전검행(戰劍行) 서장(序章) - 재출도(再出道) 서장(序章) - 재출도(再出道) 1 희미한 빛줄기가 동굴의 입구를 비추는 모습을 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해 본다. 오늘이 언제인지 아니 몇 년이나 지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늦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가까워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동굴 깊숙한 곳에 마련한 석부(石府)에서 수련(修練)에 매진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낙엽이 떨어진 것을 보니 어머니의 기일(忌日)이 가까이 다가온 것 같다. 몇 년이나 찾아가 보지도 못했으니 나가면 우선 어머니의 묘소(墓所)나 찾아가 봐야 할 것이다. 오직 기일(忌日) 전후 포함해서 삼일간만 어머니의 묘가 있는 남경(南京)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번에 가지 않는다면 내년이나 되어서야 찾아갈 수 있으므로 반드시 먼저 들려야 할 것이다. 어머니,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분. 그러나 한 번도 내게 정(情)을 주시지 않으셨다. 아무리 아버지의 무정(無情)함과 큰어머니(대부인(大夫人))의 괴롭힘이 뼈에 사무치셨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식에게 그런 유언(遺言)을 하셨을까? 지금도 꿈속에서 임종시(臨終時)의 그 한 맺힌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어째서 그런 맹세를 하게 하셨을까? 아들의 일생이 걸린 그런 맹세를..... “약속해라, 아들아. 한 번도 너를 따뜻하게 안아주지는 않았지만, 너를 열 달간 품고 산고의 고통(苦痛)을 참으며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어미로서, 마지막으로 약속해다오.” 왜 그때 거부(拒否)하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런 굴레를 쓰지도 않았을 텐데.....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呼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처음으로 아들에 대한 정을 보였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어려서 상황을 잘 알지 못해서였을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아홉 살에 불과했지만 가문의 백년 내 천재(天才)라 불렸던 내가 그 정도를 모르진 않았었다. 그럼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이유를 분명히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 상황이 그림 속 풍경보다도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해질녘 어스름한 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고, 낡고 더러워진 실내 한켠의 침대 위에는 해쓱하니 여윈 얼굴과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듯한 잿빛 살결을 지닌 여인이 머리카락을 사방에 흩뜨린 채 누워있었다. 여인은 뼈마디가 튀어나온 앙상한 손가락으로 한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말하고 있었다. “첫째, 더 이상 남궁가(南宮家)의 성(姓)을 쓰지 마라. 넌 이후로 남궁씨(南宮氏)가 아닌, 이 어미의 성인 단리씨(段俚氏)를 쓰도록 해라. 둘째, 여자(女子)를 사랑하지도 믿지도 말아라. 특히 아름다운 여자의 말을..... 지금의 네 모습, 네가 그런 흉한 모습으로 태어난 것도 그런 여자의 말 때문이니 절대로 여자를 믿지 마라. 셋째, 가문(家門)이 있는 이곳 사방 백리 이내에는 절대 들어오지 마라. 단지 나의 기일(忌日)을 전후(前後)한 삼일만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넷째, 강해져라. 어떤 사람도, 세력(勢力)도, 힘도, 설사 운명(運命)의 사슬이라도 끊을 수 있을 때까지.... 그때가 되면 맹세를 잊고 네 뜻대로 살아도 좋다. 그러나 그때가 될 때까지는 넌 단리씨(段俚氏)이고, 여자를 사랑하여 가정(家庭)을 이룰 수도, 가문(家門)에 들어올 수도 없다. 그 때까지는 천지(天地)에 너 홀로 존재(存在)해 있어야한다. 약속(約束)해라. 네 이름을 걸고, 반드시 운명(運命)의 사슬을 끊을 때까지 지킬 것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내 손을 꼭 쥐어주며 눈물을 보이던 모습이..... 처음 느껴보는 어머니의 정을..... 아버지의 무관심(無關心)과 냉대(冷待), 큰 어머니의 증오(憎惡)와 이복형제(異腹兄弟)들의 괴롭힘, 하인들의 무시(無視) 속에서, 가문의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과 외로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의 모정(母情)을 처음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랬을지라도 그런 맹세를 하지는 말아야 했었다. 과연 내 생을 다할 때까지 이룰 수 있을까? 어머니의 죽음 후에 장사를 지낸 뒤, 다음날 새벽 아무도 배웅해주지 않는 가운데 홀로 집을 나섰다. 집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와서 돌아보았다. 저기 멀리 집이 있겠지. 어머니와 아버지, 큰어머니, 형제자매와 내가 살던. 쓸쓸한가? 모르겠군. 어머니 외에는 거의 말도 하지 않고 부딪치지도 않고 살아 왔으니 태어나 말을 하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이후에는 거의 지하(地下)서고(書庫)에서 지냈고. 친족의 정(情)도 거의 느껴보지 못했으니 그리움도 없으련만.... 언제나 떳떳이 이름을 찾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이전까지는 가문의 사람을 만나도 더 이상 남궁씨(南宮氏)가 아니니 결코 한 가족으로 마주할 수도 없겠지..... 아홉 살에 집을 나와서 강호(江湖)를 유랑했다. 이름도 단리유아(段俚唯我)로 바꾸고, 단지 지하(地下)서고(書庫)에서 발견했던 삼백년 전의 괴도인 무영비도(無影秘盜)의 장보도(藏寶圖)를 해석한 후 비고(秘庫)를 목적지 삼아서..... 아홉 살 어리고 병약한데다, 모습마저 전신이 울긋불긋한 검푸른 반점(斑點)이 물든 모습의 소년에게 세상은 가혹했다. 흉측한 괴물 같은 소년의 모습은 조소와 냉대, 괴롭힘의 대상이었으며, 세상의 온정(溫情)과 인간(人間)의 따뜻함은 결코 받아 볼 수 없었다. 온갖 굴욕(屈辱)과 고통(苦痛) 속에서도 견디며, 소년은 일년여의 여정(旅程)동안 때론 유랑극단(流浪劇團)에 끼여서, 상인들 틈에 끼여서, 혹은 도적들로부터 도망치며,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낙양(洛陽) 북망산(北邙山)의 무영대묘(無影大墓)를 찾아서 들어가기 전까지, 아침엔 구걸과 풀뿌리로 배고픔을 견디면서, 오후엔 북망산의 수많은 무덤들을 이리저리 파헤치다, 밤에는 지쳐 쓰러져 무덤 곁에 잠이 들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무영대묘(無影大墓)에 들어서서 무수한 비급(秘?)을 외운지 일년 후, 강호(江湖)에 괴인(怪人)이자, 광인(狂人)인 열 살의 추괴(醜怪)한 소년이 나타났다. 무공(武功)을 익힌 사람이라면 반드시 시비를 걸어서라도 싸우고, 싸움이 난 곳에는 반드시 찾아가는.... 처음에 아무도 그런 일은 알지도,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누가 하루에도 수많은 싸움과 시비가 일어나는 강호(江湖)에서 조그마한 소년의 싸움을 기억하겠는가? 처음 소년이 삼류고수(三流高手)에도 들지 않는 불량배(不良輩)와 싸운 것을 시작으로 점점 무공(武功)이 강해져 소문파(小門派)의 삼류고수(三流高手), 표국(驃局)의 표사(驃士), 산적(山賊), 수적(水賊)들과 싸울 때도 그 당사자와 주변의 현성(縣城)에서만 잠깐 회자(膾炙)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섬서성(陝西省)의 흑풍방(黑風幇)과 청의문(靑衣門)과의 세력 싸움에서 낭인(浪人)중의 한사람으로 참가해, 비록 소문파(小門派)이지만 흑풍방(黑風幇)의 방주(幇主)인 흑풍괴(黑風怪) 구횡(丘鐄)을 이긴 이후부터는 강호(江湖)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삼년이 흐르고, 오년이 지나자 강호(江湖)는 싸움에 미친 일대괴인(一代怪人)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승(勝)보다 패배(敗北)가 훨씬 많은, 수많은 상처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날이면 새로운 상대를 찾아 상대가 삼류고수(三流高手)이거나 절정고수(絶頂高手)인 것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싸우는, 천패무광(千敗武狂) 단리유아(段俚唯我)를.... 강호(江湖)에 출도(出道)한 지 칠 년이 지났을 때, 마지막으로 화북지방(華北地方)의 절정고수(絶頂高手)인 쌍극신창(雙戟神槍) 사정찬(査定璨)과의 대결에서 비긴 이후, 사라져서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 동안의 무리한 결전(決戰)의 후유증(後遺症)으로 폐인(廢人)이 됐다든지, 원한(怨恨)이 있는 자의 암습(暗襲)으로 죽었다든지 하는 소문만 무성할 뿐 오 년내로 보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서장(序章) - 재출도(再出道) 재출도(再出道) 2 무영비고(無影秘庫)에는 서책(書冊)종류가 만여 권 남짓, 그중에서 무공(武功)비급은 육천팔백여권, 나머지는 의술(醫術), 기사(奇事), 기문(奇聞), 기관(機關), 천문(天文), 진법(陣法), 지리(地理), 여행록(旅行錄), 불경(佛經)관련 서책(書冊)과 해독(解讀)이 불가능한 과두문(蝌蚪文)으로 되어있는 일부분의 죽책(竹冊)들, 기타 영약(靈藥), 신병이기(神兵異器) 백여 점, 고서화(古書畵)등의 골동품이 몇 가지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확실히 무영비도(無影秘盜)는 괴인임이 분명했다. 금은보화는 있지도 않고 무공(武功)에 관련이 있거나 보통사람은 보아도 알 수도 없는 고서(古書), 고(古)유물(遺物)만 모아놓은 것을 보니. 수많은 무공을 두고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가장 위력이 강한 몇 가지만 익힐까? 아니면 정파무공(正派武功)만 몇 가지 익힐까? 그것도 아니라면 속성(速成)으로 익힐 수 있는 마공(魔功)을 위주로 익힐까? 우선 나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무공이 뭔지도 모르는 열 살의 소년이 혼자서 무공을 익힌다면, 단 한 가지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극성(極成)까지 익힐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십년? 이십년? 아니 일갑자(一甲子) 동안 익히더라도 보통사람이 대성(大成)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설혹 백년기재(百年奇才)일지라도 도움이 없다면 십년(十年)도 긴 시간이 아닐 것이다. 우선 모든 서책(書冊)을 보고나서 선택하기로 하고, 서책을 암기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일년여의 세월이 흘러 모든 서책을 보았을 때, 단 한 가지의 내공심법(內功心法)만 익히고 나머지는 강호(江湖)에서 싸우면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익히기로 결정했다.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 무림사상(武林史上) 최고의 살인마(殺人魔)들인 회정구마(灰情九魔)의 대형(大兄)이자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회정마의(灰情魔醫)의 마경(魔經)속에 있던, 신공(神功)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괴공(怪功)에 가까운 마공(魔功). 전신(全身)구대혈(九大穴)에 가상의 단전을 이루어 연공(練功)하는 무공으로서 회정마의(灰情魔醫)조차 완성은 시켰지만 익힐 엄두를 내지 못한 괴공이었다. 첫 출도하고 칠여 년 간 강호(江湖)를 떠돌며 무공의 고수(高手)를 찾아서, 싸움터를 찾아서 떠돌았다. 싸울 때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에 실린 힘은 될수록 몸으로 부딪혀 그 힘을 흡수했다. 비고(秘庫)에서 먹은 영약(靈藥)과 식량삼아 먹은 적운영지(赤雲靈芝)는 몸에 부딪히는 충격에 녹아 점점 내공에 흡수됐다. 무기(武器)류에 의한 직접적인 상처가 아닌 이상 하루만 지나면 회복되었고, 내공은 조금씩 쌓여갔다. 싸움에선 상대의 무공과 기억 속에 있는 수많은 무공을 비교하며, 무공에 대한 이해와 나만의 무학(武學)을 만들기 위해 싸움 후에는 반드시 상대의 무학을 분석했다. 오 년이 지나고, 칠 년이 지났을 때 더 이상 무공의 진전이 없었다. 또한 점점 더 비무(比武)하기가 어려워져서 그동안의 경험과 실전속에 익힌 무공과 기억속의 무공을 바탕으로 나만의 무학(武學)을 완성(完成)하기 위해 기약없는 수련(修練)에 들어갔다. 하북성(河北省) 보정부(普政府) 서쪽 십리 밖, 폐사당(廢社堂)에서 마지막으로 쌍극신창(雙戟神槍) 사정찬(査定璨)과 대결한 후에 무작정 산속으로 연공할 곳을 찾아 들어갔다. 사람이 찾지 않는 깊은 산 속, 계곡사이의 절벽 중턱의 동굴에서의 연공은 비록 현경(玄境)의 관문을 돌파하지는 못했지만, 오로지 나만의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구초(九招)의 검법(劍法)과 도법(刀法) 한 가지씩, 경신보법(輕身步法), 권장지각(拳掌指脚)을 각각 완성했다. 비록 내공의 부족으로 완전히 펼치지는 못하지만, 내공만 깊어진다면 별 무리 없이 시전 할 수 있을 것이다.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이 구성(九成)에서 멈춰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룰 수 없자, 나는 다시 강호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완성된 무공의 위력을 시험하고, 현경(玄境)의 벽을 깨기 위한 단서를 구하기 위해 더 이상의 혼자만의 수련은 무의미함을 알고 나서.... 어머니의 기일(忌日)에 맞추어 묘소(墓所)에 들린 후에는 계속 남하(南下)해서 세외(世外)로 빠질 작정이다. 더 이상 중원(中原)에서의 적수는 찾기 힘들고, 비무하기도 어려우니 세외로 나가서 새로운 무공을 접하고 싶다. 과연 세외의 무학(武學)은 어느 정도일까. 지금까지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니 고금십대무공(古今十大武功)이니 하지만, 그것은 모두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한 계산일 뿐 세외(世外)의 무학이 포함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세외의 무공이 중원보다 약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흔히들 천축무학(天竺武學)이 중원무학(中原武學)의 뿌리라고들 하지 않는가? 물론 전적으로 천축(天竺)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무영비고에도 세외절기(世外絶技)가 몇 가지 있었는데 결코 중원의 무학에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몇 가지 면에서는 중원무학보다 뛰어나 보였으니.... [설정 & 참조] 이하의 내용은 제 소설에서의 설정임을 밝힙니다. * 시대배경 *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가 끝나고 바로 송(宋)나라가 건국(建國)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뭐 왕실(王室)이나 관부와 별 상관이 없을테지만, 이 소설에 등장할 여러 무공들의 시간적 관계상 대충이지만 연대(年代)가 필요해서 넣었으니, 역사와 틀리더라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래 주인공인 단리유아(段俚唯我 - 본명:남궁한상(南宮寒霜))의 태어난 시절부터, 성장기(成長期), 어머니의 죽음과 가출무영비고의 기연(奇緣), 일차(一次) 출도(出道)시의 여러 상황이 원래의 1부에 해당하겠지만, 쓰다보니 너무 다른 소설과 비슷해 보여서, 아예 생략하고 그 이후부터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초반에는 설정이 많고 진도가 조금 느리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이 소설이 본 궤도에 오를 때까지 느긋하게 감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무영비도(無影秘盜) : 당(唐)나라 초엽 활동했던 괴도, 일생을 무공비급이나, 영약, 신병이기의 수집에 보낸 정체불명의 인물. 황실(皇室)의 후예라 하기도하고 파문된 승려(僧侶)라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정확한 신분은 밝혀지지 않음. 후세에 의도(義盜)로 이름 높은 무영문(無影門)의 시조로 널리 알려짐. 제 삼차마교(三次魔敎)인 혈련마교(血蓮魔敎)에 잠입했다가 종적이 밝혀져, 전 무림의 추적을 받다가 마교의 척살대(擲殺隊)에 의해 죽었음. 그러나 마교에서 탈취했다고 알려진 혈련마경(血蓮魔鏡)은 아무도 찾지 못했음. [2]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 : 원래 마교(魔敎)의 십이지맥(十二支脈) 중의 하나인 회정마맥(灰情魔脈)의 회정마공((灰情魔功)과 회혼의파(回魂醫派)의 마지막 당주(堂主)였던 회정마의(灰情魔醫)가 구전회혼심공(九轉回魂心功)을 중심으로 여러 경험을 토대로 창안한 무공. 특징 : 전신(全身)구대혈(九大穴)에 임의의 단전을 만들어 내공을 단전혈(丹田穴)에 직접 저장하지 않아도 됨. 단점 : 구대혈(九大穴)에 내공을 분산함에 따라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어서 내공을 완성하기까지 내공의 진전이 무척 느림. 실제 전체 내공력(內功力)이 삼갑자(三甲子)일지라도 일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은 이십년(二十年)에 불과. 전내공(全內功)을 모아 발출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다른 무공보다 느림. 회정마공((灰情魔功)의 특성인 오욕칠정의 말살(抹殺)로 인해 내공완성(內功完成)이 깊어질수록 감성(感性)이 소실되 점차 무감각(無感覺), 무심(無心)무정(無情)해짐(단,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어 대성(大成)한다면 본성(本性)을 회복할 수 있음). 장점 : 단전(丹田)이 파괴되더라도 복구할 수 있으며, 혈도(穴道)가 집힐지라도 내공(內功)이 제압되지 않음. 내공의 회복이 빠르고 심각한 자상(刺傷)이 아닌 타박상은 하루이내에 완치. 자연스런 차력흡기술(借力吸氣術)로 인해 직접적인 접촉인 경우 상대방의 내공을 성질에 관계없이 흡수할 수 있음. [3] 회정마의(灰情魔醫) : 회혼의파(回魂醫派)의 마지막 당주로 회정마맥(灰情魔脈)의 음모에 속아서 회정구마(灰情九魔)를 구성하였음. 회정구전회혼마공의 창안자. 회혼의파(回魂醫派)는 상고(上古)의 속가삼대의파(俗家三大醫派)의 하나로서 경혈(經穴)과 침술(鍼術)에 특히 뛰어났음. 삼대의파의 다른 두 곳은 약초를 이용한 치료에 뛰어난 백약곡(百藥谷)과 생체해부에 일가견이 있던 생사의문(生死醫門). 후일 백약곡의 비전은 약왕곡(藥王谷)으로 이어졌음. 생사의문은 절전되었지만 일부분은 상고시대 문파인 활시대묘(活屍大墓)로 이어졌음. [4] 회정구마(灰情九魔) : 고금최대(最大)최악(最惡)의 살인마들. 활동시기는 일차(一次)정마대전(正魔大戰 : 진시황 사후 초-한의 천하패권다툼의 시기) 전(前) 약 십년에 불과하지만 무려 삼만 명이 넘는 강호인, 일반인들을 가리지 않고 살해했음. 강호역사상 단체간의 접전을 제외한 살인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였고, 일차(一次)정마대전(正魔大戰)에서 패(敗)한 마교(魔敎 : 원래 명칭은 천지신교(天地神敎)로 불리웠지만, 패전후에 정파에서 마교, 혹은 원시마교(原始魔敎)로 부름. 후에 이차(二次), 삼차(三次) 마교로 일부가 흡수되었음. 천지신교는 패도천하(覇道天下)를 주목표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모인 백팔영웅동맹(百八英雄同盟)이 모태임) 멸망의 주요원인이 되었음. 원래 마교의 일파(一派)인 회정마맥(灰情魔脈)이 삼대의파(三大醫派)중의 하나인 회혼의파(回魂醫派)를 흡수하고자 정파에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정도맹(正道盟)이 회혼의파를 멸문시킨 후, 포섭한 회정마의에 의해 만들어진 감정이 말살된 살인기계들, 그러나 후에 사건의 전말(顚末)을 파악한 회정마의에 의해 회정마맥은 절멸됨. 마교에 의해 구마(九魔) 모두가 척살될 때까지 마교는 전력(戰力)의 삼할이상을 소모해야했음. [5] 무공(武功) 완성의 구별단계 삼류(三流)고수 : 십 년 이하의 내공(內功)이나 삼년이하의 외공(外功)수련자. 이류(二流)고수 : 반갑자(半甲子:삼십년)이하의 내공이나 십 년 이하의 외공수련자. 일류(一流)고수 : 일갑자(一甲子)이하의 내공을 지닌 자로서 검기(劍氣)를 생성할 수 있는 자나 병기에 기(氣)를 생성할 수 있는 자. 절정(絶頂)고수 : 화경(化境)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나 백 년 이하의 내공을 지닌자로 검기(劍氣)를 뿜어낼 수 있는 자나 이에 준하는 자. 화경(化境) : 기공(氣功)무예의 완성자.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뚫어서 순일(純一)한 기(氣)의 끊어짐이 없고 임독양맥을 이어 전신(全身) 대주천(大週天)을 완성한 자. 최소 백 년 이상의 내공, 최대 오갑자(五甲子 :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은 삼갑자 이상은 될 수 없음)의 내공. 강기(剛氣) 무공의 완성자. 초급 -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뚫어서 강기를 형성할 수 있는 자(최소 백년의 내공이 필요). 중급 - 기(氣)를 극도로 응축한 강막(剛幕)이나 강환(剛丸)을 완성한 자. 상급 - 병기를 기(氣)로 둘러싸서 백 장(丈)밖의 물체를 파괴한 후 병기를 다시 회수 할 수 있는자. 즉, 어검술(御劍術 : 여기서는 수어검(手御劍))을 완성한 자. *수어검(手御劍) : 손으로 기(氣)를 제어(制御)해서 백 장(丈)이내. *목어검(目御劍) : 눈으로 기를 제어해서 천 장(丈)이내. *심어검(心御劍) : 마음으로 기를 제어해서 백 리이내. 현경(玄境) : 정신(精神)무예(武藝)의 완성자.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어서 정신(精神)과 기(氣)의 조화로 중단전(中丹田)을 사용할 수 있는 자. 최소 삼갑자(三甲子)의 내공이 필요. 고금(古今)을 통털어 다섯 명이 현경(玄境)의 경지에 올랐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두 명은 생전에 확인이 되었으며, 나머지 세 사람도 올랐을 거라고 추측함. 이들을 일컬어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라고 칭함. 초급 -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어서 심어검(心御劍)을 완성한 자. 중급 - 광검(光劍)을 사용할 수 있는 자. 원영(元盈)을 만들 수 있음. 상급 - 무형검(無形劍)을 사용할 수 있는 자. 원영(元盈)을 몸 전체로 확대해서(원영신(元盈身)) 불사(不死)의 생명을 얻은 자. 물리(物理)적인 힘으로는 타격을 줄 수 있으나 죽일 수 없음. 지상선(地上仙). 생사경(生死境) : 영혼(靈魂)무예(武藝)의 완성자. 윤회(輪回)의 사슬을 끊은 자. 자연검(自然劍)의 경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로서 아무도 정확한 위력을 모르며, 수련방법도 알려지지 않음 요동마도(遼東魔刀) 요동마도(遼東魔刀) 1 동부(洞府)를 나와서 계곡(溪谷) 아래로 걸어가니, 나무는 낙엽(落葉)을 떨구고 바람은 한기(寒氣)를 머금은 듯하다. 계곡물에 얼굴을 비춰본다. 이것이 나의 얼굴인가? 어릴 적의 검푸른 반점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동부에서 수련(修練)에 든 지 삼년 만에 대주천(大週天)을 완성한 후 온몸에 퍼진 반점이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실제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모습이 나의 본 얼굴인가? 아버지의 단아(端雅)한 모습은 닮지 않고, 어머니의 평범한 모습을 닮았다. 어머니께서 임신(姙娠)중이었을 때, 큰어머니가 보약(補藥)을 보내서 먹은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이유로 태어난 나의 모습이 흉하게 되었을 거라고 하셨지. 처음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일신(一身)을 의탁(依託)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책임감에 어쩔 수없이 받아들이기는 하셨지만 한 번도 어머니의 처소(處所)에 찾아오지 않으셨다. 오히려 큰어머니만이 어머니를 따뜻하게 대해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보아 주셨지만, 나중에서야 그것이 본 모습이 아닌 것을 아셨다고 하셨다. 태어난 나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의 자식이 아닐지도 모르니 쫒아내고자 할 때, 내 가슴의 혈점(血點)을 보고나서 작은 할아버지께서 가문의 혈통(血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바로 쫓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계곡의 맑고 차가운 물에 몸을 씻고, 누더기 같은 옷이지만 다시 깨끗이 빨아서 입었다. 수중에 있는 것이라곤 녹슨 철검(鐵劍)과 입산 전에 지니고 있던 몇 알의 금은두(金銀豆)가 전부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것을 보니 서둘러 마을을 찾아 떠나야겠다. 이곳에 올 때, 보정부(普政府)에서 나와 서북(西北)쪽을 향하여 온 것 같은데 얼마나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는지 모르겠다. 남동쪽을 향하여 추운산영신법(追雲散影身法)을 펼쳐 절벽을 뛰어 넘고, 나뭇가지를 밟으며 산하(山下)로 내려갔다. 한 시진(時辰)이 더 지나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때, 멀리 인가(人家)의 모습들이 보인다. 가까이 가서보니 삼십여 호의 작은 화전민(火田民)촌인 것 같이 보였다. 마을에 들리니 아이들의 호기심 담긴 시선과 어른들의 경계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이런 깊은 산 중에서 칼을 찬 무인을 보는 것은 어려울테니까.... 마을의 한 노인을 붙잡고 이곳이 어디쯤인지, 객잔(客棧)이 있을 만한 큰 마을 물어서, 다시 남쪽으로 떠났다. 내가 나온 산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지류인 낭야산(狼倻山)이라는 것을 듣고, 보정부(普政府)에서 백 리 이상 멀리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남쪽으로 향한지 반 시진쯤 지나니, 현성(縣城)의 불빛이 보이고 개소리가 멀리 들린다. 객잔을 찾아 들어간 후, 일층(一層)의 구석진 탁자(卓子)에 앉아서 점소이를 기다렸다. 주근께 투성이의 열다섯 쯤 되어 보이는 소년(少年)이 다가와 물어본다. “헤헤헤, 손님 무엇을 드릴깝쇼?” “간단히 요기할만한 것을 가져오게. 그리고 빈방은 있나?” 얼마 만에 내 목소리를 들어보는지 모르겠지만, 나조차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점소이도 아무 감정(感情)이 없는 무심(無心)한 목소리가 이상한 지 잠시 멈칫한 뒤, 다시 쳐다본 후 대답한다. “방은 몇 개가 비어 있습죠. 손님, 방도 잡을깝쇼?” “그래, 방 하나하고, 심부름도 되는가?” “헤헤헤, 물론입지요.” “식사 후에 돈을 줄테니, 옷가지 좀 사다주게.” “예이,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요. 손님.” “음. 이곳이 어디이고, 송(宋)이 건국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있겠나?” “헤헤, 산 속에서라도 사셨나 보네요. 이곳은 숙야현(宿倻縣)에 속합지요. 그리고 건륭(建隆) 삼년으로 건국된 것으로는 육년이 지났고, 열흘 전에는 중양절(重陽節:구월구일)이 지났습죠. 손님.” “알았네” 점소이가 물러난 후에 주변을 들러보고, 생각에 잠겼다. 송이 건국된 지 육년이 지났다면 연공에 든 지 오년이 지난 것이다. 내 나이도 이제 약관(弱冠)을 넘어 스물둘이 되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적게 지났다. 오늘이 음력 구월 십구일이면, 어머니 기일(忌日)에 맞추어 남경(南京)에 도착하기에는 날짜가 빠듯할 것 같은데 천상 배를 타고 운하(運河)를 따라 내려가야 하는가? 그렇다면 다시 보정(普政)을 지나 창주(滄州)로 가서 배를 기다려야겠군. 이곳에서 조금만 더 북쪽으로 가면 항산(恒山)일텐데 정말 아쉬웠다. 그동안의 성취를 확인해 볼 좋은 기회일텐데. 항산파(恒山派)의 자오신니(慈烏神尼)의 검법(劍法)은 강호일절이라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절매산엽검식(絶梅散葉劍式)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잠시 후, 점소이가 음식을 가져오자 생각을 멈추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옆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말인가?” “열흘 전에 항산파(恒山派)에서 벌어진 비무(比武) 소식 말일세.” “아, 그 일. 나도 들었는데 원체 믿을 수 있어야지. 강호(江湖)십대고수(十代高手)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오악검파(五嶽劍派)의 하나인 항산파(恒山派)의 장문인인 자오신니(慈烏神尼)가 십초(十招)도 안돼서 패(敗)했다니....” “자네도 알고 있군. 그 요동(遼東)에서 온 자 말일세. 도(刀) 한 자루 들고 요동의 고수들을 찾아 떠돌다가 이번에 중원(中原)에 넘어와 항산파에 도전했다는 소식 말이군.” “그래, 그래서 지금 이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고수들이 긴장하고, 너도나도 그자를 찾으려고 고수들이 몰려들고 있지.” “그럴 필요있나?, 아무리 중원의 고수가 아니라도 정당한 비무였다는 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네, 그 자가 사용한 무공이 절전(絶傳)된 마교무공(魔敎武功) 중 하나였다는 것이 문제지, 자네도 알다시피 강호인(江湖人)이라면 다들 마교(魔敎)라면 치를 떠니 이러지.” “아니? 그래도 도대체 무슨 무공이기에....” “그래, 솔직히 아무리 마교무공이라고 해도 이렇지는 않을테지. 그런데 그 무공이 원시마교(原始魔敎)의 십대천마(十代天魔) 중의 하나였던 도마(刀魔)의 지옥참마도법(地獄斬魔刀法)이라서 문제지. 자네도 알다시피 삼대(三代)교주(敎主)였던 천마노조(天魔老祖)의 천마삼예(天魔三藝)를 제외하고는 상대할 자가 같은 십대천마 중에서도 두세 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같은 십대천마들의 무공이 이차(二次), 삼차마교(三次魔敎)에 전해져서 그곳의 최고절기가 되었으니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의 무공만 아니라면 적수가 없다고 할 수 있겠지. 더구나 지옥참마도법은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에 그 무공을 익힌 자가 나타났으니 강호가 떠들썩할밖에.” “그렇다고 이렇게 많은 강호인(江湖人)들이 모이다니 알 수가 없군“ “모르는 소리 말게. 마교(魔敎)나 다른 사파(邪派)에서는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문파(門派)내 고수들을 비밀리에 파견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네. 또 정파(正派)에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나섰다고 하네. 더구나 그를 꺾어 명성(名聲)을 얻으려는 자들도 부지기수라네.” “그래서 이렇게 강호인들이 몰려오는가 보군. 그런데, 이 일대에서 그를 상대할 고수가 있을까? 그자는 이곳저곳 찾아 비무(比武)하며 남하하고 있다는데, 솔직히 자오신니(慈烏神尼) 만한 고수가 이 근처엔 없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그자는 이제 싸우고 싶지 않아도 싸울 수밖에 없을걸? 일단 종적(蹤迹)이 발견되면 파리 떼처럼 몰려들테니.”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나?” “음. 육척(六尺)이 못되는 키에 흑의(黑衣)를 입고, 칠 척(尺)의 참마도(斬馬刀)를 메고 있다던데. 왜, 자네도 찾아 나서려고? 아서게. 목숨 귀한 줄 알아야지. 우리 같은 삼류낭인이 나서 봤자지. 죽는 줄도 모르게 목이 달아날 걸.” “나도 아네, 우리 같은 낭인(浪人)이야 파리 목숨보다 못하다는 걸. 그렇지만 언제까지 강호(江湖)의 소문파(小門派) 사이의 대리(代理) 싸움에나 참가하거나 파락호(破落戶)들의 싸움판에만 끼어 살고 싶지는 않네. 혹시 누가 아나? 이번에 싸움이 일어나면 그 중에 이름 있는 고수라도 죽는다면 국물이라도 떨어질지.” “내가 왜 자네 맘을 모르겠나. 자네나 내 처지나 마찬가진 걸. 그럴듯한 절기라도 얻어 삼류를 면하고 싶은 마음을. 그래도 별 수 있나. 이렇게 박복하게 태어나 운을 원망할 뿐이지.” [참조] [1] 절매산엽검식(絶梅散葉劍式) : 원래 화산파(華山派)의 여제자였던 고수가 화산파에서 파문(破門)된 후에 다시 항산파에 입문하여 창안한 무공으로 후일 항산파 무공중 화산파 매화검(梅花劍)의 극성검식(克性劍式)이 되었음. 원래 십이식(十二式)이었지만 점점 초수가 늘어 십팔식(十八式)까지 생겨나게 됨. 변화위주의 검식(劍式)으로 표홀(飄忽)하고 변화가 많아서 여인이 익히기에 알맞음. [2] 십대천마(十代天魔) : 원시마교(原始魔敎)의 중심인물들로 교주이하의 십방천주(十方天主). 후일 천마노조(天魔老祖)의 사후(死後), 교주 위(位)를 두고 서로 싸운 것이 마교(魔敎)멸망의 주요요인이 되었음. [3] 지옥참마도법(地獄斬魔刀法) : 십대천마(十代天魔)의 일인인 도마(刀魔)의 독문무공(獨門武功)으로 도살류(屠殺流)의 일종. 파괴력만큼은 어떤 무공보다 뛰어남. 마교 멸망시 실전(失傳)됨. [4] 천마노조(天魔老祖) : 진시황(秦始皇)시대 원시마교의 삼대(三代)교주(敎主)로서 실질적인 마교 전성기를 이룬 자. 원래 명호(名號)는 천패무조(天覇武祖)이지만 마교 멸망 후 정파에 의해 천마노조로 불리게 됨. 마교무공의 총화(總華)인 천마삼예(天魔三藝)를 완성했음. 그러나 후계(後繼)를 지정하지 않고 급작스럽게 사망해서 마교 혼란의 원인이 되었음. 후일 천강신문(天剛神門)과 봉황곡(鳳凰谷)을 중심으로 한 정파의 합공으로 마교는 멸망했음. 고금오대고수의 일인. [5] 천마삼예(天魔三藝) : 천마심결(天魔心訣), 천마삼검(天魔三劍), 천마소수(天魔素手)의 천마노조의 삼대무공(三大武功). 천마노조의 사후(死後) 실전(失傳)되었음. 그 위력이 너무나 패도적이지만 결코 마공(魔功)이 아님. 후일 정파에 의해 마공으로 매도(罵倒)되었음. 원시마교(原始魔敎)의 무공들의 대다수는 마공이라 할 수 없는 패도무공(覇道武功)이 대다수임. 요동마도(遼東魔刀) 요동마도(遼東魔刀) 2 객방에 들어와 조금 전에 들은 소문(所聞)을 생각해봤다. 확실히 지옥참마도법(地獄斬魔刀法)은 아주 강한 무공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익힌 사람의 자질(資質)이 별 볼일 없다면, 그리 상대하기 어려운 무공은 아니다. 나는 설사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의 무공일지라도 그들의 무공자체가 무적(無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무공을 익힌 그 사람이 중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비급을 얻어서 익힐지라도 그 무공의 창안자를 능가하기란 요원(遙遠)할 것이다. 비록 비급이 초식(招式)이나 구결(口訣)을 전해줄 수 있을지언정 그 깨달음까지 전해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무공전수(武功傳授)가 아닌 이상, 구결은 함축적(含蓄的)이고 뜻이 모호(模糊)해서 본의(本意)를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초식 또한 그림으로서 전달하는 것은 일부분(一部分)이고 전체 초식의 동작을 일일이 그려 넣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하니 비급만으로 그 무공을 이해하기란 정말 지난(持難)한 일이다. 그 무공정도(武功定度)를 이해할 수준이 되거나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없다면, 한 권의 비급을 보고 무공을 극성(極成)까지 터득하기는 무수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비급의 무공자체가 창안자의 무공 전부를 나타냈다고 할 수는 없으니 그 창안자를 뛰어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고 곧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지옥참마도법(地獄斬魔刀法)은 초식(招式)이 아주 단순하다. 말 그대로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도법(刀法)이니.... 자오신니(慈烏神尼)가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그녀의 무공이 대단한 것이다. 아니, 살수(殺手)를 멈춘 그 자가 더 대단하다. 이 무공의 가장 중요한 요체(要諦)는, 내공운기(內功運氣)의 묘(妙)를 더하는 구결(口訣)의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일체(一切)의 물러섬이 없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으로 절대로 뒤로 물러서면 안됀다는 것이다. 즉, 기세(氣勢)가 한번 꺾이면 바로 패(敗)하는 지름길이 된다. 참마도법(斬魔刀法)의 아류(亞流)로서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절정(絶頂)고수 이상이 되기는 아주 어려웠다. 왜냐하면 참마도법은 결코 대성(大成)의 경지가 따로 없으며,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반복 수련과 일심(一心)이 필요했다. 또 살인(殺人)시의 참혹한 모습(참마도류(斬魔刀類)는 한번 펼칠 시에 멈추기가 대단히 어려우며, 일도(一刀)에 상대를 일도양단(一刀兩斷)시킨다)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마음이 필요했다. 이런 단점이 있는데 반하여, 반대로 장점도 있는데 내공(內功)이 강하면 강할수록 위력도 따라서 강해진다는 것이다. 실제 도마(刀魔)의 무공은 도법(刀法)을 제외하고는 내공만 특히 높았지 다른 무공은 별 볼일 없었지만 실제 대결에서는 상대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었다. 만일 그자와 싸운다면 내 무공의 첫 시험상대로서는 최고의 상대일 것이다. 자오신니(慈烏神尼)를 십초 만에 패배시켰다면 최소 화경(化境)의 초급이상의 수준일테니.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찾으러 갈텐데.... 다음날 아침에 단리유아는 보정부(普政府)를 향하여 동쪽 관도(官道)로 출발했다. 백여 리가 넘는 길이지만 사람이 보일 때는 신법(身法)을 펼치지 않고 걸어서 가기로 했다. 때는 송(宋)이 들어선지 얼마돼지 않았고,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거란(契丹)이 차지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국경에 가까워서인지 관도에는 행인(行人)이 드물었다. 가끔 말을 탄 병졸들이 지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점점 화북평야(華北平野) 쪽으로 향하니 산은 낮아지고 구릉지대만 이어졌다. 오후가 지나 멀리나마 보정부(普政府)가 보일 때, 관도에서 조금 떨어진, 예전에 쌍극신창(雙戟神槍) 사정찬(査定璨)과 대결했던 야산에 세워진 폐사당(廢祠堂)이 보였다. 차차 사당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검광(劍光)이 치솟고 무기가 부딪치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없으니 길을 재촉하려다, 문득 어제 들은 소문이 생각나 관도에서 벗어나 사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당(祠堂)을 둘러싼 다 허물어진 돌담사이의 대문이 있던 흔적을 지나서 들어서니, 문짝은 떨어지고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인 반쯤 무너진, 어느 집안의 위패(位牌)를 모셨던 자그마한 사당이 보였다. 사당 양옆에는 오래된 굵은 소나무가 마치 가신(家臣)인양 버티고 서있었지만, 폐허(廢墟)가 된 사당의 모습과 같이 있으니 오히려 늙고 초라한 하인(下人)이 어쩔 줄을 모르고 처량히 서있는 것 같았다. 사당 앞 십여 장(丈)의 공터에는 깨진 그릇과 문짝들이 잡초들 사이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사당(祠堂)앞 공터 왼쪽에는 검은 옷을 입고 칠 척(尺)의 참마도(斬馬刀)를 든 사람이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쌍창(雙槍)을 든 평범한 모습의 청의(靑衣)의 사십대 남자와 원앙도(鴛鴦刀) 한 쌍을 든 삼십대 홍의(紅衣)의 미부(美婦), 오 척(尺)의 폭이 좁고 기다란 연검(軟劍)을 든 이십대 후반의 백의(白衣)를 입은 잘생긴 청년 등 세 명이 참마도를 든 흑의 대한을 공격하며 한참 싸우는 중이었다. 또 사당 입구의 계단에는 늙고 초라한 옷차림의 검버섯이 한두 개 얼굴에 피어있는 작은 얼굴의 육십 대 노인이 옆에 깃발을 세워둔 체 싸우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싸우는 곳을 피해서 돌담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서 노인을 향하여 나아갔다. 옆에 누가 와도 돌아보지 않는 모습을 보며, 단리유아가 노인 옆 계단에 앉으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형노사(邢老師).” 단리유아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그때서야 돌아본다. “누, 누구....?” “육년 전 여름철에 한 번 태원성(太原城)밖 금동사(金銅寺)에서 만나 뵙지 않았습니까?” “육년 전 태원성 금동사라면....? 그때라면.... 음, 싸움에 미친놈하고 싸운 적밖에 없는데.... 혹시?” “기억하시는군요. 그때 두 시진(時辰) 동안 가르침을 받았지요.” “흥! 네놈에겐 가르침인지 몰라도 내게는 쓸데없이 두 시진이나 허비하며 푸닥거리만 했을 뿐이야.” “그래서, 나중에 쓰러진 절 화풀이 삼아 계속 패셨던가 보군요?” 육년 전의 싸움이 생각났다. 당시 단리유아의 무공이 상승하자, 점점 고수와의 비무(比武)에 어려움을 느꼈다. 화경(化境)의 문턱에 다다른 실력에 너무 하수(下手)와는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고수들은 자신을 피하니 비무를 할 상대방이 점점 드물어져 갈 때였다. 그때 금동사(金銅寺) 밖에서 점을 보던 형노사(邢老師)가 점(占)을 보라고 다짜고짜 붙잡기에, 단리유아는 싸운 후에 점을 보겠다고 하며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원래 형노사는 단리유아와 같은 사광(四狂)의 일인인 광구신복(狂口神卜)으로, 강제로 점을 보게 하고 복채를 받는 복사(卜師)였다. 단지 돈을 주며 봐달라고 하는 점은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고른 사람의 점만 보고 복채도 마음대로 받아서, 실제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돈을 강탈당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그래도 본 점괘(占卦)가 가끔 맞아서 신복(神卜)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상대가 누군 줄 알게 되자, 단리유아는 더더욱 싸우고 싶어졌고, 형노사(邢老師)는 오히려 더 피하려고 하였지만, 단리유아가 먼저 검(劍)을 뽑아 공격하니 계속 피하지도 못하고 결국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형노사 입장으로는 점판을 벌린 후 난생 처음 손해 본 일이었으니 기억에 강하게 남았을 것이다. “아, 아니 뭐. 화풀이라기보다 우선 본전은 뽑아야지. 근데 요 몇 년 동안 소문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데 어디서 무엇을 한건가?“ “이 근처 낭야산(狼倻山)중에서 오년 동안 수련(修練)을 하다가 어제 하산한 길이었습니다.” “음. 그래서 보이지 않았구만. 그런데 그때와 많이 변한 것 같군. 특히 그 목소리 말일세. 전에는 나무처럼 딱딱해도 감정(感情)은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돌처럼 아무런 높낮이의 변화가 없구만. 얼굴 표정도 더 무표정(無表情)이 되었구.“ “그런가요? 전 잘 느끼지 못하겠는데요.” “그래. 본인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 오랫동안 수련(修練)하면서 혼자 있었을 테니,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네를 본다면 꼭 인간이 아닌 돌덩어리가 말하는 것처럼 느낄걸세.” 자신의 목소리와 표정(表情)이 그렇게 느껴졌다는 소리에도 별로 크게 느낌이 없었다. 원래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의 한 특성이 인간의 감정(感情)을 강제로 제거해서 주변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시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겉으로까지 나타나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될수록 살인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사람을 죽여도 아무 감정(感情)이 들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과거 회정구마(灰情九魔)도 감정이 말살될수록 더 많은 살인을 저질렀다는데 단리유아 자신도 그처럼 될지도 몰랐다. 한시라도 빨리 현경(玄境)의 벽을 넘어서야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현경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어야 도달하는 경지로 단순한 수련만으로는 오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만약 현경(玄境)의 고수가 있다면 물어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근 삼백년 이래로 현경의 고수는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형노사(邢老師)께서 이곳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까?” “자네도 요새 떠도는 소문(所聞)을 들은 적이 있나? 자오신니(慈烏神尼)가 요동(遼東)에서 온 고수한테 패(敗)했다는 소문 말일세.” “어제 객잔에서 들었는데, 그럼 저 사람이?” “음. 그래. 저 커다란 참마도(斬馬刀)를 든 자가 요즘에 유명한 요동에서 온 그 도객일세. 다들 요동마도(遼東魔刀)라고 부르더군. 그리고 저 쌍창(雙槍)을 든 사람이 쌍극신창(雙戟神槍) 사정찬(査定璨)이고 자네하고도 싸웠었으니 잘 알겠지. 홍의(紅衣)를 입고 원앙도(鴛鴦刀)를 양손에 쥔 여인이 홍의선자(紅衣仙子) 사정옥(査晶玉)이고 저 백의(白衣)를 입은 청년이 무연신검(舞蓮神劍) 예소립(乂少立)이지. 저들 세 명을 합쳐 화북삼협(華北三俠)이라 하고 이 일대에서는 열 손가락에 들지. 원래 난 자오신니(慈烏神尼)와 안면(顔面)이 있어서 실상을 알고 싶기도 하고, 또 부탁을 받은 것도 있기도 해서 저자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중이었지. 저들 화북삼협(華北三俠)과는 보정부에서 오늘 만나서 같이 동행하기로 했었지.“ “그런데, 왜 저자와 서로 싸우고 있습니까?”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어보자, “반 시진(時辰)쯤 전에 요 앞 관도에서 저자를 만나게 되었다네. 그래서 저 자에게 물어 보았지. 혹시 요동(遼東)에서 온 요동마도(遼東魔刀)냐고? 그렇다고 하길래 중원(中原)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묻다가 요동에서는 더 이상 적수를 찾을 수 없어서 드넓은 중원에서 적수를 찾아 비무(比武)해 보기위해 왔다더군. 자오신니(慈烏神尼)를 꺾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비무를 요청했지만 다들 피하기만 해 실망해서 남하(南下)하고 있었다더군. 그래서 저들 셋이 비무를 요청했지. 그리고 저자는 옳다구나 하고 승낙하더군. 처음에는 일대일(一對一)로 차례로 싸웠는데 십 초를 못 넘기고 다들 패했지.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셋이 합공할 테니 받아 보겠냐구 하였는데, 저자가 승낙해서 저렇게 싸우게 되었다네.“ “아니, 졌으면 패배를 시인하고 깨끗이 물러나야지. 다시 합공을 하다니 저들은 염치가 없군요” “원래 나도 말렸지만 저자가 먼저 승낙해서 다시하게 된 거라네. 나도 저들이 저렇게 자신의 명성에 연연할 줄은 몰랐네. 화북삼협(華北三俠)이라면 그래도 화북지역에서는 정정당당한 협객(俠客)으로 이름이 높았었는데. 허 참, 정말 사람이란 만나서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실체를 알 수 없다니까.” “한 사람이 십초를 견디지 못 했는데 셋이 합공한다고 결과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게다가 일대일이라면 저 사람도 여유가 있어서 손속에 사정을 보아줄 수 있겠지만, 합공 받다가 일순간 몰리게 된다면 저 자도 살수를 쓰게 될 것입니다.” “나도 그게 걱정이라네. 소문(所聞)대로 전력을 다한다면 저자의 무공은 중간에 멈추기가 거의 불가능할 텐데....” 단리유아가 그들이 싸우는 것을 바라보니, 정면에서는 쌍극신창(雙戟神槍)이 주로 상체를 공격하고, 양옆에서 홍의선자(紅衣仙子)는 주로 상대방의 공격을 빗겨 쳐서 방향을 바꾸는 방법으로 보조하고, 무연신검(舞蓮神劍)은 하반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연환(連環)공격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추어 왔는지 매끄럽게 보이지만, 단리유아가 보기에 저 자의 공격은 결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단지, 어려움을 알고 그들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는 듯 했지만 저들 화북삼협(華北三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단리유아가 보기에 저들 세 사람은 앞으로 일각(一刻)만 지난다면 지쳐서 스스로 패배하게 될 것이다. 그들도 이젠 그런 사실을 느꼈는지 서로 눈짓을 하며 내공(內功)을 끌어 모아 각기 가장 위력이 있는 초식(招式)을 시전하려는 것 같았다. 요동마도(遼東魔刀)도 그들의 무례함에 점점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도를 들어 상단(上段)으로 세우며 내공(內功)을 집중하는 것 같았다. 충분히 그들의 염치없음을 보면서도, 죽일 수 있는데도 살수(殺手)를 쓰지 않는 모습을 보고, 단리유아는 오히려 요동마도(遼東魔刀)가 마음에 들어 속으로 그를 편들었다. 과연 나라면 저 상황(狀況)에서 어찌할까? [참조] [1] 광구신복(狂口神卜) 형우초(邢佑苕) : 사광(四狂)의 일인(一人)으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강제로 점(占)을 치는 자. 복광(卜狂). 화경(化境)의 경지(境地)로 주요무공은 들고 다니는 깃발달린 죽장(竹杖)으로 펼치는 탄파칠절장법(彈波七絶杖法)임 *사광 : 무공의 고저에 의한 것이 아닌, 각기 한 가지에 광적으로 빠진 것을 기준. 전광(戰狂) - 천패무광(千敗武狂) 단리유아(段俚唯我) 복광(卜狂) - 광구신복(狂口神卜) 형우초(邢佑苕) 주광(酒狂) - 만리비개(萬里飛丐) 색광(色狂) - 화의신검(花衣神劍) 종추완(宗秋玩) 요동마도(遼東魔刀) 요동마도(遼東魔刀) 3 선공(先攻)은 먼저 정면의 쌍극신창으로부터 시작됐다. 두개의 창을 십자 형태로 교차한 후, 먼저 세운 창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고, 옆으로 뉘인 창으론 우에서 좌로 횡으로 펼치며 창두로 기(氣)를 날린다. 거의 동시에 홍의선자는 요동마도의 왼쪽에서 원앙쌍도를 부딪쳐 끝을 잘라 탄도(彈刀)를 날리고, 오른쪽에서는 무연신검이 검기(劍氣)로 감싸인 연검으로 하체를 공격한다. “쌍창굉파(雙槍宏波)” “탄비쌍광(彈飛雙光)” “무련삼절(舞蓮三節)” 앞에서는 상하좌우를 향해 창기가 다가오고, 왼쪽에선 끄트머리가 잘린 비도(飛刀)가 기에 감싸인 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라오고, 오른쪽에선 세 겹으로 구부러진 연검이 하체를 공격했다. 단리유아는 자신이라면 이 공격을 어떻게 막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이형환위(移形換位)로 뒤로 삼 장(丈)이상 물러난 후, 먼저 쌍창부터 처리한 다음 다른 사람을 공격할까? 아니면 오히려 전력으로 앞으로 다가가 쌍창을 제압할까? 요동마도는 제 자리에 서서 먼저 왼쪽으로 향하여 도강(刀剛)을 머금은 도를 휘둘러 비도를 쳐낸 후 사선(斜線)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도강을 횡으로 세 곳을 향해 날린다. “일추삼광(一追三光)” “쾅! 챙챙!” “으윽, 흑, 악“ 하북삼협 모두 쓰러진 채 비명(悲鳴)을 질렀다. 홍의선자는 쌍도로 도강을 막으려다 왼팔이 잘렸다. 다시는 쌍도를 쓰지 못할 것이다. 쌍극신창은 다행히 가장 멀리 떨어져 기를 날려 공격 했었고, 먼저 피해서 비록 창이 부러지고 약간의 내상(內傷)은 입었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다. 무연신검은 도강에 검이 직접 부딪혀서 연검은 검 자루만 남기고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되었고, 직접적인 충격을 받아 내상이 심한지 주저앉아 피를 토하고 있었다. 도강(刀剛)은 도강(刀剛)으로 막거나 피해야지, 한 단계 아래인 도기나 검기로 부딪히다니 저들 삼인이 어리석은가? 아니, 저들도 요동마도가 계속 도기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도강을 날리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화경(化境)의 고수와 절정(絶頂)고수와의 차이인가? 순간적인 움직임과 파괴력은 같은 화경의 고수가 아니면 결코 상대가 될 수 없는.... 확실히 강기(剛氣)무공의 완성단계인 화경의 고수는 강하군.... 단리유아 조차 실제로 화경의 고수와 비무한 것는 세 번밖에 안되고, 그것도 화경에 다다르기 전에 그들이 강기를 쓰지 않고 싸운 것이었다. 이번이 가까이에서 화경에 이른 고수의 움직임과 도강을 직접 본 것으로는 처음이었다. 그 때는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알아차리기도 어려웠었다. “이런 젠장할,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쯔쯪. 어이 자네 뭐하나? 자네 동생이 이렇게 다쳤는데.” 형노사가 옆에서 말하며 일어나 홍의 선자의 앞으로 다가가 왼팔의 혈도를 막아 지혈(止血)하며, 잠시 넋을 잃고 서있는 쌍극신창을 향해 소리쳤다. 쌍극신창이 정신을 차리고 누이에게 다가가 잘린 어께부분에 약을 바르면서 누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옥아, 옥아.” “내가 수혈을 눌러 잠들게 했으니 그만 부르게. 그보다 저기 예소협의 내상이 심해 보이니 우선 그부터 돌보게.“ 쌍극신창이 다시 무연신검에게 다가가 내상약(內傷藥)을 먹이고 운기를 해서 내상을 다스리도록 한 후, 옆에서 침울한 얼굴로 호법을 선다. 아마 합공을 하자고 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가슴 가득 후회가 될 것이다. 사람일이란 이런 것이다. 한 시진 전만해도 서로 즐겁게 요동고수의 소문을 얘기하며 자만심(自慢心)에 가득 차 승부를 낙관(樂觀)했겠지만, 한시진도 안돼서 사랑하는 누이는 외팔의 병신이 되었고, 의동생은 내상이 심해서 완치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머지않아 하북삼협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몇 년이 지나면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설혹 저들이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실력을 회복하더라도,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한 번 잃은 자신감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는 강호에 발을 드밀지 못할 것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지만, 특히 칼을 든 강호인(江湖人)에게는 한순간 한순간이 귀중한 것이다. 한순간의 사소한 방심이, 자만이, 상대방의 실력을 간과(看過)한 것이, 치명적인 결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만일 이런 마음가짐이 없다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더라도, 강호에서 그 명성이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여보게, 자네, 우선 대충 내상을 가라앉히고, 어서 가까운 의원에게 가서 다시 치료받도록 하게. 자네 누이의 상처는 외상도 외상이지만, 한 팔을 잃은 심적 충격이 더 클테니 이런 곳에 있다가 깨어나면 위험하다네. 저기 예소협도 직접 의원에게 치료받고 조섭(調攝)하는 것이 좋을테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소(邵)소협.” 한 쪽에 서서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그를 부른다. 육척이 약간 못되는 키에 자신보다 큰 도를 메고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정면으로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과연 그 기풍(氣風)이 범상치 않다. 각진 얼굴에 굵은 눈썹은 성격의 호쾌(豪快)함을 나타내는 듯하고, 일자로 꽉 다문 큰 입은 성정의 단호함을 보이는 것 같다. 어께는 떡 벌어져, 그 키의 다른 사람보다 훨씬 커 보여, 그 풍채(風采)가 돋보이고 걸어오는 모습은 천생호골(天生虎骨)의 상(相)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자네, 꼭 그렇게 심하게 손을 썼어야 했나?” “예, 저도 이렇게 되서 후회가 되지만.... 제 무공 자체가 원래 그렇고, 또 저 여인이 갑작스럽게 탄도(彈刀)를 날리니 저도 모르게 그만....” “휴우. 그래, 자네도 어쩔 수 없었겠지. 나도 그들이 그런 살수를 쓰리라곤 생각하지 못 했으니까. 나라도 처음부터 비무를 말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노선배(老先輩)님. 제가 합공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아. 아니네. 내가 처음부터 지켜봤는데 자네 탓이라곤 할 수 없겠지.” “....그런데, 이 분은?” “아, 이런. 경황이 없어서. 이 싸움꾼은 나와 같은 사광(四狂)의 일원으로.....“ “단리유아(段俚唯我)라 합니다.” 조용한 어조의 단리유아의 인사에 요동마도 역시 포권하며, “요동에서 온 소석정(邵晳程)이오.” “이놈이 그 싸움에 미친 그 놈이라네. 자네에게 좋은 상대가 될 거야. 나중에 한 번 싸워보게.” “아! 그 강호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가장 많은 싸움을 했다는....” “그래. 열 살에 출도해서 천 번이 넘게 싸운 게 여기 이 놈이라네. 강호에서 무공의 고수치고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걸. 한번 들러붙어서 한판하지 않으면 싸울 때까지 쫓아다니니. 원....“ 이 때, 옆에서 상처를 돌보던 쌍극신창이 다가와 말한다. “노선배, 우리는 이만 떠나야겠군요. 전광(戰狂), 자네도 잘 있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상황이 이러니 길게 얘기하지 못하겠군. 그리고 소소협(邵少俠), 오늘의 가르침 결코 잊지 않겠소. 그럼“ 포권하며, 대답도 듣지 않고 누이를 가슴에 안고 무연신검을 재촉하여 사당을 나선다.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요동마도를 둘러보며, 단리유아가 무심한 어조로, “소대협. 이제 다 끝난 것 같은데, 나와 한 번 싸워주겠소?” 요동마도가 깜작 놀라고, 단리유아의 무심한 태도에 당황하여, “예?” “이런 미친놈. 오년 동안 별로 변한 게 없구만. 처음 만난 사람한테 싸움부터 청하다니. 도대체 네 놈이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아무리 싸우고 싶어도 방금 싸운 사람한데 대결을 요구하다니?” 형노사의 말에 단리유아도 자신이 성급했음을 알고, 조용한 목소리도 말한다. “형노사, 그만 그 동안 수련(修練)만 해서, 성취를 알아보려는 급한 마음에 그랬군요. 소대협, 미안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럼, 오늘이 안 된다면 내일은 싸울 수 있겠군요?“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무감정한 목소리의, 삐쩍 말라서 더 커 보이는 평범한 모습의 단리유아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은 체 뚫어져라 쳐다본다. 세상에 무슨 이런 사람이 있는지.... 머리를 가로저으며 형노사가, “정말 못 말리는 놈이구만. 저승사자도 너 같은 놈을 맞난다면 도망부터 칠거다. 이놈아! 여보게, 소소협, 자네가 이해하게. 원래 이런 놈이니. 싸워주지 않으면 계속 자네를 귀찮게 할 테니 내일 한번 싸워보게. 자네의 비무행(比武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네. 저래 뵈도 오년 전 이미 화경에 근접했으니 지금은 화경에 들어섰을 것이네. 아마 자네와 막상막하일걸.“ “휴우, 알겠습니다. 오히려 고수를 찾아다니는 제게는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럼, 내일 사시(巳時:오전9시-11시) 초에 이곳에서 대결하기로 하지요. 그때가 어떻습니까? 단리대협?“ “좋소, 그때 싸우기로 합시다.” “자자, 그럼 내일 싸우기로 하고, 해도 저무는데 쉴 곳이나 알아보세. 싸울 때 싸우더라도 우선 뭐 좀 먹고 오늘은 푹 쉬자고.” “그러죠” “그럼 어서 출발하자고. 어제 머물던 객잔이 괜찮턴데.... 아니지, 아까 그들하고 부딪힐지도 모르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구만. 어서 가세.“ ------------------------------------------------------ 메시지로 제게 송의 연호를 보내주신 蓋金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조언과 비평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여러분 중에 제 소설에 등장시키고 싶은 문파명이나 무공초식, 이름, 지명등이 있으신 분은 댓글에 써 주십시오. 참고로 제 소설은 수많은 문파와 무공, 고수들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저는 무공 중심의 소설을 쓰고 싶어서 이렇게 써 봅니다. 제 소설에서는 결코 여자가 판치는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모든 미인이 다 주인공을 좋아하는 이야기는 듣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 시대상황에 맞지도 않고, 제게는 그런 여자들이 다 바보처럼 보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성격도 여자에 무관심하고, 특히 미인에게 거부감을 느끼지요. 뭐 나중에 여자를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의 운명이 원래 삼살의 운명을 타고난 것으로 해서, 현재 예정으로는 여자와 엮일 일은 Never, Ever 없습니다. *삼살(三煞) : 천살(天殺),천역(天驛),천고(天孤) 추신 : 사신무(백호,청룡,현무,주작)가 들어가는 명칭은 사양해 주십시오. 너무 유치하거든요. 어린애 만화에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많은 코멘트 부탁합니다. 아 그리고, 저는 댓글에 대답은 직접하지 않고, 본편의 끝에 덧붙여서 가끔 답변하는 방식으로 할 겁니다. ###### 오타를 지적해 주신 유나v 님께 감사의 말을 천리전성으로 전합니다. 저도 항상 그 부분이 헷갈리던데, 정확히 지적해 주셨네요. 앞으로도 잘못된 곳이 보이면 서슴치 마시고 지적해 주십시요. 그런데 뒷편도 일일히 수정하려면 골치께나 썩힐 것 같네요. 한두줄도 아니라서 일일히 찾을려면 눈이 견디질 못하겠네요. 혹시라도 정확한 위치라도.... (게으른 작가의 한탄이었습니다.) 즐독하시길.... ####### ***** 벼력쳐라 님께서 오타를 찾아주셨군요. 실수가 많은 작가에게도 벼락같은 댓글이었습니다. 올린지 두달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도 못찾았는데.... 감사드립니다. 천애구검(天涯九劍) 천애구검(天涯九劍) 1 객점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벌써 요동마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무기를 지닌 자들이 하나 둘 들어오더니 곧 객점 안은 빈자리가 줄어들었다. 무기를 든 강호인(江湖人)들이 계속 몰려들자 무공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도망치듯이 나가니, 얼마 안돼서 거의 모든 자리가 강호인들로 가득찼다. 저마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앉아, 요리를 시켜놓고 마주앉아 얘기하지만 큰소리는 내지 않고 귀는 이쪽을 향한 채, 가끔 힐끔거리며 소근 소근 거린다. 누가 사광(四狂)의 두 명이 있는 곳에서 소요를 일으킬 것인가. 제 명(命)을 스스로 재촉하고 싶지 않는 한.... “여보게, 소(邵)소협.” “예, 노선배님” “아, 그 노선배 소리 듣기 싫으니 다음부턴 그냥 옆에 이 놈처럼 형(邢)노사로 부르게.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물어볼게 있는데 대답해줄 수 있나?” “예,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답변해드리지요. 형(邢)노사.” “내 듣기로 자네가 익힌 무공이 실전(失傳)된지 천년도 넘은 지옥참마도법이라고 들었는데, 아까 보니 약간 다르던데 어떻게 된 것인지 얘기해 줄 수 있겠나?” “예. 뭐 별다른 비밀도 아니니 그정도야 말하지 못하겠습니까? 흠, 이백여년 전 본래 장성 밖 육고하(六股河) 근처에 살던 저의 가문의 선조(先祖)가 강의 물길이 바뀌는 바람에 조상의 묘를 이장해야만 했답니다. 당시 이장 예정지 중의 한 곳을 파다가 다 허물어진 백골(白骨)과 함께 녹슨 참마도(斬馬刀)를 발견하셨지요. 본래부터 저의 가문도 대대로 무가(武家)인지라 백골은 다시 묻어주고 도만 가져왔답니다. 그런데 녹을 없애고 도신(刀身)을 닦다가 도신에 새겨진 도법을 보았답니다. 첫눈에 상승(上乘)의 도법인 줄 알았지만 세월이 너무 흘러서인지 초식(招式)과 구결(口訣)이 불분명했지요. 각각의 면에 초식과 구결이 새겨져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조상들께서는 그 구결과 초식을 보완하여 도법을 완성하는데 심력을 다 하셨지요. 그러다 결국 삼십년 전쯤에 완성이 되어서 지금 제가 익히게 된 것입니다.“ 형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그런지 초식이 듣던 바와 다른 것 같더군” “원래 지옥참마도법은 삼초식 뿐이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가문의 무공과 합쳐져서 오초식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쯔쯪, 안타깝구만. 원래의 지옥참마도법(地獄斬魔刀法)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아, 지금의 자네 도법을 비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게.” “별말씀을....” “단지 삼초식이었지만 도법으로는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무공인데.” 형노사가 아쉬운지 한숨을 쉬며 말한다. 단리유아 또한 약간 실망했다. 완전한 지옥참마도법(地獄斬魔刀法)은 더 이상 볼 수 없을테니..... “과거 천년 전에는 초식(招式)은 단순했을지 모르지만, 내공(內功)의 우수함은 지금보다 훨씬 뛰어나서, 한 시대에 화경(化境)의 고수만 해도 백 명 이상이었다고 전해져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록 초식은 복잡해지고 다양해졌지만 은거(隱居)한 고수까지 합쳐도 삼십을 넘지 못할 겁니다.” 단리유아가 무감정한, 고저가 없는 고요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옆에서 듣던 소석정(邵晳程)이 약간 거북한 얼굴로 단리유아를 쳐다보았다. 이에 형(邢)노사가, “자네도 저놈의 목소리가 이상한 모양이구만. 누구든지 저놈 목소리를 듣게 되면 그런 느낌이 들지. 나도 몇 년 전에 처음들을 때는 무슨 나무토막이 중얼거리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다시 만나서 저 목소리를 들으니 그때보다 더 심해진 것 같더군. 쯔쯧. 자고로 사람이 감정을 잃어가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닐텐데.... 자네도 원래 그러려니 하고 더 이상 저 놈의 목소리에는 신경 쓰지 말게.” 형노사의 말을 듣고 소석정의 얼굴에 잠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그런데 어쩌다가.....” “휴, 누가 알겠는가? 물어도 본인이 아무런 말을 안하는데. 자네도 그냥 그러려니 하게.” 잠깐 동안 대화가 없이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잠시 후에 형노사가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며, “흠, 흠. 그 얘기는 그만하고 아까 저놈이 한 얘기나 계속해보세. 저놈의 말대로 과거에는 비록 초식은 단순했을지 모르지만 내공은 훨씬 우수했지. 그래서 지난날에는 화경의 고수를 만나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네. 보통 강호무림(江湖武林)의 최전성기(最全盛期)를 천이백여년의 진(秦)·한(漢) 교체기와 칠백여년 전의 삼국(三國)시대라고 보네. 그 당시에는 정말 고수 아닌 자가 없어서, 화경(化境)의 고수라도 강호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하네. 그러다가 두 번에 걸친 정마대전(正魔大戰)으로 수많은 문파(門派)와 비전절기(秘傳絶技)가 사라져서 무공의 수준이 급속히 퇴보하게 되었다고 하네. 그 이후로는 점점 문파의 제자 수를 늘리고 세(勢)를 넓히는데 집중하게 되었다네. 그 결과 빠르게 성과를 볼 수 있는 초식상의 무리(武理)는 발달했지만 내공의 양(量)만을 급속도로 늘이는 내공법이 널리 퍼지게 되었지. 그래서 절정고수, 일류고수는 많아도 이제는 화경의 경지에 이른 자도 드물어지고, 화경에 도달하기도 더 어려워졌다네.” 이에 단리유아가 말을 받아서, “형(邢)노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일례로, 삼백년 전(前)의 소림사(少林寺) 팔대 장문인인 무상대선사(無上大禪師) 이후, 누구도 현경(玄境)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또 화경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드무니, 현경은 점점 사람이 오르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형(邢)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네. 중원의 무공이 오히려 쇠퇴했다는 증거가 바로 백여 년 전에 일어난 성숙해(星宿海) 일대의 패자(覇者)인 혈수미교(血修彌敎)와의 싸움이지. 처음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난 후, 전 중원(中原)의 힘을 모아서야 가까스로 그들을 격퇴한 할 수 있었다고 하네. 그 당시 혈수미교와의 싸움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문파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네. 또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만 일갑자(一甲子)의 세월이 흘러야했다네. 비록 많이 복구됐다지만 아직도 절정(絶頂)이상의 고수의 숫자는 백 년 전에 비해서도 많은 것이 아니네. 더구나 최근에는 강호인(江湖人)들이 문파내의 실전절기(失傳絶技)를 복구하고 새로운 절기를 창안할 생각은 않고, 제자들의 수만 늘려서 세력 싸움에만 빠져 있으니, 앞으로 강호가 어찌될지 참으로 걱정이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형노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과거 가장 강했다던 칠대강파(七大强派)의 하나인 원시마교(原始魔敎)도 마교 자체가 인정한 제자는 전성기에도 이천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린 문파만 해도 십여 개를 넘어가고, 삼백이상은 수십에 이릅니다.” “맞네. 그러나 그 실속을 보면, 속이 텅텅 빈 강정과 같으니 문제네. 확실히 숫자상으로는 늘었지만, 절정(絶頂)고수 이상의 숫자에서는 과거와 상대가 되지 않지. 더 큰 문제는 강호가 무공의 고저(高低)보다 세력의 대소(大小)에 의해 결정되는 추세가 되어간다는 것이네. 하루도 크고 작은 세력싸움이 그치질 않고 진흙탕의 물처럼 혼탁(混濁)하니 앞날이 더더욱 불안하네” 확실히 강호는 과거와 비교해 본다면 혼탁해져가고 있었다. 과거의 싸움이 문파 내 상층부의 고수들 간의 싸움으로 결정되고 하급(下級)제자들은 직접 싸움에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이제는 고수들은 뒷전으로 물러나 오히려 하급제자들을 소모품으로 사용해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다반사(茶飯事)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급제자들을 키우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그리 어렵지 않으니 많은 숫자가 죽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회복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절정(絶頂)의 고수일지라도 많은 수의 이·삼류고수가 공격한다면 당할 수가 없다. 원론적으로 일대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화경(化境)에 올라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타통해서 순일(純一)한 진기(眞氣)가 끊임없이 솟아나 저절로 보충되지 않는 이상에는, 절정 이하의 고수에게 진기라는 것은 운기조식을 하지 않고 계속 쓴다면, 쓰면 쓸수록 결국 바닥을 들어내게 되어있었다. 단리유아조차 비무를 끝낸 후 그런 경우를 당하여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어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휴우, 소(邵)소협. 자네도 앞으로 비무행(比武行)에 그런 경우를 만날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게.” “잘았겠습니다. 형(邢)노사.” 단리유아가 그의 표정을 보니 대답을 하였지만, 신경을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고수라지만 숫자상의 불리함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는 아직 강호(江湖)의 실정과 중원(中原)의 지리도 잘 모르니... 하여간 그도 그런 일을 겪고 보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 그럼 오늘은 그만 각자 쉬기로 하세. 해시(亥時:21-23시)가 된지도 한참이니. 내일 대결하려면 일찍 쉬면서 운기조식도 해야 할테니. 그만 일어나세“ 각자 일어나 미리 잡아둔 객방으로 행했다. 단리유아도 객방으로 향하면서 내일의 비무(比武)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 그의 무공을 보아 도강까지 펼칠 수 있으니 나와 좋은 승부(勝負)가 될 것이다. 내가 창안한 천애구검(天涯九劍)에 좋은 상대가 될 것이고, 그의 가문이 완성했다는 새로운 도법도 기대된다. 승패(勝敗)는 중요치 않았다. 내가 혹시 간과(看過)한 내 무공의 단점이 무엇인지, 상대의 무공 중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 그런 고수와 싸운다면 한 단계 아니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겠는가? [참조 & 설정] [1] 소림사(少林寺) : 중국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숭산(嵩山)에 위치한 사찰. 처음에 이 사찰은 496년에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발타선사(跋醇禪師)를 위하여 창건했다. 519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초빙된 인도의 승려 달마가 소림사에 전하였다는 천축나라지각(天竺那羅之脚)을 기초로 역근세수경(易筋洗修經), 소림(少林) 칠십이종절기(七十二種絶技)등이 창안됨. [2] 무상대선사(無上大禪師) : 주로 당(唐)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소림사 팔대(八代) 장문인(掌門人). 소림사상(少林史上) 최강자(最强者). 최고무공은 무상반야금강선공(無上般若金剛禪功). 최고의 항마(降魔)절기로 실전(失傳)됨. 마지막으로 현경(玄境)에 올랐던 인물로 고금오대고수의 일인. [3] 혈수미교(血修彌敎) : 성숙해(星宿海) 일대의 패자. 청해호(靑海湖) 해심산(海心山)이 본산(本山)으로 좌파(左派)밀교(密敎)의 일맥으로 알려짐. [4]칠대강파(七大强派) : 상고(上古)의 대문파(大門派)로서 수많은 무학(武學)의 원류(源流)가 되었지만 일·이차 정마대전(正魔大戰)으로 모두 사라졌음. 원시마교(原始魔敎 : 천지신교), 천강신문(天剛神門), 봉황곡(鳳凰谷), 수라혈교(修羅血敎 : 이차(二次)마교로서 원시마교의 후예), 천외검문(天外劍門), 광한궁(廣寒宮), 태양곡(太陽谷). 천애구검(天涯九劍) 천애구검(天涯九劍) 2 다음날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성(城)밖 사당(祠堂)으로 향했다. 아침을 먹을 때도, 사당을 향할 때도 긴장을 풀어주려는 형(邢)노사의 반농담조의 이야기를 제외하곤 단리유아와 요동마도(遼東魔刀) 소석정(邵晳程)은 별로 말이 없었다. 단리유아가 소석정의 얼굴을 바라보니 약간 굳어서 긴장한 기색이 보였다. 단리유아도 수많은 싸움을 해보아서 무덤덤할 줄 알았는데 막상 대결 장소로 향하니 약간 흥분이 되는 것 같았다. 오년만의 첫 싸움이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 싸움 전에는 항상 이런 기분이 들었었다. 약간의 흥분과 기대감에 차 마치 깃털처럼 가벼이 들뜬 듯한 기분. 메말라가는 감정들 속에서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기회였다. 내공(內功)이 구성에 이르자 의식에 심어진 강해지기 위한 단 하나의 목표를 제외하고는, 점점 이러한 감정도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만일 마음 속 깊은 곳에 각인된 맹세가 없었다면 더 이상 살아갈 마지막 의지조차 사라졌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당(祠堂) 밖 사방으로 수십 명의 강호인(江湖人)이 여기저기 모여서 지켜보는 것을 알았지만, 비무에 방해만 주지 않는다면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사당 내에 도착해서 형노사는 계단에 앉고, 단리유아와 소석정(邵晳程)은 마주보고 서 있다. “여보게들, 어제 약속했던 바대로 비무를 시작하고자 하네.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하도록 하게. 흠흠, 할 말이 없나? 좋아. 그럼 공증인으로서 비무에 앞서 몇 가지 할 말이 있네. 우선, 싸움 도중에 한 쪽이 쓰러지거나 패배를 인정한다면 바로 출수를 멈춰야하네. 둘째로는 내가 판단해서 승부를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이네. 즉, 어느 쪽이 치명상을 입거나 요혈을 다쳤을 때는 내 판단으로 비무를 멈출 수 있다는 것이네. 세 번째는 바로 나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승복해야 하네. 다들 이해했나? 그럼 서로 인사하고 시작하게.” 본래 단리유아의 나이가 그보다는 어리지만 강호의 경험도 훨씬 많고 명성도 더 높은 선배라 할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소석정(邵晳程)이 단리유아에게 비무를 요청해야 하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비무는 단리유아가 도전을 해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단리유아가 먼저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천패무광(千敗武狂) 단리유아(段俚唯我)가 요동마도 소대협에게 비무를 요청합니다.” “요동마도(遼東魔刀) 소석정(邵晳程)은 천패무광 단리대협의 요청을 받아 비무를 허락합니다.” “좋아. 그럼 시작하게” 단리유아가 먼저 검을 빼어 오른 손에 쥐며 상대를 응시했다. 소석정도 등 뒤의 참마도(斬馬刀)를 풀어서 천주부동(天柱不動)의 자세로 눈앞에 세웠다. 칠척의 도를 든 그의 모습을 보니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기파(氣波)가 밀려왔다. 과연! 과거에 상대했던 고수들과는 차원이 틀린 고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단리유아 역시 싸움에는 이력이 난 백전노장으로 결코 상대의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등 뒤의 혈관으로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뒷골을 향하여 치밀어 오름을 느끼며, 먼저 난파은영보(亂波隱影步)로 좌로 움직이며 검을 찌르듯이 휘둘러 허리를 공격했다. “은검성조(銀劍星照)“ 원래 이 수법은 금은쌍검(金銀雙劍)중 은검(銀劍) 조적상(曺積狀)의 검법의 일초로 움직이면서 회전력(回轉力)을 주어 검을 찌르는 초식이다. 그의 운신(運身) 중에 전사(纏絲)를 검에 가미하여 쓰는 이 초식은 그 위력이 강하고 빨라서 피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 초식을 비무 후에 연구해서 단리유아가 그의 무공으로 만든 것이다. 단리유아는 비급으로도 많은 무공과 초식을 알고 있었지만, 강호(江湖)에 나와 비무를 통해서 직접 몸으로 배운 것이 더 많았고 또 그런 무공을 즐겨 사용했다. 비무할 때마다 상대의 무공을 분석하며 자신이 알던 무공과 비교하는 버릇은 점점 발전하여 이제는 상대가 펼치는 거의 모든 초식의 운용(運用)방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서 비무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비무 상대방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 전 강호를 통해서 단리유아 만큼 많은 무공을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단리유아가 강호에서 행도하던 오년 전까지 주로 사용했던 무공은 바로 이런 비무 상대자들에게서 배운 무공과 강호에 흔히 떠돌던 무공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상황이 다르게 될 것이다. 단리유아 자신만의 무공을 창안했으니.... 단리유아의 이번 공격에 소석정(邵晳程)은 피하지 않고 서서, 도의 넓은 도신(刀身)를 이용해 검을 밀치고 도를 수평으로 휘둘러 옆으로 돌아가는 단리유아를 공격하려 했다. “수휘벽파(手揮壁破)” 보통의 신법이라면 이 수법에 허리가 잘라지거나 막는다 해도 힘을 집중할 수 없으니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단리유아가 이번에 완성한 무공(武功)중의 하나인 난파은영보(亂波隱影步)는 바위에 물결이 칠 때 부딪히는 물방울의 산란(散亂)을 보고 창안한 것으로 이동중의 순간적인 변환이 자유로웠다. 순식간에 직각으로 신형을 옮겨 허상(虛像)인 그림자를 베어나가는 소석정의 왼쪽 측면으로 위치했다. 눈에 보이는 측면의 허점을 향해 이번에는 반대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공격했다. “검영삼파(劍影三波)” 이 초식은 상중하의 세 지점을 향해 검기(劍氣)를 날려서 공격하는데 검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마치 세 개의 달빛 파도가 날아드는 것과 같았다. 상중하의 모든 공격이 실체여서 어느 하나만 막을 수 없고 전체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이 초식도 원래 검각(劍閣)의 무공이지만 단리유아가 자신의 무공으로 만든 것으로 검각의 최고고수가 펼치더라도 이보다 효과적이고 완벽하게는 시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에 소석정은 다시 돌아서지 않고 그 상태에서 앞으로 한 걸음 전진해서 요혈을 피한 다음, 원래의 회전방향으로 돌면서 도의 중간을 잡아서 돌린다. “만월휘벽(滿月揮壁)” 도기에 휩싸인 참마도(斬馬刀)가 회전하며 원형의 방패 같은 도기(刀氣)를 만들어 단리유아의 공격을 막았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서 도를 찌르듯이 하여서 순간적으로 다섯 개의 도기를 십자 형태로 만들어 단리유아에게 날린다. 십자형의 도기가 점점 벌어지면서 다섯 방향으로 공격한다. 모든 방향을 피할 수 없어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며 가장 바깥쪽의 것을 향해서 검을 휘둘러 공격한다. “풍뢰탄우(風雷彈雨)” 무수히 많은 검기의 폭풍이 몰아쳐 나가며 일부는 다가오는 도기를 상쇄시켜 폭발하고 나머지는 그를 향해서 나아간다. 이 초식도 풍뢰곡(風雷谷)의 최고절기인 풍뢰검법(風雷劍法)의 일초로서 무수히 많은 검기를 만들어 공격하는 것이다. 실제 이 초식은 풍뢰곡에서도 잘 쓰지 않는데, 그 이유는 파괴력은 뛰어나지만 쓸모없이 사라지는 검기가 많고 내공의 소모가 막심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리유아가 이 초식을 본 따서 새롭게 만들었는데 내공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한꺼번에 검기를 난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중앙에 몇 개의 검기의 다발을 만든 다음 다시 그 검기에 충격을 주어 날리며 거의 동시에 다시 검기를 만들어 날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파괴력은 거의 그대로 유지되지만 내공의 소모는 삼분의 일도 안되게 줄어든다. 소석정도 또한 도를 휘둘러 도기를 만들어 날려 보낸다. “삼전추광(三箭追光)” 세 가지의 도기가 나와서 처음 하나는 날아오는 검기와 충돌하여 폭발하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단리유아의 신형을 쫓아온다. 한 호흡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벌써 수십 합(合)을 부딪치고 수십 초의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졌다. 단리유아도 점점 싸움에 몰입(沒入)해서 주변을 잊고 공수에 최선을 다했다. 시간도 공간도 멈춘 듯이 모든 것을 잊고 오직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싸움을 계속했다. 옆에서 보더라도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움직이며 오직 검과 도가 부딪혀 튀는 불꽃과 소리만 요란했다. “챙! 챙!” “콰쾅! 콰쾅!” 검과 도가 부딪히는 소리, 검풍(劍風)이 터지는 소리, 검기(劍氣)가 부딪혀 폭발하는 소리만 요란하게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땅은 헤집어지고, 주변의 풀뿌리와 땅바닥에 뒹굴던 잡동사니도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단리유아는 이렇게 몰입해서 싸웠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수많은 싸움 중에서도 상대를 잊고 싸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치고받는 싸움 속에 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준 그에게 단리유아도 최선을 다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시진? 두 시진? 문득 단리유아가 소석정의 모습을 보니 머리는 헝클어져 사방으로 날리고, 옷가지는 갈기갈기 찢어져 군데군데의 혈흔을 내비쳤다. 자신의 모습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잠깐 한 발 물러서 공격을 멈추었다. 소석정도 갑자기 단리유아가 멈추자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며 공격을 멈춘다. 호흡을 고르며 단리유아가 소석정에게, “소대협, 이제 몸도 풀렸으니,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나는 당신의 지옥참마도법을 보고 싶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처음으로 내가 창안한 무공을 선보이겠소.” “좋소” 서로 간격을 더욱 벌려 담벼락 가까이 물러섰다. 사당의 담벼락도 싸움의 결과를 보여주듯이 거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단리유아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왼손으론 검집을 잡고, 오른손에는 검병(劍柄)을 손에 댄 채 소석정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소석정 왼쪽 발이 앞으로 나가 반쯤 구부린 채, 옆으로 도를 수평으로 들고 있었다. 그가 오른 발이 앞으로 나가며 먼저 공격했다. “지옥삼천단(地獄三天斷)” 도강(刀剛)이 맺힌 도를 휘둘러 세 가닥의 도강을 좌상에서 우하로, 우상에서 좌하로, 위에서 아래로 날려 보냈다. 단리유아도 검을 뽑아서 도강의 중심을 향하여 허공을 격(隔)하고 찔렀다. “천애유성하(天涯流星河)”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제 일초로 유성(流星)이 흐르는 모습을 보고 창안한 것이었다. 보라. 땅에서 하늘로 반대로 솟구치는 유성의 모습을! 한 줄기 빛살 같은 강기(剛氣)가 검 끝에서 솟아나 도강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가장 강해보이는 곳이 가장 약한 곳이라는 격언대로. “콰꽝” 좀 전까지와는 비교 할 수 없는 큰소리와 함께 흙과 먼지가 날리고 온갖 잡동사니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윽고 흙먼지가 가라앉아 상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무렵, 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공격해 나갔다. “지옥굉월참(地獄宏月斬)”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 커다란 반월형의 도강(刀剛)이 날아들고 땅에서는 마치 유성이 솟구치듯이 나타나 도강에 부딪힌다. 순간 검강(劒剛)이 폭발해 사방으로 강기(剛氣)가 튀어나갔다. 제 이초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은 유성이 부딪혀 폭발하는 것이었다. 부딪힌 곳 주위 십장 내에는 완전히 파괴해 살아남을 것이 없었다. “쾅! 콰쾅!” 부딪힌 순간의 폭발 때문에 아까보다 훨씬 큰 굉음과 함께 먼지가 날리고 부딪힌 주위 오장 이내가 파였고 그 깊이도 일장에 달할 정도였다. 먼지가 가라앉고 서로 상대방의 모습을 보았다. 아마 소석정이 약간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이초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의 특성을 모르는 이상 최소한 약간의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외상은 크게 없는 것 같지만 입가에 혈흔(血痕)이 내비치고 창백한 안색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밀린 것을 인정할 수 없는지 재차 공격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단리유아도 호흡을 골라 내기(內氣)를 진정시킨 후 공격에 대비했다. 소석정이 도를 들어 단리유아를 가리킨 채로 정지한 후, 계속 내공을 모았다. 도환(刀丸)의 공격인 것 같았다. 내상을 입어 약간 무리일텐지만. 그 모습에 단리유아가 피할지 말지 잠시 생각하다가, 피하지 않고 맞받아치기로 했다. 지금까지 서로 계속 맞받아쳐 왔으니.... 도강(刀剛)이 점점 응축되는 모습을 보며, 단리유아 또한 검막(劍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천애유성간(天涯流星干)” “지옥탄마환(地獄彈魔丸)” 겹겹이 둘려 쌓인 둥근 방패 모양의 검막(劍幕)에 주먹보다 작게 응축된 도환(刀丸)이 부딪쳤다. “콰, 콰꽝!” 단리유아는 확실히 도환(刀丸)이 우위에 있음을 이번 공격을 막으며 알 수 있었다.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제 삼초인 천애유성간(天涯流星干)은 한군데로 검막을 집중한다면 검기를 수십 겹으로 겹겹이 쳐 놓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엔 도환에 견디지 못했다. 다행히 도환도 검막을 부수면서 기운이 다해 사라졌다. 비록 도환(刀丸)을 막았지만 부딪힌 충격에 삼장이나 밀려났고 또한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단리유아가 소석정을 보니, 그도 무리한 내공운행(內功運行)으로 내상이 아까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그만, 그만하면 됐네. 그만 둘 다 멈추게” 더 이상 싸운다면 둘 중 하나는 죽을 것이고, 다른 한명도 치유불가능의 중상을 입게 될 것이니 그만 멈추어야 할 것이다. 단리유아가 내상을 참으며 걸어가, 형노사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소대협, 대협의 고강한 무예에 새삼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비무에 응해 제 안목을 넓힐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단리대협, 나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았습니다. 불과 몇 번의 승리에 도취한 채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존광대(自尊廣大)하다니. 오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항시 다른 사람을 겸허히 대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비무는 제가 패했음을 인정합니다.” “아닙니다. 저희 둘 다 나머지 초식은 사용하지도 않았고, 또 서로 내상을 입었으니 무승부입니다.” “아니오. 단리대협, 내상의 정도나 외상의 정도를 보더라도.....” “그만, 둘 다 그만하게. 내가 판정을 하지. 오늘의 승부를 겉으로 본다면 싸움꾼이 이겼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사실 저 놈은 싸움에는 이골이 난 놈이니 외상정도야 논외로 치고라도 실제로 소대협, 자네의 무공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무공연원은 알고 있으니 저 놈에게 유리하지 또 자네는 저놈의 무공내력을 전혀 모르지 않았나? 그러니 이 비무는 무승부라네. 둘 다 인정하지?” “예.” “하지만, 그래도....” “됐네. 그보다 둘 다 내상이 심할테니 내가 호법을 서는 동안 사당 안에서 대충 진정이라도 시켜놓케.” “그러지요.” “예....” 둘 다 반쯤 무너진 사당(祠堂)안으로 들어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내상을 진정시키기 위해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들어갔다. 소석정은 내상약을 먹고 운기하기 시작했지만, 단리유아는 내상이 심한 편이 아니고 또 내공의 특성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정도의 내상은 깨끗이 완치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좌정(坐定)해서 운기(運氣)하는 시늉만 했다. 대략 이각이 못돼서 소석정이 깨어나는 기미를 느끼고, 단리유아 또한 조식을 끝마치는 것으로 가장했다. 둘 다 밖으로 나가 형노사를 만나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겨서 사당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의 싸움으로 인해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던 담장들은 모두 무너지고 여기저기 파인 구덩이와 파헤쳐진 땅바닥, 흩어진 잡동사니들로 인해 그야말로 귀가가 따로 없었다. 대충 형노사가 땅바닥을 고른 후, 이후의 일을 상의하다가 오늘은 운공요상(運功療傷)으로 상처를 치료하는데 보내고 다른 일은 내일 얘기하기로 했다. 일행이 사당을 나와 관도로 나아가니 집주위에 있던 수십 명의 강호인도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은 오늘 듣고 보았던 비무에 대해서 사방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것이다. 그러면 강호는 다시 알게 될 것이다. 싸움에 미친 일대(一代) 광인(狂人)이 다시 나타났음을.... 과거보다 훨씬 강해진 채로. ******* 비무라서 긴장감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저는 정상적인 비무라면 서로의 무공을 비교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생각해서 쓴 것입니다. 실전에서 누가 일일이 초식을 말하고 신법 같은 것은 거의 쓰지를 않고 싸우겠습니까? 다른 권법이나 장법 등 여러 가지 무공도 있을텐데 사용하지도 않고. 비무는 생사결전이 목표가 아닙니다. 자신과 상대의 무공을 비교하여 장단점을 파악하고 무공을 진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상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내용에 이상이 있거나 궁금하시면 댓글을 달아주십시오. ******** 천애구검(天涯九劍) 천애구검(天涯九劍) 3 객점으로 돌아와 각기 객방으로 흩어졌다. 목욕을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침상곁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좌정(坐定)에 들었다. 오늘의 싸움을 되새겨 보았다. 비록 내가 약간 우세하기는 하였지만 상대도 모든 무공(武功)을 펼친 것이 아니고, 단순한 비무였으니 최선을 다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나 또한 천애구검(天涯九劍)을 삼초식까지 펼쳐보지 못했으니.... 그러나, 오늘 있었던 비무에서 느꼈던 것은 천애구검(天涯九劍)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내가 창안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동안 이론적으로 초식을 만들고 실제로 싸워본 것이 처음이니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초식으로 구성된 천애구검은 각각의 초식이 한 개의 검법의 정화(精華)를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 검법의 후반 삼식은 이론적으로는 완성됐을 뿐 현재 나의 내공이나 수준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실제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전 삼식과 중 삼식이 전부였다. 특히 제삼초인 천애유성간(天涯流星干)은 순수한 방어초식이랄 수 있지만 오늘 결과로 알 수 있었다시피 검환(劍丸)류의 공격은 완전히 막을 수 없음을 들어냈다. 상대가 내상이 심해서 공격이 완전치 못했기에 다행이었지, 만일 상대의 내공이 완전했거나 나보다 내공이 깊었다면 나도 내상(內傷)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검강(劍剛)으로 강막(剛幕)을 몇 겹으로 펼친다면 강환(剛丸)류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 테지만, 워낙 내공의 소모가 심하고 초식의 변화에 대한 대응이 늦다는 단점이 있었다. 만일 상대가 회선(回旋)류나 시간 차 형태의 초식으로 공격을 한다면 이미 대처가 늦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검기를 촘촘히 겹쳐서 검막(劒幕)을 만든 것이 천애유성간인데, 검기로 형성하니 내공의 소모는 상대적으로 적고 변화에 대한 대처가 빠른 것이 장점이었지만, 오늘의 결과를 보니 보완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원래 천애유성간은 한 지점에 집중한다면 펼친다면 반경(半徑) 한자 정도의 범위에 열두 겹의 검막(劒幕)을 형성할 수 있고, 사방 일장이내 전체를 감싼다면 세 겹으로 둘러쌀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일로 인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함을 알았다. 범위를 더 축소해서 검막을 더 두껍게 펼치거나, 차라리 검강으로 검벽(劍壁)을 만드는 것을 생각해봐야 하겠다. 우선 범위를 축소해서 검기(劍氣)를 펼쳐 만드는 것은, 범위를 반자 이내로 줄인다면 현재의 수준으로는 열여덟 겹까지는 형성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공격범위가 넓어진다면 여전히 막을 수 없다는 단점이 남아있었다. 또 검강(劍剛)으로 벽을 만드는 것은 현경(玄境)에 들지 않는 이상 내공의 소모가 너무 지나쳐 내공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상대가 한 명뿐이라면 그래도 문제가 덜하겠지만 비슷한 수준의 고수가 단 한명이라도 더 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역시 내공의 소모와 빠른 회복이 문제인데.... 천상 상대의 공격에 따라 달리 펼쳐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고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는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혹시 내 내공심법(內功心法) 중의 구전결(九轉訣)을 이용한 차력흡기술(借力吸氣術)을 이용한다면.... 그러나 직접적인 신체 접촉에 의해 흡기(吸氣)하는 방법이외로는 사용해보지 않았는데. 검벽(劍壁)을 펼친 후, 상대 공격과 충돌한 다음 흩어지는 기운을, 허공을 격(隔)하고 펼쳐서 흡수할 수 있을까? 삼할 정도만 흡수할 수 있어도 성공일텐데.... 좌정에서 일어나 시험해 보았다. 일장(丈) 앞 허공에 격공장(隔空掌 : 장법의 하나로서 허공을 격하여 임의의 한점에서 힘을 터뜨리는 발경법의 한 가지)을 펼친 후 구전결(九轉訣)을 운용하여 흩어지는 기운을 향해서 의념(意念)을 집중했다. 역시, 미소한 량의 내기(內氣)를 흡수할 수 있었지만 그 양은 지극히 미미해서 채 일 푼도 되지 않았다. 더 연마한다면 흡수할 수 있는 양이 증가하겠지만 아무리 해도 오 푼 이상은 힘들 것 같다. 그 정도로는 별 효과가 없는데..... “쿵 쿵” “이봐, 대체 무슨 일인가? 누가 침임이라도 했나?” 이런, 여기가 객방 안이라는 것을 깜박했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목소리에 주변을 대충 정리한 후 문을 열었다. 형(邢)노사가 약간 놀란 얼굴로 쳐다보며, 방안을 살핀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저 오늘 비무를 생각하며 무공을 연구하다가 무심코 격공장을 펼친 것뿐입니다.” “뭐?” 황당해 하며 쳐다본다. “하여간 네 놈은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놈이야. 아니 객방 안에서도 연구랍시고 무공을 펼치다니.... 오늘 그렇게 싸운 후에 피곤하지도 않냐? 아니, 그것보다 상처 치료는 다 했나?” “외상은 약간 있지만, 내상도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어서 우선 오늘 대결에 대한 생각에 빠져 들다보니 주변을 의식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흥. 다른 놈들은 비무 후에 보통 사흘은 조식하며 내공을 추스르고, 외상치료도 하며 보내는데 너란 놈은 상처는 신경 쓰지도 않고 연구랍시고 빠져서 어디가 어딘 줄도 모르고 무공을 펼쳐? 이 미친 녀석아, 그만 작작하고 잠 좀 자자. 자정이 지난 지 언젠데 무공을 펼쳐 사람을 놀라게 해? 나이가 드니 움직이는 것도 힘들단 말이다. 알겠냐?, 이놈아!” “죄송합니다, 형(邢)노사. 놀라게 해드려서.... 이후에는 조용히 하겠습니다.” “흥, 하여간....” 뒤로 돌아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꽝 소리가 나도록 닫는 것을 본 후에, 방문을 닫고 다시 좌정했다. 생각에만 집중하고 연습은 나중에 해야겠다. 무공의 연구에 빠져 들면 나도 모르게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니.... 다시 아까의 상황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면서, 연구에 빠져들었다. 허공에서 터지는 내기를 흡수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내가 알고 있는 무공 중에서 분명히 내공을 다시 회수하는 방법이 있을텐데.... 흡정마공(吸精魔功), 흡성대법(吸星大法), 북명심법(北冥心法), 기환압정대법(氣還壓淨大法), ..... 흠, 여러 가지가 있지만 허공중의 흩어지는 내기를 다시 모으는 것은 아닌데, 하나하나 구결을 연구해야 보아야겠군.... 흡정마공, 흡성대법은 강제로 기를 빼앗는 무공으로 수라혈교(修羅血敎 : 이차(二次)마교로서 원시마교의 후예)에서 창안해서 실제로 몇몇이 익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본래 그 무공의 사악(邪惡)함도 문제였지만, 상대의 내공을 흡수해도 자신의 내공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일 푼도 되지 않고, 몸에 남아있는 다른 내공들의 충돌에 의해 경지가 높아질수록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폐기되다시피 한 무공이었다. 북명심법은 본래 도가(道家)일맥인 소요문(逍遙門)의 비전(秘傳)으로 상대의 내공을 흡수하는 것은 같지만, 소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내공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시 허공에 흩어버리는 것으로 주화입마의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소요문이 멸문(滅門)한 후 완전한 구결은 실전됐고 또 내게 있는 구결은 불완전 일부분뿐이어서 정확한 이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기환압정대법은 천강신문(天剛神門)에서 창안한 것으로 본래 마교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만든 것이었다. 이 무공은 상대방 아니, 이미 발출한 내력(內力)보다 남아있는 내력이 큰 경우, 원래 자신의 내력을 회수할 있지만, 범위가 일장(丈) 안으로 반드시 남은 내력이 더 커야하고 자신의 내력만 회수가 가능했다. 회수율은 삼 할까지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무공은 후에 여러 문파에 전해져 대부분의 주요 내공심법(內功心法) 중에 일부 구결이 포함됐다. 이중에서 북명심법의 구결과 기환압정대법, 나의 구전결을 합하면 방법이 보일 것 같은데.... 음. 이것은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것은 이정도로 하고 나중에 시간을 가지고 연구해 보아야겠다. 두 번째 문제점으로 제이초인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의 폭발 방향의 문제점이 있었다. 이 초식은 검강(劍剛)을 원형으로 만들어 회전시킨 후 날려서, 상대의 공격과 부딪히면 원심력(遠心力)에 의해 폭발된 강기가 사방으로 폭사되는 것으로 상대와 가까운 곳에서 터질 때에는 별 문제가 없고 효과가 뛰어나지만, 만약 나와 가까운 오장(丈)이내에 터진다면 나조차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 신법(身法)을 이용해 간격을 벌릴까? 그러나 이 초식은 폭발 때까지 기(氣)의 제어가 필요한데, 신법을 펼치면서 제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원심력(遠心力)의 제어 정도를 줄여볼까? 흠, 이것도 쉽지 않네.... 휴, 이것도 이정도로 해야겠군. 이것은 실제로 펼쳐보며 수련(修練)해야 할테니.... 운공(運功)이라도 할까? 그냥 둬도 회복되겠지만, 운공하는 것이 효과가 빠를테니, 잠을 자기도 이미 늦었고..... 오래간만에 운공에 들었다. 대우주(大宇宙)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운행(運行)하듯이 소우주(小宇宙)인 인체(人體) 역시 오장육부(五臟六腑)로 구성되어 있다. 오장(五臟)은 음(陰)이고, 육부(六腑)는 양(陽)이다. 또 오장육부를 오행(五行)으로 구분하면, 간(肝)·담(膽)은 목(木)이고, 심(心)·소장(小腸)은 화(火)이고, 비(脾)·위장(胃腸)은 토(土)이고, 폐(肺)·대장(大腸)은 금(金)이고, 신(腎)·방광(膀胱)은 수(水)이다. 여기에 심포(心包)와 삼초(三焦)를 화(火)로 보고 모두합해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된다. 또, 이러한 인체의 오장육부의 상호간의 작용이나 유기적(有機的)인 기능은 음양(陰陽)의 이치(理致)와 오행(五行)간의 상생(相生)상제(相制)관계에 따른다. 본래 대부분의 내공심법(內功心法)은 이러한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原理)와 주요 십이정경맥(十二正經脈)과 기경팔맥(奇經八脈)중의 임독양맥(任督兩脈)을 이용해 운공하는 것으로, 특별한 양공(陽功)이나, 음공(陰功), 사술(邪術), 법술(法術)등을 제외하고는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또 그 운행의 순서와 대략 삼백육십오 개의 혈도 중에서 이용하는 혈도에 따라서, 기(氣)의 응집(凝集)방법과 기의 특성에 따라 심법(心法)의 특색(特色)이 달라졌다.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은 비록 마공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어떤 내공심법보다 우수한 무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내가 이 내공을 선택한 이유가 창안한 이후 아무도 익히지 않았다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상 내가 익힐 수 있는 내공 중에서 이것만큼 나에게 적합한 심법도 없었다. 내공을 수련할 때, 친족(親族)이나 문파(門派)의 장로(長老)같은 도와줄 사람이 없이, 열 살의 어린아이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은 얼마돼지 않았다. 실제 영약(靈藥)이나 추궁과혈 같은 추나(追拏)수법으로 혈도를 타통 해서 내공을 늘리지 않는 이상, 열 살이란 나이는 무공을 익히는데 결코 빠른 것이 아니었다. 보통사람이 아무런 도움 없이 한 가지 내공심법만 꾸준히 익힌다면 십년동안 모을 수 있는 내력은 얼마나 될까? 내공심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십년에서 삼십년의 내력을 모으는 것이 다일 것이다. 또 다른 무기술(武技術), 경신법(輕身法), 권장법(拳掌法) 등도 익힌다면, 한 가지 내공심법을 완성하는 데에만 해도 무수한 시간이 들 것이다. 회정구전회혼마공은 회정마의(灰情魔醫)가 만든 것으로 신체(身體)에 가해지는 타격의 충격을 흡수(吸收)하고 피부에 접촉한 내기(內氣)를 흡수하여 내공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무영비고(無影秘庫)에서 이 한 가지만 익힌 것도 강호(江湖)에서 직접적으로 몸으로 부딪히며 무공(武功)을 익히는 것이 비고에서 비급을 쌓아놓고 혼자서 익히는 것보다 몇 배나 빠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신의 타격을 흡수해 내력(內力)을 키우고 또한 자연스럽게 신체는 철골지신(鐵骨之身)으로 바뀌는 것이다. 비록 몸은 고단하고 정신은 지치게 되었지만, 도검(刀劍)에 의한 피육(皮肉)의 상처를 제외한 나머지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회정결(灰情訣)의 영향으로 감정이 사라져가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던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심법이었다. 우선 임의의 구대혈(九大穴)에 가상의 단전을 형성하는 것이 첫 문제로, 일단 구대혈에 기(氣)가 형성되면 일성(一成)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회정마의는 본래 회혼의파(回魂醫派)의 당주였던 인물로, 보통 말하는 단전(丹田 : 하단전)이라는 것이 기를 모으기 위한 아랫배 부근의 기해(氣海)혈을 가리키지만, 꼭 단전이란 것이 특정 위치가 아니라 단순히 호흡을 통해 기를 모으는 의념(意念)이 집중되는 위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실험으로 회정구마(灰情九魔)의 나머지 팔마에게 각기 다른 위치에 단전을 하나씩 더 만들도록 했다. 이런 실험의 결과 반드시 특정 위치(단전혈)에만 기를 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두개 이상의 단전을 만들 수도 있음을 알았고, 인간의 정신력(精神力)으로 만들어 제어할 수 있는 최대의 숫자가 아홉 개임을 알았다. 이후 수많은 살인속에서 인체의 경혈(經穴)을 연구한 후 창안한 것이 이 회정구전회혼마공이었다. 보통 구대혈의 위치는 상관이 없지만, 나는 백회(百會), 인당(印堂), 화개(華蓋), 단중(膻中), 기해(氣海:하단전), 양쪽 쇄골의 중부(中府), 골반 양쪽의 충문(衝門)혈에 단전을 형성했었다. 일단 구개혈에 단전이 형성되어 운기가 되면 구개혈을 중심(中心)으로 보통 때에도 끊임없는 운기(運氣)가 이루어진다. 평상시에는 전신에 걸쳐 기가 퍼져 있으며, 전신(全身) 대주천(大週天)을 할 때에야 내력이 기해(氣海:하단전)혈로 모여서 전신혈도를 순행한다. 이런 결과로 제혈(制穴)이 되지 않고 상처의 회복이 빠르며 단전이 파괴되더라도 회복하는데 문제가 없다. 반면에 싸울 때에는 일단 전신의 내력(內力)을 하나의 단전에 모아야 함으로서 상대적으로 다른 내력보다 처음 발출하는 시간이 늦는 편이지만 그 차이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일단 전신의 내력을 단전으로 모은 후 하단전 기해(氣海)혈에서 나온 진기를 아래로 움직여 석문(石門), 관원(關元), 중극(中極), 곡골(曲骨), 회음(會陰)으로 보낸 후 독맥(督脈:28개혈)인 장강(長强)으로 건너간 다음 요유(腰兪), 요양관(腰陽關), 명문(命門), 현추(懸樞), 척중(脊中) 중추(中樞), 근축(筋縮), 지양(至陽), 영태(靈台), 신도(神道), 신주(身柱), 도도(陶道), 대추 (大椎), 아문(瘂門), 풍부(風府), 뇌호(腦戶), 강간(强間), 후정(後頂), 백회(百會),전정(前頂), 은교(齦交), 신회(顖會), 상성(上星), 신정(神庭), 소료(素髎), 수구(水溝), 태단(兌端)을 끝으로 임맥(任脈:24혈)의 승장(承漿), 염천(廉泉), 천돌(天突), 선기(璇璣), 화개(華蓋), 자궁(紫宮), 옥당(玉堂), 단중(膻中), 중정(中庭), 구미(鳩尾), 거궐(巨闕), 상완(上脘), 중완(中脘), 건리(建里), 하완(下脘), 수분(水分), 신궐(神闕), 음교(陰交)를 거쳐 다시 기해로 흘러든다. 임독양맥의 타통으로 멈춤 없는 기세로 흐르며 다시 기해에서 나와 왼쪽 중부혈로 움직인 후 팔을 거쳐 손에 다다라 다시 엄지손가락 소상(少商)혈을 거쳐 맞닿은 오른쪽 엄지 소상(少商)혈을 거쳐 팔을 타고 다시 기해혈로 들어간다. 다시 기해혈을 나와 중주(中注)혈을 지나서 오른 쪽 다리를 타고 내려가 용천(湧泉)혈로 들어가 왼쪽의 용천(湧泉)혈을 따라서 올라와서 기해혈로 들어온다. 이것이 일회 대주천을 운공한 것으로 보통 이 대주천을 십이회 반복하는 것이 완전한 한번의 운기행공이다. 또한 내공심법마다 양팔·양다리의 운행순서가 조금씩 다르다. 점점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었다. 보통 운공은 호법(護法)을 세워두고 하거나 사람의 출입이 없는 곳에서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난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내공은 어떨지 모르지만 회정구전회혼마공은 운기(運氣)중에 오히려 전신 감각이 상승하여 평상시 보다 훨씬 예민해진다. 실제 십장(丈)안의 어떤 움직임도 파악할 수 있고, 백장(丈)이내의 살기(殺氣)도 감지할 수 있다. 또 단전에 내공을 모으지 않고 내력(內力)을 전신에 흩어놓음으로 해서 운공중의 중단이 자연스러웠다. 유형(有形)화된 다섯 빛깔의 적(赤)·청(靑)·황(黃)·녹(綠)·백색(白色)의 고리가 백회(百會)혈 위로 층층이 쌓여있다. 임독양맥을 뚫고 대주천을 이룩한 후 오기조원(五氣造元)에 달한 모습이었다. 운기행공(運氣行功)이 점점 더해감에 따라 다섯 개의 고리는 뭉쳐진 후에 다시 아홉 가닥의 줄기로 흩어져 구대혈 위에 위치해서 아홉 마리의 용(龍)이 또아리를 튼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적(赤)·청(靑)·황(黃)·녹(綠)·백(白)·자(紫)·홍(紅)·남(藍)·흑(黑) 빛깔의 아홉 용의 색깔과 모습은 선명(鮮明)하지 않았다. 이윽고 운공이 끝나가자 아홉용의 모습도 사라졌다. 내공이 깊어감에 따라 운공 중에 마치 유체이탈(遊體離脫)을 한 것처럼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재 내공이 육갑자(六甲子)를 넘어섰지만 아직도 부족함을 느꼈다. 다른 심법들은 현경(玄境)에 이르지 않는 한 단전에 오갑자(五甲子)이상 모을 수가 없다고 알려졌지만, 나의 내공은 육갑자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도 내공의 부족함을 느꼈다. 처음 구성(九成)에 다다라 아홉 마리의 용이 생긴 후부터 마치 유체이탈처럼 정신(精神)이 깨어나 나를 관조(觀照)할 수 있었으며 점점 그 시간도 길어지고, 벗어나 주변을 볼 수 있는 범위도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아마 내공이 구갑자(九甲子)가 되어서야 현경(玄境)의 관문인 생사현관(生死玄關)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많은 내공과 깨달음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운공을 마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가볍게 행공(行功)하듯이 나한권(羅漢拳)으로 몸을 풀었다. 한 참 몸을 풀고 있으니 날이 밝아온다. 하나 둘 사람들이 깨어나고 점점 소란스럽게 되자 멈추고 형(邢)노사를 찾아서 객방으로 다가갔다. [참고 & 설정] [1] 수라혈교(修羅血敎) : 이차(二次)마교로서 원시마교의 후예를 자처하며 후한 말-삼국시대 초(서기 200년 전후)에 주로 활동했음. 마교 멸망 후 십대천마(十代天魔) 중에서 검마(劍魔), 혈마(血魔), 태양마(太陽魔)의 후예가 주축이 되어 여러 마인(魔人)들을 결합하여 원시마교의 정통후예를 자처하면서 등장. 천강신문(天剛神門)과 봉황곡(鳳凰谷)을 멸망시켰지만 천외검문(天外劍門), 광한궁(廣寒宮), 태양곡(太陽谷)의 연합공격에 멸망했음. 이 싸움으로 인해 천외검문은 후인이 끊어졌고, 광한궁, 태양곡은 대부분의 절기가 실전(失傳)됨으로 인해서 점점 쇠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 [2] 소요문(逍遙門) : 전국(戰國)시대에 존재했었다는 일인전승(一人傳承)의 도가(道家). 후일 제 일차(一次)정마대전(正魔大戰)에서 문주가 죽음으로서 단맥됨. 후일 소요일맥의 조사동(祖師洞)이 발견되어 북명심법, 소요검(逍遙劍), 소요산보(逍遙散步)등의 무공이 발견되었지만 절반이상의 구결이 소실이 되어서 익히는 것은 불가능함. [3] 천강신문(天剛神門) : 전국(戰國)시대 말부터 후한(後漢)대까지의 정파최대의 문파. 본래 원시마교와 대항하기 위해 백 명의 고수가 모여서 형성되었음. 후일 백 명의 고수의 무공을 통합하여 천강신공(天剛神功)을 창안한 천강무종(天剛武宗)에 의해 전성기를 구가함. 봉황곡과 함께 마교를 멸망시켰지만 이후 나태함에 젖어 있다가 수라혈교의 급습에 의해 절문됨. 천강무종은 고금오대고수의 일인. ******* 제 소설에서는 생사현관(生死玄關)이 육체적인 관문이 아니라 정신(精神)적인 깨달음의 관문입니다. 내공이 아무리 많더라도 깨달음이 없다면 현경(玄境)에 오르지 못합니다. 물론 최소한의 육체적 요구조건으로 삼갑자의 내공과 임동양맥의 타통으로 전신대주천을 이룩한 자이어야 하구요. *************** 강호(江湖)의 정세(情勢) 강호(江湖)의 정세(情勢) 객잔에 아침에 모여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했다. “소(邵)소협, 내상은 좀 어떤가?” “덕분에 거의 나은 것 같습니다. 단리대협은 어떠신지요?” “예, 저는...” 단리유아의 말을 가로 막으며 형노사가, “흥, 저 놈 걱정일랑 행여 꿈에서도 생각하지 말게. 싸움에 미친 저놈이 부상을 한두 번 당했겠나? 웬만한 부상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다음날 싸울 상대를 찾아다녔던 놈인데? 어제 정도의 상처는 저 놈에겐 아침에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울 뿐이야. 어제 저녁에도 자네는 요상중이어서 못 들었겠지만 무공을 연구한다고 격공장(隔空掌)을 날려 사람들을 깨운 놈 일세.” “휴, 정말 대단하시군요. 전 밤을 꼬박 새며 요상(療傷)을 하였지만 아직 완치됐다고는 볼 수 없는데?” “이 미친 싸움꾼 녀석에게는 그것이 매일하는 일과에 불과하니 이정도 갖고 빌빌거리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런데, 형(邢)노사, 왜 저를 부를 땐 제대로 부르시면서 단리대협에게는 그렇게 부르십니까?” 이때 소석정이 단리유아를 대하는 광구신복(狂口神卜)의 말이 이상함을 느끼고, “아, 그것. 원래 이놈에게는 이 정도도 약과라네. 몇 년 전에 우연히 이놈과 만나서 억지로 싸운 적이 있는데, 싸워주는 대신 싸움이 끝난 후에는 꼭 점을 보기로 했거든. 그런데 이놈이 싸운 후에 점을 치려고 하니까 뭐라고 말한 줄 아나? 저놈 왈(曰) 자신의 운명은 아니까 점 볼 필요도 없다고 하잖나?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그래도 혹 다를 수 있으니 다시 점을 봐보자고 사정을 했지. 내가 그렇게 말하니 저놈이 자신의 운명은 삼살(三煞)을 타고났다고 하면서 점칠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사주(四柱)를 물어 점을 쳐보았지. 정말 점칠 필요가 없었더군. 저놈의 말이 맞았단 말일세. 정말 하루 내내 쓸데없는 짓을 한거지. 내가 점친 이후 처음으로 손해를 본 것이었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분통이 터지는군.” 그의 소문난 괴행(怪行)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 단리유아는 당시 그가 누구인 줄 알아차리고, 그가 일단 점을 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든지 참는다는 것을 알고는 온갖 무공 초식을 사용해 공격했다. 비록 화풀이로 두드려 맞았지만, 그런 때가 아니라면 언제 또 목숨의 위협 없이 화경(化境)의 고수와 싸워볼 기회가 있을 것인가? 광구신복(狂口神卜)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소석정이 웃으며, “하하하, 정말 재미있군요. 근데, 삼살이라면?” “아, 그건 천살(天殺), 천역(天驛), 천고(天孤)의 삼살을 말한다네. 우선, 천살(天殺)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직접이든 간접이든 무수한 생명을 없앨 운명이고, 천역(天驛)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도는 운명이라네. 마지막 천고(天孤)는 평생 외톨이의 팔자지. 자손이나 친구도 없고 설혹 누군가와 가까워지더라고 결코 좋은 결말을 볼 수 없어서 죽을 때까지 혼자일 신세지.” “흐음,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요.” 소석정의 말을 듣고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한다. “괜찮습니다. 소(邵)대협.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아, 자네도 신경 쓰지 말게. 본래 타고난 팔자가 그런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때,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화제를 돌려서 고저가 없는 무심(無心)한 목소리로 형(邢)노사에게 묻는다. “그보다 형(邢)노사. 이곳 보정부(普政府)까지 단순히 소대협이 한 비무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닐테고, 진짜 목적이 뭡니까?” “다른 목적이라고요?” 소석정이 놀라 소리치는 소리에 형노사가 헛기침을 하면서, “흠. 흠. 그 자식 눈치 한 번 빠르네. 저 놈 말대로 다른 이유도 있었지. 자네들도 알다시피 당(唐)나라 말엽부터 지금까지 거의 일갑자 동안 천하가 전란에 휩싸여 어지러웠지. 땅을 버리고 유민이 된 자가 해마다 수만 명에 이르고, 일년에도 수십 번의 대소전투가 벌어져 조용할 날이 없었지. 비록 이제 송(宋)이 들어서 통일의 조짐이 보인다지만, 아직도 남당(南唐:江西·安徽·福建일대)·오월(吳越:浙江지역)·형남(荊南,또는南平)·북한(北漢:山西일대)등 여러 나라가 존립해 있어서 하나로 통일이 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걸세. 강호(江湖)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수많은 문파들이 세력이나 이권을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싸우고 있지. 절대강자가 없으니 한마디로 군웅이 난립(亂立)한 상태지. 그래서 이번에 몇몇 뜻있는 문파와 인사들이 모여서 무림맹(武林盟)을 창설하려고 한다네.” “아무리 그렇다고....” “문론 그뿐만이 아니지. 최근에 청해(靑海) 혈수미교(血修彌敎)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지. 또 혈련마교(血蓮魔敎)가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네. 그래서 세력을 모을 필요가 있지.” “그렇다 해도 단지 소문일 뿐이지 않습니까?” “아니네, 혈수미교에 백년 만에 새로운 대종사(大宗師)가 나타났다네.” 형노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형노사,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래, 이 싸움꾼아, 왜? 사실이라면 찾아가 싸우기라도 할 작정이냐?” 형(邢)노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말끝을 흐리며, “.... 정말이라면.... 찾아가....” “흥! 네가 찾아가 준다고 상대나 해줄 것 같으냐? 밑에 있는 놈들이나 보내서 죽이려 들텐데.” “그래도....”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을 못할까? 네 맘대로 해봐라. 이 미친놈아.” 형노사가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흥분해서 소리를 지른다. 옆에서 소석정이 말리며, “형(邢)노사, 진정하십시오. 설마 진짜로 혼자 찾아가겠습니까?” “흥! 원체 저놈이 제정신이어야지. 원....” 소석정이 형노사의 말을 끊어서, “형노사, 그보다 혈련마교가 다시 활동한다니 사실입니까?” “음, 원래 혈수미교(血修彌敎)보다 혈련마교(血蓮魔敎)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무림맹을 만들려고 한 것이라네. 혈련마교는 삼백년 전에 사라진 이후 강호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는데, 최근 기련산(祁連山) 부근에서 혈련마교의 인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하네.” “형노사. 제가 알기론 삼백년 전에 교주령(敎主令)인 혈련마경(血蓮魔鏡)이 분실된 후에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래, 당시 무영비도(無影秘盜)가 혈련마교에서 무공비급하고 혈련마경을 훔친 이후 거의 봉문 상태였었지. 결국엔 무영비도를 붙잡았지만 그땐 이미 그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그 이후로 혈련마교는 혈련마경을 찾기 위해 삼백년 동안 강호를 헤맸었지.” 삼백년 전 무영비도(無影秘盜)는 혈련마교에 잠입해서 마라혈경(魔羅血經)과 혈련마경(血蓮魔鏡)을 교주의 처소에서 훔쳐낼 수 있었지만 곧 발각돼서 끝없는 추적을 받았다. 원래 혈련마경은 교주령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마공(魔功)을 익힌 자에게는 더 없는 보물로서 혈련마경을 쥐고 연공하면 손쉽게 마공을 연마할 수 있었다. 또 마경 자체에는 최혼(催魂)의 효과가 있어서 마경을 비추고 섭혼술(攝魂術)을 펼치면 보통의 정력(定力)으로 결코 깨드릴 수 없었다. 무영비도(無影秘盜)가 물건을 훔쳐내서 달아났지만, 결코 혈련마교의 추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달아나는 것을 포기한 무영비도는 당시 고금오대고수의 일인이었던 무상대선사(無上大禪師)의 손에 혈련마경(血蓮魔鏡)이 들어가도록 손을 썼다. 또한 마라혈경(魔羅血經)은 겉표지를 뜯어내고 오래된 불경 속에 끼워 넣어서 알아보기 어렵게 한 후에 고서들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 설사 발견되더라도 불심 깊은 승려이거나 현인이 얻을 수 있도록 해서 마경(魔經)과 자신의 장보고(藏寶庫)의 위치를 그린 지도가 악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한 것이다. 무영비도도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다른 수를 썼겠지만 추적의 손길이 다다른 상태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혈련마경을 얻은 무상대선사는 마경(魔鏡)의 마기(魔氣)를 제압해서 누구의 손길에도 닿지 않는 장소에 봉인(封印)시켜 두었다. 또한 혈련마교에 찾아가 교주와 마경을 놓고 대결을 벌여서 이긴 후에,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강호(江湖)활동을 중단하고 봉문하도록 조치했다. 그 일 이후로 혈련마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삼백여 년 동안 봉문하면서 마경을 찾기 위한 소수의 인물들만을 제외하고 강호에 나올 수가 없었다. 마라혈경이 숨겨진 불경은 후일 남궁세가(南宮世家)에 들어갔지만, 읽는 사람이 없었고 또 세월이 흐르자 너무 낡아서 폐서고(廢書庫)에 쳐 박힌 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시일이 지나 단리유아(段俚唯我-본명:남궁한상(南宮寒霜))가 어린 시절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독서에 빠져서 폐서고에서 찾게 되기 전까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 비록 귀퉁이는 썩고, 곰팡이가 슬고 또 글자들 색도 빛바래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한정되었지만. “그렇다면 마경(魔鏡)을 찾았단 말입니까? 형노사?” 듣고 있던 소석정이 형노사에게 물었다. “글쎄, 나도 적확히는 모르지만 찾은 것이 확실해 보이더군. 원래 무림맹(武林盟) 결성에 반대하던 소림(少林)이 적극 찬동하고 나선 것을 보면 봉인 중이었던 마경을 잃어버린 것 같단 말일세” “그럼 곧 제 삼차(三次)정마대전(正魔大戰)이 일어난다는 소리군요.” “그렇게 될 공산이 크네. 그래서 강호의 분쟁을 막고 마교를 견제하기 위해서 무림맹을 만들기로 했지. 원래 이 근처의 방파들을 포섭하고 고수들을 영입하기 위해 내가 온 거라네. 더구나 자네가 도마(刀魔)의 무공을 사용한다니 우리로서는 우선 자네를 회유하거나 최소한 마교에 협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네를 찾아야만 했지.” 형노사의 말을 듣고 소석정이, “그럼 제가 마교에 협력하기라도 한다면 어쩌려고 했습니까? 형노사.” “우리에겐 선택할 수단이 별로 없었네. 솔직히 자네가 마교로 넘어간다면 합공을 해서라도 제거하려고 했지. 그러나 자네를 만나보니 마교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여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네.” “솔직히 제 무공이 십대천마의 일인이었던 도마의 지옥참마도법에서 기원했다고 할 수 있지만, 혈련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또, 사술(邪術)이나 마공(魔功)에 치우친 혈련마교에는 협력할 생각도 없습니다.” 듣고 있던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감정이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소대협, 사실 일·이차 마교와 혈련마교는 거의 연관성이 없습니다. 물론 일부의 고수와 무공이 흘러들어 간 것은 사실이지만 주류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또 혈련마교는 서장(西藏)의 밀교(密敎)와 배교(拜敎)의 영향이 훨씬 커서 이전의 마교와는 완전히 다르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원시마교(原始魔敎)나 수라혈교(修羅血敎)가 마교라고 불리었지만 대부분 무공자체는 그리 사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혈련마교는 사악한 대법(大法)이나 사술(邪術)이 무공의 주가 되어있습니다. 또 지위의 구성 면에서도 따로 제사장(祭司長)이 있어서 원래 교주(敎主)아래의 이인자이지만, 실제 모든 사술과 대법, 의식을 주제(主祭)하니 실제적인 마교의 주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흠, 싸움꾼의 말이 맞네. 무공은 교주가 높지만 실질적인 권한을 따져보면 제사장의 세력이 더 크지.” 단리유아가 느끼기에 확실히 혈수미교도 문제지만 혈련마교가 교주령인 혈련마경을 되찾았다면 혈련마교의 강호행은 가까운 시일 내에 현실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점점 더 강호가 어지러워져 가는 것을 느꼈다. 형노사를 향해서, “형노사, 무림맹을 결성한다고 했는데 누구누구가 참여했는지 아십니까?” “우선 강호십대고수(江湖十大高手) 중에서 일성(一聖)과 이왕(二王)중의 도왕(刀王), 사광(四狂)중에서 색광(色狂)과 나, 주광(酒狂)이 참여했다네. 자네 싸움꾼도 가맹할 생각이 없나? 어제 자네의 무공정도를 보니 무상(武相)이나 전투집단의 총령(總領)을 맡아도 무리가 없어 보이던데? 그리고 소소협, 자네도 가맹하는 게 어떻겠는가?” 단리유아가 형노사의 가맹을 바라는 물음에, “형노사, 저는 그런 단체에 가맹할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또 제 성격상 그런 자리는 어울리지도 않고, 저는 상대를 찾아 천하(天下)를 유랑(流浪)하는 이런 삶을 포기하기 싫군요. 사광의 나머지 분들께도 죄송하지만, 저를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 대신에 여기 소대협이 그런 자리를 맡는 것이 더 어울릴 겁니다. 무공도 충분하고 성품도 무난하니....” “형노사, 저도 함께하고 싶지만 솔직히 지금은 비무행(比武行)을 더하고 싶은 마음이 크군요.” 두 사람 모두 거절하는 소리에 형노사가 소석정을 바라보고, “그런가? 싸움꾼은 성격상 원래 함께하지 않을 거라고 어느 정도 생각했지만 자네는 정말 가맹할 생각이 없나? 지금 당장 가맹할 필요는 없다네. 내년 원단(元旦)을 지나 보름에 낙양(洛陽)에서 모여 구체적인 결맹의 세부사항을 정하기로 했으니 빨라야 삼·사월은 돼야 정식으로 출범할 것이네. 그러니 다음해 유월 정도까지는 여유가 좀 있다네.” “그렇습니까? 그럼 비무행을 계속하다가 내년 유월 안에 맹으로 찾아가기로 하지요.” 소석정이 잠시 생각하다가 승낙하는 말을 하자 형노사가 웃으며, “하하하, 정말인가? 자네 같은 고수가 참가한다면 나야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정말 고맙네. 하하하, 잊지 말고 늦어도 내년 유월까진 맹을 찾아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형노사.” 요동마도가 참가한다면 분명 전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강호십대고수 중에서 다섯 사람이 함께한다고 해도 절정이상 가는 고수들의 전체 수에 있어서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이니, 당장 십대고수와 맞겨룰 만한 실력의 고수의 가입은 큰 보탬이 될 것이다. 현(現) 강호십대고수(江湖十大高手)는 일성(一聖) : 무성(武聖) 종리현도(鍾離弦渡), 이왕(二王) :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독왕(毒王) 천중리(千仲理), 삼마(三魔) : 검마(劍魔) 진일명(陳一命),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 잔결마(殘缺魔) 수삼결(首三缺), 사광(四狂) : 전광(戰狂) 단리유아(段俚唯我), 복광(卜狂) 형우초(邢佑苕), 주광(酒狂) 만리비개(萬里飛丐), 색광(色狂) 종추완(宗秋玩)이다. 이중에서 무성과 도왕은 정파의 명숙이랄 수 있으며, 독왕과 삼마는 마도를 대표하는 마인들이었다. 사광은 정사를 따지지 않지만 아무래도 정파 쪽에 가까웠다. 형노사의 기뻐하는 소리를 듣고 있던 단리유아가 잠시 후에 형노사에게, “형노사, 맹의 결성을 주도한 문파는 어느 곳입니까?” “흠, 우선 소림(少林), 무당(武堂), 화산(華山), 청성(靑城), 아미(蛾眉), 개방(丐幇)의 오파일방(五派一幇)과 칠대세가(七大世家), 그리고 약왕곡(藥王谷)과 무외신궁(無畏神宮)이 창맹을 발기했다네.” 그러면 정파의 핵심세력은 거의 참여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세속의 일에 끼어들지 않던 약왕곡과 무외신궁이 가맹한다는 것은 단리유아에게도 약간 의외였다. 아마 무성의 영향력 때문인 것 같았는데, 무외신궁은 그 자신이 태상궁주였고 또 예부터 약왕곡과는 친분이 두터웠었다. 중원의 주요 방파. 오파일방(五派一幇) : 소림(少林), 무당(武堂), 화산(華山), 청성(靑城), 아미(蛾眉), 개방(丐幇). 칠대세가(七大世家) : 사천(四川)당가(唐家), 융중(隆仲)제갈세가(諸葛世家), 하북(河北)팽가(彭家), 진주(晋州)언가(彦家), 금릉(金陵:남경)남궁세가(南宮世家), 장사(長沙)공야세가(公冶世家), 고소(姑蘇)모용세가(慕容世家). 일궁(一宮), 이곡(二谷), 삼보(三堡), 사장(四莊) : 일궁(一宮) 무외신궁(無畏神宮), 이곡(二谷) 천독곡(千毒谷), 약왕곡(藥王谷), 삼보(三堡) 철기보(鐵騎堡), 사자보(獅子堡), 금응보(金鷹堡), 사장(四莊) 귀장(鬼莊), 백화장(百花莊), 만금장(萬金莊), 절검산장(絶劍山莊).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형노사에게, “그럼 나머지 세력들은?” “우선 세력이 강한 곳은 나 같은 강호명숙이 직접 찾아가 회유하기로 했고, 나머지 중소세력은 후일 창맹 시에 정식으로 배첩을 전달해서 가입을 재촉할 생각일세. 또 주변에 세력을 이루지 않고 홀로 독행하는 고수들의 포섭도 포함돼 있다네. 직접 방문해서 가맹을 촉구할 문파는 우선 오악검파(五嶽劍派)의 나머지 사파(四派), 삼보(三堡), 사장(四莊)중의 백화장(百花莊), 만금장(萬金莊) 또 보타암(菩陀庵), 해남검파(海南劍派), 검각(劍閣)등이지. 아마 거의 가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형노사의 말을 듣고 단리유아가 생각해보니, 일궁, 이곡, 삼보, 사장 중에서 일곱 개의 문파가 가입하여 정파의 주요세력은 거의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만일 정파에서 이처럼 결맹하여 무림맹을 만든다면 마도, 사파의 여러 문파도 역시 생존(生存)을 위해서라도 모여서 대항할 단체를 만들게 될 것이고 점점 강호의 싸움이 정·사파의 대결구도로 바뀌게 될 것 같았다. 단리유아의 생각에는 꼭 결맹을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비록 세외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라지만 이러면 오히려 싸움판만 커진 것으로 오히려 무고한 희생자만 늘리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소석정이 형노사의 말을 듣고 감탄하며, “정말, 정도(正道)의 대문파들은 거의 다 망라했군요.”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형노사에게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형노사, 그렇게 정도 문파들이 결맹한다면 사파에서도 조용하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오히려 싸움이 커지기만 할 것 같습니다.” “흠흠, 싸움꾼, 네놈의 말이 맞아. 그렇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불이라도 꺼야하니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의 상황일세. 사파의 결맹을 막으면 좋겠지만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 아마 불가능하겠지. 다만 시기라도 늦추어지기를 바라고 최소한 마교와의 싸움에서는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 정도를 바래야겠지. 그들도 세외세력(世外勢力)이 주축이 되어서 형성된 혈련마교와의 싸움에는 동참하지 않겠나?” “그렇지만....” 형노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말을 이으려다 말았다. 단리유아의 생각에는 그들이 같은 중원인(中原人)이라고 마교와의 싸움에 동참하기를 바란다는 너무 상황을 낙관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디에서나 소외세력은 있으며, 특히 정파와의 팽팽한 대치 상황 하에서 연합하여 마교를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오히려 무림맹의 세력이 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었다. 혹시라도 암중(暗中)에 마교와 맹약(盟約)을 맺거나 연합하여, 마교를 상대하기 전이나 후에 뒤통수를 친다면 정파 멸망의 지름길이 되고 마도천하가 될 것으로 보였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흔들며 속으로, ‘휴우, 생각하지 말자. 무림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무슨 상관인가? 저 잘났다고 나설 인물이 한 두명도 아닌데, 머리로는 천하제일이라는 제갈세가도 있고.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강해질 방법만이 필요하지, 누가 천하를 제패하든 상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어차피 세외로 몇 년간 나가기로 했으니 그 동안 대충 싸움이 끝나겠지.’ 생각을 멈추고 다시 형노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먼저 여기서 가까운 항산파(恒山派)를 찾아가겠군요. 형노사” “그럴 작정이네. 여기 소소협도 만나봤으니 내가 맡은 지역에서는 항산파만 찾아가면 되겠지?” 다시 소석정에게 일정을 물었다. “그럼 소대협, 소대협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아, 저는 계속 비무하며 남하해서, 한단성(邯鄲城)에서 산서성(山西省) 쪽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단리대협은 어디로 가시는지요? 방향이 같다면 같이 동행하십시다.” “죄송하게 됐군요. 저는 시월 말까지 남경에 도착해야 해서, 배를 타기 위해 가까운 창주(滄州)쪽으로 향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형노사가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나서, “흠, 시월 말까지라면 시간이 촉박할 것 같은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단지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래도 서둘러야 할 걸세. 때가 때이다 보니 운하에 배들이 제대로 다니기 힘들다네. 수적에다, 송나라가 형남이나 남당과 대치중이어서 통행하기가 쉽지 않다네. 곳곳에 통행이 금지된 곳도 있고.” “형노사 말씀대로 서둘러야 하겠군요. 소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노사” “그 정도 가지고 뭘. 식사도 마친 것 같으니 다들 출발하세. 자네는 동문 쪽으로, 소소협은 남문 쪽으로, 이 늙은이는 북문 쪽으로 가야겠군. 자네들 먼저가게, 다시들 만날 때까지 몸 건강하고.” “그럼, 다음에 뵙지요. 형노사, 단리대협도.” “예, 소대협도 장도에 무난하기를. 형노사,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시길.” 포권을 하고 돌아서 각각의 방향으로 출발했다. 형노사는 단리유아 자신이 강호행(江湖行)에 만난 몇 안돼는 지인(知人)중에 하나였다. 비록 말하는 것은 험악하고 걸지만 그 안에 담긴 정(情)을 자신이 어찌 모르겠는가? 운명이 박(薄)하여 망년지우는 되지 못하겠지만 믿을 수 있는 동료이상은 될 것이다. 소대협도 곧 천하(天下)에 웅명을 드날릴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쉽게 믿으니 그 앞날이 걱정이었다.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됀 사람의 말을 믿고 가맹하다니. 강호란 얼마나 험한 곳인가? 면전(面前)에서는 웃으며 얘기하다가도 돌아서면 등에 비수를 꽂을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휴, 모든 것이 자신의 운(運)과 명(命)에 달렸겠지. 나도 갈 길은 멀고, 남은 날은 적으니 어서 서둘러야겠지. ************** 정도쪽의 대문파는 몇 개를 제외하고는 다 나왔군요. 사파쪽은 다음 기회에 여기에 나온 사파와 추가하여 나열하도록 하지요. 이외에 몇 개의 살수문파, 강호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신비방파 몇 개 정도가 더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이야기 전체를 이루어가는 대문파들이고 그 외의 중소문파는 상황에 따라 등장시키겠습니다. 어떤 분이 구파일방은 왜 않나오냐고 물어보신다면 아직 구파의 전성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겠군요. 현 시점에서 구파의 나머지(곤륜,공동,점창,종남)는 존재하지만 세력이 미미한 중소문파 정도입니다. 현 시점에서는 칠대세가의 전성기입니다. 이후 점점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 벼락쳐라 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하북팽가(河北彭家) 하북팽가(河北彭家) 1 동문을 나와 남동쪽 고양(高陽)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고양을 지나서 하간(河間), 부양하(滏陽河)를 건너 창주(滄州)까지 수백 리의 길을 갈려면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적어도 하간까지는 오늘 안에 도착해야겠다. 특별히 높은 산이 없이 구릉지대와 낮은 야산이 가끔 보일 뿐 대부분이 드넓은 평야여서 인적이 드문 곳이 없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계속 신법을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다 밤새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걸으며 아까 들었던 무림맹(武林盟)의 창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만, 역시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가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됐다. 지금의 강호(江湖)는 수많은 정파, 사파가 난립한 형상으로 크고 작은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각대문파는 세력팽창의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세력을 더 팽창한다면 필히 인접한 다른 대문파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데, 명색이 정도를 표방하는 문파들끼리 명분 없이 싸울 수는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무림맹을 만들어 우선 서로간의 세력충돌을 방지하고, 경계내의 사파세력을 밀어내고 중소문파를 흡수하고자 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창맹 목적을 혈수미교와 혈련마교를 상대하기 위하여 라고 밝히고 있지만 조금만 생각이 있는 자라면 실상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파의 인물들이 다 바보는 아닌 이상, 중소문파에 인물이 아예 없지 않은 이상에는 그 진의(眞意)를 몰라서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 세력을 모으지 않을 수 없고, 강호는 더욱더 큰 세력간의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강호는 더욱 큰 싸움과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떨치고 어제 생각했던 천애구검(天涯九劍)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했다. 제 삼초인 천애유성간(天涯流星干)의 문제점은 하루 이틀 내에 해결할 수 없고, 여러 구결을 오랜 시간에 걸쳐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제 이초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초식은 폭발 방향에 문제점이 있었다. 검강(劍剛)을 원형으로 만들어 회전시킨 후 날려서, 상대의 공격과 부딪히면 원심력(遠心力)에 의해 폭발된 강기가 사방으로 폭사되는 이 초식은 시전자가 폭발지점에 가까운 오 장(丈) 이내에 있을 때 터진다면 자신도 완전히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 어제 저녁에 검강을 제어하면서 신법을 펼쳐 피하는 방법과 원심력를 조절하는 제어력에 대한 방법을 생각해봤었지. 우선 첫 번째 신법으로 이동하면서 검강(劍剛)을 제어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반적인 검강이라면 신법을 펼치면서도 검강을 날릴 수 있겠지만,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은 검강의 원심력을 조절하고 제어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았다. 터지는 순간 바로 신법을 펼쳐 물러설까? 검을 빼들고 검강을 최소한으로 형성한 다음 오장(丈) 앞 땅바닥을 향해 날렸다. 우선 터지는 순간 물러나 보자. “꽈꽝” “으악” 인적 드문 관도에 몇 사람이 총총히 지나가다 갑자기 땅이 파이고 돌이 날리는 폭발이 일어나자 비명을 지르며 땅에 엎드렸다. 폭발지점에서 십여 장(丈) 떨어진 반대쪽 편에서 오고 있던 사람은 너무 놀란 나머지 바지 사이로 오물을 흘러내리며 선채로 기절해 버렸다. 신법을 펼쳐 이장 뒤로 물러나다가 폭발소리와 함께 비명을 듣고 나서야 인적이 드물긴 하지만 여기가 사람이 지나다니는 관도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주변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여기저기 엎드려 벌벌 떨며 천신님, 지신님, 조상님을 외치는 소리와 선 채로 기절한 사람을. 아무리 검강(劍剛)을 최소화했다고 해도 백 년 이상의 내공(內功)이 모인 것이 폭발했으니 그 여파(餘波)는 적지 않았다. 일 장(丈) 이상 넓이의 구덩이가 패이고 십여 장(丈) 밖에까지 돌조각과 먼지들을 날려 보냈다. 갑작스런 폭발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히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은.... 길을 가던 사람이 갑자기 칼을 뽑는 것만을 보고도 놀라서 멈췄는데, 갑자기 검강을 날려 폭발을 일으킨다면.... 충격으로 심장이 멈추지 않은 것도 다행일 것이다. 사태를 알아차리고 기절한 사람에게 다가가 추궁과혈을 하여 깨어나게 했다. 깨어나자마자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을 붙들어 진정시킨 후에, 구덩이를 대충 메꾸어 놓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휴, 또 실수했군. 무공만 생각하면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니 천생 무공광(武功狂)이군.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 펼쳐야겠다. 낮지만 그래도 산인 것을 나타내듯이 울창한 수림(樹林)이 뒤덮인 곳으로 들어갔다. 산길을 통해 걸어가며 다시 한번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을 펼치며 신법으로 삼 장(丈) 밖으로 물러섰다. 좀 전에 땅바닥에 펼친 것을 보니 강기(剛氣)가 사방으로 폭사되지 않은 것을 보고, 이 번에는 전방에 보이는 어른 허리높이의 바위를 향해서 초식을 펼쳤다. 폭발과 함께 돌조각이 튀어 사방으로 날리고, 강기도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흠, 폭발과 동시에 물러난 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군. 주변의 여파를 보고 옷차림을 보니 삼장 밖으로 물러나기 전에 어느 정도의 충격이 미친 것 같았다. 역시 이것도 연습이 필요했다. 실제 검강이 폭발한다면 이보다는 훨씬 여파가 클테니 적어도 폭발과 함께 오장이상 물러나야 했다. 뒤쪽으로만 물러날 것이 아니라 좌우로 물러나는 것이 시야가 넓어져 상황파악에 더 도움이 되고 이후의 공격에도 유리할 것이다. 좌우로 움직이는 것도 연구해야겠다. 신법을 펼쳐 피하는 것이 완전해지면 다음에는 신법을 펼쳐 움직이면서 초식을 펼쳐 보아야겠지. 한 사람이 산 속을 걸으며 무공(武功)을 펼친다. “꽝!” 다시 조금 후에, “꽝!” 새들은 놀라 날아오르고, 산속의 동물들은 놀라 달아나며 보금자리로 돌아가 숨었다. 유민(流民)이 되어 떠돌다 산 속에서 강도가 되어 물건을 털던 도적(盜賊)들도 놀라 움직임을 멈추고 자리를 피했다. “제기랄, 할 일도 더럽게도 없는 놈이군. 남은 굶주림에 지쳐 이런 짓이라도 하는데. 저 놈은 아무도 없는데도 저런 짓거리라니..... 내가 무공만 익혔어도.....” “그러게 말일세. 정말 재수 옴 붙었군. 오늘은 건질게 아무것도 없겠구만. 저런 소리에 누가 근처를 지나가겠나?” “저런 미친놈이 하필 이곳을 지날게 뭐야? 젠장!” “어서 가세.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잘못해서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곱게 죽지는 못할걸세.” “제기랄. 지니고 있는 은자(銀子)라도 아니 하다못해 먹을 것이라도 뺏는다면 남은 식구들이 오늘만이라도 배부르게 지낼텐데. 저 미친놈 때문에....” 천하에 유민이 들끓으니 이런 조그만 야산(野山)에도 도적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 갑자가 넘는 세월동안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亂立)하면서 관부는 토벌(討伐)할 힘도 없었고 설사 있더라도 이런 도적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겼다가 다음날이면 다른 나라에 무너지는 혼란한 시절이었으니, 세금과 부역을 피해서 힘없는 수많은 백성들이 유민이 되었다. 이런 유민 중에서 산속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화전(火田)을 일구거나 산적(山賊), 수적(水賊)같은 도적이 되기도 했으며 대읍(大邑)의 빈민가로 흘러들거나 지방의 호족(豪族)이나 세력가(勢力家)들의 하인으로 전락(顚落)하기도 했다. 그런 세상이었으니 이런 야산에도 몇 명 되지 않지만 도적이 생긴 것일 것이다. 도적들도 숨어버린 산중(山中)으로 무공을 펼치며 지나간다. 멀리서 보는 사람마다 미친놈이라고 떠들지만 오직 자신만의 수련(修練)에 빠져 주변을 살피지 않고 지나갔다. 얼마가 지났을까? 문득 생각에서 깨어나 보니, 주위가 어두워져 벌써 한밤인데 어디가 어디인줄 모르겠다. 날이 밝아 방향을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야숙(野宿)이라도 해야겠다. 널찍한 공터를 찾아 앉으며 육포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신법을 펼치면서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을 시전하는 것도 성공했으니 오늘 밤에는 익숙해 질 때가지 연습하고 시간이 된다면 회전력이 가미된 검강(劍剛)의 폭발 방향을 제어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겠다. 밤새도록 야산(野山)의 중턱에선 무언가 터지고, 부러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온 산의 다른 동물들도 잠들지 못한 하룻밤이 지나고, 어둠이 옅어져 주변이 희미하게 보이는 새벽에야 되서 조용해졌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연공해서 초식의 단점을 없앴다. 회전력을 제어해서 폭발방향을 바꾸는 것은 특정부분의 회전력을 줄여야 했기에 파괴력이 너무 약해졌다. 그래서 아예 이것을 빼내 새로운 초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수(下手)들에게 쓰면 괜찮은 수법(手法)일 것이다. 내공소모도 거의 없고, 검강(劍剛)의 위력을 보여준다면 귀찮음도 막아줄테니. 검강의 회전력을 제어하는 것을 연구하면서 다른 무공에도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어검술(御劍術)에 한발 다가선 것 같았다. 비록 십장(丈) 이내로 아직 자유로운 전환은 무리지만 어검술에 대한 기초는 마련했다고 볼 수 있었다. 계속 수련(修練)을 하여 범위도 넓히고, 제어력을 높여서 허공중의 변환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면 수어검(手御劍)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현경(玄境)의 문턱에 한걸음 더 다가선 것이 되겠지. 하룻밤을 꼬박세자 단리유아도 아침은 제대로 먹고 싶어서 신법을 최대한으로 펼쳐 앞으로 나갔다. 신법을 펼쳐 동남향으로 향한지 반 시진(半時辰), 멀리 현성이 보였다. 하간현(河間縣)인 것 같았다. 일 리 정도의 거리가 남았을 때, 신법을 멈추고 걸어서 양쪽으로 늘어선 집들 사이의 큰 길을 따라 현(縣)내로 접어들었다. 이른 아침이어서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지만, 가게의 문을 열거나 청소를 하는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문을 열고 청소하는 객점(客店)을 찾아서 들어갔다. 청소하던 점소이가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지만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 탁자에 앉았다. 잠시 후 점소이가 다가오자 요리를 시키고 기다리면서, 먼저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있으니, 위층에서 한사람, 한사람 내려오며 탁자에 앉아 주문을 한다. 이른 아침에 내려온 것을 보니 표국(驃局)에서 일하는 사람들 같았다. 십여 명의 사람이 앉아서 음식을 먹으며 떠드니 시장터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떠들썩했다. 편히 앉아서 음식을 즐기며 먹기는 그른 것 같았다. 단리유아가 식사를 마친 후에 차를 시키고 기다릴 때, 한 사람이 다가와 포권하며 말한다. “형장(兄丈), 잠깐 자리에 앉아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단리유아가 얼굴을 보니 삼십대의 구레나룻이 무성한 보통 키의 사내였다. 허리에 도(刀)를 차고 있었지만 특별히 인상이 남는 얼굴은 아니었다. 저 쪽에 다른 사람들과 앉아 식사하면서 자꾸 쳐다보기에 이상해서 한 번 보았지만, 모르는 사람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었다. 혹시나 자신을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일어나 마주 인사하며 말했다. “우선 앉으시지요. 그런데 노형(老兄)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제가 소문으로 들었던 분과 비슷해 보여서 이렇게 인사나 하려고 왔습니다. 저는 팽가(彭家)의 팽수문(彭秀文)이라고 합니다.” 팽가의 팽수문이라면 팽가의 수재(秀才)로, 자신의 삼도(三刀)를 막는 자만을 친구(親舊)로 대접한다고 해서 명호(名號)는 삼도친행(三刀親行)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리유아가 수련하기 전에 소문만 몇 번 들었지 직접 만난적은 없었다. 단리유아가 수련을 위해 은거하기 삼년 전에 강호에 나왔으니 서른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의 문파(門派)에서는 약관(弱冠)이 지나야 출도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팽가의 삼도친행이라 불리는 분이군요. 저는 단리유아(段俚唯我)라고 합니다.” 단리유아의 무감정한 목소리에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얼굴표정을 바꾸고, “역시, 소문에 듣고 혹시나 했는데 정말 전광(戰狂) 단리대협이시군요. 꼭 만나 뵙고 싶었었는데 이제야 뵙게 되었군요.” “저도 이렇게 팽대협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런데 소문이라면?” “이틀 전에 보정부(普政府) 밖에서 요동마도와 대결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한 목소리로, “겨우 이틀 전인데 벌써 소문이 났나 보군요.” 강호의 소문이 빠름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단리유아의 변함없는 무표정과 높낮이가 일정한 목소리에 팽수문이 속으로, ‘이 사람이 과연 감정이 있는 사람일까? 어떻게 다른 사람이 말하는데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고 동요도 없지? 원래부터 이런 것인가? 소문에 대충 듣기는 했었지만, 실제 마주보고 얘기해보니 정말 껄끄럽고 거북하군.’ 잠시 생각하다가 팽수문이, “저희도 정주(定州:하남성 정주와 다름) 정원사(井元寺)에 표물(驃物)을 전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어제 보정부에서 온 사람과 만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어제 보정부를 떠났습니다만?” “소식을 전해준 분이 개방의 십목개(十目丐)입니다. 그저께 대결을 직접 보셨답니다.” 십목개는 개방의 하북분타주(分舵主)로 삼결(三結)의 인물로 소식에 정통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표행에 동행하다니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원래 하북팽가에서 북하표국(北河驃局)이라는 표국을 운영하고 있지만, 중요한 일이 아니면 직접 본가(本家)에서 고수가 나와 표행을 따라가지 않았다. 단리유아의 계속되는 무감정한 목소리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단리유아의 물음에, “원래 조부님의 서찰(書札)을 정원사 주지이신 관정대사(觀井大師)님에게 전해주고 다른 물건을 받아오는 길이었지요.” 관정대사라면 원래 오대파(五臺派)의 인물이었지만, 장문인 직을 버리고 조그마한 정원사의 주지로 들어가 버린 사람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원래 오대파의 최고고수였던 고승(高僧)이었다. 단리유아가 생각해보니 표행 인원이 십여 명에 불과한데도 팽가의 사람이 따라간 것이 궁금했다. 관정대사가 전해준 것이 보통 평범한 물건이 아닌 모양이었다. 약간 궁금해서 팽수문에게, “그러시군요. 혹시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약간 당황과 함께 난처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원래 말씀드려야겠지만 저도 정확한 내용을 몰라서.” “아닙니다. 원래 표물(驃物)에 대해 묻는 것은 금기(禁忌)시 되는데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단리대협께서는 어디로 가시는지요? 바쁘시지 않다면 본가가 있는 창주(滄州)로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팽수문의 동행요청에 잠시 생각해보다가, “저도 마침 창주(滄州)로 가지만 급하게 남경(南京)에 가야해서 팽가에 머물 수가 없겠습니다.” “제 조부님께서 전부터 꼭 만나보길 원하시던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팽형 말씀대로 저도 도왕(刀王)어르신을 만나고 싶지만 남경행의 시간이 촉박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휴우, 정말 뵙고 싶어하시던데....” “저, 형님. 이야기 중에 끼어들어 죄송하지만, 창주(滄州)로 가신다면 배를 타고 남경까지 가시려나본데, 저희 표국에 속한 배를 타고 가신다면 시일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지켜보던 두 명의 약관을 지난 지 얼마 안돼 보이는 두 청년 중에서 더 어려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하하하, 그런 수가 있었군. 좋은 생각이구나, 수호(秀湖)야. 어떻습니까, 단리대협? 배를 타고 남경에 간다고 해도 포구(浦口)마다 내려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겠지만, 저희 표국의 배를 타고 가신다면 지체됨이 없어 십여 일은 줄일 수 있을 겁니다.” 팽수문의 제안에 잠시 생각해보다가 그렇게 한다면 며칠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한 목소리로,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저도 팽(彭)노선배님을 뵙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는, 팽수문이 속으로는 정말 함께 가고 싶은지 의문을 느꼈지만 그동안의 소문대로 천성이려니 하고 생각하고, “정말 잘됐습니다. 조부님도 뵙고 싶어 했지만 가문의 다른 사람들, 특히 여기 이런 젊은 녀석들은 만나 뵙기를 학수고대했지요. 여기 이 꾀주머니가 막내아우인 수호(秀湖)이고 저 애가 그 위인 수표(秀彪)입니다. 이 녀석들아, 어서 인사 여쭙지 않고 뭘 하느냐?” “팽수표입니다.” “팽수호입니다. 정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리대협.” 팽수문의 소개에 인사하는 팽수호, 팽수표에게 단리유아도 역시나 무심한 어조로, “단리유아입니다.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포권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비록 단리유아의 나이가 비록 스물둘이지만 강호를 떠돈 지는 벌써 십이 년이니 그들보다는 까마득한 선배랄 수 있었다. 그들이 한참 귀여움 받고 재롱을 떨 때 강호행을 시작했으니.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우상시 되어있었다. 한동안 서로 얘기하다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단리유아가 표행을 보니 두 말이 이끄는 마차(馬車) 하나에 십칠 명의 표사에 불과했다. 팽가의 삼행제와 함께 밖으로 나가니 빈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서로 말을 탄 후에 동쪽으로 거리를 지나 출발했다. [참조 & 설정] 하북팽가(河北彭家) : 칠대세가(七大世家)의 하나로서 하북성(河北省) 북동부와 산동성(山東省) 북부가 주 세력권. 도법(刀法)으로 유명하며 강호십대고수 중 전대가주인 도왕(刀王)이 있음. 칠대세가 대부분은 삼국(三國)시대와 오호육국(五胡十六國)의 혼란기에 형성돼서 이후 강호의 주요문파가 되었음. 하북팽가(河北彭家) 하북팽가(河北彭家) 2 표행을 따라 창주(滄州) 방면으로 출발했다. 표두로 보이는 두 사람이 선두에 서고, 나머지 표사가 둘로 나누어 마차를 따라 달렸다. 팽가 삼형제와 함께 뒤쪽에서 표행을 따라갔다. 전부 말을 타고 가니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님에도 속도가 무척 빨랐다. 이런 속도라면 오늘 부양하(滏陽河)를 건너서 회진포(淮鎭浦)까지는 갈 수 있을 것이었다. 팽가 삼형제와 최근 강호의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의 모습이 드문 관도 사이로 말을 달린지 얼마나 지났을까? 전초(前哨)로 먼저 보낸 두 표사 중 하나가 되돌아 와서 표두에게 뭔가를 말로 전한다. 선두의 표두가 손을 들어 멈추게 하고 뒤돌아 와서 팽수문에게 말했다. “팽대협, 이 앞 관도가 굽어지는 지점에 누군가 나무를 잘라 넘어뜨려서 길을 막은 것 같습니다. 조사해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다 표사 한명은 암기(暗器)에 맞아 죽은 것 같고, 저 표사는 떨어져 지켜보다 암기가 계속 날아오자 바로 되돌아 왔답니다.” 주변을 보니 양쪽으로 백 장(丈) 안 밖의 높이를 지닌 산 사이를 관도가 관통하는 형상이었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높지도 않고 그다지 골이 깊어 보이지도 않으니 도적(盜賊)들이 있을 곳 같지는 않았다. “아니 어떤 놈이 감히 본가의 표행를 노린단 말이오? 간뎅이가 붇지 않고서는. 그래 몇 명이나 되어 보인답니까?” “정확히는 모르겠답니다. 갑자기 암기가 쏟아져서.” “아니, 그래 동료가 암기에 맞아 쓰러졌는데 자세히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적을 보지도 못하고 왔단 말이요?” “진정하십시오. 팽대협. 원래 전초의 역할이 전방에 이상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지 않습니까? 본대(本隊)에 이상을 알리는 것이 우선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휴우. 그래 정표두, 이 근처에 녹림산채가 있는 곳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이 부근은 높은 산이나 깊은 골짜기가 없어서 녹림 산채라고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거의 평야(平野)지대고 산이라고 해봐야 백 장(丈)을 넘기 흔든 야산들에 불과합니다. 몇몇 도적들이 있겠지만 간 크게 북하표국(北河驃局)을 건드릴 정도의 무리는 없다고 봐야지요. 가장 가까운 산채라고는 태행산맥(太行山脈)과 이어진 곳에 북악채(北岳寨)가 있는 정도지만, 그들의 힘이 미치는 곳도 보정부에서 백 리 이상 떨어진 노현령(路峴嶺)까지 밖에 안 됩니다.” “그럼 자네는 누가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나?” “이 근처에 팽가(彭家)를 무시하고 북하표국을 건드릴 세력은 거의 없습니다. 몇 개의 문파가 있긴 하지만 전체 제자수가 백 명도 안돼는 곳이 대부분이고 절정고수도 드물지요.”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온 세력이라는 건데. 이 하북성(河北省)에서 본가에 맞설 세력이라고는....” 하북성(河北省)에서 팽가(彭家)와 비견될 수 있는 대문파는 우선 정파(正派)로는 서쪽의 석가장(石家莊:지명)을 중심으로 한 진주(晋州)언가(彦家), 북쪽의 항산파(恒山派), 오대파(五臺派) 정도이고, 사파(邪派)로는 북동의 연경(燕京)을 중심으로 한 쌍검보(雙劍堡), 한단성(邯鄲城)을 중심으로 언가(彦家)와 대치중인 혈지문(血指門), 녹림채(綠林寨)로는 칠십이채(七十二寨)의 하나인 소오대산(小五臺山)의 구관채(九官寨), 낭야산(狼倻山)지역의 북악채(北岳寨), 석가장 서북의 평산채(平山寨)가 있고 정사(正邪)중간의 문파로는 연경성(燕京城) 서남부 지역의 평천림(平天林)을 들 수 있었다. “제 생각으로 이곳까지 움직일 여력이 있는 문파는 몇 되지 않습니다. 정파를 제외한다면 혈지문과 구관채, 평산채는 각기 주변의 언가, 오대파와 맞서고 있어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쪽까지 오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쌍검보, 북악채, 평천림이 정도인데, 북악채는 다른 녹림칠십이채의 도움이 없다면 우릴 건드릴 배짱이 없습니다.” “그러면 쌍검보나 평천림 정도군. 이들은 본가의 세력과 직접 맞닿아 있기도 하니. 그럼 남쪽의 산동성(山東省) 쪽은 어떤가? 산동성(山東省)은 정파(正派)로는 제남(齊南)일대의 태산파(泰山派), 산동반도(山東半島) 지역의 봉래파(蓬萊派), 곡부(曲阜)이하 남부지역의 은창보(銀槍堡), 사파(邪派)로는 북부의 덕주(德州)를 중심으로 흑사파(黑邪派), 청도(靑島)이남의 거경방(巨鯨幇), 녹림(綠林)으로는 태산(泰山) 서쪽 평서산(平西山)을 중심으로 한 평서채(平西寨), 황하(黃河)이십사수로채(二十四水路寨) 중에서 소양호(昭陽湖), 미산호(微山湖)인근을 지배하는 소양수채(昭陽水寨), 미산수채(微山水寨), 바다와 인접한 황하(黃河)의 끝부분의 청하수채(淸河水寨), 취병산(翠屛山)이하 지역의 병산수채(屛山水寨)등이 있고, 정사(正邪)중간으로 산동성(山東省) 서부와 하남성(河南省)동북부를 차지한 광풍방(狂風幇), 남동지역의 오련산(五連山)인근의 우문세가(宇門世家)가 있었다. “음, 가장 가까운 덕주(德州)인근의 흑사파(黑邪派)가 있습니다.” “그럼 쌍검보, 평천림, 흑사파 중의 하나라는 것인데.....” “평천림(平天林)은 먼저 적대시하지 않은 이상 공격하지 않고 본거지를 떠나지도 않으니 제외해도 되고, 흑사파(黑邪派)는 아직까지 저희와 직접 부딪힌 적이 없으니 쌍검보일 가능성이 가장 커 보입니다.” “쌍검보(雙劍堡) 녀석들이 죽으려고 작정했나보군. 최근에 자꾸 남하하면서 시비를 걸더니, 아무리 암중에 거란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감히 직접 본가를 건드릴 작정이다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팽대협. 적이 암습한 것을 보면 작정하고 노리는 것 같은데.” “어떡하다니? 당장 달려가 놈들을 죽여 없애야지.” “그래도 적확한 인원(人員)도 모르고 누구인지 확인도 못했는데 길을 돌아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정표두의 말에 팽수문이 화를 내면서, “정표두, 자네 제정신인가? 암습을 받아서 동료(同僚)가 죽었는데도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나?” “팽대협, 그런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현재 저희 인원은 표두가 저 포함해서 둘이고, 표사는 한명 죽어서 열넷에 불과하고, 공자님 두분을 포함해도 일류(一流) 이상의 고수가 다섯에 불과 한데 무턱대고 전진할 수 없잖습니까?” 정표두의 말에 팽수문이 잠시 생각해보다가, “적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걸세. 하북성(河北省) 전 지역에 본가의 세력이 미친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문파의 시선도 있으니 한꺼번에 많은 숫자의 고수가 올 수는 없을걸세.” “그래도 최소 이십 명 이상일 것이고, 또 숫자가 적으니 대부분 고수로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럼 자네는 싸우지도 않고 돌아가자는 것인가? 자네 우리 팽가에서 무공을 익힌 것이 맞나? 또 설혹 우리가 지금 이곳을 피해서 산을 돌아간다고 해서 저들이 우리를 쫒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이곳까지 와서 매복한 걸 보면 끝까지 쫒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 부양하 하류로 내려가 강을 건넌다면 그곳은 본가의 직접적인 관할지역이니 그곳까지는 쫒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럼 자네는 저들의 추적을 피해서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와 거리도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길을 돌아 도망가는 것을 본다면 즉시 추격해 올텐데?” “적이 매복(埋伏)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추적을 피해 강을 건너는 것이 더 좋지요. 설혹 따라 잡힌다 해도 좀 더 유리한 지형에서 맞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팽수문이 망설이고 있을 때, 앞쪽에서 이십여 명의 말을 탄 사람이 함성을 지르며 다가왔고 또 양쪽 산의 나무사이로 십여 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깜짝 놀라며 팽수문과 정표두가 서둘러 표사들을 움직여 싸울 태세를 갖출 때, 가까이 다가온 삼십 명의 사람이 빙 둘러싸서 포위하고 그중에서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왼쪽부터, 쌍검(雙劍)을 맨 중년인(中年人)으로 약간 사시(斜視)의 자연스레 사람을 치켜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옆으로 맨손의 웅피(熊皮)를 걸친 우락부락하게 생긴 칠 척(尺) 대한과 한 자루 판관필(判官筆)을 허리춤에 꽂고 서있는 삼십대의 창백한 안색과 차가운 눈초리의 서생(書生)같은 곱상한 사람이 나란히 서있었다. 세 사람 중에서 등에 쌍검을 매고 눈이 약간 사시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책임자가 누구냐? 앞으로 나서라!” 정표두가 나서며, “귀하들은 누군데 표행을 가로막는 것이요? 감히 북하표국(北河驃局)을 무시하겠다는 것이요?” 중년인이 코웃음 치며, “흥! 북하표국이라고? 알게 무어냐? 팽가도 별 볼일 없는데.”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이 큰소리로 웃고 떠들며 팽가를 비웃는다. 대꾸하려는 정표두에 앞서 팽수문이 앞으로 나서며, “닥쳐라. 감히 이 하북(河北)땅에서 팽가를 무시하다니. 너희들은 후환(後患)이 두렵지 않느냐?” “푸하하하, 웃기는군. 너희들이 중원(中原)에서는 대파로 큰소리를 친다만, 중원을 벗어난 세외팔황(世外八荒)에는 너희만한 세력이 없는 줄 아느냐?” 상대방의 비웃는 소리에 팽수문 역시 맞대응으로, “뭐라고? 흥! 팽가를 무시할 세력이 이 북쪽 장성(長城) 넘어서 오랑캐 땅에 있단 말이냐?” 팽수문의 말을 끝나자,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에게서 갑자기 살기(殺氣)가 강해진다. 이에 쌍검을 맨 중년인이 화가 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뭐 오랑캐라고? 이 개자식이 말이면 단 줄 알아? 우물 안 개구리 같이 지들만 최고인 줄 알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해서,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넓은지도 모르는 주제에?” “흥, 헛소리 그만하고, 도대체 그렇게 대단한 너희들은 누구냐?” “하하하, 어르신들은 북방(北方)의 영웅호걸들로 쌍검보(雙劍堡)에서 나왔다.” “뭐? 겨우 쌍검보를 믿고 큰소리를 쳤단 말이냐?” 또다시 비웃는 팽수문의 대꾸에 화가 나 쌍검을 꺼내며, “너 이놈아! 죽고 싶냐? 감히 쌍검보를 무시하다니?” “흥, 내가 쌍검보를 두려워 할 줄 아느냐?” 팽소문도 도를 빼내어 앞으로 나선다. 두 사람이 살기를 풍기며 맞부딪히기 직전, 강호비사(江湖秘事) 강호비사(江湖秘事) 1 “멈춰라” 갑자기 고성이 들리며 백발(白髮)의 나이를 추측하기 어렵고 허리에 고색창연한 검을 맨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노검수(老劍手)가 순식간에 나타나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다. 노검수가 돌아보며 쌍검의 중년인에게, “그만 칼 집어넣지 못하겠나?” “어르신, 저놈이 먼저....” “입 닥치게. 저들을 붙잡고만 있으랬더니.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죽이다니, 한 번만 떠들면 자네부터 가만두지 않겠네.” 얼굴을 붉힌 채 뒤돌아 물러서는 중년인. 노검수가 돌아서 팽소문에게 말한다. “자네는 누군가?” 팽수문도 범상치 않은 노인의 모습에 예의를 차리며, “팽가의 팽수문이라고 합니다.” “자네가 이 표행의 책임자인가?” 팽수문이 정표두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말한다. “예. 제가 책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네. 우선 표사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자네에게 사과하겠네. 사람을 붙잡고만 있으랬더니 저놈들이 먼저 손을 써버렸네. 이미 죽은 목숨을 돌릴 수 없겠지만 물질적으로 충분한 보상을 하겠네.” “어르신. 아니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면 답니까? 차라리 저놈들을 모두 죽여....” “그만. 나도 자네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 사람 목숨을 어찌 금전(金錢)과 견줄 수 있겠나? 그러나 그 때문에 또 다시 피를 본다면 그 끝이 한도 없을 것이네. 자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게. 그러면 충분한 보상과 함께, 돌아가면 저놈들을 문책하게 할테니.” 팽수문도 자신들이 불리하며 여차하면 황천을 건너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노인만 해도 자신의 조부에 조금도 못하지 않을 기도(氣度)를 보여주고 있었고, 그 외의 삼인도 자신이외에는 상대할 고수가 없었다. 단리유아의 무공수준은 잘 모르겠으나, 앞의 노인을 잠시 막아줄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에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는 살아 숨쉬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어르신께서는 누구신지요? 이런 일을 하실 분으로 안 보이시는데....” 노검수가 약간 망설이는 기색으로, “원래 관정대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부탁했어야 하는데.... 나는 천검해(千劍海)의 추(鄒)아무개라고 한다네.” “음....”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감정이 무딘 나조차 놀랄 정도로 천검해(千劍海)이라는 이름은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내가 놀라자, 팽가의 인물들은 들은 적이 없어서 어리둥절한 채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노검수도 고개를 돌려 찬찬히 내 모습을 살폈다. 천검해(千劒海). 원래 천외검문(天外劍門)이 이차마교인 수라혈교(修羅血敎)와의 싸움에서 주요 고수가 동패공사(同敗共死)해 후인(後人)이 끊어졌는데, 그 외문(外門)제자 중에 한 사람이 후일 천외검문을 부활하고자 만든 단체였다. 하지만 무수한 시간 속에 천외검문의 비전(秘傳)절기를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외문제자에 불과했던 사람이 알고 있던 검법(劍法)은 입문(入門)절기에 불과해서 큰 진전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후 오랫동안 무수한 제자들이 신분을 감추고 강호에 나서 비무를 벌이며 강호의 검법을 수집한 지 수백 년, 그 동안 쌓인 검법을 취합하고 정수(精髓)를 뽑아서 원래의 천외검문의 무적십이검해(無敵十二劍解)와 비견될 수 있는 천수검해(千手劍解)를 완성한 것은 백 년 전이었다. 백 년 전 혈수미교(血修彌敎)와의 싸움에서 중원을 도운 것이 천검해를 처음으로 중원에 알려지게 했다. 당시 혈수미교의 대종사(大宗師)와 맞서 중원(中原)오절(五絶)이 합공하였지만, 오히려 중원오절이 밀리게 되었는데 이때 끼어들어 승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후일 천검해의 천수검제(千手劒帝)로 불리게 되는 눈앞의 이 노검수였다. 이 싸움에서 혈수미교의 대종사였던 장천대라마(長天大喇麻)가 왼팔을 잃고 도주한 것도 천수검제에게 당한 것이었다. 후일 중원에 알려지기는 오절(五絶)이 했다고 하지만, 당시 참가했던 고수들은 실상을 알고 있었다. 혈수미교(血修彌敎)와의 전투 후에 오절이 실종(失踪)되고 대부분의 고수들도 사망하거나 같이 실종돼서 많은 의혹이 있었다. 분명 혈수미교를 격파하고 그들을 추적하는 중이었는데 소수의 고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수들이 실종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는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그들도 모른다고만 할뿐이어서 실종한 고수들의 문파들이 실상을 알기위해 수색대를 보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때 오절과 함께 추적에 나섰던 천수검제가 혼자 돌아왔지만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려 영영 진실은 미궁 속에 묻혔다. “자네는 누군가?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천수검제가 자신을 아는 듯한 단리유아의 태도에 단리유아에게 물어보았다. 단리유아가 이에, “혹시 천수검제 추노선배가 아니십니까?” 자신을 정확히 알아보자 천수검제도 약간 놀라서 단리유아를 더욱 자세히 바라보며, “음. 지금까지 날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던가?” “저도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무심한 목소리로 물음에 단리유아가 답했다. 단리유아가 그를 모를 수가 없었다. 본래 백 년 전 중원최고수들이었던 오절 중의 검절(劍絶)이, 남궁(南宮)세가의 인물로 가문사상 최고의 기재(奇才)로 평가됐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의 남궁세가는 칠대세가에서도 가장 성세를 자랑하고 있었고, 그런 가문을 이끌던 검절은 가문의 모든 무공을 대성(大成)하고 오히려 새로운 무공을 창안(創案)할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만일 그가 삼십년만 건재했어도 가문을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혈수미교와의 싸움에서 가문의 정예(精銳)를 데리고 참가했던 검절이 가문의 정예와 함께 실종되자, 급속도로 가문은 힘을 잃어 쇠퇴했고, 백년이 흐른 지금에는 칠대세가의 끝자락에 겨우 이름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절기가 고수들과 함께 사라져, 가전(家傳)절기라고는 거의 흔적만 남았을 뿐, 이를 익혀서 절기를 복구할 인재(人才)는 너무나 부족했다. 백여 년 동안 거의 봉문하다시피 한 채 각고의 노력을 다한 근래에 들어서야 예전의 성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복구할 수 있었다. 오직 가문의 성세(盛世)를 되살리기 위해서 살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정략 결혼한 화산(華山)파 장문인의 딸이던 큰어머니 매화선자(梅花仙子)이옥심(李玉心), 그런 둘 사이에서 불행한 삶을 살다간 어머니. 어찌 단리유아가 가문이 쇠락한 원인이 된 백 년 전의 싸움에 관심이 가지 않았겠는가? 이제 그 당시의 인물을 만났으니 단리유아도 진실을 물어 보아야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백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기억하는 이가 있다니. 허허허” “단리대협, 이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팽수문의 물어보는 말에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예, 백년 전의 초고수(超高手)들 중의 한분으로 도왕(刀王) 어르신보다 두 배분(拜分)이 위지요.” 단리유아의 말에 팽수문이 놀라서 다시, “조부님 보다 두배분이 위라면 저희 고조부(高祖父)님과 동배시란 말입니까?” “아마 그럴겁니다.” “광전도(光電刀) 팽서창(彭舒暢)이라고 팽가의 인물이었던 사람인데 혹시 알고 있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수검제가 팽수문에게 묻자, “아, 그분은 제 고조부의 동생 되시는 분으로 본가(本家)무공을 한 단계 끌어 올리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직까지 살아있나?” “삼십년 전에 별세(別世)하셨습니다.” “허허, 백 년 전 어께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웠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알고 지내던 인물들은 하나 둘 사라져 이젠 기억 속에만 흐릿하게 남아있군.” 팽수문의 답변에 천수검제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마치 생전에 함께 했던 모습을 그리듯이. 팽가의 선조와도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자 팽수문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추노선배님께 팽가의 팽수문이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그동안의 결례(缺禮)를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노선배님,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천수검제가 팽수문의 인사에 회상에서 깨어나, “으음. 내가 잠깐 정신을 놓았군. 원래 자네들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은 관정대사가 전해준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서라네.” “그렇지만, 노선배님. 저 물건은 관정대사님이 본가에 보관을 부탁한 것으로 제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난처하군. 자네, 혹시 저 안의 물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저도 밀봉(密封)된 채 받아서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휴우, 이것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래도 이유라도 알아야 제가 어떻게 할 지 선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해도 알려지면 귀찮은 일이라네.” 난처해하다가 주변을 돌려보고 나서, 손짓으로 포위망을 풀게 하여 뒤로 물러나게 한다. 모두 얼굴을 찌푸리며 마지못해서 십여 장(丈) 밖으로 물러났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자 천수검제가, “그 물건은 본래 본문(本門)과 관련이 깊다네. 이 세상에서 그 물건의 소유권(所有權)을 주장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본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 오래전에 어쩌다 관정대사의 손에 들어간 모양인데 이제야 사실을 알고 찾아온 거라네. 자네들이 떠난 며칠 후에야 관정대사를 찾아 갔었네. 그런데 자네들은 이미 먼저 떠나 멀리 있고 시간은 촉박(促迫)해서 근처에 아는 저 녀석들의 주인(主人)에게 부탁을 했었지. 소식을 전해 근방에 있는 녀석들에게 찾아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라고. 그런데 말이 와전(訛傳)됐는지 저 놈이 내가 도착하기 전에 살수(殺手)를 쓴 거라네.” “노선배님, 그 물건이 노선배님의 문파(門派)와 관련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또 사실일지라도 제 마음대로 하기도 곤란하군요.” 주변에 있던 인물 쌍검을 맨 중년인이 소리친다. “야, 이 자식아. 노선배님께서 그렇게 정황(情況)을 설명하고 부탁하는데 냉큼 건네주지 않고. 계속 딴소리만 늘어놓을래?” 화가 난 천수검제가 돌아보며, “입 닥치지 못할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어렵게 만들어 놓고 어디를 나서느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궁시렁 거리며 입을 다문다. “혹시 그 물건이 한 자루 검(劍)이 아닙니까?” 단리유아가 짐작하는 것이 있어서 조용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다시 전음(傳音)으로, “그 물건이 혹시 은환검(銀環劍)이 아닙니까?” 천수검제가 놀라며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자네는 도대체 누군가? 기억에 사라진 백 년 전의 나를 아는 것도 놀라운데, 그 사실까지 알다니.” “소생은 단리유아(段俚唯我)라고 하는 말학후진입니다.” “단리유아라고?” 무심한 표정으로 답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천수검제는 들은 적이 없어서 다시 물어보는데, 주변을 둘러쌌던 인물들이 너도나도 놀라 소리친다. “전광(戰狂)!” “천패무광(千敗武狂)?” 놀라는 탄성(歎聲)에 주변을 돌아보던 천수검제가, “내 이삼십년 만에 강호(江湖)에 나와서 자네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저들의 태도를 보니 대단한 인물인 모양이군.” “아닙니다. 그저 보잘 것 없는 허명(虛名)을 날리고 있는 일개 무부(武夫)에 불과합니다.” 고개를 저으며 단리유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이때 물러나 있던 쌍검을 맨 중년인이 다시 나서며, “십 년 내 강호십대고수(江湖十大高手) 중의 한 사람입니다. 별호는 전광, 천패무광이라고들 부릅죠. 헤헤” 이 사람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성격이 약간 촐싹맞은 것 같았다. “시끄럽다. 네 놈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왜 나서느냐?” 중년인에게 한 소리를 하고난 후, “강호십대고수라니 대단하군. 처음 볼 때부터 무공이 범상치 않아서 놀랐었는데.” “과찬이십니다. 다 허명에 불과합니다.” 조용하고 무심한 단리유아의 말을 듣다가, “그런데 자네, 원래부터 표정이 그런가? 아까부터 계속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표정의 변화도 없고 목소리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더군.” “그저 천성일 뿐 별달리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천수검제가 혀를 차면서, “쯔쯧쯧. 타고난 천성이라고? 누가 날 때부터 그런 성격을 타고 난다는 말인가? 내 보니 자네 일생도 평탄치 않은 것 같군. 그렇게 젊은 나이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잃어버리고 무심하다니. 자네도 정말 불행한 삶을 보내고 있구만.” “아닙니다. 저는 한번도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힘들다고 여긴 적은 있었지만.” 단리유아의 조용한 대꾸에 천수검제가, “그게 불행한 것이 아니고 뭔가? 사람이 슬플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긴 인생의 한 단면일 뿐이라네. 만약 사람이 아무런 감정도 없다면 더 살아야 뭐하겠나? 쯔쯧.” “......” 혀를 차면서 천수검제가 하는 말에 단리유아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그런데 어떻게 내가 찾는 물건이 그 물건인 줄 알 수 있었나?” “천검해(千劒海)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고 있어서 대충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천검해만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고 오래된 물건은 몇 가지 안돼서, 혹시 그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해서 여쭈어 보았을 뿐입니다.” “허, 대단하군 대단해. 그 몇 가지 사실로 물건을 정확히 알아맞히다니. 자네, 보이는 것과는 달리 지모(智謀)도 뛰어나군.” “단지 몇 가지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을 뿐,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허허허, 그래도 그게 어딘가? 그 정도의 사실로 알아내다니.” 이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팽수문이 끼어들어, “단리대협,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 십중팔구 짐작 가는 물건이 있지만, 직접 보지 않고선 확실히 장담을 못하겠군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팽수문이, “그럼, 단리대협이 사실을 보증하고 이후의 일을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것과 맞다면 책임을 지겠습니다. 노선배님도 혹시 그 물건이 아니라면 그만 물러나 주십시오.” 팽수문의 말에 단리유아가 답하며 천수검제에게도 물건이 틀릴 경우에 대해 얘기했다. “물론이네. 그 물건이 아니라면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다른 물건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내게는 쓸모없는 나무토막보다 못하다네.” 팽수문이 천수검제의 답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좋습니다. 그럼, 노선배님과 단리대협만 마차 안에 들어가 직접 살피고 결정을 하지요.” “좋네.” 셋이서 마차 안에 들어가 사방 한 자 크기의 물건을 꺼내어 놓은 후, 먼저 겉을 감싼 보자기를 풀었다. 안에는 봉인(封印)이 표시된 한자 정도의 낡은 목함이 있을 뿐이었다. 소도(小刀)로 봉인을 뜯고 함을 열자 그 속에는 겹겹의 천으로 싸인 어떤 물건이 나타났다. 계속해서 천을 풀자 이윽고 물건의 본모습이 보였다. “오, 정말이군!” 천수검제가 탄성을 지르며 뚫어지게 바라본다. 마지막 천속에서 나타난 물건은 은빛의 팔찌모양의 환(環)이었다. 보통의 팔찌보다 폭이 넓어서 한 치 가까이 되었지만, 은빛을 내고 알 수 없는 찬란한 무늬가 빙 둘러 새겨진 팔찌였다. 다들 은환(銀環)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팽수문이 이상하다는 듯이, “추노선배님, 검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은환이 아름답지만 결코 작은 소검(小劍)으로 보이지 않는데요.” 이에 천수검제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네. 이 물건이 맞아. 단지 본 모습이 아닐 뿐이지. 그렇지 않나, 단리소협?” “맞습니다. 이것은 환검(環劍)의 일종이지요. 일정량의 진기(眞氣)를 주입하면, 팔찌형태에서 검으로 변하게 될 겁니다.” “단리소협의 말이 맞다네. 이 것은 틀림없는 검이지.” “그럼, 단리대협. 이것이 그 검인지 사실인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약간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팽수문이 말했다. 조부(祖父)에게 가는 물품을 허락 없이 봉인을 뜯어 확인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검입니다. 추노선배님, 제가 사정(事情)을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단리유아가 팽수문의 말을 받아서 천수검제에게 허락을 구하자, “좋네.” “팽대협, 지금부터의 말은 무림비사(武林秘事)와 관련이 있으니 다른 곳에서 말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중에 도왕(刀王) 어르신도 제 말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해 주실테지만, 일단 이 얘기를 알아야 좋을 것이 없으니, 나중에 도왕 어르신께 여쭙고 잊어버리십시오.” 단리유아의 당부에 팽수문이, “아, 알겠습니다.” “이 팔찌의 정식 명칭은 은환신검(銀環神劍)으로 무림(武林)십대중보(十大重寶)의 하나에 속합니다. 아마 팽대협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설정 & 참조] [1] 중원오절(中原五絶) : 백년전의 초고수들로 혈수미교와의 싸움속에 실종(失踪)되었음. 각기 천절(天絶) 종리도전(鍾離倒轉), 검절(劍絶) 남궁고(南宮孤), 창절(槍絶) 우문사유(宇門四維), 장절(掌絶) 소추립(素秋立), 지절(智絶) 만박자(萬博子), [2] 무림(武林)십대중보(十大重寶) : 강호의 수많은 세월동안 알려진 신병(神兵)이기(異器) 중에서 가장 유명한 열 가지. 그 기보(奇寶)를 가진 자가 비밀(秘密)을 푼다면 고금오대고수에 비견되는 절대(絶代)강자(强者)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옴. ****** 일등감자님께서 감상-비평란에서 하신 이야기에 덧붙여서 설명하겠습니다. 천수검제는 사실상 배분을 따지면 강호에서 따를 자가 없습니다. 백년전 혈란을 종식시켰으니 명성은 말할 것도 없지요. 두번째로 표물은 팽가에 보관을 일시 의탁한 것이지 소유하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또 그 물건도 천검해에 소유권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대가로 뇌정도를 대신 주겠다고 한 것이지요. 세번째는 단리유아의 명성을 믿고 표물을 확인한 후에 만일 천수검제가 소유권을 주장해도 될 물건이라면 단리유아의 보증아래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적대적인 세력이 포위한 상황인 것도 팽수문으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거의 없습니다. 이상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강호비사(江湖秘事) 강호비사(江湖秘事) 2 “아, 그 검이 이....” “예, 무림(武林)십대중보(十大重寶)에 속하지만 실제 모습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단지 검(劍)처럼 생겼다고 추측할 뿐. 그러나 단 한 문파(門派)의 인물들은 실제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천외검문(天外劍門)의 후예(後裔)들입니다.” “천, 천외검문이라구요?” “예, 원래 천외검문(天外劍門)의 문주를 나타내는 물건이기도 하고, 호신지병(護身之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옛날 수라마교와의 싸움에서 문주가 죽고 나서는 종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추노선배님과 관련이 있다고는.... 제가 알기로 천외검문(天外劍門)은 멸문(滅門)된 것으로 아는데요.” 단리유아의 설명에 팽수문이 의문을 표하자, “맞습니다. 천외검문(天外劍門)은 마교와의 대전 후에 절맥(絶脈)되었지요. 그렇다고 아예 모든 제자들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외문(外門)제자에 불과 했지만 한 분이 살아남았으니, 후에 그 분이 천외검문을 부활시키기 위해 천검해(千劒海)를 일으키고 검법(劍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후예가 여기 추노선배이십니다.” “아, 그렇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천수검제가 단리유를 보면서, “여보게, 단리소협. 자네는 본문(本門)의 인물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나? 비록 내가 백 년 전에 잠시 강호활동을 해서 본문이 조금 알려졌다고 해도 그런 자세한 사정까지 아는 인물들은 거의 없을텐데?” “제가 오래전 강호(江湖)의 비사를 모아놓은 책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그런 사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책도 아주 오래되어서 지금은 아는 사람도 몇 없을 것입니다.” 단리유아가 무영비고(無影秘庫)에서 발견한 서책 중에는 강호(江湖)의 기사(奇事), 기문(奇聞)을 모아놓은 서책도 있었는데, 그곳에 천외검문이 멸망한 후 천검해가 생긴 유래도 적혀 있었다. 아마 근래 백 년 동안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는 단리유아보다 자세히 아는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삼백 년 이전의 오래된 강호사(江湖史)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단리유아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리유아의 대답을 듣고 천수검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네는 알면 알수록 나를 놀라게 하는군. 흠, 팽소협, 여기 있는 단리소협이 말했지만, 본 문의 조사들은 대대로 천외검문(天外劍門)의 검법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네. 그리고 저 검은 본문이 정통후예임을 입증할 수 있는 물건이기에 각방으로 찾았지. 그렇지만 이제까지 찾지 못했는데 이제야 찾게 되었군.” “그럼 단리대협께서 마지막으로 이 검의 본 모습을 보여서 증명해 주십시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단리유아가 팽수문으로부터 검을 건네받아 손바닥에 놓고 내공(內功)을 불어넣었다. 일 갑자 이상 불어넣으니 챙 하는 음향과 함께 길이 한자 반의 검보다 척(尺)에 가까운 은빛 찬란한 검신(劍身)을 요요히 드러낸 검이 나타났다. 폭이 한 치가 안 되고 손잡이가 따로 없으며, 얇지만 검인(劍刃)이 서지 않은 끝에서 반자 지점에서 좁아지는 형태의 은검(銀劍)이었다. 팽수문이 은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는, “정말 아름답군요. 휴, 이것이 무림십대중보중의 하나라니.” “자네도 욕심이 나는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그저 너무 아름다워서....” 약간 아쉬움에 잠긴 표정으로 부정하는 팽소문을 보며 천수검제가, “이 검이 신병(神兵)으로써 보물로 알려져 있지만, 자네 가문에는 단지 보기 좋은 보물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다네. 괜히 이 물건으로 귀찮은 일만 일어날걸세. 또 자네 가문은 도법(刀法)으로 일어섰으니 별무소용이지. 또 이 은환검(銀環劍)을 사용하기 위해선 최소한 일갑자의 내공이 있어야 검으로 변환을 시킬 수 있고, 자유자재로 사용하려면 검강(劍剛)을 쓸 수 있는 화경(化境)이상의 고수이어야 하네. 그 이전에는 살신지화(殺身至禍)를 초래할 뿐 그림에 떡이네.” “알려지기로는 이 검에 비밀이 있어서 비밀을 푼다면 천외검문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던데요.” “쓸데없는 헛소문이라네. 이 좁은 검신(劍身)에 무엇을 어떻게 숨기겠나. 단지 검신으로만 이루어진 일 척(尺) 반의 검신에..... 물론 이 검신에는 일초식의 호신(護身)무공이 있지만 천외검문의 무적십이검해(無敵十二劍解)는 결코 아니라네. 뭐 그 일초의 위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이지만.” 다시 내공을 주입하여 은환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추노선배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휴,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은환검이군. 팽소협, 내 이것을 그냥 가져가도 되지만, 이 검에 대한 보상으로 자네 가문에 뇌정도(雷霆刀)를 주지. 어떤가?” 천수검제의 제의에 팽수문이 놀라서, “뇌정도라구요 그 십대중보중의....?” “그렇다네. 뇌정도 역시 십대중보 중의 하나이지만, 본문(本門)에서는 도법을 쓰지 않으니 구석에 쳐 박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지. 자네 가문에는 뇌정도가 이 은환검보다 백배 나을 것이네.” “그렇고말고요. 하하하, 뇌정도라니!”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겠네.” “예, 아까 말한 대로 이 검은 추노선배님께 드리지요. 추노선배님, 그럼 언제쯤 본가에 들리시겠습니까?” “글쎄, 지금은 본문(本門)에 먼저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려야하니 안되겠고, 한달이내에 팽가에 들려서 오늘 일에 대한 사과와 함께 이 검에 대한 대가로 뇌정도를 건네주겠네.” 뇌정도 역시 십대중보 중의 하나로, 뇌기(雷氣)를 품고 있어서 도기(刀氣)를 쓸 수 있는 고수가 도를 사용한다면 초식을 시전할 때 자연스럽게 뇌기도 같이 흘러서 초식의 위력이 몇 배나 상승하게 된다. 원래 서장(西藏)의 뇌정천궁(雷霆天宮)의 지보(至寶)로서 역시 도안에 비밀이 숨겨져 있어서 비밀을 밝힐 수 있다면 뇌정도법(雷霆刀法)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설혹 비밀을 풀지 못할지라도 도(刀) 자체의 위력만으로도 도법의 위력을 상승시키니 도법을 지닌 자에게는 꿈에서라도 갖고 싶은 신병(神兵)이었다. 천수검제의 약속을 받고나서 팽수문이 은환검를 건네며, “여기 있습니다. 추노선배님, 꼭 빠른 시일 내에 본가에 들려주십시오.” “알겠네. 이렇게 은환검을 되찾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군. 내 한달 이내에 자네 가문을 찾아가기로 약속하지” “알겠습니다. 노선배님이 오실 때까지 학수고대하겠습니다.” 천수검제가 물건을 건네받아 품속에 넣고 나자, 모두 마차 밖으로 나갔다. 천수검제가 일행인 무리에게 다가가 일이 끝났음을 알리고 모두 떠나도록 하자, 쌍검보(雙劍堡)의 인물들도 괜히 밤새워 달려왔다고 투덜거리며 수하들을 거느리고 떠나갔다. “추노선배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단리유아가 떠나려하는 추노선배를 붙들고 말하자, 천수검제가 돌아서며, “그래, 단리소협 무슨 일인가? 아직 일이 남았나?” 천수검제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흠, 그래? 무슨 일인가?” 단리유아가 전음(傳音)으로, “백 년 전 혈수미교와의 전투 후에 발생한 실종사건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뭐, 뭐라고?” 천수검제가 깜작 놀라며 본성(本聲)으로 말했다가, 다시 전음으로, “자네가 어찌해서 그 실종에 대해서 묻는 것인가? 이미 그 사건은 세월 속에 묻혀서 아는 사람도, 비밀을 밝히려는 사람도 없는데?”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추노선배님, 우선 제가 말하는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하지 않도록 약속해 주십시오. 이것은 제 신상(身上)의 비밀과도 연관되어 있으니.” “음, 약속하지. 비밀을 지키기로.” “저는 백 년 전 당시 오절(五絶) 중 하나였던 검절(劍絶)의 후손으로 본명이 남궁한상(南宮寒霜)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실종사건에 의문이 생긴 것은 가문의 서고에서 어떤 비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경전중에 누군가 교묘히 서찰(書札)을 감추어 놓았더군요. 그 서찰에 써있던 것은 오절이 혈수미교(血修彌敎)의 중원침공을 합작해서 유도한 사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단지 하나의 서찰로 가문의 치부(恥部)일지도 모르는 사실을 밝힐 수도 없어서 지금껏 저 혼자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추노선배님은 당시 그분들과 마지막까지 행동했으니 사실을 알고게시겠지요.” 뜻밖의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천수검제가, “음, 자네가 검절의 후손이었나?” “예전에는 남궁(南宮)가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단지 단리(段俚)가의 사람일 뿐입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자네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자네도 일부 진실(眞實)을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지.” “예. 경청하지요.” 천수검제가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에, “백 년 전 혈수미교가 중원을 침공했을 때, 나는 강호에 막 출도(出道)했던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네. 음모(陰謀)와 계략(計略)이라곤 전혀 모르던 무공만 조금 센 애송이었지. 그러다 혈수미교가 침공하자 너도나도 싸우러 가더군. 나도 멋도 모르고 단지 같은 중원인(中原人)이라는 이유로 끼여서 싸우게 되었지. 한참 싸우다 보니 나중에는 장천대라마(長天大喇麻)하고도 싸우게 되었지. 그 이후에 장천대라마하고 싸우고 추적한 것까지는 알려진 소문과 다름없다네. 그 이후가 문제였지. 원래 오절의 의도는 그들 오절이 장천대라마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혈수미교와 중원연합군이 양패구상(兩敗具傷)하기를 바란 것이었지. 당시 그들이 이끌던 중원연합군은 중원 전체 고수의 약 팔 할에 달하는 고수들이 참여해 있었다네. 혈수미교는 청해성(淸海省)지역의 고수들까지 불러 모아서 그 숫자가 약간 많았지만, 그 대신 중원 쪽이 고수들이 더 많았지. 그런 고수들이 싸우다 모두 죽고, 오절과 그들의 수하들만 살아남는다면 이후 중원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마 그들끼리 서로 싸우기 전까지는 그들 오절(五絶)의 천하가 한동안 계속 됐을걸세. 혼자서 장천대라마를 상대하기는 벅찰지 모르지만 그들 중에서 두 명만 합공해도 승세(勝勢)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당시 중원에서 가장 강한 다섯 사람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합공해서도 밀렸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럼.....” “내가 끼어들 때까지는 아무 문제없었지. 모든 것이 그들 계획(計劃)대로 되었으니. 그런데 내가 끼어들어서 모든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네. 내가 장천대라마를 물리쳐 물러나게 하자 완전히 중원 쪽으로 승세가 굳어져 버려서, 원래 양패구상하기를 바랬던 싸움이었는데 장천대라마 달아나자 혈수미교의 진열이 무너지고 사기가 떨어져 일방적인 싸움이 되어버렸지. 그만 돌아가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쫓아서 섬멸하자는 쪽이 많았었네. 오절 역시 의도한대로 되지 않고 고수들이 절반이상 살아남아 있었으니 그들을 소모해 없애기 위해서도 추적하자는 쪽에 손을 들어줬지. 부상이 심한 몇 명의 고수들만 남고 나머지는 계속 추적해서 혈수미교의 본거지인 청해호(靑海湖)까지 접근했지. 그 동안 수많은 고수들이 죽었지만 무엇에 취한 것인지 누구도 그만 멈추려고 하지 않았어. 청해호 변에서 모여 중원의 고수들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저녁, 그들 오절(五絶)이 먼저 일을 벌였지. 그런 추악한 일도 아마 다시 없을걸세. 우선 자기 부하들을 모아서 피곤에 지쳐 떨어진 고수들을 공격했지. 나 또한 낌새가 이상해서 경계를 했지만 기습으로 중상을 면치 못했네. 어제의 동료였던 고수 들이 서로 칼을 겨누고 싸우다니, 그 추악함과 비참함이라니. 한참 서로 싸우니 오절과 그 수하들만 남고 거의 대부분이 차가운 땅바닥에 누었지. 남은 사람도 몇 되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내가 이러는 이유나 묻자 죽기 전에 자비(慈悲)를 베푼다면서 사실을 밝히더군. 처음 그들은 감숙성(甘肅省) 일대의 문파 중에서 한 곳에 힘을 보태준 후에 혈수미교에 시비를 걸어 싸우게 했다네. 그들이 바로 혈번성(血幡城)이지. 처음에는 사소한 아주 작은 싸움에서 시작 됐지만 점점 커져서 혈번성이 끼어들었고, 나중에는 위기감을 느낀 주변 문파를 끌어들여 싸움은 커져갔네. 본래 혈수미교는 그리 호전(好戰)적인 세력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싸움을 걸고 대화를 위해 보낸 인물들까지 모욕을 당하고 돌아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지. 고수들을 보내서 혈번성을 비롯한 그동안 싸웠던 감숙성 내의 문파들을 피로 씻어버렸어. 결국 모든 것이 오절의 의도대로 된 거지. 그들이 선동하여 앞장서자 전 중원이 들끓었고 위기감을 조성해서 너도나도 참가하길 부추겼지. 오절은 일류고수이하는 쓸데없는 희생만 된다고 하여서 일류이상의 고수만 추려서 중원연합군을 구성했다네. 오절의 자비심이 어떻다느니 천하가 떠들었지만 속내가 뻔한 거지. 고수들만 없애버리면 자연히 자신들의 천하가 될테고 고수들만 간다면 통제하기도 편하니까. 사실 숫자상으로 밀어붙인다면 혈수미교는 절대 상대가 못되니까 일류(一流)이하의 고수는 여러모로 계획에 방해만 될 뿐이었지. 그 다음은 나 때문에 약간 계획이 변경돼서 여기까지 왔지만 거의 뜻대로 됐다면서 나를 비웃더군. 듣고 보니 정말 어이가 없더구만. 단지 다섯 사람에게 천하가 놀아난 꼴이니. 그들에게 속은 어리석음을 한탄했지만 강호에서 누굴 탓하겠는가? 그들을 믿은 내 자신이 잘못이지.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안 들고, 강호에 환멸을 느껴서 그냥 죽기를 바랬다네. 그때까지는 모든 게 그들 뜻대로 되었지. 그런데 그들이 나를 비웃고 있을 때, 갑자기 장천대라마 나타났지. 살아남은 혈수미교의 잔당으로 사방을 포위한 채. 오절(五絶)은 꿈이 너무 길었어. 재빨리 처리하고 떠났어야 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혈수미교가 호수를 건너 포위한 줄도 몰랐던 것이지. 시간이 흘러 결국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네. 그것도 장천대라마의 자비로. 그 이후로 나도 중원을 떠나서 다시는 강호에 들지 않았다네. 이곳 하북성 북부 일부지역을 제외하곤.“ 단리유아가 천수검제의 설명을 듣고 자신의 예상과 비슷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흠, 그렇게 된 일이군요. 그럼 오절의 후인 중에서 천절(天絶)의 후인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다른 사절의 후인들은 대부분 문파가 몰락하거나 절문됐는데 그들은 오히려 강호제일세력(江湖第一勢力)이 되었으니.”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천절은 만약의 경우까지 대비해서 세력을 빼돌린 것이 아니겠나?” “그럼 천절의 후인 들은 그 음모를 알고 있겠군요.” “그렇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클 것이네. 모른 체 세력을 빼돌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음모를 강호에 밝히지 않은 이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우선 그때 나를 제외하곤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고, 또 혈수미교에서 시체들을 모조리 청해호에 수장(水葬)시켜 물고기 밥이 되게 해서 시체가 남지 않았지. 혹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더라도 말할 수가 없었지. 음모에 가담한 자는 더더욱 사실을 말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은 사실을 밝히더라도 믿을 사람이 별로 없었을테니. 내가 상처를 치료한 지 육 개월 만에 강호에 돌아오니 오절은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중원을 구한 영웅으로 바뀌어 있더군. 어이가 없더구만. 나중에는 어차피 말해도 믿지 않을 테고 말할 마음도 없어서 그대로 강호를 떠나 은거(隱居)해버렸다네.” 이야기를 마치자 단리유아가 천수검제에게 절을 하며, “추노선배님, 비밀에 묻혔던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제야 사건의 전반을 파악하게 되었군요.” “아닐세. 나도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진 채 남아있던 것을 말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군.” “저도 그렇군요.” “허허, 자네도? 그래 그냥 이대로 헤어지기도 뭐하니 다른 부탁이 있으면 말해보게?” 전음을 중단하고는 단리유아가, “음, 이런 부탁을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저와 비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네와 여기서?” “아닙니다. 후일 제가 찾아가서 요청을 하겠습니다.” “자네, 내가 은거한 곳은 어떻게 알고?” “참, 장소를 묻지 않았군요. 어떻게 찾아가면 됩니까?” 천수검제가 단리유아의 말에 웃으면서, “허허허, 아무에게도 본문(本門)의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구만. 나중에 연경(燕京)을 지나 북으로 오백 리 정도 장성 너머로 온다면 운무산(雲霧山)이 나온다네. 그곳에서 적하곡(赤霞谷)을 찾게. 기문진(奇門陣)이 펼쳐져 있으니 들어올 생각은 말고 나를 부르게” “어떻게?” “나중에 곡구에 들어서면 방법이 보일걸세.” “알겠습니다. 후일 찾아뵙기로 하지요.” “그래. 그 때 보기로 하세. 자네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야. 나도 그때를 기다리지.” 이 때 팽수문이 끼어들어, “어르신, 이야기가 다 끝났는지요?” “음, 그래. 다 끝났네. 거의 반 시진(時辰) 넘게 걸렸구만. 그래 무슨 일인가?” “어르신, 죄송하지만 제 조부님 앞으로 서찰(書札)을 한 장 써주실 수 없겠습니까?” “흠, 자네 입장도 곤란한 점이 있으니, 내가 서찰을 써주지. 지필묵(紙筆墨)은 지니고 있나?” “하하하, 원래 표행에는 지필묵을 지닌 표사가 반드시 있지요. 거래를 완수(完遂)하거나 받을 때 필요하니까요. 저기 대령해 놨습니다.” “자네도, 속으로는 걱정이 됐나 보군. 내 서찰을 보면 자네 조부도 오히려 자네를 칭찬하지 잘못을 탓하지는 않을 걸세” “예. 감사합니다. 추노선배님” 서찰을 써 주고 인사를 나눈 후 천수검제는 북쪽으로 떠났다. 팽가의 일행과 단리유아도 다시 말을 타고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길을 막은 곳에 다다라 죽은 표사의 시신(屍身)을 마차에 옮겨 싣고 길을 막은 나무를 치운 다음 속도를 높여서 말을 달렸다. 한 시진 넘게 지체했으니 서둘러서 어두워지기 전에 강을 넘어야했다. [참조 & 설정] [1] 무적십이검해(無敵十二劍解) : 천외검문의 비전절기로 장로이상의 고수만이 십이해 모두 익힐 권한이 있었음. 검학의 최고봉중의 하나로 고금십대절기 중의 하나. [2] 뇌정도법(雷霆刀法) : 뇌정천궁(雷霆天宮)의 최고절기. 도법(刀法)중에서 파괴력만을 따진다면 가장 뛰어남. 천하의 수많은 도법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듦. 반드시 뇌정도(雷霆刀)로 펼쳐야하며 다른 도는 뇌정(雷霆)의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뭉그러져 버림. [3] 천절(天絶) 종리도전(鍾離倒轉) : 무외신궁(無畏神宮)의 일대궁주로서 백년전 중원(中原)오절(五絶)중의 일인. 무성(武聖) 종리현도(鍾離弦渡)의 조부가 됨.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1 다음날 오후 유시(酉時17-19시)초, 해가 서산으로 달려갈 무렵에 일행은 하북팽가(河北彭家)가 있는 창주부(滄州府)에 도착했다. 창주는 연경(燕京:북경)과 항주(杭州)를 연결하는 대운하(大運河)의 중요한 포구중의 하나로서 강남(江南)과 화북(華北) 집산물(集散物)의 중요한 기착지(寄着地) 중의 하나였다. 하북팽가는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교역과 일대의 상권을 지배함으로서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여타의 세가처럼 하북팽가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의 혼란기를 전후하여 형성되었고, 강호(江湖)의 칠대세가 중의 하나가 된 것은 수(隋)·당(唐)시대에 들어서였다.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무공에 대한 자질을 타고난 무수한 기재(奇才)들이 나타나 무공을 창안하고 이를 발전시켰다. 기초무공인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는 외문(外門)제자의 중심무공이었으며 또한 본가(本家)도법의 기초수련을 위한 무공이었다. 본가의 직계혈족이나 가신 이상이 되면 내공인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기반으로, 쾌를 중심으로 한 전광도법(電光刀法), 변화위주의 녹우도법(綠雨刀法), 파괴력 위주의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중에서 한 가지를 주로 익히게 되었다. 그 외에 권장법(拳掌法)도 몇 가지 있지만 그다지 강호에 알려지진 않았다. 미완성의 도법으로 유성단천도법(流星斷天刀法)이 있지만 현재까지 이 무공을 완성한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운하(運河) 연변에 위치한 창주부내로 들어서자 교통의 요지답게 길가 양쪽의 점포와 함께, 말과 마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어 지나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한참을 동쪽으로 가다가 표국(驃局)의 인물들은 표국으로 마차를 끌고 사라졌으며, 다시 북쪽으로 말을 돌려 백 장(丈) 정도 가니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수십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으로 이루어진 장원이 한 채 나타났다. 현판만 해도 높이가 반 장(丈)에 좌·우의 길이가 이 장(丈) 가까이 되는 거대한 대문은 쳐다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할 만큼 크고 높았다. 말에서 내려 대문을 지났다. 호문위사들이 있었지만 미리 기별을 받았는지 길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바깥쪽 큰 대문을 지나서 다시 두개의 문을 지나자 이층의 커다란 대청(大廳)을 지닌 누각(樓閣)이 나타났다. 현판에 집도청(集刀廳)이라 써 있는 것을 보니 팽가의 중요대사를 논의하는 곳인 것 같았다. 입구 앞에는 사십 대의 각이진 얼굴의 강한 인상의 인물이 예닐곱의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팽수문이 다가가 절하며, “둘째 숙부(叔父)님, 어인일로 마중을 나오셨는지요. 역시 단리대협 때문입니까?” “그럼 내가 무슨 일로 이리 나와서 기다리겠느냐? 설마 못생긴 네 얼굴이 보고 싶어 기다린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하하하, 원. 숙부님도....” “딴소리 말고 소개나 시켜다오.” “그러지요. 단리대협, 여기 이분은 제게 숙부 되시는 팽(彭)자 현(玄)자, 표(豹)자 되시는 분입니다. 강호에는 단호참도(斷虎斬刀)로 알려졌지요.” 팽수문이 단리유아에게 단호참도를 소개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하게, “팽선배,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후배 단리유아(段俚唯我)라 합니다.” 단리유아의 태도에 잠시 멈칫하다가 크게 너털웃음 지으며, “하하하, 만나서 반갑소, 단리소협. 과연 소문(所聞)대로의 모습이구료.” “....” “이런, 어서 들어가지요. 아버님과 가문 어르신들께서 안에서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팽현표의 인도를 받아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 양옆으로 남녀노소의 많은 인물들이 앉아있고, 전방의 태사의에는 백발홍안(白髮紅顔)의 인물이 양옆으로 사오십 대의 장년인(長年人)을 거느리고 단리유아가 들어오는 모습을 유심히 주시하며 앉아 있었다. “조부님, 소손 수문이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하온데, 관정대사님의....” 태사의의 노인이 팽수문의 말을 끊으며, “됐다. 네가 보낸 서찰(書札)을 보고 오히려 일이 잘되었음을 알았으니. 그 일은 나중에 네 아비에게 자세히 얘기하고 이만 물러가 쉬어라. 오늘은 그보다 중요한 손님이 오셨으니.” “그럼, 조부님, 여러 어르신들. 소손(小孫)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단리대협, 대협과는 나중에 다시 뵙지요.” 단리유아가 마주 포권하며 인사한 다음에 팽수문은 아우들을 데리고 대청을 물러난다. “아버님, 이 청년이 그 사광(四狂)의 일인으로 강호에 유명한 전광(戰狂) 단리유아(段俚唯我)소협 입니다.” 팽현표가 소개하자, 노인이 웃으며, “허허허, 알고 있다. 나와 같은 십대고수(十大高手)의 일인으로 그 위명을 드날리는 분인데 모를 리가 있느냐? 만나서 반갑소, 단리소협, 이 늙은이가 도왕(刀王)으로 불리는 사람이라네.” 단리유아가 마주 포권하며 인사하려 할 때, 상대의 내공(內功)이 다가와 밀친다. 도왕이 무공을 시험함을 알고 대응했다. 내공을 증가할수록 밀치는 힘도 따라 증가함을 보고, 계속 맞부딪친다면 내상을 입거나 상대의 위신에 금이 될 것 같아서 구전결(九轉訣)을 이용해 일부는 흡수하고, 일부는 흩어버렸다. “말학후진(末學後進), 단리유아가 도왕 어르신께 인사드립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상시의 평이한 어조로 무표정한 얼굴로 단리유아가 인사한다. 단리유아의 태도에 당황한 기색이었다가 소문을 상기하고는 도왕이 경탄한 어조로, “허,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그대의 소문을 듣고 반신반의 했는데. 정말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료. 아니, 오히려 소문이 더 부족한 듯 보이는구려. 지금 그 나이에 그런 내공이라니....” “과찬(過讚)이십니다. 제 내공이 약간 특수해서 이득을 본 것일 뿐,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도왕 어르신의 내공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닐세, 아니야. 어찌 단순히 내공의 고하나 구결(口訣)의 우수함으로 그 이치를 따질 수 있겠나. 그 자신의 성취가 따르지 못해서 운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지.” “후배에게 너무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하하하, 겸손하기도 하구려. 그럼 이쯤해서 그 얘기는 그만하기로 하고 여기 있는 본가 사람들과 인사부터 나누게.” 도왕 좌·우에 시립했던 인물들이 도왕의 아들로, 왼쪽의 육척의 키에 단정한 모습의 인물이 도왕의 큰아들이자 현(現)가주(家主)인 팽인표(彭仁豹)로서 강호에는 강북인도(江北仁刀)로 알려져 있었고, 오른쪽의 육척이 못되고 문사(文士) 차림의 지혜로워 보이는 인물이 평지표(彭智豹)로서 철관도(喆觀刀)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서로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한 후에, 다시 양옆의 인물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여보게, 단리소협. 피곤할테니 우선 행장(行裝)을 푼 후에, 조금 있다가 저녁을 같이하면서 자세한 얘기를 나누도록 하세. 현표야, 네가 접빈각(接賓閣)에 안내해서 쉬시게 하여라.” 도왕과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한 후에, 팽현표를 따라 나가 하녀(下女)의 안내를 받아 동쪽의 접빈각으로 향했다. 팽현표가 하녀를 시켜 안내하게 한 후에 다시 대청에 들어오자, “현표야, 단리소협은 접빈각으로 잘 안내해드렸느냐?” “예, 아버님. 청란(靑蘭)을 딸려서 보냈습니다.” 팽현표의 대답에 놀라고 화가 나서, “뭐라고, 아니 네가 직접가지 않고 겨우 하녀를 보냈단 말이냐? 네 녀석은 무슨 손님 접대를 그 따위로 하는 거냐?” “아버님, 나이도 어린 녀석인데 제가 직접 따라가서 안내하라니요?” “뭐? 이 철없는 놈아. 비록 그가 이제 약관(弱冠)을 지난 지 얼마돼지 않지만 강호생활만 벌써 십이 년이다. 게다가 십대고수의 하나로 나와 나란히 하는 인물인데 그런 식으로 대한단 말이냐?” “그래도....” “닥쳐라.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강호인(江湖人)들이 본가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가문의 위세만 믿고 나이가 어리다고 명성(名聲)이 자자한 인물을 무시한다고 여기지 않겠느냐? 또 나머지 사광(四狂)의 인물들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불같이 화내는 도왕을 말리며 큰아들 팽인표가, “고정하시지요. 셋째가 별다른 생각 없이 다른 젊은이 같이 대우(待遇)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별로 무공이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그 말을 듣고 도왕이 더 화를 내고 기가 막혀서, “뭣이? 아니 명색이 가주(家主)라는 녀석이 그렇게 안목(眼目)이 형편없다니. 둘째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저도, 그가 비록 아버님과 내공을 겨룰 정도지만 아버님이 사정을 보아서 내공을 물려준 것으로 보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까? 또, 무슨 기도(氣度)나 풍채(風采)가 뛰어나 보이지도 않던데요.” “아니, 본가(本家)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네 녀석도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냐? 너는 내가 내공을 보낸다면 아무런 흔적 없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흩어버릴 수 있겠느냐? 좀 전에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팔성 이상의 내공을 사용했단 말이다. 그래도 그가 평범해 보이느냐? 허허허, 진정 그렇게 보았다면 너희의 안목이 형편없거나 그가 너희를 속일 정도로 무서운 인물이구나. 쯔쯪, 본가의 앞날이 걱정되는구나” 탄식하며 자식들의 안목이 낮음을 도왕이 말하자 모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 “.....” “겉모습이 다가 아니다. 그가 십이 년 동안 강호(江湖)를 떠돌면서 정당한 비무(比武)만 했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정당한 비무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비무 후에 암습(暗襲)을 받거나 비무 전에 공격당한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지 않느냐?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강호에선 싸움에서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지만 최후의 승자는 바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그가 승(勝)보다 패(敗)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천패무광(千敗武狂)으로 비하하지만 진실로 그가 이기고자 했다면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보니 나조차 승부를 장담 못할 정도인데. 진정으로 몇 사람이나 그를 이긴다고 할 수 있겠느냐?” 팽현표가 도왕의 말에 반박하여, “그래도, 실제로 어려서부터 많이 패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강호(江湖)에선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현재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과거에 그가 아무리 많이 패(敗)했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항상 그대로 정체되어 있다면 모르지만 그가 나날이 발전해 나간다면 과거의 승패가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 너희들도 명심해라. 현재에 만족해서 안주(安住)하는 자는 필히 미래에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노력하고 노력해라. 그를 보아라. 처음 강호에 나왔을 때 변변한 초식 하나도 제대로 펼칠 줄 못했을 그가 지금은 어떠하냐? 너희는 단지 운(運)이 좋아서 그가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천재(天才)라서? 근골(筋骨)이 좋아서? 아니다. 물론 약간 오성(悟性)이 뛰어 나겠지만 어렸을 적 그의 모습은 보잘 것 없었다고 들었다. 아마 밤낮으로 무공을 연구하고 노력했겠지. 의문이 생각나면 해결할 때까지 생각하고, 해답이 보이면 싸워서 맞는지 비교했을 것이다. 그러니 승패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겠지. 앞으로 너희들은 절대 그에게 무례하지 마라. 어린애들과 아랫것들에게도 명심하도록 일러라. 만일 그에게 무례했다간 내가 직접 벌을 내릴테니. 이따가 저녁에 식사할 때도 그가 사양하기 전까지는 꼭 경어를 써라. 나이는 어리지만 나와 같은 배분(拜分)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도왕의 이야기에 모두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이 여태 너무 현실에 안주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 생각하면서. 잠시 후 사람들은 각자 생각에 잠겨 자리를 떴다. 이 중에서 십오 세 정도의 청의소녀와 면사를 쓴 여인이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떴다. “큰언니, 정말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가 대단해 보였어? 난 아무리 생각해도 키만 크고 비쩍 말라서 볼품없던데. 잘생긴 것도 아니구. 위풍당당한 것도 아니던데. 응? 언닌 어떻게 생각해?” “소수(小繡)야, 너는 얘기할 때 그의 얼굴표정과 목소리를 기억하니?” 언니의 물음에 청의소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응? 얼굴표정? 목소리? 잘 모르겠는데. 단지 조용한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 “소수야,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표정의 변화가 있고, 특히 목소리에는 감정(感情)이 담겨있단다. 기쁨에 찬 목소리와 환한 표정, 슬픈 얼굴과 울적한 목소리, 화난 표정과 분노에 차서 떨리는 목소리 등등. 그런데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더구나.” “아무런 표정도, 목소리의 변화도 없었단 말이야? 언니, 그게 사람이야? 혹시 강시(彊屍) 아닐까? 귀신에 홀린 것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지?” “그래, 소수야. 오욕칠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지. 도(道)를 깨우친 성인(聖人)이거나.....(감정을 잃어버린 경우겠지. 슬프면서도 오히려 더 무서운.) 도대체 어떤 일이.....” “언니, 무슨 말이야?” “응? 아니, 아니야. 혼자 말이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그 사람과 부딪히더라도 긴 얘기하지 말고 할아버지 말대로 공손하게 인사만 하렴. 알았지?” “응, 언니.” 팽수문의 사촌, 팽수수(彭秀繡)와 천하오화(天下五花) 중의 북천한련(北天寒蓮) 팽수련(彭秀蓮)과의 대화였다. 다른 사람들도 각기 자신의 거처로 떠나면서 아까 본 그에 대해 생각하거나 옆 사람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단리유아는 하녀의 안내를 받아서 동쪽에 있는 삼층(三層)의 누각(樓閣)으로 향하면서 아까 본 대청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도왕의 무공은 역시 생각했던 것처럼 대단하게 보였다. 현 가주와 그의 형제들도 거의 화경(化境)에 근접한 것처럼 보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역시 절정(絶頂)고수 이상의 수준이었다. 면사(面紗)를 쓴 여인이 특이하게 화경의 경지에 다다른 것처럼 여겨져서 약간 뜻밖이었지만. 절정이상의 고수가 삼십여 명이니 과연 칠대세가의 한 곳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도왕의 모습을 직접 대한 것이 가장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아마 지난번에 만난 요동마도(遼東魔刀)보다 반수 정도 앞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록 내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겠지만. 이번에 꼭 비무(比武)를 해보아야겠다. 지난번 요동마도처럼 내 무공의 단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을 대성(大成)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쉽지는 않겠지. 혹 유성단천도법(流星斷天刀法)을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텐데. 볼 수 있으려나? 흠, 저녁식사에 늦지 않으려면 우선 좀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겠지. 서둘러야겠군, 시간이 얼마 없으니. [참조 & 설정] [1] 천하오화(天下五花) : 당시 강호오대미인. 북천한련(北天寒蓮) 팽수련(彭秀蓮), 동천요미(東天妖美) 우문수미(宇門琇美). 남천검국(南天劍菊) 추화국(秋華菊), 서천독장(西天毒薔) 당시장(唐嘶薔), 천중일미인(天中一美人) 종리수정(鍾離睡晶).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2 저녁이 되자 여기저기 불을 밝힌 등롱(燈籠)이 걸리고 단리유아도 시비(侍婢)의 안내를 받아서 연회(宴會)장에 들어섰다. 상단에 일렬로 나란히 선 세 개의 탁자와 그와 잇닿아서 양쪽 두개의 탁자로부터 이어진 탁자가 두 줄로 늘어서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분주히 음식과 술을 나르는 하녀와 하인들, 대부분의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며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몹시 분주해 보였다. 아래보다 일척 정도 높은 상단의 탁자에는 중앙에 도왕(刀王)이, 오른쪽으로 가주(家主) 삼형제가, 왼쪽으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늙은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노파(老婆)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팽수문의 안내를 받아서 상단의 좌석으로 다가갔다. 도왕이 일어서며, “어서 오시게. 단리소협. 소협을 위해 이렇게 연회를 마련했다네.” “어르신. 과분한 대접에 말할 바를 못 찾겠습니다.” 단리유아가 조용히 인사를 하자 도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며, “이리로 어서 올라오게. 자네에게 소개해 드릴 분도 계시니.” 상단으로 올라가 도왕 옆의 왼쪽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여기 이분이 내 손녀아이의 사부(師父)되시는 분으로 나보다도 반배이상 배분(拜分)이 높다네. 강호에서는 한매신녀(寒梅神女)로 알려졌던 분이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늘고 볼품없는 얼굴을 보고 팔구십년 전의 유명한 미인(美人)이자 고수였던 한매신녀(寒梅神女)의 모습은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그 기도(氣度)는 범상치 않아서 일대에 차가운 한기(寒氣)가 서린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무도 옆으로 다가가 앉지 않은 것일 것이다. “후배 단리유아(段俚唯我)가 한매신녀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무심한 어조의 단리유아의 인사에 반쯤 감긴 희미한 눈초리로 싸늘히 노려보며, “흥! 무슨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인물이구만, 노신을 예까지 걸음을 하게 하더니. 연설심(燕雪心)이라하네.” 마지못해 인사하는 노파에게 인사하고 돌아서자, 난처한 얼굴로 도왕이, “원래 노선배님의 성품(性稟)이 그러하니 자네가 이해하게. 그리고 여기 내 옆의 자리에 앉게.” 단리유아가 자리에 앉자, 도왕이 좌중을 조용히 하게 한 후에, “오늘 본가(本家)에 귀한 손님이 오셨기에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아까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못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분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강호(江湖)십대고수(十大高手)의 일인으로 나와 어께를 나란히 하는 분으로 강호에 전광(戰狂)으로 알려진 분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며칠 밖에 본가에 머물 수 없지만, 항시 예를 다하고 무학(武學)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면 찾아가 공손히 물어보도록 해라. 자, 단리소협, 한 말씀 하시게.” “오늘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팽가의 여러 선배님과 후배들을 만나게 되어 저도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단리유아라 합니다.” 단리유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큰소리의 함성과 웃음소리와 함께 저녁을 겸한 연회가 시작됐다. “여보게, 먼저 노부의 술을 한잔 받게.” 단리유아는 술잔을 들어 술을 받아서 입술만 축인 후에 술잔을 내려놓고 술병을 들어 도왕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네. 왜 술을 들지 않고 바로 내려놓는가? 술이 마음에 안 드나? 다른 술도 있으니 다른 술이 필요하다면 말만하게.” 도왕의 말에 단리유아가 무심한 태도로 말한다. “아닙니다. 어찌 객(客)의 입장으로 술의 호오(好惡)를 논하겠습니까? 제가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아서 그랬을 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대신에 차(茶)를 주십시오.” 도왕이 단리유아의 목소리를 듣고 속으로, ‘아니, 이 어린 친구는 도대체가 표정의 변화가 없구만. 정말 싫어해서 그러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네. 강호에 소문을 듣기로 얘기하는 것이 마치 목석과 같다고 하더니 정말 영락없네.’ 생각을 멈추고 단리유아를 보면서, “아니, 강호인(江湖人)이 되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단 말인가? 이제껏 마신 적도 없었나?” “왜 술을 마신 적이 한번도 없었겠습니까, 단지 정신(精神)을 맑게 하기위해서 술을 멀리할 뿐이지요.” “허허, 알겠네. 정말 대단하구만. 여봐라, 여기 단리소협께는 차를 내드려라. 음, 용정차가 좋겠군.” 도왕이 시비에게 명하여 차를 시킨 후에, “자네가 술을 멀리하는 것은 무공 연마에 지장이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겠지?” “예, 그런 이유도 있지요. 그러나 강호(江湖)에 칼을 들고 살아간다면 항시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도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설마, 자네는 본가(本家)가 자네를 해칠 생각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어르신,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항시 그런 생각으로 술을 멀리하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습관이 된 것뿐이지요.” “그래, 그런가? 허허허, 그런 마음가짐이니 지금 같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겠구만. 오히려 내가 부끄럽군.” “아닙니다. 술을 마시고 마시지 않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단지 맑은 정신을 항시 유지할 수 있다면.” “아닐세, 사람이 강호에 살면서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술과 여인을 무공을 연마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적이라고 일컫지만 그 둘을 멀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한매신녀가, “술과 여자가 최고의 적이라고? 흥, 자네, 나는 여자가 아닌 줄 아는가? 술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무슨 자랑이요 대수인가?” “이런, 선배님, 그런 뜻이 아니란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영웅호색(英雄好色)이란 말도 있듯이, 술과 여자를 멀리하는 자가 큰일을 이루겠는가? 잘해야 도사(道士) 나부랭이나 돌중이 될 뿐이지. 자네의 수련(秀蓮)과 저놈에 대한 생각을 내 짐작하지만, 흥! 내가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어림없는 짓이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하지. 저런 목석(木石)같은 놈이 뭐가 좋단 말인가? 흥!” 코웃음 치고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당황한 도왕이 미안한 기색으로, “미안하네. 선배님이 내 뜻을 곡해(曲解)하고 화가 나서 나간 것 같네.” “별말씀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혀 변화가 없는 무심한 음성으로 단리유아가 말하고 한매신녀의 말을 생각해본다. ‘설마하니 북천한련(北天寒蓮) 팽수련(彭秀蓮)과 나를 맺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까 면사(面紗)를 뚫고 바라보니 소문대로 미인(美人)이기는 했지만, 나에게 그리 호감(好感)이 있어 보이지는 않던데? 또 설혹 그쪽에서 마음이 있다 해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될 것 같지도 않은데.... 아마도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은 먼 후일 것이다. 운명(運命)에서 벗어난 후인. 현재의 메마른 감정에서는 어떠한 감정을 느끼기도 표현하기도 어려울 테니.’ 화제를 바꿔서 서로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듣자하니 자네 남경(南京)까지 급한 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죄송합니다. 제 일신상(一身上)의 일이어서 밝히지가 어렵군요.” “뭘 그 정도 갖고 미안해하고 그러나? 그래 언제까지 남경에 도착해야하는가?” “다음달 시월말일 전까지는 도착해야합니다.” “그러면, 시일이 촉박하군.” “예, 그래서 원래는 어르신도 뵙지 못하고 바로 떠나려고 했지요.” “흠, 그랬었나. 얘 둘째야, 여기에서 남경까지 얼마나 시일이 걸리겠느냐?” 도왕의 물어보는 소리에 팽지표(彭智豹)가, “남경까지라면, 평시라면 보통 한 달 정도 걸립니다. 객선(客船)이라면 보름 정도 더 걸리겠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곳곳에서 전란(戰亂)이 일어나는 혼란기(混亂期)라서 평시보다 두 배 이상 걸린다고 봐야지요.” “오늘이 구월 이십사일이니 시간이 부족하겠는데? 더 빠르게 갈 방법은 없겠느냐?” “본가 휘하의 표국(驃局)에 속도가 빠른 배가 몇 척 있습니다. 특수하게 시일이 촉박한 표물을 운반할 때 쓰는 배이지요. 속도는 빠르지만 승선인원을 전부 합한다 해도 십오 인에 불과해서 잘 쓰지는 않습니다. 아마 그 배라면 한달 이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평시라면 칠팔 일은 단축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흠, 그러면 대략 닷새 정도의 여유가 있겠군.” “그렇겠지요. 아버님.” “단리소협, 그럼 사흘은 본가에 머물러도 되겠군. 나머지 이틀은 혹시 모르니 미리 출발하기로 하고, 어떤가?” “어르신, 어르신께서 신경써주시니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닐세,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나? 나중에 강호(江湖)에서 본가의 인물들을 만난다면 자네가 한발 양보하고 도움을 준다면 되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하지요.” 이때 팽가의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한다. “단리대협, 듣자하니 대협의 무공이 높다고 강호에 소문이 자자하지만 실제로 저희는 본적이 없으니 이 기회에 한 가지 묘수(妙手)라도 보여주시지요.” “옳소. 맞소이다.”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도왕이 손을 들어 진정시킨 후, “여보게. 나도 소문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으니 흥을 돋우기 위해서라도 한 수 보여주는 것이 어떤가?” “그럼, 변변찮은 솜씨지만 여흥(餘興)을 위해서라도 솜씨를 보여주어야겠군요.” 도왕의 말에 단리유아가 허공섭물(虛空攝物)로 술 단지를 들어올린 후, 술 단지를 탁자 앞으로 이동하여 멈추었다. 각자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십 장(丈) 안의 탁자를 한 바퀴를 돌며 모든 술을 따랐다. “별다른 솜씨는 아니지만, 제 성의이니 모두 술잔을 들어 건배(乾杯)를 하십시다.” “와! 와! 최고다” 여러 사람의 외치는 소리와 함성이 들리며, 연회는 더욱 흥겨운 기분이 나서 모두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구만, 나도 허공섭물(虛空攝物)로 십 장(丈)이내의 물건을 제어할 수 있지만, 자네처럼 오랫동안 자유자재로 허공을 움직이며 술의 양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네.” “별 것 아닙니다. 술 단지를 들어올려 움직인 후에 술잔의 양 만큼만 술을 따르는 것은 화경(化境)의 경지에 든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저는 제어력(制御力)이 조금 높고 내공이 특별해서 오랜 시간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뿐이지요.” “자네, 겸손이 지나치구만. 말처럼 그렇게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지. 자네 모습을 보니 수어검(手御劍)도 완성한 것 같은데, 혹시 완성했나?” “아닙니다. 아직 십 장(丈)밖으로는 어렵습니다.” “대단하구만. 나도 이제 막 어검술(御劍術)에 들었는데, 아직 제어력이 형편없다네. 단지 똑바로 십 장(丈)밖의 물건을 베고 돌아올 정도에 불과해서 자네처럼 허공에서의 자유자재한 변화는 어림도 없지.” “어르신도 성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거리보다는 우선 제어력에 더 신경을 쓰다보면 제어력은 금방 늘지요. 오히려 거리를 늘이는 것이 훨씬 힘듭니다.” “그래, 나도 우선은 제어력에 집중해야겠군. 허허허,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의 무공은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오히려 어르신의 무공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은 강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허명을 뿐이지. 자네를 보니 정말 내가 형편없게 생각되는군.” “아닙니다. 결코....” 도왕이 손을 들어 말을 막으며, “됐네, 그 얘기는 그만하세. 그보다 자네는 무공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근골(筋骨), 오성(悟性), 노력(努力), 영약(靈藥), 외부의 도움 같은 것 중에서.” “글쎄요. 저는 어느 것을 우선해야할지 모르겠군요. 저는 무공(武功)마다 각기 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근골이 우수하다면 익히는 것이 빠르고, 어떤 것은 복잡해서 노력보다는 오성이 빠른 것이 도움이 될 테고, 어떤 것은 근골이나 오성보다는 단순한 끊임없는 노력이 더 중요하기도 하겠지요. 여기에 영약이나 외부의 도움이 있다면 성취가 더 빠르겠지만 그런 도움의 문제점은 일정수준에 이르면 한계(限界)에 다다르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도왕이 궁금한 얼굴로, “그래. 그럼 자네는 어떤 경우라고 생각하는가? 도왕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저는 근골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영약이나 외부의 도움도 별달리 받지 못했습니다. 오성(悟性)이 약간 뛰어난 편이었지만 오히려 노력이 지금의 저를 가능케 했다고 봅니다.” “노력이라? 그럼 자네는 노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보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천재(天才)라도, 천부적(天賦的)인 근골(筋骨)을 타고 났더라도 노력이 부족하다면 화경(化境)의 경지에 들기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절정(絶頂)의 경지까지는 아주 빠르고 쉽게 다다르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는 것이 특히 어려운데, 워낙 어려움이 없다보니 막상 벽에 부딪히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입니다. 반대로 오성(悟性)이나 근골(筋骨)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절정(絶頂)의 경지까지 다다르기 위해 무수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단 화경(化境)에 든다면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근골이나 오성이 최적의 상태로 바뀌어져 이후에는 오히려 노력하는 자가 훨씬 성취의 속도가 빠르게 됩니다. 과거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중에서도 소싯적에 천재(天才)라 불리거나 근골(筋骨)이 뛰어났다고 알려진 인물은 오직 천강무종(天剛武宗)뿐이고, 다른 인물들은 평범하거나 약간 뛰어난 정도로 그리 찾아보기 어려운 근골과 오성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노력하는 자를 선천적(先天的)으로 우수한 신체를 타고난 사람보다 높게 봅니다. 그러나 또 현경(玄境)의 경지는 그런 자질이나 노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나서 잠시 생각하다가 도왕이, “그러나 보통 사람이 노력만으로 상승(上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 않나?” “물론 그렇습니다. 사람이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하여 천부적(天賦的)인 재능(才能)을 타고난 사람을 이기긴 아주 힘들지요. 그러나 만일 약간의 운(運)과 도움이 보태진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하늘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문을 열어주는 법입니다.” “자네와 얘기를 해보니 자네가 그간에 행한 노력이 보이는듯하군. 아마 자네는 밤낮으로 무공을 생각하며 노력했겠지? 그래서 이런 경지에 어린 나이에 이른 것일 테고.” “강호(江湖)에서 여러분의 도움도 받았고 운(運)도 따랐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니네.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노력하는 자에게 하늘도 문을 열어주는 법이라고. 자네의 노력을 보고 도와줄 맘이 들었겠지. 나도 자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정도이니. 자네, 나하고 비무(比武)해보지 않으려나?” “어르신께서 비무해 주신다면, 저는 불감청(不敢請)일지언정 고소원(顧所願)입니다.” “하하하. 그래. 그럼 언제쯤 한번 해볼까? 내일이나 모래가 어떨까? 글피에는 떠날 준비도 해야할 테니.” “저는 어르신께서 원하시는 날에 하도록 할 테니 어르신이 날을 고르십시오.” “흠, 가만있자, 아무래도 내일 오후에 하는 것이 좋겠군. 혹시라도 상처가 생긴다면 대충이라도 치료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어떤가?” “좋습니다.” “그럼 내일 정오를 지나서 미시(未時:13-15시)경에 하기로 하고 장소는 본가의 연무장(鍊武場)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도왕이 가주(家主)인 팽인표(彭仁豹)를 돌아보며, “너도 들었으니 알겠지만, 내일 단리소협과 비무하기로 했으니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라.” “하지만 아버님. 이제 연세도 있으시고, 불상사도 생길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이 대신....” “됐다. 여러 말할 것 없다. 내가 먼저 청해서 한 것이니. 그동안 싸워보지 못했으니 내 무공의 허실을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이놈들이 애비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내 비록 십여 년간 실전(實戰)을 해보지 못했지만 아직도 젊은 놈들 못지않게 기력(氣力)이 충만하니 걱정할 것 없다.” “휴, 알겠습니다. 아버님. 준비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단리대협, 혹시나 하는 얘기지만 될 수 있는 데로 불상사는 피해주시요.” “알겠습니다. 노선배님보다 제가 더 걱정이지만 최선을 다해 불상사가 없도록 노력하지요.” “흠, 그럼 그렇게 하고, 이쯤해서 그만 연회를 파하기로 하고 자네도 푹 쉬도록 하게. 나도 운공(運功)을 하며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으니.” 내일의 비무(比武)를 약속하고 각자 연회장을 나와 헤어졌다. 시비의 안내를 받아서 접빈각(接賓閣)으로 향하며 단리유아도 생각에 빠졌다. ‘나도 내일의 비무를 준비하려면 내 무공과 팽가(彭家)의 무공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겠지. 운공을 해서 내기(內氣)도 가다듬어야겠고. 내일의 비무가 기대된다. 이제껏 상대한 고수(高手) 중에서 최고의 실력자이니.’ 내일의 비무에 대한 기대로 시비의 걸음을 재촉해서 접빈각으로 향했다. [설정 & 참조] [1]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 : 시간상으로 천마노조(天魔老祖:진시황(秦始皇)시대), 천강무종(天剛武宗:진시황말부터 초(楚)·한(漢)의 천하쟁탈기(天下爭奪期)), 감리천종(坎離天宗:전한(前漢)말), 천외검성(天外劍聖:후한(後漢)말), 무상대선사(無上大禪師:당(唐)초) ***** 어떤 분이 댓글에서 설정부분을 본문에 끼워 넣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던데요. 제 생각은 설정부분을 본문에 끼워 넣을 경우 본문 글의 흐름이 끊기거나 쓸데없이 용량이 너무 많아져서 지루한 느낌이 들까보아서 그런 겁니다. 단지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도로 설정부분은 보아 주십시오. 시간이 지나서 앞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설정부분도 자연스럽게 본문에 삽입될 테니까요. 좋은 지적을 해주셔서 감사하구요. 혹시, 오타나 내용전개가 껄끄러운 부분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3 다음날 정오를 지나서 유시가 가까워지자, 단리유아는 팽수문의 안내를 받아서 팽가(彭家)의 서쪽에 있는 연무장(鍊武場)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한 방향의 길이가 백 장(丈) 정도 되는 거대한 정방형(正方形)의 공터였다. 북쪽으로부터 칠십여 장(丈) 정도 되는 지점을 따라 말뚝을 박고 줄을 쳐서 임시로 비무장(比武場)을 만들었다. 그 나머지 공터에는 팽가의 주요인물 백여 명이 모여서 오늘의 비무를 구경하려고 모여 있었고 주변의 고루(高樓)에는 아녀자들과 시비로 보이는 여인들이 역시 지켜보고 있었다. 비무장 안에는 한매신녀(寒梅神女)와 가주(家主) 삼형제, 도왕(刀王)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하, 어서 오게. 그래 어제는 잘 쉬었겠지?” 도왕의 질문에 단리유아가 평온한 어조로 인사하며, “예, 어르신께서도 평안(平安)하셨습니까?” “나야 무슨 일이 있겠나? 단지 간만에 하는 비무(比武)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설쳤을 뿐이라네.” “저도 오늘의 비무가 무척 기대되었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다네. 오늘 한번 원 없이 싸워볼 수 있겠군. 이제까지 마땅한 적수(敵手)가 없어서 전력을 다해 싸워본지가 하도 오래되었다네.” “오늘 도왕 어르신의 고절(高節)한 무공을 볼 수 있을 테니, 저 역시도 기대가 됩니다.” 이때,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매신녀가, “빨리 시작하세.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가?” “허, 흠흠. 그럼 시작하기로 할까? 여기 연(燕)선배님이 공증이 되어 주실 것이고, 그리고 저 세 녀석이 주위를 지켜서 누가 난입하거나 방해하지 못하도록 할 걸세. 혹시 다른 생각이라도 있나?” “아니 없습니다. 어르신. 그대로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싸우기로 할까?” 도왕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 조용하고 무심한 어조로, “한쪽에서 패배를 시인(是認)하거나, 상처가 심해서 신형(身形)을 가누지 못하지 않는 한 계속하기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네 좋아. 그렇게 한다면 서로의 무공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겠군. 연(燕)선배님, 그럼 공증을 부탁드립니다.” “알았네. 알았어. 무슨 싸움이 그렇게 좋아서 들떠있나. 원 나잇살은 먹어가지고 젊은 애하고 비무라니. 쯔쯧, 어서 시작이나 하게.” 한매선녀가 재촉하며 북벽(北壁)쪽으로 물러서자 가주와 그 형제들도 나머지 방향으로 물러났다. “그럼 시작하기로 하세나. 자네가 먼저 선공(先攻)하겠나?” “예. 제가 선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도왕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먼저 선공하기로 하고 각기 거리를 벌렸다. 각자 거리를 벌려서 십 장(丈)정도 떨어졌다. 단리유아가 검을 빼드니 도왕(刀王) 역시 등 뒤에서 칼을 뽑았다. 도신(刀身)의 길이만 사 척(尺) 가까이 되는 금빛의 장도(長刀)였다. 아마 도왕의 애병(愛兵)으로 알려진 금서도(金犀刀)인 것 같았다. 도를 들고 선 모습이 앞선 모습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임을 보여주었다. 전에는 나이든 풍채(風采) 좋은 노인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마치 대군을 호령하는 대장군(大將軍)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 했다. 서로 칼을 겨눠서 예를 표한 후, 단리유아가 먼저 선공에 들어갔다. 일로행(一路行)으로 앞으로 곧장 다가간 다음 검을 휘둘렀다. “청풍농월(淸風弄月)” 하늘하늘 나부끼는 낙엽처럼 느릿느릿 검이 다가간다. 이 초식(招式)은 강서성(江西省) 파양호(鄱陽湖)주변의 일대고수(一代高手)인 군자검(君子劍) 반초하(潘焦夏)의 성명절기로 겉모습은 부드럽고 유연한 검초이지만 막상 검(劍)을 마주칠 때에 변화(變化)가 심해서 공격지점을 예측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검초였다. 도왕이 단리유아의 검초를 보고 감탄한 얼굴로, “허허, 대단하구만, 군자검(君子劍) 반(潘)선생이 직접 펼쳐도 이보다 완전하게 펼칠 수 없겠구만. 나도 질 수 없지.” 말과 함께 도를 들어, “녹우사(綠雨絲)” 녹우도법(綠雨刀法)의 일초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직접 공격해온다. 검광(劍光)과 도광(刀光)이 일고, 검과 도가 계속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챙! 채챙!” 단리유아가 오른쪽으로 한 걸음 물러선 후에 다시 도왕의 어께를 노려서, “무극무변(無極無變)” 곤륜파(崑崙派) 태청검법(太淸劍法)의 일초로 무변(無變)으로 만변(萬變)을 제압하는 이치가 담긴 초식이었다. “전광섬(電光閃)” 이에 도왕이 전광도법(電光刀法)의 일초로 단리유아의 가슴을 향해 공격해왔다. 단리유아가 그의 어께에 상처를 입힐 수 있겠지만, 도왕은 자신의 가슴에 일도(一刀)을 날릴 수 있으니 해보나마나 단리유아의 손해가 더 컸다. 할 수 없이 단리유아가 물러서자 도왕이 앞으로 나서며, “혼원구전(混元九轉)” 원래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은 혼원도법(混元刀法)과 벽력도법(霹靂刀法)을 합쳐서 다시 창안한 것이어서, 혼원벽력도법을 대성하려면 혼원도법과 벽력도법부터 익히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이 일초는 그런 혼원도법(混元刀法)의 일초로서 상대가 막는다면 다시 잇달아 아홉 번의 연환(連環) 공격을 받게 되는 초식이었다. “구궁문개(九宮門開)” 단리유아가 급히 무당파(武堂派) 구궁검(九宮劍)의 일초로 막았지만, 연이은 격돌로 손목이 아플 정도의 충격이 느껴졌다. 약간 손해 본 것을 느끼고 부딪치는 힘을 이용해 신형을 후상(後上)면으로 날리며, “천심탈인(穿心奪刃)” 안휘성(安徽省)의 마도명문(魔道名門)인 마검문(魔劍門)의 탈명십삼검(奪命十三劍)의 일초를 펼쳤다. 쾌검(快劍)으로서 어떤 자세에서도 시전 할 수 있었다. 도왕 역시 이에 물러서지 않으며, “전광뇌(電光雷)” 전광도법의 이초로 맞섰다. “챙. 챙. 콰, 쾅. 파, 팡”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공방전 속에 서로의 검과 도가 부딪히는 소리와 그 충돌에 땅이 파이는 소리. 검광과 도광이 난무(亂舞)하고, 검풍(劒風)과 도풍(刀風)만 요란할 뿐, 그 자세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고수는 채 열명도 되지 않았다. 이때 한쪽 누대(樓臺)에서 지켜보던 팽수수(彭秀繡)가 팽수련(彭秀蓮)에게, “언니, 언니는 뭐가 보여? 처음에는 그래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도통 분간할 수가 없네.” 팽수수의 물음에 팽수련이 미간을 모아 비무하는 것을 자세히 지켜보며, “소수(小繡)야, 언니도 겨우 보이는 구나.” “언니, 저 사람 정말 대단한가봐. 할아버지와 저렇게 맞서서 계속 싸우는 것을 보니.” “그래, 할아버지의 무공도 대단하지만 저 사람도 정말 대단하구나. 상황에 따라 갖가지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초식으로 바꾸면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싸우다니. 소문보다 훨씬 고수로구나.” “그럼 언니보다 더 고수겠네.” 팽수련이 돌아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요런 바보.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동안의 명성(名聲)만으로도 나보다는 고수라고 여겨졌는데. 이제 보니 나 같은 이는 십초도 견디기 어려울 거야.” 놀라서 팽수수가, “뭐? 설마하니 그 정도야?” “응, 지금 전력을 다하지 않은데도 저런 실력인데, 만일 그가 전력을 다한다면 나는 상대도 되지 않을 거야. 게다가 그의 모습을 보니 수많은 실전(實戰)으로 단련돼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가장 적절한 초식을 펼치는구나. 할아버지도 본가 무공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면서 잘 싸우고 계시지만 그는 정말 어떻게 싸워야하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서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아마 이번 비무를 본 사람들은 무공에 대해 새롭게 개안(開眼)한 느낌이 들 거야.” “혹시 할아버지가 지지는 않겠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단다. 시작 전만 해도 할아버지가 그래도 약간 우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장담을 못하겠구나.” 팽수수가 입을 벌리고 놀라다가 잠시 후에, “그런데, 언니. 집안에서는 저 사람한테 언니를 시집보내려 하는 것 같던데.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무슨 생각? 나는 결코 남자와 결혼(結婚)할 생각이 없단다. 저 사람의 무공이 특출(特出)나고 명성이 강호(江湖)에 자자해서 집안에서 그를 붙잡으려는 생각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란다. 저 사람은 결코 여자(女子)와 아니 누구와도 함께할 사람이 아니야.” “그래두 저 사람이 싫지는 않지. 응, 언니?” “싫은 것은 아니지만 좋아할 수도 없단다. 단지 가련(可憐)하고 무서울 뿐이지.” 팽수련의 말에 이해가 안돼서 팽수수가, “가련해? 무서워? 저 사람이?” “그래, 인간의 정(情)을 느낄 수 없을 테니 불쌍하고, 천하(天下) 무엇에도 구애(拘碍)되지 않고 무심무정(無心無情)하니 두려울 밖에.” 팽수련이 눈썹을 찌푸리며 단리유아에 대해 평했다. “난 잘 모르겠는데. 언니.” “소수야, 너도 나이가 더 들면 언니의 말을 이해하게 될 거야.”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팽수련이 씁쓸하게 말했다. 서로 싸운 지 한 시진(時辰)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도 싸움은 멈출 줄 몰랐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초식(招式)의 변화와 대응방법에 대한 생각으로 가끔 탄성(歎聲)을 지르기도 하고, 옆 사람과 얘기하기도 했다. 이런 고수들의 비무는 일생에 보기 드물고, 또한 단지 관전(觀戰)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각자 자신의 무공 연마에 있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지겨운 줄 모르고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물론 싸우는 두 사람도 흥이 나서 여태껏 알고 있던 무공을 펼치며, 상대를 공격하고 상대의 공격을 막는데 정신이 빠져서 주변상황과 시간의 경과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참을 그렇게 더 싸우다가, 서로 이렇게 싸운다면 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서로 일합(一合)을 나눈 후에 떨어져서 호흡(呼吸)을 고르며, “휴우, 정말 대단하군. 여보게, 이렇게 싸운다면 끝이 없을 것 같으니 각기 자신의 최고무공을 겨뤄 승부를 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도왕이 하는 말에 단리유아가 무심(無心)한 태도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창안한 본신무공(本身武功)을 펼치기로 하겠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도왕이 놀라서, “아니, 자네가 무공을 창안했다고?”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고 이번에 수련(修練)하며 창안한 것으로, 그동안 강호에서 익히고 느낀 무공에 제 생각을 보태어 만든 것일 뿐입니다.” 도왕이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나서 감탄하며, “허허, 그래도 그 나이에 새로운 무공을 만들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군. 자네, 갈수록 나를 더 놀라게 하는구만. 정말 강호에 새로운 일대종사(一代宗師)가 나타났음을 알겠군. 나도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 삼초식과 유성단천도법(流星斷天刀法)을 펼쳐 최선을 다할 테니, 자네도 그 무공을 펼치도록 하게. 참, 그 무공의 명칭이 무엇인가?” “천애구검(天涯九劍)으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천애구검(天涯九劍), 천애구검이라.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天涯), 강호(江湖)의 검법과 격이 다른 그러한 특이한 검법인가? 정말 기대가 되는군. 어서 시작해보세.” “그럼 제가 먼저 일초를 펼치도록 하겠습니다.” 도왕의 말에 단리유아가 답한 후, 일단 검을 검집에 넣은 다음에 다시 발검(拔劍)하며, “천애유성하(天涯流星河)” “혼원벽력파(混元霹靂破)” “콰, 꽝!” 검에서 유성(流星)처럼 쏟아지는 한줄기 검강(劍剛)에 맞서서 도왕 역시 도강(刀剛)을 휘둘러서 검강을 분쇄한다. 검강을 없앤 후에 도왕이 먼저 다시 공격했다. “혼원벽력풍(混元霹靂風)” 수많은 도강들이 모여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면서 단리유아의 앞으로 다가온다. 단리유아 역시 검강을 일으켜 전진하면서,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 반경 한자 정도의 둥근 원반(圓盤)형태의 검강을 날린 후에 신형을 꺾어서 왼쪽으로 물러났다. “콰 꽝! 쿠쿵!” 좀 전보다 훨씬 큰 충격음과 함께 지면의 흙과 돌, 먼지가 솟구쳐 장내를 뒤덮였다. 단리유아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검(劍)을 들어서, “천애만성련(天涯滿星連)“ 검에서 형성된 검강이 줄기줄기 연이어 나와서 백팔(百八)개로 이루어진 일 장(丈) 넓이의 거대한 나선모양을 이루었다. 이에 맞서서 도왕도 도를 뻗어서, “혼원벽력붕(混元霹靂崩)” 수많은 도강들이 허공에 원형을 이룬 다음 동시에 검강 가운데 한 지점을 향해서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맞서서 단리유아의 검강도 나선으로 회전하면서 가운데부터 일직선으로 부딪혀갔다. “콰 꽝! 쿠쿵! 쾅! 쾅! 쾅!” 연달아 검강(劍剛)과 도강(刀剛)이 부딪히며 수많은 강기(剛氣)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난사(亂射)됐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위험을 느끼고 물러서며, 다가오는 강풍(剛風)에 대항하기도 했다. 또 아직 허공에 떠있던 흙, 돌, 먼지는 더욱 넓고 짙게 연무장안에 흩어져 장내의 상황을 알아보기 힘들어질 정도였다. 이번 공격에서 단리유아는 자신이 오히려 큰 손해를 본 것을 알았다. 상대의 도강은 한 지점을 향해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지만 자신의 검강은 차례로 한 지점으로 모여들며 공격해서 순간적인 파괴력에서 상대가 되지 못한 것이었다. 비록 상대의 도강도 부딪혀 사라졌지만 자신에게 향하는 비산(飛散)하는 강기(剛氣)의 조각들과 강풍(剛風)에 의해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옷은 갈가리 찢어지고, 전신에 도상(刀傷)을 입어 피가 흐르고, 충격으로 인해 내상(內傷)까지 심한 것 같았다. 도왕(刀王)의 모습을 바라보니 약간의 외상(外傷)과 옷이 찢어졌을 뿐 내상이 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자네 괜찮겠나? 내상이 심해 보이는데.” 도왕이 단리유아의 모습을 살피다가 걱정스런 어조로 묻자,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단리유아가, “아직 한 초식을 펼칠 정도는 됩니다. 이번에는 팽가(彭家)의 전설이라는 유성단천도법(流星斷天刀法)을 꼭 보고 싶습니다.” “유성단천도법은 불완전한 무공이라네. 나조차 제대로 제어 할 수 없어서 자네에게 살수(殺手)를 펼칠지도 모르네. 그래도 괜찮겠나?” 단리유아의 무심한 태도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싸우자는 소리에, 경탄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기도 해서 도왕이 단리유아에게 다시 한번 물었던 것이다. “어르신, 저는 무인입니다. 설혹 제가 치명상을 입을지라도 아무런 원망(怨望)을 하지 않겠으니 꼭 보여주십시오.” 도왕이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씁쓸히 웃으며, “허허, 내가 오히려 부끄럽구만. 자네의 무공에 대한 열정(熱情)을 보니. 좋네,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 자네도 최선을 다하게.”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선공을 하도록 하지. 이 무공은 아직 불안전해서 필히 선공해야 사용할 수 있다네. 또 일단 펼치면 나조차 멈출 수 없다네.” 말을 마친 후, 도왕(刀王)이 도강(刀剛)을 형성시켜서 도를 감싼 후에 도를 앞으로 날린다. 어검술(御劍術)의 일종으로 아직 현경(玄境)에 들지 못했는데도 이기어도강(以氣御刀剛)을 시전하다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 단리유아 역시 이 무공의 무서운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유성단천(流星斷天)” “아, 어검술(御劍術)” 주변의 놀라는 탄성과 함께, 도강(刀剛)에 둘러싸인 금서도(金犀刀)가 빗살처럼 하늘에서 땅을 향해서 내리꽂혔다. 단리유아 또한 내공을 끌어 모아 무수한 검강(劍剛)을 형성시켜서 도강을 머금은 칼에 부딪히게 했다. “천애은하멸(天涯銀河滅)” 수많은 검강(劍剛)이 나아가며 서로 부딪쳐 충돌하면서 다가오는 도(刀)에 부딪혀갔다. 도와 부딪히자 그동안 계속 충돌하면서 날아오던 검강들이 일제히 도를 중심으로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콰 꽝! 쿠쿠쿵!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소리와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허공에서 폭발했기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누각(樓閣)에서 지켜보던 여인(女人)들의 비명소리가 주위를 시끄럽게 했다. 도왕도 내상(內傷)이 심한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아들 세 형제의 부축을 받으며 있었고, 한매신녀(寒梅神女) 역시 경악(驚愕)에 찬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비록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단리유아 또한 내상이 더욱 심해져서 죽은피를 몇 번이나 토했다. 생각하기에 이번 내상을 완치하는데 상당한 시일의 운공요상(運功療傷)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온 도왕이, “허허허, 정말 무섭구만. 세상에, 도강에 둘러싸인 이기어도(以氣御刀)를 직접 부딪혀 없애 버리다니. 게다가 도(刀)까지도 산산이 박살내다니 내 이런 무공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네. 아무리 흉내라지만 현경(玄境)의 무예(武藝)를 검강(劍剛)으로서 막아내다니 도대체 이 무공을 자네가 창안한 것이 맞는가?” “만약 진정한 현경(玄境)의 고수가 직접 펼쳤다면 저 역시도 막기 어려웠을 겁니다.” 도왕의 물음에 힘겹게 단리유아가 말을 마치고 다시 피를 토하자, “이런 우선 상처치료부터 해야겠군. 둘째야, 너는 얼른 의원(醫員)을 데려오고, 셋째 너는 단리소협을 업어서 거처로 옮기도록 해라. 어서 서둘러라.” “예. 알겠습니다.” 도왕의 말에 팽현표가 단리유아를 업고 접빈각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팽지표도 미리 불러두었지만 그동안의 비무(比武)에 놀라서, 구석에서 웅크리고 떨고 있는 의원을 찾아서 팽현표의 뒤를 따라가도록 재촉했다. 첫째인 팽인표가 도왕을 보면서 걱정스런 얼굴로, “아버님, 아버님의 상처도 중하니, 어서 자리를 뜨시지요. 여기는 저와 둘째가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괜찮다. 외상은 가벼운 찰과상 정도고 내상도 내상약(內傷藥)을 먹고 진정시켰으니. 단지 내공이 탈진(脫盡)했을 뿐이니 천천히 해도 된다. 나보다는 단리소협이 걱정이지.” “그래도....” “여보게, 자네도 예전 같이 젊지 않다네. 이런 내상일수록 빨리 치료해야하는 법이야. 그만 자네도 자리를 떠 요상(療傷)에나 신경 쓰도록 하게.” 한매신녀까지 옆에서 팽인표를 거들어 치료를 권하자 할 수 없이 도왕도 따른다. 함께 자리를 뜨면서, “그럼 그러도록 하지요. 그런데, 선배님 오늘 보시니 어떻습니까?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도왕의 물음에 한매신녀가 감탄과 함께, “그래 정말 그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네. 이제 보니 나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더구만. 그놈이 오늘 펼친 것이 네 초식(招式)이었으니 나머지 다섯 초식도 있을 것이지 않는가?” “정말 그렇군요. 천애구검(天涯九劍)라 했었으니. 그럼, 제가 오늘 겨우 이겼다지만 실제로는 졌다고 할 수 있겠군요. 헌데, 저런 무공을 직접 창안한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무공의 성취만도 대단한데 새로운 무공을 창안까지 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도왕의 놀람에 찬 소리와 의문에 한매신녀가 한숨과 함께, “휴, 나도 역시 믿지 못하겠네. 허나 만약 사실이라면 겉모습과 달리 오성(悟性)도 뛰어난 일대천재(一代天才)라고 할 수 밖에 없겠지.” “하긴 노력만으로 지금의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것도 약간 이상하니 역시 뛰어난 오성이 있었나보군요. 그런데, 정말 탐나는 인재(人才)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가 본가(本家)의 인물이 된다면.....” 도왕이 단리유아에 대해 칭찬하면서 슬그머니 한매신녀를 떠보자, “됐네. 나도 그의 무공만 본다면 허락하고 싶다네. 하지만 자네도 보고 느꼈으니 저놈이 이 세상에 관심이 있는 거라곤 무공뿐이라는 것을 알겠지? 다른 것들에는 완전히 무관심(無關心)하지. 설마 자네는 자네 손녀가 그런 목석(木石)과 평생을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지?” “휴, 그래도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아쉬움에 한숨을 쉬면서 말하는 도왕을 보면서 한매신녀가, “아니, 그런 생각일랑 일절(一切)말게. 저놈은 천하(天下)에 연연할 것이 없는 놈일세. 차라리 이번에 성의를 다해서, 나중에라도 저놈이 팽가(彭家)를 적대시하지 않고 도움을 주도록 하는 것이 나아.” “휴, 알겠습니다. 둘째야, 집안에 있는 귀한 약재(藥材)가 있다면 아끼지 말고 단리소협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쓰도록 해라. 너도 오늘 보았으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겠지?” “예, 이번에 아버님께 드리려고 장백(長白)에서 들어온 삼백년 근(根) 산삼(山蔘)이 있는데 이것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리고 아랫사람들에게도 일려 그의 거처(居處) 근처에서 조용하도록 하고, 혹여 그에게 실수하지 않도록 신신당부(申申當付)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팽인표의 지시로 몇 사람은 연무장(鍊武場)을 정리하고, 나머지는 오늘의 비무(比武)에 대해 서로 얘기하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떠나갔다. 그들도 오늘의 비무를 보고 본가(本家)의 도법이 지닌 장단점을 알 수 있었고, 강호(江湖)의 여러 초식에 대한 대응방법도 배울 수 있었다. 아마 오늘의 비무는 두고두고 그들의 뇌리(腦裏)에 남아서 앞으로의 무공연마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더욱 더 연마에 박차를 가하게 할 것이다. [참고 & 설정] [1]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 : 혼원도법(混元刀法)과 벽력도법(霹靂刀法)이 합쳐져 완성된 팽가(彭家)무공의 사실상의 정수(精髓). 본래 벽력도법은 벽력문(霹靂門)의 비전(秘傳)도법이었지만 그 문파가 멸망한 후에 팽가로 흘러들어 혼원도법과 합쳐지게 되었음. [2] 마검문(魔劍門) : 안휘성(安徽省)의 마도명문(魔道名門)으로 마도십강세(魔道十强勢) 중의 하나. 주 무공인 탈명십삼검(奪命十三劍)은 원시마교(原始魔敎) 검마(劍魔)의 일부 검법구결(劍法口訣)을 바탕으로 창안 발전된 것임. 대체로 수명이 짧은 것이 마도문파(魔道門派)의 대부분이지만 벌써 삼백년 이상 강호(江湖)에 건재함.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도왕(刀王) 팽무숙(彭武宿) 4 팽현표의 등에 업혀 접빈각(接賓閣)으로 돌아온 단리유아는 침상 곁에 좌정(坐定)하면서 호법(護法)을 부탁했다. “괜찮겠소. 단리대협? 우선 의원(醫員)의 진맥(診脈)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소?” 팽현표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가까스로, “아, 아닙니다. 외상보다는 내상(內傷)이 중요하니 일단 내상을 가라앉힌 다음에나 의원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그 전까지는 누구라도 접근치 말게 하여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호법을 설 터이니 안심하고 운공에 드십시오.” 팽현표가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가 문 밖에서 사람의 접근을 막으며 호법을 섰다. 내상(內傷)이라는 것은 초기에 손을 보아야지 정신을 잃거나 요상(療傷)이 늦어진다면 몸속의 어혈(瘀血)이 점점 굳어져 혈맥을 막아 나중에는 치료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도기(刀氣)에 베인 외상은 벌써 피가 멈추고 아물어서 약간의 통증을 제외하고는 신경 쓸 것이 없었다. 구전회혼결(九轉回魂訣)이 저절로 일어나 상처를 막았을 것이다. 단리유아가 운공(運功)을 시작하자 전신대혈(全身大穴)에 찌르른 듯한 통증이 일어나 괴롭혔지만, 통증을 무시하고 계속 내력(內力)을 모으려고 노력했다. 전신의 내력이 거의 바닥나고 내상이 심해서 의념(意念)을 모으고 운기(運氣)를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계속 의념을 집중하자 일각(一刻) 정도가 지나 구대혈(九大穴)을 중심으로 내력이 조금씩 한줄기, 한줄기 모이기 시작했다. 다시 기해(氣海)혈로 모든 내력을 모은 다음에 천천히 전신혈도를 순환했다. 먼저 임독양맥(任督兩脈)을 순환한 다음 팔다리를 거쳐 다시 단전으로 기를 움직였다. 겨우 일주천(一週天)을 한 다음 임독양맥을 중심으로 내상의 치료에 집중했다. 상처 입은 혈도를 어루만져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하고 죽은피는 혈맥(血脈)에서 몰아내갔다. 점점 내력이 더 모여지자 운공요상(運功療傷)의 속도는 높아지고 더 이상 내상이 악화되지 않게 되었다. 밖으로 나간 팽현표가 문틈으로 단리유아가 요상(療傷)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습으로 찾아온 의원(醫員)을 보고, “자네가 의원인가? 일단 진정 좀 하게. 자네도 강호인(江湖人)들의 싸움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닐 텐데, 그 모습이 대체 뭔가? 의원이 겨우 방(房)안의 탁자에 앉아 떨리는 몸을 진정시킨 후, “휴우, 셋째나리, 소인(小人)도 구경깨나 했다고 자부해왔지만, 오늘과 같은 광경은 결코 본 적이 없었습죠, 네. 단지 직접적인 칼부림이 대부분이어서 오늘처럼 천둥이 치는 것처럼 땅이 파이고 흔들릴 정도의 싸움은 결코 없었지요. 휴, 저는 정말 놀라서 죽는 줄 알았습죠.” 의원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하는 말을 듣고 팽현표가, “하긴 나조차 오늘 같은 싸움은 본 적이 없으니, 단지 비무(比武)일 뿐인데도 이정도니 아마 실전(實戰)이었다면 훨씬 상황이 심각했을 테지. 그래, 자네도 진정하고 정신을 좀 차리게. 환자의 상처를 보려면 우선 자네가 심신(心身)을 추슬러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운공요상이 끝나려면 한참 걸릴 테니 어서 정신을 차리게.” “예, 알겠습니다요. 그런데 외상(外傷)이 심할 텐데, 지금 살펴보지 않아도 될까요?” “괜찮을 걸세. 외상보다는 내상이 심하고 운기를 하다보면 지혈이 되는 효과도 있으니, 우선 내상을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지. 나중에 자네는 외상을 치료하고 내상에 맞는 약재(藥材)를 골라서 처방하면 될 것이네.” “헤헤, 알겠습니다요.” 의원의 간사한 말소리에 팽현표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거 혹시 실력(實力)이 형편없는 놈이 아닐까? 의원이라는 놈이 이렇게 철딱서니 없다니. 휴, 그래도 둘째 형님이 데려왔으니 실력은 있겠지.’ 다시 이각(刻)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팽지표가 길이가 한자 정도 되는 목함(木函)을 들고 접빈각의 내실(內室)로 들어왔다. “아니 형님, 무슨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현표야, 이번에 단리대협의 내상이 심각해 보여 아버님께서 장백산삼(長白山蔘)을 보내서 상처치료에 쓰게 했단다. 그런데, 단리대협은 아직 운공요상(運功療傷)중이냐?” 장백인삼을 가져왔다는 팽지표의 말에 놀라서 팽현표가, “장백산삼을요? 아버님의 성의가 대단하시군요. 단리대협은 오시자마자 요상(療傷)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보통 내상을 진정시키는데 일각(一刻)이상을 쓰지 않는데, 내공이 특이한 것인가?” 팽지표가 의아해 하자 팽현표가 문안을 들여다보더니, “반 시진(時辰) 가까이 운공하는 것을 보니 아예 본격적으로 내상치료(內傷治療)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요?”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도 이상하네 그려. 일단 내상을 진정시킨 후에 내상약(內傷藥)을 먹고 나서 다시 내상치료에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인데.” “내공(內功)이 특별한가 보지요, 오늘 보니 무공도 대단해 보이던데. 그런데 정말 아버님 말씀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팽현표의 말에 팽지표가 동의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나조차 겉모습을 보고 속단했었는데 저 사람이 저리 대단할줄 알았겠나. 겉모습도 키가 약간 크지만 인상이 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도(氣度)가 두드러져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으니. 허 참, 내가 실수할 정도니 몇 사람이나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렇더군요. 저도 직접 보고나서는 소문(所聞)이 잘못되지 않았나 했습니다. 천 번이 넘게 싸운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평범(平凡)하게 보일 줄 누가 알았습니까?” 팽지표가 한숨을 쉬면서, “휴, 그래.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보통 사람은 알아차리기도 힘드니. 아버님 정도의 그와 맞서 싸울 정도의 수준의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거네.” “저 사람이 아버님과 비무(比武)한다고 했을 때, 겉으로야 아버님을 걱정했지만 속으로는 저 사람을 비웃었지요. 그런데 오늘 싸움을 보니....” 말끝을 흐리는 팽현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팽지표가, “나도 그랬다네. 저 사람이 소문처럼 대단해도 결코 아버님의 상대가 되지 못할 줄 알았지. 그런데, 결과는 아버님이 이겼다지만, 아버님 역시도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는 않더군. 아마 실전(實戰)이었으면 반대의 결과가 되었을지도 몰라.” 팽현표가 아까의 비무를 회상하면서 잠시 몸을 부르르 떨다가 한숨을 내쉬며, “휴, 저는 유성단천도법(流星斷天刀法)을 정면으로 막아내는 것을 보고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습니다. 본가의 최고무공을 막아내다니, 그것도 자신이 창안한 무공으로.” “이제 약관(弱冠)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데 저 정도이니, 아마 십년 내에 강호(江湖)에 적수가 없을 거네. 아마 삼백년 만에 현경(玄境)에 들 고수가 될지도 모르지. 아직도 발전할 여지가 많으니.” 팽지표의 말에 팽현표가 허탈한 표정으로, “허, 삼백년만의 현경고수라? 정말 저희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군요. 그런데 형님, 저런 사람이 본가(本家)의 사람이 된다면 천하(天下)에 두려울 것이 없을 텐데 형님 생각은 어떻소?” 팽현표의 말에서, 자신의 딸인 팽수련과 단리유아의 인연을 엮어 사위로 맞아드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생각을 알아차리고 팽지표가, “아버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지만 포기하신 것 같네. 나도 수련(秀蓮)이가 싫다면 억지로 시집보내기는 싫다네. 또 연(燕)선배님이 그렇게 반대하시니 더 어려울 거네.” “그래도 본가를 위해서....” 아쉬워하는 팽현표의 말을 막으며 팽지표가 화제를 돌린다. “됐네. 그 얘기는 그만하세. 나중에 다함께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지. 우선은 저 사람의 상처가 우선이니.” “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그 장백산삼(長白山蔘)은 아버님께 드리려고 큰형님이 어렵게 구한 것인데 결국 저 사람에게 쓰게 되었군요.” “나도 약간 아깝긴 하지만 후일을 위해서는 이편이 좋겠지. 요즘과 같은 난세(亂世)에는 도와줄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 나중에 그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한참을 서로 얘기하다가 의원(醫員)을 보고 팽지표가, “여보게. 자네. 여기 이 장백산삼이 있으니 이것을 주약(主藥)으로 내상약(內傷藥)을 짓도록 하게. 필요한 약재가 더 있다면 무엇이든지 내게 얘기하고.” “아이쿠, 나리. 이 것이 그 귀한 장백산삼이라고요. 근데 몇 년 근(根)이나 됩니까요?” 놀라는 소리와 함께 은근히 물어보는 의원의 말에, “삼백년 근이라더군. 자네 혹시라도 산삼(山蔘)을 떼먹으려는 수작이라면 포기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네. 만약 걸린다면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 식솔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헤헤헤. 제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요? 나리. 단지 워낙 귀하고 삼백년 근이라면 저조차도 본적이 없어서. 백년만 되도 부르는 것이 값이잖습니까?” “그래. 이것도 정말 어렵사리 구한거지. 자네도 딴생각 말고 조금이라도 더 약효(藥效)가 우러나오게 할 생각이나 하게. 나중에 저 사람의 상처가 치료되면 자네에게도 톡톡히 사례(謝禮)할 테니.” “네, 네. 그렇쿠말굽쇼. 헤헤.” 의원의 웃음소리가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안에서, “욱, 우욱” 모두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단리유아가 검붉은 죽은피를 한 사발 이상 토한 다음 일어섰다. 팽지표가 시비(侍婢)를 불러 치우도록 시킨 후에 들어가, “단리대협, 내상은 어떠신지요. 여기 의원이 있으니 한번 보이시지요?” “팽선배님, 완치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행히 어혈(瘀血)을 토해내었으니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운공요상에 들어간다면 차차 상처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의원은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외상도 아물어서 지혈(止血)되었으니 그저 약을 바르고 상처를 싸매면 됩니다.”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팽지표가 속으로, ‘아니 이 친구는 상처가 그렇게 심한데도, 표정의 변화도 없고 전혀 감정의 동요도 없군. 도대체 안색이 약간 창백한 것을 제외한다면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가 없구만. 정말 이런 사람을 수련(秀蓮)이와 맺어준다면, 수련이는 평생 목석같은 인간과 살면서 불행해할 테지.’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딸을 단리유아에게 보내는 것을 반대하기로 결심한다. 잠시 후에 생각에서 깨어나, “아니오. 아무리 상처가 대충 치료되었다지만 그래도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여보게, 무엇하나? 어서 상처를 보지 않고.” “예, 예.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우시지요. 상처를 닦고 약(藥)을 바른 다음 싸매야하니.” “아니, 괜찮습니다.” 의원의 재축에 한참을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옷을 벗고 침상에 누웠다. 온몸의 흉터와 새로 난 상처를 보고 모두가 놀란다. “아이고, 제가 수많은 사람을 치료해봤지만 이 분처럼 흉터가 많은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치명상(致命傷)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군요. 다시 살아난 것이 기적일 정도의 큰 흉터가 이리 많다니, 다른 사람이라면 목숨 줄이 여러 개라도 살아남기 어려웠을 겁니다요.” 의원이 상처를 치료하며 떠든다. 팽가 형제도 흉터들을 보고 놀라며, “허허 형님, 그래도 저는 상처가 심한 경우를 여럿 봤다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때 본 것은 그리 중한 상처라 보기 어렵군요. 이런 흉터라니.” “정말 그렇군. 나도 역시 본적이 없다네.” 왼쪽 심장을 비껴 지나간 검상(劍傷)과 오른쪽 옆구리에서 아랫배를 관통한 흔적, 어깨의 살이 뜯어지고 새로 돋아난 모습과 전신을 뒤덮은 크고 작은 상처를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타통하고 대주천을 하면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한번 했었지만 상처가 워낙 많아서 아주 작은 상처를 제외하고는 없어지지 않았었다. “정말 단리대협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이 보이는 듯하군. 나는 도저히 염두(念頭)가 나지도 않는구만. 이런 상처를 입고 나서 다시는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 팽지표의 혀를 내두르는 말에 팽현표도 고개를 끄덕이며, “강호인(江湖人)이라면 크고 작은 흉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이런 모습은 들은 적도 없군요. 형님.” 단리유아는 두형제의 감탄과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며 의원의 치료를 받았다. 상처를 깨끗한 물로 씻어내고 약을 바르고 큰 상처는 천으로 감싸 묶은 다음, 일어나 앉으며 의원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의원이 내상을 진맥하려하자 단리유아가 필요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의원이 자신이 진맥하겠다고 하며 다시 실랑이를 벌인다. 듣고 있던 팽지표가 의원을 말리고, “그러면 대협, 본가(本家)에 마침 들여온 장백산삼이 있어서 이번에 쓸려고 하는데, 의원에게 약을 맡겨서 달이게 할 테니 꼭 드시고 치료(治療)에 전념하십시오.” “아니, 그 귀한 장백산삼을.... 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도왕(刀王) 어르신도 상처를 입었는데 제가 그것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장백산삼을 내상치료에 쓰라고 준다는 소리에 단리유아가 사양하자 팽지표가,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의 내상(內傷)은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니. 이것은 아버님께서 특별히 단리대협께 드려서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생각 마시고 상처의 회복에나 신경 쓰십시오.” “그래도....” 몇 번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하자 팽지표가, “앞으로 여기 제 아우인 현표나 조카인 수문(秀文)이, 이렇게 두 사람이 교대로 문밖에 호법을 서도록 할 테니 요상에만 전념하십시오. 약이 준비되면 저희가 시간에 맞추어 대령하도록 것이니 다른 일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돌보아주시니 어떻게 보답(報答)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무슨 보답을 바라고 그러겠습니까? 본가의 손님이신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는 마음에 새겼다가 나중에 필히 보답하기로 하겠습니다.” 높낮이가 일정한 무심한 목소리로 단리유아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역시나 계속되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단리유아를 보며 그래도 팽가의 형제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의원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단리유아를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아마 단리유아 같은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을 것이다. 도대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변화가 없으니 상처를 싸맨 천을 보지 않고는 이 사람이 정말로 다친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였고, 말로는 고맙다고 감사하는 말을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장백산삼을 팽지표로부터 받아서 약을 준비하러 나가면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속으로 천하에 다시없는 괴인(怪人)이라고 중얼거렸다. 몸도 마음도 모두. 잠시 후 팽가의 형제가 나가 팽현표는 호법으로 문밖을 지키고 팽지표는 떠나자, 단리유아는 다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운공요상(運功療傷)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전에 팽현표에게는 세 시진(時辰) 후에 깨어날 것이니, 그 때 약을 준비해 주도록 부탁했다. 나중에 깨어나 약을 복용(服用)하고 다시 운공하면 될 것이다. 아까 전에는 어혈(瘀血)을 빼내는 데 집중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요상에 들어가니 상처의 회복에 전력을 다할 작정이었다. 워낙 내상(內傷)이 심해 회복의 속도가 느렸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는 데는 불편함이 없을 정도는 되었다. 약을 마시고 다시 운공(運功)을 하니 장백산삼의 약효(藥效)가 확실히 대단한지 회복속도도 빠르고 가슴의 통증도 점점 사라졌다. 호법을 서는 사람과 의원을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정오와 저녁 때 다시 약을 마시고 계속 요상(療傷)하자, 다음날 아침에는 상처가 거의 완치되어서 무공을 펼치는 데도 별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며칠 시간이 지난다면 완치될 것으로 보였다. 오늘은 팽가(彭家)를 떠나 남경(南京)으로 향하기로 한 날이니 도왕(刀王)과 팽가의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떠나야겠지. 전에 배를 준비한다고 하였는데 준비가 다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동안 상처를 치료하는데 전념하느라 도왕과의 비무(比武)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데, 이번에 배를 타고 간다면 시간도 넉넉할 테니 다시 한번 숙고해 보아야겠군. 그리고 팽가(彭家)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언젠가는 갚아야겠지. 언제나 이곳 팽가에 다시올지 모르겠지만. ****** 저는 영약(靈藥)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만년(萬年)묵은 영초(靈草)니 영물(靈物)이지 하지만 누가 지켜본 것도 아닌데 그것이 몇 년이 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제 소설(小說)에서는 영약이라고 해봐야 천년(千年)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1 아침에 팽가(彭家)의 주요 인물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상처에 대한 것과 비무에 대한 것을 묻고 답하며 서로 이야기하다가 팽가를 나와 출발한 시각은 사시(巳時:9-11시)중엽이 지나서였다. 이번에 팽가의 식솔들을 이끌고 단리유아를 따라갈 사람으로 단호참도(斷虎斬刀) 팽현표가 되었다. 그 외 팽수표와 수호 형제, 그들의 육촌(六寸)형제로 수강(秀江), 수전(秀田), 수창(秀彰) 삼형제와 가신으로서 두 명의 형제간인 채산쌍도(砦山雙刀)등이 있었다. 그 외에 배를 운행할 수부(水夫)가 여섯으로 단리유아까지 합쳐 모두 열다섯 명이 되었다. 배의 전체적인 모습은 선수미(船首尾)가 뾰족한 세장형(細長型)의 선형으로 척 보기에도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 만든 것 같았다. 전체길이가 오 장(丈)이 약간 못되고 최대 폭(幅)도 일 장(丈)이 조금 넘는 배로서, 두개의 돛이 달려있었고 양쪽으로 각각 몇 개의 노가 달려 있었다. 두개의 돛에는 꼭대기에 각기 팽가의 깃발과 북하표국의 깃발이 걸려 이 배가 팽가의 보호 아래 표행을 떠나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환송(歡送) 나온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포구를 떠나 운하(運河)에 들어선 시각은 그로부터 반 시진(時辰) 정도가 지난 후였다. 잔잔한 물결과 순풍이 불자 점점 창주부(滄州府)의 모습은 멀어져 멀리 가물거리게 보일 뿐이었다. 팽현표가 다가오며, “단리대협, 수로(水路)에 나오니 어떻습니까? 시원하지요?” “그렇습니다. 팽대협. 답답한 가슴이 쑥 가라앉는 것 같습니다.” 찬바람이 그동안 내상을 입어 방안에만 있었던 답답한 기분을 씻어주듯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배에 탄 사람들도 고물에 모여 멀어져가는 창주부(滄州府)를 보며 앞으로의 여정(旅程)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팽현표가 수부(水夫)중에서 한명을 불러서, “대협, 이 사람이 이 배를 남경(南京)까지 움직여나갈 이 배의 선장(船長)입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물길로만 다녀서 본가에서 이사람 만큼 물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보게, 장노. 어서 인사드리도록 하게. 강호에서 유명한 분으로 이분이 이번 남경행의 주객(主客)이시니 앞으로 아랫사람들에게도 주의하도록 당부하고.” 오십대의 작고 새까맣게 탄 둥근 얼굴의 장년인(長年人)이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십니까? 나으리, 소인(小人)은 장사(張四)라 합지요. 이 배의 선장으로 앞으로는 장노(張老)로 부르시면 됩니다요.” “단리유아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단리유아의 조용한 말에 약간 당황한 얼굴로 손을 저으며, “아이고, 미천한 쇤네에게 부탁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죠. 오히려 쇤네가 부탁을 드려야합죠. 네.” 팽현표가 끼어들어 말리며, “그만하게, 그건 그렇고, 이 배로 남경(南京)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릴까? 그리고 무슨 문제는 없겠나?” 잠시 생각해보다가 장노가, “나으리, 아마 별일이 없다면 한달 이내에는 넉넉히 남경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요. 중간 중간에 필요한 물품과 음식거리를 보충하는 경우를 포함해도 충분히 한 달 내에는 도착할 수 있습죠. 그렇지만 요즘 전란(戰亂)이 자주 일어나 곳곳에 출입이 금지된 곳이 있어서 그런 곳을 우회하거나 야밤에 몰래 통과하고 하면 한달도 그리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닙죠. 또 문제가 수적(水賊)놈들인데 이곳에서 황하(黃河)까지는 그래도 팽가의 얼굴을 보아 건드릴 배짱이 있는 놈들이 없겠지만, 황하를 건너 회하(淮河)로 들어가면 문제입죠.” “수적 놈들 중에서 본가(本家)를 건드릴 배짱이 있는 놈들이 있을까?” 팽현표가 장노의 말에 의문을 표하며 묻자,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나으리. 하도 유민(流民)이 많아 수적(水賊)들도 사방에 들끓어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입죠. 그래도 수로채(水路寨)에 속한 곳들은 본가의 위신을 보아 넘어가 주겠지만, 다른 놈들은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할지 모릅니다요.” “흠, 과연 그렇게 간 큰 놈들이 있을까? 하여간, 중간에 위험한 지역이 나타나면 즉시 본가의 사람 중에서 아무나 부르게. 밤에는 한명씩 교대로 뱃전을 지킬 테니 그때는 그를 부르고, 알겠나?” “네, 네. 알겠습니다요. 나으리. 그렇게 합죠.” 장노가 인사하고 물러가자, 팽현표가 팽가의 사람들을 곁으로 불러 모았다. “대협, 이 사람들이 이번에 대협을 수행(隨行)해서 남경까지 갈 사람들입니다. 여기 수표, 수호 형제는 전에 본적도 있겠지만 여기 이 녀석들은 본적이 없을 겁니다. 우선, 여기 이 산적(山賊)같이 험악하게 생긴 두 명이 채산쌍도로 장성(長城)근방에서 알아주는 고수들이었지요. 몇 년 전부터 본가에 들어와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세 놈은 수표하고 육촌지간으로 본가의 말썽꾼 놈들이지요. 이놈들이 이번에 대협을 따라가려고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를 겁니다. 하하하.” 세 사람이 얼굴을 붉히고 당황해서, “숙부, 그 얘기는 다시는 안하기로 했잖습니까?” “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말 안할 테니 어서 인사나 드리거라.” 웃음을 억지로 참는 팽현표를 한번 흘겨보고, “하하하, 단리대협, 이렇게 만나 뵈어 일생(一生)의 영광입니다. 소생(小生)의 이름은 수강으로 여기 이 녀석들의 형이 되지요. 필요한 게 있으면 즉시 소생을 부르십시오. 저놈들은 빼고요. 워낙 말썽쟁이들이어서 미덥지 못하니.....” “아니, 형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미덥지 못한 사람이 누군데? 흥, 정말 형님을 그동안 그렇게 안 봤는데..... 단리대협, 소생은 수전으로 둘째입지요. 누군가처럼 딴소리하지 않는 대장부(大丈夫)이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소생을 불러 주십시오.” “뭐, 뭐라고? 너 이 자식.....” 수전의 말에 수강이 말문이 막혀 화를 내는데 이 모습을 보던 수창이, “아니, 형님들은 단리대협을 앞에 두고 무슨 쓸데없는 말싸움이요? 칠칠치 못하게 시리. 단리대협, 형님들은 말썽쟁이로 소문난 사람들로 절대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소생은 수창이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이제는 세 사람이 서로 옥신각신하며 다투자, 보다 못한 수호가, “그만 좀 해요. 형님들. 귀한 손님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이에요? 나이는 벌써 서른이 다 되어가면서. 쯪쯪, 하여간 아직도 어릴 적 모습과 달라진 것이 없다니까?” 이에 삼형제가 팽수호를 향해 다가가며, “뭐, 이자식이 형님들한테, 무슨 소리야?” “너 어릴 때처럼 한번 얻어터져볼래?” “저건 어릴 적부터 노인네 티가 나더니. 완전히 애 늙은이라니까.” 이에 팽수호가, “흥!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 사고뭉치들 주제에....” 화가 나서 달려드는 삼형제에게 몸을 피해 이물로 달아난다. 그러나 좁은 배안에서 도망칠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곧 잡혀서 삼형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팽현표가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팽수표에게, “저놈들은 나이를 먹어서도 저런다니까. 어이구, 무공만 강하지 워낙 철딱서니가 없어서. 애, 수표야. 네가 가서 좀 뜯어 말려라.“ “예.” 수표가 말리려 가는 것을 보고 채산쌍도를 보면서, “자네들도 단리대협께 인사나 하게.” 이에 영락없는 산적(山賊)같은, 어께에 칼을 메고 얼굴 가득 수염으로 뒤덮인, 험악한 인상의 두 사람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포권하며 인사한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리대협. 소생이 큰형인 대도(大刀) 채구악(砦丘岳)이고, 이 녀석이 아우인 채구강(砦丘岡)입니다.” “소생 채구강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귀청을 울리는 인사를 받아 포권하며 조용한 어조로, “단리유아라 합니다. 저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서로 통성명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이번에 벌어진 도왕(刀王)과의 비무(比武)에 관한 것이었고, 언제 시간이 된다면 비무를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비무 요청에 대해서는 며칠 쉬어 내상(內傷)이 완치된 후 하기로 했다. 기뻐하는 그들과 함께 고물쪽 갑판에 모여 이번 여정(旅程)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단리유아가 운공을 해야겠다고 양해를 구하면서 먼저 갑판아래 선실로 물러났다. 단리유아가 선실로 들어간 후에 채산쌍도의 대도 채구악이, “팽대협, 소문대로 정말 괴상한 사람이군요. 전 여태까지 저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얼음장처럼 냉혹(冷酷)한 사람이나 말 한마디 안하는 무뚝뚝한 사람은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세상에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변함없는 표정과 어투로 말하는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고개를 흔들며 말하는 대도 채구악을 보면서 팽현표가, “그래, 나도 처음에는 정말 황당했지. 도대체가 감정(感情)의 동요가 없으니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일세. 세상에 별별 사람이 다 있어서 살기(殺氣)를 풀풀 풍기면서 주변을 얼어붙게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네가 말한 것과 같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네.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나기 어려운 것도 아니지. 그런 사람은 가끔씩 있으니. 그런데, 저 사람은 마치 죽어버린 고목(枯木)처럼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공손히 대답을 하지만 말투도 그렇고 얼굴표정도 변함이 없으니 나도 정말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네.” 팽현표의 말을 듣고 소도 채구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도 팽가에서 멀리 보기도 했고 소문을 듣기도 했지만, 막상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 정말 껄끄럽더군요. 무슨 말을 해도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이 사람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팽현표가, “자네들도 그렇게 느꼈구만. 나 역시도 그랬다네. 무공이 강하면 무엇 하겠나?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인생을 살맛이 나지. 저 사람은 무슨 즐거움으로 살아가는지 모르겠네. 젊은 사람이 만정(萬情)을 잃어버리고 저리 되다니 무슨 사연이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네. 아마 평범한 일은 아닐 테지. 자네들도 그와 말을 하면서 껄끄럽고 당황스러웠겠지만 이후에는 그런 것은 무시하고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대해주게. 그리고 너희들도.” 아무생각이 없는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를 제외하고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단리유아는 선실에 들어가 좌정(坐定)한 후에 도왕과 싸운 모습을 되새겨 보았다. 싸움에서는 역시 무공의 강함도 중요하지만 시기와 장소에 따라 대처하는 초식(招式)이 틀려져야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도왕의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의 위력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천애구검(天涯九劍)으로 능히 막을 수 있었는데, 초식을 잘못 선택한 것이 내상(內傷)을 입게 만들어 이어진 유성단천도법(流星斷天刀法)에 상처가 악화되게 한 것이었다. 만일 혼원벽력도법의 삼초인 혼원벽력붕(混元霹靂崩)에 천애만성련(天涯滿星連)이 아닌 천애은하멸(天涯銀河滅)로 대응을 하였었다면 오히려 도왕의 상처가 훨씬 심했을 것이다. 천애만성련이 차례로 한 지점을 공격하여 연속적으로 타격을 주는데 반해서 혼원벽력붕은 모든 도강(刀剛)이 동시에 한 지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한 지점에 가해지는 파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어서 천애만성련 같은 연환공격은 오히려 쉽게 파해 되어 밀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혼원벽력풍(混元霹靂風)은 수많은 도강을 회오리 형상으로 만들어 상대의 공격과 부딪쳐 사방(四方)으로 강기(剛氣)를 날리게 하는 초식이었다.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과 그 원리는 비슷한 것으로 폭발력은 뒤질지 모르지만 폭발범위는 훨씬 커서 대응(對應)이 늦었다면 큰 상처를 입게 되었을 것이다. 흠, 우선 이 두 초식(招式)에 대해 연구해 보아야겠군. 나중에 비슷한 초식을 만날 수도 있을 테니. 먼저 혼원벽력풍(混元霹靂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것은 수많은 도강(刀剛)을 뿜어낸 후에 회오리 형상으로 만들어서 상대방을 공격하게 하는 것이다. 천애유성폭이 하나의 도강을 원형으로 크게 만들어 회전을 걸어 상대에게 날려 공격하는 것과 비슷한데 다른 점은 도강을 여러 개 따로 형성해 그 전체를 회전하게 하는 것이지. 확실히 이렇게 한다면 폭발범위는 천애유성폭보다 훨씬 넓을 것 같군. 문제는 내공의 소모가 너무 크다는 것인데, 다른 방법이 없나? 실전(實戰)에서는 형성하는 속도도 더 빨리해야 효과적일 것 같은데. 음, 이 초식은 한사람보다 다수(多數)의 적을 공격하는데 더 효과적으로 보이는데.... 아예 다수(多數)를 공격하도록 바꿔야겠군. 다수의 적을 상대하게끔 바꾸려면, 그러면 상대의 공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공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정말 복잡하군. 내공소모를 줄여서 검강(劍剛)을 형성한 다음 회전력을 걸어 제어하면서 회오리 형상으로 만든 다음, 상대의 공격에 부딪히지 않고도 폭사(爆射)해서 상대를 공격해야 하는 초식이라. 초식을 형성하는 속도도 빨라야하고. 이것은 나중에 밖에서 직접 수련하면서 해보아야겠군. 이 좁은 선실에서 했다간 당장 배가 가라앉을 테니. 검강의 수도 줄이고 회전력도 약하게 한 다음 시험하면서 점점 수도 늘리고 범위도 확대해봐야지. 이것은 이정도로 하여 나중에 수련하면서 고치기로 하고, 두 번째인 혼원벽력붕(混元霹靂崩)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초식은 한 지점으로 도강(刀剛)을 집중해서 공격한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기본적으로 천애만성련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군. 이 초식을 천애만성련에 포함해서 변식(變式)으로 만든다면 좋을 텐데.... 상대에 따라서 공격하는 형태를 달리한다면 훨씬 효과적일 테니. 천애만성련이 나선형으로 검강을 형성한 다음 가운데부터 꽈리형태로 연속적으로 공격하는 것인데, 이 혼원벽력붕은 한 지점을 동시에 공격하니 단순하지만 파괴력에서는 이 초식이 훨씬 크겠지. 이것은 약간의 수련만으로도 내 무공으로 만들 수 있겠군. 다음으로 유성단천도법(流星斷天刀法)을 생각해볼까? 비록 유성단천도법이 위력적이긴 하지만 실전에서 쓰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시전범위가 십 장(丈)에 불과하고, 초식을 펼치는 시간도 길고, 무엇보다 일단 펼치면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단점이 있어서 실전에서 이 초식을 쓰다가는 상대의 일검(一劍)에 목이 달아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현경(玄境)의 고수가 이런 초식을 쓴다면 막을 방법도 거의 없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기어도강(以氣御刀剛)을 형성해서 심어검(心御劍)의 수준으로 제어한다면 피하기도 불가능하겠지. 지금의 내 수준으로 실전에서 사용할 정도로 하려면 역시 최소한 수어검 정도는 완성한 후가 되어야 하겠군. 이 것은 일단 수어검을 완성한 다음 다시 생각해볼 문제로군. 지금은 시기상조라 할 수 있으니. 우선은 내상을 완치한 다음 먼저의 두 초식을 수련해야겠어, 남경(南京)까지 가는데 지루하지는 않겠군. 일단 운공요상(運功療傷)에 집중하기로 하고, 생각을 멈췄다. 외상은 흉터만 늘었을 뿐 이미 나았으니 내상을 완치하는데 전념해야 할 것이다. 하북성(河北省)을 벗어나 산동성(山東省)으로 들어서기 전 며칠 동안에는 별다른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니.... 운기(運氣)를 시작해서 내력(內力)을 단전(丹田)으로 모은 후에 일주천을 시작하면서 점점 무아경에 빠져 들었다. 깨어난다면 몸 상태는 더 나아져 있을 것이다. 아마 해질 무렵일 테고.... ****** 오타를 지적해주신 천신후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후에도 잘못된 곳이 있다면 서슴지 마시고 지적해 주십시오. 드릴 것은 없지만 감사의 마음을 천리전성을 통해 전합니다. ******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2 운하(運河)에 들어서 사흘 째 되는 아침. 단리유아는 내상(內傷)이 완치돼서 자유로이 전 내력을 발출해도 좋을 정도가 되자 그동안 생각한 바를 실험해보고, 채산쌍도(砦山雙刀)와의 비무도 있어서 비좁은 선실을 벗어나 갑판으로 나갔다. 차가운 가을 강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리고 옷깃을 제치니, 그동안 내상치료에 매달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밖으로 나오지 않아, 선실에 있었던 답답함과 탁한 공기에 찌든 냄새가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강변의 갈대와 드문드문 보이는 어촌(漁村)의 초가가 새벽안개 사이로 가물가물 보였다. 배의 선장인 장노가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나으리,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나오셨군요?” “예, 장노(張老)도 아침부터 수고가 많습니다. 요 며칠 상처를 돌보느라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했답니다.” 단리유아의 무심한 말에 약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가 팽현표의 말을 기억하고는, “그러셨군요. 선실이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요? 배가 작아서 선실이 워낙 좁습지요.” “그래도 저는 작지만 혼자서 선실을 쓰니 오히려 나은 편입니다. 팽가의 여러 사람들은 한 선실에 모여서 지내야하니 오죽 하겠습니까? 수부들도 역시 비좁은 선실 때문에 괴롭겠습니다.” 장노가 단리유아의 조용한 어투로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아이구, 소인과 같은 뱃놈들이야 이 일에 이력이 붙어서 아무렇지도 않습지요. 팽가의 여러 나리들도 몇 번 이런 배를 타보았으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아직 덕주(德州)는 멀었겠지요?” “웬걸요. 날씨도 좋고 순풍(順風)이 계속 불어서, 늦어도 오늘 신시(申時:15-17시) 무렵에는 가까이 보일 겁니다요.” 장노의 대답을 들어보니 예상보다 속도가 빠름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흠, 생각보다 멀리 왔군요. 덕주에는 들리지 않고 바로 지날 예정입니까?” “별일이 없다면 그냥 지나갈 테지요, 나으리. 아직 이틀정도 먹 거리에 여유가 있으니 아마 덕주는 그냥 지나치고 내일 저녁이나 되서 임청(臨淸)에 들르겠지요. 뭐, 팽가의 큰 어르신의 마음이 바뀐다면 모를까?” “흠, 하긴 덕주 일대는 흑사파(黑邪派)의 세력권이라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 “그러문입죠. 괜히 얼쩡거리다 싸움이 붙으면 골치 아파지지요. 그냥 지나치는 것이 상책입지요.” 단리유아가 장노와 얘기를 하는 중에 하나둘 일어나 갑판으로 나왔다. 서로 아침인사를 나누고 모두 모여서 이른 아침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찬이라야 잡아 올린 물고기로 만든 국과 나물 몇 가지에 불과했지만 모두들 이런 선상(船上) 생활을 여러 번 해봤는지 별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채산쌍도 형제는 이런 배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며칠돼지 않았지만 볼이 야위고 눈 밑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보이는 것이 아직도 적응이 안돼는 모습이었다. 팽가의 수호, 수표형제와 말썽꾼 삼형제는 반찬을 다투며 큰소리고 웃고 떠드는 것이 배를 타는 것에 이력이 붙은 것 같았다. 하긴 운하에 연한 창주에 사는 팽가의 사람이라면 배를 타고하는 이런 일에 익숙할 것이다. 아침을 먹은 후에 비무(比武)를 해주겠다고 단리유아가 말하니 그제야 얼굴이 밝아져 밥술을 드는 채산쌍도 형제를 보고,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가 놀리며 자신들도 싸우고 싶다며 어린애들처럼 보챘다. 말리는 수표, 수호형제와 팽현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정 없이 떼를 쓴다. 어쩔 수 없이 오후에 상대해 주겠다하니 그제야 환호와 함께 떨어진다. 이에 수호가 떼쟁이 얘들이라고 놀리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삼형제가 수호를 잡으려고 일어나 수호를 쫓고, 수호가 도망가는 가운데, 어수선한 아침을 대충 마쳤다. 각기 일어나 좁은 갑판에서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며 몸을 푼 후, 사시(巳時:09-11시)초 쯤에 이물 쪽에서 검기(劍氣)를 쓰지 않고 초식으로만 싸우기로 했다. 될 수 있는 한 무기(武器)를 사용하는데 조심하기로 하고 비무를 시작했다. 채산쌍도 형제는 장성(長城)이북 채산 근방에서 태어나 그 주변에서 주로 활동했던 사람들로 팽가에서 특별히 찾아가 입가(入家)를 요청할 정도로 장성근처에서는 유명한 고수였다. 그들의 도는 폭이 전체적으로 네 치 이상이고 도첨으로 갈수록 점차 넓어져 끝부분에서는 일곱 치 이상이 되는 도첨도 뾰쪽하지 않고 일자로 끊어진 특이한 모습이었다. 길이도 다섯 자 가까이 되는 대도로서 보통사람은 들기도 어려워 보였다. 이물 쪽의 공간이라고 해보아야 사방 일장이 겨우 될까 말까한 좁은 곳이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워 보였지만, 급하면 뒤쪽의 돛대부분까지 사용하기로 하고 비무를 시작했다. “단리대협, 그럼 저희가 먼저 선공하겠습니다.” 단리유아가 대도(大刀) 채구악(砦丘岳)의 말에 포권하며, “그럼 먼저 오십시오.” 단리유아의 말이 끝나자 먼저 채산쌍도의 형인 대도 채구악이 도를 머리 위로 들어 내리치며 공격하자, 옆에 있던 소도(小刀) 채구강(砦丘岡)은 오른쪽으로 접근하며 도를 사선으로 베어들었다. “개산일단악(開山一斷岳)” “개산초위평(開山草葦坪)” 소도 채구강의 일도는 칼을 비껴 쳐서 옆으로 흘리고, 대도 채구악의 왼쪽으로 일보 전진하면서 내리치는 도를 피하며 단리유아가 그에게 일검(一劍)을 찔렀다. “일검혈화(一劍血花)” “챙, 챙” 검과 도가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튄다. 일검혈화는 살수집단인 흑루(黑樓)의 살인초식으로 자세에 상관없이 펼칠 수 있는 쾌검으로 원래 비수(匕首)같은 단병기로 최단거리를 찌르는 초식이었다. 이에 놀란 대도 채구악이 뒤로 물러서 도신의 넓은 부분으로 막았다. 단리유아가 찌르는 초식을 변화시켜 하체를 노릴 때 옆에 있던 소도 채구강이 뒤쪽으로 돌아 뒤에서, “개산횡소엽(開山橫掃葉)” 단리유아의 허리를 노리고 수평으로 베어왔다. 할 수 없이 단리유아가 앞 돛대 쪽으로 피하며 뒤쪽에서의 공격을 막고, 다시 대도 채구악을 향해서, “구룡탐주(九龍探珠)” 소림(少林)사 칠십이종절기 중에서 금룡십이해(擒龍十二解)의 일초로서 금나수법(檎拿手法)이지만 검초로 바꾸어 펼친 것이었다. 아홉 가닥의 환영(幻影)이 일어나 상대의 눈을 어지럽힌 채, 상대가 하나라도 막지 못하거나 실체를 찾아 깨뜨리지 않는다면 혈도가 집혀 잡히게 돼는 초식이었다. 단리유아가 검법으로 바꾸어 펼치니 역시 훌륭한 하나의 공격초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도 채구악이 도를 휘저어, “개산풍운벽(開山風雲壁)” “채, 챙, 챙” 수많은 도영(刀影)을 일으켜 막는다. 이와 동시에 뒤쪽의 소도 채구강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개산팔로참(開山八路斬)” 단리유아의 상중하 요혈을 노리고 도를 휘젓는다. 등 뒤에 돛대가 있지만 혹시나 돛대에 맞을까 해서 단리유아가 돛대를 끼고 왼편으로 돌아서 도를 막으며, “선문입지(旋紋入地)” “챙, 챙” 호남성(湖南省) 무릉산맥(武陵山脈) 일대의 패자(覇者)인 청봉파(靑鳳派)의 비전창식인 비봉창사십구로(飛鳳槍四十九路) 중에서 한 초식으로 상대의 초식을 원형으로 비껴 흘린 다음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비록 내력을 무기에 집어넣지 않고 초식만의 겨룸이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 좋았다. 실제의 초식의 모습과 그 대응방법을 자세히 볼 수 있었으니. 신형(身形)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 공격하고 막는 모습은 마치 잘 짜여진 한편의 경극을 보는 것 같았다. 팽가의 인물들과 더불어 수부들까지 고물주위에 모여 앉아 비무를 구경했다.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는 소리를 질러 채산쌍도를 응원하고 때로는 대응초식을 알려주기도 하면서, 서로 자신의 대응방법이 맞는다며 떠들어댔다. 옆에서 듣던 사람들도 듣기 괴로울 지경으로 떠드니, 채산쌍도는 그들의 목소리에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초식간의 연결과 변환(變幻)등을 보며,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채산쌍도는 싸우면 싸울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대문파(大門派)의 초식으로, 강호(江湖)의 삼류초식으로, 실전(失傳)된 초식으로, 장법(掌法)의 일수였던 초식으로, 암기(暗器)수법이었던 초식으로 공격하고 막는 단리유아의 무공은 그들이 지금까지 상대해봤던 어떤 고수의 무공초식들보다 훨씬 많고 다양했다. 그들도 본래 승부자체는 별 미련이 없었다. 강호의 유명한 고수인 전광(戰狂) 단리유아(段俚唯我)와의 싸움으로 그들 자신의 무공의 장단점을 발견하고 고쳐 상승(上乘)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고 비무를 요청했던 것이었다. 자신들은 이제 절정고수의 대열에 들었지만 단리유아는 화경(化境)의 끝자락에 다다라 현경(玄境)의 문턱을 향해가는 고수이니 승부라는 것은 해보나마나였다. 그러나 화경의 고수와의 싸움은 그들 같은 화경의 입문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이자, 상승의 무공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개산도법(開山刀法)의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펼치면서, 어디가 약점인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점점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정오가 다 되어갈 무렵 일합을 끝내고 단리유아가 먼저 뒤로 물러섰다. 서로 호흡을 가누며 포권하며 비무를 끝내기로 했다. “채산의 두형제분들, 이제 정오니 점심시간이 되어옵니다. 이만 싸움을 그만 멈추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태도와 무심한 어조의 단리유아의 말에 잠깐이나마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윽고 대도 채구악이 표정을 바꾸고 한숨을 쉬면서, “휴, 단리대협. 높으신 명성에도 저희와 비무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비록 잠깐의 대결이었지만 도움이 되었다니 저 역시도 기쁩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비무를 마치도록 합시다.” 정말로 기쁜 것인지 아니면 말로만 그러는 것인지 단리유아의 무심한 말투에는 알 수가 없었지만, 대도 채구악이 할 수 없이 답례하면서, “예, 그렇게 하지요. 거듭 감사합니다. 대협.” 단리유아가 채산쌍도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서 모두가 함께 고물 쪽으로 다가오자, 팽가(彭家)의 사람들이 다가와 비무에 대해 얘기했다. 특히 수강, 수전, 수창의 삼형제들은 채산쌍도에게 다가가 각기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대응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둥, 자신의 방법이 맞는다는 둥 서로 이야기하며 채산쌍도를 붙잡고 일장의 말다툼이 일어났다. 이에 단호참도 팽현표와 수표, 수호 형제는 그들을 뜯어 말리느라 한참의 시간을 소모했다. 그들이 진정되자 곧 점심을 먹으면서 좀 전의 비무에 대해 얘기했다. “단리대협, 죄송하지만 저희 도법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는지 한 말씀 해주시지요.” 대도 채구악이 단리유아에게 묻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하고 일정한 어조로, “여러분의 도법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도법(刀法)은 원래가 부법(斧法)인 것처럼 느꼈는데, 혹시 맞습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채산쌍도는 깜짝 놀라고, 다른 사람들도 궁금한 얼굴로 지켜본다. 소도 채구강이 놀라 단리유아를 향해서, “아니, 어떻게 그 사실을....” “제가 살펴보니 이 도법이 크게 내리찍는 벽자결(劈字訣)과 참자결(斬字訣)이 주를 이루어 초식들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벽자결이 반 이상을 이루니 필시 이는 도법이 아니라 부법인 것이 고쳐져 도법이 되었거나, 아니면 부법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단리유아의 정연한 말을 듣고 나서 대도 채구악이, “흠, 정말 직접 보시지도 않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시다니. 무학의 일대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군요.” “과찬이십니다. 누구나 무예에 조예가 깊다면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대도 채구악이 손을 저으며, “아니, 결코 과찬이 아닙니다. 그동안 저희가 이 무공을 펼치면서도 이 도법이 원래 부법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팽현표가 놀라서, “정말 부법이었단 말인가? 자네들과 오년 넘게 생활한 나도 몰랐는데?” “휴, 아마 저희가 무공을 얻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잘 모르셨을 겁니다. 사실 저희는 원래 장성 밖 채산 근처에서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태어났지요. 저희도 어린 시절부터 칼 쓰는 법을 배워서 맹수를 사냥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채산의 한 동굴에서 부법(斧法)이 기록된 비급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으로 보이는 시신은 이미 뼈가 삵아 형체만 겨우 남아있었을 뿐이고, 그 곁에는 녹이 슬고 낡은 칠척의 개산대부(開山大斧) 하나만이 있었습니다. 비급도 낡아서 부서지기 직전이었고 글씨를 알아보기도 힘들었지요. 저희도 개산대부를 보고 부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원래 저희가 배운 것이 칼 쓰는 것이고 비급 자체가 불완전하니 아예 도법으로 바꾸어서 알아볼 수 있는 초식만으로 새로 도법을 만들었지요. 그렇게 몇 년이 흐르니 차츰 도법의 모양을 갖추었지요. 후에 저희가 장성근처에서 이름을 얻고부터는 아무도 이것이 원래 부법이라는 것을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대도 채구강이 도법을 얻은 사연을 얘기하자 듣고 있던 단리유아가, “혹시, 부법의 원래 명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저희가 비급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글씨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여서.... 저희도 그림으로 그려진 초식을 보고 무공을 익힌 것이라서 원래 명칭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단리유아가 대도 채구강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흠. 제가 보기에 원래의 부법은 화경(化境)의 고수가 창안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부법이 완전하다면 지금보다 상승(上乘)의 경지에 쉽게 들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단리대협, 초식은 거의 모두 익혔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단리유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초식만으로는 상승의 경지에 오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구결(口訣)이 더 중요하지요. 그 사람의 깨달음과 부법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었을 테니. 절정까지는 초식을 수련한다면 오를 수 있겠지만 화경의 경지를 오르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채구강이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실망한 기색이었다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그러면, 절정의 고수와 화경의 고수를 구별하는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대체로 절정(絶頂)까지는 초식의 위력만으로 능히 싸울 수 있고 그 초식들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일단 화경(化境)에 이르면, 강기(剛氣)를 바탕으로 초식을 펼치기에 그 강기를 형성하는 방법과 형태를 만드는 내가구결(內家口訣)이 훨씬 중요하게 됩니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빠르고 오랜 시간동안 강기를 유지하느냐가 화경의 고수간의 싸움에서는 관건이 되지요. 일단 초식의 형태는 절정이하의 수준보다 단순하고 그 중요도도 떨어져, 강기를 이루는 내가구결의 뛰어남의 유무가 승부를 결정짓게 됩니다. 강기라는 것 자체가 화려한 변초(變招)를 만들기 어렵기도 하고, 또 강기 자체의 파괴력은 같은 강기 수법으로 막지 않는 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정설(定說)입니다. 그래서 화경의 고수를 가리켜 강기(剛氣)무공의 완성자(完成者), 혹은 기공(氣功)무예의 완성자(完成者)라 일컫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화경 전에 강기를 사용하는 고수들도 있지 않소? 단리유아의 자세한 설명에 팽현표가 끼어들어 묻었다. 이에 단리유아가 책을 읽듯이, “화경(化境) 전에 강기(剛氣)를 쓰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내공을 극도로 응축시킨다면 절정(絶頂)에서도 강기를 형성할 수 있지만 화경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틀립니다. 우선 내공의 소모가 훨씬 크고, 유지시간도 상대가 안될 만큼 짧습니다. 그 형태도 화경의 고수가 펼친 강기에 비해서 훨씬 성긴 모습입니다. 그래서 절정고수가 강기를 쓴다면 많아야 세 번, 보통 한번에 불과하고 위력도 화경의 고수가 펼친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화경에 오른다면 임독양맥(任督兩脈)의 타통과 대주천(大週天)을 이루니 진기의 회복속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또 혈맥자제가 두터워지고 넓어져 많은 양의 내공을 무리 없이 빠르게 한번에 움직일 수 있게 되어 강기 자체의 위력이 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없이 듣기만 하던 팽수표가 끼어들어, “그럼 화경의 고수를 상대하려면 절정의 고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대일로는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으니 도망가는 것이 최선의 수입니다. 무공수준에 대해 이러한 설(說)이 있습니다. 일류(一流)의 고수를 막으려면 다섯 명의 이류(二流)의 고수면 되고, 절정(絶頂)의 고수를 막으려면 열 명의 일류가 필요하고, 화경(化境)의 고수를 막으려면 이십 명의 절정고수가 필요하고, 현경(玄境)의 고수를 막으려면 오십 명의 화경의 고수도 부족하다. 이 가설이 절대적으로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맞는 편입니다. 물론 피하지 않고 직접 부딪힌다는 경우이고, 진법(陣法)이나 암습도 제외하는 경우입니다.” 단리유아의 대답에 팽수호가 놀라서, “화경의 고수를 막는데 절정고수가 이십 명이나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요. 절정(絶頂)에서도 수준차가 있고, 화경(化境)에서도 수준차가 있으니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진법이나 암습을 병행한다면 숫자가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화경의 고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일단 자리를 벗어난 후에 각개격파를 노릴 것입니다.” “휴, 화경의 고수를 막는데 그 정도라면 그럼 현경(玄境)의 고수를 막을려면.....”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는 팽수호를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후에, “현경의 고수에게는 숫자라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공간(空間)의 원근(遠近)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현경의 초입(初入)만 되도 심어검(心御劍)을 쓸 수 있다는데, 이 심어검 자체가 공간을 무시하는 수법입니다.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목표하는 곳에 나타나 상대를 없애버리니 숫자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설혹 화경의 고수가 포위하여 진법을 펼쳐 대항한다 해도 잘해야 동귀어진(同歸於盡)이지 본질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다시 팽수호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러면 현경(玄境)의 경지에 들었다는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는 무적(無敵)이었겠군요?” “그들 고금오대고수는 생전에 각기 강호에서 적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타난 시기가 각각 달라서 직접 부딪혀 서로의 무공을 비교해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금오대고수 중에서 생전에 현경에 든 것이 확인된 경우는 천마노조(天魔老祖)와 무상대선사(無上大禪師) 뿐이라 들었습니다. 그 외의 세분은 은거(隱居)하기 전에 화경의 고수로서 최소한 수어검(手御劍)까지는 완성했다고 알려졌으니, 아마 죽기 전에는 현경에 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뿐이고 확실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만 현경에 올랐을까요? 지금까지 무공을 익힌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데요.” 팽수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단리유아가, “제 생각일 뿐이지만, 몇 명 더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즉, 세외팔황(世外八荒)에도 몇 명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수는 결코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경의 경지라는 것이 내공의 대소(大小)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무수한 깨달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니까요. 저는 현경의 고수가 사람을 마구 죽이거나 세욕(世慾)에 사로잡히는 경우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 경우는 현경의 관문으로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든 경우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설혹 현경(玄境)에 들었다 할지라도 속세에 나타나 풍파(風波)에 얽매이거나 속사(俗事)에 끼어드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바로 탈겁(脫劫)해서 속세를 떠나 등천(登天)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지요. 만일 내공만 높아서 현경이 될 수 있다면 강호는 예전에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휴, 아직 절정의 경지에도 들지 못한 저에게는 화경의 경지도 까마득한데, 현경의 경지는 정말 꿈에서나.....” 팽수호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자, 이때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팽수강이, “꿈 깨라. 애 늙은이야. 넌 이미 늙은이가 다 되었는데 어느 시절에 그런 경지(境地)를 바란단 말이냐?” “뭐라구요? 애 늙은이?” 화가 나서 소리치는 팽수호를 보면서 더욱 놀리듯이 팽수창이, “흥, 어렸을 때부터 쉰네나는 노친네 잔소리만 입에 달고 다니는 녀석아, 이미 마음이 늙어빠졌는데 어느 세월에..... 흥, 화경의 경지에 오르기만 해도 정말 서쪽에서 해가 뜨는 경우일 걸.” “뭐요? 말 다했습니까?” 세 사람이 계속해서 팽수호를 놀렸다. 다른 사람들이 화가 나서 일어나 달려들려는 수호를 붙잡아 진정시키고, 아직도 비웃는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는 멀리 쫓아 보내며 어수선한 점심시간을 마쳤다. “어이구, 저놈들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수호 이 녀석하고는 어릴 적부터 아웅다웅 싸우더니 아직도 그러는구나, 너희 둘 중에 한쪽은 따라오지 못하게 했어야하는데....” 고개를 흔들며 한탄하듯이 중얼거리는 팽현표를 향해서 팽수호가, “숙부님, 왜 나한테만 그래요? 저 형님들이 말썽부릴 것을 뻔히 알고 계셨으면서 데려온 사람이 누구신데....” “관두자. 관둬. 하여간 이번 일이 끝나면 내 네 녀석들을 가만두나 봐라.” 점심을 마치고 잠시 쉬다가, 다시 단리유아가 팽가 삼형제의 비무 상대가 되어 잠깐 싸워주게 되었다. 단리유아가 그들의 무공을 살펴보니 채산쌍도에 결코 못지않을 정도로 강했지만, 비무 하면서도 서로 떠드는 것이 오히려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한 시진 정도 싸우고는 더 이상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다가가 마혈과 함께 아혈도 제압해 버렸다. 눈을 부릅뜨고 얼굴이 붉어진 모습이 해혈해 달라는 모양이었지만, 단리유아는 모른 척 뒤돌아서서 고물 쪽으로 향해 다가가 멀리 보이는 덕주(德州)를 보는 척 했다. 팽수호가 간지럼을 태우다가 일각 후 혈도가 풀린 세 형제에게 잡혀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단리유아는 배 뒷전으로 밀려나는 물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예리한 안목으로 오타를 지적해주신 마이다스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잘못된 부분은 수정했습니다.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봐 주십시요. *******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3 점점 덕주부(德州府)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오고 포구의 모습도 점차 또렷이 보였다. 포구에 닻을 내린 크고 작은 배들과 들어가고 나가는 배들로 포구의 모습은 무척 분주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내리고 옮기며 떠드는 소리가 멀리 떨어져 스쳐지나가는 우리 배에도 간간히 들려왔다. 덕주부에는 들리지 않고 지나치기로 한 예정대로 가능한 한 반대쪽 강변으로 붙어서 지나갔다. 뒤로 물러나는 포구의 모습을 보고는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쪽 인근은 산동성(山東省) 북부의 대표적인 흑도문파인 흑사파(黑邪派)의 세력권이어서 다들 긴장해서 접근하는 배들과 포구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차츰 멀어지는 덕주부를 뒤로하고 다들 흩어져 강변의 정취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리유아 역시 고물 쪽에서 배 뒷전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채산쌍도(砦山雙刀)가 곁으로 다가왔다. 대도(大刀) 채구악(砦丘岳)이 단리유아를 향해서, “대협, 아까의 말씀으로는 저희 도법으로는 더 이상 상승(上乘)의 경지를 바라보기는 어렵다 하셨는데 정말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점심때의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실망해서 오후 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있었던 그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로서는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강호(江湖)를 떠도는 십여 년의 세월 속에 무공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단리유아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청하는 이는 보기 힘들었다. 물론 아무 상관도 없다가 비무(比武) 당시에야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단리유아도 가르쳐주기 싫었고, 또 당시의 단리유아의 수준이라고는 그들보다 많은 무공을 알고 있다는 것일 뿐 월등히 그들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무척 성격이 솔직한 것 같았다. 강호에서 자존심을 숙이고 타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경우는 같은 가문(家門)의 사람이거나 문파(門派)내의 사람이 아니라면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단리유아처럼 비무를 하면서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의 무공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는 경우는 없었다. 상대의 무공을 보고 배울 점을 찾거나 자신의 무공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것이지, 자신이 지닌 무공자체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잠깐 단리유아가 생각해보다가, 앞으로 한 달 동안 함께할 사이이니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도 괜찮아 보여서 대도 채구강에게, “흠, 아까 여러분의 도법을 보니 총 노수(路手)가 사십구 식(式)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직접 보았다고 해서 사십구 식인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들의 놀라는 표정에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단리유아가 말한다. “계속해서 몇 번이고 펼치는 것을 보니, 아마 대부분의 고수라면 알 수 있었을 겁니다.” “휴, 그래도 정확히 몇 수인지 알기란 쉬운 것이 아닐 텐데....” “별 것 아닙니다. 경지가 높아지면 자신보다 수준이 낫은 사람의 무공을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그 도법(刀法)이 사십구 식이 맞다면 원래의 부법(斧法)은 아마 칠초로 이루어져 있었을 겁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소도(小刀) 채구강(砦丘岡)이 고개를 흔들고 한숨을 내쉬며, “휴, 정말 마치 저희가 익힌 부법을 직접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본래 저희가 부법을 얻었을 때는 비급의 글씨도 알아보기 힘들고 해서 초식만 익히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저희의 무공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 대한 식견도 낮아서, 그 초식조차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할 수 없이 몇 조각으로 조각내서 익히게 되었고, 그것이 나중에는 실전을 겪으며 점점 각 초식으로 굳어져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지요.” “그렇게 된 거였군요. 그럼 다시 한번 제게 그 도법(刀法)을 처음부터 보여주시겠습니까? 처음 한번은 될수록 천천히 한 초, 한 초 펼쳐보여 주시고, 다음번에는 각기 연결해서 가능한 빨리 보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단리유아의 요구에 먼저 대도 채구악이 나서서 일식부터 하나하나 차례대로 펼쳐보였다. 다음번에는 소도 채구강이 연결동작으로 빠르게 전개해 보였다. 배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도 가까이 다가와 쳐다보았다. 한쪽에선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가 모여 채산쌍도의 도법에 대해 평하면서 서로 시끄럽게 떠들었다. 옆으로 다가온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자리를 비켜주도록 물러나게 한 후, 단리유아가 채산쌍도를 향해서 조용한 어조로, “잘 보았습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문제점이 몇 군데 눈에 뜁니다. 각기 일곱 번째의 초식마다 연결이 어긋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본래는 칠 초식의 부법(斧法)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여러분도 일곱 번째 초식에서 다음초식으로 넘어갈 때마다 어색하고, 실전에서는 약점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대도 채구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 여러 번 그런 경우를 당한 적이 있지요.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 각 일곱 번째 초식에서 다음 초식으로 이어서 펼치면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서 위험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본래의 개산부법(開山斧法)은 칠초식으로 절정(絶頂)에서 화경(化境)까지 무리 없이 무공이 상승하면서 각 초식간의 연관성도 별로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일부러 조각내서 연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혹시 원래의 부법칠식(斧法七式)을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까?” “예, 구결(口訣)은 알아볼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초식은 그림으로 그려져서 알기 쉬었지요. 여태까지 그 일곱 초식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도법도 크게는 그것을 조각낸 것에 불과하니까요.” 대도 채구악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글을 읽는 듯한 어투로, “잘 되었습니다. 일이 쉬어지겠군요. 그 초식을 기억한다면 이제부터는 그 초식을 익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무기도 원래의 개산대부로 바꾸는 것이 성취에도 좋고 익히기에도 쉬울 것입니다. 구결은 알 수 없지만, 모든 무공이 그렇듯이 초식 자체에는 내력운기(內力運氣)의 방법을 알게 모르게 포함한 경우가 많습니다. 상승(上乘)의 무공일수록 특히 그러하지요. 여러분이 처음 그 부법을 얻었을 때는 무공수준이 너무 낮아서 알기 어려웠을 테지만, 만약 지금 다시 시작한다면 각각의 운기요결(運氣要訣)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부법을 보고 여러분에게 직접 운기요결을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중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여러분이 서로 연구(硏究)하고 노력하다보면 기필코 내력운기의 법문(法文)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상승(上乘)의 경지에 오르기에도 쉬울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안색이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며 대도 채구악이, “휴, 지금까지 도법만 이십년 가까이 익혔는데, 이제 와서 다시 무기(武器)를 바꾸어 새로 시작해야 한다니 앞날이 캄캄하군요. 대협, 부법(斧法)을 보시고 지금 운기요결을 가르쳐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지금 시작한다면 시간이 너무....”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고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나가는 법입니다. 제가 구결(口訣)을 불러 준다면 익히기는 쉽겠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더 이상 바라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깨닫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상승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명문대파(名門大派)의 제자들입니다. 비록 제자들의 수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그 사부(師父)를 뛰어넘을 정도의 사람이 드문 것은 그런 이유랍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쉽게 상승(上乘)의 기회를 얻었지만 나중에 이르러서는 그 사부나 문파(門派)의 고수를 보며 자신의 성장정도를 알게 모르게 한계(限界)지어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이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모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쓸데없이 시간이 허비되지는 않을 겁니다. 비록 새로운 무기에 적응하고 칠초 식의 부법(斧法)을 새롭게 익혀야 하겠지만 생각보다는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미 칠초 식의 부법은 여러분이 각기 조각내서 익혀보았으니, 여러분이 연구한다면 머지않아 운기요결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익히는 시간도 그리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만약, 연구하는 도중에 도저히 운기요결을 알 수 없을 때는 다시 저에게 물어 보십시오. 구결을 완전히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알려 드리겠습니다.“ 단리유아의 조용한 말에 대도 채구악이 희색이 만연(漫然)한 얼굴로, “예, 알겠습니다. 대협. 저희의 생각이 모자랐군요. 오늘의 가르침은 잊지 않고 언젠가 때가 되면 보은(報恩)하기로 하지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다 같은 강호(江湖)동도(同道)로서 무공을 익히는 입장인데, 그 정도의 도움은 큰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사양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이번에는 소도 채구강이 고개를 흔들며, “아닙니다. 대협에게는 사소한 일중에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저희에게는 일생(一生)의 중대사중의 하나로서 오늘의 은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때 옆으로 다가온 팽현표가, “대협, 받아들이시지요. 우리 같은 강호(江湖)의 무부(武夫)에게 있어 무공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귀중하다 할 수 있지요. 그런 무공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주신 것은 설사 사부(師父)라 불러도 큰 허물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단리유아가 감사의 인사를 받자 팽현표가 채산쌍도를 바라보면서, “여보게, 자네들은 다음 포구에 닿으면 무기부터 새롭게 구해야겠구만. 그런데 개산대부(開山大斧)를 쉽게 구할 수 있을지 몰라. 시간이 있다면 주문 제작을 하면 되겠지만 여정(旅程)이 급하니 오래 머무를 수도 없고, 혹 대읍(大邑)이라면 모르지만....” “당장에는 지금 쓰는 대도(大刀)를 그대로 사용해도 될 것입니다. 어차피 배안에서는 완전한 초식을 전개하기도 어려우니 지금은 대도를 쓰다가 운기요결을 어느 정도 알아내면 그 때 대부(大斧)로 바꾸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대도도 개산대부에 못지않은 중병기(重兵器)에 해당하니 말입니다.” 단리유아가 팽현표의 말을 듣고 의견을 말하자 대도 채구악이, “흠, 단리대협의 말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도 당장에 도를 바꾸고 싶지는 않군요.” “그럼, 양산(梁山)이나 제령(濟寧)에 잠깐 내릴 때 찾아보기로 하세. 그 곳은 은창보(銀槍堡)와 광풍방(狂風幇)의 경계선을 이루는 지점들이고, 충분히 큰 대읍(大邑)이니 구할 수 있을 걸세.” “예, 그렇게 하지요.” 서로 얘기하는 도중에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가 다가와 자신들도 가르침을 내려 달라고 단리유아의 옷자락을 붙잡고 떼를 썼다. 이에 팽현표가, “네 이놈들, 당장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단리대협께 이게 무슨 짓이냐?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아무에게나 떼를 쓰고? 쯔쯪, 언제나 철이 들는지.... 야, 이 녀석들아, 너희들이 하는 양을 보면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가도 없어져버려! 공손하게 부탁해도 해줄까 말까한데 물건을 맡겨놓은 듯이 물고 늘어지기부터 하니 원....” 호통소리와 꾸짖는 소리에 자신들만 가르쳐주지 않고, 채산쌍도(砦山雙刀)만 가르쳐준다고 궁시렁거리다가 다른 사람이 먼저 떼를 쓴 것이 잘못이라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모두가 고개를 설레설레 지으면서 자리를 피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팽현표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면서, “휴, 정말 저놈들 때문에 골치가 지끈거리는군. 그나저나 대협, 저놈들은 모르겠지만 여기 수호나 수표에게도 가르침을 주시지요.” 팽가(彭家)에서 아직 강호 경험이 일천한 이들을 데려가게 한 것은 경험을 쌓으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단리유아와 친분을 쌓아 놓는다면 미래의 팽가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혹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이익이고 하니 이번 여정에 이들을 동행하게 한 것이었다. 수표와 수호 형제가 단리유아를 처음 만났을 때는 소문으로만 듣던 그를 보고 반가웠지만, 그 실제 풍모(風貌)을 보고는 은근히 실망에 차 있었다. 그러다, 도왕(刀王)과의 비무를 보고는 오히려 소문이 더 못함을 느꼈다. 비록 나이는 자신들과 비슷했지만 그 무공의 대단함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정도였고, 또한 선배로서 대우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졌다. 그 후로 단리유아를 따라서 남경(南京)으로 수행(隨行)할 사람들을 뽑을 때 자원(自願)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지만, 팽가의 장래와 가주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이들이 뽑혀서 따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도 젊은 층의 고수 중에서는 가장 강하니 역시 같이 따라가게 했던 것이다. 단리유아가 수표, 수호 형제를 한 번 돌아보고 무심(無心)한 어조로, “팽가(彭家)의 무공은 여러분들께서도 며칠 전 도왕(刀王) 어르신과의 비무에서 보셨듯이 큰 약점이 없고, 각 도법(刀法)마다 장점이 있어서, 실로 강호(江湖)의 절정(絶頂)무공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렇다할 도움을 주기에는 어렵겠습니다.” 단리유아의 사양하는 소리에 팽현표가 큰소리로 웃으면서, “하하하, 아닙니다. 대협. 겸손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또 여기 이 녀석들은 특이하게 본가의 도법(刀法)을 익히지 않았지요. 수표는 본가의 권법(拳法)중의 하나인 절패권(切牌拳)을 익혔고, 수호는 우연히 본가에 흘러들어온 철선(鐵扇)에서 얻은 선법(扇法)을 익혔지요. 본시 우리 가문이 도법을 중심으로 하는 가문이기에, 이 녀석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가신(家臣) 중에서 몇 사람이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어서 처음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도움에도 한계에 이르게 되었지요. 이번에 대협께서 무공을 보고 가르침을 주신다면 저 녀석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돌아보니 둘 모두 간절히 바라는 듯한 시선으로 초롱초롱하게 쳐다본다. 단리유아도 그들의 무공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도 있고 해서,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번 살펴보고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적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뭐하느냐? 이 녀석들아! 어서 감사 인사부터 하고 무공을 시전(示展)해 보여야지.” 단리유아의 승낙에 팽현표가 크게 웃으며 수호, 수표 형제를 보면서 말하자 그들도 눈치를 채면서 인사를 한다. “대협, 감사합니다. 저희의 무공(武功)을 지도해 주시기로 하니.” “대협, 감사합니다. 더 이상 진전(進展)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이렇게 도움을 주신다하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단리유아가 무심코 감사의 인사를 받다가 그들의 말에 꼼짝없이 그들의 무공을 지도해주어야만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팽가의 인물로서 특이하게 도법이 아닌 다른 무공을 익혔다는 소리에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할 수 없이 인사를 받고 도움을 주기로 하고, 먼저 팽수표가 절패권을 시전하기로 하자 모두 고물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와 채산쌍도, 수부들도 모여서 무공시전을 지켜보았다.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4 팽수표가 후미 갑판의 한쪽에서 절패권(切牌拳)을 기수식부터 펼치기 시작했다. 단리유아가 자세히 바라보니 비록 내력(內力)을 싣지 않고 초식으로만 펼치는 것이지만, 그 수법의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내지르는 하나하나의 초식이 날카롭고, 인체의 치명적인 요혈을 노리는 것이어서, 철저한 실전위주의 권법임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수표의 절패권이 끝나고 수호의 차례가 되자, 수호가 철선(鐵扇)을 들고 선법(扇法)을 펼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가 시끄럽게 떠들면서 수호를 약 올리기에, 팽현표가 아예 마혈과 아혈을 눌러 조용하게 만들어 버렸다. 수표의 절패권과는 정반대로 아름답기까지 한 선법이었다. 때로는 상대에게 인사하듯이 부드럽게 흔들다가 갑자기 다시 아래로 내리긋거나 철선을 허공에 날려 되돌려 받기도 하는 등, 동작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그런 부드러운 아름다움 속에는 치명적인 살수가 숨어있어서 가히 아름다움과 날카로움이 조화된 선법의 백미(白眉)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선법을 마치고 수호가 다가오자 모두들 단리유아를 주시하며 어떤 말이 나올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돌려 그들의 시선을 피한 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두 분의 무공은 잘 보았습니다. 우선 절패권(切牌拳)은 철저한 실전(實戰)위주의 권법(拳法)으로 요혈을 노리는 공격위주의 권법이라 할 수 있겠고, 선법(扇法)은 그 명칭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강유(剛柔)가 조화된 선법의 최고(最高)절기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무공으로 보였습니다.” 단리유아의 조용한 말에 수호가 끼어들어, “선법의 본래 명칭은 선하산운선법(仙霞散雲扇法)이라 합니다. 어릴 적에 본가의 무기고(武器庫)에 들렸다가 발견한 낡은 철선에 기록된 것이지요. 제가 마음에 들어서 지금까지 익히고 있습니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여 알았음을 표하고 나서 음성의 높낮이가 없는 고요한 목소리로, “두 무공 다 초식(招式)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무공(武功)이 그렇듯이 어떠한 무공을 완벽히 익힌다면, 비록 초식 자체에는 단점이 있더라도 그 무공을 펼치는 자는 초식간의 연결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속도가 빠르거나 변화가 많을 필요도 없습니다. 한 가지 무공이라도 제대로 익힌다면 능히 뛰어난 초식으로 이루어진 무공도 막고 이길 수 있습니다. 요컨대 무공(武功)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무공을 완성한 인간(人間)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얘기가 빗나갔지만 저는 고금십대무공(古今十大武功)이 최고라느니,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의 무공이 무적이라느니 하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그 무공을 익힌 이가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면 삼류(三流)의 무공을 완벽히 익힌 이에게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우선 절패권(切牌拳)을 본다면, 너무 공격에 치우쳐 지나칠 정도로 상대를 압박하는 권법으로 보입니다. 상대가 물러설 틈도 없이 공격에 공격을 더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일수(一手)에 상대의 요혈을 노리는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이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의아해 하시겠지만, 이런 초식을 계속 사용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상대에게 물러설 한 가닥의 퇴로도 남김없이 계속해서 살수(殺手)를 펼친다면, 상대가 자신보다 설혹 수준이 낮은 고수(高手)일지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듯이, 물러설 곳이 없다면 상대도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각오해서라도 부딪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문제는 수준이 낮은 고수를 상대할 때도 이러니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감히 조언한다면 이 절패권(切牌拳)은 강도 일변의 공격이 문제이니 부드러움을 위주로 하는 권법을 병행하여 익히거나 방향의 전환이 재빠른 신법(身法)을 익힐 것을 권합니다. 제 생각에는 태을권(太乙拳), 첩운권(疊雲拳) 같은 유권(柔拳)류의 권법을 같이 익혀서 강유(剛柔)를 조화하는 것이 앞으로 상승(上乘)의 경지에 오르는 데에도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법을 익히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단리유아의 설명을 듣고 나서 팽수표가, “하지만, 단리대협. 태을권(太乙拳)은 종남파(終南派)의 비전(秘傳)이고, 첩운권(疊雲拳)은 산서성(山西省) 삭주(朔州)지방의 명문인 북산권문(北山拳門)의 비전절기인데 쉽게 제가 익힐 수 없지 않습니까?” 팽수표의 질문을 받고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면서, “제가 말하는 것은 그 두 무공이 가장 절패권(切牌拳)과 상성(相性)이 어울려 권한 것입니다. 반드시 그 무공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무당파(武堂派) 태극권(太極拳)의 아류(亞流)로서 시중에 떠도는 권법을 익혀도 됩니다. 요컨대 유권(柔拳)계열의 권법을 익혀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라면 태을권, 첩운권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가장 상성이 맞아서 앞으로의 무공증진(武功增進)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팽수표가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생각에 잠긴다. 그 모습을 보던 팽현표가, “수표야, 너는 장자(長子)가 아니니 가문을 떠나 다른 문파에 들어가 무공을 익힌다 해도 큰 상관이 없단다. 단지 무공을 모두 연마(鍊磨)한 후에는 다시 가문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정 그렇게 안 된다면 조부님께 말씀드려 방도를 찾아보기로 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라.” “알겠습니다. 숙부님.” 이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팽수호가 이번에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대협, 제 무공은 어떻습니까?” “팽형의 선법(扇法)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초식만 보아도 절패권보다 상승(上乘)의 절기인 것 같으니. 그러나 이상한 것이 가끔 초식을 펼치다가 멈추고 하던데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내공(內功)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보였는데, 혹시 맞습니까?” “예, 저도 이상히 여기고 있었는데 제가 요즘 이 선법을 펼치는 도중에 자꾸만 숨이 차고 기혈(氣血)이 흐트러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팽수호의 말에 단리유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철선(鐵扇)에 있던 내공심법을 같이 익히지 않았습니까?” “철선에는 초식만 있고, 내공심법은 찾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본가(本家)의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바탕으로 선법을 연마해 왔습니다.” 이에 단리유아가 팽수호를 보면서 무심한 어조로, “혼원일기공으로 말입니까? 지금부터라도 당장 선법(扇法)연마를 그만 두십시오.” “예? 더 이상 연마를 하지마라구요?” “예, 연마를 중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초식(招式)과 내공(內功)이 전혀 맞지 않아서 그런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아까 채산쌍도 분들에게도 얘기 했었지만 상승(上乘)의 무공일수록 초식자체에 운기요결(運氣要訣)이 포함된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연마할 때는 수준도 낮고 내공도 깊지 않아서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내공이 깊어지니 초식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주화입마(走火入魔)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입니다.” “주화입마라구요?” 팽수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조용하게 말한다. “예, 초식과 내공이 상극(相剋)으로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선법을 보니 도가(道家)의 인물이 창안한 무공으로 보이는데,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은 강맹함과 굳셈이 그 특징이지 않습니까? 도가의 인물이 이 선법을 창안했다면, 내공 역시 도가(道家)의 부드러우면서도 끈질긴 특성을 가진 내공심법일 것입니다. 전혀 심법이 맞지 않으니 몸이 먼저 알고 거부하는 것으로 아마 진전도 무척 느렸을 겁니다. 그래도 수련이 깊지 않아서 천만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휴,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연마해 왔는데.... 단리대협, 다른 방도는 없을까요?” 팽수호가 한숨을 내쉬며 다른 방도를 묻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정히 선법(扇法)을 포기하지 못하고 익히고자 한다면, 전신(全身)의 내공을 흩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심법(心法)을 익히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정확히 맞는 내공심법을 알아서 익힌다면 더 좋겠지만 그 심법을 알 수 없을 테니, 비슷한 속성(屬性)의 내가심법을 구해서 익힌다면 초식을 펼치는데 별 무리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낙심천만한 표정으로 수호가 뒤로 물러나자,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가 위로한다고 한마디씩 한다. “괜찮아, 그냥 본가의 도법(刀法)을 익히면 되지. 내가 매일 상대해 줄께.” “그래그래, 뭐 하러 그런 선법을 익히려고 하냐? 남자라면 뭐니 뭐니 해도 칼 쓰는 법을 익혀야지.” “맞소, 형님. 이 녀석아, 노인네도 아닌데 부채가 왜 필요하냐? 본가는 본래 도법이 근본인데.... 흐흐흐, 당장 선법은 때려치우고 도법이나 연마해라. 내가 당장이라도 상대해 줄 테니.” 한쪽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던 팽수호를 쳐다보고 팽수표가, “뭐요? 지금 그것이 동생을 위로하는 소리요?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에(....)” 팽수표가 입안에서 작게 중얼거리자, 듣고 있던 삼형제가 일어나, “뭐야, 이자식이.”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야, 무뚝뚝하기가 통나무보다 더한 놈아. 말이면 다인 줄 아냐?” 얼굴을 붉히고 서로 일어나 싸우자 보다 못한 팽현표와 채산쌍도가 나서서 말린다. 팽현표가 삼형제의 머리를 때리며, “야 이놈들아, 동생이 내공(內功)을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딴 소리냐? 어디 오늘 너희들 나한테 죽도록 맞고 나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자.” 삼형제가 한쪽으로 달아나며, “아니, 왜 우리만 갖고 그래.” “맞소, 형님. 맨 날 우리를 잡지 못해서 안달이라니까?” “맞아, 아무리 우리가 더 촌수(寸數)가 멀다고 해도 정말 너무한다니까. 항상 저 녀석들 편만 들고.... 아이구, 서러워서....” 울화가 치솟아 이물 쪽으로 도망치는 삼형제를 쫓아가려는 팽현표를 달라붙어 붙잡아 간신히 진정시킨 후, 팽수표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단리대협, 그러면 저 선법(扇法)에 어울릴 만한 내공에는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대협께선 견문이 넓으니 알고 있는 무공 중에서 어울릴만한 무공을 생각해내실 수 있겠지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호까지 고개를 들고, 다들 자신을 쳐다보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군요. 무당(武堂)의 태극신공(太極神功), 종남(終南)의 선천태을기공(先天太乙氣功), 곤륜(崑崙)의 태청귀원일기공(太淸歸元一氣功), 공래파(邛崍派)의 소청현현기공(少淸玄玄氣功), 자부문(紫府門)의 무극대라현공(無極大羅玄功), 실전(失傳)된 것으로 미천대연신공(彌天大衍神功), 태허무극심법(太虛無極心法), 현천귀진신공(玄天歸眞神功)등이 있겠군요. 그 외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단리유아의 대답에 팽수표가 실망해서 한숨을 쉬면서, “휴, 정말 다들 구하기 어려운 무공들뿐이군요. 실전(失傳)된 것이 아닌 이상, 다들 대문파(大門派)의 비전절기(秘傳絶技)니 속가제자로 들어간다고 해도 배울 수는 없겠지요.” “제가 말한 것 말고도 강호에 더 있을 테니 자세히 찾아보십시오. 실전된 것을 찾거나 세력이 미약한 곳에 협상을 해서 적당한 대가를 주고 교환하는 것이 빠를 겁니다.” “알겠습니다. 단리대협, 그래도 안 된다면 별 수 없이 도법을 익혀야겠군요.” 팽현표가 수호를 위로하며, 그래도 다행히 방도를 알았으니 집에 돌아가면 찾아보기로 하자며 달랜다. 다들 한두 마디 위로를 하고, 저녁이 가까워져 식사를 하기위해 둘러앉았다. 팽가의 삼형제도 팽현표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앉아서 분위기에 짓눌렸는지 조용히 앉아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팽가의 삼형제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생각에 잠겨 별로 말이 없이 저녁을 먹었다. 솔직히 단리유아가 무영비고(無影秘庫)에서 읽고 외운 무공(武功) 중에서 앞전에 말한 무공이 몇 가지 있었지만, 결코 그들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 무공을 어떻게 구했는지부터 해서 왜 이런 무공을 익히지 않고 다른 무공을 익혔는지 까지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았고, 자신이 이런 무공을 여러 가지 알고 있다고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앞으로 강호행(江湖行)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팽가의 세력정도라면 그 정도의 무공을 얻는데 대가는 크겠지만, 능히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참고 & 설정] [1] 공래파(邛崍派) : 사천성 북부 공래(邛崍)산맥의 지류인 사고랑산(四姑嫏山)에 있던 도가(道家)문파로 공동파(崆洞派)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후일 구파일방의 하나에 들 정도로 강한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중소문파에 불과합니다.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남경(南京)으로의 여정(旅程) 5 그날 저녁은 그렇게 각자의 생각에 빠져서 보내고 다시 다음날이 되었다. 먼저 아침을 먹고 각자 따로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자신의 무공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단리유아가 보니 생각보다는 배의 속도가 빨라서 황하(黃河)에 도달하는데 넉넉잡아 팔일이면 충분할 것으로 보였다. 늦어도 열흘 이내에는 황하에 도착해야 남경(南京)까지의 여정(旅程)에 별 문제가 없을 터였다. 일단 황하를 벗어나 회하(淮河)를 접어들어 하북성(河北省)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은 증가할 것이다. 만일 도중에 사고라도 난다면 기일(期日)에 늦을지도 모르니 될 수 있는 한 황하에 도착할 때까지는 최고속도로 항해하는 것이 만일을 위해서도 여러모로 좋을 터였다. 오늘 저녁 늦게 임청(臨淸)에 들려 필요한 물품을 보충 받고, 황하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료성부(聊城府)에 들리기 전까지는 멈춤 없이 전속력으로 항해할 것이다. 배의 고물 쪽으로 다가가 배의 후미(後尾)로 멀어지는 물결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는 다른 사람들과의 비무(比武)와 도움을 주느라고 미처 무공에 대한 연구와 수련을 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임청에 다다를 때까지는 수련(修練)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배에 탄 첫날에 생각했던 무공에 대해서 수련하기로 하고, 먼저 혼원벽력풍(混元霹靂風)에 대해 생각했던 바대로 수련해 보기로 했다. 먼저 검을 빼들어 검강(劍剛)을 최대한 작게 하고 수(數)도 열개만 만들어서 원통형으로 회전해서 회오리 형상을 이루게 해보았다. 겨우겨우 형태는 완성은 했지만 너무 내공의 소모가 심한 것 같았다. 하긴 적은 내공으로 더 큰 회오리 형상을 이루어 내는 것이 운기(運氣)의 비결(秘訣)일 것이다. 아무리 초식을 비슷하게 흉내 내도 내공운기(內功運氣)의 비결을 모른다면 그것은 껍데기만 얻은 것일 것이다. 그러한 운기비결(運氣秘訣)을 하나 만들어 내는 데에도 수많은 사람과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혼원벽력풍(混元霹靂風)도 역시 그럴 것이니, 비록 모습은 흉내 내었다 할지라도 내공의 소모와 그 형상의 크기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겨우 열개의 최대한 작은 검강(劍剛)을 발휘하는 데에도 내공의 소모가 막심하고 정신력으로 제어하는 것도 힘이 드니. 다른 사람들이라면 몇 번하다가 포기해 버리겠지만, 단리유아는 결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강호(江湖)에서 비무하며 상대의 절묘한 초식을 보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연구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까지는 결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몸으로 직접 익히지는 않았지만 단리유아의 머리 속에는 육천여권의 무공이 기억되어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비슷한 무공이 몇 가지씩은 있었다. 설사 비슷한 구결이 없을지라도 그 수많은 무공구결(武功口訣) 중에서 관련되는 구결들을 찾아서 연구하다보면 결국에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강호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무공을 알고 있는 사람을 뽑는다면, 단리유아도 역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형성된 검강(劍剛)을 앞으로 날려, 선미(船尾)에 이어지는 포말(泡沫)에 부딪치게 했다. “꽝! 쏴아아.” 검강이 수면에 부딪혀 충돌하는 소리와 물결이 삼 장(丈) 가까이 솟구쳐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단리유아가 보니 위력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검강(劍剛)을 십여 개나 모여 날린 것치고는.... 이때 배안에 있던 사람들이 폭음에 놀라서 무슨 일이 터졌는지 알아보려고 허둥거렸다. 옆에서 처음부터 지켜보던 수표, 수호 형제와 팽현표는 폭음에 그리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더 놀랐다. 선미(船尾)에 있던 세 사람은 너무 놀라서 미처 떨어지는 물을 피할 생각도 못하고 물에 옷을 흠뻑 적신 체 입을 쩍 벌리고 서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다가올 때, 팽현표가, “대협, 방, 방금 그, 그것이 혹시 본가(本家)의 무공초식이 아니었습니까?” 돌아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또 자신이 생각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음을 알고, “흠, 맞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는 도왕(刀王) 어르신이 펼쳤던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의 일초를 흉내내본 것이지요.” 팽현표가 숨을 돌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다시, “정말 너무나 놀랐습니다. 대협이 검을 빼들어 검강(劍剛)을 맺힐 때가지는 그저 수련을 하려는 모양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본가의 도법(刀法)을 흉내 내어 만든 것이라니.....” “모양만 비슷할 뿐이지, 운기비결을 알지 못한 체 억지로 만든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줄 알았다면 더 멀리 날릴 것인데, 미쳐 신경을 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팽현표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아닙니다. 한번 본 초식을 비슷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놀라울 뿐이지, 옷이 젖은 게 무어 그리 대수롭겠습니까?” “제가 한번 무공(武功)을 수련하면 주변을 잘 의식하지 않아서..... 다음부터는 더 멀리 날려서 물이 이곳까지 튀어오지 않게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황당함과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수호가, “그런데 정말 본가의 도법(刀法)을 흉내 낸 것이 맞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작기만 할뿐 거의 비슷해 보였는데.” “원래 도왕(刀王) 어르신이 펼치는 혼원벽력풍(混元霹靂風)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제가 시험해 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형태만 비슷하게 만든 것이라 내공의 소모가 너무 크고 위력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팽현표가 경탄과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아무리 겉모양의 초식뿐이라지만, 한번 보고 따라하다니,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꿀 일입니다.” “맞습니다. 맞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초식을 흉내 낸다고 해도 내공을 운기(運氣)하는 비결(秘訣)을 모르면 흉내에 불과하니 따라할 생각도 별로 없지요.” 채가쌍도의 대도 채구악이 팽현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얘기한다. 옆에서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초식을 따라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다가, “비록 초식(招式)을 따라하는 것으로는 흉내 내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지만, 만일 계속 수련해서 자신만의 운기비결(運氣秘訣)로 완성해 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무공이 아닌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초식을 보고 따라해 보는 것도 저에게 맞게 고쳐서 익히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공을 억지로 쏟아 부어서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점점 연습을 하고 숙고(熟考)한다면 틀림없이 저에게 맞는 운기비결을 알아내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저만의 초식이 될 것입니다.” 단리유아가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 팽현표가, “휴, 그건 그렇지만, 그런 운기비결(運氣秘訣)을 알아낸다는 것이 보통사람의 재지(才智)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문제지요.”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흔들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몇 번 해보다 안 되면 그만두는 것이 대부분으로 노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때론 사람의 노력은 불가능도 가능하게 합니다. 하물며 같은 사람이 창안한 무공을 궁구(窮究)한다면, 자신에게 맞는 초식으로 바꾸는 것이 꼭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휴, 그래도.....”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도 팽현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저으며 불가능하게 생각하고 어렵다고 말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면서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의 무공을 따라하는 것은 흉내 내기에 불과하고, 결코 그 운기비결(運氣秘訣)까지는 따라할 수 없으니 그런 시도 자체가 쓸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자체가 자신의 무공(武功)에 대해서 한계(限界)를 그어버리는 큰 과오(過誤)임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것만 충실히 배우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훌륭한 절초를 연구해보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자신이 아는 것만 배우고 익히는 한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역사상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에 올랐던 고수들이 끊임없이 주변자연과 다른 사람의 장점을 궁구(窮究)하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도 결코 한계를 벗어나 그런 경지를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떠드는 소리를 뒤로하고 단리유아는 다시 수련(修練)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지켜보는 시선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지만, 점차 수련에 빠져들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일각(一刻)이 멀다하고 터지는 폭음과 솟구치는 물줄기에 강변(江邊)에서 조그만 어선으로 고기를 잡거나 운하(運河)를 지나던 배안의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치거나 욕을 하기도하고 입을 벌린 채 구경하기도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처음엔 신기해서 지켜보았지만 이내 시들해져서, 떨어져 앉아 가끔씩 쳐다볼 뿐 서로 대화하며 모르는 사람인척 했다. 단리유아의 하는 양을 보고 있던 팽현표가, “허허, 싸움에 미친 무공광(武功狂)이라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군” 옆에 같이 앉아있던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습니다. 숙부(叔父)님. 평소에는 거의 말하는 법도 없지만, 무공(武功)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만은 마치 딴 사람인 것처럼 보이더군요. 지금도 보십시오. 한 가지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沒入)해서 무공초식을 연구하는데 빠져서 완전히 주변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배의 사람들이 소리치는 말에도 들은 척도 안하는군요.” “휴, 그런 집중력과 노력이 있었으니 지금과 같은 경지에 이르렀겠지. 그 점만은 배우고 싶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강물에다가 무공(武功)을 펼쳐 수련(修練)하는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팽수호의 말에 팽현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면서, “그래 나도 그렇단다. 그런데, 저 사람이 저렇게 무공에 미쳐 수련하는 것을 보니 뭔가 깊은 사연(事緣)이 있나 보구나. 보통 사람들은 무가(武家)에 태어나 수련하거나 스승에게서 어릴 적부터 배우지만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무공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으니.” “그러고 보면, 단리대협의 신상내력(身上來歷)에 대해서 강호(江湖)에 알려진 것이라고는 열 살 무렵부터 강호행(江湖行)을 시작했다는 것 빼고는 전혀 없군요.” “그래. 고향(故鄕)이 어디인지 어떤 가문(家門)의 사람인지 아무도 모르지. 친우(親友)도 없다고 알려져 있고. 비록 사광(四狂)의 다른 사람들하고 가깝게 지내기는 하지만 결코 친구사이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니. 말하는 것을 보면, 비록 감정의 드러남이 없지만 상대방의 말에 공손히 대답하고 결코 상소리를 하지 않으니, 어릴 적에 배우지 못했거나 천한 태생은 아닌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소의 말하는 모습과 태도를 보면 분명히 명문(名門)의 후손(後孫)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할 때, 한 쪽에 따로 떨어져 있던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는, “야, 저 사람 정말 왜 저러냐?” “형님,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사람이 저런 난리를 쳐대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고 욕까지 하니 우리까지 창피하지 않소?” “맞소, 맞아. 갑자기 저런 것을 보니 혹시, 미친 것 아닐까요?” 수창의 말에 수강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혹시 어제 우리가 떼를 써서 일부러 미친 척하는 것은 아닐까?”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저렇게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욕을 해도 듣는 척도 않하잖수.” “하여간에, 형님들 조심해야겠소,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니. 혹시 우리한테 저 초식을 시험해 본다고 쓸지도 모르잖소?” 수창의 말에 수강과 수전이 겁먹은 목소리로, “설마?” “야, 너는 그 정도로 심해 보이냐?” “형님들. 어제 저 사람하고 비무(比武)할 때 얼마나 재미 있었수? 척하면 착하고 받아주는 것이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었는데, 갑자기 혈도(血途)를 눌러 말도 못하게 만들지 않았소. 어제 우리가 몇 번 떼를 쓴 것에 틀림없이 앙심을 품고 기회를 찾는 중일 거요.” 그의 말에 수강과 수전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서로 단리유아가 미친 것이 분명해 보이니, 이후로 상대하지 말고 항상 멀리 떨어져 앉아 있자고 떠든다. 옆에서 듣고 있던 채산쌍도 중의 대도(大刀) 채구악(砦丘岳)이 아우에게, “하여간에, 저놈들은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다니까. 지들이 더 이상한 줄 모르고.” “맞소, 형님. 단리대협이 무공수련(武功修練)에 열중해서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것뿐인데 저런 헛소리라니.” “정말, 저 놈들 머리는 어떻게 됐는지 몰라. 무공은 우리와 맞상대할 만큼이나 강하면서, 도대체 무공은 어떻게 익혔을까?” “하여간 불가사의라니까요. 형님.” 채산쌍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도움을 준 단리유아를 편들 수밖에 없었다. 수부(水夫)들도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말리려고도 하였지만, 팽현표가 상관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하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절대 상종치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점심을 지나 오후(午後)가 되어서도 단리유아는 멈출 줄을 몰랐다. 밥 먹고 하라고 불러도 듣는 척도 안하자 다들 포기하고, 멀찍이 이물 쪽에서 따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가 되자 배안의 사람들도 각기 자기 일에 빠져서 단리유아가 하는 행동을 신경 쓰지 않고 마치 그런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오후 동안에도 스쳐지나가는 어선과 객선, 화물선에서 놀라는 사람,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무공(武功)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놀라움에 탄성을 지르며 지켜보았다. 중간 중간에 진기(眞氣)를 보충하기 위해 조식을 취하는 잠시 멈춘 시간을 제외하고는, 단리유아는 하루 종일 그 초식에 매달렸다. 어느 정도 초식의 형(形)은 완성이 되었지만, 아직도 속도와 위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공(內功)의 소모도 극심해서 세 번 이상 연속으로 펼치기는 어려웠다. 해가 저물어 어두워질 무렵, 임청현(臨淸縣)의 포구(浦口)에 다다랐다. 포구가 다가오는데도 멈출 기미가 없는 단리유아를 보고 할 수 없이 팽현표가 기파(氣波)를 보내어 단리유아의 감각(感覺)을 건드리게 했다. 그제야 멈추며 돌아보고 포구에 다 와가니 그만하라는 말에야 수련을 멈추었다. 포구의 모습을 보고 단리유아가 일행을 청해서 오늘은 임청(臨淸)에 머물자고 제안했다. 팽현표가 듣고 생각해보니 예상했던 속도보다 빠르게 왔고, 또 오늘밤은 포구의 객잔(客棧)에 머물렀다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 크게 지장이 없을 것으로 여겨져서 다들 객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일단 객잔을 찾아가 저녁을 먹고 난 후, 방을 잡아서 쉴 사람은 쉬고, 볼일이 있는 사람은 나가기로 했다. 저녁을 먹은 후, 채산쌍도는 개산대부(開山大斧)를 알아보기 위해 대장간을 찾아갔고, 단리유아도 양해를 구해서 포구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나지막한 야산(野山)으로 향했다. 야산으로 들어가 오늘 수련한 무공을 본격적으로 시험해 보았다. 단리유아가 오늘 이곳에 머물자고 한 이유도 배에서는 제대로 펼칠 수가 없어서 사방이 트인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초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인근의 마을에서는, 야산에서 들리는 소리로, 불안감에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야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에 못지않아서 천둥소리보다도 크게 울렸다. “꽝! 꽝! 펑! 펑!” 간 큰 몇몇 젊은 장정(壯丁)과 인근의 강호인(江湖人)들이 이유를 알아보려고 야산에 올랐지만, 산꼭대기에서 몰아치는 검강(劍剛)의 폭풍을 보고 겁을 먹어 접근을 할 수 없었다. 날이 밝은 아침이 되어 들리는 소리가 그친지 한참이 지난 후,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 보인 광경은 모든 사람을 경악에 빠뜨렸다. 본래가 높이 백 장(丈)이 되지 않은 낮은 야산이었지만, 하룻밤이 지나서 본 전경(全景)은 야산의 정상부분이 삼 장(丈) 가까이 깎이고, 반경(半徑)이 이십 장(丈) 이상인 땅이 파헤쳐져 붉은 흙과 쪼개진 바위들이 사방으로 널린 평지의 모습이었다. 전날 밤에 검강(劍剛)의 폭풍이 몰아치던 모습을 보았던 한 강호인이 절세고수(絶世高手)가 검강으로 이곳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후일 사람들이 그 말을 전해 듣고 검창평(劍敞坪)이라 정상의 공터를 부르게 되었다. 아침이 되어 일행이 다시 배를 타고 출발하게 되었을 때에도, 단리유아가 어제 객방(客房)에 들어오지 않고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렴풋이 단리유아가 수련(修練)을 위해 나갔다가 새벽에야 돌아왔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나중에야 이곳의 소문(所聞)을 듣고 단리유아가 밤새 수련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나흘 만에 땅을 밟고 밤을 보내서인지 모두 기운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는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채산쌍도의 모습을 보니 대부(大斧)를 못 구한 모양이었다. 비몽사몽을 헤매는 세 명을 선실(船室)에 데려다 눕힌 후에 다시 배를 운하(運河)에 띄워 황하(黃河)를 향해 나아갔다. 어제 밤 야산에서 밤새 수련한 덕분에 아직 부족하지만 원하는 만큼의 성과는 이루었다. 앞으로 남경(南京)으로 가는 동안 계속 수련한다면 자유자재로 시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원벽력풍(混元霹靂風)과 혼원벽력붕(混元霹靂崩)을 고쳐서 나만의 초식으로 만들었다. 이 두 초식과 이전에 요동마도(遼東魔刀)와 싸운 후에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을 고쳐 만든 일식을 합쳐서 따로 삼초의 검법으로 만들었다. 각초가 별 상관이 없어서 연환(連環)할 수는 없었지만 일초마다 독특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위력은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원래 초식보다는 약간 떨어지지만 그 실현속도가 빠르고 다수를 상대하는데 효과적이었다. 흠, 그런데 이 검법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천애구검(天涯九劍)을 보완하는 초식들이 모인 것이니 천보검법(天補劍法)으로 하기로 했다. 앞으로 천애구검의 문제점이 나타날 때마다 보완한다면 초식도 몇 가지 더 늘 것이다. 초식의 이름도 정해서 요동마도와 싸운 후에 만든 것을 일초로 천반폭(天盤爆), 혼원벽력풍(混元霹靂風)을 바탕으로 이초 풍벽사(風壁絲), 혼원벽력붕(混元霹靂崩)을 바탕으로 만적붕(萬滴崩)을 삼초로 했다. 실전에서 쓰기에는 천애검법보다 더 효과적이니, 빨리 한번 시험해 봤으면 좋겠는데 여정(旅程)이 급하니 시간이 너무 없군. 휴,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남경(南京)까지 가는 동안 무엇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을까? 당장 급한 일은 해결한 것 같은데, 혹시 잊어먹은 일은 없나? 지난 며칠간의 일을 더듬어 보았다. 요동마도(遼東魔刀)와 싸우고 천수검제(千手劒帝)를 만나 비사(秘事)를 듣던 일, 도왕(刀王)과의 비무. 그때, 요동마도와 싸운 후에 느꼈던 내공의 회수(回收)에 대한 문제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생각할 시간이 부족해서 나중으로 미뤄뒀었는데 앞으로 이십여 일 동안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아마 지금이 적기(適期)일 테니.... 내공을 발출한 후에 허공에서 흩어지는 내력(內力)을 회수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었지. 천보검법은 이제 숙달만 필요하니, 앞으로는 그것에 생각을 집중해야겠군. 흑마보(黑馬堡) 흑마보(黑馬堡) 1 계속 운하(運河)를 따라 남하하면서 료성부(聊城府), 고아정(古阿井)을 지나 황하(黃河)와 만났다. 료성부에 잠깐 들린 것을 제외하고는 전속력으로 치달려 온 것이다. 황하를 거슬러 오른 지 한나절 다시 회하(淮河)에 들어서 운항하다가, 양산(梁山)에 들러서 물품을 보충하고 채산쌍도의 대부(大斧)도 구했다. 다시 계속 운하를 타고 내려가 제령(濟寧)을 지나서 소양호(昭陽湖), 미산호(微山湖)의 서편을 따라 내려갔다. 강소성(江蘇省)으로 넘어가 서주(徐州)의 동쪽을 끼고 내려가서 비주(邳州)를 바라보고 운항했다. 그동안 소양호와 미산호에서는 수적(水賊)들과 마주치기도 하였지만 팽가(彭家)의 깃발을 보고 그들이 물러나서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남하할 수 있었다. 임청(臨淸)을 지나서 강소성(江蘇省) 비주(邳州) 가까이 오는데 열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팽가에서 지금까지의 시간은 십칠일이 걸린 셈이고, 이제 남경(南京)까지는 열흘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니 적어도 삼일의 여유가 있는 셈이었다. 그동안 최대한 들릴 곳을 줄여서 운항했기에 시일을 줄일 수 있었고, 또한 지나치는 수로에서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문제로 홍택호(洪澤湖)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호수와 하천이 거미줄처럼 운하(運河)와 연결되어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또 이곳은 하북성(河北省)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팽가의 위명을 빌어 통과하기도 어려웠다. 그동안 배안의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척 바쁘고도 유용한 시간이었다. 새로 만든 천보검법(天補劍法)을 숙달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시간이기도 했고, 내력(內力)을 회수하는 연구에 매진할 여유가 있어서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내력을 회수하는 연구를 하면서 일장(丈) 앞 허공에 격공장(隔空掌)을 날리고 회수하는 수련을 했다. 잠깐 잠깐 수련을 멈추고 내가 알고 있던 무공과 나의 내공심법의 일부인 구전결(九轉訣)을 중심으로 숙고하면서 내력의 회수율을 높이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 며칠간의 성과가 있었던지 약 삼 할의 내공은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회수율을 더 높이고 그 속도도 더 빠르게 하는 것만 남은 셈이었다. 처음 격공장(隔空掌)을 펼치며 수련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도 정말 정신이 나갔는지 걱정이 되서 붙잡고 물어보기도 하였지만 단지 수련일 뿐이라는 소리에 모두가 반신반의 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격공장을 펼쳐서 장력을 터트린 후에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잠깐 생각하고 다시 격공장을 펼치는 행동을 반복하니,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수부들과 일행 중 일부 사람은 식사를 할 때도 대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멀리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쏟는 마음도 없어서 오히려 귀찮게 하지 않은 것이 더 좋았다.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지루한 나날이 이어지자, 각자 자신의 무공(武功)에 대해 생각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수전, 수강, 수창 형제들처럼 낚시나 하든가 잠을 자는 등 천하태평의 무료한 일상이 이어졌다. 채산쌍도(砦山雙刀)는 새로운 부법(斧法)을 연구하며 수련하고 있었고, 가끔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에는 나에게 물어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팽가(彭家)를 떠난 지 십칠일이 흐른 아침. 단리유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갑판에 나와서 나한권(羅漢拳)으로 가볍게 몸을 풀었다. 본래 나한권은 소림(少林) 권장(拳掌)무학의 기초수련의 권법이자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나한권은 소림의 나한권이 강호로 흘러든 후에 널리 퍼진 것으로 비록 그 정수가 빠졌지만 본격적인 무공수련을 위해서 몸을 풀거나 건강을 위해서 익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소림사의 나한권을 알고 있던 단리유아가 펼치는 나한권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겠지만, 소림사(少林寺)의 장로가 본다면 놀라서 어떻게 익혔는지 당장에 따지려 들 것이다. 차차 하나둘 갑판으로 나와서 인사하고 각기 몸을 풀기도 했다. 아침을 먹으며 둘러앉아서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얘기했다. “팽대협, 이제 강소성(江蘇省) 비주(邳州)에 가까이 오니 이번 여정(旅程)도 삼분의 이가 지난 셈이군요.” 단리유아의 말에 팽현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아서 예상보다 빠르게 이곳까지 왔지만 이후로가 문제로군요.” 단리유아가 팽현표의 말에 동의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조용히 말한다. “맞습니다. 제가 비무행(比武行)을 할 때에 하북성(河北省) 북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중원천하(中原天下) 십삼성(十三省) 중에서 고수(高手)를 찾아서 안가 본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곳 강소성(江蘇省)은 절세(絶世)고수는 드물지만 그 아래 고수의 수는 어느 곳보다 많습니다. 원래 강소성이 평야지대로서 물산(物産)이 풍족하여 중원 어느 성보다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이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수많은 호수(湖水)와 하천(河川)이 그물처럼 운하(運河)와 이어져 수적(水賊)들도 다른 어떤 곳보다 활개를 치는 곳입니다.” “그러면, 강소성의 주요세력들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군요.” 팽현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크게는 칠대세가 중에서 남경(南京)일대의 남궁세가(南宮世家)와 소주(蘇州)와 태호(太湖)유역의 고소(姑蘇)모용세가(慕容世家), 양주(楊州)에 사장(四莊)중의 만금장(萬金莊)이 있습니다. 그 외에 대문파로 정파(正派)로는 남경에서 동남쪽으로 이백여리 밖에 있는 모산(茅山)을 중심으로 모산파(茅山派), 북동부 연운항(連雲港)을 중심으로 바다를 지배하는 정해방(征海幇), 북서부 서주(徐州) 일대의 운룡문(雲龍門)이 있습니다. 사파(邪派)로는 중북부 비주(邳州)와 숙예(宿豫) 일대의 패자(覇者)인 흑마보(黑馬堡), 회음(淮陰)지방의 천시루(千屍樓), 태주(泰州)일대를 중심으로 중동부의 비사방(飛蛇幇)이 있습니다. 그 외에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에 들어가는 숭명도(崇明島)를 중심으로 장강하구를 지배하는 해룡(海龍)수채, 홍택호 일대의 회남(淮南)수채, 회하와 장강이 만나는 곳의 단강(丹江)수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사(正邪)중간으로 사양(射陽)과 괘성(罫城)지역을 중심으로 동부의 건청파(乾靑派)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강소성 지역은 회하와 장강을 끼고도는 평야지대로 이렇다할 산이 없어서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에 들어가는 큰 산채(山寨)는 없지요. 그 외에도 수많은 중소문파가 있고,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에 소속되지 않은 수채(水寨)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희가 이제 지나가야할 비주에서 남경(南京)사이에 사파와 수채가 집중돼 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듯이 단조롭게 읖조리는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나서 모든 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대체로 강소성(江蘇省) 지역은 회하(淮河)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사파와 수채들의 세력이 밀집되어 있었고, 그 외의 지역은 정파의 세력이 대부분으로, 회하를 가운데에 두고 사파와 수채들을 감싸 안은 형상이었다. “현재 비주에서 남경 사이를 가는데 있어서 북에서 남으로 사파의 세력들이 강하지요. 일단 비주와 숙예지방의 흑마보(黑馬堡), 회음지방의 천시루(千屍樓), 홍택호 일대의 수로채인 회남(淮南)수채, 그 아래 단강(丹江)수채, 태주일대의 비사방(飛蛇幇), 혹시 모르지만 동부연안의 건청파(乾靑派)도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산동성(山東省)까지는 황하수로이십사채(黃河水路二十四寨)의 세력권이어서 그들이 팽가와 본격적으로 싸울 결심을 하지 않는 한 우리 일행을 건드릴 배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소성부터는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에 들어가니 수적들도 팽가와 부딪힌다 해도 그리 자신들 세력에 대해 걱정이 없습니다. 또 흑마보(黑馬堡), 천시루(千屍樓), 비사방(飛蛇幇)은 단단히 결속되어 있어서 강소성내의 정도문파들이 포위한 형세이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비무행을 하다가 이들 문파와 싸운 적도 있어서 아는데 천시루를 제외하고는 온갖 비열한 수단을 다 쓰는 놈들입니다. 그중에서 흑마보와는 약간의 은원(恩怨)이 있어서 제가 이 배에 탄 사실을 안다면 기를 쓰고 달려들 것입니다. 혹시 팽가에서는 이들 중에서 적대적인 세력이 없습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팽현표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수적(水賊)들이야 직접 부딪힌 적이 없어서 뭐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천시루(千屍樓)의 세력은 본가(本家)와 은원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아버님께서 당시 천시루주(千屍樓主)와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팽현표의 말을 듣고 나서 채산쌍도 중에서 대도(大刀) 채구악(砦丘岳)이, “아니, 어떤 일이기에 도왕(刀王) 어르신께서 직접 나서시어 천시루주와 싸웠습니까?” “흠, 자네들은 그 당시에는 장성(長城) 너머에서 주로 활동했으니 중원의 사건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겠지. 내 설명해 주지. 처음에는 강호행도(江湖行道) 중에 본가의 인물이 음행(淫行)을 저지르는 천시루(千屍樓)의 제자를 죽인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네. 그것에 대해 천시루 쪽에서 보복하고 또 본가 쪽에서 다시 보복하는 악순환이 일어났네. 그러다 피해가 차츰 커지니 결국 양파의 수장(首長)들이 모여서 합의를 했다네. 수장간의 싸움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로. 당시 아버님이 겨우 이기기는 했지만 아주 어려운 싸움이었고, 그 싸움으로 천시루주는 내상이 심해서 거의 폐인(廢人)이 되었다고 알려졌지. 전대루주가 그런 꼴이 되었으니 강호(江湖)에서 어쩌다가 천시루의 제자와 만나면 우리야 가급적 피하려고 하지만 그쪽에서는 부득불 달려드니 문제지. 그래서 본가에서도 이번 여정(旅程)에서 제일 위험한 곳이 천시루의 세력권을 통과하는 지역으로 보았다네.” 팽현표의 설명을 듣다가 단리유아가 오래전의 일을 기억하고는, “팽대협, 저도 미처 그 대결을 보지 못했지만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도(魔道)의 명문(名門)으로 불리는 천시루(千屍樓)는 비록 사파이지만 제자들을 엄격히 가르치는 곳인데, 그 제자가 음행을 저질렀다니 지금 생각해보아도 내막을 알 수 없군요. 저도 그들과 비무해 본 적이 있어서 그들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는데....?”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팽현표가, “대협 말이 맞습니다. 비록 사파에 들지만 문율(門律)이 아주 엄격해서 조그마한 악행이라도 들키면 최소한 단전을 폐(廢)하고 사지(四肢)절맥(切脈)을 행하는 문파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파보다 제자들의 행실이 단정하기로 소문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 당시 문제는 본가의 인물이 죽인 천시루의 제자가 음약(淫藥)에 중독되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나중에야 저희가 알고 사과하려고 하였지만 그쪽에서 먼저 본가의 인물에게 살수를 써서 죽여 버렸습니다. 사과하고 그들에게 적당한 보상을 하려던 본가의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는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이 점점 커져 아버님까지 나서게 되었지요. 한번 원한(怨恨)을 맺으면 기필코 상대에게 몇 배로 앙갚음을 할 정도로 그들의 복수심은 강호(江湖)에 유명할 정도여서, 비록 그때 이후로 직접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면 틀림없이 그냥 좋게 넘어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강호(江湖)의 은원(恩怨)이란 얽히고 섞여서 그 시작과 끝을 알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사소한 일로 생긴 오해가 커져서 수십 년 동안 몇 대를 지나면서 싸우는 원수가 되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베푼 조그마한 은혜로 때로는 생명을 구원받기도 하는 곳이었다. 강호인(江湖人)으로서 은원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따지고 보면 은원에 얽매여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강호인의 삶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럼 흑마보(黑馬堡)하고 천시루(千屍樓), 수적(水賊)들이 제일 문제겠는데, 혹시 다른 원한을 맺은 분은 안계십니까?” 단리유아의 묻는 소리에 대답이 없자, 더 이상 직접적인 원한을 맺은 곳은 없다는 것을 알고 팽현표가, “대협, 수적(水賊)들하고도 싸워 보셨을 테니 그들과 가까운 안면(顔面)이 있는 곳은 없습니까?” 팽현표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과거를 상기하면서 무심하게 말한다. “본래 수적이라는 것들이 그렇듯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심하지요. 하루는 졸개였다가도 대장이 되기도 하고, 대장이 되었다 해도 언제 자리가 바뀔지 모릅니다. 회남(淮南寨)수채, 단강(丹江)수채, 해룡(海龍)수채는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에 들 정도로 크니 자리가 쉬이 바뀌지 않았을 테니 제 안면을 보아 그냥 보내줄지도 모르지만, 그 외의 중소수채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이곳 강소성을 거쳐 간 것이 칠년 전이니 그때의 제 모습을 기억하더라도 지금과는 모습이 많이 달라서 지금의 저를 알아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팽수호가 끼어들어, “아니, 대협. 겨우 칠년 전인데 모습을 못 알아보다니요?” “여러분들은 제 나이를 가끔 잊어버리는 모양이군요.” 그때서야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이는 주변 인물들을 돌아보고, “그때 제 나이가 십오 세였습니다. 키도 같은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는 큰 편이었지만, 아직 육척은 못되었고, 모습도 약간 달라서 지금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제가 태어날 때부터 병이 있어서 전신이 검붉은 반점(斑點)에 싸여있었습니다. 자라면서 점점 희미해져갔지만, 그 당시에도 약간 남아있어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로 키가 더 크고, 오년동안 수련하는 도중에 환골탈태(換骨奪胎)해서 반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랍니다. 그러니 그때 당시 저를 기억한 사람이라도 지금의 저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팽현표가 웃으며, “하하하, 단리대협. 대협은 강호의 소문을 너무 무시하는군요. 강호의 소문이라는 것은 하룻밤에 천리(千里)를 달려가기도 한답니다. 아마 지금쯤 대협이 재출도 했고, 그 모습도 약간 달라졌다는 것을 웬만한 강호인(江湖人)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팽현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긍정한다. “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러면 일단 가장 가까운 흑마보(黑馬堡)를 어떻게 피해갈지 의논해 보기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단리유아가 먼저 말하자 팽수표가, “숙부님, 이제부터는 본가(本家)의 깃발을 내리고 운항(運航)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적대적인 세력들이 많아서 본가의 깃발을 보아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팽현표가 고개를 흔들며, “아니, 그렇지 않단다. 만약 표국(驃局)의 깃발만을 달고 운항한다면 주변의 수적(水賊)들은 무슨 귀중한 물건을 옮기기에 저렇게 빠르게 이동할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적들의 침입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비록 본가의 표식을 무시하는 세력도 있겠지만 오히려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세력이 더 많을 것이다. 천시루(千屍樓)의 세력권에 들어서면 내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리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본가의 깃발을 매달고 운항하는 것이 더 이익일 것이다.” 단리유아도 팽현표의 말에 동의하면서, “저도 팽가(彭家)의 깃발을 달고 운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흑마보(黑馬堡)도 제가 이 배에 탄 것을 모른다면 팽가를 무시하면서까지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최대한 빨리 이 지역을 통과해야겠군요. 휴, 이곳을 무사히 벗어난다 해도 다음이 천시루(千屍樓)의 세력권이니 정말 쉽지 않은 나날이 되겠군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팽현표가 장노를 불러서, “장노, 지금 배안에 있는 먹을 식량으로 멈추지 않고 운항한다면 얼마나 갈 수 있나? 장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팽현표를 보면서, “큰 나으리, 미산호(微山湖)를 지나면서 보충했으니 앞으로 이틀은 문제가 없겠지만 그 이상은 힘들 겁니다요. 최대한 버텨 봐도 회음(淮陰)에서는 배를 내려 보충을 해야 합지요.” “허 참, 이거 곤란하군. 회음에는 더더욱 들릴 수 없는데, 아마 밤중에 몰래 지나가는 것이 나을 텐데.” 단리유아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끼어들어, “팽대협, 어차피 보충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으니, 차라리 비주(邳州)에 들려 보충하고 숙예(宿豫)와 회음(淮陰)을 지나서 다시 보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리유아의 의견에 팽현표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괜찮겠습니까? 비주에 들렸다가 혹시라도 대협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흑마보(黑馬堡)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팽현표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에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이 무심한 음성으로, “저는 내리지 않고 배안에 있을 테니까 모를 겁니다. 그래도 혹시 여러분과 동행(同行)하는 것이 이미 소문이 나서 알아차린다면, 어쩔 수 없이 시일이 다소 지체되더라도 상대해주어야겠지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장노, 언제쯤 비주에 도착할 것 같은가?” 팽현표의 물음에 장노가 잠시 생각하다가, “나으리, 늦어도 유시(酉時:17-19시) 무렵이면 도착할 겁니다요.” “그래. 그러면, 장노도 들었겠지만 그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구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놓게.” “알겠습니다요. 나으리. 그렇게 준비합죠.” 말을 마치자 팽현표에게 고개를 숙이며 장노가 물러났다. 흑마보(黑馬堡) 흑마보(黑馬堡) 2 흑마보(黑馬堡)는 낙마호(駱馬湖)의 서편 비주(邳州)와 숙예(宿豫)지방의 중간인 도만현(峹灣縣)에 자리 잡은 문파로, 강소성(江蘇省) 삼대사파(三大邪派)의 하나에 낄 정도로 세력이 컸다. 서북지역은 낮은 도산(峹山)으로 둘러싸이고, 동편에는 낙마호가 위치한, 운하 옆 가까운 곳에 위치한 흑마보는 본시 낙마호 일대의 수적무리 중의 하나였지만, 점점 세력이 커져 주변의 세력을 멸(滅)하거나 흡수해서 전체 제자들의 수가 일천에 가까운 거대문파(巨大門派)가 되었다. 운하 주변의 상권(商權)과 비주, 숙예 지방의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한 흑마보는 강소성의 사파 중에서 단순한 외형적인 제자 수(數)로서는 가장 큰 문파였다. 칠년 전에 강소성(江蘇省) 지역에서 단리유아가 비무행을 하다가 흑마보(黑馬堡)의 보주(堡主)와도 싸우게 되었는데, 비무가 끝난 후에도 대결에 패(敗)한 보주가 떠나는 단리유아를 제자들을 보내어 공격하게 하였다. 비무 중에도 비열한 수를 계속 쓰는 그를 보고, 승패(勝敗)에 대해 관심도 없던 단리유아도 더 참지 못하고, 비록 죽이지는 않았지만 석 달 이상 침상신세를 져야할 정도로 전신에 큰 상처를 남겨 주었다. 이 일에 앙심(怏心)을 품고 흑마보주가 사람들을 보내어 단리유아를 공격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의 단리유아는 절정(絶頂)의 수준에 달한지 얼마 안돼, 그들의 연이은 공격을 당할 수가 없었다. 공격하는 사람들 중에서 고수는 얼마돼지 않았지만 결국 중과부족(衆寡不足)으로 쫓겨야했다. 그들을 피해서 도망치는 도중에 흑마보(黑馬堡)의 사람들도 백여 명 가까이 죽거나 다칠 정도로 큰 피해를 입혔지만, 단리유아도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할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겨우 그들의 추적을 피했을 때는 보통 사람이라면 죽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의 상처가 전신 곳곳에 나있었다.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지, 보통 무기(武器)에 의한 외상인 경우에 늦어도 사흘이라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른 상대를 찾아 싸움을 시작하던 그도 열흘 동안이나 꼼짝하지 않고 치료에만 전념해야할 정도였고, 한달이 지난 후에야 완치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공격한다면 단리유아 자신도 더 이상 피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그들의 수가 많겠지만 자신의 무공도 진보(進步)해서 이전과는 다르니, 단순히 이류(二流)이하의 고수들만으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당시에도 흑마보(黑馬堡)는 보주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고수가 없었다. 일류(一流)이상의 실력자는 채 오십도 되지 않았고, 절정(絶頂)의 수준도 두세 명에 불과했다. 해질녘 비주에 들려, 급히 물품을 보충하고 숙예를 바라보고 출발했다. 혹시나 일행을 보고 흑마보(黑馬堡)의 인물들이 알아차렸는지도 모르지만 비주를 떠나 다음날 낙마호(駱馬湖)가 동편으로 보일 때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오시(午時:11-13시)초에 배가 도만현에 진입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아직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운하(運河)를 크고 작은 수십 척의 배들이 막아서 있는 것이 보였다. 큰 배는 십여 장(丈)에 달할 정도였고, 그보다는 작지만 현재 우리가 타고 있는 배보다는 커 보이는 배만도 네 척이나 되었다. 그 외에도 열명 안팎의 인원이 탄 소선(小船)도 이십여 척이 넘어보였다. 선수(船首)에서 서서 긴장한 체 주변을 주시하던 일행도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편의 모습을 보니 포위망을 돌파하기는 어려운 모습이었다. 이 정도 숫자의 배들을 볼 때, 흑마보(黑馬堡)의 수상전력(水上戰力)의 절반이상이 동원되어 운하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팽현표가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서며, “단리대협, 저들의 모습을 볼 때, 결코 하루 이틀에 준비한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단리유아가 팽현표의 물음에 무심한 음성으로, “제가 보기에도 운하(運河)를 가로막은 배의 숫자를 보니 흑마보(黑馬堡)가 최소한 며칠 전부터 준비한 것인 것 같습니다. 어제 저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텐데도 저렇게 준비한 것을 보니 제가 이 배에 탄 것을 소문(所聞)으로 들은 것 같습니다. 정면으로 뚫고 지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들은 수상전(水上戰)에 특히 능하니.....” “맞습니다. 소문으로 듣고 준비하다가 어제 저희의 모습을 연락받고, 오늘 이렇게 기다린 것 같습니다. 십여 척만 되어도 어떻게 해볼 테지만 얼핏 보아도 삼십 척이 넘을 정도로 모여서 운하를 완전히 막아버렸습니다.” “음, 팽대협. 저들이 떨어져 불화살만 쏘아도 우리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저들의 목표는 저일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저들의 세력이 크더라도 팽가(彭家)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팽현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니 문제지요. 저 놈들과 뭍에서라도 싸운다면 어떻게 해서든 함께 뚫을 길을 찾아볼 텐데, 물위에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가 떠들며 정면으로 치고 나가자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듣는 척도 않고 그들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사람들도 이 삼형제를 상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신경을 끄고 무시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팽현표가 시끄럽게 떠드는 삼형제를 한 쪽으로 쫓아 보낸 후에, “대협, 차라리 배에서 내려 싸운 후에 다시 통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지금 싸울 수 있는 숫자라고는 저까지 포함해서 아홉에 불과한데 저들의 현재 배에 탄 숫자만도 삼백 이상일 것입니다. 육지에도 그 이상의 숫자가 있을 테니 역시 내려 싸운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차라리 저 혼자 내려서 싸우는 동안 여러분들은 저곳을 통과하여 흑마보(黑馬堡)의 세력권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팽현표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단리유아가 자신 혼자서 내려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팽현표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이, “그렇지만 대협, 혼자서 저들과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후일 강호인(江湖人)들이 본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조요한 어조로, “같이 싸운다는 것이 다 능수(能手)가 아닙니다. 만약 저 혼자만 싸운다면 상황이 불리할 경우라도 재빨리 피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과 같이 싸운다면 저 역시 발을 빼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배에서 내리면 저들도 팽가(彭家)를 일부러 건드릴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저들과 싸우는 동안에 이곳을 통과해서 전속력으로 달려 백여 리 아래의 사양현(泗陽縣) 근처로 가십시오. 혹시라도 싸우다가 불리하면 도망쳐서 저도 내일 저녁까지는 그곳으로 향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저들에게는 저를 상대할만한 고수(高手)가 없습니다. 단지 수가 많아서 어려울 뿐이지, 저 혼자 피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제 실력(實力)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망설이는 팽현표를 보면서 다시 한번 단리유아가 자신 혼자서 싸울 것을 말했다. 그제야 마지못해 수긍하는 기색으로 팽현표가, “그럼, 사양현(泗陽縣) 근처로 가서 저희들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수로(水路)의 동편에 있을 테니, 늦어도 모래 오전까지는 오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늦는다면 여러분들은 즉시 다시 떠나거나 되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요. 저희도 항주(杭州)까지 갈 일이 있으니 계속 운하(運河)를 따라 남하(南下)할 것입니다. 만일 사양현(泗陽縣)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운하를 따라 내려오신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는 동안, 상대편의 배들과의 거리가 백 장(丈)안으로 좁혀졌다. 이쪽이 배를 멈추자 흑마보(黑馬堡)의 문기(門旗)가 걸린 제일 큰 주선(主船)이 앞으로 다가왔다. 배의 모습은 갑판을 중심으로 양옆에 오십여 명의 흑의(黑衣)를 입은 자들이 각종 무기를 들고 서 있었고, 중앙에는 태사의에 한명이 앉아 십여 명의 호위 속에 앉아 있었다. 거리가 이십여 장 가까이 다가오니 멈추며 배에서 한명이 소리친다. “단리 미치광이야, 네가 그 배에 있는 줄 다 알고 왔다. 어서 이리 나와 봐라.” 일행이 서로 돌아보다가 팽현표가 선수(船首)로 나서서, “본인은 단호참도(斷虎斬刀)로 불리는 팽모(彭某)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무슨 일로 본가(本家)의 표행(驃行)을 멈추시는지요?” 이 때, 태사의에 앉아있던 사람이 일어나 선수(船首)로 가까이 다가온다. 흑의를 입은 말상의 인물로, 단리유아보다 키가 커서 칠 척(尺) 가까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흑마보(黑馬堡)의 보주(堡主)인 흑마무상(黑馬無上)으로 흑마보를 지금과 같은 거대세력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본좌(本座)는 흑마보를 이끌고 있는 곽일지(藿逸志)라 하오. 우리는 팽가와는 볼일이 없으니 거기에 타고 있는 단리유아만 내 놓으시오.” 흑마무상을 보고 마주 포권하며 팽현표가, “흑마무상이시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토록 정력(精力)이 유명한 분을 만나게 되다니.” 은근슬쩍 곽일지를 비꼰다. 강호(江湖)에서 간악(奸惡)하기로 유명한데다, 십여 명의 첩실(妾室)을 거느리고도 여자만 보면 욕정(欲情)에 눈이 멀어 앞뒤를 분간 못하고 덮치는 채화음적(菜花淫敵)으로도 악명을 떨치는 것을 비웃는 것이다. 팽현표의 말에 흑마무상이 얼굴을 붉히고, “흥, 팽가(彭家)의 인물과는 더할 말이 없소. 단리유아만 내놓으면 그냥 보내드리도록 할 테니.” “감히 본가의 손님으로서 우리가 모시고 가는 중인데, 본가(本家)를 무시하고 한번 해보겠다는 거요?” 팽현표의 위협에도 듣는 척도 안하며 흑마무상이, “그런 것은 내 알바 아니요. 흐흐흐, 단지 단리유아를 내놓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대들도 같이 공격하도록 할 것이요.”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며, 욕을 하는 팽현표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보주(堡主), 그 면상(面像)을 보니 아직 그때 교훈이 부족 했었던가 봅니다. 하여간에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니 반갑습니다.” 흑마무상이 잠깐 누구인지 살피다가 예전에 본 모습과 다른, 소문(所聞)으로 들었던 모습의 단리유아임을 그제야 알아보고, “뭐, 뭐라고? 이 미친놈아, 비무(比武)를 핑계로 사람을 그토록 패는 것이 잘한 일이라는 말이냐?” 흑마무상의 욕설에도 별 미동이 없이 무심한 어조로 단리유아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는군요. 별의별수를 다 쓰다가 상대가 안 되니 비무가 끝난 후에 돌아서는 사람을 공격했던 분이 누구십니까?” 부하들 앞에서 치부(恥部)가 들어나자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고, “흥,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그 배에서 내려라. 너도 애꿎은 사람이 다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을 테니. 내 그때의 모욕(侮辱)과 죽은 수하들의 복수를 해줄 테니.” “음, 나도 그때 받은 빚이 있었는데 그동안 만나지를 못해서 어쩔 수 없었소. 좋소, 내가 내려서 당신의 대접을 받아보도록 하겠소. 또다시 비겁하게 등 뒤에서 암습하는 것 같은 짓은 안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너무나 자신에 찬 태도의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흑마무상이, “흥! 지금은 네놈이 기고만장(氣高萬丈)해서 떠들고 있지만, 오늘 해질녘에도 그렇게 떠들 수 있을지 보자.” “좋소. 누구 말이 옳은지 어디 두고 봅시다. 헌데 팽가(彭家)의 인물들을 무사히 보내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소?” 단리유아의 물음에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소리치면서, “너 싸움에 미친놈한테만 볼일이 있는데, 네놈이 떠나면 내가 미쳤다고 팽가의 배를 공격하겠느냐?” “좋소, 그럼 내가 내릴 테니 이따가 뭍에서 보도록 합시다. 팽가의 인물들이 탄 배가 무사히 떠나면 내 원 없이, 그대의 맘껏 상대해줄 테니.” 배를 돌려 수로변(水路邊)에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단리유아가 걱정스런 표정의 일행들과 인사하고 같이 내려 싸우겠다고 떼를 쓰는 팽가 삼형제는 혈도를 눌러 떼어놓은 채, 땅이 가까워지자 신법(身法)을 펼쳐 배에서 뛰어내렸다. 십여 장(丈) 남짓한 거리를 단숨에 뛰어 뭍으로 내려서자, “오오, 과연!” “저럴 수가!” 일행과 포위한 흑마보(黑馬堡)의 인물들 속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절정(絶頂)고수라도 십여 장(丈)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곡선을 그리며 신법(身法)을 펼친 것이 아니라 거의 일직선으로 신법을 펼친다는 것은 절정의 고수라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흑마보주(黑馬堡主)인 흑마무상의 얼굴에 잠깐 걱정스런 기색(氣色)이 떠올랐다. ‘혹시 소문대로 이 미친놈이 화경(化境)에 이른 것이 아닐까? 전에는 나보다 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 차이가 없었는데. 이놈이 도왕(刀王)과 비무해서 졌다는 소문에 별로 강해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소문대로 화경(化境)의 경지에 올라서 도왕과 막상막하로 겨루었단 말인가? 소문을 믿지 않고 도왕(刀王)이 봐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흥! 그래도 제 놈이 수백 명이 한꺼번에 덤비면 어쩔 거야? 지가 금강동체(金剛銅體)가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죽을 수밖에 없을 걸? 흐흐흐, 만일에 대비해서 불러온 고수들도 있으니.’ 흑마무상이 생각을 멈추고 수하들을 움직여 포위망을 풀어서 팽가(彭家)의 배가 통과하게 만들고, 몇 척의 배만 남기고 모두 배에서 내린다. 이미 가까운 곳에서 대기 중이던 수하들을 불러들이고, 배에서 내린 수하들까지 합쳐 육백 명이 넘는 모습을 보고 가슴 든든히 여기며, 단리유아를 쳐다본 후에 말한다. “이 미치광이야! 죽을 준비는 다 되었겠지? 발버둥칠 생각 말고 목이나 길게 늘여 놔라.” 단리유아의 목숨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여기며 소리친다. 단리유아가 상대방의 비웃는 말에도 아무 표정의 변화 없이 돌아서서 쳐다보며 무심한 어조로, “여보시오. 곽(藿)나으리, 조금 있다가 내 당신 원 것 싸워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때 누가 목을 간수할지 두고 봅시다. 지금은 먼저 팽가의 인물들이 무사히 떠나는 것을 보고 싶으니 말이오.” “좋다. 그 정도의 시간이야 본좌(本座)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아주지. 행여 도망칠 생각이나 하지마라.”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말하는 흑마무상을 보며 단리유아가, “이거 고맙구려. 그대가 그렇게 너그러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단리유아의 비웃는 듯한 말소리에 발끈하여 나서려했지만, 주위의 수하들이 붙잡고 말린다. ‘흥 두고 보자. 이 미친 녀석. 이각(二刻) 정도면 팽가(彭家)의 배도 멀리 멀어질 테니. 그때도 그렇게 웃을 수 있나보자.’ 흑마무상이 생각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 수하들이 가져온 태사의에 앉아서 팽가의 배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단리유아도 뒤짐을 진체 멀어지는 배를 지켜보며 서 있었다. 바야흐로 정오(正午)의 따스한 가을햇살과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수백 명의 사람이 일장박투(一場搏鬪)를 벌일 시간을 기다리며 멀어지는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흑마보(黑馬堡) 흑마보(黑馬堡) 3 멀리 오 리(里) 정도 떨어진 곳에는 도만현성이 위치해 있었고, 그 북쪽 편으로 치우친 곳에 수많은 고루거각(高樓巨閣)들로 이어진 흑마보(黑馬堡)가 사방을 오시하는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단리유아가 포위된 곳은 수로(水路)에서 십여 장(丈) 떨어진 곳으로, 수로 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육백여 명의 사람들로 둘러싸여 제일 바깥쪽의 사람들은 안쪽과 거의 백여 장(丈) 정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 흑마무상(黑馬無上)과 그의 주변인물들이 백여 장(丈)의 거리를 두고 제일 바깥쪽에 위치해 있었다. 팽가(彭家)의 사람들이 탄 배가 오 리 이상 멀어져 점점 자그마한 점으로 보일 때, 돌아서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팽현표에게는 불리해지면 즉시 빠져나오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비록 비무행(比武行)과 싸움으로 무공을 완성해서 강해지는 것이 목표이지만, 그렇다고 원한을 잊고 웃고 넘길 성인(聖人)은 결코 아니었다. 그간의 강호행(江湖行) 중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곳이 이곳으로 그 당시에는 실력이 딸려 물러나야 했지만 이번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포위한 대부분의 고수가 이류(二流)이하의 고수로 일류(一流)이상의 고수는 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본시 흑마보(黑馬堡)의 구성원 대부분이 수적(水賊)출신들로 이루어져서 이렇다할 고수가 드물었다. 또 보주인 흑마무상(黑馬無上)이 수하들을 잘 믿지 않아서 자신을 위협할 만한 고수들은 가까이 두지 않는 것도 한 이유였다. 흑마보(黑馬堡)가 강소성의 삼대사파(三大邪派)중 그 하나에 들지만, 그 수(數)가 많아서였지 고수들만의 숫자를 따지자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천시루(千屍樓)나 비사방(飛蛇幇)이 이들과 만나면 일개 수적집단 이상으로는 대우해주지 않았다. 화경(化境)의 고수에게 일류(一流)이하의 고수라는 것은 세워둔 허수아비 이상의 어떤 가치도 없었다. 만일 절정(絶頂)의 고수였다면, 이류(二流)의 고수들의 공격에 직접 당할 가능성은 적겠지만 최소한 내력(內力)의 소모라는 효과는 줄 것이다. 계속 그러다보면 내력이 바닥나서 결국 중과부족(衆寡不足)으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임독양맥(任督兩脈)의 타통과 전신(全身) 대주천(大週天)을 이루지 못한 절정의 고수에게는 그런 시도가 효과가 있을 테지만 화경(化境)의 고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흑마보주(黑馬堡主)가 단지 수(數)적인 우세만 믿고 자신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그에게 화경(化境)의 고수가 어떠한 경지(境地)인지를 똑똑히 보여 줄 작정이었다. 그동안 비무 하면서 느낀 점을 모아서 천애구검(天涯九劍)의 변초(變招)로 천보검법(天補劍法)을 만들었었는데, 이제 이들은 그 천보검법의 훌륭한 시험 대상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흑마무상(黑馬無上)이 얼마나 열심히 나를 위해 준비해두었는지 보고, 만일 그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에게 내일 뜨는 해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해줄 것이다. 단리유아가 흑마무상을 향해서 조용한 어조로, “이보시오, 곽(藿)나으리. 그들도 무사히 떠난 것 같으니 우리도 한판 어울려 보아야 하지 않겠소? 수하(手下)들부터 떼를 지어 덤빌 것이오, 아니면 고수(高手)들부터 덤빌 것이오?” 단리유아의 전혀 동요 없는 태연한 얼굴과 목소리를 들으며 흑마무상이 소리쳐, “뭐? 이 미친놈아, 네가 지금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너를 포위한 육백 명이 넘는 고수들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내 가랑이 사이를 지나간다면, 내 너그러이 용서해 줄 의향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없느냐?” 그의 말을 듣고 주변의 인물들과 흑마보(黑馬堡)의 수하들이 낄낄거리며 단리유아를 비웃는다. 이에 말소리에 진기(眞氣)를 실어서 시끄러운 소리를 잠재우며 단리유아가 무심한 음성으로, “곽(藿)나으리. 당신의 너그러움은 이미 예전에 느껴 보았으니 더는 필요 없소. 이번에는 나의 너그러움을 그대에게 확실히 보여줄 테니. 만일 당신이 여기 서 있는 이 허수아비들을 믿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내 잠시 후에 당신의 착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보여주겠소.” 단리유아의 말에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고, 흑마무상(黑馬無上)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하들에게, “뭣들 하느냐? 저놈을 당장에 쳐 죽이지 않고.” 주변에 있던 십여 명의 고수들이 몸을 날려 각자 휘하의 고수들을 인솔하기 위해 떠났다. 잠시 후에, 전(前)면의 백여 명의 고수가 먼저 공격해왔다. 대부분 검(劍)을 들었지만 일부는 아미자(蛾眉刺)나 도(刀), 부(斧), 창(槍)등의 병기도 여기저기 보였다. 어리석은 흑마무상은 수하들을 이용해서 단리유아의 진기(眞氣)를 소모시킬 생각이겠지만, 절정(絶頂)의 고수가 아닌 화경(化境)의 고수에게 진기의 소모는 크게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만으로 자신을 견제한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했다. 검집 채 들어서 가까이 다가와 공격하는 흑마보(黑馬堡)의 수하들을 하나하나 제압해갔다. “윽, 악, 으윽” 비록 죽지는 않겠지만, 팔다리 중에서 한군데 이상은 부러져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검영(劍影)이 다가와서 막상 공격하거나 막으려하면, 어느새 검(劍)이 다가와 팔다리를 분질러 놓았다. 도저히 이류(二流)고수들로서는 공격의 허와 실을 파악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신법(身法)의 속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아서 정말 무기를 든 허수아비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검(劍)과 각종무기들이 부딪쳐 나는 소리들과 쓰러지는 수하들의 비명을 듣고 한쪽에서 지켜보던 흑마무상(黑馬無上)이, “아니, 언제 저놈이 저렇게 강해졌지? 예전만 해도 나보다 약간 나았을 뿐인데. 단지 칠년 만에 저렇게 강해졌단 말이냐?” 주변의 수하 중에서 호법을 맡고 있는 흑마쌍살(黑馬雙殺)의 형인 청살(靑殺)이 불안한 얼굴로, “보주(堡主)님, 저놈의 무공이 생각보다 강한데요. 혹시 소문대로 도왕(刀王)과 맞상대할 정도로 강한 것이 사실이 아닐까요?” 청살의 물음에 반신반의하며 흑마무상이 되묻는다. “설마, 단지 칠년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화경(化境)의 경지에 들었다는 말이냐? 너희들은 그것이 믿겨지느냐?” “그렇지만, 보주(堡主)님. 저놈의 움직임을 보십시오. 도저히 수하들로서는 종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움직이며 공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소문대로 화경(化境)의 경지라면 저런 식의 공격은 전혀 쓸데없다는 것을 보주(堡主)님도 익히 알고 있잖습니까?” 청살의 말에 자신 역시 속으로 인정하는 터이지만 절대로 단리유아를 내버려두고 물러설 마음이 없던 흑마무상이 화를 내면서,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이대로 도망이라도 치자는 것이냐? 흥,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하겠다. 저 미친놈에게 그때 당한 상처가 아직도 가끔 쑤시는데, 여기서 물러나자고?” 이에 홍살(紅殺)이 흑마무상을 설득하며, “보주님, 그런 것이 아니라 수하들을 물리고 암기(暗器)나 화살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힐 수 있어도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검막(劍幕)이나 호신강기(護身剛氣)로 막아야 할 테니 내력(內力)이라도 소모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혹 막더라도 저놈이 약간이라도 방심할 테니, 그때 우리가 준비한 진법(陣法)을 펼친다면 충분히 저놈을 죽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실패한다 해도 이번에 불러 모은 고수들과 나머지 수하들로 합공한다면 저놈이 과연 견딜 수 있겠습니까?” “흐흐흐, 좋아. 그렇게 하자. 빨리 수하들을 물리고 준비한 화살과 암기를 날리도록 해라” 이들이 방법을 바꾸기로 결론을 내릴 때, 단리유가가 물러나며 목소리에 진기를 넣어서 소리친다. “모두 그만 물러나라. 너희들도 알겠지만 너희 같은 하수(下手)의 공격은 모두 쓸데없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라. 만일 또다시 계속 공격한다면 나도 더 이상은 사정을 보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들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혹시나 회정마공((灰情魔功)의 부작용이 일어날까봐서 죽이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귀찮게 한다면 단리유아 자신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을 것이었다. 진기(眞氣)를 모아서 외친 소리에, 공력(功力)이 낮은 고수들은 기혈(氣血)이 뒤집혀 내상을 입어 주저앉거나 공력이 높더라도 충격을 입어 얼굴빛이 창백해진다. 주변을 포위한 채 공격을 기다리던 대부분의 인물들도 경악과 함께 두려움의 빛이 가득했다. 그들 자신도 자신들의 공격이 거의 쓸데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들을 이끄는 고수(高手)들이나 흑마무상(黑馬無上)이 있는 곳을 돌아다보았다. 이때 단리유아가 흑마무상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흑마무상, 겨우 이따위로 나를 기다린 것이냐?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면 거기로 갈 테니 목이나 내놓고 기다려라.” 말을 마치고 단리유아가 인의 장막을 헤치고 다가가려 할 때, “뭐하느냐, 당장 공격해라.” 흑마쌍살(黑馬雙殺)이 수하들을 시켜 외곽에서 대기 중이던 궁수들에게 활을 쏘도록 하고, 나머지 수하들도 일제히 암기를 날리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에, 먼저 후(後)면에서 대기하던 백 명의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또 삼면을 포위한 흑마보(黑馬堡)의 인물들도 수전(袖箭), 비황석(飛蝗石), 철련자(鐵蓮子), 철질여(鐵疾黎), 비도(飛刀), 강표(鋼標), 상문정(喪門釘), 비추(飛錐), 강침(岡針)등 온갖 암기(暗器)들을 동시에 날렸다. 온갖 암기와 화살로 인해 일시 하늘은 먹구름이 낀 듯 햇빛이 가리어지고, 단리유아를 목표로 일제히 날아드는 물체들의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쉬이잉, 휘익, 휙, 휙” 수많은 화살과 암기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도 전혀 동요도 없이 태연한 모습으로 칼을 빼들어 이번에 만들어봤던 천보검법(天補劍法)의 풍벽사(風壁絲)를 펼쳤다. 더 이상 봐주지 않고 확실히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검강(劍剛)을 머금은 초식을 펼친 것이다. “거, 검강(劍剛)?” 수많은 검강(劍剛)이 모여서 회오리 형태를 이루며 커져갔고 이윽고, 정면으로 오는 암기와 화살을 향해 검강을 날렸다. 검강을 보고 놀란 흑마보의 인물들이 미처 대응을 하기도 전에, 검강과 부딪힌 암기(暗器)와 화살이 사방으로 날렸고, 폭발한 검강(劍剛) 또한 줄기줄기 나뉘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꽝” “휙, 파팍, 퍼,퍽” “으아악, 으윽, 악!” 검강(劍剛)이 폭발하는 소리와 회전하던 검강에 부딪혀서 잘게 부셔져 사방으로 흩어진 암기와 화살들까지 검강의 파편과 함께 날아들어 단리유아를 포위한 삼십여 장(丈) 이내는 여기 저기 고통에 찬 비명과 울부짖음으로 완전히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현세지옥(地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까운 십여 장(丈)내에 있었던 인물들은 즉사했고, 삼십 장(丈)이내의 사람들도 대부분 전신에 한두 개의 파편이 박혀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삼십 장(丈) 밖의 인물들도 폭음(爆音)에 청각이 일시 마비되거나 운이 없게도 흩어진 암기(暗器)에 맞아서 상처를 입기도 했다. 갑작스런 충격에 모두들 공황(恐慌)의 상태에 빠졌다. 거의 백여 명의 인물이 이 일초의 검법(劍法)에 죽었고 활동이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중상을 입은 사람도 백오십여 명, 이 한 초식으로 흑마보(黑馬堡)의 수하들의 수적인 우세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게 됐다. 수하들 모두가 두려움에 질려서 뒷걸음질하며 더 이상 단리유아를 막을 생각도 못했다. 흑마무상(黑馬無上)도 이번의 공격에 충격을 받아서 전신이 두려움에 떨려왔다. 자신의 생각과는 천지차이로 단리무아가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흑마쌍살(黑馬雙殺)의 홍살(紅殺)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보주(堡主)님, 정신 차리십시오. 비록 더 이상 수하들의 공격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저놈도 이번에 내공소모가 막심했을 것입니다. 저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을 보니, 지금 당장 본보(本堡)의 정예들을 동원해 공격해야합니다.” 흑마쌍살(黑馬雙殺)이 붙들어 흔들자,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흑마무상이, “휴, 정말 끔찍한 검법이군. 저 죽일 놈이 저렇게 강하다니. 당장 팔괘연환진(八卦連環陣)을 펼쳐라. 저놈도 이번에 어느 정도는 충격을 받았겠지.” 흑마쌍살(黑馬雙殺)이 복명하며 칠십 명의 일류(一流)고수들을 이끌고 단리유아에게 달려갔다. 단리유아가 풍벽사(風壁絲)로 인한 주변을 둘러보고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내상(內傷)을 입거나 내력(內力)의 과다한 소모 때문이 아니었다. 일초의 검법(劍法)에 거의 삼백 명의 사상자를 낸 것에 놀랐던 것도 아니었다. 백여 명이 즉사하고 그 이상의 숫자가 중상을 입었는데도 아무런 죄책감(罪責感)이나, 그런 일을 벌인 자신에 대한 모멸감(侮蔑感)도 없었던 것이다.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이 오성(五成)이하의 경지였던 지난날에는 그래도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수많은 싸움 중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어쩔 수 없이 죽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살인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내공심법이 구성(九成)에 이른 오늘 이렇게 많은 죽음을 보고도 나무토막을 벤 것처럼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게 놀랐던 것이다. 놀라기는커녕 죽거나 다쳐서 신음하는 모습에 오히려 전율하는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이 회정마공((灰情魔功)의 저주(咀呪)인가? 살인을 하면 할수록 죄책감이나 거부감은 사라지고 쾌락에 빠져 더욱 많은 살인을 하게 되는? 그 옛날 회정구마(灰情九魔)도 인간의 정서는 모두 사라지고 오직 살인의 쾌락만을 느끼고, 살인을 할 때에만 감정(感情)이 살아나는 기분 때문에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강호(江湖)를 떠나 은거(隱居)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감정이 살아나는 이런 경우를 찾아서 더 많은 살인을 해야 할 것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가오는 칠십이 명의 고수(高手)들을 보고는 일단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아니, 이들까지 죽여서 아까의 그 기분을 느끼고자 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흑마보(黑馬堡) 흑마보(黑馬堡) 4 “모두 각자의 위치로 가라. 오늘 반드시 저 미친놈을 죽여야 한다. 우리 형제들이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으니 우리가 복수를 하자. 저놈도 아까 검강(劍剛)을 쓰느라 내공을 많이 소모했을 테니 승산은 충분하다.” 흑마쌍살(黑馬雙殺)의 외치는 소리와 함께 칠십이 명의 인물들이 단리유아를 둘러쌌다. “팔황연개(八荒蓮開)! 이기전타(以氣傳打)” 마치 연꽃 모양처럼 벌어진 진법(陣法)이 돌아가면서 공격이 시작됐다. 아홉 명씩 한 조(組)가 되어 팔방(八方)을 점한 다음 공격이 시작됐다. 칠십이 명이 공격하지만 실제로 공격을 하는 것은 각조의 한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인물들은 그 한명에게 자신의 공력(功力)을 전이(轉移)하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아홉 명의 내력이 모이니 거의 삼갑자(三甲子)에 해당하는 공력이 한사람에게 집중됐다. 여덟 명 중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사람은 두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공력(功力)을 모으며 단리유아의 공격을 무산(霧散)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진법(陣法)은 본래의 팔괘연환진(八卦連環陣)을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칠십이 명의 내공을 여덟 명에게 집중해, 설사 상대가 몇 단계 위의 고수일지라도 상대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본래의 팔괘진(八卦陣)에 마진자(魔陣子)가 자신의 심득을 넣어서 창안한 진법(陣法)으로 소림사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에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펼치기는 아주 어려워서 많은 세월의 고련이 필요했다. 아홉 명이 한 사람에게 내공을 전이(轉移)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직접 공격하는 여덟 명의 공격과 수비의 조화 또한 필요했다. 만일 칠십이 명 중에서 한사람이라도 내력전이에 차질이 생기거나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즉시 진법은 무너지고 칠십이 명 모두 최소한 주화입마(走火入魔)되어 폐인(廢人)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실제 이 진법(陣法)을 익히고 펼치려는 시도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단 한사람 때문에 칠십이 명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니 어느 문파에서 칠십이 인의 고수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이 진법을 펼치려 하겠는가? 그러나 그런 위험부담이 큰 반면에 진법의 위력 자체만 따진다면 따라올 진법이 없었다. 또, 진법자체는 약점이 없기에 힘으로 부딪혀 깨뜨리지 않는 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흑마보(黑馬堡)가 이렇다할 고수들이 없음에도 다른 문파들이 공격하기를 꺼려한 것은, 수하들의 수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이 진법을 깨뜨릴 만한 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 진법에 갇힌다면 순수한 힘으로 뚫기 전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단리유아도 평범한 칠십이지살대진(七十二地殺大陣)으로 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흑마쌍살의 외치는 소리에 비로소 마진자의 팔괘연환진(八卦連環陣)인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순간적으로 방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진법(陣法)이 완성되고 난 후라 쉽사리 이들의 연환 공격을 물리쳐서 진법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공격하는 두 사람의 내공이 삼갑자(三甲子)에 달해서 그것을 막는 데에도 힘이 들었고, 둘러싼 나머지 때문에 움직임이 상당히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진법을 펼치는 흑마보(黑馬堡)의 수하들도 힘들어졌지만, 단리유아는 진세(陣勢)의 영향으로 더욱 움직이기 힘이 들었다. “꽝! 쿵 팡 펑!” 좌충우돌 돌파를 시도했지만, 정말이지 마치 여덟 명의 화경(化境)의 고수가 합공하는 것처럼 빠져나올 수 가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자신이 더 불리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제 육 초식을 펼치기로 했다. 비록 상대의 공격에 호신강기(護身剛氣)가 흔들려 내상(內傷)이 심할 테지만, 더 이상 늦추다가는 위험했다. 모든 내공을 끌어 모아서 검에 집중하여 검환을 맺힌 다음, 후(後)면의 공격은 무시하고 정면의 홍살을 향해서 날렸다.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제 육초 천애파황탄(天涯破荒彈)으로 다섯 개의 검환이 연이어 상대를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설사 하나를 막는다 할지라도 연이은 검환을 모두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공의 소모가 워낙 많아서 단리유아 역시 잘 쓰지 않는 초식이었다. 다섯 개의 검환(劍丸)이 연이어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자, 앞에서 공격하던 홍살(紅殺)도 안색이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다른 일곱 사람도 이번 공격을 막지 못한다면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고, 검환을 막기 위해 내력(內力)을 홍살에게 집중했다. 홍살의 도강(刀剛)과 부딪힌 검환(劍丸)이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수십 겹의 도강을 형성해 막았지만 아직도 검환은 네 개나 남아서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내력을 전이해서 계속 막았지만 세 개를 더 막자, 더 이상의 검환을 막을 수 있는 내력이 전이되지 못했다. 단리유아의 생각대로 한 지점에 계속적인 공격을 하자 아무리 내공전이로 막는다 해도 한계(限界)에 달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사용된 내력보다 전이되는 내력이 늦어져 더 이상 검환(劍丸)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꽝. 콰 꽝!” “윽, 으윽, 악, 아악” 폭음과 함께 비명이 이어졌고 전방에서 공격을 막던 홍살(紅殺)의 조를 포함한 이개 조는 마지막 검환(劍丸)의 폭발에 의한 직접적인 충격으로 시신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갈가리 쪼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외의 대부분의 진을 형성했던 고수들도 즉사하거나 피를 토하거나 가르릉거리며 숨을 가쁘게 쉴 뿐, 곧이어 그들도 숨이 멎었다. 단리유아도 충돌에 의해서 심각한 내상(內傷)을 입었다. 하지만 더욱 심한 것은 외상으로, 후(後)면의 공격을 무시하고 단지 피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미처 피하지 못한 왼쪽 옆구리의 살은 완전히 뜯겨 나가서 내장(內臟)이 보일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만일 진을 이루는 이들의 수준이 조금만 높았다면 지금의 정반대 상황이 되었을 것이었다. “우욱, 욱” 내상(內傷)으로 뭉친 죽은피를 토해낸 후에, 옆구리에 지혈산(止血散)을 바르고 상의를 벗어 허리를 꽉 둘러맸다. 순간적으로 방심해서 보통의 칠십이지살대진(七十二地殺大陣)으로 생각하다가 의외의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이전의 하수(下手)들의 공격도 방심시켜 이들의 공격을 은폐(隱蔽)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였다. 이번의 충돌로 내력(內力)은 칠할 이상 끌어올리기 어려웠고, 옆구리의 상처로 인해 움직임도 상당히 둔화되었다. 이에 반해서 상대는 흑마무상(黑馬無上)과 이십여 명의 고수(高手)들이 아직 남아 있었고, 비록 하수들이지만 삼백 명의 수하들까지도 남아있었다. 흑마무상(黑馬無上)과 그의 수하들은 팔괘연환진(八卦連環陣)에 갇힌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서로 즐겁게 대소(大笑)하며 단리유아의 죽음을 낙관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리유아의 공격으로 진(陣)은 와해되고 진법(陣法)에 참여한 고수들도 모두 죽자, 다들 경악에 차서 입을 벌리고 바라볼 뿐 아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이윽고, 단리유아가 응급조치를 마쳤을 때, 정신을 차린 흑마무상(黑馬無上)이 혈부삼살(血斧三殺)을 돌아보면서, “뿌드득, 오늘 내가 저 미치광이를 죽이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혈부삼살(血斧三殺), 이제 당신들 차례요. 어서 가서 저놈의 목을 잘라오시오. 상처가 심하니 저놈도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테니 이번이 절호의 기회일 것이요.” “푸하하하, 알았소. 보주. 저런 놈을 죽이기는 여반장(如反掌)이니, 약속한 대가나 잊지 말고 준비해 주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흑마무상(黑馬無上)을 뒤로하고 혈부삼살(血斧三殺)이 앞으로 나서서 단리유아에게 다가갔다. 그들을 보며 흑마무상이 속으로, ‘무식한 놈들 같으니, 상처 입은 맹수(猛獸)가 오히려 더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 너희들의 가치는 지금 단리 미치광이를 조금이라도 더 지치게 만드는 것뿐이야. 어리석은 놈들아, 네놈들이 죽은 후에 약속이 무슨 소용이냐? 흐흐흐’ 혈부삼살(血斧三殺)은 본래 섬서성(陝西省) 북동부 반룡산(盤龍山)에 있던 금부문(金斧門)의 제자들이었다. 전대(前代) 금부문주였던 절장금부(切掌金斧) 전효(田曉)가 반룡산을 어지럽히던 도적(盜賊)들을 소탕하다가 뛰어난 무골(武骨)을 지닌 이들을 발견하여 제자로 삼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본시 흉포한 도적의 성품이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이후에 절장금부와 그 일가(一家)를 죽이고 금부문의 비전무경(秘典武經)인 연굉금부비록(然宏金斧秘錄)을 훔쳐 달아났다. 후일 정파의 고수들이 이들을 추적하여 죽이려 하였지만, 몇 년간 숨어살며 무공을 완성한 후에 다시 나타난 이들을 상대할 고수는 거의 없었다. 단리유아와 이들도 약간의 안면이 있었다. 육년 전에 단리유아는 섬서성(陝西省)을 횡단하면서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비무를 했었다. 그때 절장금부(切掌金斧)와도 비무를 했었는데 거기서 이들을 보았던 것이다. 단리유아가 비무가 끝난 후에 저들에 대한 것을 듣고는, 저들은 타고난 반골지상(叛骨之像)이니 당장 문하에서 쫓아내도록 충고했지만 절장금부는 받아드리지 않았다. 절장금부는 사람의 외적인 재질(才質)을 알아보는 데에는 뛰어났지만, 내면의 본성(本性)을 알아보는 것은 어리석었다. 그가 떠난 지 얼마 안돼서 단리유아의 말대로 절장금부는 저들 제자들에게 변을 당했던 것이다. 또 나머지 제자들도 복수(復讐)를 하려하거나 문파를 재건할 생각은 않은 채, 뿔뿔이 흩어져 대부분이 사도(邪道)에 빠져들었다. 후일에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단리유아가 탄식하며 차라리 자신이 그때 저들을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었다. 혈부삼살(血斧三殺)이 가까이 다가오자, 단리유아도 그들을 알아보았다. “무공을 가르쳐주고, 인간의 도리를 일러준 스승과 그 일가를 절몰(切歿)시킨 패륜아들이 아닌가? 그대들도 흑마보(黑馬堡)에 몸을 담았나? 정말 흑마무상(黑馬無上)은 능력도 좋군.”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혈부삼살(血斧三殺)의 대살(大殺)이 화를 내며, “흥! 무슨 헛소리냐? 반송장인 주제에. 우리가 어딜 봐서 흑마보에 의탁하겠느냐? 흥, 그놈이 그런 배포나 있으면 다행이지, 머리만 좀 굴릴 줄 알지 완전히 좀생이 같은 놈인데. 그건 그렇고 그렇지 않아도 네놈을 찾기를 학수고대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었군.” “나를? 나는 네놈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 하나는 있군, 절장금부(切掌金斧) 전노사(田老師)를 대신해서 금부문(金斧門)의 문호를 정리해주는 것.” 태연히 자신들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대살(大殺)이, “뭐라고, 이 죽일 놈이 말이면 다인 줄 알아. 네놈이 우리를 쫓아내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전노귀(田老鬼)를 죽일 생각이나 했을 것 같으냐?” “네놈들은 천생의 반골(叛骨)들이라, 나의 말이 없었어도 그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단지 시간이 조금 늦추어졌을 뿐이겠지.” 무심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자신의 태도에, 화를 내며 대부를 꺼내드는 혈부삼살을 보고, “이제 죽여줄 테니, 저승에 가면 너희들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전노사(田老師)께 단리유아가 보내서 왔다고 전하기나 해라.” “뭐, 이 개자식이 입만 살아서, 죽어랏!” 단리유아의 말에 세 사람 모두 화가 폭발하고 악이 받쳐서, 일제히 대부를 마구잡이로 휘저어 공격했다. 이에 단리유아가 이형환위(以形換位)로 옆으로 피하며, 오히려 혈부삼살에게 접근하면서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일초인 천애유성하(天涯流星河)를 순간적으로 연이어 펼쳤다. 세 가닥의 검강(劍剛)이 일어나 빛살처럼 혈부삼살(血斧三殺)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제야 혈부삼살도 단리유아의 말에 흥분하여 무작정 달려들었음을 알고, 이미 피하기는 늦어서 최선을 다해 막았지만, “윽, 악, 아악” 세 명 모두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단리유아도 남은 내공을 끓어 모아 기습으로 쾌검(快劍)인 천애유성하(天涯流星河)를 펼친 것이다. 이들 모두 절정(絶頂)의 고수여서 비록 흥분으로 방심했다 하더라도 검기(劍氣) 정도를 모아 공격한다면 상처를 입힐 수는 있겠지만 죽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아직도 흑마무상(黑馬無上)과 그 수하들이 남았으니 어쩔 수 없이 기습으로 검강(劍剛)을 펼쳐야만 했다. 무리하게 검강을 연이어 펼쳐 내상이 더 심해져 다시 어혈(瘀血)을 토해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서 행공(行功)을 하며 조식을 취했다. 이제 흑마무상의 공격이 시작될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으니 최대한 내력을 회복해야했다. 흑마무상(黑馬無上)이 혈부삼살(血斧三殺)이 일초에 단리유아에게 죽는 것을 보고는, “이런 바보 같은 자식들, 그런 간단한 격장지계(激將之計)에 속다니. 죽어도 싸다 죽어도 싸. 제기랄, 그동안 저놈들한테 처먹인 은자가 얼마나 되는데,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한동안 혈부삼살의 욕을 하다가 주위를 돌아보고, “흐흐흐, 그래도 저놈을 죽일 수는 있겠군. 모두 가자. 저놈을 죽인 자에게 호법(護法)의 직위와 세 명의 미녀(美女)를 내리겠다.” 이 말에 주변을 둘러싼 수하들과 불러 모은 고수들 이십여 명이 함성을 지르며, 단리유아를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단리유아에게 걸어가며, “그나저나, 너무 피해가 크군. 저 미친놈 하나 때문에 아까운 칠십이지살대(七十二地殺隊)만 없어져 버렸군. 휴, 피해를 만회하려면 최소 오년은 걸려야 어느 정도 될 텐데. 으드득, 처 죽일 저 미친놈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숫자만 많지 고수(高手)들의 숫자는 상대가 되지 않아서 천시루(千屍樓)와 비사방(飛蛇幇)에 눌려 지냈는데, 이제부터는 수하(手下)로 들어가든지, 뇌물을 상납해서 굽신거려야 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이렇게 만든 단리유아를 향해 이를 갈았다. 흑마보(黑馬堡) 흑마보(黑馬堡) 5 이십여 명의 고수가 무기를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며 단리유아는 행공(行功)을 중단했다. 내공(內功)은 아직도 칠성이상은 불가능한 것 같았고, 옆구리의 상처도 피가 너무 많이 흘러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옆구리의 상처 때문에 신법을 펼치는 것은 약간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또한 뒤에서 기다리는 음흉한 흑마무상(黑馬無上)의 시선을 느끼고, 약간의 상처를 입더라도 검기(劍氣)이상은 쓰지 않기로 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저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십여 명의 일류고수와 그 속에 포함된 몇몇 절정(絶頂)고수들과의 싸움은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순수한 실전에서의 타고난 능력만이 이러한 곤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공격해온 자들은 산동성(山東省) 최남부 담주(錟州)일대의 고수들인 담주삼호(錟州三虎) 맹(孟)씨 삼형제들이었다. 중(重)병기들인 대부(大斧), 독각동인(獨脚銅人), 삼차(三叉)를 주무기로 산동성(山東省) 남부와 강소성(江蘇省) 북부 일대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수들이었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첫째 맹석(孟席)을 향하여 검(劍)을 휘둘려 대부(大斧)를 옆으로 비껴 쳐낸 후에 한 발 더 다가가 상대의 품으로 뛰어들며, 왼손으로 권(拳)을 휘둘러서 삼권(三拳)을 연달아 복부를 향해서 쳐내었다. 고통에 고개를 숙인 맹석의 등 뒤로 돌아서 왼쪽에서 형을 구원하고자 독각동인(獨脚銅人)을 휘두르며 공격하는 맹과(孟鍋)를 향해, 맹석의 명문(命門)에 권경(拳勁)을 처넣어 날려 보냈다. “챙! 펑, 푸학” 입에서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맹석은 보지도 않고, 오른쪽에서 접근하던 맹성(孟盛)을 향해서 돌아서서 공격해오는 삼차(三叉)를 철판교(鐵板橋)로 누우며 피해낸 후에, 다시 일어나며 검을 들어 낭심(囊心)을 찔렀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그의 손에서 삼차를 빼앗은 다음, 왼쪽에서 공격하다가 얼떨결에 다가오는 형의 머리를 공격해서 날려 보낸 후에 충격에 넋이 반쯤 나간 맹과에게 날려서 목에다가 삼차를 박아 버렸다. “으악, 푹, 아악” 순식간에 절정고수 셋이 죽어버렸다. 다가오는 고수들도 경악에 차 일시 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들이 멈칫한 순간, 오히려 단리유아가 그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맹씨 삼형제의 뒤를 따라오던 고수는 강소성(江蘇省) 동부 방산(方山) 일대의 고수로 평소에 절정의 고수라는 자부심에 차 있던 쾌도(快刀)의 달인인 절혼도(絶魂刀) 정패심(鄭沛沈)이었다. 상처 입은 단리유아를 공격하려 다가가며 내심 합공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그는 맹씨 삼형제가 죽자 오히려 쾌재를 부르다가, 단리유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도를 뽑아서 먼저 공격했다. 도광(刀光)이 번뜩이며 단리유아의 머리를 향해 다가왔다. 이번에 수련(修練)중에 창안한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을 펼치며 전면에는 허상(虛像)을 남기며 좌로 돌아가며 검을 휘둘려 목을 날려버렸다. “팟” 피가 솟구치고, 아직도 도(刀)를 휘둘러 단리유아를 죽일 수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수급이 날아갔다. 넘어지는 정패심의 몸뚱이를 지나서 아직도 무슨 일인지 잘 알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인 홍택호(洪澤湖)일대의 권법(拳法)의 고수 흑상권(黑傷拳) 구철(具鐵)을 향해 다가가 먼저 왼손으로 뇌전지(雷電指)를 날려 상대의 오른쪽 어깨를 노렸다. 다가오는 뇌전지에 오른손으로 권경(拳勁)을 날려 막으며 예측대로 왼쪽으로 피하는 상대에게 다가가며 검(劍)으로 심장을 찔렀다. “쉬익, 퍼엉, 푹“ 찰나의 순간에 막고 피하며 다시 공격한 것이다.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흑상권 구철의 가슴에서 검을 꺼내들고 옆으로 한걸음 다시 나아가자, 강소성 건호(建湖)일대의 쌍둥이 검도(劍道) 고수인 정호이검(靜湖二劍)이 같이 검을 휘둘러 상하를 각각 수많은 검영(劍影)을 이루며 공격했다. 본래 이들과는 비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단리유아가 저들의 연환검(連環劍)에 패한 것으로 소문이 났었다. 이들 또한 그 당시 자신들이 이미 단리유아를 꺽은 적이 있는데, 아무리 그동안 그가 무공이 상승했더라도 자신들도 놀지 않았으니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번 일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만일 이들을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검을 나누며 검도(劍道)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겠지만, 지금은 생사결전(生死決戰)의 순간, 그리고 단리유아는 비무(比武) 이외에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 자를 살려둔 적이 없었다. 번뜩이는 검광(劍光)에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의 허상(虛像)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미소 짓는 순간, 십자(十字)의 검광(劍光)이 번뜩이며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각각 상반신과 하반신이 사분(四分)되어서 쓰러졌다. “팟, 퍽” 정호이검(靜湖二劍)이 쓰러진 이후로, 쌍관필(雙官筆)로 회하(淮河)일대를 독행(獨行)하던 철회쌍필(澈淮雙筆) 관자심(管咨審)은 검(劍)을 막다가 왼손의 지법(指法)에 이마 한 가운데가 구멍이 뚫려 쓰러졌고, 이어서 철선객(鐵扇客) 심후령(沈厚鈴)은 철선을 펼쳐 검(劍)을 막다가 다가온 단리유아의 뇌벽권(雷霹拳)에 의해 머리가 산산이 박살났다. 마치 양떼 속에 한 마리의 늑대가 먹이를 노리고 날뛰듯이 순식간에 고수들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져 갔다. 검(劍)을 들어 공격하다가도 지법(指法)에 당해서 죽고, 권법(拳法)을 쓰다가도 검을 날려 목을 날려버린다. 허리의 상처 때문에 각법(脚法)은 쓰지도 않고 있지만 이미 주변을 포위하며 달려들던 인물들의 반 이상이 쓰러졌다. 채 일각(一刻)이 지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단리유아가 얼마나 많은 실전을 겪었는지 모른다. 정상적인 비무만 소문이 났을 뿐, 정작 비무보다도 피를 부르는 생사(生死)의 결전을 더 많이 겪었음을 몰랐다. “으으, 저자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모두 달아나자.” “혈귀(血鬼)다” 그제서야 주변의 포위했던 인물들이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한참 살인(殺人)에 빠져 쾌감(快感)에 들뜬 단리유아를 진정시키는 어려웠다. 달아나는 그들을 쫓아가 하나하나에게 죽음을 선물했다. 마지막으로 삼십 장(丈) 밖까지 달아났던 신법(身法)의 고수 절적귀묘(絶迹鬼猫)가 허리가 조각나 죽은 것을 끝으로 모든 고수들이 죽었다. 고수들이 포위하는 것을 보며 천천히 다가오던 흑마무상(黑馬無上)은 모든 고수들이 순식간에 죽자 오십 장(丈)밖에 멈추어서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발길을 돌려 그에게 점점 다가오자, “여, 여봐라. 모두 저놈을 공격해라. 어서.” 멀찍이 장내에서 벗어나 지켜보던 남은 수하(手下)들에게 공격을 명하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수많은 시체와 흩어진 살점, 부러진 병장기가 흩어진 싸움터의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루는 한복판에서, 전신이 피로 물들고 살점이 여기저기 붙어있는 모습으로 서있는 단리유아에게 다가갈 담력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도망치는 인물까지도 쫓아가 죽이는 그 잔인함에 행여나 자신을 공격할까봐 오히려 점점 흑마무상(黑馬無上)의 곁에서 물러설 뿐이었다. 흑마무상의 앞 삼 장(丈)의 거리까지 다가가 무심한 음성으로, “이보게 곽(藿)나으리. 아직도 준비된 것이 더 남아있나? 지금까지는 약간 멈칫거리게 할 정도는 됐지만, 나를 만족시키는 수준은 안 되는군.” “이, 이보시오. 단리대협. 내 잘못했소. 대협, 사람을 잘못보고 헛된 욕심을 부렸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흑마무상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싹싹 빌면서 자비를 구한다. 그 모습에 더더욱 살심(殺心)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다가갔다. “아까의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이런 쥐새끼 같은 모습만 남아있나?” 단리유아가 말을 하며 일 장(丈) 이내로 다가가는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흑마무상(黑馬無上)이 고개를 들며, “죽어랏!” 품속에서 침통(針筒)을 꺼내서 암기를 발사한다. “쉬익 쉭” 암기(暗器)가 전신에 박힌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며 기고만장해서 웃으며, “하하하, 절명우화침(絶命雨花針)의 맛이 어떠냐. 흐흐흐, 이런 날을 대비해서 거금을 들여 구했었는데 네놈에게 제일 처음으로 써먹는군. 흐흐흐” 절명우화침은 강호(江湖)오대금용암기(五大禁用暗器) 중의 하나로 사용이 금지된 것이었다. 오백여 년 전의 살수집단으로서 강호의 공적(公敵)으로 몰려서 멸문(滅門)된 절명곡(絶命谷)의 독문암기로 그 악독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절명우화침에 발라진 독도 극독(劇毒)이었지만, 설사 해독약을 복용해도, 그 침(針) 자체가 손톱보다도 작아서 일단 피부에 꽂히면 혈맥(血脈)을 타고 돌아서 세 시진 이내에 심장이나 뇌(腦) 속으로 들어가 갖은 고통을 주면서 서서히 죽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흑마무상(黑馬無上)의 비열함을 겪은 적이 있는 단리유아는 다가가면서 호신강기(護身剛氣)를 펼쳐두고 있었다. 비록 가까이에서 발사되어 호신강기를 뚫은 침도 있을 테지만 이미 침통을 빼내드는 순간 혈맥(血脈)을 폐쇄해서, 혈맥 안으로 침투한 침은 없었다. 피부에 붙어있던 침들을 내력으로 밀어내어 털어내자, “어, 어떻게? 그래도 독(毒)은 이미 침투했을 테니 나를 살려준다면, 해독약(解毒藥)을 주겠소. 그러니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오. 원한다면 저기 흑마보(黑馬堡)도 주겠소.” 목숨을 구걸하는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검(劍)을 휘둘러 목을 베어버렸다. 경악과 사정하는 애절한 표정이 반반인 목이 베어져 땅에 떨어졌다. 흑마무상(黑馬無上)의 생각으로는 해독약이 필요할 테니 최소한 목숨은 구걸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리유아가 익힌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이 천지간의 어떤 기운도 막지 않고 흡수한다는 것을 몰랐다. 독(毒)일지라도 독정(毒精)은 골수로 흡수하고 찌꺼기만 모공(毛孔)으로 다시 배출된다는 것을. 지금의 단리유아에는 설사 극독(劇毒)일지라도 오히려 다시없는 영약(靈藥)과 같았다. 흑마무상(黑馬無上)의 목을 벤 후에 주변을 둘러봤다. 멀찍이 떨어져서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흑마보(黑馬堡)의 졸개들도 흑마무상이 단리유아에게 죽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놀람과 당황에 찬 모습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상처를 지혈하고 약을 바르면서 단리유아가, “흑마무상은 죽었다. 오늘부로 흑마보(黑馬堡)는 강호에서 사라졌다. 너희들도 각기 제 갈길로 떠나라. 만약 일각(一刻) 이내에 까지도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은 살기가 싫다는 것으로 알아듣고, 무차별로 살수(殺手)를 펼칠 것이다.” 진기를 모아 외쳤다. 외상이 심해서 거동이 약간 불편할 뿐, 아직 저런 졸개들을 상대할 정도의 내공(內功)은 있으니 일단을 저들을 쫓아 버려야했다. 몇몇이 선동하여 공격하자고 하였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은 순식간에 장내를 떠나서 살길을 찾아 떠나갔다. 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도 그들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어께를 늘어뜨리고 장내에서 떠나갔다. 단리유아가 싸움터를 둘러보니 장내에는 흩어진 무기(武器)와 암기(暗器), 죽은 시체와 찢어진 살덩이들이 흩어져 있고, 피가 내를 이룰 정도였다. 여기저기 아직 살아있지만 고통에 차서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을 토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 풍벽사(風壁絲)에 당한 졸개 중에서 중상을 입은 자들로, 모두 버려두고 도망가서 장내의 광경은 한 폭의 지옥도(地獄道)를 이루었다. 전신에 상처를 입고, 자신과 타인의 선혈(鮮血)로 목욕을 한 듯한 단리유아의 모습은 마치 그런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악마를 보는듯했다. 보통사람이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본다면, 넉넉히 일년 동안은 가위에 눌릴 모습이었다. 일각(一刻)여 동안 죽은 시체들 중에서 깨끗한 옷을 찢어내 상처를 싸매며 호흡을 골라 내식을 진정시킨 후에, 천천히 흑마보(黑馬堡)를 향해서 움직였다. 싸움터에서 오 리 이상을 떨어져 있던 흑마보는 처음의 웅장한 모습은 볼 수 없었고, 여기저기 불타고, 부서지고, 겁탈을 당하는 여인들의 비명으로 또 다른 지옥(地獄)에 온 듯한 모습이었다. 단리유아로부터 도망친 졸개들이 난입(亂入)해서 기물을 파손하고, 돈이 되는 물건을 뒤지며, 반항하는 여인들과 하녀들을 겁탈하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흑마보(黑馬堡)로 향한 것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재(藥材)와 운공(運功)할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보(堡)의 정문을 통해 들어가자 여기 저기, 흩어진 가재도구들과, 옷가지 등이 사방으로 널려 있고 곳곳의 건물들이 불타고 있었다. 한 전각(殿閣)에서 물건을 뒤지다가 나오던 졸개들이 단리유아를 보더니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그 중에서 한명을 붙잡아 보주(堡主)의 거처로 안내하게 했다. 보주의 거처라면 숨겨놓은 약재(藥材)도 있을 것이고, 내상약(內傷藥)이나 영약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새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며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몇 대 쥐어박아 달래서 앞장서게 했다. 마치 지옥의 사신이 따라오는 듯이 덜덜 떨며 총총 걸음으로 앞장서는 졸개를 따라서 몇 개의 문을 지나 내원(內院)에 이르렀다. 여기가 보주(堡主)의 거처라며 땅바닥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싹싹 손바닥을 비는 것을 내버려두고 내원으로 들어섰다. 눈앞의 삼층의 전각(殿閣)을 뒤로하고 삼면에 십여 채의 전각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각각 담장이 둘러쳐져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는 없었지만, 여인들의 비명이 여기저기 들리는 것으로 보아서 보주의 첩실(妾室)들과 가족들의 거처인 것 같았다.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전각(殿閣)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자, 여기저기 가구와 탁자들이 뒤집혀지고, 깨진 병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아마 제일 먼저 이곳부터 들려서 값나가는 것은 몽땅 쓸어갔을 것이다. 이층의 침실로 들어가 문을 막고 간단한 기문진(奇門陣)을 입구(入口)에 펼친 다음에 요상(療傷)에 들어갔다. 반 시진(時辰)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 어혈(瘀血)을 토해내서 내상을 진정시킨 후에 전각(殿閣)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일층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곳이 없었다. 이층에 올라 여기저기 뒤지다가, 서실(書室)에서 약간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한쪽의 서가(書架)가 앞으로 나와서 전각의 넓이와 서실(書室)의 크기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 서가 뒤쪽으로 밀실(密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기관을 찾았다. 기관을 찾아 해제하니, 한쪽 벽의 서가가 열리고 길이가 일장 정도 되고, 폭이 반장이 채 못돼는 공간이 들어났다. 천장에 박힌 서너 개의 야명주(夜明珠) 아래에 각종보석과 금괴, 은괴부터, 무기, 서책, 단약 등이 나타났다. 이 흑마무상(黑馬無上)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소 자신을 능가할 고수보다는 수하들의 수만 늘려서 자신의 욕심을 차린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수하들에게는 은자나 금 부스러기나 주고 정작 귀중한 것은 자기가 모두 가진 것이었다. 흑마무상이 수적질을 시작한 이십여 년 전부터 모았으니, 금은보화만 해도 수십 대가 놀고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밀실을 안에서 닫아서 잠근 후에, 일단 요상에 필요한 약들을 찾았다. 단약(丹藥)들 속에는 흑마무상의 평소의 성품을 말해주듯이 각종 독약(毒藥)과 음약(淫藥)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은 한쪽으로 치워놓고 계속해서 뒤진 얼마 후, 한쪽의 상자를 뒤지다가 약왕곡(藥王谷)의 외상약인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와 함께 요상영단(療傷靈丹)을 찾았다. 흑옥단속고는 옆구리의 상처에 바르고, 요상영단은 삼키고 나서 다시 운공에 들었다. 몸속에 들어가자 단약이 녹으며 약력(藥力)를 내뿜기 시작했다. 내공(內功)심법을 운용하여 약력을 혈도(血途)를 타고 돌리며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따라 돌리다가 다시 전신을 대주천하면서 점점 무아지경(無我之境) 속에서 운공에 빠져들었다. 만금장(萬金莊) 만금장(萬金莊) 1 밀실(密室) 안에서 운공을 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운공을 하여 내상(內傷)을 진정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결과, 내상은 내력(內力)을 자유로이 수발할 정도로 회복이 되었고 외상(外傷)도 대부분 상처가 아물었고 옆구리는 새살이 돋으며 딱지가 붙었다. 역시 약왕곡(藥王谷)의 단약(丹藥)으로서 약효가 뛰어난 것 같았다. 이제 몇 일간 운공요상(運功療傷)을 더하며 요상에 전념한다면 상처는 완치될 것으로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에 널린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어제는 상처치료에 전념하느라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었다. 금은보화는 관심도 없으니 제쳐두고 먼저 서책(書冊)부터 살펴보았다. 기초적인 수준의 것에서부터 상승(上乘)의 무공까지 있었지만 눈길을 끌만큼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또한 몇 권의 춘화집(春畵集)와 음양대법(陰陽大法) 종류의 방중술(房中術)에 관한 책들도 있었다. 모두 없애버리려다 일단 한번 자세히 읽고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모르는 유파의 무공도 있을 테고, 강호(江湖)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 줄 모르니 음양대법에 관한 책도 읽어보기로 했다. 책들을 읽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속독으로 읽었는데도 족히 두 시진(時辰) 이상 걸린 것 같았다. 그동안 채음보양(採陽補陽) 종류의 무공을 몇 가지 알고 있었지만 그 무공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무시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읽은 음양대법(陰陽大法) 속에서 그러한 무공에서도 심오한 무학(武學)의 이치가 담겨 있음을 느꼈다. 잠시 무리(武理)를 음미하면서 생각에 빠졌다. 음(陰)과 양(陽)의 상성(相性)을 이용해서 내공을 늘리거나 상처를 치료할 수도 있고, 음기(陰氣)와 양기(陽氣)을 충돌시킨다면 강력한 무공을 창안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흠, 어떤 방법이 있을까? 본시 극음(極陰)과 극양(極陽)의 무공을 동시에 익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는데 방법이 없을까? 양의심법(兩意心法)류의 생각을 둘로 나누는 무공으로 두 가지 내공을 함께 운기(運氣)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두 가지 내력이 지나가는 혈도를 서로 충돌하지 않고 순서대로 운기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전신이 터져 죽기 십상이었다. 음기과 양기을 동시에 운기하는 무공으로 도가(道家)의 천지음양심법(天地陰陽心法), 음양천단도결(陰陽天丹道訣), 속가의 일월무극신공(日月無極神功), 마도(魔道)의 음양마유공(陰陽魔幽功), 전설의 고금오대고수의 일인인 감리천종(坎離天宗)의 감리신결(坎離神訣)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다들 내가 구결을 알지 못하는 무공들로서 천상 처음부터 시작해서 창안해야 함을 느끼고는, 나중에 다시 연구하기로 하고 일단 생각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는 무기(武器)들을 살펴보았다. 갖가지의 무기가 자신을 자랑하듯이 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검(劍)이나 도(刀)였기에 다른 것들은 무시하고, 검과 도 종류만 살펴보니 모두 이십여 자루가 있었다. 현재 쓰고 있는 철검은 사용한지 오래되어서 여기저기 날이 빠졌는데, 사실 톱으로 써도 될 정도였다. 그다지 보검(寶劍)이나 신검(神劍)을 원하지는 않지만 백번이상 단련된 강검(鋼劍)을 구하려던 참이었다. 도(刀)는 수련 중에 창안한 도법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저것을 검갑(劍匣)과 도갑(刀匣)에서 빼내어 고르다가 검(劍)은 장식이 없고 현재의 검과 길이도 비슷한 삼 척(尺)이 약간 넘는 평범한 흑검(黑劍)을 골랐다. 검인(劍刃)은 날이 세워져 있지 않았지만 현철(玄鐵)성분이 섞인 것인지 무게가 열 근이 넘는 것 같았다. 어차피 검의 날카로움은 그다지 필요치 않아서 이것을 골랐다. 검병(劍柄)에 새겨진 이름을 보니 흑아(黑牙)라 새겨져 있었다. 도(刀)는 박도(朴刀)의 형태로 도신의 길이가 이 척(尺) 칠촌(七寸) 정도이고 무게는 이십 근 정도 나가는 것을 골랐다. 도병(刀柄)의 길이는 반자 정도이고 도신(刀身)은 처음에는 이촌(二寸) 정도였다가 끝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휘어지고 넓어져 끝은 오촌(五寸) 이상이 되고 사선으로 끝이 잘라지는 모습이었다. 또 도신(刀身)에는 두 줄기의 혈조(血槽)가 파여 있었고, 도신의 색이 은은한 붉은색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선혈을 물들인 것 같아서 요악(妖惡)스러 보였다. 도병에 새겨진 이름을 보니 적운(赤雲)이라 적혀있었다. 밀실(密室)을 열고 밖으로 나가 창밖을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까지도 불타는 전각(殿閣)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재만 남아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몸을 둘러보니 피와 살점이 여기저기 말라 굳어져서 걸을 때마다 부스럭 거렸다.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은 후에 침실의 옷장에서 흑의(黑衣)를 골라 입었다. 단리유아도 키가 큰 편이었지만 흑마무상(黑馬無上)의 키도 칠 척이나 되어서 오히려 기장이 조금씩 남았다. 밀실(密室)안의 물건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았다. 먼저 서책(書冊)들은 사악한 자들에게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불태우기로 하고, 삼매진화(三昧眞火)로 태워서 창밖으로 재를 날려 보냈고,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와 요상영단(療傷靈丹)은 품속에 넣고, 나중을 위해서 보석도 한 움큼 쥐어서 품속에 넣었다. 나머지 무기류와 금은보화는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다. 무기를 가져가 일행에게 주고, 금은보화는 관부에 맡길까했지만 귀찮기도 했고, 도저히 양이 많아서 혼자서는 옮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시일이 지나면 다시 수적(水賊)들이나 도둑들이 와서 이곳을 차지하여 악용(惡用)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내버려 두기도 뭐했다. 관부(官府)에 알려 처리를 부탁한다 해도 그놈들 역시 도적과 별다를 바가 없으니 생각을 지웠다. 고개를 흔들고 나서 주변을 둘러본 후에 생각하기로 했다. 전각(殿閣) 밖으로 나가서 여기저기 다른 전각에 들어가서 어제의 광란 속에서 다행히 목숨은 부지한 여인들과 힘없는 노소(老少)를 전각 앞으로 모이게 했다. 두려움에 질려 반항하는 여인들도 맥문(脈門)을 잡아 끌고나왔고, 거동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각 내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끌어내게 했다. 몇 사람을 위로 올려 보내어 금은보화들을 가져오게 해서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각자 새로운 삶을 찾아서 떠나게 했다. 때는 전란(戰亂)이 자주 발생하던 시절이라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유랑(流浪)하는 경우란 드문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들은 당장 생활할 수 있는 금은이라도 가지고 떠나니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남은 금은보화가 약간 있었지만 내버려두고 흑마보(黑馬堡)를 떠났다. 해의 위치를 보니 벌써 유시(酉時:17-19시)가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팽가의 일행들이 기다리는 사양현(泗陽縣)까지는 백여 리의 거리가 있으니 신법을 펼친다면 저녁 무렵에는 도착할 것 같았다. 단리유아는 사양현의 포구에 도착한 다음, 다시 수로의 동편으로 강을 건너가서 근처를 뒤져 일행들의 배를 찾았다. 한쪽의 갈대 속에 돛을 내린 채 정박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뱃전에 서성이던 팽현표가 단리유아를 보고 뛰어내리며, “단리대협, 무사하셨군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다행히 상처가 있었지만, 밤새 요상(療傷)을 취해서 많이 나아졌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흑마무상은?” 팽현표의 말에 말을 끊어서 짧게 말한다. “이제 다시는 해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흑마보(黑馬堡)는?” “머리가 모두 없어졌으니 뿔뿔이 흩어져 다시 도적이 되거나 유랑하게 되겠지요.” “하하하, 그 많은 적들 속에 남겨두고 저희들만 살려고 도망친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무사하신데다 도적들을 쫓아버리고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시니 뭐라고 말할 수 없군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괜찮으니” 뱃전을 올라가서 남은 일행들과 인사하며 안부를 물었다. 새로운 검과 도를 보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냥 흑마보(黑馬堡)에서 주운 것이라고 얼버무렸다. 아직 저녁 전임을 알고 저녁을 먹으며, 어제의 싸움에 대해 물어오는 그들에게 어제의 일을 간단히 가르쳐주었다. 그러다 아까부터 어께의 도(刀)를 보고 있던 팽수호가, “단리대협, 혹시 칼도 쓰십니까? 아니면, 어께에 매고 있는 도는 무엇 때문에 가지고 오신 것입니까? “흠, 제가 이번에 오년간 수련하는 중에 도법을 한 가지 배워봤습니다. 마침 흑마보(黑馬堡)에서 쓸만한 도가 있어서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무심히 말하는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팽현표가, “아니, 대협. 도(刀)가 필요하시면 왜 본가에 있을 때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알았다면 대협의 맘에 드는 도를 그때 구해 드렸을 텐데요.” “그때는 저도 당장에 도를 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검(劍)만으로도 비무행(比武行)을 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실전(實戰)을 겪으면서 제 검법이 실전에는 잘 맞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흑마보(黑馬堡)에서 도가 보이기에 집어온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팽현표가 섭섭한 표정으로, “흠, 그래도 섭섭하군요. 본가에서는 대협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섭섭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섭섭한 표정의 팽현표가 고개를 저을 때, 채산쌍도(砦山雙刀)의 대도 채구악이, “대협, 검법(劍法)이 실전(實戰)에 맞지 않다니 무슨 말이십니까?” 대도 채구악의 묻는 소리에 잠시 생각하다가 책을 읽듯이 평온한 어조로, “음, 저의 천애구검(天涯九劍)을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으니 아시겠지만, 기본적으로 상대와 거리를 두고 검강(劍剛)이상의 수법으로 공격하는 것이지요. 이번에 제가 흑마보(黑馬堡)와 싸울 때 느낀 것이 접근전에서 공격할 마땅한 초식이 없어서, 만약 같은 화경(化境)의 고수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제가 오히려 위험했을 것입니다. 본래 이 검법을 만들 때 실전보다는 무예(武藝)의 완성(完成)에 초점을 둔 것이어서 검강(劍剛)에서 검환(劍丸)으로 다시 어검술(御劍術)을 향해가는 초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 어검술이라고요?” 모두가 단리유아의 설명에 놀랐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 일초부터 오초까지는 검강(劍剛)을, 육초는 검환(劍丸)을, 칠초부터는 어검술(御劍術)을 펼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아직 저도 칠초부터는 익히지 못하고 연구만 하고 있지요. 기본적인 형은 만들어졌지만 아직 불완전하고 깨달음도 부족해서 현재의 저로서는 펼치기가 어렵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지요.” 모두 놀람과 감탄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다시, “천애구검(天涯九劍)은 모두 검강(劍剛)이상의 수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초인 천애유성하(天涯流星河)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근접해서 펼치는 초식이 없습니다. 어제는 다들 하수(下手)들이어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같은 화경(化境)의 고수가 검강을 사용해서 접근전을 펼친다면 제가 불리하다고 봅니다. 물론 실전(實戰)에서는 저도 신법(身法)을 펼치며 피하기도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접근해서 공격하는 초식이 아니니 아무래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만약 같은 화경의 고수 둘이 합공하여 검강(劍剛)으로 공격할 때, 제가 검만을 쓴다면 필패할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설명을 듣고 있던 팽현표가, “대협, 그럼 저희 아버님도 같은 경우입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단리유아가, “무공에서 기본적인 실력이 비슷한 경우에는 항상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법칙이 옳게 적용됩니다. 같은 화경(化境)의 고수로 검강을 쓰는 고수가 둘이 공격한다면 당연히 혼자서 싸우는 쪽이 불리하지요. 단지 변수로는 내력(內力)의 대소, 내공심법(內功心法)의 뛰어남, 초식(招式)상의 우수함, 실전(實戰)경험 등이 승부를 좌우합니다. 그 외에 투지(鬪志)와 지구력(持久力) 같은 정신적(精神的)인 요인도 작용하고, 또 운(運)이나 주변의 상황도 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아버님은.....” “도왕(刀王) 어르신은 실전경험이나 다른 것들을 따져봤을 때, 검강(劍剛)을 사용하는 고수가 둘이면 비길 것이고, 셋이면 필패(必敗)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수어검(手御劍)을 사용하는 고수와 부딪힌다면 어르신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길 때 다시 더해서, “수어검(手御劍)의 위력은 사실 별것이 아닙니다. 단지 현경(玄境)으로 가는 깨달음의 한 과정일 뿐, 실제 위력은 별 볼일 없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다른 무공에도 영향을 미쳐서 그 아래의 고수와 차이가 나게 할 뿐입니다. 백 장(丈)밖의 물체를 공격하는 것이 수어검인데, 근본적으로 검기(劍氣)를 둘러싸서 공격하는 것이어서 화경(化境)의 고수만 해도 막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들 어검술(御劍術)로 떨어져서 공격하면 무적이리라 생각하는데, 절정고수도 검기(劍氣)를 형성할 수 있으니 막을 수 있어서 실전에서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그 이하의 고수에게는 그보다 큰 재앙이 따로 없을 테지만. 그러나 심어검(心御劍)에 달한 현경(玄境)의 고수가 어검술을 펼친다면 또 전혀 이야기가 틀려집니다. 일단 검강을 씌워서 날리는 이기어검강(以氣御劍剛)도 문제지만, 마음속으로 위치만 떠올려도 바로 검(劍)이 상대를 공격해 꿰뚫어 버리니 막기란 거의 불가능하지요.” 듣고 있던 팽수표가 끼어들어, “그럼 목어검(目御劍)의 경지의 고수와 싸운다면?” “목어검은 수어검과 심어검의 사이로, 현경(玄境)의 관문에 다다른 상태입니다. 수어검이 검기(劍氣)를 둘러싸서 공격하는데 반해서, 목어검은 보통 거리에 제한이 있지만 이기어검강(以氣御劍剛)을 사용할 수 있으니 상황이 또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화경이하의 고수들에게 재앙입니다. 그러나 같은 화경(化境)의 고수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검술(御劍術)은 현경(玄境)에 진입하기 위한 계단과 같습니다. 비록 심어검 전까지는 크게 위력이 없지만 현경의 관문에 이르는 확실한 단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팽수표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다시 팽현표가, “그러면 단리대협의 검법(劍法)이 그러한 목표를 지향하는 검법이라는 얘기입니까?” “맞습니다. 제 검법은 실전(實戰)보다는 무도(武道)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측면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도(刀)를 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면 도법은 어떻습니까?” “음, 이 도법은 제가 철저하게 실전에 맞게 만든 것입니다. 검법하고는 다르게 접근전이 주공격을 이루지요.” 단리유아가 오년 동안 창안한 무공들 중에서 검법(劍法)과 도법(刀法)을 제외한 나머지 무공들은 그 전에 거의 완성이 되어있었던 무공이었다. 칠 년여 동안 강호행(江湖行)을 하면서, 무영비고(無影秘庫)에서 외었던 비급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몇 가지 무공을 주로 사용했는데, 수많은 싸움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에 맞게 뜯어 고쳤던 것이었다. 비록 그들 대부분이 처음 모습과는 많이 변해서 본모습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순수하게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 무공들을 오년의 수련을 통해서 더 완벽하게 자신에게 맞게끔 수정했었던 것이고, 이에 반해서 검법과 도법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수련 중에 창안한 것이었다. 천애구검(天涯九劍)이 정도의 무공이라고 한다면, 창안한 도법은 마도(魔道)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천애구검은 현경(玄境)을 목표로 만든 것으로, 실전보다는 상승무공의 깨우침을 주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서 도법은 철저한 실전(實戰)위주의 것으로 어떻게 하면 상대를 보다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잔인하게 죽일 것인가가 주목적이었다. 단리유아 역시 이를 창안했지만 그 도법의 위력을 본 후에는 그렇게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이 도법을 완성한 후에 낭야산(狼倻山)역에서 살던 삼백여 마리의 늑대무리에게 시험을 해보았는데, 그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늑대의 시체 중에서 제대로 모습을 유지한 것은 겨우 몇 마리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완전히 조각나거나 온몸에 칼자국이 나서 마치 큰 괴수(怪獸)가 한입에 물고 씹다가 다시 뱉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검법과는 달리 도법은 외우고 있던 무공들이 주축을 이루고 수많은 실전 속에 느꼈었던 것을 보충한 것이었다. 서장(西藏)에서 악마의 현신이라 불렸던 파라구천절도(波羅九天絶刀)와 유령의 움직임이라는 구유수혼도(九幽殊魂刀), 폭풍의 뇌전연환십팔도(雷電連環十八刀) 이 세 가지가 뼈대를 이루고 거기에 강호에서 보았던 도법들과 자신의 생각을 보태어 만든 것이었다.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이라 이름붙인 이 도법은 모두 구 초식까지 있었는데 파라구천절도의 영향으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철저한 살인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뼈대가 되는 세 도법도 강호에서는 도법 중에서 열손가락에 들 정도로 강한 무공들이었는데 그런 세 도법을 합쳐서 만든 것이니, 만약 천애구검을 구 초식까지 익혀서 심어검을 펼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천애구검(天涯九劍)도 실전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도의 모습을 보자는 수강, 수전, 수창의 보챔에 도를 끌러서 보여주면서 한동안 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후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팽대협, 이제 곧 회음현(淮陰縣)인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세요. 처음에는 깃발을 내리고 밤중에 몰래 통과할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흑마보(黑馬堡)의 모습을 보니 저희의 여정(旅程)이 이미 소문이 퍼져서 들키지 않고 빠져나간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팽현표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흠, 그렇군요. 제 생각에도 저희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차라리 깃발을 매달고 대낮에 떳떳이 통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될까요. 그들은 본가(本家)에.....” 걱정스러운 기색의 팽현표에게 단리유아가 무심한 목소리로, “천시루(千屍樓)는 사파 중에서도 마중정(魔中正)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비록 무공의 연성방법이 사악해보이고, 모습 또한 보기 흉해서 사파라 불리지만 어느 곳보다 무도(武道)를 지키는 문파입니다. 저희가 밝은 대낮에 지나가면 시비를 걸어 싸우고자 할 테지만, 저희가 응하지 않는다면 크게 별다른 일이 없이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이전에 천시루(千屍樓)의 고수와도 비무(比武)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아마 저를 본다면 제 얼굴을 보아서라도 그냥 보내줄 것입니다. 그래도 안된다면 저도 싸움에 끼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싸울 수밖에 없겠지요.” 같이 싸워주겠다는 말에 안색이 밝아지는 일행들의 얼굴과 감사의 말을 들으며 저녁을 마쳤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머물다가 내일 새벽에 회음현(淮陰縣)을 바라보고 떠나기로 하고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졌다. [참조 & 설정] [1] 파라구천절도(波羅九天絶刀) : 서장(西藏)의 전설적인 도법으로 소뢰음사(少雷音寺)의 무공이라고 알려져 있음. 오백년 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었는데, 당시 대뢰음사(大雷音寺)에 거의 멸문에 이를 정도의 타격을 주었음. 수비는 일체 없고 오직 공격만이 있으며, 도법에 당한 상처의 모습이 너무 끔찍해서 그 잔인함이 중원에까지 알려졌음. [2] 구유수혼도(九幽殊魂刀) : 원시마교 구유마맥(九幽魔脈)의 최고절기. 부드럽고 은밀한 가운데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도법으로 당하는 순간에도 거의 고통을 느끼지도 못함. [3] 뇌전연환십팔도(雷電連環十八刀) : 원시마교와 동시대의 뇌전도문(雷電刀門)의 도법으로 폭풍처럼 빠르고 연속해서 몰아치는 연환도세가 특징으로 연환도(連環刀)의 최고봉으로 꼽힘. ******* 갑자기 접속자수가 폭발해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입니다. 전 백 명 정도의 조용한 분위기에서 연재를 하고 싶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으니 댓글을 읽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드네요. 한자 문제로 말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입장을 분명히 하지요. 저는 더 이상 이 이하로 한자를 뺄 수는 없습니다. 뻔히 아는 한자라니, 계속해서 같은 한자가 나온다느니 하지만, 제 생각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해주고, 의미를 함축하여 여운을 남기고, 또 반복된 사용으로 강조의 효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후로는 한자문제에는 답변을 하지 않겠습니다. 앞에 무당파가 오파일방에 들어간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장삼봉이 원말기의 인물이니 시대상으로 맞지 않다고 하신 댓글이었습니다. 우선 무당산의 도교건축물이 세워진 것이 당나라 초(기원 후 627-649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본적인 건물은 송대에는 건축이 끝났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에 도교건축물이 있다면 그 이전에 이미 문파가 존재해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또 장삼봉이나 장삼풍진인(중국어로는 두 발음이 같다고 합니다. 중국어를 아시는 분은 댓글로 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을 문파의 시조로 보는데 그 활동시기가 분명치 않습니다. 남북조 시대의 인물이라는 설, 송나라 말기의 인물이라는 설(태극권을 배우신 분은 이 때가 태극권이 퍼진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원나라 말기의 인물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저는 이중에서 남북조 때의 인물로 보고 설정을 한 것입니다. 만일 원말 때의 인물로 본다면 우리나라 무협지의 거의 대부분은 심각한 오류에 빠질 것입니다. 보통 무협지의 시간 설정이 명나라에서 청초인데, [천년 무당이라느니, 천년전 조사이신.....] 이런 말들은 다들 엉터리라는 것이지요. 이상 답글이었습니다. ********* 만금장(萬金莊) 만금장(萬金莊) 2 다음날 새벽에 사양현(泗陽縣)을 출발해서 회음(淮陰)을 바라보고 떠났다. 간혹 천시루(千屍樓)의 배가 보여 긴장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일은 없이 지나갔다. 회음을 지나 보위(寶湋), 비수(沘水), 곽집(郭集), 야백(耶伯)까지 계속 남하하면서 비록 몇몇 수적들이 공격하기도 했지만, 회남(淮南)수채의 공격은 없었다. 이미 흑마보(黑馬堡)의 일이 소문나서 강호에 퍼진 것 같았다. 야백(耶伯)을 지나 양주(楊州)를 바라보고 출발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사양현에서 출반한 날로부터 오일이 지났고 날짜로는 시월 이십삼일이었다. 늦어도 오늘 오후 늦게는 양주에 도착할 것이고, 양주(楊州)에서 남경(南京)까지는 사흘의 시간이면 넉넉하니 팽가를 출발했을 때 예상했던 일정과 비슷한 속도인 것이다. 며칠동안 요상(療傷)한 덕분에 상처는 옆구리에 흉터만 하나 늘었을 뿐, 내상과 외상 모두 완치되었다. 해질 무렵 양주(楊州)에 도착해서 포구에 가까운 우포(遇浦)객잔이라는 이름의 객잔에 여장을 풀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쉬지 못하고 긴장한 채 지내서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쉬었다가 내일 다시 남경을 향해서 출발하기로 했다. 모두가 자리에 둘러앉아서 저녁을 시켜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팽현표가 한숨을 내쉬며, “단리대협, 다행히도 이곳 양주(楊州)까지 흑마보(黑馬堡)의 일을 제외하고는 크게 별다른 일이 없이 무사히 왔군요. 천시루(千屍樓)의 도발이 걱정되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무사히 지나왔지요, 아마 강호에 흑마보(黑馬堡)의 일이 소문이 나서 저희의 배를 건들지 않았나 봅니다. 단리대협의 위명이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팽현표의 찬사에 단리유아가 전혀 동요없이 무심한 어조로, “아닙니다. 모두가 합심해서 노력한 덕분입니다. 제가 무슨 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하하, 겸손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그보다 이제부터 장강(長江)이남지역은 정파가 대부분이니 별다른 일이 없이 사흘이내에 남경까지 도착할 수 있겠군요.” “흠, 그래서 말인데 팽대협. 제가 남경(南京)에 약속한 날이 이달 말입니다. 그런데 남경까지는 천천히 가도 사흘이면 도착할 것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나흘의 시간이 남습니다. 팽가의 여러분도 항주(杭州)에 볼 일이 계시다고 하였으니, 저는 장강을 건너 진강(鎭江)에 내려주시고, 여러분은 계속 운하를 따라 남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리유아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자 팽현표가 잠시 생각하다가, “흠,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실 저희의 일도 그리 급한 것은 아닙니다. 용정차(龍井茶)와 비단 등을 연경(燕京)에 가져가 팔기 위해서 왔고, 또 백화장(百花莊)에 볼 일이 있을 뿐입니다.” 예부터 항주(杭州)는 용정차(龍井茶)와 비단의 사다지부(絲茶之府:비단·차의 주산지)로 유명했고, 강호(江湖)에서는 여인(女人)문파인 백화장(百花莊)이 유명한 곳이었다. 차와 비단을 사서 연경(燕京)에다 판다면, 거란인들과 거래한다는 것이니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며 단리유아가, “이미 양주(楊州)에 왔는데 무슨 큰 일이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강소성(江蘇省)의 장강(長江) 이남지역은 남궁세가(南宮世家), 모산파(茅山派),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세력이 자리 잡은 곳으로 사파(邪派)의 세력은 자그마한 군소세력들에 불과합니다. 예상보다 빨라서 일정에 여유가 있으니 저는 진강(鎭江)에서 내려 걸어가도 시간이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곳까지만 저를 데려다 주시고 가시면 됩니다.” 솔직한 이유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의 기일(忌日)을 전후해서 사흘만 남경성(南京城) 백리 이내로 들어갈 수 있으니, 그 이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사실을 밝힐 수 없으니 달리 이유를 말한 것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하지요. 저희도 급하지는 않지만 빠를수록 좋은 일이니.” 팽현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옆에서 수강, 수전, 수창 삼형제가 떠들며 남경(南京)까지 따라가자고 팽현표를 조르지만, 모두들 듣는 척도 않고, 음식을 음미하는 척 했다.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던 삼형제가 항주(杭州)에는 미인과 아름다운 풍광(風光)이 많으니 실컷 놀 돈을 주겠다고 팽현표가 말하니. 그제야 조용해지며 서로 히히덕거리며 여자에 관해 입방아를 찧는다. 다른 사람들은 음식을 먹으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탁자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삼십대의 도(刀)를 맨 네 명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이번에 갑자기 만금장(萬金莊)에서 고수(高手)들을 모은다니 무슨 일일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는데, 상단을 호위할 보표를 모집한다고 말은 하지만 소문에는 비사방(飛蛇幇)과 한판하려고 고수들을 모은다고 하더군.” 회하(淮河)를 사이에 두고 만금장(萬金莊)과 비사방(飛蛇幇)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세였다. 비사방으로서는 양주(楊州)의 상권을 노리고 예전부터 양주(楊州)에 진입하려고 하였지만, 주변에 정파(正派)의 세력이 강해서 시비를 걸지언정 큰 싸움은 없었다. “최근에 비사방(飛蛇幇)에서 대대적으로 사파의 고수들을 모으는 모양이야. 소문에는 강호십대고수인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도 비사방에 초빙되었다고 알려졌지. 그 외에도 사파의 쟁쟁한 절정고수 들이 모여드는 모양이야.” “흠, 크게 한판 싸움이 일어나겠군요.” “그래, 만금장(萬金莊)이라면 상가에 소속된 보표도 많고, 장내의 위사들과 고수들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상가였던 문파이니 절정고수급은 드물지. 이전까지는 워낙 주변에 쟁쟁한 정파의 세력이 있어서 비사방(飛蛇幇)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었지.” “최근 강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정파는 정파대로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이에 질세라 사파의 인물들도 검마(劍魔) 진일명(陳一命)을 중심으로 연맹을 결성한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정말 강호가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번에 세력 없이 강호를 독행(獨行)하던 혈수마((血手魔)가 비사방(飛蛇幇)에 온 것이 정사대전(正邪大戰)의 시발(始發)이 아닌가 하고 우려하고 있다네.” 단리유아가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지난날 보정부(普政府)에서 형노사(邢老師)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정파에서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하기로 했다는. 역시 생각대로 사파도 연맹(聯盟)을 결성하려는 모양이었다. 누가 처음에 무림맹을 결정하자고 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다간 세외(世外)의 세력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사대전이 먼저 발발할 것 같았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팽현표에게, “팽대협, 듣자하니 팽가도 무림맹(武林盟)에 참여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누가 처음으로 무림맹을 결성하자고 했는지 아십니까?” “글세요. 아버님께서는 무림맹(武林盟)을 창설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하셨는데, 다른 문파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고 마지못해 참여하겠다고 하셨지요. 처음에 무당(武堂)과 공야세가(公冶世家), 모용세가(慕容世家)와 몇 분의 강호명숙(江湖名宿)이 주축이 되어서 무림첩(武林帖)을 돌려 창맹을 요청했을 때 대부분의 명숙(名宿)들도 그리 내켜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무성(武聖)어른과 소림(少林)에서 찬성을 하니, 다른 명숙들도 따라서 창맹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단리유아가 생각에 잠겼다. 무성(武聖)이 무엇 때문에 창맹을 찬성하고 주동적으로 나섰을까? 아무리 세외(世外)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되면 정(正)·사(邪)의 세력싸움이 더욱 심해질 것을 뻔히 알텐데. 혹시 천수검제(千手劍帝)의 얘기대로 백년 전 당시의 음모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번에 정파의 무림맹(武林盟)이 결성되면 맹주(盟主)를 맡을 가능성이 크니 아마도 맹의 행보(行步)가 그의 손안에 좌우될 터인데, 만일 세외(世外)세력과의 결전이전에 사파의 척결(剔抉)부터 내세운다면 정사대전(正邪大戰)이 일어날 텐데. “대협, 단리대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상념에 빠져 부르는 소리에 대꾸하지 않는 단리유아를 팽현표가 소리쳐 불렀다. 단리유아가 생각을 멈추고 팽현표에게,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미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나 봅니다. 그런데 무슨일로....” “창맹에 대한 단리대협의 생각이 어떤지 물어보려고 불렀지요.” 팽현표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음, 저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창맹에 반대합니다. 세외(世外)의 침공을 막기 위해 미리 세력을 모으자는 이유는 좋지만, 그렇다면 사파세력도 참여시켜서 강호 전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정파만 따로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한다면 사파도 연맹을 만들어 대항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강호는 지금보다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휴, 저희 아버님도 그러시더군요. 사파가 연맹(聯盟)을 만든다 해도 처음에는 별일이 없을지 모르지만, 일단 한번 싸움이 시작된다면 전 강호(江湖)가 싸움판이 되어서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을 거라 하셨지요. 아버님께서 반대를 하셨지만, 무성(武聖)어른의 명성과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사파와 약정(約定)을 맺는다면 큰일은 없을 거라는 설득에 다들 찬동했답니다.” 단리유아는 그의 말을 들을수록 무성(武聖)의 의도가 의심이 됐다. 세상에 깨지지 않는 영원한 약속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 사파의 세력인 것처럼 꾸며서 정파의 한 문파를 절몰(切沒)시킨다면, 이에 흥분하여 사파를 공격하자고 하지 않을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위기의식을 느낀다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상대를 공격하자는 선동에 따라가는 것이 군중의 심리인데, 그때 명성이 높은 인물이 찬성하면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식사를 마치고 각기 헤어져서도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때, 객방(客房)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 손님을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요. 어떻게 할까요?” 점소이의 말을 듣고, 손님이라고?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손님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같이 온 일행들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이때, 다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단리대협, 일단 들어가도록 방문(房門)을 열어주십시오. 들어가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요.” 잠시 생각하다가, 허공을 격하여 진기로 방문을 열어주었다. 강호에서는 별별 암수(暗手)가 사용되니 언제나 조심을 해야 했다. 열린 문을 통해서 오십대의 금포(錦袍)의 산반(算班)을 든 오 척 단구(短軀)의 인물이 들어섰다. 뒤로 돌아 문을 닫고는, “처음 뵙겠습니다. 단리대협. 본인은 만금장(萬金莊)의 총관을 맡고 있는 금산반(金算班) 노구일(魯玖鎰)이라 합니다.” 금산반 노구일이라면 유명한 산반(算班)의 고수이자, 장주의 친척으로 만금장(萬金莊)의 총관이 된지 십여 년 동안 만금장(萬金莊)의 대소사를 처리하면서 실수가 없었던 인물로 유명했다. 예를 표하는 그에게 답례를 하며, “금산반(金算班) 노총관이시군요.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저는 만금장(萬金莊)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무심한 목소리와 표정에 당황하는 기색으로, “역시 소문대로군요. 제가 이번에 대협을 찾아뵌 것은 평소 대협의 명성(名聲)을 흠모하던 장주님께서 대협을 청하셨기 때문입니다.” 만금장(萬金莊)의 장주(莊主)인 만금산(萬金山) 노적산(魯積山)은 강호의 거부(巨富)이지만, 그 축재(蓄財)의 방법에 대해 온갖 소문이 무성할 뿐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강호의 평판도 특별히 드러나는 악행(惡行)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적(善積)을 쌓은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또 들어가는 돈은 있지만 나오는 돈은 없어서 수전노(守錢奴)로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단리유아도 그 옛날 무명시절에 양주(楊州)에 온 적이 있어 그의 성격의 한 단면을 본적이 있었다. 마차의 앞길을 막았다는 이유로 수하들이 그 사람을 초죽음이 되도록 패는 것을 웃으며 방관하는 것을. 사실 단리유아가 만금장(萬金莊)의 사람들에게 비무를 요청하지 않고 그냥 양주(楊州)를 떠난 것은 그런 비열(卑劣)한 모습을 본 바가 컸다. 이번에 총관을 불러 단리유아를 초빙한 것은 비사방(飛蛇幇)에 혈수마((血手魔)도찬정(都贊政)이 있음을 알고 나서 양주(楊州)를 지나가는 단리유아의 행적을 알고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그 의도를 어림짐작하고는, “장주님의 초청 말입니까? 저는 장주님을 뵌 적도 없는데, 무슨 일로 본인을 초대한다는 것입니까?” “흠, 흠. 대협의 명성을 흠모하다가 이번에 양주(楊州)를 지나가신다기에 만나서 담론(談論)이라도 나누고자 하신 것이지요.” “죄송하지만, 제가 내일 남경(南京)으로 급히 떠나야 해서 시간이 없습니다. 성의는 고맙게 받겠지만 다음에 뵙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간은 충분하지만 만금산(萬金山)을 만나고 싶지는 않아서, 거절의 뜻을 나타냈다. “시간이 급하시다구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럼, 지금이라도 함께 찾아주실 수는 없습니까? 제가 이렇게 사정하니 꼭 좀 들어주십시오.” 통사정을 하는 그를 보고, “이미 술시(戌時:19-21시)말이 가까워 오는데도 괜찮겠습니까?” “예, 지금 가신다 해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밤 늦게라도 기다리겠다는 말씀이 계셨었으니.” 할 수 없이 일행에게 만금장(萬金莊)에 간다는 말을 전하고 늦어도 내일 오전에는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후에, 금산반(金算班) 노(魯)총관을 따라 길을 나섰다. 문 앞에 대기한 마차를 타고 양주(楊州)성내로 향한지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무렵 북문 근처의 커다란 장원 앞에서 마차가 일단 멈췄다. 대문을 지키던 위사들이 총관의 행차인 것을 알아보고, 보는 것만으로 기를 죽이는 듯한 금빛 기둥 사이의 대문을 열어 지나가게 했다. 다시 한참을 달려서야 마차가 멈추고서 총관이 내리자 뒤따라 내렸다. 노총관의 안내를 받아서 두개의 문을 더 지나서야 커다란 대청(大廳)에 도착했다. 노총관을 따라가며 주변을 바라보니 곳곳에 무기를 지닌 인물들이 경계를 하며 있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은잠(隱潛)한 기척이 느껴졌다. 대청내로 들어가니 육십 대의 풍채(風采)가 돋보이는 노인이 앉아있던 태사의에서 내려와 들어오는 단리유아를 반겼다. 주변에는 이십대 후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뚱뚱한 청년과 삼십대의 창백한 안색의 서생(書生), 검을 허리에 찬 중년의 냉정한 표정의 검사(劍士)가 앉아 있다가 역시 일어나 들어오는 단리유아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오 단리대협. 높은 명성(名聲)에도 불구하고 처음 뵙는구려.” 육십 대의 나이임에도 청년들 못지않게 건장하고 흰머리도 없는 만금산(萬金山) 노적산(魯積山)이 단리유아를 맞이했다. “소생, 단리유아가 노장주님을 뵙습니다.” “정말 반갑소이다. 이렇게 만나다니. 본 장주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하오. 하하하”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소생을 보자고 하셨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단리유아의 무심한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흠, 우선 자리에 앉고 다과라도 나누며 이야기하지요.” 슬쩍 말을 돌리고 주변의 인물들을 소개 시킨다. “단리대협, 여기 이 아이가 내 자식으로 소금산(小金山) 노천추(魯千秋)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본장의 일을 돕고 계시는 분들로 강호(江湖)에서는 냉면수사(冷面修士)와 비홍쾌검(飛虹快劍)이라 불리는 분들이시지요.” 냉면수사(冷面修士) 여민(呂珉)은 한 자루 척(尺)을 잘 쓰는 고수로 강호(江湖)에서 냉정한 손속으로 유명한 고수이고, 비홍쾌검(飛虹快劍) 남가호(南可浩)는 비홍검법(飛虹劍法)를 대성한 고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각기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만금장(萬金莊) 만금장(萬金莊) 3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만금산(萬金山) 노적산(魯積山)이 헛기침과 함께 말을 꺼낸다. “흠, 단리대협, 이번에 흑마보(黑馬堡)와 싸워서 도적 무리를 일소했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나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습니다.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 만금장(萬金莊)도 매번 운하를 지나면서 흑마보(黑馬堡)와 여러 수적(水賊)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지요. 이번 일을 듣고 나서 도적들도 깜짝 놀라 간담이 오그라들었을 것입니다.” 한동안 다른 사람들의 찬사에 답하는 시간이 지났을 때, 만금산(萬金山)노(魯)장주가, “단리대협, 이번에 남경(南京)을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급한 볼일로 내일 오전에는 떠나야 합니다.” 그들의 속셈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을 둘러댔다. “그러시군요. 그럼 언제쯤이면 남경의 일이 끝나겠습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다음달 초순 정도가 돼야 할 것입니다.” 약간 곤혹스런 표정으로 만금산(萬金山)노(魯)장주가, “단리대협, 시일(時日)을 더 당겨서 일을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빨라야 십일월 닷새가 지나야 할 것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깨어나며 만금산(萬金山) 노(魯)장주가, “그러면, 십일월 닷새 이후에도 특별히 할 일이 계십니까?” “아직 예정한 일은 없습니다. 단지 남하하면서 고수를 찾아 비무(比武)를 할 생각입니다.” 안색이 밝아지며, “그럼, 남경(南京)에 갔다가 본 장(莊)에 오셔서 저희를 조금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요. 남하하면서 중원(中原)남서부를 통해서 세외(世外)로 나가서 세상을 둘러볼 생각입니다만, 만금장(萬金莊)에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싸움밖에 모르는 일개 무부(武夫)일 뿐입니다.” 손을 휘저으며,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일개 무부라니요? 강호(江湖)의 누가 전광(戰狂) 단리대협의 명성을 모르고, 또 그 위명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흠, 단리대협, 최근의 소문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요즘 약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회하(淮河) 건너 비사방(飛蛇幇)이 사파의 고수들을 모으고 본장(本莊)을 공격하려는 기미가 엿보이고 있습니다.” “음, 저도 소문은 들었지만, 주변의 남궁세가(南宮世家)나 모용세가(慕容世家), 모산파(茅山派)에는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습니까?” 한숨을 내쉬면서, 만금산(萬金山) 노(魯)장주가, “휴, 물론 도움을 청했었지요. 그러나 다들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이 이번 일에 끼어들었다는 소문을 듣자 모두 온갖 핑계를 대며 발을 빼더군요.” 하긴 남궁세가(南宮世家)나 모용세가(慕容世家), 모산파(茅山派)가 정파의 세력으로서 강성하지만, 강호십대고수(江湖十大高手)의 일인인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을 상대할 만한 고수는 없었다. 비록 모용세가의 가주인 호소대협(湖蘇大俠) 모용손사(慕容遜嗣)가 최근에 화경(化境)에 다다랐다고 하지만, 평생을 강호를 전전하며 혈해(血海) 속을 뒹군 혈수마 도찬정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협, 이번에 본장을 도와 저 간악한 비사방(飛蛇幇)을 물리치는데 함께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대협이 승낙한 한다면 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드리리다. 설혹 재산의 절반을 달라고 할지라도.”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이들이 놀라는데, 특히나 소금산(小金山) 노천추(魯千秋)가, “아버님, 아무리 급하다 해도 그렇지 재산의 반을 내놓으시겠다니요. 저런 자를 위해.....” 사실 소금산(小金山) 노천추(魯千秋)는 처음부터 단리유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자신보다도 어려보이고, 소문에 듣던 십대고수(十大高手)의 위명에도 불구하고 그 풍모(風貌)가 시원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장주인 아버지 만금산(萬金山)노적산(魯積山)이 계속 저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데에도 무표정하게 앉아서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을 끊어서 대답히니 더 더욱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들 조용히 해라. 내가 단리대협하고 대화하는데 무슨 말 참견이냐? 그리고 혈수마(血手魔)도찬정(都贊政)을 막지 못한다면,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다한 들 무슨 소용이냐? 사람이 우선 살고 보아야지. 단리대협, 아들이 무례하게 군것에 사과를 드리지요. 제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웠더니 버릇이 없습니다.” 비록 그 됨됨이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 배포는 알아줄만 한 것 같았다. 자신의 재산의 절반이라면 한 성(城)을 통째로 살만한 재물일 텐데 그런 재물을 내놓겠다고 하다니. 그러나 솔직히 그를 도와서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과는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실 재물이라는 것은 단리유아에게는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 무영비고(無影秘庫)에도 비록 금은보화는 없지만 수많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고서화(古書畵)와 신병이기(神兵異器)들이 있었다. 어쩌다 들려서 노자로 쓰기 위해 고서화 한두 개를 꺼내어 가져간 것을 빼고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었다. 또 만금산(萬金山)노적산(魯積山)이 재물을 모은 방법이 정당하지 못한 것도 단리유아가 만금장(萬金莊)을 대신해 싸우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과의 싸움이 기대되기도 했다. 단리유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싸움을 했다고 알려진 혈수마는 강호에 나선지 삼십여 년 동안 무패(無敗)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혈수마의 독문무공인 혈광마인장(血光魔印掌)과 광염혈류마공(狂炎血流魔功)은 강호일절의 무예로 알려져 있었다. 만일 혈수마(血手魔)와 싸운다면 비무는 되지 못할 것이고, 생사(生死)의 대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또 자신의 도법을 시험해볼 최고의 상대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만금장(萬金莊)을 대신해서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한 쪽에서 듣고 있던 냉면수사(冷面修士) 여민(呂珉)이, “흥, 단리대협은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사람으로 내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혈수마(血手魔)의 위명에 겁을 먹은 모양이구려.” 만금산(萬金山) 노장주가 말로는 말리는 척 하지만, 은근히 냉면수사를 감싸며 단리유아를 부추기는 듯한 말을 한다. “여보게, 여수사(呂修士). 단리대협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설마하니 단리대협이 혈수마(血手魔)를 두려워 싸우려 하지 않겠는가?” “흥. 저 역시도 여대협과 생각이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홍쾌검(飛虹快劍) 남가호(南可浩) 역시 냉면수사의 말에 동조하면서 단리유아를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한다. “허허, 이사람 들이 왜 이러나. 아직 단리대협의 말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서 사과들 하게. 자네들보다 훨씬 명성이 드높은 십대고수의 일인이신 분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가?” 뻔히 드러나 보이는 그들의 수작에도 가만히 있다가, “저는 결코 만금장(萬金莊)을 대표해서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과는 따로 싸우고 싶습니다. 만일 별다른 일이 없다면, 십일월 초순에 비사방(飛蛇幇)으로 혈수마를 찾아가서 싸울 것입니다.” 고저가 없이 무심한 단리유아의 말에 잠깐 눈썹을 찌푸리다가, “하하하, 역시나 전광(戰狂) 단리대협이시군요. 저 역시도 대협께서 외면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여보게들, 어서 아까 했던 말을 사과드리게. 이렇게 단리대협께서 혈수마(血手魔)를 찾아가겠다고 하지 않는가?” 마지못해 사과를 하는 그들의 말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에 냉면수사(冷面修士)와 비홍쾌검(飛虹快劍)이 눈살을 찌푸리고 화난 표정으로 말을 하려는 순간, “단리대협, 혹시 본장에서 필요한 것이 없습니까? 내 대협께서 필요한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드리리다.” 만금산(萬金山)노적산(魯積山)이 끼어들어 말하는 소리에 그들의 말문이 닫혔다. “아닙니다. 제가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혹 더 하실 말이라도 계십니까?” “단리대협. 정말 필요한 것이 없으십니까? 혹시 돈이나 여인이 필요하다면 말씀만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밤도 깊었는데 오늘은 본장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떠나시지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객잔에서 일행들도 기다릴 테니 늦더라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이렇게 난감할 때가. 이렇게 보내고는 싶지 않았는데 일행이 기다린다니 할 수 없구료. 그럼 다음에 다시 긴한 시간을 갖도록 하지요.” 자리에서 이러나 서로 포권하며 작별하려는 순간에 비홍쾌검(飛虹快劍)이, “단리대협, 듣자하니 대협은 언제나 고수를 찾아가서 비무를 한다고 하시던데, 비록 밤이 깊었지만 본인과 검을 섞어볼 의향은 없으신지요.” 아까부터 못마땅했던 모양인지 단리유아에게 비무를 요청한다. 옆에서 만금산(萬金山) 노적산(魯積山)이 말리는 척하지만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저도 비홍검법(飛虹劍法)의 명성을 들어보았는데 오늘에야 마주할 기회가 왔으니, 저 역시도 바라마지 않습니다.” 모두가 대청에서 나가서 대청 앞 십여 장의 공터로 향했다. 근처에서 경계를 서던 위사들을 한쪽으로 물린 다음 장내를 치워서 임시로 비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만금산(萬金山)과 소금산(小金山), 냉면수사(冷面修士)는 대청 앞에 서서 장내를 주시하고 공터의 중앙에는 두 사람이 삼 장(丈)의 간격을 벌리고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다. 서로 검을 빼들어 예를 표하고 나서 비홍쾌검(飛虹快劍)이 먼저 선공에 들었다. “비홍관일(飛虹貫日)” 하늘에 걸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러 가르듯이 검광(劍光)이 충천하며 한 줄기 검기(劍氣)가 단리유아를 노리며 달려든다. 목 줄기를 노리는 검을 피해서 좌로 삼보 전진하면서 상대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어 공격한다. “처처무광(凄凄舞狂)” 산동성(山東省) 서부의 패자(覇者)인 광풍방(狂風幇)의 독문 검초로 미친 듯이 퍼부어지는 수많은 검광(劍光) 속에 하나의 진검이 숨겨져 있는 공격이었다. 수십 줄기의 검광이 비홍쾌검(飛虹快劍)의 상반신을 노리고 다려든다. 이에 놀란 비홍쾌검이 자신의 왼쪽으로 물러나며, “비홍산광(飛虹散光)” 수많은 검광(劍光)이 일어나며 단리유아의 검을 막았다. “챙! 채챙!” 여기에서 계속 몰아 부친다면 비홍쾌검(飛虹快劍)은 몇 수 이내로 졌다고 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제 절정에 불과한 비홍쾌검은 단리유아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단리유아의 목적은 단순한 승패(勝敗)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비홍검법(飛虹劍法)을 계속 상대하며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일단 뒤로 한발 물러나며 다시 상대가 공격하기를 기다린다. 단리유아가 사정을 봐준 것을 알고 얼굴을 찌푸리며, “파풍섬홍(破風閃虹)” 수십 줄기의 검광(劍光)이 단리유아의 상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차천폐광(遮天閉光)” 지금은 사라진 한수검문(寒愁劍門)의 일초로 철저한 방어초식으로 유명한 것이었다. 수많은 검광(劍光)이 일어나 다가오는 검광을 가로막는다. “챙! 채챙! 챙!” 검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검광(劍光)이 사방에 번뜩여 어두운 밤하늘을 밝힌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검광(劍光)과 검기(劍氣)가 사방에 번뜩일 뿐, 싸우는 사람들의 신형(身形)은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단리유아는 몇 번이나 되풀이되는 공격에 상대 검법(劍法)의 대부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총 십삼 초(招)의 공격으로 새롭게 배울만한 것은 아홉 번째 초식으로 상중하 각기 세 곳씩 세 번을 잇달아 펼치며 다시 세 번 변환하며 공격하는 초식뿐이었다. 다른 초식들은 대체로 기타의 여러 검법과 특별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비홍쾌검(飛虹快劍)은 도저히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단리유아의 공격에 이미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느꼈지만 오기로서 자신이 초식을 몇 번이나 다 펼쳤어도, 상대는 거의 공격도 하지 않은 채 막기만 할 뿐이었다. 여러 번 자신의 빈틈을 공격할 수 있는 순간에도 단리유아가 물러서며 기다리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의 대결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그제야 단리유아의 명성이 거짓이 아니고 자신 정도의 고수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뒤로 물러나 공격을 멈추었다. 싸움이 끝나고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니, 단리유아는 옷자락이 몇 군데 잘리었을 뿐 그리 숨도 차지 않은 평시의 고요한 모습이었고, 비홍쾌검(飛虹快劍)은 비록 큰 상처는 없었지만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자락은 여기저기 사방이 잘리어 속살이 보일 정도였고 숨이 가빠져 한참을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이윽고 호흡을 가라앉히고, “단리대협, 비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인이 졌음을 시인합니다.” 비홍쾌검(飛虹快劍)의 말에 단리유아가 답하여 무심하게, “아닙니다. 서로가 아무런 상처가 없는데 비긴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비홍검법(飛虹劍法)을 견식(見識)할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대청 앞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가와 단리유아의 무공에 찬사를 표한다. 그들의 말을 뒤로 하고 다시 마차를 타고 객잔으로 떠났다. 떠나는 단리유아를 보고 소금산(小金山) 노천추(魯千秋)가, “아버님, 직접 그의 무공을 보니 정말 놀랍군요. 어떻게 평상시에는 기도(氣度)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키만 큰 볼품없는 인물로 보였는데 싸울 때에는 완전히 달라지는 군요. 정말 저희 같은 사람은 상대가 되지 않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미 단리유아의 무공에 감복한 비홍쾌검(飛虹快劍)이, “소장주님 말이 맞습니다. 역시 강호(江湖)의 소문이 틀림없군요. 비록 그 모습은 볼품없지만 진정한 고수는 드러나지 않다는 말이 맞는 것 갔습니다.” “그래, 자네의 말이 맞네. 왕왕 소문이 부풀려지기도 하지만, 괜히 강호십대고수(江湖十大高手)의 일인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지. 정말 그런 실력이 되니 그런 것이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며 단리유아를 생각하고 있을 때, 냉면수사(冷面修士) 여민(呂珉)이, “장주님, 혹시 저 싸움꾼이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과 싸우지 않고 그냥 가버리지는 않을까요? 잘못되어 그가 싸우지 않으면 저희는 모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을텐데.” “하하하,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나? 그는 싸우고 싶지 않아도 싸우게 될걸세. 이미 자신의 입으로 싸우겠다고 했으니 우리는 판을 크게 벌리기만 하면되네. 내일 당장 강호에 전광(戰狂)이 혈수마(血手魔)한테 도전하겠다고 소문을 내면, 그는 절대로 피하지 못하고 싸울 수밖에 없을테고 우리는 그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을거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비홍쾌검(飛虹快劍)이, “장주님,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자신이 싸우겠다고 하는데, 괜히 본장이 나서서 일을 소문낼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러다 본장에 악감정이라도 생기면 좋지 않을텐데요.” “자네 말도 일견 타당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확실한 보장이 필요하네. 혹시라도 그가 싸우지 않는다면 어쩔텐가? 차라리 욕 좀 먹고, 앙심(怏心)을 품게 되더라도 확실한 것이 좋지.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도 우리 역시 다른 고수들도 더 영입해야 할 것일세. 상대가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만 있는 것이 아니니, 이번에 일이 잘되면 오히려 저 꼴 보기 싫은 뱀새끼들을 없애버릴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니. 하하하” 서로 마주보며 대소(大笑)를 터뜨리며 기뻐한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자정을 지난 밤하늘에 울려 퍼질 때, 단리유아는 마차를 타고 가며 비홍검법(飛虹劍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남궁세가(南宮世家) 남궁세가(南宮世家) 만금장(萬金莊)을 나와 객잔에 돌아온 다음날, 일행과 함께 진강(鎭江)을 향해 출발했다. 해가 중천에 걸린 정오를 지나고 미시(未時:13-15시)말 진강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일행과 작별하여 팽가의 인물들은 항주(杭州)를 바라보고 떠났다.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돌려서 배에 오르는, 그들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진강부(鎭江府)내를 향해서 발길을 돌렸다. 사일 동안 객잔에서 휴식을 취하며, 그동안의 비무했던 일과 비홍쾌검(飛虹快劍)과의 비무 중에 얻은 초식들을 연구하면서 보냈다. 시월 이십구일, 기일(忌日)이 다음날이라 남경(南京)을 향해 출발했다. 오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머니의 묘소(墓所)를 찾아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점심은 용담현(龍潭縣)에서 해결하고 계속 걸으니, 해가지는 무렵 남경(南京)의 성곽이 멀리 보이는 자금산(紫金山)에 들어섰다. 자금산과 대홍산(大紅山)을 지나서, 다섯 개의 섬이 다리로 누각(樓閣)과 정자(亭子)가 연결된 현무호(玄武湖)를 끼고 북쪽으로 향한 지 반 시진(時辰)여 중앙문을 통해서 남경의 북부지역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이곳에서 지내고 다음날 날이 밝으면 어머니의 묘소에 들리기로 하고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저녁을 시키고 점소이에게 내일 아침에 쓸 수 있게 몇 가지 제사에 쓸 음식을 부탁했다. 어머니가 묻힌 곳은 성밖 대홍산(大紅山)을 지나 강변의 막부산(幕府山)에 있었다. 원래의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선산(先山)은 대홍산의 옆에 이어진 석정산(石頂山)이었지만 첩(妾)의 신분으로는 그곳에 묻힐 수가 없었다. 막부산(幕府山)은 나지막한 야산으로 숲이 우거져 있을 뿐, 강변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볼 것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산이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길 반 시진, 산 중턱 숲 속에 반경 삼장(丈)여의 자그마한 공터가 나타났고, 중앙에는 자그마한 비석도 없는 무덤이 있었다. 이곳이 어머니의 묘소로 오년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뜯겨나간 떼도 없었고 허물어진 부분도 없었다. 그동안 누군가 돌보아 왔는지 풀들도 적당히 잘려나가 제초하기 위해 가지고온 낫이 별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누가 왔을까? 남궁세가(南宮世家)에서 이곳에 올 일이라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날 자신이 떠날 때에도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단지 작은 할아버지만 배웅을 해 주었을 뿐이다. 그분도 자신이 강호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큰어머니, 형과 동생들은 자신을 짐승 보듯이 했을 뿐, 한번도 자식으로, 형제로 대해 주지 않았었다. 가문(家門)의 부흥을 위해서만 전력을 쏟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어머니가 볼품없는 시골처녀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큰어머니의 질투도 있었다지만 자신 때문에 일생을 망쳐버린 어머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십여 년 전, 단리유아의 아버지였던 남궁유수(南宮柔琇)는 당시 처가였던 화산파(華山派)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그러다 남경(南京)에서 백 여리 떨어진 장강 건너 맞은편 강포현(江浦縣)에 다다랐을 때, 강호(江湖)의 요녀인 삼음요희(三陰妖姬)와 싸우다 음약(淫藥)에 중독되게 되었다. 다행히 삼음요희는 죽일 수 있었지만, 이미 음약의 약효가 골수에 미친 남궁유수(南宮柔琇)는 가까운 산에 나물을 캐러온 평범한 시골처녀였던 단리유아의 어머니인 단리화(段俚花)를 범하게 되었다. 나중에야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다가 신물(信物)로 옥패를 건네주고 길을 떠났다. 그의 생각으로는 평범한 시골처녀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건을 잊고 평범한 어부와 결혼하여 살아갈 것이라고 여겨, 옥패는 단지 생활에 도움이 되라고 준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조부와 단둘이 외롭게 살던 단리화(段俚花)는 임신한 것을 알고는 조부를 설득해서 같이 남궁세가(南宮世家)를 찾아오게 되었다. 당시 결혼한 지 몇 년이 안됀 신혼이었던 남궁유수(南宮柔琇)는 남궁세가를 찾아온 단리화를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옥패를 보이며 책임을 요구하는 단리화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후실(後室)로 받아 들였지만 결코 단리화(段俚花)에게 정(情)을 느끼지는 못했다. 단 한번의 정사(情事)에 임신을 하다니 그의 생각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기거하게 하다가 태어난 아이를 봐서 남궁가문 혈통(血統)의 특징이 없으면 다시 쫓아낼 생각이었다. 단리유아를 임신했을 때, 화산(華山)파 장문인의 딸이자 대부인이었던 매화선자(梅花仙子) 이옥심(李玉心)이 보약이라고 준 약을 먹게 되었는데, 그 약속에는 독약의 일종인 갈홍산(蝎紅散)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낙태는 되지 않았지만 태어난 아이는 정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신에 울긋불긋한 반점(斑點)이 돋아난 흉측한 모습으로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만일 임신 전에 단리화가 백년리어(百年鯉魚)의 피를 마신 적이 없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다행히 혈통의 특징이 있어서 쫓겨나게 되지는 않았지만, 단리화(段俚花)에게는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자신의 인생(人生)을 망쳐 놓고도 책임을 지지 않고 한번도 부부의 정을 같이하지 않는 남궁유수와 웃으며 다정하게 대하다가 독약을 보낸 이옥심, 흉측하게 태어난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서서히 미쳐갔다. 태어난 자식을 보면 누군가 독(毒)을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조사 할 수도 있었지만 무정(無情)한 남편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단리유아가 본 것이라곤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 울다 웃고, 괴성을 지르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당시 태어날 때부터 단리유아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천재(天才)였다. 두 살이 되기 전에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된 후부터, 그는 가족들과는 거의 말도 없이 서고(書庫)에서 홀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단리유아의 천재성을 아는 이는 그때 돌보아준 작은 할아버지 뿐이었다. 대강의 사정을 어머니의 광기(狂氣)어린 외침과 하인들의 수군거림으로 알아낸 단리유아가 세상에 정을 줄 수 있는 대상은 자식도 알아보는 경우가 드문 미쳐버린 어머니 하나에 불과했다. 어머니의 죽음 후, 아무도 반기지 않은 가문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아홉 살에 불과했다. 무덤주위를 돌아보며, 잡초를 뽑고 길게 자란 풀들을 잘라낸 후에, 준비해온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했다. 잠시 후 무덤 옆에 누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아 쾌청했고 바람에 실린 쌀쌀함은 초겨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마다 오기는 어려웠지만, 늘 그랬듯이 오늘은 여기 어머니의 곁에서 잠을 잘 것이다. 따뜻한 햇살과 불어오는 미풍에 담긴 초목의 향기가 마치 어머니의 품속에 들어 그 향취(香臭)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한동안 그 정취(情趣)에 빠져 설핏 잠에 빠져든 지 얼마나 되었을까? 주위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일어났다. 주위로 다가온 사람들은 이십대 전후의 젊은 남자 둘과 소녀, 호위로 보이는 네 명의 중년대한 들이었다. 호위들의 가슴에 새겨진 남궁(南宮)이라는 글자를 보니 남궁세가(南宮世家)에서 나온 것 같았다. 남궁세가(南宮世家). 칠대세가(七大世家)의 하나로 강소성(江蘇省) 남경일대의 패자(覇者)로 강호에 이름을 알린지 삼백여년이 넘었다.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위치는 남경성내의 서편에 있는 청량산(淸凉山)을 뒤로 하고 성밖으로 막수호(莫愁湖)가 바라보이는 곳에 있었다. 다른 칠대세가와 비슷하게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혼란기에 생성된 남궁세가는 본래 섬서성(陝西省)에 위치했었는데,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다시 남하해서 지금의 위치에 세가를 세웠었다. 그 후 점점 세력이 커지고 무공 또한 발전하면서 강호의 칠대세가의 하나가 된 것은 당(唐)초엽 무렵이었다. 계속 성세가 이어지다가 백년 전 혈수미교(血修彌敎)의 침공에 맞서 중원의 고수들을 이끈 검절(劍絶) 남궁고(南宮孤)가 등장할 무렵에는 칠대세가의 수위를 다툴 정도로 세력이 강해졌었다. 그러나 검절이 가문의 정예와 함께 실종된 후부터 본의 아니게 봉문을 하면서 세력을 만회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당시 그들의 실종으로 고수들의 수가 태부족인 것도 문제였지만, 가문의 절기 대다수가 불완전하게만 남아 있는 것이 더욱 큰 타격이었다. 익힐 사람도 부족한데다 남아있는 무공도 불완전해서 절기를 복구하기 위해 백여 년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벽하게 복구하지 못했다. 거의 백여 년의 노력 끝에야 다소 성세를 회복하여 강호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 십여 년 사이에 불과했다. 다가오는 세 명의 인물이 무덤 옆의 단리유아를 바라보고 멈춰 섰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청년은 이십대 중반으로 단아한 얼굴로 육척의 키와 허리춤에 검을 차고 청의(靑衣)를 입은 모습이었고, 백의(白衣)를 입은 이십대 초반의 청년의 키는 육척이 못되어 보이지만 여자보다 곱상한 얼굴을 가진 미남자였다. 여인은 십대 후반의 아름다운 미녀로써 취의(翠衣)경장을 하고 등 뒤에는 비파(琵琶)를 매고 있었다. 백의의 청년이 나서며, “그대는 누구요? 여기는 본가(本家)의 인물이 묻힌 곳인데.” 그들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들을 알아보았었다. 청의의 청년은 자신보다 두 살이 더 많은 이복형인 남궁천상(南宮天霜)이었고, 백의의 청년이 나이는 같지만 생일이 자신보다 늦는 남궁현상(南宮玄霜)이며, 그 어머니를 쏙 빼닮은 듯한 취의 경장의 미인은 남궁옥상(南宮玉霜)으로 형제 중에서 막내였다. 그 옛날 가장 자신을 가장 괴롭힌 사람은 바로 눈앞의 남궁현상이었고, 남궁천상은 직접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멸시(蔑視)의 눈길을 던지며 무시했었다. 아직 어렸던 남궁옥상은 괴물이라며 울며 놀라 도망가기 일쑤였다. “이봐.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혹시 벙어리냐?” 뜻밖에 그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묻는 남궁현상(南宮玄霜)의 말에, “아니요. 그러는 그대들은 누구요?” “뭐? 내가 먼저 물었으니 자신의 신분부터 밝혀야 할 것 아니야?” 남궁현상(南宮玄霜)은 이곳에 오는 것이 정말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싫어하던 괴물(怪物)같은 이복형의 미친 어머니의 무덤으로 비록 아버지의 유명(遺命)으로 이곳에 삼년 째 오고 있지만 결코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키만 훌쩍 크지 볼품없고 초라한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니 더욱 울화가 치밀어 화풀이의 대상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이때 옆에서 무덤을 둘러보다가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남궁천상(南宮天霜)이 남궁현상을 잡아끌어 물러나게 한 후에, “혹시, 한상(寒霜) 아우가 아니냐? 몇 년간 아무도 찾지 않아서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그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의 흉측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는 그에게 비록 초라하지만 현재의 단리유아의 모습은 천지차이로 도저히 그 옛날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남궁천상의 말에 모두가 놀라서 경악에 찬 얼굴로 뚫어져라 단리유아를 쳐다본다. 그들도 단리유아의 모습에서 옛날의 괴물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서 놀라고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남궁가(南宮家)의 사람이 아니요. 그러니 그런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시오.” 무표정한 얼굴로 고요한 목소리로 말하는 단리유아의 대답에, “아니, 정말 아우였다는 말인가?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언제부터 그들이 자신을 형제로 생각했다는 말인가? 한 번도 형, 동생으로 불러본 적도 없었으면서, 다시 그들에게 고개를 저으며, “나는 당신들의 형, 동생이 아니요. 단지 단리가(段俚家)의 사람일 뿐이니,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시오.” 단리유아의 변함없는 태도와 무심한 목소리에 남궁천상(南宮天霜)이 약간 무안한 표정일 때, 옆에 있던 남궁현상(南宮玄霜)이, “뭐라고? 아니 그게 큰형에게 할 소리야? 아무리 어린시절에 헤어졌다고 해도 엄연한 한 핏줄인데?” 대답이 없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더욱 흥분해서 소리치는 그를 양쪽에서 말린다. 잠시 후에, “그래, 좋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하지만 천륜(天倫)이란 거부한다고 마음대로 끊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그래도 네가 무사하니 반갑구나. 그래 지금 이름은 뭐냐? 그동안 어떻게 지냈고?” “단리유아라 하오.” 짧게 말하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단리유아? 혹시 전광(戰狂) 단리유아(段俚唯我)?” “뭐, 전광” “뭐라고요. 큰 오라버니. 전광이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단리유아를 보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특히 남궁현상은 눈앞의 볼품없는 모습의 단리유아가 전광(戰狂)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의 그 허약하고 흉측한 모습의 사람이 십여 년 만에 십대고수(十大高手)의 일인이 되어 자신 앞에 나타났으니. 놀라는 그들에게 무심한 어조로,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이요? 여기는 남궁세가(南宮世家)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인데?” 계속해서 전혀 동요 없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약간 당황하며 남궁천상(南宮天霜)이, “흠, 그래도 자네 어머님이고 아버님의 이부인(二婦人)이 되지 않은가? 우리에게도 어머니가 된다고 할 수 있지.” 언제부터 이부인(二婦人)이었고 어머니였다는 말인가? 미친년이라 부를 때는 언제고. 그의 뻔뻔스러운 대답을 듣고 나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시오. 그게 더 고인(故人)을 위하는 것일 테니. 그렇지 않다면 다음에는 어머니의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移葬)하겠소.” “흠. 그것은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네. 아버님의 유명(遺命)이니. 참 아버님이 돌아가신 소식은 들어보았느냐?” 이제 오십대의 한창일 나이인데 죽었단 말인가? 물어볼 말도 있었는데? 아버지의 죽음에 슬픔보다는 더 이상 어머니와 자신에게 대한 처사를 물어보지 못한다는 답답함만이 가슴에 차있었다. “언제 돌아가신 것이요?” 무심한 단리유아의 목소리에 한쪽에서 보고 있던 남궁옥상(南宮玉霜)이 소리친다. “둘째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도 슬프지도 않나요?” “슬픔이라, 그가 내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단지 피를 주어 태어나게 한 것뿐.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한번이라도 다한 적이 있느냐?” 단리유아의 무정(無情)한 말에 울먹이며,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인데.....” 그들 세 형제에게는 좋은 아버지이고 훌륭한 가장이었을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결코 남남보다 못한 사이였을 뿐이었다. “그만해라. 그래, 지난날 너와 너의 어머니에게 행한 일은 우리 모두 잘못했었다는 것을 안다. 어머니도 요즘에 후회(後悔)하고 계시지. 그래도 아버지인데 묘소에 들려 절이라도 드리지 않겠느냐?” 후회?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회한(悔恨)에 잠긴다고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할 수가 있는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怨望)도, 지난날의 고통(苦痛)도, 어머니의 울부짖는 원성(怨聲)도 이제는 먼 과거의 일처럼 희미해져 갈뿐이다. 단지 다시는 그들을 보고 싶지는 않을 뿐.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럴 생각은 없소. 나는 이제 남궁가(南宮家)의 사람이 아니니 더 이상 당신들과도 엮이고 싶지 않소. 오늘은 그냥 넘길 테지만, 다음부터는 이곳을 찾아오지 마시오.” 한줌 동요도 없이 고요한 목소리로 말하는 단리유아를 보고, “휴, 넌 정말 많이 변했구나. 어렸을 적에는 비록 말이 없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 하여간에 너에게 말은 해야겠구나. 아버지는 삼년 전에 주화입마(走火入魔)하여서 돌아가셨지. 선산에 모셨으니 너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가주(家主)가 되었단다. 생각이 바뀌면 본가로 찾아오도록 하고, 나중에라도 강호(江湖)에서 만나면 아는 척이라도 하자꾸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요. 앞으로도 우리는 남남으로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요. 이것은 어머니의 유언이니.” 단리유아의 단호하고 무정한 말에 고개를 저으며, “휴, 알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겠지. 시간이 흐른다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 잠시 후 남궁천상(南宮天霜)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남궁현상은 있는 대로 욕을 하며 뒤따라갔고, 남궁옥상은 단리유아에게 전음을 보낸 후에 역시 따라 내려갔다. “둘째 오라버니, 그래도 저는 다시 만나면 오라버니로 부를 거예요. 알았죠?” 저 아이는 너무 어려 주변상황을 모르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에도 심성이 착했다. 비록 나의 모습에 무서워 하기는 했지만 겁이 많고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리석은 아버지. 가문의 절기(絶技)를 복구하고자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 자신의 재능은 너무나 부족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남궁가 최고의 절기인 제왕삼검(帝王三劍)을 복구하고자 했겠지만 무리한 시도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이르게 하였을 것이다. 오래전에 불완전하게 남아있던 무공들을 작은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어서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가 나의 재능을 알고는 아버지를 여러 차례 설득하였지만 끝끝내 아버지는 작은 할아버지를 믿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우리 모자(母子)를 받아드린 후부터였을 것이다. 할 수없이 나에게 무공구결(武功口訣)을 가르쳐주고, 비록 시일이 흐른 후에라도 복구해서 가문(家門)에 전해주도록 부탁했었다. 이미 오래전에 모두 복구하고 더 상승(上乘)의 무학으로 고쳐 놨었지만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전해줄 기회를 찾을 수 없었다. 어수선한 장내가 다시 조용해지자 무덤 곁에 눈을 감고 과거의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그 옛날 어머니의 임종(臨終)시의 모습에....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 1 다음날 아침, 얼굴에 닿는 찬 서리의 차가움에 눈을 뜨고 일어났다. 잠시 무덤 앞에서 몸을 풀다가, 주위를 돌며 몇 개의 바위와 나무를 옮겨와서 기문진(奇門陣)을 펼쳐놓았다. 천문환상미로진(千門幻想迷路陣)으로 희미한 안개가 일어나 주위를 가리고, 환상으로 수목(樹木)을 나타나게 해서 원래의 목적했던 곳을 찾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비록 공격적인 면은 없으나 진법(陣法)의 대가라 할지라도 진법이 펼쳐진 것을 알아보기 힘들어서 풀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수많은 미로 중에서 오직 한 곳만이 무덤을 향해서 열린 곳으로 다른 길은 그저 주변의 상황과 같아서 무덤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진법(陣法)을 펼쳐 놓았으니 그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또 설사 진법이 펼쳐진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진심으로 성묘(省墓)를 오는 것이 아닌 이상 얼마 안가서 단념하게 될 것이고, 설혹 진법(陣法)의 대가를 초빙한다 해도 이미 오래전 실전된 진법이어서 그 원리를 모른다면 십년이 되어도 풀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세외(世外)로 나가서 어머니의 묘소를 찾지 못할 것이기에, 다른 사람과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진법을 펼쳐 차단한 것이었다. 진법(陣法)을 펼친 후에 다시 무덤 옆에 앉아 잠시 쉬면서 상념에 잠겼다. 오시(午時:11-13시)가 가까워 해가 중천을 향하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일어나 무덤을 한바퀴 돌아보고 어머니의 곁을 돌아서서 떠나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의 세월이 흘러서야 다시 찾게 될 것인가? 만일 세외를 떠돌다 자신이 죽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누구도 어머니의 묘를 찾지 못할 것인데. 자꾸만 누군가 발길을 붙잡는 것 같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고개를 휘저어 상념을 떨치면서 진강(鎭江)을 향해서 신법을 펼쳤다. 저녁 늦게 진강(鎭江)에 닿은 후에 다음날 계속 동진하여 오후에는 장강(長江)을 사이에 두고 태주(泰州)와 마주보는 고중현(高重縣)에 다다랐다. 진강에서 머물 때, 자신이 혈수마(血手魔)에게 도전해 이달 십일에 양주(楊州) 앞 십위평(十葦坪)에서 대결하기로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만금장(萬金莊)의 흉계로 자신을 이용하겠다는 수작이 그대로 엿보였지만, 자신은 그들 뜻대로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마 자신이 이겨도 좋고, 설사 지더라도 혈수마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테니 다수가 떼 지어 덤비면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일 것이다. 또 그 여세를 몰아서 비사방(飛蛇幇)을 공격하여 태주일대를 제패할 심산일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약간은 예상했던 일이라서 역시나 그렇지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놀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원망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생사(生死)가 걸린 일일 테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강호(江湖)에 이보다 더한 일도 비일비재한 마당에 그 정도의 일은 대단할 것도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일이 중요하고 커 보이는 법으로, 자신의 생사가 달려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정의(正義)? 의리(義理)? 정(情)?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인가? 정작 눈앞에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때에 과연 몇이나 그런 것을 지킬 것인가? 그들의 심정을 이해는 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들의 의도대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오직 나만의 방식으로 싸울 것이다. 다음날 배를 타고 장강(長江)을 건넌 후, 태주(泰州)를 바라보고 길을 떠났다. 미시(未時:13-15시)말에 태주에 다다라 객잔에 들었다. 단리유아가 일층 구석의 빈 자리에 앉아 저녁을 시켜놓고 주위의 얘기를 들어보니 온통 자신과 혈수마(血手魔)의 대결이 주를 이루었다. 양주(楊州)와 비교해 보았을 때, 사람들의 모습이 훨씬 거칠고 소란스러워 보였다. 그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피해서 식사하는 중에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이것 봐, 너는 어디서 오는 물건이냐? 감히 이 태주(泰州)에 왔으면 먼저 본방의 어르신들께 인사부터 해야지.” 듣고 있던 주변의 인물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대소한다. “맞다 맞아. 처음 본 놈이 왔으면 신고부터 해야지.” “그래, 혹시 수상한 놈일지도 모르니.” 곧이어 서너 사람이 더 일어나 처음 사람과 같이 다가섰다. 처음 본 인물은 얼굴에 자잘한 상처가 뒤덮고 구레나룻이 가득 난 흉악한 표정의 사십대의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험상 굿은 얼굴이어서 마음약한 인물이 그들을 본다면 놀라 바지춤에 오줌부터 지릴 것이다. 단리유아가 묵묵부답으로 식사를 하며 가만히 있자, “이 자식이, 감히 본 어르신의 말을 씹어?” 허리의 칼을 뽑아서 거칠게 탁자 위를 때리며 칼을 눈앞에 들이민다. “꽝!” “맞수다. 조장(組長). 감히 태주(泰州)에서 본방의 사람이 아니면서도 버젓이 무기를 지니고 다니다니 저놈이 간뎅이가 부은 것이 틀림없수다.” “맞소. 조장, 아무래도 수상쩍은 놈이니 그냥 죽여 버립시다.” 조장이라는 사람이 한마디라도 한다면 모두가 무기를 꺼내어 당장 달려들 태세였다. “야! 검과 도를 가진 것을 보면 강호인(江湖人)이 분명한데 무슨 일로 태주에는 왔느냐? 만일 이번에도 말하지 않으면 네 녀석 목을 쳐버리겠다.” 칼을 들어올려 단리유아의 얼굴을 들어올린다. 단리유아가 손으로 칼을 잡아서 바깥으로 밀어낸 다음 쳐다보며, “죽고 싶지 않으면 모두 조용히 하고 그만 물러나시오.” 잠깐 단리유아의 무표정한 얼굴과 태도에 놀랐다가, “뭐, 꺼져? 이자식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나?” 다시 칼을 앞으로 휘저어 단리유아의 목을 노린다. 잘해봐야 일류(一流)고수 밖에 안돼는 놈이 계속 귀찮게 하자, 다가오는 칼을 향해 손에 기(氣)를 감싸서 칼을 쳐낸 후에, 무영문(無影門)의 무영공공금나수(無影空空擒拏手)의 초식중의 하나인 무영섬탈(無影閃奪)을 펼쳐 칼을 뺏어들었다. 뺏어든 칼을 끝부분부터 한치한치 왼손으로 쳐내어 분지르며,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서 그냥 술이나 마시고 이야기나 나누시오.” 무심한 어조로 말한 후에, 칼자루만 남은 것을 던져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음식을 먹는다. 칼이 조각조각 끊어지는 모습에 모두가 놀라서 입을 벌린 채, 객잔 안은 한 순간 정적에 파묻혔다. 검신을 분지르는 것은 일류고수라도 할 수 있을 테지만, 저렇게 작게 한 치 크기로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게 부러뜨리는 것은 절정의 고수라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너, 아, 아니. 다, 당신은 누구요?” 조장(組長)이 되는 인물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상대가 고수임을 알자 기가 죽은 목소리로 묻는다. 물어도 듣는 척도 않고 식사하는 데에만 빠진 단리유아를 보고, 점점 얼굴이 붉어지며 좀 전의 일은 잊어먹은 채 큰 목소리로, “이 자식아. 무공이 좀 높다고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흥! 네 눈에는 여기가 네 안방처럼 보이느냐?” “쾅! 쾅!”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소리친다.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자 단리유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리유아의 큰 키를 보다가 약간 놀라서 한발 뒤로 물러나는 그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열까지 수를 세겠으니, 열이 되기 전에 이곳에서 모두 나가시오. 만일 당신들 비사방(飛蛇幇)의 졸개로서 그때까지 남아있는 자가 있다면, 더 이상 내일 뜨는 해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오.” 고조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무심히 말하는 단리유아를 보고, 비사방도(飛蛇幇徒)로 보이는 삼십여 명이 일제히 일어나 무기를 쳐들었다. 잠시 단리유아의 무감각한 태도에 놀랐다가 주변의 비사방도(飛蛇幇徒)들을 보고는 다시 의기양양해서, “푸하하하, 어디 열까지 세어 보아라. 누가 내일 해를 보지 못하는지 두고 보게.” 단리유아가 수를 일곱까지 세었을 무렵, 이층에서 큰 소리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멈추시오.” 곧이어 한 사람이 이층에서 몸을 날려 단리유아의 앞에 내려섰다. 억센 얼굴의 삼십대의 장한으로 한 손에 구구도(九鉤刀) 모양의 도를 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협. 너희들은 그만 이분께 사죄하고 모두 물러가라.” “아니, 모(毛)대주. 무슨 말이요? 본방을 무시한 이놈한테 우리보고 사죄하란 말이요?” 조장이라는 인물의 말과 함께 다른 방도들도 역시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에 대주라는 인물이 화가 나서 손을 들어 뺨을 때리고 나서, “사죄하고 물러나라면 그대로 할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돌아서서 단리유아에게, “대협, 수하들의 무례를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소생이 사과드릴 테니.” 갑자기 뺨을 맞은 대다가 대주라는 인물의 저자세를 보고는, “모(毛)대주,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군데 이러는 것이요?” “아니 네놈들은 삼불언(三不言)도 들어보지 못했느냐? 강호에 아무리 화가 나도 먼저 세 번은 말로 한다는 이야기를? 강호(江湖)에 삼불언을 지키는 분이 드물어 몰라 뵈었다 해도 저분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리고, 계속해서 저 분에 대한 소문을 두고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도 모르겠다는 말이냐?” 그제야 깜짝 놀라며, “그, 그럼. 이 사람이 바, 바로....” 듣고 있던 비사방(飛蛇幇)의 인물들이 모두가 놀라 헛바람을 내뱉으며 뒷걸음 쳤다. 강호(江湖)에서 단리유아에 대한 또 하나의 소문이 삼불언(三不言)이었다. 먼저 시비를 걸어도 세 번 말로해서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만일 세 번의 말에도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 시비를 건 대상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죽여 버렸다. 사실 단리유아가 귀찮게 시비 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기도 했지만, 쓸데없이 하수들의 피를 묻히기 싫어서 그런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전, 전광(戰狂)” “천패무광(千敗武狂)” 비사방(飛蛇幇)도들의 놀람에 찬 소리를 뒤로하고, “당신은 누군가? 나의 일을 방해하다니.” 무심한 단리유아의 목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단리대협,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워낙 무식한 것들이라 대협을 몰라 뵈었던 것뿐입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물었소.”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 대답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더 이상 그들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제야 안색을 펴면서, “대협, 소생은 비사방(飛蛇幇)에서 사풍대(蛇風隊)를 맡고 있는 대주로 잔심도(殘深刀) 모심백(毛尋柏)이라 합니다.” 자신을 소개한 후에, 수하들에게 사과하도록 한 후에 모두 물러가게 한다. 모두 황천에 반쯤 발을 걸쳤다가 빠져나온 것을 알고, 사과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정신없이 객잔 밖으로 달아난다.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후에, 단리유아를 이층으로 안내한 후에 자리에 앉았다. 원래의 자리에는 한 인물이 더 있었는데, 체구가 육척이 넘고 전신이 근육으로 뒤덮인 사십대의 사람이었다. “단리대협, 소생은 풍령수(風鈴手) 사척(査拓)이라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소리에 답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잔심도가 단리유아를 바라보면서, “단리대협, 이번에 도(都)어르신과 십위평(十葦坪)에서 대결한다고 소문이 났는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강호(江湖)에 소문이 났는데, 그 소문은 잘못된 것이오. 그래서 직접 내가 찾아온 것이요.” 단리유아의 조용한 대답에, 약간 안색이 밝아지며, “하하하, 그럼 도(都)어르신과 싸우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럼 만금장(萬金莊)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모양이군요.” 대소(大笑)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 완전한 헛소문은 아니오. 혈수마(血手魔)와는 전부터 싸우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소. 그런데 이렇게 그가 한 곳에 머물고 있으니 지금 싸우지 않는다면 언제 또 만날지 어찌 알겠소?” 풍령수(風鈴手) 사척(査拓)이 놀라서, “대협, 꼭 싸울 필요가 있습니까? 대협과 도(都)어르신이 싸운다면 두 분 다 무사하지 못할 텐데요.” 그들로서는 단리유아와 혈수마가 싸우지 않는다면, 만금장(萬金莊)을 멸문시키고 양주(楊州)를 차지하는 일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비무가 아닌 이상 양쪽 모두 무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혈수마 도찬정은 여태까지 도전해온 사람을 살려준 적이 없으니. “무인(武人)이 생사를 두려워하겠소. 본래 나도 계속 남하하다가 세외(世外)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혈수마(血手魔)가 이곳에 있다하니 어찌 그냥 지나가겠소? 이번에 만나지 못한다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일인데?” 풍령수 사척이 속으로 생각하며, ‘빌어먹을 싸움귀신 같으니. 하필 이런 절호의 기회에 싸우러 올게 뭐냐? 한 달만 늦게 왔어도 저 양주는 본방의 땅이 될 텐데. 제기랄, 천하에 싸움에 미친 놈 같으니. 이 미친놈아, 네놈은 할 일이 그렇게도 없냐?’ “대협, 그럼 언제 싸울 생각입니까? 소문대로 십위평(十葦坪)에서 하실 것 입니까?” “아니오. 여기에서 남쪽으로 장강(長江)변에 백암도(白岩島)라는 작은 무인도가 있소. 아마 당신들도 알고 있는 곳일 것이오. 그곳에서 내일 신시(申時:15-17시)에 싸울 작정이오. 본래 비사방(飛蛇幇)을 찾아서 서찰(書札)을 전달할 생각이었는데 당신들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겠소.” 말을 마치고 품속에서 서찰을 꺼내어 잔심도(殘深刀) 모심백(毛尋柏)에게 건네자, “아니, 대협. 그렇게 시간이 촉박하게 싸울 필요가 있습니까? 천천히 며칠 본방에서 지내시다가....” “사람이 꿈이 길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오. 이런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오. 그 서찰(書札)에도 써있지만 내일 신시(申時)까지 오지 않는다면 싸우지 않겠다는 소리로 알겠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할 수 없이 서찰을 받아드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며칠 먹을 육포를 사고 난 후에 객잔을 나서서 백암도(白岩島)를 향했다. 이제 내일까지 운공(運功)을 하면서 심신을 추스르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내일의 승부는 자신조차 장담할 수 없어서 어찌될지 몰랐다.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 2 백암도(白岩島)는 태주(泰州)쪽 강변에서 대략 이십여 장(丈) 정도 떨어진 섬이라 부르기도 뭐한 정도의 자그마한 크기의 회하(淮河)와 장강(長江)에서 흘러든 모래와 흙이 쌓여 생긴 곳이었다. 폭이 가장 넓은 곳도 삼십 장을 겨우 넘길 정도였고, 길이도 오십여 장에 불과했다. 중앙에 높이 이십여 장 정도의 희고 큰 바위가 있어서 백암도라 불리었는데, 그 주변을 수초와 자그마한 수풀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고중현(高重縣) 쪽에서는 강변과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태주 쪽에서는 삼십 장도 못 되는 짧은 거리여서, 절정이상의 웬만큼 신법에 능한 이가 등평도수(登萍渡水)나 일위도강(一葦渡江) 같은 신법을 펼친다면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었다. 단리유아가 신법을 펼쳐 달려서 백암도(白岩島)에 이른 시각은 그날 유시(酉時:17-19시)경이었다. 태주(泰州)의 객잔에서부터 걸린 시간을 따져보니 대략 한 시진여가 걸린 것 같았다. 단리유아 자신도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니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 정도면 한 시진 이내에는 무리 없이 도착할 수 있을 거리였다. 신법을 펼쳐 바위 위에 올라서니, 꼭대기의 모습은 직경이 십여 장 정도의 넓이로 대체로 평평해서 혈수마와 대결하는데 적당해 보였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난 후에 밤을 새워 운기행공으로 내기(內氣)를 다스리면서, 혈수마의 무공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하며 보냈다. 새벽에 운공을 마치고 일어나 나한권(羅漢拳)으로 가볍게 몸을 푼 후에, 등 뒤의 도(刀)를 빼내어 눈앞에 들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햇빛에 도신을 비추어보니 아스라이 붉은 기운이 도신 주위를 떠도는 것 같았고, 사선으로 끊어진 도첨(刀尖)과 두 줄기 혈조(血槽)가 나란히 파여진 것이 보였다. 왼손으로 도병(刀柄)을 잡고, 오른손으로 지강(指剛)을 형성한 다음 주로 도배(刀背)와 도첨 부위를 중심으로 아주 미세한 구멍과 긁힌 듯한 흠집을 내었다. 이것은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을 가장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데, 도신(刀身)의 미세한 구멍과 흠집은 도법이 펼쳐질 때마다 그 자체로도 작지만 소름끼치는 소리를 흘려 일순 상대를 마비시킨다. 만약 지옥파라구천절을 펼친다면 강기(剛氣)가 도신을 감싸고 계속 회전하게 되어 그 소음을 더욱 크게 증폭시키게 되는데, 절정이하의 고수는 그 소리만으로도 내상을 입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괴성이었다. 흑마보에서 얻은 이 적운도(赤雲刀)는 아무래도 피를 부르는 마도(魔刀)가 될 것처럼 보였다. 단리유아가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을 펼치자 도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버리고 허공에 붉은 도광(刀光)만이 남아 스산한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비록 초식만의 운용인데도 이 정도이니 내력을 넣어서 펼친다면 상대는 도의 모습은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섬뜩한 도명(刀鳴)만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펼치다가 점점 빠른 속도로 펼치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정오가 조금 못되어 멈추고 운기조식으로 내력(內力)을 가다듬었다. 미시(未時:13-15시)초 태주(泰州) 방면에서 붉은 구름이 떠오듯이 한 사람이 빠른 속도로 신법을 펼치며 다가왔다. 강가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고 신법으로 땅을 박차고 강을 건너왔다. 천마행공(天馬行空)으로 십여 장(丈) 정도 날아오다가 서서히 하강하자, 다시 왼쪽 발등을 오른 발로 밟아 그 힘으로 수월히 섬에 올라섰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위 꼭대기에 서 있는 단리유아를 보고는 바위 중간의 튀어나온 곳을 밟으며 꼭대기에 올라섰다. 단리유아가 그를 보니 적의(赤衣) 장포를 입은 오십대의 장년인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얼굴은 약간 긴 편이었고 눈도 매우 큰 편이었는데, 눈썹 끝이 위로 치켜져 저절로 사나운 기세가 표정에 드리워진 모습이었다. 서로 잠깐 상대방의 모습을 주시하다가 먼저 단리유아가, “혈수마(血手魔) 도(都)선배 되시오?” 이에 혈수마가 목이 갈라지는 듯한 탁성으로, “그렇다. 애송아, 네가 감히 나에게 도전한 단리유아라는 천둥벌거숭이냐? 내가 몇 년 강호(江湖)에서 별로 활동하지 않았었는데, 내 소문도 들어보지 못했나 보구나.” 최근 십년이래로 혈수마(血手魔)는 별다른 강호활동을 하지 않았다. 가끔 이곳저곳에 나타났다는 소문은 돌았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라져서 몇 달이고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한번 나타나도 한 곳에 정착하지 않으니 단리유아도 그동안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도선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 오랫동안 뵙기를 바랐었는데도, 인연이 없었는지 이제야 만나게 되었소. 후배는 단리유아라 하오.” 혈수마의 비꼬는 듯한 말에도 전혀 동요 없이 무심한 태도로 포권하며 인사한다. 이 모습에 혈수마 역시 눈에 이채를 띄면서,   “흐흐흐,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왜, 세상 살기가 귀찮은 모양이지? 머리만 이리 내밀어라. 그동안 다른 놈들에게 해주었듯이 너도 한 주먹에 별 고통 없이 보내줄 테니.” 그동안 혈수마(血手魔)에게 도전한 인물이 여럿 있었지만, 결과는 모두 참혹한 죽음이었다. 혈수마는 강호행(江湖行)을 하는 중에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여 버렸는데, 특히 자신에게 도전한 사람들은 시신(屍身)의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전신을 박살내서 죽일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다. 몇 번 이러니 더 이상 그에게 도전하는 자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지만, 어떤 세력도 그를 막을 생각을 못했다. 강호십대고수(江湖十大高手)에 들 정도로 무공이 고강한 것도 이유였지만, 그 보다는 괜히 건드려서 자신들의 세력을 소모시키지 않으려는 이유가 더 컸다. 근래 강호(江湖)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또 하나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었다. 점점 강호에서 협의(俠義)와 정도(正道)는 공허한 외침일 따름이었고, 정사(正邪)의 구분 없이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도(都)선배, 여기까지 신법을 펼쳐서 오셨으니 잠시 운기조식이라도 하시오. 이후의 공평한 대결에 아무런 하자도 남기고 싶지 않소.” 자신의 자극하는 말에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이 고저(高低)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답하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흐흐흐, 대단하군, 대단해.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다니, 과연 십대고수(十大高手)중의 하나가 된 것이 허명(虛名)이 아니었나 보구나.” “도선배, 결전에 들기 전에 조식을 취하지 않을 것이오?” 혈수마(血手魔)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하여간에.... 떠도는 소문에 싸움에 미친 목석(木石)이라더니, 이제 보니 정말 그렇군. 정말 무슨 재미로 살아가는 놈인지 모르겠네. 야, 이 미친 싸움꾼아. 그 정도의 시간동안 신법을 펼치는 것은 본좌의 내력에 아무런 손실도 없으니 싸울 테면 어서 싸우자. 빌어먹을 자식이 바빠 죽겠는데 어르신을 부르고 지랄이야. 네놈이 십대고수(十大高手)에 든 놈이 아니었다면 상대도 안했을 텐데. 어서 싸우기나 하자, 이 미친놈아.” 혈수마의 욕설에도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도(都)선배, 조식을 하지 않았어도 선배 역시 화경(化境)에 도달한 고수이니, 지금쯤에는 내력을 거의 회복했을 것이오. 그럼 이제 싸움을 시작합시다.” 단리유아가 뒤로 물러나 도를 빼든다. 이 모습을 보던 혈수마(血手魔)가, “야, 이 자식아. 그냥 죽고 싶냐? 검(劍)을 쓴다는 놈이 왜 도(刀)를 뽑고 지랄이냐? 지금이라도 기회를 줄 테니 당장 검으로 바꿔. 나중에 헛소리하지 말고.” 혈수마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도선배,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도법에도 자신이 있으니.” “흐흐흐, 좋다 좋아. 네놈이 정 그렇다면 곧 묵사발로 만들어주마.” 서로 간격을 벌려 칠 장(丈) 정도가 되었을 때, 문득 내력(內力)을 모으던 혈수마(血手魔)가, “단리 애송아, 한 가지만 물어보자. 도대체 나하고 싸우는 이유가 뭐냐? 설마 단지 싸우고 싶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럼 무슨 이유인 줄 알았소? 내가 세상에 관심이 가는 것은 오직 무공(武功)뿐이오. 그 수단의 하나로 싸움을 할 뿐이지.” 단리유아의 대답에 혈수마가 기가 막혀서 머리를 가로저으며, “역시 네놈은 미친놈이야. 아무리 무공이 좋아도 그렇지, 세상에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이 널려있는데.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그들은 무공(武功)이 좋아서, 혹은 주변의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무공을 익혔을 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에게 무공을 수련하고 완성하는 것은 인생의 목표(目標)를 위한 수단으로서, 어느 정도에 이르면 세사(世事)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단리유아에게 있어서는 무공의 수련과 완성 자체가 필생(必生)의 목표였다. 다른 것들은 그에게 하등(何等)의 가치가 없었다. 혈수마(血手魔)가 먼저 선공을 했다. 오른손을 들어서 허공을 향하여 가볍게 밀듯이 손을 내밀었다. 혈광(血光)이 빛나면서 한 줄기의 경력이 단리유아를 향해서 다가왔다. 혈광마인장(血光魔印掌)의 일초로 혈광섬륙(血光閃戮)이었다. 도신(刀身)을 움켜쥔 손의 아래로 향하게 칼자루를 거꾸로 쥔 상태로, 팔은 앞으로 뻗어서 자신의 단전을 향하게 하며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던 단리유아는,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의 보법으로 앞으로 뛰쳐나가며,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의 일초를 펼쳤다. 제 일절(一絶)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으로 최단거리로 상대를 가르는 쾌도였다. 문제는 도법자체가 강기(剛氣)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상대의 수법도 강기가 아닌 이상 실제 막기란 불가능했다. 도강(刀剛)에 감싸인 적운도가 곧바로 혈수마의 혈광섬륙(血光閃戮)을 가르고 지나가며 곧바로 혈수마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소름끼치는 괴성(怪聲)이 그 뒤를 따르며 일순간 상대방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파팟” “크키흐아악” 소성(騷聲)과 함께 도강(刀剛)에 싸여 목을 노리는 적운도(赤雲刀)를 보고 혈수마는 깜짝 놀랐다. 설마 첫수부터 도강을 불어넣은 초식으로 공격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도강도 도강이었지만 끔직한 소성이 일순간 전신을 마비시켜서 조금만 대응이 늦었어도 그대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다급히 혈류신강(血流神剛)을 펼쳐 상체를 보호하고, 신형(身形)을 틀어 피하면서 신법으로 물러났다. 일순간 수십 명의 귀영(鬼影)이 허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급하게 피했지만 왼손으로 목을 만져보니 혈흔(血痕)이 난 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늦었으면 목이 잘렸음을 알고 소름이 끼쳐 올랐다. 혈수마(血手魔)도 더 이상 상대를 경시할 수 없음을 이 일초로 알게 되었다. 자신도 평생 강호를 떠돌며 무수한 싸움을 해보았지만, 단리유아의 저런 도법(刀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단리유아는 상대의 신법을 보고난 후, 공격을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처음과 같은 기수식을 취한 채 혈수마를 보고, “선배, 혹시 방금 펼친 것이 백로마현(百路魔現)이 아니요? 선배와 원시마교의 비마(飛魔)와는 어떤 관계시오?” 만일 단리유아가 계속해서 공격을 했다면, 혈수마(血手魔)도 다음 초식에는 결코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방심해서 단리유아에게 기선을 빼앗긴 상태여서 대응을 하려는 순간에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사실 처음 일초도 단리유아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단리유아의 목적은 혈수마의 진신절기(眞身絶技)를 보고 싶었지, 기습으로 상대의 목숨을 취하고는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아무리 비마의 백로마현(百路魔現) 일지라도 결코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상대방의 일초에 자신의 생사가 왔다 갔다 했음을 알고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혈수마(血手魔)가, 단리유아의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부릅뜨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친다. “뭐? 이 미친놈아, 싸우는 중에 무슨 헛소리냐? 내가 비마(飛魔)의 절기를 익히는데 네가 보태준 것이라도 있느냐? 어디 이번에는 네가 당해봐라!” 말과 함께, 백로마현(百路魔現)을 펼쳐 단리유아를 포위한 채 혈광마인장(血光魔印掌)을 날렸다. 혈수마(血手魔)도 좀 전의 일로 더 이상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서 단리유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퍽, 퍼벅, 펑” 수많은 붉은 손바닥 형태의 장력(掌力)이 나타나 단리유아의 사방에서 몰아쳐왔다. 수많은 환영(幻影) 속에 실체는 단 하나 뿐이지만, 그것을 찾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 옛날 비마가 이 무공과 다른 경신법(輕身法) 하나로 십대천마(十大天魔)의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도저히 실체와 환영을 분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십이성 대성에 이르면 실체가 환영이 되고 환영이 실체가 되어서, 마치 백 명의 고수가 합공하는 것과 같았다. 단리유아는 계속 그 자리에서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피하며 상대방의 신법을 살피고, 가까이 다가오는 공격만 일초인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쳐 방어와 공격을 하며 약점을 찾고 있었다. “펑, 쾅, 꽝” “크키흐아악, 크흐키키킷” 혈광(血光)이 충천하고, 끔찍스런 도성(刀聲)과 함께 붉은 도광(刀光)이 사방으로 번쩍였다. 도강(刀剛)과 장력(掌力)이 부딪혀 터지는 소리가 강 건너에까지 울려 퍼졌다. 또 바위 꼭대기는 사방으로 날리는 강기와 장력에 의해 깨진 바위조각들이 사방으로 날라 다녔다. 누군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본다면, 수많은 귀영(鬼影)과 혈광이 치솟아서 무슨 마귀들이 인세(人世)에 내려와 싸우는 줄 알았을 것이다.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 3 시간이 일각(一刻) 정도가 흘렀을까? 혈수마(血手魔)도 이런 장력(掌力)으로만 공격하는 것은 아무리 백로마현(百路魔現)이 뛰어나도 상대의 신법과 도법에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도 도강(刀剛)을 펼치니 반 시진(時辰)이상 계속 유지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자신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래전 자신의 선조가 비마(飛魔)의 절기중의 하나인 백로마현을 얻었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 보완하여 문제점을 고쳐왔지만 아직도 몇몇 문제점이 남아 있었고, 게다가 보법을 펼치는데 소모되는 내력이 너무나 컸다. 그동안에는 단리유아 같은 십대고수(十大高手)에 든 고수와는 싸운 적이 없어서 펼칠 일도 거의 없었고, 설혹 펼쳤다 하더라도 금방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계속 펼치게 되자 내력(內力)에 파탄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단리유아의 도법과 함께 터져 나오는 끔찍한 도성(刀聲)에 내력을 끌어 올리는데도 지장을 받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생각하자, 광염혈류마공(狂炎血流魔功)을 운용하여 혈류신강(血流神剛)을 양손으로 보내어 자신 역시도 강기(剛氣)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총 칠초로 이루어진 혈광마인장(血光魔印掌)은 일초부터 삼초까지는 장력(掌力)으로 펼치는 벽공장(劈空掌)과 격공장(隔空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초부터는 완전하게 강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마지막 초식은 강환(剛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 역시 펼쳐본 적이 없었다. 먼저 제사초인 혈광폭류(血光爆流)를 펼쳐 단리유아를 공격해 들어갔다. 백 명의 귀영(鬼影)이 장강(掌剛)을 내뿜어 단리유아의 전면을 향해 공격해들었다. 단리유아 역시 상대방의 백로마현(百路魔現)을 보면서 약점을 찾기 위해, 되도록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피하며 최소한의 공격만하고 있었다. 물론 후삼식을 펼친다면 쉽게 깨뜨릴 수가 있겠지만, 그것은 공력의 소모가 너무 커 방법이 없을 최후의 순간이나 쓸만한 초식이었다. 계속해서 혈수마(血手魔)의 귀영(鬼影)을 보면서, 단리유아는 백로마현이 들었던 것보다 못함을 느꼈다. 순식간에 백 명의 환영(幻影)이 나타나 사방을 포위한다고 들었지만, 혈수마가 만든 것은 칠십 명을 넘지 못했다. 또 환영자체도 불완전해서 순식간에 흩어지곤 했고, 그것이 계속 일정한 길로 이동하며 발생했다. 장소가 비좁은 탓도 있겠지만 백로마현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만일 완벽한 백로마현이라면 허공이라도 환영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대체로 상대방의 보법의 순서를 알아볼 수 있을 때, 혈수마가 장강(掌剛)으로 바꾸어 공격하는 것을 보고 단리유아 역시 다시 공격에 나섰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격은 무시하고 수십의 환영(幻影)중에서 단 하나을 향하여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다가가며,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의 제 이절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를 펼쳤다. “크키흐아악, 크흐키키킷” 무수한 도광(刀光)이 번뜩였고, 오직 하나 혈수마의 실체를 향해 다가가며 계속해서 도영(刀影)이 몰아쳤다.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은 철저한 접근전을 위한 초식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적어도 상대와 삼 장(丈)이내에는 가까이 다가가야 공격의 효과가 있었다. “콰쾅! 꽝!” 강기와 강기가 서로 부딪혀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두 사람 다 부딪힌 충격으로 삼 장 가량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 모두 흩어지는 강기(剛氣)에 옷자락이 찢어지고, 곳곳에 피가 흐르는 외상이 엿보였다. 또 약간의 내상(內傷)도 입었는지 창백한 안색들이었다. 하지만 둘 다 상처는 무시하고, 상대를 노려보며 다시 부딪혀갔다. 주변의 바위들도 성한 곳이 없어서 쪼개지거나 조각나, 섬 주위 사방으로 비산(飛散)하여 떨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먼저 단리유아가 접근해서 공격했다.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다가가며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의 제 삼절 지옥일수혼(地獄一殊魂)을 펼쳤다. “크키흐아악, 크흐키키킷” 소름끼치는 소성과 함께 적운도(赤雲刀)에 강기(剛氣)가 맺혀 일 장(丈)가량 늘어나더니, 좌에서 우로 일자(一字)로 혈수마(血手魔)를 공격했다. 일견 단순해 보이고 아주 느리게 보이지만, 막상 상대와 부딪힐 때에는 오히려 빨라져 상대방이 알아차리기 전에 상대의 방어를 뚫고 치명상을 주는 초식이었다. 설혹 상대가 공격하여 부딪힌다고 해도 도강(刀剛)의 끝이 끊어져 다시 상대를 공격하게 되는 초식이었다. 다가오는 도광(刀光)과 끔찍한 소성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혈수마도 혈광만천(血光滿天)을 펼치며 단리유아의 공격을 막았다. 시뻘건 장영(掌影)이 연이어 일어나 허공을 가득 메웠다. “콰쾅! 쿠쿵쿵! 꽈꽝!” 붉은 광채가 하늘을 물들이고, 부딪친 강기(剛氣)가 계속 충돌하여 사방으로 날렸다. 이번의 맞부딪침에서는 혈수마(血手魔)가 오히려 손해 본 바가 컸다. 다가오는 도강(刀剛)을 막았지만, 끊어진 강기의 일부가 자신이 펼친 장강(掌剛)의 벽을 뚫고 계속 들어왔던 것이다. 다급히 왼손에 혈류신강(血流神剛)을 운용해 막았지만, 이미 늦어 왼손과 부딪힌 강기에 의해 왼팔은 핏줄이 터지고 뼈가 부러져서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아마 팔을 다시 쓸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또 강기(剛氣)가 부딪치는 충격에 의해 심각한 내상을 입고 삼 장(丈)이나 물러서야 했다. 뒤로 물러서서 내상에 의한 피를 토하며, 오른 팔로 왼쪽팔의 혈도를 대충 눌러서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도록 했다.   “우욱. 울컥” 단리유아도 이번의 공격으로 내력(內力)의 소모가 많고 충격으로 내상도 심해졌다. 하지만 다시 상대를 끝장을 내기 위해서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크키흐아악, 크흐키키킷” 이번에는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의 제 사절인 지옥구전겁(地獄九電劫)을 펼쳤다.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다가가며 도를 들어 허공을 향해서 휘둘렀다. 아홉 가닥의 도강이 일어나 마치 벼락이 내려치듯이 동시에 혈수마를 향해 내리 꽂혔다. 단리유아가 공격하는 것을 보며 혈수마(血手魔)는 도저히 지금의 몸 상태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싸움에 미친놈은 완전히 싸움에 빠져서 자신을 봐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자신도 한번 싸우면 무슨 수를 쓰든 상대를 끝장내 버렸었다. 그것이 강호에서의 불문의 법칙으로 괜한 자비심으로 이미 상처를 입힌 상대를 살려주어 보았자, 되돌아오는 것은 복수심에 빠져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한테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기회를 더 주는 것일 뿐이었다. 찰나의 상념에서 깨어난 혈수마(血手魔)는 이를 악물며 어차피 막기는 틀렸으니,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할 생각으로 남은 내공을 모두 끓어 모아서 다가오는 아홉 개의 도강(刀剛)은 무시하고 혈광무한(血光無限)을 펼쳤다. 원래는 양손으로 펼쳐 두개의 강환(剛丸)이 서로 꼬여 나가면서 파괴력이 배가 되는 공격이었지만 지금은 왼손을 쓸 수가 없으니 오른손으로 하나의 강환만을 날려 보냈다. 위력이 본래의 반에도 못 미쳤지만 지금은 이 수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콰쾅! 꽈꽝!” “아악! 우욱” “쿠쿵” 또다시 한바탕 강기의 폭풍이 몰아쳐 사방으로 폭사되어 여기저기 바위가 파이고 갈라졌다. 그전에 조각났던 바위들도 더 견디지를 못하고 쪼개져 큰 소리를 내면서 한 옆으로 쓰러졌다. 땅에 넘어진 바위들 때문에 흙과 먼지가 치솟았고, 끊어진 수풀은 강심으로까지 흩날렸다. 상대가 자신의 도강(刀剛)은 무시한 채 공력을 모아서 자신을 향해 강환(剛丸)을 날리는 것을 보자, 단리유아도 다급히 호신강기(護身剛氣)를 펼치며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피했다. 아홉 개의 도강(刀剛)과 강환(剛丸)이 충돌해서 몇 개의 도강은 강환과 폭발해서 사라졌고, 나머지는 혈수마(血手魔)를 향해서 내리꽂혔다. 혈수마는 시신(屍身)을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조각이 나버렸고, 단리유아 역시 도강에 부딪혀 폭발하는 강환에 스쳐 왼쪽 허벅지의 살이 갈라진데다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미리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피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한쪽 다리는 내주어야 했을 것이다. “우욱. 울컥” 일단 뒤로 물러나 몸속에 뭉친 피를 토해내며 내상약을 먹어 내상을 일단 진정시켰다. 허벅지의 상처도 혈도를 눌러서 지혈한 후에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를 발랐다. 상처에 닿는 약이 가져다주는 쓰라림도 무시하고 내의를 찢어서 상처주위를 감싸 묶었다. 그런 후에야 단리유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원래의 바위도 여기저기 금이 가고 쪼개져 있거나 군데군데 푹 파여 있었다. 또 강기(剛氣)와 강환(剛丸)에 맞아 조각난 돌들이 바위주위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강에는 섬을 둘러싸고 이십여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모여서 섬 위의 단리유아를 주시하고 있었고, 강변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비사방(飛蛇幇)의 세력으로 십대고수(十大高手) 간의 대결을 보려고 부랴부랴 싸움 중에 모여든 것이었다. 만일이라도 단리유아가 이기고 상처가 심하다면 합공해서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다 해도 고수들 간의 대결은 여러모로 하수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이었다. 단리유아는 주변의 비사방(飛蛇幇)의 무리들을 보면서 그 자리에서 서서 간단히 행공(行功)으로 조식을 취했다. 비사방(飛蛇幇)의 방주가 타고 있는 배에선 지금 한창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주요 핵심고수들이 갑판에 모여서 단리유아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지만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비록 허벅지에 큰 상처가 났고, 내상약을 먹고 조식하는 중이었지만 그들이 보기에도 치명적인 중상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갑판의 중앙에 위치한 태사의에 역삼각형의 얼굴을 한 자그마한 오십대로 보이는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그가 바로 비사방주(飛蛇幇主)인 비사독검(飛蛇毒劍) 관철반(冠徹半)이었다. 한참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모두 조용히 해라. 여기가 시장판도 아닌데 이게 무슨 짓이냐? 다들 그만 떠들어! 어이 채(蔡)선생, 자네가 대답해보게. 그래도 우리 방에서는 자네가 가장 똑똑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에 한쪽에 서있던 대머리와 염소수염의 머리가 보통사람보다 큰, 오 척의 사십대 인물이 앞으로 나서서 말한다. 비사방(飛蛇幇)의 꾀주머니로 강호에는 대두서생(大豆書生) 채고(蔡雇)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에, 방주님. 지금까지 상황을 보셨으니 알겠지만 도(都)어르신이 죽고 단리유아가 이긴 것 같습니다.” “누가 그 사실을 모르나? 빌어먹을 놈 같으니, 기껏 공들여 초빙해왔더니 저런 애송이 하나 못 이기고 죽어? 아까 출발할 때는 그렇게 큰 소리 치더니. 아, 제기랄. 십대고수(十大高手)라고 뻐기던 그놈한테 지금까지 굽실거리고, 들어간 은자가 얼만데. 생각만 해도 복장이 터지는 것 같군. 그놈 얘기는 다시 하지 말고, 저 싸움에 미친놈을 어떻게 할지나 얘기해보게.” “에, 방주님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저놈 혼자서 흑마보(黑馬堡)를 없애버렸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흥! 그래서? 우리가 그따위 허접 쓰레기 같은 놈들과 같다는 말이냐? 아니면 쓸만한 고수는 열 명도 되지 않은 그런 멍청이만 모아서 왕처럼 군 흑마무상(黑馬無上)이 나와 같다는 말이냐?” 화를 내며 발을 굴러 갑판에 구멍을 뚫어 놓는다. “헤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영명하신 방주님을 모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놈 혼자서 흑마보(黑馬堡)를 끝장내었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도대체 요점이 뭐냐?” “에, 저놈이 지금 혈수마(血手魔)와 싸워 이겼지만 상처가 얕은 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놈도 십대고수라 알려진 놈이고, 또 지난날을 생각해보아도 비록 우리가 공격한다면 죽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지요.” “그렇다면, 채(蔡)선생은 그냥 보내자는 것인가?” “에, 우선은 그렇지요. 지금 우리가 급한 것은 만금장(萬金莊)의 일이지, 저 싸움에만 미친놈하고의 일은 나중의 일이지요. 우리가 지금 공격하다가 손실이 많다면, 바로 저기 배부른 돈밖에 모르는 놈들이 바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듣고 있던 비사독검(飛蛇毒劍)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숨을 쉬면서, “휴, 몇 년 전에 저놈이 본방(幇)에 찾아왔을 때 비무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죽여 버렸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그때는 나보다 약간 강할 뿐이었는데, 이제는 강호십대고수(江湖十大高手) 중에서도 상위에 드는 혈수마(血手魔)를 죽이다니 정말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구만. 제기랄, 저놈은 어미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히기라도 한 것일까? 아, 정말 살맛 안 나는군. 겨우겨우 사람을 모아서 뭣 좀 해보려는 참에 저 미친놈 때문에 다 틀렸어.” “에, 방주님. 지난 일을 말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비록 혈수마(血手魔)가 없지만 그동안 초빙한 고수들도 꽤 되니, 저 금탱이 놈들만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요. 지금 저 미친놈을 건드려봐야 저희에게는 아무 이익이 없지요. 우리가 뭐 하러 혈수마의 복수를 해줍니까요? 오늘은 그냥 보내고, 후일 저희가 더 세력이 커질 때 갚아주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요.” 고개를 끄덕이며, “휴, 그래. 지금은 어쩔 수가 없겠지. 하지만 내가 오늘의 일을 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네. 으드득, 내 꼭 저놈에게 앙갚음을 하고 말 것이야.” 이를 갈아 부치며 중얼거리는 비사독검(飛蛇毒劍)의 말에, 대두서생(大豆書生) 채고(蔡雇)가 안색을 찌푸렸지만 즉시 안색을 펴고 맞다며 아첨을 한다. 이렇게 비사방(飛蛇幇)이 모여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대충 내상을 진정시킨 단리유아는 바위 위에서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내려와 비사방주(飛蛇幇主)의 배로 다가왔다. 잠시 소란스럽다가, 비사독검(飛蛇毒劍)이 수하들을 물리쳐 단리유아가 배에 오르도록 허락했다. 배에 오른 단리유아와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비사독검이,   “하하하, 대협. 그래 어쩐 일로 본좌를 찾아 오셨는지요?” “관(冠)방주, 내 지금 강을 건너고 싶은데 배를 타려면 하류로 더 내려가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혹시 배 한척만 내어 주실 수 있습니까?” 무표정하게 말하며 배를 태워 맞은편으로 건네어 달라는 단리유아의 말에 비사독검(飛蛇毒劍)이 속으로, ‘이 빌어먹을 놈이 불난데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사람 약 올리는 거야 뭐야? 그냥 확 맞장 떠버릴까? 어이구,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어도 당장 이 자식을 죽여 버렸을 텐데. 정말 힘이 없는 것이 한이구나.’ 비사독검(飛蛇毒劍)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변의 고수들도 화가 나서 서로 단리유아를 보며 욕설과 함께 죽여 버리자고 방주를 보면서 말한다. “모두 조용히 해! 본좌가 단리대협과 이야기하는데 나서다니 모두 죽고 싶으냐?” 그렇지 않아도 울화통이 터져 죽을 판에 계속 떠드는 소리에 화가 나서 말한다. 다시 주변이 조용해지자, “대협, 대협이 원하시는데 물론 도와드려야지요. 저희 배로 직접 모시겠습니다. 여기 편안히 정좌(定座)해서 기다리시면 곧 건너편에 닿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관방주. 후일 이 은혜는 보답하기로 하지요.” 주변의 욕설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무표정하게 단리유아가 말했다. 비사독검(飛蛇毒劍)이 의자 하나를 더 가져다 놓게 하고 배를 맞은편 고중현(高重縣) 쪽으로 돌리게 했다. ‘빌어먹을 미친 자식. 뻔뻔스럽게 찾아와서 배를 태워 달라고? 고마우니 은혜를 갚겠다고? 흥! 나중에 네놈의 몸뚱아리로 오늘의 은혜를 갚아야할 걸? 어디 두고 보자. 이 싸움에 미친 인간아. 이번에 만금장(萬金莊)을 차지하면 강소성(江蘇省)에서는 맞상대할 곳이 없을 테니.’ 잠깐 앉아서 서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반 시진이 못되어 맞은편 강변에 배가 닿았다. 서로 포권을 하며 인사하고 단리유아가 배에서 내려 길을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비사독검(飛蛇毒劍)이, “제기랄, 정말 재수 옴 붙은 날이군. 얘들아, 어서 배를 돌려라. 오늘 같은 날에는 술독에 빠져서라도 만사를 잊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으니.” 모두 큰소리로 대답하며 배를 돌려 떠나갔다. 한참 가다가 함성을 듣고 단리유아가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겨 고중현(高重縣)으로 향했다. 적어도 오늘부터 며칠간은 객잔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며 지내야 할 것 같았다. 묵죽장(墨竹莊) 묵죽장(墨竹莊) 1 단리유아는 비사방과 헤어져 고중현(高重縣)내로 들어간 후에 그날 저녁부터 고중현의 객잔에 머물러 상처치료에 전념했다. 내상(內傷)도 내상이었지만 허벅지의 외상(外傷)이 더 심해서 거동하는 데에는 오히려 허벅지의 상처가 더 지장을 주었다. 비록 뼈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완전히 살이 갈라져 움직일 때마다 통증과 불편함을 주었다. 단리유아 자신이 아무리 고통에 면역이 되었다 해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運功)하기는 힘들었다. 자칫 잘못하여 상처가 터진다면 며칠이 더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와공(臥功)이나 행공(行功)으로 내상을 치료하니,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허벅지에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를 계속 사흘 정도 바르자, 어느 정도 치료가 되어 비로소 좌공(坐功)으로 제대로 된 운기행공을 할 수 있었다. 한편 객방에서 단리유아가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동안에, 강호(江湖)에는 혈수마(血手魔)의 죽음이 알려져 한동안 떠들썩했다. 그동안 십대고수(十大高手)끼리 싸워서 한 명이 죽은 경우는 거의 십년만의 일로, 십년 전에 잔결마(殘缺魔) 수삼결(首三缺)이 단리유아 이전의 십대고수의 한명이었던 칠절신군(七絶神君) 금사천(琴絲闡)을 죽인 이후로 처음이었다. 혈수마의 죽음을 두고 떠들던 사람들도 얼마 안가, 누가 다시 십대고수에 들어갈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천하오화(天下五花)와 함께 강호의 후기지수로 강호십수(江湖十秀)에 들어가는 중원오룡(中原五龍) 중에서 뽑아야 한다는 사람, 그들은 아직 화경(化境)의 경지에도 들지 못했고 경험도 일천하니 현재 화경의 경지에 든 인물 중에서 골라야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십여 일이 지나서는 대체로 요동마도(遼東魔刀)를 새로운 십대고수에 포함시켜야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단리유아는 며칠 동안 상처를 치료하며, 객방에 머물면서 혈수마(血手魔)가 펼쳤던 백로마현(百路魔現)을 기억해내 그 보법을 다시 재구성하는데 시간이 보냈다. 운기비결(運氣秘訣)을 모르니 초식 상으로는 비슷하게 보일 정도로 만들기는 했지만, 막상 펼쳐보면 많은 문제점이 드러날 것이다. 일단 기억하고 있던 대로 비슷하게는 만들었지만 현재의 몸 상태로는 직접 펼쳐보는 것은 무리여서 일단 허벅지의 상처가 완쾌되는 사나흘 후에나 직접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단리유아가 상처를 치료하고 고중현(高重縣)을 떠난 것은 혈수마(血手魔)와 싸운 지 칠일이 지난 후였다. 내상과 외상도 완치되어서 움직이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생각한데로 계속 남하해서 일단 보타암(菩陀庵)에 들려 그들의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을 살펴보기로 했다. 처음 생각은 수로를 따라서 상주(常州), 무석(無錫), 소주(蘇州)를 거쳐 항주(杭州)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그런 대도(大都)를 거쳐서 가면 여러 가지 귀찮은 일도 생길 것 같고 수련에도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상주(常州)외곽을 지나 동안(東安)을 거쳐 태호(太湖)의 서편을 따라 돌아서 호주(湖州)를 거쳐서 항주(杭州)로 가기로 했다.   단리유아는 상주(常州)를 지나자 될수록 사람이 없는 산길을 따라 지나가면서, 상처를 치료하는 중에 생각했던 백로마현(百路魔現)을 복구시킨 보법을 수련했다. 본래의 운기비결(運氣秘訣)을 모르니 자신이 기억한대로 펼쳐서 환영(幻影)이 나타나도록 비슷하게 만든 것이었다. 단리유아 자신의 보법인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의 특징은 일단 보법을 펼치면 희미한 안개 같은 검은 기운이 일 장(丈)범위를 감싸서 정확히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가리는 신법이었다. 또한 상대의 경력을 타고 자연스럽게 미끄러지기도 하고 환영을 보이게 해서 상대의 공격을 그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수비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보법이었지만, 공격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면이 많았다. 단리유아가 백로마현(百路魔現)을 보고는 만일 이와 비슷한 무공을 만들 수 있다면,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에는 이보다 좋은 보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펼쳐보았지만,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잘 되지 않고 발이 꼬여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점점 수련의 성과가 보여서 펼치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환영(幻影)이 사십 개를 결코 넘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위치하는 곳에 실체(實體)가 있어야하는데 엉뚱한 곳에 자꾸만 실체가 위치해 있었다. 잠시 산 속의 공터에 멈추고 앉아서 생각에 빠졌다. 아무래도 이렇게 무턱대고 비슷하게만 따라한다는 것은 문제가 많았다. 차라리 자신이 그와 비슷하게 창안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일단 환영을 만드는 것은 빠른 속도의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위치에 있으려면 구궁팔괘(九宮八卦)의 원리가 바탕이 된 보법이 필요했다.   크게 팔괘(八卦)는 선천팔괘와 후천팔괘로 나누어지는데 선천팔괘(先天八卦)는 신마(神馬)의 점에서 후천팔괘(後天八卦)는 신구(神龜)의 점에 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신마의 점을 그려 놓은 것을 하도(河圖)라고 하며, 신구의 등에 점을 그려 놓은 것을 낙서(洛書)라고 했다. 먼저 팔괘(八卦)는 선천팔괘로 복희의 하도(河圖)를 기본으로 하여 팔방위를 배열한 것이었다. 역의 원리에서 하늘(天)은 건(乾), 땅(地)은 곤(坤)이고, 산(山)은 간(艮), 못(澤)은 태(兌)이며, 천둥(雷)은 진(震), 바람(風)은 손(巽)이고 물(水)은 감(坎), 불(火)은 이(離)로 하여 이를 팔방에 위치하고 또 각각의 괘를 두 개씩 겹치면 육십사괘가 만들어진다. 구궁(九宮)은 주나라 문왕의 후천팔괘에 중궁(中宮)을 더한 것으로 낙서(洛書)에 응한 일백(一白)·이흑(二黑)·삼벽(三碧)·사록(四綠)·오황(五黃)·육백(六白)·칠적(七赤)·팔백(八白)·구자(九紫)의 구성(九星)에, 중궁과 건(乾)·감(坎)·간(艮)·진(震)·손(巽)·이(離)·곤(坤)·태(兌)의 팔괘를 휴(休)·사(死)·상(傷)·두(杜)·개(開)·경(驚)·생(生)·경(景)의 팔문(八門)에 배합을 하여, 그 운행하는 아홉 방위의 자리를 이르는 말이었다. 이런 구궁의 순환 통로는 중궁을 오(五)로 보고 각 괘(卦)의 수의 차례대로 순행하는 순둔(循屯)과 수의 차례를 역행하는 역둔(逆屯)으로 정해져 있었다. 보통 이 구궁(九宮)과 팔괘(八卦)는 진법(陣法)이나, 경신보법(輕身步法)에 특히 관련이 깊어서 명문대파의 무공 중에는 이와 관련된 무공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었다. 단리유아의 생각은 이 구궁팔괘(九宮八卦)를 응용한 보법(步法)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무공 중에서 몇 가지 찾은 다음, 거기에 다시 자신의 생각을 넣어서 새롭게 만들 심산이었다. 구궁팔괘를 응용한 대표적인 보법으로는 화산(華山)의 구궁보(九宮步), 안휘성(安徽省) 천주산(天柱山) 일대의 잠산도문(潛山刀門)의 팔괘용형보(八卦龍形步), 해남도(海南島) 해남파(海南派)의 구구팔십일표풍보(九九八十一飄風步)등이 있었고, 실전됐거나 멸문된 문파들 것으로는 잠형팔괘보(潛形八卦步), 추풍구환보(追風九幻步), 수운팔영(隨雲八影), 축남산영보(逐嵐散影步) 등이 있었다. 이중에서 단리유아가 구결을 완전한 알고 있는 것은 잠형팔괘보, 수운팔영이 있었고, 직접 본 것은 구궁보와 팔괘용형보가 있었다.   아무래도 일단은 자신이 알고 있는 보법을 익힌 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것들을 융합하는 것이 빠를 것 같아서, 먼저 잠형팔괘보(潛形八卦步)와 수운팔영(隨雲八影)을 익히기로 결정했다.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벌써 해가 저물어 가서 태양이 서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줄 모르겠지만 동안(東安)에서 그다지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산중이어서 아무도 없으니 차라리 여기서 며칠간 수련하다가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일단은 비바람이라도 피하며 당분간 생활할 동굴 같은 곳이 필요했다. 천시천청대법(千視天聽大法)으로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서,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고 신법을 펼쳤다. 그리 크지도 않고 수량이 풍부하지도 않았지만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오 장(丈)여의 자그마한 연못도 있어 물고기도 있는 것 같았다. 이 근처에서 거처하기로 하고 근처를 뒤져 동굴을 찾아보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동굴 같은 것은 없어서, 나무로 집을 만들기도 귀찮아 한쪽의 십여 장 높이의 절벽에 장력(掌力)으로 구멍을 뚫었다. “꽝! 우르릉 꽝!” 다행히 절벽이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손쉽게 장력(掌力)을 사용해 땅에서 일 장(丈) 높이에 깊이가 삼 장(丈) 정도의 동굴을 만들 수 있었다. 장력으로 대충 정리하고, 지력(指力)을 이용해서 암석을 잘라 침상을 만들었다. 다시 장력을 이용해서 먼지와 돌조각을 밖으로 몰아내자 그럴듯한 거처가 만들어졌다. 일단 오늘 저녁은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며 쉬기로 하고,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보법을 수련하기로 했다. 다음날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아 아침을 해결하고, 계곡 옆의 공터에서 보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잠은 운기행공으로 대신하면서 삼일동안 밤낮으로 잠형팔괘보(潛形八卦步)와 수운팔영(隨雲八影)를 수련하자,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기본은 된 것 같았다. 다시 그동안 보법을 수련하면서 느꼈던 구궁과 팔괘에 대해 생각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보법과 경험했던 무공들로 백로마현(百路魔現)에 비견되는 보법을 만들기 위해 명상에 들었다. 명상과 수련을 반복하기를 며칠이나 지났을까, 첫 눈이 내리던 날에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보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설혹 비마(飛魔)가 되살아나 백로마현을 펼친다 해도 보법대결에서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자신감이 드는 신법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꾸준한 수련과 잔손질이 필요할 뿐이었다. 수련하다가 문득 너무 오랜 시간을 한곳에 머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수련에 빠져서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는데,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자 고중현(高重縣)을 떠난 지도 한 달이 훨씬 넘은 것 같았다. 이제 숙달과 몇 가지 문제점은 길을 가면서 해도 될 것으로 생각되어서 다시 보타암(菩陀庵)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날은 늦어서 수련에 전념하느라 그동안 씻지 못해 악취가 나는 옷을 벗어 빨고, 또 찌든 때를 밀며 목욕하면서 보냈다. 다음날 눈으로 덮인 산야를 지나가면서 보법을 수련해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고 해도 신경을 쓰지도 않을 테지만, 그들을 놀래키기도 싫어서 계속 산길로만 남하(南下)하면서 수련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보법을 연마했다. 동안(東安)에서 태호(太湖)의 서편을 끼고 돌아가는 산중에서는 한 광인(狂人)이 이리저리 날뛰며 지나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던 산사람들은 흰 눈 위에서 사방으로 날뛰는 귀영(鬼影)을 보고, 몇 번이고 눈을 씻고 다시 보다가 모두 놀라서 달아났다. 혹시 자신이 근일에 부정한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하면서.... 근처에서 그를 본 강호인(江湖人)은 놀라서 입을 떡 벌린 채, 멀건이 서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하고 여기저기 신법을 펼쳐서 사방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를 보며, 놀라고 경탄하는 가운데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틀이 더 지난 후 미시(未時:13-15시)무렵 단리유아가 태호(太湖) 서편의 산등성이에 이르렀을 때, 태호(太湖)에서 배를 타고 놀던 사람들과 고기를 잡던 어부들도 그 모습을 멀리서 나마 볼 수 있었다. 산자락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람의 모습과 그 환영(幻影)들을..... 무공을 모르던 사람들은 귀신이 출몰했다며 두려워하고, 무공을 아는 사람들은 어떤 미치광이가 저렇게 사방으로 날뛰는지 궁금해 했다. 한참을 단리유아가 수련하면서 지나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소리쳐 단리유아를 불렀다. “멈추시오. 아, 멈추라니까.” 내공을 불어넣은 외침에 단리유아가 수련에서 깨어나 자신을 부르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삼십대의 서생(書生)차림의 인물로 육척이 안 되는 키에 청의(靑衣) 문사의를 입은 단아한 얼굴을 한, 무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평범한 문사(文士)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뒤로는 오십대의 세 인물이 호위하듯이 서있었다. 단리유아가 그를 보면서, “무슨 일이오?” 소리쳐 부르는 소리에 화를 내지도 차가운 태도도 아닌 그냥 늘 있는 일이라는 태도로, 평상시의 조용한 목소리와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문사의 얼굴에 잠깐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뒤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을 팔을 들어서 조용하게 한 후에,   “그대는 대체 누구요? 누군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요?” 그제서야 단리유아가 시선을 돌려서 사방을 둘러보니, 옆으로는 태호(太湖)가 지척이고 이미 자신이 지나오던 산도 거의 없어져 구릉이라 부르기도 뭣한 낮은 등성이들이 이어진 곳이었다. 수련에 정신이 팔려 산길이 끝나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태호(太湖)에서는 수십 척의 배들이 가까운 곳에 배를 대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고, 가까운 근처에 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집 모퉁이에 숨어서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어떤 미치광이가 날뛰며 마을을 향해 다가오자 놀라서 이 사람을 찾아가 얘기한 모양이었다.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음, 그저 잠깐 수련(修練) 중이었다고 합시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오.” 단리유아의 말에 황당해 하는 얼굴로 쳐다보며, “뭐요? 수련? 정말 제정신인거요? 아무리 무공에 빠졌다고....” 말을 하다가 지난날 들었던 소문을 생각하고 다시 단리유아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다가 놀라서, “호, 혹시 천패무광(千敗武狂) 단리대협이 아니십니까?” “그렇소, 그러는 노형은 누구시오?” 그 말을 듣고 그도 놀라고, 뒤의 세 사람도 놀라서 소리쳤다. “전광(戰狂)!” “천패무광(千敗武狂)” 잠시 후에 청의서생이 놀람과 흥분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정말로 단리대협이시란 말이요? 한 달 보름 전에 저 혈수마(血手魔) 도찬정(都贊政)을 죽인?” “맞소.” “하하하, 이런 광영이 있나. 내가 십대고수(十大高手) 중의 그 단리대협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한참을 웃다가, 단리유아를 향해 포권하며, “하하하, 이런, 제가 너무 기뻐서 결례를 했군요. 소생은 서문세절(西門洗絶)이라고 이 근처의 묵죽장(墨竹莊)이라는 장원의 주인이 되는 사람입니다.” 묵죽장(墨竹莊)이라면 대대로 문무(文武)의 명인들이 배출되고 있는 명문이었다. 비록 세력은 얼마돼지 않아서 가문 내에 무공을 익힌 자들은 이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대대로 이름 있는 학자나 절정(絶頂)의 고수를 배출해오고 있었다. 서문세절(西門洗絶)은 묵죽장의 장주로 강호에는 묵죽수사(墨竹修士)라 알려져 있었고, 그 학식과 더불어 선법(扇法)의 고수로 이름이 높았다. 서문세절이 막 가주가 되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는 때에 단리유아는 강북에 있어서 그를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그 사람됨과 무공의 실력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단리유아는 강남보다 강북지역에서 주로 활동해서 장강(長江)이남에서는 절강성(浙江省)과 호남성(湖南省)이하의 지역으로는 거의 가본 적이 없었다. 그 이하의 지역에서는 명성이 널리 알려진 고수들도 드물었고, 세력도 대부분이 중소문파에 불과했다. 그를 만나고 묵죽장(墨竹莊) 근처까지 온 것을 보니, 이제 강소성(江蘇省) 지역을 지나 절강성(浙江省)에 들어온 것 같았다. 단리유아가 서문세절(西門洗絶)의 인사에 마주 절하며 고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서문장주 되시는군요. 소생은 단리유아라 합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는 단리유아의 어투에 약간 당황하면서, “단리대협, 이미 저녁도 가까워오는데 쉴 곳을 정하지 않았다면, 누추하지만 본가에서 하룻밤 묵고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단리유아가 주변을 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그럼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하룻밤 신세를 지겠습니다.” “하하하, 폐라니요?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지요.” 크게 웃으며 단리유아를 인도하며 묵죽장(墨竹莊)으로 향했다. 묵죽장은 태호(太湖)의 남쪽 호변(湖邊)에 검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그림 같은 태호를 바라보며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언덕사이에 삼십여 채의 집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서문세절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갔다. ****** 수정했습니다. 묵죽장(墨竹莊) 묵죽장(墨竹莊) 2 단리유아는 서문세절(西門洗絶)의 뒤를 따라 고풍스러워 보이는 모습의 장원을 둘러보면서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의 이층누각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단층의 집들로서 사방으로 퍼져서 중앙의 누각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중앙의 누각이 가주의 집무실인 것 같았는데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단리유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문세절의 소개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단리유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다. 그 풍채가 너무나 보잘 것 없어서 놀랐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무표정하고 무심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며 기분이 상하기도 하였다. 본래가 묵죽장(墨竹莊)이 강호세력이라기 보다, 문사(文士)들의 성향이 강해서 예(禮)를 중시하는 문인 기풍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소문을 들어서 그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만나서 그를 보니 정말로 놀랍기보다는 당황스럽고 껄끄러웠다. 저런 사람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 성격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잘 납득이 가지 않을 텐데, 들어보지 못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마치 자신들을 무시하며 일부러 시비 거는 듯한 태도로 보였던 것이었다. 한동안 단리유아가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서문세절이 우선은 여장을 풀고 나서 저녁에 자신과 함께 식사를 나누며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시비의 안내를 받아서 거처로 향했다. 단리유아의 모습이 시비(侍婢)의 뒤를 따라서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서문세절(西門洗絶)의 숙부뻘이 되는 사람이 서문세절에게 물었다. “아니, 가주. 저런 사람을 뭐 하러 본장에 데려온 것이오? 하룻밤 유(留)하도록 해주거나 우리를 만났으면 감사하는 표정이나 즐거워하는 기색이라도 있어야지. 우리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가 감사하는 모습은 눈에 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던데.” 여기저기서 그와 비슷한 말을 하는 소리를 듣다가 서문세절이 팔을 들어 올려 조용하게 한 후에, “여러분들의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듣다가 이번에 처음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소문을 들어보신 분도 있으니 알겠지만, 저 사람이 원래 목석(木石)같이 표정의 변화가 없다고 하더군요. 행여나 그의 행동을 보고 노여워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하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십대고수(十大高手)의 일인으로서 이번에 혈수마(血手魔)를 죽인 후부터, 그가 강호제일인(江湖第一人)일지 모른다고 다들 떠들고 있습니다. 이번에 우연히 제가 그를 만나 초대한 것이니, 저를 보아서라도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그리고 그와 친교라도 맺을 수 있다면 본장에는 도움이 되었지,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서문세절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그를 두고 떠들며 이야기를 했다. 풍채(風采)가 너무 볼품이 없다, 정말로 혈수마(血手魔)를 죽일 정도로 강한 것이 맞느냐, 어떻게 저런 괴상한 성격이 되었느냐. 모두들 갑론을박하면서 한바탕 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단리유아는 시비를 따라서 한 전각으로 향했다. 먼저 옷을 벗고 목욕을 한 다음 시비가 가져온 옷을 입었다. 백색의 문사의(文士衣)로 큰 것으로 가져온다고 가져온 모양이지만, 그래도 기장이 조금씩 짧았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며 다른 옷으로 바꾸어 다시 가져오겠다는 시비에게 필요 없다고 말린 후에, 자신이 입던 옷이나 빨아서 내일 아침에 다시 가져오도록 시키고 나중에 저녁이 되면 다시 부르러 오도록 했다. 냄새나는 옷 꾸러미를 들고서 인상을 찌푸리는 시비를 뒤로하고 침상위에 정좌하면서 상념에 빠졌다. 서문세절의 얘기를 듣고 보니 벌써 십이월 보름이 지난 것을 알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며칠 되어보이지도 않은데 벌써 한 달 보름이 넘게 시간이 흐르다니. 백로마현(百路魔現)을 상대할 만큼의 보법을 창안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세월 가는 줄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보법은 거의 완성단계에 와 있었다. 물론 아직도 수련이 더 필요했다. 최소한 마음이 일기 전에 본능적으로 펼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려면 더욱 더 수련이 필요할 것이었다. 보법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까 한동안 생각하다가 백로마현(百路魔現)을 능가한다는 의미로 백팔산영환마보(百八散影幻魔步)로 하기로 했다. 자신이 익힌 원래의 보법인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은 수비적인 성격이 강해서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맛이 부족했는데, 이번에 창안한 백팔산영환마보가 그 단점을 충분히 메워 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보타암(菩陀庵)까지 가는 동안에 더 수련에 박차를 가할 생각을 하다가, 앞으로의 행로를 예상해보고는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기 묵죽장(墨竹莊)에서 보타암까지 가는 길은 호주(湖州), 항주(杭州), 소광(紹廣), 여조(余眺), 영파(寧波)까지 간 다음 다시 배를 타야했던 것이다. 가는 길에 이렇다 할 산들이 없고, 대도(大都)들이 연이어 있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쉽지 않을 터였다. 사람들의 눈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이 문제였다. 약간 우회한다면 막간산(莫干山)이나 설규산(雪窺山)이 예상경로에 가깝게 있었고, 그보다 더 멀리 돌아간다면 천목산(天目山)에 들려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시일이 오래걸일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다가 일단은 막간산(莫干山)으로 빠져서 조금 더 수련하다가 항주로 향하고, 대도(大都)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신법을 펼쳐 빨리 지나가기로 했다. 단리유아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시비가 다가와 저녁이 준비되었음을 알리고 장주(莊主)의 처소로 안내했다. 시비의 뒤를 따라서 내원(內院)으로 향하니, 두개의 대문을 지나 한쪽에 조그마한 정원이 있는 집 앞에 이르렀다. 시비가 열어주는 문을 열고 대청에 들어서니 서문세절(西門洗絶)이 한쪽에 부인으로 보이는 이십대 후반의 여자와 예닐곱 살의 여자아이와 함께 서있었다. 단리유아가 그들에게 다가서자 서문세절이, “어서 오십시요. 단리대협. 하하하, 그렇게 차려입으니 전혀 달라 보이는군요.” 깨끗하게 목욕하고 백색의 문사의에 문사건을 쓴 모습은, 아까의 낡아빠지고 찢어진 옷을 입은 대다 산발한 머리카락과 추레한 몰골이었던 모습하고는 천양지차였던 것이다. 지금의 모습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까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좋아보였던 것이다.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는 서문세절이, “이런, 제가 손님을 세워두고 무례했군요. 단리대협, 이쪽은 제 내자되는 사람으로 강호에는 적녀검(赤女劍)으로 알려졌었지요. 그리고 이 아이가 하나뿐인 제 딸인 하령(霞玲)입니다.” 서문세절의 소개에 단리유아가 여인을 돌아보니, 이제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특히 눈썹이 날카롭게 치솟은 모습이었다. 적녀검(赤女劍) 지청화(池靑花)는 십여 년 전 단리유아가 막 강호행(江湖行)을 시작할 때부터 알려진 고수로, 원래 안휘성(安徽省) 서북부일대를 지배하던 정사지간(正邪之間)의 문파인 적산검문(赤山劒門) 문주의 딸이었다. 과거 단리유아도 한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가 이제 막 무명에서 벗어나 한참 명성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성격이 불같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여자와는 될수록 마주치지도 않는 단리유아여서 그녀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었다. 당시 부득불 그녀가 우겨서 싸우게 되었는데, 자꾸만 졌음에도 귀찮게 하는 그녀에게 나중에는 단리유아도 손을 약간 심하게 썼던 것으로 기억이 되었다. 서문세절의 소개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후에 단리유아가, “단리유아라 합니다. 서문부인” 무심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아직도 처녀적의 모습이 남아있는 적녀검(赤女劍)이 코웃음을 치면서, “흥! 정말 팔 년 만에 그대를 만났는데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군요. 오히려 더 괴상해지기만 했나보군요.” 부인의 대답에 놀라서 서문세절이, “아니, 부인. 단리대협을 만난 적이 있었단 말이요? 왜 내게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소?” 저녁에 단리유아가 왔다는 소리를 그녀에게 했을 때, 원래는 혼자서 단리유아와 대화하려는 그를 붙잡고는 자신도 한 번 만나고 싶다고 간청해서 자리를 함께했던 것이었다. 이왕이면 딸아이도 같이하여 소개시킨다면, 훗날 딸아이가 강호에 나가서 만나기라도 한다면 도움도 될 것으로 보여 대동하게 된 것이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나서는 적녀검이 화를 내며, “뭐라구요? 일일이 그런 말까지 내가 할 필요가 있나요? 단지 이 사람을 과거에 한번 만난 적이 있어서 오랜만에 궁금하기도 해서 같이 만나자고 한 것뿐이라고요.” 소리치는 적녀검(赤女劍)의 말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된 서문세절이었다. 처녀 적에는 괄괄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자신과 결혼한 후에는 화를 내는 경우가 드물었고 다소곳한 모습의 현모양처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그들이 그러고 있을 때, 한 쪽의 조그마한 아이는 어머니의 치마 뒤에 숨어서 단리유아를 가끔씩 훔쳐보며 부모님의 말다툼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서문세절이 제정신을 차리고 헛기침과 함께, “흠, 흠. 단리대협, 저희의 결례를 용서하시고 이쪽으로 가시지요.” “흥, 결례는 무슨. 저 인간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아직도 툴툴거리는 적녀검의 말을 듣고 서문세절이, 저 사람이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왜 이럴까하고, 생각하면서 단리유아를 한쪽의 음식이 가득 차려진 탁자로 안내한다. 한쪽으로 아이와 적녀검이 나란히 앉고, 서문세절과 단리유아가 마주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얘, 하령(霞玲)아. 단리대협께 인사해야지.” 딸아이를 보면서 서문세절이 말을 하자, 잠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아, 안녕하세요. 하, 하령이라고 해요. 단리숙부님” 조그마한 목소리로 약간 더듬대며 대답한다. 아이는 처음 본 낯선 사람이지만 여태까지 다른 사람에게 그래왔듯이,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에게 숙부라 불렀던 것처럼 단리유아도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흥, 숙부는 무슨 숙부, 하령아 다시는 저 사람보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알았지?” “어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애야, 앞으로도 숙부라 부르고 공손하게 대해야 한단다. 알았지?” 서로 싸우는 그들을 뒤로하고 단리유아가 아이를 살펴보았다. 아직 어려서인지 눈이 큰 것을 빼고는 특별히 뛰어나거나 예쁘게 생긴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평범함에 마음이 끌려서, “단리유아라고 한단다. 앞으로는 숙부라고 불러도 좋단다.” 단리유아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서문세절과 적녀검은 저 사람이 저렇게 누군가에게 친절히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어서였고,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무토막이 중얼거리듯이 무심한 목소리에 놀랐던 것이었다. 서문세절이 숙부라 부르라고 했던 것도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가급적 단리유아와 친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 단리유아가 그렇게 딸아이에게 관심을 가질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적녀검도 아무리 자신의 딸이라지만 그리 특출한 재능이 있거나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옛날 자신이 한창 미모와 무공으로 이름을 날릴 때도 본체만체하던 사람이 자신의 딸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야릇했다. 아이는 단리유아의 모습이 이상해보였지만 아버지의 말도 있고 해서, “단리숙부, 앞으로 저도 하령이라고 불러줘요.” 천진한 아이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하령아, 이렇게 만나니 반갑구나.” 단리유아의 말에 부모들은 놀라고 아이도 이 숙부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나 표정의 변화가 없고, 목소리도 일정해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닌 듯 했던 것이다. 잠시 그렇게 서로 대화하면서 식사를 하다가 서문세절이 단리유아를 보면서, “단리대협, 그런데 이번에 이곳 태호(太湖)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벌써 혈수마(血手魔)와 싸운 것이 한 달 보름이 넘어서 전 멀리 다른 곳으로 가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동안 며칠 요상하다가, 무공을 수련하면서 보타암(菩陀庵)까지 가는 중이었습니다.” “보타암이라구요?” 단리유아의 말에 서문세절이 묻자, “예, 그들의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이 유명하다니 한 번 보려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흥! 하여간에 무공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니까. 아무리 무공이 좋아도 그렇지.....” 부인의 말에 서문세절이 말을 막으며, “흠, 흠. 단리대협께 그 무슨 말이시오? 단리대협, 저 사람의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런데 아까 전에 그렇게 정신을 놓고서 무엇을 하는 중이었습니까?” 남편의 말에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적녀검도 남편의 이야기에 궁금한 얼굴로 단리유아를 바라보았다. “음, 그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보법을 수련하는 중이었습니다.” 부부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적녀검은 역시나 하는 얼굴이었고, 서문세절은 어이가 없다는 모습이었다. 한쪽의 서문하령(西門霞玲)은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궁금한 얼굴이었다. “단리대협, 정말로 보법을 수련하는 중이었다는 말입니까? 제가 보기엔.....” “흥, 정말로.....” “혈수마(血手魔)와 싸운 후에 느낀바가 있어서 수련에 빠졌는데, 잠시 주변을 인식하지 못했나 봅니다.” 단리유아의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어투에 한동안 기가 막혀서 말을 못하다가 서문세절이, “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요. 정말 대단하시군요. 단리대협, 무공에 그렇게 열심이시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흥, 그게 정신 나간 짓이지. 도대체 무엇이 부러워할 일이라는 말이에요?” 화가 나 남편의 말에 적녀검이 소리친다. 당황하여 헛기침을 연발하는 것을 보고 서문하령이 어머니를 붙잡고 진정시킨다. 잠시 후에, 서문세절이 단리유아를 보면서, “단리대협, 보타암(菩陀庵)에 가는 길이 급하십니까?” “급한 일은 아니지만, 시간을 허비하여 미룰 일도 아닙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문세절이, “그럼 본장에서 며칠 더 머물다 가실 수는 없겠군요?” “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보타암까지 가는 며칠간 인적이 없는 곳에서 수련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니.” “수련할 곳이 필요하시다면 차라리 저희 집에서 머무르면서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뒷동산의 오죽림(烏竹林)은 인적이 없고 조용한 곳이니 그 속에서 하신다면 좋을 텐데요. 또 여기 하령이도 대협과 더 친해지고 싶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말과 함께 눈짓하는 것을 보고 서문하령이, “단리숙부, 우리 집에서 하세요. 저두 아저씨와 친하게 놀고 싶어요.” 남편과 딸이 하는 말에도 적녀검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서문세절이 계속해서 청한다. 서문하령도 단리유아가 머무르기를 계속 청하자 단리유아가, “그럼, 며칠간만 머무르도록 하지요.” 단리유아가 승낙하는 말에 모두가 희색이 만연해졌다. 적녀검도 예상외로 웃으며 단리유아가 머무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혈수마(血手魔)와의 대결만을 물어보았다. 같이 혈수마와의 대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단리유아가 저녁을 끝내고 거처로 돌아온 시각은 술시(戌時:19-21시)가 다 지나가는 시각이었다. 원래는 막간산(莫干山)에서 며칠 머물며 수련하고자 했지만, 묵죽장(墨竹莊)에서 머물며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막간산으로 우회한다면 하루정도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니 마찬가지 일 것이었다. 그러다 아까 서문하령을 보면서 왜 자신이 그 아이에게 끌렸는지 생각해보았다. 예쁜 얼굴도 아니고, 애교가 많아서 귀여운 면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재능도 별로인 것 같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일이었다. 한 참을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알 수가 없자, 고개를 흔들며 생각에서 깨어났다. 운공을 하여 피로를 푼 후에 잠이 들기로 하고 운기를 시작했다.    ******* 단리유아가 서문하령을 보고 끌리는 이유는? 생각을 해보세요. 주인공은 거의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도 그저 여자구나 하는 정도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를 처음 만났는 데에도 끌리는 것은 무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끌릴까요? 참고로 여자아를 좋아하는 변태나, 동심에 끌린 것은 아니랍니다. 묵죽장(墨竹莊) 묵죽장(墨竹莊) 3 다음날부터 묵죽장(墨竹莊)에서 머물며 백팔산영환마보(百八散影幻魔步)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대나무 숲에서 하는 보법 수련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각각의 대나무를 피해서 보법을 펼친다는 것은 지난한 일로, 처음에는 방향전환이 제대로 안 되어 몇 번이고 대나무와 부딪친 적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숙달되어, 각각의 대나무를 적으로 삼아서 포위하고 물러나는 수련을 계속했다. 새벽에 일어나 운기행공을 하고 나한권(羅漢拳)으로 몸을 푼 후에, 아침을 먹고 묵죽장(墨竹莊)을 둘러싸고 있는 오죽림(烏竹林)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보법을 수련했다. 점심은 시비가 가져와서 해결하고 다시 계속 수련하다가, 해가 지면 돌아와 저녁을 먹고 운기행공을 한 후에 잠이 들었다. 며칠 동안 별다른 일이 없이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되었다. 서문하령(西門霞玲)이 점심 때 시비를 따라 대나무 숲에 들어와 옆에 앉아서 구경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무공연마를 외인이 보는 것은 큰 금기시되는 사항이니. 단리유아 자신이 그런 것을 신경 쓰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불문율처럼 된 일이어서 묵중장의 사람들도 알아서 처신해 주었다. 첫날 단리유아가 보법을 수련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여기저기 나타나는 환영(幻影)에 감탄하며 소리 지르며 좋아하던 서문하령(西門霞玲)은, 심심한지 다음날부터 단리유아에게 그만하고 자신과 놀아달라고 떼를 썼다. 서문하령이 보기에 다른 사람들은 이 괴상한 숙부를 보면서 슬슬 피하거나 두려워하는 데, 자신이 볼 때에는 말하는 것이 약간 이상할 뿐 그다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 그대로 해주니 더욱 좋았다. 장내에서는 가법(家法)에 따라 마음대로 뛰놀 수도 없었고, 놀이 상대가 되어줄 자신 또래의 아이들도 없었다. 어른들이 귀여워 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맘대로 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문하령의 말에 단리유아가 수련을 멈추고는, “그래, 하령(霞玲)아. 이 숙부가 어떻게 해 줄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서문하령이, “목석(木石) 아저씨, 지금까지 무엇 한 거야? 나도 같이하면 안 돼?” “뭐? 목석 아저씨? 하령아 그게 나한테 하는 소리냐?” 단리유아가 서문하령의 말에 조용하게 다시 물어보았다. 이에 서문하령이 약간 머뭇거리며, “왜, 왜요? 그렇게 부르면 싫어요? 엄마도 아저씨를 그렇게 부르던데?” 잠시 적녀검(赤女劍)을 생각하다가 단리유아가 고개를 흔들며, “아니란다. 네 마음대로 부르고 싶은 데로 부르렴.” 말을 하는 단리유아도 정말 이상했다. 어째서 이 아이에게는 이렇게 너그러워지는지, 마음이 풀어져 끌리게 되는지. “음, 좋아요. 아저씨. 목석이라는 말이 좋지 않은 말인가 보죠? 다시는 그런 말 안할게요.” 단리유아가 서문하령(西門霞玲)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에, “아까 아저씨가 무엇을 하는지 물었지? 음, 그래. 술래잡기하고 비슷한 것이란다. 다른 사람을 쫓아가 따라잡거나 피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술래잡기요? 와! 나도 그것하고 싶어요. 아저씨.” 단리유아의 말에 앉아있던 조그마한 바위위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바위위에서 기뻐서 손뼉을 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서문하령을 안아 올려서 껴안고 한참을 있다가 답답해하자 다시 내려놓았다. 정말 이 아이와 자신과는 무언가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설혹 대화를 하는 중에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감정의 동요가 없었는데, 유독 이 아이와 있을 때는 감정이 살아나서 자신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서문하령의 보채는 소리에 생각에 깨어났다. 아이의 말을 듣고 다시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수련하는 백팔산영환마보(百八散影幻魔步)는 아이가 따라 하기 불가능하니 다른 것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하령아, 내가 이제부터 여기에 서있을 테니, 아저씨를 잡아보아라. 나는 일곱 걸음이상 걷지 않고 피할 테니.” 조용하게 말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하령이, “일곱 걸음이요? 정말이죠, 아저씨? 음, 그럼 령(玲)아가 아저씨를 붙잡으면 무엇을 줄 거죠?” “네가 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네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기로 하겠다.” 단리유아의 말에 서문하령(西門霞玲)이 기뻐하며 당장 시작하자고 조른다. 단리유아가 한 쪽에 서자 서문하령이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조그마한 아이가 빨라야 얼마나 빠를 것인가? 아무리 해도 단리유아를 붙잡을 수 없었다. 분명히 가만히 서 있는데도 막상 똑바로 달려가서 붙잡으려면 이미 단리유아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단리유아가 펼치는 것은 평범한 걸음이 아니었다. 칠성둔형(七星遁形)이라는 보법으로 일곱 걸음이내에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상승의 보법이었다. 본래 칠성둔형(七星遁形)은 종남파(終南派)의 비전절기였지만, 오래전에 그 비결(秘訣)이 실전되어서 종남파에도 껍데기만 남아 겨우 그 형(形)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림에도 이 보법을 알고 있는 자들은 많았지만 이것이 상승의 무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칠성둔형은 외형만 비슷할 뿐, 원래의 구결은 사라져버린 삼류무공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해도 단리유아를 붙잡을 수가 없자, 서문하령(西門霞玲)이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울먹이며 단리유아를 향해서, “흐흑, 훌쩍. 아저씨 나빠! 령(玲)아와 놀아주기 싫은 거지? 일부러 피하기만 하고. 훌쩍.” 울먹이는 서문하령(西門霞玲)의 말에 단리유아가 다가가 안아 올리며, “그만 울어라. 아저씨가 잘못했으니. 하령아, 너도 아저씨가 한 것을 배우고 싶지?” “응? 응. 령아도 배우고 싶어. 나도 가르쳐줘. 아저씨” 서문하령의 말에 단리유아가 내려놓으면서 한쪽 땅바닥에 북두칠성 모양의 발자국을 찍었다. 잠시 그 모양을 보다가 아이가 너무 어린 것을 알고 다시 최대한 좁혀서 작게 발자국을 만들었다. 다 만든 후에 곁에서 보고 있던 서문하령(西門霞玲)을 보면서 보법의 원리를 설명했다. 아직 어린 아이라 이해할 수는 없을 테니, 간단하게 움직이는 방향만 가르쳐주고 해보도록 했다. 아이가 따라서 움직이기를 얼마나 했을까? 하나의 변화를 어느 정도 익히자, 이번에는 단리유아가 붙잡고 서문하령이 피하기로 하고 시작했다. 단리유아가 마음만 먹는다면 완전한 칠성둔형(七星遁形)을 펼치더라도 잡을 수 있겠지만, 단순히 일직선으로 붙잡으려고만 했다. 서문하령이 보법의 변화대로 움직이자, 위태위태했지만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자신이 피한 것이 너무 기쁜지 좋아서 날뛰는 모습을 보이며, 더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이렇게 매일하다 보니 점점 오후에는 수련보다는 술래잡기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서문하령을 어께에 무등을 태우고 묵죽장(墨竹莊)으로 돌아가는 것이 매일 일과로 이어졌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는 서문하령의 부모뿐만 아니라 장내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라게 되었다. 그래서 그와 친교를 맺고자 몇 사람이 접근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감정의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는 모두가 이내 그만두게 되었다. 그들은 도대체 저 사람이 하령이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서 다정하게 놀아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장주의 딸이라 하지만, 솔직히 너무 평범해서 그 외모와 성격 모두 특출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묵죽장(墨竹莊)에 온지 오일이 흘렀을 때, 단리유아는 다시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자신도 모르게 서문하령(西門霞玲)에게 끌리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던 것이고, 같이 보낼수록 무공에 대한 생각은 멀어지고 점점 곁을 떠나기가 싫어졌던 것이다. 문득문득 정신을 차리고 왜 그렇게  그 아이와 함께 있으면 달라지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서문세절(西門洗絶)에게 떠나겠다고 말한 후, 다음날 울면서 매달리는 서문하령을 뒤로하고 묵죽장을 떠나 다시 보타암(菩陀庵)으로 향했다. 서문하령에게는 나중에 더 자라면 익히도록 칠성둔형(七星遁形)의 비결을 적어서 그 어머니 되는 적녀검(赤女劍) 지청화(池靑花)에게 주었다. 귓전을 울리는 서문하령의 울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 했지만 고개를 흔들며 신법을 펼쳐 전력으로 멀어져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도 없는 들판에 혼자 서 있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잠시 한숨을 쉬다가,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막간산(莫干山)을 보고는 그곳을 향해서 신형을 돌렸다. 그동안 묵죽장(墨竹莊)에 머물면서 서문하령 때문에 제대로 수련을 못했던 것이다. 결코 서문하령과 같이했던 시간이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며칠이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복잡하고 다난(多難)했던 이십여 년의 삶속에서 아마 가장 즐거웠던 때였을 것이다. 비록 이제 헤어지면 언제나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는 두고두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씌워진 어머니와의 맹세가 없었더라면 아마 그 아이의 곁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막간산(莫干山)에 들어가 미친 듯이 수련에만 몰두했다. 보법과 함께 다른 무공들도 연마하면서 며칠 동안이나 산 속 깊은 계곡에서 모든 것을 잊고 수련에 빠져들었다. 그동안의 수련 속에 처음 낭야산(狼倻山)에서 나온 이후부터 생각해왔던 무공들도 완벽하게 연마할 수 있었다. 백팔산영환마보(百八散影幻魔步)를 비롯한 천보검법(天補劍法) 세 초식, 내공의 회수에 대한 수련도 만족스러울 만큼의 진전을 보였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정신없이 무공연마에만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다시 길을 떠나기로 하고, 몸을 씻은 후에 막간산(莫干山)을 나와서 출발했다. 신법을 펼치거나 인적이 있을 때는 걷기도 하면서 우선 가까운 항주(杭州)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완전히 상거지의 몰골이어서 옷을 갈아입고 제대로 씻고 나서 보타암(菩陀庵)으로 향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걸어서 멀리 항주가 눈에 들어올 때, 시각은 이미 주위가 어두워지는 유시(酉時:17-19시)말이었다. 항주(杭州)는 옛말에 하늘에는 천당, 땅위에는 소주와 항주(上有天堂 下有蘇杭)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진(秦)나라 때 전당현(錢塘縣)이 설립된 이후 한(漢)나라 때부터 항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수(隋)나라 양제에 의해 대운하가 개설되어 남북을 잇는 교통과 무역의 주요거점이 되었다. 사다지부(絲多之府)로서 비단과 용정차(龍井茶)로 유명한 곳이었고, 서호(西湖)의 아름다움과 영은사(靈隱寺), 보석산(寶石山)등 수많은 명승고적이 즐비한 곳이었다. 또 강호에서는 백화장(百花莊)이 있어서, 매년 중양절에 전 제자들이 성장(盛裝)을 하고 서호에 나가서 그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면서 지나던 모든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멀어져갔다. 허리에 검을 차고 어께에는 도를 맨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당장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쫓아내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추레한 몰골로 객잔을 찾아 들어서니 점소이가 밀어내려다 칼을 보고는 강호인(江湖人)임을 알고,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설을 삼키면서 물러났다. 우선은 씻고 나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점소이를 시켜서 옷가지와 목욕할 수 있는 곳을 요구했다. 물통을 세 번이나 새롭게 바꾸고 나서야 어느 정도 깨끗해진 것 같았다. 가져온 흑의(黑衣)를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탁자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는데, 해시(亥時:21-23시)가 된지도 한참이어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만 몇 있을 뿐 객잔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점소이에게 물어보니 오늘로 원단(元旦)이 지난 지 열흘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묵죽장(墨竹莊)에서 나온 지 거의 스무날이나 된 것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시일이 너무 지난 것을 생각하고, 항주(杭州)를 벗어나면 신법을 펼쳐서라도 보타암(菩陀庵)에 되도록 빨리 도달하기로 했다. 자신이 보타암까지 가는 동안에는 항주의 백화장(百花莊)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세력이나 고수도 없어서 지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련도 더 이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급한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미적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단리유아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객잔의 문을 열고 세 명의 장한이 들어왔다. 한 명은 나이는 삼십대 정도이고 흑의(黑衣)를 입었는데, 키가 단리유아만큼이나 크고 허리에는 붉은 색의 채찍을 맨 모습으로 쭉 찢어진 눈초리가 잔인한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옆의 사람은 적의(赤衣)에 삼십대 정도의 나이에 키는 육척에도 훨씬 못 미쳐 보이지만 전신이 근육으로 싸여있는 사람으로 큰 통나무를 세워놓은 듯했고, 다른 한명은 흰 섭선(攝扇)을 들고 있는 입술이 얇고 눈빛이 차가운 이십대 백의(白衣)청년이었다. 그들이 들어와 한 쪽의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서로 이야기한다. “형님, 이번에 정파에서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한다면, 앞으로 우리 같은 사파(邪派)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우람한 장한이 흑의대한에게 말하자, “아우, 조용히 얘기하게. 혹시라도 정파의 떨거지들이 듣기라도 한다면 어쩌려는 것인가?” 차가운 질책에 움찔하다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는, “형님, 이곳 항주에서 백화장(百花莊)의 냄새나는 계집들을 빼고, 우리를 상대할 놈이 어디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런 계집들을 제외하고 감히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우리 절강삼마(浙江三魔)에게 덤비겠습니까?” 옆에서 섭선을 흔들어 얼굴에 부치고 있던 백의청년이 거들었다. 절강삼마는 절강성(浙江省)일대의 유명한 사파고수들로서 의형제지간이었다. 흑의대한이 큰형인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이고, 적의장한이 둘째인 절장(浙掌) 유관청(兪關靑)이고, 백의 청년이 막내로 화요(花妖) 정두후(鄭斗侯)였다. 모두가 실력이 뛰어났고, 손을 쓰는데 냉정해서 한번 손을 쓰면 반드시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는 자들이었다. 이들 절강삼마는 절강성 지역을 독행(獨行)하면서 싸움을 대리하거나 이권(利權)다툼에 끼어들면서 강호를 전전하고 있었다. 대형인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이 그들의 큰소리에 답하면서, “그건 그렇지만, 이번에 정파가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한다면, 이제 우리도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될 걸세.” 화요(花妖) 정두후(鄭斗侯)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지요. 저희 같은 사파인 들에게는 정말 재앙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검마(劍魔) 진일명(陳一命) 어르신을 주축으로 저희도 결맹을 하려고 했잖습니까? 비록 화경(化境)의 고수에 수에서는 밀린다 해도 그렇게 큰 차이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오래전에 은거했던 노물들이라도 끌어들일 수 있을 테니 별로 큰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빌어먹을 싸움에 미친 녀석 때문에 혈수마(血手魔) 어르신이 돌아가셔버리니, 저희 쪽에서는 한쪽 받침대가 빠져버린 모양이 되어버렸지요. 저는 그 소문을 듣고는 정말 심장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군요.” “꽝!” 절장(浙掌) 유관청(兪關靑)이 막내의 말을 듣고 탁자를 손으로 내려치고는, 화가 나서 소리치며, “맞습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하필 그곳을 지나가다가 싸움을 걸 것은 뭡니까? 그리고 혈수마(血手魔) 어르신도 싸우지 않고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야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미치광이하고 싸워서 개죽음이라니. 정말.....” 분통이 터져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의 그를 보면서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이 고개를 끄덕이며, “휴, 정말 문제가 심각하네. 잔결마(殘缺魔) 수삼결(首三缺)이라도 검마(劍魔) 어르신을 도와서 함께한다면 그나마 나을 텐데, 그 인간도 원체 독불장군이어서 도대체가 다른 사람의 말은 들어먹지를 않으니. 빌어먹을, 우리의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가버렸어.”      모두들 한숨쉬며 탄식하다가 화요(花妖) 정두후(鄭斗侯)가, “형님들,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알다시피 절강성(浙江省) 내에는 이렇다 할 사파의 세력이 없어서 만일 정파가 결맹하여 사파를 압박한다면 견딜 수 없을 텐데요.” 절강성(浙江省)내의 주요문파로는, 정파로서 항주(杭州)의 백화장(百花莊), 북부 호주(湖州)일대의 묵죽장(墨竹莊), 동부의 보타암(菩陀庵), 중부지역인 용문산(龍門山)과 금화(金華)일대 대불사(大佛寺), 남부의 온주(溫州)과 남안탕산(南雁蕩山) 지역의 승천보(昇天堡)가 있었고, 사파로서 북부 천목산(天目山)일대의 혈사파(血死派), 동부연안의 괄창산(括蒼山)과 북안탕산(北雁蕩山)일대의 등마문(騰魔門), 동부의 천태산(天台山)일대의 천태파(天台派), 서부 천리강산(千里岡山)과 구주(衢州)일대의 일광문(一光門)이 있었고, 녹림칠십이채로 중동부 회계산(會稽山) 일대의 회계산채(會稽山寨), 중남부 동궁산(東宮山)의 동궁산채(東宮山寨)등이 있었다. 정사중간으로 서남부 구룡산(九龍山)을 중심으로 선하령(仙霞嶺) 일대의 구룡산막(九龍山幕)이 있었다.   사실 절강성(浙江省)내에는 백화장(百花莊)과 보타암(菩陀庵)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다. 다른 세력들도 대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이 다른 성(省)에 있는 세력들보다 약하다 할 수 있었다. 대다수가 절정고수의 수가 다섯을 넘지 못했고, 문하제자의 수도 오백을 넘는 경우도 없었다. 또 사파보다 정파의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는데, 항주(杭州) 서북쪽지역 천목산(天目山) 일대의 패자인 혈사파(血死派)를 빼고는 대부분이 성의 중앙 지역을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만일 정사대전(正邪大戰)이라도 일어난다면 오래지 않아 사파의 대패로 끝날 것이 확실했다. 화요(花妖) 정두후(鄭斗侯)의 말에 한참을 생각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이, “글쎄,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차라리 안휘성(安徽省)이나 다른 성(省)으로 넘어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네. 자네들은 어찌 생각하나?” “아니, 형님. 우리가 여태 절강(浙江)지역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데, 아무리 비세라 하더라도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맞습니다, 형님.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그쪽에 있는 놈들이 제대로 받아줄지도 의문입니다.” 아우들의 말에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이 한숨을 내쉬며, “아니, 그럼 자네들은 다른 수라도 있다는 말인가? 늦어도 삼월에는 무림맹(武林盟)이 대체적인 세력과 조직을 완성하고 정식으로 강호(江湖)에 나설 텐데, 그때가 되면 우리 같은 일정한 거처가 없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표적이 될 것이네. 설혹, 무림맹에서 사파(邪派)에 대한 공격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디에나 공명심에 빠진 놈들이 우글거리고 있지 않나? 이렇게 기다리다가는 딱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좀....” 절장(浙掌) 유관청(兪關靑)이 망설이며 대답하자 독편 수가량이, “나도 가기 싫네. 그렇지만 이 절강성(浙江省)은 완전히 정파가 압도하는 형세이고 시간도 촉박하니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고 보네. 안휘성(安徽省)은 그래도 사파의 세력이 막강하니 일단 그쪽으로 피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형님, 차라리 잠시 은거(隱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절장 유관청이 내키지 않는 듯이 다시 물어본다. “형님, 그것은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한창 시절에 은거라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소.” 화요 정두후가 큰소리로 반대한다. 이에 독편 수가량이, “음, 막내의 말대로 은거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닐세. 일단 무림맹이 생기면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데, 언제까지 숨어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형님 혈사파(血死派)나 등마문(騰魔門)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절장 유관청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하다가, “글쎄, 그 놈들한테 의탁한다고 뚜렷한 대책이 될 수 있을까? 만약 정파와 싸우게 되면 제일 먼저 우리를 써먹으려고 할 텐데?” “제 생각에도 그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과 우리는 몇 번 밥그릇싸움으로 적대시 한 적도 있으니 뒤끝이 결코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무림맹(武林盟)이 결성되는 삼월이 되면 정파의 공격을 받을 것이 뻔한데.” 화요 정두후의 말에 독편 수가량이, “그래, 싸움도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하는 것이지. 상대와 차이가 너무 크게 나면 싸움도 되지 않지. 아마 백화장(百花莊)과 보타암(菩陀庵) 중에서 한문파만 나서도 다른 세력들이 다 합해도 상대가 될까 말까할 걸. 그동안은 그들이 강호행(江湖行)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무림맹이 생기면 달라질 테니.” “제기랄, 역시 안휘성(安徽省)으로 넘어가는 수가 가장 나아보이네요.” “빌어먹을 그 미치광이 때문에 사파가 완전히 열세에 놓이게 되었소. 그전에는 약간 불리해도 이렇게 정파가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우들의 말에 독편 수가량도 욕설을 퍼부으며, “그래. 그 한 놈 때문에 완전히 판도가 변해버렸다네. 젠장할, 그래도 안휘성(安徽省)은 사파의 세력이 어느 곳보다 강하니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네.” 보타암(菩陀庵) 보타암(菩陀庵) 1 한동안 단리유아를 욕하거나 강호정세에 대해 이야기 하던 절강삼마(浙江三魔)는 잠시 후,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때 단리유아와 그들과의 거리는 약 사 장(丈) 정도의 거리로서 서로 대각선의 위치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곁에서 들어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겠지만 단리유아에게는 그 정도의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절장(浙掌) 유관청(兪關靑)이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을 보면서, “그런데, 형님 우리를 모이게 한 진짜 이유가 뭐요? 무림맹(武林盟)의 소문이야 몇 달 전부터 떠돌았으니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 미치광이가 혈수마(血手魔)를 죽이지만 않았어도 그리 큰일이라고 볼 수 없었을 텐데.” “그렇소. 형님. 나도 궁금하구려.” 두 사람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펴보다가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이 작은 소리로, “너희들도 며칠 전부터 천목산(天目山)에서 생긴 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지?” 화요(花妖) 정두후(鄭斗侯)가 독편 수가량을 보면서, “형님, 그 소문이라면 오일 전부터 천목산(天目山)에서 청색의 서기(瑞氣)가 하늘로 솟구친다는 것 말입니까?” “저도 소문을 들었지만 정말로 무슨 일일까요?” 절장(浙掌) 유관청(兪關靑)도 독편 수가량에 물어본다. 두 사람의 물음에, “글쎄, 나도 듣기만 해서..... 자시(子時:23-1시)만 되면 한줄기 청색 서광(瑞光)이 천목산(天目山) 하늘위로 솟구친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현재 절강(浙江), 강소(江蘇), 안휘(安徽) 일대는 떠들썩하지. 관(官)에서는 난세를 평정할 성군(聖君)이 나타날 징조라 하기도 하고 무슨 세상을 구원할 현자나 영웅이 태어날 징조라고 떠들지만, 우리 같은 강호인(江湖人)들이 보기에는 절세(絶世)의 영약이나 신병이기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화요 정두후가 독편 수가량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한다. “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묻혀있던 세상에 보기 드문 영물(靈物)이나 절세의 이기(異器)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무슨 인물이 태어날 징조라고는 볼 수 없으니까요.” “그래. 내 생각에는 그 중에서도 신병이기가 아닐까 생각하네. 서광(瑞光)이 솟구치는 곳이 천목산(天目山) 낙성곡(落聲谷)이라는 것이 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하지. 오래전 옛날 천강신문(天剛神門)이 위치하던 곳이 천목산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관천봉(貫天峯)일대라고 알려져 있지. 낙성곡은 바로 관천봉 아래에 있으니 아마도 천강신문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네. 하지만 그동안에 혹시나 하고 멸망한 천강신문의 터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정확한 위치를 찾지는 못했지. 시간이 오래 흐르기도 했지만, 과거 천강신문이 무너질 때, 최후의 수단으로 기관을 움직여 자폭해서 모든 것이 파묻혀버렸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말일세.” 절장 유관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독편 수가량의 말을 듣고 나서, “하지만 형님, 지금 천목산(天目山) 일대는 혈사파(血死派)의 권역인데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겠소?” “흠, 다른 때 같으면 그들도 막아설 테지만 현재 수백 명의 강호인(江湖人)이 몰려드는 상황에서는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할 걸세.” “맞습니다. 고수라고 해보았자 장문인인 혈사괴수(血死怪瘦)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명성이 있는 놈들이 없으니 막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거요. 괜히 막아섰다가는 멸문을 자초할 테니.” 화요(花妖) 정두후(鄭斗侯)가 대답한 다음에 다시, “그놈들도 자신들의 터전에서 보물이 나온다면 권리를 주장하겠지만 어차피 강호(江湖)에서는 힘이 강한 자의 말이 정의이니 뭐 별 수 있을라고요. 그런데 형님들, 우리가 지금 그곳으로 출발한다면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요?”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이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아니, 그렇게 늦다고는 할 수 없지.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곳에서 어떤 물건이 나타났다면 진법(陣法)이 펼쳐져서 가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지금 간데도 늦지는 않을 걸세, 이제 서기(瑞氣)가 솟구친 것이 오일 밖에 안 되었으니. 문제는 우리가 가서 그 물건을 얻을 수 있나가 중요하지. 밤마다 자시 무렵이면 광채가 솟구쳐서 멀리 안휘성(安徽省)나 절강성(浙江省)에서도 보일 정도니 지금 정도면 강호(江湖)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테니.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고수들이 몰려올 것이네.” 절장(浙掌) 유관청(兪關靑)이 그 말을 듣고 나서 큰 소리로, “아니, 형님. 그러면 우리가 가도 다른 사람이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눈뜨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것 아니요?” “쉿, 조용히 하게. 도대체가 자네는 정신이 있나? 한 사람이라도 모르면 모를수록 좋은 일을 크게 소리치면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독편 수가량이 절장 유관청의 입을 막으며 아우의 실수를 질책한다. 이에 절장 유관청이 입을 막은 손을 떼어내면서, “형님, 이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텐데, 우리가 조용히 말한다고 얼마나 효과가 있다고 그러시오. 답답하게 시리. 그냥 크게 말합시다. 원 답답해서 죽겠소. 그리고 그 손은 언제 닦은 것이요? 냄새가 지독해서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소.” “뭐? 도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떠드느냐?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못하고. 하여간에 네 녀석은....” 두 사람이 잠깐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화요 정두후가, “형님들 그만 좀 싸우고, 우리가 가서 어떻게 그 물건을 얻을지나 얘기해 봅시다.” 이에 절장 유관청이 답하며, “글쎄, 뭐 별다른 방법이 있을라고? 가서 기다리다가 어떤 놈이 얻었을 때 살짝 뒤통수를 쳐서 아무도 모르게 뺏어오는 수밖에.” “쯔쯧, 형님은 생각이 있소? 없소? 정말이지..... 그곳에 적어도 수백 명의 강호인(江湖人)들이 몰려들 텐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소? 게다가 점점 수가 늘어날 텐데, 또 생각대로 천강신문(天剛神門)의 유물이라면 이름난 고수들도 모여들 텐데 그게 생각만큼 쉬울 것 같소?” 화요 정두후의 핀잔에 잠깐 얼굴을 붉히던 절장 유관청이 화를 내면서 큰소리로, “뭐, 이 기생오라비 같은 자식아. 그럼 너한테는 다른 좋은 생각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맨 날 입만 살아서 여자나 건드리는 주제에.” 일어나서 화요 정두후의 멱살을 잡고 소리친다. 화요 정두후도 그 소리에 화가 나서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며 무식쟁이니 오입쟁이니 하면서 욕을 하면서 싸운다. 이에 독편 수가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억지로 갈라놓으면서, “그만들 두지 못하겠느냐? 둘째, 너는 도대체가 목 위에 달린 그 물건은 어디다가 써먹을래? 좀 생각 좀해라. 아니면 입 닥치고 조용히 하던가. 그리고 막내 너도 아무리 둘째가 머리가 나쁘다고 해도 의형(義兄)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했으면 그 만큼의 대우를 해야지. 함부로 말하면 되겠느냐? 둘 다 서로 사과하고 앞으로의 일이나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고 멀뚱거리다 독편(毒鞭) 수가량(須架梁)의 점점 험악해져가는 표정에 할 수 없이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사과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의 표정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독편 수가량이, “흠, 흠. 우리가 비록 절강성(浙江省)에서는 고수라고 알아주지만, 아마 그곳에 간다면 이름도 내밀지 못할 것이네. 소문을 듣고 올 놈들이 한둘이 아니니.” “아니, 형님. 그럼 우리가 가도 물건을 얻을 가망성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그곳에 갈 필요가 있소? 잘못했다간 눈먼 칼에 맞아서 죽는 줄도 모를 텐데.” 절장 유관청이 갈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표하며 대답한다. 이에 독편 수가량이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다가, “나도 우리가 가도 별 가망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다시 오는 것도 아니니 가지 않을 수도 없지. 우리 같은 강호인(江湖人)에게는 무공을 높일 기회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지. 비록 일이 잘못돼서 죽을 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칼 날 위에서 살아가는 인생(人生)인데,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겠나? 혹시라도 우리가 얻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어쨌든 그곳까지는 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두 사람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서로가 고개를 모으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잠시 더 듣다가, 단리유아는 그들이 이야기한 소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본시 천강신문(天剛神門)은 천목산(天目山) 낙성곡(落聲谷)에서 관천봉(貫天峯)에 이르는 길 사이에 위치해있었다. 원시마교(原始魔敎)는 섬서성(陝西省) 태백산(太白山)에 위치해 있었고, 봉황곡(鳳凰谷)은 강서성(江西省) 북부 려산(廬山)에 위치해 있었다. 또 원시마교의 후예인 수라혈교(修羅血敎)는 호남성(湖南省) 무릉산맥(武陵山脈)의 무릉원(武陵源)이 본거지였다. 그 옛날 천강신문(天剛神門)과 봉황곡(鳳凰谷)이 힘을 모아 합공했다고 해서, 당시 최강의 전력이었던 원시마교를 멸문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개문파로서는 강호사상(江湖史上) 가장 강대했던 원시마교(原始魔敎)가 멸망한 주요원인은 삼대교주였던 천마노조(天魔老祖)가 후계를 지정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탈겁(脫劫)한 후에, 서로 교주위를 두고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회정구마(灰情九魔)를 제압하는데 전력(戰力)의 삼할 이상을 소모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전력은 천강신문과 봉황곡의 연합세력보다도 컸었다. 그러나 회정구마를 죽인 후에 다시 그들이 세력을 나누어 전면전(全面戰)을 치르고 있을 때, 갑자기 봉황곡과 천강신문의 기습으로 멸망되었던 것이다. 이미 서로 싸우다 수많은 고수들이 죽어서 세력이 삼분의 일도 남지 않아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살아남은 이들이 모여 형성된 것이 수라혈교(修羅血敎)로 절치부심으로 힘을 기르며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칠백여년 전에 막강한 전력을 모은 수라혈교가 봉황곡과 천강신문을 기습으로 멸문시켰는데, 무공보다는 진법(陣法)과 기관학(機關學)에 정통했던 봉황곡은 큰 어려움 없이 멸문시킬 수 있었지만 천강신문에서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었다. 천강신문이 수라혈교의 기습으로 멸망하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천강신문을 둘러싼 삼면의 절벽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이 결과 수라혈교는 전력의 오할 이상이 천강신문과 공멸해서 땅속에 파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후일 천외검문(天外劍門)과 광한궁(廣寒宮), 태양곡(太陽谷)의 연합공격에 멸망하게 된 것도 이런 결과 때문이었다. 단리유아가 그들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정말로 천강신문(天剛神門)의 유물이라면 대다수의 강호인(江湖人)들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일 터였다. 하지만 몇 백 년이나 땅속에 잠들었던 물건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정말 이상했다. 최근에 아무런 천재지변이 없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설혹 천강신문의 비밀 장보동(藏寶洞)이 함몰된 천강신문의 터에서 떨어져 있었더라도 하필 강호가 어수선한 이 시기에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림맹(武林盟)이 생기자마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만일 이 일이 누군가의 음모여서 모여든 강호인(江湖人)이 모두 죽게 된다면 정사대전은 피할 수 없는 외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수백 명의 강호인이 서로 보물을 차지하려고 싸운다면 수많은 원한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한 두 사람의 죽음이라면 모르지만 수백 명의 사람이 죽는다면 설혹 무림맹(武林盟)이 싸움을 멈추려하더라도 전혀 손쓸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은 음모인 것 같았지만 그들을 찾아가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테지만 더 이상 비무행(比武行)을 지체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물욕(物慾)으로 죽음의 구렁텅이에 들어서는데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설혹 자신이 설득한다고 해도 이미 눈앞의 보물에 눈이 먼 사람들일 텐데.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보타암(菩陀庵)으로 떠나기로 했다. 어차피 보타암에 들린 후부터는 계속 남하해서 세외(世外)로 나갈 테니, 그 일에 신경 쓸 필요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그래도 관심이 가는 사람은 사광(四狂)정도에 불과했다. 서문하령(西門霞玲)도 있었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더구나 묵죽장(墨竹莊)은 거의 강호 일에는 상관하지 않는 세력인데. 고개를 흔들며 앞으로 만날 보타암의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에 대해서 생각했다.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은 보타암(菩陀庵)의 최고무공으로 총 구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초식 하나하나가 절초인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마지막 구초는 어검술(御劍術)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신이 보타암을 찾아가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마지막 초식을 보기위한 것이었다. 대비천리어검(大悲千里御劍)이라는 이 초식은 강호에서 어검술의 완성도에서 다섯 손가락에 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현재의 단리유아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것이 이 어검술(御劍術)에 관계된 것이었다. 자신의 천애구검(天涯九劍)에서 칠초부터가 어검술이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동안의 경험으로 그런 형태의 초식일 것이라고 가정하여 만들었지만, 아무리해도 십 장(丈)이상 멀리 검을 날릴 수가 없었다. 억지로 내공을 쏟아 붙는다면 몇 장 더 멀리 보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어검술이라고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일 완벽한 어검술을 보거나 겪어본다면 자신의 검법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문제는 과연 대비천리어검(大悲千里御劍)을 완벽히 익힌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최소한 화경(化境)의 상급에 달한 이가 필요한데, 강호(江湖)에 알려진 보타신니(菩陀神尼)의 무공은 겨우 화경의 초입에 달한 것으로 그것도 최근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 천하오화(天下五花) 중에서 남천검국(南天劍菊) 추화국(秋華菊)이 유명하지만, 그 성취도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화경에도 들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누군가 전대(前代)고수 중에서 익힌 사람이 있기를 바라고 보타암(菩陀庵)으로 가는 것이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세외(世外)로 나가고자 하는 이유도 중원에서는 적수를 찾기가 힘든 것도 있었지만, 자신의 깨달음에 도움을 줄 만한 이를 찾을 수 없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객방으로 향했다. 내일부터는 전력으로 보타암(菩陀庵)을 향할 생각이었다. 천목산(天目山)의 일이 자꾸 뇌리에 남아 생각을 막았지만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보타암(菩陀庵) 보타암(菩陀庵) 2 다음날부터 보타암(菩陀庵)으로의 일정을 서둘렀다. 잠깐 잠깐 멈추어 운기행공으로 잠을 대신하면서 낮에도 사람이 보일 때에는 걷고,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신법을 펼치며 달렸다. 단리유아가 항주(杭州)를 떠나 소광(紹廣), 여조(余眺)를 거쳐 영파(寧波)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영파에 도착해서는 배를 타고 주산군도(舟山群島)로 향했고, 다시 보타암(菩陀庵)이 있는 섬으로 건너간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보타암이 있는 보타산(菩陀山)은 남북으로 이십 리가 조금 넘고, 동서로는 최대 폭이 십리 남짓한 섬으로 오대산(五臺山), 아미산(峨眉山), 구화산(九華山)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사대명산 중의 하나로 중국 제일의 불교 왕국, 해천 불교 왕국, 남해 불교 왕국 등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또한 관음보살의 도량이기도 한데 관음보살은 대자대비로 일체중생의 모든 번뇌를 소멸시켜 주는 분으로 서른세 가지의 모양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여 주시는 분이다. 보타산(菩陀山)이란 이름은 전설상 남(南)인도에 있다는 관세음보살의 영지(靈地) 보타락(補陀落:범어로 Potalaka)의 명칭을 딴 것으로, 당(唐)나라 때 어떤 승려가 관음상(觀音像)을 가지고 오는데 배가 이곳에 이르자 저절로 멎은 채 움직이지 않음으로 보타사[寶陀寺]를 세우고 불상을 모신 것이 성지가 된 시초였다고 한다. 최고봉인 불정산(佛頂山)을 중심으로 수많은 절들과 승려가 있었다. 단리유아가 찾아가고자 하는 보타암(菩陀庵)은 불정산(佛頂山) 남쪽 끝에 위치한 비구니(女僧)들로 이뤄진 청정도량(淸淨道場)이었다. 그날 저녁은 이미 시간이 늦어서 만나기를 원하는 사연을 적은 서찰만을 전하고, 산을 내려와 보타산(菩陀山) 내의 법우사(法雨寺)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날 아침 보타암을 찾아가니 지객승이 안내하여 장문인의 거처로 인도한다. 단리유아가 장문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향하니, 보타신니(菩陀神尼)가 여러 여승들을 거느리고 단리유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타신니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 성품이 자애로워 관음보살의 현신이라 알려질 정도로 덕이 높은 고승(高僧)이었다. 단리유아가 앞으로 삼 장(丈) 가까이 다가오자, 가운데의 금색가사를 입은 오십대의 오 척(尺)이 못되는 둥그런 얼굴을 지닌 자그마한 체구의 노니(老尼)가 합장하면서, “나무아미타불, 단리시주 어서 오십시오. 이곳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구료.” 노승이 보타신니(菩陀神尼)임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며, “신니(神尼)께서 이렇게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거한 속인(俗人)이 신니의 청정(淸淨)을 깨뜨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얼거리듯이 무심히 말하는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주변의 승려들이 놀라 웅성거릴 때, “나무아미타불, 아니오이다. 단리시주. 속세를 떠난 승려가 무엇에 구애되겠소. 신경 쓸 필요 없소이다.” 보타신니(菩陀神尼)가 불호를 외치며 답례한 후 제자들을 진정시킨다. 이윽고 단리유아를 이끌어 대웅전(大雄殿)으로 향한 후에 모두들 좌정한 다음, 단리유아에게 다른 승려들을 서로 소개시켜주었다. 잠시의 시간동안 서로 인사하고 강호의 정세와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나누다가 보타신니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흠, 소승이 어제 그대의 서찰을 받아 읽어보니, 본문의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을 보시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 하셨더구료. 하지만 그대에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소. 본문에서도 현재 그 검법을 완성한 이가 없소이다. 소승이 육초까지 익힌 것이 최고이고, 제자 중에서 추화국(秋華菊)이 오초까지 익혔을 뿐이외다.” 신니의 말에 단리유아도 자신의 생각대로 임을 알았다. 비록 대비천리어검(大悲千里御劍)을 볼 수는 없겠지만 나머지 초식도 강호일절이라 알려져 있으니, 온 김에 그것이라도 보고자 해서,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나머지 초식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니?” 신니가 다시 합장하면서 불호를 외치고, “나무아미타불. 단리시주, 그대의 무공은 이미 강호(江湖)에서도 당할 자가 없고, 본문에서도 적수가 없소이다. 꼭 그럴 필요가 있소이까?” 보타신니(菩陀神尼)가 강호의 소문을 듣고서도 반신반의 하다가 이제 이렇게 눈앞에서 대하니 도저히 자신은 상대가 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모자란다면 자신이 알 수가 있을 터인데 전혀 자신의 감각으로도 그 수준이 짐작가지 않았던 것이다. 비무(比武)를 해보아야 별 소용이 없을 것이고 혹시라도 불상사가 생길까 보아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신니께서는 혹여라도 비무 중에 누군가가 다칠까 걱정돼서 그러시는 모양이시군요. 하면 제가 공격보다는 수비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려도 안 되겠습니까?” 단리유아가 무심히 말하며 물러서지 않고 계속 비무를 요청하자 잠시 눈썹을 찌푸리다, 수비에만 전념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소이다. 그러면 저를 제외하곤 가장 무공이 고강한 화국(華菊)이가 시주를 상대해도 좋겠소?” 문파의 체면 때문인지 제자를 내세우는 보타신니(菩陀神尼)의 태도에 잠시 실망하다가, 어차피 대비천리어검(大悲千里御劍)은 볼 수가 없고 나머지 초식을 보는 것이 목적이므로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곧 한쪽 정사(亭舍)옆의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공터에는 미리 이리 될 줄을 알았는지 황의(黃衣)를 입은 한 미녀가 검을 손에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침어낙안(沈魚落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미인으로 천하오화(天下五花) 중의 남천검국(南天劍菊) 추화국(秋華菊)이었다. 단리유아와 보타신니가 앞장서서 다가오자 추화국(秋華菊)이 보타신니에게 절한 다음에 단리유아를 보면서, “사부님, 저 사람이 이번에 본문에 도전한 그 사람인가요?” 영롱한 목소리가 청량한 계곡물이 흐르는 것처럼 시원하게 들려온다.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보타신니가, “그렇단다, 화국아. 너도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는 전광(戰狂)으로 알려진 단리시주란다. 이번에 너와 비무하기로 하였으니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보타신니의 말에 한동안 단리유아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실망해서 속으로, ‘이 사람이 그 대단한 단리유아(段俚唯我)인가? 강호에서 수많은 싸움을 하고 혈수마(血手魔)도 이 사람에게 죽었다더니 키만 멀대 같이 큰 것을 빼고는 보잘 것 없잖아? 나이도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이십 이세라고 하던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사부의 말도 있고 해서, “보타문의 제자 남천검국(南天劍菊) 추화국(秋華菊)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로군요.” 약간은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약간 당황하거나 얼굴을 찌푸리는데, 그 말을 듣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단리유아라 합니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무심히 말하는 단리유아의 목소리에 이번에는 추화국이 놀라서 눈썹을 찌푸렸다. 강호오대미인(江湖五大美人)의 한 사람으로서 그 아름다움을 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서 쳐다보기에 바쁜데, 이 사람은 마치 인형을 보는 듯이 전혀 변함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 것이었다. 그녀에게 이런 남자는 처음으로 대부분 얼이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에 바쁠 터인데, 저런 무표정이라니..... 정말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보타신니가 제자의 변해가는 얼굴을 바라보다 앞으로 나서서, “단리시주, 그럼 즉시 비무를 시작하지요. 화국아, 너도 정신을 가다듬고 준비를 하여라.” 사부의 말에야 추화국이 상념에서 깨어나며, “그럼 단리대협, 저곳으로 가시지요. 그대에게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드리도록 할 테니.” 추화국(秋華菊)의 말에 보타신니가 속으로, ‘아니, 저애가 오늘따라 왜 저렇지. 평소에는 정요(靜窈)롭던 아이가 흥분해서 냉정을 잃다니.....’ 생각하다가 제자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주의를 준 다음 비무를 시작하도록 한다. 잠시 후, 단리유아와 추화국이 삼 장(丈)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 바라보다가 각기 검을 빼들어 예를 표한 후에 상대를 향해 다가가면서 검을 휘두른다. 추화국이 먼저 공격하고, 단리유아는 아까의 약속도 있고 해서 수비만을 하기로 한다. “대비개문화(大悲開門花)”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의 일초로 꽃잎 같은 검기들이 날아들어 단리유아의 상체를 감싸 안으려 한다. 단리유아가 좌로 피하면서, 검을 들어, “무류낙화행(舞柳落花行)” 백화장(百花莊)의 채대(彩帶)수법의 일초를 검으로 펼쳐서 추화국의 검을 가로막는다. 춤추는 버드나무 가지와 떨어지는 꽃잎의 모습처럼 하늘하늘 거리는 검영(劍影)이 일어나 상대의 검초를 가로막는다. “챙! 챙!” 검과 검이 연달아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는 검광(劍光)이 솟구치고 날리는 검기(劍氣)에 사방으로 검풍(劍風)이 일어난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더욱더 간격을 벌리고, 소리는 없지만 속으로는 같은 문파의 추화국을 응원한다. “대비천장후(大悲穿掌吼)”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의 이초로 상대의 손바닥을 연달아 찔러서 공격하는 초식으로 너무 속도가 빨라서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나중에 일어난다는 초식이었다. 수십 개의 검영이 일어나 검을 쥔 단리유아의 손목을 공격한다. 뒤로 물러나면서 상대의 검을 막기 위해 사천성(四川省)을 종횡하는 사파(邪派)의 고수 파염마수(破閻魔手)의 점환십구로(漸環十九路)를 검으로 연달아 펼치면서 물러난다. 본래는 수법(手法)의 일종이지만 검법으로 단리유아가 바꾼 것이었다. 연환해서 계속해서 펼칠 수 있는 것으로 쾌(快)와 환(幻)이 적절히 배합된 초식이었다. “챙, 챙, 챙!” 단리유아가 뒤로 물러나면서 막고, 추화국(秋華菊)이 달려들면서 계속 초식을 펼쳐 공격한다. 계속해서 검광이 일어나고 검들이 부딪혀 생기는 불꽃이 튀긴다. 밤에 보았다면 불꽃이 마치 폭죽이 허공에서 계속 터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다시 초식을 바꾸어서 추화국이, “대비천수영(大悲千手影)“ 천개의 물샐 틈이 없는 검영(劍影)이 일어나 단리유아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산검(散劍)의 일종으로 일검 일검이 실체이며 동시에 환영이 되는 초식이었다. 이에 단리유아가 물러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는, “폐문십절(閉門十絶)” 멸문된 혈전문(血戰門)의 검초를 펼쳐 막는다. 방원 일 장(丈)이내를 열 가지 초식을 연환(連環)해서 가로막는 초식이었다. 본래는 공격초식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의 수로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보법을 펼친다면 쉽게 피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비무이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계속 초식을 교환하며 이 각(刻)여가 흘렀을 때, 홀연히 장내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니(老尼)가 어린 시동을 한명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자 보타신니(菩陀神尼)가 앞으로 나서며 합장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사숙조(師叔祖). 어인 일로 이곳까지 나오셨는지요?” 노니는 보타문(菩陀門)의 전전대 기인(奇人)으로 세수가 거의 백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과거 보타문의 고수로 남해신녀(南海神女)라 하여 강호(江湖)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후일 무공을 버리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불도에만 전념한 후에 보타산(菩陀山)일대에서 가장 명망 높은 고승이 된 인물이다. 하지만 보타문 한쪽의 암자에 기거하며 세상을 잊고 칩거한지도 거의 삼십 년에 가까워서 장문인(掌門人)이나 일 년에 한두 번 문안을 여쭈기 위해 찾아갈 뿐이었고, 다른 이들은 그곳이 금지로 지정되어서 들어설 수도 없었다. 이러니 다른 비구니들은 만난 적이 없어서 얼굴을 아는 이도 드물었다. 뒤따라오는 시동이 없었다면 누구인지도 모를 이가 대부분이었다. 장문인의 인사에 그제야 누구인지 알고, 장내의 모든 보타문하(菩陀門下)의 인물들이 합장하면서 배례한다. 노니(老尼)가 여러 승려들의 예에 답례한 후, 보타신니(菩陀神尼)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장내의 상황에 대해 물어본다. “장문인, 이것이 무슨 일이요? 근 일 갑자 이내에 본문에서 칼싸움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노니가 칩거하여 참선(參禪)하는 도중에 검광(劍光)이 치솟고, 검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궁금하여 시동에게 물어보았다가 오늘 누군가 찾아왔다는 것을 듣고 직접보기 위해서 내려온 것이었다. “나무아미타불, 사숙조. 강호(江湖)에서 고수로 유명한 사람이 찾아와 본문의 제자와 대결을 하는 중입니다.” “아니,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여기까지 와서 비무를 요청한다는 말이요?” 노니의 물음에 보타신니(菩陀神尼)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죄송합니다. 사숙조의 수행(修行)을 방해해서. 저 사람은 강호십대고수의 일인으로 전광(戰狂) 단리유아(段俚唯我)라 알려진 인물입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적수가 드물고, 십여 년간 천여번이 넘게 싸움을 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제자도 어제 저 사람이 대비천리어검(大悲千里御劍)을 보고자 하여 거절을 하려 했지만,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이라도 보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대결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십대고수라고?” 노니가 놀라서 재차 묻자, “예, 최근에 같은 십대고수의 하나인 혈수마(血手魔)를 죽여서 사실상 강호제일인(江湖第一人)일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사람입니다.” “흠, 그럼 심성은 어떻다고 알려졌는가?” 노니의 물음에 보타신니가 다시, “강호에는 정사중간(正邪中間)으로 알려져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파에 가깝다고 봅니다. 악행을 한 적도 없고, 오직 무공에만 빠져서 다른 것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렇다면 약간의 도움을 주어도 될 것 같구만. 우선 직접 만나보고 관상을 한번 보고 결정하지.” 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후에 다시 장내를 보면서 잠시 단리유아와 추화국이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다, “내가 보니 저 시주와 싸우는 저 여아(女兒)는 대비천수검(大悲千手劍)을 아직 오 초식까지 밖에 익히지 못한 것 같은데, 저 사람에게는 별로 도움도 되지 못할 상대이구료. 그리고 이미 같은 초식을 몇 번이고 펼치면서 공격하는데도 저 사람은 막기만 하는데, 자신이 상대가 아님을 알 텐데도 저 아이는 어찌 그만두지 못할꼬?” 노니가 내려온 지도 일각이 지났고, 두 사람이 싸운 지도 거의 반 시진(時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추화국(秋華菊)은 갖은 수로 공격해보고 검법(劍法)뿐만 아니라 다른 무공도 간간히 사용하면서 공격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단리유아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자존심에 멈추지 못하고 계속 공격하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승부에 대한 생각은 포기한지 오래였다. 공격을 하지 않고 막기만 하는데도 당할 수가 없었고, 한 번도 같은 초식을 사용하지 않고 전혀 다른 초식으로 막는 것을 보고는 차라리 기가 막힐 뿐이었다. 보타암(菩陀庵) 보타암(菩陀庵) 3 이런 순간에 장내를 보고 있던 노니(老尼)가 목소리에 진기(眞氣)를 실어서 두 사람의 싸움을 멈추게 하였다. “나무아미타불, 모두들 그만 싸움을 멈추시게.” 노니의 진기가 충만한 소리에 두 사람이 서로 떨어져 물러났다. 추화국(秋華菊)의 몸은 비록 상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옷자락이 찢어지고, 묶은 머리가 풀려서 어지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서 단리유아는 몇 곳의 옷자락이 잘린 것을 빼고는 호흡도 일정한 모습으로 검을 들지 않았다면 평상시의 모습과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단리유아가 추화국(秋華菊)에게 포권하며 예를 표한 다음, 돌아서서 노니를 향했다. 목소리에 실린 진기에 자신에 못지않은 고수가 나타났음을 알았던 것이다. 노니를 한동안 바라보다 단리유아가 가까이 다가설 때, “허허허, 삼살(三煞)의 상(相)에 만정(萬情)을 잃어가는 모습이로구나.” 노니의 말에 단리유아가 잠시 멈칫하다가 노니를 향해서 합장하며, “소생, 단리유아가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제가 존성대명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무엇이 존성대명인가 다 쓸데없는 속세의 허명일 뿐인데, 과거의 이름은 잊은 지 오래니 그저 무념(無念)이라 부르게.” 노니의 말에 단리유아가 생각해보고 있을 때 옆에서 보타신니(菩陀神尼)가, “나무아미타불, 단리시주. 이분은 소승의 사숙조(師叔祖)되시는 분으로 출가 전에는 남해신녀(南海神女)로 알려진 분입니다.” 이에 단리유아가, “무념신니(無念神尼)시군요. 이렇게 강호의 떠돌이가 뵙게 되오니 영광입니다.” 무심(無心)한 단리유아의 계속된 인사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이름이야 어떠면 어떻고, 만남이야 인연(因緣)이 있으니 만나게 되었겠지. 듣자하니 자네가 대비천리어검(大悲千里御劍)을 보기위해서 왔다고 하던데 맞는가?” “네, 맞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혹시 신니(神尼)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단리유아의 무심한 말에 빙그레 미소 지으며, “나도 펼칠 수는 없다네. 그동안 무공에 신경 쓰지 않은지 하도 오래되어서 내공은 조금 진전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것들에서는 별달리 진전이 없었을 테니.” 말을 하면서 단리유아의 기색을 살펴보면서, “그러나 펼칠 줄을 모르지만 시주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몇 가지 알고 있다네.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단리유아가 무념신니(無念神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겠습니까? 더구나 신니의 한 마디 말씀이라도 제 게는 큰 도움이 될 터인데.” 승낙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노승이 보타신니(菩陀神尼)와 여러 승려들에게 자신과 단리유아가 할 얘기가 있으니 오늘의 대결은 그만하기로 말한다. 보타신니가 단리유아에게 양해를 구해서 비무는 없던 것으로 하기로 했다. 단리유아가 그 말에 동의한 다음 그들에게 예를 표한 후에 무념신니를 따라서 자리를 떴다. 그들이 장내에서 떠나 모습이 보이지가 않을 때, “화국(華菊)아, 내 너를 그렇게 안 보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으면 당장 그만 둘 것이지. 생사대결도 아닌데, 약간의 부끄러움이 무엇이 크다고.... 휴, 그와 너의 명성을 비교해도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설혹 이 사부가 싸운다 할지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 터인데.” 보타신니(菩陀神尼)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다가, “하지만, 사부님. 저 자가 본문의 무공을 무시하는데 가만히 있으라고요?” “뭐라고? 쯪쯪,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럼 그동안 그와 싸운 사람들은 다 무시를 당했다는 말이냐? 솔직히 말해서 네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니 삐친 모양이지.” 보타신니의 말에 처음에는 얼굴을 붉히다가 점점 우는 듯한 표정이 되어버린다. 한 번도 사부가 되어서 자신을 야단친 적이 없었는데, 그 이상한 사람 때문에 오늘 자신의 모양이 우습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보타신니가 다시 달래서 같이 공터를 떠나고, 다른 사람들은 공터를 정리하거나 오늘의 비무에 대해 대화하면서 자리를 떴다. 무념신니(無念神尼)와 함께 단리유아는 자리를 떠나 무념신니의 거처로 향했다 보타암(菩陀庵)에서 동편으로 반각 정도 걸어 올라가니 산중턱부분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암자가 나타났다. 서로 암자내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한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흠, 아까 자네의 모습을 살펴보고, 또 대비천리어검(大悲千里御劍)을 보고자 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주의 경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알겠네.” “예. 제가 어검술(御劍術) 이전까지는 노력하고 궁구하면 대체적으로 난관을 돌파하여 상승의 무공을 익힐 수 있었는데 이 어검술은 도저히 진전이 안보이더군요.”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념신니가, “아마 자네는 현경(玄境)에 도전하는 중이겠지? 그래서 더욱 어검술에 매달리는 것일 테고?” “그렇습니다. 깨달음이 필요하여 계속 고수들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답이 안보입니다. 현경의 고수라도 있다면 찾아가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단리유아의 대답에, “자네는 이미 적수를 찾기 어려울 텐데, 아직도 더 강한 무공이 필요하단 말인가?” 무념신니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신니께서도 제 상(相)을 보셔서 삼살(三煞)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과거 어머니와의 맹세로 운명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자 무공을 익혔지만 아직도 길이 먼 것을 느낍니다.” “그럼, 자네는 단지 현경(玄境)의 경지에 이르면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자네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네.” 무념신니의 말에 충격을 받아 말을 있지 못하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운명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변하는 것이라네.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니 될 수도 있지. 하지만 단지 현경(玄境)의 경지에 오른다고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세.” “그러면, 신니께서는 제가 그 운명에 따라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결코 그런 말은 아니라네. 내말은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지만, 단지 강해진다고 변한다면 그것은 운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네. 자네가 정말로 운명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모든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야 할 것일세. 그 강해지겠다는 일념에서조차도.” “신니께서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지셨으니 그런 말씀을 하시지만 저와 같은 속세의 필부(匹夫)가 어떻게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자유롭다는 말인가? 내가 말인가? 나 역시도 한참 멀었다네. 단지 그 길을 따라 매진할 뿐이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단리유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네가 익힌 심법(心法)은 그런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만정(萬情)을 처음부터 막아버리는 것일 테지? 아마 자네는 강해지고 또 세상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자 그런 심법을 익혔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네가 상승(上乘)의 경지에 오르는 데에 큰 장애가 되고 있음을 모르겠지?” 무념신니(無念神尼)의 말에 단리유아조차도 놀라서, “저의 내공심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보니 자네의 내공심법은 감정을 막아버려서 일체의 동요가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이네. 아마 무정심결(無情心訣)의 일종이겠지. 내 말이 맞나?” 단리유아가 무념신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본래가 회정마공(灰情魔功)의 일부구결이 합쳐진 것으로 점점 성취가 높아질수록 그에 따라 감정도 소실되는 심법입니다.” “회정마공이라고? 아니 그 저주받은 무공을 익혔다는 말인가?” 회정마공(灰情魔功)은 원시마교의 회정마맥(灰情魔脈)의 독문무공으로 감정을 말살한 살수들을 양성하기위한 심법의 가장 대표적인 무공이었다. 이와 비슷한 무공으로 살수무정심결(殺手無情心訣)이나 옥녀무정심결(玉女無情心訣)이 있지만 회정마공처럼 극악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것들이 일시적으로 무공을 연성할 때나 특정상황에서 부동심(不動心)을 강제로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회정마공은 완전한 감정의 소멸에 의한 살인기계들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후일에 이 회정마공의 구결 일부분이 흩어져 들어간 것이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무공이었다. 단리유아가 무념신니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회정마공(灰情魔功)이 포함되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한 중심을 이루고 있을 뿐.” 단리유아의 말에 무념신니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네의 심법이 회정마공(灰情魔功)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면 자네가 현경(玄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요원할 것이네. 자네는 과거 현경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 중에서 그러한 심법을 익힌 자가 있다고 알고 있나? 아니지, 모두가 수십 년 동안 갖가지의 일을 겪으며 깨달음을 얻는 가운데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일세. 현경의 경지가 마음의 깨달음을 중요시하는데 아예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찌 상승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겠나? 모든 것을 아예 막아버리는 그런 심법은 어느 수준까지는 쉽게 오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네.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아예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막는 것하고, 모든 일을 겪으며 초월(超越)하는 것하고 어떤 것이 진정한 깨달음에 다가간다고 생각하는가? 슬픈 일, 괴로운 일, 즐거운 일, 화나는 일, 인생(人生)은 그러한 무수한 일들의 연속인데, 아예 그런 것을 막아버린다면 어떻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겠나?”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다가, “현경(玄境)의 경지가 그런 깨달음을 얻은 마음으로 정신(精神)의 힘을 극대화 시켜서 기(氣)와 일치가 되는 경지라 하지. 화경(化境)까지는 기(氣)가 주가 되고 정신이 종이 되는 단계였다면, 현경(玄境)에서부터는 정신(精神)이 주가 되고 기는 종이 되어서 기는 최소한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이지. 그 과정으로서 어검술(御劍術)이 있는 것이고. 단지 기(氣)로서만 무기를 제어한다면 어느 정도의 거리까지 가능하고, 또 내공은 얼마나 필요할까? 단순히 내공만 많다고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화경(化境)에서는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한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의 한계는 삼 갑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통설이지. 그러면 삼 갑자의 내공만으로 얼마나 오래, 얼마나 멀리 제어할 수 있을까? 아마 십 장(丈)내외가 한계일 것일세. 바로 여기에서 정신적인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일세. 점점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신력이 주가 되고 단지 최소한의 내공을 필요로 할 뿐이지. 바로 이런 결과로 어검술(御劍術)이 현경의 문턱에 가까워진다고 하는 것이지. 심어검(心御劍)은 백 리 이내가 한계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지. 어떻게 마음이 미치는 곳이 단지 백 리에 불과하겠나? 단지 사람의 내공과 정신력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범위가 그 정도라고 하니까 그런 것이지. 그럼 사람의 정신력(精神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날 때부터 정신력이 특출한 사람이 있지만 그런 경우라도 금방 한계에 달하지. 정신력은 마음의 깨달음에 의해서 넓어지고 커지게 되는 것이라네. 그래서 현경에서부터는 마음의 공부라 하기도 하지. 얼마나 크고 많은 깨달음을 얻느냐에 따라 완전한 현경(玄境)에서 점점 생사경(生死境)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지.”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다시, “그런데, 그런 깨달음의 공부가 필요한 것이 현경(玄境)의 관문인 어검술(御劍術)부터인데, 자네의 심법은 원천적으로 그런 마음을 없애버리니 어찌 더 상승(上乘)의 경지로 다가서겠는가?” 단리유아는 무념신니의 말을 들을수록 큰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자신도 마음의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에는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의 바탕위에 마음의 깨달음이 더해진다면 완전한 경지에 이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단지 감정을 막아서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은 진정한 부동심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만일 현경(玄境)의 관문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심법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일세. 그 이전에는 거의 가망성이 없으니.”   무념신니(無念神尼)의 말에 단리유아가, “그럼 그 마음의 깨달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무념신니가 단리유아의 얼굴을 보다가 한 가지 고사(故事)를 말해주었다. 오래전에 제자를 데리고 행각을 다니는 대사(大師)가 있었다네. 길을 가는 도중에 목이 마른 대사는 주막(酒幕)에 들러서 식사를 하고 내친 김에 곡차도 한 사발 벌컥벌컥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져서는 수다를 떠는 주모(酒母)와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젖가슴도 슬슬 만져보고 그랬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는 도무지 스승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배배 꼬여서 심술이 가득하였다네. 그렇지만 감히 하늘같은 스승님께 달려들어서 뭐라고는 못하고 심사가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은 대충 짐작이 되고도 남을 걸세. 그렇게 놀다가는 대사가 제자를 보고 그만 가자고 독촉을 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휘적거리면서 다시 길을 계속 갔지. 가는 도중에 제자가 침묵으로 따라오는데 스승이 보니 영 기분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는 제자에게, “넌 어째 상판이 영 일그러져 있냐? 뭔 속상한 일이라도 있냐?” “그야 스승님 때문이지 왜 그렇겠습니까?” “아니 내가 왜? 너보고 마음이 나쁘라고 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까 주막에서 그게 뭡니까. 체통 좀 지키셨으면 좋겠습니다.” “체통이라니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이냐?” “주모(酒母)의 가슴도 주무르고 음담패설도 하고 그러셨잖아요. 그게 다 음계(淫戒)와 구업(口業)을 지으시는 것이라는 정도는 충분히 아실 스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결국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지금 스님의 곁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엉? 아하, 네 놈이 내가 혼자 노니까 열이 좀 받친 모양이구나. 허허허” “그게 아니지요.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시는군요. 비겁합니다. 그러시면....” “아, 이놈아 음계(淫戒)는 네가 범하고 있지 않느냐?” “무슨 억지 말씀입니까요?” “야 이놈아, 난 그 주막(酒幕)을 떠나면서 여인은 이미 잊어버렸는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더냐. 바보 같은 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놈아 세상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그 마음에 흔적이 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너는 어째서 이미 흔적도 없는 허상(虛像)에 대해서 집착(執着)을 하느냔 말이다. 내가 그 여인과 농담을 주고받은 것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에서 한 일이고 지금 이렇게 길을 가는 것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인데 너는 늘 흔들리는 마음으로 여자(女子)를 건드리면 안 된다느니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느니 하는 분별을 하고 있으니 결국 그 분별지(分別智)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    이야기를 마치고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바라보면서 무념신니가 게송을 읊으며,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세상만물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단리유아가 따라서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자네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걸세. 아는 것이란 세상의 사물에 대해 그냥 아는 것으로 이것을 흔히 지식(知識)이라 하지. 그러나 깨닫는다는 것은 이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시켜 완전히 자신의 일부분이 되는 것으로 이것을 지혜(智慧)라고 하지. 그러나 이 지식과 지혜를 구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닐세. 자네가 모든 집착(執着)과 번뇌(煩惱)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단지 말로서 한다고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니지. 내가 지금 자네에게 이렇게 말로 한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다고는 할 수 없지. 부처님이 연꽃을 집어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 오직 가섭존자만이 말하지 않고도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였지, 바로 염화시중(拈花示衆)의 고사이네. 진리란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절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달아야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가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일단은 자네의 내공심법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이네. 오욕(五慾), 칠정(七情)을 강제로 막아서 집착과 번뇌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네에게는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一切唯心造)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세.” ******* 위의 고사는 조선말기에 선풍(禪風)을 일으킨 고승으로 경허선사(鏡虛禪師)과 그 제자 만공선사(滿空禪師)의 일화와 만공선사의 게송(偈頌)입니다. 해남파(海南派) 해남파(海南派) 1 어떻게 보타암(菩陀庵)을 떠나왔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무작정 무념신니(無念神尼)와의 대화를 끝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으니. 배를 타고 영파(寧波)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오직 무념신니의 말만이 머릿속을 계속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현경(玄境)의 경지에 이른다고 해서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깨달음의 공부가 필요한 것이 현경(玄境)의 관문인 어검술(御劍術)부터인데, 자네의 심법은 원천적으로 그런 마음을 없애버리니 어찌 더 상승(上乘)의 경지로 나아가겠는가?’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세상만물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넋을 잃고 생각에 빠진 후, 무작정 남쪽을 향해서 걸어갔다. 현경(玄境)에 이른다 할지라도 운명(運命)에서는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그럼 지금까지의 자신의 노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라면 생사경(生死境)까지 이르러 윤회(輪回)의 겁을 끊어야만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온갖 감정을 없애고 번뇌(煩惱)를 틀어막는 회정결(灰情訣)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그럼 내공을 흩어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인가? 번뇌와 집착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부동심(不動心)과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고, 장소(長嘯)를 터뜨리며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쳐서 남하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배고픔도 잊은 채 밤낮으로 무작정 신법을 펼친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새벽녘의 찬 이슬을 맞으며 깊은 산 속 계곡 가에 쓰러져 잠이 든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첩첩이 산들로 둘러싸인 곳으로 멀리 산하에는 안개가 낀 모습이 보였고, 해가 비추는 곳은 아침이슬이 햇빛에 산란하여 눈부시게 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문득 배에서 울리는 천둥 같은 소리에 배고픔이 되살아났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몰골을 보니 먼지와 풀잎파리가 전신을 뒤덮고 있었고, 머리는 흐트러져 사방으로 날리고 있었다. 얼굴 또한 말이 아닌 것이 계곡물에 비친 모습은 눈 뜨고 있는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파리한 안색에 광대뼈는 툭 튀어 나오고 눈두덩은 피곤함에 지쳐 축 늘어진 모습으로 살도 역시 쭉 빠진 모습이었다. 몸에 붙은 먼지와 풀잎을 떨어내고 차가운 계곡물에 전신을 담아 먼지와 때를 씻어내고, 정신을 맑게 했다. 몸을 씻고 나서 주위를 돌아보다 산과일로 배를 추스르며 이곳이 어디쯤인지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몸 상태를 보아서는 최소한 사흘 이상은 흐른 것 같아서 복건성(福健省) 남부나 광동성(廣東省)에 이른 것 같았다. 또한 주위의 무성한 수목들과 햇살의 따뜻함도 남쪽지방임을 알려주는 듯 했다. 한쪽의 나무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내공심법의 문제로 느껴졌다. 현경(玄境)의 경지에 이르러 운명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단 현경에 올라서고 나서야 다시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회정마공(灰情魔功)의 영향으로 집착과 번뇌를 느끼지 못하는 현재의 감정 상태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무념신니(無念神尼)의 말에 생각을 집중했다. 오욕(五慾)칠정(七情)을 모르고서 어떻게 집착과 번뇌를 느끼겠냐는 말은 다시 계속 생각해보아도 맞는 말이었다. 아예 모른다면 마음의 동요도 없을 테니 집착(執着)과 번뇌(煩惱)도 생기지 못할 것이고, 그러한 정서를 겪지 않고서 마음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로 여겨졌다. 깨달음이란 사실을 안다는 것하고는 다른 것으로, 자신이 직접 겪으면서 느끼고 그런 감정을 초월(超越)하면서 얻지 않는 한 쓸데없는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의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은 본래가 회정마공(灰情魔功)과 구전회혼심공(九轉回魂心功)이 주축이 되어서 여타의 구결을 포함한 것이었다. 회정마공은 주로 정신(精神)을 제어하고, 구전회혼공은 신체(身體)를 제어하는 형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하나의 완전한 심법이 되어 회정결(灰情訣)만을 따로 분리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내공이 깊지 않은 이성이나 삼성아래의 경지만 되었어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있겠지만, 현재의 구성이 넘어서는 경지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결국 두 가지 방법만이 남았다. 하나는 지금의 내공심법(內功心法)을 버리고 다른 심법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력을 강제로 모아서 극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 모두 쉬운 것이 아니다. 전자는 단전(丹田)을 깨트려 내력을 흩어버린 다음, 다른 심법을 다시 익혀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단전이 하나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전신 구대혈(九大穴)에 각각 만든 현재의 상태로는 죽지 않더라도 폐인이 되기 십상이었다. 후자의 방법도 쉬운 것이 아닌데, 강제로 깨달음이 없이 내공만으로 극성에 달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고 설사 성공하더라도 이후에 많은 문제점을 남길 터였다. 현재 자신의 내력은 거의 칠갑자(七甲子)에 이르러 있었는데, 만일 각각의 단전에 일갑자의 내력이 모여 구갑자(九甲子)가 된다면 십이성의 경지에 도전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다. 구결(口訣)상으로는 모든 내력을 한가지로 모아서 다시 순일(純一)한 진기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현재 특성이 아홉 가지로 나누어진 각각의 기운을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생사를 건다고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 치의 실수가 있거나 구결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깨달음이 없는 현재의 상태로는 성공할 가능성은 일 푼도 되지 않았다. 마치 아홉 마리의 독사를, 다루는 방법도 모른 채 품은 상태에서 한 바구니에 다시 옮기는 것과 같았다. 고개를 흔들고 한숨을 쉬면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회정결(灰情訣)을 억누를 수 있는 또 다른 심결(心訣)을 익힌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회정결을 능가하는 심결을 찾기도 어렵지만, 잘못하다간 심결간의 충돌에 의해 미쳐서 정신이 잘못될 가능성이 더 컸다. 일단은 내력(內力)을 모으고,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명상(冥想)을 통한 깨달음을 얻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세외(世外)로 나가는 문제를 다시 고려해보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수련한다고 내력이 금방 모이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정대로 계속 남하하기로 했다. 적수를 만나서 새로운 무공을 대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자신보다 상승의 경지에 든 자를 만난다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념신니(無念神尼)가 비록 고승으로 이름이 높지만 직접 현경(玄境)에 달한 것은 아니니, 다른 방도가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또 혹시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무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남하해서 남만(南蠻)지역에서 다시 운남(雲南) 대리국(大理國)으로 향한 다음, 서장(西藏)을 거쳐 히말라야(喜馬拉雅)산맥을 넘어 천축(天竺)으로 건너갈 예정이다. 서장과 천축의 전설 속의 무파들 중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무공이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들 천축을 무공의 원류라 하지 않는가?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가를 찾아서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시간은 정오가 다 되어서 해가 중천에 이르고 있었다. 신법을 펼쳐 산을 타고 내려오니 멀리 고을의 모습이 보였다. 현(縣)내로 들어서 길을 가는데 복색이 특이한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여족(黎族)이나 묘족(苗族) 같은 소수민족들로 보였다. 한어를 사용한다지만 모르는 말도 있었고, 방언이 심해서 알아듣기도 힘이 들었다. 객잔을 찾아서 들어가 겨우겨우 점소이에게 물어서야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았다. 이곳은 광동성(廣東省)의 서부지역으로 운상산(雲裳山)의 아래에 있는 하랑현(河瑯縣)이고, 이미 성도(省都)인 광주(廣州)를 지나쳤다는 것이다. 날짜는 일월 십팔 일으로 보타암(菩陀庵)에서의 일로부터 오 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생각에도 주변의 복색과 건물들의 형태를 보고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도 멀리 온 것 같았다.   광동성(廣東省)은 예로부터 백월지족(百越之族)의 땅이라 불리며, 중국에서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하여 일찍이 진(秦), 한(漢)시대부터 이미 대외무역과 문화교류활동을 시작된 곳으로 여러 소수민족이 있었고, 불교와 도교, 회교(回敎)등 종교가 난립한 곳이었다. 점소이의 말에 화남(華南)지방의 중심인 광주(廣州)를 지나쳤다는 것을 알고 무척 아쉬웠다. 자신 역시도 복건성(福健省)이나 호남성(湖南省)까지는 비무를 하면서 거쳐 간 적이 있었지만, 그 아래의 지역은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이었다. 명승고적이나 여러 풍광(風光)이 아름다운 곳들도 많지만 특히나 광주에 있는 화탑(花塔)이나 삼원궁(三元宮)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안타까웠다. 화탑은 육용사(六榕寺)내에 있는 구층의 목탑으로 그 옛날 달마대사(達磨大師)가 하룻밤 묵은 곳으로 유명했고, 삼원궁은 화남(華南)지방의 도문(道門)의 중심으로 일대에서는 가장 강한 세력이었다. 그들과 겨뤄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어차피 지났으니, 더 남하해서 해남파(海南派)에나 들리기로 했다. 무념신니(無念神尼)와의 대화가 뇌리에 남아 머리를 울리지만, 어차피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닌 이상 현재의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날 밤은 그곳에서 머물고 다시 길을 떠나 계속 남하했다. 무명(茂名), 심강(甚江), 뇌주(雷州)를 거쳐서 뇌주반도(雷州半島)의 끝인 해안포(海安浦)에 도달한 것은 이틀 후 저녁으로, 멀리 경주해협(瓊州海峽)을 사이에 두고 해남도(海南島)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해남도는 동북부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서부는 산지가 있는 형상으로 그 중앙에 오지산(五指山)이 있었다. 육천여 척 높이의 오지산은 멀리서 보면 다섯 손가락이 펼쳐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바다를 건너 해구포(海口浦)에 도착한 후, 정오 무렵에 오지산(五指山)을 향해서 출발했다. 옆으로 지나며 주변의 모습을 보니, 망고나 열대야자 나무가 무성하여 남국(南國)의 정취(情趣)를 보여주는 듯 했다. 동쪽해안을 따라서 다음날 저녁까지 서둘러 신법을 펼치자 만령(万寧)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제 해남파(海南派)가 있는 오지산까지는 하루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음날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해남파로 향하니, 주변은 오지산에 가까워 올수록 장목(樟木:녹나무), 자단목(紫檀木)을 비롯한 활엽수림이 무성한 모습이었다. 신시(申時:15-17시)가 다되어갈 무렵 오지산 아래의 해남파에 다다르게 되었다. 해남파(海南派)는 해남도의 오지산(五指山)아래에 위치한 문파로, 검날을 옆으로 뉘여서 검을 휘둘러 기세가 빠르고 날카로워 막기가 어려웠다.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 모두가 이와 같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쾌검(快劍)이면서도 환검(幻劍)의 일종에 속한 것이었다. 비록 오파일방(五派一幇)에는 들지 못했지만, 광동성(廣東省) 이하지역에서는 상대할 세력이 없었다. 수많은 고루거각(高樓巨閣)을 뒤로하고 거대한 대문이 서있었고, 현판에는 폭이 일 장(丈)이 넘는 큰 글씨로 해남파(海南派)라 적혀 있었다. 대문의 양쪽으로는 네 명의 검을 찬 대한이 양쪽으로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통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리유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중의 삼십대의 대한이 앞으로 나서며, “멈추시오. 귀하는 누구요?” 초라한 몰골의 단리유아의 모습을 깔보는 듯이 오만한 음성으로 묻는다. “나는 단리유아라는 사람으로 중원에서 해남파(海南派)의 무학을 견식해보고자 왔소.” 무심하게 말하는 단리유아의 말을 듣다가, “다, 단리유아?” 주변에서 지켜보던 나머지 삼인도 깜짝 놀라서 소리친다. “전광(戰狂)! 천패무광(千敗武狂)!” 처음의 인물이 다시, “정말 그 전광 단리대협이라는 것이오?” 그들도 강호의 소문을 들어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지만, 볼품없는 풍모(風貌)에다가 며칠 간 제대로 씻지도 못한 후줄근한 모습에 본인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도 믿지 못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잠시 기다리게 한 후에 안으로 들어간다. 반 각(刻)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두 사람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한사람은 사십대의 청의(靑衣)중년인으로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메마르고 강퍅한 인상이 손속이 맵고 매정한 모습으로 보였다. 다른 한 명은 백의(白衣)를 입은 오십대의 오 척이 겨우 넘는 동안(童顔)의 사람으로 허리춤에 한 자루의 철적(鐵笛)을 꼽고 있는 모습이었다. 잠시 단리유아를 훑어보던 백의를 입은 인물이 웃으며 나서서, “하하하, 이거 단리소협 아니시오. 정말 몰라보게 달라졌구려. 육년 전에 악양(岳陽)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데, 소문에 자네의 바뀐 모습을 듣지 못했다면 나라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네.” 단리유아가 그를 보니 과거 한차례 대결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천리적자(千里笛子) 공손고(公孫鼓)로 협객으로 이름이 높고, 마당발로도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는데, 웬만한 강호(江湖)의 인물들하고는 안면이 있었다. 그의 모습에 약간 뜻밖이었지만 포권을 하면서 단리유아가, “공손대협이시군요. 거의 육년 만에 뵙는데 아직도 강건한 모습입니다.” 무심한 목소리에 놀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하하하, 정말 자네의 그 목소리는 특이하군.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은데. 자네를 몰라보는 사람도 자네의 목소리를 들으면 기억이 되살아 날걸세.” 이때 옆의 청의 중년인이, “이보시오, 공손선배. 나도 좀 소개시켜주시오.” 뚝뚝 부러지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공손고가 그제야 생각이 나서, “이런 이런,  단리소협을 만난 기쁨에 자네 생각을 깜빡했군. 여보게, 단리소협. 이쪽은 해남파(海南派)의 대제자인 추천검(秋天劍) 여사광(黎四光)이라 한다네.” “단리유아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소이다. 여사광이오.” 단리유아의 말에 못지않을 정도로 거칠고 매정한 목소리였다. 잠시 서로를 소개하고 안부를 묻는 시간이 흐른 다음, 대화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자네가 이 먼 해남도(海南島)까지는 어쩐 일인가? 역시나 비무를 위해서인가?”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공손고가, “이미 혈수마((血手魔)를 죽인 후인데 아직도 상대가 부족한 것인가?” “무공의 강함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 무학의 수준을 알고자 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행보는 멈추기 어렵습니다. 그보다 공손대협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다 단리유아의 물음에, “흠, 자네도 들은 적이 있으니 알겠지만 이번에 무림맹(武林盟)을 창설하기로 했지. 원단에 정파의 명숙들이 모여서 찬동한 후에 이달 삼월에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 맹을 세우고 조직을 정비하기로 했다네. 그리고 거리가 먼 지역에는 명숙들을 보내어 가맹을 청하기 위해서 보내기로 하였지. 이곳에 내가 온 것은 신법이 빠른 것도 있지만 해남파(海南派)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 마땅히 없어서 내가 오게 되었다네.”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런데, 왜 무창(武昌)에 무림맹(武林盟)을 세우게 되었습니까?” “원래는 낙양(洛陽)이나 개봉(開封)에 세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강남지역에서는 너무 거리가 머니 수륙교통의 요충지로 예로부터 아홉 개의 성(省)으로 통하는 대도(大都)로 알려진 무창이 가장 적당해 보였다네.” 단리유아가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강남지역과 너무 멀어서 무창(武昌)을 선택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안휘(安徽)나 강서(江西)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사전 포석인 것으로 보였는데, 사파 세력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안휘성에도 가깝고 제갈세가(諸葛世家)와 무당파(武堂派), 대홍산(大洪山)에는 사장(四莊)중의 철기보(鐵騎堡)가 주변에 있는 곳이었다. 또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장사(長沙)공야세가(公冶世家)와 강서성 서부 무공산(武功山)에 무외신궁(無畏神宮)이 있었다. 사파의 세력은 다른 성에서는 열세이거나 평수였는데, 안휘(安徽), 귀주(貴州)에서는 절대우세였고, 호남(湖南), 복건(福健) 지역에서도 약간 우세했다. 만일 정파에서 사파를 공격하려고 한다면 무창(武昌)이 가장 효과적인 위치였다. 동부로는 안휘와 남부로는 호남과 접한 상태이고, 수로의 요충지이니 이동도 쉬울 것이다. 생각에서 깨어나서 다시 공손고에게, “그러면 세력구성은 어떻게 하기로 한 것입니까?” “각 문파에 따라서 오십 명 내외로 선발하여 창맹식 전까지 보내기로 했지. 보통 칠대세가(七大世家)나 오파일방(五派一幇), 무외신궁(無畏神宮) 같은 대문파의 경우는 오십 이상 보내기로 하고, 나머지 문파는 그에 맞추어 적당한 수를 보내기로 하였다네.” 그러면 전체인원이 이천 명을 넘을 것 같았는데, 웬만한 세력은 그 중의 반만으로도 초토화 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맹주(盟主)는 누가 맡기로 했습니까?” “아직 정하지 않았다네. 일단 창맹식을 거행한 다음 모여서 결정하기로 하였지. 내 생각이지만 강호의 명성과 신망을 봐서는 무성(武聖)어르신과 도왕(刀王), 무당(武堂)의 청명진인(淸明眞人)이 가장 유력하게 보이네.” 잠시 그들이 강호(江湖)의 사건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몇 개의 대문을 지났을 때, 삼층의 커다란 전각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해남파(海南派) 해남파(海南派) 2 전각(殿閣) 앞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미 전갈을 받았는지 해남파(海南派)의 주요인물 들은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정중앙에 오 척(尺)이 겨우 넘는 잿빛 머리카락의 노인이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닭처럼 앞에 나서서 기파(氣波)를 사방으로 흘리고 있었다. 나이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박박 얽은 얼굴과 구부정히 허리를 숙인 모습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촌노(村老)처럼 보였지만, 그 기도(氣度)를 느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다. 추천검(秋天劍)이 앞으로 나서서 그 노인에게, “사부님, 어이해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질그릇 부딪치는 듯한 목소리에도 노인은 묵묵부답으로 단리유아만 응시하고 있었다. 공손고(公孫鼓)가 다가와 웃으며, “하하하, 선배님도 단리소협을 보고 싶어 이렇게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나보군요.” 다가오는 그에게 손을 들어 저으며, “흥, 저리 꺼져라. 이 수다쟁이야.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잠시 후, 다시 단리유아를 보고, “단리소협, 이렇게 만나게 되어 이 늙은이의 일생 소원(所願)을 풀 수 있게 되었소.” “아니, 무슨 말입니까? 일생의 소원이라니요?” 추천검(秋天劍)의 다시 물어보는 소리에도 대답이 없다가 단리유아의, “단리유아가 무(毋)노선배께 인사드립니다.” 무심한 말과 함께 인사하는 것을 손을 저으며 막으면서, “단리소협, 무슨 예를 그렇게 차리는가? 자네가 비록 나이는 이제 약관(弱冠)을 지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강호(江湖)의 명성이나 배분으로 보아서는 결코 나보다 못하지 않을 것인데.”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여봐라, 지금부터 단리소협을 보면 나를 보듯이 깍듯이 예우를 차리거라. 만일 내 말을 어기는 놈이 있을 때에는 어느 놈이라도 가만 두지 않겠다.” 노인은 해남파(海南派)의 장문인으로 명호는 남해검치(南海劍痴) 무삼사(毋三思)였는데, 평생을 검 하나에만 미쳐서 일생을 보낸 인물이었다. 벌써 나이가 칠십이 넘은지 오래로, 안하무인(眼下無人)에다 검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천하에 고집 세기로도 둘째가라고하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다른 것이었지만, 그 성격의 괴팍함에 무삼사(毋三思)로 바뀌어 이제는 자신조차도 본명을 사용한 것이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주변의 인물들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워낙 괴팍하기로 소문난 장문인(掌門人)이었기에 아무도 성질을 건드리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잘못했다간 몇날 며칠 동안 괴로움을 무릅써야 할지도 몰랐다. 주변의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단리유아의 옷소매를 붙잡고 건물 안의 대청(大廳)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상석의 자신과 같은 위치에 의자하나를 더 가지고 오게 해서 단리유아를 곁에 앉게 한다. 공손고(公孫鼓)조차 한 계단 아래쪽에 앉아 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무림맹(武林盟)을 창설하면서 해남도(海南島)에 갈 사람을 뽑는 데에도 아무도 가려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공손고가 예전에 한번 해남도를 방문한 적이 있고 대인관계가 무난한 편이어서 오게 된 것이었다. 무삼사(毋三思)의 성질 더러운 것은 강호에 소문이 자자해서, 한번이라도 해남도(海南島)를 방문한 인물들은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면서 떠나기 일쑤였다. 상대가 그의 맘에 안들 때에는 대상이 누구이든지 마치 허수아비를 세워놓는 것처럼 안하무인으로 대우했다. 어차피 본토와 떨어져 있어서 크게 중원의 세력과 부딪칠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 성질머리가 그 모양이니 그가 장문인이 된지 근 삼십년 이래로 강호(江湖)에서 해남파(海南派)의 인물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무공에 있어서는 해남파의 역사상 세 손가락에 들 정도의 수준으로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을 완성하고, 다시 해천삼절(海天三絶)를 창안해 해남무공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밖으로 세력을 떨치지는 않았지만 해남파의 내실은 그 어느 때보다 충실해서 중원(中原)의 오파일방(五派一幇)에 못지않게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서로의 소개가 한동안 이어진 다음, 좌측자리의 가장 앞에 앉아있던 백발의 꼬장꼬장해 보이는 서당 훈장같이 생긴 인물이 큰소리로, “장문인(掌門人),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정말 지금까지처럼 이 섬 구석에 처박혀 보낼 것이오? 본문의 세력은 근 백 년이래 최고의 성가를 이루었는데도 이렇게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것이오?” 단리유아가 오기 전까지 무림맹(武林盟)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공손고가 아무리 떠들어도 무삼사(毋三思)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듣는 척 마는 척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무삼사의 사제로서 사실상 해남파(海南派)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사람으로, 검법에만 미쳐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사형을 대신해서 지금까지 문내외의 일들을 처리해왔었다. 본래의 명호는 남해조수(南海釣叟) 초범상(焦範相) 이었지만 오히려 노보수(怒補嫂)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성질부리는 형수와 같다는 뜻이었는데, 무삼사가 벌여놓은 온갖 궂은일을 처리하면서 성격도 변했던 것이다. 천하의 무삼사도 자신의 사제에게는 미안한 것이 많아 그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흠, 그래. 사제(師弟)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헛기침하면서 말하는 무삼사(毋三思)를 노려보면서, “사형(師兄),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시오? 여태까지 얘기하던 것은 어떻게 들은 것이오? 정말 사부님의 유명(遺命)만 아니었다면.....” 그 옛날 그들의 사부였던 해남환상검(海南幻想劍)이 죽음이 가까워지자 차기 장문인(掌門人)을 정해야할 순간이 다가왔을 때 확실한 장문인 감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무공이나 자질 면에서 뒤떨어져 전혀 눈에 차지 않았고, 오직 이 두 사람만이 그래도 뛰어났었다. 단지 한 사람은 독선적인 성격으로 무공에만 빠져있고, 한 사람은 세사(世事)에 별관심이 없고 나서길 싫어하는 것이 탈이었다. 두 사람의 성격이 반반이라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무삼사(毋三思)를 장문인으로 정하고 남해조수(南海釣叟)에게는 그를 보좌하도록 맹세하게 하였다. 해남환상검의 생각에는 비록 무삼사가 성격이 괴상하지만 무학(武學)의 귀재인데다 무공이 고강하니, 사제인 그가 옆에서 소소한 일까지 처리하고 도와준다면 문파의 위명을 크게 드날리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확실히 그의 뜻대로 되기는 했지만, 그동안 남해조수(南海釣叟)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님이라고 누군가 찾아오면 푸대접하기 일쑤고, 제자들의 무공이 마음에 안 들면 먼저 패고 나서 생각하는 사람이 그의 사형 무삼사(毋三思)였다. 원래의 남해조수의 성격은 시를 읊조리며 낚시로 세월을 보내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한 것이었는데, 그동안 성격이 변해서 노보수(怒補嫂)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지니게 된 것이다. 화를 내면서 소리치는 남해조수의 모습에 역시 화를 내면서, “아, 그래서 자네에게 물어 보잖은가? 젊었을 때는 그러지 않더니 나이 먹을수록 잔소리만 느니 원....” 맞받아치는 무삼사를 보고 남해조수가 할 말을 잃고 쳐다보는 것을 보면서, “흠, 흠, 그래. 그 문제는 자네가 좋을 대로 처리하게.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을 마치자, 남해조수(南海釣叟)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단리유아를 향해서, “여보게. 단리소협, 자네가 본문에 찾아온 것은 비무를 위한 것일 테지?” “예......” 말을 하려는 단리유아의 말을 가로막으며 남해조수가, “장문인, 그러면 이달 말에 오십 명의 제자들을 무림맹(武林盟)에 보내기로 하겠소. 혹시 다른 생각이라도 게시오?” “오십 명이라고? 그건 너무 많지 않은가? 당장 세외(世外)에서 침입한다는 보장도 없고, 우리는 본토와도 떨어져 있는데 무엇 하러 그렇게 많이 보낸다는 말인가?” 무삼사(毋三思)가 남해조수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서 반문한다. 이에, “본문(本門)이 강호에 나서지 않은지 삼십 년이 넘어가오, 어느 누구의 잘난 행동 때문에..... 이제 기회가 왔으니 본격적으로 문호(門戶)를 열어 본문의 위명을 떨칠 때가 왔는데, 오십이 무엇이 많다는 말이오? 더 보내려다 일단 그 정도만 먼저 보낼 생각이었는데.” “더 보내겠다구? 자네 제정신인가? 아무리 내가 본문의 대소사를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우리와 크게 상관도 없고, 생사의 갈림길에 처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에 제자들을 그렇게 많이 보낸다는 말인가?” 남해조수의 말에 놀라 무삼사가 크게 소리친다. 이에 남해조수가, “장문인, 본문이 근 삼십년 내로 봉문(封門) 아닌 봉문상태로 있었소. 제자들의 수준은 어느 때보다 뛰어났지만, 해남도(海南島)를 벗어난 적이 있는 제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소. 모두가 이번 기회에 강호에 나서고 싶어 할 텐데 어찌 막을 수 있다는 말이오? 정 그렇게 내키지 않는다면, 육 개월마다 교대로 제자들을 보내기로 합시다.” 남해조수의 말에 잠시 생각해보다가, “흠,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제자들을 교대로 보내서 오십 명 정도만 된다면야 나도 말릴 생각은 없다네. 그건 그렇게 결정하기로 하지. 어이, 공손(公孫)수다쟁이야, 너도 들었으니 알겠지? 하루 종일 떠드느라 애썼으니 이제 그만 가봐라.” 무삼사(毋三思)의 말에 공손고(公孫鼓)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가, 한숨을 쉬면서, “무(毋)선배, 갈 때 가더라도 단리소협이 찾아왔으니 비무(比武)라도 보고 가게 해주시오.” 그 말에 눈썹을 찌푸리다 고개를 흔들며, “그래그래, 너 맘대로 해라. 단리소협, 그럼 언제 하는 것이 좋겠나? 나는 언제라도 좋으니 말만하게.” “아니, 장문인. 그게 무슨 말이오. 단리소협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것 같은데 며칠 쉬었다가 해야지.” 생각 없이 말하는 무삼사의 말에 남해조수가 말한다. 이에 단리유아의 모습을 잠시 훑어보고는 다시, “그럼, 이틀 뒤에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오늘과 내일 푹 쉬면 노독이 다 풀릴 테니.” “저도 좋습니다. 선배님. 이틀 후가 적당하겠군요.” “하하하, 좋아 좋아. 그동안 마땅한 상대가 없어서 기껏 무공(武功)을 창안해놓고도 써보지도 못하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줄 알았는데, 정말 자네가 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구만.” 단리유아의 말에 철없는 아이 같이 좋아하는 무삼사을 보면서 남해조수가 고개를 저으며, “장문사형, 도대체가 언제나 철들 것이오? 제발 좀 체통 좀 지키시오.” “뭐? 무슨 체통? 체통이 밥 먹여준다 더냐? 흥, 사람이 자기 본성대로 살아야지. 무슨.....” 고개를 가로젓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정말 잘 왔네. 내가 장문인만 아니라면 자네처럼 천하를 주유하면서 비무행(比武行)에 나설 터인데, 자네의 소문을 듣고 얼마나 자네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몰랐을 것이네. 이번에 어려운 걸음을 했으니 자네가 머물고 싶을 만큼 머물렀다 가게.” “알겠습니다. 며칠 머물며 저도 선배님과 논검(論劍)하면서 보내고 싶습니다.” 단리유아가 조용하게 말하자 무삼사(毋三思)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이곳에 머물 동안은 자네 집처럼 편안하게 지내게. 그리고 너희들도 아까 들었다시피, 앞으로 단리소협에게 깍듯이 예우를 차리도록 해라. 만약 무례한 경우가 눈에 띈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그리고 무학(武學)에 대한 궁금한 것이 있다면 찾아가 뵙고 도움을 청하도록 해라.” 무삼사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만에 차서 얼굴을 찡그리며 수군거린다.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여보게, 자네도 나의 얼굴을 보아서라도 자네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면 물리치지 말고 도움을 주기바라네.” “알겠습니다. 그 정도의 일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단리유아의 답례가 끝나자, 혈수마((血手魔)와의 싸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그동안의 비무행과 무학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한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둘만의 얘기에 빠진 그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강호(江湖)에 다시없을 무공에 미친 괴인(怪人) 둘이 한 자리에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까지 같이하면서 무학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무삼사가 물어보는 형상이고, 이에 단리유아가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내일을 기약하고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다음날도 서로 무학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 이어졌고, 오후에는 해남파(海南派)의 검법수련을 같이 참관하며 보냈다. “자네가 보기에는 본문의 검법이 어떻다고 보이나?” 무삼사(毋三思)가 검법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물었다. “음, 저도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정말 독특한 검세입니다. 실제로 부딪힌다면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하도 빠르고 변화가 많은데다 검을 눕혀서 휘두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처하기가 곤란하겠습니다.” 단리유아의 무심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런 면이 있지. 그런데 자네가 보기에는 본문의 검법의 약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주변에서 듣고 있던 해남파(海南派)의 인물들이 난처한 얼굴로 무삼사(毋三思)를 쳐다본다. 그들은 비록 기초적이지만 제자들이 검법을 수련하는 모습을 단리유아가 참관한다는 것에 반대를 했었다.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중의 전(前)육식을 풀어서 십팔 초로 만든 해풍십팔검(海風十八劍)은 해남삼십육검을 익히기 위한 기본검식이었지만, 그래도 안목이 날카로운 인물이 본다면 해남삼십육검의 일반적인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혹시라도 단리유아가 나쁜 의도를 먹고서 파해식이라도 만들어 강호에 퍼뜨린다면 해남파의 미래는 끝장이 날 것이었다. 무삼사가 강호에 적수가 없는 데 쓸데없이 그런 짓을 할 인물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단리유아를 끌고 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와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옆에서 웅성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들 조용히 해라. 너희들은 본문(本門)의 검법(劍法)이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냐? 세상에 수많은 검법이 있는데 본문의 검법이라고 무턱대고 최고라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조금이라도 단점이 보이면 그것을 고쳐서 더 낫게 만들 생각을 해야지, 지금까지 별 문제없었다고 그대로 만족하고 발전시킬 생각은 없다는 것이냐?” 잠시 탄식하다가 다시, “쯔쯧, 너희들은 이런 기회가 그리 쉽게 찾아올 줄 아느냐? 여기 단리소협은 천하에 상대하지 않은 무공이 드물고, 강호십대고수(江湖十大高手)의 하나로 천하에 적수가 없는 사람으로 무공에 대한 이해는 강호에서 제일 일 것이다. 오히려 너희들은 고마워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가르침을 청해야할 마당에 쓸데없이 자존심에만 매달려 있겠다는 말이냐?” 그들이 단리유아를 보기에는 나이가 어리고, 소문과 달리 볼품없는 모습에 실망해하던 중으로 여러 가지로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평생 무삼사(毋三思)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떠받드는 경우도 보지 못했고, 나이 어린 그에게 꼬박꼬박 선배대접을 하게 했던 것이다. 또 단리유아의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무감정한 모습에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쯔쯧, 어리석은 놈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다니, 본문의 앞날이 뻔하다. 단리소협, 저놈들은 신경 쓰지 말고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보세.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무삼사가 잠시 그들의 불만에 찬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단리유아를 향해서 물어보았다. 이에 단리유아가,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검식입니다만, 만일 중검(重劍)이나 광검(狂劍)류의 파괴력 위주의 검법을 만난다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또한 너무 초식의 날카로움만 강조하는 검법으로 상승의 경지에 든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리유아의 글을 읽는 듯한 무심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다네. 내가 본문의 검법을 대성한 후에 느낀 가장 큰 문제점도 바로 그것이었지. 비록 내가 해천삼절(海天三絶)을 만들어 보강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한 곳이 보인다네. 그래 자네 생각에는 단점을 없애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 것으로 보이나?” 무삼사(毋三思)의 기대어린 시선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제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보입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중검(重劍)류의 검법으로 보완하는 것으로 강호에 나가 비무행을 하거나 검법을 얻는 방법으로 단점을 없애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검법에서 쓸데없이 효과에만 치중하는 변초를 없애 초식의 수를 줄여서 단순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초식을 줄인다고?” 무삼사(毋三思)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초식을 날카롭고 기이하게 만드는 것이 딱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은 그저 사람을 죽이기 위한 효과적인 살인방법일 뿐입니다. 확실히 수준이 낮았을 때에는 효과적이었겠지만, 차츰 실력이 늘었을 때에는 오히려 그런 면들은 상승(上乘)의 경지에 오르는 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차라리 그런 부분들은 제거하고 검법의 특성대로 쾌(快)와 환(幻)의 요결(要訣)에 집중해서 단순화시키는 것이 검결(劍訣)에 대한 이해와 앞으로의 진전에 있어서 훨씬 낫습니다.” “허허허, 그동안 나는 전혀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서 그 부분을 보충할 생각이었는데, 자네의 생각은 나로 하여금 아주 쉬우면서도 뜻밖인 방법을 보여주는군.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의 말에 찬동한다. 주변의 사람들도 단리유아의 말에 생각에 빠져 그동안 자신들이 너무 효과적인 초식의 연마에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 F-World 에도 연재하기 시작했으니, 혹시라도 유조아가 문제가 생기면 그곳으로 오세요. 고무림에도 올리고 있는데, 그곳은 연참제한이 있어서 언제 다 올릴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연참을 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군요. 보통 10 - 15 K 바이트 정도가 한편인데, 쓰는 데 5시간정도가 걸립니다. 뭐 5 - 8 K 바이트로 쪼개서 연참이라고 올린다면 편수도 늘고 조회수도 늘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귀찮기만 합니다. 저는 별일이 없다면 10 K 바이트 정도는 올리는 것이 읽는 사람들을 위한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하루에 한편 정도만 올릴 생각입니다. 신경써서 한편 올리는 것이 대충 써서 몇편 올리는 것 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 ####### 아라한 님의 말씀대로 잘못되었군요. 제 생각은 변초를 없애고 초식의 수를 줄인다는 것이었는데 제가 잘못 썼습니다. 지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어색한 곳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무삼사(毋三思)에서 원래의 성씨도 무(毋)씨입니다. 본래 다른 이름이 있지만 별명이 더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검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무공광,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상대가 누구이든지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는 성격, 고집을 세우면 누가 말려도 듣지 않는 것. 단리유아의 외모문제는,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인상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쓴 것이랍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보기 전에는 잘 믿지 않죠. 아무런 기도가 드러나지 않고 먼지투성이의 초라한 모습에 실망해서 아마 반신반의하리라 생각하고 쓴 것이랍니다. 며칠 후에 다시 보았을 때에도 어색하다면, 다시 그 부분은 수정하지요. 윗부분도 더 자세히 설명해서 넣기로 하겠습니다. 독자에요 님의 말씀대로 어색하군요. 수정했습니다.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해남파(海南派) 해남파(海南派) 3 남해검치(南海劍痴) 무삼사(毋三思)는 평생을 검에 미쳐 산 사람으로 단리유아 자신과 성격이 비슷했다. 그동안의 강호행(江湖行) 중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자신과 가장 뜻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사광(四狂)의 나머지 사람들도 각기 한가지씩의 괴벽(怪癖)으로 유명해 서로 친분이 있었지만, 관심 가는 것이 서로 다르다보니 지인(知人)이상의 가까운 사이가 되기는 어려웠다. 만나기가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서로가 좋아하는 것이 판이했다. 자신은 밤낮으로 무공에 미쳐 있었고, 복광(卜狂) 광구신복(狂口神卜)은 풍진강호를 종횡하면서 점(占)치는데 미쳐 있었고, 색광(色狂) 화의신검(花衣神劍)은 어떤 한 여자에 정을 주는 법이 없이 미녀(美女)를 찾아서 떠돌았고, 주광(酒狂) 만리비개(萬里飛丐)는 좋은 술(酒)을 찾아서 사방으로 떠돌았고 한번 술에 취하면 멈추지 않고 만리를 달렸다. 그런데 이제 무삼사를 만나니 검법에 미쳐 세사(世事)에 관심이 없는 것이 자신과 가장 비슷했던 것이다. 서로 좋아하고 관심 가는 것이 같으니 시간이 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무학(武學)을 논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그날 저녁에 남해조수(南海釣叟)가 잠깐 찾아온 시간을 제외하고, 단리유아는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환검(幻劍)으로 강호에서 손꼽히는 검법이니 내일의 비무가 자못 기대가 되었다. 오늘 낮의 해풍십팔검(海風十八劍)을 보니 대략 해남파(海南派) 검법의 특성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상당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검초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칼을 눕혀 휘두르는 것이 기본으로 기이하면서도 날카로운 검초들로서 처음 상대해본 사람이나 하수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검법으로 보였다. 기초검법을 보고나서 더욱 해남삼십육검이 기대가 되었지만, 특히 무삼사(毋三思)가 창안했다는 해천삼절(海天三絶)은 아무도 본적이 없다고 알려진 검법으로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운기행공으로 내력을 가다듬고 나한권(羅漢拳)으로 몸을 풀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잠시 검을 빼내어 강호의 흔한 초식인 육합검법(六合劍法)을 펼치며 심신을 가다듬은 다음, 사시(巳時:9-11시) 무렵에 해남파(海南派) 문인(門人)들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사방 사십 장(丈) 정도로 입문제자들이 단체로 모여 기초무공을 수련하는 곳이었는데, 십 장(丈) 정도 바깥쪽으로 줄을 쳐서 임시로 비무할 곳을 마련한 것이었다. 줄밖으로는 해남파의 문인들이 모여 있었고, 공증인으로 천리적자(千里笛子) 공손고(公孫鼓)가 비무장의 중앙에 미리 나와 있었다. 그저께 약속했던 대로 단리유아와 들뜬 듯이 보이는 무삼사가 공손고의 앞으로 다가가서 비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손고가 무삼사를 보면서, “무(毋)선배님, 어느 정도까지 비무를 할 생각입니까?” “흠,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네만..... 단리소협,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어서 비무를 하자는 듯이 흥분한 목소리로 단리유아에게 물어보았다. “글쎄요. 보통 하듯이 한 사람이 패배를 시인하거나, 공증인이 보아서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이 위험해 보일 때까지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삼사(毋三思)가 대답한 후에 공손고에게, “좋아, 그렇게 하지. 이봐, 자네도 들었으니 알아들었겠지?” “네.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까?” “그래, 바로 시작하지. 나야 늘 바라던 일이니 더 이상 시간 끌 일은 없으니. 그런데, 단리소협. 자네는 등에 맨 도(刀)를 쓸 것인가? 아니면 허리의 검(劍)을 쓸 것인가?” 무삼사가 어서하자는 듯이 말하다가 단리유아의 등에 매달린 적운도(赤雲刀)를 보면서 묻자, 단리유아가 무심한 목소리로, “도(刀)는 가급적 생사(生死)의 결전에만 쓸 생각입니다. 그 이외의 일에서는 도를 쓸 일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이번에 선배님과 싸우게 되는 데 도를 쓰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하하, 좋았어. 오늘 내 맘껏 검법(劍法)을 펼쳐 보일 수 있겠군. 자네의 무공이 소문만큼 대단하다면 내 무공을 별 무리 없이 받아줄 수 있을 테니.” “과찬이십니다. 저 역시도 무(毋)선배님의 검법이 기대됩니다.” 잠시 후, 공손고가 비무의 시작을 알리자 서로 거리를 벌리고 섰다. 단리유아가 북쪽에, 무삼사가 남쪽에, 각각 삼 장(丈) 정도의 거리를 두고 벌려 섰다. 단리유아가 허리의 흑아검(黑牙劍)을 빼내니, 무삼사 역시 왼손에 쥐고 있던 검갑에서 검을 빼들었다. 검을 들고 허리를 꼿꼿이 편 모습에서 그동안의 촌노(村老)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타고난 검사(劍士)의 자세를 보여주는 듯이 전혀 다른 칼날 같은 날카로운 기세가 일어났다. 서로 검으로 예를 표한 후에 단리유아가 먼저 선공에 나섰다. 앞으로 뛰쳐나가며, “비검성영(飛劍星影)” 검광(劍光)과 함께 별빛처럼 빛나는 검기(劍氣)가 무삼사의 상반신을 노리고 달려든다. 검영(劍影)이 연이어 일어나 상대의 시야를 가리는 가운데 상반신의 요혈을 노리는 것으로 멸문된 낙성검문(落星劍門)의 일초검법이었다. 이에 무삼사 역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달려 나오며, “도해산형(濤海散形)”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의 일초로 큰 파도가 일어나 전면을 가리듯이 구름 같은 검기가 일어나 맞부딪혀온다. “챙, 챙!” 무수한 검영(劍影)이 서로 부딪히고 검광(劍光)이 사방으로 뻗친다. 서로의 몸을 노리며 찰나 간에 십여 번의 검격(劍擊)이 벌어졌다. 서로 빗겨지나가다가 단리유아가 왼쪽으로 돌아서서 역시 지나쳐가는 무삼사의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단장인혼(斷腸引魂)” 한줄기의 검광(劍光)이 일어나며 무삼사의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든다. 산서(山西)일대의 일대고수인 단장마도(斷腸魔刀) 호연나형(呼延懦熒)의 일초도법이었다. 단장도법(斷腸刀法)으로서 일수 일수가 살초로, 마치 단장의 고통을 겪는 것처럼 끔찍한 상처를 남기는 초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리유아의 공격에 맞서 해풍유선보(海風流旋步)로 오히려 왼쪽으로 꺾어서 접근하는 공격을 간일발의 차로 옆구리의 옷자락이 베어지는 정도로 흘리고, 오히려 단리유아를 향해서 검을 휘둘러 공격해온다. “노해침강(怒海沈降)” 성난 파도의 물결이 바위를 덮치듯이 십여 가닥의 검기(劍氣)가 연이어 일어나 위에서 아래로 단리유아를 공격한다. 이에, 단리유아는 오히려 왼쪽으로 계속 돌면서 초식을 바꾸어 다시 무삼사를 향해, “청연나혼(靑燕拏魂)“ 시퍼런 검기가 일어나 상대의 공격에 맞부딪혀갔다. 강호(江湖)에서 드문 여고수의 하나인 청연나찰(靑燕羅刹)의 검초로서 푸른 제비가 두 눈을 노리고 공격하듯이 상대를 공격한다. 두 사람이 왼쪽방향으로 회전하면서 계속해서 검을 부딪친다. “챙! 채, 챙!” 서로의 검들이 다시 부딪히며 불꽃이 튀기고, 사방으로 검기가 흩어졌다. 이번에는 두 사람 다 부딪힌 후에 뒤로 물러섰는데, 무삼사의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이 약간의 우세를 차지한 것 같았다. 이에 무삼사가 앞으로 다시 앞으로 나오면서, “천파침성(千波沈星)“ 천개의 파도가 일어나 별빛을 가리듯이 수많은 검영(劍影)이 일어나 섬전처럼 단리유아를 덮쳐온다. 실체와 환영(幻影)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어느 것이 진검(眞劍)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단리유아 역시 이에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운해천산(雲海千山)” 구름바다가 산하를 가리우듯 무수한 검기(劍氣)가 일어나 오히려 상대의 검영을 감싸려 한다. 청성파(靑城派) 청운적하검법(靑雲赤霞劍法)의 일초였는데, 공삼수칠(攻三守七)로 적절히 초식이 분배된 것으로 수비적인 성향이 강했다. “챙, 채, 챙.” 수많은 검영(劍影)이 서로 부딪혀 사라져가면서 상대방을 서로 노린다. 다시 한 번 양쪽으로 갈라서니, 이번에는 무삼사가 약간 손해를 본 모양으로 여기 저기 옷자락이 잘리고 자잘한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다. 단리유아도 옷자락이 조금 잘라져 나갔지만 상처는 없었다. 이 모습에 무삼사(毋三思)가 입술을 깨물고는, “일검파벽(一劍波劈)” 한줄기의 검광(劍光)이 쾌속하게 일어나 단리유아의 목을 노린다. 쾌초(快招)로 순수한 속도만 따진다면 천하에 따를 초식이 별로 없었다. 이에 단리유아가 왼쪽으로 한걸음 옮기며 상대의 공격을 맞받아친다. “섬광추뢰(閃光追雷)” 남궁세가(南宮世家)의 파천십삼검뢰(破天十三劍雷)의 일초로 상대의 초식에 비교할 만한 쾌초였다. 번갯불 같은 검기(劍氣)가 한 가닥 일어나 다가오는 검기의 측면을 자르고 지나갔다. “팟! 츠윽”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검광(劍光)이 나타나 모두 사라지기 전에.... 두 사람은 점점 비무(比武)에 빠져서 주위를 잊고 몰입해갔다. 무삼사(毋三思)는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을 연이어 펼치며 마치 주위에서 지켜보는 문하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듯이 했고, 단리유아는 계속해서 초식을 달리하면서 공격과 수비를 하고 있었다. 서로의 모습도 점점 빨라져 분간하기 어려워져갔고, 여기저기 날리는 검기(劍氣)와 검광(劍光)만이 보이고 검들이 부딪히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릴 뿐이었다. 또한 부딪힌 검기의 영향으로 흙먼지가 일어나 장내를 뿌연 안개처럼 가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해남파(海南派)의 인물들도 그들의 비무를 보면서 경탄에 경탄을 더했다. 무삼사(毋三思)가 펼치는 해남검공의 기기묘묘한 변화에, 그동안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부분과 순간순간의 적절한 초식의 전환을 보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그에 맞서서 계속해서 초식을 달리하면서 공격과 수비를 자유로이 행하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한 쪽에서 지켜보던 추천검(秋天劍)이 경탄하면서, “정말 놀랍군요. 저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도 그 풍모(風貌)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소문이 모자란 듯이 보일 정도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해조수(南海釣叟)가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감탄하는 어조로, “그래, 정말 대단하구나. 나도 어렴풋이 그의 기도(氣度)를 느꼈지만,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알아차릴 수가 없었는데. 그 모습이 워낙 보잘것없어서 오히려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있었지. 단지 들었던 소문과 내가 그의 기도를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을 보고, 나보다 고수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단다. 너희들도 강호(江湖)에서는 특이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더 주의해야 한다. 진인(眞人)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외양의 평범함에 속아서 상대를 속단해서는 안 됨을 명심하고 너희의 감각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일단 의심을 해보아야한다.” 옆에 앉아있던 다른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기세(氣勢)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저희 같은 사람은 떼로 몰려 달려들어도 상대가 안 되겠군요. 사부님이 그를 보고 자신을 대하듯 공대하도록 하게 한 이유가 있었군요.” “그래, 정말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알겠구나. 음, 지금까지의 대결을 보니 잘하면 본문(本門)의 오랜 숙원(宿願)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구나!” 남해조수(南海釣叟)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옆에서 시선은 대결하는 광경에 두면서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돌려 남해조수를 바라본다. 추천검이 큰소리로, “숙원이라구요?” “그래 너희들도 들어보았겠지? 언젠가 본문의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을 완성하고 본문의 무공을 새롭게 쓸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그동안 나 역시 장문사형이 그 사람이 되기를 기대했지. 정말 사형(師兄)은 성격은 어떨지 모르지만 무학에 대한 집념과 자질 면에서 본문사상 최고라 할 수 있는 인물이란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사형이 말썽부려도 묵묵히 따른 것은 사부님의 유명(遺命)도 있었지만, 사형이 그 사람이 되기를 빌면서 자잘한 세사(世事)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이지. 아마 이번에 단리소협과의 비무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잘만하면 우리 모두 여기서 새로운 검초(劍招)가 탄생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제 저녁에 내가 단리소협을 은밀히 찾아가서 부탁한 것도 될 수 있는 대로 사형의 전력(全力)을 끌어내 달라는 것이었지. 비무라는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설혹 상처를 입어도 죽지만 않을 정도로 해서.” 남해조수의 설명에 놀라서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사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부탁을 하셨다고요?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다 혹 잘못되면.....” “너희들은 단리대협의 무공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느냐? 나도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모르겠기에 한번 사형에게 물어보았지, 약간 불만스러운 것도 있어서. 얼마나 강하기에 사형이 그렇게 그를 떠받드느냐고? 그러니, 사형이 이렇게 말하더구나. ‘내가 소문에 그가 혈수마((血手魔)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나자 강호(江湖)에서 적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 내가 만나보니 오히려 소문이 부족한 감이 들었네. 처음 만났을 때 은근히 그에게 기세(氣勢)를 흘렸는데도 아무런 미동도 없더군. 그의 표정이 무감정해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나의 기세가 약한 것은 아니지. 그동안 내가 본문에 찾아오는 사람마다 한 번씩 시험해보았는데, 견디는 사람이 없었지. 잘해야 조금 버티는 정도에 불과했어. 아마 너도 내가 본문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쫓아내서 심사가 불편했겠지만, 그놈들이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못하고 화만내고 떠난 것도 다 그랬기 때문이었지, 하하하.’ 그러고 나서 사형이 말하더구나. 자신이 화경(化境)에 든 지도 이미 십년 가까이 되지만 별로 진전이 없었는데,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상대를 만났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틀림없이 자신의 무공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군.” 남해조수(南海釣叟)의 말이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추천검(秋天劍)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사부님이 그렇게 저 사람을 떠받들었군요.” “그래, 그러니 너희들도 저 사람의 나이에 상관하지 말고 예의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라. 만일 이번에 사형이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무공을 얻을 수 있다면, 도움을 준 그 사람은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되겠느냐? 사부(師父)라 부르기는 뭐하겠지만 최소한 사숙(師叔) 정도로는 불러 예우해야할 것이다. 너희들도 미리 그렇게 생각해 두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추천검을 비롯한 주변의 인물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한 문파에 새로운 검법(劍法) 한 벌을 창안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라면 그 정도도 약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일대의 무학천재(武學天才)가 아닌 이상, 하나의 무공을 창안하는데 몇 대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해남파(海南派)의 여러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처음 비무를 시작한지 한 시진(時辰)이 넘어서고부터 단리유아와 무삼사(毋三思)의 대결은 더욱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흐르고 있었다. 단리유아야 남해조수의 부탁이 없더라도 허술하게 비무를 넘길 생각은 없었지만, 무삼사 역시 일생의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을 모조리 펼쳐보고 있었다. 그동안 대성한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과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자신이 창안한 해천삼절(海天三絶)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펼쳐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리유아가 검법(劍法)의 흐름을 읽고 미리 공격하고 무삼사(毋三思)가 이에 맞서는 형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단리유아가 순간순간 검법을 방해해서 초식을 끝까지 펼칠 수 없게 방해했다. 그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무삼사는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비무에 몰입해가게 되었다. 점점 무삼사는 자신이 펼칠 다음 초식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무아지경(無我之境) 속에서 오로지 반사적으로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그것은 여태까지의 검로(劍路)를 벗어나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검로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아니 해남파(海南派)의 검로와 같으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해남파 무공이 본래 파도의 형상을 본떠서 창안한 것으로 변화(變化)와 쾌(快)를 위주로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다 더 효과적인 면을 강조한 기이(奇異)하고 신랄(辛辣)한 변초가 많이 포함되면서 변질되어 버렸었다. 그 결과로 하수들이나 실전에서는 다소의 효과가 있었지만, 그들이 검법의 효과적인 살상력에만 매달린 결과 정체되어서 더 이상 상승(上乘)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했었다. 그런데 무의식중에 단리유아의 계속된 공격을 막으면서 공격하는 상황이 지속될수록 그런 해남파(海南派) 무공의 특성인 기이하고 날카로운 기세는 점점사라지고, 장중(莊重)하면서도 모든 것을 휩쓰는 노도(怒濤)같은 형상을 드러낸 검법이 되어갔다. 아무리 단리유아의 공격이 시기적절해서 효과적으로 그런 상황을 유도했다지만, 수십 년간 오직 검법에만 매달린 무삼사(毋三思)의 뼈를 깎는 노력과 검법에 대한 궁구함이 없었다면 결코 바라볼 수 없는 결과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삼사가 공격을 펼친 후에 비무는 멈추어졌다. 처음 시작한 때로부터 두 시진(時辰)이 넘어가는 미시(未時:13-15시)말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단리유아의 모습은 옷자락이 곳곳에 잘리어지고 머리가 흐트러졌을 뿐으로 별달리 상처도 없었지만, 무삼사(毋三思)의 모습은 전신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상처투성이였고, 내상(內傷)도 심한 것처럼 안색이 창백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다는 듯이 형형히 빛나서 사방으로 광채를 뿌렸다. 상처가 심한데도 오히려 웃는 얼굴이 되어서 단리유아에게 고마움의 시선을 던지며, “허허허, 단리소협. 오늘 그대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소.” 무삼사(毋三思)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조용하게, “아닙니다. 무(毋)선배님. 선배님의 그동안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찌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앙축 드립니다. 새로운 검법을 얻은 것을.” “장문사형, 앙축 드리오. 정말 큰일을 하셨소이다.” “사부님, 제자도 축하드립니다. 본문에 오늘 같은 경사가 일어나다니....” 옆에 다가와있던 남해조수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두 축하의 말을 전한다. 이에 무삼사가 손을 저어 말리며 단리유아를 향해서, “하하하, 단리소협. 이 은혜는 삼대가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대은(大恩)일 것이요. 어찌 몇 마디 말로서 대신 할 수 있겠소.” 말을 마치자, 가까이 다가와 상처를 치료하고 약을 바르는 등 분주한 문하의 제자들을 보면서, “모두 그만하고 이쪽으로 정렬해보아라. 이까짓 상처야 피육(皮肉)이 찢어진 것에 불과하고 내상도 죽을 정도는 아니니. 너희도 오늘의 결과를 보아서 알겠지만, 단리소협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새로운 검법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도 이런 큰 은혜는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알지 못한다면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느냐? 앞으로 본문의 제자들은 단리소협을 보게 되면 본문의 큰 어른으로서 사숙(師叔)으로 대하도록 해라. 사실상 사부라 불러야하겠지만 본문에 적(籍)을 남길 분도 아니니 적어도 그 정도로는 대해야할 것이다. 혹시라도 불만이 있는 녀석이 있느냐?”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둘러볼 때, 남해조수(南海釣叟)가 대표로, “장문사형, 모두 아무런 불만이 없소. 모두가 눈앞에서 직접 보았는데 무슨 불만과 의심이 남아있겠소.” “하하하, 그래. 암 그래야지. 모두 단리소협에게 예를 표하도록 해라.” 무삼사(毋三思)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하자,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서 사숙(師叔)이라 외치며 예를 표한다. 단리유아가 계속 사양했지만 받아드리지 않으면 며칠이고 그대로 있겠다는 소리에 할 수 없이 승낙했다. 잠시 후에, 내상약을 먹고 상처를 대충 싸맨 무삼사를 단리유아가 청해서 오늘은 일단 정양하고 다시 내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단리유아도 비록 심하지 않지만 약간의 내외상이 있으므로 오늘은 그냥 숙소에서 쉴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해서 자리를 떠났다. 나머지 인물들도 각자 오늘의 비무와 무삼사(毋三思)의 새로운 검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삼삼오오 무리지어 흩어져갔다. 아마 그들은 오늘의 비무를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이런 고수들의 비무는 좀처럼 보기 어렵고 만일 볼 기회가 된다면 자신들의 무공의 진전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떠난 연무장에서는 몇 사람만이 남아서 어지러워진 장내를 정리하고 있었다. ****** AquaSilver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답니다. 앞으로도 잘못된 곳이 보이면 서슴없이 지적해 주세요. 해남파(海南派) 해남파(海南派) 4 이틀이 지난 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남해검치(南海劍痴) 무삼사(毋三思)는 거의 거동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상처가 회복되었다. 내상이 약간 남았지만, 그것은 며칠의 시간동안 약을 먹으면서 운기요상을 한다면 별 탈 없이 완치될 것이다. 그때부터 사흘 동안 단리유아와 무삼사(毋三思)는 무학에 대해서 토론하게 되었는데, 무삼사가 내상을 치료하는 오전을 제외한 오후 두 시진(時辰)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 자리에는 해남파(海南派)의 중요인물 뿐만 아니라 천리적자(千里笛子) 공손고(公孫鼓)까지 경청하게 되었는데, 모두가 귀를 세우고 단리유아와 무삼사의 논무(論武)를 경청했다. 곁에서 논무를 들은 사람들에게는 상승무공의 원리와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단리유아의 무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감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삼사 역시 자신이 깨달은 새로운 검법에 대한 대체적인 무리(武理)의 틀을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사흘의 마지막 논무(論武)가 끝나게 되었을 때, 단리유아는 해남도(海南島)를 떠날 시간이 되었음을 무삼사에게 알렸다. 그 말을 듣고 무삼사가 깜작 놀라서 며칠 더 머물도록 청했지만, 단리유아가 더 이상의 논무는 필요치 않고 이제는 명상과 실제수련을 통해서 검법을 완성시켜야 할 때임을 얘기하자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해남파(海南派)의 인물들도 더 머물러 주기를 바랐지만 한 곳에서 벌써 칠일이나 머물렀고, 또한 자신의 도움도 그리 필요치 않으니 이제 다시 비무행을 계속하고자 함을 알렸다. 그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모든 이들이 며칠 더 머물러달라고 서로 애원했다. 그들이 며칠 동안 단리유아와 생활해보니 그 무표정한 얼굴과 무심한 목소리에 아직도 대하기가 껄끄러웠지만, 그 무공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상대방에 대한 존중하는 태도에 모두가 감복했던 것이다. 무삼사(毋三思)가 이구동성으로 더 머물러 달라고 떠드는 것을 손을 들어 잠재우고, “너희들도 알다시피 여기 단리소협이 한 곳에서만 계속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항상 다른 적수를 찾아서 강호(江湖)를 떠돌았는데, 본문에 머문 지도 벌써 칠일이 되었다. 나 또한 붙잡고 싶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다. 아쉽지만 이제는 본문에서 떠나보내 드려야 할 시간이다.” 그래도 모두가 섭섭해 했지만, 자신들만을 생각해서 더 머물러 달라고 하는 것도 이기적임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식사 후에 다시 대청에 해남파(海南派)의 주요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공손고도 한자리에 같이 있었다. 무삼사(毋三思)가 손을 들어 장내의 소란을 진정시키고, “어제 논무(論武) 후에 직접 듣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 아직까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여기 단리유아 소협이 오늘 본문을 떠날 예정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울한 표정으로 듣고 있자, “너희들도 알다시피 본문에 준 도움이 얼마나 큰데 그냥 보내드릴 수 있겠느냐? 비록 겉치레에 불과할 지라도 사람의 일이란 언행(言行)의 일치가 중요한 것이다. 하여 몇 가지 단리소협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드리고자 한다. 단리소협, 자네가 별로 신외지물(身外之物)에 개의치 않음을 알고 있지만 본문의 성의를 보아서라도 사양하지 말아주게.” 인사만 하고 떠나려다 이어진 무삼사(毋三思)의 말을 듣고 단리유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무(毋)선배님, 제게는 별달리 신외지물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물건들은 두었다가 해남파(海南派)의 장래를 위해 쓰시지요.” 무삼사가 고개를 저으며, “아닐세. 자네가 어제 저녁을 같이하면서 이제부터는 세외(世外)로 나갈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는데 가능한 철저히 준비해야지. 사제(師弟), 내가 어젯밤에 준비해두도록 한 것은 다되었나?” “예,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무삼사의 말에 남해조수(南海釣叟)가 답하며 미리 준비해둔 물건을 가지고 나와 무삼사에게 전한다. 사방 한 자 정도 되는 보자기로 묶인 목함으로 무삼사가 보자기를 푼 다음 함을 열었다. 함속에는 한쪽에 사방 네 치 정도에 높이가 두 치가 약간 못되는 푸른 옥함(玉函)이 있었고, 그 주위로 수많은 자수정, 금강석, 마노, 산호, 진주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각종 보석의 아름다운 광채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탄성을 지르고 있을 때, 무삼사가 옥함을 들어서 단리유아에게 건네며, “자네가 열어보게.” 단리유아가 옥함을 받아서 열어보니, 함속에는 밀랍(蜜蠟)에 쌓인 보랏빛의 엄지손톱만한 단환(丹丸)이 이십여 개 정도가 들어있었다. 단리유아가 보고나서 궁금하여, “이것은 혹시 자옥신단(紫玉神丹)이.....” 단리유아의 말을 가로막으며 무삼사가, “자네도 알아보겠나? 이것은 본문의 비전단약(秘傳丹藥)인 자옥신단(紫玉神丹)이라네. 해중성약(海中聖藥)으로 알려진 백년이상 된 자패분(紫貝粉)과 진주를 주약으로 만든 것이지. 내공증진이나 내상에도 좋지만, 특히 외상에는 약효가 특출나지. 앞으로 계속 비무하다보면 다칠 때도 있을 텐데 자네에게는 이것 이상 좋은 물건은 없을 걸세.” 이정도의 자옥신단(紫玉神丹)이라면 가히 무가지보(無價之寶)와 맞먹는 양이었다. 아마 해남파에 있는 자옥신단을 모두 긁어모은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자옥신단은 백년이상이 된 자패와 진주를 빻은 다음 다른 여러 가지 약초와 함께 연단한 것으로 해남파의 비전성약이었다. 내공에는 그다지 별 효과가 없어서 한 알 먹으나 열 알 먹으나 십년의 공력(功力)만이 늘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상처치료에는 약왕곡(藥王谷)의 약왕신단(藥王神丹)과 비견될 정도로 우수한 것이었는데, 특히 외상의 치료에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본래 자패가 지혈과 새살을 돋는데 탁월한데다 진주 또한 해독작용과 함께 상처가 덧나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어서 외상치료에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단리유아가 그 양이 이십 개나 되는 것을 알고, 옥함을 다시 건네면서, “무(毋)선배님. 이것은 제가 받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입니다. 또한 제가 이것을 받는다면 앞으로 해남파에는 자옥신단(紫玉神丹)이 남아있지 않을 터인데, 결코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됐네. 걱정하지 말고 받게나. 자네가 본문을 걱정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하네만. 본문이 그동안 강호에서 활동을 하지 않아서 본도 이외지역에서는 세력이 위축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내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탄탄하다네. 여기 잔소리심한 내 사제가 심혈을 기울인 덕분이지. 아직도 본문에는 그 정도 수의 자옥신단이 있으니 너무 걱정 말게. 뭣하면 지금부터 다시 만들어도 될 테니. 이미 자패가 집단으로 자생하는 곳도 알고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걸세.” 무삼사의 말에도 몇 번 사양하다가,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는 무삼사를 보면서, “그러면 무선배님. 해남파(海南派)의 성의대로 이 신단(神丹)은 제가 요긴하게 쓸 터이니 저 보물들은 물리쳐 주십시오. 실제 저 같은 떠돌이가 무슨 큰돈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미 제가 쓸 만큼의 금전은 충분하니 저것은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아닐세. 앞날은 모르는 것이라네. 그리고 자네 혼자 보내기는 뭐하니 본문에서도 몇 명 자네를 수행하도록 할 생각이라네. 그러니 어느 정도의 보화는 필요할걸세.” 자신을 따라가게 하겠다는 무삼사(毋三思)의 뜻밖의 말에, “저를 수행하다니요?” “자네가 본문에 베푼 은혜가 태산 같은데, 어찌 자네 혼자만 보낼 수 있겠나? 어제 자네가 말한 바로는 남만(南蠻)에서 운남(雲南)을 거쳐 서장(西藏), 천축(天竺)으로 간다던데, 말도 통하지 않고 지리도 모를 테니 필히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걸세. 본문의 제자들 몇몇이 그동안 여러 타국과 교역하면서 그곳의 말과 풍습에 능한 이가 몇이 있다네. 그들 중에서 한두 명을 보내 자네를 수행하게 할 생각이네.” 오랜 시간동안 해남도(海南島)는 중국과 다른 나라들이 해상을 통해 무역할 때 거치는 중간기지로서의 역할을 해왔었다. 해남파(海南派)는 이러한 이권에 직접 제자들을 보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문파의 주요한 자금원중의 하나였다. “선배님, 저의 이번 세외(世外)로의 비무행은 저로서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세외의 풍물을 벗 삼아 둘러본다면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좋겠지만, 솔직히 저를 따라갔다간 십중팔구는 무사히 돌아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단리유아가 앞으로의 여정(旅程)의 험난함을 말하며 거절하는 데에도 무삼사는 고개를 저으며, “되었네. 나도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고 있네. 그러나 본문에 그 정도를 감내하지 못할 졸장부들은 없다네. 아무 걱정 말고 내말대로 하게.” 단리유아가 계속해서 거절하려다가 문득 한 가지 상념에 생각이 미쳤다. 바로 무념신니(無念神尼)와의 대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에 다른 사람들에게 정(情)을 못 느끼고 무감정하게 된 것은 내공심법인 회정결(灰情訣)의 영향도 있을 테지만, 어린 시절의 일 때문에 생긴 세상에 대한 불신이 더욱 큰 것일지도 몰랐다. 부모형제의 정을 받지 못한데다 아홉 살의 나이에 강호(江湖)를 유랑하면서 무수한 학대와 조소를 당한 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타인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중으로도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고, 일정한 관계이상으로는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광(四狂)과 서문하령(西門霞玲)의 일을 보아서도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런데 저번에 보타암(菩陀庵)의 무념신니(無念神尼)의 계도(啓道)를 받은 후부터 현재의 상태로는 더 이상 상승(上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의 행동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누군가와 사흘 이상 동행한 적이 없었는데, 세외(世外)를 떠도는 수년 동안 같이하게 된다면 최소한 동료애 정도는 생길지도 몰랐다. 서로가 오랜 세월을 같이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을 걱정하고 돌보아주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아주 작지만 자신의 깨달음에도 도움이 될 지도 몰랐던 것이다. 단리유아가 생각을 멈추고는 무삼사에게 승낙을 표시하자, 무삼사가 껄껄 웃으며, “하하하, 잘 생각했네. 자네도 누군가가 잡일을 수행해준다면 여러모로 앞으로 편할 걸세.” 단리유아게 큰소리로 말한 후에 좌중을 둘러보면서, “여봐라. 너희 중에 단리소협을 수행하여 세외(世外)를 돌아볼 사람은 없느냐? 단 두 사람만 뽑을 테니 원하는 사람은 지금 즉시 나서라. 그러나 가족이 있는 사람은 제외한다. 나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니, 진심으로 원하는 자만 앞으로 나서 거라.” 그 말에 예닐곱의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잠시 무삼사(毋三思)가 그들을 보면서 남해조수(南海釣叟)와 상의하다가, “흠, 내 생각에는 모두가 적격으로 보이는구나. 하지만 사람이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니, 상조(翔鳥)와 구의(九擬) 너희 둘이 따라가도록 해라. 너희들은 천애고아고 무공도 본문에서는 손꼽히니 가장 적격일 것이다.” 그 말에 삼십이 못 되어 보이는 젊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면서 소리를 지르며 좋아한다. 나머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실망에 차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삼사가 희희낙락한 모습의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는, “그만 좋아하고 앞으로 다가와 단리소협께 인사를 여쭈도록 해라. 그리고 앞으로 너희들은 항상 나를 보듯이 단리소협을 대해야한다. 너희의 어께에 본문의 얼굴이 걸려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무삼사의 말에 대답하고 나서 먼저 육척이 못되는 키에 매부리코와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인물이 나서며 자신을 소개한다. “단리사숙, 제자 선상조(宣翔鳥)가 인사드립니다.” 다시 옆에 있던 둥글고 곱상해 보이는 얼굴이어서 실제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인물이 나서며, “사숙님, 제자는 음구의(陰九擬)라 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끓는 물속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테니.” “소생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먼 길을 같이 가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그냥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두 사람의 인사에 단리유아가 포권하며 말하는 것을 듣고 옆에서 무삼사(毋三思)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럴 수는 없네. 남아일언 천년불개(男兒一言 千年不改 : 남자가 한 번 말한 것은 천년이 가도 바뀌지 않을 만큼 무겁다)라는 말처럼 한번 정한 바를 자네가 싫어한다고 바꿀 수는 없네.” “그래도....” 단리유아가 약간 난처함을 느끼고 있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공손고(公孫鼓)가, “무(毋)선배, 아무리 남아(男兒)의 언약이 무겁고 배분(拜分)을 그렇게 정해서 바꿀 수 없다고 해도, 앞으로 하루 이틀 같이 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있을 테니 그런 식의 표현은 단리소협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울 수도 있소이다. 차라리 조금씩 양보하여 두 사람은 소사숙(少師叔)이나 공자(公子)로 호칭하도록 하고, 단리소협도 반공대 이상 하지 않는다면 큰 문젠 없을 것입니다.” “어, 공손(公孫)수다쟁이야 오랜만에 쓸 만한 소리를 하는구나. 흠, 정 단리소협이 불편하다면 그렇게 하기로 하세” 무삼사(毋三思)의 말에 약간 안색을 붉히다가 공손고(公孫鼓)가, “내가 무슨 수다쟁이란 말이요? 정말이지..... 단리소협, 나도 이번에 느낀 점이 많은데, 나도 자네를 따라서 세외팔황(世外八荒)을 돌아보고 싶은데 나도 같이 가면 안 되겠나?” “뭐? 뭐 하러 네가 따라간단 말이냐? 그리고 네놈은 무림맹(武林盟)에 다시 안가 봐도 된다는 말이냐?” 무삼사가 큰소리로 역정을 내면서 소리쳤다. 처음부터 듣기 싫은 입바른 소리를 계속해서 마음에 안 들더니, 다시 나서서 단리유아를 따라가겠다는 소리에 화가 났던 것이다. “선배, 어차피 나하나 빠진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중원(中原)에서는 안 가본 곳이 드물지만 그밖에는 처음이니 이번에 평생소원이나 풀어봐야겠소.” “장문사형, 제 생각에는 공손대협이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비록 직접 세외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그동안의 경험과 풍문으로라도 들은 것이 많을 테니,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지장은 없을 것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해조수(南海釣叟)가 끼어들어 무삼사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이에 공손고의 대답에 화를 내려다 다시 남해조수가 하는 말을 듣고, 무삼사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다 늙어서 무슨..... 좋아, 어쨌든 단리소협의 마음이 중요하니, 계속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 단리소협,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내 생각 같아서는 귀찮은 혹밖에 안될 것 같지만 그래도 경험은 풍부하니 세외(世外)의 풍물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을 테고 무공도 그런대로 쓸 만하니.” “좋습니다. 이왕 다른 사람이 따라간다는데 한 사람 더해지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공손대협, 같이 동행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고맙네. 그동안 나도 세외팔황(世外八荒)을 구경하고 싶어서 발바닥이 가려울 지경이었는데, 이제야 소원을 풀게 되었구만. 나도 잘 부탁하네.” 공손고가 단리유아의 승낙에 기뻐 큰소리로 외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무삼사가 역정을 내며, “그만 떠들고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해라. 하여간에..... 여보게, 사제. 그런데 단리소협을 도와 세외(世外)를 안내할 다른 사람은 어디 있나?” “아, 그 사람은 해구포(海口浦)에 있으니 단리소협이 본토로 돌아갈 때 만나 같이 동행하면 될 것입니다. 아까 전서구로 연락했으니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겠지요. 모래 오후에나 단리소협이 해구포에 도착할 터이니, 그때쯤에는 모든 준비가 끝나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흠, 그래. 그럼 준비는 다 된 것인가? 혹시 빠뜨린 것은 없나? 단리소협, 혹시라도 더 필요한 것은 없소? 말만하면 대령할 테니 망설이지 말고 말해보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저 보석들은 너무 많으니 삼분의 일정도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사양하며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의 단리유아를 보다가, 할 수 없이 무삼사(毋三思)가, “정 그렇게 내키지 않는다면 반절만이라도 가져가도록 하게. 나도 더 이상은 양보 못하네. 상조(翔鳥)와 구의(九擬)는 어서 나와 챙기도록 해라. 앞으로는 너희의 일중에 하나일 테니” 단리유아가 더 이상 딴소리를 못하게 두 사람을 불러서 챙기도록 한다. 둘이 복명하며 나서서 보석들을 각기 반절씩 나눈 다음, 한 뭉텅이를 따로 자루에 묶어서 가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을 보자, 단리유아가 무삼사(毋三思)를 비롯한 해남문인(海南門人)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모두가 섭섭한 가운데,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면서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마지막으로 무삼사가 나서서 단리유아의 손을 잡으며, “소협,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본문에 요청하게. 어디에 어떤 상황에 있든지 자네가 부른다면 본문의 인물이라면 모두가 달려갈 테니.”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찌 더한 것을 바라겠습니까? 무(毋)선배, 그럼 이만 여기서 작별을 고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무심하게 말하는 단리유아의 태도에도 무삼사(毋三思)가 아쉬움에 젖어 쉬이 손을 놓지 못하다가, 남해조수(南海釣叟)가 옆에서 그만 떠나보내자고 하니 그제야 손을 놓고 떨어졌다. 잠시 후, 해남문인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크고 작은 네 명의 사람들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휴, 정말 아쉽구만. 본문에 붙들어 놓고 같이 논무(論武)나 하며 지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 다시 저 사람을 만날지 까마득하군.” 무삼사의 한탄어린 말에 옆에 있던 남해조수가 고개를 저으며, “사형,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시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되돌아오는 법이라 했으니 언젠가는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이오.” “나도 알고 있지만, 어쩐지 이생에는 다시 못 볼 것 같군. 아무래도 저 사람의 삶이 평탄치 않게 보이니....” 무삼사(毋三思)의 아쉬운 한탄 속에, 이윽고 그들의 신형(身形)은 산모퉁이를 돌아서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떠나가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몸을 돌려 문내로 침울한 기색으로 들어갔다. 아침인데도 어두워 비라도 곧 쏟아질 것 같은 우중충한 하늘의 모습은 마치 그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해남문인들의 마음처럼 어두컴컴했다. 남만(南蠻)으로의 여정(旅程) 남만(南蠻)으로의 여정(旅程) 1 해남파(海南派)에서의 아쉬운 작별을 뒤로하고 천리적자(千里笛子) 공손고(公孫鼓), 선상조(宣翔鳥), 음구의(陰九擬)와 함께 다시 길을 떠난 것은 일월(一月)의 마지막 날이었다. 해남파를 찾은 지 팔일 째 되는 아침에, 비라도 곧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머리위로 이고서 네 명이 이야기하며 울창한 수림속의 좁은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두 명의 해남파 제자들인 선상조와 음구의는 앞으로의 여정에 들뜬 모습으로 서로 얘기하고, 공손고 역시 해남파를 떠난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 것인지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모양이다. 공손고(公孫鼓)가 뒤에서 따라오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여보게, 앞으로 이렇게 같이 몇 년이나 함께할 사람들인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나나 단리소협이나 모두 유명한 사람이니 따로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네만, 자네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이름밖에는 모르니 자신에 대해 소개해보게나.” 이에 동안의 음구의(陰九擬)가 계속해서 웃음 짓는 얼굴로, “공손대협, 소사숙. 저희들은 본래가 천애고아로 어린 시절에 노예로 팔려가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스리비자야국 : 현재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 일대)의 무역상인 밑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도 그때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열 살 이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해남도(海南島)에 그 상인하고 같이 왔을 때 탈출하게 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이지요. 그러나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저희들이 탈출해보았자 얼마나 멀리 달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막 다시 잡혀갈 상황에 다다랐을 때, 당시 남해조수(南海釣叟) 사숙께서 저희를 보시고 구해주셨지요. 그 상인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해서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시고 저희를 거두어서 무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선상조(宣翔鳥)가 옆에서 맞장구치며, “맞습니다. 그때 저희가 탈출한 날이 열다섯 생일이 되었지요. 이 날을 잊지 않고 꼭 은혜에 보답하기로 맹세하고 새로 태어난다는 생각에 그날을 생일로 정했습니다.” 다시 음구의가 말을 받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상조의 말대로 그날이 저희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나이가 몇인지,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고 지냈지요. 음, 당시 저희가 그 무역상인의 밑에서 육년 정도 노예로 있을 때 여러 나라의 말들을 배웠지요. 천축국(天竺國)의 말과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의 말은 능통하게 할 정도이고, 다른 나라의 말도 약간씩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마 이번에 저희가 소사숙을 수행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공손고가 안타까운 기색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네들의 인생도 파란만장했군. 그래도 노예에서 빠져나와 해남파에 거두어져 무공도 익히게 되었다니 천만다행이네. 다른 나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니 앞으로의 일정에도 큰 도움이 되겠구만. 그런데 무공은 어느 정도 되는가?” 공손고의 말에 단리유아가 그들의 내공을 가늠해보니 아직 절정(絶頂)이 못되었지만, 머지않아 몇 년 이내에 절정고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선상조가 공손고의 물음에, “음, 저희 둘 다 해풍십팔검(海風十八劍)은 완전히 터득했고.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도 십오초까지 터득했습니다.” “꽤 괜찮은 솜씨로군.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갈 곳은 곳곳이 위험이 산재한 곳인데, 그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겠구만. 더욱 수련을 열심히 해서 최소한 자신을 지킬 정도는 되어야할 것일세.” “예, 저희도 그것이 걱정입니다. 늦어도 보름이후부터는 남만(南蠻)일대에 들어갈 터인데, 당장 무공이 급증할 수단도 없고.....” 선상조의 걱정 어린 말에 공손고가 크게 웃으며, “하하하, 자네들은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가? 여기 가까이 일대의 무학종사(武學宗師)가 있지 않나? 자네들도 지난 며칠 동안 논무(論武)하는 것을 보았을 테니, 단리소협이 얼마나 무학에 대해 해박한지 알고 있겠지? 그동안 싸웠던 것이 얼마인데, 가는 틈틈이 지도를 받는다면 최소한 짐이 되지는 않을 걸세. 게다가 자네들에게 맞는 다른 무공을 알려줄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그럼.....” 공손고(公孫鼓)의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밝아질 때, 선상조의 말을 가로막으며 단리유아가, “두 분, 먼저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소사숙(少師叔). 말을 놓으십시오. 만일 나중에라도 사문의 어르신들을 만난다면 저희가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강호(江湖)에서의 위명이나 모든 것을 보았을 때, 소사숙이 저희에게 하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편하게 말을 놓으십시오.” 두 사람이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극구 말을 놓기를 바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공손고가, “단리소협. 자네도 이미 약속하지 않았나? 반공대 이상은 하지 않기로. 그러니 그만 말을 놓게.” 아랫사람을 부르는데 익숙하지 않지만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그럼 앞으로는 말을 놓겠소. 그리고 내가 두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것은 혹시 별호 같은 것은 없는지 하는 것이오?” “그렇구만. 나도 미처 그것을 묻지 못했군. 앞으로 계속 지낼 텐데 이름을 계속 부르기도 뭐하니 별호가 있으면 좋겠지” 공손고의 말에 두 사람 다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 머뭇거리며 선상조가, “저희의 별호가 있긴 하지만, 그다지 듣기 좋은 것이 아니라서..... 본문에서는 저희 두 사람이 노예였다는 뜻에서 남노쌍검(南奴雙劍)이라고 불리곤 했습니다.” “남노쌍검이라고? 정말 듣기에 좋지 않는 이름이군.” 공손고가 얼굴을 찌푸리고 다시 한 번 불러본다. 잠시 단리유아가 생각해 보다가, “두 사람 모두 이제는 나를 따라가는 상태이니, 내가 새롭게 별호를 지어주겠소. 노(奴)자는 버리고 파(波)자를 넣어서 남파쌍검(南波雙劍)으로 부르는 것은 어떻소? 해남파(海南派)의 문인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으니.” “하하하, 좋은 이름이군. 별로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도 아주 듣기에 좋군.” 공손고의 말에 두 사람 모두 좋은 별호라고 좋아한다. 두 사람의 좋아하는 기색을 보면서 공손고가, “그럼 누가 좌검이 되고 우검이 될 것인가?” 이에 선상조가 나서며 말한다. “음, 제가 본래부터 좌검이고 이 친구가 우검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조금 더 가다가 오 장(丈) 정도의 공터가 나타났을 때, 남파쌍검(南波雙劍)을 보며 단리유아가, “그보다 두 사람의 무공을 시험해보고 싶은데 지금 무공을 볼 수 있겠소?” “아니, 여기서 말인가? 지금 당장?” 공손고(公孫鼓)와 남파쌍검(南波雙劍) 모두 단리유아를 보면서 황당해하는 얼굴로 쳐다본다. 이에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앞으로는 시간도 별로 없을 것이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니 지금 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선상조가 나서며, “소사숙, 그럼 그러기로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할까요? 저희들이 차례로 무공을 펼칠까요? 아니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은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것이오. 두 사람이 전력을 다해서 나에게 무공을 펼치시오. 명심할 것은 나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고 반드시 전력을 다해야한다는 것이오.” “그럼....” 이에 두 사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각기 좌우로 벌려서 검을 빼들고 공격할 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선뜻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먼저 단리유아가 검을 빼지 않고 검집째 들어 공격한다. 먼저 좌측의 선상조를 향해서 일로행(一路行)으로 전진하면서, 검을 휘둘러 상체를 상하로 공격한다. 평범한 태산압정(泰山壓頂) 같은 초식에 선상조가 검을 들어 해풍십팔검(海風十八劍)의 일초인 해풍과일(海風過溢)로 맞선다. “창!” 서로의 검이 부딪히고 해풍과일(海風過溢)의 변화가 이어져 검을 밀친 후에 단리유아를 공격할 것 같은 순간에, 단리유아의 검은 급격히 사선으로 꺾이며 선상조의 검을 피한다음 다시 아래에서 위로 베어 들어갔다. 이에 선상조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선다. 이때 뒤쪽에 있던 음구의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등 뒤에서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의 일초인 일검파벽(一劍波劈)으로 단리유아의 등을 향해서 공격한다. 무삼사(毋三思) 만큼의 속도와 날카로움은 없었지만 그래도 섬전 같은 속도였다. “팟” 한줄기 검광(劍光)이 일어나 단리유아를 베어갈 때, 단리유아는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을 펼쳐 허상을 남기고 왼쪽으로 물러섰다. 그런 다음 먼저 선상조에게 일검삼영(一劍三影)의 일초를 날려 물러서게 만들고, 다시 음구의에게 비홍쾌검(飛虹快劍)과의 싸움에서 터득한 비홍구천횡(飛虹九穿橫)을 펼쳐 공격한다. 아홉 가닥의 검영(劍影)이 일어나, 허상을 벤 것을 알고 잠시 당황하고 있던 음구의를 공격한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다급히 음구의가 해연비산보(海燕飛散步)로 물러나며 노해광란(怒海狂亂)을 펼쳐 막는다. “창! 챙 챙!” 구름 같은 검영이 일어나 단리유아의 공격을 막을 때, 단리유아의 일검삼영(一劍三影)에 물러났던 선상조가 이번에는 음구의를 구원하기 위해 공격한다.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공수의 전환이 계속되었다. 단리유아는 강호(江湖)의 삼류초식을 망라한 잡다한 초식으로 계속 두 사람을 공격했다. 분명 평범한 일검인 것 같이 보이는 데에도 막상 부딪히면 변화해서 전혀 다른 초식으로 이어지는 단리유아의 능수능란한 공격에 두 사람은 점점 공격은 고사하고 막기에도 급급했다. 게다가 때때로 허를 찌르는 권법(拳法)이나 각법(脚法), 지법(指法)등으로 공격할 때는 수비하기에도 어려워 물러나기에 바빴다. 전력을 다해 해연비산보(海燕飛散步)를 펼치고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의 십오초까지 연달아 몇 번이고 펼쳤지만 단리유아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했다. 실전(實戰)이었다면 이미 차가운 땅바닥에 몸뚱어리를 뉘였을 것이라 생각하며 두 사람은 사력을 다해 자신의 모든 무공을 발휘했다. 거의 한 시진(時辰) 동안 그러한 시간이 지속되었을 때, 단리유아가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남파쌍검(南波雙劍)은 옷자락과 머리가 흐트러졌고, 내식도 불안하여 호흡이 거칠어져 급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물러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탈진(脫盡)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사람 모두, 어서 조식을 취하시오.” 단리유아의 말에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내력을 모으며 조식을 취했다. 그 동안 구경하던 공손고도 다가와 감탄하며, “정말 자네는 싸움에서는 당할 자가 없구만. 만일 실전이라면 저 녀석들은 삼초를 못 넘겼을 걸세. 나조차도 십초를 넘긴다고 장담할 수 없겠구만.” 사실 단리유아가 전력을 다한다면 공손고 역시 십초를 넘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무공은 아직 화경(化境)에도 이르지 못했고, 내력도 백년정도에 불과했다. 남파쌍검(南波雙劍)에게도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고 내력도 거의 쓰지 않은 상태로 초식위주로 싸웠을 뿐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조식을 취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옆에서 호법을 서면서 그들의 무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일각 후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절을 하면서 감탄과 함께 찬사를 연발했고, 옆의 공손고도 끼어들어 같이 참여했다. 잠시 그들의 찬사가 이어진 후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단리유아가 무심한 어조로, “두 사람의 무공은 잘 보았소. 그런데 검법과 보법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무공들은 펼치지 않던데, 혹시 다른 것은 배운 적이 없소?” “예, 본문에도 몇 가지 권각법(拳脚法)이 있기는 하지만 검법에 비해서 너무 수준이 낮아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선상조가 단리유아의 물음에 대답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일단 좌검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기니 각법을 익힌다면 검법에 도움이 될 것이고, 우검은 성격이 침착하니 권법이나 지법을 가르쳐 주기로 하겠소. 하지만 지금은 검법에 매진하여야 하니 내 나중에 때가 되면 가르쳐 주겠소. 우선 그대들의 검법을 어느 정도는 완성해야할 것 같으니. 내 두 사람의 검법(劍法)을 살펴보니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도식적이라는 것이오. 초식은 완전하게 펼치지만 전혀 순간순간의 변화가 없어 보였는데, 그런 초식을 흔히들 죽은 초식이라 부르오. 보통 혼자서 수련하거나 규칙적인 대련만 하는 경우에 그렇게 초식이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데, 마치 초식이 주인이고 펼치는 사람은 종이 듯이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펼친다는 것이오. 자신의 생각이 먼저이고 초식은 그에 따라서 변화되어 펼쳐야지 무턱대고 초식을 완전하게 펼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오. 만일 실전이라면 목을 갖다 바치는 꼴이 될 것이오. 둘째로는 다른 무공을 전혀 모르니 공격에 있어서 큰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오. 그대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른다면 얘기가 틀려지겠지만, 지금의 그대들과 비슷한 수준의 고수를 만난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오. 실전(實戰)에서도 두 사람이 검을 들었다고 상대가 그대들의 검만을 바라보고 공격할 것 같소? 실제 싸움에서는 정정당당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재빨리 죽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오. 나는 실전에서 암기(暗器)를 쓰거나 독(毒)을 쓰는 데에 아무런 반대가 없소. 순간에 생사를 가르는 때에 무슨 예의가 필요하고, 무슨 정당함이 필요하겠소? 죽이지 않으면 죽는 순간에 할 수 있다면 침을 뱉어 상대의 시야를 가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지.” 이때, 공손고(公孫鼓)가 단리유아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러나, 단리소협. 강호(江湖)에서는 한 가지 무공에 전념하는 것이 다른 샛길로 빠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정설이지 않은가?” “흔히 하나의 무공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말입니다. 무공을 익히는 목적이 분분하지만 실제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공격할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무공을 익힙니다. 혼자서 무도(武道)를 참오(讖悟)하고 심신을 단련한다면 한가지의 무공만 연마하는 것이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과 전혀 부딪히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생인데, 혼자서 계속수련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무도(武道)의 완성이라는 큰 목적을 바라보고 무공을 연마하는 것도 좋지만 실제 그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마 만에 한명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실제의 대부분은 그런 경지에 오르는 것은 요원한 일이고, 하루하루가 치열한 싸움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입니다. 요컨대 제가 하고자하는 말은, 보통의 무공을 배우는 강호인(江湖人)이라면 실전(實戰)에서 자신의 무공을 보조할 공격수단이 최소한 하나이상은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실전에서 비슷한 수준일 때는 하나의 무공이라도 더 알고 있는 것이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검을 들고 싸우는 중에 갑자기 지법이나 각법, 권법등 여타의 수단으로 공격한다면 상대는 뜻밖의 공격에 놀라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결국에는 죽게 될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조용한 말에 다시 공손고가 미간을 좁히며, “그러면, 자네는 눈앞의 상황에 급급해 다른 무공을 익혀야한다는 것인가? 그러면 상승(上乘)의 경지로 가는 것에는 점점 멀어지고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지 않겠나?” “아닙니다. 과연 한가지의 절기(絶技)만 익힌다고 상승(上乘)의 경지에 빨리 다가서고, 혼자서 세상과 담을 쌓고서 수련한다고 해서 무공이 급속하게 진전되리라 생각하십니까?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제 경험으로는 틀리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몸으로 부딪혀 깨닫는 것보다 빠른 방법은 없습니다. 수많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터득한 무공과 혼자서 터득한 무공을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강하겠습니까? 그리고 제 말은 자신의 무공을 보조할 수단으로 다른 무공을 익히는 것이 실전(實戰)에서는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지, 다른 무공에도 자신의 주(主)무공처럼 전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우물을 파는 것이 시간이 덜 걸리고 빠르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무공을 익힌다고 그리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모든 무공은 서로 조금씩이라도 상관이 있어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공손고가 다시 대꾸하려다 문득 눈앞의 단리유아가 그 물증임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단리유아가 강호에 출도한 후, 무공이 점점 강해져서 상승(上乘)의 경지에 달한 것은 그동안의 상리(常理)를 깨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렇게 빠른 속도로 무공이 진전되었다는 소리를 예전에는 듣지 못했고, 그토록 어린나이에 비무행(比武行)을 시작한 사람도 없었다. 칠년 만에 일초반식(一招半式)의 무공도 펼치지도 못하던 아이가 십대고수(十大高手)의 일인이 된 것이다. 당시에 단리유아가 십대고수에 든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단리유아와 싸워본 적이 있는 사광(四狂)의 나머지 사람들의 말을 들은 후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화경(化境)에 들지는 못했지만 몇 년 이내에 화경에 들 것이 확실하고, 또한 천여번이 넘게 싸워왔는데, 만일 실전(實戰)이라면 화경의 고수일지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잠시 후에 단리유아가 남파쌍검(南波雙劍)을 보고, “그리고 두 사람은 앞으로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의 나머지 초식을 배우지 못할 것이니, 대신에 검법을 하나 전하도록 하겠소. 해남삼십육검에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해남삼십육검과 같이 익힌다면 앞으로의 상달에도 도움이 될 것이오. 과거의 검도명문인 한수검문(寒愁劍門)의 검법이었던 것인데, 내가 오래전에 우연히 얻은 검법일부를 조금 고친 것이오. 하지만 원래의 한수검에 전혀 못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소. 사실 해남삼십육검은 익히면 익힐수록 상승의 경지에 달하는 것이 어렵소. 무선배가 화경(化境)에 이른 것도 거의 백에 하나의 확률로 성공한 것으로, 무선배의 그동안의 끊임없는 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오. 너무 기괴한 살초에 치중해서 검도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통은 절정(絶頂)에 달하는 것이 한계일 것이오. 앞으로 한수검법을 수련하여 완전히 터득할 때까지는 실전에서만 계속 해남삼십육검을 쓰도록 하시오. 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내가 상대해줄 것이니, 실력은 금방 늘게 될 것이오. 뭐니 뭐니 해도 실전(實戰)이 최고이니. 가만히 혼자서 궁리하며 수련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도 때가 있는 법이니까.” 단리유아가 전해줄 무공은 이백년 전 제자들 간의 싸움으로 멸문한 한수검문(寒愁劍門)의 검법으로 강호행중에 단리유아가 우연히 얻은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한수검문은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도명문이었는데, 허무하게도 제자들 간의 내분으로 문파가 산산조각이 나버렸었다. 단리유아가 얻은 것도 완전한 것은 아닌 한수검칠십이로(寒愁劍七十二路) 중에서 사십팔로에 불과했다. 그 당시 검법을 얻고 후반초식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자신이 다시 새롭게 만든 것이었다.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과 비교해도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사십팔로의 초식을 칠초로 줄이고 두초를 더해서 새롭게 구초로 만든 것이었다. 남파쌍검(南波雙劍)은 새로운 검법을 전수해 준다는 말을 좋아하다가, 매일 아까와 같은 대련을 반복한다는 것에 몸을 부르르 떨며 창백한 안색이 되었다. 옆에서 공손고도 자신에게는 뭐 없느냐고 떠들었지만, 단리유아가 선배는 이미 절정에 달해서 다른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 현재의 무공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대답에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잠시 후, 한두 방울 빗방울이 쏟아지고 두 시진(時辰)이 가깝게 지체한 것을 알고는 모두가 신법을 펼쳐 다시 만녕(万寧)을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그날 저녁은 만령현의 객잔에 묵으며 남파쌍검을 따로 불러서 한수검법(寒愁劍法)을 전하고 다음날부터 한수검법을 수련하도록 했다. 또 앞으로는 매일 저녁을 먹은 후에는 단리유아가 직접 대련을 통해서 수련 정도를 점검하기로 했다.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나서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해구포(海口浦)에 도착했다. 남파쌍검의 안내로 해남파(海南派)가 운영하는 상단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던 안내역으로 따라갈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사십대의 다부진 체격의 사람으로 각진 얼굴에 두툼한 입술이 생각했던 상인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선상조가 앞으로 나서며, “웅(熊)사형, 사형이 이번에 저희와 같이 갈 사람이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다른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래, 원래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내가 바꿔달라고 했단다. 우선 소개나 시켜다오. 자세한 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에 선상조가 깜빡했다는 듯이 단리유아를 보면서, “웅사형, 이분이 단리사숙으로 이번에 저희들이 수행할 분이십니다. 저분은 천리적자 공손고라는 선배이시구요.” “음, 소질 웅정향(熊情香)이 사숙께 인사드립니다.” “반갑소. 단리유아라 하오. 앞으로는 그냥 소사숙이나 공자라 부르시오.” 단리유아의 무표정하고 무심한 말에 약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옆에서 음구의가 귓속말로 설명하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습니다.” 옆에서 있던 공손고가 웅정향을 바라보며, “그런데, 자네. 별호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자네가 안내인이 맞나?” “공손선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소생은 강호(江湖)에서 난파검(亂波劍)이라 불리는 웅정향(熊情香)이라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맡고 있는 것이 주로 대구월(大瞿越 또는 大越國이라 부름-현재의 베트남북부지역)과의 거래여서, 그쪽지역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사제들이 천축어(天竺語)를 아니 다른 사람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서장어(西藏語)는 저도 알아듣는 정도는 되니 별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난파검(亂波劍) 웅정향(熊情香)은 해남파에서 손꼽히는 고수로 그래도 강호에 알려진 몇 사람 중 하나였다. 잠시 후, 모두가 자리에 좌정했을 때 단리유아가, “흠, 좋소. 그러면 이제 갈 사람은 다 모인 것 같소. 앞으로 험난한 여정(旅程)이 이어질 것이지만, 모두가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 협력한다면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모두가 앞날에 대한 예상과 기대로 한동안 떠들썩했다. 잠시 후에 공손고(公孫鼓)가 웅정향을 보면서, “그런데 자네는 자원했는가? 이 두 사람은 자원했다지만.” “예, 저도 처자식도 없고 혈혈단신(孑孑單身)이지요. 원래는 다른 사람이 가기로 했지만, 저도 단리사숙과 함께 세외(世外)를 돌아보고 싶어서 바꾸어 달라고 한 것이지요. 다행히 사부님께서 허락해 제가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단리유아가, “흠,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럼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일찍 길을 떠나기로 합시다.” “뭐? 자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제 여행을 시작하는데 축하주 한잔도 없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냥 오늘밤을 보낼 수는 없지, 자네들은 아니 그러한가?” 단리유아의 말에 공손고가 펄쩍뛰며 반발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요.” “맞습니다. 오늘 같은 날 앞날을 기리는 술이 빠질 수 없지요.” 이구동성으로 떠드는 소리에 단리유아가 승낙하니 모두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어서 주루로 가자고 떠든다. 주루에 앉아서 단리유아는 차를 마시고, 나머지는 술을 마시며 앞으로의 여정(旅程)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한 시진여가 흘러 해시(亥時:21-23시)말이 가까워질 때 단리유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 더 술을 마시다, 자시가 넘었을 때 오늘밤은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간만에 회포를 풀자고 모두가 홍루(紅樓)로 향했다. 남만(南蠻)으로의 여정(旅程) 남만(南蠻)으로의 여정(旅程) 2 늦은 밤 홀로 처소로 돌아와 단리유아는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여 심신을 가다듬었다. 지난 며칠 동안은 남파쌍검(南波雙劍)의 수련을 도와주느라 제대로 자신의 수련은 하지 못했었다. 앞으로는 혼자 있을 시간도 줄어들 테니 밤을 새워 수련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운공을 마치고나니 벌써 축시(丑時:1-3시)말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어차피 자기에는 늦어서 운공한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은 희미한 달빛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어서 보통사람이라면 지척이라도 알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오 장(丈)이상은 흐릿한 형체만 보일 것이다. 단리유아가 머물고 있는 곳은 해남파(海南派)의 분타이자 상단(商團)인 장원에서 가장 안쪽의 중요인물이 머무는 내원(內院)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처소에서 나오니 사방 오 장(丈)가량의 공터와 정원으로 이루어진 곳이 나타났다. 한쪽 구석의 정원석(庭園石) 위에 앉아서 희미한 달빛을 벗 삼아 해남파에서 보고 겪은 검법에 대한 상념에 잠겼다. 해남삽십육검(海南三十六劍)과 해풍십팔검(海風十八劍), 그리고 마지막에 보여준 무삼사(毋三思)의 검법.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빼들어 천천히 기억이 나는 대로 하나하나 펼쳐보았다. 진기를 넣지 않고 초식만으로 펼치는 것이지만, 점점 속도가 빨라질수록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시끄럽게 주변을 덮치기 시작했다. “휘익, 휙, 쉬익”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머릿속에 떠오르는 검식에 따라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무삼사(毋三思)가 마지막에 보여준 검법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먼동이 터오는 것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무삼사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어 눈을 감고 천천히 펼쳐보았다. 기본적인 움직임은 해남삽십육검(海南三十六劍)에서 나왔으니, 어색하거나 막힌 곳은 그것을 참고하면서 움직였다. 처음에는 무삼사의 검법과 비슷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과도 다른 검형(劍形)을 이루게 되었다. 새벽부터 계속되는 시끄러운 소리에 상단의 몇몇 인물이 나와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단리유아의 움직임에 모두가 놀라게 되었다. 처음에는 해남삽십육검과 비슷하게 펼치더니 나중에는 자신들보다도 완벽해 검법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친숙하게 느껴지면서도 낯선 검법을 펼치게 되었을 때는 할 말을 잃고, 넋을 잃은 채 단리유아의 움직임을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히 뭉게뭉게 일어나는 파도치는 검영(劍影)의 모습에 자신들의 검법과 관계가 있음을 알았지만, 그 부드러우면서도 장중한 검형(劍形)은 전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도 전광(戰狂) 단리유아가 이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광경을 볼 줄은 몰랐던 것으로, 모두가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부릅뜨며 하나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런 일생일대의 기우(奇遇)에서 단 하나의 초식이라도 제대로 기억해서 펼칠 수 있다면 자신들의 무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설사 초식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러한 검무(劍舞)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검법의 진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단리유아가 한참을 검법에 빠졌다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벌써 시간은 사시(巳時:9-11시)초로 한참 주위가 시끄러운 시간이었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시선에 잠시 그들을 둘러보다가 자리를 떠나 처소로 들어가 몸을 씻고 나서,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조식을 취했다. 자신이 떠올린 검법을 생각해보고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이대로 무삼사(毋三思)에게 전해서 도움이 되도록 할까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무삼사도 지금 검법을 완성하는 중일 것이니, 훗날 자신이 완성한 것과 무삼사가 완성한 것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그때 완벽하게 만들어서 전해주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남파쌍검(南波雙劍)의 수련을 도와주는 것을 제외하고 특별히 생각할 무공이 없었는데 덕분에 지루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행 중 아무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고 나서 대청의 의자에 앉아서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해 보았다. 두 가지의 길이 있었는데 직접 대구월(大瞿越)로 향하는 것과 다시 광동성(廣東省)의 뇌주반도(雷州半島)로 돌아가서 광서성(廣西省)으로 갔다가 국경을 넘는 방법이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일단 이곳 해구포(海口浦)에서 바로 광서성 남서부의 항구인 방성항(防城港)으로 갔다가 북륜현(北崙懸)을 거처 십만대산에 들린 후에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일단 십만대산(十萬大山)의 응수간(鷹愁間)을 들려서 오백여 년 전 중원남부 지역의 패자였다가 멸망한 십왕전(十王殿)의 옛터를 살펴보고 가기로 했다. 과거 칠대강파(七大强派)가 일·이차정마대전으로 사라진 후에 일어난 십왕전(十王殿)은 위진남북조(221∼589년)시대에 남부지역을 거의 휩쓴 패자였다. 서로는 운남(雲南), 북으로는 귀주(貴州)·호남(湖南), 동으로는 광동(廣東), 남쪽으로는 남만(南蠻) 일대에까지 세력을 떨쳤었다. 그러나 오백여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멸망했다고 알려진 십왕전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그 자세한 사연을 몰랐다. 다른 곳은 찾아보지 않더라도 십만대산(十萬大山)에 들려서 십왕전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었다. 십왕전(十王殿)을 거친 후에는 십만대산(十萬大山)을 넘어 바로 국경을 지나 대구월(大瞿越)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단리유아가 찾아가고자 하는 남만(南蠻)지역은 바로 십만대산 너머 대구월과 임읍국(林邑國:참파왕국-베트남 중남부), 각멸(閣蔑:크메르-캄보디아에서 라오스 남부일대)이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과거 원시마교와 천강신문, 봉황곡이 천하를 다투던 시절에 이미 남만일대의 패자였던 구음독교(九陰毒敎)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확실한 멸망시기도 알려지지 않았고 아무도 정확한 위치를 몰랐지만, 단지 중원이 전국(戰國)시대였을 때부터 존재했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 이름이 끊긴 것이 거의 천년이 넘는 전한(前漢) 중엽부터인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리유아도 무영비고(無影秘庫)에서 과거의 강호사(江湖史)를 적은 고서에서 그 이름을 들었던 것이다. 단리유아의 생각으로는 한(漢)무제(武帝)의 남방경략의 과정에서 멸망했거나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단리유아가 한참 앞으로의 여정(旅程)을 생각하고 있을 때, 사시(巳時:9-11시) 말이 가까워져서야 부스스한 얼굴로 일행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먼저 남파쌍검(南波雙劍)이 돌아왔고, 난파검(亂波劍) 웅정향(熊情香)이 이어서 들어오더니, 오시(午時:11-13시)가 된지 한참이 되어서야 마지막으로 천리적자(千里笛子) 공손고(公孫鼓)가 돌아왔다. 모두가 눈 밑에 기미가 끼어 푸르스름한 것을 보니 얼마나 어제 밤에 무리를 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이 가장 늦은 공손고를 보고 노인네가 정력도 좋다고 놀리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그들을 둘러보다가, “흠,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제 출발하기로 합시다.” 모두가 인상을 찡그리는 가운데 공손고가, “아니, 아직 아침도 못 먹었는데, 벌써 출발한다는 것인가? 우리 해장이나 하고 출발하세. 지금 배를 타고 가다가는 아마 산송장을 치워야 할지도 모르네.” “맞습니다. 소사숙,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정확히 말씀을 안 해주셨잖습니까? 일단 아침, 아니 점심을 먹으면서 상의한 후에 출발하기로 하지요.” 말하다가 해가 중천에 이른 것이 생각나 약간 겸연쩍어 하면서 웅정향이 말한다. 이에 다른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저녁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모두가 탁자에 둘러앉아 이른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한다. 단리유아도 그다지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다. 웅정향이 음식을 먹다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소사숙, 그런데 곧바로 대구월(大瞿越)로 가실 것입니까?” “아니오. 일단 광서성(廣西省) 방성항(防城港)으로 갔다가 십만대산(十萬大山)을 넘어서 구월로 갈 생각이오.” 단리유아의 조용한 목소리에 공손고가, “아니, 십만대산에 들릴 일이라도 있나? 현재 그곳에는 별 세력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현재 광서성(廣西省)에는 북동부 계림(桂林)일대의 백건방(白巾幇), 그 아래 대요산(大瑤山)으로부터 동쪽으로 광동성(廣東省)의 경계와 맞닿은 오주(梧州)일대까지의 흑룡방(黑龍幇), 남동부 옥림(玉林)지방과 운개대산(云蓋大山)일대의 검림성(劍林城), 중북부 유주(柳州)일대의 유가대원(柳家大園), 북부 하지(河池)일대의 남단파(南丹派), 북서부 백색(百色)지방을 중심으로 월강문(月岡門), 중부의 성도(省都)인 남령(南寧)에서 남부 흠주(欽州)일대의 태평문(太平門), 남서부 녕명(寧明)에서 십만대산(十萬大山)에 이르는 지역의 신수문(神樹門)이 있었다. 대부분 세력이 미약했고, 비록 흑룡방이 사파에 속하고 백건방이 정파에 속한다고 하지만 나머지는 정사(正邪)가 불분명했다. 중원에 세력을 떨칠만한 이렇다 할 세력도 없는 가운데, 그들 몇 개의 문파가 서로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사실 광서성(廣西省)은 중원(中原) 서남부의 끝으로 십만대산(十萬大山)을 넘으면, 그곳부터는 남만(南蠻)이라고 일컫는 지역이었다. 또 광서성은 장족(壯族)을 비롯하여 묘족(苗族), 회족(回族)이 주민의 반을 차지하여 말도 다르고 한족(漢族)들도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공손고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십만대산의 응수간(鷹愁間)에 들려서 찾아볼 것이 있습니다.” “응수간이라고? 그곳에 뭐가 있는데? 아니, 그건 그렇다 치세. 그런데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도대체 남만에는 왜 갈려고 하는가? 그쪽이야 순 독을 다루는 놈들뿐인데? 아예 광서성에서 운남(雲南)으로 갔다가 서장(西藏)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공손고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큰소리로 묻는다. 이에 단리유아가 무심한 어조로, “물론 비무하려고 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독공(毒功)을 익힌 고수들과는 거의 싸워보지 못했으니. 독을 다루는 곳으로 천독곡(千毒谷)을 제외하고는 저도 싸운 적이 거의 없습니다. 몇몇 다른 독문(毒門)과도 싸운 적이 있지만 수준이 정말로 보잘것없었습니다. 당가(唐家)도 있지만, 그때는 암기만 썼지 독이나 독을 묻힌 암기는 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만(南蠻)의 모든 사람들이 독공만 익힌 것은 아닐 테니, 특이한 무공도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네, 정말 싸움귀신이라는 소리가 딱 들어맞는군. 아니 다른 무공도 아니고 독공은 까딱하다가는 죽기 십상인데, 그들과 싸우려고 남만에 들어가? 정말 목숨이 몇 개나 되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구만.” 단리유아의 말에 황당해하는 공손고의 대꾸가 끝나자, 웅정향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소사숙, 저도 남만(南蠻)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깊숙이까지 들어가실 생각이라시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할 것입니다. 그들의 독공(毒功)도 무섭지만, 독술(毒術)이나 고충술(蠱蟲術)이 더 상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남만에 사는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독을 다룰 수 있으니 한시도 긴장을 늦추고 편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연적인 독물(毒物)과 독장(毒障)이 처처에 널린 곳이라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대도(大都)는 괜찮겠지만. 제가 지난 며칠 동안 준비한 것은 간단한 해독약(解毒藥) 정도에 불과한데 아마 더 필요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걱정하는 기색으로 단리유아를 쳐다보며 그냥 남만지역은 통과하자고 설득한다. 그들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단리유아가 일정이 지체된다는 소리에 잠시 생각해보다가, “그러면 이곳에서 준비할 것이오?” “흠, 일단 준비하는데 까지는 하다가 남만(南蠻)과 인접한 광서성(廣西省)의 십만대산(十萬大山)의 끝자락인 동중현(洞中縣)에서 몇 가지는 구해야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웅정향이 잠시 생각해보다가 대답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다시, “며칠이나 걸릴 것 같소?” “일단 이곳에서 사흘정도는 더 필요하고, 동중현에서도 며칠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알겠소. 우선 그렇게 합시다. 나도 그동안에 남파쌍검의 수련이나 도와야겠소.” 잠시 생각해보다 웅정향의 말에 단리유아가 동의를 하고 남파쌍검(南波雙劍)을 보고 말한다.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일그러지는 남파쌍검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웅정향이, “소사숙, 수련이라니요? “하하하, 그런 것이 있네. 여기 자네의 사제들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지. 세상에 십대고수(十大高手)가 몸소 대련해주며 무공을 지도해준다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 수 있나?” 울상인 남파쌍검의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공손고가 말한다. 이에 웅정향이 단리유아의 기색을 살피며, “그래요? 그러면 소사숙, 저도 같이하면 안 되겠습니까?” 남파쌍검(南波雙劍)이 얼굴을 저으며 하지 말라는 눈치를 주는 데에도 단리유아에게 청한다. “괜찮소. 같이해도 별 상관이 없으니.” “소사숙, 정말 고맙습니다.” 웅정향이 단리유아의 허락에 기뻐하다가, 자신을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남파쌍검(南波雙劍)의 표정과 공손고의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윽고 점심을 마치자 각자 할 일을 찾아서 떠났다. 공손고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고, 웅정향은 우선 물건을 알아보고 나중에 오겠다고 떠났다. 단리유아는 남파쌍검을 데리고 한쪽의 연무장으로 향한 다음,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했듯이 먼저 한수검법(寒愁劍法)의 구결을 설명하고 다시 각각의 초식을 펼치며 설명했다. 한 시진(時辰)이 지나자 어느 정도 설명이 끝난 후부터 남파쌍검의 괴로운 일과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검법을 지도한다면서 조금이라도 자세가 틀렸다가는 무지막지하게 철검(鐵劍)으로 때렸던 것인데, 검집째로 두드리니 철로 된 몽둥이와 다를 바가 없어서 맞는 곳마다 멍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한 시진(時辰) 후에 이번에는 직접적인 대련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막지 못하면 고스란히 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수련인지 화풀이 인지 궁금한 남파쌍검이었지만 워낙 무표정한 얼굴의 단리유아이니 알 수가 없었다. 수련이 끝날 즈음에 찾아왔던 웅정향은 두둘겨 맞는 남파쌍검의 모습을 보고나서, 얼굴가득 두려운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바라보다 자신도 끼어들어 덤비라는 소리에 일이 바쁘다며 도망쳐버렸다. 그들은 단리유아가 때리는 것을 단순히 화풀이 하는 것으로 보았겠지만, 사실 그것은 상승의 타혈법(打穴法) 가운데 하나였다. 격타전공(隔打傳功)으로 내력을 이용해 신체 곳곳을 두드려 알게 모르게 내공을 전이하고 혈도의 탁한 기운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절대로 다음날에는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남파쌍검(南波雙劍)도 수련한 다음날 아침이면 씻은 듯이 멍이 없어지고 통증도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단리유아가 무슨 수를 쓴 것은 알았지만 어떤 방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이 물어보았을 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수련에만 전심을 쏟으라는 말뿐이었던 것이다. 그 후 이틀 동안 남파쌍검은 아침저녁으로 수련에 매달려야했다. 최소한 한수검법(寒愁劍法)의 초식을 암기하고, 혼자서 초식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되는 것이 단리유아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단리유아 또한 저녁에는 해남파(海南派)의 검법을 연구하여 새로운 검법을 완성하는데 바빠서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오직 공손고만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저기 쏘다니거나, 잠을 자거나, 남파쌍검이 대련할 순간에 옆에서 낄낄거리고 구경하는 등 태평하게 지냈을 뿐이었다. 첫날 이후 웅정향은 될 수 있는 한 단리유아와 얼굴이 부딪히지 않도록 피하며 바쁜척하면서 지냈다. 이월 오일이 되어서야 준비가 끝나 일행은 배를 타고 광서성(廣西省)의 방성항(防城港)으로 향했다. 배안에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다가 일단은 방성항에서 십만대산(十萬大山)으로 간 다음, 단리유아는 응수간(鷹愁間)으로 떠나고 일행은 동중현(洞中縣)으로 먼저 가서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방성항(防城港)으로 향하는 배안에서도 이전과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다. 갑판 한쪽에서는 남파쌍검이 단리유아와 함께 수련을 계속했고, 공손고는 구경하거나 선실에 처박혀 잠을 자는 것이 일과가 되었으며 웅정향은 어디에 숨었는지 식사 할 때에만 얼굴을 내밀었다. 그렇게 오일 간 수련을 더하니 남파쌍검(南波雙劍)도 약간의 진전이 있어서 한수검법(寒愁劍法)의 구결과 초식을 완전히 암기할 수 있었다. 또한 매일의 대련으로 인해 그동안의 문제점이었던 초식의 변환에 있어서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볼 수 있었다. 오일이 흐른 저녁 무렵에서야 일행은 방성항(防城港)에 도착했다. 다음날부터 그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길을 잡아서 떠난 일행이 십만대산(十萬大山)의 아래에 있는 북륜현(北崙縣)에 도착한 것은 사흘이 더 지난 이월 십삼일의 저녁 무렵이었다. 각자 쓸 물건을 제외하고는 남파쌍검이 짊어진 각종 해독에 필요한 약초를 비롯해 해남파에서 가져온 보석이 전부였는데도, 일행이 모여서 함께 가니 길이 더딘 것 같았다. 단리유아 혼자서 길을 떠났다면 하루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꼬박꼬박 세끼를 찾아먹으며 저녁에는 남파쌍검의 수련을 돕기 위해서라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산 아래에 일행을 남겨두고 단리유아 혼자 십만대산(十萬大山)의 응수간(鷹愁間)를 향해서 떠났다. 일행은 계속 서진하여 십만대산을 넘어 동중현(洞中縣)에 이르러 단리유아를 기다리며 나머지 물건들을 준비할 것이다. 뒤에서 쳐다보는 일행의 시선을 뒤로 하고 높고 낮은 산이 연이어 펼쳐진 십만대산을 향해서 신법을 펼치며 단리유아는 멀어져갔다. [참고 & 설정] [1] 천독곡(千毒谷) : 현 강호에서 약왕곡(藥王谷)과 더불어 독·약의 양대산맥. 귀주성(貴州省)의 성도(省都)인 귀양(貴陽)에서 남쪽으로 이백여리 떨어진 백운산(白雲山)에 위치해 있음. 십대고수(十大高手) 중 독왕(毒王) 천중리(千仲理)가 곡주로 있음. 남만(南蠻)으로의 여정(旅程) 남만(南蠻)으로의 여정(旅程) 3 십만대산(十萬大山)은 광서성(廣西省)의 서남부 끝에서부터 남부의 흠주(欽州)일대까지 뻗어있는 삼백 리가 넘는 산으로 최고봉은 사천구백여 척의 시량봉(蒔良峯)으로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어서 대개 삼천 척 정도의 낮은 봉우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산봉이 계속해서 이어져 산속에 산이 있는 모습을 실감케 하는 곳이었다. 찾아가고자 하는 응수간(鷹愁間)을 어제 저녁에 점소이에게 물어보았는데,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북륜현(北崙懸)에서 동쪽인 십만대산(十萬大山)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비륭정(碑隆頂) 근처 어디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쪽 방향으로 어림잡아 출발했는데, 울창한 수림이 들어갈수록 무성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출발할 때는 대충 비륭정을 보고 떠났는데, 산이 첩첩으로 이어져 밑에서 본 모습과는 다르게 골자기가 깊고 험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저녁 무렵 산중턱의 한 사냥꾼 부락을 만났다. 모두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습으로 칼을 맨 단리유아의 모습에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강호인(江湖人)이 이 깊은 산중까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과거 십왕전(十王殿)이 십만대산(十萬大山)에 자리 잡았을 때만해도 강호인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최근에는 이렇다할 문파가 근처에 없었고 큰 산채도 없었다. 경계하는 그들에게 단리유아가 응수간(鷹愁間)를 물어보자 모두가 놀라게 되었다. 잠시 후에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당신은 강호인(江湖人)으로 보이는데 그곳은 대체 왜 찾는 것이오?” “그곳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시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뭔가 찾을 것이 있어서 그러니.” 촌장이 그곳을 알고 있다는 기색이자 단리유아가 다시 물었다. 단리유아의 무심한 표정과 목소리에 모두가 놀라고 떨떠름한 표정이었다가, 촌장이 헛기침을 하면서, “흠, 흠. 당신 정말 제정신이요?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강호인(江湖人)이라 하지만 그곳은 사람이 다가갈 수가 없는 곳이요. 독장(毒障)이 일대를 뒤덮고 있고, 한번 들어가면 아무도 다시 나오지 못하는 곳이라오. 우리 같은 산사람들도 다가서기꺼리는 곳이니, 그만 단념하고 산을 내려가시오. 우리도 그 근처는 금지로 부르고 웬만해서는 다가서지도 않으니.” “꼭 가봐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시고 알려주십시오.” 촌장의 설명에도 계속해서 단리유아가 사정한다. 안된다고 거절하면서 한동안 고개를 젓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허, 정말 몰 말리겠구만.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을 텐데. 정 그리 가야만 한다면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지내고 내일 떠나시구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냥 위치만 가르쳐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전혀 변화 없이 계속 무표정한 기색으로 대답하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촌장이 속으로, ‘이 사람은 어째 이 모양이지? 정말 사람이 맞나? 이러다 혹 부정 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괜히 하룻밤 묵고가라 한 것은 아니려나? 어쨌든 길 잃은 사람을 무작정 내쫓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고, 괜히 강호인(江湖人)을 건드려 보았자 좋은 일도 없으니.....’ 한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이미 날이 어두워져 지금 간다면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다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게. 그리고 아직 식전이겠지? 같이 식사나 하면서 얘기나 나누세.” 촌장이 앞장서 단리유아를 안내해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촌장의 처사에 불만을 표한다. 모두가 긴장한 기색으로 단리유아가 들어간 촌장의 오두막을 보면서 여차하면 뛰어들 태세로 각자의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촌장의 집에서 같이 저녁을 들며 응수간(鷹愁間)의 위치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자신들도 그곳은 접근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니 다시 생각해보라는 촌장의 말에도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뜻대로 찾아갈 것을 고집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날 아침 일찍, 촌장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가르쳐준 대로 비륭정(碑隆頂)을 향하여 산을 올라갔다. 산꼭대기는 흰 구름에 휩싸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마치 부끄러워 백사(白紗) 뒤에 숨어있는 새색시 같았고, 소슬한 산바람은 세차게 불어와 머리카락을 감싸 흩어뜨리며 장난치는 듯 했다. 아침이슬은 아직 마르지 않아 얼마안가 부딪히는 풀잎파리에 옷이 다 젖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혼자서 걷다가 이윽고 구름 속에 들어 십 장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때, 문득 지나간 옛일이 떠올랐다. 과연 무공을 익힌다고 이렇게 천하를 종횡(縱橫)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십왕전(十王殿)을 찾아가는 것도 부질없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어머니와의 맹세라 하지만, 자신의 남은 일생(一生)을 포기하면서까지 무공에 전념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떨친다. 그동안은 오직 강해지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일로에 전심을 다했는데, 무념신니(無念神尼)와의 대화 후에는 부쩍 상념이 잦아져 자신을 돌이켜보는 일이 많아졌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부지런히 걸어 한 시진(時辰)여가 지나자 일차로 목표했던 비륭정(碑隆頂)에 올라섰다. 다시 북쪽의 능선을 따라 한 시진 정도를 내려가니 갑자기 길이 뚝 끊어진 절벽이 나타났다. 아랫부분이 구름에 가려서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삼백 장(丈) 이상이 되어 보이는 절애(絶崖)였다. 이곳이 응수간(鷹愁間)으로 삼백여 장(丈) 멀리 떨어진 맞은편의 단애(斷崖)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양쪽의 절벽이 십여 리 이어지다가 멀리 북쪽의 호로봉(壺路峯) 밑에서 끝나게 되는데, 그 아래는 삼면이 단애로 이어져 천연의 요새가 되는 곳이었다. 폭이 넓은 곳은 오백여 장에 이르고, 가장 좁은 응수간(鷹愁間)이 삼백여 장에 이르는 곳으로 그 아래가 십왕전(十王殿)이 위치했었던 곳이다. 잠시 단애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백 장(丈) 정도의 아래에 칠채(七彩)의 구름이 호로봉(壺路峯) 밑에까지 빙 둘러서 깔려 있어서 바닥을 볼 수가 없었다. 칠채구름을 보니 오랜 세월 쌓인 동식물이 썩어 이루어진 칠채독무(七彩毒霧)인 것 같았다. 칠채독무는 본래 지형이 막히고 동식물의 부패가 심한 곳에 생성될 수 있지만, 대부분이 오래지 않아서 흩어지게 마련이었다. 이곳은 불과 오백년 전까지만 해도 십왕전(十王殿)의 터였는데 저러한 칠채독무가 형성된 것을 보니, 누군가 진법(陣法)으로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킨 것 같았다. 이러니 보통의 사냥꾼들은 접근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고, 진법에 의해 칠채독무의 농도도 점점 짙어져 강호인(江湖人)들도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동안 강호에서 십왕전(十王殿)의 정확한 멸망이유를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단애 아래로 내려갈 곳을 찾았다. 동쪽으로 십 여리 정도 걸어가자, 단애는 낮아져 계곡으로 이어지고 독무(毒霧)도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도달한 다음 다시 계곡을 따라 걸으니, 얼마안가 독무가 길을 막아서는 응수간(鷹愁間) 아래에 도착했다. 필히 위쪽은 칠채독무(七彩毒霧)일 것이고, 아래쪽은 약간의 독기가 있겠지만 진법(陣法)으로 형성된 운무(雲霧)일 것이다. 잠시 이곳에 펼쳐진 진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자연적인 독무와 진법으로 만든 운무가 결합한 형상이었는데, 아까 응수간(鷹愁間) 위에서 보았던 지형을 떠올리며 진도(陣道)를 예상해보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칠성(七星)의 형태였으니 운무칠성진(雲霧七星陣)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겉모습일 뿐으로 단순한 운무칠성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동안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강호인(江湖人) 중에서 진법에 능한 이도 있었을 텐데, 아직까지 진(陣)내의 십왕전(十王殿)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으니. 한참을 생각해보아도 운무에 가려서 어떠한 다른 진법이 더해졌는지 밖에서는 알 수가 없어서, 일단은 운무칠성진(雲霧七星陣)의 진로대로 들어가 보아야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운무칠성진과 현재의 위치를 따진다면 입구인 이곳은 요광성(搖光星)의 위치였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순서는 국자 끝부분에 해당한 곳부터 천추(天樞)·천선(天璇)·천기(天璣)·천권(天權)·옥형(玉衡)·개양(開陽)·요광(搖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일 진형(陣形)이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북두칠성의 순서에 따라 먼저 요광(搖光) 전(前)칠보에, 천추(天樞) 좌(左)일보, 천기(天璣) 전(前)삼보, 옥형(玉衡) 우(右)오보, 다시 천권(天權) 후(後)사보로 물러선 후에 천선(天璇) 우(右)이보, 개양(開陽) 전(前)육보를 계속 반복한다면 빠져나갈 수가 있을 터였다. 진로(陣路)를 계산하고 내공을 퍼뜨려 전신의 모공(毛孔)을 닫아 독무를 호흡하지 않도록 한 다음, 한발 한발 진도에 따라 들어섰다. 그렇게 일곱 번을 반복했는데에도 전혀 주위의 모습은 변화가 없어서 안개와 무성한 수풀만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십 장(丈)이상 들어온 것이니 진도를 벗어나야 정상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진법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불회진(不廻陣)이나 윤회진(輪廻陣)의 일종으로 보였다. 오감을 마비시켜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약간씩 위치를 변하게 해서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고 자리에 주저앉아 방책을 강구했다. 불회진(不廻陣)이나 윤회진(輪廻陣)은 아예 나올 문을 갖고 있지 않은 절진으로, 파진도(破陣道)를 모르고 들어선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영원히 그 속에서 헤매고 말 것이다. 정확한 파진도를 모르는 이상, 파진법(破陣法)은 오로지 하나로 외부의 현상에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다지 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시간이 더 지나 독무를 계속 흡입하게 된다면 중독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눈을 감고 심법(心法)을 일으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하여 일체의 소리도 무시하고 오직 진로만 생각하면서 다시 걸어 나갔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도 조급해하지 않아, 마음은 일체의 외부의 현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고요했으며 발걸음 또한 조급함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각이 지났는지 찰나의 순간만이 흐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새 진세(陣勢)를 벗어난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변의 모습은 수목이 우거지고 여기저기 새소리만이 가득했고, 삼십여 장(丈) 앞에는 반쯤 무너져 폐허(廢墟)가 되어버린 성보(城堡)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옛날 그 아름다움과 위용을 자랑했을 누각(樓閣)과 성문(城門)은 우거진 수풀 속에 반쯤 파묻힌 모습으로 오백년만의 낯선 손님을 맞이했다. 그 당시 거주하는 사람들만 해도 삼천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거대해 작은 도읍과도 비견될 수 있었던 십왕전(十王殿)의 모습은 황폐하고 새소리만 들릴 뿐, 을씨년스러울 정도의 고요함만이 떠돌고 있었다. 허물어진 대문을 지나서 주위를 살펴보며 걸어가니, 제대로 남아있는 누각은 없었고 모두가 반쯤 무너진 채 수풀에 뒤덮여 있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걸어서 다섯 개의 담장을 지났을 때, 과거 십왕전(十王殿)의 대소사를 논하던 십왕대전(十王大殿)의 모습이 드러났다. 편액은 문 앞에 떨어져 조각이 나있었는데, 알아볼 수 있는 글은 십(十)자와 전(殿)자 뿐으로 이곳이 그 옛날의 십왕대전임을 알려주는 듯 했다. 원래 삼층의 건물인 것 같았지만, 위로 이층은 무너져 내렸고, 일층도 한쪽은 무너지고 넝쿨로 뒤덮인 모습이었다. 부서진 문을 저치고 들어가니 먼지와 거미줄이 사방으로 가득해, 원래의 모습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먼지와 거미줄을 제치며 이곳저곳을 뒤져 보았지만 곳곳에 싸운 흔적만 있을 뿐, 시신(屍身)이나 무기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과거 오백년 전(前)의 그날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대전을 뒤로하고 그나마 형태가 남아있는 전각(殿閣)들을 뒤졌지만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세월이 흘러 서책(書冊)들은 삵아 버렸고, 다른 물건들도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드물었다. 한 시진(時辰)여가 흘러 십왕전(十王殿)에 황혼이 내려앉았을 때, 호로봉(壺路峯)의 아래에서 거대한 무덤을 발견했다. 만일 무덤 앞에 일 장 높이의 비석이 없었다면, 누구나 단순한 동산인줄 알고 지나쳤을 것이다. 십왕전문하(十王殿門下) 삼천제자지묘(三千弟子之墓). 천고죄인(千古罪人) 잠등서(岑騰舒) 읍립(泣立). 묘비(墓碑)에 쓰여져 있는 글을 읽고 이것이 십왕전(十王殿) 문하제자들의 무덤인 것을 알았다. 묘비아래 반석(盤石)에 지력(指力)으로 갈겨쓴 흔적을 보고 흙먼지와 넝쿨을 털어내니 과거 오백년 전(前)의 비사가 들어났다. 과거 오백년 전, 당시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던 십왕전(十王殿)의 전주였던 잠등서(岑騰舒)는 세력팽창의 욕심은 없었지만, 누구나 꿈꾸던 현경(玄境)의 관문에 들기를 꿈속에서도 바랬다. 자신의 재능을 보나 십왕전(十王殿)의 무학으로 보나 고금오대고수같은 현경(玄境)의 반열에 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십 년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수어검(手御劍)의 초입에 든 것 이상은 넘어설 수가 없었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 젊고 혈기왕성했던 잠등서(岑騰舒)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고, 남은 시간도 얼마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늘은 어찌하여 나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가? 그동안의 나의 노력으로도 모자란단 말인가?’ 하늘을 저주하며 한탄하다가 그는 최후의 수단을 생각하게 되었다. 강제로 전신을 벌모세수(伐毛洗髓)해서 세맥(細脈)의 타통과 무혈지신(無穴之身), 만독불침(萬毒不侵)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현경(玄境)에 이르러 생사현관(生死玄關)을 깨뜨리지 않고, 내공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지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전주(殿主)인 잠등서(岑騰舒)의 고집을 꺾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지하연공관에서 수많은 영약(靈藥)과 남은 구왕(九王)의 도움으로 대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는 단순한 내력의 증가로 인한 세맥(細脈)의 타통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전신에서 폭주(暴走)하는 진기에 정신을 잃고 주화입마(走火入魔)하게 된 것이다. 주화입마한 잠등서(岑騰舒)는 먼저 대법에 참여한 구왕(九王)을 비롯한 사람들을 죽인 후에, 연공관을 뛰쳐나가 눈에 보이는 족족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미 연공관에서 구왕이 죽은 후라 잠등서를 막을 만한 사람도 드물었는데, 내력의 폭주로 인해서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했다. 폭주하는 진기가 뇌호혈(腦戶穴)을 건드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찾아서 죽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참혹한 도살이 하룻밤 내내 이어졌고, 화(禍)를 피해서 도망친 사람은 몇 되지도 않았다. 살아있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까지 씨가 마르다시피 했다. 하룻밤의 광란(狂亂)이 지나고 내력이 탈진해 잠이 들었던 잠등서(岑騰舒)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깨어난 잠등서가 주변을 둘러보고 그 참혹함에 놀라고, 자신이 그 모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 하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단은 생존자를 찾으면서 시신(屍身)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러나 생존자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시신조차 온전한 것은 십여 구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사지중의 하나가 없거나 알아볼 수도 없이 짓이겨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잠등서(岑騰舒)는 시신들을 한자리에 묻어서 장사지낸 후, 누구도 접근하여 원혼들의 영면(永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운무칠성진(雲霧七星陣)과 무회전륜대진(無廻轉輪大陣)을 펼쳐 사방을 차단했다. 그 후에 무덤 앞에서 천령개(天靈蓋)를 내리쳐 자결했다. 오백년 전의 비사를 알고 다시 한 번 인간 욕심의 허망함을 본 것 같아서 단리유아는 충격 속에 상념에 잠겼다. 잠등서(岑騰舒)가 했듯이, 비록 방법은 틀릴지라도, 자신이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의 내력을 모아서 강제로 십이성의 경지에 도전하려고 한다면 필히 똑같은 경우가 일어날 것이었다. 역시 내력의 대소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이 우선이었다. 어찌해야하는가? 내공을 포기할 수도 없고, 회정결(灰情訣)을 능가할 심법을 찾지 못하는 이상 정서(情緖)를 느끼거나 번뇌(煩惱)하는 일도 없을 터인데. 인위적인 내공심법으로 감정을 없애서 심적인 동요가 없다면, 번뇌와 집착도 없을 것이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길은 멀고 험한데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해가 저무는 주위의 모습을 둘러보다가 지금 떠날지 생각해보았다. 어차피 늦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다 내일아침에 내려가기로 하고 하룻밤 지낼 곳을 찾기로 하였다. 그러다 문득 잠등서(岑騰舒)가 말한 지하연공관이 떠올라 그곳을 먼저 찾아보기로 하고, 연공관이 있을 만한 곳을 뒤져 보았다. 완전히 해가 져 어둠이 사방을 내리누르고 있을 때, 호로봉(壺路峯) 밑에 뚫린 동굴 속에서 연공관을 찾았다. 기관(機關)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미 파괴되어 있거나 오래되어 작동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한쪽은 조사전(祖師殿)으로 먼지와 거미줄 속에 여러 가지 생전의 물건과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을 흔적만 남은 족자 등이 있었다. 지하연공관은 다른 쪽 석도를 통해서 지하로 통하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십여 장(丈) 이상 내려와서야 연공관에 이를 수가 있었다. 부서진 연공관의 문을 통해 들어가 먼지와 거미줄을 치우며 이곳저곳을 뒤지다 한 석실을 찾았다. 생전에 잠등서(岑騰舒)가 연공 중에 생활한 곳인 듯 돌로 된 침상을 비롯한 여러 도구들이 있었고, 한쪽의 서가에는 서책들이 꼽혀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손이 닿자마자 가루로 부서져 흘러내려버려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다시 찾아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조사전(祖師殿)의 석실 한켠에서 찾은 보고(寶庫)를 빼고는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보물이나 무기들은 더 필요하지도 않으니, 신경도 쓰지 않고 바로 동굴을 나왔다. 남만(南蠻)으로의 여정(旅程) 남만(南蠻)으로의 여정(旅程) 4 다음날 아침 황폐한 십왕전(十王殿)의 모습을 뒤로하고, 진(陣)을 나와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동중현(洞中縣)으로 향했다. 다시 북륜현(北崙懸)으로 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응수간(鷹愁間)을 지나 호로봉(壺路峯)을 넘어 십만대산(十萬大山)의 북쪽능선을 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일행 또한 북륜현에서 서진하다가 십만대산을 넘어서 동중현으로 갔을 테니, 자신도 북쪽으로 산을 넘어가는 것이 빠를 터였다. 계곡으로 다시 올라 온 다음 응수간(鷹愁間)위에서 아래의 십왕전(十王殿)을 바라보니 변함없는 칠채(七彩)의 운무만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일곱 가지 색깔의 구름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 아래의 황폐한 성보(城堡)의 모습과 삼천 명의 원혼이 떠돌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뇌리에 가득 잠등서(岑騰舒)의 그릇된 욕망과 허망한 결과가 떠올라 발걸음을 붙잡는 듯해 걷는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상념에 빠져서 천천히 걸으니, 호로봉(壺路峯)을 넘은 시각은 벌써 정오가 지난 미시(未時:13-15시)초에 이르러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지난 것을 알고 신법을 펼쳐 십만대산(十萬大山)을 사이에 두고 북륜현(北崙懸)과 마주보는 건병현(乾屛縣)을 향해서 빠르게 달렸다. 건병현을 끼고 돌아 다시 서쪽으로 향하니 해질 무렵에는 동중현(洞中縣)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현(縣)내로 들어가 일행과 만나기로 한 가장 큰 객잔을 찾아 들어가니, 남파쌍검(南波雙劍)이 탁자에 앉아 단리유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렴을 제치고 들어오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긴다. 좌검 선상조(宣翔鳥)가 큰소리로 웃으며, “소사숙, 이제 오십니까? 생각보다 빠르게 오셨군요? 저희들도 오늘 정오가 지나서야 이곳에 도착했는데.” “어서 오십시오, 소사숙.” 선상조의 떠들썩한 반김과 우검 음구의(陰九擬)의 조용한 환대에 단리유아가 답례하며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갔소?” “웅(熊)사형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 나갔고, 공손선배는 남만(南蠻)에 대한 것을 알아본다며 나갔습니다. 아마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가 거의 다되어 갈 것입니다.” 음구의가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잠시 차를 시켜놓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먼저 난파검(亂波劍) 웅정향(熊情香)이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천리적자(千里笛子) 공손고(公孫鼓)가 들어왔다. 잠시 서로의 안위를 묻고 인사한 후에 저녁을 시켜놓고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응수간(鷹愁間)에 갔던 일은 잘 되었나?” 공손고의 물음에 말없이 단리유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궁금해서 다시, “그곳에는 뭐 하러 간 것인가?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설마 그곳에 누구 만나볼 사람이라도 있었나?” “별일 아닙니다. 잠깐 찾아볼 일이 있어서였을 뿐입니다.” 대충 둘러대는 단리유아를 보고 공손고가 미간을 모으며 한마디 하려는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선상조가 그 모습에, “그보다 공손(公孫)선배, 알아본다고 하던 남만(南蠻)에 대한 소문은 어떻소?” 선상조의 물음에 단리유아에게서 고개를 돌려 대답한다. “흠, 내가 소문을 듣고자 나간 지 반나절밖에 안되어 자세히 모르지만, 좋지 않은 소문만 가득하더군.” “아니, 무슨 소식이기에?” 공손고가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원. 현재 국경일대는 중원(中原)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라네. 원래 대구월(大瞿越)은 당(唐)나라 때까지만 해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있던 곳이어서, 한족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 그런데 최근에 토벌군이 대구월을 다시 공격하려는 바람에 이곳은 전운이 감돌고 있다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의 경내로 들어간다면 첩자로 오인 받아서 공격받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네.” “소사숙, 저도 해남도(海南島)를 떠나기 전에 대충 소문은 듣고 있었지만 상황이 더 악화된 모양입니다.” 웅정향이 공손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걱정스런 기색으로 말한다. 현재 남만(南蠻)일대는 대구월이 북쪽으로 운남(雲南)과 광서(廣西)와 맞닿은 채 남쪽으로 길게 뻗은 안남산맥(安南山脈)의 북부지역까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아래의 안남산맥 중남부지역은 임읍국(林邑國)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외의 지역은 각멸(閣蔑:현재의 태국지역도 거의 대부분 포함되었음)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남쪽은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과 맞닿아 있었고 북동부는 임읍국과 대구월에 잇닿아 있었다. 그 밖에 운남성(雲南省)일대는 대리국(大理國)이 차지하고 있었고, 운남이하에서 각멸(閣蔑)이북지역(대체적으로 현재의 라오스와 태국북부)은 과거 운남에서 일어난 남소국(南詔國:649~937)이 멸망한 이후로는 조그마한 소왕국이 난립하고 있거나 무주공산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공손고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웅(熊)제의 말이 맞다네. 여보게, 단리소협. 우리 그냥 운남으로 바로 가면 안 되겠나? 병졸의 힘이야 별 것 아니지만, 사방이 한족을 적대하는 분위기인데 우리가 꼭 그리로 갈 필요는 없잖은가? 아무리 우리가 관(官)과는 상관없는 강호인(江湖人)이라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러니 틀림없이 그쪽의 무인들도 적대하는 분위기일 것일세.” “그렇습니다. 제가 해남도(海南島)에서 대구월의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들은 적이 있어서 몇 가지 알고 있는데, 강호세력이라 할 수 있는 문파는 몇몇 되지 않지만 결코 평탄은 여정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일정을 고려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듯한 물음에 단리유아가 무심하게, “여러분이 정 그러시다면 따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 혼자 남만(南蠻)지역은 돌고 여러분은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에서 기다리도록 하는.” “아니, 소사숙. 저희들을 두고 혼자가시겠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저희는 소사숙을 끝까지 따라갈 생각이니 행여나 떼어놓을 생각은 마십시오.” 단리유아의 결심이 굳고 남파쌍검(南波雙劍) 역시 따라갈 생각이자, 공손고가 한숨을 쉬면서, “정말 어쩔 수가 없구만. 도대체가 도처에 위험이 깔린 지역인데, 그렇게 기를 쓰고 가려고 하다니 아무리 싸움에 미쳤다고 해도.....” “공손선배, 말조심하시오. 아무리 선배가 나이가 많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사문의 어른이 되시고, 강호(江湖)의 명성이나 배분으로 보아도 선배가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오.” 선상조가 공손고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화를 낸다. 이에 공손고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다 역시 화가 나서, “뭐? 말조심, 너 선(宣)가 애송이야,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내 이태까지 강호(江湖)를 유랑하면서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 “말이 그렇지 않소? 다른 때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소사숙이 되시는데 그런 욕설을 하다니 우리 해남파(海南派)를 무시하는 것이오?” “누가 누구를 욕했다는 말이냐? 강호(江湖)에서 그의 별명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라고?” “뭐요? 그래서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이 지금 잘했다는 것이오?” 서로 일어나 한동안 말다툼을 벌이다가 옆에서 음구의와 웅정향이 뜯어말려서야, 씨근덕거리며 서로를 노려보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이에 단리유아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공손(公孫)선배, 해남파(海南派)의 사질들. 앞으로 저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마음대로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으니. 이름이 무어 그리 중요합니까? 이름이 나를 가리킨다지만 이름 자체가 내가 아닌데.” 무심(無心)한 목소리로 단리유아가 말하자 싸웠던 사람들도 어이없는 표정과 당황한 얼굴이 되어 자신들이 도대체 왜 싸웠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공손고가 속으로, ‘이 사람 말 그대로 괴인이로구만. 싸움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다더니. 괜히 서로 싸웠군.’ 공손고와 선상조가 눈을 마주치고 겸연쩍은 얼굴로 바라보다 서로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연발한다. 다시 단리유아가 공손고를 보면서, “그보다 공선선배는 어떻게 할 것이오? 먼저 운남(雲南)으로 가겠소? 아니면 따라가겠소?” “휴, 어쩔 수 없지.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은 자네 하자는 대로 따라 할 것 같으니, 나도 함께 가야할 밖에 별수 있나?” 약간 심통이 난 것 같은 그를 보면서 단리유아가, “그보다 남만(南蠻)지역의 세력들에 대해서는 들어보았소?” “글쎄,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남만의 북부지역인 홍하강(紅河江)유역의 채주(菜州), 하구(河口), 하강(河江), 산몽(山夢), 하내(河內:하노이)일대의 세력들에 대해 몇 가지는 들어보았지. 하지만 자세히는 모르겠네. 또 그 이하 중남부 지역의 세력에 대해서는 듣지도 못했으니, 전체적으로 알아보려면 시일이 더 필요할 것일세.” “소사숙, 어차피 며칠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 소문을 알아본다면 대충이나마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뭐, 어차피 남만내로 들어가야 중남부지역은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겠지만.” 웅정향이 공손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그렇소? 그럼 이곳에 며칠 더 머물러야 한다는 것인데.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웅정향이 잠시 생각해보다가, “음, 다른 것은 거의 준비가 되어서 몇 가지만 구하면 되는데, 가장 중요한 고충(蠱蟲)을 막는데 필요한 향사목(香絲木)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품속에 간직하면 고충이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몸속에 들어오더라도 가루를 내서 물에 타 마신다면 잠시 동안은 고충을 진정시킬 수 있는 약입니다. 그런데 최근 대구월(大瞿越)과의 사정이 악화되어서 물건을 가져오는 상인들이 오지를 못하니 구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이전에 사간 사람 중에서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한다면 아마 사나흘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향사목(香絲木)은 높이가 칠 척이 못되는 나무로, 보통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늪지 깊숙이 한가운데서 서식하는 반(半)수생하는 나무였다. 몸통의 굵기는 사람 팔뚝만 하고, 그 외에 손가락만한 굵기의 가는 줄기가 사방으로 나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나무자체에서 특이한 향(香)이 나와서 벌레들을 쫓아버리는 성질이 있었는데, 특히 고충(蠱蟲)에게는 상극으로 남만(南蠻)지역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좋소. 그럼 그동안 각자 할 일을 하고 향사목(香絲木)이 구해지는 대로 출발하기로 하고, 혹시 토착부족 중에서 안내인을 구할 수는 없겠소?” “저도 따로 남만지역을 잘 아는 안내인을 찾아볼 생각이 있지만,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는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웅정향의 말에 듣고 있던 공손고가, “그 일은 내가 알아보기로 하지. 어차피 소문을 모으다보면 그런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테니.” 공손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야기를 마치고 각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사일 간 단리유아는 남파쌍검(南波雙劍)의 수련강도를 높여, 한수검법(寒愁劍法)을 혼자서 펼쳐 수련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다. 사일동안 남파쌍검이 얼마나 시달렸는지, 얼굴에 살이 빠져 광대뼈가 눈에 두드려지게 드러난 모습이었다. 공손고는 소문을 듣고자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있었고, 웅정향은 다음날 아침에 떠나 아직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사일 후 저녁 무렵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웅정향이 나타났다. 그날 저녁 모두가 자리에 모여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웅사질,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소? 향사목은 구했소?” 단리유아의 물음에 웅정향이 피곤한 모습으로, “예, 소사숙. 물어 물어서 녕명(寧明)의 신수문(神樹門)까지 찾아갔습니다. 원래 그들의 본업이 약초판매이고 강호세력이니 아무래도 얼마간은 있을 것 같아서 찾아갔는데, 어렵게나마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향사목(香絲木)은 이곳 남만(南蠻)과 가까운 곳에서는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더 가치가 있었다. 웅정향도 해남파(海南派)의 이름을 팔고 사정사정해서야, 겨우 한자가량의 향사목을 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공손고를 향해서 고개를 돌려 단리유아가, “흠, 그럼 내일은 떠날 수 있겠군. 공손선배, 남만의 소문을 모으는 일과 안내인을 찾는 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내인은 다행히 구할 수 있었지만, 믿을 수 있는 놈인지는 모르겠구만. 지 말대로는 몽족(夢族)이라고 하던데. 그놈은 당장이라도 데려올 수 있으니 걱정 말게.” 남만(南蠻)지역은 크게 대구월과 임읍국, 각멸이 나뉘어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름 없는 왕국과 주인 없이 소수부족들이 난립한 지역도 많았다. 전체적으로 백여 가지가 넘는 대소민족이 난립한 지역으로, 산 하나를 건너 부족이 틀려져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구월 지역도 큰 강의 삼각주와 동부해안지역을 따라 거주하는 대다수 월족(越族)을 제외하고 수십여 부족이 흩어져 있었다. 공손고가 말한 몽족(夢族)은 하내(河內) 북부에서 홍하강(紅河江)의 한 갈래인 흑수하(黑水河)일대 사이에 퍼져 있는 부족으로 그래도 세력이 강한 편에 속한 부족이었다. 단리유아가 가고자하는 지역은 하내(河內)를 지나 중부의 안남산맥(安南山脈)을 따라서 남하하다가 임읍국에서 산맥을 넘어 각멸(閣蔑)의 북부지역인 람파(濫巴)로 서진한 후에, 시통천(蓍洞踐)을 거쳐 미공하(湄公河:메콩강)를 동편으로 끼고 북진하여 운남성에 이르는 것이 목표였다. 그 아래지역에도 무예를 익힌 사람이나 세력이 있다면 갈 생각이지만, 우선은 최소한 각멸의 북부까지는 가는 것이 목표였다. 구음독교(九陰毒敎)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안남산맥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이 단리유아의 생각이어서, 남하하면서 남만(南蠻)의 기인이사들과 싸워보고 구음독교에 대해서 수소문할 생각이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공손고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다시, “중남부지역은 모르겠지만 북부 채주(菜州)일대의 사인곡(蛇人谷), 하내(河內)일대의 진무사(鎭武寺), 서쪽의 운남성(雲南省)아래 비사리(非沙里) 일대의 세금동(銴金洞), 안남산맥의 중부인 수락지(藪落池) 근처의 독룡림(毒龍林), 남루(濫婁)일대의 백상사(白象社), 루암팔봉(壘岩八封)일대의 소적교(素赤橋), 몽박산(蒙箔蒜) 일대의 나하루관(羅蝦鏤館)이 있다고 들었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세력들은 확실히 들어나 있는데 반해서, 소수로 이루어져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이네. 게다가 중부이하 임읍국(林邑國)지역부터 각멸(閣蔑)지역은 알아볼 수가 없었으니 아직 반도 알아보지 못한 셈이지.” 공손고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보다가 단리유아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그러면 앞으로 어떤 행로로 갈 생각인지 각자 의견을 말해 봅시다.” “지금 이곳은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으니, 여기서 북으로 가서 운남성(雲南省)과 가까운 정서(靖西)까지 간 다음에 국경을 넘어 고평(高平)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다음에 계속 서진해서 사인곡(蛇人谷)에 들리고, 다시 흑수하(黑水河)를 따라서 남동진해 하내(河內)를 거쳐서 남하하는 것이.” 조용한 음구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없으면 음사질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가장 무난한 진로인 것 같으니.” 단리유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찬동한다. 다들 걱정반기대반인 모습이었다. 다음날인 이월 이십이일의 아침이 되었을 때, 남만(南蠻)의 밀림을 통과할 때 쓰기위해 미리 대장간에 주문해두었던 이 척 정도의 대감도(大砍刀:박도의 일종으로 외날의 칼)와 암기들을 각자 따로 챙기고, 모두 대장간에서 나와 동중현(洞中縣)의 북문로(北門路) 끝에서 공손고가 안내인을 데려오기를 기다렸다. 사시(巳時:9-11시) 말에 가까워져서야 공손고가 이상한 옷차림을 한 이제 이십도 못돼 보이는 소년을 데려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오 척이 겨우 넘는 작은 키, 뭉툭한 코와 좁은 미간을 하고 있어서 한눈에 토착부족중 하나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상하의 검은색에 팔소매가 없는 특이한 옷을 벗은 듯이 걸치고, 머리도 검은색 천으로 이마를 칭칭 맨 적족(赤足)의 소년이었다. 옷도 다 떨어지고, 온몸이 시커멓게 때가 낀데다 냄새까지 심한 모습이었다. 악취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제 열대여섯 되어 보이는 너무 어린 모습에 선상조가, “아니, 공손대협. 이 아이가 안내인이라는 말입니까? 누군가를 안내하기에는 너무 어린 것 아닙니까?” “험, 나도 이 아이를 만났을 때 너무 어려보이기에 나이가 얼마인지 물었다네. 자기말로는 스물이라는데, 딱히 증명할 다른 수단도 없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데려온 거지.” 공손고가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 역시 난처하다는 모습이었다. 이에 웅정향이, “우리말은 할 줄 안답니까?” 공손고가 대답하기 전에 소년이 먼저 더듬거리며, “하, 할 줄을 아, 알아.” “흠, 이름이 무엇이냐? 고향은? 몽족(夢族)이 맞긴 맞은 것 같은데.” “이, 이름 파타루(芭朶婁) 고, 고향 측허사(測歔瀉).” 반말에 눈썹을 찌푸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는 일행이 되었다. 몇 가지 더 물어보다가 잠시 후에 단리유아가 일행을 한쪽으로 불러 모았다. 단리유아가 공손고를 보면서, “확실히 월족(越族)이 아닌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물어 보았습니까?” “자기 말로는 작년 여름에 아버지를 따라 물건을 팔려고 부락을 떠나왔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다른 사연이 있는 것 같았네. 아버지는 어디 갔느냐는 물음에 국경을 넘다 죽었다고 하는데, 영 아닌 것 같단 말일세. 사실 전운이 감돌기는 하지만 저 아이가 이곳에 왔을 무렵에는 통행에 큰 문제가 없었어. 그리고 물건을 팔기위해 왔다면 병사들이 일부러 죽일 리도 없지.” 웅정향이 공손고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동안은 어떻게 살아왔답니까? 전혀 다른 부족의 사람인데, 아무리 이곳이 대구월(大瞿越)과 가까워 다른 민족을 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닐지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동안은 가져온 물건을 팔아 지내거나 이곳저곳에서 구걸하며 지내다가, 최근에는 십만대산(十萬大山)에서 약초를 캐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살아왔다네. 나도 거기에서 만났으니 그것은 확실하네.” 공손고의 말에 일행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자기 입으로는 스물이라지만 아무리 보아도 열일곱은 넘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린나이에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동안 서로 생각해보고 저 아이를 안내인으로 삼아 데려갈 것인지 상의해 보았다. 무공도 없어 보이는데다가 일단은 안내인이 필요하니 데려가기로 했다. 일행이 다시 소년에게 다가가서 데려가기로 결정했음을 전해주자 얼굴 가득 희색을 띄며 기뻐한다. 그 모습을 보고 일행에게 길을 떠나자고 말을 하려다가, 파타루(芭朶婁)의 모습을 다시 둘러보고 단리유아가,     “무기는 없소, 파타루?” “무, 무기 없다. 모, 모두 빼, 빼앗겼다.” 그 말에 단리유아가 자신의 대감도(大砍刀)를 파타루에게 건네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말리는데 단리유아가 자신에게는 적운도(赤雲刀)가 있으니 됐다고 하니, 공손고가, “아니,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얼핏 도갑(刀匣)만 보아도 범상한 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도를 막 휘둘러 수풀을 베겠다고?” “칼은 칼일 뿐이지 무엇이 다릅니까? 어차피 베는 것은 똑같은데. 오히려 다른 칼보다 날카로우니 힘이 덜 들 테니 저한테는 이것이 더 낫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귀찮기만 했었는데.” 보통 사람의 상식을 깨뜨리는 단리유아의 무심한 말에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며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 다시 대감도를 구하자고 하지만, 듣는 척도 안하고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다시 한 번 단리유아의 괴상함을 생각한다. ‘아니 무인(武人)이 자신의 병기를 저렇게 함부로 해도 되나? 정말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네.’ 서로 생각하다가 멀어지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따라간다. 다섯 명의 크고 작은 중원인(中原人)과 몽족(夢族)의 어린 소년이 길을 떠난다. 남파쌍검(南波雙劍)은 각각 등에 상자를 맨 모습이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각각 봇짐을 진 모습이었다. 맨 앞쪽에는 단리유아가 앞장서고, 그 뒤를 파타루(芭朶婁)가 뒤따르며 궁금한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남파쌍검이 따르고, 웅정향과 공손고는 제일 뒤에서 담소(談笑)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행로난(行路難) 난중진(難重陳) 행로난(行路難) 난중진(難重陳) 1 그날부터 여섯 명의 특이한 일행의 멀고 먼 여정이 시작되었다. 일차 목적지는 광서성(廣西省) 서북부의 정서(靖西)까지 가는 것이었다. 보통 단리유아 혼자서 간다면 사흘 이내에 도착할 수 있을 테지만, 무공을 모르는 소년이 낀 상태에서의 여행은 훨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동중현(洞中縣)에서 정서까지의 직선거리는 육백여리 정도이고, 반듯한 길이란 없으니 적어도 팔백여리의 거리였다. 가는 도중에는 녕명(寧明)지역의 신수문(神樹門)을 제외하고 이렇다할 세력이나 고수도 없어서, 단리유아도 연구했던 해남파(海南派)의 무공을 완성하는데 시간을 쏟았다. 남파쌍검(南波雙劍)도 이제는 혼자서 한수검법(寒愁劍法)을 수련할 수 있는 정도여서 가끔 대련을 해주는 경우 외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가다가 노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을에 들러 객잔에서 보냈다. 보통 진시(辰時:07-09시)에 출발해서 유시(酉時:17-19시)경에는 멈췄기 때문에 하루 다섯 시진(時辰)이상 걷는 것은 힘이 들었다. 틈틈이 쉬어야했고 식사도 해야 했기에 실제로 걷는 시간은 네 시진이 채 되지 못했다. 특별히 기한을 정하고 세외(世外)로의 비무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일행의 속도는 너무나 느렸다. 특히 파타루(芭朶婁)는 어린데다가 체격도 외소하고 체력도 강한 편이 아니어서 더 빠르게 걸으려 해도 걸을 수가 없었다. 이 아이가 정말로 도움이 될지도 몰랐고, 차라리 대구월(大瞿越)로 넘어가서 다시 안내인을 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도 모르는 타향에 내버려두고 떠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녕명(寧明)을 지나자 단리유아는 더 이상 시일이 지체되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세외팔황(世外八荒)을 떠돈다면 족히 십만 리는 넘을 대장정(大長征)일 터인데, 적어도 하루에 백리는 걸어가야 했다. 현재는 하루에 오십리 가는 것이 보통이고, 많아야 육십리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기저기에 가끔 머물기도 할 테니 평상시에도 백리 정도는 가야했다. 최소한 신법이라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날 정오 무렵 관도의 한켠에 모여서 간단히 육포로 끼니를 때울 때 파타루(芭朶婁)에게 물어보았다. “파타루, 혹시 무공을 배워 볼 생각은 없소?” 무심한 단리유아의 말에 그동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파타루가, “배, 배우고 싶다. 무척.” 그동안 남파쌍검(南波雙劍)과 단리유아의 대련을 보면서 파타루(芭朶婁) 자신도 저렇게 움직이고 싸우는 법을 배웠으면 했지만, 워낙이 무표정한 단리유아인데다 은연중에 일행의 대장임을 알고는 가르쳐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웅정향이 나서며, “소사숙, 이 아이를 가르치겠다고요?” “그렇소. 너무 일정이 지체되니 어쩔 수 없이 신법이라도 가르쳐야하겠소.” 이에 웅정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하지만 소사숙. 이 녀석이 과연 알아듣고 익힐 수 있을까요? 한어(漢語)를 말하는 것과 글자로 익히는 것은 천지 차이인데, 구결을 외우고 익히지 않는다면 크게 효과가 없을 텐데요.” 몽족(夢族)에게 특별한 문자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 파타루(芭朶婁)가 글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파타루, 배, 배우겠다. 글자도.” “좋소, 그럼 내일부터 우선 천자문을 배우시오. 그 정도만 해도 어느 정도의 글자는 알아들을 수 있을 테니. 특별히 상승무공을 가르칠 생각은 없고 간단한 토납법(吐納法)과 신법 정도일 테지만, 정히 안 되면 실전대련을 하면서 신법만이라도 가르치면 될 테니.” 안색이 밝아지는 파타루(芭朶婁)를 보면서, 주위의 사람들은 과연 이 아이가 익힐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걱정하는 얼굴이 되었다. 글자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가 한자(漢字)를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고, 그동안 남파쌍검(南波雙劍)에게 대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대련도 실전처럼 할 테니 앞으로 몸이 성하지 못할 것이다. 지나가는 현성(縣城)에서 천자문을 구해서 파타루에게 준 후에 글을 가르쳤다. 그러나 얼마안가 단리유아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함을 알았다. 파타루가 하루에 외우는 글자가 스무 자 남짓에 불과하고, 그나마 다음날이면 반은 기억하지 못했다. 이정도의 암기속도라면 채주(菜州)에 다 닿을 때까지도 완전히 익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정서(靖西)에서 국경을 넘어 대구월(大瞿越)의 고평(高平)까지만도 이백리가 넘고, 다시 고평(高平)에서 서쪽 끄트머리 채주(菜州)까지는 천리가 넘는 길이었다. 또 험준한 산악지형이어서 실제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클 것이었다. 오늘 외었다고 하더라도 다음날이면 반을 잊어버리니, 다른 수단을 찾아야만하였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소년으로 그만둘까 하다가 자신의 성격에 무엇을 그만둔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런 작은 일에 선례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객잔에 들어 침상 곁에 좌정한 후에 알고 있는 무공 중에서 방법이 없나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바로 최혼술(催魂術)이나 탈혼사술(奪魂邪術) 같은 사공이학(邪功異學)으로 정신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자칫해서는 부작용으로 백치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잠시 더 생각해보았을 때, 소림사(少林寺)의 무공 중에서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이치는 사술(邪術)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효과를 주는 것으로 본래는 사술에 걸린 사람의 금제(禁制)를 풀기위해 창안한 것이었다.   보리광명심(菩提光明心)으로, 본래 뜻으로 생각을 전하는 혜광심어(慧光心語)에서 나온 무학이었다. 불력(佛力)과 내력(內力)을 목소리에 실어서 상대의 심혼을 흔드는 방법이었는데, 그 자체로도 극상의 항마(降魔)절학으로 마공을 익히거나 심성이 사악한 자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수법이었다. 잠시 후, 파타루(芭朶婁)를 불러 천자문을 펼치게 한 다음 보리광명심(菩提光明心)으로 심혼에 새기듯이 책을 펴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뜻과 음을 말하고 획의 순서를 가르쳐주었다. 두 시진(時辰)이 지나 축시(丑時:1-3시)가 되어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 화경의 고수인 단리유아도 지나친 심력과 내력의 고갈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고 안색 또한 창백했다. 마찬가지로 지쳐서 쓰러진 파타루의 수혈을 눌러 거처로 옮겨놓은 후에 침상 곁에 좌정하고 운기조식을 취해 심신을 회복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파타루에게 천자문을 한 자 한 자 물어보자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파타루 자신도 놀랐지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더욱 놀라게 되었다. 모두가 어찌된 일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지만, 묵묵부답으로 단리유아는 고개를 젓기만 했다. 자신이 이런 수단을 썼다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일단은 천자문을 알게 되자 간단한 내가토납법(內家吐納法)을 가르쳤다. 며칠 후 정서(靖西)에 이르렀을 때에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자세로 조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객잔에 머무는 동안 자옥신단(紫玉神丹)을 하나 먹인 후에 약력을 유도하여 일주천을 시켰다. 몇 번 돌리다가 파타루(芭朶婁)가 적응하자 손을 떼고 일어났다. 이제 계속 수련한다면 십년의 내력을 흡수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겨우 십년에 불과한 내력이지만, 조식을 통해서 내력을 흡수할 수가 있다면 최소한 보통사람보다는 체력이 강해질 것이다. 정서(靖西)에 도착하여 하루를 쉬면서 노독을 풀고, 고산지대를 지날 때 필요한 두꺼운 옷도 구했다. 그날 객잔에 머무는 동안 단리유아는 파타루에게 신법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내력을 어떻게 발바닥 용천혈(湧泉穴)까지 인도하고, 신법을 펼칠 때 내력의 수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 것이었다. 다음날 길을 가면서 신법을 펼쳐보도록 했다. 비록 내력이 십년도 못되고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별달리 효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빨라서 보통사람보다는 더 빠르게 걸을 수 있었다. 파타루(芭朶婁) 또한 신기한 모양으로,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걸음이 빨라지고 체력도 늘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서(靖西)에서 대구월(大瞿越)의 고평(高平)에 이르는 길은 높이가 최소한 삼천 척에 이르는 산들이 이어져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는 곳이었다. 앞으로 고평에서 하강(河江), 하구(河口), 사파(沙巴), 채주(菜州)로 이어지는, 계속해서 서진할 대구월의 북부지역은 크고 작은 산과 고원이 이어진 곳으로 특별히 길도 없는데다가 곳곳에 단애를 이룬 험악한 지형이었다. 특히 사파는 해발 일만 척이상의 고산에 있는 도시였고, 육천 척 이상의 고봉도 대여섯 개에 이르는 곳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두툼한 옷을 챙겼는데, 남만(南蠻)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가려는 지역은 고산지대여서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해 오히려 중원의 늦가을의 날씨처럼 쌀쌀했던 것이다. 국경을 넘어 고평(高平)까지는 이백여 리 길이었지만, 산이 겹겹이 이어져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서(靖西)를 떠난 지 나흘째 되는, 삼월 십사일의 유시(酉時:17-19시) 말경에서야 겨우 고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중턱의 고원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그래도 중원(中原)과 마주하는 북부의 요점도시여서 인지 대읍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번화한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중원의 지배를 받은 탓인지는 몰라도 광서성(廣西省)의 고을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광서성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십여 가지의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일행의 모습을 보고는 모두가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대구월(大瞿越)에 한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전운이 무르익는 시기에 한인이 국경을 넘어와 돌아다니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던 것이다. 파타루(芭朶婁)의 안내로 일행은 중원의 객잔과 비슷해 보이는 커다란 집에 들어갔다. 술과 음식을 파는 곳으로 보였는데, 내부의 탁자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사방 오 장(丈) 정도 넓이의 주청(酒廳)의 구석 쪽에 일행이 둘러앉아 파타루에게 저녁을 시키도록 했다. 일행 중의 웅정향도 월어(越語)는 할 줄 알았지만, 워낙 다양한 많은 부족들이 있고 또 한인이 나서기도 뭐해서 대구월에 들어서고부터는 은연중에 파타루가 나서게 했던 것이다. 가져온 음식은 껌과 깐이라 불리는 밥과 고깃국이었다. 그 외에 생선과 라우라 불리는 야채요리가 있었다. 일행이 막 한입 입에 넣으려는 순간에, 한 쪽에서 남자 하나가 일어나 다가왔다. 삼사십대의 사내로 오 척 정도의 키에 구리와 은으로 팔찌와 목걸이를 하고, 머리는 가장자리는 모두 깎아 꼭대기만 남긴 모습이었다. 옷도 검은 색 계통의 통이 큰 것을 입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도갑도 없이 도신이 넓은 칼을 꼽은 채 맨발로 신발도 신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파타루(芭朶婁)가 이곳 고평(高平)일대에 사는 흠족(歆族)으로 보인다고 말하며, 특히나 한족을 싫어하는 부류로 아주 호전적인 부족이라고 설명한다. 본래 이들 흠족(歆族)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는 그런 부족이 아니라, 사냥이나 약초를 채집하며 생활하는 부족으로 타고난 사냥꾼으로 일대에 이름이 높았다. 이들은 이 근처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부족으로 한 번 싸움이 시작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부족이었다. 보통 성인이 되면 혼자서 사냥에 나서는데, 멧돼지, 곰, 호랑이조차 가리지 않고 사냥할 정도로 각 개인이 모두가 타고난 전사(戰士)들이었다. 다가온 사내가 큰소리로 일행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떠든다. 듣고 있던 파타루(芭朶婁)가 나서며 몇 마디 하지만 계속해서 말하고, 허리춤에 꽂힌 칼을 손으로 두드린다. 파타루가 일행을 보면서 천자문을 외운 후부터는 상당히 능숙하게 된 한어로, “이 사람이 당장 이곳을 떠나랍니다. 안 그러면 모두 재미없을 것이랍니다.” “뭐, 재미없어? 이 자식이 우리를 뭐로 보는 거야? 안 떠나면 네까짓 것이 어쩔 건데?” 선상조가 파타루의 말을 듣고 큰소리로 소리친다. 옆에 있던 웅정향과 공손고도 불쾌한 기색이었고, 음구의는 신중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선상조의 말에 흠족(歆族)의 사내도 뭔가 좋은 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들었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뭐라 소리친다. 파타루(芭朶婁)가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다급하게, “큰일 났습니다. 저 사람이 지금 자신을 모욕한 한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내와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 이십여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처음의 사내가 칼을 빼들더니 뭐라고 소리친다. “뭐라고 떠드는 거야? 원, 시끄러워 죽겠네.” 공손고의 말에 듣고 있던 파타루(芭朶婁)가 몇 마디 대꾸하다가 일행에게, “제가 여러분들은 별다른 목적 없이 그냥 여행하는 중이라고 이들에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고 당장 산을 넘어 중원으로 돌라가라고 합니다. 안 그러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현재와 같은 전운이 이는 상황에서 목적 없이 여행한다는 소리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구월(大瞿越)은 당(唐)나라가 무너지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절 동안 독립하였는데, 이후부터 수십 년 동안 한족과 싸워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국경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이들은 많은 피해를 보았으니 한족이라면 이가 갈릴 정도였다. 처음에는 몽족(夢族)의 소년이 동행하는 모습에 그래도 참으며 말로 떠나도록 했는데, 듣지 않으니 옳다구나 하고 칼을 빼내게 된 것이다. 사내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서며 파타루에게, “내말을 저들에게 전달해 주시오.” 파타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하자, 단리유아가 흠족(歆族)의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이들을 이끄는 사람으로 이번 여행을 책임지고 있소.” 잠시 파타루가 이들에게 전하는 소리를 듣고는 계속해서, “우리는 무공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서 이곳에 왔소. 결코 무엇을 염탐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식사만 마치면 곧 떠나도록 할 것이오. 그러니 자리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파타루가 중간 중간 말을 전할 수 있도록 멈추며 단리유아가 말을 끝냈다. 이때 흠족의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는데, 백발에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모습의 노인이었다. 육십이 넘어보였는데 오른쪽 뺨을 가로질러서 목까지 흉터가 나있는데다가 쭉 찢어진 눈초리로 상대를 노려보는 얼굴이었다. “무공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왔다고? 너희 한족이 말하는 강호인(江湖人)이라는 것인가?” 뜻밖의 한어에 일행이 놀랐을 때, 단리유아는 노인을 보면서, “그렇소. 노인이 강호인을 안다면, 그 성향도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흉악한 얼굴에서 단리유아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니 마치 야차 같은 모습이 되었다. 코웃음을 날리며, “흥, 강호인(江湖人)이라고? 물론 잘 알지. 으드득, 오래전 옛날에도 너희 같은 강호인이라는 놈들이 우리 부족에 들어온 적이 있었지. 그때 우리 부족 사람이 그놈들에게 수십 명이나 죽어나갔고, 내 형도 그때 그놈들한테 죽었지. 너희 놈들이 보통의 한족이라도 이가 갈릴 지경인데, 뭐 강호인이라고?” 말을 멈춘 후에 주위를 둘러보고 큰 소리로 외친다. 싸움을 말리려다가 오히려 불을 붙인 꼴이 되어버렸다. 파타루가 일행을 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우, 우리를 모두 주, 죽이라는데요? 어떻게.....” 파타루(芭朶婁)는 일행의 능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정확히 모르기에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일어나 포위하고 공격하려는 모습에 겁이 났던 것이다. 자신은 한족이 아니기에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무기를 든 사람들을 보고는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칼과 겸(鎌)과 같은 무기와 대롱을 꺼내드는 사람, 시위에 활을 거는 사람, 모두가 무기를 꺼내고 공격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에 일행도 자리에서 일어나 할 수 없이 무기를 꺼내어 대적할 준비를 했다. 떨고 있는 파타루는 뒤로 잡아 당겨서 물러나게 한 후에 모두 탁자 뒤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 흠족(歆族)에 침입했던 강호인들은 그리 강한 사람들이 아니어서 겨우 일류정도의 수준이었다. 흠족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리유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남파쌍검(南波雙劍) 역시 이제는 절정(絶頂)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는 정도였고, 나머지 웅정향과 공손고도 절정에 이른지 오래된 고수들이었다. 모두가 포위된 모습을 보았지만 그리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소사숙, 웅사형. 그리고 공손선배.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살인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더라도 가급적 줄이십시오. 괜히 일이 커지면 앞으로의 여정(旅程)만 힘들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화살이나 독침에도 주의를 기울여서 맞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독하기 위해 약물들을 모아왔지만, 사실 정확한 성분을 모르는 이상 완전히 해독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음구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웅정향이 단리유아를 보면서, “소사숙. 이곳은 장소가 비좁으니 싸우는 도중에 혹시라도 화살이나 암기에 맞을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서 싸우는 것이 어떨까요?” “맞습니다. 소사숙. 저도 이 좁은 곳에서 싸우는 것에 반대합니다. 일단 기회를 보아서 밖으로 나가지요.” 음구의가 찬동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파타루(芭朶婁)는 어떻게 할 것이오. 누군가 데려가야 할 테인데, 지금 모습을 보니 앞으로의 여정이 쉽지 않을 터인데, 안내인 없이 밀림 속을 헤매고 다닐 수는 없지 않소?” “제기랄, 어쩔 수 없구만. 내가 데려왔으니, 이놈은 내가 신경 써서 데리고 나가지. 자네들은 싸우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하게.” 일행 모두가 대충 상의를 끝냈을 때, 흠족(歆族)의 사람들도 모두 준비가 되었는지 공격을 시작하려는 모습이었다. 또 흠족이 아닌 다른 부족의 사람들도 무기를 들고 여차하면 합세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때, 아까의 흠족의 노인이 단리유아 일행의 침착한 모습을 보고는, ‘아니 이놈들은 어째서 이렇게 동요가 없이 침착하지?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잖아. 혹시, 이거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닐까? 아니야. 흐흐흐, 그전에도 이놈들과 비슷한 녀석들을 죽인 적이 있었잖아. 그 당시에는 무턱대고 칼만 들고 정면으로 싸우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이번에는 적훼척(赤虺蜴:극독을 품은 한 자 이내의 붉고 작은 도마뱀)의 독(毒)을 바른 독침과 독화살도 있으니. 이 좁은 곳에서 다 피할 수는 없을 테니, 슬쩍 스치기만 해도 중독되어서 죽을 걸. 흐흐흐, 일단 중독되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 테지. 우리 부족조차 해독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독성이 지독한 독이니.“ ******* 검도부 님 말씀대로 약간 늘어지는 느낌이 저도 듭니다. 하지만 저는 글을 쓰는 스타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충 대충 사건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일단은 확실한 설정과 주변상황을 제시하면서 이후에 비무행을 진행한다면 훨씬 글의 완성도가 높아지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지금부터는 단리유아 혼자서 하는 여행이 아니니 아무래도 주변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많아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얼마 후부터는 이런 세세한 사항의 제시는 필요가 없이 사건을 전개해도, 대강의 상황이 제시 되었으니 충분히 개연성이 확보되어서 어딘가 이상하거나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행로난(行路難) 난중진(難重陳) 행로난(行路難) 난중진(難重陳) 2 현재 일행이 모여 있는 곳은 입구에서 왼쪽에 위치한 곳으로, 입구와 삼 장(丈) 정도 떨어져 있었다. 후문으로 보이는 곳은 입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보이는 뒤쪽 벽에 있었다. 후문 쪽은 거리가 더 멀었고, 입구는 흠족(歆族)의 전사 예닐곱 명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곁에 사방 삼 척 정도의 덧창이 있었지만 한 번에 모두가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다른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씩 빠져나가야 했다. 아니면 입구를 돌파해서 나가야 하는데 솔직히 너무 장소가 좁아서 단리유아 자신은 걱정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독침이나 독화살을 피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일단은 파타루(芭朶婁)를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잠시 전음입밀로 상의하다가 먼저 공손고가 파타루를 데리고 들창으로 나가고, 그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기습을 하여 돌파하기로 했다. 가장 앞에서 단리유아가 막고 나머지 사람들은 단리유아를 통과하는 독침이나 독화살을 막는 것으로 결정했다. 단리유아가 앞으로 나서며 노인에게, “당신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를 공격하려하다니, 아무리 한족(漢族)에게 원한이 깊다고 그렇게 할 수가 있소? 지금 떠날 테니 길을 비키시오. 만일 비키지 않는다면 이후의 일은 당신 책임이오.” 단리유아의 전혀 고저가 없는 말에 무심(無心)한 말에 흠칫하는 기색이었지만, 주변을 보고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흐흐흐, 비키지 않겠다면 어쩔 텐데?” “바로 이렇게 하겠다는 말이오.” 단리유아가 말과 함께 검집째 휘둘러 앞을 막고 있는 정면의 세 사람을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공손고가 파타루(芭朶婁)를 안고서 창문을 부서뜨리며 뛰쳐나갔다. “펑, 퍽, 뚝.” “악, 으윽, 억!” 검영(劍影)이 일어나 세 명의 무기를 든 오른 팔을 부러뜨렸고, 그와 함께 정문 쪽을 향하여 뛰쳐나가며 공격을 계속했다. 입구까지의 거리는 삼 장(丈) 정도에 불과해서 다른 사람들이 공격하여 막으려는 순간에, 이미 단리유아와 다른 사람들이 통과해서 밖으로 나가버린 후였다. 순식간에 입구 쪽을 막고 있던 일곱 사람이 사지(四肢) 중에 한곳이 부러지거나 급소를 맞아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한쪽에서 독침을 날리고 화살을 날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이런 광경에 어이가 없어진 노인이 그때서야 소리를 지르며, “뭐하는 것이냐? 어서 쫓아라. 으드득, 도대체가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이냐?” 노인의 호통에 그제야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는 이를 악물고 모두가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단리유아와 일행이 파타루를 등에 맨 공손고를 만나서 떠나고자 할 때, 흠족(歆族)의 전사(戰士)들과 같이 있던 삼십여 명의 사람들도 뛰쳐나왔다. “소사숙, 어서 자리를 피하시지요. 이들과 싸워 봤자 우리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음구의의 재촉에 선상조가 화를 내면서, “아니, 자네 무슨 소린가? 빌어먹을, 밥 한끼 얻어먹자고 들어왔을 뿐인데 다짜고짜 공격하다니 이런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제미랄 놈들 같으니. 아까는 비좁아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는 막힌 곳도 없으니 한바탕 화풀이나 하고 가야지.” “상조,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곳에도 월군(越軍)이 머물러 있을 테니 만일 그놈들이라도 몰려온다면, 앞으로 두고두고 귀찮은 일이 될 것이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소. 저들의 독(毒)이 무서울 뿐이지, 무공은 별로요. 하지만 수백 명의 병졸들에 포위된다면 죽이지 않고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어서 갑시다.” 단리유아가 말하며 웅정향이 앞장서게 하고 자신이 제일 뒤에서 날아오는 독침과 독화살을 막으며 뒤따른다. 대로의 한가운데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흠족(歆族)도 사람들이 지나는 대로에서 함부로 독물을 쓸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소리를 지르며 쫓아올 뿐이었다. 그러나 무공을 익힌 고수의 신법을 보통사람들이 쫓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서 점점 더 거리가 벌어졌다. 일행이 뒤에서 시끄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는 흠족의 무리들을 피해서 달아나 서로(西路)의 끝에 이르러있을 때, 멀리 백여 명의 병사들이 길을 막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선상조가 이 모습에 침을 내뱉으며, “제기랄, 이 자식들이 미리 연락을 주었나보군. 우리보다 더 빨리 도착할 수는 없었을 테니” “아니, 내 생각에는 낯선 한인들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그 이전에 군영(軍營)에서 출발하여 모든 도로를 폐쇄하려한 것 같네. 소사숙,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대군에 포위 될 뻔 했는데. 포위망이 다 갖추어지기 전에 어서 이들을 뚫고 지나가야합니다.” 일행이 서로 얘기하면서 달려오는 순간, 흑색갑주를 걸치고 물소의 뿔이 돋아난 것 같은 투구를 쓴 장군이 앞으로 나오며 한어(漢語)로, “모두 멈춰라. 무기를 내려놓고 순순히 투항해라. 조사해보고 상관이 없다면 풀려나게 될 것이니.” 그 모습에 일행이 코웃음 칠 때, 선상조가, “이보슈, 장군나리. 우리가 뭐 다섯 살 먹은 애들인 줄 아시오? 어서 길이나 비키시오. 괜히 피 보기 전에.” “뭐? 감히 반항하겠다는 것이냐?” 백여 명의 병사를 믿고 큰소리치지만 사실 일행이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지, 저 정도의 숫자라면 쉽진 않겠지만 남파쌍검(南波雙劍) 만으로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들이 잠시 말을 주고받는 순간에, 흠족(歆族)의 전사들이 삼십 장(丈)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단리유아가 검을 휘둘러 검강(劍剛)으로 한쪽의 목조건물을 향해 날려 보낸 후에 폭발하는 나뭇조각 사이를 뚫고 달려 나갔다. 나머지 일행도 모두 뒤따라 달려 나갔다. 그 광경에 막아섰던 군대와 흠족의 전사들이 모두 놀라 넋이 빠졌다가 비로소 그들이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할지 생각하려할 때에는 이미 일행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일행은 그대로 십여 리를 수풀을 헤치며 달리다 산속을 흐르는 시냇가에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져 희미한 달빛만이 주위를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공손고가 바위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젠장,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람. 처음 들어온 도시에서부터 이런 대접을 받다니 정말 어이가 없구만.” “아, 그 자식들을 다 죽여 버려야 하는 건데. 감히 우리를 공격하다니.” 선상조 역시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발길질을 하며 말한다. 한쪽에 앉으며 웅정향이, “휴. 소사숙, 앞으로도 군대가 있을 큰 도시에는 무사히 들어나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에 대해 소문이 나게 될 테고 수배될 지도 모르니. 이렇게 되면 안남산맥(安南山脈) 중부를 지나기 전에는 계속 눈을 피해서 다녀야할 것 같습니다.” 걱정스런 기색으로 말하는 웅정향을 보다가, 단리유아가 음구의에게 식량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보니 사흘 치의 건량밖에 없다고 한다. 다시 파타루에게 고평(高平)에서 하강(河江)으로의 지름길을 물어보니, 능초산(稜峭山)을 넘어가는 것이 지름길이지만 그곳은 흠족(歆族)의 본거지라고 난색을 표하며 돌아가기를 바란다. 능초산(稜峭山)은 고평(高平)에서 서북쪽으로 이백여 리 떨어진 곳에서 고평 근처까지 뻗어있는 산으로, 최고봉이 육천오백여 척에 이르는 높고 험한 산이었다. 수목이 뒤덮여 있고 온갖 맹수와 독물(毒物)들이 있어, 주로 흠족(歆族)들이 살 뿐이고 다른 부족들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현재 일행이 있는 곳도 능초산의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한 골짜기였다. 단리유아가 파타루(芭朶婁)의 말을 듣고서 둘러보며, “우회해서 간다면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소사숙, 그냥 곧바로 통과합시다. 이번에도 놈들이 막는다면 제가 본때를 보여 주겠습니다.” 이에 파타루가 놀라서, “안됩니다. 이 일대는 흠족(歆族)의 터전으로, 산속 밀림이 우거진 곳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고 알려진 부족입니다. 아까 여러분이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이곳에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여긴다면 큰 착각입니다.” 음구의가 파타루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소사숙, 파타루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며칠 후면 오늘 일이 사방에 소문이 날 것입니다. 그리되면 모든 흠족(歆族)도 알게 될 것이고 게다가 식량도 부족하니, 될 수록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파타루(芭朶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가능한 빠른 속도로 능초산(稜峭山)을 넘어가기로 했다. 그날 밤은 그곳에서 머물고 다음날에 다시 길도 없는 밀림을 헤치며 전진했다. 모두가 수풀을 칼로 쳐내며 전진하니 옷은 이곳저곳 초목의 푸른 물이 들었고, 가끔씩 나타나는 독물과 맹수들로 지치고 신경이 날카롭게 되었다. 또 한참을 간 것 같은데도 똑같은 풍경이 이어져 도대체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날 저녁 무렵에 능초산(稜峭山)의 동남쪽 한 산등성이에 이르렀을 때, 산속의 버려진 집을 발견했다. 문이나 벽이 없이 정방형으로 나무기둥을 일 장(丈) 간격으로 박고, 그 위에 이엉을 얹은 모습으로 벽이 있다면 남만(南蠻)의 전형적인 가옥형태인 고상식(高上式)의 집으로 보였을 것이다. 땅과 일 장 정도의 높이에 대나무로 바닥을 만들고,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가 걸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일행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집의 안쪽에 옷가지와 여러 가지 생활에 필요한 것 같은 물건이 있었다. 호기심을 느끼고 일행이 다가설 때, 파타루(芭朶婁)가 막아서며, “이곳에는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곳이 뭔데 들어가면 안 돼? 잠깐 들어가 보고만 올 테니 저리 비켜라.” 어제의 사건 때문인지 선상조가 짜증난 목소리로 소리친다. 이에 팔을 벌리며 강경하게 파타루가, “안된다니까요. 이것은 무덤집이란 말입니다. 괜히 들어갔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무덤집? 그게 뭔데? 흥! 별 수 없는 오랑캐들이란. 죽은 사람한테 무슨 집이야?” 비웃는 소리에 파타루가 얼굴이 붉어져 화를 내면서, “무슨 소립니까? 조상(祖上)을 숭배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은데? 이곳은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것들을 모아놓은 곳이라구요. 그리고 그 밑에 무덤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그냥 구경 좀 하겠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선상조가 파타루를 밀치고 신형을 날려 움막 같은 집으로 뛰어올랐다. 쓰러진 파타루가 큰일 났다고 소리 지르며 허둥대다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선상조가 집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대나무바닥 위에 낡고 빛이 바랜 온갖 물건이 있었다. 옷에서부터 한쪽의 조그만 항아리에 담긴 쌀, 깃털장식, 활 등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물건이 있었다. 문득 그중에서 손바닥 정도 되는 길이의 외날의 칼을 집어 들고 살펴보다가, 일행이 부르는 소리에 내려왔다. “선사제, 이게 무슨 짓인가? 아무리 우리와 풍습이 다르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함부로 죽은 사람을 위한 곳에 뛰어들다니.” 웅정향의 말에 이어 나머지 사람들도 선상조를 노려보며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꾸짖는다. 그럼에도 듣는 척도 안하고 단도(短刀)만 살펴보다가, “이것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아십니까? 분명히 나무로 된 것 같은데 날카롭기가 진검(眞劍) 못지않군요.” 욕심이 나는 듯이 이리저리 돌리며 자세히 바라본다. 일행이 보니 전체적으로 검붉은 빛을 내고 있었는데, 분명히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을 텐데도 방금 전까지 사용한 듯이 날카롭게 날이 서있었다. 단리유아가 선상조를 바라보며, “선사질, 아무리 좋은 병기라도 고인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면서까지 훔치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이오. 다 보았으면 다시 가져다 놓으시오.” 파타루(芭朶婁)도 칼을 보다가 놀라며, “이미 틀렸습니다. 저 칼은 보통사람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보통 족장(族長)들이나 그 정도의 세력이 있는 사람이 갖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제 누군가 신성한 무덤집에 들어와 칼을 훔쳤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우리는 끝장입니다.” 남만(南蠻)의 백여 부족 중에서 무덤을 무덤집과 함께 만드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어서, 거의 절반이상 되는 부족들의 장례형식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그 위나 주위에 무덤집을 만드는데, 무덤과 같이 만들거나 몇 년 후에 만들기도 했다. 이런 무덤집에는 죽은 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품과 생전에 쓰던 유품(遺品)들을 들여놓았다. 또 물품 중 일부는 무덤집안에 들여놓지 않고 불에 태워서 날려 보내기도 하는데, 죽은 자가 저 세상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남만(南蠻)의 북부지역인 대구월(大瞿越)은 오랫동안 중원의 지배를 받아서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가 퍼져있었지만, 그것도 강의 하구나 평야지대의 인구가 집중된 지역에서만 믿을 뿐이었다. 또 겉모습은 절의 모습이지만 들어가면 한 가문의 사당(祠堂)이거나 다른 신들을 모셔놓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는 부처님의 불상(佛像) 옆에 태연히 악마불(惡魔佛)을 모셔놓고 숭배하기도 했다. 또 온갖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숭배대상이나 유명했던 인물들의 조상(彫像)을 같이 모셔놓는 경우도 드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고산지대나 밀림속의 문명(文明)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오지(奧地)의 경우는 조상(祖上)을 숭배하거나 새나 동물의 조상(彫像)을 우상시하기도 하고, 모든 자연에 영(靈)이 깃들어있다는 등의 토속신앙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파타루(芭朶婁)의 놀라고 두려워하는 소리에 선상조가, “아니 이것 좀 만졌다고 누가 알기라도 한다고 그래. 정 그러면 다시 갖다놓으면 되지.” “이미 늦었다니까요. 부족마다 주술사(呪術師)가 있는데, 보통 이런 물건에는 주술(呪術)이 걸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건 혈루라(血淚羅)라고 신성시되는 칼로 족장(族長)만이 쓸 수 있고, 주술사가 인정한 사람만이 다시 가져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전에는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걱정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에 공손고가 파타루를 달래며 말한다. “흠,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너도 어제 보았지만 우리들은 보통사람과는 다르단다.” 파타루(芭朶婁)가 단리유아를 힐끗 보다가 다시, “그때는 평지에다가 도시였으니 그렇지. 이런 밀림 속에서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모욕(侮辱)을 받고 절대로 가만히 있을 부족이 아닙니다. 흠족(歆族)이 얼마나 집요하고 잔인한 부족인줄 모르시니 그러는데, 비록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어떤 부족도 이들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게다가 산속에서는 귀신들이 따로 없다는데.” “흥, 그까짓 놈들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 어제 보니 내력도 없이 그냥 외공을 단련한 정도 밖에 안 되던데.” “아, 정말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들은.....” 선상조의 말에 다시 파타루가 대꾸하려 할 때 웅정향이, “됐다. 걱정은 그만두고 어떻게 해야 할 지나 생각해보자. 그리고 선사제, 자네도 다음부터는 섣불리 행동하지 말게. 자네 때문에 우리 모두가 위험해져도 좋다는 말인가? 게다가 사숙님도 계신데.” “상조야, 어서 그것부터 갖다 놓아라. 이미 만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웅정향과 음구의의 말을 듣고도 그리 내키지 않다는 듯 머뭇거리다, 단리유아를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참, 할 수 없지. 모두가 그렇다면.... 하지만 그놈들이 뭐가 무섭다고....” 궁시렁대다가 아쉬운 듯이 몇 번이고 칼을 쓰다듬으며, 발길을 돌려 무덤집으로 올라간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단리유아가, “파타루(芭朶婁),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제라도 능초산(稜峭山)을 우회할까? 아니면 더 속력을 내서 재빨리 통과하는 것이 좋을까?” “돌아간다고 이런 밀림 속에서 얼마나 돌아가겠습니까? 그때는 이미 포위된 후일 것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빨리 통과해야합니다. 밤에도 걸어서. 일단 능초산만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로로족(露露族)의 영역이니, 그들도 일부러 쫓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른 부족과 마주쳐도 호의(好意)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우리가 조상의 무덤집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제기랄, 완전히 설상가상(雪上加霜)이구만. 관에서도 쫓기고, 토착부족들에게도 쫓기고 앞으로 편히 잘 날이 있으려나 모르겠군.” 공손고가 파타루의 말에 선상조를 노려보며 투덜거린다. 그 모습에 선상조가 화를 내려다 일행 모두가 노려보자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날 밤부터 자지도 않고 밤에도 별빛에 의지해 방향만 대충 잡은 채 일행은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날에도 걸음을 재촉하여 험악한 산비탈을 타거나 계곡을 건너는 등 힘겨운 일정을 소화해야했다. 겨우 능초산(稜峭山)을 넘어 서쪽 끝 산등성이에 이른 때는 그 다음날, 날이 어두워진 유시(酉時:17-19시)말이었다. 이틀 동안의 밤낮 없는 강행군으로 무공의 고수들인 일행도 지쳤지만, 파타루(芭朶婁)는 거의 기진맥진할 정도였다. 앞에서 방향을 잡아 길을 찾고, 이것저것 독물이나 독초도 신경 써야 했으니 쓰러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곳까지 버텨오던 파타루도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더 가야한다고 중얼거렸지만, 일행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날 저녁은 별 수 없이 그곳에서 쉬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 왕수 님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수정했답니다. 앞으로도 지켜봐 주시고 잘못된 곳이 보이면 바로바로 지적해 주십시오. 천외검성 님께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제야 잘못된 곳을 찾았군요. 감사합니다. 행로난(行路難) 난중진(難重陳) 행로난(行路難) 난중진(難重陳) 3 천지(天地)가 고요히 잠이 들고 가끔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만 들려오는 축시(丑時:1-3시)경. 달도 구름 속에 숨어서 삼 장(丈) 밖을 알아보기 힘들 때, 음산한 기운이 사위를 뒤덮으며 일행이 잠든 곳을 향하여 서서히 접근해왔다. 어스름한 안개가 사위(四圍)를 뒤덮으며 점점 일행을 향해서 다가오는 가운데, 극도의 정제된 살기에 풀벌레까지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잠이 들었던 단리유아는 감각에 닿는 미미한 살기에 깨어났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희미한 검푸른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면서 십 장(丈) 이내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안개가 아니고 독기(毒氣)도 포함된 것처럼 보였다. 천시지청대법(千視地聽大法)으로 사위를 감지해서야 안개 속에 숨어서 소리죽여 접근하는 삽십여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나 은밀하고 서서히 접근하는지 일각(一刻)에 일 장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흠족(歆族)의 전사들이 습격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단리유아는 일행을 깨웠다. 일어나지 않고 엎드려서 조용히 흔들어 하나하나 일행을 깨우고 전에 준비해두었던 해독단을 먹였을 때, 상대는 벌써 십 장 이내로 접근하고 있었다. 희미한 안개가 이미 주위를 뒤덮어 절정(絶頂)의 고수들인 일행도 삼 장 이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일행도 곧 습격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전과 같이 공손고는 파타루만 책임지며 중앙에 서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방향을 나누어 싸우기로 했다. 흠족(歆族)이 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움에 질려 소리 지르려는 파타루를 공손고가 아혈을 눌러 한 쪽으로 데려갔다. 일행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단리유아가 정면을, 웅정향이 후면을, 음구의와 선상조가 각각 좌우를 맡았다. 시야가 제한되는 이런 칠흑 같은 어둠과 안개 속에서 독암기(毒暗器)는 치명적이지만, 고평(高平)에서 마주친 전사들의 수준을 보았을 때는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상대도 조금 더 다가 왔을 때 일행이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았는지 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먼저 독침(毒針)과 함께 온갖 독물(毒物)이 날아들어 왔다. “휘익, 쉬익, 쉭” 뒤이어 검은색의 옷을 입고 신체의 드러난 곳은 문신(文身)으로 물들인 전사(戰士)들이 덮쳐왔다. 얼굴에도 어두운 색깔로 마귀 같은 모습을 그린 것 같았다. 암기(暗器)를 쳐내고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독물(毒物)들을 없앴다. “차, 차, 창, 팍, 퍽” 암기와 독물이 일행의 주위로 쉴 새 없이 떨어질 때, 흠족(歆族)의 전사들이 눈앞까지 다가와 무기를 휘둘렀다. 먼저 단리유아가 검을 빼들어 정면에서 덮치는 상대의 이 척 가량의 칼을 막았다. “창, 창, 차창” 그와 동시에 일행들도 상대의 칼이나 낫과 부딪쳐서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일합의 부딪침이 끝났을 때, 일행 모두가 놀라게 되었다. 지난번의 일로 쉽게 상대를 쓰러뜨리고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비록 검기(劍氣)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보았었던 그런 전사들이 자신들의 검을 무리 없이 막았기 때문이었다. “챙, 채 챙” 한사람에게 서너 명이상 달라붙어 연이어 공격하고 있었고, 그 외에는 밖에서 독침(毒針)이나 독물(毒物)을 계속 날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상대의 공격을 무리 없이 막고는 있었지만, 독침과 독화살, 독물 등의 공격에 일행도 운신(運身)을 크게 하여 자유로이 움직이며 싸울 수 없었다. 한동안 상대의 무기를 쳐내다 검으로 상대의 신체를 갈랐을 때, 일행 모두 놀라서 당황할 지경이었다. 칼에 맞았는데도 아무런 상처가 없고, 지나간 흔적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웅정향이 놀라서 상대의 무기를 밀어내며, “이런, 정말 어찌 된 영문이지? 칼이 들어가지 않잖아? 분명 내력(內力)도 없는 놈들인데.” “강시(彊屍)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지? 도검불침(刀劍不侵)이라니 말도 안 돼.” 뒤이어 음구의도 의혹어린 어조로 말하자, 선상조가 살기를 일으키며, “퉤, 이 자식들이 정말 해보자는 것인가? 소사숙, 더 이상 봐주지 말고 모두 죽여 버립시다.” 가급적 살수(殺手)를 쓰지 않고 제압하려 했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일행도 그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을 알자, 모두가 전사들을 향해 살심(殺心)을 품게 되었다. 일행이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으로 공격하려 할 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한 쪽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타람마하(裟朶攬摩何) 각추타흠파(却推拖廞爬).....” 한편, 일행과 십여 장 떨어진 안개 속에서 주술사(呪術師)로 보이는 육십대의 왜소한 늙은이가 검은색의 죽장(竹杖)을 손에 모아 쥔 채 일행을 보면서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폭이 넓은 검은색의 옷에 머리는 붉은 색의 천으로 둘둘 감은 모습으로 자신의 키보다도 더 큰 죽장을 들고 있었다. 흠족의 주술사로 일대에 자자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칠가사(漆呵四)라는 사람이었다. 그도 고평(高平)에서 일어난 일로, 처음 일행에 대해 소문을 들었었다. 그래도 중원에서 온 강호인(江湖人)이라는 말에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자신이 주술을 걸은 물건을 함부로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는 분노해 전사들을 이끌고 추적해 공격해왔던 것이다. 칠가사(漆呵四)도 처음에는 그래도 손쉽게 없앨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단리유아 일행과 직접 부딪쳐보니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보통 남만(南蠻)의 고수들도 자신이 주술을 건 전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해 일각(一刻)을 넘지 못했는데, 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대로 간다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깨물며 자신도 잘 쓰지 않는 혈인광혼술(血引狂魂術)을 펼쳤다. 일단 이 술법을 펼친 이상, 전사들은 살아남는다고 해도 기력을 소모해 최소한 육 개월은 움직이기도 어려울 것이다. 칠가사(漆呵四)의 주문(呪文)이 이어지자, 갑자기 전사들의 눈빛이 완전히 광기(狂氣)에 물들어 괴성을 지르며 공격한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이성을 가지고 공격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전신(全身)을 돌보지 않고 거의 몸을 던져서 공격해들었다. “우아아아!” “차, 창, 챙, 챙” 갑자기 눈빛이 변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우선 접근해서 붙잡으려는 태도에, 선상조가 당황한 얼굴로 욕설을 뱉으며, “이런 제기랄. 뭐 이런 놈들이 있지? 완전히 미치광이가 따로 없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갑자기 태도가 변하다니.” 음구의가 놀라서 중얼거릴 때, 나머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있었다. 칼이 들어가지 않는데다, 그나마 검기(劍氣)로 공격해 상처를 입혀도 전혀 무시하고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정한 초식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지만 전신을 내던져 동귀어진(同歸於盡)하려는 상대의 모습에, 더 이상 살수를 망설일 상황은 아니었다. 이제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죽을 때에도 비명도 없이 괴성만 지르며 덮쳐들고, 머리를 잘리거나 사지(四肢)가 모두 잘리지 않으면 끝까지 달려들었다. 게다가 가끔 뒤에서 날리는 독암기와 독물에, 마음대로 움직이며 흠족(歆族)의 전사(戰士)들을 죽일 수도 없었다. 모두가 검법(劍法)을 펼치며 살수를 펼쳤어도 일각 동안 겨우 열 명 밖에 죽일 수 없었다. 그나마 단리유아가 죽인 것이 일곱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상대하는 데에도 곤란을 겪고 있었고, 아직도 흠족(歆族)의 전사들은 이십여 명이나 남아있었다. 장내는 난무(亂舞)하는 검광(劍光)과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소름끼치게 광기(狂氣)에 차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 퍼져나갔고, 이들이 발하는 살기(殺氣)에 근처의 모든 생물체가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떨며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대지를 적시고, 여기저기 조각난 암기와 떨어진 무기, 죽은 독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우초타풍가(盂醮朶馮可) 타란초쟁라(咤卵剿錚羅).....” 점점 서로가 살기(殺氣)에 빠져 광분(狂奔)하고 있을 때, 다시 뒤쪽의 칠가사(漆呵四)가 주문을 바꾸었다. 제혼강심술(制魂降心術)로 적의 심혼(心魂)을 뒤흔들어 의지를 약하게 만드는 술법이었는데, 주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적을 공격할 때 자주 쓰는 술법이었다. 상대의 진언이 커지면서 일행은 심혼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래도 단리유아는 크게 영향 받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점점 심령(心靈)이 위축돼 행동 또한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서 전사들은 더욱 원기(元氣)가 살아나는지, 전보다도 더 민첩하게 날뛰고 있었다. “차, 창, 챙, 챙” “우아아아!” “스윽.” “윽,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가장 먼저 선상조가 상대의 철겸(鐵鎌)에 어께부위가 갈라져 피가 솟구쳐 오르는 가운데, 상대의 팔을 자르며 소리쳤다. 이에 음구의가 자신의 상대를 물리치고는, “뒤로 물러나 어서 정혈산(淨血散)을 바르게. 해독할 수 없더라도 독이 퍼지지는 않을 테니.” “자네는 이까짓 상처로 내가 어떻게 될 줄 아는가? 으드득, 내 오늘 저놈들을 작살을 내버리겠네.” 이를 갈면서 계속 검을 휘두르려는 선상조를 공손고가 잡아채며, “무슨 쓸데없는 만용인가? 어서 뒤로 물러나게.” 앞으로 나와 선상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는, 선상조가 물러나 지혈과 함께 약을 바르게 했다. 그때 선상조의 모습을 본 칠가사(漆呵四)가, 자신이 주술을 건 혈루라(血淚羅)를 건드린 놈이라는 것을 알자 다시 주문을 바꾸었다. 우선 하나라도 먼저 죽여서 상대편을 흔들어야 했던 것이다. 작심소혼술(灼心燒魂術)로 상대가 자신이 주술을 건 물건을 직접 가지고 있거나 건드려서 술법에 반응하게 되었을 때 공격하는 술법인데, 거리가 가까울수록 효과가 컸다. “파타루후자(爬拖漏朽煮) 사주특호야(沙走蟘呼也).....” “크아악.” 갑자기 선상조가 뒤로 쓰러지면서 눈을 뒤집고, 입가에는 흰 거품을 물며 사지를 부르르 떤다. 이에 공손고가 힐끗 보고는, “이런 제기랄. 저 놈은 또 왜 저래? 빌어먹을. 완전히 엎친데 겹친 경우로군.” “소사숙, 우선 저 주술부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조가 위험할 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 우선 주술사부터 없애주십시오.” 음구의도 선상조가 발광하는 것을 알아차리자, 다급한 어조로 단리유아에게 말한다. 단리유아도 이렇게 계속 가다간 선상조 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가 위험해질 것을 느끼고, “공손선배, 우선 선(宣)사질을 붙잡으시오. 내가 주술사를 죽이겠으니. 그동안 웅(熊)사질과 음(陰)사질이 잠시만 시간을 끄시오.” 말을 마치자 일행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문이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정면에서 미쳐 날뛰는 세 명의 전사(戰士)를 향해 다가서면서, 먼저 앞을 막아선 상대에게 다가가 상대의 칼을 밀친 다음에 다가가 뇌전지(雷電指)로 미심(眉心)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채챙. 쉬익! 털썩.” 다시 옆에서 공격해오는 두 사람들을 보면서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을 펼쳐 뒤로 물러났다가, 오른쪽에서 다가와 공격하는 전사의 겸(鎌)을 밀친 다음에 손목을 찌르고 다시 품속에 뛰어들어 상대의 가슴 한복판에 연속해서 삼장(三掌)을 날렸다. “챙그랑. 퍽. 콰콰쾅!” 피를 뿌리며 삼 장(丈)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전사의 모습은 보지도 않고, 다시 왼쪽에서 다가오는 칼을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피하며 미처 상대가 실체(實體)를 알아차리기 전에 목을 날려버렸다. “팟! 투툭!” 떨어지는 목이 땅을 구르며 들리는 소리에도, 무시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단리유아가 세 명의 전사를 없애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칠가사(漆呵四)가 다급한 기색으로 전사들의 불러들여 앞을 가로막게 했다. 칠가사의 주술에 나머지의 전사들도 웅정향과 음구의를 상대하는 네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단리유아에게 달려들었다. 단리유아도 시간이 다급하다는 것을 알고는 검강(劍剛)을 둘러싸 일수에 상대를 죽이고 있었다. 전사들이 비록 도검불침에다 광기(狂氣)에 젖어 두려움이 없다 해도 도저히 단리유아를 막을 수 없었다. “우아아아!” “채챙. 퍽. 콰콰쾅!” 전사들의 광기에 찬 울부짖음과 함께 서로의 무기가 부딪히고 검광(劍光)이 번쩍였다. 하나하나 단리유아의 검에 죽어갔지만, 쓰러질 때에도 전혀 비명을 지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다른 싸움보다 더 끔직하고 잔인하게 보였다 칠가사(漆呵四)도 상대가 자신을 노리고, 또 전사들이 상대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장내를 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비장한 안색으로 품속에서 한 뼘 길이의 소도(小刀)를 꺼내 왼 팔뚝을 그었다. 피가 나오자 팔을 휘저어 하늘에 뿌리며, “차탁하함부(叉鐸何含否) 할우제제탁(割又嚌嚌啄)....” 혈천귀장소혼술(血天鬼藏召魂術)로, 칠가사(漆呵四) 역시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술법이었다. 이 술법(術法)은 본시 고대천축(古代天竺)의 사악한 술법으로 악명을 떨쳤던 유마밀전(幽魔密殿)의 것이었다. 피를 뿜어서 상대를 전혀 다른 차원(次元)의 공간에 가두어놓고 악귀(惡鬼)를 불러내 상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일단 펼치면 술법사(術法師)도 거두어들일 수 없었다. 반 시진(時辰) 이내에 상대를 죽이지 못한다면 술법을 펼친 자가 죽게 되는 것으로, 이때 허상(虛像)으로 악귀를 불러서 공격하는 것과 실제의 사람에게 술법을 걸어 공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전자의 방법은 허상이므로 부동지심(不動之心)에 이른 사람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후자는 실상(實像)으로 사람이 악귀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어서 부동지심 만으로는 돌파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 거의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 술법에 참여한 전사(戰士)들은 술법이 거두어진 뒤에도 살아남지 못하는 극악한 술법이었다. 주술사 역시 상대를 죽이고 살아난다 해도 술법의 능력에 막대한 타격을 받아서 얼마간은 보통사람보다도 더 허약하게 되는 것이었다. 오래전 옛날 천축(天竺)에서도 사라진 술법이 오늘 이곳에 등장한 것이었다. 칠가사(漆呵四)의 주문(呪文)이 이어지자, 곧이어 단리유아 주위를 포함한 십 장(丈) 주위가 완전히 혈천(血天)으로 둘러싸였다. 전사들의 모습도 변해서 꿈에 볼까두려울 정도로 흉측한 마귀(魔鬼)가 되었다. 얼굴전체가 악귀의 형상으로 변하고 머리위에는 뿔이 돋아났으며, 체격도 커져 전보다 두 배 정도로 커졌고 전신도 딱딱한 각질로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단리유아도 전사들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상대가 사술(邪術)을 펼쳤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선 심신을 가라앉히고 상대의 공격을 막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마귀들의 모습을 한 전사들이 공격에도 죽지 않고 계속 되살아나는데, 어떤 것이 허상(虛像)이고 어떤 것이 실상(實像)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일각 동안 이리저리 부딪치고 공격했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채챙! 퍼퍽. 콰꽝!” 상대가 허상과 실상이 뒤엉켜 있어서 허상을 없애도 다시 나타났고, 그렇다고 부동지심(不動之心)으로 깨뜨리려하면 실상이 공격했다. 실상 자체도 완전히 목이 잘리거나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사지가 끊어지지 않는 한 죽지도 않았다. 술법(術法)을 펼치기 전에 살아남아 공격했던 사람은 아홉 명이었는데, 그중에 악귀로 변해서 단리유아에게 죽은 이는 두 사람뿐이었다. 이제 검기(劍氣)는 전혀 통하지 않아서 검강(劍剛)을 제외하고는 죽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또한 허상에 자꾸 속다보니 상대의 공격에 당해서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상대의 무기에 극독(劇毒)이 발라져 있는지 독에 강한 내성이 있는 단리유아조차 간간히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고,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겨우겨우 치명상은 면하고 있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출혈과다로 먼저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콰콰쾅! 챙그랑. 채챙! 퍼퍽. 콰꽝!”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잠시 이어지다가 검강으로 전방의 공격을 물리친 후에, 검을 버리고 어깨 뒤의 적운도(赤雲刀)를 빼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져 감을 느끼고, 더 이상 이렇게 수세에 몰려 버틸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먼저 백팔산영환마보(百八散影幻魔步)를 펼쳐서, 사방을 신영(身影)으로 둘러싸 역으로 다가오는 귀영들을 포위했다. 동시에 도를 휘두르며, “크키흐아악, 크흐키키킷....” 소름끼치는 괴성과 함께 도강(刀剛)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의 제 이절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로, 허상과 실상을 가리지 않고 십 장(丈)내의 모든 사물을 파괴했다. 도광(刀光)이 번뜩이고 도영(刀影)이 천지를 뒤덮었다. 도강(刀剛)에 부딪칠 때마다 허상(虛像)은 흩어지고, 실상(實像)의 악귀들도 전신에 도강이 적중되어서 갈가리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와 함께 술법도 깨져 혈천(血天)도 사라졌다. 단리유아는 술법에 벗어나자마자 자신을 보면서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뭐라 중얼거리는 칠가사(漆呵四)를 단칼에 죽여 버렸다. 술법을 다시 펼친다면 자신 역시 벗어난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고, 이런 악랄한 술법을 펼친 사람을 더 살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중원(中原)에서의 술법(術法)은 그리 공격적이거나 사악한 것도 드물었고, 술법의 고수를 상대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대개 환상(幻像)이고, 실체와 일체될 정도로 뛰어난 경지에 달한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칠가사가 죽자 사위를 둘러쌓던 검푸른 안개도 점점 흩어져 사라져갔다. 칠가사(漆呵四)의 비명을 뒤로하고 단리유아가 상처를 지혈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도 갑자기 시뻘건 구름이 주위를 뒤덮어서 접근하려고 했지만, 들어갈 수가 없어서 초조한 기색으로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흠족(歆族)의 전사(戰士)들도 모두 죽었고, 한쪽에서는 선상조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혈도가 풀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파타루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어, 어떻게 술법(術法)을 깨뜨렸습니까? 저것은 그동안 누구도 깨뜨리지 못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보다, 선(宣)사질의 상태는 어떻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소?” 파타루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단리유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선상조의 상태를 물어본다. 이에 음구의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신으로 독(毒)이 퍼진 것도 아니고, 혹시나 해서 고독(蠱毒)인지도 알아보았지만 그것도 아니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저 주술사(呪術師)의 술법(術法) 때문입니다. 전에 저 사람이 혈루라(血淚羅)를 만진 적이 있었잖습니까. 그때 내가 그랬잖습니까. 주술사가 그 칼에 주술(呪術)을 걸어놓았다고. 함부로 신성한 칼을 만진 자에게 반드시 보복하게 될 것이라고.” 파타루가 음구의의 말을 받아서 설명한다. 이에 웅정향이 놀라서, “아니 보지도 않고 누가 만진 것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여러분이 주술(呪術)을 무시하나본데, 일단 자신이 주술을 걸면 천리 밖에서도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마 저 사람이 그 칼을 만질 때, 주술사(呪術師)만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무언가 저 사람의 몸속에 침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음구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나? 이미 저 주술사도 죽어버렸는데.” “원래 주술(呪術)을 풀려면 더 뛰어난 주술사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받거나 주술을 건 상대를 없애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뭐, 예외적인 것도 몇 가지 있지만. 아마 별일 없으면 저녁때쯤에는 깨어날 것입니다.” 그 말에 일행이 안도의 숨을 쉬면서 자리에 앉아서 각자 상처를 돌보았다. 그들도 몇 군데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단리유아 만큼 심한 것은 아니었다. 내상은 별로 없었지만 외상은 아주 심해서 곳곳에서 핏줄기가 보이고 있었다. 일단 지혈을 한 다음, 옷을 벗어 상처부위에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를 발랐다. 다시 자옥신단(紫玉神丹)을 먹은 후, 간단히 조식을 마쳐 심신을 고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서히 밝아오는 희미한 새벽빛에, 간밤의 참극(慘劇)이 낫낫이 드러나 천지에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무기가 흩어져 있었고, 독물과 독암기에서 흘러나온 독기(毒氣)에 그 주변은 허옇게 말라비틀어져가고 있었다. 또 죽은 흠족(歆族) 전사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온전한 몸은 거의 없이, 사지가 떨어져나가거나 머리만 따로 따로 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술법(術法) 속에서 악귀로 변했던 시신들은, 햇빛을 받자 타들어가더니 재로 변해서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 버렸다. [설정 & 참조] [1] 유마밀전(幽魔密殿) : 고대천축(天竺)의 삼대세력으로 불문(佛門)이 등장하기 전까지 천축을 삼분했었음. 고금을 통틀어 서장(西藏)의 흑찰미사(黑刹彌寺)와 함께 모든 사술, 환술, 법술의 시조로 알려져 있음. 부처님의 등장이후 불문이 번성함에 따라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불법의 수호자로 알려진 비사법문(毘沙法門)에 멸망하여 일부의 술법은 흑찰미사로 흘러들었고 나머지는 세상에 흩어지거나 실전되었음. 중원에 원시마교나 천강신문, 봉황곡이 나타나기 훨씬 오래전인 춘추시대(BC770-BC403)초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문파로 그 사악함과 잔인함에 모두가 두려워했음. 최고무공은 유마십이해(幽魔十二解). 사인곡(蛇人谷) 사인곡(蛇人谷) 1 잠시 시체를 묻고 독기(毒氣)가 배인 땅을 뒤집어 장내를 대충 정리한 후, 자리를 옮겨 십여 리를 걸어 산 아래로 내려가서 아침을 해결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단리유아가 파타루를 보면서, “파타루, 부족마다 아까 같은 주술사가 있나?” “대부분의 부족마다 주술사(呪術師)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사악한 술법(術法)으로 유명한 주술사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술사의 종류도 다양해서 여러 가지 술법을 지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질병의 치료에 뛰어나든가, 예언에 타고나든가, 저주를 건다든가, 혹은 바람을 부르거나 비를 내리는데 뛰어나는 등 가지각색입니다. 이 흠족(歆族)의 주술사는 사악한 술법으로 이 근처에서 악명이 자자했는데, 일단 아까처럼 전사(戰士)들을 만들어버리면 상대할 부족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자들에게도 술법을 걸어서 자신의 일족을 앞장서 공격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독약(毒藥)과 술법을 이용해 그렇게 만든다는데 아무도 그 방법은 모릅니다. 모두가 일인전승(一人傳承)이니. 그래서 저 주술사는 여러분 같은 고수들도 상대하기 꺼린다고 알려져 있었지요.” 그 말에 웅정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휴, 앞으로도 계속 저런 괴물 같은 놈들과 마주친다면 끔찍한 일이군.” “맞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했길래 보통사람을 칼이 안 들어갈 정도로 만들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알 수가 없군요.” 음구의도 맞장구치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이때 공손고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이보게, 단리소협. 정말 계속 갈 텐가? 앞으로도 이런 공격이 계속되면 우리도 당할지 몰라. 저놈들도 우리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몰라서 이 정도였지, 만일 알았다면 결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걸세. 게다가 관(官)에서도 쫓기는 입장이 아닌가? 또 오늘 일이 소문이 난다면 남만(南蠻)의 고수들도 몰려들 텐데, 아무리 자네가 고수라도 한 손이 여러 손을 당해내지 못하는 법일세.” “소사숙, 제 생각도 그냥 운남(雲南)으로 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까와 같은 일이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웅정향 또한 공손고의 말에 동의하여 앞으로의 일정을 다시 고려해보도록 단리유아를 설득했다. 이에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었습니까? 우리는 세외(世外)를 그저 유람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서장(西藏)이나 천축(天竺)지역은 더 기괴한 일도 일어날 터인데, 벌써부터 낙심하여 돌아가자고 한다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정 걱정이 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돌아가십시오. 전 계속 갈 생각이니.” 말이 끝나자 공손고가 단리유아의 무심함에 화가 나 소리를 지르며, “아니, 자네는 무섭지도 않고, 걱정되지도 않는단 말인가? 일개 부족의 주술사(呪術師)가 저런 놈들이라는데, 게다가 독술(毒術)의 대가는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는데도 벌써 선(宣)가 아이가 저렇게 인사불성이 되어버렸잖은가?” “그 정도가 뭐가 대수입니까? 사람이 강호(江湖)에 산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겪을 터인데. 그리고 선(宣)사질은 별 이상 없다지 않습니까? 전 오히려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저런 술법(術法)은 저조차도 중원(中原)에서 겪어본 적이 없어서 술법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오늘 겪어보니 개안(開眼)한 느낌입니다. 그동안 사술(邪術) 같은 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고 천시했었는데,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겠군요.” 공손고의 말에도 전혀 동요 없이 조용히 말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습에 기가 막혀서, ‘으이그, 저 미친놈.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만. 다른 사람들은 걱정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무공에 미쳤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정말 이 인간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속으로 투덜거리는 공손고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단리유아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단리유아는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물고서 술법(術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 외었던 서책(書冊) 중에서 술법에 관련된 것을 뒤지며, 다시 한번 곰곰이 되새기고 있었다. 그날은 그곳에서 머물며 선상조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상처를 치료했다. 다음날 선상조가 정신을 차리고 별 이상이 없자 다시 하강(河江)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가지 소소한 충돌과 말썽이 일어났지만, 이미 일행에 대한 소문이 퍼졌는지 큰 싸움은 벌어지지 않고 무사히 하강까지 갈 수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계속된 하강(河江)에서 채주(菜州)까지의 팔백여 리의 길도 이전보다 결코 순탄치 않았다. 파타루의 앞장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독물에 중독(中毒)되기도 했고, 풍토병에 걸려 일행 모두가 닷새 동안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 날씨도 밤에는 물방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고, 낮에는 찌는 듯이 덥고 습도가 높아서 숨쉬기도 곤란할 정도였다. 또 아침저녁으로 내리는 자욱한 안개비는 땅을 진창으로 만들고 옷을 피부에 달라붙게 만들어, 그렇지 않아도 습기와 끈적거리는 땀에 시달리는 일행의 발을 더욱 무겁게 했다. 그렇게 독물에 물리고 습진에 걸려 온몸에 물집이 잡힌 채 괴로운 여정이 연일 이어졌다. 단리유아를 제외하곤 일행의 마음도 처음과 같은 호기(豪氣)와 여행에 대한 낭만은 찾아볼 수가 없어서 어서 빨리 이 지겨운 밀림(密林)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다행이라면 토착부족들과 큰 마찰 없이 식량과 식수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의 일이 소문이 났는지 일부러 시비를 거는 부족은 몇 없었고, 가끔 남만(南蠻)의 고수라고 찾아와 일행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별달리 강한 고수는 없었다. 그렇게 이십여 일이 흐른 사월 보름이 되었을 때,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서 토착부족들보다도 더 보기 흉하고 악취를 사방으로 풍기며 채주(菜州)와 하루거리인 방남(方南)에 들어섰다. 이곳도 삼천 척의 고원에 자리 잡은 곳으로 결코 낮은 곳은 아니었다. 고을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삼백여 호(戶)가 사는 소읍으로 흑수하(黑水河)를 사이에 두고 채주와 마주한 곳이었다. 이제 강을 건너고 부지런히 걷는다면 하루이내에 채주에 닿을 수 있을 터였다. 일행이 고을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러섰다. 시비를 걸려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동안의 여정(旅程)에 신경이 날카로워 흉흉한 안색인 일행의 얼굴을 보고는 모두가 기겁해서 물러났다. 객잔 비슷한 곳에 들어서려하자 주인으로 보이는 듯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섰다. 그러나 파타루가 몇 마디 하자, 금 새 얼굴이 창백해지며 두려운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모두가 그동안 한번도 제대로 씻지 못해서 먼저 목욕부터 하기를 원했다. 모두가 울상이 된 주인을 뒤로하고 목욕을 마쳤을 때는 이미 술시(戌時:19-21시)에 이른지 한참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미리 사오도록 시킨 대구월(大瞿越)의 평복인 폭이 넓고 거친 검은색의 마의(麻衣)로 갈아입고 내려와 주청(酒廳)의 탁자에 앉아서 저녁을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손고가 양팔을 들어 보이며, “휴, 정말 간만에 사람다워 보이는구만.” “정말 몸이 날아갈 듯하군요.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데” 선상조의 동의에 파타루가 입술을 내밀고,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요? 이곳은 그래도 양호한 지역이란 말입니다. 중부 안남산맥(安南山脈)일대는 산도 높고 밀림도 훨씬 울창하다구요. 그리고 습지가 널린 곳이어서 까딱 잘못하다간 늪에 빠지거나 피를 빠는 거머리나 혈승(血蠅) 같은 독충들도 널린 곳이라구요.” “아, 알았다고 알았어. 젠장, 오늘은 눈앞의 일만 생각하자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괜히 미리 걱정으로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파타루의 말에 선상조가 투덜거리며 말할 때, 웅정향이 단리유아를 보면서, “소사숙, 이제 내일이면 채주(菜州)에 도찰할 텐데, 혼자서 사인곡(蛇人谷)으로 찾아갈 생각입니까?” “사인곡이라구요?”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려 할 순간, 파타루가 깜짝 놀라 반문한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웅정향이, “그래. 너는 사인곡(蛇人谷)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겠구나. 듣기론 채주(菜州) 근처라든데.” “그럼 채주에 가는 것이 사인곡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까?” “공손선배가 자네에게 얘기하지 않았었나? 얘기한 줄 알았는데?” 고개를 갸웃하면서 공손고를 보면서 말한다. 이에 공손고가,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네. 그저 이곳저곳을 안내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지. 게다가 보수도 넉넉히 준다고 했고.” 이에 파타루가 입술을 악물며 단호하게, “난 사인곡(蛇人谷)에 안갈 겁니다. 절대로 못가요. 아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 근처에는 얼씬도 안할 것입니다.” “걱정 말게. 자네에게 그곳까지 같이 가자고 하지는 않을 테니. 자넨 일행과 함께 채주(菜州)에 머물고 있으면 돼.” 단리유아의 말에도 고개를 저으며 큰 소리로, “그래도 난 가기 싫어요. 설마 앞으로도 그런 곳만 찾아가는 것은 아닐 테죠?” 공손고가 헛기침을 연발하면서, “흠, 흠. 걱정하지 말래두. 누가 너보고 싸우라고 할까봐 그러냐? 넌 그저 근처까지 안내하고, 그곳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주기만 하면 돼.” “어떻게 걱정이 안 됩니까? 사인곡(蛇人谷) 같은 곳만 찾아간다는데, 만일 그들을 만났다간 뼈도 못 추릴 텐데.” “자네는 우리와 같이 있을 텐데. 무슨 걱정인가? 더구나 근처까지만 가는 것인데.” “그래. 여기 소사숙님만 찾아가서 비무할 작정이니 넌 아무 걱정하지 마라.” 웅정향과 음구의가 옆에서 파타루를 달래며 말한다. 이에 파타루가 일행을 둘러보면서, “비무(比武)요? 그 찾아가서 서로 무공을 비교한다는 것 말입니까? 정말 그것 때문에 찾아가는 거라구요?” “그래, 여기 일행은 그저 나를 따라 세외를 떠돌기 위해서 온 것일 뿐이지, 싸우는 것은 나 혼자 할 작정이네.” 단리유아의 말에 파타루가 큰 소리로, “말도 안돼. 대체 정신이 있습니까? 그들이 찾아가면 ‘어서 오시오. 정말 잘 왔소.’ 하고 반기며 비무해줄 것 같습니까? 그리고 따로 떨어져 있다고 안전할 것 같습니까? 우리의 행적을 안다면 오히려 암습받기 딱 좋을 텐데? 난 더 이상 여러분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다른 정신 나간 사람을 찾아보세요.” 이에 선상조가 소리 지르며, “뭐? 이 자식이 말이면 단 줄 알아? 너보고 싸우라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흥, 전에 흠족(歆族)하고 싸울 때 보니까 쩔쩔 매던데 뭘.” “이 자식이 정말....” 선상조가 그 말에 일어나 달려들려 할 때, 단리유아가 팔을 잡아당기며, “그만 두게. 떠나고 싶은 사람을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지. 자네가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오늘이라도 떠나도록 하게. 어렵겠지만 다른 사람을 구해보도록 할 테니.” 이에 공손고가 놀라서, “아니, 자네 무슨 말인가? 이봐, 애송이야. 네놈이 우리를 따라 이곳까지 따라온 것도 목적이 있어서일 텐데, 이제 얘기해봐라, 들어봐서 도울 수 있다면 도와줄 테니.” 이에 파타루가 머뭇거리다가, “음, 어떻게 알았죠? 말한 적이 없는데.” “넌 우리가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느냐? 너 같은 어린애가 광서성(廣西省)까지 와서 혼자 얼정거리다니, 무슨 일인가 있으니 그곳까지 왔겠지.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래도 아버지와 같이 왔다고 했잖습니까?” “흥! 정말 네 아버지와 함께 와서 아버지가 죽었다면, 진작 너 혼자라도 되돌아갈 일이지, 그곳에서 계속 있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래도....” 파타루의 말을 가로막으며 웅정향이, “그것보다 자네의 사연을 말해보게. 듣고 나서 도와줄만 하면 도와줄 테니.” 파타루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음, 원래 저는 흑수하(黑水河)를 따라 내려가다가 산몽(山夢), 화빈(華濱)의 중간쯤에 있는 측허사(測歔瀉)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부족과 강을 사이에 두고 적대적인 부족이 있었는데, 고무족(鼓舞族)이라는 부족입니다. 이들은 흠족(歆族)보다도 더 무섭고 악랄한 부족으로 주변의 부족을 약탈하여 생활합니다. 전사들 자체도 용맹하지만, 거기에도 독을 다루는데 뛰어난 악명 높은 주술사(呪術師)가 있어서 모두가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그들이 우리 부락에 쳐들어와 젊은 남자들은 거의 죽여 버리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아니, 우리가 듣기로는 몽족(夢族)은 월족(越族)을 제외하면 그 세력이 세손가락 안에 든다고 하던데, 다른 일족에게 부탁도 해보지 않았다는 말인가?” 몽정향의 말에 침울한 표정이 되어서, “저도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들 난색을 표하면서 거절하더군요. 원래 저희 몽족(夢族)은 강변을 따라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부족이라 싸움에 뛰어난 전사들은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고무족(鼓舞族)은 저희보다 훨씬 소수이지만 모두가 뛰어난 전사들이고, 악명 높은 주술사(呪術師)까지 있어서 아무도 싸우려하지 않았습니다.” “쯔쯧, 하여간에 자기 눈앞에 위험이 닥쳐야만 뭘 할 생각인가보구만. 그런 놈들이 그렇게 몇 십 년 세월이 흐른다면, 내 보기에 자네 부족들 모두는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 눈에 선하군.” 웅정향의 말에 파타루도 고개를 끄덕이며 우울한 목소리로, “저도 압니다. 우리 부족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그래서 도와줄 사람을 찾아서 길을 떠났는데 고무족(鼓舞族)에서 보낸 전사한테 저를 따라왔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저만 겨우 도망쳐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우리보고 고무족을 없애달라는 소린가? 아니, 우리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그럴 필요가 있나?” 음구의가 옆에서 듣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에 파타루가 울먹이는 어조로, “제가 바라는 것은 그들을 다 죽여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희 일족(一族)을 구해주고, 그 주술사(呪術師)만이라도 죽여주십시오. 그놈이 얼마나 악랄한 놈인지 말로 다 못합니다. 독술(毒術)을 시험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한테 온갖 짓을 다하다가, 죽으면 독물(毒物)의 먹이로 주는 놈입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무슨 짓이든지 할 테니.” 일행이 파타루의 말을 듣고 동정의 표정으로 바라볼 때,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파타루를 보다가 음구의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소사숙, 어떻게 할까요? 불쌍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뭐 도덕군자(道德君子)도 아니고 협객(俠客)도 아닌데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요?” 이에 선상조가 큰소리로 화를 내면서, “뭐라고? 자네는 그런 극악한 놈을 그냥 두고 보겠다는 것인가?” “아니 내 말은.....” 공손고가 끼어들어 음구의의 말을 가로막으며, “됐네. 오랜만에 선(宣)가 애송이가 옳은 소리를 하는구만. 우리가 모름지기 무공(武功)을 익혔으면, 모르면 몰라도 그런 놈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가 죽여야지. 나는 찬성이네.” 일행이 서로 편이 갈려서 선상조와 공손고는 찬성하고, 웅정향과 음구의는 반대한다. 잠시 생각하다가 단리유아가, “현재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한어(漢語)를 할 줄 아는 안내인이요. 파타루 만큼 능숙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당장에 찾기도 어려울 것이니 도와주기로 합시다. 협행(俠行)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그런 강자(强者)라면 찾아가 보지 않을 수 없으니.” 단리유아가 도와주겠다고 하자 파타루가 연신 고맙다고 고개 숙여 절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무심한 목소리로, “자네의 처지를 동정해서도 아니고, 단지 그자가 적수(敵手)가 될만하다고 생각해서일 뿐이네.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한 마디 한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당장의 급한 불을 끌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힘이 아닌 이상 그자가 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일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일단은 그자를 죽여서 일족(一族)이라도 무사하게 된다면 다시 생각해볼 생각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단리유아가 다시, “그보다 그 일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사인곡(蛇人谷)에 대해서 아는 대로 얘기해보게.” 잠시 단리유아를 보면서 머뭇거리다 마지못해서, “저도 듣기만 해서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식인족(食人族)인 지령족(地靈族)의 일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령족(地靈族)은 채주(菜州)에서 운남성(雲南省) 아래 일대에 흩어져 사는 소수부족이었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그 사람을 생포하여 신(神)에게 드리는 제물로 쓰기 위해 살해하고 그 고기를 나누어 먹는 식인(食人)의 관습을 지닌 부족이었다. 남만(南蠻) 일대의 세상과 격리된 오지(奧地)에 사는 소수부족 중에 가끔 그런 부족이 있었다. 파타루의 말에 일행 모두가 놀라서, “뭐, 뭐라고?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아니, 뭐 그런 놈들이 있어? 어떻게 사람의 인육(人肉)을 먹을 수 있지?” 파타루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일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육(人肉)을 먹는 것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리 드물지도 않습니다. 그런 전통을 지닌 부족만 해도 십여 개에 달하니까요? 그리고 한족(漢族)이라고 인육을 전혀 먹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에 선상조가 큰 소리로, “뭐라고? 이 자식이 너 말 다했냐? 우리가 너희 같은 오랑캐와 똑같은 줄 아느냐? 어떻게 너희 같은 놈들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말이면 다입니까? 전부터 삐뜩하면 우리 보고 오랑캐라고 하는데,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잘났소? 남의 조상(祖上)의 물건이나 훔치는 주제에.” 파타루의 말에 선상조가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나, “이 꼬맹이가 내가 언제 뭘 훔쳤다는 것이냐? 그냥 본 것뿐인데.” “뭐요? 꼬맹이? 그러는 댁은 욕심 많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수리 같구만.” 마주 일어나 선상조의 매부리코를 빗대어 놀린다. 서로 노려보고 싸우는 두 사람을 일행이 뜯어말린다. 잠시 후에 아직도 씨근덕거리는 파타루를 보면서 단리유아가 다시 묻는다. “그만하고 파타루, 아까 얘기나 계속해보게.” 잠시 숨을 고르며 선상조를 흘겨보다가, “사인곡(蛇人谷)은 채주(菜州)에서 북쪽으로 이틀정도 거리에 있는 초라산(草羅山)의 북쪽에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한 위치는 그들만이 알고 있어서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수천가지의 뱀들을 키우며 생활한다고 알려져 있고, 믿는 것도 큰 뱀신으로 자신들을 뱀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람을 잡으면 순결한 처녀는 큰 뱀에게 공양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먹거나 독사(毒蛇)들의 먹이로 준다고 하더군요.” 이에 선상조가, “제기랄, 하여간에 별 이상한 놈들도 다 있구만.... 어떻게 그런 놈들이 있지?” 비꼬는 듯한 선상조의 말에 파타루가 다시 흥분하여 소리치려고 할 때, 일행이 선상조를 꾸짖고, 파타루를 말린다. 잠시 후에 웅정향이 단리유아를 향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소사숙, 듣고 보니 보통 잔인한 놈들이 아닐 것 같은데 꼭 가셔야겠습니까?” 듣는 척도 안하고 파타루를 보면서 단리유아가, “그보다 파타루, 그곳에 무공이 뛰어난 고수(高手)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나?”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서.... 아, 한 가지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대구월(大瞿越)에서 열손가락에 든다던 삼강사루(三江死淚) 오정(吳程)이라는 고수가 찾아갔다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삼강사루(三江死淚) 오정(吳程)은 삼십여 년 전에 잠시 광서성(廣西省) 지역에서 활동했던 고수로, 남만(南蠻)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원(中原)의 무인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실망해서 다시는 중원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무공도 당시 광서성 지역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었다. 파타루의 말에 공손고가 놀라서 묻는다. “삼강사루(三江死淚) 오정(吳程)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 공손선배?” “흠, 나도 소문으로 듣기만 했었는데, 오래전에 광서성(廣西省)에서도 잠시 활동했었다고 알고 있네. 특이하게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를 쓰던 고수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흥미를 느꼈는지 단리유아가 다시, “어느 정도의 고수였습니까?” 잠시 멈칫거리다 내키지 않는 듯이, “글쎄, 나도 듣기만 해서..... 당시 광서성(廣西省)에서는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자였다고 알려져 있었네.” “그럼, 최소한 절정(絶頂)의 고수라는 것이군요. 그런 고수가 실종되었다면 가볼 가치가 충분하겠습니다.” 태도가 달라지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속으로 역시나 괴인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유독 무공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 오타나 내용상의 오류가 보인다면 댓글에 써주세요. 하고 싶은 말도 함께. 조연A, 판타지마스터K 님의 말씀처럼 약간 이상하군요. 그 부분은 빼버렸습니다. ###### 그리고 제 소설에서의 남만에 대한 이야기가 약간 이상하게 여겨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보통 독공의 고수들이 즐비한 곳으로 나오지요. 일단 제 생각은 남만의 북부지역은 독술과 법술이 결합된 형태로, 중부이하는 독공중심으로, 서부지역은 격투기와 외공 중심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 많은 분들이 댓글에 의견을 내주셨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친중이다 친미다 이런 것에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만, 여기에서 이런 내용이 들어간 것은 은연중에 자신들이 최고다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뭐, 특별히 여기에 대해 단리유아는 관심이 없지만 말입니다. 아마 제가 이 부분에 단리유아의 생각을 넣지 않아서 약간 오해의 여지가 있나봅니다. 그리고 인물 각자의 성격을 잘 표현하지 못해서 이런 혼동이 왔을 수도 있겠군요. 단리유아는 말할 필요없고, 공손고는 강호의 일반적인 구태의연하고 겉으로 협의를 외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선상조는 다혈질에 나서기 좋아하는 인물이고, 음구의는 신중한 편이고, 웅정향은 냉정하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했는데 제가 잘못 표현한 곳이 있나봅니다. 나중에 다시 검토해서 일관성을 더 주도록 하겠습니다. ***** 사실 제 글은 그리 재미있는 타입은 아닙니다. 특별히 로맨스나 긴박한 싸움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건이 많은 것도 아니지요. 하지만 제 원래 생각이 왜 세외를 토대로 쓰거나 무공중심으로 쓰는 사람은 없을까 하고 생각해서 쓴 것입니다. 천약란님 실망하지 마세요. 제가 이번에 놀다보니 시간이 남아돌아 이전부터 구상하고 조금씩 모아놓았던 것으로 쓰다보니 그런 것이지, 제 필력이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이 처음 써보는 것이라 실제 전업작가들이 본다면 많은 곳에서 어색한 곳이 보일 것입니다. 사인곡(蛇人谷) 사인곡(蛇人谷) 2 채주(菜州)에 도착하여 일행은 남겨두고 단리유아 혼자서 길을 떠나갔다. 밀림 속을 헤치며 전진한지 이틀 후, 초라산(草羅山)에 다다르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사인곡(蛇人谷)을 찾기 시작했는데 워낙 숲이 울창하고 안개가 항시 뒤덮고 있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사흘이 지난 정오 무렵에 십여 장(丈)이 넘는 나무꼭대기에 앉아서 포기할까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멀리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혹시나 하고 신법을 펼쳐 조용히 다가가니 온몸에 뱀 문신(文身)이 새겨져 있고 옷조차 사피(蛇皮)로 이루어진 것으로 하체만 대충가린 두 명의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뱀을 잡기위해 나온 사인곡(蛇人谷)의 인물들로 보였는데 커다란 망태기를 맨 모습으로, 뱀이 들어있는지 계속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기척을 죽이며 그들을 뒤따라 다니기를 두 시진(時辰) 가까이 했을 때, 안개에 감싸인 한 계곡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잠시 그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멈추어 서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았다. 일단 오늘밤은 쉬면서 생각해보다 다음날 아침에 들어가기로 하고 자리를 떠났다. 사인곡(蛇人谷)과 오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밑동이 일 장(丈) 가까이 되는 고목에 구멍을 뚫어서 하룻밤 쉴 곳을 마련했다. 그동안 일행과 함께 하느라 미처 무학(武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 찾아가는 곳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얻을 수 있을 지에는 상당히 회의적이었지만, 이색적인 무공을 상대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혹시나 자신과 겨룰만한 상대가 있을지도 몰랐다. 술법(術法)에 대해서 틈틈이 생각해보았는데, 역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악한 술법만 있는 것도 아닌데, 강호(江湖)에서 주로 마주치는 수준 낮은 사술(邪術)을 보고 천시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단순히 눈속임이 아닌 이상 철저한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대한 이해와 계산이 필요한 것이 상승(上乘)의 술법으로 익히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다. 일부의 사악한 술법을 제외한 일반적인 법술(法術)이나 도술(道術)은 오랜 시간의 명상과 수련이 필요한 것으로 보통사람들이 익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수련이 필요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막대한 정신력(精神力)이 요구됨으로 해서 꾸준히 정신을 단련해야만 했다. 주로 단식과 함께 지속적인 참선(參禪)으로 자아(自我)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으로 이러한 수련을 통해서 정신력을 늘리고, 그와 더불어 천지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 단리유아가 알고 있는 최고의 술법서(術法書)는 대뢰음사(大雷音寺)에 멸문된 흑찰미사(黑刹彌寺)의 금단백경(禁斷百經)중의 하나인 천단금서(天丹禁書)가 있었다. 사악하고 끔직한 술법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자신이 수련한다 해도 언제 완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복잡한 상승의 술법들이었다. 술법에 대해 검토하다 익히는 것은 포기하고 그 수련법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을 집중했다. 확실히 참선(參禪)을 계속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한 가지 화두(話頭)에 몰두한다면 자신이 느끼고 있는 벽을 깨뜨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앞으로는 운공은 줄이고 될수록 참선으로 대신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다음날 아침, 안개비가 산하(山下)를 감싸 선녀의 치맛자락에 둘러싸인 듯한 초라산(草羅山)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제의 장소를 찾아 걸어갔다. 사인곡(蛇人谷)도 운무(雲霧)에 가려 그 안을 볼 수가 없었다. 들어가는 계곡의 입구도 곧바른 것이 아닌지 오 장(丈) 앞에서 왼쪽으로 꺾인 모습이었다. 단리유아가 계곡으로 접근하자 망을 보는 파수꾼인지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어제 본 사람들과 비슷한 복장으로 단지 장창(長槍)과 비슷하지만 날이 두 갈래로 나뉜 창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떠들다 단리유아가 한어로 얘기하자, 놀라서 한사람은 호각(號角)을 불어 경고음을 내어 내부에 전하고 한 사람은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공격하는 그들을 간단히 마혈을 제압해 한 쪽에 세워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들어갔다. 단리유아가 들어감에 따라 수십 명의 사인곡(蛇人谷)의 인물들이 나와서 단리유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도저히 자신들이 막을 수 없는 고수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더 이상 접근해서 공격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사인곡(蛇人谷)의 내부에서는, 동굴 속 자신의 처소에서 사인곡의 곡주인 만사괴요(萬邪怪妖) 수파호(水破戶)가 부하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만사괴요 수파호는 이들 사인곡의 곡주이자, 모계(母系)전통사회인 이들 일족의 족장이기도 했다. 이미 육십의 나이에 가까워오지만 겉보기로는 삼십대의 모습으로 남만(南蠻)의 전형적인 갈색의 피부에 요염한 얼굴을 지닌 여인이었다. 똬리를 튼 거대한 흑린사(黑鱗蛇)를 의자삼아 깔고 앉아서 부하들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만사괴요의 머리위로 흑린사의 머리가 이리저리 돌아보며 혀를 내밀어 쉬쉭 소리내고 있었다. 한참 부하들의 설명을 듣다가 화가 나서, “아니, 어떤 놈이기에 나에게까지 보고한다는 말이냐? 너희 놈들은 대체 무엇하고 있었단 말이냐?” 만사괴요(萬邪怪妖)의 말과 함께 흑린사(黑鱗蛇)도 더욱 소리를 높이며 모두를 주시한다. 이에 모두가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한쪽의 머리가 하나도 없이 벗겨진 육십대의 뱀눈의 잔인해 보이는 대머리 노인이 앞으로 나서서 말한다. 젊었을 적에는 곡주의 한 남편이기도 했던 자로 곡내의 사내들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자였다. 이름은 곡주의 성을 따라서 수나람(水喇籃)이었다. “곡주님, 보통 놈이 아닙니다. 예전에 본곡을 공격했던 삼강사루(三江死淚) 오정(吳程)만큼이나 고수로 보였습니다. 아직 그 놈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만 전혀 저희들만의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오정(吳程)만큼이나 강하다고?” 그 옛날 삼강사루(三江死淚) 오정(吳程)이 침입했을 때, 전력의 삼분지일을 소모해야 가까스로 제압할 수 있었다. 오독대진(五毒大陣)을 펼쳐 진기가 소모되고 독사들이 뿜어대는 독기(毒氣)에 중독된 오정을 공격해 만사괴요(萬邪怪妖) 수파호(水破戶)가 제압했던 것이다. 만약 정상적인 대결이었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무공은 막상막하였다. “그것보다 더 강할 지도.....”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본곡에 와서 이딴 짓이란 말이냐? 누군지는 알아보았느냐?” “아, 아직..... 단지 중원인(中原人)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침입한 자가 중원인이라는 소리에 놀라, “중원인이라고?” “예, 그런데 저희는 한어(漢語)를 모르니 무슨 목적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본곡에 한어를 할 줄 아는 놈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 이에 오른쪽에서 죽장(竹杖)을 집고 구부정히 서 있던 나이를 알아볼 수 없는 노파(老婆)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며 말한다. 전대부터 곡주의 유모이자 호위로, 곡내의 대소사를 곡주대신에 처리해온 수내내(水乃乃)라는 노파였다. “저, 소곡주님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본래 오정(吳程)의 딸이었던 아이를 납치해서 소곡주로 삼았던 것인데, 여기에는 복잡한 치정(癡情)에 얽힌 사연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옛날 젊었을 적에 만사괴요(萬邪怪妖) 수파호(水破戶)와 오정(吳程)은 부부였는데, 오정은 이들의 전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들 일족은 철저한 모계(母系)사회로 여자가 가문의 가장이고 또 대부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들은 이들의 노예나 마찬가지였고, 특히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로 한 여자가 여러 남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결혼했던 오정도 사인곡(蛇人谷)에 와서야 이런 사실을 알고는 만사괴요에게 배신감과 증오심을 느끼고 환멸에 가득 차 떠나버렸다. 만사괴요 역시 오정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들에게는 이것이 전통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던 것이다. 몇 년간 만사괴요(萬邪怪妖) 수파호(水破戶)의 손길을 피해 중원(中原)으로 떠났던 오정(吳程)이 다시 돌아온 것은 이십여 년 전으로, 곧 다른 여인을 맞아서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허나 만사괴요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십여 년 동안 그를 찾고 있었다. 그가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만사괴요는 십여 년 전, 당시 아홉 살의 아이였던 오정의 딸은 납치하고 그 부인은 죽여 버렸다. 오정이 딸을 찾아오도록 해서 사로잡아 다시 함께할 생각이었지만, 오정은 결코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갖은 위협과 애원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중에는 오히려 증오심이 북받쳐 올라서 채양보음(採陽報陰)으로 원기(元氣)를 말려서 죽여 버렸다. 또 그 딸은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서 자신과 똑같은 길을 가게 만들어 복수할 생각이었다. 만사괴요(萬邪怪妖)가 부하의 말에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기다가, “그래? 하지만 그 아이는..... 좋아, 어쩔 수 없지. 그 애를 데려가서 무슨 연유인지 알아보게.” 오정(吳程)이 죽은 후에 자식도 없고 자신의 무공을 이어받을만한 재질을 가진 사람도 없어서 오정의 딸을 제자 겸 수양딸로 삼았다. 자질이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일견 자신의 행동에 후회가 치밀어 차마 죽이지 못하고 정(情)을 다해 무공을 가르치고 길러서 소곡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가 만사괴요(萬邪怪妖)에게 죽은 것을 알고 있던 오정의 딸 오아화(吳雅花)는, 한시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만사괴요의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모두다 죽여서 독사들의 밥으로 만들어버렸고, 성격도 변해서 모두가 두려워할 정도로 표독(慓毒)해 아무도 가까이 가려하지 않았다. 몇 달 전 오아화(吳雅花)는 만사괴요(萬邪怪妖)가 수련하는 도중에 수하들을 따돌리고 몰래 침입하여 암습을 했는데, 불행히도 곁에 있던 흑린사(黑鱗蛇)를 생각하지 못해서 암습을 알아차린 만사괴요에게 제압되었다. 만사괴요가 깔고 앉아있는 흑린사는 수백 년 된 영물(靈物)로 인간이 알아차리기 힘든 기척도 느낄 수가 있었고, 몸체 역시 도검이 통하지 않는 사 장(丈)이 넘는 거대한 뱀이었다. 본래 비단뱀의 일종인 큰 뱀이 우연히 다른 영물을 잡아먹어 더 커지고 영성(靈性)을 지니게 된 것으로 대대로 사인곡(蛇人谷)의 숭배대상이자 곡주의 수신호위이기도 했다. 만사괴요(萬邪怪妖)도 기른 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오아화(吳雅花)를, 혈도를 눌러 무공을 봉하여 수뢰(水牢)에 가두어 놓은 상태였다. 그놈의 정(情)이 무엇인지 늙어갈수록 과거 오정(吳程)과 함께했던 추억이 떠오르고 자신이 성급하게 그를 죽인 것이 후회가 되어, 차마 죽이진 못하고 수뢰에 감금한 채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다. 단리유아는 한참 막아서는 사인곡(蛇人谷)의 인물들을 한쪽으로 제압하면서 나아가고 있었는데, 점점 자신이 괜히 찾아온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다할 고수도 없어 지금까지는 일류(一流)의 경지에 달한 사람도 몇 되지 않았고, 단지 독사(毒蛇)들을 호각으로 조정해서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자신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는 방법이었다. 내뿜는 독사들의 독기(毒氣)에도 중독되지 않는데다가 접근하는 뱀들은 검을 휘둘러 공격하여 없애버리니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이런 상황일 때, 문득 곡내에서 몇 명의 사람이 달려왔다. 단리유아가 보니 노파와 대머리의 노인, 그리고 그 사이에 노인에게 오른팔이 잡힌 한 여인이 있었다. 겨우 한조각의 천으로 가슴과 하체의 치부를 가린 여인으로, 머리는 사방에 흐트러져 있고 얼굴은 더러운 때로 뒤덮여 알아볼 수도 없었다. 늙은 노파인 수내내(水乃乃)가 여인을 향해서 뭐라고 말하자, 여인이 고개를 들어 단리유아를 바라본다. 초라하고 더럽기 그지없는 몰골이지만 눈은 생생이 살아있어 날카로운 광채를 보이고 있었다. 다시 수내내가 뭐라고 하자 여인이 냉소(冷笑)를 날리고 단리유아를 향해 더듬거리며 기운이 없는지 작은 소리로 말한다. “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무슨 일로 본곡에 왔습니까?” “한어(漢語)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오. 나는 단리유아라하는 사람인데, 그대들의 무공에 대해 듣고 비무를 해보고자 왔소.” 단리유아의 무심한 목소리에 잠깐 놀란 기색이었다가 오아화(吳雅花)는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을 잘만 이용한다면 자신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오면서 보니 주위는 뱀들의 시체로 시산을 이루고 있었고, 수하들도 벌써 삼분의 일은 제압된 것을 보니 무공이 아주 고강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몇 달 동안 노력하여 막힌 혈도를 뚫고 내력(內力)을 회복하는 중이었는데, 이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온 것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요?” 약간 이상해서 물어보았다. 이 먼 곳까지 중원인(中原人)이 비무를 하기 왔다니 이 사람이 제 정신인지, 혹시 사인곡(蛇人谷)의 지보인 피독주(避毒珠)를 노리고 온 것이 아닌지 해서 물었다. “그렇소. 단지 이곳에 곡주가 있다면 무공을 비교해 보고 싶소.” 제 정신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괴상한 사람이었지만, 어차피 자신이 복수하는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는 고개를 돌려 수내내(水乃乃)에게, “이 사람은 단리유아라고 하는데 자기 말로는 피독주(避毒珠)를 노리고 찾아왔다는군요. 만약 일각 이내에 피독주를 내놓지 않으면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군요.” 수나람(水喇籃)이 화가 나 눈을 치켜 올리며 오아화(吳雅花)의 목을 움켜지며 말했다. “뭣이라? 그게 정말이냐? 혹시 네 년이 딴 생각으로 말을 바꾼 것은 아니겠지?” “으, 윽. 그르륵.” 수나람(水喇籃)의 손을 붙잡으며 오아화가 숨이 막혀 할 때, 옆의 수내내(水乃乃)가 죽장으로 수나람의 옆구리를 찌르며, “뭐하는 것인가? 소곡주를 죽일 셈인가? 죄를 지어 수뇌(水牢)에 갇혀있지만 아직까지는 소곡주임을 잊지 말게.” “흥, 소곡주는 무슨.... 내가 곡주시라면 당장에 쳐 죽여 버릴 텐데.” 못마땅한 기색으로 마지못해 손을 풀고 물러난다. 오아화(吳雅花)가 목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럽게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수내내(水乃乃)가 냉랭한 목소리로, “소곡주, 정말로 저자가 피독주(避毒珠)를 노리고 침입한 것이 확실하오?” “흥, 그렇다면 수(水)모모는 저 중원인이 무엇하러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설마 할 일 없이 유람 차 왔다고는 여기지 않겠지요? 본곡에 뭐가 볼 것이 있어요? 오직 피독주만 저런 중원인이 여기까지 올 가치가 있지.” “흠. 그것은 그렇지만.... 그러면 지금까지 본곡의 제자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다가, 이제와 피독주(避毒珠)를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이요?” 차가운 목소리로 꼼꼼하게 따지고 든다. 이에 오아화가, “그동안은 상대도 되지 않는 하수들이고 일부러, 피를 묻히기도 싫어서 그랬다는군요.” 오아화(吳雅花)의 말에도 의심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지만, 수내내(水乃乃)도 무단히 곡내로 들어와 사랑하는 자식 같은 뱀들을 죽인 놈을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수나람(水喇籃)을 바라보며, “자네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지휘하여 저놈을 막고 있게. 필요하다면 오독대진(五毒大陣)을 쳐도 좋네. 그동안 나는 소곡주를 데리고 가서 곡주에게 보고할 테니.” 오독대진(五毒大陣)은 청린비사(靑鱗飛蛇), 금선사(金線蛇), 칠채홍사(七彩虹蛇), 음양쌍두사(陰陽雙頭蛇), 흑망사(黑網蛇)가 함께 합공하는 것이었다. 하나하나가 도검불침이고 뱀중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것들로,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중독(中毒)이 되어 죽을 정도의 극독을 지닌 독사들이었다. 이들 다섯 독사가 나머지 독사들을 거느리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청린비사(靑鱗飛蛇)는 하늘을 날면서 공격하고 흑망사(黑網蛇)은 삼 장(丈)의 거구로 직접 몸통으로 공격했다. 다른 뱀들도 크기는 석 자도 되지 않지만, 순간적인 속도가 너무 재빨라서 절정(絶頂)의 고수라도 막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옛날 오정(吳程)이 버티지 못한 것도 이 오독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독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독대진(五毒大陣)을 펼쳐도 좋다는 소리에 잔인하게 눈웃음 지으며, “흐흐흐, 알겠소. 내 저놈을 갈기갈기 찢어서 자식들의 원한을 갚아주겠소.” “보통 놈이 아니니 섣불리 달려들지는 말고, 내가 곡주께 말씀드릴 테니 곡주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게.” 수내내(水乃乃)가 말하고 자리를 떠난 후, 수나람(水喇籃)이 수하들에게 명령하여 오독대진(五毒大陣)을 펼치게 한다. 단리유아가 한 쪽에서 지켜보니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오아화(吳雅花)에게 분명히 비무하러 왔다고 했는데, 이들의 기색을 보니 말이 와전(訛傳)됐는지 아니면 고의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공격하려는 기색이 다분했던 것이다. 단리유아가 한숨을 쉬면서 떠나려고 했을 때, “삐익, 삑” “삘리리. 삘리....” 온갖 호각(號角) 소리와 적성(笛聲)이 들리며 자신 주위로 아까 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독사들이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의 이십 장(丈) 반경이내가 독사들로 뒤덮여 물샐 틈도 없어보였고 다섯 마리의 특이한 뱀들이 각각 중간 중간에 자리 잡고 앉아서 마치 부하들을 지휘하는 장군처럼 나머지 뱀들을 몰아쳐 단리유아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독기(毒氣)가 사방으로 넘쳐 숨쉬기도 곤란할 정도였고, 비린내 또한 지독했다. 사인곡(蛇人谷)의 인물들은 오십여 장(丈) 밖으로 물러나 호각과 각적(角笛)을 불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물러나기도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단리유아는 어께에서 적운도(赤雲刀)를 빼들었다. [설정 & 참조] [1] 흑찰미사(黑刹彌寺) : 기원을 전후로 서장(西藏)을 대뢰음사(大雷音寺)와 양분했던 술법(術法)의 본산. 유마밀전(幽魔密殿)의 일부 법술과 서장 전래의 술법이 합쳐져 독특한 술법을 창안하게 되었음. 유마밀전과 더불어 술법의 양대본산. 대뢰음사와의 싸움에서 패해서 사라졌음. 최고술법은 금단백경(禁斷百經)으로 그중에서도 백미(白眉)인 천단금서(天丹禁書)는 아무도 완벽히 익힌 적이 없음. ****** 오늘은 좀 짧네요. 잘못된 곳이 보이면 바로바로 지적해 주세요. 하실 말씀도 마구마구.... 오아화가 한어를 할 수 있다는 데에 의문을 가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 회에 그녀의 어머니가 한족이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는데, 그 부분은 다음에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현경의 난관을 돌파할 한 가지 수단이 보였군요. 앞으로도 서너 번의 계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한순간에 대오각성 한다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 편이라 2부 이전에는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감정 문제도 앞으로 계기가 필요하지요. 참, 일행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원래는 세외를 도는 중에 하나하나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고민이군요. 음, 전에 고대천축의 삼대문파를 어떻게 정했는지 물어보았는데 아무도 답을 주시지 않았네요. 책을 낸다면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정답은 유마밀전, 바라만겁문, 태양마찰이었습니다. 사인곡(蛇人谷) 사인곡(蛇人谷) 3 몰려오는 뱀들의 모습을 보면서 단리유아는 호흡을 멈추었다. 이전에는 그리 독기(毒氣)가 심한 편이 아니어서 견딜 수 있었는데, 다섯 마리의 사왕(蛇王)이 내뿜는 독기는 너무 독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오랜 시간을 독기를 마시다보면 중독(中毒)될지도 몰랐다. 다섯 마리 사왕(蛇王)의 명령에 따라 수만 마리의 뱀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장내는 시끄러운 호각성(號角聲)과 적성(笛聲), 뱀들의 쉬쉬거리는 소리로 정신이 없을 정도였고, 독기가 안개처럼 깔려 주변의 동식물을 죽이고 대지도 검게 오염시켰다. 뱀들이 일 장(丈) 이내로 접근하자 도(刀)를 휘둘러, “크크키히힛....” 번쩍이는 도광(刀光)과 함께 귀청을 찢는 듯한 소성(騷聲)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동시에 폭풍 같은 도기(刀氣)가 일어나 사방을 도영(刀影)으로 뒤덮었다.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의 제 이절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로 연환도의 일종인데, 단리유아 자신도 일단 펼치면 끝날 때까지 초식을 멈출 수가 없었다. 본래는 도강(刀剛)으로 펼치는 것이었는데, 오대사왕(五大蛇王)은 모르지만 나머지 독사들을 죽이는 데는 도기만으로도 충분했다. “크크키히힛” “퍼, 버, 퍼벅” 도영(刀影)이 반경 오 장(丈) 이내를 뒤덮고, 끔직한 소성과 함께 뱀들이 분시(分屍)되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뱀들이 조각나 땅에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호흡이 지나 초식이 끝났을 때, 장내의 모습은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난 고깃덩이들이 사방으로 산을 이루고 쌓여있었다. 조각난 뱀들의 몸에서 나오는 피와 흩어진 조각들로 십 장 이내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을 보여주었다. 멀찍이 떨어져 호각(號角)과 각적(角笛)을 불던 사인곡(蛇人谷)의 인물들도 대부분 끔찍한 소성에 내상을 입었는지 창백한 안색으로 더 이상 피리를 불지 못하고 있었다. 절정(絶頂)에 이른 수나람(水喇籃) 정도만 제자리에 서있었지만 그 역시도 창백한 안색이었다. “이, 이런 도법(刀法)이 있다니?” 도성(刀聲)에 충격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단리유아의 도법(刀法)에 더 놀랐던 것이다. 세상에 이러한 도법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초에 수천마리의 뱀을 조각내 버리다니, 만일 자신이 저 안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하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려오고 오한이 전신에 치밀어 올랐다. 다가오며 뱀들을 지휘하던 다섯 마리 사왕(蛇王)들도 자신들을 제어하던 뿔피리의 소리가 멈추자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또 아무리 사왕들이 대단한 독물이라지만, 본능적으로 단리유아의 무서움을 느꼈는지 쉬쉭 거리며 뒤로 물러나려고 하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로 돌아 떠나가려할 때, 다시 호각(號角)과 각적(角笛)소리가 들리며 이번에는 오대사왕(五大蛇王)이 선두에 서서 공격해왔다. 수나람(水喇籃)이 단리유아가 떠나려는 모습을 보고 수하들을 지휘해서 피리를 다시 불게 했던 것이다. 단리유아가 돌아서 떠나자 상대도 이번에 무리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또 자신들에게 이런 피해를 입혔는데, 순순히 그냥 보내줄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번에는 다섯 마리 사왕(蛇王)이 선두에 서서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 독사들은 빈틈을 노리며 차례차례 덮치게 만들었다. 덮쳐오는 뱀들을 보면서 단리유아는 괜히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다.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 세상에 뱀들과 싸우려고 이곳까지 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것을 느꼈을 텐데, 어째서 물러서지 않고 다시 공격을 하는지..... 말이라도 통한다면 어떻게 해볼 텐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분명 아까 그 여인에게 비무하고자 왔다고 했는데,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는 듯한 공격이라니..... 그러나 세상에 어느 누가 손해를 보고는 그냥 눈감고 넘기겠는가? 설혹 단순히 비무하고자 온 것이라 알았다 해도 이미 이들에게는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이들에게 뱀은 단순한 것이 아닌 마치 자식과 같았다. 초라산(草羅山)을 돌며 뱀들을 붙잡거나 아니면 멀리 안남산맥(安南山脈)의 대습지(大濕地)까지 가서 잡아와 기른 것으로, 다시 독성(毒性)이 강한 것끼리 교배시켜 보다 더 낳은 독사를 만드는데 일생을 바친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이일이 대대로 내려오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信仰)이자, 죽을 때에도 뱀에게 몸을 바쳐서 행하는 일이었다. 죽은 다음에 뱀에게 그 시신을 공양하면 자신들의 영혼(靈魂)이 뱀신에게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일족이었다. 사람이 죽는 것보다 뱀들이 죽는 것을 더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 단리유아의 행동은 어떤 말로도 용납할 수 없는 극악한 짓이었다. 성인군자(聖人君子)가 아닌 이상에는.... 하물며 이들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을 타고날 때부터 보고 겪은 사람들인데.... 청린비사(靑鱗飛蛇)가 하늘을 날면서 공격하고 흑망사(黑網蛇)는 그 꼬리를 휘둘러 공격한다. 다른 세 사왕(蛇王)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가끔 독을 뱉어 단리유아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휘익, 휙, 쉬익, 쿵” 처음에는 피하는 데에만 주력하던 단리유아도 이들 오대사왕(五大蛇王)의 공격을 단순히 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마치 다섯 명의 고수(高手)가 합공하듯이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니, 오랜 세월 동안 훈련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주위를 떠도는 독기(毒氣)가 너무 독해서 호흡을 멈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내력의 운용에 지장을 주어서 만약 자신의 내공이 특수하지 않았다면 이미 중독되어 쓰러졌을 것임을 느꼈다. 부딪히는 뱀들의 몸 또한 도검불침(刀劍不侵)으로 전혀 흠집조차 낼 수 없었고, 속도가 빨라서 제대로 적중시킬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느끼고 운신하는데 가장 지장을 주는, 하늘에서 공격하는 청린비사(靑鱗飛蛇)를 없애기로 했다. 청린비사가 다시 공격하기 위해 섬전과 같이 날아올 때,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펼쳐 왼쪽으로 움직이며, “팟” “크흐흐악” 도강(刀剛)으로 적운도(赤雲刀)를 감싸서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의 제 일절(一絶)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쳤다. 시뻘건 섬광(閃光)이 번뜩이며 하늘에서 단리유아의 머리를 노리며 달려들던 청린비사(靑鱗飛蛇)를 덮쳤다. 청린비사가 피하려는 순간에 벌써 한줄기 도광(刀光)이 몸통을 가르며 지나갔다. 둘로 갈라져 떨어지는 청린비사를 보며 물러서는 순간, “꽝” 흑망사(黑網蛇)의 꼬리가 단리유아의 옆구리를 쳐서 단리유아를 십여 장(丈)이나 날려버렸다. 단리유아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는데, 뱀들은 시력(視力)이나 청각(聽覺)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바닥을 울리는 진동(震動)과 혀로 느끼는 후각(嗅覺)으로 상대를 감지하는데, 사람과 싸우듯이 보법을 펼쳤으니 별로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겨우 접근하는 꼬리를 느끼고, 호신강기(護身剛氣)를 펼쳤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비록 허리가 부러져 즉사하는 것은 면했지만, 옆구리의 갈비뼈는 모두가 부러졌고 내상도 심각한 상태였다. 쓰러진 단리유아를 온갖 뱀들이 물어뜯고 있을 때, 그 통증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우욱! 울컥” 부러진 갈비뼈가 내부의 장기(臟器)를 건드렸는지 몇 번이나 피를 뱉어내도 계속해서 피가 넘어왔다. 넘어오는 피를 삼키고,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숨쉬기도 곤란할 지경이었고, 뱀들의 독기(毒氣)가 치밀어 올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전신이 중독(中毒)되어 부어오르고, 내력(內力)도 곳곳에서 끊어져 원활한 운용을 할 수 없었다. 하체에서는 계속해서 독사들이 물어뜯어 나중에는 거의 감각을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상(內傷)과 독상(毒傷)에도 불구하고, 우선 내력(內力)을 돌려 운공해서 독기(毒氣)에 저항했다. 자신의 내공이 독기를 흡수하여 원기(元氣)로 바꿀 수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이렇게 많은 다양한 독들이 체내에 유입되었을 때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독기의 진행을 늦추어 흡수하거나 체외로 밀어내야만 했다. 특히 심장과 뇌 쪽으로 퍼지는 독기를 막아서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구단전(九丹田)중에서 상단의 백회혈(百會穴)에서 인당(印堂), 화개(華蓋), 단중(膻中)의 사대단전으로 내력을 집중해서 머리와 심장으로 퍼지는 독기를 차단했다. 이제 사용할 수 있는 내력은 육할에도 미치지 못한 삼갑자 정도에 불과했다. 이때 한쪽에서 오대사왕(五大蛇王)과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 있던 수나람(水喇籃)이 도강(刀剛)을 보고 놀라서, “도, 도강?” 깜짝 놀라서 오대사왕을 물러나려고 하였을 때는 이미 늦어 청린비사(靑鱗飛蛇)가 둘로 갈라져 땅에 떨어졌고, 이어서 흑망사(黑網蛇)의 꼬리에 맞아서 단리유아가 한쪽으로 튕겨나가고 있었다. 도강(刀剛)과 도성(刀聲)에 다시 충격 받아 수하들이 비틀거리고 있을 때, 수나람(水喇籃)이 이를 부러져라 바드득 갈면서, “으드득, 뭣들 하느냐? 놈이 지금 쓰러졌으니 이제 전과 같이 도강(刀剛)을 쓰기도 힘들 것이다. 어서 피리를 불어서 공격 명령을 내리란 말이다. 이 멍텅구리 같은 자식들아! 네놈들은 저것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수하들이 겨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피리를 불 때, “이 새끼들아, 더 힘껏 불란 말이다. 우리 자식 같은 뱀들이 저렇게 죽고, 더구나 청린비사(靑鱗飛蛇)까지 죽었는데 가만히 있을 작정이냐? 우리가 오늘 다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저 놈을 살려둔다면 안될 것이다. 만약 저놈이 살아난다면 어떻게 우리가 뱀신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고래고래 악을 써서 수하들을 다그친다. 수하들도 입술을 깨물고 죽을힘을 다해서 피리를 부니 이전보다도 훨씬 소리가 커졌다. 단리유아가 가까스로 응급처치를 하고 일어났을 때, 다시 청린비사(靑鱗飛蛇)를 제외한 네 마리의 사왕(蛇王)이 공격해왔다. 계속해서 진기를 모아서 독(毒)을 몰아내며, 우선 공격을 막는데 주력했다. 보법은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가급적 제자리에 서서 도(刀)를 휘둘러 접근하는 공격을 막았다. 독기를 몰아내는데 내력을 소모하니 제대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일각(一刻)정도가 흐르자 어느 정도 위험한 상황은 넘길 수 있었다. 아직도 독기(毒氣)가 들끓었지만,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수나람(水喇籃)이 공격명령을 내려 막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곡내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장내에 도착했다. 만사괴요(萬邪怪妖)와 수내내(水乃乃), 오아화(吳雅花) 등이었다. 만사괴요가 장내를 둘러보다가 수나람에게, “이게 어찌된 일이냐? 청린비사(靑鱗飛蛇)까지 죽다니?” “곡주님, 저놈이 너무 강해서 도강(刀剛)에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뭐, 도, 도강이라고?” 놀라는 만사괴요와 더불어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만사괴요(萬邪怪妖) 역시 겨우 최근에야 화경(化境)의 경지에 올라서 강기(剛氣)를 쓸 수 있을 정도였는데, 젊디젊은 약관(弱冠)의 청년이 벌써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는 데에 대해서 놀라움과 시기심, 두려움이 범벅된 감정을 느꼈다. 자신도 삼강사루(三江死淚) 오정(吳程)의 원기를 빨아들인 후에 화경에 이르고자 계속해서 수련했는데, 작년에서야 겨우 일부분이나마 자신의 내력(內力)과 동화를 이뤄 화경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놀라는 사람들을 보다가 만사괴요(萬邪怪妖)를 향해 수나람(水喇籃)이 걱정마라는 듯이, “하지만 저놈도 흑망사(黑網蛇)의 꼬리에 맞고,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 중독(中毒)되었으니 결코 오래 버티진 못할 것입니다.” 수내내(水乃乃)가 수나람을 보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이보게, 수곡(守谷)장로. 어째서 곡주님께서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공격했다는 말인가?” “그러면 저놈이 떠나도록 그냥 보고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오? 이미 우리에게 입힌 손해가 얼마인데?” “내 말은 그것이 아니라.....” 만사괴요(萬邪怪妖)가 손을 들어 말리며, “됐다. 그동안의 경과가 어찌되었든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우선은 앞으로의 일이나 생각하자.” “곡주님, 이미 중독되고, 상처도 심할 테니 얼마 안 있어 저놈도 끝장일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다 잠시 생각하다가 오아화(吳雅花)를 보면서, “아화(雅花)야, 저놈이 본곡에 피독주(避毒珠)를 노리고 왔다는 것이 정말이냐? 수곡(守谷)장로 말로는 저놈이 그냥 떠나려고 했다는데?” “맞습니다, 곡주. 저 계집이 거짓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오아화(吳雅花)가 이미 거짓이 들어났다는 것을 알고는 오히려 코웃음치며, “흥, 어차피 무슨 상관이에요? 병신 같은 놈, 좀 강해보여서 싸움을 붙였는데 저 모양이라니.” “아니 저 계집이....” 사방에서 오아화(吳雅花)를 보며 욕을 하고, 만사괴요(萬邪怪妖)에게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죽여 버리자고 소리친다. 만사괴요(萬邪怪妖)가 잠시 오아화(吳雅花)의 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네가 나를 증오하는 것을 안다만.... 나는 너를 정말로 친딸처럼 여겨왔다. 휴, 나도 옛일이....” 한숨쉬며 회한(悔恨)에 가득 차 말하는 만사괴요를 보면서 오아화가 화가 나 소리를 지르며, “닥쳐요. 엎지른 물을 다시주어 담을 수 없듯이,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가요? 흥, 나는 당신을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애야, 미안하구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한대도 할 말이 없다. 이번 일이 끝나면 너를 풀어줄 테니 너도 네 갈 길로 가려무나. 나도 더 이상 너를 보기 힘들구나. 너도 그럴 테니.....” “흥! 아주 아주 자비(慈悲)로우시군요.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것을 잊고 당신을 용서할 것 같은 가요?” 비꼬듯이 말하는 오아화(吳雅花)를 보면서, 만사괴요(萬邪怪妖)가 한숨과 함께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이들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싸우는 장내의 상황은 다시 일변했다. 어느 정도 독기(毒氣)를 제어하고 내력을 가다듬은 단리유아가 다시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먼저 접근하는 금선사(金線蛇), 칠채홍사(七彩虹蛇), 음양쌍두사(陰陽雙頭蛇)를 향해서 왼손으로 뇌전지(雷電指)를 연이어 날려서 물러서게 한 다음, 가장 멀리 뒤쪽에서 호시탐탐 노리는 흑망사(黑網蛇)를 향해서 궁신탄영(弓身彈影)을 펼쳤다. 순식간에 흑망사의 머리 앞까지 접근한 다음,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단지 입을 벌리고 삼키려하는 흑망사를 향해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쳤다. “팟!” “크히키아악” 도성(刀聲)과 함께 한줄기 도강(刀剛)이 일어나 흑망사(黑網蛇)의 입천장을 뚫고 하늘로 솟구친다. 머리가 폭죽처럼 터져 사방으로 선혈과 조각이 비산할 때, 단리유아는 쓰러지는 흑망사의 상체를 피해 한쪽으로 물러서며 다른 사왕(蛇王)들의 공격을 막았다. “타, 탁, 탕” 도검불침인 몸체 때문에 도법(刀法) 자체의 힘만으로는 크게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단리유아도 밖에서 자신을 노리는 흑망사(黑網蛇)가 가장 문제가 되자 무리해서라도 죽여야만 했다. 순간의 내력을 모아서 궁신탄영(弓身彈影)을 펼치고, 도강(刀剛)을 둘러싸 쾌도인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쳤던 것이다. 정상의 몸 상태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내력을 육할 이상 끌어올리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연이은 내력의 소모는 다시 독이 발작할 여지를 주었다. ****** 오늘은 여기까지 올립니다. 급하게 쓰다보니 어딘가 이상한 곳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오타나 이상한 곳이 보이면 댓글에 써주십시오. ###### 타뮤리온 님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 역시 궁금해 하실 것 같군요. 이것은 제 1부에 해당합니다. 말 그대로 전검의 행로를 그린 것으로 주인공의 무공완성과 세외팔황을 돌면서의 비무와 전투가 그 주요 줄거리입니다. 만약 다른 연정, 패권, 음모 같은 것을 바라신다면 2 부를 기다려 주십시오. 그때는 중원이 무대가 되어서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나올 것입니다. 십왕전의 일은 단리유아에게 내공만으로는 현경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고, 앞으로 2 부에서 필요한 것이어서 넣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언급한 인물들이나 사건 중에서 앞으로 아무 관련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괜히 이야기를 만들려고 집어넣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오아화나 전의 서문하령 같은 경우, 2 부에서 등장할 인물들 중의 하나로 그 중에서도 서문하령(사실 이것은 말하면 안 되지만....)은 큰 축이 될 것입니다. 문파가 너무 많아서 복잡하다는 것은, 제가 본래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무공의 유파와 문파의 역사와 체계, 세외무공에 대한 전반적인 체계를 한번 세워보고 싶어서였기 때문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때저때 대충대충 나오거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같은 몇 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문파들 간의 상호관계를 그려서 무협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여자들이 등장해서 판을 치는 이야기에 신물이 나서이기도 했습니다. 처음보고 한눈에 반해서 그날저녁에 바로 첫날밤을 보낸다거나, 이리저리 여자들에게 이끌려 다니는 것에 정말 울화가 치민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지요. 본전 생각나게 한다는.... 제가 무협을 보면 스토리와 구성을 주로 보는데, 이런 경우는 쓸데없는 말장난이나 섹스로 질질끌다가 아무 내용없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마 일반적인 무협을 기대하신 분들께서는 낯설거나 복잡하게 여겨지실 것입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사연과 암시가 숨어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31편 남궁세가까지는 전반적인 무공, 강호, 주인공의 신세내력에 대한 설정이어서 지루하게 느끼셨던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반드시 필요해서 넣었으니 지루하게 여기지 마시고 꼼꼼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사인곡(蛇人谷) 사인곡(蛇人谷) 4 일순간 도광(刀光)이 번쩍이며 단리유아가 흑망사(黑網蛇)를 죽였을 때, 지켜보던 사인곡(蛇人谷)의 인물들도 모두가 놀랐다. 곧 쓰러질 것 같았는데, 도강(刀剛)을 일으켜 일순간에 흑망사를 없애버렸던 것이다. 또 도법(刀法)을 펼칠 때마다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모두가 귀청을 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저 개자식이! 야 이놈들아 뭐하는 것이냐 더욱 소리를 높여!” 수나람(水喇籃)이 다시 한번 도성(刀聲)에 충격을 받은 수하들을 다그친다. 이미 반수이상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인물들도 내상이 심한지 비틀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만사괴요(萬邪怪妖)가, “그만둬!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력(氣力)이 탈진한데다 내상이 심해 조금 더 무리한다면 회복하기도 어려울 것이네. 차라리 내가 가서 저놈을 없애버리는 편이 낫겠어.” “안됩니다. 곡주님. 만약 저놈이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할 결심이라면 곡주님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내내(水乃乃)가 옆에서 말린다. 수나람(水喇籃)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면서, “맞습니다. 지금 저놈은 겨우 버티고 있는데, 뭐 하러 무리하게 나서시겠다는 겁니까? 혹시라도 옥체에 상처라도 난다면 큰일입니다.” “흥, 겁쟁이들 같으니라구. 그러면 너희들이 잘난 곡주대신 나서 보시지.” 오아화(吳雅花)가 암습할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옆에서 부추긴다. 수나람(水喇籃)이 이 말에 오아화 옆으로 다가가며, “뭣이? 이 계집이 보자보자 하니까, 네년이 아직도 소곡주인 줄 착각하나보지?” “그만하게. 아직은 본곡에서 나가지 않았으니 내 딸인 셈이니. 그리고 아화(雅花), 너도 쓸데없는 소리마라.” “흥!” 코웃음 치는 오아화(吳雅花)의 모습에 모두가 눈썹을 찌푸리며 만사괴요(萬邪怪妖)를 향해서 뭐라 말하려고 할 때, 만사괴요가 자신을 따라 나온 주변의 십여 인에게, “그보다 자네들이 대신 사왕(蛇王)들을 조종하게. 이미 수하들은 더 버티기 힘들 것으로 보이니.” “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내내(水乃乃)가 말하며 기력이 탈진한 수하들을 물리고, 곡주를 따라온 고수들을 직접 나서게 한다. 모두가 사인곡(蛇人谷)의 주요인물 들로 곡주 외에는 무공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었다. 십여 명의 고수가 나서서 대신 각적(角笛)을 부니 다시 소리가 높아지고, 사왕(蛇王)들의 공격도 훨씬 민첩해지고 공격하는 부위와 방법도 다양해졌다. 이 모습을 바라보다가 만사괴요(萬邪怪妖)가 고개를 저으며, “그런데, 정말 끔찍한 도법(刀法)이로군. 도대체 무슨 도법인지....” “곡주님 말씀대로 너무도 무서운 도법입니다. 저놈이 상처를 입기 전에, 단 일초에 십 장(丈) 이내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버리더군요.” 수나람(水喇籃)의 말에 냉정한 수내내(水乃乃)도 놀라서, “이, 일초에 십 장(丈) 이내 모두를?” “맞소이다. 만약 저 놈이 흑망사(黑網蛇)에게 부상을 당하지 않고 중독(中毒)되지 않았다면, 오대사왕(五大蛇王)이 아무리 대단해도 결코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오. 또 도법을 펼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소리에 수하들 대부분이 내상을 입었소. 거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도 저러니, 만약 지척에서 도성(刀聲)을 들었다면 모두가 내상으로 바로 쓰러졌을 것이오. 나조차도 멈칫거리게 할 정도이니 수하들은 말할 필요가 없을 거요.” “세상에 저런 도법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놀라서 수내내(水乃乃)가 고개를 젓을 때, 만사괴요(萬邪怪妖) 역시 고개를 끄덕이다 오아화(吳雅花)를 보면서, “그래. 나조차 들은 기억이 없군. 아화(雅花)야, 저 사람이 누군 줄 아느냐?” “저놈 말로는 단리유아라 하데요. 호호호, 뭐 비무하러 이곳까지 왔다나? 그동안 꼴 보기 싫은 뱀들만 계속 보고 있으려니 골치가 지근거렸는데, 저 미친놈이 이렇게 많이 죽여 버렸으니 훨씬 낫군요. 깔깔깔” 통쾌하다는 듯이 웃으며 만사괴요를 비웃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에 수나람이 화를 내며 달려들어 오아화의 목을 움켜쥐고 흔들며, “이 계집이! 누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네 년이 사실대로 말했다면 결코 이렇게까지 피해가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만! 내버려두게. 오늘이 지나면 더 볼 일도 없을 테니.” 만사괴요가 말리고 나서 잠시 생각해보다가 수내내를 보면서, “단리유아라고? 자네는 들어본 적이 없는가?” “글쎄요. 노신도 세상에 나간 지 하도 오래되어서.... 게다가 중원(中原)의 사정을 알기는 어려우니, 저도 누구인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 곡주님. 이번에 남만(南蠻)으로 넘어온 중원인(中原人)들이 몇 있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달 정도 전에 흠족(歆族)과 싸워서 주술사(呪術師)와 전사들을 죽였다는 소리를 얼마 전에 채주(菜州)가 갔다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나람의 말에 만사괴요가 놀라서, “흠족(歆族)의 주술사(呪術師)라면? 그 술법(術法)에 미쳐서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는 인간 말인가?” “예, 최후로 자신을 희생하는 술법까지 걸었지만, 결국에는 중원인(中原人)들에게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문을 들어보니, 근래 그 중원놈들 때문에 남만(南蠻) 전역의 고수들이 들고 일어나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이들이 서로 단리유아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온몸이 독기(毒氣)로 퉁퉁 붓고 머리카락과 옷자락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단리유아는 도법자체로만 사왕(蛇王)들의 공격을 막으며 내력을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반신은 거의 독기에 마비되어서, 내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계속해서 신형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게다가 옆구리의 상처에서 움직일 때마다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찌르는지, 그 통증이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날뛰는 독기를 어느 정도 억눌렀을 때, 사인곡(蛇人谷)에서 다시 고수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미 사인곡의 최고고수들이 장내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버티면서 사왕들을 처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설혹 사왕들을 죽인다 할지라도 내상(內傷)과 독상(毒傷)은 더 악화될 것이고 내력(內力) 또한 바닥을 드러낼 것이니, 별 대응도 못하고 그들에게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천상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해야만 했다. 우선 독기(毒氣)라도 어떻게 한다면, 그동안의 실전경험으로 버틸 자신은 있었다. 내력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실전에서 자신과 맞상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했고, 그동안에 내력이 조금이라도 회복된다면 저들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자신의 경솔한 판단이 후회가 됐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파타루(芭朶婁)나 말이 통할 사람을 데리고 와야 했는데, 무턱대고 혼자 찾아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한어를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왔던 것인데.... 아까 그 여자가 말을 바꾸어버린 것이 분명해보였다. 이런 생사의 갈림길에 이르게 하다니, 꼭 그 여자에게 물어봐야했다. 난생 처음 본 사람을 속인 이유를.... 어떤 수를 써서든지 살아남아.... 잠시 응전하며 생각하다, 현재의 상태로는 한꺼번에 사왕(蛇王)들을 죽일 수 없으니 한쪽은 포기해야만 했다. 일단은 가장 문제가 되는 머리가 둘로 각각 음혼독(陰混毒)과 양혼독(陽混毒)을 지니고 있는 음양쌍두사(陰陽雙頭蛇)부터 없애기로 했다. 두 가지 독 모두 극독으로, 특히 중독되면 정신을 잃고 욕정에 빠져 음욕(淫慾)을 해소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치솟는 독기를 무시하고 모든 내력(內力)을 끌어 모아 단 일순간에 사왕들을 없애야만 했다. 먼저 왼손으로 뇌전지(雷電指)를 정면의 칠채홍사(七彩虹蛇)에 겨냥해서 물러서게 만들고, 좌측에서 가까이 접근하는 금선사(金線蛇)는 무시했다. “팟” “퍽” 뇌전지(雷電指)에 충격을 받아 뒤로 날아가는 것은 보지도 않고, 그와 동시에 오른 쪽으로 빠르게 전진하며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으로, “크흐키아악” 도광(刀光)과 도성(刀聲)이 일어나며 두 줄기의 도강(刀剛)에 음양쌍두사의 머리가 잘려졌다. 동시에 뒤따라 달려오는 금선사의 머리를 금룡십이해(禽龍十二解)중의 신룡탐주(神龍探珠)로 움켜쥐어, 진기로 터뜨려 멀리 던져 버렸다. 이 순간, 뇌전지에 맞아 물러났던 칠채홍사(七彩虹蛇)가 왼쪽 장딴지를 물었다. 칠채홍사가 다시 물러나려는 순간에 도강으로 두 토막을 내버렸다. 찰나의 순간에 연이어 세 마리의 사왕(蛇王)이 죽었다. 내력(內力)의 탈진과 독기로 비틀거리다 입술을 깨물어 정신을 차리고, 칠채홍사(七彩虹蛇)가 물었던 장딴지 살을 칼로 도려냈다. 이미 독기가 퍼져갔지만 그래도 도려내는 것이 나았다. 시커먼 독혈(毒血)이 줄줄 흐를 때, 다시 땅에 떨어진 음양쌍두사(陰陽雙頭蛇)의 머리를 쪼개 뇌두(腦豆)를 찾아서 입에 넣었다. 이 두 뇌두(腦豆)는 음양쌍두사의 정화로 정신을 혼미케 하는 음독(淫毒)은 없었지만, 그것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독정(毒精)으로 음양(陰陽)의 성분을 가진 것 중에서는 가장 강했다. 독정내단(毒精內丹)의 일종으로 보통 삼백년 이상이 되어야 생기고, 어느 정도 효과가 있으려면 오백년 이상은 되어야했다. 그러나 독문(毒門)의 인물들도 이 뇌두를 함부로 먹지 않았다. 우선은 음양쌍두사 자체가 보기 드물기도 해서 오백년 이상 가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았고, 차라리 기르는 것이 더 나은데다가 한꺼번에 먹는다면 음양독(陰陽毒)의 충돌로 견딜 수가 없었다. 천천히 하나를 희석시켜서 완전히 흡수한 다음 다시 다른 쪽도 희석시킨 후에 복용해서 조화시켜야지, 단리유아처럼 한꺼번에 삼켰다가는 죽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단리유아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으로 음양지독(陰陽之毒)의 충돌에 의해 전신의 극독(劇毒)들을 촉발시켜 일순간에 최대의 힘을 폭발시켜야만했다. 이 폭발된 힘을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에 따라 돌려서 순수한 독정(毒精)만을 남기고, 나머지 독기들을 몰아내어야 했다. 허벅지를 도려냈음에도 이미 독 기운이 머리끝까지 치솟는지 현기증이 일어나 정신을 찾기 힘들었다.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자신도 몰랐다. 혈맥이 독들의 폭발을 견딜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정신을 잃지 않고 운공을 계속하여 회정구전회혼마공이 다스릴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이때, 한 쪽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과 나머지 각적(角笛)을 불던 십여 명의 고수들 모두가, 단리유아가 세 마리의 사왕(蛇王)을 일순간에 죽인 것을 보고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이, 이럴 수가” “저, 저 지독한 놈.” 모두가 놀라서 당황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음양쌍두사(陰陽雙頭蛇)의 뇌두(腦豆)를 먹는 것을 보고 만사괴요(萬邪怪妖)가 문득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아, 안돼! 모두 저놈을 공격해라. 당장.” 자신이 앞장서 달려 나간다. 이에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리둥절하다가 뒤따른다. 수나람(水喇籃)이 수내내(水乃乃)를 보면서, “아니, 이미 칠채홍사(七彩虹蛇)의 독에 중독된 되다가, 음양독(陰陽毒)에도 중독되었는데 공격할 필요가 있소?” “아니네. 나 역시 저놈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이는군. 음양독이 극독이지만. 만일 그를 억제할만한 독(毒)과 내공(內功)이 있다면 전혀 반대의 결과가 될 지도 모르네. 바로 이독제독(以毒制毒)이 되어버릴 수도 있네. 그러니 저놈이 더 회복되기 전에 죽여야 해.” “그, 그럴 수가?” 다른 사람들도 듣고는 놀라서 더 속도를 내어 만사괴요(萬邪怪妖)를 뒤따랐고, 그곳에는 오아화(吳雅花)와 내상이 심한 수하들만이 남아있었다. 이때, 단리유아는 오른쪽 무릎을 꿇은 채 적운도(赤雲刀)를 땅에 박아 상체를 지탱하고, 독기의 폭발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 온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미 음양독(陰陽毒)이 혈관을 떠돌며 전신에 스며든 온갖 독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음양독이 더 강력하고 내력이 고갈되어서 제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죽어랏!” 이런 순간에 만사괴요(萬邪怪妖)가 달려들며 단리유아의 등을 향해 일장(一掌)을 날렸다. 일장에 힘없이 날아가며, 단리유아의 등살이 터져나가고 사방으로 핏줄기를 날렸다. 십여 장(丈) 밖으로 떨어져 구르며 미동이 없었다. 다가오던 사인곡(蛇人谷)의 인물들이 지켜볼 때, 수나람이 만사괴요에게 물었다. “곡주님. 드디어 저 놈이 죽었습니까?” “아니, 나도 모르겠네. 다시 한번 더 확인해야지.” 그들이 서서히 단리유아를 향해 접근할 때, 단리유아는 전신을 떨면서 엎어진 채 몸속에 뭉친 어혈(瘀血)을 토해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내력(內力)이 바닥나 음양독(陰陽毒)과 나머지 독들의 충돌을 제어하지 못해서 혈맥이 폭발할 순간, 등에 닿은 만사괴요(萬邪怪妖)의 일장은 오히려 그를 도와준 셈이 되었다. 비록 등짝은 터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만사괴요의 내력을 차력흡기술(借力吸氣術)로 유도해, 일순간이지만 자신의 내력으로 만들어 음양독과 나머지 독들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독들이 충돌하면서 쌓인 내부의 어혈과 독기들을 대부분 몰아낼 수가 있었다. 이제 시간이 갈수록 독정(毒精)들은 내력으로 흡수될 것이고, 나머지 찌꺼기인 독기들은 모공을 통해서 빠져나갈 것이다. 내력은 이제 사성도 되지 않은 백년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독기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쓰러져 헐떡이는 단리유아의 곁에 가까이 다가간 수나람이 다시 손을 휘둘러 단리유아의 등판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죽어, 이 개자식아! 본곡의 사랑스런 아이들을 다 죽이다니. 죽어랏! 이 미친놈아!” 계속해서 장을 날리고 발길질을 한다. 거듭된 수나람의 공격에도 머리만 맞지 않게 교묘히 피하며 가만히 있었다. 비록 장력(掌力)의 전부를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온몸의 살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내력의 회복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몸속의 독정(毒精)을 흡수하는 데에도 속도가 붙어 거의 육성에 달하는 내력이 회복되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싸워볼만한 상황이 되었다. 이리저리 뒹굴며 전신에 상처투성이가 된 채, 미동 없이 몸을 떨고만 있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모두 물러나라. 어서!” 말과 함께 만사괴요(萬邪怪妖)가 나서며 장력으로 단리유아를 공격한다. 만사괴요의 장력을 피해 뒹굴며 일어서며,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만사괴요를 보고 있는 가까이 있던 수나람(水喇籃)을 향해서 도를 휘둘렀다. “크흐키아악” 끔찍한 소성(騷聲)에 모두가 일순 멈칫하는 순간, 한줄기 도광(刀光)이 일며 수나람의 목을 잘라버렸다. 잠시 멈춰 서 전신의 혈도를 두드려 피가 나오는 부위를 지혈했다. 자신이 오늘과 같은 상처를 입고 생사경각(生死頃刻)에 처한 것은, 거의 팔년에 가까워지는 흑마보(黑馬堡)를 방문했을 때 당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도 상처가 심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완전히 전신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도성(刀聲)과 눈앞에서 수나람의 목이 달아나는 모습에 놀라서 멈칫할 때, 지혈을 마친 단리유아가 오히려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옆에서 만사괴요(萬邪怪妖)가 붉은색의 채찍을 빼들어 공격했지만,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신형을 흩트리고 오른쪽으로 달아나 사인곡(蛇人谷)의 인물 뒤로 숨으면서 바로 앞의 인물에게 다가가며 도를 휘둘렀다. “팟” “크흐키아악” 또다시 울리는 도성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단리유아 앞에 있던 사인곡(蛇人谷)의 장로중의 하나는 다가오는 도광(刀光)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툭” 머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때, 이미 단리유아는 다른 사람들을 노리고 있었다. 멀리 오십 장(丈) 밖에서 도성(刀聲)을 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도 같은 화경(化境)의 고수인 만사괴요(萬邪怪妖)만은 멈칫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내상을 입고 정신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만사괴요가 단리유아 앞으로 접근하며 채찍으로 공격하면서, “모두 정신차렷! 어서 고막을 막아.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고 말 것이다. 이 저주받을 놈아, 제발 그만 죽어라!” 나머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옷자락을 찢어 귀를 막았을 때는 벌써 다섯이 더 죽어서, 이제는 네 명의 고수와 수내내(水乃乃), 만사괴요(萬邪怪妖)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귀를 막았음에도 뇌리를 찌르는 도성(刀聲)에 제대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오직 만사괴요(萬邪怪妖)만이 그럭저럭 대응할 수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십이성의 내력이 온전한 상태에서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을 펼쳤다면 만사괴요 역시 움직이는데 지장을 받거나 내상을 입게 되었을 것이다. 철저한 살인 초식인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은 그 도법자체도 상대가 없을 정도로 잔인무도했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도성(刀聲)으로 절정이하의 고수에게는 터져 나오는 도성에도 내상을 입게 될 정도였고, 화경의 고수일지라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지옥파라구천절의 세 가지 큰 축 중에서 하나가 소뢰음사(少雷音寺)의 파라구천절도(波羅九天絶刀)인데, 그 도법의 특징이 바로 도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크키하아악” 연이은 도성(刀聲)과 함께 다시 사인곡(蛇人谷)의 장로 하나가 죽었다. 아무리 그들이 상대해보려고 해도 이건 마치 어른과 아이싸움처럼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된 단리유아에게 무공수준이라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일단 실전능력에서 떨어지면, 같은 화경(化境)의 고수일지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악, 악마(惡魔)!” “저, 저주받을 도법(刀法).” 모두가 뒤로 물러서 달아날 생각에만 매달렸다.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성(刀聲)에 내력을 제대로 끌어올릴 수도 없었고, 전신(全身)을 이용해서 공격하는 상대에게는 어떠한 수단도 통하지 않았다. 수내내(水乃乃)가 정신을 차리며 만사괴요(萬邪怪妖)를 향해 말한다. “곡주님.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어서 달아나야 합니다.” “뭐? 지금 이렇게까지 피해를 입고 그냥 도망치자는 말이 나오느냐?” “하지만, 곡주님. 싸움도 어느 정도 상대가 되어야지만 하는 것이지, 이놈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일단 내곡(內谷)으로 달아나 동부(洞府)를 폐쇄하며 내부에서 싸우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명이 죽어갈 때, 만사괴요(萬邪怪妖)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일대일로도 자신 없는데다가 고수들도 몇 남지 않았고, 사왕(蛇王)도 모두 죽은 상태에서는 전멸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알았다. 모두가 뒤로 달아나 곡내 쪽으로 뛰어갔다. 단리유아는 하나하나 죽이며 뒤따라갔다. 만사괴요(萬邪怪妖)와 수내내(水乃乃)가 오아화(吳雅花)의 근처에까지 다가갔을 때, 나머지 장로들도 모두 죽었다. 만사괴요가 오아화를 붙잡고 도망가자고 얘기할 때, 단리유아가 다가왔다. 전신이 자신의 피와 타인의 피로 목욕을 한 듯이 보이고, 옷자락은 찢어지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산발한 모습이었다. 오직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무심한 눈동자만이 광채를 번뜩여서 마치 지옥의 사신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거기 서!” 무심(無心)한 소리에 실랑이를 벌이던 사람들과 뒤로 물러서던 사인곡(蛇人谷)의 인물들 모두가 부르르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모두가 오아화(吳雅花)를 쳐다보며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닐 것이라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놀라움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오아화(吳雅花)를 바라보면서, “당신은 왜 내 말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일부러 와전(訛傳)해서 서로 싸우게 한 것이오?” 무심한 음성과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투명한 시선을 바라보다가 처음에는 두려운 기색이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큰소리로, “당신이 정말 싸우기 위해서만 왔다는 것이 정말이에요? 게다가 이 여자는 내 부모를 모두 죽인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라고요. 흥! 그런데 내가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음, 당신의 처지는 이해하지만 그래도 나를 속였으니, 당신도 대가(代價)를 치러야할 것이오. 이것에 동의하시오?” 전혀 동요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무감정(無感情)하게 물어본다. 이에 오아화(吳雅花)가 큰소리로, “뭐라구요? 흥, 내가 무슨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소리죠? 무공만 강하면 다인가요? 당신은 의협심(義俠心)도 없어요? 게다가 나도 반은 한인(漢人)이란 말이에요. 어머니가 한인이고, 아버지는 월인(越人)이었는데, 이 악랄한 여자가 어렸을 때, 다 죽여 버렸단 말이에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만사괴요(萬邪怪妖)를 보며 소리치다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 말에 문득 전에 들었던 삼강사루 오정에 대한 말이 기억나, “삼강사루(三江死淚) 오정(吳程)과는 어떤 관계요?” “우리 아버지였어요. 날 구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찾아왔다가 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자 죽어서 뱀들의 먹이가 되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게 되었나요?” “당신 말대로 악랄한 여자군. 하지만 당신이 또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소?” “흐흑흑. 정말이란 말이에요. 제발 날 좀 도와줘요. 그러면 내 당신의 종이라도 되어서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울면서 사정하는 말에도 고개를 저으며 전혀 변함없는 태도와 무심(無心)한 목소리로 판관(判官)이 판결문을 읽듯이, “당신의 말은 잘 들었소. 하지만 나는 절대로 여자의 말을 믿는 사람이 아니오. 게다가 이미 나를 속인 적이 있는데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당신의 처지가 지금 그리 좋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과오(過誤)를 따지는 것이 먼저이니 나를 속인 것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단리유아의 말에 화가 폭발해 손가락질하면서 큰소리로, “이, 이 천하에 무정(無情)한 놈아! 네놈은 인지상정(人之常情)도 모르느냐? 이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이 미친놈아! 그래, 그러면 네놈이 어쩔 것인데?” “....맞는 말이오. 처음에는 죽이려 했지만, 그래도 당신의 모습과 처지를 고려해서 적당한 대가만 받겠소.” 말과 함께 도(刀)를 휘둘러 오아화(吳雅花)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일섬(一閃) 도광(刀光)이 번뜩이고 도성(刀聲)이 일며, “팟” “크키흐아악” “퍽” 어께에서 팔이 떨어져 나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도성(刀聲)에 다른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오아화(吳雅花)도 그래도 설마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단리유아가 칼을 휘둘러 팔을 잘라버리니, 믿기지 않는 얼굴로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중에야 고통을 느끼고, “아아악!” 고통과 충격에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 혼절한다. 이를 보고 만사괴요(萬邪怪妖)가 혈편(血鞭)을 휘둘러 단리유아를 공격하며 수내내(水乃乃)를 향해서, “어서 어께를 지혈하고, 아화(雅花)을 데리고 동부(洞府)로 떠나게. 내가 이 자를 막을 테니.” “하, 하지만. 곡주님.....” “어서! 어서가게. 나조차 이 자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자신은 없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아화를 곡주로 받들어주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내내(水乃乃)가 오아화(吳雅花)를 지혈하고 옆구리에 끼고 수하들에게도 이른 후에 장내를 떠났다. 단리유아가 공격을 막으며 그 광경을 보다가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고는, 만사괴요(萬邪怪妖)의 공격을 물리쳐 혈편(血鞭)을 조각내버린 후에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 떠나갔다. 한 여자의 거짓말에 의해 이런 일장(一場)의 도살극이 벌어지다니, 역시나 어머니의 말대로 여자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됐다. 자신의 잘못으로 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지 않아서 생긴 일이니, 더 이상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버렸다. 온통 허탈한 마음만 가득한 채 장내를 떠나가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만사괴요 역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조각난 혈편을 보다가 단리유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짓고 있었다. ****** 급하게 올리네요. 싸우는 장면에서는 멈출 수가 없어서 계속 써 내린 것을, 수정하는 데에만도 너무 오래 걸리네요. 역시 다섯 페이지가 가장 적당하고 내용의 일관성에도 좋은데, 어쩔 수가 없어서 다 수정했는데 열 페이지까지 되는군요. 한 번 더 수정해야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그냥 올립니다. 오타나 어딘가 이상한 곳이 보이면 댓글에 마음껏 써 주세요. ###### 杰 님의 말씀대로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닉네임이네요. 감사합니다. senseoar 님의 말씀대로 문장의 연결이 어색한 곳이 보입니다. 34 편까지 수정하다가 말았는데, 다시 한편 한편 수정해야겠습니다. 어딘가 어색한 곳이 있어도 올릴 당시에는 잘 못느낍니다. 이상한 곳이 보이시면 바로바로 지적해 주세요. 여러분이 느끼는 것이 제가 찾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빠릅니다. 그러니 댓글에 마음에 안든 부분이나 오류가 보일 때는 서슴없이 지적해 주세요. 고무족(鼓舞族) 고무족(鼓舞族) 1 사인곡(蛇人谷)을 떠나와 어제 머물렀던 거목으로 향했다. 상처가 심해서 일단은 요상을 하여 어느 정도 추스른 뒤에 떠나는 것이 나았다. 전신 곳곳이 터지고 피가 흘러서 온몸이 핏물 속에 잠겼다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내상은 그리 심하다 할 수 없었지만 외상이 심해서 더 이상 무리한다면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고목 속에서 옷을 모두 벗은 후에 자옥신단(紫玉神丹)을 먹고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를 상처부위에 발랐는데, 상처가 너무 많아서 흑옥단속고를 반 이상 써야 했다. 등 뒤에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은 내력으로 혈맥을 막아 우선적으로 지혈만 시켰다. 정좌하고 앉아서 운기행공을 하며 요상에만 전념 한 지 사흘이 지났을 때, 우선적으로 움직임에 지장이 없을 정도는 회복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회복되려면 적어도 보름 이상은 더 치료에 노력해야 할 정도였다. 한 여자의 말장난에 놀아나 이런 상처를 입게 되다니.... 아무리 자신의 처지가 곤궁하더라도 이런 짓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여자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어머니가 말했던 자신이 흉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사연이 생각나서, 상처의 고통보다는 과거의 쓰라린 기억이 더 괴롭혔다.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가 더 이상 상처 때문에 지체할 수 없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찾아 가능한 빨리 가야만 했다. 벌써 헤어진 지 구일이나 지나서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열흘 정도는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면 떠나라고 했으니, 늦어도 오늘은 출발하여야 했다. 밖으로 나서니 아침 햇살과 함께 운무(雲霧)가 산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단순히 풍광(風光)만을 논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사흘 전의 참혹했던 싸움을 겪은 자신에게는 무언가 음울하고 음침한 기운을 흘리는 것 같았다. 잠시 사인곡(蛇人谷)쪽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채주(菜州)의 한 객잔에 머무르며 단리유아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열흘이 지나도록 단리유아가 돌아오지 않자 어찌할지를 두고 서로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공손고가 객방에 모인 일행을 둘러보면서, “여보게들, 이미 열흘이 다 지나가고 있네. 무작정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선배님께서는 그냥 이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입니까?” 음구의의 말에 미처 공손고가 답하기도 전에 선상조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는데, “자네,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인가? 아무리 소사숙께서 되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해도, 약속한 날짜가 지났으니 바로 떠나자고?” “내말은 그것이 아니라, 사인곡(蛇人谷)으로 찾으러 갈 것인지 아니면 되돌아갈 것인지를 공손선배에게 물어보는 것이네.” 이에 선상조가 공손고를 흘겨보면서, “흥! 되돌아가기는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설마 자네는 소사숙께서 저런 뱀이나 숭배하는 미개한 야만인들에게 돌아가셨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말인가? 나는 죽어도 못 돌아가겠네. 나 혼자 사인곡(蛇人谷)에 찾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음구의가 답답하다는 듯이, “자네는 어찌 다른 사람들의 말은 끝까지 들어볼 생각을 안 하는가? 누가 바로 되돌아가자는 것인가? 사인곡으로 바로 찾으러갈 것인지, 아니면 며칠 더 기다려 보든지 생각해보자는 것인데.” 교묘하게 말을 돌려서 되돌아가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아예 막아버렸다. 이에 다른 사람들이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가, 웅정향이, “사제, 그러면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보다 파타루(芭朶婁)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여보게, 파타루. 자네가 생각하기에 단리사숙께서 아직까지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나?” 음구의가 말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 파타루에게 물어보니, 파타루가 한동안 생각하다가, “여기서 초라산(草羅山)까지 가는데 길을 정확히 모르니 적어도 이틀은 걸릴 것입니다. 다시 초라산에서 사인곡(蛇人谷)을 찾아야하니 며칠이 더 걸릴지 모르지요.” “그러면 왕복하는 데에만 사일이고, 찾는 데에도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군?” “그렇지요. 정확한 위치를 아무도 모르는데다 초라산의 운무는 유명하니,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음구의가 선언하듯이, “여러분 모두가 들었다시피 최소한도로 정했을 때가 열흘 정도 걸릴 것 같군요. 게다가 상처를 입고 요상하느라 약간 늦어질지도 모르니, 만약 사흘정도 더 기다리다가 그래도 오지 않는다면 그때 찾아나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사흘을 더 기다려보다가 찾아 나서기로 했다. 다음날 일행이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 저녁이 되어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해시(亥時:21-23)초가 되어서야 단리유아아가 객잔을 찾아 담을 넘어 객방으로 들어왔다. 누군가 담을 넘어 객방으로 다가올 때부터 경계하고 있던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향해서 돌아서며, “누구냐?” 웅정향이 월어(越語)로 물어볼 때 단리유아가, “나요, 웅사질.” 단리유아임을 알고 선상조가 달려가 문을 연다. 단리유아가 안에 들어오자 단리유아의 모습에 모두가 놀라서 소리친다. “괜찮나?” “아니, 소사숙. 어찌된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머리는 산발한데다 넝마 같은 옷에 곳곳을 옷을 찢어 싸매고 검붉은 혈흔(血痕)이 온몸을 뒤덮은 모습으로, 한밤중에 보통사람이 보았다가는 몇날 며칠을 두고 가위에 눌릴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근심어린 얼굴로 당황하면서 앞을 다투어 안위를 물어보는데, “괜찮소. 그보다 그동안 별 일 없었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무심한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의 안부만 묻자, 모두가 말문이 막혔다가 공손고가 고개를 저으며, “객방에 틀어박혀 나가지도 않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그보다 정말 괜찮기는 한건가?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심한 상처는 며칠간 요상하면서 어느 정도 억눌렀으니, 앞으로 치료만 제대로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다행이라며 일행이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무슨 일로 이렇게 상처가 심한지 단리유아에게 물어보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아서 단리유아의 이야기에 때로는 한숨을 쉬고, 때로는 분노하고 경탄하기도 하며 사인곡(蛇人谷)에서 일어난 일의 전말을 들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에, 모두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그런 사지에서 무사히 벗어난 것에 안도하며 사인곡에서의 일에 대해 대화했다. 잠시 후에 지난 일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웅정향을 보면서 단리유아가, “그보다, 웅사질. 앞으로 얼마간은 상처를 치료하는데 전념해야할 것 같으니, 조용한 곳을 한번 알아보아주시오.” “그게 좋겠군요. 소사숙, 그런데 며칠정도나 머무를 작정이신지요?”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는 보름 정도면 되겠지만, 이번 일로 말이 통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함을 알았으니 한달 정도 머물 수 있는 곳이면 좋겠소. 우선 이 근처 대구월(大瞿越) 지역에서는 파타루(芭朶婁)를 대동하여 찾아간다면 말이 통하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는 없을 텐데, 무공이 너무 약한 것이 문제이오. 정당한 비무라면 모르지만 혹여 불상사가 생긴다면 내가 일일이 보호해줄 수도 없으니, 앞으로 한 달 동안 무공을 가르쳐 최소한 신법이라도 제대로 펼치게 만들어야겠소. 그러니 이왕이면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으면서도 무공을 가르칠만한 적당한 크기의 집을 알아보시오. 그리고 파타루, 나에게 무공을 배워볼 생각이 있소?” 이 말에 파타루가 연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배우고말고요. 안 그래도 가르쳐달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제 부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열심히 익히겠습니다.” 그동안 일행을 따라다니며 파타루도 단리유아의 무공이 뛰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고, 또 무공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족의 소족장으로서 언젠가 일행과 헤어진 뒤에도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보아 부탁할 참이었는데, 단리유아가 직접 가르쳐준다니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웅정향이 기뻐하는 파타루를 보다가 단리유아에게, “소사숙, 그러면 이 아이를 제자로 삼으실 생각이십니까?” “아니오. 그저 내가 강호행(江湖行)중에 접한 무공 중에서 신법(身法)과 도법(刀法) 한 가지를 가르칠 생각이오. 내 본신무공을 배우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오.” 단리유아의 본신무공을 일초식이라도 익히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또 파타루의 자질도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제대로 익힐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또 앞으로 필요할 테니 음사질에게 서장어(西藏語)와 천축어(天竺語)도 배워야겠소.” 음구의가 단리유아의 말에 놀라서, “소사숙, 서장어와 천축어를 배우시겠다구요? 아주 어려운 말로 익히기 쉽지 않을 텐데요?” “예전에 서장어와 천축어로 된 책을 구해서 읽은 적이 있소. 말로 대화하는 것을 못할 뿐이지,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소. 그러니 앞으로 틈틈이 익힌다면, 별 문제없이 뜻을 전달할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오.” 선상조가 큰소리로 웃으며, “하하하, 대단하시군요. 저희도 어렸을 때에 노예상인 밑에서 일하면서 익혔는데, 말은 어떨지 몰라도 글은 제대로 모르지요. 그런데, 언제 그런 것을 익히셨습니까?” “오래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이오.” 모두가 궁금한 얼굴로 자세히 물어보았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무공에만 뛰어난 줄 알았다가 이런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다시 한번 단리유아를 쳐다보며 놀라게 되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익혔을까? 이 사람의 신상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전혀 없으니, 알 수가 없구만. 그런 글을 배웠다면 학문 또한 범상치 않을 텐데.... 보통 가문에서는 그런 서책을 구하기도 어려울 테니, 필시 명문세가의 후예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말이야. 하긴 말하는 것을 보아서는 어려서 배우지 못하고 막 자란 듯한 태도를 볼 수가 없으니....“ 공손고의 생각처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며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로가 얼굴을 마주보며 눈짓으로 물어보기도 했지만, 단리유아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웅정향은 월족(越族)의 상인으로 변장하고 적당한 집을 찾으러 다녔다. 그동안 단리유아는 상처를 치료하며, 파타루에게 신법과 도법 한 가지씩의 구결을 가르치고 외우게 했다. 사흘 후, 채주(菜州)외곽의 주위에 별다른 건물도 없는 조그마한 장원(莊園)을 구했다. 그동안 방치되었는지 제대로 된 건물도 중앙의 대청뿐인 곳으로 주위의 건물들은 지붕이 새거나 무성한 잡초에 둘러싸여 있었다. 공손고와 선상조가 집의 모습에 불평하며 투덜거렸는데, 웅정향이 당장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넓은 곳은 이곳 밖에 없었다고 하고 또한 단리유아도 마음에 들어 하니 그들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오전에는 음구의에게 서장어(西藏語)와 천축어(天竺語)를 익히고, 오후에는 파타루에게 구결을 전한 부풍신법(浮風身法)과 반월파천도(半月破天刀)를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부풍신법은 강호의 일반적인 신법을 단리유아가 수정한 것으로 적은 내력으로도 오래 달릴 수 있게 하는 것이 특징인데, 그리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현재의 파타루에게는 가장 적절한 신법이었다. 반월파천도는 백여 년 전의 명문이었던 반월도문(半月刀門)의 도법으로, 반월도문은 혈수미교(血修彌敎)와의 싸움에서 문내의 대다수 고수가 참여해 죽은 후로 쇄락해서 반갑자 전에 멸문된 곳이었다. 특징은 도를 빼듦과 동시에 상대를 반으로 가르는 쾌도로 발도와 동시에 초식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보름 정도가 흘러 어느 정도 혼자서 초식을 펼칠 정도가 되자, 그때부터는 직접 대련하면서 파타루(芭朶婁)를 가르쳤다. 대련을 시작한 첫날에는 어느 정도 열의도 있고 끝까지 버티는 모습이었는데, 다음날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주저 않으며 헉헉댔다. 그 모습에 단리유아가 물러나 검을 내리고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어서 일어서시오, 파타루. 지금 그대로 포기할 셈이오?” “하, 하지만, 너무 심하잖습니까? 전혀 사정도 안보아주고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 부치기만 한단 말입니까? 이제 무공이라는 것을 배운지도 얼마 되지 않은데....” 숨을 몰아쉬며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얘기하는 파타루를 보면서, “파타루(芭朶婁), 당신은 앞으로 할 일이 있지 않소? 그동안의 인연을 생각해서 도움을 주는 것일 뿐, 나도 당신에게 이렇게 무공을 가르쳐줄 필요 없이 몇 마디 말만 익혀도 충분할 것이오. 또 시간이 있다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해도 됐을 것이오. 그러나 파타루, 이제 다시 길을 떠나면 당신 일족의 마을까지는 한달 정도면 도착할 것이오. 그러니 당신에게 있는 시간이라고는 한달 보름 정도의 시간밖에 안 남았소. 물론 우리가 당신 일족을 구해주는 데에 당신의 힘은 별로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당신의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천지차이가 될 것이오. 또 우리가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없고 길어야 일년 정도에 불과할 것인데, 그동안에 충분히 강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또 누구에겐가 도움을 구걸해야할 처지가 될 것이오. 만약 순간의 고통을 참지 못할 정도로 의지가 약하다면, 아무리 당신이 육체적으로 강해진다고 해도 또 다시 누군가의 노예가 될 뿐이오. 당신은 그런 인간이 되고 싶소?” 단리유아의 무심한 말에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하면 되잖소. 나도 노예가 되기는 싫으니 앞으로는 절대로 봐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어서 다시 시작합시다.” 도를 들고 먼저 단리유아에게 덤벼들었다. 단리유아가 옆으로 피하며 다시 상체의 빈 곳을 찌르면서, “누가 감정적으로 칼을 휘두르라고 가르쳤소? 당신은 단지 칼의 노예가 되고 싶소?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의지(意志)를 먼저 생각하시오. 칼은 단지 당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수단이자, 당신 몸에 이어진 당신의 노예일 뿐이오.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자재로 칼을 휘두를 수 있다면 초식이라는 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소. 초식이라는 것은 단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칼을 사용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기본적인 형태는 똑 같소. 항상 자신의 의지를 먼저 생각하시오. 그렇게 한다면, 언젠가 진정으로 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어께를 얻어맞아 비틀거리며 한 발 물러서 단리유아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시 공격한다. 칼끝에 자신의 의지를 모아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휘둘렀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항상 단리유아의 말을 명심하면서 수련하니 도법을 수련하는 데에도 속도가 붙었다. 이처럼 매일매일 얻어터지면서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며 대련을 계속한 보람이 있는지 실력도 급속하게 늘었다. 내력도 단리유아가 타혈법으로 전신을 두드려준 덕분인지 이제 이십년 가까이 되어서, 내력만 따진다면 이류고수라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가는 파타루에게 달린 일이었다. 그동안 단리유아도 저녁에는 운공을 하면서 체내에 쌓인 독정(毒精)을 내력으로 전환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현재의 안정된 상태일 때 조금씩 흡수하여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야했다. 만일 이대로 독정을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다른 극독이 끼어들어 균형을 무너뜨리기라도 한다면 전과 같은 요행은 더 이상 바랄수도 없을 터였다. 독정을 내력으로 조금씩 흡수하자 한 달이 지났을 때에는 오히려 내공이 반갑자 정도 더 늘어나 칠갑자 반 정도에 달하게 되었다. 또 이제부터는 웬만한 독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여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할 수 있었다. 단지 전신에 늘어난 보기흉한 상처자국을 제외한다면. 오월 이십팔일. 사인곡(蛇人谷)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넘어갔을 때,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이번에는 흑수하(黑水河)를 따라 내려가 산몽(山夢)을 거쳐 파타루의 고향인 측허사(測歔瀉)를 향했다. 이전의 약속대로 고무족(鼓舞族)을 물리쳐 파타루의 일족을 구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의 수련 덕분에 파타루도 이제는 무인의 기세가 나타나는 것이 눈에 두드러져 양쪽 태양혈(太陽穴)이 불끈 솟은 모습이고, 걷는 자세와 속도에 있어서도 정연한 기풍이 드러났다. 일행 모두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월족(越族)의 복장으로 꾸민 채 다시 길을 떠났다. ****** 어제는 글을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술에 맛이 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답니다. 뭔가 허전한데 어디가 잘못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딘가 어색한 곳이 있어도 올릴 당시에는 잘 못느낍니다. 이상한 곳이 보이시면 바로바로 지적해 주세요. 여러분이 느끼는 것이 제가 찾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빠르니, 수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댓글에 마음에 안든 부분이나 오류가 보일 때는 서슴없이 지적해 주세요. @@@@@@ 타뮤리온 말씀처럼 아마 어투가 바뀐 것이 그런 느낌이 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다시 한번 앞에서부터 보고, 일관성이 없다면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고무족(鼓舞族) 고무족(鼓舞族) 2 채주(菜州)에서 파타루의 고향인 측허사(測歔瀉)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대략 육백여의 거리로서 흑수하(黑水河)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해가 뜨는 동쪽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일행이 출발하는 채주(菜州)가 흑사하의 서편에 있으므로 계속 남하한다면 측허사 맞은편의 고무족(鼓舞族)의 영역에 먼저 이르게 될 것이다. 될 수 있는 대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가기 위해서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강변을 따라 천천히 남하했다. 고산지대인 채주에서 남하할수록, 날씨는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었고 구름 한점 없이 맑다가도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흑수하(黑水河)를 따라 내려가면서 파타루도 반월파천도(半月破天刀)에 매진하며 틈나는 대로 남파쌍검(南波雙劍)과 대련을 통하여 실력을 키워갔다. 특히 선상조와 대련할 때에는 정말로 실전인 것처럼 살벌한 싸움이 일어나 지켜보는 일행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달여가 흘러 측허사(測歔瀉)에 다 왔을 무렵에는 도법과 내력에 있어서 명실공이 강호인(江湖人)이라 할 수 있을 이류고수의 수준에 달했다. 하루거리로 측허사를 앞둔 유월 이십오일의 해질녘, 무성한 수초와 이따금 강에 사는 악어와 같은 이국적인 동물이 보이는 강변에서 십여 장(丈) 정도 떨어진 언덕에 여장을 풀고 노숙을 준비했다. 비록 보이는 것이라고는 중원의 풍물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들뿐이었지만, 은은한 노을이 지는 가운데 보이는 반짝이는 은싸래기 같은 강물의 모습은 여행에 지친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어 마음을 풀어주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모두가 풍광(風光)을 음미하면서 저녁을 먹으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다. “파타루, 이제 자네의 고향도 다 왔다고 볼 수 있네. 지난번에 대충 들었지만 이제 우리에게 자네가 살던 곳에 대해 더 자세한 사정을 말해주면 좋겠군.” 음구의가 물으니, 파타루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지만 저기 앞에 높다랗게 보이는 반라산(磐裸山) 일대가 고무족(鼓舞族)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 강변 일대에 저희 몽족(夢族)이 넓게 퍼져 있습니다. 또 저희 일족이 사는 측허사(測歔瀉)는 반라산 맞은편에서 남쪽으로 이십 리 정도 더 내려가야 합니다.” 일행이 파타루가 가리키는 산을 보니 이십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사천 척 가량의 높은 산이 위치해 있었다. 그동안 마주친 산들과 달리 특이하게 황량해 보이는 바위산으로, 수풀이 우거진 곳은 계곡 쪽의 일부분에서만 듬성듬성하게 보였다. “여러분이 보듯이 흑수하(黑水河)를 사이에 두고 서편은 대체로 고산이 이어져 있습니다. 또 조금 더 내려간다면 안남산맥(安南山脈)과도 이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맞은편은 흑수하와 홍하(紅河)사이의 평야지대로서 그리 높은 산도 없고 우거진 밀림(密林)도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는 논농사가 성하지요. 뭐, 고기 잡는 사람도 많지만.” “흠, 그러면 월족(越族)하고 생활하는 것은 비슷하겠군?” 웅정향이 생각하며 물어보니, “예,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단지 월족이 수가 훨씬 많고,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약간 유식한 체하는 경향이 많을 뿐이지요. 게다가 엄청나게 자신들이 잘난 줄 알아서 다른 부족들 보기를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보다도 못하게 보는 놈들입니다.” 은근슬쩍 선상조를 쳐다보며 말하다가 다시, “보시다시피 맞은편은 땅이 기름져서 씨를 뿌리면 삼모작까지 가능해서 살기 좋은 곳입니다만, 그러다보니 대체로 성격들도 온순해서 특별하게 뛰어난 전사(戰士)나 주술사(呪術師)도 드문 편입니다.” “그러면 고무족(鼓舞族)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게.” “저 산을 보자면 온통 바위투성이로 계곡 근처에 일부 계단식 논이 있지만 다른 곳은 농작물이 자라기 힘들어서 겨우 일부지역에서만 밭농사를 짓고 있을 뿐입니다. 또 산이 황량하다보니 잡아먹을 동물이나 야생과도 드물어 살기에 척박한 곳이고, 아주 깊은 계곡은 독물(毒物)도 많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고무족이 언제부터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아무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반갑자 전부터 갑자기 강성해졌습니다. 그전까지도 다 합해도 천명이 겨우 넘을 정도의 소수이고, 별로 특이한 부족도 아니었습니다.” 본래 고무족(鼓舞族)은 저 서쪽 멀리 포감(蒲甘:현재의 미얀마에서 태국 북서부일대)에서 쫓겨나 이곳까지 밀려온 부족으로 태족(太族)의 일족이었다. 다른 고산지대의 부족들처럼 화전을 일구면서 삼사년마다 새로운 땅을 찾아서 떠도는 부족으로 마을의 단위도 많아야 이십호, 보통 십호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주로 대나무나 다른 나뭇조각으로 만든 고상식의 집에서 살았다. 자연의 영(靈)이나 동식물의 조상(彫像)을 믿는 원시적인 부족으로 본래는 세력도 약하고 오랜 세월동안 다른 부족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삼십년 전부터 갑자기 호전적인 세력으로 변해서 다른 부족들을 침략하여 식량과 여자들을 약탈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습니다. 또 최근에는 족장인 르바이 쿠무(고무족의 위대한 호랑이라는 뜻)가 반라산(磐裸山)일대의 고무족(鼓舞族)을 통합해서 삼천여 명으로 세력이 불어났습니다.” “뭐? 삼천이라고? 너는 우리가 뭐 전신이라도 되는 줄 아냐?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뚫고 너희 일족만을 무사히 구할 수 있다는 말이냐?” 끼어들어 소리치는 선상조의 말에 눈썹을 찌푸리다, “누가 삼천 명이 다 전사라고 했습니까? 그 중에서 전사라 불리는 남자들은 칠팔백 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게 적은 수냐?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우리도 사람이란 말이다. 너도 이제 무공을 익히니 알겠지만, 우리도 힘이 떨어지고 지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파타루가 선상조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면서, “뭐, 그동안에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혼자서도 다 처치할 수 있다는 태도이던데....” “이 자식이, 내가 언제?” “음, 흠족(歆族)의 무덤집을 건드리고 난 후에, 뭐라고 그랬더라?” 그 말을 듣고 선상조가 일어나 달려들었다. 이에 덩달아 파타루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의 칼에 손을 가져가 도병을 움켜쥐고 있었다. 음구의가 일어나 둘 사이를 막아서며, “자네 왜 그러나 도대체? 제발 좀 성질 좀 죽이게. 누가 조금 기분 나쁘게 말하면 무조건 달려드니....” “뭐라고? 자네는 저놈이 하는 말도 못 들었나? 저 자식이 일부러 살살 약 올리는데 내가 어떻게 참으라는 말인가?” 그동안에 자신 때문에 흠족(歆族)의 습격을 받은 것에 대해 적지 않게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사사건건 파타루가 아픈 곳을 찌르니 선상조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타루도 이 성질만 급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인간이 맘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로 항상 자신과 같은 남만의 부족들을 깔보는 듯한 어투와 표정으로 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련 중에도 선상조가 으스대거나 조롱하면서 매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 결코 그에게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웅정향과 공손고도 나서서 말리며 선상조를 끌어다 제자리에 앉힌다. 음구의가 파타루를 보면서, “자네도 더 이상 지난 일로 남의 아픈 곳을 건드리며 말하지 말게. 그래도 자네를 돕기 위해서 가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 그렇게 부아를 돋구어 앞날에 좋은 일이 얼마나 있겠나?” “저 사람이 자꾸 성급하게 나서서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으니 그런 것 아닙니까?” 이 말에 다시 흥분하는 선상조와 이에 노려보며 맞서는 파타루를 일행이 모두 달려들어 진정시키느라 한참이나 이야기가 끊어졌다. “파타루,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자네를 도우러가는 중인데 자꾸 서로의 화목을 깨뜨리면 어쩌자는 것인가? 앞으로도 위험한 날들이 계속될 텐데?” 웅정향의 엄정한 말에 한동안 뚱해 있다가, “파타루, 선사질. 서로 화해하시오. 얘들도 아니고 언제까지 지난 일로 마음 상해서 서로 안달할 것이오?” 단리유아의 담담히 중얼거리는 말에 서로 눈길을 피하며 화해하는 척한다.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혀를 찰 때 단리유아가, “파타루,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해 보시오.” “사실 전사들의 실력은, 여러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지금의 저에게도 훨씬 못 미칩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주술사(呪術師)입니다. 이름이 휼리파(恤狸把)라고 알려진 사람인데, 특히 독술(毒術)에 뛰어나 쥐도 새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중독 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주술도 뛰어나 지난번 흠족(歆族)에서와 비슷하게 전사들을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독약(毒藥)과 술법(術法)이 결합된 것으로 칼을 맞아도 쉽게 죽지 않고, 상처의 회복도 눈에 보일 정도로 빨라 마치 불사(不死)의 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독약으로 일순간에 평생의 잠원진기(潛元眞氣)를 격발시키는 것에 불과해 그 부작용이 막심했다. 술법이 그것을 보조하고 잠력의 격발을 순차적으로 늦추어 부작용을 최대한 막는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부작용을 완전히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근본적으로 술법은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하여,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타는 투지를 불러 일으켜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독약도 잘만 쓴다면 영약(靈藥)에 못지않지만, 이렇게 몇 번 계속하거나 지속하는 시간이 길어져 잠력이 고갈된다면 죽거나 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설혹 당장 죽지 안는다하더라도 독약에 중독돼 점점 더 강한 독성의 독이 필요한 독인이 될 뿐이었고, 죽는 것은 마찬가지로 단지 얼마나 시간이 더 남았느냐는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주술사(呪術師) 혼자 따로 있다는 것이오?”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의 거처는 알려지지 않아서.... 단지 고무족(鼓舞族)의 부락이 크게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그 중에 한 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단리유아의 반문에 땅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한다. “여기 제일 중앙에 해당하는 수뢰곡(水瀨谷)에 삼백 정도의 전사와 함께 르바이 쿠무가 있고, 제일 바깥 산 아래쪽에서 강변일대까지 다른 부족에서 데려온 노예들로 하여금 농토를 경작하도록 하는 곳에 또 삼백정도의 전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숙한 이곳 혼곡동(魂哭洞) 쪽에 나머지 전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시오?” “보통 때라면 독물이 풍부한 혼곡동 일대에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휼리파(恤狸把)가 족장과 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한동안 파타루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가, “그러면 일족 중에서 끌려간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 것 같소?” “아마 별일이 없다면 강변 쪽 농지에 있을 것입니다.” “측허사(測歔瀉)에는 안 들리고 가보아도 되겠소?” “제가 떠나온 지 거의 일년에 가까워지는데, 아마 힘없는 노인네나 아직 어린 아이들만 남아있을 것입니다. 뭐, 근방의 몽족(夢族)들에게 식량만이라도 보내주도록 했으니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파타루가 걱정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그래도 다른 몽족들을 믿는다는 듯이 힘을 주어서 말한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 단리유아가 말을 하려다 멈추고, 잠시 후에 일행을 돌아보면서, “모두 들었다시피 찾아갈 곳이 세 곳이나 되오. 어찌해야 좋을지 의견을 말해보시오.” “글쎄, 내 생각에는 도적을 잡을 때는 우두머리를 잡아야한다는 말이 있듯이 족장 놈을 우선 잡는 것이 어떨까 하네만?” 공손고의 말에 일행이 잠시 생각할 때 음구의가, “소사숙, 공손선배의 말이 일견 타당하지만, 저희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인물은 주술사인 휼리파(恤狸把)입니다. 우선 그놈을 처치한다면 다른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는 일단 강변과 혼곡동(魂哭洞) 쪽을 공격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내가 혼곡동 쪽을 맡아서 휼리파를 찾을 동안 나머지는 파타루의 일족을 구한다?” “예, 휼리파만 없다면 전사들이 삼백 명일지라도 기습으로 우두머리 몇 놈만 먼저 제거한다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무공도 익히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음구의의 의견이 자신의 생각과 같자, 일행을 둘러보며, “그러면 음사질의 말대로 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만약이라도 저번에 흠족(歆族)에서처럼 술법에 걸린 전사들과 부딪히거나 휼리파(恤狸把)를 만난다면 될 수록 자리를 피하도록 하십시오. 일단 내일 헤어졌다가 일이 뜻대로 안 되더라도 사흘 후까지 파타루의 고향인 측허사(測歔瀉)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단리유아의 말에 일행이 동의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며 저녁을 마쳤다. 잠시 후, 각자 볼일을 보다가 하나둘 잠에 빠졌을 때 단리유아는 백여 장(丈) 떨어진 강가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에 추락해 부서지는 달빛은 한쪽으로 제쳐두고, 자신의 내공인 회정결(灰情訣)과 무념신니(無念神尼)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십왕전(十王殿)에서의 일로 보아서는 내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에 있어서 뚜렷한 방도가 없으니 일단은 내력을 완벽히 채우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자신과 비슷하거나 상승(上乘)의 경지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싸워본다면 뭔가 길이 보일 것도 같은데, 현재로서는 안개가 뒤덮은 수많은 미로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것과 같았다. 기억 속에 있는 무공 중에서 회정결을 극복할만한 무공을 찾거나, 앞으로의 여정 중에서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참선(參禪)을 해오고 있지만 무작정 한다고 바로 길이 보이는 것이 아니니, 최소한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더라도 깨달음을 얻은 현자(賢者)나 고승(高僧)을 찾아서 물어보는 것이 지름길일 것이다. 일단은 비무행을 계속하면서 그런 사람에 대한 소문이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먼저 찾아갈 생각이었다. 무념신니(無念神尼)의 말대로 삶에 있어서의 집착과 번뇌에 대해서 물어보고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비록 무공과는 상관이 없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상념에 잠겨 있다가 흑아검(黑牙劍)을 빼들어 검신을 성월(星月)의 빛에 의지해 바라보았다. 날도 없는 검신은 자신의 마음처럼 어두운 검은 색으로 답답한 마음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대관절 현경(玄境)에 달하는 길은 무엇일까? 검을 휘둘러 천천히 육합검(六合劍)을 하나하나 풀어서 펼쳐보았다. 본래가 화산파(華山派)의 검법이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법이었다. 자신이 가장 먼저 익혔고, 또한 강호의 검법 중에서 가장 기본 초식으로 흠잡을 데가 없다고 생각한 검법이었다. 전후좌우와 상하를 합해서 육합을 공격하고 수비하는 것으로 다른 초식들도 이것을 어떻게 적절히 배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 것일 뿐, 기본적인 초식은 모두가 같다고 보아야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검을 들어 조천세(朝天勢)에서 상하로 내리긋다가 회전하며 사방을 가르고 다시 발을 굴러 뛰어올라 상하를 연이어 찔렀다. 사방 일 장(丈)을 벗어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단순하게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눈을 감고 오직 검결(劍訣)에 따랐다. 처음에는 천천히 정(精)·기(氣)·신(神)을 집중하여 펼치다가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휘익, 휙, 파앗” 시간이 갈수록 속도가 빨라져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해서 일행이 잠든 곳까지 들려왔다. 일행도 하나둘 깨어나 멀리서 보이는 검광(劍光)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시작이군. 도대체가 저 사람은 잠도 없나? 어떻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럴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구만.” 공손고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할 때, 한동안 바라보던 웅정향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데 오늘은 약간 이상하군요. 보통은 육합검(六合劍)을 서너 번 펼치는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저희가 지켜본 것만 해도 거의 반 시진(時辰)이 되었는데도 멈출 기색이 안 보이는군요.” “그건 그렇구만.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이렇게 멀리까지 울릴 정도로 전력을 다해서 펼친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공손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단리유아가 수련을 거른 적은 거의 없어서 최소한 육합검(六合劍)이나 나한권(羅漢拳)으로 몸을 푸는 정도는 기본으로 했고, 다른 무공도 한두 가지는 더해서 수련을 해왔었다. 일행도 무공을 틈틈이 수련해왔지만 단리유아처럼 매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일행도 단리유아의 수련에 익숙해져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해왔는데, 오늘처럼 한 시진이 넘어가도록 쉬지도 않고 계속 검법을 펼친 적은 없었던 것이다. “혹시 무언가 깨달음을 얻어 무의식중에 계속하시는 것 아닐까요?” “정말인가? 지금도 저렇게 강한데....” 음구의의 말에 공손고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한다. 그 노력과 무공에 대한 자질에 저도 모르게 질투심이 끓어올랐던 것이다. 자신은 벌써 육십이 다 되어가는 데에도 화경(化境)의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상승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반쯤 포기한 상태였는데, 이제 약관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단리유아는 화경의 끝에 다다라 현경(玄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경지로서도 상대할 자가 얼마 없을 터인데, 여기서 다시 벌어진다면 더더욱 차이는 벌어지게 될 것이다. 나이어린 후배를 질투하는 자신에 대해 씁쓰레한 기분과 환멸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질투가 났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약간의 질투심과 감탄이 반반이 된 상태로 치솟는 검광(劍光)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선상조가 주위를 둘러보며, “그런데 이 땅꼬마 놈은 어디로 갔지? 아까 같이 잠들지 않았던 건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웅정향이 놀라서, “이런! 지금 사숙이 막 상달(上達)의 기회를 잡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방해해서 건드리면 안 될 텐데....” “뭐요? 그럼 혹시 이 자식이?” 모두가 일어나 파타루를 찾아서 주위로 흩어졌다. 파타루가 중간에 끼어들어 단리유아가 검무(劍舞)를 멈추게 해서는 안됐다. 일행이 파타루를 찾아 나설 때, 이미 파타루는 단리유아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파타루도 고향 가까이에 다가오자 잠을 들지 못해서 일어나 강변을 따라 상념에 젖어 산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파공음이 들려오자 자신도 모르게 구경하려고 다가갔던 것이다. 자신도 연무 중에 지켜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동안에 몇 번 단리유아가 수련할 때에 지켜보아도 별 말이 없어서 오늘도 무심코 다가가고 있었다. 한편 단리유아는 육합검(六合劍)을 따라 천천히 펼치다가 점점 속도가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자신이 알고 있거나 강호(江湖)에서 익혔던 검법을 하나하나 펼쳐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답답한 마음에 평상시처럼 수련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검법을 연이어 펼치니 점점 자신도 검법에 빠져들게 되었다. 초반에는 검법들을 의식해서 초식을 하나하나 정확히 펼쳤던 것인데, 나중에는 그런 생각도 없이 무의식중에 검이 향하는 데로 휘두르고 있었다. 나중에는 검광(劍光)만 충천하여 오 장(丈) 이내를 뒤덮어 신형을 가려서 단리유아의 모습도 사라져버렸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세상만물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무념신니(無念神尼)의 말이 연신 뇌리에 울려 퍼졌다. 마음, 마음이라.... 집착과 번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번뇌와 망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일체의 현상에 대한 진실을 깨달아 한결같이 지키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는데, 오히려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그동안 자신이 너무나 현경(玄境)이라는 경지에 얽매어 갖가지 무공과 초식에,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마음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을 집착이라 여기지 못하고 다른 소소한 삶속에서 느끼는 것만 따졌으니 자신의 어리석음에 통탄할 수밖에 없었다. 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으로부터 혹은 어떤 노력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미 자신 안에 있었고, 일부러 찾을 필요도 억지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하는 그 마음을 멈추고 자신의 마음만을 관조하여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미 흑아검(黑牙劍)도 단리유아의 손에서 벗어나 주위 삼 장(丈) 이내를 떠돌며 검광(劍光)만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잠겨 서있는 단리유아의 주위를 천천히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었다. 그때, 가까이 다가왔던 파타루가 이 모습을 보고 놀라서 무의식중에 탄성을 질렀다. “아, 저럴 수가!” 그 순간 검(劍)은 땅에 떨어지고, 단리유아도 무아경(無我境)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고 파타루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을 알았지만, 책망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오늘과 같은 기연(奇緣)은 다시 오기 힘들 테지만, 이미 깨달음의 한 끝자락을 엿보았으니 머지않아 다시 계기를 만난다면 현경(玄境)에 들어서는 것도 더 이상 꿈이 아님을 알았다. 더 이상 조급해하거나 서둘러서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이제 어검술(御劍術)의 실마리는 어느 정도 알았으니 수어검(手御劍)도 얼마 안가서 완벽하게 펼쳐지리라 여겼다. 파타루도 자신이 소리를 질러 무언가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검광(劍光)이 멈추는 것을 보고 다가왔던 일행들이 땅에 떨어진 검과 파타루의 모습을 보고,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행이 다가와 안타까운 얼굴로 단리유아를 바라보고 위로했다. “야, 이 자식아! 내가 다른 사람이 연공할 때는 옆에 다가가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 누누이 말했잖아! 너 때문에 소사숙께서 일생일대의 기우(奇遇)를 놓치게 되었는데 어쩔 테냐?” 선상조의 말에도 풀이 죽어 아무 말도 못하는 파타루를 보고 단리유아가, “괜찮소, 선사질.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하늘이 파타루를 빌려 막았을 뿐, 결코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니 너무 책망하지 마시오. 게다가 어둠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는 길을 하나라도 찾았으니 그것만 해도 어디요? 또 앞으로도 다시 계기가 올 것이라 생각하오. 그리고 파타루,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이미 지나간 일이니.... 나도 잊은 지 오래니, 그대도 잊고 다만 앞일만 생각하기 바라오.” “그, 그래도....” 다시 이어지는 선상조의 말에도 고개를 저으며 말을 막고 땅에서 검을 주어든 후에, “도재당인안첩리(道在當人眼睫裡), 서래면목지여금(西來面目只如今). 갈음기손상현로(渴飮饑飧常顯露), 하용구구향외심(何用區區向外尋). 도(道)가 그대 눈썹 안에 있거늘,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지금도 묻고 있는가?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데서 한결같이 환하게 드러나는데, 무슨 일로 구구히 밖을 향해 찾을까?“ 한 줄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장내를 떠나갔다. 그 말을 듣고, 일행이 한동안 어리둥절해서 서로 돌아보다가 선상조가, “무슨 뜻이지? 이봐, 구의. 자네는 사숙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겠지?” “내가 무슨 모든 일을 알고 있을 사람이라 생각하나? 나보다는 공손선배나 웅사형이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음구의의 말에 공손고와 웅정향이 생각해보다가, “도(道)가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구만.” “나도 잘 모르겠네. 아무래도 상승의 무학에 관련된 말인 것 같은데, 우리 같은 범부가 알기에는 너무 어렵네.”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누구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잠깐 서로 바라보다가, 음구의가, “그런데, 소사숙께서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선상조가, “달라졌다니?” “자네는 이상하지 않는가? 보통 때에도 거의 감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렇다 해도 그렇다고 무감각하게 말한 것 같지는 않던데? 아까 파타루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 달라보여서 말일세.” “글쎄, 달라보였나?” 고개를 갸웃하는 선상조를 보다가 웅정향이, “흠, 음사제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조금 이상하군. 목소리는 변화가 없지만, 표정은 전과 약간 달라보였네.” “어떻게 달라져 보인다는 것입니까?” “글쎄, 뭐라고 말할까? 태도도 그렇지만 어투가 조금 이상해 보여서.... 비슷해 보이지만 전에는 무심했다면, 이제는 허허롭다고 해야 할까?” 단리유아에 대해 말을 주고받으며 한동안 떠들다가, “됐네. 그만하고 잠이나 자러가세. 벌써 축시(丑時:1-3시)가 된지도 한참일세. 내일 할 일도 많은데 어서 자야지. 그리고 성격이 변했다면 최소한 전보다는 좋게 변했겠지.” 공손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파타루를 데리고 다시 잠자리로 향했다. ****** 글이 길어져 이제야 올립니다. 기다리던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급하게 올리니 오타나 오류가 보이면 댓글에 써주세요. 여러분의 날카로운 지적이 제 글을 조금이라도 낫게 할 테니 말입니다. ###### senseoar 님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메시지로 소소한 부분까지 지적해주시니 뭐라고 고마움을 표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지적해주시고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이런, 이런. 수정했었는데, 버튼을 잘못 눌렀나 봅니다. 졸리니 이런 실수도 하네요. 고무족(鼓舞族) 고무족(鼓舞族) 3 일행과 헤어져 원래의 노숙하던 장소로 돌아왔다. 근처의 한 나무아래에 정좌하여 생각에 잠겨 조금 전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비록 무아경(無我境)에서 갑작스레 깨어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억지로 구하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 것만 해도 자신에게는 큰 진전이 될 것이다. 현경(玄境)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으려하는 마음을 멈추고 자신의 마음을 관조(觀照)하여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나, 본연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어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자재의 경지에 도달하여야함을 깨달은 것만 해도 그 자체로서 귀중한 것이다. 오늘의 기우(奇遇)가 비록 완전치는 않지만 캄캄한 어둠속에서 한 줄기 빛이 길을 밝혀주는 것과 같았다. 아직도 그 길은 멀지만, 미로 속에서 벗어나 하나의 길을 찾은 것만 해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터였다. 앞으로의 길도 순탄치 않을 것이고 길에서 벗어나 종종 헤맬 때도 있을 테지만, 오늘의 깨달음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경지에 이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이윽고 나머지 일행이 돌아와서 명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다가 중요한 순간임을 알고,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한쪽의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오 장(丈) 밖 나무 아래의 단리유아를 곁눈질로 보면서 부러움에 한숨을 쉬거나, 오늘 본 광경을 떠올리고 아까 말한 뜻 모를 소리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다음날 일행이 길을 떠나서 사시(巳時:9-11시)말경에 반라산(磐裸山) 아래에 이르러 헤어졌다. 일이 되든 아니돼든 사흘 후에는 파타루(芭朶婁)의 고향인 측허사(測歔瀉)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단리유아는 곧장 반라산으로 향했고, 나머지 일행은 강변의 수초에 몸을 숨긴 채 어제 상의한 파타루의 일족이 붙잡혀 노예로 있는 곳으로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 어제 말한 혼곡동(魂哭洞)은 반라산(磐裸山)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산 전체로 보아서는 북서쪽에 치우친 곳에 있어, 단리유아가 가는 방향에서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일단 반라산에 들어서면 이렇다할 나무도 없이 바위투성이와 가끔가다 드러난 황토가 보일 뿐이었다. 혹시라도 파수꾼이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신형을 숨겨서 어제 파타루가 말한 곳으로 다가가니 특이한 지형이 나타났다. 보통 계곡은 산위에서 아래로 향하며 낮아지는 것인데, 이 계곡은 산중턱에 생겨난 것인데도 오히려 들어갈수록 낮아지는 모습이었다. 이 것을 보니 안쪽에는 호수나 습지가 있거나, 물이 빠져나갈 수로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단리유아가 지켜보니 입구의 양쪽 언덕에 망루로 보이는 곳이 보였고, 그 사이 계곡의 입구에 고무족(鼓舞族)의 전사들로 보이는 집단이 모여 사는 듯한 집들이 보였다. 그리 경계가 삼엄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망루 위까지 합해도 지키는 사람은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파타루의 말대로라면 이백 명 정도가 있다는데, 나머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다.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테지만, 만일이라도 다른 곳으로 연락을 하거나 자신이 들어간 뒤에 누군가 찾아와 본다면 나머지 일행이 위험하게 될 지도 몰랐다. 아니 잠깐 다시 생각해보니, 차라리 일을 크게 벌려 소란을 일으킨다면 다른 곳에서 전사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지도 몰랐다. 그러면 일행이 일하는데 훨씬 수월할 것이다. 아무리 절정의 고수가 넷이라 해도 수적인 우세를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혹시라도 나머지 전사들이 힘을 모으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동안 생각하다가 후자의 방법대로 소란을 더 크게 만들기로 했다. 전사(戰士)들이 모이지 않더라도 모두가 이곳에 신경을 빼앗기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이곳은 고무족(鼓舞族)에게는 어느 곳보다 중요한 곳으로 수많은 독물을 채집하거나 기르는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단리유아가 신형을 드러내 곡 입구로 들어서니,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을 보고 모두가 놀라서 소리치거나 피리를 불어 곡내로 신호를 보낸다. 더 다가서 곡내로 진입하려할 때, 하반신만 대충가린 채 얼굴과 몸통에 온갖 기인한 문신을 한 전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오십여 명이 앞을 막아섰다. 그중에서 머리를 길게 땋아서 다시 이마주위로 돌려서 묶은 삼십대의 장한이 앞으로 나왔다. 남만인(南蠻人)으로서는 드물게 아주 큰 체격에 드는 육척의 전사였지만, 단리유아 앞에 서니 그래도 머리 한개 정도의 차이가 났다. 뭐라고 소리치지만 알아들을 수 없어서 우선은 이들을 모두 제압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모두 죽여 버릴까하다가, 자신과 별 상관도 없는데다 죽이는 것도 내키지 않아 제압하기만 하기로 했다. 어제의 일로 이유 없는 살생이 자신의 깨달음에도 결코 좋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떠드는 사람을 향해 검을 휘둘러 허공을 격하고 점혈(點穴)해 버렸다. “쿵” 말하다가 혈도가 눌려, 입을 벌린 채 뒤로 넘어가 큰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최소한 두 시진(時辰)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 모습에 모두가 놀라서 창이나 칼을 휘두르며 공격하거나 멀리서 화살을 날리는 등 한동안 소란스런 상황이 이어졌지만, 무공을 전혀 모르는 이들의 순수한 근력에 의지한 힘은 단리유아에게 전혀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다. 일각(一刻)이 지나자 대부분이 쓰러졌고, 망루위의 두 사람과 몇 사람이 서 있을 뿐이었다. 멀리서 칼을 휘두를 때마다 사람이 픽픽 쓰러지자 이들은 단리유아가 무슨 저주를 거는 줄 알고 두려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은 사람도 모두 쓰러지고, 망루도 기둥을 베어 넘어뜨린 후에 다시 곡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곡내로 백여 장(丈) 정도 내려가니, 한쪽으로 방원 오십여 장의 습지가 보였고, 그 주위를 따라 바위틈으로 길이 나 건너편 동굴까지 이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이 혼곡동(魂哭洞)으로 습지와 이십 여 장의 차이가 나는 절벽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습지 가까이 다가가니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수포사이로 여기저기 갖가지의 독물(毒物)들이 우글거리고 있었고, 일 장(丈)의 높이로 독기가 떠올라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이곳이 습지였다 해도 이렇게 많은 독물이 들끓는 것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습지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독물(毒物)이 많고, 종류 또한 다양했던 것이다. 각종 독사(毒蛇)에서부터 흑오공(黑蜈蚣), 삼광독령(三光毒蛉), 혈점독와(血點毒蛙), 도화반접(桃花斑蝶), 삼목섬여(三目蟾蜍), 적령승(赤逞蠅) 등 온갖 독물에다 습지 근처에는 구더기와 독개미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원래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단리유아가 내려오니 습지 가까이 맞은 편 동굴 속에서 백여 명의 고무족(鼓舞族) 전사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전사들은 내버려두고 독지(毒池)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군데군데 인골(人骨)로 보이는 뼈마디가 사방에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서 다가오는 전사들을 향해서 움직였다. 처음에는 휼리파(恤狸把)만 죽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대부분의 독지라는 것은 수천 년 동안 동식물이 쌓인 후에 천천히 부패하여 독물이 모여들고, 다시 독물들도 죽어서 점점 독지가 커지고 독기도 강해지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독물이 많았다고 하니 어느 정도 독지(毒池)가 활성 되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이렇게 독물이 들끓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이 정도의 습지에서 단기간에 이런 독물을 키울 정도라면, 수백 명의 사람이 시체가 되어 양분이 되고 시독(屍毒)이 더해져야 했다. 수백 명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았을 때였고,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었을 지는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무공도 익히지 않은 전사들을 죽이는 것에 꺼림직 했지만, 이 모습을 보니 아까 죽이지 않고 그냥 온 것이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혼곡동(魂哭洞)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때까지 있다면, 아무도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세사(世事)에 무관심하다고 해도 이렇게 무고한 사람을 죽여 독물의 밥이 되게 하는 족속들까지 살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살아있어 보았자 얼마나 더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갈지 모르니.... 휼리파(恤狸把)가 특별한 수단을 쓴 모양으로 백여 명의 전사들은 독기가 두렵지 않은 지 거침없이 단리유아를 향해서 다가왔다. 뭐라고 소리치며 무기를 휘두르며 접근하는 그들에게 적운도(赤雲刀)를 꺼내들어 천천히 다가갔다. 시끄럽게 떠드는 전사들의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도를 휘두르며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크흐키아악” 도성(刀聲)과 함께 붉은 색의 도영(刀影)이 뭉게구름 피어오르듯이 떠올라 사방을 뒤덮었다. 끔직한 도성에 귀청이 마비되거나 충격을 받아서 비틀거리는 전사들에게 지옥의 재앙이 떨어졌다. 도광(刀光)이 번쩍일 때마다 도성과 함께 자욱한 피 보라가 일어나 사위를 뒤덮인 가운데, 그 사이로 고무족(鼓舞族) 전사들의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흐윽, 으아악, 아악” “크흐키아악” 갖가지의 비명이 이어지며 조각난 시체가 사방으로 날렸다. 아직 장내에 도착하지 못하고 절벽 틈의 외길로 다가오던 전사들이,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귀를 막고 두려움에 떨면서 뒤로 물러서려했다. 앞을 가로막는 전사들을 죽이며 전진하던 단리유아는 길을 막는 자들은 아무도 살려두지 않을 작정으로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으으, 아, 악마다” 그 모습에 두려움에 질려 곳곳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소리쳤다. 또 다가오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뒷걸음치다가 좀 전까지도 동료였던 전사를 죽이고 물러서려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옆에 보이는 독지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차라리 독지에 빠져 죽는 것이 나았지 저렇게 산산조각이 나서 죽기는 싫었던 것이다. 일부는 사력을 다해 공격해보려 하지만, 귀청을 떨어 울리는 소리에 공격하다가도 멈춰서버려 애처로운 눈길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적운도(赤雲刀)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죽음의 향기(香氣)가 장내를 뒤덮어 일각이내에 동굴 앞에까지 시산(屍山)이 이어졌다. 동굴 속으로 달아난 자들은 이십 명도 되지 못해서 거의 백 명의 전사들이 일순간에 죽어버린 것이다. 단리유아가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닦으며 지나간 곳을 돌아보니, 조각난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줄줄이 내를 이루고 흘러내려 땅을 적시고 있었다. 또 습지의 독물들이 혈향(血香)에 이끌려 달려들고 있어서 장내는 완전히 독물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 중에 천살(天煞)을 타고났다고 했는데, 그것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운명(運命)인 것 같았다. 반 시진(時辰)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도, 또 다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다니.... 살인에 대해 별다른 감응은 없었지만, 아직도 운명을 벗어나는 길은 멀고 멈을 다시 생각나게 했다. 혼곡동(魂哭洞)으로 들어서니 지하에서 불어오는지 싸늘한 한풍이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몰아쳐왔다. 일 장(丈)의 높이와 폭을 지닌 천연 동굴인 것 같은데,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았는지 그을린 흔적과 함께 여기저기 횃불을 걸어놓은 곳이 있었다. 횃불에 불을 붙여 동내로 들어갔다. 길을 가다 숨어서 습격하는 고무족(鼓舞族)의 전사들을 가리지 않고 죽이며 전진하기를 백여 장(丈), 더 이상 가로막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두 개의 동굴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오른쪽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으로 보였고, 왼쪽은 차가운 냉기(冷氣)가 흐르고 귀곡성(鬼哭聲)이 이따금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이곳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은 사람의 흔적이 있는 곳을 둘러보기로 하고 계속 전진하자 고무족(鼓舞族)의 거처로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동굴 가운데 형성된 사방 십여 장(丈) 정도의 광장으로 여기저기 동굴이 뚫려 있었다. 이곳저곳을 뒤져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곳은 찾을 수 없었다. 몇몇 숨어 있던 전사들이 덮쳐온 것을 제외하곤. 한 쪽의 동굴에 독약과 독물들을 모아놓은 각종 병과 함이 있었지만, 별로 특이한 독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전에 갈라진 왼쪽의 동부에 휼리파(恤狸把)가 있는 것 같았다. 시체만 남아있는 적막한 동굴을 다시 뒤로 하고, 터벅터벅 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조금 전의 갈림길로 향했다. 거기서 냉기(冷氣)가 흘러나오는 왼쪽의 동부로 향해서 비스듬히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차가운 냉기가 밀려와 선혈(鮮血)에 젖어 축축한 옷을 얼어붙게 만들어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게 만들고, 뼈골에까지 스며드는 냉기에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내공을 운기하여 추위를 몰아내었지만, 그래도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움직임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횃불도 점점 약해지더니 결국 얼마 못가 꺼져버렸다. 동굴 벽에 맺힌 성에에 반사되는 희미한 광채를 의지하고 안력을 집중해도 오 장(丈) 이상 멀리 알아볼 수는 없었다. 얼마나 깊이 내려온 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백 장(丈) 이상은 내려왔을 것이라 생각할 때, 마침내 방원 삼십여 장(丈)의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의 중앙에는 오 장(丈) 정도의 시퍼런 빛이 이는 연못이 있었다. 광장 곳곳에는 횃불이 타고 있었고, 벽과 천정에 갖가지 광석이 박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연못의 건너편에는 오십대의 비쩍 말라 해골에 옷을 입혀놓은 듯한 모습의 낡은 흑의를 입고 머리는 붉은 천으로 둘둘 감싼 주술사(呪術師)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단리유아가 광장에 들어서자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머리카락도 없는데다 눈썹도 없고 웃을 때에도 이빨이 보이지 않는 괴상한 모습이었다. “킬킬킬” 서로가 십여 장(丈)의 사이를 두고 마주보았을 때, 단리유아가 칼을 들어 공격하려 하자, “킬킬킬, 이, 이제 보니 주, 중원인이로군.” 더듬거리는 데에다 잇몸사이로 새어나오는 소리여서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는 한어(漢語)로 말하고 있었다. 이에 단리유아가 약간 뜻밖이어서 공격을 멈추고, “한어를 알고 있군. 당신이 휼리파(恤狸把)요?” “클클클, 그렇다면 어쩔 텐가?” “당신도 당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크크, 무슨 짓이라니?” “습지에다 사람을 죽여서 일부러 독지(毒池)로 활성 시키지 않았단 말이오?” 그 말에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크클, 글쎄.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보다 본래 표정이 그런가?” “무슨 소리요? 말 돌리지 말고 습지의 일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하시오.”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킬킬킬. 이제 보니 살아있는 강시(彊屍)로군. 크크큭, 좋아 좋아. 안 그래도 강한 녀석이 필요했는데.” “왜, 사람들을 죽여서 독지를 더 확산시켰소? 단지 독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텐데?” “크크크, 궁금한 것도 많구만. 어차피 더 들을 일도 없을 테니 말해주지. 독물은 부수적으로 필요할 뿐이야. 다른 것을 완성하는데.” 이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독강시(毒彊屍)의 일종인가? 그렇다면 더 더욱 당신을 살려줄 수 없겠소.” “크크큭, 알량한 의협심(義俠心)인가? 키킬킬. 정말 중원인들은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더군.” “의협심? 그런 것은 모르지만, 당신 같은 인간을 보고 그냥 살려둘 자비심은 없소.” 막 단리유아가 도를 휘두르려 할 때, “잠깐. 크크큭, 이제 서서히 약효가 발동할 시간이 되었을 텐데?” “약효?” “킬킬킬, 가슴이 따끔거리지 않나?” “하독(下毒)한 것이오?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볼 수 없었는데?” “이미 네가 들어서기 전부터 했지. 이제 그만 쓰러지는 것이 어떤가?” 이미 단리유아가 들어서기 전부터 동굴 바닥에 은수사영(銀銹死迎)을 뿌려두고는 벽의 횃불에는 절이광초(截理抂草)를 섞어서 태우고 있었다. 은수사영은 아주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는 미세한 가루로, 그리 독성이 강하지도 않아서 약간의 부스럼 정도 나는 독(毒)으로 사실 독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절이광초는 마취제의 일종이기도 하고, 흥분제로 쓰기도 하는 것으로 역시 독초라 할 수 없었다. 은수사영은 공기 중으로 떠돌다 호흡을 타고 몸속으로 스며드는데, 만약 이때 절이광초의 향기를 같이 들어 마신다면 점차 굳어져 폐를 완전히 막아버리게 된다.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늦은 후여서, 숨을 쉴 수가 없게 되는 천하에 다시없는 극악한 독물로 변해 고수라 할지라도 견딜 수 없었다. “무슨 독이오?” “크크큭, 정말 특이하군. 이미 숨쉬기도 곤란할 텐데, 그런 것이나 물어보다니. 흐흐흐, 마지막이니 말해주지. 은수사영(銀銹死迎)과 절이광초(截理抂草)라네.” “은수사영, 절이광초? 그것들은 독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그 말에 의외라는 듯이 다시 한번 천천히 단리유아를 훑어보다가, “크크큭, 그런 사실도 아나? 보통사람은 평생가야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것인데? 크크큭, 대단하군. 자네 말대로 두 가지 모두 독이라 할 수 없지만, 함께할 때는 전혀 얘기가 틀려지지. 죽은 후에도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고.... 흐흐흐, 이제 궁금증이 다 풀렸나? 그러면, 기다리기도 지루하니 이제 그만 쓰러지는 것이 어떤가?” “잘 알았소. 나도 이제까지 지루했었는데, 사실을 알았으니 그만 끝내야겠소.” “뭐, 뭐라고?” 깜짝 놀라서 휼리파(恤狸把)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에, “팟” “크키흐아악” 일섬(一閃) 도광(刀光)이 일어나 목을 향해 다가왔다. 도성에 멈칫하다가 사력을 다해 고개를 젖히며 뒤로 물러섰다. “퍽. 푸학” 뒤로 물러서 피했지만, 이미 목이 절반 가까이 갈라져 피가 솟구쳐 나왔다. 목을 움켜쥐고 갈라진 목소리로 무어라 하는 것을 보고, “이제 보니 고루마공(骷髏魔功)류의 무공을 익혔군.” “어, 어떻게 주, 중독....” 급속도로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고 단리유아가 말하자, 다시 놀라움에 차서 휼리파(恤狸把)가 물어보았다. 자신이 아직까지 하독(下毒)해서 실패한 역사가 없었고, 사문(師門)에서도 이 독술(毒術)을 아는 자가 세 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 너무 길어져 여기까지 우선 올리지요. 나머지는 저녁에.... 오타나 오류가 보이면 지적해 주세요. ujoa 는 너무 한자가 깨져나오는 경우가 많네요.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던데.... 흠, 진짜무협광인 님 말대로 사문이 없는 강자가 나오기 힘들지요. 그런데 아직 남만에서 그런 인물이 나온 적이 없는데요. 흠족의 주술사의 사문을 밝히지 않아서 그런가요? 아마 그 부분은 더 다듬어야할 것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너무 간단하게 끝을 내버린 기분이 드네요. 사인곡은 대대로 전승되는 곳이고, 여기의 휼리파는..... 말하면 안돼요. 아직은.... 고무족(鼓舞族) 고무족(鼓舞族) 4 단리유아도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휼리파(恤狸把)의 말을 듣고 나서야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끼고 아차 했지만, 이미 벌써 독기(毒氣)가 폐를 채우며 밀려들고 있었다. 만일 자신의 내공이 특이하지 않고 또 동굴에 들어서면서 한기(寒氣)를 물리치기 위해 운기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더 이상의 중독을 멈출 수도 해독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구단전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특성 때문에 그나마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밀어내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일부분만 남아서 폐로 들어갔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완전히 독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으로, 수은의 일종인 은수사영(銀銹死迎)의 가루가 절이광초(截理抂草)와 만나서 굳어지는 것일 뿐 달리 독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더 이상의 유입을 차단하고, 구대혈에 모인 내력을 순서대로 옮겨 은수사영을 폐에서 몰아내야했다. 방심의 기회를 틈타 일도를 날렸지만, 상대 역시 고루마공(骷髏魔功)류의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완전히 죽일 수는 없었다. 일도에 죽이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끌어서 해독하는 동안 자신의 정확한 상태를 감추어야했다. “당신이 그런 특이한 무공을 익혔듯이, 나 역시 비슷한 것을 익혔다고 생각하시오.” “아무리 그래도....” 멀찍이 물러서며 말하다가 문득 단리유아가 다시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크크큭, 이제 보니 중독(中毒)되지 않은 것이 아니군. 단지 시간을 끌어 해독해보려는 심산으로군. 하지만 과연 그렇게 쉬울까?” “그리 어렵지도 않을 것이오. 그런데 그 무공은 어떤 것이오?” 이제는 상처의 흔적도 거의 보이지 않는 휼리파(恤狸把)의 목을 보면서 물으니, “킬킬킬, 왜, 궁금한가? 아마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지만, 뭐 간단하게만 말해주지. 자네 말대로 고루마공(骷髏魔功)에 속하는 것이지. 단지 흐흐흐, 진정한 고루마공이라는 것이 문제지.” “고루마공이라고? 그것은 이미 절전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고루마공(骷髏魔功)은 원시마교의 십이지맥 중의 하나인 고루마맥(骷髏魔脈)의 비전으로 과거 마교가 멸망하면서 같이 실전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고루마맥은 상고시대에 활시대묘(活屍大墓)와 함께 구시술(驅屍術)과 시독공(屍毒功)에서 있어서 양대산맥으로 알려진 곳으로 특히 고루마공은 마교 십대천마중의 일인인 고골마(骷骨魔)의 무공으로 성취가 높아질수록 점점 고루의 형상으로 변해서, 강기가 아니면 상처조차 입힐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고루마맥이 멸망한 후에 그 일부가 강호에 흩어져 몇 번 등장한 적이 있었지만, 완전한 고루마공이 나온 적은 없었다. “흐흐흐, 미안하지만 설명은 그만둬야 할 것 같네. 나조차 혼자서는 온전한 자네를 상대할 자신이 없거든?” “여기에 또 누가 있다는 것이오?” 단리유아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휼리파(恤狸把)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음충스런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자네 앞에 있지 않나? 흐흐흐.” 말과 함께, 품속에서 사람의 다리뼈로 만든 듯한 백골소(白骨簫)를 꺼내어 들었다. “고루마소(骷髏魔簫)?” “흐흐흐, 정말 대단하군. 단번에 알아보다니. 만일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자네와 사흘 밤낮으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을 것 같은데?” 말을 마치고 고루마소를 입으로 가져가 분다. 본래 구시술(驅屍術) 쪽에서는 활시대묘(活屍大墓)가 더 뛰어나 그들은 단지 말로서도 강시를 조정할 정도였고, 고루마맥은 무공 쪽이 더 뛰어난데 반해서 강시를 조종하기위해서는 고루마소 같은 여타의 수단이 필요했다. “삘리리. 삐이익.....” “푸하학!” 듣기에도 괴상한 피리소리가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어, 단리유아 앞 검푸른 연못에서 아홉의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전신에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채 나타난 그들은, 청록 빛의 피부에 회백색의 동공을 드러낸 채 시선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들 강시들은 원래 명칭이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로 천여 종의 독물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주입시키고, 다시 한빙담(寒氷潭)에 넣어서 음한지기(陰寒之氣)를 흡수시켜서 완성하는 것이다. 일단 전신이 독으로 이루어진데다가 골수에 음한지기가 쌓여서 내뿜는 내력에 자연스럽게 독기와 한기가 포함되어 나갔다. 독기 자체도 두렵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한기(寒氣)로 은연중에 침투하여 동작을 둔화시키고 혈맥을 얼려버린다. 본래 휼리파(恤狸把)는 안남산맥(安南山脈)의 중부인 수락지(藪落池)에 있는 독룡림(毒龍林)의 삼대장로 중의 하나였는데, 우연히 완전한 고루마경을 얻자 욕심이 생겨 독룡림을 뛰쳐나왔다. 독술사(毒術師), 독령사(毒靈師), 독공사(毒功師)의 삼대장로 중에서 독술사였는데, 독술을 제외하고는 그리 쓸만한 무공이 없었다. 대대로 독술사의 권한이 가장 작았고 실력이 뒤떨어지는 자가 맡았는데, 다른 장로와 달리 문파 내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에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독룡림(毒龍林)의 추적을 두려워하여 힘을 기르고 무공을 익힐 장소를 찾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여기 혼곡동(魂哭洞)이었다. 혼곡동 밖에는 비록 작지만 독지가 있었고, 내부에는 한빙담(寒氷潭)이 있어서 자신의 무공을 완성하는 데에도 강시를 만드는 데에도 최적지였다. 고루마공(骷髏魔功) 자체가 시독(屍毒)을 필요로 한데다 음성의 무공으로 음한지기가 있는 곳에서 수련하는 것이 속도가 훨씬 빨랐던 것이다. 어리석은 고무족(鼓舞族)의 전사들에게 독술을 펼쳐 일시적으로 강하게 만들었지만, 대부분이 독술을 건지 삼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 전사 중에서 그래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거의 독인(毒人)에 다다른 자들이 몇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지금의 강시가 된 자들이었다. 독강시가 되기 위해서는 선천적으로 독물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야했다. 천여 종의 독물을 주입받다가 한줌의 독수로 녹아버리는 것이 대부분으로 독기를 버틸만한 근골을 찾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거의 백 명이 넘는 전사들 중에서 겨우 이들만이 연시과정에서 살아남아서, 최후로 한빙담(寒氷潭)에 담겨져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휼리파(恤狸把)의 피리소리가 계속되자, 강시들이 일제히 단리유아를 향해서 공격을 해왔다. 고루마소를 입에서 떼면서, “클클클. 잘 놀아보게. 내가 삼십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네. 아마 자네의 상대로 부족함이 없을 걸세.” 현재 단리유아의 상태는 은수사영(銀銹死迎)을 완전히 몰아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급격한 움직임은 폐의 호흡량을 증가시켜 중독을 촉진할 뿐으로 되도록 움직임이 없이 내력으로 은수사영을 몰아내야했다. 내력을 오할 이상 끌어올리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일단 피하면서 횃불과 함께 불타는 절이광초(截理抂草)를 없애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홉의 강시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을 피하며, 광장안의 횃불을 차례대로 꺼나갔다. “팟” “크키흐아악” 도광(刀光)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도성(刀聲)과 함께 횃불이 잘려나가 땅에 떨어져 나갔다. 반각이 안 되어 광장의 횃불이 모두 껴져서 벽과 천정에서 자연적으로 빛을 내는 광석의 희미한 빛만이 장내를 비추고 있었다. 거의 일 장(丈)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빛이어서 장내에는 움직이는 인기척만 느껴질 뿐 제대로 상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독을 몰아내 거의 대부분의 내력을 회복했지만, 이에 비례하여 강시들의 속도도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져있었다. “콰 꽝!” 강시들이 후려치는 경력이 벽에 부딪쳐 계속해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독기(毒氣)와 한기(寒氣)가 몰아쳤다. “삐이익, 삘리리....” 옆에서 단리유아가 싸우는 것을 바라보던 휼리파(恤狸把)가 다시 고루마소를 불어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의 배치를 바꾸었다. 무작정 뒤를 쫓으니 강시가 아무리 자연스럽게 움직인다고 해도 단리유아를 쫓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광장의 입구 쪽에 둘을 배치하고 나머지도 각각 사이를 벌린 후에 서서히 단리유아를 향해서 접근케 했다. 단리유아 역시 더 이상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은수사영(銀銹死迎)도 거의 몰아내 이제는 내력의 수발도 자유로웠다. 미량의 독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 정도는 크게 운기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덮쳐오는 강시를 맞이하여 적운도(赤雲刀)를 휘둘러서 공격에 들어갔다. 한편, 단리유아와 헤어진 일행들은 강을 따라 갈대숲에 몸을 숨기며 삼십여 리 아래 고무족(鼓舞族)의 노예들이 있는 곳까지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두 시진(時辰)이 흘러 정오가 다되어 그들이 근처까지 도달했을 때 웬일인지 백여 명의 전사들이 반라산(磐裸山)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서로 바라보며 무슨 일일까 생각하다가 웅정향이, “흠, 아무래도 소사숙이 가신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군. 일부러 소란을 피우신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일로 절반 이상의 전사들이 한꺼번에 몰려갈 필요는 없을 테니. 소사숙께서 일부러 소란을 피워서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으니, 우리의 일은 훨씬 수월하게 되었습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지만, 한꺼번에 삼백 명을 상대한다는 것은 저희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음구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때, 공손고가, “자네 말대로 일은 쉬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백오십 정도의 전사들이 남아있다고 보아야 하네. 이제 어떻게 할지 자세히 생각해보세.” “뭘 어떻게 합니까? 그냥 덮쳐 모두 죽인 후에 빨리 소사숙을 도우러가야지요.” 선상고의 말에 공손고가 혀를 차면서, “쯔쯧, 자네는 그렇게 생각이 없나? 어제 저녁에는 안 된다고 큰소리치더니 오늘은 어서 공격하자고 하니,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백오십 명을 죽이기가 말처럼 쉬운 줄 아는가? 칼질 백오십 번 하면 모두 죽일 수 있겠지만, 눈앞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계속 칼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는가? 절체절명의 위험 하에서 어쩔 수 없는 경우나 살인마가 아니고서는 결코 그렇게 못해.” 발끈해서 대꾸하려는 선상조를 끌어 앉히며 음구의가, “맞습니다, 선배님. 저희가 다 죽이려하면 무공을 모르는 사람 백오십 정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렵다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될 수 있는 대로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음구의까지 공손고를 편들자 선상조가 뚱해서 뒤로 물러나 앉는다. “일단은 경계를 서는 놈들부터 제압한 후에, 마을로 들어가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을 제압해야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살인은 하지 않아야 앞으로 우리가 여행을 계속하기에도 편할 것입니다. 한꺼번에 백오십 명을 죽여 보십시오. 아마 면전에서는 속으로 갖은 욕설과 살심을 품고 있다 해도 두려워 별다른 행동을 못하겠지만, 남만(南蠻)인들의 공분(公憤)을 사게 되어 이제까지와 달리 처처에서 암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일행이 흠족(歆族)을 지나오면서 무덤집을 건드린 사건으로 여기저기서 적대적인 부족과 싸우기도 하고 남만(南蠻)의 고수들이 찾아와 덤비기도 했지만, 그리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개 부족의 전사들을 떼로 몰아 죽인다면 이야기가 틀려져 앞으로는 물 한 모금 마음편이 먹을 수 없게 될 지도 몰랐다. “파타루, 자네가 한 번 말해보게. 우리가 보기에는 모두가 똑같아 보여서 누가 우두머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어떻게 분별할 방법이 없겠나?” 음구의의 말에 어젯밤 이후로 풀이 죽어 있던 파타루가, “부족마다 약간씩 틀린데, 고무족(鼓舞族) 전사들은 몸통에 문신한 동물의 머리수에 따라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다섯 개 이상이라면 열명의 전사를 거느린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일단 그런 놈들은 없애기로 하고, 나머지는 가급적 제압하는 방식으로 합시다. 정 안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리고 일단 둘로 갈라져 저희와 파타루가 강을 따라 내려가며 제압할 테니, 공손선배와 웅사형이 반대편으로 돌아서 경계하는 자들을 제압하여 반대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구의의 말에 웅정향이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 방법은 좋지 않다고 보네. 우리가 단지 몇 명을 구출하려고 한다면 자네 말대로 하는 것이 낫겠지만, 여기 잡혀 있을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는 데는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네. 혹시라도 발각된다면 저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할 기회만 줄 뿐이니. 차라리 마을의 중앙으로 쳐들어가 대다수의 전사들을 먼저 제압하는 것이 낫다고 보네. 설혹 들키더라도 소수만 남았을 테고, 소사숙 때문에 당분간 더 이상의 전사들이 오기는 힘들 테니.”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며 그렇게 하기로 한다. 공손고와 웅정향이 한조가 되고, 남파쌍검(南波雙劍)과 파타루가 한조가 되어 마을을 향해가면서 적들을 제압하기로 했다. 파타루는 싸우지 않고 경계만 하면서 일행이 적을 제압하기로 하고 정면의 마을을 향해서 다가갔다. 최대한 근접하다가 더 이상 은폐할 곳이 없는 삼십 장(丈) 정도의 거리만 남겨두었을 때, 일제히 일어나 마을을 향해서 신법을 펼쳐다가갔다. 모두가 어려운 싸움이 될 것으로 여기고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다가오는 일행의 모습에 파수가 호각(號角)와 각적(角笛)을 불 때, 이미 일행은 마을내로 들어서며 눈에 보이는 족족 고무족(鼓舞族)의 전사들을 제압해갔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죽이지 않았지만, 최소한 사지 중 한곳을 부러뜨려 더 이상 반항할 수 없게 만들면서 계속 전진했다. 마을의 중앙부에 다다랐을 때, 벌써 이십여 명이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제압당했다. 파타루도 처음에는 그저 뒤에서 따라오기만 했는데, 일행의 모습과 고무족(鼓舞族)을 보고 흥분하여 보이는 족족 상대에게 달려들어 살초를 펼쳐 죽이고 있었다. 삼십여 명의 전사들이 모여들어 조직적인 저항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어서 네 명의 절정고수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곳곳에서 뼈가 부러져 비명을 지르거나 급소를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반 시진(時辰)이 안 되어 일행은 별다른 상처 없이, 고무족의 전사들 대부분을 제압할 수가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은 뜻밖에도 파타루로, 전신에 피 칠을 하고 있었고 살인의 흥분으로 온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일단 노예들을 가두어두는 곳 같은 우리 속에 고무족 전사들을 모두 집어넣은 후에 어떻게 할지 상의했다. “아무리 이들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해도 너무 일이 쉽게 끝난 것 같군. 상당히 위험한 일대혈전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손고의 말에 웅정향이 파타루를 보면서, “정말 저들이 고무족(鼓舞族)의 전사들이 맞나? 우리가 기습해서 이들이 별다른 저항을 못했다고 해도, 이렇게 수준이 낮은 전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그동안 이곳을 공격한 부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인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 얼굴과 살인의 충격으로 반쯤 멍한 상태로, “누, 누가 이렇게 고수들이 공격하리라 생각하겠습니까? 또 그동안은 휼리파(恤狸把)의 악명 때문이라도 접근하지 않았고, 다른 부족의 전사들은 이들과 상대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그런데 전사들이 백오십 명 정도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어째서 오십 명 정도 밖에 안 되지? 또 노예들은 어디로 갔길 래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 파타루, 정말 자네 일족이 이곳에 붙잡혀 있는 것이 맞나?” 음구의의 물음에 그제야 생각이 미쳐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작년에 제가 도망칠 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모여 있다고 했는데, 대체 그 동안 어디로 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의 집들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자, 논이 있는 들판으로 뛰어가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그러나 논에도 풀만 무성할 뿐이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파타루가 낯선 몽족(夢族)의 언어로 누군가를 연이어 부르다가, 신형을 돌려 고무족(鼓舞族)이 들어가 있는 우리로 다가와 한 사람을 끄집어낸다. “여기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지?” 파타루가 고무족(鼓舞族)의 말로 물어보는데도 아무 말도 않자, 근처에 있던 대나무를 들어서 내리치며, “어서 말하지 못해! 너 말고도 물어볼 사람은 많고 많아. 빨리 말하란 말이다.” “퍽. 퍼벅.” “윽, 으윽, 악” 한동안 매질이 계속되자 그제야, “마, 말하겠소. 그러니. 제발 그만....” 잠시 후에, 띄엄띄엄 거리며, “여, 여기 있던 사, 사람들은..... 아악, 마, 말할 테니. 그, 그만. 모, 모두가 호, 혼곡동(魂哭洞)으로 끄, 끌려갔소.” “뭐, 뭐라고? 호, 혼곡동? 혼곡동....” 고무족(鼓舞族) 전사의 말에 경악하여 한동안 계속 넋을 잃고 소리치다가, 칼을 빼들어 이성을 잃고 상대를 마구 내리친다. 피가 튀고 살점이 여기저기로 튈 때, 보고 있던 일행이 달려들어 붙잡아 진정시킨다. 한동안 몸부림치다가 울부짖으며, “흐흐흑, 이, 이 죽일 놈의 고무족(鼓舞族) 놈들이 다른 사람들을 혼곡동(魂哭洞)으로 모두 보내어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흑흑, 나보다 한살아래의 동생도 있고 사촌과 친척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았단 말입니다.” “혼곡동에 갔다고 모두 죽었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웅정향의 물음에 소리치며, “혼곡동(魂哭洞)이 왜 그런 말이 붙었는데요. 단지 동굴에서 나오는 소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래전부터 이놈들이 포로들 중에서 사람들을 독지에 빠뜨려 죽여서, 원한을 가진 귀신이 울부짖는다고 해서 그런 것이란 말입니닷! 으드득, 내, 내가 이놈들을 그냥두면 사람이 아닙니다. 흑흑.”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일행이 한동안 멍해 있을 때, 일행의 손을 뿌리치고는 고무족(鼓舞族)이 잡혀있는 우리로 뛰어 들어가 칼을 휘둘러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었다. “으악, 아악” “살려주시오. 제발, 모 목숨만.” 비명소리와 함께 고무족(鼓舞族)의 말로 살려달라는 소리가 장내를 시끄럽게 울릴 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일행이, “공손선배,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일족이 죽었다고 저렇게 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것 입니까?” “웅사형,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제기랄, 아무리 자기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요. 빌어먹을, 저 자식도 불쌍하게 됐군. 갖은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일가친척이 때죽음을 당하다니. 퉤, 저 빌어먹을 고무족(鼓舞族)놈들 같으니라고, 어떻게 한두 명도 아닐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을 독지에 빠뜨려 죽이다니. 만일 나한테 저런 일이 생긴다면 끝까지 찾아내어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릴 텐데.” 공손고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선상조가 끼어들어 소리친다. 이에 공손고가, “그래도 일단 진정시키고 보세. 저렇게 마구 죽인다고 이미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나?” “젠장, 난 모르겠수.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하시오.” 일행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도 계속 비명이 이어지고 생을 구걸하는 애달픈 소리가 들려왔다. 웅정향이 보다 못해 들어가 광기에 가득 차 고무족(鼓舞族)을 죽이다, 자신도 몰라보고 칼을 휘두르는 파타루를 피하며 혼혈을 눌러 제압했다. 쓰러지는 파타루를 안고 나왔을 때, 우리 안에 살아남은 고무족은 채 열명도 되지 않았다. 죽지 않았어도 치명상을 입어 비명을 지르는 자가 대부분으로 장내는 시체와 함께 피바다와 조각난 사지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공손고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휴, 끔찍하구만. 제기랄, 일이 이렇게 되다니.” “어서 자리를 뜨지요. 아무래도 지금쯤은 수뢰곡(水瀨谷)에 있는 족장이라는 자도 소식을 들었을 테니.” 음구의의 말에 일행이 동의하며, 정신을 잃은 파타루를 데리고 장내를 떠나서 건너편의 측허사(測歔瀉)로 향했다. 오늘과 같은 일을 겪으니, 일행 모두가 심사가 복잡했다. 음구의와 선상조는 기억할 때부터 여기저기 구걸하던 것이 처음이라 알고 있는 피붙이가 천지간에 없어서, 이런 일을 보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졸지에 일가친척을 잃은 파타루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웅정향은 젊었을 때 적의 손에 가족을 잃고 혈혈단신이 된 자신의 처지가 생각나 역시 우울해졌다. 공손고는 강호에서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어서 그리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지만, 역시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참조 & 설정] [1] 고루마맥(骷髏魔脈) : 원시마교 십이지맥 중의 일파로서 활시대묘(活屍大墓)와 더불어 구시술(驅屍術)과 시독공(屍毒功)에 있어서 시조로 여겨지고 있음. 마교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고, 최고 무공은 고루마공(骷髏魔功). 고루시독수(骷髏屍毒手). 절멸된 후에 강호에 흩어진 무공 중의 일부가 전해져 백골문(白骨門)과 강시곡(彊屍谷) 등이 생겨났음. [2] 활시대묘(活屍大墓) : 고루마맥과 더불어 구시술과 시독공에 있어서 시조로 여겨지는 문파. 고루마맥과 달리 구시술 쪽에 뛰어났고 강시제조에 있어서도 한수 위라고 여겨짐. 본래가 사파(邪派)라 할 수 없는 곳으로 시신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던 사람들이 모여 이룬 단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번성했지만, 제 이차(二次)정마대전(正魔大戰:수라혈교와 천지검문, 광한궁, 태양곡간의 싸움)이 일어난 칠백여년 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멸망했음. 흩어진 구시술 중의 일부가 강시곡(彊屍谷)에 전해졌고, 대부분은 천리상문(千里喪門)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고수와 강시제조술은 찾아볼 수 없음. ****** 늦게나마 올립니다. 길어지니 어쩔 수가 없군요. 오타와 오류는 댓글에..... 베넘톡시크 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아이디가 특이하군요. 무슨 특별한 뜻이 있는지? 토요일은 못올릴 것 같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오니 벌써 12시가 넘어가는 군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일요일에는 별 일이 없으니 올리도록하겠습니다. 고무족(鼓舞族) 고무족(鼓舞族) 5 일행이 고무족(鼓舞族)의 잔인한 행위에 경악하고, 파타루의 광기(狂氣)에 찬 살육에 심란한 가운데 측허사(測歔瀉)로 향할 때, 단리유아와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와의 싸움도 점입가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일 장(丈)이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서로간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혈청독강시가 발하는 한기가 포함된 경력이 뿜어져 나와 광장내부에는 한무(寒霧)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크키흐아악” “카캉. 꽈꽝” 계속해서 도성(刀聲)이 울리며 도광(刀光)이 이는 가운데 도기(刀氣)가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를 향해 날아갔다. 강시와 부딪칠 때마다 폭음이 터져 나오고 강시가 뒤로 날아 가지만, 이내 멀쩡하게 일어나 다시 공격에 가담하는 일이 한동안 이어졌다. 도기로는 한 줄기 흔적만 남길 뿐이어서 강철을 그대로 내리친 것 같았다. 현 강호의 일반적인 강시라면 어딘가 약점이 있거나 신체자체도 이 정도까지 강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연성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 도저히 강시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고, 속도도 빨라 절정의 고수라도 손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울 같았다. 휼리파(恤狸把)의 말에도 설마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고루마맥(骷髏魔脈)의 비전(秘傳)으로 만든 강시 같았다. “크키흐아악” “카캉. 꽈꽝” 한동안 어둠속에서 공방이 이어지다, 단리유아는 이렇게 하다가는 자신이 먼저 지쳐 쓰러지게 될 것임을 알았다. 비록 아직까지 이렇다 할 상처는 입지 않고 있었지만, 한기(寒氣)와 강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毒氣)에 점차 운신(運身)하는데 지장을 받고 있었다.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을 펼칠 결심을 하고는 먼저 정면에서 덮치는 강시에게, “크키흐아악” “퍽, 꽈꽝” “끼악!” 한 줄기 붉은 섬광(閃光)과 함께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에 의해 가슴에 구멍이 뚫어진 채 뒤로 날아갔다. 여태까지 비명 한 마디도 없더니 자신의 도성(刀聲)에 못지않은 듣기 싫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강(刀剛)에 맞아서 가슴이 주먹만큼이나 터져나갔음에도 이내 일어서 다시 다가와 공격에 끼어들었다. 게다가 터진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독혈에 바닥이 피시식 거리며 녹아나고, 독무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이은 강시들의 공격은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피하며, 방법을 바꾸어 도강을 적운도(赤雲刀)에 둘러싸 직접 부딪쳐 공격을 막았다. “크키흐아악” “콰쾅, 꽈꽝” “끼악! 끼끽” 확실히 도강(刀剛)으로 이루어진 공격에는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라도 견딜 수 없는지, 여기저기 몸 한 쪽의 살점이 떨어져나가거나 손발이 날아가기도 하여 잠시 동안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이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던 휼리파(恤狸把)가 경악성과 함께, “아, 아니 저놈이? 빠드득, 내가 반갑자 동안 이런 오지(奧地)에 처박혀 갖은 고생을 하며 만든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를?” 휼리파(恤狸把)도 자신의 목을 노렸던 공격에 단리유아가 도강(刀剛)을 쓸 수 있는 것을 알았지만, 저렇게 오랫동안 유지할 정도의 고수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자신의 독술(毒術)에 중독되어 얼마간은 버틸지 모르지만,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에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도 고루마공(骷髏魔功)을 십성까지 익힌 것이 최근으로 화경에 달한 것도 오년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제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상대의 모습에 설마 했던 것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아무리 한혈청독강시라 해도 완파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으로 보여서 다른 수단을 찾아야했다. “삐이익. 삘리리....” 휼리파(恤狸把)가 고루마소(骷髏魔簫)를 불자 장내의 상황은 또다시 바뀌었다. 이제까지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의 공격이 손발을 사용한 단순한 공격이었다면, 고루마소의 소성이 시작됨과 함께 상처를 입더라도 우선적으로 단리유아를 붙잡으려는 형태로 바뀌었다. 팔다리가 하나 떨어져 나가도 어떻게 해서든 붙잡으려는 강시들의 공격에 단리유아도 점점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가까스로 치명상은 피하고 있었지만 곳곳에 상처가 난데다 내상도 점차 가중되고 있었고, 한기(寒氣)와 독기(毒氣)가 상처를 타고 들어오는 상황이 되어 운기에도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무리한 공격을 하지 않고 한혈청독강시를 제압한 후에 휼리파를 상대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이렇게 가다가는 움직일 공간이 점점 줄어들어 결국에는 강시에게 붙잡히게 될 지도 몰랐다. 목을 자르거나 완전히 분시(分屍)하기 전에는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초식을 바꾸어 내력의 소모를 무릅쓰며 백팔산영환마보(百八散影幻魔步)와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를 동시에 펼쳤다. “크키흐아악.....” “꽈꽝, 퍼퍼벅” 도성(刀聲)과 함께 시뻘건 도영(刀影)이 장내를 뒤덮으며 일어나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를 둘러쌌다. 한동안 도강(刀剛)이 격중 되는 소리와 끔찍한 도성이 연이어 울리더니, 이윽고 조각난 살점과 독혈(毒血)이 사방으로 튀어 벽과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뒤따르며 광장 안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퍼퍼퍽. 투툭” 강시들이 조각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휼리파(恤狸把)가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덮쳐왔다. 아직 완전히 중독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닌 데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한 공격으로 내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무리해서라도 오늘 여기서 깨끗이 죽여 버려야 나중에 후환이 없을 터였다. 휼리파가 충격에 빠져 단리유아의 공격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다가, 삼 장(丈)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다. 단리유아가 도를 좌우로 휘둘러, “크흐키아악” 도성(刀聲)과 함께 붉은 도강(刀剛)이 일 장(丈) 가까이 늘어나 휼리파(恤狸把)를 좌에서 우로 갈라갔다. 지옥일수혼(地獄一殊魂)을 보고 휼리파도 양손에 고루시독수(骷髏屍毒手)를 펼쳐 막아섰다. 회백색의 강기(剛氣)가 구름처럼 일어나 도강에 맞서 부딪쳤다. “콰쾅. 파팡” 도강(刀剛)과 수강(手剛)이 부딪쳐 폭발하면서 두 사람이 그 반동으로 각기 뒤로 물러섰다. 흩어진 강기에 부딪쳐 땅바닥의 돌조각이 튀어 오르고, 흙먼지가 공중에 퍼져 장내를 뒤덮었다. 단리유아는 시독(屍毒)이 포함된 고루시독수(骷髏屍毒手)와 부딪친 후에 뒤로 물러나 피를 토해내며 내상을 억누르고 있었다. “우욱, 울컥” 이때 휼리파(恤狸把)도 단리유아의 공격에 미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심각한 내상과 함께 왼팔에 직접 부딪친 도강에 의해 큰 상처를 입고 고루마공(骷髏魔功)으로 상처를 회복하는 중이었다. 힐끗 상처를 바라 보다 고개를 돌려, “크크큭, 한혈청독강시(寒血靑毒彊屍)와 싸운 후에도 이런 위력적인 공격을 계속하다니.... 쁘드득, 네 놈이 대단한 것은 내 인정하지. 하지만 삼십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노력을 망쳐버린 네 놈을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오. 누가 그런 짓을 하라고 했소? 당신이 비록 악명(惡名)이라도 명성을 떨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곳에 찾아올 일도 없었을 것이오.” “뭐? 뭐가 자업자득이란 말이냐?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런 버러지 같은 놈들 몇 명 죽인 것이 무슨 큰일이라는 말이냐? 흥!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나쁜 놈도 부지기수인데도 그런 놈들은 잘만 살아가지 않더냐? 인과응보(因果應報)? 무슨 엿 말아 먹는 헛소리냐?” 휼리파(恤狸把)의 노성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오? 이번에 생사를 갈라서 누가 옳은 소리를 했는지 봅시다. 강호(江湖)에선 살아남는 자의 말이 정의이니.” 말과 함께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이번 공격에 상대방을 끝장내야 했다. 내상이 심한 것도 문제지만, 이전의 완전하게 해독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계속 시간을 끌어 시독(屍毒)에 중독이라도 된다면 시간이 갈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앞으로 뛰쳐나가며 전력을 모아서 도를 휘둘러, “크키흐아악” 허공에 붉은 색의 도영(刀影)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가운데, 구름 속에서 아홉 가닥의 도강(刀剛)이 마치 벼락처럼 연이어 일어나 휼리파(恤狸把)를 향하여 공격해 들어갔다. “번쩍! 콰콰쾅” 휼리파도 단리유아가 공격할 자세를 취할 때부터 온 몸의 내력을 모아서 양 손에 집중하여 고루시독수(骷髏屍毒手)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도 역시 수강(手剛)을 양손에 모아 고루시독수의 일초인 고루광독만(骷髏廣毒滿)을 펼쳤다. 회백색의 시독강(屍毒剛)이 구름처럼 일어나 사방을 뒤덮으며 단리유아의 공격에 맞서갔다. “쿠쿠쿵” 이때 단리유아의 공격을 보면서 처음에는 별다른 이상을 못 느끼다가, 갑자기 도영(刀影) 속에서 아홉 가닥의 혈섬(血閃)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휼리파(恤狸把)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피하려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콰콰꽈쾅” “으악! 으윽” 벼락 치는 굉음과 함께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장내는 강기의 폭발에 의해 흙먼지가 일어나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아홉 가닥의 도강은 휼리파(恤狸把)를 산산조각을 내고도 여력이 남아서, 그 주변에 일 장(丈) 정도의 깊이를 지닌 구덩이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흩어진 휼리파의 시체조각이 떨어질 때, 단리유아 역시 휼리파의 최후의 공격에 당해서 뒤로 물러나 입에서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우욱. 울컥” 휼리파는 도저히 단리유아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자, 최후의 수로 동귀어진(同歸於盡)을 노렸던 것이다. 휼리파가 양손에 시독(屍毒)을 집중하여, 마치 검을 끊어 날리듯이 손목을 끊어서 양손을 단리유아에게 날렸던 것이다. 한손은 겨우 피했지만 다른 손은 옆구리에 박혀서 검은 독혈(毒血)이 줄줄이 떨어지는 가운데, 점차 시독이 전신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만약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단리유아도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겠지만, 그동안의 격전으로 인한 내외상(內外傷)으로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독기(毒氣)가 치밀어 올라 정신을 혼미케 하는 가운데, 옆구리에서 손을 떼어내고 지혈했다. 상처도 상처지만 일단은 시독(屍毒)을 어떻게 해야만 했다. 현재 상태가 계속된다면 평범한 사람의 공격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입구주위에 간단한 기문진(奇門陣)을 펼친 후에 가좌부를 틀고 앉아서 시독을 제어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을 일으켜 백회(百會), 인당(印堂), 화개(華蓋), 단중(膻中)의 네 단전은 정신을 잃지 않게 독기(毒氣)가 머리 쪽으로 퍼지는 것을 막고, 이하의 단전에서는 시독(屍毒)을 제어하고 흡수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동안 휼리파(恤狸把)가 모아온 시독이 얼마나 많고 지독한지, 만일 사인곡(蛇人谷)에서 각종 독사들에 전체적으로 한번 중독되지 않았었다면 단리유아 역시 결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독정(毒精)만을 흡수하고 나머지 독기는 모공을 몰아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룻밤을 꼬박 새고 나서야 대부분의 독기를 없애고 독정만을 남겨둘 수 있었다. 시일을 두고 독정을 천천히 흡수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외상이야 운기하는 도중에 지혈은 되어서 여기저기 검붉은 피딱지가 붙은 모습이었다. 자리에 일어나서 옷을 벗으려하자 모공을 통해 배출된 시독(屍毒)에 옷이 삭았는지 부스럭거리며 떨어졌다. 상처부위에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를 바르고 자옥신단(紫玉神丹)을 복용한 다음, 다시 좌정에 들어 내외상(內外傷)을 치료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운공에 든 지 두 시진(時辰)이 지난 후에 다시 일어났다. 며칠 더 치료해야 되겠지만, 일단 급한 불은 끈 상태로 움직임에 그다지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되었다. 또 걱정하며 기다릴 일행을 생각해서라도 지금쯤에는 출발해야했다. 부스러진 옷은 버리고 등 뒤에 매고 있던 봇짐에서 옷을 꺼내어 입었다. 역시나 독기에 삭아서 성한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안 입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광장을 벗어나 오백여 장(丈)을 넘게 걸어 동굴이 둘로 갈라지는 지점에까지 다가왔을 때, 한 무리의 고무족(鼓舞族) 전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본래 휼리파(恤狸把)가 있는 동굴은 금역(禁域)으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데다, 한기(寒氣)가 지독해서 무공을 모르는 일반전사들이 들어서기는 불가능했다. 이들은 어제의 변고를 듣고는 몰려온 고무족의 전사들로, 휼리파의 동굴에서 난데없이 이방인이 나타나자 모두가 흉흉한 안색으로 노려보았다. 어제 자신들이 찾아왔을 때는 사방에 조각나 흩어진 시체만을 찾을 수 있어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는 가운데, 동료들을 이렇게 만든 인간에 대해 모두가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산발한 머리카락과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핏줄기가 대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듯해서 모두가 살기(殺氣)를 일으키며 단리유아를 노려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런 소란스런 상황에서 뒤쪽으로부터 한 사람이 크게 소리를 쳐 장내를 진정시켰다. 단리유아가 보니, 몸통전체에 커다란 흑호(黑虎)의 문신이 새겨진 사십대의 사나운 얼굴의 전사였다. 아마 이 인물이 고무족(鼓舞族)의 족장이라는 르바이 쿠무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휼리파(恤狸把)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겠지만, 이 자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르바이 쿠무가 자신을 향해서 뭐라고 떠드는 소리를 한참 있다가 단리유아가, “당신이 르바이 쿠무요?” 단리유아의 물음에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단리유아를 궁금한 얼굴로 바라본다. “크흐키아악” “팟!” 한줄기 붉은 섬광(閃光)이 일어나 르바이 쿠무의 목을 가로지나갔다. 땅에 떨어진 목은 아직도 무슨 일인지 모른 채 궁금한 얼굴로 단리유아를 바라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설마 십여 명의 사람에게 둘러싸인 데다 삼 장(丈) 이상 떨어진 상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했을 테지만, 최소한 절정의 고수만 되어도 그 정도의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탁, 데구르륵” 땅에 떨어진 족장의 목이 구르는 소리에야, 도성(刀聲)의 충격에서 고무족(鼓舞族)의 전사들이 깨어났다. 족장이 죽은 모습에 놀라다가 일제히 살기를 뿜으며 단리유아를 노려보았다. 몇몇 인물이 뭐라 소리치자 모두가 무기를 들고 단리유아를 덮쳐왔다. 가급적 족장만을 죽이려 했지만, 어차피 이 일족을 살려두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던 터라 다가오는 전사들은 가리지 않고 베어 넘기며 전진했다. “크흐키아악.....” “파팟” “퍼퍽. 퍽” “으악. 윽. 악” 장내는 일순간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현장이 되어서 고무족(鼓舞族) 전사들의 떼죽음이 시작되었다. 좁은 동굴 내에서는 피할 곳도 없었고, 귀청을 울리는 도성(刀聲)에 제대로 공격도 하지 못하고 멈추어서 멍하니 바라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독침(毒針)과 독물(毒物)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지만, 제대로 쓸 기회도 없는 데에다 단리유아에게 크게 위협도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뒤에 버티고 있는 자신들의 수를 믿고 덤벼들었지만 일각(一刻)이 지나지 않아서 시야를 가리고 있던 수십 명이 죽어버리자, 남아있던 전사들은 두려움이 질린 채 뒷걸음질하며 빠져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했다. 하지만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던 뒤쪽의 전사들 때문에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날 단리유아가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동안에 죽인 전사들만 해도 거의 이백에 이르렀다. 겨우 살아남아 동굴을 뛰쳐나갔던 전사들이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악마라 소리치며 동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떠들자, 밖에 남아서 기다리고 있던 전사들도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몇 명이 남아서 덤벼들었지만 반각이 지나지 않아서 조각나 고깃덩어리가 된 채 사방에 흩어져 떨어졌다. 때늦은 후회를 하였겠지만 이미 뒤늦은 후였다. 단리유아가 주위를 둘러보니 해가 넘어가는 황혼녘으로 주위가 어두워져오는 것을 보니 유시(酉時:17-19)말이 다된 것 같았다. 가끔 마주치는 고무족(鼓舞族)의 사람들이 흉신악살(凶神惡煞) 같은 모습에 놀라서 도망치는 것을 제외하고, 숨어서 암습하거나 공격하는 전사들은 찾는 족족 죽이며 혼곡동(魂哭洞)에서 나와 일행과 만나기로 한 측허사(測歔瀉)로 향했다. 이리아(伊莉芽) 이리아(伊莉芽) 1 강변에 이른 시각이 너무 늦어 계속 길을 재촉해도 새벽녘에야 측허사(測歔瀉)에 도착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그날 밤은 근처에 머물러 보내기로 했다. 차가운 달빛이 비추는 가운데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에도 변함없이, 오늘도 강물은 무심히 유유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긴 강물이 무슨 일을 알겠는가? 자신의 상념(想念)이 그대로 비춰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일 텐데. 옷을 벗고 강물에 전신을 담그니 말라붙은 피가 풀려서 강물을 점점이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피부에 달라붙은 피와 육편(肉片)이 강물에 씻겨나가는데, 몸에 밴 독기(毒氣)도 쓸려나갔는지 강 아래쪽에서는 물고기들이 배를 뒤집고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깨끗이 온몸을 씻은 후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정좌하여 조식을 취하며 지난 이틀간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휼리파(恤狸把)의 싸움에서는 독술(毒術)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강호(江湖)에서 전전하면서 이렇다 할 독공의 고수를 만나지도 못했었고, 암수로써 독으로 공격받은 적도 있었지만 자신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독이나 고명한 수법은 드물었다. 이번 경우에서는 자신이 미리 운기를 하고 있어서 은수사영(銀銹死迎)을 은연중에 대부분 몰아낼 수 있었지, 그렇지 않고 무심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면 자신 역시도 다른 사람과 같은 꼴이 되었을 지도 몰랐다. 확실히 중원(中原)보다는 독술에 있어서 뛰어나 보였는데, 아직 독(毒)의 종가(宗家)라는 독룡림(毒龍林)과는 마주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 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또 만약 사인곡(蛇人谷)에서의 일이 없었다면 최후로 휼리파가 날린 시독(屍毒)이 집중된 독수에 버틸 수도 없을 것이다. 정말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처럼 길흉화복이 번갈아 일어나 세상사(世上事)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생각을 바꾸어 어제와 오늘 사이에 죽인 고무족(鼓舞族)의 전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삼백 명이 넘는 전사들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죄책감도 없었고 후회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잔인한 살수를 써야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현경(玄境)의 관문에 이른 사람에게 이런 무차별한 살인이 결코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마음의 공부라는 현경에 있어서 이런 근본적인 도의(道義)에 있어서도 지키지 못한다면, 그동안 한발 다가섰던 것도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릴지도 몰랐다. 또 이렇게 많은 살인을 저지르다가는 알게 모르게 점차 살인에 빠지거나 매달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 근본문제는 회정결(灰情訣)의 영향으로 사람을 죽이면서도 죽는 모습에 끔찍함이나 거부감, 죄책감 같은 감정을 거의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살인의 쾌감에 빠져 더욱더 잔인하게 살수를 펼치게 되는 경우가 되어버렸다. 본래가 회정마맥(灰情魔脈)이 완전한 살수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회정마공((灰情魔功)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죄책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없게 감정(感情)을 말살하는 심법이었다. 그 성취가 깊어질수록 감정은 점차 사라져 하나의 살인기계처럼 무감각하게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살인을 많이 할수록 그때에만 감정이 살아나니, 살인에 대한 집착으로 광기(狂氣)에 빠져 더 많은 살생을 하게 되었다. 과거 회정구마(灰情九魔)가 강호사(江湖史) 최고의 살인마들이라 불리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평상시에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다가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감정의 홍수에 자신도 모르게 살인의 쾌감(快感)에 빠져서 계속해서 살수를 펼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고무족(鼓舞族)이 천도(天道)에 어긋나는 극악한 일을 했다고 해서 자신이 이렇게 시신(屍身)을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죽인다면, 자신이 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도 이런 척박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을 뿐일 텐데.... 정말 세상은 요지경속이라 할 수 있었다. 고무족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이 정의(正義)일 것일 테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전혀 다르게 보일 테니.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세상사일 것이다. 자신 역시 그런 사람들처럼 속단하여 일장(一場)의 도살(屠殺)을 벌인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운명 중에 나타난 살업(殺業)을 피할 수 없다 해도, 이렇게 참혹한 수단을 쓴 것에 대해서는 가슴 깊이 참오(懺悟)했다. 앞으로는 될 수 있는 데로 살인을 자제하고, 또 생사의 결전이 아닌 이상 지옥파라구천절도 펼치지 않을 작정이다.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은 일단 펼치면, 심각한 내상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자신도 멈출 수 없는 살인초식이었다. 일초를 제외한 다른 초식들은 상대를 철저히 분시(分屍)시키는 초식들이어서 일단 적중이 되면 시신을 찾을 수도 없이 조각내 버렸다. 근처에 있어서 직접적인 공격을 당하지 않더라도, 흩어지는 강기(剛氣)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처를 남기는 초식들이었다. 아직 나머지 오초식을 펼칠만한 상대가 없었지만, 솔직히 자신도 나머지 초식들을 펼치고 싶지 않았다. 내력(內力)의 소모가 전(前) 사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도 한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그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현경(玄境)의 고수가 아닌 이상 초식자체로서 이 중후반 오초식을 막을 만한 무공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천애구검(天涯九劍)도 현재 육초식까지는 완성되어 있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었다. 나머지 삼초가 어검술(御劍術)을 나타내는 초식들이라지만, 사실상 완성되지도 못했고 펼치지도 못하는 상태해서는 결코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일단은 보통 때에는 도(刀)이외에 다른 수단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으로 하고,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도법은 쓰지 않기로 생각을 정했다. 다음날 아침 강을 건너고 다시 하류로 이십여 리를 걸어서, 사시(巳時:9-11시)말에 파타루가 말한 측허사(測歔瀉)에 도착했다. 강의 서편과는 딴 판으로 동편은 전체적으로 낮은 구릉과 넓은 평야가 대부부인 지역이었다. 측허사는 이런 지역에서 뒤편으로 구릉을 두고, 앞으로는 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한쪽으로는 넓은 농지가 펼쳐진 곳이었다. 정말 반라산(磐裸山)의 고무족(鼓舞族)들에 비해서는 천혜의 축복을 받은 지역으로 대대로 몽족(夢族)의 일족인 파타루의 조상들이 살아온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생활을 나타내주는 듯이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농지가 황폐해져 잡초만 무성했다. 또 구릉과 강변에 자리 잡은 고상식의 집에서는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뜨거운 한낮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강변을 따라 걷다가 마을로 들어서자, 대부분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고 힘없이 돌아다니는 몇 명의 노인과 아이들이 보일 뿐이었다. 단리유아가 나타나자 지켜보던 사람 중에서 한 아이가 뛰어가며 소리쳤다. “파타루 오빠, 누가 찾아왔어. 오빠가 말한 그 사람인가 본데, 너무 무섭고 괴상하게 생겼어.” 뛰어가면서 외치는 소리에 파타루라는 말만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다행이 일행도 무사히 도착한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중앙에 있는 한 집에서 파타루를 선두로 일행이 뛰쳐나왔다. 모두가 서로의 무사함을 기뻐하다가 공손고가 단리유아의 모습을 살펴보며, “자네는 한번 어디로 싸우러갔다 하면은 그 모양이로군. 어서 옷이나 좀 갈아입게, 여기 있는 마을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그렇지 않아도 끌려간 사람들이 독물(毒物)의 밥이 되었다는 소식에 모두가 낙심한데다, 그동안 얼마나 어렵게 지냈는지 피폐할 대로 피폐한 상황인 사람들이 자네를 계속 보다가는 기겁해서 우리까지 마주할 생각을 하지 못할 테니.” 강물에 목욕을 하고 씻었다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보이고, 혈흔(血痕)도 옷 조각에 곳곳에 배어들어 보기흉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옷도 독기(毒氣)에 삭아서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손고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자고 떠들었다. 우선 옷을 갈아입고 자세한 경과를 듣기로 하고, 집안에 들어가 일행 중에서는 가장 큰 체구인 선상조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정강이가 들어나고 팔목도 드러났지만 일단은 구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대로 입고, 대나무로 만든 마룻바닥에 주저앉아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단리유아가 침울한 기색으로 한 쪽에 앉아있는 파타루를 보다가 공손고를 향해서, “그런데 끌려간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어찌 알았습니까?” “아, 말도 말게. 빌어먹을, 무슨 그런 놈들이 다 세상에 있는지.... 우리가 강변의 농지에 찾아가 보았더니 아무도 없더구만. 그곳에 있던 고무족(鼓舞族) 놈들을 제압한 후에 파타루가 물어서야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지. 그곳에 파타루의 일족 말고도 이삼백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을 텐데. 제기랄!” 공손고가 말하다가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젓는다. 한동안 무거운 공기가 실내를 뒤덮은 가운데, 고무족(鼓舞族)을 욕하는 소리와 파타루를 동정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보다 소사숙, 가신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휼리파(恤狸把)는?” 음구의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파타루까지 고개를 들어 단리유아를 쳐다보았다. “휼리파(恤狸把)와 족장으로 보이는 자는 죽었소. 또 나머지 전사들도 삼백 명 가까이 죽었으니 앞으로는 그런 짓을 못하게 될 것이오.” “휼리파를? 게다가 삼백 명의 전사까지?” 파타루가 놀라서 소리쳤다. 일행도 모두가 놀라서 단리유아를 바라보았다. 파타루가 수십 명을 죽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두 명 죽인 것이 다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 놓고도 전혀 죄책감이 없는지 마치 개미를 밟아 죽였다는 듯이 무심한 단리유아의 태도에 놀랐던 것이다. 자신들도 고무족(鼓舞族)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알고는 모두가 마음이 불편했다. “소사숙, 정말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파타루를 제외하곤 내내 불편한 기색이었던 일행 중에서 음구의가 물었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었소. 하지만 혼곡동(魂哭洞) 앞에 있는 독지(毒池)에 이르러서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보이는 인골(人骨)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독지에 빠져 있는 것이 눈에 뛰었소. 아마 삼십년 전부터 그렇게 사람을 죽여 독지에 처넣었다면 적어도 수천은 될 것이오. 그런 모습을 보니 그들을 살려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살수를 펼치게 된 것이오.” “맞습니다. 그런 놈들은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으드득, 눈앞에 그놈들이 있다면 살을 씹고 뼈를 발라내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릴 텐데....” 파타루가 살기를 피어 올리며 이를 갈며 원한에 불타 소리쳤다. 일행에 의해 측허사(測歔瀉)에 가까이 다가 와서야 정신을 차렸던 파타루는 자신의 일족(一族)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한동안 살기에 광분하며 되돌아가서 고무족(鼓舞族)에 복수하고자 했었다. 간신히 일행이 측허사에 다 왔으니 남아 있던 사람들이라도 보고가자고 설득하지 않았다면, 일행의 눈을 피해서라도 혼자서 반라산(磐裸山)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파타루의 말에 일행이 더 말을 못하다가 단리유아가, “그런데 마을의 상황을 보니 좋지 않게 보이던데 어찌된 일이오?” “저희들이 이곳에 오니 모두가 굶주림에 지쳐 곧 죽어갈 정도로 보이더군요. 식량도 떨어진 데다 일을 할 장정이나 젊은 여인도 없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저희가 대신 물고기를 잡고 가지고 있던 육포를 넣어서 끓여서 먹였지만 간의 기별도 안 간 상태일 것입니다. 대처에 나가서 당장 필요한 식량이라도 구해 와야 할 텐데, 아직 소사숙의 소식도 듣지 못했고 혹시라도 고무족(鼓舞族)의 전사들이 추적하여 공격할까봐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음구의의 말에 단리유아가 파타루를 보면서, “파타루, 근처의 같은 몽족(夢族)에게 부탁을 했었다면서 어떻게 된 일이요?” “으드득, 그놈들도 똑같은 놈들입니다. 지난여름에 제가 떠나면서 식량이라도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었는데, 한두 달 보내다가 말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곳을 노리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답니다. 만약 가까이에 고무족(鼓舞族)이 없었다면 저희 일족은 모두가 쫓겨나 굶어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를 갈며 주변의 같은 몽족(夢族)들에게도 원한을 드러내며 소리친다. 이에 단리유아가, “파타루, 너무 그들을 원망하지 마시오. 세상사가 그런 것이니. 게다가 앞으로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원한을 나타내면 다시 마을을 복구시키고 일족을 번성시키는 일도 어려울 것이오.” “그렇다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다못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곳을 노리고 찾아오다니.... 그런 놈들을 같은 부족의 형제라고 믿고 있었으니, 지금은 그놈들이 고무족(鼓舞族) 놈들보다 오히려 더 증오스럽습니다. 그동안 굶어죽은 아이와 노인도 상당수가 된다고 하니.” 잠시 그런 파타루를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일행을 보면서,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 봅시다. 나도 며칠간은 이곳에 머물러 상처를 치료해야 할 테니.” “소사숙. 일단 급한 것은 식량을 구해와 아사 직전의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제일 급합니다. 또 마을을 떠났던 젊은이들도 다시 불러 모아야 할 것입니다.” 웅정향이 말을 받아서 우선해야 할 것을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단리유아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빈집이 대다수이고, 젊은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는 파타루를 보면서, “현재 마을에 젊은이는 하나도 보이지 않던데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있었소?” “휴, 작년에 고무족(鼓舞族)의 습격에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일부는 저를 따라가고 일부는 다른 곳으로 가서 일하여 마을에 식량이라도 보내기로 했습니다. 마을에 있어보아야 고무족(鼓舞族)에 잡혀가 죽을 것이 뻔하니. 그들이 그런 식량이라도 보내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 마을에는 사십대가 넘어가는 노인들과 열 살 미만의 아이들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이 움직여 고기를 잡거나 한쪽에 조그맣게 농사를 지어 연명하고 있었다. 외지로 나간 일족의 도움이라고 해보아야 사실 얼마 되지도 않았다. 밖에서 이곳까지 식량을 전하러 다시 온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자신들 역시 낯선 타향에 적응하기도 어려울 것이니. “그러면 일단 식량을 구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소. 각자 어떤 일을 맡을지 이야기해봅시다.” 단리유아의 말에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던지 음구의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소사숙, 파타루가 먼저 젊은이들을 찾으러 떠나 그들을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공손선배와 웅사형이 식량과 여러 가지 물건을 구해 오기로 했고, 저와 상조는 마을을 지키고 부서진 집이나 군데군데 고칠 곳을 손보기로 했습니다.” “흠, 다 좋은데 파타루나 웅사질이 여기를 떠난다면 말이 통하지 않을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음구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말을 통역할 사람이 모두 떠난다는 소리에 다시 물어보았다. 이에 파타루가 나서며, “저희 마을의 나이든 어르신 중에서 옛날에 중국상인 밑에서 심부름하면서 한어(漢語)를 익히신 분이 계십니다. 저 역시 그분에게 배웠는데 말이 통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파타루의 말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한시라도 서두를수록 좋은 일이어서 점심을 먹고 나서 바로 각자 맡은 일대로 떠나갔다. 그로부터 며칠간 단리유아는 거처에서 나가지 않고 내외상(內外傷)을 치료하고, 또 시독정(屍毒精)을 흡수하는데 전력을 다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의 인상 때문인지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가끔 파타루의 동생이라는 아홉 살의 꼬마 여자애가 나타나 훔쳐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일이 없었다. 사흘 후, 팔월 초하룻날이 되어서야 대부분의 독정(毒精)을 흡수하고 상처도 옆구리의 외상만 남아 거의 흉터만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리유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모처럼만에 남파쌍검(南波雙劍)과 같이 아침을 같이하면서 그동안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음사질, 일은 어떻게 되었소? 또 아직 파타루나 공손선배에게서 들어온 소식은 없소?” “아직 다들 별다른 소식은 없고, 단지 파타루가 보냈다는 청년 한 명이 어제 저녁에 돌아왔을 뿐입니다. 아마 파타루는 적어도 보름은 더 걸려야 할 것 같습니다. 웅사형에게도 제가 떠나는 김에 아예 식량뿐 아니라 농구나 생활용구도 사오도록 했으니, 그것을 구하러 대읍으로 갔다면 사흘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일단은 저희가 거동할 수 있는 노인들의 도움을 받고 해서, 고기를 잡아 그럭저럭 버티고 있습니다.” 음구의의 말에 선상조가 끼어들어, “하하하, 소사숙. 뭐, 힘쓸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강 속이 고기 반 물 반이어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이런 일을 하니 재미도 있구요. 게다가 저희들도 배를 타본 경험도 있으니 고기 잡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었습니다.” “상조의 말대로 저희에게는 오랜만에 실력 발휘할 기회가 되었지요. 모두들 놀라워하더군요. 게다가 무공을 사용해서 갖가지 재주를 부려 고기를 낚으니, 낙심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제 돌아온 청년에게 고기 잡는 일은 맡기고, 논의 벼를 베어 쌀을 수확할 생각입니다.” 음구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음사질, 나도 상처가 거의 나았으니 일해도 될 것이오. 오늘은 나도 같이 일하도록 하겠소.”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소사숙까지 나서실 필요는 없습니다. 벼가 자라는 곳도 그리 넓지 않아서 저희 둘만 해도 오늘 중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맞습니다. 며칠간 생선만 먹다보니 질려서, 쌀을 수확해 볼 생각으로 그런 것입니다. 소사숙께서 나서실 만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음구의와 선상조의 반대하는 말에도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오. 상처를 치료하느라 그동안 방안에 틀어박혀만 있었더니 나도 답답하구료. 같이 하도록 합시다. 세상의 가장 큰 즐거움 중에 하나가 농부가 일 년 간의 노고 끝에 수확하는 것이라 들었는데, 나 역시 잠깐이나마 그런 즐거움을 맛보고 싶소.” 어쩔 수 없이 승낙하는 둘을 보다가 아침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 각자 손에 낫을 쥐고 논으로 향했다. 벼가 자라는 곳은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는데, 다해서 삼백 평 정도에 불과해 유능한 농부라면 하루이내에도 다 벨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이 작은 농토에서 수확되는 쌀로 백여 명의 사람들이 버텨온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삼모작을 한다지만, 너무나 적은 양일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해서 군데군데 잡초까지 섞여 있어서 실제 수확량은 다른 곳보다 못할 것이다. 모두가 무기(武器)는 한 쪽 논두렁에 놓아두고 맨발로 논 속으로 들어섰다. 발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는 진흙의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며 나란히 서서 벼를 베어나갔다. 가로의 폭이 삼십여 장(丈)이 되고, 세로의 길이가 삼 장(丈)이 조금 더 되는 곳에서 세 사람의 젊은이가 낫으로 벼를 베어나갔다. 멀리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들이 결코 강호인(江湖人)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을에서 한두 사람이 나와서 지켜보더니, 이윽고 마을 사람 대부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남파쌍검(南波雙劍)이 물고기를 잡아서 자신들을 도와주었는데도 낯가림이 심해서 접근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나 졸래졸래 따라다닐 뿐. 워낙 처음의 인상이 기억에 남아서였을 것이다. 파타루 만큼은 아니었지만 일행도 이곳저곳에 핏자국을 무치고 들어서니, 두려운 마음에 가까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내려쬐는 가운데 세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모처럼 만의 평화로운 정경에 잠겨서 벼를 베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담벼락이나 가까운 나무아래 그늘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도 즐거워 뛰어놀며 떠느니, 비로소 사람들이 사는 마을처럼 활기가 돌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리아(伊莉芽) 이리아(伊莉芽) 2 처음에는 다들 서툴러서 속도가 나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져 반 시진(時辰) 안 되어 한 사람의 일꾼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벼를 베는데 속도가 빨라지니 이내 맨땅을 드러낸 곳이 넓어지고, 또 세 사람이 지나가는 뒤에는 볏단이 차곡차곡 쌓여지게 되었다. 뜨거운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일하니 더위에 지칠 만도 할 것이지만, 일행 모두 이 정도의 열기에는 그리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단지 습도가 높아서 후덥지근한 것이 문제일 뿐. “휴, 소사숙. 이 일도 정말 쉽지 않군요. 한서(寒暑)에 그리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인 저희들도 이 정도인데, 보통 사람이 이런 뜨거운 햇빛과 다습(多濕)한 가운데 일한다는 것은 정말 용이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음구의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하자 선상조도 역시 허리를 펴고, “어이구. 반 시진 밖에 안 되었는데도 이러니, 농부들은 어떻게 매일 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우 우리가 벼를 베는 곳은 이 넓은 농토에서도 백분의 일도 되지 않을 정도인데도 이렇게 힘이 드니. 은연중에 그들을 비웃었는데, 직접해보니 차라리 한 시진 동안 대련을 하는 것이 쉽게 보일 지경입니다.” 허리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 단리유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나 역시 일하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이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소. 세상일 중에 쉬운 일이 얼마나 되겠소마는, 이렇게 하루하루 계속하는 것은 무공수련 보다도 오히려 힘들 것이라 생각되오. 우리가 처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런 것을 보니 실제로 농사를 짓는 것도 대단한 일일 것 같소. 일 년 열두 달 부지런해야 그래도 원하던 소출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보는 것과 직접해보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이지요. 오늘 이렇게 해보니 다시금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사숙. 제가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음구의가 맞장구치며 말하다가 단리유아에게 물어보자, “그래 무엇이오? 혹시 무공에 대한 것이오? 그러고 보니 내가 검법(劍法)을 보완할 각법(脚法)이나 지법(指法)을 전한다고 해놓고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구려. 이참에 여유가 생겼으니, 내 시간 나는 대로 전해 주기로 하겠소.” “아닙니다. 이제야 제대로 검법을 펼치는 수준이었는데, 그동안에는 배우려 해도 배울 시간이 없었지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소사숙께 묻고 싶은 것은 무공을 완성하여 현경(玄境)에 이른다면, 이후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인지 궁금해서입니다.” 음구의의 말에 잠시 일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선상조 역시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단리유아 자신도 현경(玄境)에 들고 나서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운명에서 벗어날 정도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전력을 다해 무공을 연마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을 뿐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흠, 내 어릴 적 꿈은 그저 어머니를 모시고 조용한 산속에서 단둘이 사는 거였소.” “아니,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습니까?” 선상조의 소리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었소. 어머니도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 그 말에 잠시 침묵이 깔렸다가 음구의가 다시, “그러면 지금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글쎄. 과거의 나라면 조그마한 장원(莊院)에 은둔하여 책이나 읽으며 세월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오. 지금도 생각이 그리 바뀌지는 않아서 설혹 다른 일을 할지라도, 내가 무공을 완성한다면 강호(江湖)에 다시 나올 일은 없을 것이오.” 실제 어릴 적의 단리유아의 성격은 어머니의 일을 제외하고, 다른 일에는 무관심했었다. 오직 서책(書冊)만이 유일한 즐거움으로, 하루 중의 대부분을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장서고(藏書庫)에 틀어박혀 책을 보내며 지냈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책을 읽으니 삼만여 권에 달하는 장서를 다 읽고, 나중에는 지하의 폐서고(弊書庫)까지 뒤지며 책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단리유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이가 바로 작은 할아버지였던 남궁관(南宮瓘)으로, 가주이자 단리유아의 아버지였던 남궁유수(南宮柔琇)에게 말하여 단리유아 모자에게 더 정을 쏟도록 신신당부했었다. 그러나 이미 눈 밖에 난 상태였던 두 모자(母子)에 대해 별다른 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데다가, 역시나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들을 가문에 받아드린 남궁관의 처사에도 불만에 차 있어서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렸었다. 게다가 대부인인 매화선자(梅花仙子) 이옥심(李玉心)에만 빠져 있던 터라 더욱더 두 모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후일 남궁관이 임종하기 전에 남궁유수(南宮柔琇)에게 말을 남기기를, 여인의 치마폭에 싸여서 자식을 버린 어리석고 옹졸한 놈으로 가문을 일대 중흥시킬 인재를 스스로 차버렸다고 한탄했었다. 단리유아의 말에 약간 뜻밖이라는 듯이 음구의가, “저희들은 무공을 완성한다면 이렇다 할 문파(門派)라도 창건하실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일행이 단리유아를 보면서 저렇게 무공에 빠져서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데, 도대체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도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겨우 무공을 완성한 후에는 은거(隱居)하여 강호(江湖)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허탈해져버렸다. 자신들의 생각에는 문파를 창건하여 강호에 명성을 떨치거나 강호제패(江湖制覇)의 야망이라도 가진 줄로 알았던 것이다. “잘못 보았구려. 난 그런 일에는 별 관심이 없소.” 본래의 단리유아의 성격도 조용한 것을 좋아하지,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강호(江湖)에 다시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깊은 산속에 은거하거나 아니면 벽촌에 숨어서 일체의 번잡한 일에 끼어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소사숙.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공을 익히는데 ....열심이십니까?” 선상조가 무심코 ‘미친 듯이’라 말하려다 말을 바꾸어 다시 물어보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소. 단지 어머니와의 약속일뿐이오.” 무덤덤하게 말하며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서로가 궁금해서 쳐다보았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어떤 사연이 있는지 남파쌍검(南波雙劍)으로써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에 잠겼을 때 단리유아가, “그보다 그대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이번에 무사히 세외(世外)를 돌아본다면.” “저희야 해남파(海南派)에 돌아가야지요. 아직 은혜를 갚지 못했는데, 소사숙을 수행하는 것이 그 일부라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다 갚았다 할 수 없지요.” 음구의의 말에 단리유아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대들은 돌아갈 곳이라도 있구려.” “다른 가족들은 안 계십니까?” “글쎄. 그들은..... 아니, 이런 얘기는 그만합시다.” 말을 멈추며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묵묵히 다시 일에만 열중한다. 남파쌍검(南波雙劍)도 대화를 멈추고는 부지런히 벼를 베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정오(正午)가 조금 넘어설 무렵에는 논의 벼를 모두 벨 수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는 다시 잘라놓은 벼를 집단으로 묶어서 한 곳으로 모은 다음, 저녁때까지 도리깨로 내리쳐 낱알을 모았다. 이후의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두었는데, 하루 종일 수확한 것이 네 섬에 불과했다. 저녁에 마을사람들이 모처럼만에 쌀로 밥을 해서 자그마한 잔치가 벌어졌다. 모처럼 만에 얼굴에 웃음꽃이 피며, 비록 부족한 양이지만 모두가 모여서 즐겁게 식사를 했다. 일행도 한쪽에 따로 앉아서 차려준 것을 먹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다가와 깔깔거리며 한 자 정도의 죽통(竹筒)을 내밀었다. “뭐냐? 이 계집애야. 오늘은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선상조가 그 모습에 소리치니, 혀를 내밀며 웃음치고 도망친다. “깔깔깔!” “저 계집애가? 으이구, 저것을 그냥. 콱!” 그 모습에 화를 내는 것을 보다가 음구의가 놓고 간 죽통을 가져서 열어보며, “그만두게. 아직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그러는 것 가지고 뭘 그러나? 우리도 어렸을 때, 낯선 이방인을 보고는 그러지 않았던가?” “그래도 그렇지? 내 저렇게 맹랑한 계집아이는 처음보네. 무시로 들이닥쳐서 엿보고, 장난이나 쳐대니....” “내버려두게. 오히려 성격이 밝고 쾌활한 것이 나는 좋기만 하더구만. 이곳 사람들 대부분이 그동안의 어려움 때문인지 활발하지 못하고 매일 울상을 하고 있는데, 저 아이는 그럼 면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보기 좋더군. 오, 이것이 무엇이지? 참, 맛있게 생겼군.” 음구의가 말하다 죽통안의 내용물을 보다가 킁킁거리며 소리쳤다. 단리유아가 보니 어죽(魚粥)인 것 같았는데,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쌀과 완전히 버무려져 있었다. 선상조가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어 빼앗아 자신 먼저 먹으려다 단리유아를 생각하고는 멋쩍게 웃으며, “하하하, 소사숙. 아주 맛좋게 생겼습니다. 먼저 드셔보시지요.” 말과 함께 단리유아의 그릇에 따라주고, 다시 음구의와 나누어 각자의 그릇에 따랐다. 선상조와 음구의가 그 맛에 감탄하며 자꾸 소리쳤다. 단리유아도 담백한 것이 마음에 들어 모처럼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음식을 먹다가 단리유아가, “그런데, 아까 그 아이는 누구요? 내가 상처를 치료할 때도 엿보고, 아까 우리가 벼를 벨 때도 논두렁에 앉아서 바라보고 있던데?” “소사숙, 아까 그 아이는 파타루의 동생으로 이리아(伊莉芽)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과 달리 그리 어두운 기색도 없고, 호기심도 강한 지 항시 우리를 지켜보더군요.” 음구의가 설명하자 문득, 첫날에 소리치던 것이 생각나, “파타루의 동생이라고?” “예, 이제 아홉 살 된 막내라 하더군요. 파타루가 같이 있을 때에도 꼭 붙어서 따라다니고, 저희에게도 가끔 훔쳐보거나 장난치기도 하지요. 아마 소사숙께도 귀찮게 할 지 모르지만 아직 어린 아이이니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아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남만의 여느 아이들처럼 햇볕에 탄 흑갈색의 피부에 얼굴도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남자아이 같이 눈썹이 두텁고 짙었다. 또 파타루와는 달리 얼굴도 둥근 것이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고기를 잡으면서 사흘 동안 수확한 쌀로 식량을 해결하여 지냈다. 이리아(伊莉芽)도 가끔 단리유아를 훔쳐보기도 했는데, 첫날의 험악한 인상이 기억에 남았는지 쉽게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에 선상조에게는 각법(脚法)을, 음구의에게는 지법(指法)을 전수해주었다. 이틀간은 구결(口訣)을 외우고 사흘 째 되는 날은 단리유아가 하나하나 초식을 펼쳐서 가르쳐 주고 있을 때, 이리아도 한 쪽에 다가와 쳐다보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초식을 펼쳐 설명한 후에 선상조가 각법을 수련하는 것을 이리아(伊莉芽)가 보더니, 자신도 따라하려다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져 쓰러졌다. 그 모습에 선상조가 기고만장해서 비웃으며, “우하하하. 이 계집애야. 이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 흥! 네가 한 초식이라도 제대로 펼칠 수 있다면, 내 너를 누님이라 부르도록 하지.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겠지만, 선상조의 표정을 보아서는 좋은 소리는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약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뭐라 소리치며 도망쳤다. 선상조가 틀림없이 욕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화를 내는 것을 음구의가 곁에서 말렸다. 잠깐 있다가 다시 찾아와 옆에서 지켜보다가 따라 해보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일행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가 되었을 때, 공손고와 몽정향이 식량과 여러 물품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다. 그 양이 세대의 수레나 되어서인지 일꾼도 네 사람이 따라온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수레의 모습에 식량이 왔다는 것을 알고 하나둘 모여들더니, 이내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 공터에 모여들었다. 짐을 내리고 일꾼을 보낸 다음, 통역을 도와주는 노인을 통해서 줄을 서서 가족의 수만큼 공평하게 나누어 받아가도록 했다. 웅정향이 그 일을 옆에서 감독했고, 공손고는 일행과 대화를 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공손선배, 식량을 정말 많이 구했군요. 그런데 다른 물품들은 별로 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음구의의 말에 한숨을 쉬면서 피곤한 기색으로, “휴, 이백 리 아래 화빈(華濱)까지 가서 쌀을 구했는데 보통 때보다 갑절이나 돈이 더 들었다네. 게다가 다른 물품도 구하기가 어렵더구만. 특히 우리 같은 이방인이 찾아가니 선뜻 내놓으려는 놈들도 별로 없어서 얘 좀 먹었다네. 지금 화빈(華濱)과 하내(河內) 일대는 병사들이 모여들어 우글거리고 있던데, 아무래도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아. 그놈들의 눈도 피해야하는 데에다, 전쟁 때문에 물가가 폭등해서 더더욱 힘들었다네.” “그렇군요. 그래도 저 정도의 양이면, 올해까지는 문제없을 것 같군요. 또 이제 젊은이들이 돌아오고 마을의 노인들도 어느 정도 기력을 찾는다면, 저 버려진 농토도 다시 뒤엎어 볍씨를 뿌릴 수 있을 것이니 내년부터는 그리 문제가 없을 것 같군요.” 이에 공손고가 고개를 저으며, “그렇지 않네. 한번 정도 더 갔다와야할 것이네. 식량은 그리 부족하지 않을 테지만, 다른 물품은 많이 부족할 것일세. 다음번에는 파타루와 이들 마을사람을 데려가 그들이 직접 고르게 할 생각이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네. 저들에게야 저것이 큰돈이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몇 푼 되지도 않지. 가져온 보석을 하나만 팔아도 오히려 돈이 남을 정도이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단리유아가, “그런데 파타루가 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여기서 더 한참을 머물러야한다는 소리군요.” “그래, 파타루가 돌아와야 정확한 시일을 알겠지만, 그 녀석이 사방을 떠돌며 젊은이를 되돌려보내는 데에만 보름 이상은 걸릴 것이네. 지나간 며칠을 제외하더라도 최소한 앞으로 한 달은 이곳에 머물러야한다는 것이지.” “그렇겠군요. 혹시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불현듯, “아, 그래. 깜박했군. 여보게, 아무래도 진무사(鎭武寺)가 있는 하내(河內)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네. 지금 그곳은 월군(越軍)의 대본영이 있는 곳으로 경계가 너무 삼엄하다네. 우리가 그곳에서 비무를 하여 소문이라도 난다면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일세.” 공손고의 말에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좋습니다. 어차피 진무사(鎭武寺)는 불문(佛門)의 세력이라 돌아서 들릴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시일이 더 지체된다면 가지 않고 바로 독룡림(毒龍林)으로 출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공손고와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때 음구의가, “공손선배, 다음번에 물품을 구하러나가실 때에는 해독(解毒)에 필요한 물건도 더 구해주십시오. 그동안 쓴 것이 많아서 이번 기회에 보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네. 내 잊어먹지 않고 구해오도록 하지. 그리고 자네도 미리 자네 사형에게 이야기를 해놓게.” 일행이 그렇게 앞날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식량과 물품을 분배하는 일도 끝나서 웅정향도 자리에서 벗어나 일행에게 다가왔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일행은 저녁을 먹으러갔다. 오늘 가져온 식량으로 사람이 거쳐하는 집들에서는 연기가 솟아나 밥 짓는 냄새가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하나둘 돌아오는 마을청년들을 보면서, 일행은 파타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머무는 집은 사람이 없는 빈집으로 이리아(伊莉芽)가 찾아올 뿐이고, 통역을 해주는 노인이 가끔가다 들릴 뿐이어서 한가한 나날이 이어졌다. 일행도 마을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를 제외하고는 다 같이 모여서 머물고 있었다. 이리아는 선상조가 각법(脚法)을 펼칠 때마다 옆에서 따라했는데 사흘이 지나서는, 처음 일초에 불과하지만 점차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것 같았다. 복잡한 동작이 여덟 번 이어지는 것이었는데도, 어느새 기억하여 느리지만 비슷하게 펼치는 것이었다. 이 모습에 음구의가 선상조를 보면서 웃으며, “여보게, 상조. 자네는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않는 사내대장부이겠지?” “암, 틀림없는 대장부네.” “그러면 자네가 저번에 저 아이에게 큰 소리로 약속했던 것도 생각나겠군. 일초라도 제대로 펼치면 누님이라 부르겠다는.” 이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난처한 듯이, “그, 그것은.... 하지만, 저 아이가 제대로 펼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단지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흠, 그런가? 하지만, 이리아(伊莉芽)는 내력이 없기 때문에 그 정도는 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무래도 자네같이 현란한 속도와 동작이 나오길 바란다는 것은 무리라 생각하는데?” “그, 그래도....”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웅정향과 공손고도 음구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한다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선상조가 자신의 편이 하나도 없자 단리유아를 바라보면서 도움을 바라는 듯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선사질. 이 세상에 깨지지 않는 약속이 없다지만, 그러나 이런 소소한 약속도 지키지 못한다면 더 이상 그 사람을 볼 필요도 없을 것이오. 이미 그 사람의 인물 됨됨이가 드러난 것일 테니. 이미 입 밖에 나온 말이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소. 이번 일로 그대도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아니 됨을 알았을 것이오. 앞으로도 성급하게 말하기 전에, 항상 먼저 생각한 다음에 말하도록 하시오.” 항상 행동이 앞서는 선상조를 보면서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치도록, 더 이상 변명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이에 울상이 되었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주위에서 쳐다보는 일행을 원망스레 바라보다가, “하겠소.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이리아(伊莉芽), 이리 와서 내 절을 받아라.” “어허, 앞으로 누님이 되실 텐데. 손위 사람보고 이리 오라니? 자네가 앞으로 가서 말해야지.” 공손고의 웃음을 참는 듯한 엄숙한 말에 어쩔 수 없이 선상조가 이리아(伊莉芽)에게 다가섰다. 한쪽에서서 영문을 모르고 일행을 보고 있던 이리아는 선상조가 다가오자,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리아 앞에까지 다가가서는 선상조가, “이, 이리아(伊莉芽)누님. 소제의 절을 받으십시오. 아, 앞으로 누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벌려 이를 악물고 말한 다음, 무릎 꿇고 큰절을 한다. 이에 당황하던 이리아가 자신에게 큰 절하는 모습에, 짓궂은 표정으로 다가가 머리를 흩트리며 뭐라고 소리친다. “푸하하하” “하하하” 일행 모두가 이 한편의 희극 같은 장면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선상조가 창피함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에게 소리치며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모두 그만 웃으시오. 내 오늘 일에 대해 잊지 않고, 두고두고 되갚아주도록 하겠소.” 한동안 폭소가 계속되며 선상조에 대해 떠들었다. 모두가 이리아(伊莉芽)를 보면서 귀여워하다가, 잠시 후 공손고가, “여보게, 단리소협. 아까 하는 것을 보니 이 아이의 자질이 괜찮아 보이던데, 이 아이를 본격적으로 가르쳐볼 생각 없나? 어차피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머물러야 할 테니, 그 시간에 바쁜 일도 없을 것인데?” “그렇습니다, 소사숙. 이 아이를 보니 총명한데다 근골(筋骨)이 아주 좋군요. 제가 시간이 있다면 본문에 데려가 정식으로 입문시킨다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소사숙께서 잠시 가르쳐 보시지요.” 웅정향도 권하고 다른 공손고와 음구의도 재차 권한다. 단리유아가 보기에도 이 아이의 재질(才質)이 범상치 않아보였는데, 근골 중에서 무공을 익히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기수신골(奇秀神骨)에 속한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 달 동안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이 아이를 가르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한어(漢語)를 모르고, 또 불과 한 달 밖에 가르칠 시간이 없는데 괜히 제가 가르쳐서 이 아이를 망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흠, 그것도 그렇구만. 하지만, 여보게, 이런 촌락에 언제 인연(因緣)이 닿아서 저 아이가 다시 무공을 접할 기회가 올 것인가? 아마 평범하게 여생을 마치는 것이 다일 것일세. 게다가 저번에 파타루에게 글자를 외우게 한 적도 있으니 별로 어렵지 않다고 보는데?” 공손고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차라리 평범한 일생(一生)이 행복할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무공을 배워 강호(江湖)를 떠도니, 그래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솔직히 저는 내키지 않습니다. 우리 같은 강호인(江湖人)이 된다면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것이고, 편안한 일생은 다시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다른 사람의 일생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또 파타루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해서 한자(漢字)를 외우니 효과가 금방 나타났지만, 이 아이는 아예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설사 제가 한자를 기억하게 한다 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손고가, “그렇지 않네. 무공을 익혔다고 다 강호(江湖)에 사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이 일족을 보더라도 힘이 없어서, 고무족(鼓舞族)에게 끌려가 무수한 생목숨이 사라져 버렸지 않은가? 적어도 자신을 지킬 정도만 가르쳐주어도 이 아이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일세.” “소사숙, 말을 소통하는 문제는 제가 노력해보지요. 이 아이도 월어(越語)는 어느 정도 할 테니, 제가 가르친다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소사숙께서 이 아이에게 한자를 기억시킨다면 훨씬 시일이 단축될 것입니다.” 공손고와 웅정향은 이리아(伊莉芽)가 마음에 드는지, 어떻게 해서든지 무공을 가르쳐주고 싶어 했다. 자신들이 가르칠 수도 있지만, 단리유아에게 배우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일 것이고 또 자신들은 여기저기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면 저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 결정합시다. 저 아이가 배우길 원한다면 저 역시 가르치겠습니다.” 그 말에 희색이 만연해서 웅정향이 이리아(伊莉芽)에게 다가가 월어(越語)로 물어본다. “이리아, 너 무공을 배워보겠느냐?” “무, 무공?” “그래, 아까 네가 따라했던 동작 같은 것 말이다. 배우고 싶지 않느냐?” “배, 배우고 싶다. 오, 오빠도 막 자랑해서 나도 하고 싶다.” 더듬거리는 월어(越語)로 이리아가 말했다. 이리아(伊莉芽)가 오빠를 만나보니 예전과 같은 약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사내답고 강해진 모습에 부러웠던 것이다. 게다가 엄청 자랑하면서 단리유아에게 무공을 배웠던 것을 이야기하고, 한 번 펼쳐 보이니 그 도법의 화려함에 반해서 넋이 나가버렸었다. 이에 천성이 활달한 이리아도 배우고 싶어서 그동안 일행을 졸졸 따라다녔던 것이다. “소사숙, 이 아이도 배우고 싶다고 합니다. 이리아(伊莉芽), 이리 와서 인사드려라.” “아, 안녕하세요?” 웅정향이 부르자 다가와 단리유아를 향해 쭈뼛거리며 인사를 한다. 그 모습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다시 물어보겠다. 정말로 무공을 익힐 생각이 있느냐? 아주 힘들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싫다면 말해라.”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단리유아를 보고 잠시 멈칫거리다, 웅정향이 뭐라고 하자 다시 고개를 숙이며 절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내력을 발휘에 절하지 못하게 하고는 얼떨떨한 얼굴의 이리아(伊莉芽)는 보지 않고, 웅정향에게, “이 아이를 제자로 삼을 생각은 없소. 내 무공은 여아가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고, 게다가 시간도 없으니 다른 무공을 가르치겠소. 그리고 앞으로 내가 무공을 가르칠 때에는 다들 접근하지 말아 주시오.” 잠시 실망했다가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겠군요. 아무래도 여아니 그에 적합한 무공을 익히는 것이 성취도에 있어서도 좋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이리아(伊莉芽)에게 설명하고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여 주었다. “이 아이에게 급한 것은 말을 가르치는 것일 테니. 내가 우선 천자문을 암기시켜 줄 테니, 웅사질이 나머지 기본적인 말을 가르치시오.”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그날부터 이리아(伊莉芽)를 가르칠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저번의 파타루와 같이 보리광명심(菩提光明心)으로 천자문을 기억시켰다. 또 매일 아침저녁으로 추궁과혈로 전신의 혈도를 두르려, 자신의 내력을 이용해 몸 안의 불순물을 제거해나갔다. 저번의 파타루는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급하게 하느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리아는 우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으니, 기본적으로 몸을 만든 후에 가르칠 생각이었다. 나머지 무공은 몸으로 다 펼치지는 못하더라도, 암기시켜서 혼자서 터득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열흘이 흐르자 불순물도 어느 정도 사라져 무공을 가르칠만한 상태가 되었다. 일단 심법(心法)과 보법(步法), 수법(手法) 한 가지씩의 구결을 외우게 만들고, 자옥신단(紫玉神丹)을 먹이고 일주천을 시켜서 운기의 순서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웅정향에게 말을 익혀서 점점 한어(漢語)에 숙달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는데, 한 달이 다되었을 때에는 모든 구결과 그 설명을 외우게 되었다. 한어를 어느 정도 이해하자 이리아(伊莉芽)가 제일 먼저 한 것이 바로 선상조를 쫓아다니며 동생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잡혔다가는 꼼짝없이 동생이 되어 온갖 궂은일을 해야 했으니, 나중에 선상조는 이리아의 옷자락만 보여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중간에 파타루가 돌아왔다가, 다시 공손고와 웅정향과 함께 마을의 청년 셋을 데리고 농사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화빈(華濱)에 갔다 온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나머지 일행도 그동안 되돌아온 스무 명 남짓한 청년들을 거들어 이곳저곳 손보는데 도와주고 있었다. 한 달이 다되어 마을도 어느 정도 회복되자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단리유아도 마지막으로 검법(劍法) 한 가지를 더 이리아(伊莉芽)에게 전했는데, 이제부터는 이리아 혼자서 수련해야만했다. 최소한 혼자서 수련할 수 있게 기본은 갖추어 주었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의 성취를 볼지는 단리유아 역시 자신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더 이상 시일을 지체할 수가 없어서 이제는 원래의 목적대로 독룡림(毒龍林)으로 출발해야 했다. 독룡림(毒龍林) 독룡림(毒龍林) 1 그날 저녁 앞으로의 여정(旅程)을 다시 시작하기 전에 일행이 모두 모여 대화를 시작했다. 같이 저녁을 들면서 먼저 그동안에 있어난 일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때로는 웃음 짓고 때로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달 여를 한 곳에 머무르니 그렇지 않아도 약간 지루한 감을 느끼고 있었던 일행은,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여정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잠시 후, 웅정향이 먼저 말문을 열어, “소사숙. 일단 준비는 끝났으니 앞으로의 여정(旅程)은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부터 향할 곳은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독룡림(毒龍林)까지는 그래도 대구월(大瞿越)지역이어서 어느 정도 지리를 알 수도 있고 말이 통하는 지역이지만, 그 이하지역은 임읍국(林邑國:참파왕국-안남산맥 중부에서 산맥이 끝나는 지역까지. 192-1470년)의 땅으로 저희들도 그 나라에 대해서 들은 것은 있지만 정확히 어떤 세력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일행이 이제부터 향할 안남산맥(安南山脈)을 따라 남하할 지역은 중북부의 독룡림(毒龍林)이 있는 수락지(藪落池)까지 칠백여 리가 넘는 길이었다. 또 그 이하지역은 임읍국의 땅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안남산맥을 따라 길게 자리 잡은 임읍국(林邑國)은 북부는 대구월(大瞿越)과 서남부는 각멸(閣蔑)과 접하고 있었다. 림족(林族)이 건설한 임읍국은 오랜 세월동안 동남아 해상무역의 주체로서 중국(中國)이나 왜(倭)는 물론 멀리 대식국(大食國:페르시아)과도 교류를 해오고 있었다. 또 이러한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특히 천축(天竺)과 중국 문화의 완충 지대로서 정치와 문화에 있어서 독특한 면이 많았다. 웅정향의 말을 받아서 음구의가, “저희가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에 있을 때, 잠시 들은 임읍국(林邑國)은 천축(天竺)의 바라문교(婆羅門敎)가 성하고, 일부 불교(佛敎)나 회교(回敎)를 믿는 사람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가 농사를 짓는다지만, 남부의 평야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산악지역이라 식량이 부족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해변을 따라 항구가 있어서 대외무역을 하는 곳이 몇 군데 있지만, 그곳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대부분 미지의 땅입니다.” 단리유아가 일행의 우려 섞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흠, 그러면 일단 수락지(藪落池)까지 가기로 하고 임읍국(林邑國)에 대해서는 그때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파타루, 당신도 그곳까지만 우리를 안내하시오. 어차피 대구월(大瞿越) 이하의 지역에서는 당신의 도움도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으니, 그곳에서 돌아가도록 하시오.” 무심한 단리유아의 말에 파타루가 흥분하여 소리치며, “뭐라구요? 말도 안 됩니다. 이제까지 함께해왔는데.... 저도 계속 여러분을 따라가고 싶으니 데려가 주십시오.” “안되오. 당신도 안남산맥(安南山脈) 중부 이하로는 잘 알지 못하지 않소? 괜히 데려가 봐야 짐만 될 뿐일 것이오.” 단리유아의 단호히 거절하는 말에, 파타루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은 정(情)이 들어서 일행을 계속해서 따라다니고 싶은데, 이 인간은 어찌 이리 냉정하게 말하는 것인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음구의가, “파타루, 내 생각도 소사숙과 같네. 자네는 수락지(藪落池)까지만 안내하고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솔직히 다른 안내인을 구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자네를 떼어놓고 싶다네. 우리보다는 이곳사람들이 더 자네를 필요로 할 걸세.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는가?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부족에서 이곳을 노리고 공격해올지 모르는데, 자네 외에는 무공을 익힌 사람도 없어서 아마 별 대항도 하지 못하고 쫓겨날 걸세. 자네도 더 이상 일족(一族)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겠지?” “그, 그렇지만.....” 그 말에도 울상을 지으며 반대하려는 파타루의 말을 끊고, 웅정향이, “음사제의 말이 맞네. 자네도 소사숙께 섭섭한 마음이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것이 최선임을 알 것이네. 그러니 우리말대로 하게. 그리고 자네가 이젠 일족의 족장(族長)이라 할 수 있는데,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 우리도 자네 마음을 잘 아네. 하지만 자네가 있을 곳은 여기야. 결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 공손고도 파타루를 달랜다. 일행 모두가 반대하니 파타루도 어쩔 수 없이 풀이 죽은 기색으로 고개를 숙인다. 잠시 일행이 파타루를 위로하다가, 공손고가, “그럼 파타루의 일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더 준비할 것은 없을까?” “일단 독룡림(毒龍林)까지는 안남산맥(安南山脈)을 따라 갈 것이니 독물(毒物)에 대해서 더 주의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소사숙. 그 이하지역도 밀림을 뚫고 지날 것입니까? 아니면 해안가를 따라 내려가실 생각입니까?” 음구의가 대답하다가 단리유아에게 물어보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단리유아가, “음, 일단 그것도 수락지(藪落池)까지 가서 독룡림(毒龍林)에 들린 후에 결정하기로 합시다. 그때 보아서 유명한 문파가 산맥 깊숙이 있다면 밀림을 뚫고 찾아가기로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 이외의 지역은 해안을 따라 남하하기로 합시다.” 다음날 일행은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나, 흑수하(黑水河)를 건너서 반라산(磐裸山)을 왼쪽으로 끼고 남하했다. 시간은 구월 이일로서 광서성(廣西省)을 벗어나 남만(南蠻)에 들어선 지도 거의 여섯 달이 다 되고 있었다. 예상보다는 시간이 더 걸렸는데, 아무래도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파타루와 이런 지역이 처음이다 보니 익숙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앞으로 수락지(藪落池)에 이르는 칠백여 리의 길도 서두른다고 해도 적어도 이십일에서 길게는 한 달 넘게 걸릴 것이다. 흑수하(黑水河)를 건너서 안남산맥(安南山脈)의 초입에 해당하는 해발 오천척이 넘는 고산들인 반륭산(盤隆山), 낭마산(朗磨山)을 거쳐 방고(坊高)에 이른 것은 구월 십사일이 되어서였다. 그나마 지금까지의 길은 나은 편으로 소수부족들이 사는 곳도 있어서 식수나 식량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부터가 문제로 대습지인 수락지(藪落池)까지는 살고 있는 부족도 얼마 없었고, 이전과는 비교과 안 될 정도로 밀림이 무성한 지역이었다. 또 독물(毒物)도 넘쳐나서 한 발짝 길을 걷는 것에도 주의에 주의를 해야 했다. 방고(坊高)에서 하루를 쉬어 노독을 푼 후에 육포와 식수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구해서 등에 짊어진 채, 가강(渮江)을 건너 다시 수락지(藪落池)를 향해서 길을 떠났다. 가강을 건넌 지 닷새째 되는 날 오후, 더위와 밀림에 지쳐 일행은 어딘지도 정확히 모를 곳을 헤매고 있었다. “으아! 제기랄. 이놈의 밀림은 언제쯤 끝나는 거야? 어떻게 하루 종일 걸어도 하늘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담.” 선상조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칼을 휘둘러 덩굴을 쳐내며 소리쳤다. 더위와 독물(毒物)도 일행을 지치게 했지만 더 일행을 힘들게 하는 것은 끈적끈적한 습기였다. 특히 아침저녁으로는 수풀 아래 일 장(丈) 높이로 안개가 깔리는데, 얼마나 안개가 지독한 지 일행과 같은 고수들도 삼 장(丈) 앞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과 덩굴로 해를 보기도 어려워 도대체 정확히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길이라고는 전혀 없으니 아예 길을 새롭게 내면서 가야했던 것이다. 게다가 곳곳이 습지와 독지여서 되돌아간 것도 몇 번이나 됐다. “이봐, 땅꼬마야. 제대로 가고 있기나 하냐? 설마 요번처럼 다시 뒤돌아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일행의 순서는 파타루가 앞장서고, 남파쌍검(南波雙劍), 웅정향과 공손고, 그리고 단리유아의 순이었다. 교대로 남파쌍검(南波雙劍)과 웅정향과 공손고가 자리를 바꾸는 방식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앞장서서 길을 내며 주의 깊게 사방을 둘러보던 파타루가 돌아서서, “뭐? 누가 땅꼬마란 말이냐?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크다고? 그리고 이쪽 지역은 몇몇 원시부족의 사냥꾼을 제외하고는 들어오지도 않는 지역이란 말이야. 설마 내가 모든 지역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 잘난 양반아!” “이 자식이! 그렇지 않아도 짜증나 죽겠는데, 너 오늘 나한테 죽도록 맞아볼래? 요새 불쌍해서 대련을 하지 않았는데, 어디 몸이 근질근질하는 모양이구나.” 변죽 올리는 파타루의 말에 선상조 역시 약을 올린다. 이에 다시 파타루가 비웃는 표정으로, “흥! 누가 당신을 두려워할 줄 알고? 그런데, 이리아(伊莉芽)에게 동생이 되니 나한테는 어떻게 되나?” “너 이 새끼가, 정말 죽어 볼래? 그 계집애한테 시달린 것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열 받아 죽겠는데....” 선상가 화가 나 얼굴이 붉혀져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에 파타루가 선상조의 위아래를 꼬나보며 입술을 내밀고, “사내대장부가 한 입으로 두 말하다니. 그런 사람을 뭐라 하드라?” “이, 이 개자식이....” 화가 나서 뛰쳐나가려는 것을 음구의가 한쪽 팔을 잡았다. 일 장(丈) 뒤에서 따라오던 공손고와 웅정향도 달려들어 붙잡으려 할 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자 손에 든 칼을 파타루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져 버렸다. 날아오는 칼에 파타루가 옆으로 쓰러져 피했다. 칼은 수풀 때문에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르지만 무엇엔가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퍽! 탁!” 파타루도 자리에 일어나 정말로 공격할지는 몰랐던지 선상조에게 달려들었다. “오늘 우리 어디 끝장을 봅시다. 나도 댁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들 이러나? 아무리 짜증이 나도 그렇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애들도 아니면서.” 공손고가 파타루를 붙잡아 말릴 때, 웅정향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꾸짖는다. 그래도 서로를 노려보면서, “저 개자식이 약 올리잖습니까?” “흥! 앞에서 길을 내고, 독물(毒物)들도 주의하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허구 헌 날 뒤에서 궁시렁대기나 하고....” 이에 팔을 음구의의 팔을 뿌리치고 선상조가 파타루를 향해 달려든다. 단리유아가 옆에서 보다가 아무래도 일이 커질 것 같아서 끼어들어 완맥(腕脈)을 잡아채 제압했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시오. 모두가 지치고 짜증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머오. 그만 진정들 하고, 오늘은 해도 저물어가니 이 근처에서 쉴 곳을 알아봅시다.” 단리유아가 말하여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전방에서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꺼먼 구름덩이가 다가왔다. “파타루, 저게 뭔가? 아무래도 벌 같은데, 저렇게 큰 벌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음구의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소리치자, 일행 모두가 뒤돌아보았다. 파타루가 다가오는 벌들을 보면서 기겁해서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치, 칠촌독봉(七寸毒蜂)! 모두 도망쳐요.” “아니 이런 밀림에서 어디로 도망치라는 말인가? 또 겨우 저 따위 벌 때문에 도망치라고?” 공손고가 철적(鐵笛)을 빼들며 말한다. 일행도 도망치기는 글렀다는 것을 알고는 각자 무기를 꺼내들었다. 파타루도 우거진 수풀 속을 뚫고 벌을 피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용기를 내어 도를 들어올리며, “저놈들은 보통 벌이 아닙니다. 다 큰 벌은 크기가 대략 칠촌에 이르고 피부도 단단해 웬만한 칼질로는 죽일 수도 없습니다. 날개를 노려서 떨어뜨리거나 완전히 두 조각을 내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침에 쏘이면 보통 사람도 두 시진(時辰)을 넘기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절대로 침에 쏘이지 않도록 하고, 설혹 침에 쏘이면 바로 맞은 부위를 칼로 도려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마취의 성분도 있어서 내버려두면 점점 움직일 수도 없게 될 테니.” 파타루가 빠른 속도로 떠들며 벌에 대해서 알려준다. 이에 공손고가 선상조를 흘겨보면서, “하여간에 네 놈은 일 만드는 데는 선수야. 제기랄, 이제는 벌과도 싸워야하다니. 이놈의 땅은 한시도 마음 놓을 수가 없구만!” 발끈하여 소리치려는 선상조를 잡아당기며 단리유아가, “모두 그만하고 각자 위치를 정하기나 합시다. 내가 정면에서 다가오는 녀석들을 맡을 테니, 나머지는 여러분이 막도록 하시오. 그리고 파타루, 당신은 중앙에 서 있으시오.” “나도 싸우겠습니다. 이제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 파타루가 승복할 수 없다는 듯이 칼을 들어 올리며 나선다. 이에 단리유아가 정면에서 다가오는 벌들을 향해서 검을 휘두르며, “한 사람은 만일을 위해서도 가운데에서 대기해야 하오. 혹시라도 누군가 독침(毒針)에 쏘인다면 , 상처를 응급처치 할 동안 대신해야할 테니. 그러니 여러 소리 말고 우선은 중앙에 있으시오.” “파파팍, 터터턱. 퍼퍽” 할 수 없이 파타루가 중앙에 서고, 나머지 일행은 방원을 형성한 채 무기를 꺼내어 사방에서 덮쳐오는 벌들을 쳐내었다. 얼마나 수가 많은지 햇빛을 가려서 주위가 어두컴컴해 보일 정도였다. “퍼퍼퍽, 파팍” “제기랄, 무슨 놈의 벌들이 이렇게 많아?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수가 한군데에 모여살 수가 있지?” 공손고가 벌을 쳐내며 질린 듯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미 수천 마리는 떨어진 것 같았는데, 조금의 흔적도 없는 것처럼 사방에서 계속해서 몰려드는 것이었다. 이에 파타루가, “그동안 이 근처 십 리 이내에서는 특별히 독물(毒物)이나 동물(動物)을 마주치지 못했는데, 아마도 이놈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놈들은 특이하게 육식을 하는 놈들인데,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독물들도 이 칠촌독봉(七寸毒蜂)에 상대가 되지 않아서 먹잇감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원체 숫자가 많으니 아무리 대단한 독물이라도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단리유아도 검기(劍氣)를 형성해 공격해서 상당한 숫자를 죽였는데, 이미 전방은 벌들의 조각난 시체로 맨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일행도 죽이고 있었지만 도대체가 얼마나 많은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퍼퍽. 파팍. 투툭” 일각이 넘게 죽었을 때 웅정향이 등 뒤, 하늘 위에서 접근한 독봉(毒蜂)에 침을 쏘였다. “윽, 제기랄.” “어서 물러서 파타루에게 독침을 파내도록 하시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더 넓게 막고.” 옆에서 지켜보던 단리유아가 소리쳐 물러나게 한다. 뒤로 물러나니 파타루가 소도(小刀)를 꺼내어 왼쪽 어깨 뒷부분의 옷을 도려내고, 침이 들어가 푸르게 변색되고 있는 지점을 칼로 일 촌 가량 도려냈다. 그런 순간에도 독기(毒氣)가 번져 이미 좌측 상반신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욱, 정말 지독한 독(毒)이군. 벌써 이렇게 번지다니. 파타루, 자네는 그만하고 내 자리를 대신 맞도록 하게. 잠깐 해독약을 복용하고 상처를 싸맨 다음 다시 교대할 테니.” 파타루를 밀어내고 준비했던 해독약(解毒藥)을 복용했다. 해독약라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어서, 일단은 독기(毒氣)가 더 번지는 것을 멈추는 정도만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나서 다시 한 번 꼼꼼히 치료해야 할 것이다. 파타루가 잠시 끼어들었지만, 막는 것도 힘이 부치는 모습이었다. 일행도 기(氣)를 형성하지 않고 그냥 무기로 공격해서는 제대로 타격을 줄 수 없었다. 날개에 맞지 않는 한 다시 날아올라 공격했던 것이다. 다시 웅정향이 나서며, “자네는 뒤로 물러나게. 그리고 위에서 공격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도록 하게. 우리가 사방을 막는다 해도 위쪽은 완전히 막을 수 없으니.” 웅정향이 나서고, 완전히 지쳐서 파타루가 헉헉거리며 물러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벌들의 숫자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미 떨어진 벌들이 일행주위로 한 자 높이까지 쌓여서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일행도 그동안 모두 한두 번 벌에 쏘여 치료를 해야만 했다. “허헉, 정말 이가 갈리게 징그러운 놈들이구만. 내 이런 벌이 세상에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휴, 정말 끔찍한 놈들입니다. 어떻게 죽여도 물러서지 않고, 끝이 안 보이니.” 공손고와 웅정향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일행이 절정고수라 해도 반 시진(時辰) 내내 멈추지 않고 무기에 기(氣)를 형성해서 휘두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두가 지쳐갈 때 별안간 공격이 끊기더니, 다시 전방에서 한 때로 모여서 공격해왔다. 이것이 마지막 공격인 것 같았는데, 거대한 기둥이 회오리치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단리유아가 검을 들어서 공격할 자세를 취하며, “내가 저놈들을 없앨 테니 혹시라도 빠져나가는 놈들이 있으면 막도록 하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검을 휘둘러 천보검법(天補劍法)의 만적붕(萬滴崩)를 펼쳤다. 은청색의 검강(劍剛)이 허공에 연이어 나타나 나선형으로 회전하면서 전방의 벌을 향해서 다가갔다. “콰쾅! 퍼퍽. 파스슥” 벌떼와 부딪치는 순간 검강(劍剛)이 폭발하며 전방으로 난사되었다. 그 결과, 전방 오 장(丈)까지 폭이 일 장이 약간 못되게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된 수풀과 벌들의 시체로 길이 났다. 또 사방으로 강기(剛氣)가 폭사 되어 주변의 수풀도 엉망이 된 모습이었다. “투툭! 툭” 허공에서 떨어지는 조각난 벌과 나뭇가지의 소리에 일행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허, 정말 대단하군. 이게 검강(劍剛)의 위력인가?” “저번에 고평(高平)에서 도망칠 때 언뜻 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일행의 감탄사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들이 단리유아가 직접 검강을 펼치는 것을 본 것은 고평(高平)에서 건물을 날려버릴 때 잠깐 본 것에 불과했다. 그때는 달아나느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때는 단순하게 하나의 검강을 날렸을 뿐이지 이렇게 초식을 이루어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검강에 대해 떠들면서 아직 살아남은 소수의 칠촌독봉(七寸毒蜂)을 없앴다. “휴, 이제야 끝났구만. 이놈들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네.” “맞습니다. 사실 소사숙께서 삼분의 이 이상 없애지 않았다면, 저희들은 여지 것 검을 휘두르고 있어야할 것입니다.” 공손고의 말에 음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웅정향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선사제. 도대체 언제나 말썽 피우지 않고 조용할 텐가? 오늘 만약 소사숙께서 없었다면, 우린 저놈들의 한 끼 식사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네.” “맞네. 너 이 망할 자식,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내가 먼저 그냥두지 않겠다.” 공손고 역시 선상조를 노려보면서 말할 때, “그만합시다. 이미 끝난 일이고 선사질도 많이 미안한 모양이니. 그리고 오늘은 어차피 늦기도 하니 이곳에서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게다가 비록 지저분하지만 이런 공터가 생겼으니, 노숙하기에도 적당하겠습니다.” 아직도 불만에 차서 일행 모두가 선상조를 노려보다가 단리유아의 말에 물러나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해독약을 먹어서 꼼꼼히 치료했다. 이때 파타루가 단리유아에게 다가서며, “대장. 쉴 때 쉬더라도 어두워지기 전에 아까 칠촌독봉(七寸毒蜂)이 나온 곳에 가서 꿀이라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맞아. 그 생각을 못했군. 벌이 있다면 분명 꿀도 있을 텐데. 어서가세.” 공손고가 맞장구치면서 파타르루를 재촉한다. 일행도 그 말에 문득 생각나서 파타루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공터에서 삼 장(丈)을 못 들어가 커다란 고목(枯木)이 나타났다. 중간부분은 불타서 없어졌는데, 둘레만 해도 일 장이 넘었고, 높이는 이 장에 약간 못 미쳤다. 선상조가 던진 칼도 나무 한쪽에 떨어져 있었다. 일행이 다가가 보니 벌집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는지라, 음구의가, “여보게 도대체 벌집은 어디에 있나? 아무리 봐도 고목뿐인데.” “여기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이 고목 전체가 그놈들의 집입니다. 아마 꼭대기는 밀랍이나 배설물로 막혀있을 것이고 그 안쪽 전부가 벌집으로 꽉 차 있을 것입니다.” “뭐, 뭐라고? 이 고목 전체가?” 일행이 놀라서 다가가 보니 한쪽에 두 자 정도의 구멍이 드러나 보였다. 아마 이곳이 통로인 것 같았다. “하하하, 오늘 저희는 횡재했습니다. 그놈들한테 당한 것은 억울하지만, 이놈들의 꿀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능숙한 일꾼도 칠촌독봉(七寸毒蜂)의 꿀은 목숨을 걸어도 구할 수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꿀도 중요하지만 이 정도의 크기라면 꿀 중에서도 가장 순도가 높은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이 정도이니 상당한 량이 나올 것입니다.” 일행이 고목을 조심해서 쪼개낸 다음 속을 들여다보니 완전히 벌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군데군데 유충과 몇 마리의 독봉이 있었지만, 이내 쫒아버리고 정신없이 꿀을 먹는데 열중했다. 그동안 습지(濕地)와 독지(毒池)를 거치면서 육포가 제대로 된 것이 없었는데 간만에 포식하게 되었다. 한동안 꿀을 먹고 나머지는 한 쪽에 모아서 먹을 수 있도록 한 후에, 밑바닥을 뒤져서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을 찾았다. 이정도 크기에도 불구하고 겨우 한 근이 될까 말까 할 정도의 량밖에 없었다. 약초를 담은 병을 꺼내어 속을 비운 후에, 조심해서 황금수황밀을 따로 담았다.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은 같은 량의 공청석유(空淸石油)와 맞먹는 효과를 지녔다는 영약이었다. 원체 구하기 어려운 것인데, 수십만 마리의 벌들이 모여서 수십 년 이상 한 곳에 살아가야 극히 소량이 생길뿐이었다. 이정도의 양이라면 사실 값을 따질 수 없었다. 아마 강호인(江湖人)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얻으려 할 것이다. “소사숙, 이것을 어떻게 처리 할까요?” 음구의의 말에 선상조가 냉큼, “하하하, 어떡하기는. 당장 우리끼리 나누어 먹어야지. 소사숙, 먼저 드십시오.” “자네 때문에 생고생을 했는데, 그럼 자네는 빠지게.” 공손고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발끈하여, “무슨 소리요? 내가 아니었으면 이런 것을 찾을 수나 있을 것 같소?” “허허, 내참 어이가 없구만. 이놈은 대체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뻔뻔할까?” “말다했소? 보자보자 하니까 선배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군.” “다했으면 어쩔 테냐? 이 천방지축 모르고 날뛰는 망둥이야!” “뭐, 뭐요? 마, 망둥이? 이 빌어먹을 노인네가?” 화가 나서 서로 욕하며 날뛰는 선상고와 공손고를, 주위에서 달려들어 떨어뜨려 놓으며 말린다. 한동안 소란스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단리유아가, “이것은 영약중의 영약이라 할 수 있으니, 앞으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말도록 합시다. 당장 조금씩 먹어서 내공을 늘릴 수 있겠지만, 그 보다는 앞으로 위급한 상황이 되었을 때 더 필요할 것이오.” 단리유아의 말에 일행도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한다. 선상조만 궁시렁대다가 다른 사람들이 눈총을 주자 할 수 없이 물러섰다.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자, 일행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 임읍국 부분은 제가 역사를 잘 몰라서 저번에 설명해 넣지 못했습니다. 양해바라구요, 간단히 앞부분에서도 수정했으니 다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타와 오류가 보이면 댓글에 써 주세요. ###### 지명을 나타내는 부분은 지도를 직접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중국쪽이라면 대강 감이라도 올 텐데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생소한 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 점은 저도 당장 어떻게 해볼 수가 없군요. 앞으로 책으로 낼 때, 지도로 지명과 문파, 날짜 등은 상세히 그려낼 계획입니다. ##### 천중무적 님 말씀처럼 약간 문제가 있군요. 제 생각은 무공을 본격적으로 익힌 것은 채주에서 머물동안 이어서 그렇게 쓴 것인데, 어색한 면이 보이네요. 수정했습니다. 독룡림(毒龍林) 독룡림(毒龍林) 2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나 밀림을 헤치며 계속 남하해, 포가산(咆苛山)의 끝자락인 초랍(草拉)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것은 구월 말의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도중에도 습지와 독지를 만나 되돌아가기도 했고, 습지에 빠져 짐을 못 쓰게 되어 버린 적도 있었다. 물도 떨어져 습지의 물을 떠먹었다가 독기(毒氣)에 중독되어 며칠을 배앓이로 고생하기도 했다. 다행히 일행 모두 무사히 초랍까지 왔지만 되돌아가라면 다시는 가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였다. 독룡림(毒龍林)이 있는 수락지(藪落池)는 이 초랍(草拉)을 지나서부터 사방 이백여 리의 대습지였다. 안남산맥(安南山脈)의 최고봉중의 하나로 일만 척이 넘는 고봉인 포가산(咆苛山)을 뒤로하고, 그 아래에서 수릉강(浽菱江)이 만나는 일대를 가리키는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독룡림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위치와 통로를 몰라서 대습지를 통과할 수가 없었다. 만일 길을 모르는 가운데 들어섰다가는 습지에 빠지거나 각종 독물의 먹이가 될 뿐으로 그 자체가 천연적인 요새와 같았다. 초랍(草拉)은 소수부족 중의 하나인 토족(土族)의 일족이 사는 곳으로 수락지(藪落池)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이었다. 이들 토족은 강에서 고기를 잡거나 화전과 사냥에 의지해 살아가는 부족이었는데, 이 중에서도 초랍은 가장 끝에 위치한 곳으로 오십여 호의 토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이십여 리를 더 가서 수릉강(浽菱江)을 건너면 수락지에 닿게 될 것이다. 일단은 이곳에서 쉬면서 노독을 풀고, 파타루를 돌려보내야 했다. 해질녘 황혼이 사위를 뒤덮을 때, 갑자기 밀림을 뚫고 나타난 일행의 모습을 본 토족(土族)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소란이 일어났다. 수릉강(浽菱江)을 따라 올라오는 사람은 가끔 있었지만, 이처럼 안남산맥(安南山脈)의 밀림을 뚫고 남하해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이 이곳을 거쳐 가기도 했지만, 그들도 특별히 독물(毒物)을 구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잘 가지 않는 곳이었다. 기진맥진한 채 완전히 넝마 같은 옷을 걸친 일행의 모습은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시궁창에 빠졌다가 나온 생쥐 꼴이었다. 전신에서 퀴퀴한 냄새를 흘리는데다 여기저기 독물에 물린 상처투성이의 모습은 이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체적으로 토족의 남자들은 하반신을 가린 형태로 무릎까지 오는 흑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었고, 상체는 벗은 채 팔뚝에 은(銀)과 동(銅)으로 된 팔찌를 하고 있었다. 또 몸통에는 여러 가지 동물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머리는 검은 천으로 둘둘 말은 모습이었다. 여자들은 머리위에 수건을 쓰고, 상하의 중요부위만 천으로 대충 가리고 있었다. 일행의 모습을 보고 놀라 소리치는 소리에 곧 삼십여 명의 전사들이 모여들어 창을 내밀며 뭐라고 소리쳤다. 이에 파타루가 나서서 알 수 없는 말로 여러 번 떠들었는데도, 위협적인 태도로 창을 들어서 소리친다. 잠시 파타루가 몇 마디 더 하다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우리를 보고 역귀(疫鬼)가 아니냐고 하면서 물러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로 공격하겠다고.” “역귀(疫鬼)?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물러가기는 어디로 물러간다는 말이냐? 제기랄, 피곤해 죽겠는데. 차라리 무기를 든 놈은 죄다 죽여 버리고 쉬는 것이 낫지.” 단리유아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선상조가 끼어들어 대답한다. 일행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음구의가 팔을 잡아채며, “상조, 자네는 입 좀 다물게. 이들을 죽여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곳은 독룡림(毒龍林)과 가까워서 그들과도 연관이 있을 텐데.” “쯔쯧, 하여간에 저 놈은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몰라. 너는 나서지 말고 저리 한 쪽에 처박혀 있는 것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니, 입 다물고 가만이나 있어라!” “뭐요? 그것이.... 우웁.” 공손고의 말에 발끈하여 나서려는 것을 음구의가 입을 가리고 낚아 채 뒤로 잡아당겼다. 두 사람이 뒤에서 투닥거릴 때, “파타루, 일행 모두가 피곤에 절어서 이대로 계속 수락지(藪落池)로 향할 수는 없소. 다른 방도는 없겠소?” 단리유아의 물음에 파타루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들 일족(一族)은 대체로 힘을 숭상하는 부족입니다. 강한 전사를 보면, 모두가 경배하지요. 또 나중에 그 전사가 죽으면 신으로 모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약자를 보면 잡아서 신에게 공양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한번 약세를 보이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무공을 한번 펼쳐주십시오.” “알겠소.”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빼들어 한쪽의 나무를 검강(劍剛)을 발휘해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콰쾅! 투투툭!” 굉음에 놀라서 토족(土族)의 전사들이 물러서거나 엎드리며 두려운 표정이 된 채 단리유아를 가리키며 웅성거렸다. 이 때 뒤에서 한 명의 사십대의 오 척이 못되는 모습에 팔뚝에 다섯 개의 은팔찌를 찬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뭉툭한 코와 가늘게 뜬 눈에 몸통에는 물소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파타루의 말로는 족장으로 보인다고 했다. 파타루가 나서서 한동안 말을 한 다음, “저희가 수락지(藪落池)로 독룡림(毒龍林)을 찾아가는 중이라 하니 놀라는군요. 아마도 이들은 그들을 신인(神人)으로 여기고 있나봅니다. 우리가 찾아간다니 과연 신인들처럼 대단하다며 후히 대접하겠다고 합니다.” “그래그래. 잘 알았으니, 신인이고 뭐고 간에 우선 좀 씻고 쉴만한 곳이나 안내해달라고 해라.” 공손고의 말에 파타루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전에 구한 칠촌독봉(七寸毒蜂)의 꿀이 남아있으면 이들에게 선물로 주십시오. 우리가 이들의 도움에 답례를 한다면, 앞으로 우리가 머물 동안 결코 해를 끼치지 않고 극진히 대접할 것입니다. 아마 이들에겐 그 이상의 선물이 없을 것이니.” 파타루의 말에 일행이 공손고를 바라보며 어서 주라는 듯이 계속 눈길을 준다. 한동안 일행의 시선을 피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공손고가 아까워하면서 등 뒤에 매고 있던 상자에서 꿀을 꺼내어 건넸다. “제기랄, 이게 마지막인데. 그동안 아무리 먹고 싶어도 참고 남겨놓은 것인데, 쩝.” “뭘 그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당장 우리가 필요한 것은 최소한 좀 씻고 쉬는 것이란 말입니다.” 웅정향이 쏘아붙이며 미적거리는 공손고의 손에서 뺏다시피 잡아채 파타루에게 건네주었다. 한동안 더 대화가 이어지다가 일행은 마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마을도 다른 산악부족과 마찬가지로 고상식으로 지어져있었다. 깨끗한 물이 귀한 곳이어서 대충 세면만 하고 다시 모여, 족장의 집에서 저녁을 대접받았다. 쌀밥과 물고기 말린 것,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시커먼 고깃덩어리와 몇 가지 야생과, 카사바(열대관목으로 그 뿌리가 고구마처럼 생겼는데, 보통 길이가 30-50cm, 지름이 20cm이고, 바깥 껍질은 갈색.)의 뿌리를 삶은 것을 내놓았다. 일행이 모여 앉고 한쪽에 촌장과 마을의 원로로 보이는 노인 넷이 모여서 식사를 시작했다. 공손고가 차려진 음식을 보면서, “제기랄! 이게 다야? 아까 그 꿀을 내다팔면 그 만한 은덩이는 구할 수 있을 텐데.” “쉿! 너무 크게 떠들지 마십시오. 이런 곳에서 그럼 얼마나 대단한 음식을 원한다는 말입니까? 여태까지 다른 부족들에게 들려서 먹을 때에는 별말이 없다가 오늘은 무슨 심통입니까?” 파타루가 주의를 주어도 공손고가 투덜거리며,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그때는 우리도 식수나 간단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잠깐 들렸을 뿐이지만, 그 아까운 꿀에 비해서 이게 도대체 뭔가?” “그래도 이들에게는 이것이 진수성찬이란 말입니다. 만약 손님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자신들을 모욕했다고 여기고 모두가 달려들어 죽이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조용히 드시기나 하세요.” “제기랄, 내가 저놈들이 겁날까봐? 나 혼자서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이때, 웅정향이 공손고를 말리며, “공손선배, 이곳은 수락지(藪落池)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을이요. 아마 우리가 찾아가는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과도 약간 관계가 있을 것 같으니, 말썽 피울 생각 마시고 그냥 드십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공손선배, 어차피 이틀 정도는 이곳에 쉬면서 피로를 풀고 나서 다시 길을 가야할 테니 너무 그렇게 음식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잠시 일행이 공손고와 이야기하다가 단리유아가 파타루를 바라보면서, “파타루, 먼저 이들의 대접에 대해 사례의 말을 전해주시오. 그리고 이들에게 독룡림(毒龍林)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아 주시오. 아니면 가는 길이라도.” 파타루가 단리유아의 말을 받아서 족장과 원로들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 “이들도 가는 길은 모른답니다. 누구도 강을 건너 수락지(藪落池)쪽으로는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동안 지켜진 금기(禁忌)와 같은 것인가 봅니다. 저희들끼리 가는 것은 어떻게 보느냐 하니 극구 말리는군요. 그곳과 비교해서 우리가 지나온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길을 모른다면, 끝없이 습지에서 헤매다 독물의 먹이가 될 뿐이라고. 여기서 머물다 독룡림(毒龍林)의 인물이 나왔을 때, 같이 들어가는 것이 상수랍니다.” “파타루,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들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소? 차라리 나 혼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어떨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파타루가 대답하기 전에, “소사숙. 지난번에 사인곡(蛇人谷)에 소사숙께서 혼자 가신 후에 기다리다 걱정이 되어 죽을 뻔 했는데 여기서 또 기다리라고요? 이번에는 우리도 따라갈 생각이니, 떨어뜨릴 생각은 아예 마십시오.” “소사숙. 상조의 말처럼 저희도 이제부터는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저희가 따라가도 큰 힘이 못되고 짐이 될 수도 있지만, 떨어져 있다가 암습이라도 당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음구의가 선상조의 말에 편든다.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하며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이에 파타루가, “지난번 독룡림(毒龍林)의 인물이 나온 것이 한 달이 다 되어가니, 별 일이 없다면 며칠 내로 독룡림의 인물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기다렸다가 그때 함께 들어가지요.” “알겠소. 그러면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해서 일행도 같이 갈 수 있다면 함께 가기로 합시다.” 사실 단리유아는 일행과 함께 독룡림(毒龍林)에 들어서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오히려 걸리적거릴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일행 모두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공손고를 보면서, “공손선배, 혹시 독룡림(毒龍林)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들은 중원(中原)에도 알려질 정도로 남만(南蠻)에서는 가장 유명한 문파중의 한 곳인데.” 공손고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글쎄. 하도 소문이 분분해서. 어떤 사람들은 더 없이 사악(邪惡)한 곳으로 보기도하고, 또 다른 사람은 독을 쓰지만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행위는 한 적이 없다고 하기도 해서. 내 생각으로는 과거 중원(中原)에서 잠시 활동했던 것을 보아서는 그리 사악한 곳은 아니라고 보네. 단지 은원(恩怨)에 대해서 분명하다고 하는데, 한번 잘못 건드렸다가는 한 문파가 혈수(血水)로 녹아서 사라져버릴 정도로 복수심이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 공손고의 말을 듣고 모두가 걱정스런 표정이 되었다. 말은 안하지만 다들 속으로는 그냥 지나쳤으면 하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거쳐 온 곳만 해도 끔찍한데, 수락지(藪落池)의 험악함과 독룡림(毒龍林)의 독공을 생각하니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단리유아에게 그냥 지나치자고 해보아야 듣는 척도 안하고 혼자라도 찾아갈 테니, 일행의 마음은 한쪽 발목에 밧줄을 매단 채 수렁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답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식사를 계속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 일행끼리 따로 한집에 모이게 되었을 때, “독룡림(毒龍林)의 일은 아까 의논했던 대로 하도록 하고, 파타루의 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파타루, 혼자서 밀림 속을 통과해서 돌아갈 수 있겠소?”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저의며, “휴, 아무리 제가 무공을 조금 익혔다고 하지만, 저 혼자서 다시 밀림을 뚫고 전진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올 때는 우기(雨期)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만일 우기라면 이렇게 무사히 도착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기라고? 그러고 보니 큰 비를 만난 적은 없군. 지겨운 안개만 밤낮으로 깔려서 짜증났었을 뿐.” 공손고가 지난 일을 돌이켜보며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대구월(大瞿越)의 북부지역은 십이월에서 사월까지가 우기로 대체적으로 비오는 날이 많고 습한 날씨가 계속된다. 그에 반해서 이 근처 중부지방은 십일월에서 십이월까지가 우기로 거의 매일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몰아치는 시절로 가장 험악한 곳이었다. 또, 임읍국(林邑國) 남부지역은 오월에서 시월까지가 우기로, 매일 반 시진(時辰) 가량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렸다. 다행히 일행이 오는 동안에는 비가 몇 번 온 적은 있어도 하루 종일 내리는 경우는 없었다. 만일 습지와 독지가 산재해 있는 상태에서 우기(雨期)에 들어갔다면, 절대로 이렇게 빠른 시간 내로 무사히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천지가 물바다가 되어서 어디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저는 수릉강(浽菱江)을 따라 계속 남동진해서 해안가가 나올 때까지 내려갈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해안을 따라 올라간다면 별일 없다면 두 달 이내에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파타루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상조가 끼어들어, “아니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밀림을 뚫고서 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잖아?” “그래도 시일이 두 배 이상 걸리잖소?” “제기랄. 나는 두 배로 걸리더라도 앞으로 저놈의 밀림은 다시는 통과하고 싶지 않아.” 선상조가 이가 생각만 해도 갈린다는 듯이 말할　때 단리유아가, “됐소. 해안으로 돌아서 왔다면 두 달은 족히 걸렸을 텐데, 우리가 그동안 너무 시일을 지체해서 어쩔 수 없소. 앞으로도 그리 쉬운 길은 없을 것이오. 그보다 파타루, 당신 말대로 한다면 우리의 도움 없이도 별 탈 없이 되돌아갈 수 있겠군.” “예, 혼자서 여행하니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해안가는 대읍(大邑)이 많으니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파타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할 때, “파타루, 그동안 당신이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안내를 해주었는데 그냥 보낼 수 없을 것 같소. 공손선배가 금전(金錢)으로 보상하겠다고 했지만 더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아닙니다. 그동안 저를 도와서 고무족(鼓舞族)을 물리치고, 저희 일족을 도와주신 것만 해도 이미 충분한 보상이 되었습니다.” 파타루의 거절에 공손고가 고개를 저으며, “자네를 도운 것은 이것과는 별개야. 그전에 이미 약속한 것이니. 여보게, 단리소협. 금전이야 이 아이에게 별로 필요치 않을 것이네. 차라리 이번에 얻은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을 나누어주는 것이 어떻겠나? 나도 이리아(伊莉芽)에게 특별히 준 것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흠, 소사숙. 저도 공손선배의 의견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이들 오누이가 무공을 혼자서 익히니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도 이리아에게 선물한 것이 없었는데, 선배 말에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공손고와 웅정향은 파타루보다는 이리아(伊莉芽)를 생각하고, 귀여운 모습을 되새기며 의견을 내놓았다. 두 사람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소. 이리아(伊莉芽)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웅사질,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의 반을 따로 담아서 다음에 파타루가 떠날 때에 바로 가져갈 수 있도록 미리 전해주도록 하시오.” “아니, 소사숙. 그 귀한 것을 반의반도 아니고, 절반이나 이놈한테 주라구요? 이 자식이 한 일이 얼마나 된다고?” 절반이나 건네주라는 소리에 심통이 일어나 선상조가 소리쳤다. 이에 파타루도, “저도 받기가 그렇습니다. 그동안 저나 저희 일족에게 도움을 주신 것만 해도 평생을 따라다니며 갚아도 부족할 텐데.” “선사질은 그만 나서시오. 일행이 지금껏 큰 탈 없이 무사히 온 것에는 파타루의 공이 적지 않소. 파타루, 이것은 미리 약속한 대가라 생각해두시오. 그리고 이리아와 반씩 나누어 복용하도록 하시오. 혼자서 많이 먹는다고 내력(內力)이 그만큼 느는 것은 아니니. 아마 한사람이 모두 먹어도 반갑자(半甲子) 이상의 효과는 없을 것이오. 조심할 것은 절대로 한 번에 한 모금이상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또 욕심내서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먹어도 안 되오.” 단리유아가 선상조를 꾸짖고는 파타루에게 상세히 복용할 방법을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아마, 제대로 약효를 흡수한다면 이삼십년 정도 내력이 증가될 것이오.” 음구의가 단리유아의 말에 의문을 나타내며, “소사숙,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이 그 정도의 효과밖에 없습니까? 절반이라면 반근에 해당하는 양인데?” “아마 한 사람이 한 근 모두를 먹어도 반갑자 이상 내력이 늘어나지 않을 것이오. 흔히들 영약(靈藥)을 많이 먹을수록 내력도 급증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 몸은 오묘해서 어느 정도 이상은 모공을 통해 밖으로 배출되어 버리거나 곧 내성이 생겨서 생각보다 그리 효과가 없소. 다만 세맥(細脈)에 스며들어 상처회복 같은 경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이번에는 선상조가, “하지만 소사숙. 강호(江湖)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천년삼왕(千年蔘王)이나 태양화리(太陽火鯉)를 먹고, 일갑자 이상의 내공을 얻어서 절세고수(絶世高手)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한참 선상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런 경우는 누군가 진기로 도인(導引)해서 제대로 약효를 흡수한 경우요. 아니면 그만한 능력이 되던가. 일반적으로 영약(靈藥)을 먹으면 고수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좋지 않는 결과를 보이는 경우가 더 많소. 만일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그런 영약을 잘못 먹었다가는 약기를 견디지 못하고 혈맥이 터져 죽거나, 약기운이 뇌리를 침범해 백치(白痴)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오. 또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도 함부로 먹지 않는 것이 좋소. 일단 심신(心身)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내력만 급증한다면, 그런 사람은 절정이상을 넘기 힘들게 될 것이오. 갑자기 내력이 늘어나니 자신도 모르게 자만에 빠지게 되고, 항상 날뛰는 기혈(氣血)을 눌러야하므로 다른 일에 제대로 정신을 집중할 수 없게 되오. 흔히들 대문파에서 영약으로 제자들의 무공을 급증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보다 고수가 많이 나오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이기 때문이오.” “그러면, 소사숙. 한 번에 어느 정도의 양을 복용하는 것이 적당할까요?” 음구의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보통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력(內力)의 오분의 일이 적당하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그것도 많다고 생각하오. 자칫 기혈(氣血)이 흐트러진다면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하게 될 테니. 파타루, 내가 당신에게 아까 말했지만, 사실 한 모금도 많다고 볼 수 있소. 당신들은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상황이니, 될 수 있으면 반 모금 이상은 먹지 말고 시일을 가지고 천천히 복용하도록 하시오.” 단리유아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선상조는 아직도 아쉬운지 파타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더 앞으로의 일정에 대화를 나누다가 일단 파타루는 독룡림(毒龍林)의 인물이 올 때까지는 머물렀다가 떠나기로 결정하고, 독룡림의 인물이 올 때까지는 각자 쉬면서 기다리도록 결정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시간은 벌써 해시(亥時:21-23시)가 된지 한참이어서 서둘러 각자 잘 곳으로 향했다. 이들 토족(土族)의 집은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구조로 동쪽 모서리 쪽으로 출입구가 나있었고, 그 반대쪽에 침실이 있었다. 촌장이 내준 집이었지만, 장정이 여섯이나 되는 일행이 모두 한 침실에서 잠들기는 비좁았다. 할 수 없이 선상조와 음구의, 파타루가 침실 밖에서 자야만 했다. 그러나 지난 십여 일간의 여정(旅程)에 비한다면,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모두가 피곤에 지쳐 자리에 쓰러지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 오타와 오류에 대해 댓글에 마구 써주십시요. 의견도.... 선상조와 중원으로 돌아가자는 데에 말이 많군요.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함없답니다. 다 때가 되면 적절하게 처리될 것입니다. ###### 블랙펄 님께 감사를.... 무심코 넘겼는데 지적을 해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독룡림(毒龍林) 독룡림(毒龍林) 3 일행이 피곤에 골아 떨어져 시간이 자정(子正)에 가까워졌을 때, 집안은 퀴퀴한 냄새와 함께 일행의 코고는 소리와 입맛 다시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한동안 뒤척이다 잠이 오지 않아서, 단리유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마을도 모두가 잠에 빠졌는지 불빛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들려오는 소리도 없이 깊은 정적에 빠져 있었다. 한줄기 어스름한 달빛에 의지하여, 집을 나와 뒤쪽 수풀 속으로 걸어가며 상념에 잠겼다. 다른 이들은 그동안의 힘겨운 여정(旅程)에 지쳐 바로 고단한 몸을 누이자마자 잠에 빠졌을 테지만, 자신에게는 오히려 마음이 답답한 바가 더 커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행을 같이하는 동안 일행의 잔소리와 투정, 말다툼, 앞날에 대한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홀로 떠돌았는데 이렇게 무리지어 여행하니, 아무래도 익숙지 않았고 마음의 부담도 느껴졌다. 누군가를 책임져야한다는 것은 역시나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運命)중의 하나가 천고(天孤)인 것을 보면, 괜히 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닌지 회의가 들 때가 많았다. 천고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운명적으로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만일 누군가와 친밀하게 되었을 때는 반드시 어느 한 쪽에 불행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었다. 자신은 그런 일에 익숙하다지만, 아마 일행은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여태 무의식적으로도 누군가와 가까워지기를 거부하고, 조금이라도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을 피하여 왔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운명대로라면 이들이 지금이라도 자신과 헤어지지 않는 한 불행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이들을 데리고 다니지만, 이들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뇌리에 떠올라 괴롭혔다. 현경(玄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온갖 감정을 겪으며, 집착(執着)과 번뇌(煩惱)를 통해서 자아(自我)에 대해 성찰(省察)해야 했다. 일체의 번뇌와 망상이 부질없음을 알고,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달라지고 일어남을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말로 이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를 한 것인지 모르지만 결코 깨달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겪지 않고 말로만 그렇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공허한 중얼거림에 불과했다. 도(道)는 어떤 말로도 정확히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듯이(道可道 非常道), 깨달음을 말로 표현한다면 이미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라 할 수 없었다(不立文字). 각자 타고난 운명과 삶의 무게가 틀리다지만, 자신의 일생은 언제나 안락(安樂)함을 맛보게 될지 생각해보면 씁쓸한 여운만 마음에 가득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편할 날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도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지만, 솔직히 무공이 강해진다고 해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자신도 회의적이었다. 상념에 잠겨 숲속을 거닐고 있을 때, 문득 어디선가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자정이 지난 지 한참인데, 누가 이 시간에 숲속에 들어와 있는지 궁금했다. 발소리를 죽여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가보니, 저녁에 토족(土族)의 원로라고 하며 함께 식사를 나누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부파로탁(吟咐把虜柝), 수하마사하(羞何嚰思遐)....” 아까 원로 중의 하나라고 했었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술사의 기운이 느껴져 주술사(呪術師)로 생각했었던 인물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길 일각 정도 지났을 때, 하늘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주술사를 향해서 큰 새가 날아와 그 앞에 내려앉았다. 까마귀와 전체적으로 비슷해보였는데, 부리가 황금색이었고 훨씬 체구가 커보였다. 내려앉은 키만 해도 삼 척에 가까워서 주술사의 허리에 부리가 닿을 정도였다. “까아악 까악” 새가 내려서며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바라보며 계속 울자, 주술사가 가까이 다가와 살펴본다. 재빨리 몸을 움직여 옆으로 이동해 다른 나무 뒤로 숨었다. 무공은 대단치 않은지 기척을 못 느끼고, 다가와 보니 아무도 없자 다시 돌아갔다. 아직도 울고 있는 새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바로 새의 발목에 죽통을 매달아 다시 날려 보냈다. 잠시 후 주술사마저 장내를 떠나자 나와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미 새는 멀리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주술사의 인기척도 없었다. 이곳은 마을과 백여 장(丈) 정도 떨어진 숲속의 공터로 반경 삼 장 이내에는 아무것도 없이 맨땅을 드려내고 있는 곳이었다.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그 주술사(呪術師)는 이곳에 와서 술법으로 황금오(黃金烏)를 불렀을까? 제금소환술(制禽召還術)의 일종인 것 같았으니, 오랜 시간동안 같이하지 않았다면 마음대로 부릴 수도 없을 것이다. 체구가 너무 커서 한곳에 가두어놓고 키우지 못할 정도였는데, 어느 곳에서 불러와 어디로 죽통을 보냈던 것일까?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자도 독룡림(毒龍林)의 인물이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뇌리에 떠올랐다.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벗어났다. 어차피 독룡림(毒龍林)의 인물이 와야 수락지(藪落池)를 통과할 수 있으니, 설혹 그들이 호의를 가지지 않고 온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자신과 싸울만한 상대가 온다면 그것으로도 목적은 완수한 것일 테니.... 또 그리 쓰고 싶지는 않지만, 독룡림을 찾아갈 다른 방도를 찾으면 될 것이다. 독룡림(毒龍林)에 들어간다면 자신이 알고자 하는 구음독교(九陰毒敎)에 대한 것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구음독교는 모든 독문(毒門)의 시조로 알려진 문파이니, 아무래도 현재 독의 종가로 알려진 독룡림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과거 구음독교는 독공 한 가지로 중원의 원시마교(原始魔敎)와 맞설 정도로 강한 문파였는데, 전한(前漢) 말부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렸다. 정확한 위치도 알려지지 않은데다 멀리 남만(南蠻)에 위치한 문파여서 아무도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구음독교(九陰毒敎)나 원시마교(原始魔敎를 생각해보면, 과거의 무공에 비해 오히려 현재의 무공이 더 뒤떨어져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러한 결과가 일어난 주요원인은, 아무래도 문파에 대한 생각자체가 달라진 것 때문으로 보였다. 과거에는 문파가 그리 많지 않아서, 몇 개의 큰 세력과 나머지 대다수의 독행(獨行)하는 고수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사승(師承)관계가 지금처럼 꽉 틀어 막힌 것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배움을 청하는 데에도 훨씬 자유로웠고, 다시 다른 사람을 사부로 모시는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이에 반해서 현재는 과거와 같은 거대세력 없이 수십 수백 개의 문파가 난립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다시 사부를 바꾼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 무공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 빠른 내력의 축적에 의한 복잡하고 현란한 초식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무공이 다양해지고 초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발전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실제 고수의 수와 질에서는 과거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뒤떨어졌다. 과거에는 일인전승(一人傳承)이나 두세 명으로 이어지는 형태의 문파가 대다수를 차지해 독행하는 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원시마교(原始魔敎나 천강신문(天剛神門)도 본래 이런 고수들이 모여서 형성된 결사체였다. 이러다보니 세력다툼보다는 서로간의 무공에 대한 경쟁이 치열했고, 각기 무공 연마에 박차를 가해서 누구라도 고수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런 강파들이 멸망해 강호(江湖)로 무공이 흩어짐에 따라 무공이 널리 퍼지고 수많은 문파들이 생겨났지만, 오히려 이전만큼의 성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문파가 너무 많다보니 그 무공의 발전에 매달리기보다는 제자의 수와 세력의 팽창에만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양적인 팽창과 빠르고 효과적인 무공을 강조하게 됨에 따라 세월이 흘러 갈수록 이전과 같은 고수들은 기대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채 걷다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일행이 잠든 집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집 뒤의 수풀 속 한쪽에 있는 조그마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잠도 안 오는 데에다 아까의 주술사의 모습을 보니, 혹시라도 암습이 있을지 몰라서 바위에 앉아서 조식을 취하며 다시 상념에 잠겼다. 다음날 아침 늦게 단리유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고 있을 때, 하나둘 일행이 일어났다. 일어난 사람들이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는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그저 생각할 바가 있어서 새벽에 일어났을 뿐이라고 둘러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일행은 토족(土族)의 마을에서 머물며, 몸을 씻고 그동안 지친 심신을 회복하며 지냈다. 별다른 없이 무료한 일상이 이어졌는데, 족장의 명이 있었는지 일행이 머무는 곳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흘째 되는 시월 이일의 정오가 가까워졌을 때,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로 보이는 한 떼의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왔다. 모두 십여 명의 사람들이었는데, 대부분 제대로 복장을 갖춘 모습이었다. 월족(越族)과 비슷한 형태로 머리는 목뒤에서 묶어 매고, 폭이 넓은 상하의에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섰는데, 쌍둥이로 보이는 오십대의 사람들이었다. 약간 등이 굽고 고개를 앞으로 내민 모습으로, 얼굴의 모습도 둥근데다 가는 눈썹이 아래로 처진 형상으로 가만히 있어도 웃는 형상이었다. 서로의 모습이 똑같았는데, 단지 한 쪽의 인물은 얼굴의 왼편에 콩알 만한 점이 있어서 구별할 수 있었다. “그대들이 본문을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오신 누구시요?” 두 명중에서 좌측의 점이 있는 사람이 말했다. 한어(漢語)를 듣고 이들이 독룡림(毒龍林)에서 나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웅정향이 앞으로 나서, “우리는 중원(中原)에서 왔는데 여기 이분은 저희들의 소사숙으로 저희를 이끌고 있는 분으로 중원에서는 전광(戰狂) 단리유아라 알려진 분입니다. 이쪽은 천리적자(千里笛子) 공손고라는 분이고, 이들은 저의 사제가 되는 남파쌍검(南波雙劍)입니다. 그리고 저는 난파검(亂波劍) 웅정향이라고 해남파(海南派)의 사람입니다.” 웅정향의 설명에 이들 두 사람이 놀라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단리유아를 보면서 이번에는 얼굴에 점이 없는 사람이, “그 중원에서 십대고수중의 하나라는 단리대협이라는 말이오? 그것이 정말이시오?“ “그렇소.” 표정의 변화 없이 입만 움직여 말하는 듯한 단리유아를 보고 약간 이상하다는 듯이 보다가 다시 점이 있는 사람이, “이런 저희가 실례했군요. 여러분의 소개를 받고는 저희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었으니. 저희들은 독룡림(毒龍林)의 사람들로 완와쌍수(宛蛙雙手)라 합니다. 이쪽은 제 아우로 사리차(巳里磋)이고, 저는 사리행(巳里荇)이라 합니다. 저희는 주로 외부에서 본문을 찾아오는 손님을 안내하고 접대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호(江湖)의 소문에 밝은 모양입니다. 이런 이역에서 저희 소사숙을 바로 알아보다니, 저희는 한동안 실랑이를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웅정향의 말에 아우인 사리차(巳里磋)가, “아마 남만(南蠻)의 다른 곳과 비슷하게 생각해서 그런 모양이군요. 하지만 저희들은 삼년마다 제자들을 수행(修行)을 겸해서 내보내는 전통이 있소이다. 그런 제자들에 의해 중원의 소문도 들어오지요. 또 여러분 같이 가끔 이렇게 찾아오는 분들께 물어서 알기도 하지요.” 그제야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때, 단리유아가 그들을 보면서, “이번에 본인이 이곳에 온 것은 독룡림(毒龍林)과의 비무를 하고자 온 것입니다. 여기 일행들은 그저 저를 따라 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방문하고, 본인이 비무를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역시나 단리유아의 표정에 어색한 기색이 엿보이다가 이번에는 형인 사리행(巳里荇)이 말하는데, 이들 형제는 반드시 번갈아 가면서 말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흠, 일단 그 비무에 대해서는 저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없겠습니다. 본래 저희의 임무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살펴서 본문내로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이어서, 그런 중요한 사항까지 결정할 권한은 없습니다. 일단 모두 신분이 확실한 것 같으니, 저희가 본문까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할 생각입니까?” “예, 가급적 지금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통 강을 건너서 다시 이틀은 더 가야 하니, 일단 오늘은 수릉강(浽菱江)을 건너 수락지(藪落池)까지 갔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잠시 일행과 서로 소개하는 시간이 이어지고 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결정했다. 일행이 한 쪽에서 짐을 챙기고는 파타루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파타루. 그동안 고생 많이 했소. 돌아가면 이리아(伊莉芽)와 함께 더욱 수련에 열중하시오. 특히 이리아는 아직 어리니, 꾸준히 수련한다면 절정의 경지까지는 무리가 없을 것이오. 내가 그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했고, 총명한 아이이니 말이오. 그대도 더욱 노력하도록 하시오.” 단리유아의 말에 파타루가 섭섭한 기색이 만면에 어린 얼굴로, “알겠습니다. 그동안 여러분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이 은혜를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조심해서 잘 가게. 이리아(伊莉芽)에게도 안부 전하고.” 공손고의 말에 이어서 일행이 차례로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인사를 나눌 때, 선상조가, “땅꼬마야.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헤어진다니 나도 약간 시원섭섭하구나. 잘 가라. 이리아(伊莉芽)에게도 안부 전하고. 나중에 만났을 때에는 제발 동생관계에서 풀어달라고 말도 전하고.” “댁도 몸 건강히 잘 있으시오. 이리아와의 일은 나도 어쩔 수가 없소. 그대가 이미 천지신명에 대고 맹세했으니, 내 마음대로 다시 물릴 수는 없소.” “그, 그런....” 선상조가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잠시 작별인사가 이어진 뒤에 일행이 먼저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과 떠났다. 멀어지는 일행의 모습을 보면서, 파타루 역시 마을을 떠나 수릉강(浽菱江)을 따라 남하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날 오후 강까지 걸으니 세 척의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전체적인 길이가 삼 장(丈) 정도에 폭이 일 장이 못되는 배였는데 거목을 통째로 파내어 만든 것 같았다. 게다가 배 밑 부분은 철판을 댄 모습이었다. 다섯 명의 사람이 배를 지키며 기다리고 있다가 완와쌍수(宛蛙雙手)의 모습을 보고 절을 하고,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반 시진이 안 되어 일행은 배를 타고 수릉강(浽菱江)을 건너 수락지(藪落池)에 들어섰다. 과연 토족(土族)의 족장에게 들었던 것처럼 기괴한 나무와 갈대, 수초가 무성해서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특히 맨 땅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이곳을 보니 땅을 걸어서는 찾아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배를 타지 않는다면 절대로 지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음구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완와쌍수(宛蛙雙手)의 형인 사리행(巳里荇)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요. 그래도 이곳은 외곽지역이어서 이렇게 땅이 드러난 곳이 얼마 있지만, 들어갈수록 그런 곳은 거의 없이 습지로 이루어져 있소이다. 또, 설사 이와 같이 배를 타고 간다고 해도 저희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길을 알 수도 없거니와 늪에 사는 독물들의 습격으로 한 시진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요. 오늘은 해가 저물어가니 이곳에서 머물다가 가시도록 하지요.” 일행이 동의하여 한곳에 보이는 오 장(丈)여의 맨땅을 찾아 노숙을 준비할 때, 완와쌍수(宛蛙雙手)는 수하들을 지휘해 주위 곳곳에 구불구불한 이상하게 생긴 나무를 박고 다시 나무를 연결해 줄을 치고 땅에는 회색빛의 가루를 주위로 뿌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완와쌍수(宛蛙雙手)에게 웅정향이 다가가며, “저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보니 제독산(除毒散)의 일종인 것 같은데. 저희도 구해가지고 왔지만, 별 효과는 못 보았는데.” “맞소이다. 땅에 뿌리는 것은 제독산의 일종으로 저희는 회회분(回灰粉)이라 부르지요. 일반적인 제독산에 비해서 효과가 탁월해서 아주 소량만 뿌려도 땅으로 접근하는 독물을 차단할 수 있지요. 그리고 저 나무는 과와목(萪渦木)이라는 것인데 독물을 쫓아주지요. 여러분도 향사목(香絲木)에 대해서는 들어보셨겠지만, 저 나무에 대해서는 모르실 것이요. 향사목이 벌레를 물리치는 데에만 효과가 있다면 저것은 벌레나 다른 독물을 가리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소이다. 또 줄에 매달린 약초들도 독특한 향기를 뿌려서 과와목을 피하지 않는 독물에 효과가 있소이다.” 사리행(巳里荇)의 말에 웅정향이 반색하며, “혹시, 저희가 나중에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노숙할 때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흠, 이것들은 저희 문파만의 비전이어서 저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소이다. 나중에 림주(林主)님께 물어보도록 하지요.” 사리차(巳里磋)의 말에 웅정향이 아쉬운 기색으로 물러나면서 자꾸만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날은 그곳에서 머물고, 다음날부터 이틀 동안 배로 수락지(藪落池)를 통과했다. 일행은 아무리 보아도 수로를 알 수 없었는데, 이들은 정확히 아는지 망설임 없이 배를 저어 나아갔다. 때때로 호각(號角)과 각적(角笛)을 불어서 접근하는 독물을 쫓아내기도 했는데, 일행이 뱃전에서 보며 기겁할 정도의 기괴한 독물들이 연이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삼 장(丈)이 넘는 뱀이나 악어는 가장 흔한 것이고, 여러 종류의 독와(毒蛙)와 독섬(毒蟾), 징그러운 모습의 수사(水蛇)들이 뒤엉켜 있는 지역도, 흑혈문질(黑血吻蛭:거머리의 일종)이 떼로 모인 지역도 있었다. 그 외에도 혼황책(昏荒蚱:메뚜기의 일종)이나 독접(毒蝶), 비천오공(飛天蜈蚣)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등 천지 사방이 각종 독물들의 세상이었다. 만일 일행들만으로 통과하려고 했다면, 그 수로도 알 수 없거니와 이런 독물들에 의해서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행과 달리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은 그리 긴장한 기색이 없이 때때로 호각과 각적을 불어서 접근하는 독물을 물리치거나, 그래도 달려드는 독물에게는 이상한 가루를 뿌리면서 멈춤 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수로를 찾아 한 곳에서 빙빙 돌기도하고 사선으로 왔다 갔다 하여, 일행은 그 모습을 보았어도 다시 통과하려한다면 수로를 기억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틀 후 신시(申時:15-17시) 말이 가까워질 때, 일행은 마침내 수락지(藪落池)를 지나쳐 독룡림(毒龍林)에 다다르게 되었다. 우거진 수풀과 갈대를 헤치고 나타난 독룡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일행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다들 이름처럼 숲이 우거진 곳일 줄 알았고, 수락지를 통과해 포가산(咆苛山) 아래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모습은 수락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최대 폭이 오 리가 안 되는 섬의 모습이었다. 수면과 백여 장 높이의 꼭대기에 돌로 된 집들이 모여 있었고, 그 아래지역에는 여기저기 밭과 논이 보이고 있었다. 전혀 뜻밖의 모습에 일행이 얼떨떨할 때, 섬의 한쪽에 위치한 부두에 배가 도착했다. 폭이 일 장(丈) 정도의 길을 따라, 정상의 집들이 있는 곳으로 향해 걸으면서 공손고가, “정말 생각과는 딴판이로군. 나는 독룡림(毒龍林)이라 부르기에 숲속에 위치한 곳일 줄 알았는데, 이런 별천지라니.” “하하하, 이곳에 찾아오시는 분마다 모두 놀라시더군요. 다들 이곳의 위치와 평화로운 모습에 전혀 상상을 못한답니다.” 사리행(巳里荇)의 말에도 선상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휴우. 도대체 어떻게 이런 독지(毒池)의 한 가운데, 이렇게 아름다운 섬이 있을 수가 있지?” “그것은 저희 문파의 비밀이어서 알려드릴 수가 없지만, 이미 저희가 이곳에 위치한 지도 칠백여 년에 이르지요. 그동안 이곳을 노린 세력도 있었지만, 자연적인 환경에 의해서 미처 이곳까지 닿기도 전에 대부분 몰살해버렸지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외부에서의 큰 환란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사리차(巳里磋)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걸어서 커다란 대문이 위치한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대문을 통과해 일행이 주위의 건물을 바라보니, 건물들의 전체적인 모습은 사찰(寺刹)의 형태처럼 층층이 난간으로 이어졌고, 또 건물과 건물은 회랑(回廊)으로 이어져 있었다. 너무 복잡해서 혼자서 걷다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하루 종일이라도 헤맬 것 같았다. 대문을 통과해 몇 번 회랑을 따라 건물을 돌고 다섯 번에 걸쳐 문을 통과 했을 때, 전면에 삼층의 거대한 전각(殿閣)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각의 주위로는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이 좌우로 이십 명씩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완와쌍수(宛蛙雙手)가 나서서 그곳의 책임자를 만나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에 다시 일행을 인도해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으로 들어서자 내부의 모습도 특이한 구석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우선 천장이 삼 장(丈)이 넘을 정도로 높아 들어서는 사람의 기를 죽이는 듯했고, 좌우의 폭이 오 장여, 입구에서 맞은 편 끝까지 십여 장이 넘어보였다. 그 사이에 양쪽으로 폭이 삼척이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석주(石柱)들이, 좌우의 삼분의 일이 못되는 지점에 세워져 입구의 반대편까지 각기 아홉 개씩 길게 늘어서있었다. 또 맞은 편 태사의가 위치한 상단에는 여러 형태의 달(月)의 모습이 연이어 그려져 있었고, 그 사이에 몸통은 뱀이고 머리는 아름다운 여인인 미인사(美人蛇)가 달을 품에 껴안거나 꼬리로 감싼 벽화가 형형색색으로 그려져 들어서자마자 일행의 눈에 띄었다. 석주 사이로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이 각각 자리해 있었고, 맞은편의 상단에는 거대한 태사의가 놓여있었다. ****** 골 아프네요. 중원이라면 대충 넘어가도 될 텐데.... 더는 수정을 못하겠습니다. 나머지는 내일 올리지요. 오타와 오류가 보이면 서슴지 마시고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헤이안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깜박했습니다. 독룡림(毒龍林) 독룡림(毒龍林) 4 완와쌍수(宛蛙雙手)를 선두로 일행이 뒤따라 들어가 태사의와 오 장(丈)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일행을 멈추게 하고 태사의의 인물을 향해 절을 하면서, “림주(林主), 본문을 방문하고자 하는 손님이 찾아왔기에 제자들이 나가서 이렇게 영접해왔습니다.” “알았다. 이미 전서로 연락받아서 대충 알고 있으니, 너희들은 그만 물러가도록.” 태사의에 앉아있는 인물은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머리에는 왕관과 비슷한 금옥(金玉)으로 된 관을 쓰고, 형형색색의 달이 새겨진 흑의 장포를 입고 있었다. 또 얼굴의 생김새는 각이 져 성격이 근엄함을 나타내는 듯 했고, 부드럽지만 상대를 압도하는 눈빛과 특이하게 자주 빛의 수염이 턱 전체를 덮고 있었다. 완와쌍수(宛蛙雙手)가 복명한 후에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 능숙한 한어(漢語)로, “어서 오시오, 여러분. 본문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본좌는 자령독제(紫靈毒帝) 아선세(牙揎世)라 하오.” 장중한 목소리와 태도에서 절로 우러나는 상대의 기도에 일행이 압도되어 말문이 막혔을 때, “저희도 이렇게 찾아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들을 이끌고 있는 전광(戰狂) 단리유아라 하고, 여기 이 분은 천리적자(千里笛子) 공손고라 합니다. 이쪽 세 사람은 해남파(海南派)의 사람들로서 제게는 사질이 됩니다. 이쪽은 난파검(亂波劍) 웅정향이라 하고, 저 두 사람은 남파쌍검(南波雙劍)이라 하는데 각기 선상조, 음구의라 합니다.“ 조용한 단리유아의 목소리에 일행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자령독제(紫靈毒帝)의 기도에 눌려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자령독제도 자신의 기도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 모습으로, 천천히 물건을 가리키듯이 무심한 어조로 일행을 소개하는 모습에 눈빛을 빛내며 단리유아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기도에 제대로 버티는 사람들이 없어서, 실제 만났을 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사람은 얼마 없었던 것이다. “내 이렇게 그대와 마주대하니, 과연 그대의 위명이 헛되지 않음을 알겠소. 단리대협, 내 본문의 사람들을 소개 시켜 주리다. 먼저 이쪽의 나이 드신 분이 본문의 가장 큰 어른으로 앙화독령(殃禍毒鈴) 기혼사(祁渾肆)이시고, 이쪽은 본문의 장로들인 독공사(毒功師) 이하류(異河留), 독령사(毒靈師) 차차후(差叉帿), 독술사(毒術師) 가리탁(架狸擢)이라 하오.” 앙화독령(殃禍毒鈴) 기혼사(祁渾肆)는 자령독제(紫靈毒帝)에게도 사조뻘이 되는 인물로, 특이하게 말단제자로 들어왔다가 점점 무공이 발전하여 나중에는 독룡림(毒龍林)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 고수가 된 사람이었다. 주로 외부로 돌아다니며, 독룡림을 대표해 갖가지 일을 처리했었다. 벌써 나이가 백에 가까워오는데, 겉보기에는 오십대의 얼굴이어서 오히려 공손고보다 더 젊어 보였다. 항상 한쪽 어금니를 악물어 찡그린 표정이 되었는데, 그 성격이 심통스럽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듯 했다. 키는 오 척이 겨우 넘었고, 양손은 교차하여 반대편 옷소매에 집어넣고 있었다. “림주가 어쩐 일로 직접 소개를 다 하시오?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로구려.” 역시나 얼굴 표정처럼 심통 맞은 목소리로 자령독제(紫靈毒帝)에게 말한다. 하지만 자령독제가 듣는 척도 안하고 정면만 바라보고 있자, “흥, 상대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어디 두고 봅시다, 림주. 어릴 적 그렇게 따르더니 이제는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구려.” 잠시 자령독제(紫靈毒帝)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상기되다가, 다시 평상시로 돌아오며 상대를 안 한다. 사실은 반대로 자령독제가 어렸을 때부터 쫓아다니며 날마다 괴롭혔었는데, 독룡림(毒龍林)의 인물치고 그의 심술과 장난에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상대해 보아야 좋을 것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기혼사(祁渾肆)라는 늙은이네. 만나서 반갑군.” 화풀이 하듯이, 전혀 달갑지 않는 태도로 고개만 까닥여 한어로 일행에게 말한다. 다른 세 사람도 서로 자신을 소개했다. 독공사(毒功師) 이하류(異河留)는 제자들의 독공을 가르치는 인물로, 평키에 머리털 하나 없는 오십대의 대머리였다.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 성질이 사나움을 보여주는 듯했다. 독령사(毒靈師) 차차후(差叉帿)는 문내의 대소사를 처리하며 독물을 채집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젊었을 때 수많은 여인들을 울렸을 듯한 미남자로, 나이가 들었어도 마치 여자처럼 곱상한 얼굴이었다. 독술사(毒術師) 가리탁(架狸擢)은 독술과 술법을 가리키고 연구하는 인물로, 곰보처럼 얽은 얼굴에 드러난 들창코와 듬성듬성 난 머리털을 하고 있었다. 키는 가장 커서 육척이 넘어보였는데, 전신이 빼빼 말라서 대꼬챙이를 세워놓은 것 같았다. 독령사와 독술사는 한어로 자신을 소개했고, 독공사는 월어(越語)로 자신을 소개했는데 옆에서 독령사 차차후가 다시 설명해주었다. 다시 독령사(毒靈師) 차차후(差叉帿)가 나서서, 전내의 다른 사람들을 소개시켰다. 한참 동안 서로의 인사가 이어진 후에 자령독제가, “단리대협, 듣자하니 비무를 하고자 이곳까지 오셨다고 들었소. 정말로 본좌와 비무할 생각이시오? 본좌의 독공을 견딜 수 있겠소?” “림주의 진재실학을 맛보고 싶으니, 독공을 펼치셔도 됩니다. 일부러 독공을 보기 위해서 이곳 남만(南蠻)까지 온 것이니.” 무심한 표정으로 말할 때, “그렇지만 이제까지 림주의 독공을 견딘 사람이 없었는데? 그저 무기술만 겨루는 것이 어떻겠소?” 독령사(毒靈師) 차차후(差叉帿)가 나서서 말렸다. 실제로 독공에 있어서 근 이백년 이래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자령독제(紫靈毒帝) 아선세(牙揎世)였던 것이다. 이에 앙화독령(殃禍毒鈴) 기혼사(祁渾肆)가, “무슨 상관이냐? 지가 싸우고 싶다는데, 내버려둬라. 클클, 나중에 어떤 꼴이 될지 벌써부터 궁금한데?” “상관없습니다. 제가 요청한 것이니, 혹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아무런 원망을 하지 않겠습니다.” “흘흘. 정말 특이하군. 내 생전 자네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는데.” 변함없는 단리유아의 태도에 기혼사(祁渾肆)가 흥미를 드러내며 바라보았다. 잠시 비무에 대해 얘기하여, 푹 쉬어 피로를 풀고 사흘 후 정오에 하기로 결정했다. 비무에 대한 사항이 마무리 되었을 때, “단리대협. 본좌가 듣자하니 반라산(磐裸山)에서 고무족(鼓舞族)의 주술사와 전사들을 중원인들이 죽였다고 들었는데, 혹시 여러분이 아니시오?” “맞습니다. 저와 일행이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자들로서 결코 후회는 없습니다.” 단리유아가 자령독제(紫靈毒帝)의 물음에 대답했을 때, 독술사(毒術師) 가리탁(架狸擢)이 흥분한 어조로, “정말 휼리파(恤狸把)를 죽였다는 말이오? 그곳에는 강시들도 있었을 텐데?” “휼리파?” “주술사말이오. 본문의 전대 독술사(毒術師)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고루마경(骷髏魔經)을 얻자 뛰쳐나갔었소.” 이 말을 듣고 일행이 긴장한다. 만일 이들이 복수라도 하고자 한다면, 이곳은 적지의 한가운데였기 때문이었다. 단리유아아가 그제야 어찌된 일인지 알고는 별다른 동요 없이, “모두 죽었습니다. 아마 시신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산산조각 났으니.” “혹시, 고루마경은 발견하지 못했소?”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죽인 후에 바로 자리를 떴으니.” 의심스런 눈길로 일행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가리탁(架狸擢)을 향해 기혼사(祁渾肆)가, “그 반도 놈의 얘기를 꺼내서 어쩌자는 것이냐? 지난 번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는 묵사발이 되어서 돌아온 주제에.” 년 초에 휼리파(恤狸把)의 소재지를 파악한 독룡림(毒龍林)에서 추살대를 보냈는데, 상대의 무공과 강시에 상대가 되지 못한 채 조롱만 당하고 왔었다. 돌아온 제자들을 보고 독룡림의 인물들이 다시 추살대를 편성해서 보내려할 때, 휼리파가 중원인들에게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모두가 궁금해 했었는데, 이제야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알게 된 것이다. 가리탁(架狸擢)이 나서서 물은 것도 혹시나 고루마경(骷髏魔經)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만일 고루마경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자신에게는 더 없는 보물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리탁이 기혼사의 꾸짖음에 고개를 숙이며 물러날 때, “기(祁)어르신의 말이 맞소. 그 놈을 죽여 없앤 것만 해도 본문에 큰 은혜를 베풀었다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놈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앓던 이가 빠진 듯이 속이 후련했었소. 가(架)장로도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시오. 단리대협, 본문의 반도를 처리해준 것에 대해 림주로서 본좌가 감사드리겠소. 비무가 끝난다면 내 그대에게 보답을 하겠소.” 잠시 대화가 더 이어지다가, 자령독제(紫靈毒帝)가 그만 자리를 파하고 일행을 안내하여 쉬도록 했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일행은 독룡림(毒龍林)에서 마련해준 전각에 머물러 조용히 휴식을 취했는데, 자령독제의 지시인지 하루하루 진수성찬과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거의 일곱 달 만에 받아보는 제대로 된 음식에 일행 모두가 감탄하며 달려들었다. 독령사(毒靈師) 차차후(差叉帿)가 다음날 한번 들린 이외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는데, 앙화독령(殃禍毒鈴) 기혼사(祁渾肆)는 아침저녁으로 일행을 찾아오곤 했다. 모두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상대해보았자 손해라는 것을 알고, 될 수 있는 대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흐르자 나머지 일행은 기혼사의 장난과 심술에도 별 동요 없이 상대하지 않았는데, 선상조는 성격이 원래 다혈질이라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화를 내고 달려들었다. 모처럼 만의 재미있는 장난감을 만났다는 듯이, 나중에는 기혼사도 찾아와 선상조만 상대했다. 시간이 갈수록 일행은 비무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단리유아를 걱정했다. 그러나 무심한 태도로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이라는 듯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밖에는 하지 않는 단리유아였다. 할 수 없이 일행이 속으로 걱정하는 가운데에 더 물어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사흘 째 되는 비무할 날이 다가왔다. 단리유아가 아침부터 심신을 고르며 준비하고 있을 때, 독령사(毒靈師) 차차후(差叉帿)와 기혼사(祁渾肆)가 찾아와 비무할 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비무 장소는 섬의 한 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 여기저기 바위와 잡초만 무성한 곳이었다. 아마 자령독제(紫靈毒帝)의 독공에 피해를 줄이고자, 이런 외진 곳으로 고른 것 같았다. 장내에는 자령독제와 독공사(毒功師), 독술사(毒術師)를 비롯한 독룡림(毒龍林)의 주요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한동안 서로 인사가 이어진 후에 미리 약정한 대로, 공증인으로는 각각 기혼사와 공손고가 뽑혔다. 두 공증인이 한 쪽에 자리하고, 그 맞은편으로 나머지 일행들과 독룡림의 고수들 삼십여 명이 자리했다. 사방 삼십여 장(丈)의 공터에 단리유아 자령독제(紫靈毒帝)가 마주한 후, “단리대협,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소. 정말 독공을 상대할 자신이 있소? 자랑이 아니라, 이미 본좌의 독공은 본문에서도 성취가 드물 정도로 뛰어나 상대할 자가 없었소.” 자령독제가 약간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어볼 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또한 독에 대한 내성이 남다른 사람이고, 이후의 일에도 제가 책임을 질 테니.” “그래도.... 휴, 알겠소. 그런데 검과 도 중에서 어떤 것을 쓸 것이오? 아니면 둘 다 쓰겠소?” 단리유아의 굳은 결심을 알자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어떤 무기를 쓸 것인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도는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너무 살기가 짙어서 비무할 때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검을 쓸 생각인데, 림주께서는 적수공권으로 맞설 생각입니까?” “아니, 본좌도 무기를 쓸 생각이오. 이 구절편(九節鞭)을 쓰도록 할 것이오.” 말과 함께 뒤 허리춤에서 하나의 마디가 팔 촌 가량이고, 그 사이를 고리로 이어진 묵청색의 빛을 내는 철편(鐵鞭)을 꺼내보였다. 땅에 끌리는 것을 보았을 때, 첨두(尖頭)까지의 전체적인 길이는 일 장이 약간 못되어 보였다. “특이한 병기로군요. 구절편 중에서도 이렇게 긴 것을 보기란 쉽지 않은데.” “그렇소. 이것은 본문의 제일신병으로 구절독마편(九節毒魔鞭)이라 하오. 재질 자체가 강하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독물에 잠겨 그 자체가 독성을 품고 있소. 대협도 주의하기 바라오.” 잠시 몇 마디 더 이어지다가 서로 거리를 벌리고 예를 표한 후에, 먼저 단리유아가 흑아검(黑牙劍)을 휘둘러 공격해갔다. “적월추성(摘月追星)“ 한줄기 검광(劍光)과 함께 섬전 같은 검기(劍氣)가 일어나 자령독제를 노리고 달려든다. 호남성(湖南省) 일대의 고수인 귀검산인(鬼劍散人)의 적월나운검법(摘月拏雲劍法)중의 일초로서 쾌검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이에 자령독제도 물러섬이 없이 제자리에서 구절독마편을 휘둘러 응수한다. “절과연천굉(節過軟穿宏)“ 땅에 늘어져 있던 구절독마편이 독사가 고개를 일으키듯이 일어나 다가오는 검기를 가르고, 연이어 쭉 늘어나듯이 펴지며 연달아 단리유아의 상반신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채챙 챙!” 연이어 검과 편이 부딪쳐 불꽃이 튄다. 계속적인 구절독마편의 공세에 밀려 단리유아가 일보 물러서면서, “은하성밀밀(銀河星密密)” “챙, 챙, 채챙” 검기(劍氣)가 구름처럼 연이어 일어나 허공을 뒤덮으며 다가오는 편을 쳐낸다. 이 초식은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지역에 위치한 은하검문(銀河劍門)의 검법이었다. 은하검문은 역사가 삼백년이 넘는 오래된 검도명문이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쇠퇴해 이제는 변변한 고수 하나 없었다. 이 초식은 검기를 일으켜 물샐틈없는 방어막을 형성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은하성밀밀(銀河星密密)에 연이어 앞으로 다가가며, “은하성류산(銀河星流散)” 검영(劍影)이 잇달아 나타나 허공을 에워싸다가 검기가 비산해 자령독제(紫靈毒帝)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하늘의 별이 폭발해 흩어지듯이 갑자기 갈라져 상대방을 공격하는 초식으로 대처하기 까다로운 초식이었다. 갑작스런 단리유아의 공격에 자령독제가 구절독마편을 끌어당겨 계속회전하면서 방어를 한다. “절편원화생(節鞭圓化生)” “채챙, 챙, 채챙” 검광(劍光)과 편영(鞭影)이 구름처럼 일어나 서로의 몸을 감춘 채, 검과 편만이 연달아 부딪쳤다. 연이은 충돌에 의해 소리만 요란하게 울릴 뿐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검기(劍氣)와 편기(鞭氣)가 흩어져 사방으로 퍼져나가 땅바닥을 훑고 지나니, 여기저기 바닥이 파이고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이번에는 자령독제(紫靈毒帝)가 손해 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어지러이 구절독마편을 휘둘러, “척천구절파(斥天九絶波)” 잇달아 편이 꺾이어 마치 검처럼 찌르더니, 다시 펴지며 연달아 공격한다. 편영(鞭影)이 시야를 가리며 다가오자, 자령독제의 왼쪽으로 비스듬히 빗겨나가며, “월광성조만(月光星照滿)” 검광(劍光)이 계속해서 번뜩이며 구름 같은 검영(劍影)과 함께 자령독제(紫靈毒帝)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초식은 과거 오백여년 전의 고수인 월영검제(月影劍帝)의 월영검법(月影劍法)의 일초였다. 이 검법의 특성은 빛의 반사를 이용한 검법이었는데, 환검(幻劍)의 일종으로서 당시 월영검제가 십대고수의 일인에 들게 만든 유명한 검법이었다. “챙, 채, 챙.” 수많은 검영(劍影)과 편영(鞭影)이 서로 부딪혀 사라져가면서 연이어 상대방을 노린다. 검과 편이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할 뿐, 두 사람의 신영은 완전히 사라져 이따금 번뜩이며 나타날 뿐이었다. 무기가 연달아 부딪침에 따라 불꽃이 튀겨 오르고, 검기(劍氣)와 편기(鞭氣)에 흙먼지와 조각난 풀잎파리가 떠올라 장내를 뒤덮었다. 한쪽에서 공증인으로 지켜보던 앙화독령(殃禍毒鈴) 기혼사(祁渾肆)가 감탄한 어조로, “허, 정말 대단하구만. 저 아이를 어렸을 때부터 내가 봐와서 잘 아는데, 여태까지 저렇게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맞상대할 사람이 없었다네.” 이에 공손고가 오히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글쎄요. 저는 오히려 림주(林主)께서 걱정이 됩니다. 선배님이 단리소협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독공을 쓰지 않고 이렇게 단순히 무기술로만 계속 싸운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전의 경험을 따진다면 정면으로 맞설 사람이 별로 없을 테니.” “그래, 지금 보니 오히려 선세(揎世)가 약간 밀리는 기색도 보이는군. 흠, 이리되면 천상 독공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리하다는 이야기로구만.” 공손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지요, 선배님. 하지만, 제 생각에는 독공을 쓴다고 해도 림주께서 크게 압도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까? 음, 그럴지도 모르겠군. 독공이라도 이런 비무에서는 완전하게 쓸 수 있다고 볼 수 없으니.” 공손고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잠시 더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그런데 자네 일행이 이번에 세외(世外)를 떠돈다며? 저 어린 친구의 비무행을 따라서.” “예, 저희도 단리소협이 세외로 나간다기에 따라왔지요.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더군요. 특히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가 지리와 풍물도 낯설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에 기혼사(祁渾肆)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클클. 그래? 그러면 세외에 대해 잘 알 만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겠군.” “예, 그런 사람이 있다면 훨씬 수월한 여행이 될 것이지요. 계속해서 현지의 안내인을 골라서 데리고 다니기도 어렵고, 너무 시일이 오래 걸리게 되니.” 무심코 공손고가 대답할 때, “그럼, 나는 어떨까? 이래봬도 젊었을 때부터 안 가본 곳이 없다네. 특히 남만(南蠻)과 운남성(雲南省) 일대까지는 훤하니 말일세. 게다가 자네도 알다시피 아직도 한 사람 몫은 단단히 할 정도이지 않은가?” “하, 하지만. 연세도 있으신데. 또 이곳에서 가장 웃어른이신데, 함부로 돌아다닐 수 있겠습니까?” 공손고가 비로서 기혼사(祁渾肆)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기겁해서 말린다. 이 인간이 따라갔다간 얼마나 피곤하게 될지 몰랐다. 단지 며칠이지만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으로 항상 일을 만들어 시끄러워야 적성이 풀렸던 것이다. “흐흐흐, 무슨 말인가? 자네와 나를 보면 누가 더 나이를 먹었다고 보겠나? 게다가 나도 본문에서 나가본지가 십년이 넘어서 지루한 참이었는데, 이번에 한 번 바람 좀 쏘여야겠군. 자네는 아무 걱정 말게. 내 림주(林主)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으니.” 음흉한 눈초리로 눈웃음 지으며 말하는 기혼사를 보면서 공손고가 속으로, ‘제기랄. 이 빌어먹을 노친네가 노망이 났나? 뭐 하러 우릴 따라오겠다는 것이지? 꼴을 보아하니, 이 노친네가 떠난다고 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분위기인데? 어떡한다?’ 생각이 잠긴 그를 보면서, “클클. 앞으로 같이 할 것 같으니, 오늘 저녁 같이 회포나 푸는 것이 어떻겠나? 우리 같은 노인네가 모여서 세상사에 대해 얘기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뭐 나머지 사람도 함께한다면 더욱 좋고.” “그, 그렇지요.” 졸지에 거의 사십년의 나이가 더 먹은 것 같은 기분에, 공손고가 울상을 지으며 떨떠름히 승낙했다. 오늘 저녁에 반드시 일행을 끌고 가겠다고 생각하며. ****** 요새는 앞부분을 수정하느라 바쁘군요. 일단 51편까지는 수정했습니다. 크게 변한 점이 없이 오타나 문맥의 연결을 고쳤을 뿐이니 보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51편은 약간 달라졌으니 보실 분들은 보시구요. ##### 작가아님 님 드디어 찾아냈습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룡림(毒龍林) 독룡림(毒龍林) 5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단리유아와 자령독제(紫靈毒帝)의 비무를 보면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상황은 점점 더 치열해져가고 있었다. 검영(劍影)과 편영(鞭影)이 서로의 신형을 뒤덮은 채,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검기와 편기가 땅바닥을 긁거나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차창. 챙. 챙” “시식, 타탁” 자령독제(紫靈毒帝)는 이제까지 구절독마편(九節毒魔鞭)으로 상대해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한 적이 없었는데, 시시때때로 바뀌는 단리유아의 검법에 당황하여 제대로 편법을 펼칠 수도 없었다. 일정한 흐름이 있다면 곧 적응할 수 있을 텐데, 삼류초식에서부터 절전(絶傳)되어 들어본 적도 없는 초식까지 자유자재로 펼치니 아무리 자신의 편법이 독특하더라도 크게 효과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독마섬륙편법((毒魔殲戮鞭法)은 총 십이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미 몇 번이고 반복해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단리유아의 대응은 빨라지고 초식의 변화를 짐작하고 미리미리 흐름을 끊고 있었다. 거의 한 시진(時辰)이 넘도록 싸우다가 도저히 편법만으로는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고, 편을 휘둘러 단리유아를 물러서게 한 후에 뒤로 물러섰다. 단리유아의 모습은 여기저기 옷자락이 찢어진 부분이 엿보였지만,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에 반에 자령독제(紫靈毒帝)는 곳곳에 상처를 입고,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선혈이 엿보이고 있었다. 지켜보던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도 자신들의 림주(林主)가 상대가 안 됨을 알고는 안색을 찌푸리고 침중한 기색이 되었다. 아무리 비무라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실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잠시 호흡을 고른 후에, 자령독제(紫靈毒帝)가 편을 버리고는, “단리대협, 과연 소문이 헛되지 않구려. 내 당신의 무공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소. 무기술에서는 당신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시인하겠소.” “아닙니다. 림주(林主)의 편법((鞭法)도 뛰어나 강호(江湖)의 일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전에서 독공을 운기하여 펼친다면 상황도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소. 대협도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오. 그보다 이제부터는 독공(毒功)을 펼칠 작정인데, 받아보시겠소?” “좋습니다. 소생도 검을 버리고 적수공권으로 상대하지요.” 말과 함께 흑아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맨손으로 마주선다. “흠, 장법(掌法)에도 일가견이 있었소?” “미천한 솜씨지만 그럭저럭 쓸 정도는 될 것입니다.” “허허, 정말 대단하구려. 검법 하나만 해도 적수가 드물 터인데. 하여간 다시 시작해봅시다.” 말과 함께 먼저 선공으로 나서서, 독공을 운기한 후에 양손을 번갈아 교차하며, “자령권산운(紫靈捲山雲)” 보랏빛 장영(掌影)이 일어남과 동시에 독기가 사방에 퍼진다. 마치 자주색의 노을이 산하(山下)의 구름을 말아 올리듯이 일어나 단리유아를 향해서 다가온다. 이 장법은 사실상 독룡림(毒龍林)의 최고무공으로, 자천독황일기공(紫天毒荒一氣功)을 바탕으로 펼치는 살황후정독장(煞荒朽炡毒掌)의 제일초였다. 자령독제(紫靈毒帝)가 독공을 본격적으로 운기해서 펼친다는 것을 알고는,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다급히 거리를 더 벌려 오십 장(丈) 밖까지 물러선다. 또 나머지 일행에게도 제독단(除毒丹)을 주면서 될 수 있는 한 호흡을 삼갈 것을 권한다. 이에 맞서 단리유아도 물러서지 않고 내력을 운기해, “풍령산슬우(風鈴霰璱雨)” “사르릉. 파르릉” 연푸른색의 장영(掌影)이 연이어 일어나 상대의 공격에 맞부딪쳐간다. 바람에 흔들리는 방울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이 청아한 소리가 일어나며, 푸른빛의 장영이 허공을 물들이며 상대를 향해서 쏟아진다. 풍령벽산장법(風鈴碧霰掌法)의 일초로, 본래의 벽산장법(碧霰掌法)에 더해서 단리유아가 그동안의 경험과 기억속의 장법들을 모아서 창안한 장법이었다. 대조적인 색깔의 장영이 방원 오 장(丈) 이내를 뒤덮으며 각기 상대방을 향해서 다가갔다. “퍼펑. 콰쾅” 장력이 서로 부딪치며 장풍에 의해 흙먼지와 풀잎들이 떠올라 장 내를 어지럽힌다. 서로 충격을 받아서 서너 걸음 물러섰지만, 이내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자령후화진(紫靈朽化盡)” “풍령벽정벽(風鈴霰霆劈)” 자줏빛의 독기(毒氣)를 품은 장영과 청옥(靑玉)빛의 장영이 재차 부딪쳐갔다. “콰쾅. 퍼펑” 연이어 허공에서 장력(掌力)이 부딪치며 폭죽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부딪쳐 폭발하는 장력의 여진에, 뒤로 물러나 지켜보던 사람들에게까지 장풍(掌風)에 밀려난 흙먼지가 다가와서 시야를 어지럽혔다. 모두가 손을 휘저어 먼지를 날려 보내고 있을 때, 다시 두 사람은 거리를 좁혀서 부딪쳐갔다. 서로 내상(內傷)을 입었지만, 조금도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편에서 지켜보던 독룡림(毒龍林)의 사람들은 독공을 운기해서 장력을 펼쳤음에도 그리 우세한 기미가 없는 상황에 심각한 얼굴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단리유아가 비무를 요청했을 때도 그리 걱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장문인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아무리 단리유아가 중원(中原)의 십대고수라 하지만, 자령독제(紫靈毒帝) 역시 남만(南蠻)에서는 적수가 드물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쪽에 모여 있던 삼대장로가 장내의 광경을 보면서 서로 월어(越語)로 대화한다. 먼저 독령사(毒靈師) 차차후(差叉帿)가, “이제 보니 저 사람 보통이 아니군. 독기(毒氣)가 퍼져나가고 있을 터인데도 저렇게 물러섬이 없다니, 이리되면 순수한 장법(掌法)의 대결이 되겠는 걸.” “그렇소이다. 세상에 자천독황일기공(紫天毒荒一氣功)에 맞상대하면서 중독의 기색이 엿보이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았구려. 아무리 림주(林主)께서 독공을 전력으로 운기하지 않는다하지만, 이 정도에서도 그리 힘들지 않게 버틴다면 실전에서도 크게 유리한 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오.” 독공사(毒功師) 이하류(異河留)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독술사(毒術師) 가리탁(架狸擢)도, “중원에서 전광(戰狂)이라 불린다기에 반신반의 했는데, 이런 모습을 대하니 나조차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소. 검법(劍法)만 해도 대단한데 장법(掌法)조차 이러니, 휼리파(恤狸把)가 강시들을 데리고도 상대가 되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되오.” 놀라움과 함께 두려움의 기색이 언뜻 스쳐지나가는 얼굴로 말한다. 독령사 이하류가, “흠, 그런데 저 사람의 등에 매고 있는 도는 왜 쓰지 않는지 모르겠소. 지금까지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면 도법 역시 대단할 터인데.” 다른 두 사람도 궁금한 기색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웅정향과 남파쌍검(南波雙劍)을 보면서 독령사(毒靈師) 이하류(異河留)가 한어로, “혹시, 단리대협이 도를 쓰지 않은 이유를 아시오?” “제가 말씀드리지요. 언젠가 소사숙이 말씀하시길, 자신의 도법은 너무 살기가 짙어 일단 펼치면 반드시 살수를 쓰게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가급적 적을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쓰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이에 삼대장로와 옆에서 듣던 나머지 독룡림(毒龍林)의 사람들도 더욱 놀라 서로 단리유아에 대해 떠들었다. 지금의 상태를 보아서도 림주(林主)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터인데, 실전에서 도법까지 쓴다면 더욱 어려울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이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와 자령독제(紫靈毒帝)와의 비무는 점점 더 치열해져갔다. “자령후천사(紫靈朽千蛇)” 자줏빛의 강기(剛氣)가 연이어 일어나 단리유아을 향해 다가왔다. 독강(毒剛)을 이용해서 펼치는 초식으로, 마치 천 마리의 독사가 흐느적거리며 덮치듯이 천천히 접근하던 장영(掌影)이 상대와 부딪힐 때는 가늘게 갈라져 달려들게 되는 것이었다. “풍령일광폭(風鈴一光爆)” 이에 반해서 단리유아는 한줄기의 두터운 장강(掌剛)으로 상대를 공격해갔다. 청옥색의 강기(剛氣)가 빠른 속도로 상대를 덮쳐갔다. 서로의 강기가 부딪치는 순간, “콰쾅. 꽈르릉” “파파팍. 퍼퍽” 푸른빛 강기(剛氣)가 폭발하면서 보랏빛 장영(掌影)과 연이어 충돌한다. 자청(紫靑)의 아름다운 빛줄기가 사방으로 흩어져, 모르고 멀리서 떨어져 보는 사람들은 아주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흩어지는 강기가 사방으로 비산하여 땅바닥에 있던 바위까지 부셔나갔다. 이로 인해 이제는 돌조각들도 허공으로 튀어 올라 멀리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서로가 충격을 받아서 일 장(丈) 이상 뒤로 물러섰다. 단리유아는 내상보다 이번에 부딪친 강기(剛氣)가 터져나가며 곳곳에 상처를 남겼는데, 그동안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던 독기가 상처를 타고 따라 들어와 내력(內力)을 수발하는데 지장을 주고 있었다. 모공으로 스며드는 독기 정도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는데, 직접 상처로 침투하는 것은 그 독기의 독함에 있어서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얼마나 지독한지 벌써 상처부위는 시커멓게 변색되었고, 상처에서는 흑혈(黑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자령독제(紫靈毒帝)는 외상도 외상이지만, 그보다는 내상이 심했다. 물러섬이 없이 연이어 장법(掌法)을 펼쳐 부딪치니, 아무래도 순수한 장법으로 이루어진 단리유아의 공격에서 밀리는 바가 있었다. 실전에서라면 이렇게 정직한 공격은 없을 테지만, 비무에서는 묘수(妙手)나 상대를 속이는 허초(虛招)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뒤로 물러나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가다듬다가 다시 서로 부딪쳐갔다. 먼저 자령독제(紫靈毒帝)가, “자령정천후(紫靈炡穿吼)”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보랏빛의 장강(掌剛)이 일어나 상대를 향해서 다가갔다. 이에 단리유아도 내력을 모아서 바로, “풍령초초함(風鈴焦焦咸)” “파르르릉....” 아름다운 방울소리와 함께 푸른빛의 장강(掌剛)이 회전하면서 상대를 향해서 접근해갔다. 두 마리의 자룡(紫龍)과 청룡(靑龍)이 치솟아 허공에서 여의주를 놓고 다투듯이 아름다운 모습이 이어졌다. “꽈꽝. 꽈르릉 꽝” 두 줄기의 장강(掌剛)이 부딪치자 이전과는 폭발소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면서, 강기가 터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장내는 강기에 부딪쳐 떠오른 풀잎과 흙먼지, 돌조각으로 뒤덮여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자세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공손고와 기혼사(祁渾肆)가 뛰어나가며 바로 비무를 중지시켰다. 자령독제(紫靈毒帝)는 전신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옆구리를 부여잡고 선혈을 토해내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옆구리의 상처도 심상치 않았지만, 내상이 심한 지 몇 번을 토해냈음에도 진정이 되지 않아 계속해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단리유아의 모습도 그리 좋지는 않았는데, 곳곳의 옷자락이 조각나 상처가 보이고 있었다. 내상도 자령독제 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두세 번에 거쳐 죽은피를 토해내야 했다. 심각한 외상은 없었지만 상처마다 독혈(毒血)이 흘러나오고, 독기가 상처를 따라 전신으로 스며들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겉보기로는 자령독제가 위중한 것 같았지만, 사실 단리유아가 더 심각한 상태였다. 독기가 날뛰어 내력을 흐트러뜨리는데다가 어지러움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웠는데, 아마 그동안 몸속에 침투했던 독정들이 없었다면 바로 중독되어 쓰러졌을 것이다. 당장 비무를 멈추고 바로 해독(解毒)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찌될지 아무도 몰랐다.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도 다가와 자령독제(紫靈毒帝)를 돌보면서, 미묘한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공에 놀랐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장문인에게 이렇게 상처를 입혔으니 곱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일행도 다가와 단리유아를 보호하며, 음구의가 먼저 지니고 온 해독산(解毒散)을 찾아내 복용하게 했다. 서로의 상처를 돌보다가, 문득 자령독제가 탈진한 목소리로 독공사 이하류에게 무언가 말을 전한다. 맘에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자령독제가 계속 말하자 할 수 없다는 듯이 일행에게 다가와, “이보시오. 우리 림주(林主)께서 단리대협의 독상(毒傷)이 심상치 않을 테니, 본문의 비전영약을 전하라고 하셨소.” “이미 저희가 지닌 해독산을 복용케 해드렸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웅정향이 사양하면서 거절하자, 독공사(毒功師) 이하류(異河留)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흥, 이보시오. 당신은 우리 림주님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오? 아니면 우리의 독공이 그리 손쉽게 해독되리라 생각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한참 변명을 늘어놓다가, 월어(越語)로 말하는 소리에 무슨 말인지 몰라서 궁금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는 일행에게 웅정향이 설명해주었다. 일행이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받을지 말지 주춤거리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간신히 독기(毒氣)를 억누르면서 검푸른 안색으로, “웅사질, 고맙다고 사의를 전하고 받아들이시오.” “하지만, 소사숙. 상대의 말만 듣고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만일....” 이에 단리유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되었소. 그러려고 했다면 이렇게 찾아와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현재 상태로 보아서는 나도 제대로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니, 바로 공격한다 해도 우리 모두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오.” 마지못해 웅정향이 이하류(異河留)에게 다가가 단리유아의 말을 전하고, 건네주는 두 치 정도의 조그마한 옥병을 받아들었다. 일단 공손고와 기혼사(祁渾肆)가 나서서, 두 사람의 상처가 심하니, 비무를 끝내고 우선 상처를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둘러 처소로 돌아가자, 장내는 어지러이 패인 땅바닥과 조각난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드러나 그동안의 비무가 생각보다도 살벌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지 몇 명의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이 남아서 독기가 배어든 땅을 뒤집고, 수풀을 한쪽으로 모아 불로 태우고 있었다. 거처로 돌아오자 일행이 호법을 서는 가운데, 단리유아는 바로 독상의 치료에 들어갔다. 우선은 독기를 해독하는 것이 중요해서 상처는 지혈만 시켰다. 독공사(毒功師) 이하류(異河留)가 전해준 옥병을 열어보니, 고약한 냄새가 나는 시커먼 물약이 담겨있었다. 한동안 그 냄새에 망설이다 조금만 입에 넣고 가좌부를 틀고 앉아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옥병의 약의 성분이 무엇인지 자신의 내공에도 진정되지 않던 독기들을 하나하나 가라앉았다. 계속해서 운공하면서 독기를 몰아내고, 한쪽으로는 독정(毒精)만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하루 밤낮으로 운기하여서야 겨우 독기를 몰아낼 수 있었다. 운기를 끝마치고 나자, 자령독제(紫靈毒帝)의 독공에 포함된 독기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된 것을 알았다. 아마 이제는 웬만한 독에는 중독되지도 않을 것이고, 자령독제의 독공에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였다. 자신의 내공의 특성을 몰라서 단지 독기를 몰아낼 것이라 생각하고 비전영약을 주었겠지만, 그 근본이 되는 독정을 흡수해서 자신의 독공에도 내성이 생겼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걱정하는 일행에게 대충 상처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고는, 상처부위에 약을 바르고 다시 본격적인 운공에 들었다. 자신이 너무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면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이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랐고, 그 시간에 독정을 내력으로 흡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 너무 길어져서 여기서 나눕니다. 오타와 오류를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삼생 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머지 부분은 처음 몇편을 가르키는 것입니까? 이편에서는 찾을 수 없어서.... 아, 정말 골아프다는.... 독룡림(毒龍林) 독룡림(毒龍林) 6 비무가 있은 지 사흘 후 시월 십일의 아침, 요상을 마친 단리유아와 일행이 모여서 모처럼만에 아침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기혼사와 독령사(毒靈師) 차차후(差叉帿)가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한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림주(林主)가 저녁을 같이하자는 말을 전하고 차차후는 바로 돌아갔다. 슬금슬금 피하는 일행의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먼저 탁자의 한쪽에 앉으며 기혼사가, “모두들 자리에 앉게. 흘흘, 설마 발바닥이 붙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마지못해 앉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여보게, 단리소협. 이번에 세외(世外)로 비무행을 하다가 본문에도 들린 것으로 알고 있네. 이 사람들에게 듣기로 계속 남하할 생각이라던데, 혹시 나도 따라가면 안 되겠나? 이래봬도 이 근처에 대해서는 빠삭하다네. 아마 다른 안내인을 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무공도 쓸 만하다고 자부하니 여러모로 도움도 될 것이네.” 주위에서 보던 사람들이 기혼사(祁渾肆)의 눈치를 보면서, 제발 거절하라는 눈짓을 단리유아에게 하지만, “흠, 선배님께서 따라가신다면 저희야 좋겠지만, 혹시라도 이곳의 여러분들께서 떠나지 못하게 막으신다면 어쩌실 것입니까?” “클클, 그 점은 전혀 걱정할 필요 없네. 누가 내 말을 막는단 말인가? 그런 놈이 있다면 본보기로 일 년 내내 본때를 보여줄 것일세.” 단리유아의 말에 곧바로 대답하다가, 주위의 일행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끝낸다. “그렇다면 저야 찬성입니다. 저희 일행의 의견을 물어보아서 과반수이상 반대하지 않는다면 같이 가기로 하겠습니다.” 단리유아가 일행을 보면서 찬반을 물어보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선상조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다가 큰소리로, “소사숙. 절대 저는 저 노망난 늙은이하고 갈 생각이 없습니다. 제발 함께 데려간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앞으로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 “뭐? 노망? 흐흐흐, 네가 진짜 노망난 늙은이를 보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내가 한번 보여줄까? 클클클” 기혼사(祁渾肆)가 바로 끼어들어 선상조를 바라보면서 음충맞게 웃으며 말한다. 선상조도 일순 두려운 표정이 되었다가 그래도 안 된다는 듯이, “흥, 차라리 나를 죽이쇼. 무슨 늙은이가 애들도 하지 않을 장난이나 쳐대고, 심술만 덕지덕지 붙어서....” “그래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참에 다해봐라. 원래 이 늙은이는 욕을 먹을수록 기분이 좋으니, 욕설도 왕창해주면 더욱 좋고.” 전혀 화내는 기색 없이 오히려 귓구멍을 후비며 선상조를 약을 올린다. “이, 이....” 핏발이 얼굴에 몰려 시뻘게진 채 제대로 말을 있지 못하는 선상조를 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듯이, “선사질은 자리에 앉으시오. 아무리 그래도 나이든 노인이신데 그렇게 막말을 해서 되겠소?” 말을 마치고는 다시, “선사질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으니, 기(祁)선배님도 우리와 함께 가도록 결정했습니다. 선배님, 앞으로의 여정에 많은 도움을 바랍니다.” “흘흘. 자네는 겉보기와 달리 예의가 밝구만. 요즘 젊은 놈들은 영 버릇이 없던데. 클클, 하여간에 나도 잘 부탁하네. 앞으로 정말 재미있을 것 같구만.” 기혼사(祁渾肆)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왜들 그러나? 혹시 내가 따라가는 것이 아직도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일부러 밝은 안색을 지으며, 일행이 웃으며 아니라 소리친다. 이 늙은이가 어떤 수단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별별 이상한 방법으로 골탕 먹였었다. 갑자기 아무 곳에나 독물(毒物)이 튀어나와 가슴 철렁한 것은 예사고, 이를 풀어놓았는지 전신이 가려워져 박박 긁게 만들거나 음식 속에다 별별 괴상한 벌레들을 잡아다 놓은 적도 있었다. 앞으로의 동행을 생각하니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지만, 그것도 마음 놓고 내색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일행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서 기혼사(祁渾肆)의 기분을 맞추고 있을 때, “기(祁)선배님, 독룡림(毒龍林)에서 가장 배분이 높다고 들었는데, 제가 한 가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기혼사가 고개를 돌려서, “그래 뭔가? 말만하게. 내가 알고 있다면 말해줄 테니.” “흠,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혹시나 구음독교(九陰毒敎)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는지 해서입니다.” 기혼사(祁渾肆)가 그 말에 깜짝 놀라서, “뭐, 뭐라고? 자네가 어떻게 구음독교를 아는가?” 주위의 일행도 처음 들어보는 문파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 바라보다가, 궁금한 표정으로 단리유아와 기혼사에게 시선을 모은다. 기혼사의 놀라서 다급히 묻는 소리에도 전혀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시고 계신 것 같군요. 저도 오래전의 강호사(江湖史)가 적힌 서책을 본적이 있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근래에는 알고 있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허, 정말 말이 안 나오게 하는군. 남만(南蠻)에서도 거의 사라진지 천년이 다 되어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 없을 터인데. 그 먼 중원(中原)에서 구음독교(九陰毒敎)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니. 우선 자네가 아는 대로 얘기해 보도록 하게.” 기혼사(祁渾肆)의 말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제가 서책에서 본 바로는 과거 중원의 원시마교(原始魔敎)나 천강신문(天剛神門)에 비견되는 강파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공의 비조(鼻祖)로서 모든 독문과 독공의 뿌리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이 정도까지 밖에 알지 못합니다. 정확한 위치나 무공같은 것은 들은 적이 없어서.” “흠, 그 사실만 알아도 반은 알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 말대로 과거 구음독교(九陰毒敎)는 남만(南蠻)을 지배하던 세력으로 거의 천년에 걸쳐 성세를 떨쳤다고 하지. 그 당시에만 해도 그리 문파라 이름 할 정도의 세력이 얼마 없기도 했지만, 그 독공의 뛰어남은 지금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네.” 이에 공손고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정말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오래전에? 아직 중원(中原)에도 그런 강파가 없었을 텐데.” “흥! 너는 뭐 중원의 무공만이 유일하고 가장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느냐? 구음독교(九陰毒敎)도 그렇지만, 천축(天竺)이나 서장(西藏)의 상고(上古)문파는 더 오래전에 융성한 경우도 많아. 그 이외의 지역에도 많을 것이다. 네가 만약 중원의 무공이 가장 오래되고 세력의 융성도 빠르다고 생각해 왔다면, 넌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기혼사(祁渾肆)가 공손고의 말에 화가 나 소리친다. 이에 단리유아가 진정시키면서, “그보다 선배님, 아까의 말씀이나 계속하여 주십시오.” “본래 구음독교(九陰毒敎)의 위치가 바로 이곳일세. 단지 천여 년 전에 갑작스런 지진으로 이 대습지 아래로 묻혀버렸다네. 그때의 지각변동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는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손을 쓰지 못하고 모두가 망연자실하여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땅 속에 파묻혀 버린 대다가 수로도 변해서, 지금처럼 이곳은 완전히 습지로 바뀌어 버렸다네. 실의에 빠진 사람들 중에 이십여 명이 모여서 그래도 고향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만든 것이 이 독룡림(毒龍林)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지. 독룡림이 이루어진 것이 횟수로는 천년이라 하지만, 그때까지는 독룡림이라는 명칭도 없었다네. 사실상 수많은 무공이 실전되어 어느 정도 복구하는 데에만 해도 삼백여 년이 흘렀고, 또 성세를 회복할 때까지는 강호(江湖)에서 활동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하는 기혼사(祁渾肆)를 보면서, “천년의 세력이 한순간에 사라지다니, 정말 허망한 일입니다. 선배님, 그러면 무공은 완전히 복구했습니까?” “아니네. 과거 구음독교(九陰毒敎)의 최고무공은 구음앙천자하독공(九陰殃天紫霞毒功)이라 하는데, 당시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완전한 구결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네. 소교주가 일부구결을 알아서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 림주가 썼던 자천독황일기공(紫天毒荒一氣功)이라네. 하지만 과거의 무공에 비해서 위력은 형편없다네. 아마 구음앙천자하독공의 칠성 정도의 위력이라고 보네.” 자천독황일기공(紫天毒荒一氣功)의 독공만 해도 끔직해서 단리유아 같은 독에 대한 내성이 특출 난 사람도 버티기 어려웠는데, 그것이 칠성정도의 위력밖에 되지 않는다니 과거 구음앙천자하독공(九陰殃天紫霞毒功)의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 일행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실제로 중원(中原)의 고금십대무공(古今十大武功)이라는 열 가지 무공에 비해서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실전에서는 상대하기가 훨씬 까다롭고 무서운 무공이었다. 고금십대무공이라 하지만, 세외(世外)의 무공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얼마나 그와 비견할 만한 무공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잠시 후에 단리유아가 정신을 차리고는, “선배님, 그러면 현경(玄境)의 경지에 이른 분도 계셨겠습니다.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흠, 나도 정확히는 모르네. 구전으로 전해지기만 해서. 과거 구음독교(九陰毒敎)가 가장 강성했을 당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천삼백여 년 전에 최초이자 최후로 구음앙천자하독공(九陰殃天紫霞毒功)을 완성한 분이 계셨다고 들었네. 이제는 꿈이라는 독제지경(毒帝之境)에까지 이르러 마음만으로 상대를 중독시켜 죽이거나 살리는 것을 자유자재로 했다고 알려져 있지.” “흠, 정말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분이 없으니, 저희 중원에서도 근 삼백년 내에 현경(玄境)의 고수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일행 모두가 한동안 구음독교(九陰毒敎)의 비사에 생각에 잠겼다. 단리유아 역시 구음독교의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완전히 땅속에 묻혀버렸다는 이야기에 실망했고 또한 그런 강파가 사라져 뛰어난 무공이 실전된 것도 안타까웠다. 일행도 중원(中原)과 견줄만한 문파와 무공이 있었다는 말에 자신들이 세외(世外)에 생각해왔던 것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날 저녁 자령독제(紫靈毒帝)와 단둘이 그의 거처에서 만나 저녁을 같이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단리대협. 독상(毒傷)은 어떻소? 겉보기로는 완치된 것 같은데.” “다행이 림주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하게 독기를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기회를 빌러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무심한 목소리로 단리유아가 포권을 하며 고마움을 표하자,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령독제가 약간 거북함을 드러내다가, “하하하, 뭘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시오. 본좌도 단리대협과 비무를 하게 되어서 참으로 즐거웠소이다. 그동안 남만(南蠻)에서 적수를 찾지 못해서 알게 모르게 자만심에 가득 차, 더 이상 무공에 대한 열정(熱情)이 없어져 버렸는데 이번 기회로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소.”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지난번에 내상이 심한 것 같았는데, 괜찮으십니까?” 아직도 약간 창백한 빛이 엿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단리유아가 묻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정도의 내상이야 우리 같은 무인들에게 무엇이 대수겠소? 시일이 흐른다면 완치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식사를 마치고도 서로 다과를 나누면서, 지난번의 비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무학에 대해서 토론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한참이 지나 시간이 해시(亥時:21-23시)에 가까워질 때, 문득 자령독제(紫靈毒帝)가, “단리대협, 지난번에 휼리파(恤狸把)를 대신 없애준 데에 대해 사례를 하겠다고 했는데 미처 못 했소이다. 내 대협이 떠날 때, 여정(旅程)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을 보내드리다. 그리고 지금 직접 대협께 드릴 것이 하나 있소.”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한 목소리로, “아닙니다. 이번에 해독하는데 도와주신 것만 해도 이미 그 일에 대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휼리파(恤狸把)의 일도 다른 사람의 부탁에 의한 것이니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소. 휼리파가 뛰쳐나간 것이 내가 미처 림주가 되기 전의 일이라오.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어찌 적은 일이겠소. 그러니 사양하지 마시오.” 말과 함께 한쪽의 탁자의 서랍에서 손바닥만한 옥함(玉函)을 꺼내어 건네준다. 단리유아가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받아서 열어보니, 어린 아이 주먹보다 조금 적은 크기의 흑진주(黑眞珠)가 놓여있었다. “이것은?” “흠, 대협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해독령주(解毒靈珠)라는 것이오. 만독(萬毒)을 해독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독들은 해독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오. 앞으로도 험한 일정이 이어질 텐데, 내 다른 것은 드릴 것이 없고 이것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아서 드리는 것이오.” 해독령주(解毒靈珠)라는 것은 보통 독물이 모여 사는 특이한 지형에서 살아가는 찰행보합(擦行寶蛤)이라는 조개에게 생기는 흑진주(黑眞珠)를 말했다. 그런 험악한 지형에서 살아가는 찰행보합은 자연스레 독기를 해독하는 물질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이 해독령주였다. 하지만 그런 독지를 찾기도 어려운데다 찰행보합에서도 진주가 생기는 것은 백의 하나여서 아주 드문 경우였다. 게다가 이렇게 큰 것은 거의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것으로 좀처럼 구할 수 없었다. 보통 진주를 칼이나 다른 도구로 갈아서,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신다면 대부분의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단리유아가 너무 귀한 물건이어서 다시 함을 닫아 건네면서, “너무 귀한 선물로 제가 가지기에는 너무 부담이 됩니다.” “아니오. 너무 부담 갖지 마시오. 본문에도 아직 하나가 남았으니.” 어쩔 수 없이 단리유아가 받아서 품에 넣고 다시 대화를 나누다가, “참 깜박했소이다. 이번에 기(祁)어르신께서 따라가고 싶어 해서 본좌가 보내드린다고 약속했었소. 이미 대협이 승낙했다는 것을 알지만, 기어르신의 괴행(怪行)에도 너그러이 보아주시오. 원체 장난을 좋아하셔서 그렇지, 결코 악의를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니.” “알겠습니다. 저도 기(祁)선배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승낙할 때, “그리고 단리대협께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소. 아마 이것은 대협과도 관련이 있을지 몰라서 말하는 것인데, 십년 전에 본문을 빠져나간 제자들의 행방이 묘연(杳然)하다오. 현재까지 찾아보고 있지만, 아무래도 누군가의 음모에 당한 것 같소. 그들의 행방에 대해서도 기(祁)어르신께 말씀드렸지만 대협께서도 귀찮다 마시고 될 수 있는 대로 도움을 주시고, 나중에라도 찾아보아 주시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단리유아가 뜻밖의 말을 듣고 자령독제(紫靈毒帝)에게 묻는다. 이에 이마를 좁히고 눈썹을 찌푸리면서 잠시 생각하다가, “십년 전 봄에 중원(中原)에서 본문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소. 무외신궁(無畏神宮)의 사람이라는데, 중원에서 그 세력이 크다고 우리도 들은 적이 있어 맞아들였소. 목적은 자신들이 오래된 유적을 찾았는데, 독물(毒物)의 위험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우니 도움을 바란다는 것이었소. 그 당시 여러 보물과 함께 무공비급도 몇 권 받아서 거절하기가 어려워, 내 사제와 제자 세 사람을 딸려 보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소. 나중에 본문에서 무외신궁까지 가서 물어보니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었소. 그동안 우리도 몇 번이고 찾아보았지만, 하내(河內)지역까지는 확인이 되었는데 그 이후로의 행적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소. 대협께서 비무행 중에 거칠 운남(雲南)지역이나, 아니면 나중에 중원에 돌아가시더라도 꼭 좀 찾아주시오.” 자령독제(紫靈毒帝)의 부탁에 단리유아가 승낙하고는 잠시 더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되돌아오는 길에 생각에 잠겼다. 무외신궁에서 정말로 사람을 요청한 것이 아닌지, 아니면 다른 세력이 가장한 후에 납치한 것인지. 문득 중원(中原)을 떠나올 때 소문으로 들었던 천목산(天目山)의 일도 생각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 길어져 전편과 나누었습니다. 오타와 오류를 지적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금화선고(金花仙姑) 금화선고(金花仙姑) 1 자령독제(紫靈毒帝)와의 만남에서 돌아와 일행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다시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 좌정하고 상념에 잠겼다. 일행도 자신이 전한 소식을 듣고 잠깐 대화를 나누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 각자의 침실로 찾아가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중원(中原)을 떠나올 때의 강호(江湖)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의 실종사건은 여러모로 심상치 않았다. 그동안 중원의 일이 어찌되었는지 몰라서 정확한 사실을 모르겠지만, 실종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이용된다면 혈겁(血劫)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중원의 독술(毒術)과 전혀 다른 이들의 독술은 상대할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중원에도 몇 개의 독문이 있지만, 독술보다는 독공 쪽으로 치우친 면이 많았고 독술이 뛰어난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 천독곡(千毒谷)과 약왕곡(藥王谷)이라는 독과 약의 이대명문이 있다지만, 이들 역시 상대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또 혹시라도 누군가 독강시(毒彊屍)를 만드는데 이들을 이용한다면 문제는 더욱 커질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일어나 머리를 어지럽혔다. 일단 비무행을 계속할 생각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당장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허나 나중에 중원(中原)으로 돌아갔을 시에는, 누군가 그들을 이용해 음모를 꾸민다면 강호(江湖)의 판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뇌리에 연이어 떠오르는 상념을 고개를 흔들어 떨쳤다. 강호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야 얼마 안 되고, 그나마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거의 없으니. 다만 앞으로는 중원의 변화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자주 수소문할 필요성이 있음을 느꼈다. 생각을 바꾸어, 며칠 더 독룡림(毒龍林)에서 머무르는 동안에 자령독제(紫靈毒帝)와의 비무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했다. 자령독제와의 비무에서 총 십이초로 이루어진 편법((鞭法)도 상대하기 까다로웠지만, 그보다는 역시 독공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천독황일기공(紫天毒荒一氣功)이라는 명칭의 이 독공은 같은 화경(化境)의 고수라도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운기시에 퍼져나가는 그 독기자체도 지독한데다, 만일 상처라도 입는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회복한 것도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단은 편법((鞭法)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독공(毒功)은 정확한 구결을 알지 못하는 한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비급 중에서도 몇 가지 있을 테지만, 독룡림(毒龍林)의 독공과는 많은 수준 차가 있어서 오랜 시간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먼저 기억하는 대로 편법을 다시 구성한 후에 거기에서 약점을 찾아 파해식을 만들고, 다시 자신의 생각을 합쳐 새롭게 만들어볼 작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또다시 새로운 무공에 매달리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의 무공이 필요치 않는 데에도 자꾸 버릇이 되어서 새로운 무공을 연구하니, 현경(玄境)에 이르는 데에 있어서도 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을 것이다. 이러니 여러 가지로 생각이 나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마음의 변화에 대해 관조하는 것에도 방해가 되고 있을 것이다. 허나 억지로 생각을 바꾸어 떨쳐버리지 않을 생각이다. 일부러 가는 마음을 막는다는 것도 맞지 않을 것이니, 마음이 흐르는 대로 행하다보면 언젠가는 점점 이런 것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날이 올 것이다. 자령독제(紫靈毒帝)의 편법((鞭法)을 생각해보니 까다롭지만, 약점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먼저 가장 큰 문제는 병기가 너무 길다는 것이 문제였다. 절정의 경지까지는 병기의 이점이 클 테지만, 화경(化境)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그런 것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대략 반 장(丈) 정도면 적당할 터인데, 너무 길다보니 자신과 같은 실전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약점이 되고 있었다. 물론 실전이 아닌 비무여서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초식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약점이 보였던 것이다. 순간순간의 변화에 있어서 약간씩 늦거나 초식의 전환하는 데 있어서 매끄럽지 못했다. 자령독제 자신에 비해서 낮은 수준이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고, 또 그렇다 해도 실전(實戰)에서는 독공을 함께 발휘해서 펼쳤을 테니 이렇다 할 문제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편법자체만 본다면 상대할만한 고수가 여럿 될 것이다. 또 두번째 문제는 편법이 너무 변화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실제 쓸데 없는 초식이 몇 군데 보였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일단은 오늘 저녁은 편법을 기억나는 대로 재구성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직접 펼치기는 어려우니 여정 도중에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수련한다면, 자신만의 편법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저녁 일행이 기혼사(祁渾肆)까지 모두 모였을 때,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색이 편치 않는 일행을 둘러보다가 단리유아가, “기(祁)선배님. 이제부터 들릴 임읍국(林邑國:참파왕국)이나 각멸(閣蔑:크메르)지역은 저희조차 들어본 적이 없으니,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알고 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흘흘. 암, 암. 자네들은 행운아라네. 나처럼 유능한 안내인에다가 무공도 뛰어난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자네들은 나를 만난 것에 대해,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마음속에 새기게 될 것이네.” 즐거워서 혼자 떠드는 기혼사를 보면서, 선상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슨 얼어 죽을....” “선가 아이야. 네가 아직 쓴 맛을 덜 보았나보구나. 흘흘, 앞으로 계속 함께 할 테니 걱정하지마라. 내가 매일 매일 세상사는 것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줄 테니.” 즐거워죽겠다는 기혼사의 기색에 반해 일행 모두가 안색이 좋지 못했고, 선상조는 돌아앉아 혼자서 궁시렁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혼사는, “흐흐, 자네들이 가려는 지역에도 여러 세력과 고수들이 있지만, 단리소협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곳은 몇 군데 안 될 것이네. 일단 내려갔다가 다시 운남(雲南)으로 간다고 했으니 서쪽 포감(蒲甘:버마)지역이나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스리비자야국)은 제외하고, 또 각멸(閣蔑) 남부 지역도 몇 곳이 있지만 그리 유명하지 않으니 제외하겠네.” 잠시 말을 멈추다가 다시, “우선 임읍국(林邑國)에서는 수도인 구차(邱車:현재의 다낭근처)지역의 금화선부(金花仙府), 다시 내려가서 무역항으로 유명한 호안(湖岸)지역의 차리살납당(此離薩納堂)이 있고, 쭉 내려가서 불과(岪跨) 지역의 괴리산사(傀離山舍)가 있고, 다시 각멸(閣蔑)로 넘어가면, 시통천(蓍洞踐)일대의 무산루(巫刪樓), 각멸의 수도인 연수사(沿愁思:앙코르)일대의 천석밀궁(千石密宮), 계속 북진하여 곤간(困桿) 인근의 파호추계(坡湖鎚契), 남루(濫婁)일대의 백상사(白象社), 몽박산(蒙箔蒜) 일대의 나하루관(羅蝦鏤館), 루암팔봉(壘岩八封)일대의 소적교(素赤橋)를 거쳐 운남성(雲南省)아래 비사리(非沙里) 일대의 세금동(銴金洞)에 이르게 되면 될 것일세.” “선배님, 무슨 문파가 그리 많습니까? 대부분이 중원에서도 들은 적이 없는 곳뿐이군요.” 공손고의 물음에 기혼사(祁渾肆)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뭐가 많다는 것인가? 뭐, 이쪽 남만(南蠻) 일대는 사람도 살지 않는 지역이란 소린가? 아니면 모두가 미개인뿐이라는 소린가? 아까 열거한 것도 단리소협이 찾아가 볼 정도의 세력과 명성 높은 고수가 있는 곳뿐이야. 그 외의 소수세력이나 독행하는 고수들은 제외했고, 또 너무 거리가 멀어질까봐 다른 지역은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았는데. 흥! 네놈은 중원인(中原人)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냐?”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는 듯이 점점 더 자신의 말에 흥분하여 공손고를 노려보며 소리친다. 이에 공손고가 쩔쩔매며, “기(祁)선배, 그런 뜻이 아니라.....” “닥쳐. 이 자식들이 정말 정신상태가 글러먹었구만. 흥, 내가 이번에 함께 하면서 확실히 그런 생각을 뜯어 고쳐놓고 말테다.” 흥분하여 소리치는 기혼사를 향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기(祁)선배님, 고정하십시오. 설마 그런 의도로 이야기 했겠습니까? 아무래도 여정(旅程)이 너무 힘들어 질까봐 그런 것일 겁니다.” 기혼사도 언제나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단리유아만은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바가 있어서, 이내 목청을 가다듬으며, “흘흘, 내가 너무 흥분했나보구만. 이렇게 성질부릴 것이 아닌데, 내 자네에게는 미안허이.” 이에 공손고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며 속으로, ‘으이구, 저 빌어먹을 이중인격자 같으니. 우리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단리소협 한 테만은 온갖 근엄한 척 다하는군. 아, 정말 끔찍한 여정이 되겠군.’ 공손고와 비슷한 생각으로 일행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때, “기선배님, 그럼 가장 먼저 부딪칠 금화선부(金花仙府)에 대해 아시는 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흘흘, 그래 내 자세히 아는 대로 말해주지. 금화선부는 임읍국(林邑國)의 수도 근처에 있는 문파로 여인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이에 일행 모두 궁금한 얼굴로 주시한다. 중원에서도 여인들만의 문파는 몇 되지 않았는데, 이런 곳에도 그런 문파가 있다니 다들 호기심이 일어난 것이다. 일행을 둘러보다가, “흘흘, 갑자기 여자 이야기가 나오니 모두가 목이 빠져라 쳐다보는군. 하지만 그런 여자들과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좋을 걸? 클클, 안 그랬다간 언제 죽은지도 모르게 저 세상으로 갈 테니. 하긴 뭐 여자들의 육향(肉香)에 빠져 죽을 테니, 행복할 지도 모르지.” “무슨 소리이십니까? 어떤 여자들이길 래?” 난파검 웅정향이 궁금하여 물어보자, “흘흘. 원래가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신전이었는데, 언제 적부터 변했는지 모르지만 강호(江湖)의 세력인 여인문파로 바뀌었지. 모두들 천명에 하나 볼 수 있을 정도의 미인으로 미혼술(迷魂術)과 독고술(毒蠱術)이 뛰어나지. 흐흐, 아마 자신도 모르게 미혼술에 걸려들 걸? 알아차리기도 힘든데다가 알아차렸다 해도 벗어나기 쉽지 않지.”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중원(中原)에도 그와 비슷한 문파가 몇 있는데?” 공손고의 말에 기혼사가 눈썹을 찌푸리다, “넌 어째 꼭 중원(中原)과 비교하드라. 어떻게 그런 생각만 드는지 정말 희안하구만. 그런 간단한 미혼술(迷魂術)일 줄 아느냐? 전혀 사기(邪氣)가 없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거룩하고 자비로운 여신을 보는 듯이 성스러워 보인단 말이다. 흥, 게다가 독고술(毒蠱術)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일단 걸려들면 죽지도 살지도 모를 텐데?” “기(祁)선배님. 미혼술은 모르지만, 저희도 고충(蠱蟲)을 막기 위해 향사목(香絲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음구의가 끼어들어 말할 때, 기혼사(祁渾肆)가 코웃음 치면서, “흥! 넌 바보냐? 세상에 뛰어난 방패가 있으면, 그에 비례해 뚫을 수 있는 창을 만드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 것처럼 향사목(香絲木)이 고충(蠱蟲)을 몰아낸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을 텐데, 그동안 가만히 눈뜨고 있었겠느냐? 너희가 향사목만 믿고 있다가는 오히려 더 쉽게 고충에 당할 걸?” 그 말에 놀라 잠시 일행이 심각한 안색으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단리유아가, “선배님, 그런 것 말고, 무공이 뛰어난 고수는 없습니까?” 이에 한참 단리유아를 훑어보다가 기혼사(祁渾肆)가, “흘흘, 물론 있지. 문주인 금화선고(金花仙姑)는 나와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의 고수지. 나이도 나보다 몇 살 적을 뿐이고. 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주안술(朱顔術)을 익혀 아직도 삽십대 초반 정도로 젊어 보이지. 클클, 그런데 자네는 모든 여자들의 천적이로구만. 이렇게 감정의 동요가 없으니 아마도 미혼술(迷魂術)에도 그리 영향 받지 않을 것이고, 림주와 싸운 것을 보았을 때는 독고술(毒蠱術)도 크게 영향을 줄 수 없을 것 같군. 흐흐, 정말 그 계집들이 자네와 싸운다면 놀라 기겁하겠군.” “흠, 그러면 제가 비무를 요청하면 받아주겠습니까? 말씀대로라면 사악한 집단으로 보이는데.” 전혀 자신의 말에는 관심을 드러내지 않고 물어보는 단리유아를 보고 잠시 말문을 잃었다가, “클클, 정말 괴상한 친구로구만. 흘흘, 아마 받아들인다고 해도 정당한 대결은 어려울 걸? 그 계집들이 무공을 익힌 남자들은 우선적으로 잡아들여 내력을 뽑아내려고 하니 말일세.” 기혼사(祁渾肆)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면서 음구의가, “소사숙, 그런 문파라면 그냥 지나치지요. 괜히 접근했다가 무슨 사단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일행도 이구동성으로 음구의의 말에 동의하여 단리유아를 설득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그러면 금화선부(金花仙府)는 그대로 지나치기로 합시다. 우선은 여정(旅程)을 계속해서 구차를 지난 다음 다른 곳에 대해서 다시 상의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선배님 어떤 길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행의 생각대로 결정하고 기혼사에게 가는 길을 물었다. “클클, 어차피 일단은 수릉강(浽菱江)을 타고 해안까지 간 다음, 해안을 따라서 남하해야하네. 아니면 안남산맥(安南山脈)을 뚫고 내려가든지,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오래 걸릴 수도 있지. 워낙 거리가 머니 산맥을 뚫고 내려가기 보다는 해안가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 빠를 것이네.” 기혼사의 말에 일단은 수릉강(浽菱江)을 타고 내려가 해안을 따라서 남하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금화선부에 들리지 않더라도 호안(湖岸)지역의 차리살납당(此離薩納堂)을 찾아가려면 그 방법이 빠를 터였다. 다음날 일행은 자령독제(紫靈毒帝)와 독룡림(毒龍林)의 인물들과 작별을 하고는 수락지(藪落池)를 거쳐서 떠나갔다. 떠나는 기혼사를 보면서 독룡림의 사람들은 표정을 숨긴 채 아쉬운 표정을 하다가,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자마자 모두가 속이 후련한 표정이 되었다. 최소한 앞으로 오년동안은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니, 오히려 같이 떠나가는 일행을 동정했다. 얼마나 골치 아프고, 괴로움을 당할지 상상하면서. 일행이 독룡림(毒龍林)을 떠나서 천이삼백여 리가 떨어진 구차(邱車) 근처, 수전(藪田)이라는 곳까지 온 것은 이미 우기가 시작되어 험악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는 십일월 십팔일의 저녁이었다. 앞으로 반나절만 더 간다면 임읍국(林邑國)의 수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릉강(浽菱江)을 따라 내려간 이틀을 제외하고는, 해안가를 따라 남하했는데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다만, 일행에 대한 소문이 나서 거의 매일 남만(南蠻)의 고수들이 찾아와 생각보다는 늦은 편이었다. 그동안 일행의 소문은 전 남만(南蠻)에 퍼져, 중원의 십대고수 중의 한 사람이 비무를 하고자 찾아왔다는 말이 퍼져나갔다. 또 사인곡(蛇人谷)과 고무족(鼓舞族)의 일도 널리 알려졌고, 독룡림(毒龍林)도 거쳤다는 것이 소문이 나자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비무를 요청해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제외한다면 크게 어려운 일은 없었는데, 뛰어난 고수도 얼마 없어 대부분 남파쌍검(南波雙劍)보다도 못했다. 직접 상대한 십여 명을 제외하고는, 나중에는 짜증이 난 기혼사가 무공이 너무 뒤떨어지는 사람들은 겁을 주어 쫓아버렸다. 이미 임읍국(林邑國)으로 넘어 온지도 한참이었는데, 하필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하루 종일 폭우가 쏟아져 우장을 걸쳤어도 날마다 저녁에는 속옷까지 완전히 젖게 되었다. 기진맥진한 일행이 그날은 수전(藪田)에서 보내고 다음날 폭우 속을 뚫고, 다시 구차(邱車)를 향해서 출발했다. 일단 임읍국의 수도인 구차에서 며칠 쉬며 피로를 푼 후에, 다시 남하해 호안(湖岸)지역의 차리살납당(此離薩納堂)으로 떠나기로 했다. 해운(海雲)고개를 통해서 왕도인 구차로 들어섰는데, 오른편으로 보이는 오행석산(五行石山)이 인상 깊게 보였다. 마치 다섯 손가락처럼 연이어 있는 산으로 완전히 대리석으로 된 산이었다. 일행이 왕도인 구차에 들어선 시각은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으로, 제일 먼저 임읍국 특유의 바라문교(婆羅門敎)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신전과 여러 건축물들이 눈에 띄었다. 거리에는 일행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연일 폭우가 쏟아지니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기가 어려웠다. 다들 집안에 있거나 건물 안에서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 걸음을 옮겨 주변을 바라보며 기혼사가 안내하는 곳으로 향하다가, “이곳은 너무 특이하군요. 기선배. 어째 건물 같은 것이 들었던 천축국(天竺國)의 형태와 비슷하군요. 게다가 복장도 비슷하게 보입니다.” 웅정향의 말에 기혼사가 사방을 둘러보며, “흠, 자네 말이 맞네. 이곳은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세력이 강성해서 아무래도 그 영향이 적지 않네. 게다가 여기는 모계중심의 사회로 여자의 권한이 크네. 그러니 여자들을 대할 때 특히 주의하도록 하게.” 이들 임읍국(林邑國)의 사람들은 대부분 바라문교(婆羅門敎)를 믿고 있어서 계급에 따른 차별이 심했다. 곳곳에 신전이 있는데, 대다수가 파괴의 신으로 최고신인 시바신을 모신 곳이었다. 게다가 모계(母系)중심의 사회로 가문마다 무자야라 불리는 여자가 가장으로 있었다. 왕도 대대로 여왕(女王)으로 이어져오는 곳이었는데, 이런 결과로 상대적으로 남성의 권한이 약했다. 복장의 형태는 남성은 머리를 흰색의 터번으로 둘둘 말아 감싸고, 보통 청남색 계통의 옷을 입거나 천으로 치마처럼 두르기도 했다. 여성은 보통 머리 전체를 망사로 가리거나 수건을 쓰고, 몸은 여러 겹으로 겹쳐진 치마나 바지를 입거나 넓은 천으로 전신을 둘둘 마는 형식의 옷을 입기도 했다. 기혼사가 머리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훔치며 조심스럽게, “원래 금화선부(金花仙府)도 이런 모계중심의 세상에서 생겨났으니 그렇게 되었겠지. 여자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해서, 결혼하면 남자는 당연히 처가에 들어가 살아야 되네. 아이의 성도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되지. 게다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으니, 더욱 여자의 세력이 강한 곳이네. 우리가 지나온 지역은 큰 고을이 없어서 그리 상관이 없었지만, 여기에서는 다들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하게. 비록 이곳이 해안과 이어져 오랜 세월동안 무역항으로도 번창해 이방인에 대해서 관대하다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안방과 같은 곳이니 주의하도록 하게.” 이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기혼사는 일단 구차(邱車)의 남문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일행은 하루 이틀 쉬다가 바로 남하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남문로의 한 객관에 들어서니, 낯선 이방인의 모습에 내부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들에게 향했다. 일행도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아예 별채를 따로 얻었다. ***** 어쩐지 별로 맘에 안드네요. 이 편은 나중에 다시 수정해야겠습니다. 오타와 오류가 보이면 바로바로 지적해주십시오. 금화선고(金花仙姑) 금화선고(金花仙姑) 2 다음날 객관의 별채에 머물러 일행은 하루 종일 머무르며 피로를 풀었다. 단리유아는 아침식사 때 식사를 하면서, 저녁때까지는 수련할 테니 아무도 찾아와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일행도 단리유아가 또 무공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여 약속하고는 저녁때까지 접근하지 않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자, 침실로 돌아와 침상 곁에 정좌하여 상념에 잠겼다. 그동안 시간 날 때마다 자령독제(紫靈毒帝)의 편법(鞭法)을 연구하고 수련하여, 자신의 생각에 맞게 수정하는 것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다. 나머지 초식의 연결에만 좀 더 신경 써 보충한다면 편법을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인데, 시일이 이렇게 단축된 것에는 기혼사의 도움이 컸다. 일단 이 편법을 완성한다면, 독공에 대해서도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독공들을 연구한다면, 지금 당장에는 자령독제(紫靈毒帝)의 독공에는 미치지 못할 지라도 시일이 흐른다면 그에 못지않은 독공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자신의 내력에는 독정(毒精)이 포함되어 있어서 독공을 익히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의 특성이 다른 내공을 배척하는 것도 아니어서, 연구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일단 먼저 편법을 완성하여 기혼사에게 전한 다음, 이후에 시간이 날 때마다 독공을 연구하기로 했다. 아마 보름정도면 편법도 완전히 완성 될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더 보충하거나 변형하든지 아니면 그대로 익히는 것은 독룡림(毒龍林)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처음 구절편(九節鞭)을 구해달라는 단리유아의 말에 기혼사(祁渾肆)가 의아해하다가, 단리유아가 수련하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넋을 잃었었다. 설마하니 자령독제(紫靈毒帝)의 편법을 펼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비록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기혼사가 어찌 몰라보겠는가? 수련하는 것을 중간에 멈추게 하고는 어찌된 일인지 물어서야, 이런 것이 단리유아가 비무행을 하는 일과 중의 하나임을 알았지만 기혼사에게는 너무나 중대한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단리유아가 이 편법(鞭法)을 전해주기라도 했다가는 자신들의 비전무공 중의 하나는 완전히 쓸모없게 돼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발 수련을 하지 말든지, 아니면 그 무공이 완성되더라도 다른 이에게 전하지 말 것을 약속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단리유아가 나중에 완성된다면 독룡림(毒龍林)에 전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겨우 안심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오히려 기혼사가 직접 나서서, 편법의 완성을 위해 대련을 자청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단리유아도 그동안 틈틈이 수련하고, 도중에 찾아오는 남만(南蠻)의 고수들과의 비무에서도 몇 번 펼쳐보면서 새롭게 다듬었다. 단리유아가 구한 구절편(九節鞭)의 길이는 겨우 오 척이 넘을 정도의 짧은 것인데, 이것을 단리유아가 펼치니 검법(劍法)과 편법(鞭法)이 구분이 안가는 독특한 편법이 완성되었다. 자유자재로 구부려지는 구절편의 특성과 진기를 주입하여 연검(軟劍)을 사용하듯이 펼치니 완전히 새로운 무공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기혼사 역시 감탄하여 이것이 진짜 자령독제(紫靈毒帝)의 편법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실제 자령독제의 편법의 형에서 거의 벗어나, 자령독제가 보더라도 직접 상대하지 않는 한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일행이야 단리유아가 하루도 수련을 그만둔 적이 없고 해남파(海南派)의 검법을 연구하는 것을 본 적이 있으니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을 처음 본 기혼사는 단리유아의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자질과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상 하나의 무공을 연마하기에도 보통사람들은 평생을 바쳐서도 대성하기 어려운 법인데, 아무리 다른 무공을 보고 변형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한다면 새로 창안한 것과 별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모습에 비록 나이 어리지만 기혼사(祁渾肆)가 같은 무인으로서 탄복하여,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무공을 익힌 사람 중에서 단리유아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수련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통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면 만족하여 지속적인 수련을 멈추고 가끔 몸을 푸는 정도로 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기혼사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러니 기혼사가 단리유아를 대하는 태도는 장난이나 심술을 전혀 부리지 않고 은연중에 떠받들고 친절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일행들을 대하는 것은 딴판으로 완전히 자신의 수하를 부리듯이 멋대로 괴롭혀, 그동안 일행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편 단리유아가 침실에 머물러 혼자서 조용히 하루 종일 무공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밖에서 일행은 기혼사의 등살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데에다 하루라도 심술을 부리지 않는다면 몸에 두드러기라도 나는지, 오늘도 일행을 찾아다니면서 못살게 굴고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한번 마음에 안 들면, 하루 종일이라도 붙들고 말할 것처럼 들러붙어 들들 볶아대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머지 일행은 맞장구치면서 아부하거나 아예 마이동풍으로 상대를 하지 않으면 제풀에 물러간다는 것을 알아서 어느 정도 적응하였지만, 선상조는 원체 참을성이 없으니 매일매일 기혼사의 심술과 장난에 당하고 있었다. 오늘도 더 견디지 못하고 선상조가 울화통이 터져 밖으로 뛰쳐나가, 객관의 주청(酒廳)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겨우 손짓발짓을 동원하여서야 상대가 알아듣고 술을 가져왔다. 내려놓는 술병을 잔에 따르지도 않고 한 번에 기울여 마시고, 다시 다른 술병에 손을 가져가 마시고 있을 때, “호호호, 이런 어째서 대낮부터 혼자 술을 마시고 있나요?” 나이가 이제 이십도 못되어 보이는 앳된 목소리로, 한 여자가 곁으로 다가와 물어본다. 전신에 감청색의 둘둘 만 듯한 옷을 입고 얼굴은 백사(白紗)로 가린 여인이었는데, 하얀 천 사이로 맑고 영롱한 눈빛만 보이고 있었다. “누구시오? 나를 아시오?” 선상조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여인을 보면서 물어보자, 여인의 눈빛이 반짝하며 한어(漢語)로, “호호호, 이런 중원분이시군요. 정말 멀리서 오시기도 하셨어라. 어찌 술을 그렇게 마시나요. 호호호, 술은 여인이 따라줄 때 제 맛이 우러나는데.... 소녀가 한 잔 따라드리지요.”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슬쩍 손으로 술잔을 말아 쥐는데, 길고 푸른 소맷자락이 술잔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술잔을 건네며 다시, “소녀는 이곳 가문중의 하나인 하타가(河楕家)의 여인이랍니다. 호호호, 오늘 이곳에 우연히 찾아왔는데, 그대 같은 헌헌장부를 만나게 되어서 대화나 나눠 볼까하고 다가왔답니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하며 은근슬쩍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게다가 정면으로 마주 앉으니 자연스럽게 안이 비치는 옷이라 어렴풋이 몸의 곳곳이 드러나 보였다. 이에 선상조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다가 얼굴을 붉히며, “무슨 소리요? 그리고 남녀가 유별한데, 나는 할 말이 없으니 당신은 그만 물러가시오.” “어머나! 매정도 하셔라. 무슨 남자가 여인이 찾아와 말을 붙이는데 단번에 거절하나요. 그러지 말고 우리 통성명이나 하는 것이 어때요.” 말과 함께 고개를 내밀어 얼굴을 선상조의 바로 앞까지 가져간다.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빛과 훅 끼쳐오는 향기에, 선상조가 당황하여 얼굴을 뒤로 물릴 때, “호호호,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니 마치 나이 어린 소년 같군요. 어째서 제가 건네주는 술잔은 아직까지 마시지 않나요. 정말 장부답지 못하네요.” “내 나이가 몇 인데.... 장부답지 못하다고? 흥!” 여인의 말에 선상조가 바로 술잔을 들이킨다. 그 모습에 여인이 너무 희어서 창백하기까지 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면서, “호호호, 과연 생긴 모습처럼 장부답군요. 그런데 아직도 제게 이름을 가르쳐주시지 않을 건가요? 제가 그리 못나 보이나요?” “나는 선상조라 합니다. 그대는 어떤 분이시오?” 선상조가 몽롱한 어조로 말한다. 분명히 정신은 말짱한 것 같은데도 입은 따로 노는 듯이, 전혀 다른 부드러운 어투로 술술 말이 나간다. 이에 여인이 맑은 목소리로 작게 웃으며, “호호호, 멀리 보는 새라 풍채처럼 멋있는 이름이군요. 소녀의 이름은 하타호루(河楕呼累)라 불린답니다. 다음 대 무자야로서 수업 차 밖으로 나왔다가 그대를 보게 되었지요. 호호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 아닌가요?” 점점 더 상대에게 매혹되어 상대의 눈빛과 목소리에 완전히 맛이 간 채로, “하타호루(河楕呼累)라, 호루.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오. 그대의 모습도 필경 아름다울 것이오. 내게 잠깐이나마 볼 기회를 주시지 않겠소? 아름다운 나의 호루?” 선상조의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운 말에 여인이 속으로, ‘이제 보니 나이만 많았지, 순 애송이로군. 이렇게 쉽게 넘어오다니. 오히려 이상할 지경인걸.’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아, 물론이지요. 그대가 원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나요. 하지만 잠깐만이예요.” 말과 함께 얼굴을 가린 백색의 면사를 살짝 거두어 보였다가 다시 가린다. 가늘고 긴 아미에 흑갈색의 부드러운 눈동자와 작고 붉은 입술을 지닌, 중원(中原)의 여인들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이었다. 이마의 중앙에는 빈디야라 불리는 조그마한 붉은 색의 점이 있었는데, 그 형상이 타오르는 불꽃같아 보여 아주 정열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선상조가 넋이 나갔다가 다시 얼굴을 가려서 볼 수 없자,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며,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이요. 호루(呼累). 마치 여신과 같구려. 그대는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내 눈앞에 나타났소?” “아, 저도 당신을 보니 전생의 인연이 이어져 만난 것 같아요. 어찌 이렇게 당신에게 끌리는지....” 여인도 애처로운 눈망울로 선상조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한다. 이 여인은 금화선부(金花仙府) 사선자(四仙子) 중의 하나로 화련선자(火蓮仙子)라 불리고 있었다. 사선자는 금화선고(金花仙姑) 아래의 직책으로 각기 구차(邱車)지역의 사방을 맡아서 관리해오고 있었는데, 화련선자는 그 중에서도 이곳 남쪽지역을 맡고 있었다. 주로 외지인이나 이방인을 노려 접근한 다음, 납치해서 금화선부로 데려가는 것이 이들 사선자의 주목적이었다. 먼저 미혼술(迷魂術)로 상대를 미혹시킨 후에, 혹시라도 반항하지 못하게 다시 고충(蠱蟲)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했다. 이들의 미혼술은 전혀 사기(邪氣)가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웬만해서는 알아차리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이 미혼술(迷魂術)은 연영미혼대법(然英迷魂大法)이라 하는데, 익히려면 열 살 미만의 어린 시절부터 얼굴의 표정을 관리하여 자연스럽게 익혀야했다. 중원(中原)의 미혼술은 본래가 섭혼술(攝魂術)의 일종인데다 주로 내력(內力)을 이용한 것으로, 아무래도 펼치는 사람보다 내공이 높은 고수거나 정심한 인물은 쉽게 알아차리고 깨뜨릴 수 있었다. 이에 반에 이들의 미혼술은 내력보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터득한 자연스러움이 배여 있었고, 또 정신의 힘을 단련해서 이용하는 것이어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화련선자(火蓮仙子)가 신전으로 들어온 연락을 받고 찾아왔지만, 일행이 별채에 머물러 나오지 않으니 어찌할 바를 몰라서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자신 혼자서 찾아간다는 것은 너무 위험해서 혹시라도 정체를 파악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독고(毒蠱)를 쓰는 것도 어려워서 가까이 접근해서 고충(蠱蟲)을 퍼뜨리거나, 음식물에 넣어서 자연스럽게 들어가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상대가 미리 독고에 대비하고 있다면, 그것도 그리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노리고 있다는 것만 들켜 흔적만을 남길 뿐이었다. 이렇게 한참 생각하고 있는 도중에 선상조가 혼자 나왔으니, 정말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는 거미에게 다가온 먹음직스런 먹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선상조는 일행이 주의를 준 것도 잊어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미혼술(迷魂術)에 넘어가 상대를 따라나섰다. 저녁이 되어서 일행이 식사를 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어서야, 일행은 선상조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사람들이 별채의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찾을 수 없어 대청에 다시 모였을 때, “음사질. 마지막으로 선사질을 본 것이 언제요?” 가장 친한 음구의를 보면서 단리유아가 물어보니, 음구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혼사를 힐끗 보고는, “음, 소사숙. 저도 정오 이후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 기(祁)노선배님께서 마지막으로 같이 있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기선배님. 음사질의 말로는 선배님과 있었다는데, 언제 마지막으로 선사질을 보셨습니까?” 음구의의 말에 단리유아가 기혼사를 보면서 물어보았다. 이에 기혼사가 시큰둥한 어조로, “글쎄. 여기 이 친구 말대로 내가 정오까지는 같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나도 모르겠네. 클클, 화가 나서 뛰쳐나가 버렸으니.” “그러면 그 이후로 다른 분들은 본 적이 없습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다들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걱정스러운 기색이 된다. 말은 안하지만, 모두가 기혼사를 힐끗거리며 틀림없이 저 노인네가 장난을 쳐 화를 돋구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사숙.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갔다면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테니, 제 생각에는 객관의 주청(酒廳)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주청에 가서 물어보지요.”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청으로 향했다. 주청으로 향해서 주인에게 선상조의 모습을 보았는지 기혼사가 물어보다가, 일행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여보게, 단리소협.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게 된 것 같네. 이 사람의 말로는 어떤 여자가 와서 얘기하다가 같이 나갔다는군.” “여자라구요? 아니,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웅정향이 놀라서 말할 때, 음구의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선배님, 그러면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답니까?” “이 사람 말로는 신시(申時:15-17시)초에 나갔다고 하네.” “아니, 그러면 벌써 두 시진(時辰) 이상 흘렀다는 것 아닙니까?” 공손고가 놀라서 소리친다. 지금은 술시(戌時:19-21시)가 된 지도 한참이어서, 벌써 날도 어두워져 밖은 캄캄한 한밤중이었다. “제기랄. 이 자식은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처음 본 여자를 따라가다니, 정말 구제불능인 놈이구만.” 공손고가 투덜거릴 때, 음구의가 기혼사를 보면서 다급한 어조로, “선배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까요? 아무리 여인의 힘이 크다지만 이런 곳에 함부로 들어오기는 힘들 테니. 저 주인은 누구인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흘흘, 그래. 자네의 말대로 보통 여자는 이런 곳에 잘 들어오지 않지. 아마 이놈도 그 여자를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보통 이런 놈들은 끄나풀에 불과해서 잡아 족쳐도 자세한 것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네.” 말과 함께 주인을 바라보고 물어본다. 한동안 모른다고 계속 잡아떼는 주인을 보다가, 품속에서 붉은 색의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조그마한 쥐 모양의 동물을 꺼내어 주인의 얼굴에 들이민다. 붉은 쥐를 보고서는 놀라서 주인이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겨우 떠듬거리며 사실을 말한다. 이 주인도 자세한 것은 모르고 단지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성내의 한 신전에 연락을 한다고만 했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신벌을 받게 된다면서. 여자는 모르는 사람으로 단지 신전에서 왔다기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고 애기한다. “그렇다면 지금 곧바로 그 신전을 찾아가야 할까요?” 웅정향이 기혼사의 설명에 물어볼 때, 기혼사가 얼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리 가 보았자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네. 가서 물어보아야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을 것이고, 알려줘도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 시치미를 뗄 테니. 이곳에선 낯선 남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닌데, 신전과도 연관이 있는 계집들이라면 금화선부(金花仙府) 뿐이네. 게다가 백주 대낮에 그런 일을 할 만한 대담한 곳도 거의 금화선부의 계집들에 불과하지. 휴, 정말 골치 아프게 되었구만. 제기랄, 하필 그 계집들이 끼어들다니.” “그러면 서둘러야겠습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니. 기선배님. 금화선부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기혼사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내키지 않는 듯이, “나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네. 단지 오행석산(五行石山)에 있는 구루동(九漏洞)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 동굴이 여기저기로 통해서 어느 곳에 정확히 금화선부(金花仙府)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지. 빌어먹을 놈 같으니, 아주 일을 만드는 놈이로구만. 이런 날씨에 생고생을 하게 생겼으니. 어이구, 삭신이야.” 허리를 두드리면서 노골적으로 비를 맞고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모습에 일행이 속으로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하고 욕하면서 억지로 가자고 강권했다. 객관을 나서서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걸어서 성 밖으로 향하는 도중에, 문득 웅정향이 아까의 붉은 쥐가 생각나서, “저 선배님, 아까의 그 쥐는 어떤 것이 길래 보자마자 주인이 그렇게 사색이 된 것입니까?” “흘흘, 왜 자네도 보고 싶은가? 말만 하게. 내 실컷 보여줄 테니.” “아니 그것이 아니라....” 손을 저으며 기겁하는 웅정향을 보면서 기혼사가, “쯔쯧. 그렇게 담이 약해서야. 누가 단지 본다고 어찌 될 것 같은가?” 말과 함께 품속에서 붉은 쥐를 꺼내든다. 따뜻한 품속에 있다가,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오자 싫다는 듯이 찌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붉은 쥐가 몸을 웅크린다. 이에 다시 품속에 넣으면서 기혼사가, “이놈은 혈적서(血摘鼠)라는 독물이지. 뭐, 이놈보다 독기가 심한 것도 많지만 이놈도 한번 물리면 살아남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야. 그냥 중독되어 죽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지만, 숨이 끊어지기 전 두 시진(時辰) 동안은 온몸의 혈관이 터져나가게 되지.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나을 텐데,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꼼짝하지 못하고 고통을 당해야 하지. 또 후각이 예민해서 한번 맡아본 냄새는 어디든지 추적한다는 것이지. 게다가 주인의 말은 절대복종하니 정말 얼마나 귀여운 녀석인지 모르네. 내 다음에 자네들에게도 자세히 보여주지.” 일행이 그 말에 기겁을 하면서 절대로 보고 싶지 않다고 거절할 때, “클클, 겁들이 왜 그렇게 많은가? 내가 설마 자네들을 물게 할까봐서 그런가? 설혹 물더라도 해약이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말게, 흘흘. 그런데 오늘 날씨가 이렇지 않다면, 이놈을 시켜서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을 텐데. 뭐, 어차피 금화선부(金花仙府)의 계집들 짓이라면 갈 곳이 뻔할 테지만, 혹시라도 길이 어긋날지도 모르겠네.” 기혼사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일행은 서쪽 성문을 나가서, 오면서 보았던 오행석산(五行石山)으로 향했다. 전신으로 쏟아지는 장대 같은 폭우와 캄캄한 어둠속에서 일행의 두런거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암흑 속에서 비바람을 무릅쓰고 오행석산으로 신형을 날리는 이들의 모습은, 옷자락만 이따금 보일 뿐이어서 마치 귀신들이 하계에 찾아온 것 같았다. 금화선고(金花仙姑) 금화선고(金花仙姑) 3 해시(亥時:21-23시)가 조금 지났을 때, 일행은 성 밖 십여 리 떨어진 오행석산(五行石山) 밑에 이르렀다. 낮에 보았던 것과는 달리 어두운 음영만을 드리우고 있는 산의 모습은, 순수한 대리석만으로 이루어져서 그런지 보는 사람의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음산한 모습이었다. 나란히 다섯 개의 손가락이 벌리고 서 있는 듯한 오행석산(五行石山)의 모습을 보면서 단리유아가, “기(祁)노선배님, 이제 어디로 가야합니까?” “글쎄. 저 가운데 보이는 중모봉(中母峰)에 구루동(九漏洞)이 있다고 들었지만, 나도 직접 찾아가 본 것은 아니니 정확한 위치는 모르네.” 기혼사가 대답하고 나서, 이마를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훔치며 다시, “흐이구, 정말 이놈의 날씨는 왜 이렇게 험악한지 모르겠네. 우기(雨期)가 되기만 하면 이렇게 폭우가 밤낮으로 쏟아지니, 원. 나도 남만(南蠻)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왔지만 이놈의 날씨는 전혀 마음에 안 들어.” 기혼사의 투덜거리는 말을 들으며, 일행은 일제히 중모봉(中母峰)으로 신형을 날렸다. 가는 도중에 다시 기혼사를 보면서 단리유아가, “선배님, 구루동(九漏洞)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입니까? 아니면 아는 사람이 드물어 찾기 힘든 곳에 있는 것입니까?” “클클. 아는 사람이 상당히 된다고 하니, 뭐 구루동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일세. 허지만 금화선부(金花仙府)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극소수의 강호인(江湖人)이나 알고 있다네. 아마 동굴내로 들어선다 해도 찾기란 쉽지 않을 걸세. 완전히 미로처럼 곳곳으로 길이 나 있어서, 너무 깊게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실종되는 사람도 많다고 하니까. 뭐, 그중에 얼마는 그 계집들의 짓이기도 하겠지만.” 기혼사의 말에 앞서 달리던 음구의가 돌아보면서, “아까 보여주었던 혈적서(血摘鼠)로 추적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추적하는데 뛰어난 영물이라면서요?” “흘흘, 그럼 그럼. 얼마나 뛰어난데.... 하지만 그것도 일정한 거리 내에 있어야 냄새를 맡고 추적할 수 있지. 이렇게 추적이 끊겼다가 다시 찾는 것은 쉽지가 않다네. 게다가 그년들이 다니는 입구는 따로 숨겨져 있을 것이 뻔하니, 더더욱 찾기 어렵지.” 혈적서(血摘鼠)를 영물이라고 말하는 음구의의 말에 기분 좋게 처음엔 말하다가, 다시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한다. 일행이 기혼사의 말에 더더욱 일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침중한 기색이 되었다. 모두가 중모봉(中母峰)의 산 중턱에 올라 이곳저곳을 뒤졌을 때, 얼마 안 되어 산 중턱에 위치한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동굴의 입구가 사방 삼 장(丈)이 넘을 정도로 거대해서 쉽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한 쪽에 임읍국(林邑國)의 언어로 뭐라 써진 것을 보면서, “클클, 다 왔구만. 이곳이 바로 구루동(九漏洞)이라네. 자자, 어서 들어가세. 이 지겨운 빗속에서는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으니.” 기혼사의 말에 일행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이에 기혼사가 신형을 날려 들어가면서, “쯔쯧. 정말 겁들이 많구만. 어차피 이 입구 쪽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을 텐데....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구루동(九漏洞)은 겹겹이 연결되어 있고,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입구는 따로 있을 것이라고.” 잠시 후 모두가 동굴 속으로 들어왔을 때, 입구에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상의했다. “소사숙.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가 함께 찾아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각자 찾아보시는 것은?” 음구의가 초조한 어조로 단리유아에게 물어본다. 이에 기혼사가, “클클, 단리소협. 여기 동굴이 복잡하지만, 흩어진다면 오히려 위험만 증가할 것이네. 이런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계집들이 암습이라도 한다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네. 내 생각은 일단 가는 데까지 가보다가 혈적서(血摘鼠)가 추적하게 하는 것이 좋겠네. 어느 정도 가까워진다면 이 녀석도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 “그러면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흔적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 다시 흩어져 찾을 지 생각해봅시다. 그보다 횃불이나 천리화통(千里火筒)을 가져온 분이 계십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서로 얼굴을 돌아보다가, “이런! 모두가 급하게 걸음을 옮기다보니, 아무도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못했나보네. 큰 일 났구만. 휴, 동굴 안이 너무 어두워 불빛이 없다면 어디가 어딘지도 찾기 어려울 텐데. 게다가 함정이나 암습이라도 있다면 대비하기 어려울 것인데....” 공손고가 낭패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모두가 미처 급하게 서둘다 신경을 쓰지 못했는지, 아무도 불을 밝힐 만한 물건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횃불을 만들 만한 나무도 없는 순수한 대리석산이어서 당장 불을 밝힐 만한 것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다시 되돌아가든가 산 아래의 언덕진 곳까지 가서 나무를 구해 와야 했다. 잠시 상의하다 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산 아래의 조그마한 숲에서 나무 가지를 잘라 와서 임시로 횃불을 만들기로 했다. 일행이 다시 준비하는데도 반 시진의 시간이 더 흘러, 이제 자시(子時:23-01시)가 되는 데에도 일각이상 남지 않았다. 빗물에 흠뻑 젖어 제대로 타지도 않고 연기만 나는 것을 겨우 불 붙여 한 줄기 불빛에 의지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여분으로 쓸 것으로 더 준비해 가지고 들어가지만 두 시진 이상 버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이전에 찾지 못한다면 다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행이 이렇게 동굴 속으로 진입하고 있을 때, 선상조의 상황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여자들의 늪에 빠져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무엇을 하는지도 잊은 채, 육체의 쾌락에 빠져 내력(內力)과 정기(精氣)를 소진한지도 거의 두 시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이렇게 가다간, 머지않아 피골(皮骨)만이 남은 하나의 고루(骷髏)로 화하게 될 것이다. 금화선부(金花仙府)의 한 석부에서 사선자(四仙子)와 알몸으로 뒤엉켜 정사에 열중하고 있을 때, 화련선자(火蓮仙子)가 먼저, “호호호,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포식하는군요.” 나머지 삼선자도 깔깔거리며 웃음 짓다가, 문득 서부지역을 책임지는 가장 풍만해 보이는 이마에 하얀 물결모양의 형상인 빈디야를 한 백만선자(白漫仙子)가, “그런데, 동생. 다른 사람들도 더 있었다고 하는데, 나머지는 어떻게 하고 이놈만 잡아왔어? 이참에 우리 모두 함께 나서서 잡으러 가는 것이 어때? 이놈이 이정도의 내력과 정기(精氣)가 있으니, 다른 놈들도 그 이상 될 것 아닌가? 이번에 한번 마음껏 즐겨보는 것이 어떻겠나?” “저도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너무 위험해서 이놈만 제압해 데려왔어요. 이놈이 이정도의 내력을 지닌 것을 보면 다른 놈들도 그이상은 될 테니, 혹시라도 저희의 미혼술(迷魂術)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저 혼자서는 당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화련선자(火蓮仙子)의 대답에 이마에 연꽃모양의 빈디야를 한, 가장 앳되어 보이지만 나이는 가장 많은 선화선자(善花仙子)가, “설마, 세상에 우리의 미혼술(迷魂術)을 견딜 놈이 있을까? 아직까지 제대로 알아차리고 도망친 놈들도 몇 안 되는데. 호호호, 그리고 이 녀석은 동생의 손짓 한 번에 손쉽게 넘어 왔다며?” “맞아요, 언니. 아직까지 일단 걸린 다음에 깨어난 적은 없지요. 저도 언니들의 의견에 찬성해요. 그런데 사부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어요. 오늘 동생이 이놈을 데려온 것도 마땅찮아하는 눈치시던데.” 선상조의 몸 위에서 정사를 나누다가 떨어져 나오면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셋째로서 이마에 번개모양의 빈디야를 한 광전선자(光電仙子)가 말한다. 다시 선상조와 화련선자(火蓮仙子)가 정사를 나누기 시작할 때, “사부님도 나이가 드시니, 너무 조심성이 강해지신 것 같아. 중원인(中原人)들이라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시면서, 다음에는 중원인이라면 먼저 물어보도록 하시던데?” 백만선자(白漫仙子)가 화련선자(火蓮仙子)의 몸 위에서 날뛰는 선상조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하자, 광전선자(光電仙子)가 깔깔거리면서, “호호호, 언니도 참. 사부님 말씀으로는 최근 남만(南蠻)에 중원인이 들어와서 고수들을 연이어 격파하고 있으니, 조심하자는 것이겠지요. 만약 우리가 더 많이 잡아와서, 먼저 몇 명을 바치면 그런 말도 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에 다른 여인들이 서로 크게 웃으면서 광전선자(光電仙子)의 말에 맞장구를 칠 때, 선화선자(善花仙子)가 화련선자(火蓮仙子)를 보면서, “그런데 화련아, 이놈에 대해서는 자세히 물어보았어?” 이에 화련선자(火蓮仙子)가 가쁜 숨소리를 내면서 가까스로, “허헉, 언니. 저도 물어보았는데 해남파(海南派)의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은 중원인이 넷, 독룡림(毒龍林)의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하던데요. 중원인들은 그리 두렵지 않지만, 그래도 독룡림의 사람이라면 조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대로 왔지요.” “뭐라고? 아니, 아까 사부님한테는 그저 이곳을 찾아온 상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광전선자(光電仙子)의 놀라 소리치는 소리에 화련선자(火蓮仙子)가, “언니도 참. 어떻게 사부님께 사실대로 말해요? 허헉, 그랬다가는 당장 되돌려 보내라고 그러실 텐데. 우리가 그동안 별 볼일 없는 놈들만 상대하다보니, 얼마나 내력과 정기(精氣)가 강한 놈이 그리웠는데?” “네 말대로 그동안 거의 허탕 치면서 지내 잡아온 놈들도 몇 안 되었어. 게다가 쓸모없는 놈들이 대부분이어서 바로 노예로 팔아먹은 것이 거지반이야. 하지만, 그래도 사부님을 속인 것은 큰 잘못이야.” 선화선자가 화련선자를 바라보고 말한다. 이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백만선자(白漫仙子)가 놀라서, “언니, 혹시 그들이 소문에 비무행을 한다는 그 중원인들이 아닐까요? 그들도 독룡림(毒龍林)의 고수가 하나 끼어있다고 들었는데.” “정말? 얘, 화련(火蓮)아. 너 똑바로 대답해봐라. 설마 백만(白漫)의 말대로 그들인 것은 아니겠지?” 선화선자(善花仙子)가 선상조의 마혈을 눌러 한쪽으로 치우면서 화련선자(火蓮仙子)를 강제로 일으켜 앉히면서 말한다. 이에 화련선자가 중간에 멈춘 것에 아쉽고 화가 나서 한동안 말을 않다가, 주위에서 계속 재촉하자 숨을 고르면서, “나도 잘 몰라요. 이놈을 잡아와 데려와서 대충 이름과 가족관계를 물어보았을 뿐이에요. 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저 누구누구인지만 물어보았지요. 그리고 언니들도 지금까지 즐기기에 바빠 자세히 물어볼 시간이나 있었나요 뭐?” 이에 다른 세 선자가 모여서 당황한 얼굴로 서로 바라보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오랜만의 즐거움에 빠져서 화련선자(火蓮仙子)가 데려오자마자, 모두 달려들어 욕구를 푸는 데에만 빠졌던 것이다. 한동안 깨끗이 씻긴 후에 여러 정력에 좋다는 약과 정기를 최고로 북돋우게 하는 약을 먹이고, 거의 두 시진이 넘도록 오랜만의 탐닉에 빠져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만일 사부인 금화선고(金花仙姑)가 사실을 안다면 모두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고, 화련선자는 독형(毒刑)에 처해지거나 내공이 전폐된 채 노예로 다른 곳에 팔려나갈 지도 몰랐다. 게다가 소문대로라면 고무족의 일에서 보듯이, 단지 몇 사람이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인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아니 너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앞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면 어떡하자는 것이냐?” 선화선자(善花仙子)가 화련선자(火蓮仙子)를 바라보면서 소리친다. 그러자 화련선자가 자신들도 여태까지 즐겼으면서 딴소리한다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에 선화선자가 화가 나서 손을 들어 올릴 때, “진정하세요, 언니. 이미 벌어진 일인데. 그보다 언니,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요. 우선 저놈을 정신 차리게 하여 확실하게 알아보죠. 그 다음에 어떤 방도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광전선자(光電仙子)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동의하여 선상조를 앞으로 끌고 와서 자세히 물어본다. 얼빠진 표정으로 물어보는 대로 답하는 선상조의 말이 계속될수록 사선자 모두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되어갔다. 이들이 이렇게 물어보고 있을 때, 급하게 석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여니 이들에게는 제자뻘이 되는 여인이 하나 들어서서 발가벗은 이들의 모습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사고(師姑)님들. 누군가 동굴로 들어와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답니다. 곳 본부에도 가까워질 것 같은데 혹시라도 입구를 찾을까봐 불안해서 사조님께 말씀드렸더니, 사조께서 여러분 중의 한 분이라도 미리 가셔서 지키도록 명하셨습니다.” 다급하게 쏘아대는 소리에 사선자(四仙子)가 당황하다가, 아무래도 일이 커진 것 같아서 모두 옷을 걸치고 바로 뛰쳐나간다. 모두 뛰쳐나가 혼자 남아있던 여인이 실내를 둘러보다가 침상위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선상조를 보면서, “호호호, 이게 웬 횡재야. 흐훗. 사고들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잠깐 즐기고나 갈까? 어차피 누가 알지도 못할 텐데, 호호호.” 말과 함께 옷을 벗고 선상조에게 달려든다. 이윽고 실내는 음란한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다시 열기가 피어오른다. 한편 일행이 한줄기 불빛에 의지해 동굴로 들어선 지도, 거의 반 시진이 지나 자정(子正)을 넘기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은 계속해서 갈라지고, 여러 곳으로 함께 연결되는 곳이 곳곳이어서 확실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동굴의 폭도 줄어들어 일 장(丈)을 넘기는 곳도 드물어서 더욱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젓은 옷이 달라붙어 걸을 때마다 질척거리고, 차가운 기운을 전하는 것이 더욱 기분 나쁘고 초조하게 했다. 특히 선상조에 대한 걱정으로 음구의와 웅정향은 초조한 기색으로 연신 사방의 벽을 두드리면서 전진하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빈 공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두드리는 벽에서 나는 소리와 일행의 발걸음 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려서 되돌아오는 가운데, 모두가 희미한 횃불에 의지해 사방을 주시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제기랄. 모두가 똑 같아 보여서 도대체 어디가 어딘 줄 모르겠구만. 이렇게 하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은데.” 공손고가 변함없이 계속되는 광경에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끼고는 말한다. 다른 이들도 매한가지여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동안 떠들었다.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단리유아가, “기(祁)노선배님. 혈적서(血摘鼠)가 정확한 위치를 찾지는 못하겠지만, 만일 금화선부(金花仙府)가 이곳에 있다면 틀림없이 자주 다니는 통로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여인들이라면 품속에 사향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을 테니, 향기도 은연중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까 생각한대로 한번 혈적서를 풀어놓아서, 그런 곳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리유아의 조용한 말에 음구의와 웅정향도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초조하고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벽을 두드리거나 눈으로 이상한 곳을 찾기만 했던 것이다. “소사숙님의 말이 맞습니다. 당황하여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분명히 그런 곳이 있을 것입니다. 선배님, 이정도로 깊이 들어왔다면 금화선부(金花仙府)도 가까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 번 혈적서(血摘鼠)를 풀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음구의의 말에 기혼사가 손뼉을 침과 동시에 웃음 지으며, “흘흘, 이제야 자네들도 혈적서의 가치를 알아보는 모양이군. 클클, 나도 이 정도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네. 그러면 한번 풀어보도록 하지.” 말과 함께 품속에서 혈적서(血摘鼠)를 꺼내어 뭔가 중얼거리다가 풀어놓는다. “클클, 이제 이 녀석이 찾아갈 것이네. 일단 사향 같은 특이한 향기가 나는 곳만 찾도록 했으니, 우리는 이 녀석을 놓치지 않고 뒤쫓기만 하면 되네. 흘흘흘. 내 사랑스런 적하(赤霞)야, 어서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봐라. 어서.” 마치 딸을 부르는 듯이 다정하게 쥐의 이름을 말한다. 보통 때에는 그 소리에 모두가 두드러기가 났을 테지만, 지금은 어떤 소리보다도 듣기 좋게 들렸다. 일행이 한줄기 불빛에 의지해 빠르게 달리는 혈적서(血摘鼠)를 놓치지 않고 뒤따르기를 일각 정도 했을 때, 혈적서가 동굴의 한쪽 벽 앞에서 찌직거리는 소리를 지르며 멈춘다. 일행이 보기에는 전혀 다른 곳과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혈적서의 후각에는 무언가 틀린 것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기혼사가 혈적서를 거두어들이며, “흘흘, 잘했다. 사랑스런 적하야. 내 나중에 상으로 네가 제일 좋아하는 뱀을 잡아다 주마.” 이 말에 잠깐 일행의 시선이 혈적서(血摘鼠)를 향했다. 보통은 뱀이 쥐를 잡아먹는데, 이놈은 특이하게 뱀을 잡아먹는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극독을 지닌 대다가 어떤 동물보다 재빠르고, 신체도 단단하니 그럴 만도 했다. 잠시 일행이 생각하다가, 음구의가 벽을 두드리면서 단리유아를 보고, “소사숙. 아무래도 이곳이 이상한 모양인데, 소리가 다른 곳과는 약간 틀립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별로 특이한 점을 알 수 없군요. 어떻게 할까요.” 단리유아가 보기에도 이렇다 할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바닥에 희미하게 무언가 끌린 흔적이 보여서, 눈앞의 벽이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밖에서는 열 수 있는 기관이 없고, 내부에서 신호를 받아서 여는 것 같았다. “모두 잠깐 뒤로 물러서시오. 아무래도 강제로 파괴해야 할 것 같으니. 내 생각으로 두께가 일 척 이상이니, 파편이 뒤로 튈지도 모르겠소.” 말과 함께 일행을 뒤로 삼 장 이상 물러나게 한 후에, 검을 빼들어 검강(劍剛)을 형성한 후에 전방의 벽으로 날렸다. “콰쾅! 투투툭” 검강(劍剛)이 벽면과 부딪쳐 폭발하면서 방원 삼 척 정도의 구멍이 뚫렸다. 깨진 돌조각이 떨어지고, 먼지가 일어나 한동안 호흡하기에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자 상황이 자세하게 드러났다. 구멍으로 보이는 건너편의 닦여진 석도(石道)로 보아서 이곳이 금화선부(金花仙府)가 분명해보였다. 단리유아가 장력으로 나머지 부분도 깨뜨려 사람이 들어갈 만한 통로를 만든 후에 일행은 안으로 들어섰다. 삼 장 정도 통로를 따라서 들어가자 높이가 이십여 장(丈)인 드넓은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천장에 박힌 몇 개의 야광주와 사방에 박혀있는 여러 광석들이 동굴벽을 따라 꽂혀있는 횃불아래 반사되어, 공동의 정경은 어둡지 않고 오히려 대낮처럼 밝았다. 그런 불빛아래 드러난 광경은 거의 반경 백 장이 넘을 정도로 거대한 곳이었는데,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여러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갖가지 동물의 조각상과 날카롭게 형성된 지붕의 모습이 보였고, 정문으로 보이는 곳에는 양 옆으로 실물의 두 배에 해당하는 크기로 각기 벌거벗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조각이 네 개씩 늘어서 있었다. 일행이 통로를 벗어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선자(四仙子)가 십여 명의 제자들을 뒤로 하고, 놀라고 당황한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니 모두가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천으로 휘감듯이 신체를 감싸는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도 가리지 않고 드러낸 모습이었는데, 과연 기혼사의 말대로 천명에 하나 볼까한 미인들이었다. 단리유아와 기혼사를 제외하곤 모두가 넋이 빠져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클클, 이놈들아. 정신 차려. 이 계집들이 너희 동료를 데려갔을지 모르는데, 그런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테냐? 쯔쯧, 하여간에....” 그제야 얼굴이 붉어진 채 시선을 돌리지만, 다시 저도 모르게 여인들의 모습에 시선이 향했다. 그동안 남만(南蠻)에 와서 여자들을 본 적이 가끔 있었지만, 이 정도의 미인들은 본 적이 없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데다가 특징이 두드려져 자신들도 모르게 평소 자신의 취향대로 시선이 향했던 것이다. “모두 뒤로 물러서시오. 선(宣)사질이 잡혀가서 어떤 일을 당하고 있을 지를 생각하면서, 다들 정신을 차리도록 하시오.” 무심(無心)한 단리유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사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어서, 전에 들었던 미혼술(迷魂術)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신들도 어쩔 수가 없을 정도로 저절로 시선이 이끌렸던 것이다. 물러나는 일행을 뒤로하고 단리유아가 앞으로 나서서, “나는 단리유아라 하오. 이렇게 무례하게 난입하게 된 것에 우선 사과드리겠소. 하지만 우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사라져 급한 마음에 그런 것이니, 이해를 해주시면 고맙겠소. 만일 그대들과 상관이 없다면 충분히 배상하도록 하겠소.” 무심한 표정과 변함없는 어조로 중얼거리듯이 조용하게 말한다. 이런 단리유아의 기색을 바라보면서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사람들이 눈에 이채를 띄고 있었다. 자신들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온기 없는 조각상을 보는 듯이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때 화련선자(火蓮仙子)가 앞으로 나서면서, 아미를 치켜들며 화난 표정으로 한어(漢語)로, “무슨 소리예요? 누가 이곳에 왔다고. 흥, 무공이 좀 세다고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나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두드러지게 보였지만, 단리유아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은 죄송하게 되었소.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동료가 이곳에 없다면 충분한 배상을 하겠소. 그러니 잠시 우리가 이곳을 찾아볼 수 있게 해주겠소?” 이때 선화선자(善花仙子)가 앞으로 나서서, “무례하시군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렇게 다른 문파를 침입하여 강제로 문을 깨다니, 그대들은 예의도 모르나요?” 한없이 선량하고 순진한 모습으로 말한다. 이에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해서 단리유아가 잠시 어찌할 지 생각에 잠겼을 때, “클클, 이 계집들이 누굴 바보로 아나. 여보게,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나? 여기 이 귀염둥이 적하(赤霞)가 있지 않은가? 이 녀석이 여기서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흥! 이 계집들아. 좋은 말로 할 때, 선가 아이를 데려와라. 네년들이 내 즐거움을 데려가다니, 나부터 네년들이 맘에 안 들어.” 기혼사가 혈적서(血摘鼠)를 꺼내들어 보이면서 단리유아에게 말한다. 혈적서의 모습을 보자 사선자(四仙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도 혈적서가 어떤 것을 냄새로 찾는 데에는 따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오타와 오류 지적 요(要). ###### 유이드 님께 감사드립니다. 깜박 빼 먹었군요. 지적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금화선고(金花仙姑) 금화선고(金花仙姑) 4 기혼사의 말에 당황하는 여인들을 보면서, 일행도 여기에 선상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잠깐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있던 일행들도, 이런 생각이 들자 모두가 퍼뜩 정신이 나서는 다들 화가 난 표정으로 변했다. “이 계집들이 사람을 납치해 놓고 시치미를 떼? 당장 데려오지 않는다면 모두 쳐 죽이고 말테다.” 공손고의 외침과 함께, “상조는 어디에 있지? 어서 빨리 데려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음구의가 초조한 목소리로 다그친다. 일행이 이렇게 다 같이 욕설을 하면서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여인들에게 외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앞으로 나서서, “당신들 모두가 들었듯이, 우리 일행이 여기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오. 만일 일각이내에 이 앞으로 대령하지 않는다면, 이후에 발생하는 불상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당신들 책임이오. 당장 선사질을 데려오시오.”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이에 한동안 당황하던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여인들 중에서 광전선자(光電仙子)가 나서서, “호호호, 우리가 풀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살짝 입가를 가리고 웃으면서, 극성으로 연영미혼대법(然英迷魂大法)을 펼친다. 청량하게 울려나오는 목소리와 아스라이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눈빛, 입가의 미소가 얼굴 전체로 물결처럼 퍼져나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와 함께 바람에 살랑거리듯이 사뿐사뿐 걸어서 일행에게 다가오는데, 천상에서 나는 향기처럼 상대를 매혹시키는 향기가 은은히 퍼져 일행에게 밀려든다. 이들의 연영미혼대법(然英迷魂大法)은 미소와 목소리, 눈빛이 전체적으로 조화가 되고, 또 오랜 시간 정신을 단련하여 대법자체에 자신의 의지가 배어들게 된다. 또한 부수적으로 각자 독특한 체향이 전신에 스며들게 되는데, 이처럼 본격적으로 내력을 발산한다면 뿜어져 나와 자연스레 남자의 애욕(愛慾)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일단 대법에 걸려들게 된다면, 설혹 상대가 미혼술(迷魂術)을 펼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의지 자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항상 자신이 그녀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 여겨, 절대로 그녀들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광전선자(光電仙子)의 아름다운 모습에 일행이 또 다시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었다. 이때 기혼사가 뒤를 돌아보고 멍청한 눈빛으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일행을 보면서, “이것들이! 도대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만. 쯔쯧, 이렇게 의지(意志)가 약해서야 원. 야, 이놈들아. 어서 정신 차리지 못해!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줄도 모르고.... 이제 보니 이놈들은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구만.” 기혼사의 소리치는 소리에, 그제야 일행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한다. 이런 모습을 혀를 차면서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광전선자(光電仙子)를 보면서, “야, 이 빌어먹을 아줌마야! 네 나이가 몇이냐? 껍데기만 좀 젊어 보인다고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리고 당장 거기서 멈춰! 흥, 감히 누구 앞에서 독고(毒蠱)를 풀려고 해?” 광전선자(光電仙子)가 입가를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면서 허공을 격해서 독고를 날리는 것을 보고 소리친다. 팔을 휘저어 장력으로 바람에 실려 오는 독고를 쳐내면서, “모두 숨을 멈춰라! 이놈들은 일단 숨을 타고 몸으로 들어가면 뇌 속으로 올라가는 놈이라, 나중에는 강제로 제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니.” 광전선자(光電仙子)가 날린 것은 산정뇌심고(散精腦心蠱)라는 것으로 고충(蠱蟲)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것 중의 하나였다. 보통의 독고(毒蠱)가 뱃속으로 타고 들어가 자리 잡는데 반해서 이놈들은 상대의 뇌 속으로 파고들었다. 일단 들어가 자리 잡으면 보통 때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잠들어 있다가, 모고(母蠱)를 지닌 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깨어나 숙주의 뇌를 갉아먹었다. 그 고통도 문제지만 점차 기억을 잃고 백치가 되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뇌 속에서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 산정뇌심고와 더불어 해독불가능의 삼대고독(三大蠱毒)으로 삼세정인고(三世情人蠱), 흡혈반음고(吸血反陰蠱)가 있었다. 기혼사의 행동을 보고 정확히 어떤 곳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몰랐지만, 단리유아 또한 장력을 일으켜 공중에 난사했다. “퍼펑, 퍼펑!” 한동안 장력이 터지는 소리가 요란할 때, 광전선자(光電仙子)가 기혼사를 보면서 달려들며, “이 늙어빠진 쥐새끼가 일을 방해하다니, 그리고 뭐? 누가 아줌마라는 것이냐?” 자신의 일을 방해해서 그르치게 만든 기혼사에게 화가 나서 달려든다. 이에 기혼사가 비웃으면서, “그래, 그래. 난 늙어빠진 쥐새끼가 맞아! 하지만 네 년같이 다 늙은 주제에 겉으로만 아닌 척하는 사람은 아니지. 흘흘, 네 년의 사부도 나를 보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데 네까짓 계집이 혼자서 덤벼들어? 어디 혼 좀 나봐라.” 말과 동시에 달려드는 광전선자(光電仙子)의 공격을 피하면서 장력을 휘둘러 공격한다. 본래 기혼사와 금화선고(金花仙姑)는 오래전 옛날 한번 부딪친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녀가 누구인줄 몰랐던 기혼사도 거의 미혼술(迷魂術)에 넘어가게 되었다. 만일 품속에 넣고 다니던 여러 독물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금화선고의 발밑에 엎드리게 되었을 것이다. 금화선고가 품속에 파고들며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는데, 독물에 물려 기겁하여 소리치지 않았다면 기혼사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사실을 안 기혼사가 달려들어 금화선고는 거의 죽을 뻔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독고(毒蠱)를 쓸 수 없는 데에다 독에 중독되어 제대로 무공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지만 이후로는 오히려 금화선고가 피해 다녀야 했다. “퍼펑! 파팍” “흘흘, 그놈의 엉덩이 참 실팍하구만. 흐흐, 그곳만은 맘에 드는군. 아주 펑퍼짐한 것이 애들께나 나았을 것 같은데?” “철썩” 말과 함께 기혼사가 슬쩍 손으로 치고 물러선다. 이에 더욱 화가 나 씩씩대며 광전선자(光電仙子)가, “이, 이 빌어먹을 노망난 늙은이야. 평생 처녀로 지냈는데, 누가 애를 나았다는 말이냐. 오늘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차라리 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겠다. 이 지저분한 늙은 개야” “클클, 처녀라, 처녀? 흐흐, 정말인가? 시집만 안 갔다고 처녀인가? 흐흐흐, 그리고 좀 더 그럴싸한 욕을 해보게. 이거 오랜 만에 욕을 들으니 흥분되는 것 같은데?” 오히려 광전선자를 훑어보듯이 바라보면서, 비웃으며 약 올린다. 이에 광전선자가 광분하여 날뛰며 제대로 된 초식도 없이 달려든다. 한동안 옆에서 기혼사의 연신 놀리는 소리와 광전선자(光電仙子)의 화가 나서 뒤쫓는, 싸우는 것인지 장난을 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푸닥거리를 보다가 단리유아가 일행을 더 뒤로 물러나게 한 후에 도를 꺼내어 들었다. “크흐키아악!” “콰쾅!” 단리유아가 도를 휘두르니, 끔직한 도성(刀聲)과 함께 붉은 섬광(閃光)이 번쩍이며 일어난다. 날아간 도강(刀剛)이 한쪽에 방원 일 장(丈) 정도의 구덩이를 파이게 만들었다. 귀청을 떨어 울리는 도성과 폭음에 싸우던 두 사람도 떨어져 물러서고, 지켜보던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여인들도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장내의 모든 사람이 도성에 충격을 받았는데, 내력이 약한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제자들은 창백한 안색으로 입가에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일행도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아 뒤로 물러나 조식을 취했다. 단리유아가 도를 빼든 것은 이들의 미혼술(迷魂術)에 자꾸만 일행이 빠져들자 아예 그런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고, 이들 금화선부의 여인들에게는 확실한 무력을 보여주어 딴 생각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도를 다시 등 뒤의 도갑(刀匣)에 넣고는 창백한 안색으로 놀라서 바라보는 여인들을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가 일각의 시간을 주었는데, 어째서 계속 쓸데없는 수를 쓰는 것이오? 선사질을 데려와서 술법을 푼다면, 우리도 그만 조용히 물러서겠소. 그렇지 않고 계속 미혼술(迷魂術)이나 독고술(毒蠱術)을 쓴다면, 협상할 생각이 없다는 것으로 알겠소.” 단리유아의 말에 사선자(四仙子)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상의한다. 그렇지만 금화선고(金花仙姑)를 제외하고는 단리유아를 막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신들도 느낀 후라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들 넷이서 합공한다면 단리유아를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에 다른 제자들은 나머지 일행에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상조를 인질로 잡고 위협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눈앞의 이 인간만은 차라리 자신들을 다 죽이면 죽였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위협에 굴복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자신들의 미혼술(迷魂術)이 전혀 통하지 않는 데에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무표정한 사람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선상조를 그냥 풀어주자니, 그대로 물러설지도 의문이었다. 일단 자신들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제자를 안으로 보내 이곳의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이미 폭음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다들 깨어났겠지만, 그래도 자세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때까지 잠시 시간을 끌기로 결정하고 나서, 선화선자(善花仙子)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정말 일행을 풀어주면 그냥 물러날 것인가요?” “그렇소. 단,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야 하오. 만일 속여서 독고(毒蠱)를 썼거나 사술(邪術)을 걸어놓았다가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무심한 단리유아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저기 내력이나 정기(精氣)에 손상이 간 것은....” “뭐라고? 이런 빌어먹을 계집들이!” 화가 나서 크게 소리치는 음구의의 말에 이어 웅정향이, “소사숙. 이 계집들을 도저히 가만 둘 수 없습니다. 사제를 건네받는다면 이곳의 계집들을 모두 족쳐야합니다.” “그래, 내력은 몰라도 정기는 쉽게 회복되지 못할 것이네. 이참에 이런 사악한 곳은 없애 버려야하네.” 공손고까지 옆에서 거든다. 이에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면서, “난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오. 일단 그에 따른 대가는 받아야겠지만, 약속을 했으면 그대로 지킬 것이오. 그리고 우선은 선사질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나중에 다시 부딪친다면 모르지만, 지금 당장에 이들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오.” “흘흘, 맞네. 남자가 일단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으면,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지. 야, 이것들아! 여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조금 나아지니 그딴 소리나 하고 자빠졌냐? 쯔쯧, 얼굴 한번 두껍구만.” 기혼사가 옆에서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다가, 일행을 노려보면서 아니꼽다는 듯이 소리친다. 일행이 기혼사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투덜거린다. “이 자식들이? 너희들 나중에 나 좀 보자. 말을 하려면 대놓고 할 것이지, 뒤에서 궁시렁거리기나 해?” 바로 참지 못하고 기혼사가 일행을 노려보며 말한다. 모두가 찔끔한 표정으로 나중 일을 생각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당신도 들었을 테지만, 일단 선사질만 무사히 넘겨준다면 우리도 그대로 물러나도록 하겠소. 이것은 나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오. 기노선배, 선배도 보증해 주시오.” “클클, 나도 이 계집들이 맘에 안 들지만, 우선 그놈을 구하는 것이 순서이니 나도 보증하지. 이 계집들아, 난 앙화독령(殃禍毒鈴)이라는 사람이다. 들어본 적이 있지?” 기혼사의 말에 사선자와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제자들이 놀라서 웅성거린다. 그들도 금화선고(金花仙姑)가 얘기하는 것을 들어서 얼마나 괴팍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늙은이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까 기혼사에게 대들었던 광전선자(光電仙子)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이 되어 기혼사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흘흘, 그 노망난 할망구가 얘기는 제대로 했나보군. 나도 보증할 테니, 어서 그놈이나 데려와라. 너희 꼴 보기 싫은 계집들은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으니.” 이렇게 서로 얘기하고 있을 때,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여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클클,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이놈의 할망구는 다 늙어서도 이렇게 위세만 차리고 다니다니. 쯔쯧, 이제 관 속으로 들어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혼사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일행이 바라보니, 양쪽으로 각기 열다섯 명씩 늘어선 여인들 사이로 네 명의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거한들이 교자를 매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로도 삼십여 명의 여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가장 뒤쪽으로 두 여인이 비틀거리는 선상조를 양쪽에서 부축한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쪽의 삼십여 명은 바구니에서 갖가지 꽃잎을 뿌리고, 입으로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또 여인들은 모두 형형색색의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하나같이 보기 드문 미인들이었다. 게다가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있어서 시력을 집중한다면, 그대로 나신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네 명의 거한이 매고 있는 교자는 사방 일 장 정도의 폭과 반 장 정도의 높이를 가진 것으로, 곳곳에 춤을 추는 여인상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고, 주렴은 각종보석을 꿰어 영롱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저 계집들이? 소사숙, 저기 뒤쪽에 상조가 있는데, 불과 두세 시진에 불과한데도 얼마나 시달렸는지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보입니다. 으드득, 이 계집들을 정말!” 음구의가 이를 갈아 부치며 말한다. 일행도 이들의 거창한 행차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중에, 음구의의 말에 선상조를 바라보더니 서로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여인들을 욕한다. 이윽고 일행의 오 장 앞에서 행차가 멎은 후에, 여인들이 양쪽으로 각기 나누어 선 상태에서, 교자의 주렴을 걷으면서 한 여인이 내려섰다. 금빛의 천으로 전신을 감싼 이십대 후반의 여인으로, 여인으로서는 키가 큰 편이었고 머리는 틀어 올려 금과 은으로 조각한 꽃잎들로 장식하고 있었다. 또 이마 한 가운데에는 마름모꼴의 금강석 같은 형태로 금빛의 빈디야를 하고 있어서, 마치 신전의 벽화 속에서 튀어나온 사랑의 여신처럼 보였다. 여인이 내려서자 사선자(四仙子)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응접한다. 한참 뭐라고 이야기하다가 손을 휘둘러 화련선자(火蓮仙子)를 내리치더니, 다른 제자들을 시켜서 뒤로 데려가게 한다. 잠시 더 이야기하다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여인을 보다가 기혼사가 고개를 돌려, “클클, 여보게 단리소협. 저 여인이 내가 말한 금화선고(金花仙姑)일세. 흐흐흐, 그런데 저 늙은이는 오히려 더 젊어진 것처럼 보이는군.” 다시 고개를 돌려서, “이봐, 할망구.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변함없구만. 흘흘, 난 다 죽어갈 줄 알았는데.” “흥! 늪에 빠져 사는 어떤 못난이도 팔팔한데, 젊은 내가 먼저 죽을까 보아?” 다가오던 금화선고(金花仙姑)가 기혼사를 힐끗 보더니 냉소하면서 말한다. 다시 뭐라고 대꾸하려는 기혼사를 피해서 바로, “여보게. 그대가 이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단리유아라 합니다.” 보통 자신의 모습을 보면 절로 경애심을 느껴서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마치 목석을 대하듯이 무심하게 말하는 것에 금화선고가 잠시 멈칫한다. 무심한 단리유아의 목소리에 잠시 이채를 띄다가, “흠, 저 늙은이가 말했다시피, 본녀가 이곳의 주인인 금화선고(金花仙姑)라네.” 잠시 멈추었다가 고개를 돌려서 사선자를 보면서, “우선 제자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내가 사과하겠네. 자네 일행은 적절한 보상과 함께 돌려보내도록 하지. 그러나 마음대로 본부에 침입하여 문을 파괴한 것을 다른 곳에서 안다면, 이후로 본문이 어떻게 강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 그러니 나와 싸워서 이긴다면 자네 일행을 풀어주겠네.” “뭐라고? 이 늙은이가 보자보자 하니까, 옛날에 나한테서도 달아난 주제에. 뭘 잘 했다고 또 싸워 이기라는 소리야?” 기혼사의 말에 금화선고(金花仙姑)가 고개를 둘러보더니, “흥! 옛날 늙은이가 내 손에서 빠져나간 것이 천행이었지, 만일 그때 독에 중독되지도 않았다면 이미 백골이 되었거나 아직까지 내 발바닥을 핥고 있을 걸? 아니, 그 짜리몽땅 같은 몸을 보니, 곧바로 죽어 거름이나 되었을 것 같은데?” “이, 이 할망구가 정말? 여기서 다시 한판 해보자는 것이냐?” 금화선고(金花仙姑)가 기혼사를 훑어보며 비아냥거리듯이 말하자, 기혼사가 길길이 날뛰며 달려들려 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붙잡아 진정시켜 물러나게 한 후에, “싸우는 것은 좋은데, 그 쪽이 먼저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람을 함부로 납치해서 정혈(精血)을 고갈시켜 놓고, 다시 싸운 후에 데려가라는 것은 너무 몰염치한 짓이 아닙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금화선모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무슨 소린가? 아까 본녀가 사과하지 않았나? 그리고 보상도 하겠다고 했잖은가?” “흥, 곧 죽어도 늙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군.” 옆에서 기혼사가 이죽거린다. 한동안 서로 노려보다가 금화선모가 고개를 돌려, “자네는 본녀가 우리의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라는 것인가? 흥, 그렇다면 나도 더 할 말이 없네. 이런 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전통인데, 여자가 남자를 좀 데리고 논다고 무슨 큰일이라는 것인가? 게다가 저 사람이 좋아서 따라온 것인데.” “논점을 회피하시는 군요. 저 선사질의 상태가 그저 논 것으로 보이십니까? 게다가 누가 좋아서 따라갔다는 것입니까? 그대들의 미혼술(迷魂術)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쉽게 따라가겠습니까?” 단리유아가 전혀 동요 없이 무심하게 말한다. 이에 금화선모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흥! 자네는 우리의 미혼술(迷魂術)이 그렇게 시시한 것으로 보이나? 우리의 미혼술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매력과 같아서, 설혹 우리가 저 사람을 풀어준다고 해도 자네들한테 돌아가려하지 않을 걸?” “그러면 제가 깨어나게 만든 후에, 물어보아서 사술에 끌려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금화선고(金花仙姑)의 호언장담에 단리유아가 바로 묻는다. “좋아, 그러면 우리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본녀가 시인하지, 되었나?” “좋습니다.” 금화선고가 손짓으로 선상조를 데려오게 하면서, “아, 한 가지 사실을 말하지 않았군. 이 자의 머릿속에는 이미 산정뇌심고(散精腦心蠱)가 있어서 지금 풀어주어 보았자, 자네들로서는 어쩔 수 없을 걸세. 혹시라도 그냥 달아날 생각은 말게.” 단리유아가 다가온 선상조를 보니, 얼굴이 피폐한데다가 눈은 광채를 잃어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단리유아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보리광명심(菩提光明心)을 일으켜 선상조의 머리위에 손을 올린 상태로, “갈(喝)! 그만 깨어나시오, 선사질.” 선상조의 심혼을 뒤흔들며 동시에 손바닥으로 두정(頭頂)을 내리쳤다. “퍽. 턱” 선상조가 잠시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다가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들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아니, 사숙조.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는?”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본다. 선상조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이제 정신이 드시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오? “음, 술을 마시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아, 그런데 그녀는 어디 갔습니까? 호루, 호루. 어디 있소?” 다행히 정신은 차렸지만, 금화선고의 말처럼 먼저 여인부터 찾는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그딴 아줌마나 찾아? 정신 차려, 이 자식아.” 기혼사가 달려들어 연신 뺨을 후려치며 소리 지른다. 그래도 화련선자(火蓮仙子)만 찾는 선상조를 보면서, 단리유아도 이들의 수법이 보통이 아님을 느꼈다. 기혼사를 떼어내고 선상조의 수혈을 집으면서 전음으로, ‘선배님, 여기서 산정뇌심고(散精腦心蠱)를 해독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다른 독고(毒蠱)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당장 여기에서 해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네. 본림에서 준비가 갖추어진 상황이라면 모르지만. 또 설사 우리가 그냥 데려간다고 해도 저쪽에서 독고에 명령을 내리면, 바로 죽거나 백치가 될 것이네.’ “흥, 아무리 독룡림(毒龍林)의 독술이 뛰어난다 해도 당장에는 어쩔 수 없을 걸.” 금화선고(金花仙姑)가 한쪽에서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전음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냉소하며 말한다. 다시 이어서, “미혼술(迷魂術)을 깨뜨려서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본녀도 대단하다고 보네. 하지만 이제 자네도 알았다시피 우리의 미혼술은 결코 사술(邪術)은 아니라네. 내력과도 별 상관없이 오로지 상대를 매혹시킬 뿐이야. 이제 승복하겠지? 자, 어서 싸우기나 하세.” 이에 단리유아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선상조는 한쪽으로 물러나게 한 후에, 검을 빼들고 앞으로 나섰다. [설정 & 참조] [1] 삼대고독(三大蠱毒) : 산정뇌심고(散精腦心蠱), 삼세정인고(三世情人蠱), 흡혈반음고(吸血反陰蠱)로서 해독불가능의 고독. 삼세정인고는 음양고(陰陽蠱)의 일종으로, 본래 사랑하는 연인간의 죽음에도 변치 않을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일단 한쪽이 죽으면 상대도 바로 죽게 되는 고독임. 흡혈반음고는 흡혈고(吸血蠱)의 일종으로, 일단 몸속에 들어가면 숙주의 혈관을 따라 돌면서 계속 번식하게 되는데, 숙주의 피를 완전히 빨아먹을 때까지 번식함. 단, 여자의 몸에서는 효과가 없이 남자의 몸에서만 움직이고, 일단 퍼지기 시작하면 치료할 수 없음. ******* 너무 길어져, 오늘은 여기까지 올리지요. 오타와 오류가 보이시면 댓글에 써주세요. ##### 푸르메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애욕이 가장 낫게 보이는군요. 감사드립니다. 푸우짱 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찾기 힘드는데, 찾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금화선고(金花仙姑) 금화선고(金花仙姑) 5 단리유아가 나서자 일행과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여인들이 각기 뒤로 물러서 십여 장(丈)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싸우기에 앞서 단리유아가, “선고(仙姑), 싸움이 끝나면 누가 선사질의 고독(蠱毒)을 해독할 것입니까?” “흥! 무슨 걱정인가? 내가 해독할 수 있고, 나머지 사선자(四仙子)도 해독할 수 있는데. 혹시라도 내가 잘못될까 그러나? 호호홋, 처음부터 나를 너무 무시하는군.” 이미 승부는 해보나마나일 것이라는 듯한 단리유아의 태도에, 금화선고(金花仙姑)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말이 끝나자마자 달려든다. 양 손목에 감긴 금빛의 천을 풀러 공격하는데, 길이가 이 장이 조금 못되고 폭은 세치 정도로서, 바람에 날리는 천처럼 너울거리며 단리유아를 향해서 다가왔다. 이 무공은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최고무공으로 일곱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진 비천쌍봉채대법(飛天雙鳳彩帶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손목에 감긴 한 쌍의 금봉채대(金鳳彩帶)로 펼치는 것으로, 그 재질이 금잠사(金蠶絲)로 이루어져 웬만한 신병이기에도 끊어지지 않는 데에다 순간적으로 길이와 방향의 변화가 심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공 중의 하나였다. 먼저 제일초인 쌍봉비상(雙鳳飛上)의 일식으로 공격하여 단리유아의 목을 노렸다. 너울거리며 다가오는 한 쌍의 채대(彩帶)를 바라보다가 단리유아 역시,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금화선고(金花仙姑)의 오른쪽으로 다가서면서, 검을 빼들어 연속으로 채대를 향해서 삼검을 날렸다. “퍼퍽. 퍽” 검광이 치솟으며 채대(彩帶)의 측면을 쳐내었지만, 부드럽게 휘날리며 검의 충격을 흡수하고, 오히려 검을 감싸묶으려는 듯이 휘어지면서 다가왔다. 단리유아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서면서 다시 검을 휘둘러, 한줄기 검기를 날려 이번에는 금화선고(金花仙姑)의 목을 노렸다. “팟” 다가오는 검기(劍氣)에 흠칫하더니, 오른손의 채대를 끌어당겨 벽을 만들고 왼손의 채대로는 계속 단리유아를 공격했다. “퍼퍽” 이에 단리유아 역시 다시 검을 변화해서, 상대의 채대(彩帶)를 쳐내야만 했다. 휘어지고 접혀졌다가 다시 펴지며 공격하는 것이 너무 자유로워, 연속으로 검을 휘둘러 막아내야만 했다. 구름 같은 검영(劍影)이 떠올라 다가오는 채대와 연이어 부딪쳤다. 굉파산란(宏波散瀾)으로 해남삼십육검(海南三十六劍)의 일초였다. “파파팍. 퍼퍽” 연이어 검(劍)과 채대(彩帶)가 부딪칠 때, 다시 금화선고(金花仙姑)가 채대를 변화시켜서 공격한다. 한 쌍의 채대가 번갈아 가면서 공격하는 것으로, 쌍봉취란(雙鳳取卵)의 일초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연이어 한 쌍의 채대가 공격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금봉(金鳳)이 공격하듯이 자유자재로 변화해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휘리릭. 휘익” 단리유아 역시 더 이상 뒤로 물러서면 뒤쪽이 벽이어서, 계속해서 수세에 몰릴 것을 알고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면서 공격했다. 전신을 검영(劍影)으로 뒤덮어 상대의 채대와 부딪쳐나갔다. 천로혈전검(千路血戰劍)의 일초로, 철저한 실전위주의 검법으로 유명했던 혈광막(血狂幕)의 무공이었다. 이들 혈광막의 검법은 접근전에서 더욱 무서운 위력을 발했는데, 특별히 정해진 초식이 없이 전신을 검으로 감싸서 상대에게 접근하여 살초를 날리는 것이었다. “퍼퍼퍽, 파다닥. 파팟” 검영(劍影)이 일어나서 연이어 채대와 부딪쳤다. 현란하게 허공을 수놓는 채대(彩帶)와 검광(劍光)이 장내를 뒤덮는 가운데 두 사람은 치열한 격돌을 벌이고 있었다. 검기(劍氣)와 채대에 형성된 기가 부딪쳐 사방으로 날리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더 거리를 벌려 물러나야만 했다. 이렇게 서로 공방을 계속하면서 싸우는 것이 어느덧 반 시진이 넘게 흐르고 있었다. 금화선고(金花仙姑)가 이제까지 싸운 결전 중에서, 이렇게까지 그녀를 곤란하게 한 상대가 없었다. 미혼술(迷魂術)에 제압되지 않았다 해도, 대개는 마음이 흔들려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리유아에게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오직 본신의 무공만이 두 사람의 승부를 가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실전(實戰)의 경험이 풍부한 단리유아에게 이렇게 채대에 기를 둘러서 공격하는 것은 큰 이득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몇 번이고 치명적인 살수를 펼칠 기회가 왔음에도, 단리유아가 물러나서 별다른 상처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단리유아가 살심을 품었다면 이미 승부는 끝난 지 오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단리유아 역시 산정뇌심고(散精腦心蠱)에 걸린 선상조를 구하기 위해서는 금화선고(金花仙姑)에게 크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단지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스스로 물러서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히려 지쳐서 패배하게 될 것을 알고, 금화선고는 비천쌍봉채대법(飛天雙鳳彩帶法)의 후반 삼초를 펼칠 결심을 했다. 전 사초와는 달리 오직 강기(剛氣)를 바탕으로 펼치는 것으로 금화선고 역시 최근에야 연성한 것인데, 금화선부의 역사상 이를 완벽하게 익힌 것은 처음이었다. 대개는 무공보다 미혼술(迷魂術)에 심력을 쏟아서, 후삼초는 연마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단리유아의 공격을 물리쳐 뒤로 물러나게 하고는, 채대를 접어서 반으로 줄인 후에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채대에 강기(剛氣)를 형성해 허공을 격하고 휘두르니, 채대가 풀려나감과 동시에 두 마리의 금빛 봉황새 같은 강기가 나타나 단리유아를 향해서 공격해 들었다. “끼이익.” 새 울음소리와 비슷한 봉명(鳳鳴)이 들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강기(剛氣)를 보면서, 단리유아 역시 검강(劍剛)을 형성해서 공격해 들어갔다. 될 수 있는 한 상처를 입히지 않고 끝내려 했지만, 상대가 강기를 펼쳐서 공격하는 이상 단리유아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먼저 요동마도(遼東魔刀)와 싸운 후에 천애구검(天涯九劍)을 보완하고자 만들었던, 천보검법(天補劍法)의 제일초 천반폭(天盤爆)을 펼쳐 마주쳐나갔다. 곧이어 허공에서 두 개의 금빛 강기와 반자 정도의 원형의 강기가 부딪치며 폭발했다. “콰쾅. 퍼펑” 강기(剛氣)가 흩어져 사방으로 난사해 땅바닥을 연신 파헤치고 있었다. 흙먼지가 뒤덮여 시야를 어지럽힐 때, 물러났던 두 사람은 다시금 부딪쳐갔다. 단리유아 자신은 큰 피해가 없었지만, 부딪치면 전방으로 폭사되는 천반폭(天盤爆)의 특성 때문에, 금화선고(金花仙姑)는 전신 곳곳에 상처를 입은 대다가 내상도 입게 되었다. 자신이 뒤진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금화선고가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한 쌍의 금봉채대(金鳳彩帶)를 휘둘러 공격해갔다. 비천쌍봉채대법(飛天雙鳳彩帶法)의 제육초로 쌍봉쟁선(雙鳳爭先)이라는 초식인데, 두 마리의 금봉황(金鳳凰)이 서로를 희롱하듯이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단리유아을 덮쳐갔다. “끼이이익” 봉명(鳳鳴)과 함께 덮쳐오는 상대의 공격을 보면서, 단리유아 역시 검을 휘둘러 풍벽사(風壁絲)를 펼쳤다. 회오리 같은 검강(劍剛)이 허공을 수놓으면서 한 쌍의 금봉황을 덮쳤다. 금봉황이 부리로 쪼듯이 다가오는 검강을 마주쳐 없애려 하지만, 그 수와 회전력에 밀려 오히려 점점 흩어져버렸다. “콰콰쾅! 꽈쾅” 연이어 부딪치는 강기에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또한 부딪쳐 흩어지는 강기(剛氣)가 사방으로 튀어서 땅바닥을 헤집었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기겁해서 피하거나 막고 있었다. 한동안 소란이 진정되고 허공을 뒤덮었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서로가 십여 장(丈)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었는데, 단리유아의 모습은 옷자락이 찢어지고 약간의 외상을 입은 상태로 보였고, 금화선고(金花仙姑)는 창백한 안색으로 입가에 피를 흘리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옷도 거의 조각이 난 상태여서, 몸의 대부분이 드러나 하얀 속살과 함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피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더 견디지 못하고 금화선고가 고개를 숙이며, 한 모금 죽은피를 뱉어냈다. “선고(仙姑), 그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승부는 났다고 보는데.” 무심한 표정으로 단리유아가 물어본다. 이에 상처를 보고 놀라서 곁으로 다가오려는 삼선자를, 손을 흔들어 물리치고 나서, “본녀도 아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맥없이 패한다면 이후의 본문은 어떻게 될 것 같나? 내가 살아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죽은 후에는 큰 문제가 될 것이네.” “하지만, 더 무리한다면 선고(仙姑)의 내상은 더욱 치료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에도 금화선고가 입술을 깨물며, “아직까지는 버틸만하네.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 될 것일세. 자네도 주의해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할 때, 금화선고(金花仙姑)가 숨을 들이켜 내기를 진정한 다음 다시 채대를 휘둘러 공격해갔다. 이번 공격에 모든 내력을 끌어올린 듯이 순간적으로 얼굴에 혈기가 돌았다. 손을 내저어 금봉채대(金鳳彩帶)를 날리면서, “가랏!” 말과 함께 두 개의 채대가 서로 꼬여서 하나의 봉황의 형상을 이루며 단리유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끼이이익” 봉명(鳳鳴)과 울리며 금빛 봉황 형상의 강기(剛氣)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덮쳐왔다. 단리유아가 보니 이기어검강(以氣御劍剛)의 일종으로 보였는데, 금화선고(金花仙姑)의 수준으로 볼 때 이런 무공을 펼친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아무리 범위가 좁고 방향의 전환이 자유롭지 못한다 하지만, 이 초식 자체는 최소한 화경(化境)의 끝자락에 달한 자만이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금화선고(金花仙姑)의 공격을 보면서, 단리유아 역시 검을 휘둘러 만적붕(萬滴崩)을 펼쳐 공격해 들어갔다. 검강(劍剛)이 연이어 일어나 나선형을 이루어 회전하면서 금빛의 봉황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두 가지의 강기가 부딪칠 때, 검강이 동시에 봉황의 몸통부분을 향해서 부딪쳐갔다. “끼이이익” “콰쾅! 꽈르릉 꽝” 애처로운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봉황이 검강(劍剛)의 공격에 폭발해서 사라져갔다. 가장 중심을 한꺼번에 두드리니, 얼마가지 않아서 강기가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두 가지의 강기가 서로 부딪쳐 폭발하는 소리가 사방을 떨어 울렸다. 좁은 공동에서 그런 큰 폭발음이 들리니,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귓전을 파고드는 소리에 귀를 막고 얼굴을 찌푸렸다. 폭음과 함께 발생한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여인들이 놀라서 소리치며 금화선고에게 다가갔다. “사, 사부님.” “사조님.” “선고님.” 여러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삼선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금화선고(金花仙姑)를 부축해 일어나 앉혔다. 이미 금화선고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혈색이 없는 모습으로, 외상보다도 내상이 심각한 상태였는데, 완전히 정신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에 놀라 삼선자가 영단을 꺼내어 먹이고, 선화선자(善花仙子)가 등 뒤에서 운기를 해서 진기를 주입하는 등 한동안 부산한 상황이 이어졌다. 단리유아 역시 이번 공격에 무사하지 못해서 곳곳에 피가 흐르고, 약간의 내상도 입게 되었다. 하지만 금화선고(金花仙姑)에 비해서는 아주 경미하다고 할 정도였다. 금화선고는 이번의 공격에 잠원진기(潛元眞氣)까지 끌어올려 단리유아를 공격했던 것이다. 내상도 심해서 완치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특히 잠원진기의 소모로 인해 스스로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정혈(精血)을 빨아들여 보충하지 않는 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혈도를 눌러 지혈하고 호흡을 가다듬어 내기를 가라앉히고 있는, 단리유아의 곁으로 기혼사가 다가오며, “자네. 괜찮나?” “괜찮습니다. 내외상이 약간 있지만, 그리 심한 것은 아니니.” 기혼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휴, 정말 다행이군. 나도 저 할망구가 그런 수단을 쓸지 몰랐네. 세상에 잠원진기(潛元眞氣)를 끌어올리다니?” “정말로 잠원진기를 썼다는 말입니까?” 가까이 다가온 공손고도 놀라 다시 물어본다. 기혼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것 같네. 저 늙은이의 얼굴을 보니, 아까 전보다 갑자기 십수 년은 더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가?” 일행이 그 말에 금화선고(金花仙姑)를 바라보니, 과연 얼굴이 윤기를 잃고 하나둘 주름살이 보이고 있었다. “저 할망구가 왜 갑자기 잠원진기(潛元眞氣)까지 썼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내력은 소모되면 다시 되돌아온다지만, 잠원진기는 다시 보충할 수 없는 것인데. 허참!” 일행이 이렇게 단리유아의 안부와 금화선고(金花仙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반 시진 정도가 지나서 금화선고가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려는 금화선고를 삼선자가 만류할 때, “그만 두거라. 죽을 정도는 아니니, 일을 마저 끝내야지.” “허나 사부님. 상처가 너무 심하옵니다. 사부님께 이런 심한 상처를 입히다니. 으드득, 차라리 저놈들을 기습해서 다 죽여 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백만선자(白漫仙子)가 이를 갈면서 말한다. 이에 금화선고가 혀를 차면서, “쯔쯧.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 생각이 없는 게냐? 그들을 다 죽여서 어쩔 텐데? 그리고 너희들이 보다시피 저 사람은 나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강한 사람이야. 오히려 너희들이 떼죽음 당할 것이다. 나와 싸울 때도 최선을 다한 것 같지 않던데.” “하, 하지만. 사부님께서 잠원진기(潛元眞氣)까지 쓰셨는데....” 광전선자(光電仙子)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에 금화선자(金花仙姑)가 제자들을 둘러보면서, “너희들도 보았다시피 미혼술(迷魂術)이 별로 효과가 없는 사람들도 있단다. 이 좁은 남만(南蠻)에서야 드물 테지만, 천하로 보았을 때에는 부지기수일 것이다. 본래 본문은 신을 모시는 신녀들이 모여서 호신을 위해서 무공을 익혔지. 미혼술은 신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자 한 것이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본문은 무공은 등한시하고 미혼술에만 매달리게 되었단다. 게다가 너무나 육욕(肉慾)에 매달려서 본분을 잊어버리게 되었어.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런 면이 더 크지.” 잠시 숨을 가라앉히고 다시, “나도 젊었을 때는 너희들과 비슷하게 남자들을 잡아들여 노는데 시간을 보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단다. 이렇게 하다가는 얼마 안가서 비록 신께 버림받지 않더라도 점점 타락해서 자멸하게 될 것이 뻔히 보이더구나. 너희들도 이제부터라도 신께 헌신하고, 무공에 좀 더 매진하도록 해라. 솔직히 너희들의 무공은 너무 보잘 것 없어서 내가 죽는다면 어찌될지 정말 걱정이다. 남자들을 잡아들여 즐기는 것은 내 말리지 않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거라. 그렇지 않는다면 얼마안가 본문은 끝장이 날 것이다.” 묵묵부답으로 생각에 잠긴 제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리유아에게 다가왔다. 삼선자도 뒤따라 일어나 금화선고(金花仙姑)를 쫓는다. 가까이 다가온 제자들을 보다가 백만선자(白漫仙子)에게, “너는 우선 저 사람을 해독시켜라. 약속은 지켜야할 테니. 그동안 나는 이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눌 테니까.”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머뭇거리는 백만선자(白漫仙子)에게 몇 번 재촉하여 선상조의 고독(蠱毒)을 해독하도록 한 후에, “자네에게 했던 대로 저 사람을 해독시켜 주겠네. 그리고 보상으로 저 사람의 내공을 다시 보충할 수 있도록 영단을 주도록 하겠네.” 단리유아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습니다. 그런데 미혼술(迷魂術)에서 깨어나도 여자를 찾던데, 그것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휴, 그것은 우리도 어쩔 수 없다네. 내가 말했다시피 사술이 아닌 이상, 무공만으로는 깨뜨릴 수 없다네. 저자의 의지력과 시간에 달렸다고 봐야지.” 이에 기혼사가 끼어들어서, “클클, 할망구. 이제야 좀 사람다워 보이는구만. 전에는 정말 늙지도 않는 괴물 같았는데. 흐흐, 그런데 도대체 잠원진기(潛元眞氣)까지 끌어올려 쓴 이유가 뭔가?” “흥, 늙은이가 무슨 상관이냐? 저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면서. 다 본문을 위해서 한 일이니까 노망난 늙은이는 신경 쓰지 마.” 기혼사를 바라보면서 냉소하며 금화선고(金花仙姑)가 말한다. 발끈해서 다시 대꾸하려는 기혼사를 말리면서, 음구의가 걱정스런 얼굴로, “선고(仙姑), 내력이야 영단을 먹는다면 얼마 안가서 회복할 수 있을 테지만, 정기(精氣)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벌써 나이보다 몇 년은 늙은 것처럼 기운이 없던데.”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따로 할 말이 없네. 앞으로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고 정양해야 할 것이라는 말 밖에는. 정히 그렇게 걱정되면 저 사람에게 일생동안 편히 살 만큼의 보화를 주도록 하지.” 금화선고(金花仙姑)가 음구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자신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에 공손고가, “아니, 그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소? 사람을 납치해서 그렇게 만들었으면....” “호호호, 그럼 어찌하라는 것인가?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흥, 내가 자네들이 두려워서 이러는 줄 아는가? 다 본문을 위해서 이렇게 양보할 뿐인데.” 금화선고의 말에 일행이 얼굴을 찌푸리고 서로 투덜거릴 때, “빌어먹을 놈 같으니. 내버려둬.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일 테니. 제 놈이 따라가서 그런 것이니, 자업자득이지. 그보다 어서 여기서 떠나기나 하자. 정말 암내가 풀풀 날려서 골치가 지근거리니.” 기혼사가 말과 함께 금화선고(金花仙姑)를 노려본다. 이에 금화선고도 서로 노려보다가 냉소와 함께 고개를 돌려버리고 상대를 하지 않는다. 잠시 이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백만선자(白漫仙子)가 와서 해독이 끝났음을 알린다. 단리유아가 기혼사를 보면서 확인을 부탁하고는, “선고(仙姑), 선사질이 별 이상이 없다면 약속대로 우리도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네. 나도 저 사람에게 줄 영단을 준비하도록 하지.” 잠시 후 기혼사가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리자, 단리유아와 일행은 다시 동굴을 나섰다. 일행이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묘시(卯時:5-7시)초에 이르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의 고생에 비해서 일행이 얻은 것이라고는 음구의의 등에 업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선상조 뿐이었다. [설정 & 참조] [1] 혈광막(血狂幕) :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낭인들의 대부와 같았던 문파로서 수백 년의 역사와 위명을 드날렸던 정사중간의 대문파였음. 혈수미교(血修彌敎)와의 싸움에서 문파의 고수들이 실종된 이후로 점차 쇠퇴해서 현재는 일개 중소문파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었음.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이 본거지로서 최고무공은 천로혈전검(千路血戰劍). ******* 오타나 오류가 보이는 분은 댓글에 달아주세요. ###### 삼생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상하게 자꾸 그런 부분에서 오류가 생기네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밀석궁(千密石宮) 천밀석궁(千密石宮) 1 금화선부(金花仙府)에서 돌아온 일행은 우선 정오가 될 때까지 각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선상조는 수혈이 집힌 채로 음구의가 곁에서 지키기로 했고, 단리유아는 외상에 약을 바르고 운공을 통해 내상을 치료했다. 정오가 지나 일행이 대청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을 때, 선상조도 깨어나 음구의의 부축을 받으며 탁자로 다가왔다. 얼굴이 반쪽이 된 대다가 피부도 윤기를 잃어 푸석푸석한 모양인 선상조를 보면서 일행이 걱정에 찬 소리로 한두 마디 말하고 있을 때, 기혼사가 낄낄거리며, “흐흐흐, 어때? 간밤에 계집들 육림(肉林) 속에 파묻혀 지내본 소감이?” 기혼사의 말에 선상조가 기억을 하려고 하지만, 어젯밤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화련선자(火蓮仙子)의 모습만 계속해서 뇌리에 떠오르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소. 그보다 구의, 호루(呼累)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이 얼빠진 행동에 공손고가 분통이 터져서, “새벽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그러더니, 도대체 호루(呼累)가 누구냐? 너 때문에 지금까지 쓸데없이 고생한 것만 해도 이가 갈릴 지경인데, 또다시 그딴 계집이나 찾아? 이 빌어먹을 자식아!” “쾅!” 탁자를 내리치면서,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선상조를 가만둘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에 음구의와 웅정향이 양옆에서 붙들어 공손고를 말릴 때, 선상조가 오히려 얼굴을 붉히고 큰소리로 다시,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소? 그딴 계집이라니? 얼마나 아름답고 다정한 여인인데....” “이 자식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헛소리네. 야, 이 정신 나간 놈아. 아직도 어제 일이 생각나지 않느냐? 네놈이 그 여자를 따라갔다가 그 모양 그 꼴이 됐는데도 계속 그렇게 주둥아릴 놀릴 테냐?” 공손고의 말에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평소와 너무 다른 몸 상태에 놀란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내력도 절반에도 못 미치고, 왜 이렇게 자꾸 어지럽지? 여보게, 구의.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세히 말해보게.” “클클, 이놈아. 어제 일이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느냐? 흘흘, 그 고생을 하고도 여인들과 놀아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기혼사가 옆에서 이죽거린다. 기혼사의 말에도 선상조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일행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쯔쯧. 안됐군, 안됐어. 어제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구만. 이 계집들이 나중에 무슨 수를 쓴 것 같은데? 흘흘, 계집들과 놀아나 황홀경에 취했던 기억이 나지 않다니 정말 안타깝게 됐구만. 흐흐흐, 정신이 붕붕 뜨는 듯한 기분이었을 텐데. 비록 나이가 오십이 다 되었을 것이지만 겉보기로는 스물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 계집들이 달려들었으면.... 으흐흐.” 계속해서 약 올리는 듯한 기혼사의 태도에 일행이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상대 해보았자 자신들만 손해라는 것을 알고. 음구의가 선상조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휴우, 자네가 어제 여인을 따라간 후에 우리가 찾아 나선 것이 저녁을 먹으려는 시간이었네.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한참을 헤매다가, 그 여인들이 있는 금화선부(金花仙府)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지났을 무렵이었지. 그 여인들과의 협상을 통해, 소사숙께서 금화선고(金花仙姑)와 싸워 이겨서 자네의 고독(蠱毒)을 풀고 이렇게 되돌아오게 되었다네. 우리가 조금만 늦었어도 자네는 이렇게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네. 겨우 두세 시진 남짓 동안에 몸 상태가 그렇게 되었으니. 그러니 그런 요물(妖物) 같은 계집은 잊도록 하게.” “저, 정말 그녀가.... 호루(呼累), 당신이....” 음구의의 설명에 선상조가 넋을 잃고 중얼거린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간다. 음구의가 따라가지만 뿌리치고 혼자서 자신의 방에 들어가 방문을 잠가버렸다. “휴, 사제가 충격이 큰 모양이군. 비록 성질이 급해서 탈이지만, 아직까지 남에게 직접 해를 입힌 적은 없었는데.” 웅정향이 되돌아오는 음구의를 보다가 탄식하며 말한다. 공손고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냥 혼자 두어도 괜찮으려나 몰라? 혹시라도 다시 그 여인을 찾아간다고 애먹이지나 않을지?” “흘흘, 지금 당장에라도 창문을 통해서 그 여인을 쫓아갈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 기혼사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자, 음구의가 놀라서 다시 되돌아가려 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됐소, 음사질. 아직까지 방밖으로 빠져나간 기척은 없으니, 잠시 혼자 있게 내버려둡시다.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머물며 선사질이 회복되기를 기다릴지, 아니면 차라리 길을 떠나 이곳에서 멀리 벗어날지.” “소사숙. 제 생각에는 이곳에 오래 머물수록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무리를 해서라도 계속 남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웅정향의 의견에 음구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몸이 지쳐 녹초가 된다면, 그 여자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골아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시일이 흐르다보면 잊혀 질지도 모르지요. 단지, 상조에게는 첫사랑과 같았을 터인데 마음에 큰 상처가 남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쯔쯧, 정말 재수가 없었던 모양이구만. 하필 그런 여자에게 혹하다니. 바보 같은 놈, 그렇게 이곳에서는 여자를 조심하라고 일렀는데도....” 음구의의 말에 공손고가 혀를 차며 말할 때, 옆에서 기혼사가 얼굴 가득 조롱기가 번진 표정으로, “흘흘흘, 너희들도 똑같아. 뭐, 어젯밤에 보니 다들 정신을 못차리더구만. 너희도 혼자 있을 때, 그년들이 접근했다면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 것 같으냐? 클클, 단지 저놈이 더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기혼사의 말에 다들 창피해서 얼굴을 붉힌다.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맞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을 때, 단리유아가, “그러면 내일 아침에 바로 길을 떠나도록 하지요. 그런데 호안(湖岸)까지는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을 테고, 신법을 펼치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흘흘, 그냥 걸어서 가도록하지. 내력보다는 체력이 문제일 테니, 앞으로도 되도록 오래 걸어서 지치게 만드는 것이 좋겠네. 그래야 저놈도 딴 생각을 못할 테니.” 기혼사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일 때, “기선배님, 호안(湖岸)지역의 차리살납당(此離薩納堂)은 어떤 세력입니까? 강한 사람이 없다면 그냥 지나치고 싶은데.” “글쎄. 본래가 지하납골당에 모인 도굴꾼들이 모여 형성된 세력인데, 그놈들이 우연찮게 몇 가지 무공을 얻어서 강호(江湖)의 세력으로 발전한 경우라네. 나도 직접 싸운 적이 있어서 아는데, 장안법(障眼法)과 몇 가지 수법을 제외하고는 그리 대단치 않다네. 뭐, 자네 정도라면 그다지 문제가 없을 것이네.” 기혼사의 말에 일행이 잠시 의논하다가 곧바로 호안(湖岸)을 지나서 계속 남하하다가, 안남산맥(安南山脈)을 넘어 불과(岪跨)지역으로 향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헤어져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보충했고, 웅정향과 음구의는 선상조가 걱정이 되어서 교대로 지키기로 했다. 다음날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나 남하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아직도 폭우가 연일 계속되어서 걷는 데에도 힘이 들었지만, 선상조를 생각해서라도 일행은 머뭇거릴 생각이 없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내력과 정기(精氣)가 전과 같이 않은 선상조는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되어 바로 쓰러져 잠에 빠졌다. 말도 별로 없어져 기혼사의 장난에도 응하지 않고, 하루 종일 멍한 표정으로 발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일행이 그렇게 중부의 우기(雨期) 속에 천여 리를 걸어 안남산맥(安南山脈) 너머 불과(岪跨)지역에 도착한 것은 십이월 팔일이 되어서였다. 그동안 거의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한 덕분에 일행 역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특히나 선상조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내력이야 얼마 안가서 회복되었지만, 마음의 충격과 날마다 이어진 폭우를 맞고 걷다보니 큰 병이 들었다. 열이 너무 심해서 헛소리까지 하는 등, 하루 종일 혼수상태가 계속됐다. 불과에 머무르며 일행도 그동안의 노독을 풀고 선상조의 병도 치료했다. 도착한 다음날에 단리유아와 기혼사 단 둘이 괴리산사(傀離山舍)를 찾아 나섰다. 괴리산사는 남만(南蠻)에서는 유명한 유적(流賊)으로, 특별히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주로 불과(岪跨)지역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종횡하는 집단이었다. 그러나 둘이서 수소문해보니, 시월쯤에 중부의 우기(雨期)를 피해서 남쪽으로 원정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단리유아도 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며칠 머물면서 그동안의 여독을 풀고, 여정을 서둘다보니 미쳐 신경 쓰지 못했던 독공과 금화선고(金花仙姑)의 무공에 대해 생각하며 지냈다. 불과(岪跨)에 머문 지 열흘이 지났을 때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선상조도 정신을 차리고 열병에서 깨어나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는지 하루 종일 말이 없는 대다가, 전체적인 얼굴의 모습도 변해서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눈 밑에도 검푸른 그늘이 져 음침한 안색이 되었다. 그런 모습에 기혼사도 더 이상 장난치는데 재미를 못 느끼게 되어 하루 종일 안색을 찌푸리고 있었다. 우기(雨期)가 끝나 가는지 전과 같이 온종일 쏟아지는 폭우는 없었다. 점차 맑은 날이 이어졌는데, 이제는 다시 찌는 듯한 더위가 일행을 덮쳐서 숨 막히게 했다. 람파(濫巴)를 지나서 각멸(閣蔑:크메르)로 넘어가 시통천(蓍洞踐)일대에 이르는 칠팔백여 리의 길을, 이전과는 달리 천천히 걸어서 갔다. 이따금 남만(南蠻)의 고수라며 찾아오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단조롭고 지루한 여정이 이어졌다. 미공하(湄公河:메콩강)의 동쪽에 자리 잡은 시통천에 일행이 도착한 것은 원단이 지난 지 며칠 안 되는 날이었다. 강변을 따라 형성된 큰 마을인 시통천(蓍洞踐)은 원단이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인지 아직도 들뜨고 밝은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강변을 따라 수상가옥이 연이어져 있었고, 배 자체에 집을 만든 떠돌이 배라 불리는 크고 작은 배들이 수 없이 들어서 있었다. 들고 나는 배들과 사람들이 소리치는 장면이 바라다 보이는 한 객관에 머물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일행이 대화를 나누었다. “소사숙, 길을 서두르다보니 원단이 지나간 줄도 몰랐습니다. 정말 세월이 빠르군요. 저희가 본문을 떠날 때가 일월의 마지막 날이고, 남만(南蠻)에 들어선 것도 이월 중순이 지났을 때였는데, 벌써 일 년 가까이 되었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웅정향이 활기차 보이는 강변의 정경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이에 공손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휴, 정말 일도 많고 탈도 많은 나날이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군. 지나고 보니 그리 힘들게 보이지 않는데, 왜 그리 처음에는 괴롭고 어렵게만 느껴졌었는지....” “아마 저희가 이런 지형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그동안 날씨나 풍토병, 더위나 밀림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계속 겪다보니 이제는 익숙해져 그리 힘든 줄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음구의가 옆에서 덧붙여 말한다. 잠시 일행이 그동안의 여정(旅程)에 대해서 돌이켜보다가 다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했다. “기노선배님. 여기 시통천(蓍洞踐)까지는 별 탈 없이 왔는데, 여기에 있다는 무산루(巫刪樓)라는 세력은 어떤 곳입니까?” “흠, 이곳 각멸(閣蔑) 지역도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세력이 융성한 곳이지. 그렇지만 임읍국(林邑國)처럼 천축과 흡사한 모양은 아니네. 자신들에 맞게 변화시켜서 독특한 면이 많다네.” 각멸(閣蔑)은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세력이 강성하지만, 임읍국(林邑國)과는 여러모로 다른 바가 많았다. 특히 왕이 왕인 동시에 바라문교의 수장을 겸하고 있는 제정일치(祭政一致) 형태의 나라였다. 그래서 왕권이 유독 강했고, 그 아래의 집권층을 제외한 하층민의 계급은 그다지 구별이 없었다.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발달했고, 바라문교의 세력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불교(佛敎)의 세력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클클, 이곳 사람들은 단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네. 이곳의 무산루(巫刪樓)도 약간 그런 면이 있는데, 본래는 바라문교(婆羅門敎)와 토속신앙이 결합한 형태의 종교집단이라 할 수 있다네. 그런데 약간 사이한 면이 있어서 사람을 죽여서 신께 바치는 의식이 있지.” 기혼사의 말에 일행이 깜짝 놀라서 쳐다본다. 이에 기혼사가, “흘흘, 왜들 그렇게 보나? 중원(中原)에서도 그런 단체가 있을 텐데? 게다가 이들이 무슨 사술(邪術)을 써서 강제로 죽이는 것도 아니고, 자원한 사람들 중에서 뽑힌 자들을 죽일 뿐이야. 오히려 그렇게 죽는다면 신(神)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인데. 클클, 설마 너희들의 잣대로 마음대로 속단하는 것은 아닐 테지?” “아,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너무....” 공손고가 놀란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그래도 너무 끔찍하다는 듯이 말한다. 이에 기혼사가, “흥! 너희들도 이런 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을 걸?” 일행이 그래도 납득가지 않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 바라보고 있자, “클클, 너희들은 잡혀가 죽지 않을 테니 아무 걱정마라. 원하지 않는 자를 죽였다간 부정 타서 신벌(神罰)을 받게 된다고 믿는 이들이니.” “그보다 선배님, 그들의 무공은 어떻습니까?” 단리유아가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행을 대신해서 말을 돌린다. “자네는 허구헌 날 무공밖에는 모르는군. 클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구만?” 기혼사의 말에도 단리유아가 묵묵히 바라만보고 있자, “쯔쯧, 돌덩이 같은 사람이로구만. 하여간에 질문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흠, 나도 여기 무산루(巫刪樓)의 고수와는 싸운 적이 없다네. 싸우고 싶지도 않고. 워낙 지독한 놈들이라 하나가 당한다면 다 죽을 때까지 달려들걸? 나라면 무산루의 미친놈들과는 절대로 싸우지 않을 것이네.” “흠, 그 정도입니까? 그러면 다시 서진해서 천밀석궁(千密石宮)까지는 가야한다는 것인데. 무산루가 주로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들어본 적은 있으십니까?” 단리유아가 기혼사의 말에 비무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는 무공에 대해서만 묻는다. “클클, 직경이 이 척 정도 되는 철환(鐵環)을 반으로 나눈 다음 날을 세운, 특이한 반월형의 둥근 칼을 사용한다고 들었지. 게다가 회선도(回旋刀)의 수법도 포함되어있다고 해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공중의 하나라 알려져 있다네.” “정말 특이한 무공일 것 같은데, 상대해보면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기혼사의 말에도 단리유아가 비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다는 듯이 말한다. 다들 단리유아를 한 번 쳐다보다가 기혼사가, “흘흘, 정말 무공에만 신경 쓰는구만. 무산루(巫刪樓)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고 앞으로의 천밀석궁(千密石宮)에 대해서나 얘기하세. 어차피 여기 미공하(湄公河)를 넘으면 보름이내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그러면 천밀석궁은 어떤 세력입니까?” 단리유아가 마지못해 말한다는 듯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천밀석궁에 대해서 말한다. “흠, 천밀석궁(千密石宮)은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승려들이 머무는 곳으로 유명하다네. 이곳 각멸(閣蔑) 지역의 수도인 연수사(沿愁思:앙코르) 근처에 있는데, 총 인원만 천 명이 넘는 대세력이라네. 본문과 비교해도 그 세력이 뒤떨어지지 않지. 북쪽의 백상사(白象社)와 함께 남만에서는 삼대세력으로 불리는 곳이지.” “그러면 고수들도 많겠군요?” 음구의가 옆에서 끼어들어 물어본다. 기혼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뭐, 고수들의 숫자만 따진다면 삼대세력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지. 무공의 특성도 천축(天竺)의 영향을 받아서 권장(拳掌)이 뛰어나고 외공(外功)이 발달한 곳이라 할 수 있네.” “문파의 성향은 어떻습니까? 설마 이곳 무산루(巫刪樓) 같이 사악한 곳은 아닐 테지요?” 공손고가 옆에서 다시 물어본다. 고수의 숫자가 너무 많아 비무하다가 잘못된다면, 빠져나오기도 힘들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기혼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한동안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이 자식은 꼭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네. 무산루(巫刪樓)가 사이한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무슨 사악한 술법을 쓰는 곳은 아니야. 그리고 천밀석궁(千密石宮)은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세력으로, 보통 수행자들이 무리지어 있는 곳이란 말이다. 나도 그들과는 안면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아, 아니, 저는 단지 걱정이 돼서....” 쩔쩔매는 공손고를 보면서, “흥, 네놈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뿌리박혀 있지 않는 이상, 그런 말이 계속 그렇게 튀어나올 것 같아? 너 이따가 나 좀 보자.” 주눅 들어 울상인 공손고를 안됐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일행은 다시 일정에 대해 논의 했다. 일단은 내일까지 쉬며 그동안의 여독을 풀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미공하(湄公河)를 건너 연수사(沿愁思)까지는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 앞에 천석밀궁을 천밀석궁으로 바꿨습니다. 이것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요. 오타와 오류가 보이면 댓글에 휘갈겨 써주세요. ###### 삼생님의 말처럼 어색한 곳이 보이네요. 수정했습니다. 천밀석궁(千密石宮) 천밀석궁(千密石宮) 2 다음날 일행이 하루를 더 머물며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길을 재촉해 팔백여 리 떨어진 연수사(沿愁思)에 도착한 것은 일월 십팔일의 저녁 무렵이었다. 오후에 한 차례 쏟아진 소나기로 간만에 선선한 날씨를 보이는 가운데, 밀림을 통과해 한쪽에 서있는 야자수와 논밭을 따라 한동안 걸으니, 이윽고 이국적인 풍물을 자랑하는 거대한 도시의 모습이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도시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일행들 모두 도시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성문을 들어가는 다리 양옆으로 세워진 각각 오십사 개의 악마와 신의 조각상에서부터 멀리 내성의 중앙에 보이는 황금빛 첨탑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새겨진 부조와 조각상들을 보면서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로 임읍국(林邑國)의 신전과 왕궁이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이루어져 아기자기한 면이 많은 반면에, 연수사(沿愁思)는 붉은 빛이 도는 사암을 쌓아서 만든 것으로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과 함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비록 중앙의 왕궁과 그 주위를 둘러싼 사원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서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장대한 건축물에 감탄하고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거리도 온통 사람들로 북적여 발 디들 틈도 없을 정도였다. 중원의 어느 도시보다도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고, 이때까지 들렸던 어느 곳보다 번화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소사숙, 이렇게 웅장한 석조 건축물은 중원(中原)에서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큰 도시가 남만(南蠻)에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길을 걷다가 주위의 모습에 놀라 웅정향이 감탄하며 말한다. 옆에서 걷던 공손고도 마주 오는 사람들을 피하며 역시 감탄한 얼굴로, “휴, 나도 기선배의 말을 듣고도 설마 했는데. 정말 이런 도시가 밀림이 주위를 둘러싼 한 복판에 있다니, 보고 있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군.” 일행의 놀란 표정에 기혼사가 웃으며, “클클, 여기로 각멸(閣蔑)의 수도가 옮겨온 지 이제 백오십여 년 남짓할 뿐이네. 지금도 계속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고,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지.” 연수사(沿愁思)의 모습은 중앙에 자리 잡은 삼십여 장(丈)의 해자로 둘러싸인 왕궁과 사원들이 위치한 내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도시는 아직도 확장되고 있는 중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곳곳에 신전과 사원들이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복장도 특이해 대체적으로 머리는 틀어 올려 묶고 하반신만을 가리는 옷을 대충 걸치고 있었다. 단지 그 위에 어깨가 드러나는 한 가닥의 천을 더 두르고 있을 뿐으로 거의 벌거벗은 모습과 비슷했다. 기혼사의 말에 한동안 일행이 연수사(沿愁思)의 모습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성문에서 가까운 대로변의 한 객관을 찾아 들어섰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헤집고 지나가기도 힘들어 멀리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객관에 들어 먼저 대충 씻고 나서, 별채에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한동안 연수사(沿愁思)의 풍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단리유아가 기혼사를 바라보면서, “기선배님. 천밀석궁(千密石宮)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흘흘, 여기에서 북쪽으로 오십 리 정도 더 간 밀림 속에 있다네. 여기 연수사(沿愁思)보다도 더 오래된 곳으로 벌써 그곳에 위치한지 삼백여 년 정도에 이르지. 본래는 그곳으로 수도를 옮길 생각이었는데, 너무 숲이 우거져 애로점이 많았지. 게다가 수원에서 멀리 떨어져 물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흠, 내 생각으로는 늦어도 내일 저녁에는 도착할 것으로 보이네. 그곳의 궁주와도 안면이 있으니, 우리가 찾아가면 박대는 하지 않을 것이네. 아마 자네의 비무 상대로는 궁주의 사제가 나올 것이네. 철루존자(鐵壘尊子)라는 사람으로 평생을 무공의 연마에 바친 사람이지. 자네하고 좋은 승부가 될 것이네. 사실상 남만(南蠻)에서는 가장 강한 인물일 것이라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니. 자존심 상하지만 본문의 림주(林主)도 독공을 쓰지 않는 한 상대가 안 된다고 자인할 정도라네.” “그 정도로 강한 사람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제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한다. 그동안 괴리산사(傀離山舍)나 무산루(巫刪樓)에서는 비무를 하지 못하고 지나친데다, 찾아오는 남만(南蠻)의 고수들도 얼마 없어서 아무래도 지루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기혼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말할 때, 웅정향이 궁금한 얼굴로, “기선배님. 대체 어느 정도 고수이기에 남만(南蠻)에서 제일 강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실제 지금까지 부딪친 고수 중에 단리유아 혼자 만난 만사괴요(萬邪怪妖)와 휼리파(恤狸把)를 제외하고는, 일행을 놀라게 할 만한 고수는 자령독제(紫靈毒帝)와 금화선고(金花仙姑)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기혼사도 화경의 고수로 자신들보다 강했지만, 워낙 장난이 심해서 고수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글쎄? 내가 직접 싸우는 것을 보지 못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과거 남만(南蠻)의 내놓으라하는 고수들이 모여 비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전혀 무명의 인물이었던 철루존자(鐵壘尊子)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꺾고 최강자가 되었지. 본림의 림주(林主)도 그때 싸웠는데, 아깝게도 삼백초를 못 넘기고 패하고 말았지. 뭐, 독공을 썼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테지만. 그게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니, 지금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네.” 기혼사가 생각에 잠겨 말할 때 음구의가, “십여 년 전에 처음 명성을 날렸다면, 지금도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을 것 같군요?” “그래, 이제 마흔이 못 되었다네. 본래 천밀석궁(千密石宮) 전대궁주의 막내제자로 들어간 인물로 현 궁주와도 나이차가 상당하지. 나도 몇 번밖에 본 적이 없어서 속단하기 어렵지만, 조금 이상한 면이 있어서 꼭 반쯤 미친 것 같아 보이더군. 자네도 싸울 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철루존자(鐵壘尊子)에 대해서 기혼사가 말한다. 듣고 있던 공손고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에 걱정이 되어서, “여보게, 단리소협. 꼭 비무를 해야 하겠나? 그런 사람과 싸우다가 중상이라도 입는다면 큰일이 아니겠나?” 주위의 일행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재고해보기를 바란다. 이에 일행을 둘러보면서 단리유아가, “흠, 싸우다보면 이런 저런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저것 다 고려하다간 될 일도 안 될 것입니다. 하여간에 그 정도의 고수라면 저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절대로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클클, 정말 이번 싸움은 볼 만 하겠군. 그놈도 이상한 구석이 있는데다가 자네도 그에 못지않으니. 흐흐흐.” 기혼사만이 음충스럽게 웃으며 자못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다른 일행들이 한동안 기혼사를 쏘아보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잠시 더 천밀석궁(千密石宮)과 철루존자(鐵壘尊子)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다음날 일찍 출발하기로 하고 각자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행은 다시 연수사(沿愁思)의 북쪽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북쪽의 천밀석궁(千密石宮)으로 향하는 길은 한쪽은 강을 따라 농경지가 연이어 펼쳐져 있었고, 반대로 서쪽은 밀림으로 뒤덮인 구릉이 연이어져 있었다. 길을 따라 야자수가 심어져 있었고, 마을 마다 크고 작은 사원들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는 이방인들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이 되지만, 곧 신경을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일과에 열중했다. 그렇게 주위의 풍광(風光)을 바라보면서 걸음을 옮긴 지 반나절이 지났을 때, 일행은 방향을 바꾸어 밀림 쪽으로 향했다. 천밀석궁(千密石宮)은 이런 밀림 속으로 이십여 리가 들어간 지역에 있었는데, 폭이 일 장(丈) 정도에 이르는 한줄기 작은 도로가 강변의 마을까지 이어져 있었다. 수풀에 포위된 것 같은 좁은 도로를 한 시진 조금 넘게 걷자, 밀림으로 둘러싸인 천밀석궁의 모습이 일행의 시야에 드러났다. 주변을 둘러싼 구릉사이로 대략 사방 십여 리 정도 되는 분지에 위치한 천밀석궁(千密石宮)은, 중앙으로 보이는 세 개의 첨탑과 그 주위를 둘러싼 사원들, 다시 그 외곽으로 사원에 종속된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세 개의 탑은 각기 우주의 창조신인 브라마와 그 유지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에게 봉헌된 신전으로, 이들 천밀석궁(千密石宮)은 그중에서도 파괴신 시바를 주신으로 모시는 곳에 속했다. 시바신은 파괴의 신인 동시에 무용(武勇)의 신이고 또한 고행과 산의 신이기도 했다. 이런 특성으로 특히 이 시바신을 모시는 곳에서는 주술(呪術)과 무공이 발달하게 되었다. 천밀석궁의 인원은 대략 천여 명으로 그중에서 순수한 수행자들이 오백여 명이 넘고, 나머지의 사람들만이 무공과 주술을 익힌 경우였다. 그 외에 사원에 속하는 사람들만 이천여 명이 있었다. 일행이 사원주위의 마을을 통과해 사원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두 명이 다가왔다. 한줄기 천으로 어깨를 가로질러 몸통을 휘돌려 걸친 모습으로 다른 각멸(閣蔑)인들과 그리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옷의 색깔이 황색으로 통일된 것이 특이할 뿐이었다. 다가오는 두 사람을 향해서 기혼사가 몇 마디하자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하고는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문의 한쪽에는 칼과 삼지창을 든 채 해골들을 꿰어 목에 두른 검은 피부의 복수의 여신 칼리가 일행을 주시하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긴 창을 들고 여섯 개의 얼굴과 열두 개의 팔을 지닌 군신 스칸다가 공작새를 타고서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위의 신상들과 여러 부조물을 보면서 일행 모두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어 조심스럽게 기혼사를 따라 들어갔다. 이에 반해 기혼사는 이곳에 몇 번 온 적이 있어서, 마치 제 집을 찾아온 듯이 크게 웃으며 거리낌 없는 태도로 앞장서 일행을 안내했다. 잠시 후 일행은 몇 개의 건물과 문을 지나서 천밀석궁(千密石宮)의 본전에 해당하는 곳에 이르렀다. 그 폭만 해도 십여 장에 이르고 높이도 오 장 여에 이르는 삼층의 석조건물이었다. 기혼사의 안내를 받아 대전에 들어서니, 사면을 따라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신들과 신화가 마치 튀어나올 것처럼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전내에는 지면과 오 척 정도 되는 높이에 위치한 석단에 각기 양측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칠 척 정도 높이의 상단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주름진 얼굴과 흰 수염이 무성한 노인이 역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기혼사가 노인의 모습을 보고 반갑게 다가가더니 크게 웃으며, “껄껄껄, 철광(鐵光). 이거 오랜만이네 그려. 아마 십년 가까이 되어가는 것 같구만.” 노인은 천밀석궁(千密石宮)의 궁주로 철루존자(鐵壘尊子)의 사형이기도 한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라는 인물이었다. 철광대존자가 반쯤 감긴 듯한 눈을 치켜 올리면서,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이곳에까지 다 왔나? 이제는 다른 세상에서나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정말 기운도 좋구만.” 느릿느릿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귀찮다는 듯이 대꾸한다. 이에 기혼사가 정말 맘에 안 드는 목소리라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어째 자네의 목소리는 맨 날 그 모양인가? 갈수록 늘어지는 것 같구만. 쯔쯧, 정말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또다시 짜증나게 만드는군. 게다가 자네는 내가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로구만? 십년 만에 보는데다 이렇게 귀한 손님도 데려왔는데?”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자네의 성격도 보통이 아닌 주제에. 게다가 누가 찾아오라고 간청이라도 했나?” 전혀 달갑지 않다는 듯이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가 대답한다. 기혼사가 고개를 흔들면서, “휴, 그만 두자, 그만 둬. 네놈하고 말싸움하는 내가 미친놈이지. 젊었을 때부터 말싸움으로 유일하게 이기지 못한 놈이니. 그보다 여기 이 사람들과 인사나 하게. 중원에서 이 먼 남만(南蠻)에까지 찾아온 사람들이라네.” “이들이 그들인가? 한 참 소문이 무성한 그?”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가 일행을 주시하면서 기혼사에게 다시 묻는다. 이에 기혼사가, “클클, 자네도 소문을 들었나보군 그래. 여기 가운데 젊은 사람이 이들을 이끌고 있는 단리유아라는 사람이라네. 바로 고수를 찾아서 비무행을 한다는 사람이지. 여기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이고.” 기혼사가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에게 말한 후에 고개를 돌려, 궁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는 일행을 보면서 한어로, “여보게. 각자 인사하게. 이 다 죽어가는 듯한 늙은이가 이곳의 궁주인 철광대존자라네.” 단리유아가 기혼사의 말에 앞으로 나와 인사하며 일행을 소개한다. 한어를 모르는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가 옆의 기혼사가 설명하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만을 끄덕이며 인사한다. 다시 주위의 인물들이 기혼사의 통역을 통해서 일행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일어나지도 않고 가부좌의 상태에서 웅얼거리듯이 말하는 것을 보고, 일행의 안색이 점점 찌푸려져 갔다. “클클, 너무 신경 쓰지 말게들. 원래 이렇게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정석이니.” 기혼사가 일행의 눈치를 보고 이들의 관습에 대해서 설명한다. 잠시 서로간의 소개가 이어진 후에 철광대존자가 일행을 보면서 무어라 말한다. 기혼사가 알아듣지 못할 각멸어(閣蔑語)를 통역해 다시 일행에게 전한다. “흘흘, 다들 반갑다는군. 정말인지 모르지만. 이 늙은이가 원체 게을러터져서.... 흐흐, 그나저나 자네의 비무 요청에 대해서는 자신의 사제에게 기별을 넣어봐야 알겠다는군. 연공관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은지도 삼년 가까이 된다고 하네. 뭐, 내일 중으로 가부을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놈의 성격을 보았을 때 내 생각에도 거절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네.” 기혼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흠, 그러면 비무에 대해서 응해준다면 고맙겠다고 인사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 머물렀으면 좋을지도 여쭤봐 주십시오.” “소사숙, 기선배. 될수록 여기 사원 밖에서 머물렀으면 합니다. 여기 들어오니 주위의 분위기에 눌려서 마음이 편치 않군요. 너무 엄숙한데다 괴이한 면이 많아서 답답합니다.” 웅정향이 단리유아의 말에 덧붙여 기혼사에게 말한다. 나머지 일행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못해서 뻣뻣하게 굳어있는 인상이었다. 기혼사가 일행을 보면서, “흘흘, 다들 왜 그런 표정인가? 꼭 못 올 곳에 끌려왔다는 듯이? 흐흐흐.” 한동안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에게 다시 말을 전한다. 한동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다가 일행의 바램대로 비무 승낙이 떨어질 때까지는 사원 밖 마을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일행이 다시 철광대존자와 주위의 승려들에게 인사를 하고 사원을 나왔다. 사원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일행 모두 한숨을 내쉬면서 답답한 마음을 떨친다. “휴, 정말 분위기 한번 대단하구만. 신상과 벽화 때문인지 모르지만 완전히 숨 막힐 정도로 엄숙한 느낌이 들더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공손고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다른 일행들도 서로 이와 비슷한 느낌을 말하며 천밀석궁(千密石宮)을 본 소감을 말한다.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다가 기혼사가 고개를 저으면서, “쯔쯧. 도대체가 뭐가 그리 답답하다는 것인가? 자네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바라문교(婆羅門敎)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 정도는 아닐 것이야.” “기선배님, 제가 보기에는 일행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게 보입니다. 아마 천밀석궁(千密石宮) 전체에 주술이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엄숙함과 신에 대한 경배심을 북돋우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단리유아가 기혼사를 제지하면서 일행의 소감에 대해서 동조한다. 이에 기혼사가 놀라서, “주술(呪術)이라고? 그러면 왜 나는 여태까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 내가 이곳에 온 것만 해도 벌써 일곱 번에 이르는데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일행 역시 놀라서 단리유아를 바라본다. 자신들도 그것이 주술(呪術)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돌아다보면서 단리유아가, “아무래도 이것은 바라문교(婆羅門敎)에 익숙하지 않거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별 달리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신에 대한 암시를 통해서 믿음을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익숙한 사람은 별로 그런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단지 사원으로서 약간의 엄숙함을 내보인다고 생각할 뿐. 하지만 저희와 같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거부감을 느끼기에 특히나 그런 것 같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기혼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흠, 정말 그런가? 한 번도 그렇게는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그러고 보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약간 답답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마친다. 일단 일행은 천밀석궁(千密石宮)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마 비무한다면 빨라야 이틀 후나 되어서일 테니,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로 했다. 단리유아 또한 휴식을 취하며 그동안 생각해왔었던 독공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해보기로 했다. ******* 어제는 글을 올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매일 글을 쓰는데다 요즘에는 수정하랴 일러스트로 지도를 그리랴 밤을 새다시피 해서 넉 다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타와 오류가 보이면 바로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오리스터 님의 지적에 대해서 답변하겠습니다. [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 애로(隘路): [1] 좁고 험한 길. [2] 일을 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지점, 지장. 보시는 바와 같이 사전에 나온 말인데, 언제적부터 사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이것에 대해서 반론을 하실 분들은 댓글을 남겨주십시오. 정 어울리지 않다면 바꾸기로 할 테니. 천밀석궁(千密石宮) 천밀석궁(千密石宮) 3 이틀 후 천밀석궁(千密石宮)에서 연락이 와서 그 다음날 비무를 하기로 했고, 기혼사가 공증인으로서 철루존자(鐵壘尊子)와 단리유아의 비무를 인증하기로 했다. 그 이틀 동안 일행은 휴식을 취하며 기혼사와 함께 어울려 마을의 이곳저곳과 멀리 보이는 천밀석궁의 모습을 감상하며 지냈고, 단리유아는 홀로 머물러 심신을 가다듬으며 그동안 생각해왔던 금화선고(金花仙姑)의 채대법과 독공을 연구하며 보냈다. 독공(毒功)에 대해서는 여정(旅程) 중에도 간간히 기혼사의 도움을 받아 대강의 틀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독의 발출보다는 흡수와 해독에 중점을 두고 만든 것이었다. 실제 자신에게는 그리 독공의 필요성이 없어서, 단지 중독되는 문제에 있어서의 해독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자신의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이 해독하는 데에 있어 다른 심법보다 뛰어나다지만 완전히 독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의 예에서 보듯이 해독시키는 양과 시간보다 중독된 독기가 많고 강하다면 중독을 피할 수 없었다. 회공독결(回空毒訣)이라 이름 지은 이 구결은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의 해독구결보다 그 해독 속도와 양에 있어서 세배이상 뛰어났다. 회공독결을 심법상의 해독구결과 대체할 생각이었지만 어려운 점이 많았다. 아무래도 아직 완벽히 완성되지 않은데다가 다른 회정결, 구전회혼결과 충돌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함으로, 해독구결을 대체해서 회공독결을 포함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일단은 시간을 가지고 더 수정을 가해서 완벽한 구결로 만들어야 했다. 금화선고(金花仙姑)의 채대법에 대해서는 불과(岪跨)지역에 머무를 때 잠시 연구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그동안 상대해보았던 채대법 중에서 백화장(百花莊)의 백화무류채대법(百花舞柳彩帶法)과 더불어 쌍절을 이룰만한 무공으로 보였다. 백화무류채대법이 수비적인 요소가 많은데 비해서, 금화선고의 비천쌍봉채대법(飛天雙鳳彩帶法)은 보다 더 공격적인 면이 강했고 그 공격범위에 있어서도 더 넓었다. 또 공격중의 변화에 있어서도 백화무류채대법보다 뛰어나다고 생각되었다. 채대법을 기억하는 대로 완성해보았지만 그 변화를 다 알아차릴 수 없어서 부족한 면이 많이 보였다. 그동안 여정(旅情) 중에도 틈틈이 일 장(丈) 길이의 천을 가지고 연습해왔는데, 비쩍 마른 큰 키의 단리유아가 양손에 움켜쥔 천을 휘젓는 것을 보면서 일행이 다들 어울리지 않고 괴상해 보인다고 했었다. 단리유아가 무공을 연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보기에 썩 좋지 못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어떤 미친놈이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행이 안색을 찌푸리며 마음에 들지 않아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채대법(彩帶法)을 완성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여인들이 익힐 만한 무공 중에서 이러한 채대법보다 더 적합한 무공은 드물다고 느꼈다. 다른 검(劍)이나 편(鞭)을 익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실 선천적으로 체력이 강하지 않은 여인에게 있어서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부드러움을 바탕으로 하는 무공이나 음공(音功) 같은 것을 익히는 경우, 실전에서도 보다 유리하고 또 더 빨리 상승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이런 무공을 연구하는 이유도, 이런 무공을 직접 연구하다보면 나중에 다시 부딪칠 때 보다 손쉽게 상대의 공격에 대해 대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에도 계속 수련하며 연구해왔지만 완전하게 만드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단순히 금화선고(金花仙姑)의 채대법을 흉내 내는 데에 그친다면 이미 충분하다고 할 정도였지만, 자신이 만족할 정도로 완성되어 자유자재로 펼쳐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의 연구와 수련이 필요했다. 일월 이십이일, 비무날이 되자 사시(巳時:9-11시)초에 일행 모두는 다시 천밀석궁(千密石宮)으로 향했다. 일행은 아직도 그리 내키지 않는 불편한 안색으로 두 개의 신상이 지키는 입구를 지나 천밀석궁의 본전으로 들어섰다. 이미 본전에는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를 비롯한 천밀석궁의 사람들이 자리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의 옆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석단에 기대어 서있었다. 철루존자(鐵壘尊子)로 보였는데 산발한 머리와 가끔 눈에서 광기(狂氣)가 드러나 일행의 심경을 더욱 위축시키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육척이 넘어 보이는 큰 키에 한 조각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얼굴도 온통 지저분한 수염으로 뒤덮여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잠시 서로간의 안부와 소개가 이루어졌는데, 단리유아와 철루존자(鐵壘尊子)는 보자마자 서로가 호적수임을 알아차렸는지 서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클클, 정말 맞수끼리 만난 모양이로구만. 그만 서로 노려보고 인사부터 나누게. 단리소협, 이쪽이 내가 말했던 그 철루존자라는 사람이라네.” 기혼사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옆에서 끼어들어 말한다. 기혼사의 소개로 서로 통성명을 하고나서 바로 비무장으로 향했다. 일행 모두 철루존자(鐵壘尊子)의 기세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되어서 단리유아를 뒤따랐다. 비무장은 천밀석궁(千密石宮)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 삼백여 장 떨어진 밀림 속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 다른 수행자들의 수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궁에서 벗어난 곳에 임시로 비무장을 마련한 것 같았다. 사방 삼십여 장의 공터로 급하게 만들었는지 한쪽에는 베어 넘긴 나무와 풀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땅바닥도 나무뿌리를 제거하고 바닥을 골랐는데, 뒤집힌 지 얼마 안 된 것을 보여주듯이 아직도 검붉은 흙빛이 남아있었다. 각기 동편과 서편으로 일행과 천밀석궁(千密石宮)의 인물들이 자리 잡고, 기혼사와 더불어 단리유아, 철루존자(鐵壘尊子) 만이 중앙으로 향했다. 기혼사가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허흠, 그만 서로 바라보고 나부터 좀 보게나.” 각기 한어와 각멸어로 말한 다음 먼저 단리유아를 향해서, “자네도 느꼈다시피 이 사람의 무공은 보통이 아니네. 그래서 말인데, 어느 정도까지 싸울 생각인가?” “저야 별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때처럼 중상이 아닌 이상 멈추지 않고 싸울 생각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다시 철루존자(鐵壘尊子)를 향해서 물어본다. 철루존자가 목이 쉬고 갈라터진 듯한 목소리로, “기선배, 어서 싸우기나 합시다. 선배가 중단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싸울 작정이니.” 기혼사가 철루존자의 껄끄러운 목소리에 안색을 찌푸리다가 다시 두 사람을 향해서, “그러면 두 사람 중의 한쪽이 패배를 시인하거나 내가 중지하지 않는 한 계속 싸우기로 하세.” 기혼사의 말과 함께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누고 거리를 벌인다. 이를 보고 기혼사가 비무 시작을 알리고 북쪽으로 물러섰다. 잠시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가, 먼저 단리유아가 검을 빼들어 상대를 공격해나갔다. “호풍광사(呼風狂沙)” 철루존자(鐵壘尊子)의 오른쪽으로 돌면서 상대의 옆구리를 노리면서 검을 날렸다. 감숙성(甘肅省) 끝자락에 위치한 풍사문(風沙門)의 광사검법(狂沙劍法)으로 회오리치듯이 검영(劍影)이 일어나 상대를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휘리릭.” 검광(劍光)이 일어남과 동시에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검영(劍影)을 보면서, 철루존자(鐵壘尊子) 또한 단리유아의 오른쪽으로 향하며 나아가며 공격해갔다. “바라천수화하(婆羅千手化河)” 천개의 손이 나타나듯이 수영(手影)이 허공을 뒤덮으며 단리유아의 검세에 부딪쳐갔다. 천밀석궁(千密石宮)의 무공 중에서 바라천겁수(婆羅千劫手)의 일초였다. 특별한 외공을 익혔는지 검기를 둘러싼 공격에도 직접적으로 손을 부딪쳤다. 본래 손에 경력을 실어서 쳐낸다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손을 부딪치는 공격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천밀석궁의 외공 중에서 철루금갑공(鐵壘金甲功)을 완벽히 터득한 이가 바로 철루존자(鐵壘尊子)로, 신병이기가 아닌 이상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파파팡. 퍼퍽” 수영(手影)과 검영(劍影)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서로가 공방을 계속하며 스쳐지나갈 때, 철루존자(鐵壘尊子)가 오른 발을 축으로 곧바로 회전하면서 다시 공격해갔다. “팔로산각(八路散脚)”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는 힘에 의해서 더욱 위력이 커진 초식으로 풍전팔각로(風轉八脚路) 중의 일로에 해당하는 초식이었다. 허공에 발그림자가 연이어 여덟 번에 걸쳐 나오며 단리유아의 측면의 상하전체를 노렸다. 단리유아 역시 상대가 권각(拳脚)의 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상대의 공격을 예상하고, 서로 스쳐나갈 때 역시 신형을 회전하면서 상대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궁전투사(弓箭投射)” 상대의 발그림자에 맞서서 검영(劍影)이 연이어 일어나 상대의 공격에 부딪쳐갔다. 마치 각각의 화살을 부러뜨려 날리듯이 검영이 상대의 공격에 따라 꺾여나가며 부딪쳤다. 본래 산서성(山西省)에 위치한 백궁막(百弓幕)의 무공으로, 접근전에서 상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창안한 철전살법(鐵箭煞法)의 일초였다. 이 척 길이의 철시(鐵矢)로 검을 대신해 펼치는 것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공 중의 하나였다. “퍼퍽, 퍼퍼펑” 검영(劍影)과 각영(脚影)이 서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계속해서 부딪쳤다. 마지막으로 부딪쳐 일 장(丈) 정도 서로 물러섰다가 다시 서로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단리유아가 먼저 상대의 상반신을 노려서 검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사한투광(梭汗透光)” 검영(劍影)이 연이어 일어나 철루존자(鐵壘尊子)의 상반신을 찌른다. 마치 베틀 북으로 땀방울을 맞추고 빛을 꿰뚫듯이 촘촘하고 뾰쪽한 검영이 상대를 공격해갔다. 이 초식은 강호(江湖)의 대표적인 여고수 중의 하나인 철심마비(鐵心魔妃)의 천침검십구로(穿針劍十九路)중의 일로였다. 주로 찌르기로 이루어진 초식들인데 처음 겪어본 사람에게는 상당히 까다로워서 대처가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어느새 목숨을 내놓게 되는 검법이었다. 철심마비가 강호에서 명성을 얻게 만든 것도 바로 이 검법 때문이었다. 철루존자 역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바라천수포해(婆羅千手包海)” 수영(手影)이 연이어 일어나 단리유아의 검영(劍影)에 맞부딪쳐갔다. 바라천겁수(婆羅千劫手)의 이초로 마치 거대한 천개의 손 그림자가 일어나 바다를 뒤덮듯이 상대를 감싸서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파파팍, 퍼펑” 두 사람의 공격이 부딪쳐서 또다시 폭음을 만들어낸다. 장내는 햇살에 번쩍이는 검광(劍光)과 서로가 만들어낸 검영(劍影)과 수영(手影)에 뒤덮여 있었다. 흩어지는 경력에 임시로 다져놓은 땅바닥이 파헤쳐져 흙먼지가 떠올라, 마치 다갈색의 안개처럼 장내를 뒤덮어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연이어 부딪쳐가고 있었다. 서로가 간만에 만난 호적수라는 듯이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을 마음껏 펼치면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한쪽에 모인 일행이 그런 광경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휴, 정말 대단한 격전이라고 할 수 밖에 없구만. 이 두 사람의 무공을 보니, 나 같은 사람은 절로 탄식이 흘러나오는군. 저렇게 젊은데도 벌써 저런 경지에 이르다니....” 공손고가 두 사람의 무공을 보면서 찬탄 반, 시샘 반의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지켜보단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웅정향이 고개를 돌려서, “저희 소사숙의 무공도 대단하지만, 저 사람의 무공도 그에 못지않군요. 정말 저들의 모습에 비해 저희 같은 사람들의 자질은 보잘 것 없나봅니다. 저런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경지라니.... 휴우, 지켜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웅사형, 사형 말대로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동안에 우리가 지켜보았듯이 사숙께서 어느 정도 수련에 집중하고 노력하는지 보았지 않습니까? 단지 자질 만으로 저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에 음구의가 옆에서 끼어들어 말한다. 이에 웅정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 안다네. 자질 만으로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어떡하나? 이 나이 들도록 무엇을 했는지, 젊었을 때 더 노력할 것을 하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데....” “자네도 그런가? 나 역시 그렇다네. 휴, 과거를 돌이켜보면 후회만 가득하네. 그때 좀 더 노력할 걸 하고 말일세. 젊었을 때는 어찌 그렇게 노는데 정신이 팔리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만 했는지. 정말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구만.” 잠시 한탄스러운 기색으로 공손고가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서, “자네 두 사람은 아직 늦었다고 볼 수 없으니, 이제라도 좀 더 노력해보게나. 게다가 단리소협은 자네들에게 사숙이 되니 도움받기에도 쉬울 것 아닌가? 비록 겉보기에는 무정해보여도 그동안 하는 것을 보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 자네들이 계속 청한다면 내치지 않고 도움을 줄 것일세.” 선상조와 음구의를 바라보면서 공손고가 충고하고, 옆의 웅정향도 거든다. “저희도 알고 있지만, 워낙 갈 길이 바빠서 저희에게 전해준 무공조차도 제대로 수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희는 소사숙처럼 쉽게 무공 한 가지에 집중하는 성격도 아니라서 더욱 어려움이 있지요. 기회가 된다면 다시 도움을 청하기는 하겠지만, 일단 지금 배운 것을 제대로 익힌 후에나 다시 도움을 바래도 바래야겠지요.” 음구의가 두 사람을 보면서 안타까운 어조로 대답한다. 사실 평범한 사람으로서 단리유아처럼 무공 한 가지에 매달려 계속 수련한다는 것은 거의 드문 경우였다. 그 정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다른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을 것이고 즐기고 싶은 것도 많을 것인데, 어떻게 무공 한 가지에만 전념하여 시간을 보내려고 하겠는가? 다들 눈앞에 다가온 세사(世事)에 신경을 써야하고, 또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중의 하나인데? 단리유아처럼 무공일도에 전신을 바친다는 것이 결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일행이 서로 상념에 잠겼다가,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는 비무를 보면서 공손고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흠,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째 일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맞습니다. 저희 장문인이나 금화선고(金花仙姑)와 싸울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때도 긴박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치열한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어느 정도 실력 차를 느낄 수 있어서 긴장감은 그리 없었지요. 이렇게 가다가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고의 말에 맞장구친다. 음구의의 말에 그동안 말이 없던 선상조가 움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그래도 소사숙께서 이기실 것일세. 나는 소사숙님을 믿네.” 간만에 들리는, 너무 소리가 작아 알아듣기도 힘든, 선상조의 목소리를 듣고 일행이 돌아본다. 잠시 선상조를 바라보다가 웅정향이 얼굴을 찌푸리며, “휴, 사제의 말대로 나도 소사숙께서 이기길 바라고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네. 하지만, 이렇게 비등한 고수끼리의 대결은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문제라네.” “자네 말이 맞네. 한쪽의 실력이 기운다면 별 탈 없이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지. 하지만, 이처럼 실력 차가 없을 때는 문제가 되네. 한쪽이 봐주려고 해도 할 수가 없고, 혹시라도 한 사람이 비무에 너무 열중하여 정신을 잃는다면 그냥 좋게 끝나기는 어려울 것일세.” 공손고가 옆에서 웅정향의 말을 거든다. 일행 모두가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대화를 하면서 단리유아와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대결을 지켜본다. 한편, 두 사람이 비무를 시작한지도 벌써 한 시진이 넘게 흘러서 어느덧 오시(午時:11-13시) 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싸우면 싸울수록 더욱 몰입해가며 주위를 잊은 채 상대방을 공격하고 상대방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비무장내 삼십여 장에서 두 사람의 경력에 파헤쳐져 있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지켜보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허공에 날리는 뿌연 흙먼지로 인해, 두 사람의 신형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어서 상황을 알아차리기도 힘들었다. 오직 폭음소리가 이따금 들리고 검광(劍光)이 허공에 치솟는 장면이 보일뿐이었다. 이때 단리유아와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모습은 엉망이 되어있었는데, 단리유아는 곳곳에 옷이 찢어지고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철루존자 역시 산발한데다 윗옷은 완전히 조각나 없어지고 하의만 온전하게 걸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심각한 외상은 없었지만,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연이은 격돌로 인해서 내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철루존자(鐵壘尊子)의 외공(外功)과 권각술(拳脚術)에 대응하기 어려웠던 반면에, 철루존자 역시 단리유아의 검술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은 철저한 맨손 격투로 일단 접근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단리유아는 자신의 공격을 무리 없이 막고 있는데다가 맞더라도 치명적인 요혈은 교묘하게 비껴나가게 만들고 있었다. 수법(手法)과 각법(脚法)에 더해서 금나술(擒拏術)과 몸통공격을 하려고 해보았지만 도대체 가까이 접근할 틈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단리유아의 검초에 당황하여 물러서야할 때도 많았다. 단리유아 역시 어렵기는 매한가지로 철루존자(鐵壘尊子)의 공격에 섬뜩함을 느끼고 물러서야할 경우가 많았다. 주로 수법과 각법으로 공격한다지만, 온몸을 내던지다시피 한 공격이 계속 이어져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게다가 신체가 철인과 같아서 검기에 적중되어도 정통으로 맞지 않는 한 상처조차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만일 자신이 검법이외에 다른 무공에도 일가견이 있고, 실전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다면 벌써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을 것이다. ******* 오늘은 여기까지.... 오타와 오류가 보이시는 분은 바로 지적해주십시오. ####### 그리운이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청천 님께 감사드립니다. 삼생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천밀석궁(千密石宮) 천밀석궁(千密石宮) 4 두 사람의 싸움이 처음에는 단순한 비무처럼 시작되었지만, 가면 갈수록 실전처럼 살벌해져 갔다. 이렇게 된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철루존자(鐵壘尊子)의 공격이 전신을 이용한 공격이다 보니, 그에 맞서는 단리유아 역시 검법뿐만 아니라 다른 무공도 역시 보조해서 펼쳐야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서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계속해서 맞부딪치는 식으로 싸우니 더욱 그러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두 사람 모두 멈출래야 멈출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철루존자(鐵壘尊子)의 왼쪽으로 따라 돌면서, “풍산도해(風散渡海)” 철루존자의 측면을 노리고 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왼손으로는 태극마환권(太極魔環拳)으로 칠권을 연이어 날렸다. 풍산도해(風散渡海)는 오래전에 실전된 풍정수뢰검법(風靜水瀨劍法)의 일초로 검기를 연이어 날려서 층층이 쌓듯이 모여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태극마환권은 귀주성(貴州省)의 일대고수인 마환신권(魔環神拳)이 본래의 태극권에 자신의 심득을 더해서 창안한 것으로 강호(江湖)의 일절이라 할 수 있었는데, 격중된 상처의 모습이 둥근 고리모양으로 파인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검영(劍影)이 뭉게구름처럼 쌓여서 철루존자(鐵壘尊子)를 향해 다가가고, 권영(拳影)이 일어나 연이어 상대가 피할 범위를 제한하며 압박해갔다. 단리유아의 공격에 철루존자 또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앞으로 달려들면서, “바라천수전고(婆羅千手電鼓)” 마치 뇌전이 땅으로 내리꽂히듯이 수영(手影)이 허공을 뒤덮고, 우레 소리가 은은히 장내를 감싸며 단리유아의 공격에 부딪쳐갔다. “으르릉.” “콰쾅! 퍼퍼펑” 이와 동시에 다시 수법을 바꾸어 단리유아의 상체를 노려서 삼장을 날린다. “패엽수전괘(貝葉垂前掛)” 새파란 빛깔의 패엽(貝葉) 모양의 장영(掌影)이 단리유아의 전면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천밀석궁(千密石宮)의 무공 중의 하나로 패엽점수장(貝葉漸水掌)의 일초였다. “콰콰쾅! 퍼펑” 장영(掌影)의 푸른빛과 어우러져 검광(劍光)이 일어나고, 두 사람의 공세에 의해 뭉게구름이 일어나듯이 흙먼지가 치솟아 장내를 뒤덮었다. 폭발음만이 비무의 험악함을 더해주듯이 울려 퍼져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서로 부딪치고 물러섰다가 곧바로 서로를 노리며 공격해 들어갔다. 비무를 시작할 때는 한쪽에 준비한 평상에 누워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도, 더 이상 누워서 볼 수 없었는지 일어나 정좌한 채 안면을 찌푸리고 심각한 안색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이십여 명의 천밀석궁(千密石宮)의 고수들도 일의 심각함을 눈치 채고 걱정스런 기색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철광대존자 옆의 한 장로가 침중한 어조로, “궁주님.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어째 이제는 비무라기보다는 실전처럼 보입니다.”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 역시 그러함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제가 또다시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군. 중원(中原)에서 온 저 사람의 실력도 이에 못지않으니 좋게 끝날 것 같지 않네. 지금까지는 주로 상대가 당해왔지만, 아마 이번에는 사제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 그동안 들려온 저 사람의 소문대로라면. 하여간에 사제는 정신이 한곳에 빠지면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성격이 문제야. 그것만 고친다면 더 상승의 경지에도 이를 수 있을 텐데. 무공만 밤낮으로 익힌다 해서 현경(玄境)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 텐데.” “그럼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옆에서 다른 장로가 묻는다. 보통 자신들이 느끼기에는 무공만 부지런히 익힌다면 점차 상승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왔었던 것이다.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가 주위의 고수들을 둘러보면서, “자네들도 알 것이지만, 현경(玄境) 이전까지는 무공의 자질과 노력에 의해서 이를 수 있네. 단지 시간의 장단과 그 과정의 난이에 있어서 사람마다 약간 다를 뿐이지. 하지만 현경의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일세. 지난 세월을 돌이켜볼 때 현경에 올랐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다들 무공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네. 다들 불가일세(不可一世)의 인물들로서 인격적으로도 더할 나위없었던 사람들이었네.” “하지만, 현경(玄境)에 올랐어도 세상을 피로 뒤덮은 사람이 나온 적도 있지 않습니까?” 한 제자의 반문에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가 혀를 차며, “쯔쯧. 어찌 그들이 현경(玄境)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느냐? 그들은 현경의 관문에서 주화입마(走火入魔)하여 그리 된 것일 뿐이야. 무리하게 육체적인 내공만으로 현경에 도전하니 그런 결과가 생길 수밖에. 어검술(御劍術)까지 쓸 수 있으니 자기 자신도 현경에 올랐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으로 뇌리에 침습한 마기(魔氣)의 영향으로 그 자신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지. 단지 쉽게 흥분하여 화를 내거나 살인할 때마다 쾌감을 느끼는 것에 이상함을 느낄 테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것으로 바로 마기에 굴복하여 혈마(血魔)가 되어서 세상을 어지럽힐 뿐이지. 나중에는 자신 역시도 치솟는 혈기를 주체할 수 없어서 자멸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세상에 끼치는 해악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문제지.”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면서, “휴, 그런데 사제 역시 그런 기미가 보인단 말일세. 육체적인 수련에만 매달리고 있는데, 그래서는 잘못했다가는 본궁에서 혈마(血魔)가 생길지도 몰라. 이미 현경(玄境)의 벽에 다다라서 수련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태이니. 내 이전에도 무공수련은 그만두고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누누이 타일렀건만 워낙 성격이 외골수라 듣지 않는 것이 문제야. 다른 일상사에도 신경 쓰면서 삶과 자연에 대해 하나하나 깨달음을 얻어야지, 외골수로 수련만해서는 결코 좋은 결과가 생길 수 없어. 자칫 성급하게 현경의 관문에 도전했다가 잘못되는 경우에는, 차라리 주화입마(走火入魔)하여 바로 죽는다면 별 문제가 없을 테지만 만일이라도....” 말끝을 흐리는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를 보면서, 장로중의 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그러면 싸움을 멈추게 하고는 바로 참회동(懺悔洞)에 가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닐세. 그리되었다간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지. 사제의 성격에 한곳에 주저앉아 참선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그런데 때마침 저 사람이 찾아와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몰라. 이번에 싸우게 된다면 그동안에 쌓였던 답답한 마음이라도 풀어질 테니. 내 이번에는 궁주의 권한으로라도 비무가 끝난 다음에 세상을 돌아보게 할 생각이라네. 여행만큼 사람의 시야를 넓고 다양하게 바꾸어주는 것이 없으니. 저들을 따라가도 좋고, 아니면 혼자서 세상살이를 배우는 것도 좋겠지.”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의 얘기에 한 제자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사부님. 그러면 싸움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지금 보니 두 사람 다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에 철광대존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아니, 내버려두자. 설혹 상처를 입더라도 괘의치 말도록 해라. 오히려 사제에게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는 아닐 테니, 지금 끼어들어 방해한다는 것도 이미 늦었고.”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의 대답에 천밀석궁(千密石宮) 제자들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이와 같은 싸움에서 무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것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편, 두 사람의 싸움도 거의 두 시진(時辰)이 넘어가 이제는 서로가 강기(剛氣)를 써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끼어든다는 것도 불가능해서 사방으로 두 사람이 부딪치는 강기의 여파가 미치고 있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비무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외상뿐만 아니라 내상도 심각한 상황이었는데도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먼저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일식인 천애유성하로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목을 노리면서 이와 동시에 앞으로 달려들면서 왼손으로는 뇌벽권(雷霹拳)을 연이어 펼쳤다. “천애유성하(天涯流星河)” 한줄기 시퍼런 섬광이 일어나 철루존자에게 달려듦과 동시에, 허공에는 뇌벽권(雷霹拳)에 의한 손 그림자와 계속해서 뇌성이 울려 퍼져나갔다. 철루존자(鐵壘尊子) 역시 달려들면서 바라천겁수(婆羅千劫手)의 일초를 수강(手剛)으로 펼쳐 단리유아의 검강(劍剛)을 막고, 다시 왼쪽으로 움직이면서 패엽점수장(貝葉漸水掌)의 일초인 패엽천점적으로 단리유아의 상체를 노렸다. “패엽천점적(貝葉千漸滴)” 패엽 모양의 강기가 연이어 일어나 단리유아의 공격에 부딪쳐갔다. “으르릉” “콰콰쾅. 꽈쾅” 장영(掌影)과 검영(劍影)이 부딪치고 연이어 권과 장이 부딪쳐서 폭발했다. 흩어지는 강기에 장내가 어지러워질 때,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향해서 다가가며 공격해나갔다. 이미 두 사람의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된지 오래로 내상 또한 심해서 몇 번이고 어혈(瘀血)이 목구멍으로 넘어왔지만, 서로가 자존심이 강해서 뱉어내 잠시 진정시킨 다음에 공격을 이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보통의 비무라면 이미 멈추어야할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은 전혀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쪽에 공증인으로 지켜보고 있던 기혼사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끼어들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보다는 고수로 만일 중간에 밀치고 들다가 두 사람의 공격에 맞서기라도 했다가는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기혼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수록 장내의 상황은 어지럽게 변하고 있었다. 이미 지켜보던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더 뒤로 물러서 수풀 속에까지 밀려난 상황이었다. 게다가 흩어지는 강기(剛氣)에 튀어 오르는 흙덩이와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려 주위의 수풀에 맞아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장내를 울리고 있었다. 이때 단리유아는 전신의 상처에서 터져 나오는 피로 온몸을 붉게 물들이며, 부딪치는 충격에 내상을 입어 넘어오는 피는 억지로 다시 삼키고는 다시 상대의 공격에 부딪쳐갔다. 사실 자신이 비무하면서 이렇게까지 열중하게 만드는 상대는 아직까지 없었다고 보아야했다. 일수 일수에 물러서지 않는 상대의 모습에 자신 역시도 절로 투지가 일어나 물러설 생각이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반면에 철루존자(鐵壘尊子) 역시 내외상이 심각한 상태였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수련하다가 벽에 부딪쳐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어서 폭발할 지경이었는데, 이렇게 단리유아와 싸우다보니 답답한 마음이 풀려나가 시원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내외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싸우면 싸울수록 통쾌한 느낌이 강해져서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신체가 알고, 이제는 단리유아가 누구인지 주변이 어떤지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그동안 익혔던 무공을 모두 다 펼쳐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순간이라도 한쪽이 물러선다면, 아마 살아남는다 해도 상처가 막중해서 제대로 치유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미 무공보다는 두 사람의 투지가 장내를 짓누르면서 서로를 노려보며 공격해가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천애구검의 제 오초인 천애만성련(天涯滿星連)을 펼쳐 허공을 검강(劍剛)으로 줄줄이 수놓고 있을 때, 철루존자 역시 패엽점수장의 칠초인 패엽천잠만(貝葉千潛滿)을 펼쳐 장영을 일으켜 마주쳐가고 있었다. 백팔개로 이루어져 나선형으로 회전하면서 다가오는 은청색의 검강에 맞서 패엽 모양의 강기가 허공을 시퍼렇게 물들이며 서로를 향해 부딪쳐나갔다. 주위의 사람들이 상황의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을 때, “꽈꽝! 콰콰꽝” 굉음이 연이어 울리면서 사방으로 강기(剛氣)가 흩어져 나갔다. 주위에는 흙먼지가 떠올라 뒤덮고, 후두둑거리며 마치 우박이 쏟아지듯 흙덩이와 부서진 돌조각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번 공격으로 두 사람 모두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미 외상으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대다가 내상으로 인해서 그동안 멈추지 않고 부딪쳤던 두 사람도 서로 물러난 채 죽은피를 계속해서 뱉어내야만했다. 잠시 피를 토해내고는 서로를 감탄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가오던 기혼사가 소리를 지름에도 다시 서로가 공격해나갔다. “그만 멈춰!” 소리를 지르던 기혼사가, 자신의 말에도 철루존자(鐵壘尊子)가 먼저 공격해나가자, “이런 젠장할! 어떻게 이런 놈들만 모였는지....” 욕설을 내뱉으며 할 수 없이 다시 뒤로 뛰어서 물러났다. 철루존자(鐵壘尊子)가 먼저 두 손을 교차해서 패엽점수장의 최후초식인 패엽천광멸(貝葉千光滅)을 펼쳤다. 이 초식은 강환(剛丸)에 해당하는 초식으로 양손에서 모아진 내력을 합쳐서 극도로 응축시킨 다음 상대에 부딪치는 순간 터뜨리는 초식이었다. 시퍼런 패엽 모양의 강환이 다가오고 있을 때, 단리유아 역시 천애구검의 제 육초인 천애파황탄(天涯破荒彈)을 펼쳐서 맞부딪쳐나가고 있었다. 천애파황탄은 다섯 개의 검환(劍丸)을 연이어 날리는 것으로 상대가 하나를 막더라도 연이어 다가오는 나머지 검환을 막아야만 하는 초식이었다. 짙푸른 빛의 패엽 형태의 강환(剛丸)과 상대적으로 작은 은청색의 다섯 검환(劍丸)이 마치 밤하늘의 달과 별처럼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으면서 맞부딪쳐나갔다. “꽝! 꽈꽈꽝!” 서로의 강환(剛丸)이 터져나가는 굉음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귀를 막을 때, 흩어지던 강기(剛氣)가 주변에서 지켜보던 곳까지 날아와 나무를 부러뜨리거나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부상당한 사람들을 서로가 살피고 있을 때, 기혼사가 장내로 뛰어나가면서, “모두 그만하게. 제기랄, 조금만 더했다가는 두 사람 모두 살아남지 못할 테니.” 소리치며 다가오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놀라서, “이 자식들아. 그만 그놈들은 내버려두고 빨리 튀어오지 못해? 제기랄,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의 일행과 천밀석궁(千密石宮)의 사람들을 다급하게 불러 모았다. 서둘러 다가온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고는 모두가 그 처참함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철루존자(鐵壘尊子)는 왼쪽 팔이 혈관이 터지고 기괴한 모습으로 뼈가 부러져, 치료를 한다 해도 제대로 무공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될 정도였다. 게다가 철루금갑공(鐵壘金甲功)에도 불구하고 전신의 곳곳이 거미줄처럼 갈라지거나 터져 피가 줄줄이 흐르는데다가 얼굴의 한쪽도 거의 날아가 그 속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내상이 너무 깊어서 몇 번 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쓰러져 혼절해버렸다. 단리유아 역시 무사하지 못했는데, 내상이 심각한 것은 둘째로 하고라도 전신 곳곳에 상처를 입어 움직이기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특히 강기(剛氣)에 스친 왼쪽 허벅지는 쩍 갈라진 채 뼈를 드러내며 줄줄 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복부도 상처를 입고 갈라져 내장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내상으로 인해 죽은피를 뱉어내고 우선 복부와 허벅지의 혈도를 막아 지혈하고 있을 때, 일행이 달라붙어 서로 떠들면서 약을 바르고 옷을 찢어 묶으며 소란을 떨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러서 어지러운데다가 계속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일행의 걱정과 잔소리에 더욱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천밀석궁(千密石宮)의 사람들도 서로 상처를 돌보며 부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기혼사가 철광대존자(鐵光大尊子)와 상의해서 우선 상처를 돌보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는 일단 장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철루존자(鐵壘尊子)는 천밀석궁의 인물들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평상으로 옮겨진 후에 먼저 떠났고, 일행도 선상조가 단리유아를 부축하며 천천히 장내를 떠나갔다. 남겨진 장내의 모습은 여기 저기 핏방울이 스며든 땅바닥과 완전히 난장판이 된 모습만이 남아 오늘의 비무가 어떠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시간도 유시(酉時:17-19시)가 된지 한참인 해거름 무렵인지라, 더 처참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나타내주는 듯 했다. ****** 늦었네요. 오타와 오류가 보이시면 바로 지적해주세요. ##### 한량거제 님의 말씀대로 조금 이상하군요. 수정했습니다. 해거름 :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백상사(白象社) 백상사(白象社) 1 선상조의 부축을 받아서 거처에 돌아오자, 곧 걱정하여 떠드는 일행을 물리치고 상처를 돌보았다. 현기증이 일어나는데다가 피곤하여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잃지 말아야 했다. 우선 자옥신단(紫玉神丹)을 복용하고 내상을 진정시킨 다음에 쉬어야, 이후에 상처를 회복하는데 드는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허벅지의 상처로 인해 침상에 누워서 와공(臥功)으로 운기를 해야 했다. 일단 내상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을 일으켜 천천히 진기를 순환시켰다. 먼저 구대혈의 진기를 모아야만 했는데, 복부의 상처가 커서 임시로 단중혈(膻中穴)로 진기를 모았다. 내상과 내력의 과중한 소모로 거의 바닥나다시피 해, 잘 모이지 않는 진기를 의념을 집중해 하나하나 끌어 모았다. 천천히 단중혈에 모인 진기를 내상을 입어서 어혈이 뭉치거나 손상된 혈도에 보내어, 죽은피를 몰아내고 혈관을 어루만져 더 이상 내상이 확대되지 않도록 했다. 겨우 겨우 일주천을 하고 난 후에, 어혈을 토해내고는 계속해서 진기를 전신으로 보내어 상처의 치료에 전념했다. 십이주천을 하고나서 다시 한 번 뱉어내서야 어느 정도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피곤함에 지쳐 잠이 들었다. 일단 급한 불이라도 껐으니 더 이상 상처가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시간이 더 오래 걸릴 테지만, 이후로는 정신을 놓더라도 구전회혼결(九轉回魂訣)이 계속해서 움직여 상처를 치료할 것이다. 단리유아가 누워 요상을 하고 있을 때 침실 밖에 모여 앉아있던 일행은 오늘의 싸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문틈으로 단리유아의 모습을 힐끔 보다가 기혼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휴, 이제야 잠이 든 것 같군. 정말 대단한 정신력일세. 보통사람이었다면 진즉 혼절하고도 남았을 상처였는데.” “맞습니다. 저라면 이미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을 것입니다. 휴, 아직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데, 처음 사숙의 상처를 보았을 때는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습니다.” 웅정향이 기혼사의 말을 받아서 답한다. 일행이 고개를 끄덕일 때, 공손고가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모습이 생각나 기혼사를 향해서, “그런데 그 사람은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단리소협보다 상처가 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는데.” “클클, 괜찮을 것이네. 천밀석궁(千密石宮)에도 의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있으니, 단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릴 뿐일 테지. 또 그 정도로 어찌될 정도로 허약한 놈이었다면, 지금껏 그런 명성을 얻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기혼사의 말에 공손고가 불안한 표정으로, “이 일로 무슨 문제가 생기지나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무슨 문제? 뭐, 천밀석궁(千密石宮)에서 보복이라도 할까봐? 이 자식은 정말.... 두 사람 다 상처를 입은 대다가 공증인인 나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기혼사가 볼을 씰룩거리며 공손고를 노려보면서 말한다. 이에 공손고가 고개를 수그리며 혼자 웅얼거리고 있을 때, 문안을 살펴보고 있던 음구의가, “두 분 다 그만 고정하십시오. 그래도 이정도로 일이 끝난 것만 해도 천만다행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죽기라도 했다면 정말 큰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도 죽지는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지요. 단리사숙께서도 정신을 잃지 않으시고 일단 상처를 진정시켰으니, 더 이상 상처가 악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일이 걸릴 뿐이지, 완치하는 데는 별 문제 없을 것입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 내 원, 이런 비무는 보다보다 처음일세. 정말....” 공손고가 음구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릴 때, 웅정향이 아직도 아까의 비무가 생각나는지 안색을 찌푸리며, “저도 비무를 참관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실제로 싸운 적도 많았지만, 이렇게 살벌했던 비무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생사대결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쉰다. “무슨 그런 놈이 있는지 몰라. 싸웠다하면 광기(狂氣)에 빠진다더니 오늘 보니 그 말대로더군. 게다가 이 사람도 그에 못지않으니. 어이구, 하마터면 이 늙은이 간이 다 떨어질 뻔했다네.” 기혼사가 자신 역시 그렇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행여나 그런 일이 있을려구? 오늘 일도 더 일찍 끼어들어 중단시켰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일행의 표정을 보고는 대강 생각을 짐작하고, “이 자식들이! 도대체 그 표정은 뭐냐? 다들 내 잘못이라는 듯 나무라는. 흥, 너희도 가까이 다가가 봐라. 끼어들 엄두가 나는지. 제기랄, 나보다 하수라면 어떻게 해볼 텐데, 둘 다 강하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단 말이다.” 투덜거리는 기혼사의 표정이 마치 투정부리는 듯한 아이의 모습과 같았다. 그래도 석연치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행에게, 점점 화가 나는 듯이 눈썹을 치켜들고 노려보면서 기혼사가 말하려고 할 때, “그보다 소사숙의 상처에 대해서나 얘기합시다. 아무래도 쉬이 회복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제 생각은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을 복용하시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상조가 낮게 깔려 울려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행이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기혼사가 황금수황밀이라는 소리에 놀라서, “뭐,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이라고? 정말 그걸 가지고 있었단 말이냐? 아니 그러면서도 그동안 나한테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별로 쓸 일도 없었던 데다가 바쁜 일정 중에 언제 노선배에게 보여준다는 말이오? 게다가 보여주었다가는 부뚜막의 고양이가 생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을 텐데.” 선상조가 빤히 기혼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이에 흥분한 기혼사가, “뭐가 어째? 너 애송이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냐? 흐흐, 그동안 불쌍해서 내버려두었더니 어느새 기가 살아난 모양이지?” “불쌍하기는 누가 불쌍하다고....” 서로가 노려보며 싸우는 두 사람을 주위에서 말린다. 음구의가 화제를 돌려서, “상조의 제안대로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금화선부(金花仙府)의 영단만 복용했지 상조도 그동안 쓰지 않았던 것인데, 이렇게 먼저 제안하니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반대하실 분 없습니까?” 미리 대답할 말을 한정짓는 음구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다. 기혼사만이 어찌해볼 수 없을까하는 얼굴로 끼어들어 말하지만, 일행 모두가 마이동풍으로 마치 면전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서로만 대화를 나누고는 호법을 설 선상조만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나버렸다. “흥! 이것들이 요새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다들 기가 살았구만. 클클, 내 이제부터 네놈들을 가만히 나두나 봐라.” 투덜거리다가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쳐나간다. 화풀이도 하고 철루존자(鐵壘尊子)의 상처도 궁금해 천밀석궁(千密石宮)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다음날 사시(巳時:9-11시)초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단리유아는 본격적으로 요상에 들어갔다. 잠에서 깨어나니 전날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온몸에서 일어나 뇌리를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비무 중에는 이런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는데, 고통에 단련된 자신조차도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였다. 먼저 복부와 허벅지의 상처를 다시 소독하고, 다시 꼼꼼히 실로 꿰매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다른 상처부위도 닦아내 금창약을 바르고, 복부와 허벅지에는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를 발랐다. 그러고 나서 일행이 건네준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을 한 모금 복용하고 운기를 시작했다. 곧이어 한 줄기 뜨거운 진기가 솟구치면서 혈도를 치달려 돌기 시작했다. 운기가 진행될수록 진기가 계속 모이고, 전신을 흰 안개가 뒤덮으면서 혈관 속에 남아있던 찌꺼기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처를 치료한지 열흘이 되었을 때, 겨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내상은 거의 완치되었고, 허벅지와 복부의 상처를 제외하고는 다른 상처도 완치되어 움직이는 데에는 그리 불편함이 없었다. 어느 정도 상처가 치료되자 나머지 상처는 여정(旅程) 중에 치료하기로 하고, 일행을 불러 다시 길을 떠나자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말에 일행이 기겁하면서 말려, 할 수 없이 완치될 때까지는 이곳에 더 머무르기로 했다. 단리유아가 상처에 전념하고 있을 때, 매일같이 천밀석궁(千密石宮)에 다녀오는 기혼사에 의해서 철루존자(鐵壘尊子)의 상세에 대해서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철루존자도 사흘이 지나서는 정신을 차리고 요상을 하고 있지만, 단리유아보다는 상처가 심해서 아직도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게다가 팔의 상처가 심해서 다 낫더라도 제대로 무공을 펼칠 수 있을지는 천밀석궁에서도 자신할 수 없을 정도라 전한다. 열흘이 더 흘렀을 때, 단리유아는 상처가 완쾌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다시 길을 재촉해야했다. 상처 때문에 천밀석궁(千密石宮)에 너무 오래 머무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에 철루존자(鐵壘尊子)가 한번 찾아왔는데, 왼뺨의 살이 거의 날아가 그동안 살이 약간 돋아났음에도 양쪽의 모습이 틀려서 더욱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팔의 상처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는지 아직도 천으로 묶어서 허리춤에 고정시킨 모습이었다. 일행이 번득거리는 눈동자와 그 괴상한 모습에 절로 안색을 찌푸리고 있을 때, 철루존자는 한동안 묵묵히 단리유아를 바라보다가 아무런 말없이 다시 돌아갔다. 그동안 상처를 회복하는 중에, 단리유아는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무공에 대한 것과 이전부터 생각해왔던 독공에 대해서 연구해보고 있었다. 철루존자의 무공은 아직 움직임이 불편해 기억을 돌이켜 새로이 구성하는 데에만 전념했다. 나중에 회복되어 시간이 된다면 다시 본격적으로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아마 자신의 무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자신도 전신을 이용한 공격에 능한 편인데, 철루존자의 박투는 자신과는 다른 면이 많아서 연구하여 수련해둔다면 이전과 같이 대처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회공독결(回空毒訣)을 수정하여 심법 속에 포함시키는 문제는 거의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다른 심결과의 충돌도 그리 크지 않아서 조금 더 수정한다면 완전해질 것으로 보였다. 앞으로의 과제는 금화선고(金花仙姑)의 채대법과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무공을 연구하는 것만이 남아있다고 보아야했다. 일단 여정(旅程)이 너무 늦어졌으니 다시 길을 떠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해 완벽하게 자신의 무공으로 만들기로 했다. 단리유아가 이렇게 상처를 치료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무공을 연구하며 보내고 있을 때, 일행은 각자의 일로 분주했다. 기혼사는 양쪽을 오가면서 시간을 보냈고, 공손고와 웅정향은 주위의 풍물을 둘러보거나 앞으로의 여정(旅程)에 필요할 물품을 구하러 다녔다. 음구의와 선상조는 간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시간 동안, 단리유아와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비무에 자극을 받았는지 밤낮으로 서로의 무공을 연마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가끔 기혼사가 옆에서 끼어들어 지도 반 장난 반으로 대련을 해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각기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천밀석궁(千密石宮)에 온지도 이십여 일이 흐른 이월 보름의 저녁에 일행이 모두 모였을 때, 단리유아는 다시 길을 떠나기로 일행에게 말하고 있었다. “기선배님, 이제 저의 상처도 완쾌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니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들릴 곳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소사숙. 며칠 더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처가 완쾌되었다고 하지만 그동안 제대로 쉬시지도 못했지 않습니까? 무공을 익히거나 상처를 입어 치료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시 길을 서둘러야 했으니, 며칠 더 휴식을 취하면서 이곳의 풍물을 둘러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웅정향이 너무 길을 서두르는 것 같아서 옆에서 말린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오. 그동안 충분히 쉬었고 앞으로는 몸이 완전해질 때까지 천천히 움직일 생각이니, 가는 도중에 주위를 둘러보아도 충분할 것이오. 게다가 너무 한 곳에 있어서 답답했던 것도 있으니.”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단리유아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이것이 타고난 천성인지 아니면 천역(天驛)의 운명대로인지는 몰라도 한시도 한 곳에 가만히 머무르지 못하고 금새 답답해했다. 실제로 어린 시절에 집에서 있던 시간과 무영비고(無影秘庫)에서의 일을 제외하고는 한 달 이상 머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대부분은 상처를 치료하거나 무공을 연구하기 위해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을 뿐이었으니, 실제 다른 일로서 오랫동안 머문 적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했다. “흘흘, 그래 자네 말대로 나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네. 내일은 모두가 떠나기로 하지.” 본래부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고 조용한 것을 싫어하던 기혼사는 이런 단리유아의 말이 반갑기만 했다. 다른 일행도 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할 수 없이 내일 떠나기로 동의했다. 잠시 후에 기혼사가 단리유아가 물었던 말에 답하여, “앞으로는 계속 북진해야 할 텐데, 노정(路程)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곤간(困桿) 인근에 위치한 파호추계(坡湖鎚契)부터 만나게 될 것이네. 그 다음에 다시 올라가면 남루(濫婁)일대의 백상사(白象社)에 이르게 되겠지.” “그러면 먼저 거쳐 갈 파호추계(坡湖鎚契)는 어떤 문파입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기혼사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놈들은 순 도적놈들이지. 사실상 그 일대는 그놈들의 왕국과 같아서 다른 세력이 어쩌지 못하고 있다네. 이곳 남만(南蠻)에서도 사파에 속한 곳으로 불과(岪跨) 지역의 괴리산사(傀離山舍), 북쪽 끝에 위치한 비사리(非沙里) 일대의 세금동(銴金洞)과 더불어 삼대사파라 불리는 곳이라네. 단지 제자들의 수와 세력권의 크기로만 따진다면 가장 큰 집단이라 할 수 있지.” 기혼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음구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사숙. 기노선배의 말씀대로라면 부딪쳐보아야 좋을 것 같지 않은데 그냥 지나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런 놈들과 싸워서 괜히 피 볼 필요가 어디에 있나? 차라리 돌아가는 것은 어떤가?” 공손고도 음구의의 말에 동의하면서 말한다. 말은 안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생각인지 걱정스런 얼굴로 단리유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기혼사가 고개를 저으면서, “흘흘, 돌아가는 것은 너무 시일이 오래 걸려서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사람 수와 세력의 크기로는 제일 크다고.” “도대체 어느 정도 크기의 문파이기에 그러십니까?” 웅정향이 옆에서 끼어들어 묻는다. 이에 기혼사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곤간(困桿) 일대 오백여 리는 그놈들의 세력권이라네. 게다가 제자들의 수로만 삼천 명이 넘으니, 단순히 인원만을 따진다면 최고라 할 수 있을 것이네.” 일행이 그 소리에 놀라 입을 벌리고 기혼사만 바라보고 있었다. 중원(中原)에서도 가장 문하제자의 수가 많은 문파가 천여 명 정도에 불과한데, 무려 삼천 명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웅정향이 믿을 수가 없어서, “정말이십니까? 아니 삼천 명이라니.... 그 정도의 제자들을 먹여 살리려면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도대체 이놈들이 내말을 어떻게 듣는 것이지? 그러면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말이냐?” 모두가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자 기혼사가 화를 내면서 반문한다. 이에 음구의도 너무 많다는 듯이, “하지만, 기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삼천이라니....” “흥! 이 자식들이 정말? 그놈들이 그 일대의 모든 실권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놈들한테 무슨 문제가 있을 것 같으냐? 가까이에 끼어들어 뭐라고 참견할 수 있는 세력도 없는데, 그 정도가 무엇이 놀랄 일이라고. 그보다는 그놈들의 흉악성이 문제인데.” 흥분하여 소리 지르는 기혼사를 단리유아가 말리며, “기선배님, 진정하시고 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십시오. 그러면 일행도 이해할 테니 말입니다.” “클클, 그래 자네 말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저 놈들은 도대체가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저러다니, 원. 쯔쯧.” 단리유아의 말에 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일행을 보며 못난이들이라는 듯이 비웃는 표정으로 말한다. 일행이 이에 속으로 다시 한 번 괴상한 늙은이라고 소리칠 때, “흘흘, 내 너희 어리석은 놈들을 위해서 말해주지. 귓구멍을 후비고 잘 들어라. 본래가 그놈들은 그 일대의 몇몇 세력이 연합하여 이루어졌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단단해져서 이제는 완전한 하나의 문파라 할 수 있게 된 것이야. 게다가 상권이나 토지 등을 대부분 차지해서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노예나 마찬가지야.” 일행이 겨우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일 때 단리유아가, “그러면 제가 상대할 만한 고수라도 있습니까?” “글쎄. 아마 일대일로 자네를 상대할 고수는 없을 것일세. 게다가 자네의 비무행에 도움을 줄만한 고수도 없다고 보아야 해. 나와 비슷한 수준인 녀석이 계주(契主)로 있으니.” 기혼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면 될 수 있는 대로 부딪치지 않고 통과하기로 하고, 혹시 다른 준비할 것은 없겠습니까?” “소사숙, 그 문제는 그동안 기선배님과 상의해서 준비했으니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옆에서 웅정향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일행이 좀 더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하여 대체적인 노정(路程)을 계획하고는 각자 자리를 떴다. 다음날 아침 일행이 모두 길을 떠나서 다시 북쪽으로 향하는 숲길에 다다랐을 때, 한켠의 그루터기에 앉은 채 철루존자(鐵壘尊子)가 미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뜻밖의 모습에 주춤거리고 걸음을 멈추었을 때, 철루존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기혼사가 앞으로 나서서 의아한 표정으로, “아니, 자네가 어쩐 일인가? 여태까지 요상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할 말이 있어 왔소. 저 사람에게 내 말 좀 전해주시오.” 듣기 싫은 쉰 듯한 거친 목소리에 기혼사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철루존자(鐵壘尊子)가 단리유아의 앞에까지 다가와서 무표정한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에 기혼사가 고개를 흔들다가 노려보는 철루존자의 모습에 앞으로 다가와서, “저놈이 말하기를 나중에 다시 한 번 대결하고 싶다는군. 게다가 자네를 찾아갈 작정이니, 반드시 기다려달라고 하네.” 기혼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철루존자(鐵壘尊子)를 향해서, “존자(尊子)께서 찾아오신다면 또다시 대결할 기회가 생길 테니, 오히려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언제든지 저를 찾아오십시오. 그러나 현재는 세외(世外)를 떠도는 입장이라 언제 다시 뵙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기혼사가 다시 철루존자에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는 바로 발걸음을 돌려 일행에게서 멀어져갔다. “으이구, 저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 도대체가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잠시 멀어지는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투덜거리는 기혼사를 재촉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밀림 사이로 보이는 한 줄기 숲길에 의지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오타와 오류가 보이면 바로 바로 지적해주세요. ###### 현문 님의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백상사(白象社) 백상사(白象社) 2 그로부터 이십여 일이 흐른 삼월 육일의 저녁노을이 질 무렵에, 일행은 일차 목적지로 삼았던 곤간(困桿)에 이르게 되었다 천밀석궁(千密石宮)에서 곤간(困桿)까지의 거리는 천리가 넘는 길로 다른 곳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산이 없는 편이어서, 천천히 이동했음에도 예상보다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노정(路程)의 주변이 크고 작은 강줄기를 따라 농경지와 낮은 구릉이 이어진 곳이어서, 이전과는 달리 울창한 밀림을 계속해서 지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로 강변이나 평야지대를 따라 이동하니 약간씩 돌아갔음에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에 단리유아도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었고, 일행 또한 급한 일도 없어서 쉬엄쉬엄 걸음을 옮기며 주변의 풍광(風光)에 시선을 가져가고 있었다. 곤간(困桿)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사고가 없었는데, 아마도 천밀석궁(千密石宮)에서의 비무가 사방으로 전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제는 싸우자고 찾아오는 고수들도 드물어서 일행은 모처럼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단지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기혼사의 심술과 장난에 일행이 더 피곤함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곤간에서 하루 쉴 때에도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인 파호추계(坡湖鎚契)에서는 이렇다 할 시비를 걸지 않아서, 일행은 어떨지 모르지만 단리유아는 지루함을 느낄 정도였다. 곤간을 떠나 남루(濫婁)에 이르는 오백여 리의 여정도 이전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단지 점점 산이 높아지고 밀림이 우거진 곳이 많아서 길이 거칠어 좀 더 힘들어진 것 정도였다. 일행이 미공하(湄公河)의 북편에 위치한 남루(濫婁)에 이른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흐른 삼월 십칠일의 오후 신시(申時:15-17시)초 무렵이었다. 강을 건너 도착한 남루는 미공하에 걸쳐있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는 번성한 모습이었다. 크고 작은 수십 척의 배들이 분주히 들락거리고 있었고, 옷을 거의 벗다시피 한 사람에서부터 머리를 깎은 승려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강변의 한쪽에 위치한 객관에 거처를 정한 일행은 짐을 풀고 각자 씻고 난 후에, 모여앉아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소사숙,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이 이곳까지 무사하게 도착했군요. 생각 밖으로 파호추계(坡湖鎚契)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웅정향의 말에 공손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흠, 정말 예상 밖이었지. 그놈들이 그렇게 조용할지 누가 알았는가? 흐흐흐, 아마도 우리를 보고 겁을 먹었을지도 모르지.” “뭐? 무슨 헛소리냐? 클클, 네놈들이 아니라 여기 단리소협 때문이었겠지. 사실상 남만(南蠻) 제일의 고수라는 철루존자(鐵壘尊子)와 비무에서 단리소협이 우세할 정도였으니, 그놈들이 호랑이 간을 삶아먹지 않은 이상 덤빌 생각은 못했을 걸? 너희들 정도의 고수야 그들에게도 여럿 있으니 상대하고자 한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단리소협이나 나 정도의 고수는 없다고 보아야하니 그놈들이 덤비지 못한 것이야. 암, 그렇구 말구.” 기혼사가 공손고를 면박주면서 말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끝나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좋아하는 모습에 일행이 눈살을 찌푸릴 때, 공손고가 속으로, ‘주책바가지 같은 영감탱이. 하여간에 자기 멋대로 라니까. 빌어먹을, 도대체가 저 모습에 누가 백 살이 다된 노인이라고 생각하겠어? 귀신은 뭐하나 몰라, 제기랄.“ 일행의 안색을 보고는 기혼사가 뭐라고 쏘아붙일 기세일 때,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기혼사에게 묻는다. “기노선배님, 여기까지 왔는데 백상사(白象社)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단리유아의 말에 화를 누그러뜨리며 얼굴의 표정을 바꾸면서, “흘흘, 그래 내 말해주지. 어떤 버릇없는 놈들은 들을 필요도 없겠지만, 자네가 물으니 내 대답하지 않을 수 없지.” 말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돌려 볼을 실룩거리며 일행을 노려보다가, “백상사(白象社)는 본래가 남조국(南詔國)의 왕성에 있던 국왕 직속의 천상군(千象軍)이 그 기원이라네. 남조국이 멸망한 후에 그들 일부가 이곳까지 내려와서 만든 것이 바로 백상사이지. 천상군은 코끼리를 모아서 만든 군대였는데, 그들을 조련하고 올라타 상대를 공격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체계적인 무공으로 발전했지. 이렇게 생긴 무공에다 새롭게 다른 무공을 포괄하여 생긴 것이 바로 백상사의 주요 무공인 점근상피공(粘筋象皮功)과 팔 척 길이의 장창(長槍)을 사용한 무예인 격차천창법(格扯穿槍法)이라네.” “기노선배님, 그러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게 보입니다만?” 음구의가 남조국(南詔國)의 멸망이후에 생겼다는 말에 의문을 느끼고 말한다. 이에 기혼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흠, 생긴 지는 이제 일갑자 정도 밖에 안 되었지. 본래 전대사주였던 사람이 일세에 보기 드문 대단한 고수였는데, 그 사람이 없었다면 이렇게 문파가 생기지도 못했을 것이네. 나보다도 반배정도가 높은 선배로 전대 남만(南蠻) 제일고수라 할 수 있었지. 게다가 나에게는 의형님이 되시는 분이었다네. 그 문하의 수는 백여 명에 불과하지만, 그들 모두가 대단한 고수들이어서 남만에서는 본문과 천밀석궁(千密石宮)과 더불어 삼대문파에 들지.” “의형님이라면 친분이 두터웠겠군요?” 옆에서 웅정향이 끼어들어서 물어볼 때, 기혼사가 과거를 회상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휴, 그래. 내가 정말 존경하던 형님이셨는데 이미 이십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네. 참으로 대단한 무인이자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분으로, 젊었을 때 너무 고생을 많이 했는지 그리 오래 사시지는 못했어. 지금은 그 아들놈이 사주(社主)를 맡고 있다네. 그놈도 뛰어나서 그 형님에 못지않은 고수라네. 철루존자(鐵壘尊子)와 비교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네. 십여 년 전에 싸웠을 때도 아깝게 졌었다고 들었으니. 그동안 수련해왔다면 틀림없이 무공이 더 상승했겠지. 아마 자네가 찾아가면 쌍수를 들고 반길 걸세. 자신의 무공을 입증할 좋은 기회일 테니. 게다가 이래봬도 내가 의숙부이니 괄시하지는 않을 걸세.” 철루존자(鐵壘尊子)와 맞설 만큼의 고수라는 소리에 일행이 걱정스런 얼굴로 단리유아를 바라볼 때, “흠, 그동안 상대할 만한 고수가 없어서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아주 좋은 상대가 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대가 된다는 듯이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한다. 일행이 그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이제는 말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말려 보았자 듣는 척도 안할 테니. 한동안 백상사(白象社)에 대해서 더 얘기를 나누고, 그동안의 풍물에 대한 각자의 감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녁식사를 마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흩어질 때, 단리유아는 고상식으로 지어진 객관의 난간으로 나가 주위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거룻배에 밝혀진 불빛으로 강물 위는 촛불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저녁을 지어먹는지 온갖 음식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한동안 주위의 정경을 바라보다가 자신만의 상념 속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여정(旅程)이 이어지는 저녁마다 수련한 덕분에 회공독결(回空毒訣)을 회정구전회혼마공에 포함시키는 것은 완성되었고, 금화선고(金花仙姑)의 채대법도 완전히 뜯어고쳐 자신만의 무공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근래에는 철루존자(鐵壘尊子)의 무공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대체적인 형은 완성되었지만, 수련하는 도중에 갖가지 문제점이 드러날 것이다. 철루존자(鐵壘尊子)의 권각을 연계해서 펼치는 것은 배울 점이 많았는데, 자신도 여러 무공을 같이 펼칠 수 있었지만, 그처럼 완전히 톱니바퀴가 돌듯이 하나의 공격으로 연이어 펼치는 것은 아니었다. 권(拳)이 나가면 다시 각(脚)이 뒤따르고, 다시 각(脚)이 지나가면 장(掌)이 뒤따라서 실전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고수라면 같은 화경(化境)의 고수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일순간이라도 당황하거나 대처가 늦다면 상대의 연환 공격에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각법(脚法)이 인상적이었는데, 자신이 창안한 난영칠각무(亂影七脚舞)와 좋은 비교가 되었다. 난영칠각무가 완전히 따로 떨어진 무공으로 몸을 허공에 띄운 상태에서 연이어 상대를 공격하는데 반해서, 철루존자(鐵壘尊子)의 풍전팔각로(風轉八脚路)는 제자리에 고정된 상태에서 한쪽 다리로만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각자 일장일단이 있었는데, 철루존자의 풍전팔각로는 다른 무공과 연계해서 펼칠 수 있다는데 큰 장점이 있었고, 자신의 난영칠각무는 그 자체로 따로 떨어진 무공으로 두 다리를 함께 이용해서 상대가 미처 대응할 순간도 없이 연이어 공격을 퍼붓는 각법이었다. 철루존자(鐵壘尊子)의 각법을 자신의 무공에 포함시킨다면, 다른 대전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따로 완성할지 아니면 난영칠각무(亂影七脚舞)를 수정하여 포함시킬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일단 기억했던 대로 해보면서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일 때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단리유아가 한참 무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기혼사가 난간 쪽으로 나오더니, “흘흘, 자네는 또 무공에 대한 생각인가? 쯔쯧, 젊은 사람이 어째 다른 것에는 흥미를 못 느끼나?” 생각에서 깨어나 단리유아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돌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어째서 혼자 나오셨습니까?” “그놈들 얘기는 하지도 말게, 원. 이 자식들이 나 몰래 지들끼리만 나가버렸다네. 하나 둘 밖으로 볼일 본다면서 나가더니 돌아오지도 않더군. 틀림없이 유곽(遊廓)에 갔을 것이네. 나쁜 놈들 같으니, 지들끼리만 가? 돌아오기만 하면 내 가만두나 봐라. 흥!” 말하다가 생각할수록 성질이 나는지 점점 소리를 높이면서 소리친다. 그러더니 단리유아를 보면서 애원하는 표정으로, “여보게, 자네. 나와 같이 나가지 않으려나? 혼자 있으니 심심해 죽을 지경인데, 응?” “전 혼자 생각해볼 것이 많아서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단번에 말끝을 잘라서 말하는 단리유아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로구만. 그렇게 재미없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군.” “저보다는 일행을 찾아보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몇 곳 뒤져보면 일행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행과 같은 이방인이 나돌아 다닌다면 그 일대에 소문이 퍼졌을 테니 말입니다.” 동문서답 식으로 대답하는 단리유아를 보다가 한숨을 쉬다가 소리를 지르며, “휴, 알았네. 알았어.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런가? 나 같이 나이 든 늙은이 혼자 찾아갈려니 그런 것이지. 젠장, 이놈들을 어떻게 해야 속이 후련할까? 아니면 당장 안면 무릅쓰고 찾아 나설까?” 중얼거리며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간다. 단리유아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상 노완동(老頑童)이라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자신의 생각에 빠졌다. 다음날, 단리유아가 아침의 수련을 마치고 혼자서 아침을 들 때까지 아무도 객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엔 기혼사까지 쫓아나간 것 같았다. 사시(巳時:9-11시) 말이 되어서야 돌아온 일행이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모두가 술 냄새를 풍기는 대다가 푸석푸석한 잠이 덜 깬 얼굴로 비틀거리며 서로 부축한 채 돌아왔다. 일행의 모습을 보고 단리유아가, “선사질도 같이 여자와 동침했소?” “소사숙, 저도....” 선상조가 당황하는 기색으로 말하려 할 때, 옆에서 기혼사가 끼어들어 음흉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낄낄, 내가 찾아 갔을 때 저놈들 모두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더구만. 하지만 계속 술이 들어가니 나중엔 다시 본성이 도지던지 저놈이 제일 설치더군. 흐흐흐, 아주 볼만 했다네.” 엊저녁에 단리유아하고 얘기를 한 후에도 도저히 혼자 있기 심심했던 기혼사가 일행을 찾아 나섰었다. 기혼사가 일행을 찾아갔을 때, 모두가 간만에 모여서 그동안의 여러 일을 돌이켜보면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특히나 기혼사에 대해 험담을 하는 중이었는데, 기혼사가 찾아오니 일행은 반길 수가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인 일행의 모습을 보다가 그렇지 않아도 심통이 나있던 기혼사가 화풀이로 술 속에 약을 넣어버렸다. 그 후로는 모두가 폭주하여 완전히 술에 젖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서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다. 다들 아침에 일어나니 각기 여자들을 끌어안고 자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돌아왔지만, 아직도 다들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기혼사의 말에 다들 얼굴을 찌푸리며, 틀림없이 기혼사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말이 없었다. 단리유아가 일행의 기색을 보다가 어쩐 일인지 대강 짐작하고는, “모두가 어서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오. 아무래도 백상사(白象社)에 찾아가 비무를 요청하는 것은 나와 기선배님 혼자서 가야할 것 같소.” “아니, 오늘 당장 가자고? 나도 피곤한데, 내일 같이 가면 안 될까?” 기혼사가 단리유아의 말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한다. 이에 공손고가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기선배.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선배 입으로 우리를 비웃었잖소. ‘그 정도 술에 정신이 나가다니, 이렇게 늙은 나도 정신이 말짱한데’ 하고 말이오.” “뭐라고? 이 자식들이 정말? 나도 술을 많이 마셨단 말이다.” 기혼사가 소리칠 때 일행 모두가 둘이서 다녀오라고 말하더니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단리유아가 일행을 욕하며 투덜거리는 기혼사를 이끌고 둘이서 백상사(白象社)를 찾아 나섰다. “기노선배님, 그만 화 푸시고, 어디로 찾아가야 할지나 설명해주십시오.” “흥! 정말 자네 때문에 이 무슨 고생인지.... 가세, 가. 제기랄, 이 자식들이 나를 또 따돌려? 어디 두고 보자.” 둘이서 동쪽으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십여 리 정도 걸었을 때, 야트막한 야산 아래에 이르렀다. 백여 장(丈) 높이의 숲이 우거진 산으로, 동북쪽 면을 뒤로하고 수십여 채의 목조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고상식으로 지어진 모습이었는데, 대부분이 풀로 이엉을 얹은 초가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평범한 마을로 보았을 것이다. 이곳이 백상사(白象社)라는 기혼사의 말을 듣고도 예상과는 딴판인 모습에 단리유아가, “선배님, 이곳이 정말 그곳이라는 겁니까? 보아하니 무슨 작은 촌마을 같이 보이는데 말입니다.” “이곳이 맞아. 어서 들어가기나 하세.” 기혼사가 짜증난다는 듯이 말하며, 앞장서 마을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서니 촌구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마을의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들어섰을 때까지 아무도 길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그래도 높은 담벼락이 처진 큰 집을 향해서 다가갔을 때, 무공을 연마하는지 담 너머로 사람들의 기합성이 들려왔다. 지키는 사람도 없는 대문을 향해서 다가가며, “그런데 이렇게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흥! 우리가 온 것을 이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네. 본래가 외곽에서부터 거미줄처럼 지하로 암로가 파진 곳이니. 겉으로만 이렇게 보일 뿐으로 누군가 침입하여 공격하려 했다간,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공격할지 모르는 곳이네.” 기혼사가 말하더니 손으로 대문을 부수듯이 크게 두드린다. “꽝. 꽝” “야, 이놈들아.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알았으면 나와서 맞이해야 할 것 아니냐?” 소리를 지르면서 계속해서 문을 두드릴 때, 대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사방 이십여 장의 드넓은 공터에 사오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세 사람의 노인이 앞으로 나오더니 기혼사를 보고 놀라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노선배. 어쩐 일이십니까?” “정말 간만이군요.” “하하하,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으셔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세 명의 쌍둥이 노인이 연이어 천둥 같은 목소리로 소리친다. 모두 키가 육척이 넘는 사람들로서 이미 백발이 무성한데도 전혀 기력이 떨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젊은 사람보다도 더 탱탱한 피부와 근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들은 백상사(白象社)의 최고수들 중의 세 사람으로서 백상삼로(白象三老)라는 명호를 가지고 있었다. 다가온 세 사람을 보다가 기혼사가 각자 다리를 걷어차면서, “모두 조그맣게 말하지 못해? 이것들이 그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벌써 잊어먹었나. 그리고 사람이 찾아온 것을 알았다면 문이라도 열어놓아야지 이게 무슨 심보냐? 내 이 자식을 가만두나 봐라. 야, 그 곰탱이 같은 놈은 어디 있냐?” 기혼사의 말에 세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노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본문의 사주(社主)이시고 나이도 들어서 마흔이 넘었는데....” “뭐? 그놈이 어릴 때부터 보아왔었는데 무슨 헛소리냐? 몇 년 못 보았다고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아이고, 형님. 형님이 없다고 벌써부터 괄시하다니, 지하에 계신 형님께서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지....” 기혼사가 소리를 지르다가 슬쩍 고개를 숙이며 한탄하는 듯이 말하는데,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청이 멍멍할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한참 기혼사를 달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안쪽으로부터 한 사람이 질풍같이 뛰어서 장내에 도착했다. 기혼사를 보더니 바로 달려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기숙부님. 죄송합니다. 오실 줄 아셨다면 미리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흥, 네놈이 이 숙부를 알아보기나 하는 것이냐? 도대체가 얘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이 모양이냐?” 주위를 흘겨보면서 기혼사가 말할 때, 무조건 고개를 숙이면서 잘못을 빈다. “잘못했습니다, 기숙부. 내 이참에 숙부님의 화가 풀릴 때까지 다들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좋아, 그럼 내 두고 보도록 하지. 그만 일어서 여기 이 사람과 인사부터 나누어라.” 두 사람의 하는 양을 보면서 기혼사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입문한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평소의 사주(社主)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기혼사의 말에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서 단리유아를 바라본다.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허리를 숙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정면으로 대하니 자신보다도 키가 큰 칠 척의 중년 사내였다. 게다가 몸통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자신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또 고슴도치처럼 돋아나 얼굴을 뒤덮은 수염과 툭 튀여 나온 큰 눈망울에 간이 작은 사람이 보았다가는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사나워보였다. 기혼사의 소개에 단리유아가 먼저, “단리유아라 합니다.” “하하하, 잘 오셨소. 그렇지 않아도 내 소문을 듣고서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뵈니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본인은 독첨광(犢瞻廣)이라고 하오.” 한어로 말하여 자신을 소개하는데, 종이 울리는 듯한 큰소리에 다시 기혼사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이 자식도 그러네. 이놈아, 좀 조용히 말하지 못해. 어째서 이 인간들은 목소리가 이리 큰지 몰라. 그만 떠들고 안으로 안내나 해라. 피곤해 죽겠으니.” “이런, 숙부님께서도 계신데....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모두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시지요.” 앞장서서 기혼사와 단리유아를 안으로 인도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은 독첨광과 백상삼로(白象三老)의 안내를 받아서 몇 개의 문을 지나서 한참을 걸어서 중앙의 대전으로 향했다. ***** 조금 늦었습니다. 오타와 오류가 보이시면 바로 지적해주세요. 전편의 추혼12절 님의 질문에 답하지요. 제 본래 구상은 각지역마다 40편 전후로 계획한 것입니다. [남만], [운남`서장], [천축], [천산`몽고], [북해`만주`장백] 순으로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제가 정확하게 분량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편수는 대충 정해져 있었지만, 이번에 한번에 모아서 계산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더군요. 모아보니 아래아한글에서 남만지역만 해도 대충 삼백페이지에 이릅니다. 조판용으로 한다면 두배 가까이 늘어나니 정말 난감할 지경입니다. 1부 전검행만 본래 구상으로 다섯권 정도로 끝낼 작정이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 출판할 때의 양식이 틀려서 아무래도 늘어날 것 같습니다. 한지역에 반드시 비무를 해야할 곳으로 서너 장을 잡고, 다시 비무만 이어지지는 않을 테니 싸우는 장면을 넣을 곳으로 서너 장을 잡은 다음, 다시 여정에 대한 전반적인 설정에 해당하는 것이 한두 장 정도 에 달합니다. 그러니 보통 40편이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 흠, 그러고 보니 각법에 대해서는 한번도 나오지 않았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각법의 고수와 싸울 때 넣기로 하겠습니다. $$$$$$ 그리운이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흐흠..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백상사(白象社) 백상사(白象社) 3 단리유아가 독첨광(犢瞻廣)을 따라 들어가면서 살펴보니 상당히 특이한 형태로 집들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평범한 촌락의 모습이었는데, 중앙의 담벼락이 쳐진 장원(莊院)에서부터 뒤편의 산 아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집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앞에서 보았던 집들은 평상시에만 사용하는 곳으로 보였고, 싸움이 일어나면 이곳 장원으로 모여서 결전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독첨광을 따라서 연이어 다섯 개의 문을 통과해서야 이층의 목조건물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이 백상사(白象社)의 집무청으로 보였는데, 폭이 오 장 높이가 삼 장에 이르는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는 소식을 전해들은 백상사의 인물들이 모여서 단리유아와 기혼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혼사를 알아보고 인사하며 안부를 묻는 등 잠시 소란스러운 장면이 이어지다가 소리치면서 빨리 들어가자고 다그치는 기혼사의 말에야 멈추고 대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대청 안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또다시 기혼사의 소개로 한동안 주위 인물들과 단리유아의 대면이 이루어졌다. 서로간의 인사가 끝났을 때, 독첨광이 껄껄 웃으며, “하하하, 정말 잘 오셨소이다. 단리대협. 그렇지 않아도 소문을 듣고 나서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숙부님과 같이 오셨으니 내 집처럼 한동안 머무시며 저와 같이 무학을 논하시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온몸을 제치면서 웃으며 말하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대청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다른 백상사(白象社)의 인물들은 만성이 되었는지 별다른 동요가 없었는데, 기혼사와 단리유아는 귀청이 울릴 정도여서 절로 안색이 찌푸려졌다. 이에 기혼사가 다시 독첨광을 노려보면서, “야 이 멍청한 곰 같은 놈아. 아까 전에도 목소리를 낮추라고 말했어, 안 그랬어? 너 어디 오늘 혼 좀 나볼래? 이 자식이 오랜만에 만났더니 기가 살았구만.” 방방 뜨면서 소리치는 기혼사의 말에 독첨광이 찔끔한 표정이 되어서 말한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숙부님.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그랬으니,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어릴 적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옛날 생각이 떠오르니 금방 기가 죽는 모습이었다. 전대사주였던 백상무후(白象武侯) 독우전(犢宇全)이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야 독첨광을 낳게 되었는데, 어릴 적에도 체구가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컸었다. 보통의 숙부라면 자신이 목마를 태우고 돌아다닐 텐데, 이 기혼사는 오히려 독첨광에게 올라타서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게다가 어찌나 장난이 심한지 찾아올 때마다 독첨광을 괴롭히지 않는 적이 없었다. 독첨광도 존경하던 아버지의 하나뿐인 의형제이니 어찌할 수도 없이 매번 당해야 했었다. 이 나이 들어 다시 목마 태우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얼마나 끔찍한지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고 있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 듯이 기혼사가 심통스럽게 한쪽 볼을 실룩거리며, “그렇지 않아도 밤새 돌아다닌 대다가 술까지 많이 마셔 피곤해 죽겠는데, 골이 울릴 정도로 크게 말하다니. 너 이....” “숙부님, 한번만 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상로주(象露酒)를 실컷 대접해 드릴 테니. 야, 철주(鐵柱)야. 어서 가서 안채에다 술상을 보도록 일러라. 음식도 푸짐하게 준비하게 하고.” 중간에 말을 막으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말한다. 이에 한 청년이 대청의 한쪽 구석에서 일어나 미적거리며 다가왔다. 그 아들 역시 덩치가 산만하고 독첨광을 쏙 빼닮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영락없는 부자간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본래 독철주(犢鐵柱)도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같이 마중 나왔었는데, 기혼사를 보고는 기겁해서 구석에 숨어있었다. 기혼사가 독첨광의 말에야 진정하더니, 그 아들인 독철주를 보다가 눈빛을 빛내면서, “호, 이놈이 그 녀석인가? 흠, 정말 많이 컸구만. 이 녀석이 열 살 때 보고는 처음 본 것인데.” “하하하, 그렇지요. 얘, 이리와 인사드리거라. 어찌 그렇게 부끄러움이 많으냐?” 부친을 원망스레 쳐다보며 다가오는 독철주를, 기혼사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까 전에는 안 보이더니, 내가 보기 싫었던 모양이구나? 클클, 어째 기분이 영 그런 걸?” “아, 아닙니다. 어찌 제가 조부님께 그런 마음을 품고 있겠습니까? 아버님 말씀대로 오랜만에 뵈니 부끄러움이 일었나봅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기혼사가 음흉하게 웃음 지으며, “킬킬. 무슨 부끄러움은, 체구에 안 맞게 시리? 흐흐흐, 너 꼬마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중에 즐겁게 놀아보자.” 잠시 후 독첨광이 울상인 독철주를 내보내는데, 앞날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대청을 벗어난다. 멀어지는 자식의 모습에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독첨광이, “그런데, 숙부님. 이 남루(濫婁)까지 오셨으면 바로 찾아오실 것이지 어찌 다른 곳에서 머무셨습니까? 오늘이라도 당장 거처를 옮기시지요. 단리대협도 이곳에 머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제 오후 늦게 도착해서 이제야 찾아온 것이야. 게다가 다른 일행도 있었으니. 단리소협, 어차피 비무도 해야 할 것이니, 차라리 이곳으로 옮겨서 쉬는 것이 어떻겠나?” 기혼사가 독첨광의 물음에 답하고, 다시 단리유아에게 물어본다. 이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도 더 움직이기 싫으니 네가 사람을 보내서 불러 오려무나. 단리소협이 서찰을 하나 써 주게. 그놈들이 찾아오도록.”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한다. 잠시 서로 담소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청에서 나와 독첨광을 따라서 안채로 향한 후에 독첨광의 소개로 그의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부인이 셋에 남녀 아이가 일곱으로, 부인들은 오 척이 겨우 넘는데 반해서 자식들은 하나 같이 남녀 할 것 없이 체구가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기혼사가 눈빛을 빛내며 아이들을 바라볼 때, 기혼사를 기억하는 열다섯 살이 넘는 세 명의 소년들은 울상을 지으면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잠시 소개가 끝난 후에 장남인 독철주만 남아 곁에서 시중을 드는 가운데, 점심을 같이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리대협. 이번에 철루존자(鐵壘尊子)와 대결하였다고 들었는데, 그래 비무해본 소감이 어떠했습니까?” 독첨광이 바로 단리유아에게 묻는다. 자신과도 싸워본 적이 있으니 아무래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무공과도 간접적인 비교가 될 터이니. 곁에 서있던 독철주도 관심이 이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자신과 나이차가 별로 없는데도 그 무공에 있어서는 비할 수 없는데다가, 이번에 철루존자(鐵壘尊子)와의 소문을 듣고서는 더욱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권각(拳脚)의 달인으로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더욱 대단한 것은 그 투기(鬪氣)로 끝까지 물러섬이 없는 것이 강하게 인상에 남았습니다.” 단리유아가 당시를 돌이키면서 무심하게 말할 때, 기혼사가 옆에서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게 투기(鬪氣)였나? 광기(狂氣)였지! 완전히 죽자 살자 덤비는 놈이었는데, 자네가 조금만 약했더라도 상처가 그 정도로만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네. 비무하면서 그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놈은 내 처음 보았네. 자네도 그렇지, 중간에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맞서다니 불상사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랬나?” “아니 어느 정도였기에? 저희도 소문으로 들었지만, 단지 무승부를 이루었다고 알려졌을 뿐이었는데?” 독첨광이 놀란 표정으로 끼어들어 말한다. 이에 기혼사가, “무승부?” “예, 반나절이 넘게 싸웠지만 서로 승부를 낼 수 없다고 알려졌지요.” 독첨광의 말에 기혼사가 냉소를 날리며, “흥! 뭐가 무승부란 말이냐? 천밀석궁(千密石宮) 놈들이 헛소리를 지껄인 모양이군. 먼저 쓰러진 놈이 그놈이었는데. 서로 죽자 살자 달려들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웠으면서.... 너도 나중에 비무할 때 날뛸 생각이라면 아예 비무할 생각도 마라.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네놈부터 관두지 않을 테니.” “숙부님, 싸우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독첨광(犢瞻廣)이 대꾸할 때, 기혼사가 두 눈을 치켜떠 노려보며, “뭣이라고? 네놈은 이 늙은이가 놀라서 빨리 죽기라도 바라는 것이냐?” “아니 저, 그런 뜻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실랑이에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기선배, 독(犢)대협의 말씀대로 몰입해 싸우다보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 같은 강호(江湖)의 무인으로서 생사에 너무 연연할 수도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두 사람이 무표정하게 말하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먼저 기혼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여간에 자네도 그놈 못지않게 괴인(怪人)이야. 어디 자네 맘대로 해보게.” 독첨광도 한동안 멍하니 단리유아를 바라보다가 껄껄 웃으며, “하하하, 그렇지요. 우리 같은 무인이 그런 것에 연연할 수 없지요. 정말 이번에 맘 놓고 비무해볼 수 있겠군요. 그동안 적당한 상대가 없어서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지도 오래였는데. 하하하” “으이구, 이자식도 성질이 도졌나보군. 으휴, 이번에도 놀라서 수명이 팍팍 깎일 것 같군. 그만 좀 웃어, 이 자식아! 귀청 떨어질 것 같으니.” 시끄러운 웃음소리에 기혼사가 독첨광에게 화풀이한다. 잠시 두 사람이 티격태격 거릴 때, “독대협. 그보다 언제 비무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여태까지 말하면서도 전혀 희노애락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에, 독첨광이 약간 어색한 표정이다가, “흠, 저야 언제든지 괜찮으니, 단리대협이 원하는 날대로 하겠습니다.” “어제 도착했으니 며칠 쉬다가 하세. 모레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 어떤가?” 기혼사가 먼저 끼어들어 말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하여, 모래 정오에 뒤쪽 야산의 조용한 골짜기에서 하기로 정했다. 비무에 대한 세부사항을 결정한 다음, 잠시 서로에 대해서 얘기하고 철루존자(鐵壘尊子)와의 비무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점심을 마친 후에 단리유아가 한 쪽에 마련된 별채로 돌아와 쉬고 있을 때, 오후 늦게서야 일행이 찾아왔다. 다들 아직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간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기혼사는 제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쏘아 다니다가 저녁 늦게야 다시 돌아왔다. 다음날에야 제대로 기력을 회복한 일행이 기혼사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하라고 달라붙어 캐물었지만, 계속해서 음흉한 표정만을 지은 채 놀리며 사실을 말하지 않는 기혼사였다. 일행이 제풀에 지쳐 떨어져나간 후에, 기혼사가 일행을 데리고 가서 백상사(白象社)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게 했다. 곧이어 간단한 주석(酒席)이 벌어지고 모두가 떠들썩하게 웃고 마시며, 그동안의 여정(旅程)에 대해서 백상사의 사람들에게 말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단리유아는 그 시간동안 홀로 떨어져 비무에 대한 준비로 심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다음날 정오에 기혼사를 따라 후문을 통하여 뒤쪽 야산으로 향했다. 조그마한 골짜기의 한쪽 구석에 마련된 비무장은 주위에 수풀이 우거져 있는 방원 이십여 장의 공터로 아무래도 독첨광의 수련장인 것 같았다. 비무장에는 백상삼로(白象三老)와 독철주 등을 위시해서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맨 앞에는 독첨광이 나서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서로 인사를 나눈 후에 독첨광과 기혼사, 단리유아만 중앙에 남은 채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가 뒤로 물러났다. 기혼사가 두 사람을 보면서 걱정스런 얼굴로, “제발 이 늙은이를 위해서도 적당하게만 싸우도록 하게나. 이미 비무에 대한 다른 사항은 약속대로 변함이 없다는 것으로 알고 난 물러날 테니.” 기혼사의 말에도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이 없었다. 독첨광은 자신보다 조금 큰 팔 척의 장창을 손에 쥔 채 굳은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에 반해서 단리유아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두 사람의 기색을 바라보다가, 기혼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혼자 궁시렁대면서 물러났다. 두 사람이 서로 포권한 뒤에 거리를 벌려 삼 장(丈) 정도가 되었을 때, 단리유아가 먼저 선공에 나섰다. 검을 빼들며 일로행(一路行)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달려들면서, “광단섬영(光斷閃影)” 시퍼런 검광(劍光)과 함께 한줄기 검기(劍氣)가 줄달음쳐 독첨광을 덮쳐갔다. 추전신쾌검(追電迅快劍)의 일초로 산서성(山西省)일대의 고수 산서쾌검(山西快劍) 이문광(李雯曠)의 검법이었다. 추전신쾌검은 오직 쾌자결(快字訣) 하나가 중심이 된 검법으로 쾌검으로서는 강호(江湖)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오래전 단리유아가 비무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산서(山西)일대에서는 십대고수에 들 정도의 고수였던 산서쾌검(山西快劍) 이문광(李雯曠)과 부딪쳐 가르침을 청했었다. 하지만 당시 열 셋의 어린 나이에다 반점으로 뒤덮인 괴상한 모습의 소년이 난데없이 비무를 청하자, 이문광은 어이없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도 산서에서는 알아주는 자신인데 이런 애송이가 찾아와서 비무를 청하다니. 이에 비무를 시작하자마자 이문광이 비웃음을 흘리면서 검으로 희롱하듯이 단리유아의 전신 곳곳에 상처를 만들었다. 살아난 것도 운 좋은 줄 알라며 온갖 조롱하는 말과 함께. 그러나 후일 단리유아가 재도전을 했을 때는 딴판으로 변해서 이번에는 반대로 이문광이 쩔쩔매게 되었다. 자신이 쾌검을 펼칠 때마다 미리 검로(劍路)를 예상하여 중간에서 끊어버리니 제대로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먼저 이문광이 제풀에 지쳐서 패배를 자인하고는 단리유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자신의 자세만 보고도 검로를 예상할 수 있는지. 그는 단리유아가 한번 겪어본 무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무공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설명을 듣고 나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단리유아가 추전신쾌검(追電迅快劍)을 펼쳐보이자 허탈한 표정으로 검을 부러뜨리고 은거해버렸다. 단리유아의 공격에 독첨광이 마주쳐나가며 창을 회전하여 검기(劍氣)를 갈라 쳐내면서, 앞으로 나아가며 창으로 연속으로 상중하를 향해서 찔렀다. “차천삼점로(扯穿三點路)” 창영(槍影)이 일어나 단리유아의 전신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격차천창법(格扯穿槍法)의 일초로 언뜻 보기에는 단순하게 세 번을 찌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마주칠 때는 창 자체에 전사(纏絲)력이 가미되어서 상대의 무기를 부러뜨릴 정도로 파괴력이 강했다. 또 순간이라도 멈칫거린다면 이어지는 공격에 꼬챙이처럼 끼인 채 그 회전력으로 분시되는 초식이었다. 이처럼 격차천창법은 보통의 창법과 달리 전사가 그 근본을 이루어서 단순한 상처라도 크게 찢어발기는 특징이 있었다. “채챙. 챙챙” 검과 창이 부딪칠 때, 손목에 전해오는 충격으로 단리유아 역시 상대의 창법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즉시 신형을 틀었지만 이어지는 공격에 옆구리의 옷자락이 조각나서 떨어져 나갔다. 조금만 대응이 늦었어도 단순하게 옷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독첨광의 왼쪽 측면으로 빠져나가면서 즉시 반격해나갔다. “늠약설상로(澟若雪霜露)” 은청빛 검광(劍光)과 함께 검영(劍影)이 일어나 스쳐지나가는 독첨광의 측면을 노리면서 달려들었다. 마치 흰 눈과 찬 서리가 내려서 차가운 느낌을 전해주듯이, 분분히 아름다운 은빛 검화(劍花)가 날아갔다. 사천성(四川省) 대설산(大雪山)에 위치한 설산파(雪山派)의 검법인 설상검십이로(雪霜劍十二路) 중의 일초였다. 흩날리며 자신의 측면을 노리면서 다가오는 검화(劍花)에, 독첨광 역시 왼쪽으로 회전하면서 단리유아의 공격을 맞받아쳐갔다. “차천월광행(扯穿月光行)” 창이 반원을 그림에 따라서 둥근 월형(月形)의 방패 같은 창영(槍影)이 일어나 단리유아의 공격을 막아갔다. 격차천창법의 일초로 수비중심의 초식이라 할 수 있었다. “차차창 채챙” 연이어 부딪치는 검과 창에 의해서 불똥이 튀겨 흩날리고, 두 가지 무기의 충돌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장내를 울렸다. 약간 손해 보았다는 것을 느끼자, 이번에는 오히려 독참광이 단리유아를 쫓듯이 다가가면서, “차천단광첨(扯穿斷光尖)” 창을 내리그음과 동시에 연이어 단리유아를 찌른다. 섬광(閃光)이 일어나더니, 단리유아의 전신을 향해서 수십 개의 창영(槍影)이 일어나 달려들었다. 마치 햇빛을 가르고 지나가는 한 줄기 섬광처럼. 단리유아도 독참광의 공격에 계속해서 왼쪽으로 돌면서 일부는 측면으로 흘리고 일부는 검을 휘둘러 없애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서, “몽포울산향(濛泡鬱散香)” 검광(劍光)이 일어남과 동시에 검기(劍氣)가 뭉게뭉게 일어나 장내를 뒤덮으며 독참광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흐릿한 물거품이 안개처럼 일어나 시야를 가리듯이, 흩어지는 향기가 장내를 진동하듯이. 본래 이 초식은 과거 여인문파로서 위명을 날리다가 지금은 세월 속에 파묻힌 운영비곡(雲影秘谷)의 절기로 포영진향검법(泡影振香劍法)의 일초였다. 그 아름다움과 섬세함으로 과거 강호(江湖)의 십대검법에 들 정도로 강한 검법이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초식이 흩어져 이제는 겨우 형태만 남은 검법이었다. 우연히 운영비곡에 들어섰던 단리유아가 몇 안 남은 후인들과 싸우면서 터득한 검법으로 자신이 새롭게 뜯어고친 초식이었다. “채챙. 차차창” 검영(劍影)과 창영(槍影)이 서로 상쇄되고, 부딪치는 무기들의 광채가 사방으로 번쩍였다. 서로의 검법과 창법이 물러서지 않고 계속 부딪치자, 사방으로 광풍이 일듯이 검풍(劍風)과 창의 회전력에 의해 흙먼지가 말아 올라 하늘을 뒤덮었다. 장내는 미친 듯이 일어나는 바람에 의해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까지 흙먼지와 풀잎파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붙여넣기를 잘못했군요. 정신이 없다보니 이런 실수도 하네요. 오타와 오류가 보이시면 댓글을 써주세요. ###### 드니로 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차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아님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한참 헤맸답니다. 감사드립니다. 작가아님 님의 말씀대로 깨지는 한자가 많습니다. 이건 제가 어찌해 볼 수가 없습니다. 고무림이나 f-world에서는 완전하게 나오는데, 여기에서만 그런 것이거든요. 공지 [출판 & 삭제] 제가 이런 것도 써보네요.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이번에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북#미디어라는 곳과 출판을 약속했답니다. 현재 대충 삼권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우선 두권을 먼저 출판하자고 해서 이렇게 공지를 씁니다. 아마 2주 안에 삭제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만지역이 끝나는 것이 대여섯 편 정도에 이르는데, 그것까지 포함하면 삼권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도 얼마 안 있어 삭제할 것 같군요. 거의 다 끝나가니. 그런데 계속해서 전편을 수정하면서 새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너무 힘 드는군요. 게다가 새 글을 쓰는데도 제대로 집중하기도 힘들고, 수정하는데도 시간이 더 드는 것 같습니다. 일러스트로 단리유아가 지나간 여정에 따라서 지도도 그려야하는데, 일단 하북, 산동, 강소, 절강, 해남·광서까지는 다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정표를 붙여야하는데 계속해서 지도도 수정하고, 지도에 맞게 다시 글도 수정해야하니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아, 정말 괜히 넣을 결심을 했다는 후회가.... 다 다음 주까지만 이해를 해주십시오. 앞으로는 삼일에 한편씩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은 화요일 저녁에 올리도록 하지요. 백상사(白象社) 백상사(白象社) 4 단리유아와 독첨광의 결전은 마치 미리 약정이라도 한 것처럼, 한 사람이 공격하면 한 사람이 맞서는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온갖 초식을 사용해서 독첨광 주위를 돌아가면서 공방을 계속하는데 반해서, 독첨광은 대체로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공격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싸우면 싸울수록 흥이 나는지 조금도 물러설 기미 없이 상대를 공격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장내는 두 사람의 움직임으로 번뜩이는 무기들의 섬광(閃光)과 부딪치는 시끄러운 소리가 무성할 뿐, 점차 검영(劍影)과 창영(槍影)에 가려져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또 워낙 일수 일수의 공격과 방어가 순식간에 일어나니,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두 사람의 결전을 보면서 한쪽에 모여 있던 일행들은 신중한 기색으로 지켜보지만 그리 걱정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이에 반해서 백상사(白象社)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모두가 비무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백상일로(白象一老)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사주(社主)의 무공도 대단하지만, 저 사람의 무공은 오히려 더 놀랍군.” “맞소이다. 형님. 소문에 철루존자(鐵壘尊子)와 무승부를 이루었다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구려.” 옆의 백상이로(白象二老)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독철주가, “세상에 저 사람은 한 번도 같은 초식을 펼치지 않고 있군요. 게다가 평소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삼류초식들이 저렇게 기묘한 효과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렇다네. 역시 강한 무공보다는 그것을 펼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케 해주는 것 같구만. 나도 저런 초식들을 저렇게 사용할 줄은 정말 뜻밖이로군. 다른 사람들도 단리유아의 검초에 대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초식에서부터 기기묘묘한 초식까지 적절한 배합을 통해서 독첨광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만(南蠻)에서 손꼽히는 고수라는 자신들의 사주(社主)가 갖은 공격을 퍼부어도 그리 유리해보이지 않아서 더욱 그러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이 서로 두 사람의 비무에 대해서 떠들고 있을 때, 비무의 상황은 점점 치열해져가고 있었다. 단리유아는 상대의 독특한 창법(槍法)에 의해서 직접적인 검격은 최소한으로 줄인 채 주로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식으로 막으며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독첨광은 격차천창법(格扯穿槍法)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뜻밖의 일수에 당황하여 물러서는 경우가 많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단리유아가 적응하는지 창법의 흐름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더 이상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패배를 자인해야할 것을 느끼자, 독첨광은 입술을 깨물고 여태까지 펼치지 않았던 격차천창법(格扯穿槍法)의 후반 십이식을 펼칠 결심을 했다. 총 삼십육식으로 구성된 격차천창법에서 후반 십이식은 그 정화라 할 수 있었는데, 그 자신 역시도 최근에 이르러서야 모두 연성할 수 있을 정도로 난해한 초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리유아의 공격을 막아선 후에 자세를 바꾸어 창을 머리위로 들어 올림과 동시에 내려치며, “격차타지폭(格扯墮地爆)” “쿠쿵. 콰쾅” 창이 땅을 내려치는 굉음과 동시에 단리유아를 향해서 지면이 터져나가며, 창기(槍氣)가 잇달아 치솟으며 공격해왔다. 상대의 공격에 단리유아가 검을 들어 천주부동(天柱不動)의 자세로 잠시 멈추었다가, 자신의 사방을 향해서 내려치며, “팔황건곤쇄(八荒乾坤碎)” 구름 같은 검영(劍影)이 일어남과 동시에 무수한 검기(劍氣)가 사방으로 폭사하면서 주위의 땅을 물샐틈없이 파헤친다. 이 초식은 실전된 건곤십삼검(乾坤十三劍)의 일식으로 본래 다수의 합공에 대응해서 펼치는 것이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장 알맞은 초식 중의 하나였다. “콰콰쾅. 퍼퍼퍽” 사방 일 장(丈) 이상의 땅바닥이 뒤집히며 덮쳐오던 창기(槍氣)와 검기(劍氣)가 터져나갔다. 비산하는 흙먼지에 뒤덮인 채 단리유아가 약간 손해 본 것을 느끼고 있을 때, 재차 독첨광의 공격이 이어졌다. 땅을 내려친 창의 탄력을 이용해 신형을 허공으로 삼 장 이상 솟구쳤다가 떨어져 내리며, “격차풍파전(格扯風波轉)” 내려치는 창과 함께 창영(槍影)이 허공을 뒤덮으며 마치 소용돌이가 일어난 듯이 회전하는 창기(槍氣)가 일어나 단리유아를 향해서 덮쳐왔다. 이에 단리유아 역시 물러서지 않으며, 검을 들어 올리며 허공을 향해서, “무중일천광(霧中溢釧洸)” 검광(劍光)이 번쩍임과 동시에 고리모양의 검화(劍花)가 연이어 피어나 허공을 감싸듯이 포위하면서 독첨광의 공세에 맞부딪쳐갔다. 마치 안개 속에서 솟구치는 옥환(玉環)이 번쩍이며 터져 나오듯이. 이 초식은 사천성(四川省)과 호북성(湖北省) 사이 무산(巫山)에 위치한 무산신녀궁(巫山神女宮)의 운무천라검법(雲霧天羅劍法)의 일초로서, 허공중에서 연이어 터져나가는 검화로 상대를 제압하는 초식이었다. “콰콰쾅 퍼퍼퍽” 창영(槍影)과 검영(劍影)이 부딪쳐 상쇄되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짐과 동시에 은청색의 검화(劍花)와 청색의 창기(槍氣)가 허공을 수놓으며 터져나가는 것이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두 사람의 공세가 맞부딪친 후에 곧바로 서로가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한쪽에서 지켜보던 백상사(白象社)의 사람들이 두 사람의 비무를 보면서 걱정스런 기색으로 바라본다. 두 사람의 격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백상일로(白象一老)가, “이거 비무치곤 너무 살벌하지 않는가? 이러다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이군.” “그러게 말이오. 사주(社主)가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옆의 백상이로(白象二老)가 응답할 때, 같이 지켜보고 있던 독철주가 걱정스런 얼굴로, “저 지금이라도 중단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마지막 초식까지 펼칠 모양이신 것 같은데.” “우리도 알고 있지만, 이미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네. 게다가 끼어들어 중단시키면 나중에 사주(社主)의 노화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 자네가 할 텐가?” 독철주가 그래도 안 된다는 듯이, “저희야 뒷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저기 조부님께서야 괜찮으실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멈추도록 해야지요. 저번에 저 사람이 철루존자(鐵壘尊子)와 싸운 얘기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불리할 것 같아 그럽니다.” “이미 기선배가 끼어들기도 늦었다네. 우리도 그 얘기를 들었지만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일세.” 백삼삼로(白象三老)가 말하며 한숨을 내쉰다. 모두들 걱정스런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당장에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다들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편, 한쪽에 따로 서서 지켜보고 있던 기혼사도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이 자식이 그렇게 내가 말했어도 듣지 않고 후반 초식까지 펼치다니. 내 가만 놔두나봐라. 으이구, 저 사람도 내가 그렇게 일렀으면 적당히 하고 물러설 일이지, 오히려 뛰쳐나가 끝까지 물러서지 않다니. 정말....” 단리유아까지 노려보면서 인상을 가득 찌푸리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행의 안색도 처음과는 달리 걱정스런 기색이 완연해져서, 다들 두 사람의 비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휴,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로구만. 웬만큼 했으면 물러설 일이지 서로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니, 원.”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공손고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다. 웅정향이 말을 받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저 독대협도 그렇지만 사숙의 성격에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을 죽기보다도 싫어할 테니, 정말 이러다 또 서로가 중상을 입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그렇게 상처를 입고도 전혀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구만. 보통사람이 그 정도 상처를 입는다면 아무래도 망설이게 될 것인데.” 공손고가 고개를 저으며 정말 못 말릴 사람이라는 듯이 말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음구의가 고개를 돌려서, “휴, 정말 소사숙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무공에 열성을 가지고 연마한다고 해도 저처럼 전신을 내던져서 하는 경우란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비무를 한다고 해도 결코 이 정도까지 하지도 않고 어쩌다가 한 번 하는 정도인데, 사숙께서는 밤낮으로 적수를 찾아 싸우고 다시 그 무공을 연구하니....”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음구의를 보면서, 공손고가 안색을 찌푸리면서, “그래도 그런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네. 사람이 너무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무감정하니 도대체 삶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그렇게 무공이 강해져 보아야 무엇 하겠나? 휴, 나라면 차라리 평범하게 사는 것을 택할 것이네.” “소사숙께서 그런 것은 그럴만한 사연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다 입장이 다르니,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어렵지요.” 선상조가 낮게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대체 어떤 사연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며 각자 생각에 잠겼다. 한편,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두고 떠들고 있을 때, 두 사람의 접전은 그 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전신의 옷이 조각나고 곳곳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며 공격을 계속해가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독첨광을 향해 다가가며,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제 이초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을 펼쳤다. 반월형의 검강(劍剛)이 솟구쳐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독첨광이 창을 허공을 격하고 점을 찍듯이 찌르며, “차천천척뢰(扯穿千斥雷)” 시퍼런 창두 모양의 바늘처럼 보이는 강기(剛氣)가 연이어 일어나 허공에 나타나더니 검강(劍剛)을 향해서 맞서나갔다.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검강과 강기가 부딪치면서 허공을 은청(銀靑)빛으로 물들이며 폭발한다. “콰르릉. 콰쾅” 굉음과 함께 흩어지는 강기(剛氣)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고 있었다. 땅바닥이 헤집어지고 조각난 풀잎과 흙먼지가 허공을 물들이고 있을 때,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다가오는 흙먼지를 휘저으며 더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괜히 흩어지는 강기에 맞기라도 했다간 중상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검강(劍剛)과 창강(槍剛)이 부딪칠 때, 단리유아는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왼쪽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천애만성련(天涯滿星連)“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제 사초로서 허공에 백팔개의 검강(劍剛)을 형성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나선으로 회전하면서 가운데의 검강에서부터 차례대로 상대를 향해서 튀어나갔다. 맞서오는 검강(劍剛)을 보면서 내상으로 넘어오는 죽은피를 삼키고는, 독첨광 역시 바로 창을 휘둘러서 허공을 연속으로 내리긋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단리유아의 공격에 미처 상처를 돌볼 시간도 없었다. “차천과천하(扯穿過天河)” 휘둘러지는 창의 궤적과 함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강기(剛氣)가 일어나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이 퍼져나가며 맞서나갔다. “콰콰쾅! 쿠쿠쿵.” 다가오는 은청색의 화살을 청색의 괴조가 하나하나 없애듯이, 서로가 연이어 부딪쳐 폭발해가며 허공을 수놓는다.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검광(劍光)과 창의 광채가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만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서로가 물러서지 않고 부딪친 결과 두 사람 모두 심각한 내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단리유아는 내상보다는 조각나 흩어지는 강기(剛氣)에 전신 곳곳이 갈라 터져 온몸을 선혈로 물들이고 있었고, 독첨광은 점근상피공(粘筋象皮功) 덕분인지 외상보다는 내상이 심각한 상태로 넘어오는 죽은피를 연이어 토해내고 있었다. “독대협, 그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리유아가 전신을 지혈하면서 독첨광을 보면서 말한다. 이때, 기혼사가 다가오면서, “그래, 그만하는 것이 좋겠네. 첨광아, 너도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 내상이 워낙 심해서 계속했다가는 회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보이는데.” “숙부님, 오늘과 같은 기회가 아니면 또 어느 때 제가 전력을 다해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최후초식이 남아있으니, 그 한 초만 펼치도록 하겠습니다. 단리대협, 어떻소? 마지막 일초를 받아주시겠소?” 거친 숨을 내쉬며 독첨광이 말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좋습니다. 일초라면.” “뭐가 어째? 너 제 정신이냐? 그 몸으로 또다시 무공을 펼치겠다고?” 단리유아가 승낙할 때, 기혼사가 독첨광을 손가락질하며 얼굴을 붉히고 소리친다. 이에 독첨광이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리며 기혼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숙부님, 어서 비키십시오. 잘못했다가는 숙부님도 피해를 볼 수 있을 테니....” “뭐, 뭣이라? 이 자식이, 정말?” 기혼사가 소리칠 때, 벌써 독첨광이 내력을 운기하여 창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는, “너 이 자식 이따가 보자. 젠장할, 어떻게 된 것이 저번과 똑같아? 아, 제기랄.” 뒤로 물러나면서 두 사람을 욕하며 투덜거린다. 기혼사가 완전히 뒤로 물러설 때, “단리대협, 이번 공격은 조심하시오. 본문 창법의 최후초식이니, 나조차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소이다.” 이때, 독첨광이 최후초식을 펼친다는 말을 듣고 백상사(白象社)의 인물들이 기겁을 하고는 뒤로 물러선다. 한쪽에서 영문을 모르고 바라보는 일행에게도 소리쳐 더욱 뒤로 물러나게 한다. 주위가 소란스러울 때,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욱 뒤로 물러서 십여 장(丈) 간격으로 거리를 벌린다. 뒤로 단리유아가 물러선 것을 보고는 곧이어 독첨광이, “차천성폭만(扯穿星爆滿)” 이에 맞서 단리유아 역시, “천애은하멸(天涯銀河滅)” 독첨광이 말과 동시에 모든 내력을 끌어 모아 강기(剛氣)를 둘러싼 창을 허공으로 내던진다. 오 장(丈) 위 허공에서 멈추어 거대한 원반 모양으로 회전하다가, 일순 창과 함께 강기가 터져 나간다. 산산이 조각나서 마치 별이 터지듯이 허공을 물들이며 폭발하다가 단리유아를 중심으로 폭사된다. 단리유아도 이미 천애구검(天涯九劍)의 제 오초 천애은하멸(天涯銀河滅)을 펼친 후라, 무수한 검강(劍剛)이 허공을 뒤덮으며 상대의 공격에 맞서가고 있었다. 서로 부딪쳐 폭발하던 검강들이 이윽고 상대의 공격과 부딪치자 우레와 같은 폭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며 허공은 온통 강기들이 폭발하면서 내는 소리와 빛줄기에 찬연히 물들고 있었다. “우르릉. 콰쾅. 콰르릉 쾅쾅.”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데 십리 밖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더불어 흩어지는 강기(剛氣)가 사방으로 폭사되며,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물러섰던 사람들도 튀어 오르는 돌조각과 조각나 흩어지는 나뭇조각을 피하느라 바쁠 정도였다. 한참 후, 허공을 뒤덮였던 먼지가 가라앉은 후에야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독첨광은 이번의 초식에 온 내력을 쏟아 부은 대다가 그동안의 내상이 더욱 악화되어 뒤쪽으로 튕겨나가 혼절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전신곳곳에 상처를 입어서 생명이 위급할 정도로 보였다. 단리유아 역시 무사하지 못해 내상은 둘째로 치더라도, 외상이 너무 심했다. 온몸에 조각난 창의 조각들이 박힌 상태였고, 강기(剛氣)에 스친 여파로 곳곳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장내로 뛰어든 기혼사가 상황을 알아보자마자 기겁한 목소리로, “이런 제기랄.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야, 이놈들아. 빨리 이리 오지 못해!” 고래고래 소리치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다가온 사람들이 모두가 놀라 독첨광과 단리유아에게 달라붙어 상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야, 어떠냐? 죽지는 않았겠지?” 기혼사가 백상사(白象社)의 사람들을 헤치며, 다급한 어조로 물어본다. 이에 백상일로(白象一老)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휴,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부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상은 별 것 아니지만, 내상이 너무 심해서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제대로 회복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듣지 않더니. 이런 미련 곰탱이 같은 놈 같으니라고.... 에잉!” 얼굴을 찌푸리며 걱정 반 노여움 반이 뒤섞인 표정으로 기혼사가 투덜거린다. 이에 독철주가 돌아보면서, “그보다 단리대협은 어떻습니까? 아까 보니 그분도 상처가 보통이 아니던데.” “지금 그 사람 걱정할 때냐? 네 아비가 이 꼴이 되었는데?” 기혼사의 말에 독철주가 고개를 저으며, “아버님의 상처야 내상이 심할 뿐이지, 외상은 별 것 아닙니다. 게다가 아버님이 자청해서 일어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지요.” “흥, 잘났다 잘났어. 네 아비보다 그놈이 더 좋아 보이는 모양이로구만. 그 사람은 걱정할 필요 없다. 저번에는 그보다 심각했었지만 괜찮았으니 이번에도 별일이야 있을라구? 하여간 괴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니.” 이렇게 한쪽에서 떠들고 있을 때, 단리유아에게 다가간 일행도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면서 떠들고 있었다. “자네 괜찮은가? 정말 어찌해볼 수가 없구만. 도대체 왜 그렇게 끝까지 싸우려고만 하는지, 상처가 웬만큼 되면 물러서기라도 할 것이지. 쯔쯧, 다들 호승심과 자존심만 내세우니 원.” 공손고가 탄식하듯이 혀를 차면서 떠든다. 옆에 다가간 음구의가 준비해간 천으로 상처부위를 닦아내면서, 우선 상처가 가장 커 보이는 턱 주위를 감싸묶는다. “휴, 소사숙. 이만하기를 천만다행입니다. 까딱 잘못했으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른쪽 눈 옆에서 목덜미까지 그어진 상처에 의해 턱뼈가 갈라져 말할 수도 없을 정도였는데, 일행 모두 그 모습을 보고 정말 죽지 않은 것이 용하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만 상처가 깊었다면 그대로 머리가 두 쪽으로 나뉘어졌을 것이다. 그 외에도 전신 곳곳에 부서진 창의 조각이 십여 개가 박혀있었고, 강기(剛氣)에 스친 곳도 여러 곳이라 상처가 드러난 곳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옆에서 떠드는 잔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단리유아는 피를 너무 흘려 현기증이 이는 것을 참으며 음구의의 도움을 받아 일단 상처부위를 지혈하고 크게 벌어진 곳은 천으로 대충 묶어서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박혀있는 창 조각을 빼내려는 것은 손으로 막아서 우선은 내버려 두게 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간 후에 뽑아내기로 했다. 내상이야 그리 심하다 할 수 없었지만, 전신의 상처를 천으로 둘둘 묶다보니 원래의 옷이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 안 있어 천에 피가 스며들어 붉게 물드니, 그 기괴한 모습이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밤중에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녔다간, 강시(彊屍)가 돌아다니는 줄로 오해하기에 딱 알맞을 정도였다. 대충 처치가 끝나자 일단은 돌아가 상처를 회복하는데 우선하기로 하고, 기혼사가 양측의 사람들을 시켜서 두 사람을 서둘러 장내에서 떠나가게 했다. 남은 사람들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공터를 바라보면서 서로가 좀 전의 대결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본래 이십여 장의 공터였는데, 이제는 범위가 더 넓어진데다가 곳곳에 구덩이가 패이고 부러진 나무가 산재해 최후의 격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 오타와 오류가 보이시면 바로 지적해 주세요. 흠, 새로운 초식을 계속 쓰는 것은 제가 계속해서 만들어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또 간간히 제가 언급하지 못했던 문파에 대한 소개도 되니 말입니다. 나중에 중원에 돌아왔을 때도 낫설지 않고, 아하 그런 문파가 있었지 하고 생각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서장까지는 비무와 싸움이 지속될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구도의 길에 들어설 것입니다. 현재의 단리유아는 많은 문제가 있지요. 오년동안 수련해서 화경에 이르렀지만, 결코 무적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는 화경의 고수와 제대로 싸운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일단 외적으로 완성된 상태에 이르렀을 때부터 본격적인 자아성찰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마 계속 비무가 이어져서 지루하게 느꼈던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원래는 적당히 섞어서 쓸 계획이었는데, 남만편이 너무 길어져 급하게 진행하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후로는 약간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 현문 님의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허풍공작 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야 수정했습니다. 소적교(素赤橋) 소적교(素赤橋) 1 그로부터 십여 일 동안 단리유아는 백상사(白象社)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는데 전념했다. 턱뼈가 갈라져 처음 삼일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운기행공으로 내상을 치료하며 보내야 했고, 그 뒤에도 얼마간은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턱뼈를 움직일 수 없었으니, 부랴부랴 한 번에 삼킬 수 있는 벽곡단(辟穀丹)을 만들어 복용하거나 죽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외상은 전처럼 거동하기 힘들 정도의 큰 상처는 없어서 창 조각을 빼내고 곳곳의 갈라진 곳에 약을 바르는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도 중상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단리유아에게야 그 정도의 상처는 다반사여서 그리 심하다 할 수 없었다. 독첨광(犢瞻廣)도 사흘이 지났을 때 정신을 차리고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워낙 내상이 심해 적어도 석 달간은 운공을 하는데 매달려야 할 것으로 보였다. 어느 정도 턱뼈가 아물고 전신의 외상도 거의 완치되자 단리유아는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더 머물러달라고 간청하는 백상사(白象社)의 사람들과 일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월 이일이 되자 몽박산(蒙箔蒜)의 나하루관(羅蝦鏤館)을 목표로 출발했다. 투덜거리는 일행을 데리고 아쉬워하는 독첨광(犢瞻廣)과 여러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츰 백상사에서 멀어져갔다. 백상사(白象社)에서 나와서 남루(濫婁)로 되돌아와 배를 탔다. 몽박산(蒙箔蒜)은 미공하(湄公河)를 따라 동북방향으로 삼백여리가 넘게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강변을 따라서 걷는 것보다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배를 탄다면 강이 약간씩 구부러져 거리상으로는 더 멀겠지만, 실제적인 속도는 더 빠를 것이라 생각되었다. 몽박산까지 가는 배를 구하기 어려워 한참을 헤맨 정오 무렵에야 배를 탈 수 있었다. 웬만큼 큰 배가 아니고는 강변의 악어나 큰 뱀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밤에는 강변에 배를 대고 야숙을 해야 할 것이기에 오지(奧地)의 소수부족과 조우할 경우도 있어서 그곳까지 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겨우겨우 웃돈을 얹어주고 아예 배를 한척 사다시피 해서 길이가 오 장(丈)여가 조금 넘는 크기의 배를 구했다. “자네 뭐 하러 이리 길을 서두르나? 좀 더 쉬었다가 가도 될 텐데.” 배에 올라타서도 기혼사가 심통 맞은 아이처럼 찡그리며 말한다. 한참 백상사에서 제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독첨광의 자식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보내고 있었으니, 입속에 넣었던 당과를 빼앗긴 아이처럼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혼사의 심통스러운 어조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이미 백상사(白象社)에 머문 지도 보름 가까이 되는데 이제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입니다. 그보다 몽박산(蒙箔蒜)의 나하루관(羅蝦鏤館)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상처 때문인지 목소리가 이상해져 말할 때마다 약간씩 떨리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기혼사가 단리유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정말 이상해 보이는군. 그래도 전에는 평범한 편이었는데, 이제는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절대로 자네를 잊지 못할 것이네. 게다가 그런 괴상한 목소리라니, 원....” 그전에는 큰 키에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오른쪽 눈 밑에서 아래턱을 가르고 지나가는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어 오히려 흉악한 얼굴이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모습에다 무표정하기까지 하니 절로 보는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더구나 그동안 더욱 말라서 마치 바짝 마른 장작개비를 세워놓은 듯해 지켜보는 일행으로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게 했던 것이다. 묵묵부답인 채 바라보는 단리유아를 보면서, “알았어, 알았다구. 그만 좀 쳐다보게. 정말 괴상하단 말일세. 내 말해 줌세.” 한동안 투덜거리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휴, 정말.... 나하루관(羅蝦鏤館)은 원래 안남산맥(安南山脈) 밑에서 살던 시라족(矢羅族)이라는 부족이 강변까지 내려와 세운 것이네.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 일대에서는 가장 강한 세력이라네. 처음에는 그저 그 일족의 최고 지배자의 거처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강호(江湖)의 세력처럼 변했다네. 보통 시라족의 족장을 강철 같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루루(鏤鏤)라고 부른다네. 또 족장이 조상에 대한 제식을 주관하는 주술사를 겸하기도 해서 그들 부족에서는 최고로 높은 지위라네. 아마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강호(江湖)에 그 세력이 알려진 것은 백여 년 정도 되는데, 독술(毒術)과 암기(暗器) 그리고 활솜씨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네. 나도 한번 그들과 싸워본 적이 있어 아는데, 다른 것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암기는 일절이라 부를 만하지. 독은 주로 두꺼비나 개구리 같은 독물의 독을 사용하는데, 극독이라 하지만 본문의 사람들 정도에게는 별로 해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네. 단지 암기가 문제인데, 삼 장(丈) 이내에서 발출된다면 절대로 피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크기도 세치를 넘지 않는 독침이라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일단 몸에 독침이 들어가면 서서히 끝부분부터 녹아서 체내에 스며든다고 하네.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호신강기(護身剛氣)도 무용지물이라고 알려져 있지.” 일행이 기혼사의 말에 걱정스런 기색일 때, “그러면 다른 무공은 어떻습니까?” 단리유아가 곧이어 다시 묻는다. 기혼사가 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클클, 정말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는 없나보구만. 흘흘, 나도 하수들과 한번 싸웠을 뿐이어서 잘 모르지만, 그 외에도 관주인 루루(鏤鏤)의 주술(呪術)과 권법(拳法)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네. 뭐, 그리 호전적인 세력도 아니어서 자신들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전혀 세상일에는 상관하지 않지. 아마 자네가 찾아간다고 해도 비무를 해줄지는 나도 자신할 수 없다네.” “소사숙, 웬만하면 그냥 지나치지요. 그런 암기술을 지닌 세력이라면, 괜히 저희와 시비라도 붙어 싸우는 경우에는 저희 역시 무사하지 못할 터이니.” 웅정향이 끼어들어 만류한다. 일행의 나머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너도 나도 반대할 때, “일단 가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자면 비무해볼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니. 비무를 요청해서 받아준다면 한번 싸워보도록 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곧바로 다시 길을 떠나기로 합시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수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한다. 모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러운 기색이 된다. 더 말해보아야 듣지도 않을 터이니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며.... 상의를 끝내고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졌다. 크기도 작고 양쪽에 달린 열두 개의 노와 하나의 작은 돛을 이용한 배여서, 생각했던 것보다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게다가 일단 해질 무렵에는 강변에 배를 세우고, 노숙을 하고 다시 떠나가는 식으로 하다 보니 하루에 오육십 리가 고작이었다. 어쨌든 엿새가 흐른 사월 팔일이 되었을 때, 일행은 별다른 탈 없이 몽박산(蒙箔蒜)의 포구에 이를 수 있었다. 포구의 객관에서 하룻밤을 묵고서 다음날 기혼사와 단리유아가 함께 가서 비무를 요청했지만, 기혼사의 예상대로 보기 좋게 거절만 당하고 물러나야 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놈들은 강호(江湖)의 세력이라 하지만 그다지 다른 일에 신경 쓰는 놈들이 아니고, 또 소문이 그리 퍼졌는데 미쳤다고 자네의 비무를 받아들이겠나? 으이구, 괜히 쓸데없는 걸음만 했네.” 투덜거리는 기혼사를 뒤로하고 단리유아는 앞장서 일행이 머무는 객관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일행에게 사실을 말해주자 그제야 편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곧이어 들어와 계속해서 궁시렁대는 기혼사를 보면서, “기노선배님. 아무래도 앞으로도 비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나머지 소적교(素赤橋)나 세금동(銴金洞)에 대해서 말해주십시오. 비무가 어렵다면 곧바로 운남(雲南)으로 향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 단리유아의 말에야 기혼사가 얼굴을 펴고 유쾌하게 웃으며,     “킬킬, 자네도 시간 낭비하기는 싫은 모양이로구만. 흠, 어차피 운남(雲南)으로 향한다면 북진할 것이고, 그리되면 앞으로 그 문파들과 부딪칠지도 모르니 말해줌세.”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해보다가, “먼저 소적교(素赤橋)는 루암팔봉(壘岩八封) 남쪽에 위치한 나몽산(邏霿山)의 한쪽에 있다고 알려진 세력이라네. 그렇지만 정확한 위치나 제자들의 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네. 단지 남만(南蠻)에서는 가장 유명한 살수 단체이고, 그 수가 백여 명은 넘을 것이라 생각되고 있지.” 기혼사의 말에 놀라서 일행의 모두가 쳐다보다며 한마디씩 한다. “기선배, 이곳에 그렇게 큰 살수단체가 있단 말이오?” “정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백 명이 넘는 살수단체는 중원(中原)에서도 찾기 쉽지 않을 터인데.” 공손고와 웅정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한다. 중원 최고의 살수단체라는 흑루(黑樓)의 전체 살수의 수가 삼백 명 정도에 불과하고, 백 명이 넘어가는 세력으로는 암향사(暗香舍)와 북망대묘(北邙大墓), 사신곡(死神谷) 정도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 정확히 세력이 알려지지 않은 살수단체가 여럿 있었지만, 그래도 백 명이 넘는 살수를 거느리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살수를 백 명이 넘게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소요되는 자원과 살수를 키워내는데 드는 시간을 따져볼 때, 보통의 문파를 세우는 것보다 몇 배의 어려움이 있었다. 기혼사가 일행의 놀라서 떠드는 것을 계속 듣다가, “시끄러!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어차피 매일반인데, 그런 단체가 있는 것이 뭐가 놀랄 일이라는 거냐? 모두 입 닥치고 조용히 설명이나 들어!” 자신의 고함에 일행이 기가 죽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조용히 못해! 어른이 말하는데 계속 그렇게 궁시렁댈래?” 다시 한 번 소리치자 일행이 아예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내쉰다. 기혼사가 그 모습에 의기양양하여 즐겁게 홍소를 날리며, “하하하, 이제야 좀 조용하구만. 아까는 웬 파리 떼가 윙윙거려 골치가 아플 정도였는데.” “기노선배, 그만하시고 어서 계속 설명을 해주십시오.” 단리유아의 말에야 멈추더니, “흠 흠. 그럼 계속함세. 본래 소적교(素赤橋)는 그 역사가 오래되어 본문이나 천밀석궁(千密石宮)에 비견할 만하지. 소적교가 알려진지 삼백년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말일세. 소문에는 남조국(南詔國)이 세워질 무렵 왕실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어진 단체라는데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르지. 처음에는 주로 왕실에 반하는 정적(政敵)이나 처치가 곤란한 사람들을 없애는 등 여러 가지로 왕실에 유리한 일을 주로 했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시일이 흘러 이백여 년 전에 현재의 나몽산(邏霿山)으로 옮겨온 이후부터는 완전히 강호(江湖)의 세력으로 전환해서 이 남만(南蠻) 전역에 걸쳐 살행을 하고 있지. 게다가 남조국도 멸망한지도 일 갑자가 넘어가니 더욱 그러하지. 내 생각에는 현재가 최고의 전성기라고 여겨지네. 그 수나 살수의 무공 정도를 볼 때 말이지.” “그러면 저희가 지나갈 때 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루암팔봉(壘岩八封)을 지나야 하니 나몽산을 통과해야 할 것 같은데.” 기혼사가 음구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몽산(邏霿山)의 측면을 끼고 가야하니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본래 살수단체인데 앞장서 공격하지는 않겠지. 혹 누군가 청부를 한다면 또 모르지만. 뭐, 당장에는 별 문제 없을 것이라 여겨지네. 그보다, 단리소협. 설마하니 소적교(素赤橋)에까지 찾아가서 비무를 청하지는 않겠지?” 일행 역시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쳐다본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가보아야 찾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그보다 비사리(非沙里)의 세금동(銴金洞)은 어떤 세력입니까?” 단리유아가 말을 바꾸어 물어보니, 일행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기혼사가 단리유아의 물음에 얼굴을 찌푸리며, “세금동(銴金洞)은 본문과 더불어 남만(南蠻)의 정사(正邪) 이대독문으로 알려진 곳이네. 빌어먹을. 그놈들도 우리처럼 원래가 구음독교(九陰毒敎)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이 세운 곳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사악한 곳으로 변해버렸네. 우리와는 달리 사악한 술법(術法)에 독술을 결합한 형태로 발전해서 온갖 나쁜 짓을 다하고 있다네. 독공(毒功)은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인정하기 싫지만 독술(毒術)에서는 한수 위라고 보네.” “휴, 앞으로도 편한 여행은 되지 않겠군요. 혹시라도 그놈들과 싸울지도 모르고 게다가 지형도 점차 거칠어져 산악지대와 밀림이 연이어진 곳이니.” 웅정향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다른 일행도 걱정스런 기색으로 앞으로의 여정(旅情)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소사숙. 그런 문파들만이 연이어 있으니 일단은 운남(雲南)으로 곧장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구의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숙이며 잠시 생각해보다가, “그렇게 합시다. 모두가 원하고 비무를 청하기도 어려운 곳으로 보이니, 될수록 부딪치지 않고 서둘러 운남(雲南)으로 향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어차피 운남의 서쌍판납(西雙版納)까지 간다면, 그들과 전혀 부딪치지 않고 간다는 것도 어려울 것일세. 소적교(素赤橋)는 돈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곳이고, 세금동(銴金洞)도 사악한 것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곳이니.” 기혼사가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다. 한동안 걱정스런 표정으로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서 더 의논하다가, 일단은 그대로 북진하여 운남성(雲南省)에 이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음날 다시 일행은 발걸음을 옮겨 루암팔봉(壘岩八封)을 향했다. 현재의 이 지역은 가장 무더운 건기에 해당해서 온종일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이 일행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게다가 밀림이 우거지고 점점 산들도 높고 험해져 갈수록 힘들어져 갔다. 다행히도 그동안의 경험과 기혼사가 독물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하루하루 쌓이는 피로와 짜증은 다들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몽박산(蒙箔蒜)에서 루암팔봉(壘岩八封)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육백여리 정도였고 실제적인 거리로는 팔백여 리에 가까웠는데 일행이 느끼기에는 오히려 더욱 멀게 느껴졌다. 지난날 측허사(測歔瀉)에서 독룡림(毒龍林)을 찾아 떠났을 때만큼이나 힘든 여정이 이어진지 보름 정도가 되었을 때, 일행은 나몽산(邏霿山)의 동쪽 기슭에 이르게 되었다. 나몽산(邏霿山)은 최고봉의 높이가 칠천 척에 가까운 고산으로 밀림이 빽빽하고 수많은 계곡이 있어서 길을 모르는 사람이 들어섰다가는 숲속을 헤매다 숲의 귀신이 되기에 딱 맞았다. 게다가 물안개가 사시사철 산중턱부터 감싸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 신비스러운 자태에 일대에서는 영산(靈山)이라고 소문난 곳이었다. 독물도 많고 숲이 우거져 나몽산 근처 산등성이 밑에 일부 소수부족들이 살고 있을 뿐이었고, 그 깊은 곳에는 거의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일행이 지나가는 곳도 동서로 백 여리에 걸친 나몽산(邏霿山)에서 가장 동쪽 끝에 하당하는 지역으로, 낮은 산기슭에 따라 내어진 한줄기 오솔길을 걸어 통과한다고 하지만 험하기는 다른 곳과 별다르지 않았다. 일단 이 나몽산을 통과하면 루암팔봉(壘岩八封)까지는 삼십여 리 정도만 남아서 지척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날 일행은 시간이 너무 늦어 일단 산중턱의 길옆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공터에서 머물렀다가, 다음날 아침 다시 길을 떠나 산을 넘기로 했다. 공터 주위로 독룡림(毒龍林)에서 가져온 회회분(回灰粉)과 과와목(萪渦木)으로 독물의 접근을 막고 하룻밤 묵을 수 있게 주변을 정리했다. 저녁을 간단히 끌인 물에 건량을 불린 것과 주변에서 잡아온 뱀을 구워서 때웠다. 남만(南蠻)에 이르기 전만 해도 이렇게 뱀을 구워먹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일행도,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져 오히려 서로 달려들어 입가에 검댕이 묻는 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고기를 뜯고 있었다. 먼저 웅정향이 뱀고기를 한입 삼키며, “꿀꺽, 소사숙. 이제 루암팔봉(壘岩八封)은 지척이라 할 수 있으니, 운남(雲南)까지 가는데 거의 절반은 왔다고 볼 수 있겠군요. 휴, 정말 이놈의 날씨와 밀림은 지겹기 그지없습니다.” “나도 그렇다네. 일단 내일 산을 넘으면 루암팔봉에는 다 왔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하루 종일이라도 물속에 빠져서 몸을 씻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네.” 공손고가 옆에서 국물을 삼키고는 대답한다. 한쪽에서 기혼사가 두 사람을 보며, “클클, 루암팔봉(壘岩八封)을 지나서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점점 더 산은 험해지고 밀림도 우거질걸? 게다가 그때쯤에는 우기가 시작될지도 모르니, 아마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편하지는 않을 텐데?” 약 올리듯이 두 사람을 보면서 말한다. 두 사람이 말은 못하고 속으로, ‘빌어먹을,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라고. 어떻게 젊은 우리들보다 팔팔한지 알 수가 없구만. 으이구, 저 늙은이만 없어도 곱절은 더 편할 텐데. 하루라도 조용하지 못하고 남 편한 것을 못 보니 원.... 아, 제기랄.’ 일행이 그동안 기혼사에게 당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최근에 이어진 밀림을 계속 횡단하는 여정(旅程)동안에는 더욱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데에다 기혼사의 투정과 장난도 받아주어야 했으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피곤하고 더디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그래도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걸음을 재촉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아직 반절도 못간 채 미적거리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다가 기혼사가, “흘흘, 게다가 이곳은 소적교(素赤橋)가 지척임을 잊지 마라. 혹시 모르지. 지금도 멀리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지.” 기혼사의 말에 놀란 일행이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하듯이 세밀히 살핀다. 그동안의 여정(旅程)에 지쳐 미처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새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는데, 달도 없는 그믐밤이어서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주위 십여 장(丈)을 제외하고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환영(幻影)을 일으키는 듯했고, 연이어 멀리서 들려오는 날짐승과 산짐승들의 우는 소리가 일행의 심란(心亂)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근처 백 장 이내에는 아무도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보다 어서 쉬고 내일 일정이나 준비합시다.” 단리유아가 청력을 집중해서 주위를 살피다가 일행을 둘러보며 말한다. 이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계속하다가 얼마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치우고, 각자 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이내 일행의 코고는 소리와 모닥불의 타닥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장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일행이 모두 잠이 들었을 때, 단리유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터에서 백여 장 정도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검을 빼들고 수련을 시작했다. 그동안 여정(旅程)의 틈틈이 무공을 연구하고 수련을 계속해왔지만, 이제는 더 연구할만한 것도 없어서 단순히 몸을 푸는 정도로 육합검법(六合劍法)만을 펼쳤다. 이윽고 수련을 멈추고 한쪽의 바위위에 정좌하여 자신이 겪은 여러 무공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철루존자(鐵壘尊子)의 권각술은 이미 자신의 무공으로 소화했고, 독첨광(犢瞻廣)의 창법에서는 전사력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응용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여 자신의 검법에 포함시켰다. 역시 세외(世外)를 떠돌기로 결정한 것은 잘한 것으로 보였다. 적수가 될 만한 사람들이 이십여 명이 있었음에도 중원(中原)에서는 다들 자신의 명성 때문이라도 제대로 비무를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너무 수준이 낮은 사람들과의 싸움은 자신에게는 그리 도움도 되지 못한데다가 마땅히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남만(南蠻)에 와서야 거의 생사결전과 같은 비무를 하니 자신의 무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랐다. 그런 고수들과 맞부딪치니 아직도 자신의 무공에서는 단점이 많이 보임을 느낄 수 있었다. 최소한 그런 단점을 없앤 후에야 현경(玄境)에 도전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서 급하게 서두르거나 그것에만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발걸음을 후퇴하는 것과 같을 터였다. 천천히 자신의 수련에 전념하고 하나하나 성취하다보면, 그 기틀을 다져서 나중에는 별 무리 없이 상승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터였다. 모든 것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이미 한줄기 길을 발견한 이상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보았다. 지난날 반라산(磐裸山)에 이르렀을 때처럼 눈을 감은 채 천천히.... ****** 흠, 다음편은 월요일 저녁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타와 오류를 지적해주세요. 여러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 senseoar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소적교(素赤橋) 소적교(素赤橋) 2 단리유아가 한참 검법을 펼치며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든 지도 어느덧 반 시진이 넘어서 시간이 자정(子正)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일단의 괴영(怪影)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옷자락 날리는 소리도 없이 서서히 조용하게 다가서는데, 온몸을 흑으로 감싼 대다가 무기의 인광(刃光) 역시 죽여서 마치 흐느적거리며 배회하는 귀신들의 그림자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 윤곽을 분간하기도 힘들어 움직이지 않는 한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들은 소적교(素赤橋)의 살수들로 소적오교(素赤五橋)라 불리는 최고 살수와 그 이하 십이영(十二影), 다시 그 아래 일급살수 칠십여 명이었다. 오늘 이 살행(殺行)은 그들 문파의 사활이 걸린 일로, 수련중인 제자들과 원로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살수들이 참가한 일이었다. 일행이 머문 곳에서 백여 장(丈) 떨어진 곳까지 접근한 후에, 앞으로의 공격에 대해서 서로 전음으로 의논을 하고 있었다. 우선 저녁에 멀리서 지켜보았던 대로 진형을 짜서 독교(毒橋)와 암교(暗橋)가 육영(六影)과 삼십여 명의 살수들을 지휘하여 주변을 포위하여 공격하기로 했고, 목교(木橋)와 혈교(血橋), 귀교(鬼橋)는 나머지 육영과 살수들을 데리고 한쪽에서 수련에 빠져있는 단리유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각자 자리에서 흩어져 먼저 소적오교(素赤五橋) 중의 한명인 독교(毒橋)가 십여 명을 데리고 일행이 누워 잠든 곳에서 오십여 장 위쪽 산언덕으로 올라가, 바람결을 따라 독분(毒粉)을 뿌려서 서서히 검은 독무가 아래로 퍼져 내려가게 했다. 문득 바람에 실려 다가오는 한줄기 독기(毒氣)를 감지하고 기혼사가 잠에서 깨어났다. 이혼흑염독(離魂黑染毒)임을 알자 누군가의 습격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는, 곧바로 일어나 서둘러 일행에게 다가갔다.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기혼사가 다가가 살펴볼 때에는 이미 일행 모두 의식을 잃고 있었다. 완전히 해독(解毒)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함을 느끼고, 단지 독이 더 이상 퍼지지 않게만 만들어 일행을 정신 차리게 했다. “이런 제기랄!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이 자식들아, 그만 정신 차리지 못해!” 기혼사의 재촉하는 소리에 일행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적들의 공격을 대비하는 순간, 순식간에 사방에서 수십 명의 흑영들이 덮쳐왔다. 일행의 상태는 독기에 중독되어서 비록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내력(內力)을 모으는데 지장을 받고 있었고, 게다가 정신 역시 아직 혼미한 상태였다. “우선 내가 사방을 돌면서 막을 테니, 그동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내력을 모아봐라. 절대로 흩어질 생각은 말고.” 기혼사가 외치며 다가오는 살수들의 공격을 막아선다. 나머지 사인은 한군데 모여 기혼사의 보호를 받으며 우선 내력을 모으고 수비하는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채채챙. 채챙.” “윽, 으윽” 다가오던 살수들의 무기와 일행의 검(劍)과 기혼사의 철편(鐵鞭)이 부딪치자 불꽃과 함께 요란한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살수들이 기혼사의 철편에 맞아 죽어가기도 했지만, 겨우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미약한 신음소리에 불과했다. “뭣들 하는 거냐?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고만단 말이다, 이 자식들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겨우 상대의 공격을 막는데 급급한 일행의 모습을 보며 기혼사가 소리친다. 다시 주위를 포위한 살수들의 공격을 막으며, “단리소협, 단리소협! 어디 있나? 도대체 이 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하는 거야. 단리소협!”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친다. 기혼사가 살수들의 공세를 막고 있지만, 나머지 일행 때문에 제대로 공격도 못하고 있었다. “채채챙. 차창” “윽, 으욱” 한창 공방이 일어나 일행의 전신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을 때, 한쪽에서 지켜보던 소적오교(素赤五橋)중의 암교(暗橋)가 암기를 날린다. “휘리릭” 원반형태의 륜(輪)과 비슷한 모양으로, 그 크기가 미처 반자에 못 미치는 손바닥 넓이 정도 되는 암기가 회전하며 쾌속하게 일행을 덮쳐왔다. 이에 웅정향이 나서서 칼로 쳐내려고 할 때, 그 모습을 보고 기혼사가 기겁하여 달려들며, “안 돼! 이 바보야! 그건 유성폭혈륜(流星爆血輪)이란 말이다!” 그러나 이미 늦어서 검과 부딪친 암기(暗器)가 허공으로 퉁겨남과 동시에, 폭발하여 조각난 채 일행을 향하여 파편들이 쏘아져나가고 있었다. “파팡” “쉬익, 쉬이익!” “채채챙 챙챙” 기혼사가 뛰어들어 전면을 향하여 철편(鐵鞭)을 휘둘러 방어막을 형성했지만, 이미 통과하거나 그 사이로 빠져나간 것이 더 많았다. “으으윽, 아악” 일행도 다급히 무기를 휘둘러 막아섰지만, 정면에 있던 웅정향은 전신에 벌집처럼 파편이 박힌 상태로 쓰러졌고 나머지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해서 비록 치명상은 면했다하지만 전신 곳곳에 십여 개씩의 파편이 박혀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암기(暗器)에도 독이 묻혀있었는지 더욱 일행의 중독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기혼사 역시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초식을 펼치지 못해서 그 자신 역시 곳곳에 암기가 박힌 상태였다. 기혼사가 일행의 모습을 보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단리소협, 단리소협! 빨리 돌아오게!” 한편, 한참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검법을 펼치던 단리유아도 일행이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무아지경에서 깨어났다. 간만에 찾아온 기회로 중간에 깨어나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무래도 일행이 있는 곳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일행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 산등성이로 백여 장(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자신에게까지 들려올 정도라면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했다. 자신이 수련에 빠져 접근하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더라도 기혼사 정도의 고수라면 주위에 나타나는 살기(殺氣)에 반응하여 미리 대비를 했어야하는데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때는 제대로 대비를 못한 것 같았다. 만일 단리유아가 수련에 빠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주변을 살폈다면, 이들이 이토록 가까이 다가오도록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을 터였다. 이들도 모닥불의 불빛을 보고 마치 불나방이 밝은 빛에 모이듯이 일행을 먼저 공격하고, 다음 순간 떨어져 있는 단리유아를 공격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차차창. 채챙” “윽, 아악” 연이은 무기의 부딪치는 소리와 기혼사의 고래고래 소리치는 소리에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검을 거두고 도를 빼들어 급히 발걸음을 옮겨 일행에게로 향했다. 단리유아가 일행과의 중간 정도 되는 지점인 오십여 장(丈) 정도까지 전진했을 때, 주변의 나무위에서 연이어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내리며 단리유아를 공격했다. 모두가 전신을 흑의로 감싼 상태로서 오직 드러난 것은 두 눈의 차디찬 안광에 불과했다. 상대의 무기도 두자 정도 되는 겸(鎌)과 비슷하지만, 약간 펴진 반월형의 광채를 드러내지 않는 칙칙한 칼이었다. 상대의 모습과 전신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살수들임을 알아차리고 주저 없이 도를 휘둘렀다. “크흐키아악! 크키키흐악....” 붉은 섬광(閃光)과 함께 차가운 도영(刀影)이 연신 일어나 도성(刀聲)에 멈칫거리고 있는 상대를 덮쳐갔다. 먼저 전면에서 다가서는 두 사람을 베어나간 후에 정신을 차리고 덮쳐들려는 상대들을 보면서,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신형을 흩트린 채 오른 쪽으로 향하여 자신의 얼굴을 향하여 도를 휘두르는 상대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지나가는 도를 피하며, “팟” “크키흐아악” 시뻘건 광채와 동시에 목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솟구쳐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았다. 떨어지는 핏줄기를 피해서 전진함과 동시에 도성(刀聲)에 멈칫하는 다른 살수에게 다가가 다시 도를 휘둘러 상대의 칼을 쳐냈다. 동시에 오른 발을 축으로 왼다리를 들어 지난번에 철루존자(鐵壘尊子)와 싸우며 터득한 각법(脚法)으로 상대를 머리 위부터 연속으로 일곱 번을 가격했다. “차창” “퍼퍼퍽” “으으윽” 도중에 상대의 손을 걷어차 도를 떠오르게 만든 다음, 다시 적운도(赤雲刀)로 도를 쳐내어 왼쪽에서 접근하던 살수를 향해서 날려 보냈다. 살수가 날아오는 칼을 쳐내고 있을 때, 품속으로 뛰어들며 장(掌)을 휘둘러 상대의 복부에 연속으로 삼장을 터뜨렸다. 충격을 받아서 피를 뿌리고 날아가는 살수의 품속에 숨어 접근하며, 전방에서 기다리던 세 명에게 도를 휘둘러, “크흐키아악” “퍼퍼펑” 끔찍한 소성과 함께 세 가닥의 붉은 도광(刀光)이 일어나, 도성에 멈칫하고 있는 살수들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세 번의 회전하는 수레바퀴처럼 주먹만 한 둥근 도기(刀氣)가 일어나 상대의 몸통을 꿰뚫어버리는 잔인한 초식으로, 성취가 높을수록 그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었다. 삼전인혼겁(三轉引魂劫)이라 불리는 초식으로 강호(江湖)를 유랑하는 낭인중의 하나인 쾌도광마(快刀狂魔)의 절기였다. 목덜미로부터 뒤쪽으로 피와 살점이 터져나가며 쓰러지는 살수들을 지나쳐 돌아, 뒤쪽에서 다시 공격해오는 살수들을 향해서 다가갔다.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정면으로 환영(幻影)을 전진하게 하고, 반대로 자신은 왼쪽 측면으로 돌면서 칼을 휘둘렀다. “팟” “크키흐흐악.” “슈욱” 목이 떨어져 나가며 피가 솟구칠 때, 몸뚱이만 남은 시체를 걷어차 반대편에서 칼을 휘두르며 다가오던 두 명의 살수에게 날려 보냈다. 그들이 주저 없이 좀 전의 동료였던 시신을 조각내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접근하며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이용해 뇌전지(雷電指)의 일초인 뇌전만홍참(雷電滿紅斬)을 펼쳤다. “파파팟” 섬광(閃光)이 일면서 다섯 줄기의 붉은 색의 뇌전이 튀어나가 두 명을 노렸다. 두 살수가 각각 뇌전지(雷電指)를 막기에 급급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다가서며 한줄기 도광(刀光)으로 두 사람의 미심을 꿰뚫어버렸다. “차차창, 챙그랑.“ “퍼퍼퍽” 연이어 나타나는 살수들을 향해 접근하여 전신을 이용해 공격해나갔다. 별다른 비명 소리도 없이 오직 무기가 부딪치는 금속성과 단리유아의 공격에 작렬하여 터져나가는 소리만 장내를 떠돌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 장(丈) 이내라도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칙칙한 어둠속에서 마치 춤추는 귀영(鬼影)처럼 이쪽에서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에는 반대편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이십여 명의 살수들을 저승으로 인도했다. 살수(殺手)들을 처리하고 단리유아가 일행이 모여 있는 곳까지 갈 동안에도 계속해서 다른 살수들이 나타나 진로를 가로막았다. 자신의 도(刀)에 두 동강이 나도록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않고 달려드는 이들을 보면서, 단리유아 역시 그 지독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이들도 단리유아의 도법(刀法)에 대한 대처법을 알아냈는지, 그 끔찍한 도성(刀聲)에도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일대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단리유아를 멈추게 만들려고 갖은 수를 다 쓰고 있었다. 공격하다가 틈만 나면 붙잡으려고 하거나 동료의 시신까지 이용해 숨어서 달려들기도 했다. 서둘러 살수의 숲을 헤치며 달려가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측면의 나무둥치의 껍질이 벗겨지며 소리 없이 한줄기 도광(刀光)이 일어나 머리를 향해서 다가왔다. 소적오교(素赤五橋)중의 목교(木橋)로서 주로 나무나 풀숲에 숨어서 암습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미 단리유아가 살수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고 정면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자, 은신포로 전신을 가리고 나무와 동화되어 기척을 숨긴 채 단리유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식대법(龜息大法)으로 숨을 멈추고, 한줄기 온기조차 가라앉혀 마치 무생물인 것처럼 나무에 들러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격하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고 숨소리도 내뱉지 않으니, 그 은밀함에 단리유아 역시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 뒷머리를 향해서 천천히 날아오는 도광(刀光)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이에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피하며 지옥파라구천절의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쳤다. “팟” “스윽” “크키흐아악”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옆으로 회피했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서 한줄기의 도광(刀光)에 의해서 머리카락과 함께 오른쪽 측후면의 두피(頭皮)가 갈라졌다. 동시에 적운도(赤雲刀)에서 솟구치는 붉은 섬광(閃光)에 의해서 목교(木橋) 역시 이마에 구멍이 뚫어져 쓰러졌다. 옷자락을 찢어 서둘러 머리를 감쌌다. 단리유아의 대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머릿속까지 갈라져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일행과의 거리가 줄어들어 십여 장(丈)까지 접근했을 때, 전면에서 키가 칠척에 가까운 한 대한이 오 척의 대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소적오교(素赤五橋)중의 혈교(血橋)로서 이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인물로 특히 정면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살수였다. “크키흐아악” “차차창. 채챙” 서로의 도(刀)가 부딪치자 혈교(血橋)가 순수한 힘으로 단리유아를 밀어내려고 한다. 상대의 체구와 도를 보면서 그 도법의 성질을 대충 파악한 단리유아가 오히려 밀치는 힘에 의해 철판교(鐵板橋)로 뒤로 누우며 도가 지나가게 만들고, 일어섬과 동시에 왼손으로는 흙을 퍼서 상대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의 적운도로는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쳤다. “팟” “크흐키아악” 붉은 섬광(閃光)과 도성이 일어나 얼굴을 향해서 덮쳐오는 흙먼지를 손으로 흩트리고 있는 혈교(血橋)의 미심혈(眉心穴)을 가격해나갔다. 이때 혈교의 그림자에서 한줄기 시퍼런 광채가 번쩍이며 단리유아의 도를 막아나갔다. “차창.” 이와 동시에 전신의 형체가 불분명하게 보이는 귀영(鬼影)이 그림자 속에서 튀여 나왔다.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인지 술법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정확한 모습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자는 바로 귀교(鬼橋)로서 혈교(血橋)와 한 쌍으로 상대를 암습하는 자였다. 보통 혈교가 정면으로 싸우다가 세가 불리하거나 위급할 때 상대를 암습해서 죽이는데, 서로 오누이간으로서 소적교(素赤橋)에 입문한 이후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사이였다. 오교(五橋) 중에서는 유일하게 여자로서 신법과 귀혼수(鬼魂殊)라는 백여 개의 비수를 이용한 공격에 능했다. 귀교(鬼橋)가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며 열두 개의 비도를 단리유아의 상중하로 나누어 시간차로 날렸다. 이와 동시에 혈교(血橋) 역시 도를 휘두르며 정면에서 덮쳐왔다. “채채챙. 채챙” 단리유아가 도를 휘둘러 비수를 퉁겨냈을 때, 혈교(血橋)가 접근해서 상하로 연이어 일곱 번의 칼질을 한다. 시퍼런 도기가 일어나 덮치는 것을 보고 단리유아가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왼쪽으로 움직이며, 먼저 한줄기 도광을 일으켜 귀교(鬼橋)를 공격했다. “크키흐아악” 붉은 빛의 도기(刀氣)와 도성에 멈칫하여 귀교(鬼橋)가 물러날 순간, 혈교(血橋)를 향해서 다가가며 적운도(赤雲刀)로 땅을 파헤쳐 흙먼지를 일으킴과 동시에 땅을 쳐 그 탄력으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머리를 거꾸로 한 채 혈교의 머리를 타고 넘어가며, 도를 휘둘러 다시 자신의 눈앞을 가리는 흙먼지를 피해 옆으로 움직이려는 혈교의 머리를 갈라갔다. “아, 안 돼!” “팟” “쉬웃.” 귀교(鬼橋)가 소리치며 달려들어 비도를 허공으로 날릴 때, 이미 한줄기의 도광이 혈교(血橋)의 머리를 양분하고 지나간 뒤였다. 다시 혈교의 등 뒤로 숨으며 다가오는 비도를 피하다가, 오라비의 죽음에 분노와 슬픔에 망연자실하고 있는 귀교를 덮쳐갔다. 귀교가 정신을 차리고 신법을 펼쳐 피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 한줄기 붉은 도광(刀光)에 의해서 심장에 구멍이 뚫린 후였다. 양손으로 적운도(赤雲刀)를 붙잡은 채 원한과 절망에 찬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귀교(鬼橋)의 시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강제로 도를 뽑아내 피를 떨쳐낸 후에 다시 일행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런 단리유아의 모습을 양손의 손가락이 모두 잘린 채 뒤로 쓰러져가며, 사신(死神)이 내려앉아 눈동자가 풀려나가는 시선으로 귀교가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 흠, 오늘은 조금 잔인한 장면이 많군요. 오타와 오류가 보이시면 바로 지적해주세요. 소적교(素赤橋) 소적교(素赤橋) 3 불과 반 시진(時辰)이 못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지만, 단리유아가 일행에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행의 모습은 명재경각(命在頃刻)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기혼사와 공손고만 겨우 싸우고 있을 뿐이었고, 웅정향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음구의도 왼팔이 날아간 대다가 북부가 갈라지고 전신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그 곁에서 선상조가 비틀거리며 둘을 보호한 채로 싸우고 있었지만, 그 또한 위험한 상태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살수들도 십여 명이 쓰러져 있어서 주변은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선혈로 인해 곳곳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단리유아가 주변을 에워싼 이십여 명의 살수의 숲을 뚫고 일행에게 다가갔을 때, “소사숙, 어찌 이제 오십니까? 구의와 웅사형이....” 애통한 목소리로 단리유아를 보며 선상조가 말한다. 그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단리유아가 기혼사에게 다가가, “기노선배, 어찌 된 일입니까?” “제기랄, 낸들 아나? 잠 중에 얼핏 독향(毒香)이 느껴지기에 일어나 급히 애들을 해독시킬 때 이미 이놈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는걸. 미처 제대로 해독되지도 못한 상태여서 계속해서 공격을 당하니 이 꼴이 될 수밖에.” 폭포수처럼 쏘아대는 기혼사의 말을 들으며 단리유아가, “기노선배, 제가 이들을 상대할 동안 우선적으로 일행을 보호해 주십시오.” 말과 함께 단리유아가 뛰쳐나가면서, 사방을 돌며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의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를 연이어 펼쳤다. 이미 시간을 끌수록 일행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모든 내력을 쏟아 부어서 적운도에 도강(刀剛)을 형성한 채 주위를 휩쓸었다. “크흐키아악. 크키흐흐악....” 귀청을 떨어 울리는 도성(刀聲)과 함께 일순 붉은 빛의 도기(刀氣)가 일어나 신형을 가리더니 곧 장내를 뒤덮었다. 사방 십여 장(丈) 이내는 오직 도영(刀影)만이 가득한 채 병기와 초목, 사람을 가리지 않고 걸리는 모든 것을 부수며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살수들이 갖은 수를 다해서 저항을 해보고 있었지만, 마치 해일이 덮치듯이 주변을 뒤덮으며 다가오는 도영에는 무의미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붉은 빛의 도영과 어울려 솟구쳐 오르는 핏줄기가 마치 안개처럼 허공을 떠돌아다니고 있었고, 사방으로 조각나 흩날리는 살점과 초목, 무기만이 우박이 떨어져 내리듯이 땅바닥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차차창. 푸스슥.” “퍼퍼퍽. 투투툭.” 잠시 후 도영(刀影)이 가라앉으며 단리유아의 공격이 멈추었을 때, 주위의 공터는 더 넓어져 거의 삼 장 정도가 늘어나 있었다. 풀숲에 숨어있던 살수들까지 이번의 공세에 나무와 함께 분시(分屍)되어, 조각난 수풀과 뒤섞인 채 주위로 흩어져 내렸다. 혈무(血霧)가 가라앉고 투두둑거리는 소리가 그쳤을 때, 온통 주위는 조각난 살점과 흘러나온 핏줄기에 완전히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혈향(血香)이 자욱하게 피어올라 그 끔찍함을 전해주고 있었고, 주변의 초목(草木)은 튀어간 선혈과 살점에 의해서 울긋불긋 색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은 한줄기 꺼져가는 불빛에 의해서 그 보이는 것이 희미했지만, 만일 밝은 대낮이라면 그 처참함을 결코 눈뜨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도법의 끔찍한 소리에 멈칫했던 일행들도 이 참혹하고 잔인한 광경에 오히려 놀라, 백짓장처럼 창백한 안색이 되어 넋이 반쯤나간 얼굴로 단리유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모두가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허리를 숙이며 뱃속의 음식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내력(內力)을 가다듬던 단리유아가 그런 모습을 보다가, “어서 상처를 수습하시오. 지금 이 주변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많은 수의 살수들이 남아있는 것 같으니.”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경계하며 말하는 단리유아의 무심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흠칫 놀라 일행이 정신을 차리고 그제야 음구의와 웅정향의 상처를 돌보았다. 두 사람 모두 독(毒)에 중독되어 전신이 검게 변색된 대다가 상처에서 나오는 선혈로 인해 원래의 피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웅정향은 전신에 암기가 박혀 있었는데, 한쪽 눈에 박힌 암기에 의해서 이미 독기(毒氣)가 뇌리에까지 퍼졌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음구의의 상처도 심했는데, 한 팔이 떨어져나간 데다가 이미 옆구리에도 일검을 맞아 내장이 드러날 정도였고, 피를 너무 많이 흘러 혼절한 상태로 기식이 엄엄했다. “우, 웅사형. 구, 구의.” 선상조가 털썩 주저앉아 두 사람을 흔들며 애처롭게 말하지만 둘 다 의식이 없었다. 공손고가 비틀거리며 곁으로 다가가며, “그만 두게. 그래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기선배님, 선배님이 한번 살펴보아주시오.” 주변의 동정을 살피던 단리유아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한다. 이미 호각소리가 나면서 나머지 살수들도 물러간 뒤였다. 그들도 단리유아의 도법을 보고는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혼사가 단리유아의 말에 곁에 다가가 두 사람을 진맥해보고 코에 손을 대 호흡을 알아본 후에, “휴, 두 사람 다 이미 늦었네. 웅가 아이는 간헐적으로 호흡이 있지만 이미 뇌리(腦裏)에까지 독기가 치밀어 오른 상태라 어찌할 수 없네. 아마 곧 호흡도 멈출 것이네. 음가 아이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대다가 독기가 전신으로 퍼져서 살아나기 힘들 것으로 보이네.” 탄식하며 기혼사가 말하고, 음구의의 혈도를 막아 더 이상 출혈이 되지 않게 한다. 곁에서 보고 있던 선상조가 소리쳐, “안 돼! 반드시 살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황금수황밀(黃金粹皇蜜)이 있으니 구의만이라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소사숙,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기선배, 다시 한 번 보아주시오. 두 사람 중에서 한 명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겠소?” 공손고가 상처의 고통을 참으며 옆에서 말한다. 이에 기혼사가 고개를 저으며, “이미 독기(毒氣)에 중독된 데에다 다시 암기의 독이 퍼졌고, 재차 독장(毒掌)에 맞아서 더 이상 손쓸 수 없다네. 하나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독장에까지 당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네. 게다가 그동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설혹 독을 해독한다 해도 어려워.” “나, 나 때문에. 구, 구의가....” 단리유아가 오기 바로 전에 독교(毒橋)의 공세를 막던 선상조가 위태롭게 되자, 음구의가 나서서 몸으로 막았던 것이다. 전신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어 독교를 죽일 수는 있었지만, 다른 살수의 공격은 미처 어찌할 수 없어서 한 팔이 날아가고 옆구리에도 상처를 입게 되었다. 게다가 독교가 최후로 날린 독장(毒掌)에 맞아서 그 독기 또한 전신으로 퍼져 나간 상태였다. “흑흑. 구의, 구의....” 음구의를 붙잡고 통곡을 하는 선상조를 보다가, “기노선배, 잠시라도 좋으니 정신이라도 차리게 해주시오. 마지막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단리유아의 말에 기혼사가 한숨을 내쉬다가 선상조를 밀치고, 음구의의 전신의 혈도를 두드리며, “아마 반각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네. 자네도 그만 그치고 마지막 말이라도 제대로 듣게.” 반혼과혈대법(返魂過血大法)으로 최후의 잠력(潛力)을 일으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죽음이 닥쳐 한순간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을 때나, 생사의 위기에서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붙잡고 울먹이는 선상조를 밀치며, 음구의의 등을 껴안아 일으켜 앉힌다. 다들 침울한 표정으로 음구의를 바라볼 때, 회광반조(廻光反照)로 얼굴이 붉어지더니 곧이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가 아직 죽지 않았군요. 여보게, 상조. 그만 울게. 항상 당당한 사내대장부라고 큰소리치더니 어찌 그리 눈물을 흘리나?” “엉엉. 다 나 때문이네. 자네가....” 음구의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말에, 두 눈에서 눈물을 철철 흘리며 선상조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한다. “사람마다 수명(壽命)을 타고나는 법일세. 평탄치 않은 일생이었지만, 그래도 자네와 같은 지기(知己)도 있었고 나를 알아주고 아껴주는 사람도 있었으니 결코 후회 없는 삶이라 생각하네. 게다가 가는 길 외롭지 않으려고 저렇게 웅사형도 기다리니 무엇이 그리 애통하겠나?” “흐흑....” 울먹이는 선상조를 바라보다가, “소사숙, 함께 세외(世外)를 돌며 오랫동안 모시고 싶었는데 제 명(命)이 이것밖에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오. 그대의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소.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도....”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보며 그 생각은 통탄(痛嘆)스러운데 흔들리는 감정은 없으니, 그 자신 역시 이러한 자신의 태도에 회의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 같이 한 세월이 일 년여가 넘어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을 터인데도.... 잠시 그런 단리유아를 보다가, “소사숙, 부디 바라시던 대로 현경(玄境)에 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여기 웅사형도 그럴 것이니, 항상 저희를 생각하시여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걱정 마시오. 그대나 모든 것을 떨치고 편히 가기를 바라오.” 음구의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기선배, 공손선배. 함께한 날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부디 저희 소사숙을 도와서 무사히 여정(旅程)을 마치길 바랍니다.” 공손고와 기혼사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에 공손고가 침통한 목소리로, “나도 자네가 그리울 것이네. 아, 이런 일이 생기다니....” “클클, 나도 자네를 알게 되어서 즐거웠다네. 아무 걱정 말게나. 나도 나이가 들어서 머지않아 자네를 찾아갈 것 같으니, 그때는 내 다시 자네를 괴롭혀주겠네. 거기에 뭐 좋은 것이 있다고 어찌 이리 빨리 떠났는지.” 웃으며 말하려 하지만 결코 침울한 기색을 숨길 수 없으니,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슬픔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음구의가 입 꼬리를 말아 올려 슬며시 웃으며, “선배님은 부디 천천히 오십시오. 다시 만날 땐 제가 오히려 선배일 테니, 그땐 그런 장난을 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허허, 그런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기혼사를 바라보다가, 다시 선상조를 향해, “여보게, 상조.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을 때는 함께 하기로 했는데, 내가 먼저 가게 되었군 그래. 앞으로 나와 웅사형 몫까지 다해서 소사숙을 모시게나.” “흐흐흑, 차라리 내가 죽게 내버려두지. 자네 혼자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울면서 소리치는 선상조를 보며, 오른팔을 들어 올려 어깨를 쓰다듬으며, “하하, 자네는 아직도 떼를 쓰는 아이 같군. 그동안 성격이 많이 변한 줄 알았더니.... 너무 슬퍼말게나. 죽음이 무슨 대수이겠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늘 곁에 따라붙어 다니는 것인데. 오히려 나는 기대가 되는구만. 날 태어나게 한 부모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 테니....” 쓸쓸히 말하다가 힘이 부치는지 낮아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상조, 부디 몸 건강하게나. 이제 가야할 것 같네. 저, 저기 웅사형이 소, 손짓하며 기다리고 있....” 팔을 떨어뜨리며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한 채로 말이 끊어진다. “구의, 구의. 엉엉....” 선상조가 붙들어 껴안더니, 소리쳐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다른 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망연한 시선으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욱.” 한동안 울부짖다가 그 애통함을 참을 수 없는지 선상조가 선지피를 토해내며 뒤로 넘어간다. “이런, 이 녀석도 상처가 심한데. 단리소협, 어서 일으켜 앉혀 내기(內氣)를 가라앉히도록 하게. 잘못하다간 줄초상이 날지도 모르니.” 기혼사가 기겁하며 단리유아를 재촉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선상조를 일으켜 앉힌 후에, 등 뒤에 정좌하고는 내력을 주입하여 들끓는 혈기를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보며 기혼사가, “자네도 어서 상처를 돌보도록 하게. 그동안 내가 해독약을 만들어볼 테니.” 공손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처를 지혈하고 옷을 찢어 감싼다. 이윽고 그도 정좌에 들어 조식을 취한다. 단리유아도 선상조의 어혈을 빼내어 토하게 한 후에, 수혈을 눌러 잠들게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도 밤은 깊어 고요하기 이를 데 없어, 좀 전에 있었던 참혹한 살겁(殺劫)이 한바탕 꿈인 듯 했다.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의 시신과 주변에 넘어져 있는 십여 명의 살수의 모습이 현실임을 자각시켰지만, 마음은 허황되어 그 사실을 부정하듯이 자꾸만 지난 일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었다. 몇 시진 전만해도 같이 웃으며 떠들었던 것이 마치 그림처럼 생생한데, 이제는 그 두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을 생각하니 괴로운 마음 달랠 길이 없었다. ******* 오타와 오류가 보이시면 지적해주세요. 내일은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올립니다. 그동안 수정하느라 제대로 올리지 못했는데, 다음 주부터는 정상적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말에 한편 올릴까 생각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 본래는 두 사람 중에서 한 명만 죽고, 한 명은 중상으로 해남도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소적교가 공격한 이유는 나중에 나올 것입니다. 소적교(素赤橋) 소적교(素赤橋) 4 상념을 떨치고 한숨을 내쉬며, 바삐 움직이고 있는 기혼사를 향해서, “기선배님, 이 두 사람을 해독할 수 있겠습니까?” 한쪽의 봇짐에서 해독하기 위한 약초를 뒤지다가 단리유아의 물음에, “휴, 쉽지 않구만. 이혼흑염독(離魂黑染毒)도 극독으로 유명한 것인데, 다시 암기와 병기에 발라져있던 다른 독들이 뒤섞여 있어서 시간이 걸릴 것 같네. 적어도 세 시진 이내에는 해독해야 하는데, 약초도 부족하고 혼자서 다 하려니 난감할 지경이라네.” 기혼사의 말에 문득, 지난날 자령독제(紫靈毒帝)에게서 받았던 해독령주(解毒靈珠)가 생각났다. 품속에서 꺼내어 기혼사에게 보이며, “기선배님, 이것이면 그래도 부족한 약초를 대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게 뭔가? 해독령주(解毒靈珠)를 왜 자네가 가지고 있나? 본문에서만 있다고 알려진 것인데.” 기혼사가 놀라서 묻는다. 단리유아가 해독령주를 받은 경과를 설명한 후에, “좀 전에는 뜻밖의 일에 미처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그때 이것을 사용했다면 음사질이라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겠습니다.” “아니네. 해독령주(解毒靈珠)가 독문(毒門)의 지보(至寶)로 유명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일세. 보통의 독이나 한 가지만 중독되었으면 그래도 해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나같이 지독한 극독인 서너 가지 독에 중독된 대다가 다시 독장(毒掌)에 중독되었으니, 설사 이것을 썼더라도 별효과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네. 게다가 상처를 지혈하지 못해 그동안 흘린 피가 너무 많았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네.” 기혼사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한다. 다시 단리유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기노선배, 장소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곳은 혈향(血香)이 진동하고 처참해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에 기혼사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글쎄. 나도 그러고 싶지만, 보다시피 모두가 상처가 심해서 당장에 움직이기는 그렇구만. 일단 해독이라도 되어야 어떻게 해볼 것이네. 당장 급한 것은 그것이니, 그동안에는 어쩔 수 없겠지.” 말을 멈추었다가 주변의 모습에 생각이 났다는 듯이, “그런데, 그 도법이 뭔가? 세상에 그런 도법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소뢰음사(少雷音寺)의 도법 중에서 그런 도성(刀聲)이 일어나는 것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의 위력은 없다고 들었는데?” “그 도법하고 다른 여러 도법이 합쳐진 것입니다. 저도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않고 있습니다.” 단리유아의 설명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휴, 너무 잔인한 도법(刀法)이네. 지켜보던 우리까지 도성(刀聲)에 충격을 받을 정도였는데, 직접 부딪친 그들은 정말 얼마나 끔찍했을지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이 부르르 몸을 떤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며 해독제를 만드는데 열중한다. 해독령주(解毒靈珠)를 갈아서 가루를 내고 그 외에 다른 약초를 섞어서 급한 대로 해독제를 만들어 두 사람에게 복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다시 반 시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먼저 그동안 대충 운공하여 상처를 가라앉힌 공손고에게 복용하게 하고, 한쪽에 쓰러져 잠든 선상조를 깨운 후에 약을 복용하게 했다. 깨어난 선상조가 일어나 앉았지만, 멍하니 두 사람의 시신을 바라보고 눈물만 흘리며 넋을 잃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기혼사가 혀를 차며, “쯔쯧, 이놈아. 산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네놈도 따라서 죽고 싶은 게냐? 단리소협, 자네가 강제로라도 약을 먹이게.” 단리유아가 다가가 넋을 잃고 있는 선상조에게, “선사질, 부디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리시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소사숙, 정말 웅사형과 구의가 죽었습니까? 한바탕 악몽(惡夢)을 꾼 듯 아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넋을 잃고 혼자서 속삭이듯이 작게 중얼거린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흔들며, “나도 꿈이었으면 좋겠소. 그러나 목전의 모습을 보고도 현실에서 도피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러니 그대도 정신을 차리시오. 앞으로의 일도 힘들기는 매한가지 일 테니 말이오.” 단리유아의 무심한 목소리에, 선상조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다. 한동안 묵묵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소사숙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어찌하여 이런 모습을 보고도 그리 감정의 동요가 없이 무정(無情)하게 말씀하십니까?” “....” 선상조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멀리 밤하늘을 쳐다본다. 이런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며 선상조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약을 복용하면서, “저는 가끔 소사숙에게도 감정(感情)이라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행동하시는 것은 그렇지 않지만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정말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하여 해독하는데 열중한다. 선상조의 말이 폐부를 송곳으로 찌르듯이 정통으로 파고들더니, 머릿속을 어지럽혀 자신에 대해서 회의가 일어남을 막을 수 없었다. 한 시진(時辰) 정도가 흘러 두 사람 다 해독이 끝나서 운공을 마쳤지만, 이후에 다시 한 번 천천히 여독까지 해독해야 할 것이다. 우선 장내를 벗어나 깨끗한 곳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요상하고, 그러고 나서 날이 밝은 후에 두 사람을 매장하기로 했다. 기혼사와 단리유아가 각각 쓰러져 있는 두 시신을 업고, 공손고와 선상조가 서로 부축하며 장내를 떠났다. 시간은 인시(寅時:3-5시) 중엽을 지나고 있어서, 아직도 날이 밝으려면 한참이 지나야 할 때였다. 한줄기 장작불에 의지해 공터를 지나갈 때, 발바닥에 밟히는 뭉클거리는 살점과 굳어진 선혈이 주는 질척거리는 느낌이 다들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 정도로 끔직한 소리와 감각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제야 일행도 이것이 생생한 사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단리유아도 역시 등 뒤의 웅정향의 시신에서 전해오는 싸늘히 차가워진 채 굳어져가는 느낌과 끈적거리는 피와 혈향(血香)에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들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든 채, 우울한 낯빛으로 장내를 떠나 산의 아래쪽으로 향하여 내려갔다. 운공하여 해독을 했다지만 다른 내외상도 심한 두 사람 때문에 멀리까지는 갈 수가 없었다. 백여 장을 내려가니 한쪽의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사방 오 장여의 평평한 돌바닥이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시신을 한쪽에 내려놓고 두 사람은 우선 운기행공으로 조식을 취하여 내외상을 다스리기로 했다. 그때까지 미처 자신의 상처는 신경을 쓰지도 못하고 있던 기혼사도 함께 운공에 들어갔다. 단리유아는 다른 사람들이 운공에 드는 것을 보다가, 한쪽에 누워있는 두 사람을 향해서 다가갔다. 이미 두 사람의 몸에선 온기가 사라졌고, 얼굴빛도 독기(毒氣) 때문에 거무스름하게 보이고 있었다. 뜨여진 두 사람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소사숙, 어찌 그렇게 보시고만 계십니까? 한마디 위로의 말도 없이.’ ‘흥! 천하의 무정(無情)한 인간 같으니, 어떻게 슬퍼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지?’ ‘소사숙, 여기는 차갑군요. 휴, 따뜻한 곳이 그립습니다.’ ‘당신 때문이야. 조금만 당신이 신경을 썼다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애원과 한탄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자신만의 헛된 생각일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탓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안하오, 두 사람 다. 나의 헛된 욕심 때문에 그대들이 이렇게 된 것이오. 마음껏 욕하시오. 조금이라도 가는 길에 원이라도 없게.’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속삭이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뜨여진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려 덮은 후에 한숨을 내쉰 채 그 모습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이 두 사람도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運命)에 영향 받아서 그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이렇게 차가운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한 가지 욕심 때문에 이들을 끌고 왔지만, 결국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었다. 생사(生死)의 번뇌(煩惱)에 있어서 가장 큰 것이 친인(親人)의 죽음이라 할 진대, 그런 일이 직접 일어나니 참담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아까 말했던 선상조의 말마따나 괴로운 마음을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없게 만드는 회정결(灰情訣)에 대한 회의가 번뇌(煩惱)를 일으키게 하고, 거기에 더해 선상조의 목소리까지 뇌리를 울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소사숙은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어찌하여 이런 모습을 보고도 그리 감정의 동요가 없이 무정(無情)하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가끔 소사숙에게도 감정(感情)이라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행동하시는 것은 그렇지 않지만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정말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니, 달도 없는 그믐날에 잔뜩 흐려 별빛도 드러나지 않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칠흑과 같아 그 암담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회정결(灰情訣), 회정결이여. 너는 정말로 깰 수 없는 철벽인가?’ 언제나 부동심을 유지하게 만드는 회정결(灰情訣)이지만, 이때만큼 후회가 된 적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제어하여 감정(感情)을 없애는 것이라 하지만, 그동안 같이 했던 두 사람이 죽었는데도 별다른 동요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 뇌리를 차지하고 앉아 떠날 줄 모르는데, 철벽처럼 요지부동인 회정결은 결코 감정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동안에는 이런 상황이 없어서 회정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결코 좋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무감정한 것이 무엇이 좋다는 것인가? 사람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문득 지난날 무념신니(無念神尼)가 한 말이 뇌리에 울렸다. ‘슬픈 일, 괴로운 일, 즐거운 일, 화나는 일, 인생(人生)은 그러한 무수한 일들의 연속인데, 아예 그런 것을 막아버린다면 어떻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겠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강제로 막아서 집착과 번뇌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네에게는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일어난다(一切唯心造)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세.’ ‘그러나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번뇌가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理性)과 감정(感情)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주저앉아 머리를 끌어안고 생각에 빠졌다. ‘모든 것에 동요하지 않기 위해 익힌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줄이야. 그전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날이 갈수록 문제가 커지고 상승에 다가가는 것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차라리 이제라도 다른 심결을 익혀서 회정결(灰情訣)을 억누를까? 하지만 그것은 잘못될 경우 정신이 분열될 수도 있는데....’ 심란한 생각만이 뇌리에 가득하니 그 어지러움과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기혼사가 먼저 운공을 끝내자, “기선배님, 잠깐 자리를 비울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쳐 부르십시오. 멀리는 가지 않고 근처에 있을 테니.” “아니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가? 그러다 아까 같은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나조차 무사하기 힘들 텐데.” 기혼사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듯이 말한다. 이에 무표정한 얼굴로, “마음이 답답해 주변을 돌아볼 생각입니다. 소적교(素赤橋)의 살수들도 돌아갔는지 주변 백여 장 안에는 인적이 없으니, 곧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잠시만 일행을 지켜주십시오.” 말과 함께 기혼사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숲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부르는 기혼사의 목소리를 흘리며 서쪽으로 이십여 장을 가니 오 장여의 수풀만이 무성한 공터가 드러났다. 공터에 들어서서 흑아검(黑牙劍)을 꺼내어 곧바로 검무(劍舞)를 추었다. 모든 정신을 놓고 기혈이 흐트러지는 것도 무시하고, 뇌리에 가득 찬 잡념을 떨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서 검을 휘둘렀다. 초식의 순서나 검법의 종류에 관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저었다. 검에 의해서 주변의 수풀이 조각나 사위를 뒤덮고, 검영(劍影)이 연이어 일어나 신형을 가렸다. 한 시진 정도를 그렇게 펼쳐서 새벽빛이 어둠을 몰아내 천지를 서서히 밝게 비출 때, 그래도 답답한 마음만 더할 뿐이자 검무를 멈추고 검을 내던져버렸다. “퍽” 나무에 부딪쳐 떨어지는 소리에도 쳐다보지도 않고, 넋을 잃고 손바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크고 굵은 손가락, 굳은 살, 얼기설기 상처투성이의. ‘참으로 험하구나. 주인을 잘못 만난 너도, 나의 운명도. 언제나 이런 일이 끝나서 평범한 삶을 느껴볼 것인가?’ 탄식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다, 문득 어머니와의 맹세가 다시 떠올랐다. ‘강해져라. 어떤 사람도, 세력도, 힘도, 설사 운명(運命)의 사슬이라도 끊을 수 있을 때까지.... 그때가 되면 맹세를 잊고 네 뜻대로 살아도 좋다. 그러나 그때가 될 때까지는 넌 단리씨(段俚氏)이고, 여자를 사랑하여 가정을 이룰 수도, 가문에 들어올 수도 없다. 그 때까지는 천지(天地)에 너 홀로 존재(存在)해 있어야한다. 약속해라. 네 이름을 걸고, 반드시 운명의 사슬을 끊을 때까지 지킬 것을....‘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맹세는 한시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 말, 그 표정, 그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니 떠올라서 하루라도 채찍질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공을 익혀서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 것도, 다른 인간적인 정서(情緖)를 버린 것도, 삶의 평안함을 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결과 얻은 것이 무엇인가? 상처투성이의 몸뚱아리는 제외하고라도, 언제나 혈해(血海) 속에서 떠도는 운명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무공이 강해졌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을 살릴 수도 없는 것을.’ 한줄기 새벽빛에 손바닥이 불그스름하게 빛나 마치 핏속에 잠긴 것 같았고, 혈향(血香)이 나는 것도 같아서 절로 눈썹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자식이 이런 길을 걸어갈지? 아니면 이미 운명(運命)이 그리 정해져서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 정말 타고난 운명이라는 것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정해져서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어떤 사람은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그 대강은 정해져 있을지라도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은 이미 그리 정해진 것은 비록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자체가 바로 변함없는 운명(運命)이라고 말한다. ‘과연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 무공을 익혀서 강해지는 것이 운명(運命)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무공을 익힌 것, 그 자체가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 속박된 것은 아닐까? 삼살(三煞)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하는데, 차라리 혼자서 숨어 산다면 이렇게 혈해(血海) 속을 떠돌지는 않게 되지 않았을까?‘ 끝없는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뇌리에 떠오르며 여태까지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다시 회의(懷疑)를 불러일으키며 괴롭히고 있었다. 한참을 이런 상념에 정신을 쏟다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이런 노력과 무공이 쓸데없는 것이 아닌지 하고 생각할 때, 음구의가 마지막에 당부한 말이 떠올랐다. ‘소사숙, 부디 바라시던 대로 현경(玄境)에 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여기 웅사형도 그럴 것이니, 항상 저희를 생각하시여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저어서 생각을 떨쳤다. 결코 자신의 지금까지의 노력이 쓸모없지도 틀리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면 더 이상 자신의 존재이유란 있을 수 없을 테니. 비록 지금은 운명(運命)의 실타래에 매달려 춤추는 인형에 불과할 테지만, 언젠가는 삼라만상(森羅萬象)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어머니와 더불어 이제는 다른 두 사람의 빚이 마음에 더해졌으니, 결코 포기할 수 없으리라. 설혹 중간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설사 신이 앞길을 가로막을지라도. 천고만난(千苦萬難)을 겪을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 결심을 굳히고 검을 찾아 회수한 후에 다시 일행에게로 향했다. 다른 공손고와 선상조는 아직도 운공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였고, 기혼사가 한쪽에 앉아 걱정스런 표정으로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혼사가 다가오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자네는 어찌 그리 무심한가? 이 사람들이 걱정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잠시 저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고개를 숙여 잘못을 말하는 단리유아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휴, 자네도 마음이 편치 않음을 아네만,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소적교(素赤橋)에서 공격한 것을 보면 앞으로도 평탄치 않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소적교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기혼사가 단리유아의 질문에 쓸데없는 짓이라는 듯이, “왜? 찾아가 모두 없애려고? 아서게, 그놈들이 어떤 놈이라고 자신들의 본거지를 쉬이 드러난 곳에 짓겠는가? 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 하듯이 보나마나 곳곳에 숨을 곳을 만들어 놓았을 걸? 이백여 년 동안 자네처럼 찾아볼 생각을 하나라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못 찾은 것은 그만큼 은밀하기 때문이지.” “그래도 최소한 이유라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단리유아가 재차 물을 때, 기혼사가 걱정스런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나도 궁금하네. 하지만 자네가 찾아 나섰을 때에 그놈들이 다시 습격해온다면 어찌할 텐가? 그때는 아마 나라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네. 게다가 지난밤에 찾아온 놈들은 다들 젊은 놈들뿐이어서 사십대 이상은 없더구만. 진짜 무서운 살수들은 나이 들어 은퇴한 살수들이라네. 그런 자들이 한둘만 되었어도 이미 다들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네.”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며, “게다가 이 녀석들은 한동안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것이니, 일단은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일세.” 이에 운공을 마치고 두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공손고가, “나도 기선배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네. 일단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먼저일 걸세. 그 다음에야 다른 일을 생각해도 늦지는 않을 것일세.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네. 누가 우리의 목숨을 청부했을까? 남만(南蠻)에서 그 정도로 원한이 있는 곳은 없다고 보아야 하는데. 여보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공손고가 기혼사의 말에 동조하며 말하다가, 다시 화제를 바꾸어 단리유아에게 물어본다. 이에 단리유아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제가 생각해도 별로 없다고 봅니다. 언뜻 생각나기로는 사인곡(蛇人谷), 고무족(鼓舞族), 금화선부(金花仙府) 정도입니다. 그들과는 크고 작은 원한을 맺은 것이 있어서 청부했을지도 있지만, 실제로 청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저와 싸워본 적이 있으니 웬만한 살수들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알 테고, 그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청부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기혼사 역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러고 보면 나도 이상하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와 자네의 수준을 보아서는 힘들 것임을 알 텐데도 은퇴한 원로살수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으니. 이건 마치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처럼 겉으로만 요란하게 움직인 것 같구만.” “이들이 최고의 살수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공손고가 이에 놀라 묻는다. 기혼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래, 이들을 가르친 전대 살수들이 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단 말일세. 게다가 소적교(素赤橋)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이라는 소적쌍존(素赤雙尊) 중에서 하나도 따라붙지 않았고.” “소적쌍존이라면?”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단지 교주(橋主) 밑에 이 두 사람이 실제적으로 일들을 처리한다고 알려졌을 뿐이야. 교주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다고 들었네.” 한동안 서로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며 대화를 해보았지만, 뚜렷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에 단리유아가 그 화제를 멈추게 하면서, “일단 루암팔봉(壘岩八封)에 가서 상처를 치료하며 다시 알아보기로 합시다. 아직 청부가 끝나지 않았으니, 만일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니. 그때는 한명이라도 생포해서 누가 청부했는지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여러분의 상처가 나으면 나 혼자 직접 찾으러 갈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에 운공을 마치고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선상조가 이를 갈아 부치며, “으드득, 소사숙. 그때는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가서 하나라도 죽여야 이 한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따로 떨어져 있어보았자 오히려 더 위험할 것이네. 그놈들이 다시 암습하러 온다면 이전과 같은 상황이 될 것일세. 차라리 자네와 함께 가서 싸우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이네.” 공손고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다가, 입술을 깨물며 동행할 뜻을 내비친다. 기혼사도 옆에서 듣다가 끼어들어, “그래, 여기 이 사람의 말이 맞네. 괜히 따로 갈라져 보았자 오히려 각개격파 당하기 쉬울 것이네. 이곳 루암팔봉(壘岩八封) 일대는 소적교(素赤橋)의 텃밭과 같으니 말이야. 그러니 상처가 완쾌된 후에 함께 공격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아 보이는구만.” 자신 혼자 찾아가는 것이 여러모로 행동하는데 편할 테지만, 일행 모두의 생각이 그러니 할 수 없이 그러기로 결정했다. 벌써 시간이 진시(辰時:7-9시)초가 다되어서, 해가 동쪽 산마루에 걸려 사방을 비추고 있었지만 구름이 짙게 끼어서 그리 밝지는 않았다. 우중충한 천색을 살피다가 두 사람의 시신을 땅에 묻고 서둘러 루암팔봉(壘岩八封)으로 떠나서 상처를 치료하기로 했다. 산등성이 꼭대기로 올라가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다른 도구가 없으니 장력으로 구덩이를 만들었고, 둘레가 일 장(丈)이 넘는 커다란 나무를 잘라 속을 파내어 관을 대신했다. 두 사람의 시신을 각기 나무 관에 넣은 후에 나란히 합장하여 구덩이에 내려놓고 흙을 덮었다. 다들 침통한 기색으로 말이 없이 흙을 덮을 때, 선상조만이 입술을 악물며 흐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선상조가 넋두리하듯이, “소사숙, 두 사람 다 편하게 갔을까요? 그곳은 좋은 곳일까요? 춥지는 않은지....” 그런 모습에 기혼사가, 미처 단리유아가 대답할 시간도 없이 끼어들어, 혀를 차면서, “쯔쯧,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무덤도 과분해. 그래도 이들은 이렇게 관에 싸여 묻혔지만, 이름 없는 황야(荒野)에 버려지거나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백골(白骨)이 되어 천지의 바람에 따라 혼령(魂靈)이 떠돌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것이야. 그만하고 너도 그런 헛된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해라.” 곧이어 주변의 돌을 찾아서 무덤 주위로 세운 후에 다시 그 위에 흙을 쌓아서 무덤을 완성했고, 바위를 조각내서 비석을 대신하여 무덤 앞에 세웠다.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다가 선상조가 침울한 표정으로, “소사숙. 그런데 소적교(素赤橋) 놈들이 무덤을 파헤치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괜찮을 것이오. 떠나기 전에 내가 이 주위로 진법(陣法)을 펼쳐서 접근하지 못하게 할 테니.” 얼마 후, 다들 무덤 앞에 모여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끌며 무덤을 뒤로하고 산등성이를 내려갔다. 선상조가 자꾸만 뒤돌아보며 시야에서 무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아본다. 동문의 사형과 평생의 고락(苦樂)을 함께 했던 친우가 죽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 하겠는가? 이렇다 할 일이 없고 시간이 있다면, 평생을 이곳에 머문다 해도 그리 아쉽지 않을 것이다. 네 사람의 그림자가 지친 발걸음을 옮겨 터벅터벅 산등성이를 내려간다. 천색(天色)도 이들의 마음을 나타내듯이 곧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이 어둡게 찌푸려 침통한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죽음의 강을 건넌 이여, 그대는 어떠한가? 세사(世事)의 번잡함에서 벗어나니 즐거운가? 남겨진 일들에 근심이 되어 괴로운가? 천지(天地)는 아득하여 그 끝을 모르고, 자연(自然)은 변함없이 그 무정(無情)함을 드러내는데, 언제나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대 먼저 쫓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니, 오늘도 인생의 괴로움과 인연(因緣)의 무상함에 짓눌려, 갈 길 모르고 헤매며 쓸쓸히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네. 다시 만나는 날 내 그대에게 물어보리. 날 기다렸는지, 그동안 홀로 외롭지 않았는지.... 그날이 되면 소리쳐 그대를 부르고, 손에 손을 잡고 은한(銀漢)을 거닐며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 ******* 이 시는 본래 2부의 서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넣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넣었습니다. 주인공의 성격 때문에 시를 많이 넣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네요. 그리고 제 소설의 1부는 그리 재미없고 단조롭습니다. 보실 분들은 무공의 바다에서 헤엄칠 분과 이후의 구도행, 그리고 무공의 역사와 체계, 세외의 풍물을 보고 싶으신 분들만 보십시오. 스리슬쩍 넘어가서 먼치킨을 만들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 Elminster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소적교(素赤橋) 소적교(素赤橋) 5 무거운 침묵 속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일행이 루암팔봉(壘岩八封)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가 지나 미시(未時:1-3시)말이 가까워서였다. 루암팔봉(壘岩八封)은 미공하(眉公河)와 샛강인 간강(干江)이 지나가는 근처에 자리 잡은 도시였는데, 이천여 호(戶)에 달할 정도로 일대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대부분이 라오족(羅奧族)에 속하지만 소수의 여러 부족들도 함께 살고 있었는데, 특별히 어느 나라에 속하지 않은 채 무앙이라 불리는 부족장과 비슷한 위치의 사람이 자치적으로 다스리는 곳에 해당했다. 건물의 형태도 이전 지역과는 달리 특이했는데, 큰 건물들은 대부분 목조 형식으로 지어져 그 처마가 땅 끝에 끌릴 정도로 내려온 것이 많았다. 그 외의 작은 집들은 고상식(高上式)으로 지어져 거북의 등과 같은 모습으로 이엉을 얹은 것이었다. 주민들의 복장은 이전의 월족(越族)과 비슷하게 폭이 넓은 흑색 계통의 옷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소수부족들의 다양한 복장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가끔 주황색의 승복을 입은 승려들도 눈에 띄었는데, 아무래도 이곳은 주로 소승불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남자 나이 십 세가 넘으면 출가하여 사원에서 배우는 것이 전통으로, 그러한 공부를 하지 않는 자는 멸시당하거나 어른으로 대우받기 힘들었다. 또 여기 저기 코끼리의 모습도 보였는데, 이 일대에서는 코끼리가 바로 그 사람의 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일행이 도착한 때가 사월 이십육일로, 중원(中原)의 설날에 해당하는 분 피마이(4월 중순)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도시의 모습은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로 흥청거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로 물들인 일행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 채로 뒤로 물러서니, 도시의 중심부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동부외곽지대의 한 객관에 자리 잡았는데, 만일을 위해서 아예 독채를 따로 잡았다. 또 먹는 음식에서부터 물에 이르기까지 기혼사의 검사를 거친 후에야 먹을 수 있게 했는데, 아무래도 이전의 암습에 의해서 또다시 소적교(素赤橋)의 독수가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우선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대신하여 식사를 하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차려놓은 음식을 보니 카우냐우 라고 하는 찹쌀밥과, 핑카이라 불리는 닭을 통째로 튀긴 것, 랍프와 탐막쿵이라 불리는 고기와 야채를 무친 것, 그 외에 처음 보는 과일이 서너 가지 있었다. 대나무 통에 쪄서 내놓은 쌀밥은 이전과 달리 찰기가 있어서 일행의 입맛에 맞았지만, 나머지 요리는 대체로 매운 맛이 강해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먹기가 쉽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음식의 향기와 모양이 군침을 돌게 만들었지만, 다들 마음이 불편하니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넘어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삼키다가 이내 그만두고, 한쪽의 과일만을 뒤적거려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둘투둘한 돌기로 뒤덮인 작은 달걀만한 정도 되는 람부탄이라는 과일의 껍질을 벗겨서 그 속의 흰 과육을 먹다가, 그 시고 단맛에 얼굴을 찌푸리며 선상조가, “이것도 제 마음 같이 시면서도 달으니, 자꾸만 나 혼자 살아남은 것을 꾸짖는 것 같습니다.” “클클, 이놈아. 그만 좀 청승떨고 정신 좀 차려. 과일이 과일뿐이지, 무어 다를 것 있다고. 그만하고 앞일이나 생각해라.” 기혼사가 선상조의 침울한 얼굴을 바라보며 꾸짖듯이 말한다. 다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단리유아가 기혼사를 바라보며, “기노선배, 며칠이나 이곳에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곳은 소적교(素赤橋)의 입김이 강한 곳이니, 오래도록 머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일단 이놈들의 상처를 어느 정도 치료하고 완전히 해독하려면 최소한 사흘은 더 지내야 할 것이네.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놈들은 몇 없겠지만, 아마도 이곳의 이목은 그놈들에게 장악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니 우리가 여기 머무는 것도 이미 알려졌을 걸세.” 기혼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한다. 이에 공손고가 걱정스럽게, “그렇다면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차라리 외진 곳을 찾아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네. 어차피 우리가 숨는다 해도 별로 소용없을 것이네. 이미 우리의 행적을 알고 있을 테니. 차라리 편히 쉬며 빨리 회복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네.” 기혼사의 말에 이어 단리유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기선배님의 말이 맞습니다. 숨어보았자 우리에게는 별 이득이 없이 상처의 회복만 더딜 뿐입니다. 어차피 그놈들의 본거지를 알려면, 그놈들이 다시 습격하게 만들어 하나라도 생포해야 하니 아예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안 오면 상처가 치료된 뒤에 우리가 찾아가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다들 생각에 잠길 때, 기혼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데 그동안에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실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네와 나뿐인데.” “일단 제가 밤중에는 경계를 설 테니, 기선배님께서 낮에는 주위를 살펴주십시오. 그리고 건물 주위로 아예 기문진(奇門陣)을 펼쳐 출입구만 열어놓고, 곳곳에 간단하게나마 기관을 설치해서 놈들이 접근했을 때는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할 생각입니다.” 일단 단리유아의 말대로 하기로 하고 잠시 더 의논하여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 결정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고와 선상조는 한쪽의 방에서 요상을 하고, 기혼사와 단리유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밖으로 향했다. 단리유아가 집 주위를 돌며 잡동사니를 치우고 담벼락을 따라 사방 삼 장여의 공터에 진법(陣法)을 펼치는 동안, 그 사이 사이로 기혼사가 군데군데 약물을 뿌리고 다녔다. 유독하지는 않지만, 한동안 정신을 잃게 하는 미혼독(迷魂毒)과 추적하는데 쓰기 위해 천리미향(千里迷香)을 뿌린 것이다. 다시 두 사람이 모여서 눈에 보이지 않은 곳, 처마 밑이나 지붕의 구석진 곳에다가 침입에 대비해서 철질려(鐵蒺藜)를 깔아두거나 철선으로 줄을 쳐서 건드렸을 때 소리가 나도록 했다. 우선은 이정도로 하고 다음날 몇 가지를 더 구해 와서 보강하기로 했다. 그렇게 준비하니 벌써 해질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혼사가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흠, 이만하면 대충 준비는 끝났구만. 내일 다시 손을 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정도 만족하세. 일단 자네 먼저 눈이라도 부치게. 저녁부터는 자네가 주위를 경계해야 할 것이니.” “저는 피곤하지 않으니, 선배님께서 먼저 쉬십시오. 저야 이렇다 할 상처도 없는데다가 이미 늦어서 잠자기도 글렀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선배님도 상처가 여러 곳이니 일단 먼저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단리유아가 기혼사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한다. 사실 일행 중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이 기혼사일 것이다. 겉모습과는 달리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니,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상처는 제대로 돌볼 사이도 없이 밤새 일행을 돌보느라 더욱 지쳤을 터였다. 단리유아의 말에 괜찮다며 한동안 고집부리다가 변함없는 표정으로 계속 말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래그래, 알았다구. 일단 자네가 먼저 운기행공이라도 하게. 그전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그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시진 후에 교대하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에 되어 단리유아 혼자서 대청에 앉아 경계를 서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에 들었다. 모두가 하룻밤 사이에 심신이 지쳐서 곧 잠에 들더니 낮은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고, 가끔 선상조의 잠꼬대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적막함을 깨뜨릴 뿐이었다. 귀를 기울이니 멀리서 누군가 와공후(臥箜篌)를 타는지, 은은하게 울려오는 처량한 음률이 고단한 여행자의 심사를 뒤흔들어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한줄기 촛불에 의지하여 넓은 대청의 탁자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상념에 잠겼다. 이번의 여정(旅程)을 통해서 많은 일이 일어났고, 자신의 무공에 있어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그 이전의 홀로 독행(獨行)할 때와는 달리 여러 사람과의 동행은 비록 시일이 지체되고 사람간의 불화와 틀어짐을 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인간관계 속에서 느끼는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홀로 독행할 때에는 그런 생각이 없이 오직 무공에만 매달리다 보니, 인간관계와 그런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온갖 감정을 느끼거나 그에 대해 번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 이전만 해도 그런 관계를 일부러 피해왔었고, 자신의 무공에도 그리 필요함을 느끼지 못했었다. 아니, 자신의 운명(運命)을 생각할 때 그런 괴로움을 다시 맛보기 싫어서 그런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채 천지에 홀로 떠도는 천고(天孤)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을 것이었다. 이번의 이 일로 인해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생긴 것을 보니, 운명의 수레바퀴는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자신의 삶과 무공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게 된 것을 보면 그 씁쓸함을 참을 수 없었다. 마음을 제어하는 회정결(灰情訣)이 그러한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과 번민이 없다면, 결코 흔들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끝없는 회의 속에 자신을 돌이켜보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한 토막의 돌덩이와 다름없게 될 것이다. 심결(心訣)이란 무엇인가? 모든 무공에는 대소경중에 상관없이 그러한 심결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은 무공을 익힐 시나 펼칠 시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지만, 유독 회정결(灰情訣)이 문제인 것은 익히면 익힐수록 다른 감정들은 없애버리고 일체의 흔들림이 없게 무감정한 인간을 만드는데 있었다. 본래의 회정마공((灰情魔功)은 신체의 감각을 죽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 마음까지 죽이게 만드는 마공이었다. 일단 먼저 전신의 통각(痛覺)을 없애서 어떠한 통증에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일단계에 해당했고, 거기에 더해서 얼굴의 표정을 나타내지 못하게 안면의 근육을 마비시키는 것이 이단계이고, 마지막으로 눈빛을 죽이는 것이 삼단계에 해당했다. 일단 여기까지가 육체적인 완성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채 백 명에 한 명도 되기 힘들었다. 그런 대법(大法)과 고련(苦練) 속에 미치거나 자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회정마공((灰情魔功)이 마공으로서 악명을 떨치게 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는데, 그러한 대법을 통해서 탄생하는 온전한 한명을 위해서 무고한 생명이 무수하게 죽어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누가 일부러 그런 무공을 익히려 하겠는가? 납치해서 강제로 익히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더욱 성공의 가능성은 떨어졌다. 실제 완전하게 통과하는 사람은 없다고 보아야 했고, 보통은 일단계에까지 달하면 살수의 길로 접어들며 회정마공을 익히기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단 그런 육체적인 감각이 상실되면서부터 회정마공((灰情魔功)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미 외적인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되니 급속도로 인간의 감정 역시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 탄생하는 살수는 이렇다 할 살기도 없고 무감정한 채, 대법동안 암시적으로 세뇌되어 오직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는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 회정마의가 회정구마(灰情九魔)를 만들어 낼 때는 거기에 더해서 육체를 개조하고 끝없는 살심을 일으키게 만들어 정말 다시없는 살인기계들을 만들었다. 그 자신 역시 원한에 차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을 테지만, 그로 인해서 강호(江湖)는 한동안 혈해(血海)에서 미쳐 날뛰는 살인마들을 직면하게 되었었다. 회정마맥(灰情魔脈)의 역사상 완전하게 삼단계까지 통과한 것이 채 셋을 넘길 수 없었는데, 회정마의는 그런 불가능을 약물과 신체개조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이후로 회정마공((灰情魔功)이 익히는 것이 금지된 금단의 마공이 된 것도 그런 바가 컸다. 그러나 실제로 완벽한 회정마공은 다시는 나타날 수 없었다. 이미 그 구결과 수련 방법이 실전된 데에다 누가 그런 마공을 일부러 익히려하겠는가? 비록 다시는 그런 무공이 나타날 수는 없었지만, 회정마맥(灰情魔脈)이 강호(江湖)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실제 대다수 살수집단에 있어서 조종과 같았는데, 회정마공을 완성하는 과정 속에 탄생한 무수한 절기와 비법이 오늘날의 살수들의 무공과 기초수련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단리유아 자신이 익힌 회정결(灰情訣)은 이런 육체의 단련은 제외하고, 단지 내면의 심상을 제어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회정마의가 원시마교의 공격 속에 삼년 동안이나 쫓기면서 완성한 것이 바로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이었는데, 육체적인 면을 제외한 반면에 오히려 심적인 문제에 대해서 더 보강한 것이었다. 회정마의(灰情魔醫)는 일체의 부동심에 이른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현경(玄境)에 달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전반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실제 그런 경지에 이르는 길은 보통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차라리 육체적으로는 구전회혼결(九轉回魂訣)에 의해서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게 만들고, 내면적으로는 회정결(灰情訣)로 완전한 부동심에 이른 인간이 더 강하고 현실적으로도 훨씬 빠르게 현경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결과로 탄생한 회정구전회혼마공(灰情九轉回魂魔功)은 확실히 그 뛰어난 점이 많았지만, 일단 화경(化境)의 경지를 넘어간 후부터 현경(玄境)에 달할 때까지는 오히려 문제가 더 커졌다. 일단 회정결(灰情訣)에 의해서 자의든 타의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을 것이고, 그런 과정이 없다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도 힘든 것이었다. 일체의 감정을 막아서 부동심을 이루게 하는데 실제로 그것은 단지 감정에 흔들리지 않게만 만들 뿐이지, 특별히 깨달음에 의해서 그리되는 것은 아니니 완전한 부동심이라 할 수 없었다. 또 회정결의 성취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점차 세상사에 무관심하게 되는데, 만일 단리유아처럼 뚜렷한 목표가 없는 인간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은거하거나 자살하게 되었을 것이다. 본래 단리유아 자신이 무영비고(無影秘庫)에서 찾은 회정마경(灰情魔經)에는 이 내공심법이외에도 다른 무공도 있었다. 바로 나머지 팔마의 무공이었는데 하나 같이 상대를 분시하는 잔인한 무공인데다가 도저히 무공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고문에 가까운 수법들이 즐비했다. 그런 무공들은 포기하고 내공심법만 익혔는데, 처음 자신이 이 무공을 익힐 때만 해도 이러한 문제점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오히려 가장 적합하게 생각되었던 것이었다. 열 살의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아이가 도움 없이 혼자서 익히기에는 이것만큼 적당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문제가 커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자신 역시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끊임없는 생각으로 심결(心訣)을 숙고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이번의 이런 일을 격고 번민에 가득 차 하루 종일 생각할수록 이러한 심적인 충격만이 해결책임을 느낄 수 있었다. 끊임없는 고뇌(苦惱)와 회오(悔悟)가 심상을 흔들지 않는 한 결코 회정결(灰情訣)은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두 사람의 불행 속에 이런 것을 느끼니 암흑 속에서 빛을 발견한 듯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삶이 끝난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괴로움만 더해주는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배회하며 상념에 잠겼다. 앞으로의 여정(旅程)도 쉽지 않을 것이고, 나머지 일행의 불행도 눈에 보이는 듯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대로 이들을 계속 데리고 다녀야 하는지, 아니면 그만 헤어져 남은 사람들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래야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옛사람들의 말대로 불행과 행복은 같이 온다는데, 자신의 처지가 그와 같았다. 그 후로 이틀 동안은 별다른 일이 없이 지나갔다. 일행도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난 것 같았고, 독상도 완치되었다. 남은 것은 내외상이었지만 움직이는데 그리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고, 십여 일이 흐르면 완치될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에는 상처치료에 바빠서 함께 할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그날 아침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모두 모여서 식사를 같이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기혼사가 먼저 말문을 열어, “정말 이상한 일이로구만. 지난 이틀 동안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다니.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습격했는지 영문을 모르겠네.” 턱을 받치며 골똘히 생각해보며 말하는데, 기혼사 자신이 보기에도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대 살수들은 나서지도 않은 채 칠십여 명의 살수가 습격했고, 육십 명 가까이 죽었는데도 재차 암습하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공손고 역시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휴, 저도 이것을 좋은 징조인지 아니면 불길한 징조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도 알 것이고, 부상이 심해서 실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선배와 단리소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텐데.” “소사숙, 지금이라도 우리가 찾아나서는 것이 어떨까요?” 선상조가 승낙하면 곧바로 일어설 기세로 말하니,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오. 아직 상처가 완치되었다고 볼 수 없으니, 사흘 정도 더 기다려 보도록 합시다. 그들이 나몽산(邏霿山) 일대에 있는 한, 산 전체를 뒤져서라도 찾을 수 있을 테니.” 이에 기혼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흠, 그것도 확실한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네. 나몽산(邏霿山)에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곳이 본거지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니. 그놈들이 이 근처에 자리 잡은 지 이백년에 가까워오는데, 분명히 다른 곳에도 소굴을 마련했을 것이네. 이것 정말 난감하구만. 어떤 놈이라도 좋으니 달려들어야 어찌해볼 텐데, 마냥 기다리고만 있으니.” 다들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며 의논을 해보았지만, 마땅한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모두가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궁금했지만, 재차 암습하는 살수도 없으니 답답함만 더해갔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죽음을 두고 그냥 떠나자니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고, 차라리 당장이라도 나몽산(邏霿山)으로 찾아가 뒤져보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 서로 떠들어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을 때, 문득 문을 두드리며 별채에서 일하는 소동이 다가와서 소식을 전한다. “나으리, 어떤 분이 찾아오셨는데 어찌할까요?” 라오족(羅奧族)의 말에 일행이 멀뚱히 기혼사를 바라보며 궁금하게 여기자, 기혼사가 나서서, “누가 찾아왔단 말이냐? 우리를 알 만한 사람이 이 근처에는 없을 텐데? 어떻게 생겼더냐?” “흰옷을 입은 노인인데요?”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혹시 누군지는 아느냐?” “아니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요. 정말 부처님처럼 자애롭게 생겼어요. 저는 마치 절에서 걸어 나온 부처님인줄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한참을 그 생김새에 대해서 떠드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기혼사가 일행에게 설명했다. 모두가 서로 쳐다보며 얘기해보지만, 다들 의아하게 여길 뿐 상대가 누군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한동안 의논을 하다가 일단 만나보기로 하고, 혹시라도 암습이 이어질지 모르니 일단 기혼사와 단리유아가 나서고 선상조와 공손고는 뒤로 물러나 있기로 했다. ******* 너무 길어져서, 나머지는 저녁에 수정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한량거제 님의 말씀대로 어색하군요. 수정했습니다. 소적교(素赤橋) 소적교(素赤橋) 6 곧이어 소동의 안내를 받아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정말 아이의 설명대로였다. 육십을 넘어가는 혈색 좋은 둥근 얼굴에 자애로운 웃음이 떠도는 표정에다 흰머리와 흰 수염을 하고, 전체적으로 승려의 복장처럼 흰색의 천으로 한쪽의 어깨를 드러내며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기혼사가 상대를 훑어보다가 미심쩍은 얼굴로, “흘흘, 그대는 누구요? 전혀 안면이 없는 것 같은데.” 한동안 물끄러미 기혼사를 바라보다가, “허허허, 선배의 위명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뵈니 정말 소문대로이구려.” 한어(漢語)로 말하며 딴청을 피운다. 이에 기혼사가 눈썹을 찌푸리며 막 말을 하려할 때, “그보다 이쪽 분들이나 소개해주시지요.” “흥! 그러는 자네의 신분부터 소개하는 것이 어떤가? 찾아왔으면 객이 먼저 자신을 소개해야지.” 기혼사가 화낼 때, 철모르는 아이를 바라보듯이, “허허, 어련히 알아서 할까봐 그러시오. 가만히 있으시오. 곧 소개할 테니.” “뭐, 뭐라고? 이 자식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흔들 것처럼 흥분하는 기혼사를 단리유아가 붙잡아 뒤로 물러나게 하고, “저는 일행을 이끌고 있는 단리유아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공손고 선배이시고, 이쪽은 제게 사질 되는 선상조라는 사람입니다.”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흠, 그대가 바로 그 사람이구만. 내 전해들은 소문을 듣고도 반신반의 했는데, 정말 명불허전이로군.” “....” “우선 자리에 앉아서 얘기하는 것이 어떤가? 이거 손님접대가 말이 아니구만.”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쪽의 탁자로 먼저 걸어가며 말한다. 이에 다들 얼굴을 찌푸릴 때, “저런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 손님인 주제에 마치 주인인 듯이 말하는군.” 기혼사가 투덜거리며 말하니 곧 맞받아쳐, “허허, 선배는 어찌 그리 심통이시오. 나이 들어 서있기 힘들어 앉아서 말하자는 것뿐인데.” “저 자식이 정말....” 뻔뻔한 대답에 흥분하는 기혼사를 붙잡으며 단리유아가 전음으로, <기선배님, 진정하십시오. 아무래도 보통 고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도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은연중에 그 기운이 범상치 않습니다. 혹시라도 소적교(素赤橋)와 관련된 사람일지도 모르니 주의하십시오.> <뭐, 소적교(素赤橋)? 가만, 그러고 보니 소적쌍존(素赤雙尊) 중에서 백소생존(白素生尊)의 복장이 저렇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전음으로 대화하고 있을 때, 태연히 차를 따라서 마시며, “다들 뭐하는 것이오? 손님을 따로 두고 속닥거리기만 하다니.” “너 혹시 소적교(素赤橋)의 백소생존(白素生尊)이 아니냐?” 기혼사가 노려보다가 손가락질하며 소리친다. 이에 변함없이 느긋한 어조로, “허허, 이제야 눈치 채셨소? 일단 이리와 앉으시오. 오늘은 그대들과 싸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니.” “뭐? 이런 뻔뻔한 놈 같으니. 사람을 죽여 놓고도 당당히 찾아와?” “단리소협, 일단 제압하고 나서 말하세.” “으드득, 소사숙. 소적교(素赤橋)의 놈이라면 먼저 반쯤 죽여 놓고 봅시다.” 시인하는 백소생존(白素生尊)을 보며, 다들 살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한두 마디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친다. 서로 분노에 차서 떠들 때, 단리유아가 나서서, “다들 진정하시오. 일단 대화를 해본 후에 어찌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 공손선배와 선사질은 주위를 돌아보며 누가 접근하는지 한번 살펴보아주시오.” “허허, 중원(中原)의 법도는 이러한가? 대화를 하고자 찾아온 사람을 이리 대접하다니. 밖에는 아무도 없으니 걱정 말고 이리와 앉아서 얘기나 하자니까?”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한다. 잠시 단리유아가 주변의 기척에 귀 기울이다가 상대의 말대로 별다른 이상이 없자, 일단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은 공손고와 선상조는 뒤쪽으로 물러나게 한 후에 기혼사와 둘이서 탁자에 마주하며 앉았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나? 흘흘, 소적교(素赤橋)의 놈들은 다 자네처럼 뻔뻔한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기혼사를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에 기혼사가 화를 내려고 할 때, “흠, 그런 소리나 듣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니 선배는 조용이나 있으시오. 여기 단리소협과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으니.” “너 정말 사람 말이 말같이 않다는 것이냐? 너 자리에서....”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려는 기혼사를 붙잡아 앉히며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만 하십시오, 기선배님. 일단 얘기를 들어봅시다. 우선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동요 없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백소생존이 특이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자네 혹시 본래 출신이 살수 아니었나? 무슨 표정이 그렇게 삭막한가?” “....” “알았네, 알았어. 더 묻지 않지. 나는 여기 기선배의 말대로 소적교(素赤橋)의 백소생존(白素生尊)이라 불리는 사람일세. 이름은 잊은 지 오래니 그저 소(素) 늙은이라 부르면 되네.” 그제야 단리유아가 말문을 열어 단도직입적으로, “소(素)선배가 이렇게 저희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하지 않고 잠시 차를 마시며 미적거리다가, “흠, 차 맛이 그렇구만. 모름지기 차라면 뜨거울 때 마셔야 하는데, 너무 식은 것 같군.” “그럼 다시 데워드리지요.” 단리유아가 단지를 들어 올려 손바닥에 올린 채로 삼매진화로 데운 후에 다시 내려놓는다. 이에 백소생존(白素生尊)이 잠깐 놀란 표정이었다가 이내 그 기색을 지우고, 다시 차를 따라 마시며, “이제야 조금 나은 것 같군. 역시 차는 이래야하지.” “이제 그만 본론을 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리유아의 조용하고 무심한 태도에 헛기침을 하다가, “흠, 흠. 본래 사흘 전에 있었던 일은 본문의 내부 문제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이네. 그것에 대해서 사과하려고 이렇게 찾아온 것일세.” “아니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요? 내가 당신을 죽여 놓고 그래볼 테니, 어떤 기분인지 한번 느껴보시오.” 이에 분노한 선상조가 소리치며 달려들 때, “쯔쯧, 성급한 사람이로구만. 사람이 죽어버리면 아무 느낌도 없을 텐데, 내가 죽은 다음에 무슨 소용인가? 차라리 두고두고 괴롭히는 것이 더 재미있을 텐데?” 단리유아가 일어나 말릴 때, 조롱하듯이 말한다. 이에 다들 흥분할 때, 단리유아가 다시 진정시키고 선상조를 한쪽의 공손에게 맡기며 일단 말이 끝날 때까지는 참도록 달랜다.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는 단리유아를 보며, “이후로는 암습이 없을 것이네. 자네 일행도 두 사람이 죽었지만, 본문에서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전력이 사라져 버렸네. 그러니 서로 이만하고, 그만두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나?” “아니, 네놈은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애초에 습격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기혼사가 끼어들어 소리칠 때, 이맛살을 찌푸리며 백소생존(白素生尊)이, “그래서 내가 직접 이리 찾아와서 말하지 않소?” “소(素)선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미 인과(因果)가 발생한 후에 그러는 한마디 말로는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보다 소상히 어찌된 일인지 말해주시오.” 단리유아의 말에 한동안 미간을 모으며 생각에 잠기다가, “그래, 내 이야기 해주지. 본래 이 일은 자네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니. 우리 소적교(素赤橋)는 과거 남조국(南詔國)이 건국되기 직전에 왕실의 후원으로 생겼는데, 대대로 왕의 동생이 교주가 되어 이끌었다네. 그러다 이백년 정도 전에 의견차로 이곳으로 옮겨온 후에는 관계를 끊었지. 그 후로는 그때 교주였던 분의 후예들이 후대를 이끌어 교주가 되었다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 “흠, 그런데 얼마 전에 본문에 문제가 발생했네. 전대 교주가 죽고 나서 아직 어린 왕녀(王女)가 교주가 되었는데 그만 납치되어서 실종되었네. 중원(中原)으로 향한 것은 분명한데, 확실하게 어느 곳으로 갔는지는 우리도 모르네.” “뭐라고? 아니 어떻게 했길래 교주가 납치되도록 몰랐단 말이냐?” 기혼사의 말에도 묵묵부답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후에 다시 단리유아를 보며, “갑작스럽게 전대교주가 죽은지라, 외부에 나가서 따로 교육받고 있던 왕녀(王女)를 급히 불러들이게 되었네.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다들 걱정하고 있을 때에야 납치된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도 누군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서찰을 받고나서야 사태를 파악한 것이네. 서찰에는 우리가 추적할지 알았는지 자네 일행들을 공격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네. 그렇지 않으면 왕녀를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그렇다 해도 호위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단리유아 역시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라 백소생존(白素生尊)에게 묻는다. 이에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휴, 나와 같이 본교를 이끌던 혈적사존(血赤死尊)이 반심을 먹고 납치한 것으로 보이네. 그자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으니 틀림없을 것이네. 아니더라도 최소한 관계가 있을 것이지. 혈적사존은 우리와 같은 남만인(南蠻人)이 아니네. 자네와 같은 한인(漢人)이지. 본래 전전대교주가 그 자질을 보고 받아들였는데, 이와 같은 일이 생겼다네. 우리와 다른 한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실권은 적고, 살행만을 도맡아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을 것이네. 그전까지는 교주가 생존해 있고, 대다수도 그를 따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지. 그런데 이런 틈이 보이자 바로 일을 저질렀네.” “그렇더라도 그자를 추적하는 것이 빠르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아무리 남만인(南蠻人)이 아니어서 불만에 가득 찼다고 해도 그렇게 하루아침에 반심을 먹다니 이해가 안 됩니다.” 단리유아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우리도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한동안 그냥 추적할지말지 망설였는데, 그자가 관련이 되어 있다면 추적하는 것도 힘들고 또 교내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아직 남아있을 테니 어쩔 수 없었네. 게다가 잘못됐다가는 왕녀가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니. 일단 젊은 자들은 대부분 교에 대한 충섬심이 깊지 않으니 거의 이번 일에 참가하게 만들었는데, 확실히 누가 첩자로 끼어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네. 또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 일단은 그자의 말대로 하는 척하다가 교내를 정비하고 난 후에 어찌해보아야 할 것이니. 그런 틈에 나머지 그런 자들을 없앨 수밖에 없었네. 우리로서도 최소한 습격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지.” 추적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천천히 단리유아를 보면서, “누군가 그자를 부추기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자가 불만에 차있다고 해도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걸세. 한편으로는 추적하게 하면서 여러 가지로 알아보았는데, 비밀리에 중원(中原)에서 온 자와 몇 번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네.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백소생존(白素生尊)의 말대로라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에 의해서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다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없을 때, 단리유아가 정신을 차리고, “누군가의 청부를 받아서 그랬다 하더라도, 그자가 귀교의 소교주를 납치할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그냥 혼자서 떠나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것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이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내가 이렇게 찾아온 것도 그 때문이네. 본교의 소교주는 특이한 자질을 타고났다네. 자네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바로 천향신골(天香神骨)이라네.” “뭐, 천향신골?” “세상에 천향신골이라니?” 기혼사가 놀라 소리쳐 물을 때, 일행도 역시 놀라서 반문하고 있었다. 천향신골(天香神骨)은 선천적으로 몸에서 향기가 나는데다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미혼대법(迷魂大法)과 비슷한 염정력(艶情力)이 생긴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일단 남자라면 결코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하는 특이한 체질이었고, 무공을 익히는 데에도 더할 나위 없는 신체여서 여인의 신체로는 최상이라 알려져 있었다. 과거 딱 한번 그런 신체를 타고난 여인이 있었는데, 단지 삼년동안 강호(江湖)를 종횡하며 누군가를 찾아 헤매었을 뿐이었지만 한 마디로 그때 당시 강호의 상황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었다. 그녀가 바로 용봉쌍려(龍鳳雙侶)의 봉려(鳳侶)로서 오백여 년 전 강호를 휘젓고 다녔던 천향신녀(天香神女) 대가수(代嘉秀)였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단리유아가 곧바로,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흠, 자네도 천향신골(天香神骨)이 남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 만일 누군가 왕녀를 이용하려한다면 천하에 그녀의 염정력(艶情力)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으로 생각하나? 아마 기십에 불과할 걸?” 백소생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는, “그러나 현재 세외(世外)를 떠도는 비무행에 나선 나와는 그리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 지금은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네. 게다가 왕녀의 나이도 이제 열 살에 불과하니 앞으로 빨라도 오년 정도가 흘러야 그 염정력(艶情力)이 본격적으로 발휘될 것이네. 그럼에도 이렇게 내가 찾아온 것은 더 이상의 싸움을 막기 위한 것도 있지만, 보다 큰 이유는 그녀를 찾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라네.” 기혼사가 이에 코웃음 치며 비꼬듯이, “뭐, 부탁? 흥! 그 계집이 죽든 살든 무슨 상관이냐? 따지고 보면 다 그 계집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백소생존이 기혼사의 말은 아예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이번에 나를 포함해서 본문의 최고고수들로 이십여 명이 중원(中原)으로 떠날 생각이네. 하루라도 빨리 왕녀를 찾아야 하니까. 그렇지 않다면 본문은 그냥 세월 속에 사라지고 말 것이네. 하지만 그 넓은 중원에서 설혹 우리가 찾는다고 해도, 쉽게 다시 데려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네. 아마 십중팔구는 이번 일에 관여한 집단에게 모두 죽음을 맞이하기 십상일 것이네. 이 먼 남만(南蠻)에까지 손길이 닿을 정도의 집단에게 이십여 명의 살수들이 얼마나 큰 힘을 쓸 수 있겠나? 데려오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 뻔하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찾는데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네. 만일이라도 왕녀가 다른 이들에게 이용되어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을 한다면, 나중에라도 자네가 대신 죽여 달라는 것이지.” “죽여 달라니?” 뜻밖의 말에 단리유아가 곧바로 반문한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적교(素赤橋)의 정신적인 구심점인 왕녀를 죽여 달라는 소리는 스스로 멸문을 자초하겠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백소생존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울한 어조로, “그래,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네. 비록 나이에 비해 총명하다지만 아직 어린데다가 혹시라도 사법(邪法)에 당한다면 다른 사람의 꼭두각시가 될지도 모르니.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도 우리가 모두 죽고, 왕녀가 그런 지경에 있다면 자네가 깨끗이 죽여 달라는 것이네. 그렇지 않고 큰 죄를 짓지 않았다면 다시 이곳으로 되돌려 보내 달라는 것이고. 이 세상에 왕녀의 염정력(艶情力)에 휘둘리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인데, 그중에서도 자네가 적임자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것이네.” “그러면 이미 죽은 두 사람의 목숨 빚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눈썹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이번 일도 비록 우리가 직접 살수를 썼다지만, 실제 근본 원인은 왕녀를 납치한 집단의 소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가 복수하고자 한다면 그 집단에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네. 그 집단에서 청부했으니.” “어느 곳인지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모르네. 우리도 누구인지 확인해보고 있지만, 워낙 멀리 떨어진 중원(中原)에서 찾아온 집단이라 알 수가 없지. 그쪽의 사정까지 자세히 파악한 적은 없으니.” 백소생존(白素生尊)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 문제는 저 혼자 결정하기 어려우니, 의논을 해보아야겠습니다.”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한쪽으로 모이게 한 후에, 단음강막(斷音剛幕)을 펼쳐 주위를 차단한 채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생각을 말하며 어찌할지 의논했다. “들어본 것과 같은 상황인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보다 저놈들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괜히 청부를 받아드렸다 싶으니 이제와 딴 수작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나?” 공손고가 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이에 기혼사가 고개를 흔들며, “아니, 아마도 사실인 것 같아. 사실상 암습이 이어진다면 단리소협을 제외하고는 살아남는다고 보장을 못할 상황이야. 그런 때에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 떠들 필요는 없는 것이지. 게다가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보아도 그런 것 같고.” “기선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 생각에도 일부러 꾸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교내의 치부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단리유아가 기혼사의 말에 덧붙여 말한다. 이에 공손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흠, 딴은 그렇기도 하군. 그러면 우선 자네 생각부터 말해보게.” 공손고가 단리유아의 의견을 먼저 묻는다. 이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제 생각은 일단 저들의 말대로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아니, 소사숙. 두 사람이 저들에 의해서 죽었는데, 내버려두자는 말씀이십니까?” 선상조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곧바로 반문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일행을 돌아보며, “확실히 나도 저들에게 복수하고 싶지만, 사실상 복수하기도 힘듭니다. 저들 자체가 살수들이니 결코 정면 대결은 없을 것이고, 이전과 같은 암습이 계속된다면 여러분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기선배님의 말씀대로라면 이번에는 전대 살수들이 나설 것이니,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또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모르니, 그 본거지를 찾는다는 것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제 생각은 저들로 하여금 중원(中原)의 그 세력을 추적하게 만들어, 실제적으로 이번 일을 일으킨 원흉(元兇)을 찾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비록 우리가 당장에 직접 복수하지 않는다 해도 저들 또한 그런 과정 속에서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우리는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일석이조이지 않겠습니까?” 잠시 더 의논하다가 결국에는 단리유아의 말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단리유아가, “소(素)선배, 우리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지지 않겠소. 그러나 그쪽의 책임이 없다고는 볼 수 없으니, 몇 가지 도움을 바라겠소.” “그래 말해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줄 테니.” “일단 더 이상의 암습이 없다는 것을 보장해야 할 것. 둘째, 앞으로 중원(中原)에서 알아낸 사실을 매년 보내줄 것. 그리고....” 단리유아의 말을 중간에 가로 막으며, “잠깐, 자네들은 세외(世外)를 떠돈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가 어떻게 자네들을 찾아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설혹 그런다 해도 이미 한참 뒤일 터인데.” “흠, 그것도 그렇군요. 그러면 적당한 곳에 조사한 것을 숨겨 놓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제가 찾아볼 수 있게.” “그래 그것이 좋겠네. 그런데, 우리는 중원(中原)에 대해서 잘 모르니 자네가 한번 그런 곳을 말해보게. 그것이 나중에 자네가 찾을 때도 좋을 테니.” 잠시 백소생존(白素生尊)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가, “낙양(洛陽)근처 용문석굴(龍門石窟)에 봉선사(奉先寺)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의 본존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왼쪽 귓속에 숨겨놓으십시오. 워낙 유명한 불상이니 찾기도 쉽고, 높이가 육 장(丈) 가까이 되니 사람들의 손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알겠네. 그런 곳이라면 우리도 찾기 쉬울 것 같군” 백소생존이 말과 동시에 전음으로, <만일을 대비해서 다른 곳에도 숨겨놓겠네. 자네가 찾기 쉽게 따로 표시해 둘 테니 걱정 말고.> 느닷없는 전음에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해남파(海南派)에 전해주고 적절히 보상도 해주십시오.” “해남파에? 흠, 그러지. 어차피 중원(中原)으로 향하다보면 근처를 지날 것이니, 어려운 것이 아닐 테지.” 잠시 더 세부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멀어지는 백소생존(白素生尊)의 모습을 보며, 단리유아는 과연 누가 이번 일을 일으켰는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이역만리에까지 와서 청부하다니, 아무리 소적교(素赤橋)의 왕녀를 납치하는데 필요해서 그렇다 쳐도, 도대체 그런 집단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가지 일중에 어떤 것이 진실한 목적인지 불분명한 것이 더욱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설정 & 참조] [1] 용봉쌍려(龍鳳雙侶) : 오백 년 전의 강호를 뒤흔들었던 한 쌍의 협려(俠侶)로서 용협(龍俠) 여지광(呂智光)과 봉려(鳳侶) 대가수(代嘉秀)를 합쳐서 부르는 말. 용협(龍俠) 천룡검협(天龍劍俠) 여지광은 강호제일의 미남자이자 협객이었고, 봉려(鳳侶) 천향신녀(天香神女) 대가수 역시 천하제일미인으로 알려졌던 사람. 두 사람 모두 이제까지 강호에 이름을 날린 남녀로서는 비교할 상대가 없다고 알려진 미남미녀였음. 본래 부부였던 용협이 강호에 나가서 실종되자 봉려가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이때 강호에 온갖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되었음. ******* 이번 소적교 부분이 남만에서 가장 중요한데 어쩐지 맘에 들지 않네요. 나중에 다시 수정해야 하겠습니다. 내용도 너무 기니 중간에 장을 다시 나눌까 생각합니다. 어딘가 잘못되거나 빈틈이 보이는 분은 댓글에 써주십시오. ####### 단리유아의 회정결은 아직 완전히 깨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금이 간 정도이지요. 완전히 깨지려면 앞으로 두어 번의 계기를 만나야 할 것이고, 무공 역시 높아가야 할 것입니다. 곤명(昆明)으로의 여정(旅程) 곤명(昆明)으로의 여정(旅程) 1 백소생존(白素生尊)이 돌아간 후에 일행이 다들 모여 누가 이번 일을 꾸몄는지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뚜렷한 결론을 볼 수 없었다. 일행이 남만(南蠻)에서 떠돈 지 벌써 일 년 반에 가까워졌는데, 그동안 중원(中原)의 상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단리유아가 떠나올 때 무림맹(武林盟)의 창설과 천목산(天目山)의 일 등이 일어났었는데, 아마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같았다. 그러나 이 먼 남만(南蠻)에서는 소문조차 들을 수 없었으니, 아무래도 운남(雲南)으로 향해서 곤명(昆明)이나 대리(大理) 같은 큰 도성에 가야만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일단은 상처를 치료하는데 전념하고, 비사리(非沙里)는 직접 거치지 않고 그 측면을 끼고 통과해서 바로 서쌍판납(西雙版納)의 경홍(景洪)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오일 동안 일행은 휴식을 취하며 상처를 치료하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나몽산(邏霿山)의 일로 마음이 침울하고, 그 원인을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다들 마음이 뒤숭숭했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한 채 길을 떠나니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심경 속에 출발한 일행이 루암팔봉(壘岩八封)을 떠나 밀림과 산악지대를 통과하고, 운남(雲南)의 제일 끝인 묘채(苗寨)를 지나 서쌍판납(西雙版納)의 중심인 경홍(景洪)에 이른 것은 유월 이일의 해거름 참이었다. 그동안에는 평탄한 여정이 이어졌는데, 다행히 비사리(非沙里)의 세금동(銴金洞)과도 별 마찰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 고단한 여정(旅程) 속에서 일행도 어느 정도 충격을 벗어난 느낌이었지만, 다들 일부러라도 두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하는 말처럼, 두 사람이 없으니 어려운 일이 많았다. 음구의는 꼼꼼한 성격이어서 일행의 자질구레한 일을 책임지고 있었고, 웅정향은 여러 가지 물품을 조달하고 항시 먼저 나서서 주변의 부족들과 대화했던 것이다. 단리유아의 성격이 그런 일에는 무관심하니, 아무래도 이제는 선상조가 음구의의 몫을 대신해야 했고, 공손고와 기혼사가 나서야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일행이 향한 운남(雲南)은 춘추전국시대에 전국(滇國)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촉한(蜀漢)의 관리 하에 있다가, 이후 당(唐)나라 때에 남조국(南詔國)이 번성하고 멸망한 후에 현재는 대리국(大理國)에 속해 있었다. 제갈공명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가 생겨난 곳도 이곳이었는데, 예로부터 구름이 머무는 산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운남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대체적으로 고산지대가 이어져 있었는데, 북서쪽이 높고 남서쪽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낮은 지역도 보통 오육천 척에 이르는 높이의 고산지대여서 한여름에도 덥지 않고 시원했고, 사철 내내 꽃이 지지 않았다. 사계절 모두 봄 같이 온화한 날씨가 이어져 살기 좋았지만, 반대로 일교차와 고도에 따른 날씨 변화가 심해서 ‘산 하나에 사계절이 있고 십리 안에 계절이 다르다’ 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다. 민족의 구성 또한 다양해서 한족(漢族)을 포함해 백족(白族), 이족(彛族), 합니족(哈尼族), 장족(壯族), 묘족(苗族)등 이십여 부족들이 모인 곳이었는데, 각 부족마다 말이 다르고 종교나 전통에 있어서도 차이가 심했다. 현재는 백족과 이족의 세력이 가장 강했는데, 아무래도 이 두 부족이 주체가 되어서 대리국(大理國)을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일행이 도착한 서쌍판납(西雙版納)은 경홍(景洪) 일대의 남부지역을 통칭하는 곳으로 태족(傣族)이 절반 이상이었고, 그 외에 묘족(苗族), 기낙족(基諾族)을 비롯한 여러 부족이 살고 있었다. 집들은 대체적으로 상하 이층의 죽루(竹樓) 형태로 지어져 있었는데, 아래층은 여러 물건이나 가축을 키우고 사람들은 이층에서 생활하는 구조였다. 사람들의 복장은 주로 백색이나 청색계통이 많았는데, 머리와 허리를 청색의 띠로 둘러맨 형식이었다. 이 일대는 소승불교의 세력이 강하지만, 집안 내에서는 원시적인 조상신이나 자연의 영을 숭배하기도 했다. 남만(南蠻)의 찌는 듯이 더운 날씨와 습습한 밀림지역을 뚫고 다니던 일행이, 높고 푸른 하늘과 한 여름인데도 오히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기까지 한 운남(雲南)의 날씨를 접하니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가 경홍(景洪)의 바로 앞에 위치한 공작호(孔雀湖)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삼층의 죽루 형식으로 지어진 객관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씻고 나서 저녁을 먹은 후에, 한손으로는 찻잔을 들어 중원에까지 널리 알려진 보이차(普洱茶)를 마시고, 눈으로는 공작호(孔雀湖)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이 일대의 특산인 보이차(普洱茶)는 약차로 유명한데 다른 차와는 달리 오래 묵을수록 품격이 높아서 대체로 이십년을 넘긴 것을 최고로 쳤다. 마치 녹물처럼 진한 적갈색인 찻물을 바라보다가 한 모금 마시고, 그 맛을 음미하니 떫은맛은 전혀 없고 독특한 향기가 우러났다. 다들 그 맛에 감탄하며 한동안 차에 대해서 서로 품평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단리유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일행을 향해서, “여러분, 이제 운남(雲南)에 왔으니 앞으로의 여정(旅程)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제 생각은 이제부터라도 저 혼자서 다니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린가? 흥! 난 절대 따로 떨어질 생각이 없네.” 기혼사가 곧바로 맞받아친다. 공손고와 선상조도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아니 이제 와서 헤어지자는 소린가? 이제 시작일 뿐인데?” “소사숙, 저도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웅사형의 염원과 구의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생생한데 어떻게 저 혼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단호하게 말하는 선상조를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앞으로의 여정도 쉬울 것 같지 않고, 혹시라도 여러분에게 좋지 않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런 것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들을 떼어놓고 밤중에 혼자서라도 떠날까 하는 생각이 그동안 단리유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을 따라간다면 불행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눈에 뻔히 보였던 것이다. 일단 이곳 운남(雲南)은 오랫동안 중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서 그리 위험하지 않는 곳이고 한어를 아는 사람도 많으니 자신 혼자서 떠나도 될 것 같아서, 이 기회에 될 수 있으면 일행을 돌려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일단 운남을 지나 서장(西藏)으로 향한 뒤에는 돌아가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 어려울 테니, 이곳에서 헤어지는 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기혼사가 팔짱을 끼면서, 코웃음과 함께 토라진 듯이 고개를 돌리며, “흥! 어차피 오늘 죽으나 십년 뒤에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야. 나는 화끈하게 죽고 싶지, 한 곳에 처박혀 골골거리다가 벽에 똥칠까지 하며 살고 싶지는 않네.” “나도 돌아갈 생각이 없네. 돌아가 보아야 딱히 반겨줄 사람도 없으니 천상 또다시 강호를 떠돌 텐데, 그럴 바에야 아예 자네를 따라 세외(世外)를 돌며 새로운 풍물을 보고 느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네.” 공손고도 고개를 저으며 거부한다. 곧이어 선상조도 뚝뚝 부러지는 듯한 어조로, “소사숙. 아마도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것 같은데,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앞으로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흘흘, 그래그래. 선가야, 네가 드디어 철이 들었나보구나. 클클, 이거 재미가 하나 준 것 같은데?” 선상조를 바라보며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공손고를 지긋이 바라본다. 마치 이제는 자네 혼자 내 장난을 받아주어야겠군 하는 표정으로. 기겁한 공손고가 눈길을 피하며, “흠, 흠. 그러면 앞으로도 함께 하기로 하고, 우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이야기해 보세.” 다들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으니, 할 수 없이 단리유아도 단념해야 했다. 공손고의 말을 받아 기혼사를 향해서, “기노선배님, 운남(雲南) 지역의 정세도 잘 아십니까?” “흘흘, 차 맛이 좋구만” 아까의 일로 삐친 듯이 차를 들어 마시며 딴청을 부리다가, 계속해서 묵묵히 쳐다보는 단리유아의 눈길에, “알았으니 그만 쳐다보게. 원, 무슨 사람이 그런지. 흠, 이 일대에도 문파들이 많지만 대체적으로 그리 세력이 강한 편이라 할 수는 없다네. 지금의 자네 수준이라면 일일이 찾아갈 필요 없이 두어 곳만 들리면 될 것으로 보이네. 다른 곳은 가 보았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내 생각으로는 묵룡궁(墨龍宮)과 천룡사(天龍寺) 정도가 적당하리라 생각되네.” 현재 운남 지역의 문파들을 보면, 먼저 경홍(景洪) 일대 란창강(瀾凔江) 유역에 자리 잡은 수정곡(水晶谷), 중남부 개구(个舊) 일대의 정관루(定觀樓), 동남부 문산(文山) 일대의 태원전(太元殿), 중부 옥계(玉溪) 일대의 명성파(明星派), 석림(石林) 일대의 회검림(廻劍林), 북동부 소통(昭通) 일대의 개산관(開山關), 곤명(昆明) 일대의 묵룡궁(墨龍宮), 애뢰산(哀牢山) 일대의 적전파(赤典派), 외보산(巍寶山) 일대의 파초동(芭蕉洞), 서부 보산(保山) 일대의 와불사(臥佛寺), 대리(大理) 근처 점창산(點蒼山) 일대의 천룡사(天龍寺), 북부 중전(中甸) 일대의 갈단사(喝丹寺), 려강(麗江) 일대의 벽해궁(碧海宮)이 있었다. 이중에서 수정곡과 천룡사, 파초동, 와불사, 갈단사는 정파에 속하고, 정관루, 태원전, 명성파, 회검림, 적전파는 사파에 속했다. 그 외 묵룡궁과 벽해궁은 이렇다 할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문파였고, 개산관은 녹림산채였지만 녹림칠십이채와는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또 란창강(瀾凔江), 노강(怒江), 금사강(金沙江) 같은 큰 강들이 지나고 있었지만, 워낙 험한 협곡이 이어지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크게 알려진 수채는 없었다. 이중에서 대리(大理) 단씨왕가(段氏王家)의 호국불사인 천룡사(天龍寺), 거의 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도가문파인 파초동(芭蕉洞), 서장(西藏) 라마교의 황교에 속하는 갈단사(喝丹寺), 가장 순수한 것은 피라는 것을 부르짖으며 세상의 파괴를 주장하는 광교도인 적전파(赤典派), 옥룡설산(玉龍雪山)에 위치해 있다는 신비한 여인문파 벽해궁(碧海宮)이 특이한 곳이었다. 현재 운남(雲南)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곳은 묵룡궁(墨龍宮)과 천룡사(天龍寺)였는데, 곤명(昆明)와 대리(大理)을 중심으로 운남을 동서로 양분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 외의 다른 문파들은 대부분 삼백 명을 넘지 않는 중소문파라 할 수 있었다. 또 이 운남 지역에서는 대체적으로 근처의 부족들과 유대가 깊어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한동안 기혼사가 운남(雲南) 지역의 문파들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잠시 단리유아가 생각에 잠겼다가, “그러면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흠, 일단 곤명(昆明)을 바라보고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리고 운남(雲南)까지 왔는데 석림(石林)을 안보고 갈 수는 없으니, 며칠 쉬다가 경홍(景洪)을 출발해서 사모(思茅), 완강(元江), 옥계(玉溪)를 거쳐 석림으로 향한 다음에 다시 곤명으로 향하면 될 것이네. 그 다음에는 다시 대리(大理)로 갔다가 란창강(瀾凔江)을 따라서 올라가 서장(西藏)으로 넘어가면 될 테니.” 기혼사가 말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리(大理)로 간 다음에 려강(麗江)을 거쳐서 중전(中甸) 쪽으로 갔으면 합니다.” “그래? 왜 그곳으로 가려고 하나? 아무래도 돌아가는 것인데. 내가 알기로는 그 일대는 특별이 강한 문파가 없는데?” 건너편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공손고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곳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어서, 려강(麗江)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으로 알고 있네. 우리야 그곳에 들렸다가 풍물을 구경하며 천천히 가도 상관없지만, 그리되면 자네는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 될 터인데?” “기선배님의 말씀대로 현재 그 일대는 벽해궁(碧海宮)과 갈단사(喝丹寺) 정도가 있지만, 세력이 그다지 강한 문파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 그곳에는 운남(雲南) 전역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동파교(東巴敎)가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쪽을 거쳐서 가는 것이 어떨까합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모두 들어본 적이 없으니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 참지 못하고 선상조가 먼저, “소사숙, 동파교(東巴敎)라는 세력이 그 정도로 강했던 곳입니까? 그 정도로 유명했으면 중원에도 알려졌을지 모르는데?” “그래, 나도 이 지역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데도 전혀 듣지 못한 일이네. 동파교라는 것이 남아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믿고 있는 종교라고 들었네만?” 기혼사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반문한다. 공손고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라, 묻지는 않고 있지만 역시 의아한 표정이 되어서 단리유아를 바라본다. 이에 일행을 둘러보며, “과거 이 일대를 지배했던 종교인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중원의 원시마교와 견줄만한 강파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현경(玄境)의 고수도 있었다고 하니 제게 도움이 될지 몰라 찾아가려고 합니다.” “뭐? 그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다는 말이야?” 기혼사가 놀라서 소리친다. 공손고와 선상조도 놀란 얼굴이 되어서, “여보게, 단리소협. 그것이 정말인가? 현재는 천룡사(天龍寺)와 묵룡궁(墨龍宮)을 제외하곤 변변한 문파도 없는 곳인데?” “소사숙, 저도 궁금하군요. 그 정도의 세력이라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인데, 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놀라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인 일행을 바라보며, “아마 너무 오래 전에 사라져버려서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중원(中原)에서도 오래전의 강호사(江湖史)에 몇 줄 짧게 쓰여 있을 뿐이니, 실제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서에는 대부분 그저 종교집단이라고만 되어있을 뿐이니, 설혹 사서에서 보았던 사람도 무공을 지닌 문파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우연히 알게 되어서 이번에 찾아가볼 생각이 든 것입니다.” “허허, 정말 세외(世外)에 이런 강파들이 있었다니....” 공손고가 할 말을 잃고 중얼거렸다. 이에 기혼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냐? 본문의 전신인 구음독교(九陰毒敎)도 과거에는 능히 중원의 세력과 비견될 정도였는데. 오래전 이곳이 중원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안다고?” “그런 뜻이 아니라, 단지 저의 견문이 너무 짧아 여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뜻밖의 사실을 접하니 놀라서 그런 것입니다.” 손사래를 치며, 기혼사의 심통을 피하기 위해 공손고가 다급히 변명한다. 한동안 다들 동파교(東巴敎)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그런 강한 세력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얼마나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는지. 동파교(東巴敎)는 과거 전국시대에서 한(漢)나라 초까지 흥성했던 고대종교였는데, 본래 운남(雲南) 지역에 살던 고강족(古羌族)의 토착신앙으로 사람들 간의 만민평등이 그 주요교리였다. 한때는 운남에서 사천(四川) 서남부와 광서(廣西), 귀주(貴州) 일부지역까지 휩쓸었던 종교였지만, 현재에 있어서는 려강(麗江)에서 중전(中甸) 일대 소수의 납서족(納西族)만이 믿고 있었다. 중국의 지배력이 커진 한대(漢代)이후부터 점차 쇠퇴하다가, 삼국시대를 지난 후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동파교(東巴敎)는 특이하게 한자(漢字)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만의 독특한 그림문자인 천오백여 자의 동파문(東巴文)을 사용해서 그 교리와 전설을 기록하고 있었다. 과거 전성기였을 때 동파교의 호교단체의 무력은 원시마교에 비견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었다. 전설에 전하는 동파교의 무인 중에서 현경(玄境)에 이른 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그 세력이 강했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서는 전설 속에 묻혀버린 문파로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중원인 들은 설혹 안다 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곳 운남(雲南) 사람들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대대로 이곳 운남 지방에서 일어난 왕조의 왕을 중원에서는 운남왕(雲南王)이라 부르며 거의 중원의 속국처럼 여겼으니, 그 문화가 남아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의 대리국(大理國)의 지배세력인 백족(白族)도 원래의 한인(漢人)들이 토착부족과 결합하여 생긴 것으로, 사실상 중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단리유아가 그곳을 찾아가려는 이유는 과거 동파교(東巴敎)가 운남에서 세력을 떨칠 당시 동파교의 호교단체가 사용했던 동파무전(東巴武典)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설혹 찾더라도 납서족(納西族)이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을 테지만, 만일 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무공에 있어서 큰 돌파구가 되리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미 그 명맥이 끊긴지 칠백년이 넘었지만, 동파교의 성지라는 중전(中甸) 근처에 위치한 백지(白地)를 찾아보거나 아직 동파교를 믿는 납서족에게 물어보면 그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잠시 후에 기혼사가 즐거운 표정으로, “흘흘, 그러면 그쪽으로 갔다가 덕흠(德欽)을 지나 서장(西藏)으로 향하기로 하지. 뭐, 우리야 아름다운 곳을 둘러보니 더 좋지. 그곳을 통틀어 향격리랍(香格里拉:샹그리라)이라 부르는데,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니 이참에 내 눈이 호강하겠구만.” 기혼사가 기뻐하며 말한다. 단리유아의 의도는 별로 생각하지도 않은 채. 향격리랍(香格里拉)이라는 말은 마음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을 지닌 장족어(藏族語)로서 이상향을 가리키는데, 그 아름다움을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여서 중원에까지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하지만 기혼사의 말처럼 그 주변의 풍광을 보고자 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 단리유아가 찾아가려는 곳은 중전(中甸) 근처 백지(白地)에 위치한 일월성(日月城)으로 그곳만 들리고 바로 길을 재촉할 생각이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무너져 성곽의 흔적이나마 남아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바로 그곳이 동파교(東巴敎)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한동안 서로 희색이 만연한 표정으로 향격리랍(香格里拉)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떠들다가, 일단 내일까지 쉬고 나서 석림(石林)을 거쳐 곤명(昆明)까지 가기로 하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졌다. 곤명(昆明)으로의 여정(旅程) 곤명(昆明)으로의 여정 2 각자 자리에서 흩어져 다른 사람들이 서로 술을 마시러 주루로 향할 때, 단리유아는 홀로 공작호(孔雀湖)로 향했다. 공작호는 주위에 푸른 공작새가 많아 살고 있어서 그러한 이름이 생겨난 호수였는데, 푸르고 맑은 물빛과 호변을 따라 늘어선 야자수와 빈랑나무 등으로 여름 밤 남국(南國)의 정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신월(新月)의 달빛이 호수에 쏟아지고, 호심(湖心)에는 달이 머물러 물결 따라 춤추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도 듣지 않고 따라나서겠다는 일행의 고집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가운데, 무작정 호수변을 따라 발길 흐르는 대로 걸었다. 문득 멀리 호변에 자리 잡은 어부가 부르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태족(傣族)의 말이어서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가락에 풍기는 느낌으로는 풍족한 삶을 찬양하는 노래인 듯 했다. 심란한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세상은 변함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정처 없이 헤매는 나그네의 모습을 비웃는 것 같았다. 왜 그리 여유롭지 못하고 빡빡하게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리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삶은 이리도 평범한 가운데 충분히 아름다운데.... 어깨위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그대 여기 머물러 한 세상 보내는 것은 어떠하냐고 소리치듯이. 꾸짖고 유혹하는 듯한 주위의 정경(情景)에 오히려 마음의 무거움만 더해갔다. 앞날에 대한 걱정과 멀기 만한 깨달음의 갈증에 타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한 채, 오늘도 세상은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마음이 어지럽기에 그런 것일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 보일 테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일 터였다. 자신의 마음이 고요하고 다른 사람들이 심란하다면 상황은 정반대일 것이다. 별안간 벼락이 정수리를 내리치듯이 그 자리에 멈춰 넋을 잃고 상념에 잠겼다. ‘마음, 마음이라.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인가? (一切唯心造) 세상 만물은 변함없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분별하고 느끼는 것이 다른 것은 그것을 보는 인간의 마음이 흔들려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인가?‘ “제법본적(諸法本寂) 유심소작(唯心所作)” 세상 만물은 본래 고요하여 변함없는데, 오직 마음이 (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심생즉종종심생(心生卽種種心生) 심멸즉종종심멸(心滅卽種種心滅)”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 가지 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온몸을 꿰뚫듯이 치솟아 오르는 법열(法悅)에,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가부좌한 채 명상에 들었다. 본래 머물던 죽루에서 호수를 따라 거의 한 시진을 걸어, 현재 단리유아가 있는 곳은 정반대편의 한쪽 호수변이였다. 주변은 오 장(丈) 이상이 넘어가는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오직 공작새와 원숭이, 새들 만이 한밤중의 일어난 이 괴행을 목격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걷던 한 인간이 갑자기 멈추었다가 다시 주저앉으니, 주변의 동물들도 이상해보였을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운데, 한줄기 달빛이 비추며 남쪽에서 불어오는 훈풍만이 깨달음을 축복하듯이 단리유아를 감싸 돌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명상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난 시각은 다시 세 시진이 흐른 인시(寅時:3-5시) 말에 가까워지는 새벽녘이었다. 흑아검(黑牙劍)을 검집에서 꺼내어 천천히 육합검(六合劍)을 펼쳐 몸을 푼 후, 심신을 집중하여 팔을 떨쳐 검을 날려 보냈다. 처음에는 십 장(丈)까지 날렸다가 회수했는데, 이것이 이전까지 단리유아가 펼칠 수 있는 한계였다. 별 무리 없이 진기가 끊이지 않음을 알고, 다시 검을 날려서 점점 거리를 벌여갔다. 검기(劍氣)에 감싸인 검이 허공을 회전하며 검풍(劍風)이 이는 가운데, 점점 더 속도가 빠르게 회전하며 그 범위도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나무사이를 통과하고 자유자재로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가 흘렀을 때, 거리가 삼십 장(丈)이 조금 못되었을 때에야 검이 땅에 떨어졌다. 심력(心力)과 진기(眞氣)의 소모로 전신이 땀으로 목욕을 하듯이 흥건히 젖었지만, 오히려 마음은 상쾌하기만 했다. 오늘은 처음이어서 이 정도 일 테지만, 이제 수어검(手御劍)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할 수 있었다. 오늘의 깨달음을 잊지 않고 계속 되뇌며 점점 더 굳건히 하여 완전해 진다면, 그 거리와 내력의 소모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최근 며칠 동안의 번민과 그동안의 계속된 수련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고무족(鼓舞族)에서 잠깐 발을 들여놓았다가 물러났었는데, 이제는 좁지만 확실한 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죽음이 미친 바가 큼을 느끼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오늘의 이 기우(奇遇)는 두 사람의 염원이 저승에서도 이어진 바가 클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 고뇌하고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보다 더 상승의 경지를 향해서 나아갈 것을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육체적인 검법수련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수련이 더욱 중요했다. 또한 다른 삶에 대한 깨달음도 필요했다.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지만, 아직도 그 길은 멀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한 목적지를 찾았으니 갈 길 모르고 서성대며 헤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만 해도 자신에게는 큰 진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하더라도 결코 서둘러서도 안 될 것이고, 만족하여 마음이 풀어져 오늘의 깨달음을 잊어도 안 될 것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계속해서 마음을 닦아 맑고 고요하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한쪽의 둘레가 일 장(丈)이 넘는 거목 아래에 앉아 조식을 취하여 호흡을 가다듬다가 죽루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부터 최소한 사흘은 한곳에서 머물며 이번의 깨달음을 완전히 소화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여정(旅程)을 서두를 필요가 없을 테니, 천천히 하나하나 깨달음을 얻어가며 점차 일상사에 대해서도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호수 주변으로 깔린 희미한 안개가 이른 아침의 햇빛에 산란하여, 마치 선녀가 호수 주위를 따라 춤을 추며 칠채(七彩)의 꽃가루를 흩날리는 것 같았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호수의 정경과 주변의 동물과 새들을 완상(玩賞)하며 천천히 죽루를 향해 걸었다. 어제는 심란한 마음에 어디가 어딘 줄도 모르고 무작정 걸었었는데, 오늘 아침은 고요한 가운데 유유자적하게 걸음을 옮기니 정말 하룻밤이 지난 것에 불과한데도 마치 십년이 넘게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단리유아가 죽루에 돌아왔을 때, 일행 모두 간밤에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실내에는 술기운이 떠돌 정도였다. 술에 취해 잠이 들어 아직까지도 깨어나지도 않는 일행을 보다가,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한쪽의 침상위에 정좌하여 명상에 잠겼다. 시간이 흘러 하나둘 깨어난 일행이 숙취의 고통으로 비틀거리며 한창 소란스러울 때, 명상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정오가 가까워져 같이 모여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자네는 어젯밤에 어디를 갔었나? 새벽에 돌아와서도 보이질 않더니?” 공손고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담담한 표정으로, “잠시 호변을 따라 산책하다가 아침에야 돌아왔습니다.” 약간 달라진 듯한 단리유아의 모습에 다들 얼굴을 쳐다본다. 이전과는 달리 안면의 무표정함이 많이 가셔서 이제는 그리 이상하게 느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기혼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단리유아 앞에 머리를 들이밀어 뚫어져라 바라보며, “자네 어디 아프나?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데?” “흠, 소사숙. 어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선상조도 궁금한 표정으로 옆에서 묻는다. 고개를 뒤로 물려 기혼사로부터 떨어지며 조용한 어조로, “간밤에 기우(奇遇)를 만나 무공에 약간의 진전을 보아서 그런 것일 겁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기혼사가 놀라서 묻는다. 다른 이들도 다들 놀라서 반문이 이어진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감탄 반 부러움 반이 된 표정으로 한동안 어찌된 일인지 자세히 묻고, 곧이어 축하하는 말들이 오고 갔다. 말을 하면서도 다들 부끄러운 표정이 된다. 자신들은 간밤에 모두 나가 술을 마시며 떠들기 바빴는데, 단리유아는 이렇게 혼자만의 수련에 정진하여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니, 문득 자신들이 너무 나태한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었을 때,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며칠 동안 조용히 이곳에서 수련을 하다가 출발했으면 합니다.” “흠, 그래. 그것도 좋겠지. 우리야 며칠 쉰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휴, 늙으면 어서 죽어야지. 정말 자네는....” 기혼사가 그 자신답지 않게 한탄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일을 더 머문 후에 출발하기로 했다. 그동안에는 여정(旅程)에 바빠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이참에 일행도 쉬면서 전신의 노독을 푼 후에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단리유아는 홀로 정좌한 채, 고요히 내면을 관조하며 지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하루에 한 잔의 차와 과일 한 조각만으로 대신하니 일행도 걱정스런 기색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피로의 기색은 없이 밝아지는 표정에 안심하고 각자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 기혼사와 공손고는 밖으로 나돌아 다니며 주위의 풍물을 둘러보거나 필요한 물품을 구하였고, 선상조는 가끔 단리유아의 수발을 들면서 무공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유월 팔일의 아침이 되었을 때, 일행은 곤명(昆明)을 바라보고 다시 길을 떠났다. 모두가 며칠 동안의 휴식으로 창쾌(暢快)한 표정인 채, 서로 이야기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변의 정취도 일행의 마음처럼 꽃이 만발하고 녹음이 우거져 절로 흥겨움이 일게 했다. 마음이 바쁘지 않으니 모두가 주변에 마음을 빼앗겨 아름다운 곳이 보이면 한동안 그곳에서 자리 잡고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이 일대에서는 특별히 신경 쓸 만한 세력이나 고수도 없어서 날마다 조용한 날이 이어졌다. 일행이 경홍(景洪)을 지나 사모(思茅), 완강(元江), 옥계(玉溪)를 거쳐 석림(石林)으로 향했는데, 곳곳이 아름다운 절경이라 다들 한시라도 더 머무르려고만 했지 서두르려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옥계를 지나서는 무선호(撫仙湖)를 동편으로 끼고돌며 석림으로 향했는데, 과연 천하제일절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장관을 이룬 곳이었다. 주위의 절경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걷다가 기혼사가 찬탄을 연발하며, “대단해. 정말 이런 곳을 보게 될 줄이야. 내 곧 죽어도 할 말이 없구만.” “저것을 보십시오. 저것은 공작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지 않습니까?” “저것은 어떤가? 저것은 꼭 낙타모양 같은데?” 서로가 손가락으로 바위를 가리키며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감탄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림(石林)은 바다 밑 석회암층이 지각변동으로 치솟은 다음에 수많은 세월 속에 풍화되어, 마치 날카로운 검을 세워놓은 듯한 바위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곳이었다. 사자정(獅子亭), 검봉지(劒峰池), 망봉정(望峰亭), 연화봉(蓮花峰) 등 곳곳이 기괴한 형태의 바위가 연이어 진 곳이라 일행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넋을 잃고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일행이 둘러보던 중에 검봉지의 한쪽에 자리 잡은 회검림(廻劍林)의 제자와 작은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별일 없이 조용한 가운데 지나갔다. 일행이 석림(石林)에 도착하였을 때는 마침 이족(彛族)의 최고 명절이자 신년에 해당하는 화파절(火把節:음력 6월 24-25일)이 열리고 있었다. 화파절은 횃불에 불을 붙여 새해에도 행운을 바라는 축제로 그와 함께 소싸움, 씨름, 경마 등이 열리는 이족 최대의 명절이었는데, 낯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일행도 초대되어 마을 한쪽 공터에 앉아서 흥미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운남(雲南) 최대의 부족인 이족(彛族)은 대대로 호랑이를 숭상하고 무사의 용기를 강조하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데, 주로 이층의 지붕이 흙으로 덮힌 토장방(土掌房) 형식의 집에서 생활하며 농사를 지어 살아갔다. 성격이 열정적이고 손님을 좋아해서 술로 손님을 대접는 것을 즐겨하는데, 만약 주인이 권하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주인을 무시한다고 여겼다. 또 항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평상시에도 일상생활을 서로 시적인 운율로 화답했다. 중원(中原)의 영향으로 불교와 도교가 어느 정도 파고들었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여 만물에 신과 정령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단리유아도 건네주는 술잔을 사양하다가 모욕 받았다는 듯이 찌푸려지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 어쩔 수 없이 술을 받아 마셔야 했다. 잠시 후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돌이 되었다는 아시마(阿詩瑪)의 전설을 노래하는 시간이 끝나자, 이번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도무(刀舞)가 이어졌다. 이십여 명의 청년이 나가서 월금(月琴)의 반주에 맞추어 칼을 들고 춤을 추는데, 전쟁의 신을 찬양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도무가 끝난 후 일행이 병기를 지닌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서로 청한다. 이에 일행이 한동안 서로 돌아보다가, 결국에는 선상조가 나서게 되었다. 투덜거리며 공터로 나가며, “아니 제가 꼭 나서야겠습니까? 그냥 안 하겠다고 하면 될 것이지.” “야, 이 자식아. 이런 대접을 받았으면 답례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설마 내가 나서야 된다는 것은 아니겠지? 여기서는 네가 제일 밑이니 잔말 말고 한바탕 춤이나 춰! 그리고 혹시 아냐? 나중에 네 모습에 반한 아가씨가 쫓아올지.” 미적거리는 선상조를 향해서 기혼사가 소리친다. 선상조가 나서서 한바탕 검무(劍舞)를 추니,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일행에 대한 대접이 더욱 융숭해졌다. 내키지 않은 기색으로 나섰던 선상조도 이에 기분이 좋아져 껄껄 웃으며 술을 연이어 들이켰다.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을 때, 횃불을 만들어 마을 사람 모두가 열을 이루어 산길을 따라 논둑길까지 곳곳으로 행진했다. 일행도 즐거이 한쪽에 끼어들어 참가했는데, 멀리서 그 모습을 보았다면 마치 화룡(火龍)이 꿈틀거리며 춤추는 듯했을 것이다. 사흘을 더 석림(石林)에 머물며 갖가지 기괴한 형상의 바위와 이족(彛族)의 풍습을 구경하다가 다시 곤명(昆明)을 향해서 출발했다. 모두가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겨 곤명에 다다른 것은 칠월의 말에 가까워서였다. 본래 경홍(景洪)에서 곤명까지는 천 삼백여리의 거리였지만, 모두가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풍광에 시선을 빼앗기니 생각보다는 오래 걸린 셈이었다. 곤명(昆明)은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여 춘성(春城)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족(彛族)과 합니족(哈尼族)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행이 목적지로 삼은 묵룡궁(墨龍宮)은 곤명에서 북쪽으로 사십여 리 떨어진 오로산(五老山) 아래에 있는 흑룡담(黑龍潭) 근처에 자리 잡은 문파였다. 본래 묵룡궁은 합니족의 일족이 세운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오백 년에 가까웠지만, 실제 당금과 같은 성세를 떨친 것은 백 년도 안 되는 최근의 일이었다. 흑룡담(黑龍潭)에는 한 가지 전설이 내려오는데, 팔선(八仙)의 한명인 여동빈(呂洞賓)이 세상을 떠돌다가 당시 세상을 어지럽히던 열 마리의 교룡 중에서 아홉 마리를 없앴는데, 그때 목숨을 구걸하여 살아남은 한 마리의 흑룡이 이곳에 남았고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그 여동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묵룡궁(墨龍宮)은 이후 점차 세력이 강해져, 현재는 대리(大理)의 천룡사(天龍寺)와 함께 운남(雲南)을 양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무공 중에서는 도가적인 기풍이 드러나지만, 그들의 행위 자체를 본다면 딱히 정파라 할 수 없었다. 단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결코 먼저 상대를 공격하지 않을 뿐이었지, 실제 다른 문파를 공격할 때에는 개미새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킬 정도로 잔인한 곳이었다. 일단 일행은 곤명(昆明)에 머물며 서찰을 묵룡궁(墨龍宮)에 보내어 회답을 기다리기로 했고, 그동안에 중원의 소문을 알아보기로 했다. 이곳 곤명은 운남(雲南)의 동쪽 지방의 중심지로서 귀주(貴州)와도 가까우니, 중원에서 이곳으로 왕래하는 사람도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 단리유아의 현재 수준은 수어검의 상태입니다. 아직 현경에 이르기에는 멀었다고 보아야지요. 게다가 내공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고, 깨달음도 부족한 상태이니 아직은 도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천지와 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제 설정에서의 완전한 현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편은 나중에 다시 수정해서 더 세밀히 해야 함을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댓글에 달아주세요. 곤명(昆明)으로의 여정(旅程) 곤명(昆明)으로의 여정(旅程) 3 객관의 일꾼을 불러 서찰을 전하도록 한 후, 일행 모두 중원(中原)의 소문을 알아보기 위해 상인들이 주로 머무는 객관의 주루를 찾아갔다. 현재 일행이 머무는 곳은 곤명(昆明)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취호(翠湖) 부근에 위치한 곳이었다. 호수 주변으로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보통 외부인들이 모여서 쉬었다가 가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대부분 운남(雲南)의 차와 향료, 약초 등을 구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건물에 해당하는 취란주루(翠鸞酒樓)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삼층의 거대한 주루인 취란주루 내에는 마침 해가 저무는 저녁나절이라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일층은 너무 사람이 많아서 시끄러울 정도였고, 이층은 그나마 몇 개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일행은 취호(翠湖)가 바라보이는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서 들려오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들이 거래하는 물건에 대한 얘기가 다여서 제대로 강호(江湖)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던 공손고가 한 사람을 발견하고 걸어가더니, 곧이어 그 사람을 데리고 일행의 자리로 다가왔다. 사십대의 인물로 상인이라기보다는 산적같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습으로, 허리에도 사척 가량의 대도(大刀)를 비껴 매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거치적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여보게, 단리소협. 이 사람은 중원의 포정상단(包鼎商團)의 사람으로 강호(江湖)에서의 별호는 철풍난도(徹風亂刀) 라 하는데, 나와는 조금 안면이 있다네. 서로 인사하게나.” 포정상단(包鼎商團)은 중원 오대 상단의 하나로 주로 사천, 귀주, 호북 일대에 세력을 떨치는 상단이었다. 다른 상단은 하북·산서·산동 유역의 북룡상단(北龍商團), 강소·안휘·절강을 중심으로 한 만금장이 주도하는 만금상단(萬金商團), 광동성 광주를 중심으로 한 화남지역의 남해상단(南海商團), 섬서·감숙을 중심으로 주로 비단길을 따라 세외와 교역하는 사하상단(沙河商團)이 있었다. 다른 상단들이 대체적으로 연합적인 성격이 강한데 반해서 이들 포정상단(包鼎商團)은 대대로 거부였던 만전조가(萬錢曹家)의 직속 상단으로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에 위치한 상단이었다. 그 지닌바 금력과 무력에 있어서 사하상단(沙河商團)과 함께 최고로 불리고 있었다. 만전조가는 삼백여 년의 역사가 있는 상가로 한 방울의 피를 흘릴지언정 한 톨의 쌀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 붙을 정도의 철저한 상인들이었다. 자식의 재능이 못 미치는 경우에는 데릴사위나 그도 아니면 양자를 얻어서라도 따로 가문을 상속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단리유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하며, “저는 단리유아라 합니다. 여기 이분은 기혼사라는 강호선배이시고, 이쪽은 제게 사질 되는 선상조라는 사람입니다.” “껄껄껄. 단리대협, 이거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본인은 포정상단(包鼎商團)에서 운남지역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 천장립(千掌立)이라 하오이다.” 철풍난도(徹風亂刀) 천장립(千掌立)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큰 웃음소리와 두 손을 맞잡고 계속 흔드는 모습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오히려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 모습에 기혼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봐, 좀 조그맣게 말 못하겠나? 그리고 그게 뭐하는 짓인가?” “하하하, 원래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지요. 하지만 타고난 천성인 것을 어찌합니까? 하하하” “정말 시끄러운 자식으로구만. 으이구, 단리소협이 소문을 듣고자 하지만 않았어도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텐데. 클클, 정말 아쉽구만.” 기혼사가 못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철풍난도(徹風亂刀) 천장립을 바라본다. 이에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철풍난도에게 공손고가 전음을 날려, 심통 맞은 늙은이니 괜히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조심하기를 당부한다. 잠시 서로간의 통성명이 이어진 후에 모두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시작했다. 먼저 공손고가 말문을 열어, “여보게, 천소제. 그동안 우리가 여기 단리소협을 따라 남만(南蠻)을 떠돌아서, 거의 일 년 반이 넘도록 중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네. 자네는 현재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겠지?” 공손고의 물음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급할 것 없다는 듯이, “흠, 그래서 그동안 선배와 단리대협를 뵐 수 없었나보군요. 이거 부럽소이다. 나는 매일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사방을 돌아다녀야했는데.” “휴, 자네가 직접 따라가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결코 편안한 여정(旅程)은 아니었다네. 지금 생각해보아도 다시는 남만(南蠻)의 밀림을 뚫고 다니고 싶지는 않네. 그보다 중원의 일이 어떻게 됐는지나 얘기해보게.”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는 공손고를 바라보다가, “무림맹(武林盟)이 창설된 것은 아실 테지요?” “그래. 무림맹의 창설을 위해서 해남파(海南派)까지 갔다가 단리소협을 따라나선 것이었으니.” “그러면 그 이후의 일부터 설명하면 되겠군요. 음, 삼월 보름에 정식으로 무림맹이 창맹식을 가지고 무창(武昌)에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천목산(天目山)의 일이 터졌습니다. 천목산에서 서광(瑞光)이 나타나자, 처음에는 비밀리에 하나둘 모여들었는데 나중에는 소문이 퍼져서 전 강호(江湖)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지요. 다들 천강신문(天剛神門)의 기보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모여들었는데, 뜻밖에도 누군가의 음모였습니다. 그때 당시 천강신문의 장보동이라 알려진 곳에서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천장립의 말에 공손고가 놀라서 다그치듯이, “뭐라구? 그게 정말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무림맹(武林盟)은 그동안 뭐하고? 게다가 그런 일이라면 명숙(名宿)들도 많이 있었을 텐데.” “당시 강호의 내놓으라하는 고수들이 모여들었는데, 미처 무림맹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워낙 많이 몰려들었으니 강제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지요. 다행히 갑자기 천강신문(天剛神門)의 장보동이 나타난 것에 이상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설득해서 절반 정도는 들어가지 않고 일의 귀추를 지켜보고자 했지요. 뭐, 그중에는 혹시라도 들어가서 기관에라도 당할까봐 차라리 밖에서 기다리다 나오는 사람들을 덮치는 것이 낫겠다싶어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간에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너도 나도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하여 겨우 살아남은 몇몇이 되돌아 나와서 음모임을 밝혔지만, 그때는 이미 동부(洞府)도 무너진 뒤라서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단리유아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때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 죽었다면, 강호(江湖)의 판도에도 크게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소이다. 다행이 그때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고수가 많아서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지만, 그래도 일류 이상의 강호의 고수 중에서 거의 이할 가까이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그 일을 두고 세외(世外)의 문파가 꾸민 일이라느니 사파에서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고 방해하려고 꾸몄다는 등 온갖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일이라면 적어도 십년 이상은 준비해야 했을 테니, 사파에서 꾸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아, 사파에서도 결맹하여 흑사련(黑邪聯)이 결성되었다는 것을 깜박했군요.” 선상조가 놀라 걱정스런 표정으로, “흑사련(黑邪聯)이라니요?” “무림맹이 창설되자마자 사파에서도 결맹을 선포하고 연맹을 만들었다네. 검마(劍魔) 진일명(陳一命)과 독왕(毒王) 천중리(千仲理)가 주축이 되어서 결성되었지.” 천장립의 말에 다들 걱정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리되면 정사의 대립만 악화시킨 형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득 공손고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누가 그런 음모를 꾸몄을까?” 공손고의 중얼거림처럼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지, 일행 모두 의혹스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또 흑사련(黑邪聯)이 결성된 것을 보면 현재의 강호(江湖)는 완전히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을 것이라 생각되니 그 점에 있어서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행의 표정을 바라보며 천장립이, “저희 같은 상가(商家)도 완전히 강호의 싸움과 상관이 없을 수는 없는데, 최근의 상황을 보면 걱정이 미만 저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완전히 정파와 사파가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지요. 게다가 천목산(天目山)의 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정말 정세가 흉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요즘에는 하루라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지요. 무림맹(武林盟)이 생겼다지만, 오히려 판만 더 키운 꼴이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근자에는 쓸데없이 무림맹을 만들었다고 하는 소리가 높은데, 그 때문에 무림맹에서 탈퇴하는 문파가 늘고 또 그런 문파끼리 각 지역별로 따로 결맹하려는 움직임까지 생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공손고가 놀라서 크게 소리 지르며,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따로 결맹을 결성하려하다니? 그리되면 흑사련(黑邪聯)에 각개격파 되기 십상일 텐데.” 공손고의 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에 앉아서 얘기하고 있던 다른 상인들도 고개를 돌려 일행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그제야 실책을 알고 공손고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어찌된 일인지 소상히 말해보게. 도대체 사람들이 생각이 있나 모르겠군.” “클클, 너도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야. 이런 곳에서 그리 소리 지르다니, 쯔쯧.” 안됐다는 듯이 꼬나보며 말하고 혀를 차는 기혼사의 태도에, 공손고가 고개를 수그리며 속으로 주책맞은 늙은이라 욕할 때, “공손선배의 우려가 무엇인지 알겠지만, 사실상 흑사련(黑邪聯)은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검마(劍魔)의 절검산장(絶劍山莊)과 독왕(毒王) 천중리의 천독곡(千毒谷)이 주체가 되어 흑사련이 결성되었는데, 공야세가(公冶世家)나 무외신궁(無畏神宮)이 중간에서 가로막은 형상이라 힘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지요. 이에 흑사련도 중원 전역을 나누어서 다섯 개의 지단으로 힘을 모으니, 무림맹이 그리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차라리 정파도 각 지역별로 결성하여 대항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고 큰 문제가 있을 때만 무림맹에 모여서 토의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요. 게다가 결성초기에서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니 더욱 그러하지요.” 천장립이 공손고를 구해주듯이 곧바로 설명했다. 이에 다시 공손고가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게 무슨 소린가? 불만이라니?” “무림맹을 결성했을 때 실권을 차지한 쪽은 오파일방(五派一幇)과 무외신궁, 약왕곡 등이었습니다. 공야세가를 제외한 칠대세가(七大世家)와 삼보(三堡)는 상대적으로 권한이 약했지요. 그러니 불만이 없을 수가 없지요. 무성(武聖)의 위명에 눌려 대놓고 말이 없을 뿐이지, 나머지 세력들의 불만은 널리 알려졌지요.” 일행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선상조가 동문사형제들이 걱정되어, “저기 해남파(海南派)는 어떤지 알고 계십니까?” “해남파는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얼마 안가서 제자들을 불러들인 것으로 알고 있네. 자네 문파의 장문인이 워낙 성정이 괴팍한데다 그동안 무림맹에 불만이 많았다고 하더군. 최근에는 아예 광동성(廣東省) 일대의 세력을 모아서 따로 세력을 결성할 생각인가 보더군.” “다른 소식은 모르십니까? 혹시 불상사라도?”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별일은 없다고 하네. 광동성이야 원래부터 해남파의 세력권이었고, 그리 강한 문파도 없으니.” 천장립의 말에 선상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단리유아가 문득 비사방(飛蛇幇)의 일이 생각나서, “비사방(飛蛇幇)과 만금장(萬金莊)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아, 그렇지. 그 얘기를 말한다는 것을 잊었구려. 음, 단리대협이 혈수마((血手魔)를 죽이고 떠난 후에 흑사련(黑邪聯)이 결성되었는데, 그 얼마 후에 비사방이 만금장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거의 멸문시켰습니다.” “멸문이라니? 만금장이 그리 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게다가 주변의 문파들은 어떡하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공손고를 향해서, “절검산장(絶劍山莊)과 천시루(千屍樓)가 연합하여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기습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어서 다른 문파들은 미처 손을 쓸 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싸움에서 만금장(萬金莊)은 대다수가 죽고 소금산(小金山) 노천추만이 간신히 화를 피해서 모용세가(慕容世家)의 그늘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모용세가야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지요. 만금상단(萬金商團)은 아직 건재하고 노천추도 살아있으니, 그 자금력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비사방도 공들여 양주(楊州)를 차지했지만, 그 알맹이는 얻지 못했으니 죽 써서 개 준 꼴이 되어버렸지요. 현재 강소성은 장강을 경계로 팽팽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옛날 남궁세가(南宮世家)가 강성했을 때는 그런 일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을 텐데.” 백 년 전 남궁세가가 최전성기를 구가할 당시만 해도 강소성(江蘇省) 일대에서는 상대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비사방(飛蛇幇)도 중소문파에 불과했는데, 혈수미교(血修彌敎)와의 싸움에서 남궁세가의 정예가 사라진 후로 점차 주변의 세력들이 강해진 것이었다. 단리유아가 사건의 경과와 가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천장립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휴우. 중원(中原)의 일도 문제지만 저희 같은 상단(商團)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요. 이전에도 세력다툼은 항상 있어왔고, 강호제패를 위해 음모를 꾸미는 일도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세외(世外)의 움직임도 심상치가 않아서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 모두가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하고 있을 때에 터져 나온 천장립의 말에 다들 더더욱 놀라서 경악성을 터뜨린다. “세외의 움직임이라니?” “세외가 어쨌다는 것입니까?” “클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기혼사도 놀라서 되묻는다. 천장립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저희 같은 상단이 세외의 소식에는 가장 빠르지요. 아무래도 저희의 밥줄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으니 말입니다. 무림맹의 결성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던 혈련마교(血蓮魔敎)의 움직임이야 으래 있어왔으니 그리 문제가 아니지만, 문제는 그 외의 지역도 그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빨리 말해봐라. 어찌된 일인지.” “쾅!” 기혼사가 소리치며 탁자를 내리친다. 단리유아가 붙잡으며 진정시킬 때, 잠시 멈칫했던 천장립이 말을 이어, “최근에 혈련마교(血蓮魔敎)가 기련산(祁連山) 일대에서 세력을 모으고 있는 것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에 더해서 혈수미교(血修彌敎)가 백년만의 대집회를 열어 청해성(靑海省)의 고수들을 불러 모으고 있답니다. 이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문제는 그 이외의 지역이지요. 몽고(蒙古)의 대평원지역에 위치한 금붕성(金鵬城)과 북해(北海)의 빙궁(氷宮)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천산파(天山派)가 멸문되고 천산흑랑청(天山黑狼廳)이 천산남로 일대를 장악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그리고 서장(西藏)지역도 한창 시끄러운 모양입니다.” 천장립의 말에 다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강호사(江湖史)이래 세외(世外)지역이 이렇게 한꺼번에 준동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원시마교(原始魔敎) 같은 쟁쟁한 강파들이 있어서 사실상 중원을 넘보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혼란스런 상태에서는 만일 한곳에서라도 침공한다면 제대로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일행이 충격 속에 생각에 잠겨있을 때, “천산흑랑청(天山黑狼廳)이야 워낙 먼 곳에 위치해 있으니, 직접적으로 중원을 침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같은 상단에는 오히려 더 큰 위협이지요. 제대로 교역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니 말입니다. 천상 천산북로나 서역남로를 따라 교역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지요. 또 만일이라도 이런 세외문파가 결맹이라도 맺어 길을 폐쇄한다면 더욱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상인의 입장에서 천장립이 한탄스레 말한다. 다들 말이 없을 때에 단리유아가, “서장(西藏)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는데, 어떤 일이기에 그렇습니까?” “최근에 소뢰음사(少雷音寺)가 포달랍궁(包達拉宮)을 패배시켜 서장을 일통했다고 합니다. 이미 대뢰음사(大雷音寺)는 쇠퇴해서 세력이 미미한 실정이니 사실상 서장에서는 상대할 곳이 없다고 보아야지요. 게다가 그들의 성품 또한 사악하고 호전적이라니 아마 가만히 앉아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장립의 말에 다들 걱정스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본다. 이리되면 서장으로의 행보가 평탄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리유아가 쉬이 마음을 바꿀 것 같지 않으니, 다들 말은 못한 채 속으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별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단리유아가, “그 외의 지역은 별 문제가 없습니까?” “다른 지역에서는 그리 대대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 운남(雲南)이나 남만(南蠻)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몇몇 문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여태 남만을 돌아다니고 왔는데.” 기혼사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소리친다. 천장립이 고개를 저으며, “물론 다른 곳처럼 큰 움직임은 없지만, 개별적인 움직임이 자주 일어나니 문제지요. 이곳 곤명(昆明)만 해도 최근에 묵룡궁(墨龍宮)이 귀주(貴州)의 천독곡(千毒谷)과 결맹을 맺어 고수들 간의 왕래가 빈번하다고 들었습니다. 또 남만(南蠻) 지역에서 넘어오는 자들도 부쩍 늘었다고 들었으니.” 도대체 남만(南蠻) 지역에서 중원으로 건너간 문파가 어디일까? 일행이 생각해보지만 어디인지는 짐작가지 않았다. 독룡림(毒龍林)이나 천밀석궁(千密石宮), 백상사(白象社)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지만, 그 외의 문파들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만의 독술(毒術)이나 술법(術法)등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을 테고, 또 소적교(素赤橋)의 일로 보아서도 다른 문파들도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천장립의 말에 다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걱정되어 침중한 기색이 된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더 자세히 물었지만, 대체로 좋지 않는 소식일 뿐이어서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얼마 후에 천장립과 헤어져 일행들이 객관으로 돌아갔지만, 가는 길에도 다들 말이 없이 자신들 만의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설정 & 참조] [1] 금붕성(金鵬城) : 음산산맥(陰山山脈) 아래에 자리 잡은 문파로서 현재 호화호특(呼和浩特) 평원지역을 제패한 문파. 과거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 일대를 장악한 열화천궁(熱火天宮)의 무공이 흘러들어 발전한 문파. [2] 천산흑랑청(天山黑狼廳) : 천산의 남쪽 고차(庫車) 일대를 기점으로 천산남로를 평정한 문파. 본래 천산일대의 도적집단에 불과했지만, 천산흑랑제(天山黑狼帝)의 등장 이후 세력을 확장하여 그 일대를 제패함. 천룡사(天龍寺) 천룡사(天龍寺) 1 객관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돌아와서도, 모두가 말이 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단리유아도 침상 곁에 좌정하고 앉아서 철풍난도(徹風亂刀)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었다. 먼저 천목산(天目山)의 일을 보았을 때는 확실히 누군가가 음모를 꾸몄다고 느꼈지만, 어디에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추측할 수 없었다. 그동안의 일을 보아서는 무외신궁(無畏神宮)이 그런 것 같지만, 그곳 혼자만으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았고 실제로도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성(武聖)이 무림맹을 주도해서 혼란을 야기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맹점일 수도 있었다. 또 세외(世外)의 여러 문파가 한 결 같이 동시에 준동하는 것도 이상했다. 무외신궁(無畏神宮)에서 그곳까지 손을 써서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거의 세외(世外)전체가 망라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아무리 중원에서의 위명이 높고 세력이 강하다고 하지만 세외의 그런 문파들까지 무외신궁이 어떻게 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또 누군가 그런 일을 벌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중원내의 세력이 강호(江湖)를 제패할 목적이라면, 중원을 어지럽힐지언정 세외의 세력까지 끌어들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두 곳이라면 또 몰라도 중원을 둘러싼 전 지역에서 준동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짜놓은 듯이 중원이 혼란스러울 때, 세외 전 지역이 준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어지럽도록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일단 중원(中原)만을 따진다면, 무외신궁(無畏神宮)이 가장 의심스러웠지만 세외(世外)까지 포함한다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자신이 가려는 지역인 서장(西藏), 천산(天山), 몽고(蒙古)대평원, 북해(北海)까지 어지러운 상황이니 앞으로의 여정도 근심스러웠다. 또 북만주(北滿洲)의 상황도 좋지 않다고 했으니, 일은 더욱 꼬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라도 일행을 떼어놓고 혼자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마음만 더욱 답답했다. 자신 혼자라면 천지에 얽매일 곳도 없으니 별 문제가 없지만, 일행의 안위까지 걸려있으니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불러 모아서 자신의 의견을 말해보았지만, 다들 펄쩍 뛰면서 따라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다. 당장에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일행이 따라붙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는 짐이 될 공산이 클 뿐이었다. 일단 묵룡궁(墨龍宮)에서 비무를 승낙할지에 대해서 기다려보다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바로 대리(大理)로 떠나기로 했다. 사실 현재에 있어서는 딱히 비무가 자신의 무공 진전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새로운 무공을 겪어보는 것도 나중을 위해서도 필요하리라 생각되었다. 그 후 사흘 동안을 기다려도 묵룡궁(墨龍宮)의 대답은 없었다. 일행도 더는 기다릴 수 없으니, 다시 대리(大理)로 떠나기로 했다. 그 문파의 성격과 귀주(貴州)의 천독곡(千毒谷)과 결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라 그리 뜻밖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일행이 안령(安寧)·초웅(楚雄)·상운(祥雲)을 거쳐 천여 리 떨어진 대리에 도착한 것은 팔월 이십오일이 되어서야 했다. 고산지대의 산길이 험한 편이었다 해도 일행이 주변의 풍광에 시선을 빼앗겨서 지체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늦게 도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리(大理)는 점창산(點蒼山)과 이해(洱海)의 서남쪽 호수 변 사이에 자리 잡은 곳으로, 현재 대리국(大理國)의 수도로서 번화하기가 중원의 여느 성도에 못지않았다. 그 주민의 대다수는 본래 이곳으로 이주한 한족이 토착부족과 결합하여 생긴 백족(白族)으로, 특별히 흰색을 좋아해 옷도 흰색을 즐겨 입고 가옥이나 담장도 흰색을 칠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일행은 그날 저녁은 대리성(大理城) 내에서 머물다가 다음날 아침 천룡사(天龍寺)를 찾아가기로 했다. 모두 씻고 나서 저녁을 먹은 후에 차를 시켜놓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곳까지 와서 삼도차(三道茶)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는 기혼사의 고집에 할 수 없이 삼도차를 시켜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리 내키지 않아하던 일행들도 삼도차를 마시면서, 마치 인생처럼 첫 번째 잔은 쓴맛을, 두 번째는 달콤함을, 세 번째는 쓰지도 달콤하지 않는 다채롭고 오묘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차에 대한 감상을 서로 이야기 하다가, 공손고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여보게, 정말로 천룡사(天龍寺)에 찾아가 비무를 할 생각인가? 천룡사는 대리(大理) 왕실과 관련이 깊은 곳이라, 괜히 일이라도 잘못된다면 아무래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 “흠. 저도 비무를 했으면 좋겠지만 꼭 하고자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이곳은 대리국(大理國)에서 가장 큰 사찰이니, 덕이 높은 고승도 있을 것으로 보여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단리유아가 차를 음미하며 조용히 말하자, 기혼사가 영문을 몰라서, “비무는 이해가 가지만, 고승을 찾아가다니?” “현재의 제 상태에서는 비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철루존자(鐵壘尊子) 정도 되는 고수와 싸운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실제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기회 정도일 것입니다. 현재 저에게는 깨달음이나 삶에 대한 문제를 물어볼 사람이 더 절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비무할 수 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런 고승과 대화라도 나누기 위해 찾아가려는 것입니다.” 평온한 어조의 단리유아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기색이 된다. 아무리 정파이고 그 근본이 승려가 머무는 절이라고 하더라도, 불상사가 생긴다면 그리 쉽게 일이 끝나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단리유아가 기혼사를 바라보며, “기노선배님, 천룡사(天龍寺)에서 저를 상대할만한 고수가 있겠습니까?” “흘흘, 내가 이곳에 다녀간 지도 삼십 년 정도가 되어서 현재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과거 이곳에 천룡삼불(天龍三佛)이라는 땡중들이 유명했다네. 뭐 그들 정도라면 자네를 상대하고도 남겠지.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야.” 기혼사가 무슨 좋지 않는 일이라도 생각났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툴툴거리며 말한다. 천룡삼불(天龍三佛)은 과거 천룡사(天龍寺)의 최고수들이자 괴승들로서 현재의 성세를 이룩한 인물들이었다. 각기 불광(佛光), 수광(守光), 지광(智光)의 세 사람으로 생김부터 기괴했고 성품은 더욱 이상했던 사람들로, 기혼사보다 반배분 정도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과거 기혼사가 찾아왔을 때도 세 사람에게 붙들려 갖은 괴롭힘을 당했던 것인데, 무공이나 나이로나 상대가 되지 않으니 기혼사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선상조가 궁금하여, “천룡삼불(天龍三佛)이라면?” “흥! 한마디로 빌어먹을 놈들이지. 다들 살아있는 부처라는 둥 별별 소리로 찬양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한마디로 돌중들에 불과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나 내뱉고 온갖 미친 짓을 도맡아 했었으니. 그 괴물들이 아직까지 살아있을지 모르겠군. 미처 그 생각은 못했는데. 제기랄, 아직까지 그놈들이 살아있다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다가, 턱을 받치고 생각에 잠겨 혼자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린다. 공손고가 그 모습에 속으로, ‘그러는 선배도 그들과 별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하는 짓을 보면 아직도 철모르는 아이 같으니 말이오.’ 온갖 표정을 진 채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리는 기혼사의 태도를 보고, 다들 공손고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그 다채로운 표정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일행이 주시하고 있을 때에야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의 기묘한 시선을 느낀 기혼사가 정신을 차리고, “뭘 봐? 이것들이 사람을 아주 요상하게 바라보네. 오늘도 잠자지 않고 즐겁게 보내볼래?” “무슨 말입니까? 그저 선배님이 중간에 말이 없길래 바라본 것에 불과합니다.” 공손고가 다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변명한다. 옆의 선상조도 거들어서 그런 일 없다며 기혼사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일행을 노려보며 투덜거리는 기혼사였다. 한동안 어수선한 시간이 흐른 후에, 단리유아가 기혼사를 바라보며, “기노선배님, 그러면 그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없습니까? 또 알려진 고승이라도?” “글쎄? 내가 이곳을 찾은 것도 급한 일로 잠깐 들린 것에 불과하고, 세월이 삼십년 가까이 흘렀으니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는 잘 모르지.” 기혼사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한다. 잠시 천룡사(天龍寺)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다음날 아침 찾아가기로 하고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졌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진시(辰時:7-9시) 말이 되었을 때, 일행은 객관을 나서 천룡사로 향했다. 천룡사(天龍寺)는 대리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점창산(點蒼山)의 주봉인 마룡봉(馬龍峰)의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곳으로 멀리서도 보이는 세 개의 탑으로 쉽게 분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중앙의 가장 높은 탑은 십육층으로서 이십 장이 넘었고, 마치 집을 차근차근 포개놓은 형상인 백색의 석탑으로서 천룡사의 상징과 같았다. 남조국(南詔國) 초기에 세워진 천룡사는 그 크기와 웅장함에 있어서 중원의 어떤 사찰에 못지않았는데, 평상시의 승려만 해도 이천여 명에 이르는 곳이었다. 또 역대의 왕(王) 중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경우도 많아서 대리(大理) 단씨왕가와도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알려진 무공으로는 일양지(一陽指), 육맥신검(六脈神劍), 천룡보리신공(天龍菩提神功), 천룡대라삼검(天龍大羅三劍)이 유명했다. 일행이 찾아가서 산문을 지키는 지객승에게 방문한 목적을 말하고 서찰을 전하니, 지객승이 황망한 태도로 일행을 둘러보다가 잠시 후에 한쪽의 객사로 일행을 인도하며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다음날 아침, 어제의 지객승을 따라 여러 명의 승려들이 객사로 찾아왔다. 그 중앙에는 이마의 계인과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이 보통의 신분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각진 얼굴의 육십대 승려가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먼저 곁의 지객승이 나서서, “이분은 저희 사찰의 지객원주이신 법혜대사(法慧大師)님 이십니다.” “노스님께 단리유아가 인사드립니다.” 단리유아에 이어서 일행이 서로 합장하여 배례하며 이름을 밝힌다. 기혼사만 딴청을 부리며 뒤쪽에서 미적거릴 때, 법혜대사가 답례하다가 일행 중의 기혼사를 보고, “혹시, 기노선배님 아니십니까?” “뭐? 누구라고? 나? 나는 모르는 사람이야.”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펄쩍뛰며 부인한다. 어이가 없어진 일행이 이 노인네가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고 있을 때, 법혜대사(法慧大師)가 앞으로 나서며, “허허, 정말 그 성격이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구려. 옛날에 찾아오셨을 때 잠깐 뵌 적이 있지 않다면 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셨으면 미리 말씀하실 것이지 왜 그렇게 숨어 계셨습니까? 그랬다면 일이 이렇게 번거롭게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제기랄! 늙은 놈이 기억도 좋구만. 나는 그저 여기 단리소협을 따라왔으니 없는 척 해라.” 자신의 나이는 생각도 않은 채 기혼사가 투덜거리며 말한다. 이에 법혜대사(法慧大師)가 너털웃음과 함께, “허허허, 그러시면 안 되지요. 선배님의 명성이나 배분을 보아서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제가 사조님께 몰매를 맞을 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뭐? 그 늙은이들이 아직까지 다 살아있다는 말이냐?” 깜짝 놀란 기혼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한다. 법혜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분께서는 먼저 귀천하시고, 지금은 불광(佛光) 사조님만 계십니다. 선배님이 오신 걸 알면 즐거이 맞으실 것입니다.” “빌어먹을! 즐겁기는 뭐가 즐거워? 별별 일을 다 시킬 거면서.” 욕설과 함께 뒤돌아서서 혼자 계속해서 궁시렁거린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법혜대사가 일행을 돌아보며, “일단 대웅전으로 가도록 합시다. 기선배님이 계시니 신분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앞장서 법혜대사(法慧大師)가 일행을 인도하고,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일행이 머물렀던 객사는 절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남서쪽 끝에 위치해 있어서, 거의 반각 가량을 걸어서야 중심부의 대웅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층 이상 되는 건물은 드물었지만, 워낙 넓다보니 길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섰다가는 온종일 헤매기 십상으로 보였다. 법혜대사의 전갈을 받았는지, 대웅전 앞에서는 이십여 명의 승려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서 금빛가사를 걸친 중앙의 근엄한 표정의 백미(白眉) 노승을 향해 법혜대사가 다가가며, “장문사형, 제가 찾아가보니 사조님과 절친하신 기노선배님께서 함께 오셨더군요. 그래서 따로 신분을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모셔왔습니다. 어제 천룡사(天龍寺)의 사람들이 서찰을 건네받고, 중원인이 이곳까지 찾아와 비무를 요청한 것을 알고는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로 어제 내내 장로(長老)들이 모여서 토의를 벌였지만 딱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정말 단순히 비무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서 들어온 것인지, 서로 간에 격론이 벌어졌는데 일단 만나보고 나서 결정하기로 하여 이렇게 아침에 법혜대사가 직접 찾아왔던 것이었다. 법혜대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혼사를 향해서 합장하며, “아미타불, 소승 철혜(鐵慧)입니다. 기선배님의 강녕하심을 뵈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이미 사조님께 소식을 전했으니, 나중에 선배님을 찾으실 것입니다.” “벌써 소식을 전했다는 말이냐? 제기랄! 하여간 이것들은 쓸데없는 짓 하는 데는 다들 선수라니까. 내가 가나봐라. 흥!” 기혼사가 화를 내며 소리친다. 잠시 서로의 소개가 이어진 후에 대웅전 안으로 향하여 자리 잡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천룡사(天龍寺)의 방장인 철혜대사(鐵慧大師)가, “아미타불. 단리시주, 본사에 찾아오신 목적이 비무를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제가 귀사의 무공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할 때, 철혜대사가 천천히 근엄한 목소리로, “중원(中原)의 소문을 잘 아는 제자들이 있어서 그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소. 하지만, 내가 직접 보아도 그대에게 맞설만한 고수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꼭 비무를 해야 하겠소이까?” “승패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단지 견식을 넓히고 싶을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철혜대사(鐵慧大師)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알겠소. 그러면 본사에서는 본승의 사질이 되는 사람을 내보내겠소. 그리해도 되겠소?” 자신의 사질을 내보내겠다는 소리에 약간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러도록 하지요.” “그럼 그것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혹 다른 목적은 없소이까?” “다른 것은 없는데, 혹시 무공과는 상관없이 덕이 높은 분이 계시면 한번 만나 찾아뵙고 싶습니다.” 이에 철혜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소. 그거야 나중에 기선배가 불광(佛光)사조를 뵐 때 같이 찾아가서 여쭈면 될 것이니 말이오.” “난 안 간다니까. 절대 안 가.” 소리치는 기혼사는 내버려두고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묻고, 중원(中原)과 운남(雲南)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비무에 대해서도 더 세밀히 의논해서 사흘 후 정오에 하기로 했다.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서로 이야기만 나누니, 기혼사가 한동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가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먼저 나가버렸다. 반 시진 여가 흘러 자리에서 물러나올 때까지도 기혼사는 화가 안 풀린 뚱한 표정으로, 전각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공손고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기선배, 무얼 그리 못마땅해 하십니까? 그저 한번 만나보기만 하면 될 터인데.” “뭐? 네놈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지. 너 같으면 이 나이 들어 궁상맞게 그 늙은이한테 당해야 하겠느냐?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네, 너 이 자식....” 화풀이 하듯이 공손고를 쳐다보며 계속해서 떠든다. 단리유아가 붙들어 진정시킨 후, 사흘 후에 비무이니 그동안 이해은창(洱海銀蒼)의 경관을 구경하자고 설득해서야 겨우 누그러졌다. 그 후 비무 있기 전날까지 일행은 천룡사(天龍寺)의 경내와 점창산(點蒼山)과 이해(洱海)의 풍광을 구경하며 지냈다. 대리(大理)의 오른편에 위치한 이해(洱海)는 사람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담호수로 육천척이 넘는 고지대에 위치해있었다. 또 대리성의 서쪽으로는 점창산(點蒼山)이 이해를 따라서 남북으로 백여 리 넘게 뻗어있었다. 일만 척이 넘어가는 열아홉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진 점창산은 사시사철 산색이 짙푸르고 무성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눈 덮인 점창산의 봉우리와 이해의 풍광이 어우러진 것을 이해은창(洱海銀蒼)이라 했는데, 불타는 듯한 노을이 천지를 뒤덮을 때 호수변에서 점창산을 바라보니 일행도 과연 그 아름다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이 아름다워 절로 탄성이 흐르고 넋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흘 동안 단리유아도 저녁에만 운기조식으로 심신을 가다듬을 뿐이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행을 따라나서서 유유히 곳곳의 절경을 감상하며 돌아다녔다. 천룡사(天龍寺) 천룡사(天龍寺) 2 사흘이 흘러 비무할 날 사시(巳時:9-11시) 말이 되었을 때, 일행은 약속장소인 비무장으로 향했다. 본래는 사찰 내의 연무장에서하려 했으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승려들도 있어서, 조금 떨어진 점창산(點蒼山) 십구봉 중의 하나인 학운봉(鶴雲峰) 아래에서 하기로 정했었다. 천룡사(天龍寺)를 걸어 나와 이각 정도가 흘러 비무장에 도착하니, 방장인 철혜대사(鐵慧大師)를 중심으로 이미 천룡사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속인들도 예닐곱 명 끼어있었다. 잠시 서로간의 인사가 이어진 후에, 철혜대사(鐵慧大師)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단리시주, 여기 이 사람이 본사를 대표할 사람이오. 서로 인사하구려.” 철혜대사가 가리키는 사람을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여섯 명의 수행인에 둘러싸여 이십대 중반의 잘 생긴 청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슴팍에 청실로 연꽃이 새겨진 백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그저 책이나 읽을 것 같은 서생같이 보일 정도로 문약해보였다. 철혜선사의 소개에 앉아있던 청년이 일어나 단리유아에게 다가오더니, “하하하, 이거 단리대협을 만나 뵈니 정말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다.... 목단휘(木段徽)라 합니다. 부디 한수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도중에 멈칫거리며 말한다. 단리유아가 정면으로 바라보니 육척이 넘는 키에 단정한 외모가 귀한 가문의 사람을 드러내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무공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직 화경(化境)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 같은 사람이어서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사의 결전처럼 치열한 비무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천룡대라삼검(天龍大羅三劍)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나왔으면 했던 것이다. 일양지(一陽指)나 육맥신검(六脈神劍)은 절정 정도의 고수라도 펼칠 수 있겠지만, 천룡대라삼검(天龍大羅三劍)은 검강을 기본으로 하는 중검(重劍)으로 유명해서 화경(化境)의 고수가 아닌 이상에는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육맥신검을 한꺼번에 펼치는 것 역시 화경에 달해야만 가능하니, 그것 역시 제대로 견식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잠깐 철혜대사(鐵慧大師)를 돌아보니 그도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다가, 전음으로 상대방에 대해서 알려준다. <단리시주, 원래는 다른 사람이 나갈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되어서 우리도 미안하기 그지없소이다. 우리도 어쩔 수 없었으니 양해해주시고, 그분은 대리국(大理國)의 삼왕자이니 부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끔 해주시구려.> 이 청년은 대리국(大理國)의 삼왕자인 단휘(段徽)로, 어릴 적부터 무공 쪽에 관심이 많아 일 년의 반은 천룡사(天龍寺)에 살다시피 하며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중원의 십대고수중의 한명인 단리유아가 찾아왔다는 소문을 어떻게 알았는지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해서, 비무상대를 그 자신으로 바꿔 대신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천룡사(天龍寺)의 행위가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비무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바라, 전음으로 철혜대사(鐵慧大師)에게 알았음을 말하고 난후에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리유아라 합니다. 좋은 대결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하하, 뭘요. 제가 오히려 부탁드려야 되지요. 하하하, 이렇게 알려진 고수와 싸우게 되니 정말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상대가 없었는데.” 자신만만한 태도로 떠드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곧이어 비무를 시작하기로 했다. 일행과 천룡사(天龍寺)의 인물들이 물러나 이십 여 장의 공터를 만들어줄 때, 공증인이 된 기혼사가 한쪽으로 물러나며 역시 천룡사를 대표해 공증인이 된 법혜대사(法慧大師)를 향해서, “아니, 어떻게 저런 애송이를 내보내게 되었나? 그래도 어느 정도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지. 이리되면 비무 자체가 별 의미가 없을 터인데?” “휴, 저희도 별 수 없었습니다. 저분의 신분이 대리국(大理國)의 삼왕자 되시니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려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요.” 법혜선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니, 기혼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뭐라고? 이런 제기랄! 행여나 상처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그런 건가? 그리고 불광(佛光) 그 늙은이는 어떻게 저런 놈을 가만히 놔두고 있나? 옛날 성질대로라면 왕자라도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렸을 텐데? 게다가 대리 왕실에서 출가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왕실에서 출가한 분들이야 이미 무공을 버리고 수행에만 전념하니 별 신경도 쓰지 않지요. 게다가 다른 두 사조님들이 입적하신 후에는 불광(佛光) 사조께서도 침성곡(沈聖谷)에 머물러 나오시지 않은지 한참 되었으니 말입니다.” 기혼사가 법혜선사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흠, 그래? 그래서 그동안 그 늙은이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나보군. 예전에는 하루다 멀다하고 찾아와 귀찮게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법혜선사가, “사조께서도 연세가 연세인지라 예전만큼 그리 활동적이지는 못하지요. 그렇지만 선배님께 계속 수발드는 아이들을 보냈다고 알고 있는데, 왜 한 번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까?” 이에 기혼사가 코웃음과 함께 아직도 치가 떨린다는 듯이, “흥! 내가 미쳤냐? 괜히 찾아가서 생고생하게. 옛날 그 늙은이들 세 명이 모여 다닐 때 얼마나 나를 못살게 했는데. 빌어먹을, 내가 그때 그 시절만 생각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 부르든 말든 내가 신경 쓰나 봐라.” “그러다가 불쑥 사조님이 찾아 나서기라도 하신다면 일이 더 커질 텐데요? 아무리 이십여 년 사이에 몇 번 밖에 거동한 적이 없다고 해도, 선배님과는 보통사이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법혜대사(法慧大師)가 말하니, 기혼사가 펄쩍뛰며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무슨 사이? 나는 절대로 그 늙은이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어. 그 늙은이들이 저희들 멋대로 나를 끌고 다니면서 부려 먹인 것일 뿐이지. 흥, 그 늙은이가 내려오면 재빨리 도망치면 그만이지. 내가 도망가면 어쩔 수 있으려고? 흐흐, 지금은 나이가 백 이십이 넘었을 테니 설마 예전처럼 팔팔한 것은 아니겠지. 모습만 보여도....” 법혜선사가 혼자서 계속 중얼거리는 기혼사를 바라보며 속으로, ‘불광(佛光) 사조님은 아직도 정정하신데? 그리고 옛날에도 계속 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매일 이리 숨고 저리 도망쳐도 잡혀온 것은 기억나지도 않나 보구려.’ 걱정스럽게 기혼사를 바라본다. 나중에 무슨 고생을 당할지 눈에 훤했던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한쪽으로 향할 때,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뒤로 물러나 이십여 장의 공간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단리유아가 단휘(段徽)를 바라보며, “이제 시작해보기로 합시다. 그런데 검을 쓰지 않을 생각입니까?” “하하하, 본사의 육맥신검(六脈神劍)은 검이 필요 없으니 이 두 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크게 웃음을 터뜨림과 동시에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단휘가 대답한다. 육맥신검(六脈神劍)은 일양지를 근본으로 하여 펼치는 무형기검(無形氣劍)의 일종으로, 십이정경맥 중에서 손으로 이어진 육맥을 이용해 기검을 발출하는 무공이었다. 즉,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의 엄지손가락 끝 소상혈(少商穴),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 집게손가락 끝 상양혈(商陽穴),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 가운데손가락 끝 중충혈(中衝穴),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 약지손가락 끝 관충혈(關衝穴),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 새끼손가락 끝 소택혈(少澤穴),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 새끼손가락 끝 소충혈(少衝穴)을 이용해서 기검을 펼치는 것으로 각각의 손가락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졌다. 엄지로 펼치는 소상검(少商劍)은 그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어서 보통 무겁고 굳건한 바위와 같은 기세를 떨치는 기검이었고, 식지의 상양검(商陽劍)은 그 움직임이 가장 자유로워서 종잡을 수 없는 변화를 보이는 기검이었다. 중지의 중충검(中衝劍)은 자유로운 변화는 없지만 대도로 도법을 펼치듯이 크게 내려치고 휘둘러 베는 것 같았고, 약지의 관충검(關衝劍)은 그 움직임이 가장 제한이 되어서 주로 단순하면서도 요혈을 찌르는 듯한 기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지막 양손의 소지로 펼치는 소택검(少澤劍)과 소충검(少衝劍)은 그 움직임이 자유롭듯이 변화가 많고 표홀한 기세의 기검으로, 둘 중의 하나는 다른 손으로 펼쳐야 했는데, 왼손으로 펼치면 오히려 상리에 어긋나는 바가 많아서 막기가 더 어려웠다. 단휘(段徽)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비무를 시작하기로 한다. 서로 뒤로 물러나서 삼 장여의 거리를 벌린 후에, 서로 예를 표하고 나서 곧바로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백강설만(寒白降雪滿)” 단리유아가 먼저 단휘의 왼쪽으로 향하며 검을 사선으로 춤추듯이 흔들어 상대를 공격했다. 차가운 겨울날 눈이 하늘에서 쏟아지듯 하늘거리는 검영(劍影)이 단휘의 상반신을 향해서 다가간다. 설산파(雪山派)의 설상검십이로(雪霜劍十二路)중의 일초로서 보기에는 가볍고 느리게 보이지만, 실제의 모습은 정반대인 초식이어서 막기가 쉽지 않은 초식이었다. “관충천점화(關衝千點花)” 단휘도 역시 오른쪽으로 공격을 피한 후에 단리유아의 좌측면을 따라 돌며, 약지를 들어 올려 연이어 다가오는 검영(劍影)을 향해서 찌른다. 마치 천개의 꽃술을 하나하나 맞추듯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희미한 안개 같은 기검(氣劍)이 연이어 검영을 가르고 다시 단리유아를 향해서 다가간다. “차차창. 쉭 쉬식” 지켜보던 사람들이 두 사람의 공세를 보니 한사람은 보이지 않은 칼을 들고 허공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고, 다른 한사람은 이에 맞서서 쓸데없이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세에서 나오는 검기(劍氣)가 사방으로 흩어져 땅바닥을 파헤치는 것을 본다면, 실제의 상황은 전혀 딴판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리를 향해서 다가오는 기검(氣劍)을 보고는, 단리유아가 검을 휘둘러 막아내고 이번에는 정면으로 다가가며, “추월조휘(秋月照輝)” 검영(劍影)이 허공을 뒤덮더니 곧이어 검화(劍花)가 떨어져 내린다. 가을밤 보름달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월광(月光)이 은 싸라기처럼 반짝이며 수면을 물들이듯이. 이 초식은 호남성(湖南省) 최남단인 구의산(九疑山) 일대의 패자인 추월도문(秋月刀門)의 추월반광도법(秋月反光刀法)의 일초였다. 과거 단리유아가 호남성을 지나던 중에 추월도문의 제자와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 그 초식의 현란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 검법에 맞게 변형한 것이었다. 초식이 너무 아름다워 지켜보던 사람들이 오히려 탄성을 흘릴 정도였다. 이에 단휘가 피하기도 어렵고, 만일 피한다면 선수를 내주게 된다는 것을 느끼자 제자리에 서서 식지를 들어, “상양투세비류(商陽投細飛流)” “차차창. 쉬익 쉭” 그물 같은 기검(氣劍)을 일으켜 다가오는 검화(劍花)를 감싸서 하나하나 떨어뜨림과 동시에, 왼손의 소지를 이용해서 위아래로 사선방향으로 연달아 그으며, “소충과사탄현(少衝過斜彈絃)” 희미한 기검(氣劍)이 달려 나가 단리유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왼쪽 어깨를 향하여 연이어 공격해온다. 칠현금(七絃琴)의 현을 퉁겨내어 빗발치는 금성(琴聲)을 일으키듯이, 사르릉거리는 검풍(劍風)을 동반하여 무형의 칼날이 다가온다. 상대의 공격을 보자 그대로 전진하면 자신이 오히려 손해가 클 것을 느끼고, 단리유아가 도중에 초식을 멈추고 자신의 왼쪽으로 일보 옮겨 예봉을 피하며, “천하도도(天河濤濤)” “쉬익. 차차창” 검영(劍影)이 허공을 수놓으며 상대의 공격에 맞서나갔다. 이 초식은 종남파(終南派)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의 일초로서, 호호탕탕한 물결처럼 거침없이 일어나는 기세가 특징이었다. 서로의 공세가 상쇄된 후에 흩어지는 검기(劍氣)로 인해 흙먼지가 일어나 두 사람의 시야를 가리고 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다시 단휘에게 달려 나가며 검을 변화시켜, “오죽개천황(烏竹蓋天荒)” 마치 몽둥이로 땅을 내려치듯이 검을 연이어 내리쳐 상대를 공격해나갔다. 이 초식은 본래 개방(丐幇)의 비전 무공 중의 하나로 오죽패천장법(烏竹覇天杖法)의 일초에 속한 것이었다. 사백여 년 전 개방사상 최고의 고수였던 오죽개성(烏竹丐聖)의 무공으로 과거에는 강호십절에 들 정도로 대단한 무공이었는데, 그 오죽개성에 힘입어 당시만 해도 개방이 천하제일대방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개방에서도 그 본래 구결은 실전되고 초식 역시 껍데기만 남아있는 상태로서, 과거 단리유아가 개방고수와 싸우며 그 초식의 기묘함을 느끼고 자신이 연구하여 보강한 것이었다. 구름 같은 검영(劍影)이 허공을 뒤덮는 가운데, 검풍(劍風)이 붕붕거리며 일어나 단휘의 상반신 전체를 가리우며 공격해 들어왔다. 조금도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쳐오는 단리유아의 공격에 단휘가 이를 악물며 맞서나갔다. 곧바로 중지를 곧추세워서, “중충횡단운악(重衝橫斷雲岳)“ 중지를 곧추세워 크게 상하좌우를 향해서 내려친다. 햇빛에 기검(氣劍)이 산란하며 반짝이는 가운데, 다가오는 시퍼런 검광(劍光)에 맞서나가며 연이어 부딪쳤다. “차차창. 쉭 쉬익” 서로의 공세가 부딪쳐 검풍(劍風)이 일어나고 검기에 흙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부딪쳐가고 있었다. 서로의 신영이 번뜩이고 검광(劍光)이 햇빛에 산란하여 반짝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가 대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실상 이미 승부가 끝났음을 누구나가 느낄 정도였는데, 점차 단휘가 제자리에서 서서 공격을 막는 것이 늘어났고 그 주위를 돌면서 단리유아가 공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지켜보던 일행이야 별로 걱정스런 표정이 아니었지만, 단휘를 수행해서 따라왔던 사람들과 천룡사(天龍寺)의 승려들은 점차 심각한 안색이 되어 초조한 표정이 역력했다. 단리유아 역시 처음에는 정확히 그 모습을 알기 어려운 기검(氣劍)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가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을 알고 그리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적응이 되어서 자유자재로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상대의 공격과 승패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육맥신검(六脈神劍)을 펼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갖가지 초식으로 상대의 반응을 알아보고 있었다. 이 육맥신검의 운기술을 알아낸다면 자신이 사용하는 검법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손바닥의 노궁혈(勞宮穴)을 통하여 검에 진기를 주입하는 것이었는데, 이 육맥신검처럼 정밀하게 기를 제어하고 다섯 손가락 모두를 사용해서 펼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단휘 역시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은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과 나이는 비슷한데도 이렇게 실력 차가 많이 나니 자신이 여태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모두가 그 신분을 보아서라도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여 공격한 적이 없었던 데다가 항상 다들 떠받들어주기만 했었으니, 그래도 젊은 층에서는 자신이 천하제일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중원(中原)의 십대고수의 일인인 단리유아와 싸우게 되니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은 지쳐가 수비하기도 급급한데, 단리유아는 변함없는 기색으로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 전에 끝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중간에서 초식을 거두어들이며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이 의아할 지경이었다. 한 시진 정도가 더 흘러 계속해보아야 쓸데없음을 알고, 단리유아의 공세를 물리친 후에 뒤로 물러나 가쁜 숨을 내쉬면서, “휴우, 단리대협. 내가 졌소이다. 정말 그대의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려. 그대를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 수 있었소.” “저도 천룡사(天龍寺)의 무공을 대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상시와 별다르지 않은 조용한 태도로 말하는 단리유아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단휘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오. 그대의 무공에 비한다면 어찌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소? 이제 보니 본신의 무공은 펼쳐보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오.” “모든 것은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직 그대의 육맥신검(六脈神劍)이 제대로 완성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만일 극성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상 육맥신검(六脈神劍)이 제대로 펼쳐졌다면 단리유아 역시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휘는 아직 세 가지 이상을 한꺼번에 펼치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지, 실제 육맥신검이 무서운 것은 양손으로 모두 펼칠 때로 정말 맞서는 것이 까다로운 무공이었다. 마치 한사람이 여러 개의 팔로 검법을 펼치는 것과 같아서 합공하는 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게다가 만일 극성에 이르러서 다섯 손가락의 기검(氣劍)을 응축해서 검강(劍剛)을 펼치게 된다면 더욱 무서운 무공이 되는 것이었다. 한동안 서로 무공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이만 비무를 끝내기로 하고, 주위로 다가온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결정하기로 말했다. 천룡사(天龍寺)의 사람들도 별다른 불상사 없이 끝나서 만족스런 표정이었고, 단지 단휘를 따라왔던 수행원들이 모두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을 따름이었다. 단리유아야 비무를 계속하여 천룡대라삼검(天龍大羅三劍)을 보고 싶지만, 이들이 원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그만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한동안 서로가 부산하게 떠들다가 모두가 자리를 떠나가려는 순간, 산등성이를 넘어서 누군가 달려 내려오며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천룡사(天龍寺) 천룡사(天龍寺) 3 “기소아(祁小兒), 기소아야. 어디 있느냐?” 벽력같은 목소리에 일행이 무슨 일인가하고 쳐다보고 있을 때, 뛰어내려오는 사람을 향해서 천룡사(天龍寺)의 인물들이 합장하고 배례하며 인사한다. “불광(佛光) 사조님을 뵈옵니다.” “태상조를 뵙습니다.” 일행이 쳐다보니 그 키가 칠척이 넘어가고, 전신에 누더기 같이 다 떨어진 폐포를 걸치고 손에는 키만큼이나 커다란 석장을 쥔 사람이었다. 산발한 백발이 노인임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워낙 체구가 우람하여 머리카락을 보지 않는다면 노인이라 여길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여태까지 일행이 마주친 사람 중에서 백상사(白象社)의 독첨광의 체구가 가장 컸는데, 이 사람은 그보다 반 자 정도 키가 크고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어서 훨씬 더 크고 우람하게 느껴졌다. 다가오던 인영을 보고, 누구인지 알아차린 기혼사가 기겁하여 달아나려한다. 불광괴승(佛光怪僧)도 주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내달려 지나치며, 한쪽으로 뛰어 달아나는 기혼사를 보고는 크게 웃으며, “하하하. 이놈, 소아(小兒)야!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내가 미쳤소? 빌어먹을,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말과 함께 기혼사가 계속해서 반대쪽으로 내뺀다. 벌써 거리가 십여 장이 벌어진 상황이라 쉬이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쫓아 내려가던 불광괴승(佛光怪僧)도 잡기에는 힘들다는 것을 알자, 손에 들고 있던 석장을 냅다 기혼사를 향해 던져버리며, “껄껄껄, 네놈이 서라는데 안 서?” “꽈꽝” 던져진 석장이 기혼사의 머리를 넘어가 바로 앞의 나무를 산산조각 내며 땅바닥에 꽂힌다. 굉음과 함께 떨어지는 나뭇조각에 깜짝 놀라 기혼사가 멈칫할 때, 불광괴승(佛光怪僧)이 곧바로 다가가 기혼사를 붙잡아 올리며, “푸하하하, 네가 도망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흐흐흐.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었는데,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이 우형을 보러 일부러 찾아왔구나. 이 귀여운 것.” 두 팔로 껴안은 채 얼굴에 돋아난 고슴도치 같은 수염으로 기혼사의 얼굴을 계속해서 비비적거린다. 얼굴에서 전해오는 따끔한 느낌에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기혼사가, “내려놔. 내려놓으란 말이요! 제기랄, 내가 당신이 보고 싶기는 뭐가 보고 싶다고 이곳까지 찾아오겠소? 그리고 내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그런 소리요? 빨리 내려놓으시오.” 고래고래 소리치며, 두 팔로 불광괴승(佛光怪僧)의 가슴팍을 밀어 얼굴을 피하려하고 두 다리로는 계속 걷어차며 발버둥을 친다. 천룡사(天龍寺)의 사람들이야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지켜보던 일행은 다들 황당한 얼굴이 되어 쳐다본다. 칠척 반에 가까운 거구에 겨우 오척이 될까 말까한 기혼사가 매달려 있으니,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았다. 기혼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유쾌히 웃으며, “껄껄껄. 기소아야, 내가 볼 땐 넌 죽을 때까지 귀여운 아이로만 보인단다. 흠, 이제 내려 줄 테니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마라. 그때는 어찌되는 줄 알겠지? 흐흐흐, 기억나지 않으면 시험해보아도 좋고.” “알았소, 알았어. 그러니 어서 내려놓으시오. 이게 무슨 망신이요? 제기랄, 내가 전생에 무슨 빚을 졌기에 이 꼴인지....” 기혼사가 한쪽 볼을 실룩거리며 투덜거린다. 그 모습에 내려놓던 불광괴승이 기혼사의 얼굴을 덮을 정도의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볼을 잡아당기며,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 전생에 난 논밭을 가는 소였고, 너는 나를 마구 부려먹는 주인이었지. 그러니 너는 내게 빚진 것이 태산이지.” 이에 기혼사가 손을 쳐내고 서너 걸음 옆으로 물러서며, “무슨 헛소리요? 흥! 이생에는 내가 이렇게 당하지만, 염라대왕에게 사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음 생에는 당신을 마구 괴롭혀주겠소.” “그러려무나. 할 수 있다면 말이지. 하하하, 이 부처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게 된 것이 한참이란다.” 허리를 젖히고 큰 웃음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친다. 불광(佛光)의 이런 모습에 기혼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뭐가 깨달음을 얻었단 말이요? 글자도 제대로 못 읽은 무식한 돌중이면서. 게다가 젊었을 적에 갖가지 못된 짓을 도맡아 한 주제에....” 계속해서 궁시렁거리는 기혼사를 보면서 불광괴승(佛光怪僧)이 근엄한 표정으로, “소아야, 사람이 직접 체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쁜 일인지 어떻게 실감할 수 있겠느냐? 다 이 몸이 성불(成佛)하기 위해서 한 것이니 누가 뭐래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리고 글자를 모르는 것이 무슨 대수냐? 한 글자 아는 것이 하나의 죄업을 늘리는 것일 뿐, 글을 안다고 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얼마나 되느냐? 깨달음은 글과는 상관없다 했으니 이 몸이야 말로 타고난 부처이지.”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해? 하여간에....” 기혼사가 어처구니없어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흘겨보며 혼자서 궁시렁거린다. 두 사람이 장내로 다가오자 천룡사(天龍寺)의 인물들은 앞 다투어 불광괴승(佛光怪僧)에게 다가가 인사하기에 바빴고, 일행은 기혼사의 모습에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한쪽 볼이 꼬집혀 붉게 물들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으니 영락없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화가 폭발할 지경이었던 기혼사가 일행의 모습에 입술을 삐죽이며, “이것들이? 너희가 지금 날 비웃는 것이냐? 흥! 다들 나중에 보자. 제기랄, 저 웬수 같은 인간 때문에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불광괴승(佛光怪僧)을 힐긋거리며 연신 투덜거린다. 앞 다투어 인사하며 건강을 묻는 천룡사(天龍寺)의 사람들 때문에 한동안 소란스런 상황이 이어질 때, 불광괴승이 석장으로 땅바닥을 내리치며, “꽝” “다들 시끄럽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가 이리 많으냐?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인데, 그 장소와 시간이 무슨 상관이라고. 네놈들은 그렇게 얽매이는 것이 많으니 성불하기는 애초에 틀려먹었다. 제기랄 것 같으니라고, 이러니 여태 쓸 만한 놈들이 안 나오고 있지.” 크게 소리치다가 한쪽의 단휘의 전신을 쓸어보며, “너 흰옷 입은 아이야, 이리로 와봐라.” 불광괴승(佛光怪僧)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단휘가, 그동안 천룡사(天龍寺)를 찾아올 때도 어떻게 해서든지 마주치지 않으려 했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미적거린다. 옆에서 법혜대사(法慧大師)가 그 신분을 말하자, 이에 더욱 크게 불광괴승이 소리쳐, “냉큼 오지 못하겠느냐? 감히 네가 왕자라고 뻗대는 것이냐? 내 당장에 왕궁으로 쳐들어가....” “알겠습니다. 가겠으니 절대로 왕궁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단휘가 기겁하여 대꾸하며 불광괴승의 앞으로 다가간다. 과거 이들 천룡삼불(天龍三佛)이 대리왕실에 준 도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단휘로서는 불광괴승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다가온 단휘를 바라보며, “네가 삼왕자라고? 그러면 왕위와도 별 상관이 없겠군.” “예, 그렇습니다. 태사조님.” “흠, 그러면 너 출가해라. 넌 불가와 인연이 있으니 당장에라도 하면 좋을 것 같군.”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불광괴승이 말한다. 이에 깜짝 놀라 단휘가 뒤로 물러서면서,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데없이 출가라니요? 저는 결코 승려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흥! 내가 하라면 할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사흘 내로 왕궁에 찾아가 내가 말할 테니 그리 알고 기다리고 있거라.” 불광괴승(佛光怪僧)이 말을 마치고, 단휘의 말은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일행을 향해서 다가온다. 불광괴승의 말에 울상이 된 단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지만, 이 대리국 안에서 불광괴승의 말을 거역할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을 터였다. 불광이 찾아가 자신이 출가하기로 했다고 한다면, 그 부모인 왕을 비롯한 대신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왕실에서 출가하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니니, 오히려 경사가 났다고 잔치라도 벌일 터였다. 괜히 오늘 이 자리에 와서 비무에서도 진데다가 이런 일을 겪으니, 그 운수의 사나움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가온 불광괴승이 일행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단리유아에게로 향할 때, 법혜대사(法慧大師)가 옆으로 다가오며, “사조님, 이 사람이 전에 말씀 드렸던 중원(中原)에서 찾아온 사람입니다. 사조님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해서 그렇지 않아도 비무 후에 찾아뵐 작정이었습니다. 단리시주, 불광(佛光)사조님께 인사드리시오.” “단리유아가 인사드립니다.” 고개 숙여 절하는 단리유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이윽고 고개를 든 단리유아의 얼굴을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남만(南蠻)을 거쳐서 찾아 왔습니다.” 조용히 대답하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다시, “거기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비무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단리유아의 대답에 얼굴을 찌푸리다가 다시, “어디로 가는 길인가?” “.... 서장(西藏)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때서야 단리유아도 질문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잠시 주춤하다가 대답한다. 곧이어 불광괴승(佛光怪僧)이 석장으로 땅바닥을 내려치며, “꽝!” “쯔쯧, 아직 멀었군. 갈 길이 멀구만.” “....?” 뜬금없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하여 일행이 서로 돌아볼 때, 불광괴승이 고개를 돌려 기혼사를 향해 다가가며, “소아야, 요새 내가 살 낙이 없어서 제대로 나다니지를 못했단다. 그런데 이렇게 네가 찾아왔으니 어찌 아니 기쁘겠느냐? 마침 목도 컬컬하니 우리가 만난 것을 기념해서 목이나 축이러 가자.” “도대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술타령이오? 그리고 깨달았다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것이오? 도대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고는.” 투덜거리는 기혼사를 향해서 얼굴을 일그러뜨려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흐흐흑, 술이라니? 반가운 마음에 곡차로 목이나 축이자는 것인데. 그리고 넌 이 우형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냐? 다른 두 놈도 날 내버려두고 먼저 떠나가 버려 내가 얼마나 허전했는데. 흐흐흑.” “쳇, 징그럽소. 눈물도 나오지도 않으면서 그런 짓이라니, 제발 나이 값이나 하시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까지 있었다면 난 이미 울화가 치밀어 기절해 버렸을 것이오.” 오히려 더욱 화가 난다는 듯이 기혼사가 소리친다. 이에 불광괴승(佛光怪僧)이 다가가 왼팔로 목을 껴안으며, “무슨 소리냐? 넌 나의 마음을 모르겠단 말이냐? 게다가 그 두 사람이 널 얼마나 위해주었는데.” “케켁켁. 이 파, 팔 좀....” “이런, 내가 흥분했군. 괜찮으냐? 귀여운 동생아.” 은근슬쩍 팔을 풀며 말꼬리를 돌리며 불광괴승이 말한다. “으이구, 정말 말이나 못하면.... 제기랄, 어서 갑시다. 보나마나 끝까지 날 괴롭힐 생각인가 본데 나도 오늘은 술독에 빠져서 주정이나 한번 부려봐야겠소.” “헐헐, 암 그래야지. 그래야 착한 우리 기소아지.” 불광괴승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니, 기혼사가 짜증을 내며 멀찍이 떨어진다. 두 사람이 장내를 떠나가 일행의 시야에서 멀어져갈 때, 기혼사가 불광괴승을 향해서, “아까 그건 무슨 소리요?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만하고?” “쯔쯧, 넌 알 필요 없다. 언젠가는 그놈에게 도움이 되겠지만. 네 녀석은 바탕이 글러먹어서 알아보아야 헛것이야.” “무슨 말이오? 사람을 어떻게 보고?” 화가 나 소리치는 기혼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넌 이대로 살 팔자니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뜻인지 알려주면, 나중에 그 녀석에게 말해줄 심산이겠지?” “내가 무슨 고자질쟁인 줄 아시오? 흥!”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자 기혼사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린다. 이에 불광괴승이 고개를 숙여 귓가에 대고, “과거에 네가 한 짓이 생각나지도 않나보구나. 네가 우리 사형제를 싸움붙이기 위해서 어찌했더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계면쩍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리는 기혼사를 향해 혀를 차며, “끌끌, 이 녀석아. 그놈을 도와주려는 생각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렇지만 그런 것은 다른 사람이 알려주면 오히려 독이 될 뿐이야. 그 자신이 무슨 뜻인지 깨달아야 도움이 되지. 그러니 자꾸 딴 생각 말고 어서 우리는 목이나 축이러 가자.” “제기랄, 하여간에 자기 멋대로 라니까.... 같이 갑시다. 같이 가요. 보나마나 돈도 없을 것이면서.” 기혼사가 혼자서 궁시렁거리다가, 앞장서 성큼성큼 내려가는 불광괴승을 소리쳐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뒤쫓는다. 불광괴승(佛光怪僧)이 한줄기 광풍(狂風)처럼 나타나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는, 곧바로 쾌도난마로 일을 처리하고 떠나버리니 다들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단리유아에게 단 세 마디만 물음을 던지고는 곧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두 사람을 보고, 일행도 당황하여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고 선상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사숙, 무슨 뜻입니까?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뜬금없는 소리나 하다니.” “휴, 나도 잘 모르겠소. 깊은 뜻이 담긴 것 같은데, 아무래도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야겠소.” 단리유아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치며 대답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공손고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법혜대사(法慧大師)를 향해서, “대사, 대사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것은....” 법혜대사가 말하려 할 때, 철혜대사(鐵慧大師)가 크게 소리치며, “갈(喝)! 사제는 더 이상 말하지 마시게. 사조께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을 테니. 어찌 우리가 끼어들어 답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런 것을 가르쳐준다한들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뿐일 것이네.” “맞습니다. 장문사형, 제가 무심코 경망 되이 나서려 했군요. 사형께 감사드립니다.” 법혜대사(法慧大師)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다들 표정을 굳힌 채 설명을 하지 않으니 일행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곧이어 서로 작별을 고하고 각기 장내를 떠나서 흩어졌다. 단휘일행은 대리왕성으로 향했는데, 오늘의 일을 설명할 생각을 하니 답답한지 침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자신은 결코 승려가 될 생각이 없었는데, 꼼짝없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천룡사(天龍寺)의 사람들도 각자 생각에 잠기어 떠나고 장내에는 일행과 단리유아만이 남아있었다. 공손고와 선상조가 서로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걸음을 옮길 때, 단리유아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물음에 터벅터벅 걸으며 묵묵히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동파교(東巴敎) 동파교(東巴敎) 1 천룡사(天龍寺) 내의 거처에 돌아와 정좌하여 생각에 잠길 때까지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단순하게 자신의 행보에 대해서 물어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너무나 단순하고 짧은 질문이라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비무를 끝낸 후부터 계속해서 불광괴승(佛光怪僧)의 말이 뇌리를 울리며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무엇을 하고 있나? 어디로 가는 길인가?’ ‘난데없이 이런 물음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 캄캄한 어둠 속에 상을 차려놓고 아무런 도구도 없이 밥을 떠먹으라는 것처럼 전혀 뜻밖의 물음이니 그 뜻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후 내내 상념에 잠겼지만 뚜렷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공손고와 선상조도 돌아와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로서도 당최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 선상조가 식사를 청했지만, 듣는 척도 안 하고 단리유아는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시 식사를 청하려는 선상조를 말리며 공손고가, “그만 두게.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일 테니. 때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겠지. 그나저나 그놈의 중인지 술꾼인지 모를 사람은 제대로 말이나 해줄 것이지, 달랑 몇 마디 남기고 떠나버리다니. 제기랄, 우리 같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나?” “선배는 어찌 생각하시오? 정말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소? 그동안 경험한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을 테니 어느 정도 감이라도 있지 않겠소?” 선상조가 곧이어 물어본다. 이에 공손고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내가 무슨 고승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그런 선문답을 어찌 알겠나? 나도 몇 번 그런 고승들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원래가 의미가 함축되고 여러 가지 뜻이 있으니 그 당사자와 그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않는 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네.” “휴, 별 수 없이 기선배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나보군요. 정말 괴승은 괴승인가 봅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은데도 우리 같은 범인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쉽게 던지고 단숨에 사람들을 휩쓰는 기세를 보면. 게다가 천하의 기선배를 그렇게 다루는 사람이라니. 저는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에 공손고가 낄낄 거리며, “푸하하하,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웃음을 참을 수 없구만. 세상에 그 심통 맞은 늙은이를 그렇게 다루다니 말이야. 아까 보니 영락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이더군. 정말 세상에는 천적이라는 것이 있나보네. 누가 그 늙은이가 그렇게 당하리라 생각을 했었겠나?” “맞습니다. 휴, 그동안 기선배의 심술을 계속 당하다가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마찬가지 일세. 흥! 빌어먹을 노인네. 오늘 고생깨나 할 것이네. 흐흐흐, 정말....” 서로가 기혼사에 대해서 떠들어 그동안 쌓였던 마음을 풀며, 제발 불광괴승(佛光怪僧)이 한시라도 더 붙들어 자신들 대신에 복수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을 더 머무르다가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기혼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떠나자고 졸랐는데, 하루 종일 불광괴승에게 끌려가 갖가지 궂은일을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떼를 쓰다시피 하며 조르니 일행도 더 머무르지 못하고 천룡사(天龍寺)를 떠나야 했다. 그동안 단리유아가 다시 불광괴승을 찾아가 물어보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단지 너 자신에 대해서 더 생각하라는 말뿐. 더 생각해보아야 현재에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단리유아도 그만 생각을 멈추고 우선 눈앞의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테고,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생각을 방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천룡사를 뒤로 하고 일행이 다시 길을 떠나니 기혼사가 가장 좋아했다. 산문을 나서 이해(洱海)의 서편을 끼고 여강(麗江)으로 향했는데, 천룡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니 그제야 기혼사가 크게 웃으며, “우하하하. 드디어 천룡사(天龍寺)를 떠나게 되었군.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네. 빌어먹을 늙으니 같으니라고. 어떻게 사람이 편한 꼴을 못 보는지, 허구헌 날 이거해라 저거해라 시키기만 하고. 제기랄, 하루만 더 머물렀었다가는 화병이 나서 쓰러져 버렸을지도 몰라. 그 늙은이....” 혼자서 계속해서 투덜거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은, 그 자신도 남이 편한 꼴을 못 보니 피차일반이 아닌가 하고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뒷감당을 하기는 너무 두려우니 차마 묻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혼사가 문득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나, “너 이 자식들. 그동안 내가 당하니 고소해 죽었을 테지. 흥! 전에 보니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하더구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이 언제 그랬다고?” 공손고가 시치미를 떼자, 기혼사가 소리 지르며, “뭐가 안 그래? 네놈이 속으로 하는 생각을 내가 모를 줄 알고? 흥! 앞으로 하루도 심심하지 않게 해줄 테니 걱정마라. 흐흐흐, 그것 참 어떻게 놀려먹지. 벌레를 불러서 잠도 못 자게 만들까 아니면....” 소리치다가 다시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 모습에 다들 별 수 없는 노완동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다. 천룡사(天龍寺)를 떠난 일행이 북쪽으로 사백여 리 떨어진 여강(麗江)에 도착한 것은 구월 십일일의 정오를 조금 지나서였다. 별 어려움이 없는 평탄한 여정이 이어졌지만, 단지 워낙 고산지대가 이어지다보니 아침저녁으로는 오히려 쌀쌀함을 느낄 정도의 날씨가 계속되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았지만, 더 길을 재촉하지 않고 오늘은 이곳에 머무르기로 하고 동파교(東巴敎)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했다. 여강(麗江)은 옥룡설산(玉龍雪山)의 아래에 위치한 도시로 주민의 대다수를 납서족(納西族)이 차지하고 있었다. 납서족은 아직까지 동파교(東巴敎)를 믿는 사람들로서, 사람과 신 사이에는 동파(東巴)가 있고 하늘과 땅 사이에 자신들이 산다고 생각했다. 동파는 이 동파교의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이자 무당이었고, 또한 무사이기도 했던 사람을 가리켰는데, 그 옛날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그 세력이 퍼져나갔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주술과 호신술 정도를 알고 있을 뿐으로, 과거의 위명을 떨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 납서족은 자신들만의 문자인 동파문(東巴文)과 말을 사용해서 일행과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천여 호가 넘는 고을인 여강(麗江)에서 사흘을 머물며 수소문해보았지만, 다들 모른다는 말뿐이었고 제대로 가르쳐주려는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동파(東巴)라 불리는 사람을 십여 명이나 찾아다녔지만, 원하던 결과는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일행을 수상하게 보는 시선만 늘어갈 뿐이었다. 더 이상 머물러보아야 좋을 것 없다는 것을 알자, 일행은 마지막으로 옥룡설산(玉龍雪山) 아래에 있는 파향(芭鄕)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다는 동파를 찾아보고 나서 바로 중전(中甸)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한 마리의 흰 용이 드러누운 것 같다는 옥룡설산(玉龍雪山)의 아래에 위치한 파향(芭鄕)은 백여 호 남짓한 작은 마을이었다. 다른 납서족(納西族)의 부락과 같이 이층으로 된 흙벽돌로 된 집들이 이어져 있었는데, 모든 골목들이 옥룡설산을 향해 있었고, 마을의 집들을 따라 개천이 흐르고 있어서 어느 집을 찾아가던 조그마한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점심이 미처 못되어 파향에 도착한 일행이 물어물어 동파(東巴)의 집으로 향했는데, 마을의 제일 북쪽 산 아래의 조그마한 사당을 겸한 이층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삼 장 정도 되는 정원 겸 뜰이 보였다. 무슨 향인지 모르지만 향냄새가 자욱한 가운데, 여기저기 허공으로 줄이 쳐져서 대문 위의 기둥으로 이어져 있었다. 일행이 뜰로 들어서니 안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찾아갔던 동파(東巴)도 저런 경문을 외는 것을 보아서 그리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는 없었다. 일각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기혼사가 투덜거리며 욕하는 것을 단리유아가 달래고 있을 때, 이층의 덧문을 열고 한 사람이 얼굴만 살짝 내밀어 일행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전체적으로 좁고 긴 얼굴에 턱이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생겼고, 얼굴도 약간 화장을 한 것처럼 하얗고 입술은 붉은데다가 턱에도 아무런 수염이 없는 사십대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누구냐? 감히 멋대로 들어서다니. 오늘은 망자를 위해서 경을 하는 날인 줄 모르느냐?” 납서족(納西族)의 말이어서 일행이 무슨 말인 줄 몰라 어리둥절할 때, 기혼사가 앞으로 나서서 한어로, “야, 이놈아. 사람이 찾아왔으면 내다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빌어먹을, 벌써 일각이 넘도록 가만히 서서 있었는데. 냉큼 내려오지 못할래?” “흥! 이제 보니 중원인들인가?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왔지?” 명확한 한어로 말하니 일행 모두가 놀랐다. 다른 동파(東巴)들 중에서는 이리 정확하게 말하는 이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대부분 다른 사람의 통역을 거쳐야 그나마 말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혼사가 미처 말하기 전에 단리유아가 나서서, “저희는 동파교(東巴敎)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무슨 시간? 중원인이 그것을 알아서 무엇 하게? 흥! 난 당신들을 볼 일이 없으니 냉큼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걸?” 계속해서 내려다보고 냉소하며 말하는 사람을 보고, 기혼사가 일학충천(一鶴沖天)으로 뛰어오르며, “이 자식아! 사람이 부르면 최소한 내려와 맞아야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동시에 오른손으로 손 그림자를 일으켜 상대의 목덜미를 움켜쥐려한다. 이에 동파(東巴)가 오른손을 내밀어 손에 쥔 소도를 천심인장(穿心刃掌)의 수법으로 휘둘러 기혼사의 손을 마주 찔러가며, “누가 찾아 오랬나? 아쉬운 게 누군데 큰 소리야?” 기겁한 기혼사가 신형을 회전시켜 땅으로 내려서며, “어라? 이 자식 이제 보니 제대로 무공을 익힌 놈인데. 야, 이놈아. 뭣 좀 물어볼 것이 있으니 그만하고 내려와라.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데, 이래도 안 내려오면 확 불을 질러버릴 테니.” 소리치는 기혼사의 말에 일행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때, 위층의 사람이 이에 코웃음 치며, “흥! 그런 애들 장난 같은 협박에 내가 속을 것 같으냐? 만일 그랬단 봐라. 내 가만두나. 세상 끝까지 따라가 저주를 걸어 줄 테니.” “뭐? 저주? 클클, 네놈이 나한테 저주를 걸면 나는 네놈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독술을 걸어주지. 빨랑 내려와 이 잡것아. 정말 불 질러 버리기 전에.” 오히려 큰 소리로 맞받아친다. 이에 유심히 기혼사를 살펴보다가, “당신은 중원인이 아니로군. 남만인인가? 남만인이 왜 중원인들을 따라다니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아니지,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을 테지. 아니면 꼬투리를 잡혔던지.” 한동안 혼자 말로 중얼거리다가, “내려갈 테니 꼼짝 말고 기다려라. 조금이라도 움직일 생각은 말고.” 말과 함께 덧문을 닫고 사라진다. 이에 기혼사가 혼자 씩씩대며, “저 자식이 끝까지 반말이네. 저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기선배, 진정하시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단리사숙의 일 때문이니, 더 이상 상대를 곤란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선상조의 말과 함께 공손고와 단리유아도 기혼사를 말려 뒤쪽으로 물러나게 한다. 곧이어 이층에 있던 사람이 내려왔는데, 육척의 못되는 키에 전신에는 전체적으로 붉은 색에 청색과 흑색이 가로지르는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으로 머리에는 청동 빛이 나는 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심히 요상했다. 정면으로 바라보니 얼굴의 모습도 이상해서 꼭 피를 빨아먹은 박쥐같은 모습이었다. 심통스런 기색으로 마지못해 물러났던 기혼사가 손벽을 치며, “이상하군, 이상해. 어디서 이런 박쥐가 나타났지?” 비웃는 기혼사의 말에 내려온 사람이 그렇지 않아도 좁아 보이는 미간을 더욱 좁히며, “이상하군, 이상해. 어디서 이런 원숭이가 나타났지?” 똑같은 동작과 말로 기혼사를 놀린다. 이에 흥분한 기혼사가 달려들며, “너 이 자식, 정말 해볼 테냐?” “흥! 그러면 내가 당신이 무서울 줄 아나보지. 해볼 테면 해 봐, 어서.” 오히려 가슴을 내밀며 큰소리친다. 이에 뛰쳐나가려는 기혼사를 일행이 모두 달려들어 붙들고는 한참동안 갖은 말로 진정을 시킨다. 잠시 동안의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단리유아가 나서며, “저는 단리유아라 합니다. 이분은 공손고라는 선배이시고, 이쪽은 제 사질 되는 선상조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말하지 마! 저 자식한테 내 이름도 가르쳐주기 싫으니.” 퉁퉁 부은 얼굴로 씰룩거리며 기혼사가 소리친다. 단리유아가 그 말에도 못들은 척하며, “기혼사라는 선배이십니다. 연세가 백세가 가까워지시니 아까의 무례에 대해서 너무 따지지 마시고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백 살이 다되었다고? 정말인가? 흠, 아무리보아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하는 짓을 보아서도 그렇구. 하지만, 너그러운 이 몸이 철없는 사람과 어찌 계속 싸우겠는가? 암, 그렇지 그렇구 말구. 내가 누군가? 자랑스러운 파향(芭鄕) 동파의 이십칠대손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혼사를 보고 말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 일행이 보기에 이 사람도 약간 이상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외모만큼이나. “저 개자식이 끝까지.... 이것 놓지 못해? 너희들 나중에 어찌될지 알고나 이러는 것이냐? 빨리 놔....” 또다시 날뛰는 기혼사를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공손고와 선상조가 붙잡아 아예 한쪽으로 물러난다. 한쪽에서 투덕거리는 세 사람을 내버려두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흠, 제가 뭐라고 불러야 되겠습니까?” “뭐긴 뭐야? 그냥 동파라 불러. 마을 이름이 파향이니 파향동파(芭鄕東巴)라 하면 될 거야. 다들 그렇게 부르니. 그나저나 뭐 하러 이곳까지 찾아왔나?” 별로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대꾸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동파교(東巴敎)에 대한 것을 알아보고자 찾아왔습니다. 과거의 동파교는 그 무공이 뛰어난 호교단체가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그들의 무공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입니다.” “뭐? 겨우 그것 때문이라고? 이미 사라져 없어진지 팔백여년에 이르는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그리고 중원인이 동파문(東巴文)을 읽을 줄도 모를 텐데, 찾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 단리유아를 훑어보며, 별 정신 나간 놈 다보겠다는 듯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동파무전(東巴武典)의 무공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무공만으로도 충분한데, 단지 현경(玄境)에 이르렀다는 분이 계셨다는 것을 듣고 그분의 깨달음이나 수행과정 같은 것이라도 알 수 있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아니, 네가 그것을 어찌 아냐? 이제는 이 운남(雲南)에서도 아는 사람이 얼마 없을 텐데?” 놀라서 빠르게 쏘듯이 말하는 파향동파(芭鄕東巴)를 향해서, “오래전의 강호사를 적은 서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입니다.” “.... 흠, 네가 바로 그 사람인가? 소문에 떠돌던? 남만(南蠻)까지 갔다가 얼마 전에 운남(雲南)으로 왔다고 들었는데.”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혼자서 한참 생각하더니 궁금한 표정으로 말한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여, “맞습니다. 제가 그 사람으로 얼마 전에 천룡사(天龍寺)에 다시 서장(西藏)을 향해서가는 중에 이렇게 들린 것입니다.” 파향동파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너도 참 쓸데없는 짓이나 하고 있구나. 겨우 그런 것이나 알아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가르쳐주기는 하겠지만,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걸? 흠, 너도 알다시피 현재 동파교(東巴敎)는 거의 흔적만 남았을 뿐이야. 제대로 된 무공은 없이 몇 가지 주술과 호신술 정도만 남아있지. 그러면 난 어떻게 무공을 익혔냐구? 음, 내가 아직 젊었을 적에 동파(東巴)가 되기 싫어서 집을 뛰쳐나갔지. 그때는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거든. 정말 꼴불견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가문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니 어떻게 피할 수도 없어서, 무조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지. 아, 동파가 어떻게 되냐구? 빌어먹을 법도이지만, 가문의 둘째는 무조건 이어받아야 해. 그런데 내가 둘째였거든. 동생도 없고. 무슨 팔자인지 말이야. 어쨌든 그렇게 중원까지 흘러들어가 무공을 익히게 되었는데, 나중에 나이 들어서야 고향 생각이 나고 지난 일이 후회가 되어서 돌아오게 됐지. 돌아온 것도 십년도 안 될걸? 아닌가? 십년은 넘었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고, 모두가 죽어버린 뒤였다는 말이야. 그래서....” 파향동파(芭鄕東巴)가 자신의 기분에 취해 계속해서 자신의 가족사와 강호(江湖)에서 겪은 일에 대해서 횡설수설하며 떠들었다. 거의 반각 가까이 멈추지도 않고 혼자서 계속 떠들다가 숨을 돌릴 때서야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겉보기에는 그리 연세가 들어 보이지 않는데, 지금 어찌 되십니까?” “나? 흐흐흐, 저 늙은이도 생각보다 젊어 보이지만. 나도 역시 젊어 보이는 편에 속하지. 아마 팔십에 가까울 걸. 이 화장도 한 몫 한 바가 있지만 본래 본바탕이 좋으니 그런 것이지. 이 화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또다시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그를 보자 이 사람의 버릇이 그런 것임을 알고, 단리유아가 아예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가로막으며, “선배님, 그보다 동파무전(東巴武典)이나 과거에 현경(玄境)에 달했다는 분이 남겨놓은 글 같은 것은 없습니까?” “응? 그것? 음, 동파무전은 실전되었다고 보아야 할 거야. 조금씩 구결이 남아는 있겠지만, 온전한 것은 없을 테니 말이지. 벽해궁(碧海宮)의 무공이 동파교(東巴敎)와 연관이 있다고도 하지만, 그 계집들은 워낙 신비한 척 해서 정확히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니 물어볼 수도 없지. 그러니 동파무전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지. 그리고 과거 현경에 달했다는 분의 글은 어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거야. 그분이 바로 단파희요(丹巴喜繞)라는 분인데, 사실상 동파교를 세상에 알린 것과 마찬가지이니. 과거 그분은 정말 대단했다고 들었지. 그때만 해도 이렇게 중원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는데, 지금은....” 샛길로 다시 빠지는 그를 보며, 단리유아가 말 꼬리를 붙잡고, “그러면 그분의 글을 찾을 만한 곳을 알고 계십니까?” “글쎄? 그분의 글이라?”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손뼉을 치며, “맞다. 맞아. 중전(中甸)의 백지(白地)에는 아마 남아있는 것이 있을 거야. 과거 동파교(東巴敎)의 발원지이고, 아직도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니 말이야. 흠, 그런데 그쪽은 마사이(摩思夷)들의 땅인데. 그들도 우리와 같은 동파교(東巴敎)이지만 여러모로 전통이 달라서 말이야. 그 족속들은 여자가 가장인 모계전통이고, 말도 우리와는 달라서 찾아가도 쉽지 않을 걸. 게다가 그 족속들의 습관이란....” 처음에는 제대로 말하다가 나중에는 혼자서 주절주절 마사이들에 대한 말을 늘어놓는다. 아이를 가지고 싶을 때만 남자를 며칠 받아들이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쫒아내고, 아이는 어미의 성을 따라서 큰다고, 외지인이 들리면 여자들이 달려들어 관계를 맺을 생각부터 한다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떠들어댄다. ******* 출판사에서 각각 열권의 책을 보내왔는데, 기분이 요상하네요. 처음으로 내가 쓴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설레임도 있고. 음, 하여간에 이벤트라도 열어서 책을 보내드렸으면 하는데 어떤 방법이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런 쪽에는 무관심해서, 어쨌거나 댓글에 써주세요. 좋은 의견이 보이면 공지를 날리도록 할 테니. 아, 일곱분에게 보낼 생각입니다. 딱히 아는 누군가에게 선사하기에는 부끄럽네요. 아직 많이 모자라니. ###### 계속해서 비무만 이어지니 지루하신 분들이 많나 보네요. 전에 세외의 세력에 대해서 나온 부분을 참고해서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비무는 거의 없을 것이고, 깨달음에 관한 것만 몇 번 나올 뿐입니다. 그 외에는 피튀기는 혈전과 음모의 서장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불광괴승이 질문한 것은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단순한 복선이나 행로에 대한 것은 아니랍니다. 동파교(東巴敎) 동파교(東巴敎) 2 한동안 혼자서 계속 떠드는 파향동파(芭鄕東巴)를 보면서 단리유아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냥 이대로 중전(中甸)의 백지(白地)로 향할지, 아니면 먼저 벽해궁(碧海宮)을 찾아본 후에 다시 중전으로 향할지. 한참 생각에 잠겼을 때, 한쪽에서 기혼사를 붙잡고 있던 공손고가 파향동파를 향해서, “저기, 혹시 팔망수괴(八忘瘦怪) 육(陸)노선배가 아니시오?” “으잉? 누구지? 나를 알아보게? 중원(中原)에서 사라진지 삼십년이 넘었는데.” “정말 육노선배 되십니까?” 혹시나 했던 공손고가 놀라서 되묻는다. 이에 파향동파(芭鄕東巴)가 소리를 지르며, “아, 글쎄 누구냐니까? 빌어먹을, 기억도 안 나는 놈이 아는 척하기는.” 그래도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공손고가 놀라 중얼거린다. “세상에 이 운남(雲南)의 구석진 곳에 삼괴(三怪)의 하나가 있을 줄이야.” “저 자식이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안하고 딴소리만 하네. 그것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만. 아, 누구냐니까? 이 자식아!” 역정을 내며 소리 지르는 파향동파를 바라보다가 단리유아가, “공손선배. 누구신지 아시오?” 힐끗 파향동파(芭鄕東巴)를 바라보다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전음으로, <자네는 전대의 고수 중에서 세 괴물인 파행삼괴(破行三怪)도 모르나? 자네들 사광(四狂) 이전에 활동했던 사람들인데? 그래도 자네들은 어떤 것을 광적으로 좋아해서 그런 명호가 붙었지만, 저들 삼괴(三怪)는 한마디로 괴상한 인간들이라네. 저 사람은 그 중에서 팔망수괴(八忘瘦怪)라 불리는 육이지(陸二知)라는 사람이라네. 이름보다는 명호로서 더 알려진 사람이지. 일단 입을 열면 끝도 없이 중얼거리는데다가 워낙 제멋대로 행동하여 매일 사고를 치던 사고뭉치지. 얼굴을 저렇게 꾸미니 긴가민가했는데, 아까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과 그 태도를 보고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네. 한마디로 괴물들이니 자네도 조심하게. 그리고 만일 우리를 따라나선다면 절대로 끼워주지 말게. 완전사고뭉치니. 그렇지 않아도 기선배만으로도 버거운데, 저 인간까지 끼이면 완전히 우리는 볼 장 다본 셈일 테니.> 팔망수괴(八忘瘦怪)가 전음으로 떠드는 두 사람을 보다가 공손고를 손가락질하며, “야, 이 자식아. 정말로 빨리 누군지 말 안할래?” “죄송합니다. 육선배님께 공손고가 인사드립니다.”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공손고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공손고? 공손이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제가 막 출도했을 무렵에 선배님께서 은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사부님은 아실 것입니다. 추전만리(追電萬里) 저창곤(楮昌坤)이라는 분이신데....” “추전만리, 추전만리.... 아, 그 늙은이? 쓸데없이 이곳저곳 참견하기 좋아하던 개코늙은이 말이지?” 중간에 끼어들어 공손고의 말을 막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말한다. 자신의 사부를 깔보는 듯한 욕설에 공손고가 화가 나서, “무슨 소리십니까? 아무리 선배님의 위명이 높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그러고 보니 닮은 것도 같군. 작달막한 키에 쓸데없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을 보니.”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공손고를 쓸어보며 말한다. 이에 공손고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빌어먹을, 하여간에 재수가 없다니까. 요새는 어떻게 이런 인간들만 만나게 되지?‘ 투덜거리는 공손고는 내버려두고 단리유아를 향해서, “자네가 요새 비무를 하고자 세외(世外)로 나섰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맞습니다. 저희 소사숙께서는 현재 중원 십대고수중의 한분으로 전광(戰狂)이라 불리고 계십니다.” 한쪽에서 선상조가 끼어들어 대신 말하자, 팔망수괴(八忘瘦怪)가 눈만 돌려 흘겨보며, “너한테 안 물었다, 매부리코 아이야. 앞으로는 쓸데없이 어른 말씀하시는데 나서지 마! 음, 나선 김에 한 가지 물어보자. 넌 해남파(海南派) 인물이라 했지?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이 너희 사숙이 되지?” “.... 저희 해남파에 도움을 많이 주셔서 그렇게 대하기로 장문인께서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놀리듯이 말하자, 선상조가 불만스런 기색이 완연한 채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말한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그래? 아직까지 그 고집쟁이가 장문이던가?” “예, 무삼사(毋三思)라는 분이 현재의 장문을 맡고 있습니다.”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말하자,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데 그 고집쟁이가 웬 일로 제자를 내보냈지? 누구라도 맘에 안 들면 안하무인인 인간인데. 참말로 자네가 맘에 들었나보구만. 이렇게 제자를 보내서 수행하게 하고. 그 인간하고는 과거에 한번 대판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선배님, 그보다 아까 제게 묻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팔망수괴(八忘瘦怪)의 말을 중간에 끊어서 단리유아가 되묻는다. 이에 이마를 치며, “그렇지! 내가 왜 이러지? 묻고 싶었던 것이 그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요새 치매 끼가 있나?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혼자 처박혀 있다 보니 그런가? 먹는 것이 부실한 건가? 제기랄, 이놈의 동파(東巴)노릇도 지겨워 죽겠네. 맨날 경문이나 외고....” 또다시 횡설수설하는 팔망수괴를 보며 일행 모두 눈살을 찌푸린다.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 이 사람과 대화를 하다간 스스로 화가 폭발해버릴 것이다. 기혼사가 이 모양을 보고는, “그래 너 아무래도 치매에 걸린 것 같다. 그러니 그냥 콱 혀를 깨물어 죽는 것이 어떻겠느냐? 보기흉한 꼴 더 보여주지 말고?” “뭐? 그러는 당신이나 나이 값을 제대로 하시지. 흥! 어디서 참견이야 참견이.... 키 작은 원숭이 같은 인간이.” “넌 그렇게 피 빨아먹은 박쥐같이 생겨서 그 모양이냐? 횡성수설하기만 하고?” “그래서....” 서로가 말을 주고받고 노려보며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정말 앙숙이 만난 것처럼 서로가 맘에 들지 않아서 사사건건 시비를 일으키려고 했다. 두 사람을 뜯어말린 후에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대청의 탁자에 일행이 좌정하고 앉아 있으니 이십대의 납서족(納西族)의 남자가 들어와 말없이 수유차(茱留茶)를 따르고 나서 물러난다. 잠시 후 팔망수괴(八忘瘦怪)가 머리의 관을 벗고 화장도 지운 채, 단순하게 보이는 청의를 입고 탁자로 다가왔다. 머리를 틀어 목잠(木簪:비녀)으로 고정시킨 모습이었는데, 좀 전처럼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보이기는 마찬가지인 얼굴이었다.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미리 생각을 하고 왔는지 곧바로 단리유아를 향해서, “흠, 내가 자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중원(中原)의 소식을 알고 싶었던 거야. 삼십년 전 강호(江湖)를 떠난 후에 이리저리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부터는 거의 소문을 듣지 못하고 있었지. 자네에 대한 것도 일전에 여강(麗江)에 나갔을 때, 누군가 남만(南蠻)에서부터 비무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잠깐 들었을 뿐이지. 그러니 최근의 강호에 대해서 말해주게.” “제가 설명하지요. 아무래도 최근 삼십년 내의 일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공손고가 중간에 끼어들어 나서며 강호(江湖)의 정세에 대해서 말해준다. 파행삼괴(破行三怪)가 사라진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지. 최근의 강호가 어떻게 변했고, 거기에 더해 세외(世外)의 정세는 어떤지. 팔망수괴가 때로는 탄성을 지르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서 중얼거리고, 중간에 끼어들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도 해서 거의 반 시진이 흘러서야 대충 설명이 끝나게 되었다. 공손고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흔들며, “휴, 정말 많이도 변했군. 그래도 내가 떠날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너의 말대로라면 완전히 난장판이라는 소리네?” “그렇지요. 그런데 다른 두 분의 소식은 모르십니까? 그래도 세분은 친한 편이어서 가끔 같이 행동하기도 했지 않습니까?” “뭐가 친해? 그 웬수 같은 놈들하고 내가? 흥! 다시는 그놈들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내가 만날 때마다 그놈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지놈들도 어딘가에 처박혀 있겠지, 아니면 이미 저승에 가서 날 기다리고 있던지.” 다른 두 사람을 생각하다가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한다. 과거의 예를 보아서는 그 역시도 그들에 못지않은 말썽을 피우고 다녔는데, 자신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는 듯이 말한다. 잠시 일행이 삼괴(三怪)를 생각하며 말이 없을 때, 팔망수괴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그런데, 자네. 단파희요(丹巴喜繞) 어르신의 글을 찾으려면 백지(白地)로 가야 할 터인데, 나도 따라가면 안 될까?” <절대로 끼어주면 안 되네. 우리만 피곤할 뿐이야.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따라가게 한다면....> 공손고가 기겁하여 곧바로 전음을 날릴 때, 그 모양을 보고 팔망수괴가 중간에 끼어들어, “너 이 자식. 나에 대해서 험담하고 있었지?” “아, 아닙니다. 그저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뭐가 안 그래? 그러면 그냥 물어볼 것이지 전음으로 하다니, 넌 틀림없이 나를 욕하고 있었을 거야.”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공손고를 노려본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 막으며, “육선배님, 저희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테지만. 이곳의 일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흐흐, 여기 일이야 아까 자네가 본 그놈한테 맡기면 큰 문제없을 거야. 그놈이 형님의 손자인데 이미 배울 건 다 배웠으니까. 으이구, 내가 처음에 찾아왔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여서 얼마나 힘들었던지. 동파문(東巴文)도 모르고....” 장황하게 자신의 고생담을 늘어놓는 모습에 일행이 질려갈 때, “그러면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어차피 동파문(東巴文)을 해독하려면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할 테니.” “응? 그래 그렇구 말구. 잘 생각했어. 넌 나와 뜻이 통하는군. 우리 앞으로 잘 해보자구. 흐흐흐.” 단리유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소리치다가, 일행을 돌아보고는 음흉하게 눈웃음 짓는다. 일행이 말리고 싶어도 단리유아의 말대로 필요한 사람인데다가 그의 소문을 상기하고는 속으로만 끙끙대고 있었다. 이때 옆에서 바라보던 기혼사가 도저히 맘에 들지 않아서, “잘해보기는 뭘 잘해봐? 그리고 이참에 함께 할 테니, 이후부터는 꼬박꼬박 선배로서 대우해라. 네놈이 팔십이라니 나보다는 한참 어리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야.” “무슨 소리? 내가 언제? 그리고 우리 같은 강호인이 배분으로 따지지 나이로 따지나? 흥, 당신도 하대를 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공대를 해? 꿈 깨시지.” 뻔뻔스럽게 말하며 코웃음 친다. 화가 솟구쳐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혼사를 붙잡아 앉혀 한동안 진정시킨 후에 단리유아가, “두 분께서는 그만 화해하십시오. 그렇지 않고 계속 싸우신다면, 두 분 다 저희와 같이 동행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내가 자네들과 같이 한지 얼마나 되었는데, 겨우 오늘 만난 인간 때문에 나를 내치겠다고? 흥, 저런 괴상망측하게 생긴 놈 때문에?” 기혼사가 투덜거리며 말하다가 팔망수괴를 비웃으며 말할 때, 단리유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팔망수괴가, “너도 고생깨나 했겠다. 저렇게 철모르는 아이 같은 인간하고 그동안 함께 있었다면. 쯔쯧.” “저 자식이 그래도....” 서로가 또다시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일행 모두가 한숨을 내쉬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단리유아도 이마를 찌푸리다가, 시간이 갈수록 갖가지 욕설을 내뱉으며 서로를 욕하는 모습에 두 사람을 돌아보며, “두 분 다 그만하십시오. 싸우고 싶으면 아예 따로 나가서 싸우시고 앞으로도 일행이 모인 자리에서는 싸우지 마십시오. 그리고 육선배님은 백지(白地)까지만 저희와 동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뭐, 겨우 거기까지만? 나도 계속 따라가고 싶은데 그곳에서 헤어지자고? 흥! 누구 맘대로. 이미 승낙했으면서 다시 되물릴 생각 마. 간만에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는 다시 제멋대로 떠든다. 거기에 더해서 기혼사가 이죽거리니 또다시 싸움이 붙어서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일행도 더 이상 말해보아야 헛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두 사람을 남겨 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의 손님용 침실로 향했다. 공손고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짜증난 목소리로, “자네, 무엇하러 저 말썽쟁이를 끼어주었나? 앞으로 우린 고생문이 훤히 열리게 되었네. 제기랄,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이게 도대체 뭔가?” “소사숙, 저도 이번의 결정은 잘못한 것 같습니다. 무공이야 우리보다 고수이겠지만,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는 말썽을 도맡아서 저지를 것 같은데 말입니다. 게다가 저 두 사람을 보니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을 텐데.” 선상조도 걱정스런 얼굴로 말한다. 두 사람의 푸념 섞인 한탄에 단리유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파문(東巴文)을 해독할 사람이 필요해서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이제 보니 저 사람의 고집도 보통이 아닌 것 같소. 우선 백지(白地)까지 갈 동안에는 어쩔 수 없으니 다들 참아봅시다. 그 이후로 어떻게 해서든 헤어지도록 해볼 테니. 정 말을 안 들으면 도망이라도 칠 수밖에.” 단리유아의 말에야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앞으로 저 말썽꾸러기 두 명에 대한 걱정에 한숨을 계속해서 내쉬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다 같이 중전(中甸) 근처 백지(白地)로 향했다. 먼저 파향(芭鄕)에서 나와서 옥룡설산(玉龍雪山)과 합파설산(哈巴雪山) 사이에 위치한 호도협(虎渡峽)으로 향했다. 본래 금사강(金沙江)이 두 산 사이의 협곡에 이르러 그 기세가 사나워져, 그 중간에 위치한 바위를 딛고 호랑이만이 건너뛸 수 있다 해서 붙여진 것이 이 호도협이었다. 달리 금사벽유(金沙劈流)라 불리기도 하는데, 중원의 삼협(三峽)과 비교해도 결코 그 기세와 장관이 못지않아서 천하제일기협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일행이 다가가 바라보니, 굉음을 울려 귀가 멍멍할 정도인데다 물줄기가 사나운 기세로 암초에 부딪쳐 물안개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다들 그 모습에 감탄하며 한마디씩 했는데, 곧이어 아니나 다를까 팔망수괴와 기혼사는 서로가 자신의 표현이 낫다며 싸우고 있었다. 싸우는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일행은 서남쪽 물줄기가 약해지는 장강제일만(長江第一灣)으로 향했다. 장강이 처음으로 방향을 바꾸는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과거 제갈량이 남정(南征)하여 강을 건넌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강을 건넌 후에 점점 북쪽으로 향할수록 일행도 점차 옷을 두껍게 입어야만 했다. 그동안에도 두 명의 싸움 때문에 일행 모두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의 경관은 더 없이 아름다웠지만,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두 사람 때문에 제대로 풍광(風光)을 돌아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아예 떨어져서 두 사람은 내버려두고 세 사람만 따로 행동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벽해궁(碧海宮)이나 갈단사(喝丹寺) 같은 문파와는 별다른 충돌이 없이 지나가서 예상보다는 일정이 빠른 편으로, 일행이 여강(麗江)에서 오백여 리 떨어진 중전(中甸)에 이른 것은 구월 이십이일이었고, 다시 동북 방향으로 이백수십여 리 떨어진 백지(白地)에 도착한 것은 구월 이십칠일에 이르러서였다. 횡단산맥(橫斷山脈)의 남동쪽 끝부분에 위치한 백지(白地)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해발 팔천여척의 높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온천수의 침전물에 의해 하얀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반원형의 웅덩이가 겹겹이 형성된 백수대(白水帶)의 한쪽에 위치해 있었다. 일행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리 크지 않은 오십여 호가 사는 작은 마을로서, 현재는 납서족(納西族)의 일족인 마사이(摩思夷)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이들은 다른 납서족들과는 달리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한 부족으로 집안의 가장은 가장 나이 많은 여인이 쥐고 있었고, 달리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때가 되면 남자를 들여와 아이를 낳을 뿐이었다. 태어난 아이도 그대로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어머니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단리유아가 찾아가려는 일월성(日月城)은 백지(白地)에서 십여 리 떨어진 횡단산맥(橫斷山脈)의 아래에 위치한 둘레가 채 오리가 못 되는 작은 산성이었다. 일단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날은 백지에 머무르다가 다음날부터 일월성과 동파교(東巴敎)에 대해 조사해보기로 했다. 마을에 들어서니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이 밥 짓는 연기만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일행이 걸음을 옮겨 마을 중앙의 공터에 이르러서야 한명의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짙은 청색과 흑색 계통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약간 검은 피부이지만 아직도 미태가 남아있는 삼십대의 여인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는데, 그 위에 커다란 물동이를 이고 있었다. 지나가는 여인을 붙잡고 팔망수괴(八忘瘦怪)가 나서서 하룻밤 묵을 곳을 청하니, 별로 의아한 기색도 없이 따로 빈집을 내주었다. 일행도 여러 지역을 돌면서 이러한 대접에는 익숙했는데,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이와 같은 촌락에서 외지인이 들어오는 것을 그다지 막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 마사이(摩思夷)의 전통으로 볼 때, 이처럼 외지인이 찾아오면 오히려 관계를 맺어 피를 섞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무래도 이처럼 외지와 떨어진 지역에서 계속해서 친족끼리 피를 섞다보면 기형이 많이 태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의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있는 집으로 향할 때, 팔망수괴가 여인을 향해서, “그런데 치왕모모(緇王母母)는 아직 건강한가? 몇 년 전 찾아올 때만 해도 팔팔했었는데 말이야.” “그분과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여인이 약간 흠칫하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이에 팔망수괴가 말꼬리를 흐리며,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 단지 과거에 한번 만나본 적이 있어서 물어본 것일 뿐이야.” “그러시군요. 그분이 돌아가신지 벌써 삼 년 정도가 되었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여인을 보고 팔망수괴가 다시, “정말 안됐군, 벌써 저 세상으로 가다니. 그전만 해도 건강했었는데, 그러면 지금은 그 딸인 치피궁(緇避宮)이 족장인 것인가?” “그렇지요. 오늘은 늦었으니 나중에 따로 만나보시면 될 것입니다.” 여인이 별 표정 없이 말하고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일행이 머물 이층의 토장방 형식으로 지어진 집으로 안내하고는 곧바로 되돌아간다. 돌아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팔망수괴(八忘瘦怪)가 굳어진 안색으로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설정 & 참조] [1] 파행삼괴(破行三怪) : 팔망수괴(八忘瘦怪) 육이지(陸二知), 불언치괴(不言癡怪) 이이사(易耳四), 만산온괴(萬山瘟怪) 시정풍(施情風)를 이르는 말. 강호사광이 등장하기 반갑자 이전에 주로 활동했는데, 사광과는 달리 다들 강호의 골칫덩이로 이름을 날렸음. 팔망수괴 육이지는 항상 제멋대로 행동했는데, 잘 말하다가도 딴 길로 빠져서 혼자 횡설수설해서 절로 상대의 화를 돋우던 사람. 특히 숫자의 계산에 약했던 인물로서 십 단위가 넘어가면 제대로 계산해내지 못함. 일례로 어떤 물건이라도 무조건 자신이 판단해서 그 값어치에 상관없이 동전이나 은 한 냥으로 값을 대신 처리했던 사람. 한 쌍의 단검으로 펼치는 과천포영쌍검법(過天捕影雙劍法)이 특기. 불언치괴 이이사 :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말더듬이에다가 꼽추. 누구에게나 떼를 쓰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울고불고 들어줄 때까지 떨어지지 않음. 주요무공은 웃음과 곡소리로 펼치는 만포절황소곡공(萬抛絶荒笑哭功). 만산온괴 시정풍 : 칠척의 거구로서 역시 자신 멋대로의 인물. 항상 찌푸린 표정으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다니던 사람. 그만 만났다하면 잘되던 일도 어그러져 강호(江湖)에서 가장 재수 없는 인간이라 불림. 한 쌍의 주먹으로 펼치는 만천패절신권(滿天覇絶神拳)이 특기. 공지 그동안 제 글을 읽으신 분들을 위해 출판을 기념해서 자그마한 이벤트를 열려고 합니다. 제 글을 읽고 감상이나 비평, 전검행에서 앞으로 더 바라는 것 등으로 해서 써서 보내주시고, 길이는 크게 따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열줄 이상은 써서 보내주세요. 이외에도 등장시키고 싶은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의 성격을 묘사해서 보내주셔도 됩니다. 하여간에 마음대로 쓰셔서 보내세요. 정히 글쓰기가 어려운 분들은 그림을 보내주셔도 됩니다. 단리유아의 모습이나 싸움장면 같은 것으로, 자신은 현재의 책표지가 맘에 안 드는데 이것으로 표지를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그리면 더욱 좋겠지요. 이것으로 다섯 분을 뽑고, 세 명은 그동안 제 글을 읽고 도움을 주신 분들 중에서 제 마음대로 선정할 생각입니다. 혹시라도 뽑히지 않더라도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고, 앞으로는 책이 나올 때마다 그런 분들을 우선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내실 주소는 zerocrush70@empal.com 입니다. 마감일은 다음주 수요일 17일 자정까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12월 21일을 기해서 4권 분량인 [소적교]까지 삭제할 생각입니다. 개전(開戰) 개전(開戰) 1 단리유아가 팔망수괴(八忘瘦怪)의 행동이 이상해서, “육선배, 뭐 이상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일단 모두들 안으로 들어가지. 그리고 내가 말하라고 할 때까지는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마라.” 고개를 갸웃하다가 전에 없이 신중한 기색으로 일행에게 주의를 준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납서족(納西族) 집들과 같이 일층의 중앙에 화로가 있고 그 곁에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중앙에는 침실이 하나 있었고, 나머지 두 개의 방에는 여러 가지 농사에 필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이에 반해 이층은 모두 침실이었고, 중앙에 화로와 탁자가 있었다. 집안 전체를 조사한 후에 이층의 탁자에 모두 모여 앉았다. 공손고가 이해가 되지 않은 표정으로, “육선배,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느꼈소? 다짜고짜 아무 말도 못하게 하고 곳곳을 뒤지다니?” “쉿!” 팔망수괴가 곧바로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에 찻잔의 물을 찍어서 탁자에 글을 쓴다. <이제부터 다들 평상시처럼 행동해. 단,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전음이나 글로 하고. 혹시라도 누군가 청음통(聽音筒)으로 엿듣고 있을지도 모르니. 우선 내가 술법을 펼칠 동안만 다들 주의하도록 해라.>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품속에서 주사(朱沙)를 꺼내어 물에 풀더니, 주위의 벽과 바닥에 알 수 없는 문양을 그려 넣는다. 갖가지 동물이나 꽃모양이었는데, 무슨 술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일행이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볼 때, 팔망수괴가 모든 일을 끝마치고는, “휴, 이제야 다 끝났군. 제기랄! 원래는 관이나 묘실에 그려 넣어서 물이나 벌레들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동파(東巴)로서 배운 것이 이럴 때 써 먹네 원 참.” “도대체 무슨 짓이냐? 난데없이 아무 말도 없이 그러다니 너 혹시 또 장난치는 것 아니냐?” 그동안 참고 있던 기혼사가 짜증이 나서 소리를 지른다. 팔망수괴가 흘겨보며, “이 늙은이가 사람을 뭘로 보고 그래? 남은 힘들어 죽겠구만. 아무려면 이런 일까지 그럴까봐? 정말 어쩔 수 없는 늙은이라니까? 그동안....“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팔망수괴를 향해서 선상조가 끼어들어, “그보다 선배님, 이제 어쩐 일인지 설명이나 해주십시오.” “응? 그래. 어떤 인간 때문에 자꾸 하려는 말이 빗나가기만 하네, 정말. 그 인간이....” 또다시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중얼거리는 팔망수괴를 향해서 선상조가 소리 지르며, “선배님!” “왜 소리 지르고 난리야! 어련히 알아서 말할까봐. 조그만 녀석이 아무 때나 끼어들고 있어. 정말 너 혼 좀 나야겠다. 요새....” 일행 모두가 그의 횡설수설에 질려 화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느끼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려서, “흠, 흠. 너희는 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이상한 것을 못 느꼈냐?” “글쎄요? 단지 사람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만, 지금은 저녁을 먹을 때니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일행이 생각해 보고 있을 때, 공손고가 먼저 대답한다. 이에 팔망수괴가 실눈을 뜨고 칠칠맞다는 듯이, “흥! 바보 같은 놈. 여태 강호(江湖)에서 그 목을 간직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용하다. 이놈아, 겨우 그것밖에는 생각을 못해? 이제 보니 그 개코 영감보다 훨씬 못난 놈이네. 그 인간은 눈치하나는 기막혔는데. 어떻게 넌....” “자세히 설명해보십시오. 도대체 어디가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단리유아가 중간에 끼어들어 말꼬리를 자르며 되묻는다. 이에 고개를 돌려 단리유아를 향해서, “너도 이상한 것을 못 느꼈냐?” “....그러고 보니 약간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저녁때라고 하더라도 거의 동시에 밥 짓은 연기가 나다니, 게다가 소나 개 같은 가축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하니, 팔망수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나마 너는 제대로 알고 있군. 밥 짓는 연기야 그렇다 해도 동물들의 소리까지 들리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게다가 아까 전의 그 계집도 이곳의 마사이(摩思夷)족이 아니야.” “뭐라구요?” 모두가 놀라서 되물으니,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마사이(摩思夷)족의 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 아마 다른 곳에서 온 마사이 일족이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몇 마디 말을 배웠을 것이지. 게다가 그 얼굴에 칠한 화장으로 볼 때나, 이미 서른이 넘었는데도 그런 몸이라니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 화장 솜씨는 별로였는데, 나라면....” 다시 샛길로 빠지는 팔망수괴를 향해 선상조가 나서서, “그 여자의 어디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전 잘 모르겠던데요.” “응? 너희는 그 여자처럼 나이 삼십이 되도록 그렇게 늘씬하게 보일 것 같냐? 이곳은 보통 나이 열네다섯이면 남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해서 스물이 되기 전에 아이를 서넛은 낳는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 여자의 젖가슴이 그렇게 팽팽하다니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냐? 설혹 애를 낳지 못하는 체질이라 해도 절대 그런 모습은 나올 수 없어. 음, 다시 생각해보니 그 여자 정말 예쁘게 생겼네. 다른 때라면....” 입맛을 다시며 횡설수설하는 그를 보고, 기혼사가 소리치며, “이 빌어먹을 놈아! 제대로 좀 얘기해 봐. 도대체 얘기하다가 딴소리하는 것이 벌써 몇 번이냐? 정말 울화통이 터져 죽겠네.” “이 인간이 왜 소리 지르고 난리야! 지금 말하는 중이잖아.” “저 개 자식이?” 기혼사가 일어나 달려들려는 것을 붙잡아 말릴 때, 혀를 내밀어 약을 올리다가 일행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소리쳐 제대로 말하라는 소리에 찔끔해서, “제기랄, 나도 모르게 그러는 것을 어쩌란 말이야? 원래부터가 그랬는데....” “육선배, 요점이 무엇입니까?” 중간에 끼어들어 단리유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으니,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음, 아까 전에 그 계집에게 내가 몇 마디 물은 것이 있었지? 치왕모모(緇王母母)는 이곳의 족장이었으니 그들도 알 수 있겠지만, 그 딸의 이름은 치피궁(緇避宮)이 아니야. 바로 그 치왕모모의 본명이지. 그러니 그 여인은 이곳의 마사이(摩思夷)가 아니고 가짜라는 것이지. 무공은 어떻게 숨겼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킬킬킬, 그러고 보면 나도 정말 똑똑해. 암, 내가 누군데....” 제대로 말하다가 다시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팔망수괴를 내버려 둔 채, 나머지 사람들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 반쯤 정신 나간 놈의 말대로라면, 누군가 마을 사람으로 가장한 채 잠복하고 있다는 것인가?” 기혼사의 말에 선상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대체 어떤 집단일까요? 설마 우리를 노리고?” “우리가 목표라면 바로 며칠 전에 준비했다는 것인데, 우리의 목적지가 이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제대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정말 이상한 일이네?” 공손고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얼굴 가득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중얼거린다. 단리유아가 두 사람을 보면서, “꼭 그렇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일정을 자세히는 모른다 해도 대충 어느 길로 향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남만(南蠻)에서 서장(西藏)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것은 소문이 나서 웬만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또 려강(麗江)에서 동파교(東巴敎)에 대해 수소문한 적이 있으니,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긴 해도 여기까지 와서 우리를 노릴 이유가 있을까? 일행이 서로 상의하고 있을 때, 자신 혼자 떠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팔망수괴가 끼어들어, “이곳은 사천(四川)과 가까운 곳이야. 물론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서도 이천여 리 정도 떨어져있지만 말이야. 너희들, 나한테 말 안한 것이 있지? 이제 말해봐라. 나도 너희들과 함께 공격받게 되었으니. 도대체 왜 너희를 노리는지.”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남만(南蠻)에서 소적교(素赤橋)에게 공격받은 사실을 말하고, “저희도 무슨 일인지 잘 모릅니다. 그때 한번 공격받기는 했지만 확실히 우리를 노리고 그랬는지, 아니면 단지 추적하는 시간을 끌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누가 청부했는지 모르니, 어떤 세력에서 저희를 노리는 것인지는 아예 모르지요.” 이에 팔망수괴가 얼굴 가득 불만인 표정으로, 숨도 돌리지 않고 연이어, “제기랄, 심심해서 따라나섰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상대가 노리는 이유도 그 정체도 모르다니, 괜히 나까지 공격받게 생겼잖아? 도대체 너희를 노리는 이유가 뭐지? 정말 아무 이유도 모른다는 것은 아니겠지? 너희들 무슨 보물이라도 가지고 있냐? 아니면, 들어서는 안 될 다른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라도 있냐?” “글쎄요. 그렇다고 이 먼 곳까지 우리를 잡기위해서 찾아올 필요가 있을까요?” 공손고가 되물으니,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이 바보야, 너는 생각이 있냐 없냐? 전에 나에게 중원(中原)과 세외(世外)의 정세를 말했었는데, 아무런 생각이 없었단 말이냐? 중원이야 그렇다 쳐도 세외까지 동시에 준동하는 것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 생각하느냐? 게다가 한곳도 빠짐없이 세외 각 지역의 강파들이? 누군가 중원과 세외에서 동시에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그렇지. 분명히 사상 전례가 없는 집단일 거야. 이정도로 크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도대체 누가 그럴 수 있지? 중원뿐이라면 또 모르지만, 세외까지 그렇다니 정말 알 수가 없네. 내가 강호에서....” 혼잣말이 되어 다시 늘어지는 팔망수괴를 향해서 선상조가 놀란 목소리로, “세외 전 지역이 한 통속이라는 말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걸? 몇 곳은 자발적으로 참여했겠지만, 다른 곳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겠지. 다들 단순히 세력만으로 어쩔 수 있는 문파들이 아니니까. 무언가 음모를 꾸몄거나 미끼를 던졌겠지.” 일행 모두가 각자의 생각을 얘기하며 떠들었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일단 이곳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칠지, 아니면 이곳에서 상대할지에 대해서 의논했다. 이곳을 나가자는 의견과 이미 적들의 시야에 노출되어 있으니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다가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백수대(白水帶) 쪽으로 물러나서 싸우기로 결정하고, 그동안에 모두가 결전을 준비하는데 만전을 기하기로 했다. 한편, 일행이 이렇게 의논하고 있을 때, 일행을 안내했던 여인은 마을을 되돌아 나와서 일월성(日月城)으로 신법을 펼쳐 달려가고 있었다. 일월성의 모습은 성곽은 다 허물어지고 단지 중앙에 사당인지 신전인지 모를 십여 장 크기의 석조 건물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석전 주위로는 모두가 흑의에 복면을 한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여인이 십여 장 가까이 다가오도록 아무런 동요도 없다가, 그 중의 한 명이 나서서 껄끄러운 음성으로, “그 자리에 멈추시오. 먼저 영패를 보이시오.” “이것 봐요, 철목대주(鐵木隊主). 나를 몇 번이나 봤잖아요. 도대체 만날 때마다 이럴 필요가 있나요?” 짜증난 표정으로 여인이 말할 때, 전혀 동요 없이, “영패를 보이지 않으면 바로 공격하겠소.” “흥! 아무리 당신들이 일을 주관한다고 해도, 나는 당신들의 수하가 아니에요. 지금은 참지만....” 상대를 향해서 소리치다가 입술을 깨물며, 품속에서 철로 된 팔각의 영패를 꺼내들어 던진다. 손바닥 반절 정도의 영패의 전면에는 운남지단(雲南支壇) 제 삼로(三路)라 적혀있고, 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둘러싼 채로 각기 해와 달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영패를 보고, 그 주인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운남비로(雲南秘路)” “출해등천(出海騰天)” 암호가 맞자 영패를 건네고 옆으로 물러서며, “들어가시오, 제 삼로주. 철목군주(鐵木君主)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흥!” 코웃음을 치고 난 후에 여인이 흑의인들 사이를 통과하여 석전(石殿)으로 들어섰다. 석전 내에는 좌우로 각기 다섯 명의 백의 경장을 하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본래는 석단이 위치해 있었던 전면에는 검은 색의 두터운 휘장이 쳐져 그 뒤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여인이 석단 앞 삼 장까지 다가선 후에 무릎을 꿇고, “삼로주 벽해비연(碧海飛燕)이 철목군주(鐵木君主)께 인사드립니다.” “일어나라, 삼로주.” 목소리에 실린 한기가 장내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차가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온다. 흠칫하던 벽해비연이 복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그들이 도착했나?” “그렇습니다.” “뭔가 이상한 모습은 없던가?” “파향(芭鄕)에서 온 동파(東巴)가 몇 마디 물었지만, 그 외에는 별달리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벽해비연(碧海飛燕)의 말이 끝나고 나서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모든 준비는 다 되었나?” “예, 적전파(赤典派)와 갈단사(喝丹寺)에서 각기 삼십 명의 고수들이 왔고, 저희 벽해궁(碧海宮)에서도 그 정도의 수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직도 그렇게 문파의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나? 죽고 싶나?” “아, 아닙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군주님, 한번만 봐 주십시오.” 두려움에 질린 기색으로 벽해비연이 곧바로 무릎을 꿇으며 애원한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휘장 너머에서 다시 냉랭한 어조로, “이번만은 용서해 주겠다. 다음번에는 네가 벽해궁주(碧海宮主)의 제자라 할지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벽해비연이 겉으로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기쁜 표정으로 말하지만, 속으로는, ‘이년이 다섯 명의 군주 가운데 가장 냉정하고 악독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로군. 아무리 단주(壇主)와 동격이라도 겨우 그런 일로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다니, 어디 두고 보자.’ 이를 갈고 있을 때,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귓전을 울리며, “이번의 거사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리유아를 죽이는 것이다. 다른 자들은 죽여도 좋고, 설혹 살아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만은 죽여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군주. 그런데, 지금 공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벽해비연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아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넌 그만 물러나서 공격할 준비나 철저히 해라. 자시(子時)를 기해 공격을 시작하고, 그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좋다.” 고개를 숙이며 벽해비연이 복명하며 물러난다. 벽해비연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오른쪽 맨 앞에 서 있던 여인이, “군주(君主)님, 단리유아를 죽이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고수라지만 그리 대세에 영향을 줄 만한 사람은 아닌데요.” “그자는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많이 알고 있고, 그동안 남만(南蠻)과 운남(雲南)을 휘저으며 우리의 일을 방해한 바가 적지 않지. 세외(世外)의 다른 곳들은 대체로 포섭이 되거나 동맹을 맺었는데, 이 일대는 겨우 몇 개의 세력만이 복속되었을 뿐이야. 그것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보잘 것 없는 문파들뿐이지.” 이번에는 좌측의 제일 앞에 서 있던 여인이, “군주님. 그래도 꼭 이렇게 저희가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이 일은 원래 서장지단(西藏支壇)이 소뢰음사(少雷音寺)와 같이 맡기로 했잖습니까?” “흥! 나도 알아. 그렇지만 과거에 그 인간이 본문에 침입해서 쑥대밭을 만들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먼저 손을 쓰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느냐? 그동안 우리가 절치부심한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신교(神敎)에 투신한 것도 다 그자 때문인데.” 철목군주(鐵木君主)의 말에 질문했던 여인이 속으로, ‘소곡주, 사실은 그가 그대를 뿌리치고 떠나서 그런 것이 아닌가요? 그 당시 서로 오해로 싸우기는 했지만 그리 큰 불상사는 없었는데, 아무리 그대가 매달려도 그 무정한 인간이 그대로 떠나버려서 어린 가슴에 한(恨)이 맺힌 것이겠지요. 비록 천지신교(天地神敎)가 본문의 무공을 되찾아주고 그대가 태상교주의 제자가 되었다지만, 우리는 운영비곡(雲影秘谷)의 제자들이지 천지신교의 사람은 아니랍니다. 그대는 점점 그 사실을 잊고 마공(魔功)에 깊이 빠지게 되었으니 앞날이 걱정이군요. 휴우.’ 반대쪽의 여인이 다시 철목군주를 향해서, “그렇지만, 군주. 단리유아나 그 일행의 무공으로 볼 때, 저들 삼파의 고수만으로는 쉽지 않을 텐데요.” “호호호, 운남지단(雲南支壇)의 너구리가 수를 써서 휘하의 고수들은 보내지도 않고 포섭한 삼파의 수하들만 보냈는데, 나도 그럴 줄 알고 본교의 포인전(捕仁殿)에서 사상시마(四象屍魔)를 불러왔지.” 주위의 여인들이 모두 놀라서, “사, 사상시마라면? 그 괴물들....” “호호호, 일갑자 전의 마두들이니 단리유아 그놈도 별 수 없을 걸? 그들은 포인전(捕仁殿)에서도 열손가락에 들고, 머지않아 열성전(列聖殿)에 들 후보로 꼽힐 정도이니. 호호호, 그놈이 죽는 꼴을 직접보고 싶군.” 사상시마(四象屍魔)는 본래가 사상문(四象門)이라는 중소문파의 제자들이었는데, 나중에 그 문주를 죽이고 비급을 탈취해서 무공을 연성한 마인들이었다. 그 당시에도 각자 절정고수였지만, 특히 무서운 것은 네 명이 펼치는 사상합벽진(四象合壁陣)으로서 상대할 자가 드물었다. ****** 샤르나크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 제가 좋아하는 여자상이 평범하고 조용한 스타일입니다. 그러다보니 소설속에서도 그런 면이 보이나 봅니다. 아마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1 부에서는 크게 여자와 엮일 일이 없습니다. 2 부를 위해서 넣은 것이 대부분이고, 직접 연관된 것은 과거 1차 출도시에 연관이 된 여자들 몇이 나올 뿐입니다. 그나마 좋은 관계는 별로 없지요. 단리유아에게는 괴롭겠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이런 힘든 여정이 이어지는 중에 여자가 동행할 수 있을까요? 하루 이틀이라면 또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 질 것입니다. 앞으로 볼 때는 이전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보십시요. 단리유아의 처지도 잘 기억하시구요. 본래는 약간 더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약간 앞당겨 이야기를 빨리 진행할 생각입니다. 개전(開戰) 개전(開戰) 2 한편, 일행은 그동안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거나 한쪽에서 조식을 취하기도 하며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기혼사가 상대의 독공에 대비해 미리 해독제를 나누어주며 단리유아를 향해, “자네가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로 주변을 한번 살펴보게. 만일 포위된 형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물러나서 우리가 유리한 곳에서 싸우는 것이 좋지 않겠나? 또 가장 약한 곳을 찾으면 나중에라도 그쪽을 뚫고 빠져나가면 될 테니.” “맞네. 이곳은 이미 그들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라 우리가 불리하네. 정말로 우리를 공격할 생각이 맞는다면 갖가지 암기와 독뿐만 아니라 수십의 고수가 잠복하고 있을 걸세.” 공손고도 기혼사의 말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현재 일행이 있는 마을은, 횡단산맥(橫斷山脈)이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뻗어있는 가운데, 동남쪽으로 일월성(日月城)이 위치해 있었고 서북쪽으로 백수대(白水帶)가 위치해 있었다. 또 일행이 머물고 있는 집의 위치는 마을의 중앙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비슷해서 그들의 말에 따라 천리지청술을 펼쳐 주변을 살피던 단리유아가, 잠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 주위 백여 장 을 살펴보니, 다른 쪽으로는 각기 삼십여 명씩 있고 오직 동쪽에만 십여 명이 있습니다. 호흡이 다들 일정한 것으로 보아서 다들 무인인 것 같습니다. 그 외에 평범한 마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공손고가 놀라서, “그렇다면 백 명이 넘는다는 소리잖은가?” “아니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겨우 우리 다섯 명을 노리고 이렇게 많은 수가 모였지?” 기혼사도 놀라 되묻고, 다들 걱정스런 표정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행의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수였던 것이다. 팔망수괴가 놀란 일행을 향해서, “너희들 땜에 나까지 넘어가게 생겼잖아? 빌어먹을! 아, 나는 왜 이리 재수가 없을까? 제기랄, 이놈의 팔자는....” 한탄 맺힌 팔망수괴의 투정을 다들 무시하고 한쪽으로 흘릴 때, 공손고가 고개를 갸웃하며, “마을 사람들의 기척이 없다면, 이 빌어먹을 놈들이 우리 때문에 그들까지 죽여 버린 것이 아닐까?” “설마하니 그럴려구요? 이 정도의 마을이면 이백 명이 넘을 것 같은데요.” 선상조가 놀라서 말할 때, 기혼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말로 다들 죽이지는 않았겠지. 다른 곳에 가두어 놓았을 거야. 아무려면 무공도 모르는 사람들을 다 죽였을라고?” “나도 그래. 그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들을 다 죽였을 리는 없을 테지. 그랬다간....” 옆에 있던 팔망수괴가 참견하여 떠드는 것을 무시하고, 단리유아가 일행을 돌아보며, “그보다, 이렇게 된 상황이니 우리도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들 어느 쪽으로 뚫고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좀 전의 자네 얘기로는 동쪽이 가장 적다는 소린데, 그쪽으로 뚫고 나갈까?” 공손고가 먼저 의견을 내놓는다. 이에 선상조가 잠깐 생각하다가, “아니, 제 생각은 다릅니다. 다른 곳과 달리 동쪽만 사람이 적은 것이 이상합니다.” “저도 역시 선사질과 생각이 같습니다. 마치 그쪽으로 우리를 유인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일부러 그런 것 같습니다. 만일 저들이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으니, 될 수 있는 대로 각개격파를 하는 방식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우리에게 불리하니, 일단 서쪽이나 북쪽을 뚫고 나가서 횡단산맥(橫斷山脈)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할지 다시 생각하고, 우선은 어떻게 해서든 저들이 모이게 만들어서는 안 될 테니 말입니다.” 단리유아가 선상조의 말에 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이에 기혼사 역시 비슷한 생각이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면 지금 바로 공격하는 것이 어떨까?” “그래, 지금이 술시(戌時:17-21시) 말이 가까워지니 적들도 예상치 못할 거야. 아마 자정이나 새벽에 습격할 생각이었을 테니까. 으흠, 이게 다 내가....” 다들 잘난 척하며 혼자 떠드는 팔망수괴를 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내버려둔 채 다른 사람들끼리만 의논을 계속했다. 잠시 후에 단리유아가 결론을 내리듯이, “그러면 일단 서쪽을 향해서 포위망을 뚫고 나갑시다. 죽이는 데에는 신경 쓰지 말고, 우선적으로 이곳을 벗어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단리유아의 결정이 이어지자마자, 곧바로 공손고가 걱정스런 모습으로, “그러면 한명씩 차례로 나가서 주변에서 감시하는 놈들을 죽이고 갈까? 아니면 그냥 전력으로 서쪽을 뚫고 나갈까?” “음, 이 집의 위치가 애매합니다. 거의 중앙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 사방에서 감시하기는 용이한 곳이고, 반대로 상대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은신술(隱身術)을 배웠으면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서 한명씩 빠져나가는 것은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차라리 전속력으로 빠져나가 적이 공격하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행이 동의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무기를 꺼내들고, 이층의 난간 쪽으로 난 문으로 향했다. 일행의 뒤쪽에서 팔망수괴가 계속 투덜거리며, “젠장, 괜히 따라와서 이게 무슨 꼴이람. 간만에 재미있을 줄 알았더니....” “시끄러워, 이 자식아! 지금 목숨 줄이 달린 순간에도 계속 그럴래? 빌어먹을 놈 같으니. 넌 아예 이곳에 있어라, 그렇게 불만스러우면. 그러면 그놈들이 널 오냐 하고 받아줄지도 모르니.” “이 늙은이가....” 서로 노려보며 싸우는 기혼사와 팔망수괴를 향해서 단리유아가, “두 분 다 조용히 하시고 준비하십시오. 제가 앞장서 달릴 테니 기선배가 가장 뒤에 서시고, 육선배가 중앙에, 그리 선사질과 공손선배가 그 좌우를 맡아주시오.” 이에 두 사람도 곧 싸움을 멈추고 조용히 숨을 죽인다. 단리유아가 슬며시 문을 열어보니, 마을의 대부분은 불이 꺼진 채 단지 몇 곳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십여 장 정도 되는 마을 중앙의 공터에도 누군가 모닥불을 피워놓아서 일행이 숨으려 해도 숨기가 마땅치 않아보였는데, 귀를 기울이니 양쪽 옆에 위치한 집의 지붕에서도 누군가 은잠(隱潛)하여 숨소리를 죽인 채 일행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에는 밝은 달이 구름 속에 한쪽 발을 살짝 숨긴 채 달빛을 흘리고 있었고, 한밤의 서늘한 미풍이 이따금 불어와 옷깃을 흔들었다. 보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달빛과 별빛만으로도 그렇게 어두워보이지는 않았고, 마치 이후의 싸움은 모른다는 듯이 평온하고 고요한 모습이었다. 누가 자신들을 노리는지는 모르지만, 단리유아는 결코 그들 뜻대로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직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데다가 다른 두 사람의 빚도 마음에 남아있으니. 설혹 피로 목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심을 굳히고 오른 손에 든 적운도(赤雲刀)를 다시 한 번 세차게 움켜쥐고는 먼저 이층에서 뛰어내려 마을의 중앙으로 달려나갔다. 그 뒤를 이어 일행이 곧바로 쫓아나갔다. 전방의 모닥불을 장력으로 쳐올린 다음, 다시 사방의 집들을 향해서 날려 보내고는 곧바로 서쪽으로 향했다. “펑! 퍼퍼퍽. 투투툭.” 모닥불이 사방의 집 위로 떨어져 내리고 주위에 숨어 공격을 기다리던 적들이 알아차릴 때, 일행은 벌써 서쪽에 위치한 집들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삐이익. 삑.” 요란한 호각성이 마을의 곳곳에서 터져 나오며, 일행이 도망치고 있음을 사방에 알리고 있었다. 일행이 뛰어든 골목길은 폭이 일 장 정도 되는 길로서 삼십 장 정도를 달려야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오륙 장을 지나는 순간부터 양쪽의 건물위에서 암기(暗器)가 날려 오거나 숨어있던 갈단사(喝丹寺)의 승려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휘이익, 쉬쉭.” “차차창, 차창” 일행도 암기를 쳐내면서 단리유아를 뒤쫓고 있었는데, 너무 많아서 완전히 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공을 거의 덮다시피 하며 쏟아져 내리는 암기에, 다들 한두 개 정도는 몸에 꽂힌 채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선두에서 암기를 쳐내며 달리던 단리유아가 골목의 중간을 지나고 있을 때, 양쪽의 집들 사이 골목에서 계도(戒刀)를 든 두 명의 승려가 뛰쳐나오며 달려들었다. “갈단사(喝丹寺)?” 바로 뒤에서 달리던 팔망수괴가 놀라서 소리치지만,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서 먼저 왼쪽의 중을 향해, “크키흐아악.” 도(刀)를 휘둘러 공격함과 동시에 상대가 도를 막고 도성(刀聲)에 멈칫한 순간, 왼발로 상대의 옆구리를 가격하고, 이어서 오른 쪽으로 기우는 상대의 몸속으로 뛰어들며 왼손으로는 가슴을 가격하고 오른 손의 적운도로는 상대의 팔을 자른 후에,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중을 향해서 날려 보냈다. “차창! 퍽. 쾅! 피슛” 팔이 떨어져나간 채 가슴에도 장력을 격중당해서 피분수를 뿜으며 나뒹구는 중을 내버려두고, 오른쪽의 중이 순식간의 벌어진 일에 당황하여 날아오던 동료의 팔을 쳐내고 있을 때, 도(刀)를 휘둘러 상대의 안면을 가르고는 곧바로 다시 달려 나갔다. 이 일이 한 호흡도 되지 않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뒤따르던 일행이 보기에는 단리유아가 그저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두 중이 그대로 쓰러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차차창! 퍼퍼퍽!” 암기를 쳐내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없애며 달려서 마을의 끝에 이르기까지 단리유아가 죽인 사람만 일곱에 상처를 입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든 이가 십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일행은 암기가 오히려 문제였지, 습격하는 갈단사(喝丹寺)의 승려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을의 끝에 이르자 나머지 십여 명의 갈단사 승려들이 모여서 일행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멈춰라” 중앙의 금빛가사를 입고 자신의 키보다 큰 칠척의 석장을 든 중년승이 달려오는 일행을 향해서 한어로 소리쳤다. 이번에 참가한 갈단사(喝丹寺)를 이끄는 사람으로, 장로에 해당하는 직위에 있던 수촌존자(修寸尊子)라는 인물이었다. 상대의 모습과 소리치는 소리에도 계속 달리며, 뒤따르는 일행을 향해서, “내가 공격할 테니 모두 귀를 막고, 그대로 이곳을 벗어나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리의 중앙으로 뛰어들며, 도강(刀剛)을 둘러싸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를 펼쳐, “크키흐아악....” 붉은 색의 도광(刀光)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나 장내를 뒤덮고, 끔찍한 도성(刀聲)이 사람들의 청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단리유아도 일단 이들이 최후의 저지선이라는 것을 알자 전력을 다해 지옥파라구천절(地獄波羅九天絶) 펼친 것이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도성에 뒤따르던 일행도 충격을 받아 멈칫하고 있었는데, 정면에서 기다리던 갈단사(喝丹寺)의 승려들은 그 소리에 어느 정도의 타격을 받았겠는가? 모두가 충격으로 내상을 입고 멈칫한 채 대항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수촌존자(修寸尊子)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쳐, “모두 정신차렷! 고막을 막고 대항해라.”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중들이 대항을 하려하지만, 이미 눈앞에까지 다가온 도강(刀剛)에는 단지 암울한 눈동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구름 속의 악마가 먹이를 씹어 삼키듯이, 붉은 도영(刀影)만이 장내를 뒤덮은 채 듣기에도 섬뜩한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차차창. 파파팍.” “퍼퍼퍽. 투투툭.” 무기와 몸뚱아리를 가리지 않고 산산조각 내며 떨어지는 피와 살점에 일행마저도 놀란 얼굴로 지나가다 멈추어 바라보고 있을 때, 죽어나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다가 애통하고 분노에 찬 얼굴로 수촌존자(修寸尊子)가, “이, 이 악마 같은 놈. 어떻게 사람을 죽여도 이렇게 죽일 수 있느냐! 죽어랏, 이 혈귀(血鬼)야!” 자신도 모르게 서장어(西藏語)로 소리치며 단리유아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본래는 포달랍궁(布達拉宮)에 속한 사찰이었던 갈단사는 소뢰음사(少雷音寺)의 공격에 포달랍궁이 패배하여 굴복한 후에, 천지신교(天地神敎)의 운남지단에 포섭되게 되었었다. 포달랍궁의 달라이대라마를 비롯한 몇몇이 탈출했다지만, 이미 서장(西藏)은 천지신교의 도움을 받은 소뢰음사가 제패한 후라,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본사를 따라서 천지신교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갈단파는 이미 다른 벽해궁(碧海宮)이나 적전파(赤典派)와는 달리 거의 예속화되다시피 해서, 반대하던 승려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치고 새롭게 주지와 장로들이 선정된 상태였다. 이 수촌존자(修寸尊子)는 그때 살아남은 장로중의 하나로서 갈단사(喝丹寺)의 최고수라 할 수 있었는데, 비록 운남지단(雲南支壇)에 굴복했지만 중원의 고수들을 잡기위해서 제자들을 희생할 생각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나중에 달라이대라마가 되돌아온다면 다시 반기를 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서 이렇게 대부분이 죽어나가니, 분노하여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단리유아가 이미 장내에 있던 열 명의 제자 중에서 일곱을 죽이고 있을 때에야, 수촌존자(修寸尊子)가 석장을 휘둘러 공격해오고 있었다. 강기(剛氣)에 감싸인 상대의 석장과 적운도가 연이어 부딪치자, 서로의 무기에 불꽃이 튕기며 사방으로 강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콰콰쾅! 파파팍!” 두 사람이 순식간에 수십 합을 부딪친 후에 서로 물러섰다. 단리유아는 피로 전신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리 큰 상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서 수촌존자(修寸尊子)의 온몸은 곳곳에 거미줄 같은 도흔이 새겨진 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연환도의 일종인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의 특성에 그 초식의 변화를 따라잡기에도 벅찼던 것이다. 볼 때도 그러했지만 직접 맞부딪치니 그 도법의 끔찍함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깨닫게 된 수촌존자가 두려움과 놀람이 뒤범벅인 표정으로, “으으, 아, 악마의 도법. 이 저주받을....” 상대가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단리유아는 다시 상대를 공격해나갔다. 호각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이미 사방을 포위했던 고수들이 장내로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일초에 상대를 없앨 결심을 하고, “크키흐아악!” “파, 파팟.” 제 사절 지옥구전겁(地獄九電劫)을 펼쳐 수촌존자를 덮쳐갔다. 붉은 도영(刀影)이 달빛아래 뭉실 거리며 피어올라 수촌존자의 정면으로 달려들더니, 이윽고 그 가운데에서 아홉 가닥의 섬전 같은 도강(刀剛)이 내리쳐, “버번쩍. 꽈르릉 꽝!” 미처 수촌존자가 석장을 휘둘러 완전한 초식을 펼쳐 대항하기도 전에, 갑자기 내리꽂히는 아홉 개의 혈섬(血閃)에 강기의 벽이 꿰뚫리며 그대로 직격해왔다. “콰콰쾅! 꽈르릉!” “아아악!” “푸드드득. 투투툭.” 비명이 잠깐 울렸지만 연이어 내리치는 도강(刀剛)에 의한 굉음에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수촌존자를 산산조각내고도 도강이 연이어 내리쳐, 그 일대에 일 장 여에 달하는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세 명의 살아남았던 갈단사(喝丹寺)의 제자들도 도강의 여파에 휩쓸려 조각나 흩어졌다. 흙먼지와 살점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을 때, “뭣들하고 계십니까? 어서 갑시다.” 단리유아가 일행을 향해 소리치며 뛰쳐나간다. 너무 끔찍한 장내의 모습에 놀랐던 일행도 그제야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단리유아를 뒤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삐이익. 삑” 일행이 이십여 장 밖을 벗어났을 때에야, 호각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고수들이 장내로 모여들었다. 다가온 그들이 장내에 와서 본 광경은 아무리 많은 싸움을 많이 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모습들이었다. 피는 줄줄이 흘러 과연 이게 피인지 시냇물인지 의아할 정도였고, 제대로 된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조각난 살점이 곳곳에 널려있어서 발에 밟힐 때마다 아침에 만났던 그들이 이렇게 된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늦었네요. 다음 편은 월요일 저녁에 올리겠습니다. 기다리지 마세요. 개전(開戰) 개전(開戰) 3 이렇게 삼파의 고수들이 장내의 처참함에 한동안 넋이 빠져있을 때, 벽해비연(碧海飛燕)이 지붕을 타고 넘어 장내에 도착했다. 피범벅이 된 장내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다가, 곧 크게 소리쳐, “뭣들 하느냐! 어서 뒤쫓지 않고? 빨리 전방에서 대기 중인 운남지단(雲南支壇)의 고수들에게도 화폭(火爆)으로 신호를 보내라! 일단 길을 막아서 잠시라도 놈들을 지체하게 만들어야 할 테니.“ “알겠소. 내가 먼저 이들을 이끌고 뒤쫓겠소. 당신은 군주(君主)께 보고하고 곧 뒤따라오시오.” 적전파(赤典派)의 고수들을 이끌고 온 혈환적사(血換赤師)가 먼저 정신을 차려 대답하고는, 곧바로 삼파의 나머지 고수들을 재촉해 일행을 추적해나갔다. 그와 동시에 신호탄이 허공으로 솟구쳐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쾅!” 앞서 달리던 일행도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먼저 하늘을 힐끗 쳐다본 공손고가 욕설과 함께, “제기랄! 이거 완전히 포위된 것 같은데? 도대체 이 많은 고수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우리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공격받다니. 도대체 그 이유도 모르니 속이 터져 나갈 것 같네, 정말. 어휴, 젠장할!” “그러게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운남(雲南) 지역에서 세력을 동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백여 명이 한꺼번에 이동했는데도 그 움직임이 들어나지 않다니....” 선상조도 이해할 수 없어서 달려 나가며 소리친다. 이때 기혼사가 고개를 돌려 돌아보다가 뒤쫓는 삼파의 고수들을 보고, “빌어먹을! 완전히 새까맣게 몰려드는군. 족히 백명은 넘을 것 같아.” 일행도 그 말에 놀라 힐끗 뒤돌아보고는, 너도 나도 일의 심각함을 느끼게 되었다. 저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웬만한 문파를 쉽게 없애버릴 정도였는데, 단 다섯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고수들이 움직이는데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는 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일행이 서로 의문에 차서 욕설과 함께 소리칠 때, 팔망수괴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다급한 기색으로, “이봐, 우선 횡단산맥(橫斷山脈)으로 들어가자. 저기 뒤쫓는 놈들을 보니 갈단사(喝丹寺)와 벽해궁(碧海宮), 적전파(赤典派)까지 있어. 아까의 신호를 보아서는 서쪽도 막혔다고 보아야하니 말이야.” 현재 일행의 동쪽으로는 삼파의 고수들과 철목군주(鐵木君主) 휘하의 고수들이 있었고, 서쪽에는 운남지단(雲南支壇) 휘하의 고수들이 백여 명이 포진한 상태였다. 남쪽으로는 벽해궁(碧海宮)과 갈단사(喝丹寺)가 위치한 지역으로 그 일대는 그들의 안방과 같으니 그쪽으로도 갈 수 없었다. 지형적으로는 북서쪽에서 남동으로 횡단산맥(橫斷山脈)의 고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일행이 있는 곳은 초원과 자그마한 숲들이 이어진 고원지대로 딱히 몸을 숨길 곳도 없었다. “모두 북쪽으로 갑시다. 이리되면 산속으로 숨어드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단리유아 역시 생각이 비슷했던 터라 곧바로 말과 함께 방향을 바꾸어, 횡단산맥(橫斷山脈)의 지류의 하나인 백인설산(白刃雪山)을 바라보고 달려갔다. 일행을 뒤쫓던 적전파(赤典派)의 혈환적사(血換赤師)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쳐, “빨리 다시 신호를 보내라. 어떻게 해서든지 길을 막아서 산속으로 들어가진 못하게 하라고. 절대 저놈들을 놓치면 안 돼!“ 혈환적사(血換赤師)가 재촉하는데도 그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처음 뒤쫓는 천지신교 휘하의 고수들과 일행의 거리는 삼사십 장 정도였는데, 갈수록 거리차가 늘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류이하의 고수들은 뒤쳐져지고, 나머지 오십여 명의 고수들만 남아 일행을 뒤쫓고 있었다. 대략 반 시진 정도 시간이 흘러 삼십여 리 정도 달렸을 때에도, 일행과 삼파의 고수들과의 거리는 반리 정도 이상으로는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성월(星月)의 빛에 의지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한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을 때, 드디어 일행은 백인설산(白刃雪山)의 아래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행이 푸르른 들판을 통과해 산 아래 가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선상조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침을 내뱉으며, “퉤. 제기랄! 벌써 이곳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군. 도대체 이놈들은 또 누구야?” 이들은 운남지단(雲南支壇)의 흑영전(黑影殿)에 속하는 고수로서, 일행이 도망칠 곳을 예상하여 미리 산 아래에 포진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다들 전신을 가린 흑의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각기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 중앙에는 얼기설기 곰보투성이 얼굴을 한, 육십대의 대머리 꼽추노인이 달려오는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 흑영전의 고수들을 이끄는 자로 강호에서는 사망두타(死亡頭駝)로 알려진 반갑자 전의 사파고수였다. 달려오는 일행이 시야에 들어와 삼십여 장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 사망두타가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모두 멈춰라! 단리 미치광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항복할 자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라!” “저 개자식이!” “무슨 헛소리냐?” 뒤쪽의 선상조와 공손고가 소리치고 다른 일행들도 모두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일행 모두 여태 상처도 돌보지 못한 채 줄곧 쫓기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분하는 일행을 보며 단리유아가 냉정한 목소리로, “모두 진정하십시오. 아까 전의 신호로 보아서는 다른 곳에서도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빨리 이들을 쓰러뜨리고 눈앞의 숲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모두 이곳만 통과하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을 테니 최선을 다하십시오.” 말과 함께 먼저 앞으로 달려가 이십여 장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모습을 보고 기다리던 흑영전(黑影殿)의 인물들 중에서 십여 명이, 한자 길이의 분화폭류통(焚化爆流筒)을 꺼내어 단리유아에게 내던졌다. 강호오대암기 중의 하나로 사용이 금지된 암기였는데, 불을 붙여 던지면 폭발과 함께 침통속의 콩알만한 철환(鐵丸)이 사방으로 터지는 것이었다. 상대가 분화폭류통을 꺼낼 때부터 심상치 않은 암기임을 직감한 단리유아가, 뒤따르던 일행을 향해서, “모두 주의하시오. 내가 저것을 없앨 동안 뒤쪽으로 흩어질 수도 있으니, 우선 뒤쪽에서 잠시 기다리시오.” 말과 함께 내력을 전신의 내력을 끌어 모아 지옥파라구천절의 제 오절 지옥천폭류(地獄千瀑流)를 펼쳤다. 지옥천폭류는 일순간에 바늘 같은 도강(刀剛)을 허공에 수놓아서 폭포물이 쏟아지듯이 상대를 내리 덮쳐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크키흐아악....” 적운도(赤雲刀)가 움직임에 따라 도성이 시끄럽게 울리며, 붉은 색의 도강(刀剛)이 방원 삼 장 이내의 허공을 촘촘히 매운 채 곧바로 달려오는 분화폭류통(焚化爆流筒)에 부딪쳐갔다. 서로 부딪치는 순간 도강이 폭발하고 분화폭류통도 연이어 폭발했다. 흩어지는 강기(剛氣)와 철환(鐵丸)이 사방으로 튀겼는데, 도강의 벽에 가로막혀서, 오히려 대부분 흑영전(黑影殿)의 고수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망두타(死亡頭駝)가 경악해서 뒤로 물러서며, “모두 피해!” 하지만, 이미 대다수가 도성(刀聲)에 충격을 받아서 일시 몸이 마비된 이후라 사망두타의 경고성은 때늦은 외침에 불과했다. “아악! 으윽. 악!” 폭우처럼 쏟아지는 철환(鐵丸)과 강기(剛氣)에 순식간에 이십여 명의 고수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졌다. 이와 동시에 일행이 달려들어 남은 삼십여 명을 덮쳐가고 있었다. 단리유아는 다른 자들은 일행에게 맡기고, 우선 정면으로 보이는 사망두타(死亡頭駝)를 덮쳐갔다. 도를 휘둘러 제 삼절 지옥일수혼(地獄一殊魂)을 펼쳐, “크키흐아악!” 일 장이 넘는 시뻘건 도강(刀剛)이 일어나 일자로 상대를 향해서 덮쳐갔다. 이 모습에 이미 피할 수 없음을 안 사망두타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죽은 채로, 사력을 다해서 자신의 최고무공인 탈명화령장(奪命化靈掌)을 펼쳐 허공에 검은 색의 장강(掌剛)의 벽을 형성하여 맞받아쳐갔다. 두 가지의 강기(剛氣)가 서로 부딪친 순간, “꽈꽈쾅! 꽈르릉 꽝!” 굉음이 울려 퍼지며 강기가 사방으로 난사됐다. 붉은 색의 도강(刀剛)이 장강(掌剛)에 부딪친 순간 끝이 잘라지며 사망두타(死亡頭駝)를 향해 폭사되었다. 본래 사망두타의 생각은 우선 눈앞의 도강을 막은 후에 뒤로 피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다시 도강이 조각나 순간적으로 달려드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으악!” 도강(刀剛)이 사망두타의 상체를 완전히 날려 보내어 허리 아래만이 남아 있다가, 그것도 잠시 후에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갔다. “쿵” 그 주위에 있던 서너 명도 흩어지는 강기(剛氣)의 충격에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터져나간 살점이 쏟아져 내리니 온몸이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그런 그들을 덮쳐서 단리유아는 계속 공격해나갔다. 한편 이미 일행도 장내로 달려들어 한참 드잡이 질을 하고 있었는데, 기혼사가 가장 날뛰고 있었다. 오른 손의 철편(鐵鞭)으로 펼치는 무공도 무서웠지만, 왼손으로 펼치는 독장(毒掌)에 의해서 근처에 있던 자들까지 독기에 중독되어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쫓기는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던 상태였던지라, 분풀이라도 하는 듯이 잔인하게 상대를 도륙하고 있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각기 무기를 꺼내어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적의 수가 많아도 아직은 견딜만한 상황이었다. 팔망수괴는 그 천성대로 싸우면서도 시끄럽게 떠들고 온갖 욕설을 퍼부어서, 상대하던 적들이 오히려 당황하고 화가 폭발하게 만들 정도였다. 제일 먼저 단리유아가 흑영전(黑影殿)의 고수들을 이끌던 사망두타(死亡頭駝)를 죽여 버렸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이제는 살아서 도망치려는 생각이 더 커서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창. 채채챙!” “죽어랏!” “아악. 윽, 으악! 푹, 으흑” 장내에는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욕설, 서로 간에 상대를 죽이고자하는 살기(殺氣)에 가득 찬 목소리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다들 반쯤 광기(狂氣)에 젖은 채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른 상대를 찾아서 달려드는 것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일행의 모습도 피에 젖어서 제대로 모습을 분간하기에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단리유아의 모습이 제일 끔찍했는데, 한 번씩 도를 휘둘러 지옥파라구천절을 펼칠 때마다 상대가 분시되어 버리니, 완전히 피로 온몸을 물들이고 여기저기 살점이 들러붙어서 꿈에서라도 보기 두려울 정도의 모습이었다. 마치 한 마리의 피에 미친 야차(夜叉)가 지옥도에서 날뛰듯이 상대를 찾아가며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던 단리유아가, 위급해 보이는 선상조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네 명에게 포위되어 근근이 수비하기에도 바빠서 제대로 상대를 공격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러한 난전(亂戰)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제대로 자신이 가진 것도 다 펼치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던 네 명의 고수들 중에서, 먼저 왼쪽의 검을 든 이에게 다가가 뇌전지(雷電指)를 날려 상대의 미간을 노렸다. “쉬웃!” 다가오는 뇌전지를 고개를 저어 피하고 검을 휘둘러 덮치는 상대의 측면으로,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을 펼쳐 빠져나가면서 그대로 적운도를 휘저어 허리를 갈라갔다. “크흐키아악!” 흑영전(黑影殿)의 고수가 검을 휘둘러 단리유아의 환영(幻影)을 가르자,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해 미소 짓고 있었지만 곧 그 얼굴은 땅에 부딪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뇌리에는 캄캄한 어둠만이 내리덮여 그 의식도 끊어졌다. 넘어지는 상대를 지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 연달아 권을 날려 상대의 얼굴을 시야를 가리다가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쳐 미간에 구멍을 뚫고 지나갔다. “팟” “퍽!” 미간에 구멍이 났음에도 서있는 상대를 걷어차, 한쪽의 적을 향해서 날려 보내며, “선사질! 싸울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싸우시오. 이것저것 생각하거나 검법 하나만으로 싸웠다가는, 이런 혼전 중에는 하수에게라도 죽기 십상이오.” “휴, 알겠습니다. 소사숙.” 선상조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남은 상대를 향해서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이제까지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것에 분풀이라도 하듯이. 단리유아가 차버린 동료의 시신을 피해서 흑영전(黑影殿)의 고수가 옆으로 물러났을 때, 이미 사신은 눈앞에 다가와 미소 짓고 있었다.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다가온 단리유아가 도를 휘둘러 심장을 조각내고 지나간 후였던 것이다. 단리유아가 사방으로 헤집고 다니며 고수들을 죽여 나가니, 그렇지 않아도 불리하던 전황은 완전히 기울어 이제는 거의 도살에 가까운 장면이 지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팔망수괴와 기혼사 모두 화경의 고수이니, 일대일로서 상대할 만한 고수가 없었던 흑영전(黑影殿)의 고수들로서는 어떻게 대항해볼 수도 없었다. 처음 격전이 시작된 이후 불과 반에 반각도 되지 못한 시간에 불과 했지만, 이제 살아남은 고수들은 채 열 명도 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여기 저기 상처를 입어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있었는데, 특히 단리유아가 다가올 때마다 다들 치를 떨며 물러서려고만 했다. 한줄기 동요의 기색도 없이 마치 물건을 치우듯이 사람을 죽여 나가는 모습에 두려움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분노하는 모습을 본다면 이 정도는 아닐 테지만, 그 무표정한 모습이 마치 악마가 놀이감을 가지고 장난치는 듯 했던 것이다. 일행이 이렇게 싸우면서 몇 남은 흑영전(黑影殿)의 고수들을 몰아붙이고 있을 때, 뒤쫓던 삼파의 고수들이 언덕을 넘어 장내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이를 알아차리고 일행을 보고, “어서 갑시다. 저들은 모두 고수들이니 포위되면 우리가 절대 불리합니다.” 이에 팔망수괴가 한밤중에 이렇게 계속 쫓기고 또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것에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제기랄! 계속해서 쫓기기만 하는군. 차라리 지금 맞장 떠버리는 것이 어떨까?” “지금은 안 됩니다. 저들만이라면 한번 해볼 만할 테지만, 분명히 뒤따르는 고수들이 더 있을 테니, 우리가 싸울 동안 완전히 포위되어 버릴 것입니다. 쓸데없이 만용을 부릴 때가 아니라, 지금은 도망칠 때입니다. 어서 갑시다.” 단리유아의 재촉에 팔망수괴가 투덜거리며, “젠장! 잠깐 분풀이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고 있었는데, 또다시 도망쳐야 하다니....” 팔망수괴의 말을 뒷전으로 흘리며 단리유아는 전면을 가로막던 세 명의 인물을 향해서 덮쳐가고 있었다. 적운도를 들어 올려 제 이절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를 펼치니, “크흐키아악....” 도성에 상대가 멈칫한 순간, 시뻘건 도영(刀影)이 장내를 덮치고 곧이어 핏줄기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핏방울과 육편이 비가 내리듯 쏟아질 때, 단리유아는 벌써 숲속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일행도 각기 도성에 멈칫하고 있는 상대를 공격한 후에, 곧바로 단리유아를 뒤쫓아 가고 있었다. 음모(陰謀)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뒤쫓던 삼파의 고수들이 장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행이 숲속으로 뛰어든 뒤였다. 뒤쫓아 들어가려는 삼파의 고수들을 가로막으며 혈환적사(血換赤師)가, “다들 멈춰! 이런 밤중에 무작정 숲속에 뛰어들었다가는 죽기 십상이야.” 곧이어 고개를 돌려 살아남은 네 명을 향해서 살기어린 눈초리로 노려보며, “빌어먹을, 어떻게 다섯 명을 막는데도 이렇게 당할 수 있단 말이냐? 단지 놈들을 붙들고만 있으랬더니, 너희 흑영전(黑影殿) 놈들은 다들 병신이라는 말이냐?” 이때, 네 사람 모두 겨우 살아남았지만 상처가 심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혈환적사(血換赤師)의 말에 다들 분노해서 쳐다볼 때, 그중의 삼십대 대한이 소리쳐, “당신들이라고 별 수 있을 것 같소? 다른 자들만 해도 버거울 판에 단리 미치광이까지 날뛰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그들을 막는단 말이오? 먼저 제대로 포위하지도 못하고 그들이 달아나도록 만든 게 누구인데 그런 소리요? 흥! 그리고 당신들은 우리 운남지단(雲南支壇)에 속한 세력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뭐라고? 이 개놈이!” 혈환적사(血換赤師)가 화가 폭발해 발로 걷어 차 상대를 날려버리며, “퍽!” “이 개자식아! 우리는 너희와 동맹을 맺은 것이지, 결코 너희들의 수하는 아니야! 어디서 그딴 소리냐?” 또다시 손을 휘둘러 쓰러진 흑영전(黑影殿)의 고수를 아예 죽여 버리려 할 때, 주변에 있던 고수들이 말린다. 벽해궁(碧海宮)의 고수중의 하나인 벽해연수(碧海蓮愁)가 혈환적사를 향해서, “지금 그에게 화풀이해서 어쩌겠다는 것이에요? 저 사람을 죽이기라도 했다간 당신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텐데.” “흥! 아예 이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면 누가 이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소?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동맹을 맺은 것이지, 이놈들의 졸개는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이거해라 저거해라 멋대로 명령이나 내려서 맘에 들지 않는 터에.” 오히려 반발하면서 살기 가득한 눈길로 살아남은 네 명의 흑영전(黑影殿) 고수들을 노려본다. 이에 벽해연수(碧海蓮愁)가 빤히 쳐다보며, “어디 당신 맘대로 해보세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두고 보게. 그들 지단의 세력만 해도 우리 삼파를 합친 것보다도 더 세력이 큰데, 이 사실을 알면 과연 당신들 적전파(赤典派)가 남아날 것 같아요? 그리고 분명히 이곳에도 그들의 끄나풀이 있을 텐데 말이에요.” “무슨 소리요? 누가 이곳에 있다고.” 혈환적사(血換赤師)가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칠 때, 벽해연수가 전음으로, <좀 조용히 해요! 당신들은 어떻게 그들과 동맹을 맺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우리와 여기 갈단사(喝丹寺)는 거의 강제적으로 말뿐인 동맹을 맺은 것이에요. 본궁은 그다지 욕심이 없던 폐쇄적인 문파인데, 갑작스럽게 자신들 휘하에 들어오라니 좋아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다들 반대했지만 그들의 무력시위를 보고나서는 어쩔 수 없이 끼어든 것뿐이에요. 물론 그동안의 생활에 답답해했던 젊은 층은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그게 정말이요? 우리는 운남(雲南) 동남부 지역의 패권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가입하게 되었는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혈환적사(血換赤師)가 되물을 때, <흥! 어리석기 그지없군요. 동맹이라는 것은 세력이 비슷할 때나 성립되는 것이지, 이렇게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는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 아닌가요? 나중에 천룡사(天龍寺)나 묵룡궁(墨龍宮)을 없앤 후에는 우리는 거추장스러울 뿐일 텐데?> 벽해연수(碧海蓮愁)의 말에 분노해서,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속았다는 말이오? 내 당장 이 더러운 중원 놈들을!> <어떻게 할려구요? 지금 이 자리에서 반기라도 들 생각인가요? 그럴 생각이라면 꿈 깨는 것이 좋을 것이에요. 이미 당신들 수뇌부 대부분은 각종 금제(禁制)에 걸린 상태일 테니.> <그, 금제라니?> 놀라 되묻는 말에, 벽해연수 몇 명밖에 없는 갈단사(喝丹寺)의 고수들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갈단사도 반항을 했지만, 주요고수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버리기만 했을 뿐이에요.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나중에 쳐들어온 그들에게 큰 피해를 입고서야 굴복했으니. 만일 당신들이 반기라도 든다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하나하나 죽여 없앨 것이에요.> <당신들도 금제를 당했소?> 벽해연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장로이상은 모두 만성독약에 중독된 상태고, 일부는 사령대법에 정신마저 금제되어 있는 상태에요. 내 사매인 벽해비연(碧海飛燕)도 금제를 당해서 본성이 완전히 바뀐 경우에 해당해요. 당신들 문파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에요. 갑자기 성격이 변했거나 운남지단(雲南支壇)에 협조적으로 성격이 바뀐 사람이.> <그렇다면 끝까지 이렇게 이들에게 이용당해야 한다는 것이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살지는 못하겠소! 흥! 적전(赤典)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살수 있단 말이오?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낫지.> 흥분하여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혈환적사(血換赤師)의 말에 이미 늦었다는 듯이, <어리석군요. 그렇게 한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은가요? 이미 당신들의 식솔들에게까지 손길이 미쳐서 당신이 자결이라도 한다면 그들은 죽거나 노예가 될 뿐일 텐데.> <그럴 수가? 으으, 이 악독한 놈들을!> 치를 떠는 혈환적사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며, <휴우, 이미 늦었어요. 애초에 완전히 외부에서 침입을 못하게 폐쇄하지 않는 한,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당신도 쓸데없는 생각을 말고 조용히 이들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에요. 혹시라도 나중에 알아요? 그들이 정말로 약속을 지킬지? 아니더라도 지금은 참고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달리 다른 수단이 없으니.>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있는 혈환적사(血換赤師)를 향해서, <이번에 이들을 공격하는데 불러 모은 고수들을 보면, 이 단리유아라는 사람이 그들에게는 큰 골칫덩이인 모양이에요. 더욱이 그 철목군주(鐵木君主)라는 계집까지 찾아와서 공격을 요청하는 것을 보면 말이에요. 이제부터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적당히 수하들을 보전할 생각이나 하세요. 최소한 그래야 나중에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테니까.> <....> 벽해연수의 말에도 혈환적사는 이를 악물고 생각에 잠긴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들이 이렇게 숲밖에 모여 진을 치고 있을 때, 일행은 숲을 뚫고 오 리 정도 들어간 후 공터에 앉아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일각 정도가 흐른 후에, 잠시 동정을 살피려고 남아있던 단리유아도 일행에게 되돌아왔다. 현재 일행이 있는 숲은 백인설산(白刃雪山) 아래에 자리 잡은 십리삼원(十里森原)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백인설산은 산꼭대기가 항상 만년설로 뒤덮인 이만 척이 넘는 고산으로, 백지(白地)로부터 북서방향으로 오십여 리에 위치해 있었고 산꼭대기가 하나의 칼날이 세워진 것처럼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그 아래를 사방 십리 정도에 이르는 십리삼원이 둘러싸듯이 펼쳐져 있었는데,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무성해서 한번 들어가면 그 종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어느 정도 추적을 떨쳤다고 생각한 일행은 숲속 오장 여의 공터에 주저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다들 도망치느라 미처 상처나 암기에도 신경 쓰지 못한 상태로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전신이 자타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단리유아가 돌아올 때까지 암기를 뽑아내고 대충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일행은 곧바로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떤가? 놈들이 안으로 들어오던가?” “또 다른 놈들은 안보였나?” 공손고와 기혼사가 소리치듯이 물을 때, 한쪽의 바위위에 걸터앉아 겉옷을 벗어 그나마 깨끗한 안쪽으로 얼굴의 굳은 피와 살점을 털어내며, “아직까지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계속 모여드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날이 새면 본격적으로 수색을 할 작정인 것 같습니다. 제가 올 때까지 모인 수가 거의 백 오십에 이르렀으니, 아무래도 이백 명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단리유아의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듯한 말에 다들 놀라서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이었다. “뭐라고? 세상에 아직도 그렇게나 많단 말이야?” “제기랄! 완전히 첩첩산중이로군.”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으아 정말 울화통 터지는군. 내가 젊었었던 적에도 이렇게 황당하게 쫓긴 적이 없었는데?” 다들 소리칠 때, 팔망수괴가 일행을 돌아보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너희들 정말로 공격받는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냐? 저들 삼파와 아무 관련이 없어?” “아니 몇 번이고 말했지 않소? 우리도 모른다고. 제길, 운남(雲南)에 들어와서는 천룡사(天龍寺)를 제외하고는 달리 들린 곳도 없는데 어떻게 다른 곳과 원한이 맺혔겠소?” 공손고가 화풀이 하듯이 대꾸하자, 팔망수괴가 화가 나서, “이 자식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무슨 이유가 있으니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든 것이지. 제기랄, 완전히 재수 옴 붙었구만.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렇게 늙어서까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듯이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팔망수괴를 보고,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일행 모두가 얼굴을 찌푸리며 노려본다. 더 참지 못한 기혼사가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며, “그만 좀 떠들어, 이 수다쟁이야! 네가 그렇게 떠들지 않아도 우리 모두 영문을 몰라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야. 빌어먹을 자식이 누가 따라 오랬냐? 지가 부득불 끼어달라고 떼를 쓸 때는 언제고....” “뭐라고? 이 늙은이가 어디서 화풀이야! 이것 못 놔? 빨리 놔, 이 심통 맞은 원숭이야!” “이 빌어먹을 박쥐 녀석이, 정말!” 팔망수괴도 기혼사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서로가 욕설을 내뱉으며 싸우기 시작한다. 일행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았어도 멈추지 않고 떠들어 다른 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단리유아가 일행을 돌아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모두 진정하시고, 일단 교대로 운공하여 피로를 회복한 후에 다시 얘기합시다. 지금은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는 것 같으니.” 잠시 후, 다들 간단히 조식을 취한 후에 어찌된 일인지 서로 의견을 나눴다. 단리유아가 일행을 돌아보며,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보면, 운남(雲南)의 세 문파가 연합했다는 것이고 거기에 더해서 다른 문파가 끼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딱히 의심 가는 곳도 없고, 이유도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각자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십시오.” 이에 팔망수괴가 일행을 바라보며, “갈단사(喝丹寺)와 벽해궁(碧海宮), 적전파(赤典派)는 그 성향이 판이해서 결코 함께 할 문파들이 아니야. 오히려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소문났었는데....” “그래, 나도 저놈 말처럼 그들은 서로 별 관계가 없다고 알고 있네.” 기혼사가 잠시 팔망수괴를 힐끗거리다가 말한다. 이에 일행 모두 생각에 잠겼을 때, 먼저 선상조가, “이리되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부딪쳤던 집단이 그들 삼파를 어떻게 해서 같이 공격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런 세력이 있을까? 아직까지 이 운남에서는 천룡사(天龍寺)와 묵룡궁(墨龍宮) 만한 문파도 없는데, 그 두 문파가 그렇게 했다고도 볼 수 없고.” 두 사람의 말을 듣던 단리유아가 자신이 싸웠던 사망두타(死亡頭駝)가 생각나서, “혹시 제가 싸웠던 꼽추노인이 누구인지 아는 분이 안 계십니까?” 단리유아의 말에 다들 생각에 잠겼을 때, 팔망수괴가 무릎을 치며, “맞아, 그 꼽추 놈은 사망두타(死亡頭駝)일 거야. 하도 오래전이라서 기억에 가물거리기는 한데, 그 꼽추와 대머리를 한 모습에는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없는 놈이지. 으흐흐, 정말 난 기억도 좋아. 그놈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도 사십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처음에는 제대로 말하다가 다시 자화자찬으로 넘어가 혼자서 떠든다. 그런 모습에 다들 눈살을 찌푸릴 때, 단리유아가 중간에 끼어들어, “어떤 사람인지도 기억하십니까? 문파나 성향 같은?” “응? 음, 문파에 들어간 적은 없다고 알려졌었는데, 주로 강북에서, 그 중에서도 섬서(陝西)와 영하(寧夏) 일대에서 활동한 놈이었지. 온갖 나쁜 짓을 일삼다가 공분이 일어 고수들이 뒤쫓자 등격리(騰格里) 너머로 달아났다고 들었네. 나도 과거 그놈과 싸웠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싸우고 그 후에는 자신이 어떻게 괴롭혔다는 둥 계속해서 혼자 떠든다. 다들 그 모습에 화가 치솟았지만, 말해보았자 입만 아플 뿐이라는 것을 알고 팔망수괴는 내버려둔 채 나머지 일행끼리만 대화를 계속했다. “육선배의 얘기로는 최소한 중원의 인물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문제가 더 커질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소적교(素赤橋)의 일과 지금의 일로 미루어보면, 아무래도 중원에서 뭔가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런데 문제는 중원에서 고수를 보내어 이 세외(世外)까지 올 만한 세력이 과연 있느냐 하는 것이지.” 공손고의 말에 이어 선상조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긴 합니다. 정사로 나뉘어서 다들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야. 세외의 현 상황도 심상치 않는 것도 문제지. 대부분의 지역에서 세력을 모으고 있고, 사파의 성향이 강한 곳들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기혼사가 덧붙여 말한다. 다들 생각해보았지만, 제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단지 세외와 중원의 정세로 미루어볼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단리유아도 현재로서는 너무 정보가 부족해 어떤 세력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우선 당장의 일부터 생각하기로 하고,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친 후에 화제를 바꾸어서, “그보다 앞으로 어찌할지 결정합시다. 현재 우리가 있는 이곳은 뒤쪽으로는 횡단산맥(橫斷山脈)이 펼쳐진 상태고, 남서쪽으로는 갈단사(喝丹寺)와 벽해궁(碧海宮)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 실제 갈 수 있는 곳은 북서쪽과 횡단산맥을 넘어 사천(四川)으로 가는 길 뿐으로 보입니다.” “북서쪽으로 계속 가면 서장(西藏)인데, 과연 그곳은 안전할까? 듣기로는 소뢰음사(少雷音寺)가 현재 패권을 차지했다고 들었는데. 차라리 사천으로 넘어가 아미나 청성 같은 대문파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떻겠나?” 공손고가 걱정스런 어조로 말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사천(四川) 쪽으로 향하는 것도 문제가 많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중원(中原)과 세외(世外)를 아우르는 신비단체가 있는 것 같은데, 만일 이들이 정말로 중원에서 온 세력이라면 그대로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꼴입니다. 게다가 현재 중원의 상황을 본다면 적과 아군이 명확치 않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아니, 무림맹이 있지 않나?” 공손고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되묻자, 잠시 뜸을 들였다가, “공손선배에게는 미안하지만 전 무림맹이 의심스럽습니다. 아니, 무외신궁(無畏神宮)과 오파일방(五派一幇)이 의심스럽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내 자네를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무성(武聖) 선배를 못 믿겠다는 것인가?” 곧바로 화를 내며 되묻는 공손고를 향해서, “공선선배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혈련마교(血蓮魔敎)의 준동이 걱정된다고 하지만, 당시엔 무림맹을 만들 필요가 별로 없었습니다. 딱히 혈련마교가 침공한다는 조짐도 없었지요. 혈수미교(血修彌敎)까지 이유를 들먹였지만, 혈수미교 자체의 성격만 본다면 그리 걱정할 것도 없었습니다. 또 정말로 그런 문파들의 공격을 대비해서 무림맹을 만들었다면 사파도 참여하게 해서 명실상부한 중원맹을 만들어야했습니다. 게다가 소림사에 봉인시켰던 혈련마경(血蓮魔鏡)이 분실되었다고 했는데, 제가 알기로는 대대로 장문인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고 기관이 첩첩이 둘러싸인 곳에 숨겨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그럴 수 있지도 않나? 정과 사는 물과 불 같으니 같이 중원맹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고, 혈련마경은 정말로 누군가 침입해서 훔쳐갔을 수도 있지.” 공손고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이에 단리유아가 과거의 일을 되짚어, “먼저 일어난 것이 혈련마경이 분실되었고, 그 후에 혈련마교가 준동했다고 알려졌지요. 혈련마경(血蓮魔鏡)을 누군가 훔쳐갈 동안 소림사에서 아무도 몰랐다는데, 그것이야 말로 이상한 일이지요. 물론 사실을 알고 뒤쫓았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문인에 불과하고, 기관에 둘려 싸인 곳에서도 정확히 어떤 곳에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난당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무림맹의 창설을 요구했지요.” “그렇다고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사실이 맞다면, 그 신비세력은 전래를 찾아볼 수 없는 세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생겨날 수는 없으니, 최소한 반갑자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만일 누군가 강호(江湖)를 제패할 생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강호의 모든 세력들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사파라면 여러 가지 미끼로 어느 정도는 포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대로 명문정파인 오파일방(五派一幇)이나 칠대세가(七大世家)는 약간 다르지요. 결코 누군가 강호를 제패하는 것을 두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칠대세가는 혈연이 중심이고 현재 가장 세력이 융성한 상태이니 외부에서 침투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이와 달리 오파일방은 제자들을 뽑을 때 근골이 뛰어난 자들을 보낸다면, 나중에 쉽게 수뇌부로 들어가 문파를 장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선상조가 끼어들어, “소사숙, 사숙의 의심이 맞다 해도 겨우 그들이 무림맹을 창설하는데 주동이 되었다고 그런다는 것은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닙니까?” “물론 그렇소. 그렇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시오. 무림맹을 만들고부터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되었고, 오파일방이 대부분의 실권을 차지하고 있소. 게다가 매일 싸움이 지속되어서 점점 중원의 힘은 줄어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림맹은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지 않소? 더구나 무용론까지 나와서 각지역마다 따로 결맹을 하려 한다고 들었지 않소? 상황이 이런데 만일 이렇게 몇 년 이어진다면, 얼마 안가 중원은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오.” 단리유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손고가 다시 되물어, “그렇다면 무성(武聖) 선배는 어떤가? 그분의 지금까지 성품으로 볼 때 과연 의심할 수 있을까?” 이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을 멈추었다가, 이전의 천수검제(千手劍帝)와 나누었던 백 년 전의 비사에 대해서 설명한다. 물론 자신에 대한 신상내력은 말하지 않고. “그게 정말인가? 과거 중원오절(中原五絶)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공손고도 놀라고 나머지 일행도 놀라서 소리친다. 한동안 소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진 후에, “당시 그 일이 있은 후에 다른 오절의 후인들은 아예 멸문되거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천절(天絶)의 후인들인 무외신궁(無畏神宮)은 강호제일의 세력이 되었지요. 더욱이 천절의 출신이 불분명한 것도 이상합니다. 당시 많은 협행으로 명성을 떨치고 무외신궁을 창건했다하지만, 정확히 사문이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혼자 무공을 습득해서 그럴 수 있다지만, 과거 무외신궁 구성원 중에서 절반 정도는 강호에 알려진 적이 없던 사람들이라고 들었습니다.” 팔망수괴가 곁에서 끼어들어, “맞아. 나도 그 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지. 많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의아해 했었다고 했는데, 바로 혈수미교(血修彌敎)와의 싸움이 시작되어서 흐지부지해져 버렸지. 흥! 그리고 나도 개인적으로 무성(武聖)을 좋아하지 않아. 명성이 높다지만 대부분 다른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고, 실제 안 보이는 곳에서는 더러운 짓을 한 적도 있었으니. 곳곳의 이권에 개입해서 일을 저질렀지만, 막상 파고들면 증거가 될 만한 사람이 죽어버려 뭐라 할 수 없었을 뿐이야. 그놈은 절대 명성처럼 선한 놈이 아니야. 어떻게 된 것이 그놈이 무슨 선행을 했다고 하면, 그 소문이 중원 전역을 한동안 떠들썩하게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지. 정말 그놈이....” 놀란 공손고가 끼어들면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분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이런 맹추 같으니라고! 어떻게 네놈은 네 사부보다 못하냐? 그런 소문이나 겉모습으로만 무턱대고 믿고. 소문이 중원 전역에 퍼지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보통은 한 달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며칠 안에 떠들썩하니 이상하지 않단 말이냐. 게다가 과거에 무외신궁(無畏神宮)의 고수들에게 쫓기는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이상한 말을 들었단 말이야. 무성(武聖) 일가는 본래 중원인들이 아니라고. 뭐 그 사람이 곧 죽어버리고, 단지 외모만으로는 분간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야.” 선상조가 곧바로, “중원인이 아니라고요?” “그래, 신강(新疆)의 회흘족(回紇族:위구르족)이라고 하더군. 회회교(回回敎)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뭐라 할 수 없어서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지.” 다들 한동안 무성(武聖)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일행을 돌아보며, “지금으로서는 확실한 것은 아니니, 일단 서북쪽 덕흠(德欽)까지 가기로 합시다. 우선은 이들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니 말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합시다.” “그러면 곧바로 떠날 생각인가?” 기혼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일행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여기서 흩어지자고?” “예, 아무래도 저들이 노리는 것이 저인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이야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 저는 몇 가지 비밀을 알고 있는데다가 남만(南蠻)의 일로 보아 여러모로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계속 횡단산맥(橫斷山脈)을 타고 덕흠(德欽)까지 가시고, 저만 따로 떨어져 행동하다가 다시 만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선상조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뭐라구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따로 떨어진다면 저희의 위험은 줄어들겠지만, 소사숙께서는 몇 배나 더 위험할 것이 뻔합니다. 어떻게 그 많은 고수들을 뚫고 나오시겠다는 말입니까? 차라리 이대로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오. 선사질의 말처럼 했다간, 얼마안가 그들에게 종적이 발각될 것이오. 일단 포위된다면 절대 우리가 불리하오.” 말을 끊고 일행을 돌아보며, “그리고 저 혼자 간다면 언제고 몸은 빼낼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적들이 노리는 것이 저라면 여러분을 추격하는 것은 심하지 않을 것이고, 그동안 저는 치고 빠지는 식으로 싸우며 적의 수뇌부들을 없애고 정보를 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서쪽으로 향해 란창강(瀾凔江)까지 유인하여 적들과 싸울 동안, 여러분은 따로 계속 횡단산맥(橫斷山脈)을 따라 달려서 다시 덕흠(德欽)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들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한번 세운 고집을 바꾸지 않는 단리유아를 설득할 수 없었다. 기혼사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며, “정말 고집불통이로구만. 절대로 끝까지 싸울 생각은 하지 말고, 중간에 빠져서 곧 우리를 뒤쫓아 오게. 알겠나?” 기혼사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을 시키려고, “알겠습니다. 그보다 어디에서 만날지나 정하지요. 육선배님, 이 지역을 잘 아실 테니 혹시 적당한 곳이 있겠습니까?” 말을 바꾸어 팔망수괴를 바라보고 묻는다. 이에 팔망수괴가 또다시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으며, “그래. 내가 누군가? 이 운남(雲南)에서....” “그만 닥치고 빨리 대답이나 해!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기 자랑이나 하고 있을래?” 기혼사의 말에 뭐라고 소리치려다가 주위의 일행까지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알았어, 알았다구. 말하면 될 것 아니야. 괜히 따라나섰다가 이 꼴이 됐는데....” “정말 끝까지 이 자식은.....” 달려들어 멱살을 흔드는 기혼사를 떨어뜨린 후에, 일행이 대답을 재촉하니 그제서야, “덕흠(德欽)에서 북쪽으로 십리 정도 가면 마애삼불(磨崖三佛)이 새겨진 백여 장 높이의 큰 절벽이 있지. 그 근처에 이르러서 절벽을 뒤져보면 동굴이 있을 테니, 그리로 오면 돼. 절벽이 멀리서도 눈에 뛸 정도로 크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마애삼불의 크기만 해도 십여 장에 이르러....” “됐어, 이 자식아! 그만 떠들어!” 기혼사가 소리치고 난 후에 단리유아를 향해서, “부디 몸조심하게. 내 말을 잊지 말고 중간에라도 불리하다싶으면 도망치도록 하게. 끝까지 싸울 생각 말고. 응?” “알겠습니다. 선배님도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단리유아가 말할 때, 선상조도 내키지 않는 침울한 표정으로, “소사숙.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전....” “자네, 무사해야 하네. 이렇게 헤어지다니 마치....” 공손고까지 나서서 걱정스레 말한다. 잠시 후에 팔망수괴가 마지막으로 단리유아를 걱정하는 말을 하고 나자, 일행은 다시 덕흠(德欽)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서로 방향이 갈라져 흩어졌다. 시간은 이제 자시(子時)가 지날 무렵으로, 그 행로의 위험함을 암시하듯이 흩어지는 일행의 모습을 흐릿한 한줄기의 달빛이 비추어 그 그림자만이 춤추고 있었다. ****** 늦었네요. 길이가 길다보니 수정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 먹었습니다. 이번 장의 제목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한편이 다인데 제목이 별로 맘에 안드네요. 그리고 100 회 축하를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즐독하시길....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1 한편, 이렇게 일행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십리삼원(十里森原)으로 들어갈 때, 일월성에서는 철목군주(鐵木君主)가 벽해비연(碧海飛燕)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단리유아 일행이 백지(白地)에서 도망쳤다는 것을 듣고는, “넌 도대체 어떻게 일을 처리한 것이냐? 그들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하랬더니,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눈뜨고 바라보고만 있어? 네가 진정 죽고 싶으냐!” 휘장 사이로 흘러나오는 살기에 가득 찬 냉혹한 목소리에, 벽해비연이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며, “죄, 죄송합니다, 군주님. 고수들로 하여금 뒤쫓게 했으니, 얼마가지 않아서 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들은 독안에 든 쥐라 할 수 있으니, 이번에는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흥! 네 년의 말처럼 그게 쉬울 것 같으냐? 이때까지 공들여 준비했었는데 이리도 쉽게 탈출하게 만들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자정이 넘어서 사상시마(四象屍魔)가 도착할 때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그들 모두를 잡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네 년이....” 다시 한 번 벽해비연(碧海飛燕)이 엎드려 연신 머리를 돌바닥에 박으며, “쿵쿵” “제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군주님. 이번에는 기필코 그들을 잡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이마가 찢어진 채로 간청하는 모습에 철목군주(鐵木君主)가, “좋다.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하지만 다시 그들을 놓친다면 그때는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단리유아만은 반드시 붙잡아야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입술을 깨물고 맹세하듯이 대답하는 벽해비연을 향해서, “그러면 이후의 대책을 말해봐라. 어떻게 할지.” “그들이 숨어들만한 곳이라고는 북서쪽의 십리삼원(十里森原)뿐입니다. 다른 쪽으로는 도망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먼저 십리삼원을 포위하고는 지금 즉시 가까운 제이로(갈단사)나 제삼로(벽해궁)에 더 많은 고수들을 요청해야 합니다.” 벽해비연의 말에 철목군주가 냉정한 목소리로, “그러다 그전에 그놈들이 포위망을 벗어나면?”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야지요. 그런데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저희에게는 단리유아를 막을 만한 고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철목군주(鐵木君主)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곧 있으면 사상시마(四象屍魔)가 도착할 것이다. 그들이라면 단리유아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테니, 그동안만 시간을 끌어라. 다른 자들은 어찌되든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어차피 별 볼일 없는 놈들일 뿐이니, 지금 놓치더라도 나중에 충분히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단리유아는 반드시 죽여야 해. 그자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본교의 목적을 방해할 가능성만 커질 것이다. 그러니 만일 다시 부딪치게 된다면, 다른 자들은 최소한의 고수로서 견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단리유아를 공격해라.” “알겠습니다.” “일단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지금 즉시 다른 두 곳에도 전서구를 날려 고수들을 파견하도록 요청해라.“ 철목군주의 말이 끝났을 때, 철목대주(鐵木隊主)가 들어와 복명하고는, “군주님, 놈들이 운남지단(雲南支壇)의 포위망을 뚫고 십리삼원(十里森原)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곧바로 추적해 들어가도록 명령할까요?” “아니, 이런 밤중에 뛰어들었다가는 오히려 단리유아에게 각개격파만 될 뿐이야. 어떻게 해서든 그놈을 포위해서 싸워야 죽일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수가 많다고 해도 힘들 것이니, 일단 밖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전서구를 날려라. 벽해비연, 네가 남은 고수들을 이끌고 먼저 가서 주변을 정리해라.” 잠시 생각하다가 철목군주(鐵木君主)가 명령을 내린다. 벽해비연이 나가자, “우리도 그쪽으로 진영을 옮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준비해라. 그리고 현재 본좌 휘하 철목군(鐵木軍)의 수는 몇이나 따라왔느냐?” “총 백 명이 따라 왔습니다. 그들은 지금 중전(中甸) 일대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철목대주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다시 휘장 뒤에서 철목군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만일을 대비해서 그들은 십리삼원(十里森原)의 서쪽 향초령(向楚嶺)에 숨어서 대기하도록 일러라.” 복명하고 철목대주가 물러나자 휘장 사이로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으드득! 운남(雲南)의 너구리가 그 휘하고수들을 더 보내었다면, 이리 어렵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흥! 두고 보자. 세외총교주를 믿고 그러나 본데, 나중에 과연 어느 쪽이 본교를 움직이는 실세인지 똑똑히 보여주지.” “진정하세요, 군주님. 아직은 그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태상교주께서 마지막 폐관을 깨고 나오셔서 백팔열성대제(百八列聖大祭)를 열 때까지는 참아야합니다.” 왼쪽의 철목십검(鐵木十劍) 중의 일검이 나서서 말한다. 이에 철목군주가,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지.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나저나, 이 사상시마(四象屍魔)는 언제 오는 것이지? 내가 연락한지 언제인데 아직까지....” 철목군주의 말이 석전을 울릴 때, 어디선가 귀청을 거스르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흐흐흐, 군주. 걱정 마시오. 우리도 이제 도착했으니. 잠시 놀다 오느라 그런 것뿐이오.” “사상시마(四象屍魔), 쓸데없이 숨어서 육합전성(六合傳聲)이나 보내지 말고 즉시 들어와 복명해라!” “알겠소.” 곧이어 장내로 순식간에 네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육척이 못되는 키에 각기 검·도·창·륜을 지니고 있는, 해골처럼 비쩍 마르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의 노인들이었다. 거의 얼굴이 비슷해 이들이 형제임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검을 지닌 자가 첫째인 사상검마(四象劍魔)였고 나머지도 병기의 차례대로 이름과 순서가 정해졌다. 먼저 사상검마가 대표로 나서서 고개를 숙이며, “군주께 사상시마가 인사드리오.” “너희들은 내 말이 말 같지 않느냐? 어떻게 이제야 온 것이냐?” 분기서린 철목군주의 호통에 사상륜마(四象輪魔)가, “켈켈켈. 군주, 그대가 아무리 태상교주의 제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대의 소속이 아니오. 이번에 전주께서 특별히 허락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대의 명을 받지도 않을 것이오. 우리 역시 본교의 서열로는 백위 안에 드는 것을 잊지 마시오.” “흥! 겨우 턱걸이한 주제에 무슨 큰 소리냐? 지단의 고수들까지 포함한다면 삼백위에나 겨우 들 정도이면서.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벽해비연을 따라가 놈들이나 쫓아라.” 철목군주의 냉소에 사상시마(四象屍魔) 모두 얼굴을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이었지만 대꾸할 수는 없었다. 현재의 서열상으로는 교주 직속의 오대군주(五大君主)의 위치가 자신들보다는 높았던 것이다. 속으로만, ‘이 계집이 태상교주의 제자라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군. 우리 역시 곧 열성전(列聖殿)에 들지 모르는데.... 으드득, 두고 보자.’ 내심은 감춘 채 곧이어 사상시마가 복명하고 물러난다. 이렇게 철목군주(鐵木君主)가 명령을 내려 진영을 다시 갖추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일행과 헤어져 숲의 입구를 향해서 다가가고 있었다. 일행은 반대쪽의 산봉우리 쪽으로 올라간 후에 계속 북서진 할 것이고, 단리유아는 입구의 포위망을 돌파해 서진하여 란창강(瀾凔江)까지 이들을 끌고 다닐 생각이었다. 다들 지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것은 일행이니, 이들이 완전히 포위망을 갖추기 전에 공격하여 돌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무의 그늘에 신형을 감추며 입구 쪽으로 향하니, 아직 들어올 생각은 없는지 각기 모여서 입구만을 지키고 있었다. 이전에는 백오십여 명에 이르렀는데 현재의 모습은 백여 명 뿐으로, 나머지는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져 숲을 포위한 것 같았고 그 외에도 더 많은 자들이 있을 것 같았다. 현재 보이는 자들은 이전의 삼파의 고수들 오십여 명과 사망두타(死亡頭駝)가 이끌던 자들과 복장이 같은 자들이 오십여 명 섞여 있는 상태였다. 귀를 기울여 주변을 살피니 입구 근처의 나무와 수풀에 십여 명이 은잠(隱潛)하여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먼저 이들을 해치운 후에 포위망을 뚫을까 아니면 그대로 뛰쳐나가 달려들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은잠한 자들을 없앤 후에 치고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뛰쳐나갈 때 이들이 소리라도 지른다면, 쉽게 포위될 터이고 기습의 효과도 줄어들 테니. 사람의 키만큼이나 무성한 수풀에 엎드려 천천히 전방에 은잠한 적을 향해서 다가갔다. 현재 숨어있는 자들은 운남지단(雲南支壇)의 흑영전(黑影殿)에 속한 열두 명의 고수로, 각자 삼 장여의 간격을 두고 숲속을 감시하고 있었다. 다들 살아남은 동료들의 얘기를 듣고 마음이 불안했지만, 상부자의 명령에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서 감시해야 했다. 한쪽의 흑영팔호가 가장 가까운 칠호를 향해 전음으로, <이봐, 칠호. 우리가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빌어먹을, 아무리 명령이라도 이번 일은 내키지 않는군.> <자네 죽고 싶나? 지금 이 상황에서 전음을 보내다니.> 다급하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제기랄! 알게 뭔가? 어차피 그놈과 부딪친다면 죽게 될 것이 뻔한데. 자네도 아까 그 친구들을 보았지 않나? 다들 두려움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걸.> <그래도 어쩔 텐가? 위에서 명령을 내리니 우리 같은 졸개들이야 어쩔 수 없지.> 이에 한숨을 내쉬며 다시, <휴, 단리유아 놈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이렇게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미 다른 지역은 거의 목표를 완수했다고 하던데. 이제 조금 있으면 본교도 정식으로 개파할 것인데, 그때가 되면 그자가 무슨 수로 우리를 당해내겠나?> 잠시 칠호의 대답이 없자, 다시 전음을 보내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칠호?> 고개를 돌려 왼쪽으로 향하는 순간, 시커먼 손이 다가와 목을 비튼다. <우욱, 윽> 눈을 찢어져라 부릅뜨고 비명을 지르지만, 손바닥에 입이 가로막혀 아무런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목뼈가 돌아가는 섬뜩한 소리가 조그맣게 난 후에, 단리유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다른 자들은 모두 죽은 이후라 이제는 전방에서 모여앉아 대기한 나머지 적들을 공격할 순간이었다. 이때 숲의 입구에서는 중앙에 모닥불을 피워둔 채, 삼파의 고수들과 흑영전(黑影殿)의 고수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이미 단리유아 일행은 숲에 들어가 버린 후라, 다들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수색에 나설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감시하는 몇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고수들은 휴식을 취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벽해비연(碧海飛燕)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순간으로, 일행이 숲속으로 달아난 지 반시진도 안 되는 때였다. 이들이 설마 하는 생각으로 방심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중앙의 모닥불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쾅!” 장력으로 모닥불을 쳐올려 밤하늘을 훤히 밝힌 후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흑영전(黑影殿)의 고수들을 향해서 쳐들어갔다. “저, 적이닷!” “다, 단리 미치광이!” 몇몇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소리칠 때, 이미 단리유아의 도는 혈광(血光)을 뿜어내고 있었다. “크흐키아악....” 소름끼치는 도성(刀聲)에 이어서 도강(刀剛)의 폭풍이 일어나, 미처 대항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던 이들에게 덮쳐가고 있었다. 사태를 알아차린 이들도 도성에 일순 전신이 마비되어 멈칫하고 있을 때,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의 도강이 순식간에 장내를 뒤덮어버렸다. “크흐키아악....” “아아악! 윽. 악!” 단리유아도 이 일초에 전력을 다해서 펼쳤는데, 이들이 제대로 대항하기 전에 최대한 숫자를 줄여야 했던 것이다. 이미 십여 명이 죽어나갔고, 핏방울이 허공으로 튀어 올라 자욱한 혈무(血霧)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퍼퍼퍽. 투투툭.” 조각난 육편이 땅바닥에 부딪쳐내는 끔찍한 소리에, 먼저 혈환적사(血換赤師)가 정신을 차리고, “뭣들 하느냐? 다들 정신을 차리고 우선 고막을 막아라!” “어서 뒤로 물러서라. 어서!” 이어 벽해연수(碧海蓮愁)도 소리치며 수하들을 재촉한다. 곧이어 혈환적사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달려들어, 이척 길이의 쇠꼬챙이 같은 검을 휘두르며, “이 미친놈아! 그만 멈추지 못해!” “차차창, 챙챙챙!”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며 불꽃이 일며 허공을 밝게 비춘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단리유아를 향해서 공격해갔지만, 일수에 백팔가지의 변화를 일으키는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의 도세에 밀려 점차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벽해연수가 장내로 뛰어들며, “뭣들 하느냐! 어서 저 놈을 공격해라.” 말과 함께 연검을 휘두르며 공세에 합세한다. 다른 이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이를 부드득 갈며 단리유아를 향해서 덮쳐갔다.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일순간에 거의 이십여 명이나 죽어나갔던 것이다. 게다가 시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조각나 버리니, 두려움도 일었지만 먼저 동료들이 죽었다는 생각이 가득해서 다들 분노에 차서 달려들었다. 주위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보며, 왼손으로는 뇌벽권(雷霹拳)을 펼쳐 혈환적사를 공격하여 물러나게 만들고,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을 펼쳐 벽해연수의 연검을 흘린 후에, 다시 그녀를 향해 덮쳐가며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쳤다. “우르릉” “크흐키아악!” 한줄기 섬광(閃光)이 번뜩이며, “팟” “윽” “아, 안 돼!” 미간에 구멍이 난 채로 뒤로 쓰러지는 벽해연수의 모습을 보고 혈환적사가 소리치지만, 이미 벽해연수는 죽음의 강을 건너간 뒤였다. “이, 이 악마같은 놈. 뒈져랏!” 이를 갈며 혈환적사가 덮쳐갔지만, 단리유아는 그를 피하며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그 나머지 적들을 죽이고 있었다. 앞에서 검을 휘둘러 공격하는 흑영전(黑影殿)의 고수를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피한 후에, 뇌전지(雷電指)로 심장에 구멍을 내고는 상대의 검을 뺏어들었다. “팟” “윽” 뒤쫓아 오는 혈적환사를 향해서 죽은 자를 차서 날리며, 다시 앞으로 뛰어가며 왼손으로는 검을 펼치고 오른 손으로는 도를 휘두르며 사방에서 덮치는 적들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차차차. 채챙.” “콰쾅. 퍼펑” “으아악. 으윽.”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장력이 터지는 소리, 처절한 비명이 이어지며 장내는 한바탕 지옥도를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공격하던 천지신교 무리들이 오히려 단리유아의 투기에 짓눌려서, 두려움에 질린 채 뒤로 물러서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다. 다들 이와 같은 혈전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고, 이처럼 난전 속에서 날뛰는 자도 상대해본 적이 없었다. 혈환적사를 제외하고는 혼자서 단리유아를 멈추게 할 만한 사람도 없는데다가, 곳곳에 상처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족족 상대를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단리유아가 일행과 헤어진 것도 이처럼 난전 중에 다른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 없이 싸운다면, 자신의 무공을 최고조로 발휘할 수 있고 실전에서는 자신을 막을 자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 도망친다면 오히려 불리한 것은 적들이지, 단리유아 자신은 아니었다. 혈환적사가 자신의 공격은 피한 채 다른 사람들만 공격하고 있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이 비겁한 놈아! 제발, 나하고 싸우자!” 자신이 접근하여 공격할 때마다 빠져나가며 다른 사람을 공격해가니, 혈환적사는 분통이 터져 죽을 정도였다. 일대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자신이 붙잡고 있는 동안 다른 고수들이 공격한다면 비록 죽이지는 못해도 치명상은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가 일류이상의 고수들이고 절정의 고수도 십여 명에 이르니 해볼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싸움이 시작되고 나니 아주 일방적인 싸움이 되고 말았다. 단리유아가 자신은 피한 채 나머지 고수들에게만 달려들어 죽이니, 아무리 절정의 고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지만 상대가 되지 않고 있었다. 혈환적사의 외침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적들을 죽이는 단리유아였다. 전방을 가로막는 이제 이십대의 젊고 아름다운 벽해궁(碧海宮)의 여제자를 향해서 다가가니,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제대로 초식도 펼치지 못한 채 무작정 검을 휘두른다. 이제까지 궁내에서 수련만 했었지 이렇게 살기 넘치는 혈전에는 끼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차차창”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오른손의 도로는 상대의 검을 막고 왼손의 검으로는 목을 날린 후에, 다시 검으로 그 목을 쳐내어 혈환적사에게 날리고는 다른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혈환적사가 다가오는 머리를 피하며, “저, 저 지독한 놈!” “으으, 아, 악마.”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와 더욱 천지신교의 무리들의 기세를 위축시켰다. 이미 사십여 명이 죽어갔고, 남아있는 자들도 전의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단리유아도 몇 군데 상처를 입었지만 치명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아예 상처는 무시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달려드니 이미 그 기세에서도 눌리고 있었다. 이렇게 이들과 단리유아가 싸우고 있을 때, 벽해비연(碧海飛燕)이 삼십여 명의 고수와 사상시마(四象屍魔)를 이끌고 장내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지원군을 보며 혈환적사가 이를 부드득 갈며, “으드득, 다들 조금만 더 버텨라. 이제 원군이 왔으니, 놈이 죽는 것도 시간문제다.” 싸움에 빠져 적들을 죽이고 있던 단리유아도 혈환적사의 목소리에 다시 원군이 도착한 것을 알고는, 왼손의 검에 강기(剛氣)를 주입해 전방으로 내던졌다. 흑영전(黑影殿)의 고수가 피하며 검을 쳐내는 순간, 검과 강기가 폭발하며 일순간 장내에는 벽력성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꽝! 콰콰꽝!” “아아악. 으악. 윽” 방원 오 장 이내는 조각난 검에 의해 근처에 있던 모든 적들의 몸뚱이가 관통되었고, 폭발하는 강기에 의에 일 장 이상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이런 모습에 충격을 받아 잠시 적들이 공황에 빠져있을 때, 단리유아는 뚫어진 길을 통해서 다시 서쪽으로 달아났다. ****** 이벤트에서 뽑힌 분들을 정했으니, 그분들은 보시고 답장을 주세요.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2 벽해비연(碧海飛燕)과 함께 장내에 도착한 사상시마(四象屍魔)는 멀리 달아나고 있는 단리유아를 보며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강호십대고수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거의 백 명의 고수가 모여서 달려들었는데도 별다른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피해만 막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이 무인지경으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모습에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사상검마(四象劍魔)가 주위를 돌아보다가 벽해비연을 향해, “넌 이곳을 정리하는 대로 뒤쫓아 와라. 우리는 먼저 저놈을 쫓아갈 테니.” 말과 함께 벽해비연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아우들을 데리고 단리유아를 추격해갔다. 그 순간에도 단리유아와의 거리 차는 벌써 삼십 장 정도로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섯!” “단리애송아! 그만 달아나고 한번 싸워보자!” 뒤쫓던 사상시마(四象屍魔)가 서로 소리친다. 힐끗 고개를 돌려 상대의 모습을 돌아보던 단리유아는 오히려 추운산영신법(追雲散影身法)을 극성으로 펼쳐서 달려 나갔다. 쫓아오는 사상시마의 모습에 보통의 고수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저들 뜻대로 멈추어 싸우는 것은 바보짓에 불과했던 것이다. 전력으로 쫓아감에도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모습에 막내인 사상륜마(四象輪魔)가, “오지랄 놈 같으니, 더럽게 빠르군.” “흐흐, 너무 걱정 마라. 저놈이 아무리 빨리 달아나도 결국에는 우리 손바닥 안이지. 저쪽으로 계속 간다면 철목군(鐵木軍)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사상검마가 말하며 더욱 속력을 내어 뒤쫓는다. 한밤중의 희미한 달빛 속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들판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 근처 북부일대 향격리랍(香格里拉)은 고산지대 임에도 불구하고 우거진 숲보다는 푸른 초원이 연이어 펼쳐진 곳이었다. 군데군데에 작은 숲이 보일 뿐이었는데, 많은 계곡이 있음에도 주변에 수풀이 무성하지 않으니 은신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처럼 숨을만한 지역이 없어서 일단 시야에 들어오면 추적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반 시진이 못되어 점점 사상시마(四象屍魔)와의 거리가 벌어져 시야에 가물거릴 정도가 되었지만 단리유아는 잠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일단 초원을 벗어날 때까지는 계속 달리다가 적들의 시선을 벗어나는 순간에 계곡 쪽으로 뛰어들기로 했다. 잠시 뒤를 돌아보다가 산등성이를 돌았을 때 방향을 바꾸어 왼쪽의 산 위로 향한 다음, 한쪽의 바위 그늘 아래에 숨어서 사상시마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얼마가지 않아 그들이 알아차린다고 해도 잠시 동안은 시간을 벌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격전이 이어져 상처는 별로 심하지 않았지만, 내력의 소모와 피로함은 어쩔 수 없었다.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매고 있을 때, 백여 장 떨어진 산 아래를 지나가는 사상시마(四象屍魔)를 볼 수 있었다. 바로 자옥신단(紫玉神丹)을 먹고는 조식을 통해서 기혈을 조절했다. 시간이 더 있어서 제대로 운기행공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에 있어서는 이 정도의 시간도 더없이 귀중했다. 이들은 자기가 서쪽으로 계속 갈 것이라 여길 것이지만, 단리유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일단 남쪽으로 향해서 조금 휘저은 후에 다시 방향을 바꾸어 달아나 최대한 이들을 혼란시킬 생각이었다. 한참 동안 달려가도 단리유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자, 그제야 사상시마(四象屍魔)도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여우같은 놈. 다시 숨었군.” “어서 가자. 아까 산을 지나치기 전까지는 눈에 보였으니, 틀림없이 그곳에 숨었을 것이다.” “뿌드득, 난 그놈을 잡으면 먼저 다리를 분질러 놓겠소. 제기랄, 한밤중에 이런 숨바꼭질이나 하고 있다니.” 서로 욕설을 내뱉으며 지나쳤던 산 쪽으로 향했다. 이들이 다시 길을 되돌아 왔을 때, 단리유아는 산을 넘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멀리 산꼭대기를 넘어가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 사상시마가 다시 뒤를 쫓았다. 한편, 단리유아가 이렇게 십리삼원(十里森原)의 입구를 돌파하여 나갔을 때, 일행 역시 반대편 쪽으로 향한 후에 산등성이를 타고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행이 십리삼원의 북서쪽 끝에 이르렀을 때, 멀리서 희미한 폭음이 들려왔다. 일행이 있는 곳과는 거의 십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들려올 정도니, 어느 정도의 소리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휴, 단리소협이 먼저 시작한 것 같은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저도 소사숙이 걱정되는군요. 저쪽에 주로 고수들이 모여 있을 것이고, 적들도 수백에 이를 텐데.” 공손고와 선상조가 폭음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말한다. 걱정스런 기색이 가득한 두 사람을 향해서 기혼사가, “너무 걱정마라. 너희도 알다시피 포위되지만 않는다면, 일대일로서 그 사람과 싸울 사람은 찾아볼 수 없을 테니. 그 말대로 치고 빠진다면 위험하기는 해도 무사할 테니.” “그래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사숙 혼자서 그 험한....” 선상조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할 때, 팔망수괴가 중간에 끼어들어, “지금 그놈 걱정할 때냐. 빌어먹을, 눈앞의 일이나 걱정해라. 틀림없이 이쪽에도 적지 않은 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우리가 달아나야 그놈도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을 테니. 제기랄, 재수 없이 끼어들어 한밤 내내 싸우게 생겼는데, 너희들은....” “입 닥쳐! 정말 너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겠다. 어떻게 된 게 어린 애처럼 계속 그렇게 투덜거리기나 하냐?” 기혼사가 소리치는데, 정말 이 팔망수괴의 말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였던 것이다. 팔망수괴가 곧바로 기혼사를 노려보며, “뭐라고? 이 늙은이가 못하는 말이 없네. 네가....” “두 분 다 그만 하십시오. 저기 놈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도 않습니까?” 공손고가 중간에 끼어들어 앞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십리삼원(十里森原)에서도 벗어난 산언덕을 내려가는 지역에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이 한밤에 얼마나 많은 적들이 모여들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는데, 일행이 사방을 따져보았을 때는 최소한 삼백 명 이상이 움직인 것 같았다. 팔망수괴가 상대의 복장을 확인하고, “젠장! 더럽게 많군. 오십은 될 것 같은데? 피에 미친 적전파(赤典派)와 벽해궁(碧海宮)의 계집들이잖아. 다들 조심해라. 특히 적전파 놈들은 주의해. 저놈들은 안 되겠다 싶으면, 자폭공까지 쓰는 놈들이니까. 만일 눈이 충혈 되고 얼굴이 부풀어오면 무조건 삼 장 밖으로 피해라. 아니면 바로 심장에 구멍을 내야 해.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중상을 면하지 못할 테니.” 한순간도 멈춤 없이 내리 말한다. 이에 다들 무기를 꺼내면서도 침중한 안색이 되었다. 이때, 기혼사가 일행을 돌아보며, “모두들 내가 나누어주었던 해독약을 복용해라. 흐흐, 이참에 분풀이나 실컷 해야겠다. 다시는 뒤쫓을 생각을 못하게 박살을 내주지. 너희들도 행여나 상대를 봐줄 생각마라. 일단 적이라 여긴다면, 가장 잔인하고 효과적으로 죽이는 것이 좋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더 덜어줄 테니.” “잔말 말고 빨리 솜씨나 부려봐라! 이 잘난척하는 늙은이야!” “너 이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정말....” 팔망수괴의 빈정대는 말에 기혼사가 노려보며 계속 소리치려다가, 상황이 상황인지라 중간에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지난번 소적교(素赤橋)의 일로 독탄(毒彈)을 몇 개 만들어봤는데, 이번에 한번 시험해봐야겠다. 내가 독탄을 던진 후에 바로 뛰어들어서 저놈들을 죽여라.” 말과 함께 품속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검은 색의 독탄을 꺼낸다. 일행이 각자 무기를 꺼낸 채 언덕을 내려가 십여 장 가까이 다가가니, 적전파(赤典派)의 무리 중에서 한명의 대한이 나와서 소리친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죽고 싶지 않다면.” 계속해서 다가가다가 기혼사가 독탄을 내던지며, “흥! 이거나 먹어라. 이 자식들아.” “퍼펑!” 이와 동시에 일행도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적진의 중앙에 두 개의 독탄이 터지자, 곧이어 검은 색의 독분(毒粉)이 사방으로 퍼지며 적들을 중독시켰다. “독이닷! 모두 물러서라, 어서!” 눈치 빠른 사람들 몇몇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지만, 이미 과반수이상이 중독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점차 중독되고 있었다. “윽, 케켁.” “비, 비겁한 놈들.” 이처럼 당황하여 혼란 상태에 빠진 적들을 향해서, 일행이 뛰어들어 각자의 무기를 휘둘러 상대를 죽이고 있었다. 이미 독에 중독된 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 없었다. 팔망수괴가 양손에 한자 길이의 단검을 든 채 상대를 공격하며, “이거 원 너무 싱겁군. 야, 임마. 그럴 때는 이렇게 공격해야지. 너 지금 내 앞에서 춤 추냐? 킬킬.” “이 미친 늙은이가!” 놀리듯이 곳곳에 상처를 내는 모습에 적전파(赤典派)의 고수가 분통을 터뜨리며 몸을 내던져 달려든다. 상대의 모습에 화혈분시공(化血分屍功)을 쓰려는 것을 느끼자, 곧바로 왼손의 검을 날려 심장을 꿰뚫으며, “흐흐, 자식이 어른이 가르침을 주면 따라야지. 감히 욕이나 해? 흥! 그렇지 않아도 한밤중에 쫓겨서 화가 나 죽겠는데....” 상대를 밀치고 지나가며 끊임없이 떠든다. 기혼사가 철편으로 자신의 상대를 쳐서 날리며, “야 이 수다쟁이야! 지금이 장난칠 때냐? 나중에 나보다 적게 죽였다면 넌 내손에 죽을 줄 알아라.” “흥! 댁이나 잘하셔. 쓸데없는 걱정 말고. 그동안 당한 분풀이나 좀 하자는 것인데, 늙은이가....” 코웃음을 날리면서도 떠드니 오히려 상대하던 적들이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두 사람은 여유가 있어서 떠들었지만, 공손고와 선상조는 각기 일수 일수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처음 독기에 중독되어 기습적으로 죽은 이십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상대는 삼십여 명이 남아 있었다. 선상조는 사방을 포위한 벽해궁(碧海宮)의 여제자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지난번과는 달리 몸을 사리지 않고 죽이려는 의지에 가득차서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차차창. 채챙.” 한수검법(寒愁劍法)의 일초인 차천폐광(遮天閉光)을 펼쳐 사방의 공격을 막고, 전면의 여인을 향해서 뛰어들어 검을 들어 사선으로 올려치며 왼다리로는 상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챙그랑 창. 퍽!” “악!” 그와 동시에 해연비산보(海燕飛散步)를 펼쳐 측면의 공격을 피하며 검신에 뭍은 선혈을 흩뿌려, 회피하려 고개를 돌리는 상대에게 달려들어 일검파벽(一劍波劈)의 일식으로 상대의 목덜미를 찌르며 지나간다. “아악” “이 비겁한 놈! 여자한테 그따위 더러운 술수나 쓰다니.” 쓰러지는 동문을 보며 다른 벽해궁(碧海宮)의 제자가 소리칠 때, 말없이 검에 묻은 핏방울을 상대에게 털어내며 다시 달려들었다. 머리를 노린 채 다가오는 상대의 검의 측면을 막아선 후, 검면을 따라 몸을 회전하여 상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차차창 퍼퍼펑.” “아아악.” 가슴에 연달아 삼권을 날린 후에, 곧바로 돌아서 다른 쪽에서 다가오는 상대의 공격을 신법을 펼쳐 피하고 또다시 달려들었다. 이미 웬만한 상처는 신경 쓰지도 않는 채, 오직 상대를 죽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악. 윽. 흐윽.” “차차창. 채챙. 퍼펑.” 장내는 비명성과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뒤섞여 흐르며, 피비린내와 살기만이 안개처럼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점차 시간이 갈수록 적들의 저항도 미약해져 가고 있었는데, 기혼사와 팔망수괴가 경쟁적으로 달려들어 죽이고 있었던 데다가 중독된 상태여서 제대로 싸울 수 없었던 것이다. “도, 도망치자.” 이때, 겁에 질린 벽해궁(碧海宮)의 한 여제자가 소리치며 뒤로 물러서 달아나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기세가 죽어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다들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팔망수괴가 쫓아가 계속 상대를 죽이려는 모습에 기혼사가 소리쳐, “그만 둬, 이놈아! 어서 여기를 뜨기나 하자. 또 다른 놈들이 오고 있을 지도 모르니.” “제기랄, 한참 신나게 죽이고 있을 판이었는데....” 떠드는 팔망수괴는 내버려둔 채, 이미 일행은 저만치 떨어져 기혼사를 뒤따라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소리치며, “같이 가! 어떻게 나만 남겨두고 너희들끼리만 가냐? 틀림없이 저 늙은이가....” 궁시렁대며 뒤를 쫓는다. 장내에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미약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과 시체가 되어 쓰러진 사람들, 조각난 사지와 무기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돌아와서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그 모습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중원인들의 명령에 따라서 행한 일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니 후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 시간 십리삼원(十里森原)의 입구에 도착한 철목군주(鐵木君主)는 또다시 단리유아를 놓쳤다는 소식에 광분하고 있었다. 철목십검이 가마를 내려놓자마자, 가마 주위를 호위하고 있는 철목대주(鐵木隊主)를 향해서, “철목대주, 당장 저 쓸모없는 계집을 죽여 버려라.” 철목대주가 말없이 검을 빼들어 장내로 접근하니, 벽해비연(碧海飛燕)이 털썩 주저앉으며 애처롭게, “군주님, 한번만 더 봐주십시오. 이번일은 제가 미처 손을 쓸 수도 없이 일어난 일이니....” “닥쳐라! 떠나올 때 전서구로 어떻게 해야 할지 연락했을 것이 아니냐? 어떻게 포진하고 경계를 했기에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에도 달아날 수 있단 말이냐!” 살기 넘치는 철목군주의 목소리에 한쪽에 서있던 혈환적사(血換赤師)가 끼어들어, “군주님, 이것은 벽해비연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리유아가 이리도 빨리 기습할 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니....” “흥! 그러면 네놈이 대신 벌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라. 패군지장인 주제에.” 냉소하는 철목군주의 말에 혈환적사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쳐, “군주. 우리는 그대들의 약속을 믿고 동맹을 한 것이지. 결코 그대들의 수하가 아니오. 이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요? 이미 우리 삼파의 피해도 적지 않은 상황인데.” 이에 뚝뚝 끊어지는 듯한 살기 찬 어조로 철목군주가,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감히 반기라도 들겠다는 것이냐?” 혈환적사가 앞으로 나서며, “결코 그런 뜻이 아니오, 군주. 단지 이번 일은 벽해비연만 책임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일 뿐이오. 단리유아 그놈의 무위가 우리가 듣던 바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소. 우리가 들은 것은 그놈이 주로 검을 쓰고 최고무공도 검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 그놈이 싸울 때에는 검보다는 도를 쓰는 것이 대부분이었소.”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런 꼴을 보이다니.” 한기서린 철목군주의 목소리에 혈환적사가 고개를 저으며, “군주도 그놈을 직접 상대해보면 얼마나 잔인한 놈인지 알게 될 것이오. 지금 여기를 보시오. 모두들 두려움에 질려 있지 않소?” 가마의 주렴 사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쓸모없는 것들! 좋다. 그러면 벽해비연은 살려주지. 하지만 책임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으니, 한 팔은 내놓아라.” “군주, 그것은....“ 혈환적사가 말할 때, 벽해비연이 스스로 왼팔을 자르며, “군주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꼭 보은하겠습니다.” 고통을 참으며 입술을 깨문 채 대답한다. 혈환적사가 더는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사갈 같은 계집 같으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함부로 하다니.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알만하군. 두고 보자’ 이렇게 철목군주(鐵木君主)가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 전서구가 와서 나머지 일행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철목군주가 냉소를 날리며, “흥! 어떻게 된 것이 제대로 된 놈들이 없군. 하여간에.... 벽해비연,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지금 즉시 나머지 운남지단(雲南支壇)의 고수들을 이끌고 놈들을 추격해라. 이번에도 놈들을 놓친다면 그때는 아예 돌아올 생각도 말아라.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직접 죽여 버릴 테니.” 벽해비연이 복명하고 데려온 삼십여 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떠나고, 사방을 포위하던 고수들에게도 전서구를 날려 추격하도록 한다. 잠시 후, 철목군주가 명령을 내려, “혈환적사(血換赤師), 넌 즉시 나머지 삼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단리유아를 추격해라. 지금 사상시마(四象屍魔)가 추격하고 있으니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만 못하게 막고, 그놈을 중전(中甸) 쪽으로 모는 데에만 최선을 다해라.” 복명하고 혈환적사가 떠나자 곧바로, “철목대주, 너는 향초령(向楚嶺)에 숨어있는 철목군(鐵木軍)을 남하시켜 중전(中甸) 쪽으로 향하게 해라. 그리고 다시 소식을 전해서 지원 요청했던 갈단사와 벽해궁의 고수들은 중전 밖 흑암평(黑岩坪)에 포진시켜라. 이번만은 달아나지 못하게 포위해야 한다. 명심해! 우리가 먼저 포위망을 구축하느냐에 이번일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것을. 모두 전속력으로 움직이도록 해라. 그리고 우리도 즉시 중전 쪽으로 향한다.” 모두가 부산하게 움직여 단리유아의 예상경로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공을 펼쳐 전속력으로 떠나는 고수들을 보며, 가마 속에서 철목군주(鐵木君主)가, “단리유아, 단리유아야. 어디 이번에도 빠져나갈 수 있는지 보자. 천하에 무정한 인간 같으니, 내가 이리 된 것도 모두 네놈 탓이야. 으드득, 반드시 네놈만은 죽이고야 말겠다. 무슨 수를 쓰던지.” 과거 자신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무정하게 떠나버린 단리유아를 향해서 이를 갈며 중얼거린다. 우연히 운영비곡(雲影秘谷)에 들어섰을 때에 단리유아는 한참 명성을 날리던 때였고, 임유정(林有情) 역시 십칠 세의 꿈 많은 아름다운 소녀로서 운영비곡의 소곡주였다. 당시 기문진(奇門陣)을 뚫고 갑자기 들어선 단리유아를 보고 운영비곡의 사람들이 적으로 오해하여 싸우게 되었는데, 살수를 펼치지 않고 피하는 데에만 전력을 다했던 단리유아는, 마지막으로 싸웠던 당시의 운영비곡주인 운영신녀(雲影神女)와의 싸움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나중에야 오해가 풀려 한 달 가까이 운영비곡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고 운영신녀와도 논무를 하며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공이 고강한 것을 보고 느끼는 단지 소녀다운 동경 정도에 불과 했는데, 운영신녀와의 대화 속에 드러나는 해박한 지식과 무심한 표정에도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에 임유정도 연심을 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 자신이 느끼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단리유아에게 빠져, 하루 종일 곁을 따라다니며 종알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명과 자신의 처지에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오히려 더욱 피하려고만 했던 단리유아는, 결코 요지부동으로 무정할 뿐이었다. 나중에는 울며 매달려 정을 호소함에도 매몰차게 떠나버리니, 어린 마음에 큰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태상교주의 눈에 들어 제자로 들어가, 여인으로서는 익혀서는 안 되는 금단의 태음현마공(太陰玄魔功)을 익힌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태음현마공은 음공(陰功) 계열의 무공으로서는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지만, 익힐수록 석녀(石女)가 되어 아이를 가질 수 없고 점차 그 심성과 외양이 변하게 되는 마공이었다. 성취가 높아질수록 인간의 마음은 잃어버린 채 오직 상대를 죽이려는 살기에만 물들게 되는 마녀가 될 뿐이었다. 가슴 앞으로 흘러내린 회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철목군주(鐵木君主)가 반드시 제 손으로 단리유아를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가마 주위를 둘러싸고 움직이던 철목십검 모두 그런 모습에 다들 걱정스런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점차 마공이 깊어짐에 따라 예전의 다정다감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살기에 가득 찬 마녀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좀 더 시일이 흐른다면, 그 자신조차 잊어버린 채 오직 피를 찾아 떠돌게 될지도 몰랐다. 태상교주가 태음현마공(太陰玄魔功)을 익히게 한 이유가 의심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그들이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이리 변한 임유정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다들 단리유아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따뜻한 한 마디 말이라도, 적어도 기다려 달라는 말이라도 했다면... 소란스레 움직이는 갖가지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며, 한줄기 차가운 달빛만이 무심하게 천지를 흐르고 있었다. 어리석은 욕망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을 조롱하듯이. ****** 어제는 출판사에 넘길 4권을 수정하느라 미처 올리지 못했습니다. 다 끝났으니 앞으로는 제대로 올리겠습니다. 기다리셨던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것이 없군요. 그리고, 이벤트에 당첨된 분들은 이전의 공지 란에 덧붙여 아이디를 적어놨으니, 메일이나 메시지로 연락을 바랍니다. ##### 현문님의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3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남쪽으로 향하던 단리유아는, 흑암평(黑岩坪)에 거의 다 왔을 때까지도, 거리가 약간 벌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사상시마(四象屍魔)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다른 자들과 싸우는 중에 포위되어 합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느끼자, 먼저 이들을 처리하고 가기로 했다. 경공을 펼쳐 따르는 수준을 볼 때 모두가 화경(化境)에 근접한 고수들로 보였는데, 만일 그들과 싸울 때 진법(陣法)이라도 펼친다면 자신이 오히려 불리할 것은 자명할 것으로 보였다. 현재의 자신의 수준으로는 화경에 달한 세 명의 고수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물리칠 자신이 있었지만, 네 명이상 이면 불리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다섯이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을 터였다. 더구나 현재와 같이 사방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이들이 끼어들어 싸운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언덕을 끼고 돌 때, 방향을 바꾸어 언덕위로 향했다. 그런 후에 나지막한 관목과 잡초사이를 엎드려 천천히 이미 지나쳤던 언덕 아래로 기어갔다. 한쪽의 바위 뒤에 이르자 귀식대법으로 숨을 죽인 채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제 기습하여 먼저 한명이라도 죽일 수 있다면, 불리한 것은 그들일 것이다. 전력으로 단리유아를 뒤쫓던 사상시마(四象屍魔)가 꺾어지는 지점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사상검마가 아우들을 향하여, “잠깐, 이놈이 또 방향을 바꾸었을 지도 모르고, 혹시 숨어 우리를 노릴 지도 모르니 천천히 경계를 하며 나아가자.” “원 형님두 걱정도 팔자시오. 아무려면 그놈이 그럴 정신이나 있겠소? 요 앞이 흑암평(黑岩坪)이니, 이제 그놈도 독안에 든 쥐요. 흐흐흐, 놈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과 싸울 때 우리가 달려든다면, 제아무리 상천입지(上天入地)의 술수를 쓴다 해도 결코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오.” 사상륜마가 괴소와 함께 반론할 때, 사상창마가 잠시 생각하다가, “아닐세. 그놈이 지금까지 행한 일로 보아서는 아주 약은 놈이야. 조금 거리가 벌어지더라도 확실한 것이 좋지. 게다가 이제 다 왔다고 보아야 하니.” “나도 그 말에 동감하네. 더구나 그놈의 무공을 보았을 때는 합공하지 않는 한 우리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어. 강호십대고수에 들었다 해도 나이가 가장 어려서 별로 걱정하지 않았는데, 이제까지의 일을 볼 때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무공이 뛰어난 놈인 것 같아.” 침중한 안색으로 사상도마도 사상창마의 의견에 찬동한다. 이때, 한쪽에 숨어서 이들의 말을 듣던 단리유아는, ‘앞에도 적들이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이렇게 많은 고수들을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어디란 말인가? 휴, 계속 달려갔다면 꼼짝없이 포위망에 갇힐 뻔 했군. 차라리 이들을 피해서 다시 서쪽으로 달아날까? 아니야! 이들의 움직임을 볼 때 결코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텐데, 위험하더라도 이 기회에 이들만이라도 처치해야겠군.’ 생각을 하다가 결심을 굳히고는, 사상시마(四象屍魔)가 천천히 주변을 경계하며 언덕을 돌아설 때 공격해나갔다. 그들에게서 오륙 장 떨어진 바위 뒤에 숨어있던 단리유아는,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친 다음 그들 뒷머리로 떨어져 내리며 전력으로 제오절 지옥천폭류(地獄千瀑流)를 펼쳤다. “파파파팟!” “크흐키아악....” 앞쪽만을 경계하며 다가서던 사상시마(四象屍魔)가 갑작스레 뒤쪽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뒤돌아섰을 때는, 이미 바늘 같은 도강(刀剛)이 허공을 덮은 채 쏟아지고 있었다. 도성(刀聲)에 약간 멈칫하다가 사상검마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피, 피해랏!” 다급하게 소리치고 뒤로 신형을 날리며, 검을 들어 허공에 검막(劍幕)을 쳤다. 다른 이들도 이와 비슷하게 물러서며 각기 강기(剛氣)를 펼쳐 막아섰지만, 가장 뒤쪽에 위치해 있던 사상륜마는 미처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차차창! 퍼퍼퍽! 콰콰쾅!” “아악! 으윽 흑!” 빗살처럼 쏟아지는 도강(刀剛)에 강막(剛幕)이 뚫리더니, 곧이어 전신 곳곳이 터져나가며 사상륜마가 뒤로 퉁겨졌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푸들거리는 근육의 미미한 움직임만 있을 뿐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완전히 피할 수 없어서 각기 상처를 입었다. 사상창마는 왼쪽어께에 구멍이 뚫려 왼팔을 움직일 수 없었고, 사상도마도 목옆을 스쳐지나간 도강에 의해서 한쪽의 살점이 떨어져 나간 채 핏줄기가 분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상검마 만이 가장 거리가 멀었고 예측이 빨라서 큰 상처가 없었다. “막내야. 막내야!” 그들이 물러서며 쓰러지는 사상륜마를 보며 소리쳐 부르짖고 있을 때, 상대의 반격하는 힘을 빌러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던 단리유아가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이 미처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야했다. 위에서 떨어져 내리며 다시 제 삼절 지옥일수혼(地獄一殊魂)을 펼쳤다. “크흐키아악!” 귀를 찢는 도성과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일 장이 넘는 도강(刀剛)을 보고 각자 강기를 펼쳐 막으려 할 때, “이 죽일 놈! 막내를 죽이다니.” 오히려 사상도마가 앞으로 뛰쳐나가며, 도강(刀剛)을 펼쳐 단리유아를 향해서 덮쳐갔다. 그 자신의 도법 중의 일초인 월폭광(月爆光)을 펼쳤는데, 곧 반월형의 도강이 일어나 단리유아의 붉은 도강에 맞부딪쳤다. 그 모습에 사상검마가 소리치며, “안 돼! 둘째야, 어서 물러서라!” 말과 함께 다가오는 도강(刀剛)은 무시한 채, 검을 들어 자신의 검법 중의 일초인 일첨굉단(一尖宏斷)을 펼쳐, “버번쩍.” 한줄기 섬광과 함께 시퍼런 뇌전 같은 검강(劍剛)이 솟구쳐 단리유아를 노릴 때, 동시에 사상창마가 창법을 펼쳐 다가오는 도강을 막고 있었다. 곧이어 서로의 공세가 맞부딪쳐, “콰콰쾅! 퍼퍼펑!” “으윽! 윽. 윽” 굉음과 함께 곧이어 강기(剛氣)의 폭풍이 몰아쳐서 사방으로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이번의 부딪침으로 인해 사상도마는 완전히 왼쪽 어께가 날아가 버렸고, 직접적인 충격으로 내상도 가장 심했다. 다른 두 사람도 강기에 의해서 곳곳에 상처를 입고 있었고, 단리유아도 사상검마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해 왼쪽어께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잠시 공세를 멈추고 단리유아가 상처를 지혈하고 싸매고 있을 때,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시야가 드러났다. 서로의 모습을 노려보다가, 단리유아가 사상시마를 향해서, “도대체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또 그대들은 어떤 세력이오?” 연달아 묻는 단리유아의 말에 사상도마가 내상으로 넘어오는 죽은피를 내뱉으며, “퉤! 흐흐흐, 죽일 놈! 나중에 저승에 가서나 알아봐라.” “네놈이 막내를 죽이다니, 으드득.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사상검마가 이미 시신이 되어버린 사상륜마를 보고 이를 갈며 소리친다. 사상창마도 단리유아를 노려보며, “더러운 놈. 등 뒤에서 암습이나 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강호십대고수의 일인이라 할 수 있느냐?” “.....” 생사를 가르는 순간에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일단 판단해서 적이라 여긴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죽여야 했다. 처음부터 적이 아니라면 몰라도 그런 일에 신경 쓰는 자는 목숨을 여벌로 다니지 않는 한, 은원이 중첩되는 강호(江湖)에서는 단지 바보에 불과했다. 그들은 자신을 수십 명이 떼 지어 공격하면서 그런 소리나 하다니. 사상창마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단지 말없이 도를 들어서 상대를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이들을 보니 그 이유를 듣기에도 틀린 것 같았고, 아까의 말대로라면 다른 곳에서도 몰려들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이들을 해치우는 것이 좋았다. 일단 항거불능의 상태에 이르도록 만든 다음에 물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 남은 세 사람도 각기 흩어졌다. 정면을 사상검마가 막고, 왼쪽은 사상창마가, 오른쪽은 사상도마가 위치했다. 사상륜마가 죽지 않았다면 사상합벽진(四象合壁陣)을 펼쳐서 상대했을 테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으니 단순한 숫자의 우세에 의한 합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서로가 상대를 노려보고 자세를 갖춘 채 움직임이 없다가, 단리유아가 먼저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을 펼쳐 정면으로 환영(幻影)을 달려들게 하고, 오른쪽의 사상도마를 향해서 덮쳐갔다. 그가 가장 상처가 심해보였기에 먼저 없앨 생각이었다. 제 이절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를 펼쳐, “크키흐아악....” 붉은 색의 도광(刀光)이 번쩍이며 곧이어 허공에는 도영(刀影)만이 난무하고 있었다. 도성에 멈칫하던 삼마도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사상검마가 허상에 속았다는 것을 알고 방향을 바꾸어 단리유아에게 달려들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사상도마를 연속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차차창. 채채챙.” “파파팡. 퍼퍼펑.” “윽, 으윽.” 도강(刀剛)에 휩싸인 적운도의 연이인 폭풍 같은 공세에 사상도마가 최소한의 상처로 가까스로 막고 있을 때, 사상창마가 구원하려 달려들어 창을 휘두르고, 곧이어 사상검마까지 달려들어 숨 가쁘게 서로의 무기를 치고받고 있었다. 이런 근접전에서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강기(剛氣)에 살짝 스치더라도 중상을 면치 못했다. “빌어먹을, 내가 이렇게 당하다니. 으드득!” 다른 두 사람의 도움 속에 사상도마가 잠시 물러나, 또다시 늘어난 상처를 지혈하면서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곧이어 대충 지혈이 끝나자 다시 뛰어들며, “죽어라! 이 개자식아!” 도강(刀剛)을 형성한 채 뛰어들어 단리유아의 측면을 노렸다. 잠시 자신이 물러난 것에 불과함에도 다른 두 사람이 위태위태한 상태였던 것이다. 세 사람의 합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단리유아의 공세가 약간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단리유아의 연이은 공격으로 인해서, 세 사람 모두 여러 곳에 상처를 입다보니 평상시와 같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차차창. 퍼퍼펑.” “콰콰쾅.” “퍼퍼퍽. 투투툭.” 난무하는 강기(剛氣) 속에서 방원 십여 장을 돌아다니며 서로가 상대를 노리고 있었는데, 네 사람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서로의 무공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신영과 무기가 부딪칠 때 일어나는 불꽃이 이따금 보일 뿐이었고, 서로 간에 부딪치는 무기의 충돌음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또 이들의 싸움으로 인해서 주변은 곳곳이 패이고, 흙먼지와 조각난 수풀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적운도를 휘둘러 세 사람을 몰아쳐가며 단리유아는 생각하고 있었다. ‘기습하기를 잘했군. 그렇지 않았다면 이들을 상대할 수 없었을 것 같아. 이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고수들을 부릴 수 있는 단체가 어디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군. 휴, 정말 어찌된 일인지....’ 이에 반해서 나머지 세 사람도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끄러운 도성(刀聲)에 의해서 자꾸 진기의 흐름이 끊어지는 것도 문제였고, 합벽진을 펼치지 못하는데다가 다들 상처를 입고 있어서 단리유아의 도를 막는 데에도 급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 무슨 이딴 놈이 있지? 어떻게 이렇게 싸우면서도 내력이 끊이질 않고, 계속해서 도강(刀剛)을 펼칠 수 있지? 삼대일로 싸우며....’ ‘으으, 정말 끔찍한 도법이로군. 이놈의 도성(刀聲)이라도 어찌하면 그래도 나을 텐데. 빌어먹을, 저 소리에 제대로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겠군.’ ‘본교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놈을 건드리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들었던 소문으로는 별달리 세상사에 신경 쓰는 놈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괜히 건드려 골치 아픈 강적을 만들어낸 것 같은데.’ 세 사람이 속으로 생각하다가, 이렇게 근접전으로 계속 싸우다가는 자신들이 먼저 쓰러질 것이라 느끼자, 다들 목숨을 건 승부수를 띄우기로 결심하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눈짓만 보고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던지라 곧 서로의 뜻을 이해했다. 곧이어 세 사람이 일제히 신형을 뒤로 물려, 단리유아와 오 장 정도의 거리차를 벌린 후에 다시 자신들의 최고무공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제발 그만 죽어라, 이 악마 같은 놈아!” 소리치며 먼저 사상검마가 검을 들어 허공을 연이어 찌르듯이 휘둘러 만첨밀폭(滿尖密爆)을 펼치고, 사상도마가 이어서 원월참(圓月斬)을 펼쳐 둥근 월형의 강기를 펼쳐 덮친다. 반대쪽에서는 사상창마가 천창쇄멸(千槍碎滅)을 펼쳐 허공가득 창영을 형성한 채 돌진했다. ‘어쩔 수 없군. 한명이라도 살려둔 채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단리유아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그들이 이 일초에 승부를 걸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에 물러서는 그들을 보며 준비하던 단리유아도 완전히 죽일 결심으로 초식을 바꿨다. 먼저 백팔산영환마보(百八散影幻魔步)를 펼쳐 장내를 환영으로 뒤덮으며, 동시에 지옥파라구천절의 제 육절 지옥폭멸황(地獄爆滅荒)을 펼쳤다. 곧이어 붉은 도강(刀剛)이 허공에 층층이 도영을 만들고 이어서 서로 부딪쳐 폭발하며 사방으로 강기가 비산해갔다. “콰콰콰 쿠쿠쿵” 단리유아를 덮쳐오던 삼마가 이 광경에 멈칫할 때, 이미 서로의 공세가 부딪쳐나가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들 이를 악물며 온 내력을 쏟아 부은 채 그대로 밀고 나갔다. “꽈르릉! 꽝. 콰콰꽝!” “으아악, 악, 으윽!” “퍼퍼퍽, 투투툭.” 장내는 서로의 공세가 부딪쳐 폭발하는 벽력같은 굉음이 터져 나오고, 곧이어 비명과 함께 강기(剛氣)가 사방으로 흩어져나가 주위를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멀리서 다가들던 천지신교의 고수들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다들 서둘러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할 때, 가마 속에서 철목군주(鐵木君主)가 신형을 날려 뛰쳐나가며, “너희들은 최대한 빨리 뒤쫓아 와라! 내가 먼저 가볼 테니.” “군주님, 안 됩니다. 홀로 가시면....” 뒤에서 소리쳐 부르는 철목십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목군주가 전력을 다해서 경공을 펼치며 굉음이 울린 곳으로 달려간다.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희끄무레한 회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경공을 펼치는 모습뿐이었다. ‘아무래도 사상시마(四象屍魔)와 그 인간이 부딪친 것 같은데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군. 내가 갈 동안이라도 버텨야할 터인데.’ 철목군주가 달려오고 있을 때, 장내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단리유아 밖에 없었다. 이미 다른 두 사람은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이 산산조각이 났고, 그래도 사상검마만이 하반신이 날아간 채로 쓰러져 마지막 숨을 내쉬며 그르륵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단리유아도 무사하지는 못해서 심각한 내상과 함께 전신 곳곳이 터져나갔는데, 외상보다는 내상이 심각한 상태였다. 하룻밤 내내 싸우고 달아나기를 반복하다보니, 내력의 고갈과 함께 이번의 싸움으로 인한 내상으로 온몸이 피곤한 채 움직이기도 싫을 정도였다. 거듭 어혈을 뱉어내 숨을 고르고, 자옥신단(紫玉神丹)을 먹고 나서 지혈을 한 뒤에 옷을 찢어서 대충 상처부위를 감쌌다. ‘휴, 정말 하룻밤 내내 싸우는군. 왜 그러는지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언제나 이런 살겁(殺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가만히 있어도 천살(天殺)의 운명은 피할 수 없단 말인가? 어째서 세상은 나를 가만 두지 못하는가?’ 한숨을 내쉰 채 잠시 생각하다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신법을 펼쳐 서쪽으로 달아났다. 일단 금사강(金沙江) 쪽으로 향한 다음 협곡을 건너서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현재에 있어서 싸운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다. ***** 老翁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명칭이 비슷해서 쓰는 저도 헷갈립니다. 나중에 책으로 나올 때는 약간 수정할 생각입니다.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4 단리유아는 뒤쫓는 인형의 추적을 피해서 중전(中甸)의 외곽을 지나쳐 서쪽으로 계속해서 달렸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전력을 다해서 신법을 펼침에도 그 추적을 떨칠 수 없었다. 연이은 격전으로 내력의 소모와 내상 때문에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힐끗 고개를 돌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인형을 보다가, 흑의를 입은 여인이라는 것을 알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한 여인이군. 여중제일고수라는 철심마비(鐵心魔妃)의 무공도 저 정도는 안 될 텐데, 강호에 저런 여고수가 있었나? 도대체 이 집단이 어떤 곳이길래 이런 고수들이 이리도 많지? 부딪쳤던 삼파의 고수를 합한 것만 해도 대단할 터인데. 휴, 어쨌거나 지금 상태로 저 정도의 여인과 싸웠다가는 곧 주위를 포진한 고수들에게 포위될 테니, 일단 금사강(金沙江)을 넘어서 추격을 따돌린 후에나 어찌해야 하겠군. 이미 날이 샜으니 그들도 한꺼번에 이동하기에는 약간이나마 부담이 되겠지. 아직까지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숨겨야할 것이 많을 테니.’ 이렇게 두 사람이 쫓고 쫓기는 상황이 계속 이어져 금사강(金沙江)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샌지 한참이 흘러 태양은 온 누리를 밝게 비추고 있는 진시(辰時:7-9시) 말이었다. 단리유아가 흑암평(黑岩坪) 외곽에서 사상시마(四象屍魔)와 싸운 후에 도망친 지도 거의 두시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금사강(金沙江)의 상류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그 협곡의 깊이가 최소한 백여 장에 달할 정도로 깊은 곳이 연이어져 있었지만, 좌우의 폭에서는 좁은 곳이 많아서 마치 도끼로 찍어 내린 듯한 절벽이 곳곳에 보이는 곳이었다. 단리유아의 생각은 일단 금사강에 이르러 협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적당한 지형에서 협곡을 건너뛰어서 건너편의 산악지역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중전(中甸)일대와는 달리 금사강과 란창강(瀾凔江) 사이의 지역은 그래도 몸을 감출만큼 수풀이 무성한 산악지형이 많아서 잠시간이라도 추적을 뿌리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금사강(金沙江)에 이르렀을 때, 뒤쫓던 철목군주(鐵木君主)와 단리유아의 거리는 거의 육칠십 장까지 가까워지고 있었다. 단리유아는 힐끗 뒤를 돌아본 후에 다시 강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적당한 곳을 찾았다. ‘흥! 당신이 협곡을 넘어가 숲속으로 뛰어들 생각인가 본데, 그렇게 쉽게 도망치지는 못할 걸? 지옥 끝까지라도 당신을 쫓아갈 테니.’ 단리유아의 뒷모습을 보며 철목군주는 더욱 신법에 박차를 가해, 그 의도를 알고는 강을 따라 일직선으로 뒤쫓았다. 강을 건너 숲속으로 뛰어든다면, 추적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고 잘못하다가는 놓칠 수도 있었다. 단리유아가 마침내 폭이 십여 장에 불과한 적당한 지역을 발견하고 멈추지 않고 신형을 솟구쳐 건너편으로 건너뛸 때, 이십여 장까지 따라붙은 철목군주가 다급히 머리에 꽂힌 한옥잠(寒玉簪)을 빼내어 단리유아를 향해서 집어던졌다. “호호홋. 이 무정한 인간아,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휘익!” 단리유아도 뒤쪽에서 무언가 암기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두 절벽 사이를 날고 있는 상황에서는 딱히 대책이 없었다. ‘정말 끈질긴 여인이로군. 포기할 만도 한데, 이렇게까지 추격하여 죽이려하다니.’ 급히 풍차전륜(風車轉輪)의 일식으로 몸을 둥글게 말아 앞으로 회전하며, 뒤쪽에서 다가오는 암기를 장력으로 쳐냈다. “퍼펑!” 겨우 방향을 바꾸었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서 허벅지에 옥잠(玉簪)이 꽂히고야 말았다. 그 충격에 겨우 건너편에 내려서서 뒤를 돌아보니, 여인이 절벽에 선 채로 크게 웃고 있었다. “우욱!” “호호호, 무정한 인간아! 꼴 좋구나. 과거에는 날 버리고 떠났지만, 이제는 내 손아귀에서 결코 달아날 수 없을 걸?” 옥잠에서 퍼져나가는 한기가 순식간에 하체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옥잠을 빼어보니 반자 정도의 길이로서 천년한옥(千年寒玉)에다가 봉황을 상감한 것이었다. 한옥에다 다시 한기를 실어서였는지 순식간에 지독한 음한지기(陰寒之氣)가 퍼져나가, 벌써 왼쪽 다리 아래로는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상의를 찢어서 대충 허벅지의 상처를 싸맨 후, 내력을 돌려 한기를 몰아내며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윽, 지독한 음한지기로군. 저 여인의 태도를 보면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지? 저런 모습의 여인은 기억에 없는데? 저 정도로 특이한 생김새라면 누구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을 터인데.’ 이때, 철목군주(鐵木君主)의 모습은 회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이목구비만 따진다면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생김새라 할 수 있었지만 회칠을 한 듯한 창백한 얼굴이 그 아름다움을 죽여서 오히려 강시처럼 음침해보였다. 자신은 모르는 여인 같은데도 마치 자신을 잘 아는 듯한 여인의 태도에, 곧바로 철목군주를 향해서, “나를 잘 아는 것 같은데, 당신은 누구요?” “으드득, 내가 누구냐고? 날 기억하지도 못한단 말이냐?” 철목군주가 곧바로 소리치며 되묻는다. 그녀 자신은 한시도 지난 일을 잊지 못해 칠여 년을 괴로움 속에서 매일 악몽을 꾼 듯이 보냈는데, 자신을 전혀 몰라보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그동안의 애증(愛憎)이 물밀듯이 끓어올라 그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호호호!” 철목군주(鐵木君主)가 한동안 고개를 젖힌 채 애증이 엇갈린 웃음을 터뜨리다가, 단리유아를 노려보며 안색을 굳히고 싸늘한 어조로, “이 무정한 인간아, 조금만 기다려라. 끝까지 쫓아가서 당신을 죽이기 직전에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줄 테니.” 한 맺힌 듯한 여인의 외침에 단리유아의 가슴에도 한줄기 냉기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누구지? 내가 만난 여인 중에서 이렇게까지 나에게 원한을 품을 사람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하고 있다가 상대가 협곡을 건너오려는 모습을 보고,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님을 알았다. 곧바로 옥잠을 내던지며, “휘익!” “나를 죽일 테면 어디 한번 쫓아와 보시오.” 말과 함께 신형을 돌려서 산을 향해서 내달렸다. “퍼펑!” 곧바로 단리유아가 날린 옥잠에 철목군주가 신형을 뒤집어 내려서며 장력으로 쳐낸다. 이윽고 옥잠을 회수한 철목군주가 절벽을 건너서 다시 단리유아의 뒤를 쫓았다. “흥! 내 손에서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현재 단리유아와 철목군주가 있는 곳은 란창강(瀾凔江)과 금사강(金沙江) 사이에 위치한 권련산(捲蓮山)의 동쪽 끝이라 할 수 있었다. 높이 이만척이 넘는 고봉이 연이어진 권련산은 이전의 횡단산맥(橫斷山脈)과는 달리 산중턱 아래로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한번 들어가면 그 종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일단 저 여인을 외진 곳으로 유인한 후에 자초지종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군. 나머지 적들도 뒤쫓고 있을 테니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추적을 피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니.’ 뒤쫓아 오는 철목군주를 보면서 일단 단리유아는 숲속으로 뛰어들어 계속해서 계곡과 산봉우리를 넘어서 서쪽의 란창강(瀾凔江)으로 향했다. 단리유아가 숲속으로 뛰어들어서 약간씩 거리가 벌어지거나 잠깐 추적의 손길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완전하게 철목군주를 떨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반나절 넘게 계속 달려서 해가 저물어가는 유시(酉時:17-19시) 무렵, 어느 정도는 거리를 벌였다고 생각하자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이곳이라면 다른 곳에서 찾기가 쉽지 않겠지. 여기서 그 여인을 붙잡아서 물어본 후에 다시 떠나가도 늦지는 않을 테니, 일단 잠시 쉬면서 내력을 회복해야겠군.’ 단리유아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언덕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조식을 취하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단리유아가 위치한 곳은 산봉우리 사이의 사방 오십 장 정도 되는 작은 분지로서, 서쪽을 제외하고 나머지 삼면은 칼날 같은 산봉우리가 둘러싼 곳이었다. 산꼭대기에서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분지를 돌아서 산 아래로 향하고 있었고, 자그마한 시내를 사이에 두고 작은 연못과 자잘한 초지만이 펼쳐져 있었다. 지면에서 백여 장 높이로는 희미한 운무가 깔려 있어서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바라보아도 제대로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답군. 아무런 인적도 없고 바람마저 고요해서 이런 곳에서 은거하기에는 정말 좋겠는데. 휴,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은 뭔가?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 오늘도 이렇게 사람을 죽이고 상처만 가득하다니. 이렇게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이 결코 좋지 않을 터인데. 앞으로의 진전에도 영향을 줄 것 같으니, 더욱 갈 길이 지체되겠군. 게다가 정체모를 집단마저 노리고 있으니, 제대로 수련을 계속할 수나 있을까?’ 조식을 마치고 주위의 정경을 둘러보다가, 시냇물에 뛰어들어 피와 상처를 닦아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핏덩이가 풀려 검붉게 시냇물을 물들이며 하류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의 앞날을 나타내는 것처럼 계속해서 퍼져가는 핏물이 넌 결코 피의 운명(運命)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넌 결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운명의 실타래를 너 같은 인간이 끊을 수 있을 것 같아? 흥! 그만 포기하고 순응하는 것이 어때? 킬킬킬,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즐겁지 않나? 하룻밤 내내 네가 죽인 사람만 해도 백 명이 넘을 텐데, 네가 그런다고 그런 결과가 뒤집어지지도 않을 걸? 흐흐흐, 이제 와서 자비로운 척 후회하는 척하는 것인가? 천하제일의 무정한 인간이?’ 흘러내려가는 물결에 비친 환영(幻影)이 계속해서 흔들리며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어. 단지 그들이 나를 노리니 어쩔 수 없었을 뿐이지. 난....’ ‘흥! 말 같지도 않는 소리. 그래서 아까 사람을 죽일 때에 오히려 쾌감을 느꼈나? 손끝에서 생명이 스러지는 기분에 소름이 돋는 것처럼 즐겁지 않았었나? 인정하시지? 넌 타고난 살인마라는 것을.’ ‘아니 그렇지 않아. 그건 회정결(灰情訣)의 부작용일 뿐이지 결코 내 본성이 그런 것은....’ ‘웃기지 마! 그런다고 네가 그들을 죽였다는 것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회정결로 제어하는 마음도 너 자신의 일편(一片)이야. 흥,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면 조금은 편하겠지. 그렇지만 넌 분명히 그들을 죽일 때에 처음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쾌감에 빠져 죽였지. 인정해! 그리고 거기에 네 마음을 맡겨서 너를 가로막는 자들은 누구라도 죽여 버리는 거야, 어때? 뭐 하러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려고 그리 기를 쓰나? 지금의 무공만으로도 막을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흐흐흐, 그만 자신을 괴롭히고, 사람을 죽이는 즐거움에 취해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가?’ 빈정대며 유혹하는 듯한 환영을 손으로 내리쳐 흩트리면서, “절대로 인정 못해! 설혹 내가 그들을 죽일 때 일순간이라도 쾌감에 젖었더라도 그건 결코 내 본성이 아니야. 난....” “휘이익!” 고개를 들고 망연히 소리치고 있을 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그제야 단리유아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잠깐이나마 심마(心魔)와 싸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이 약해졌거나 계속해서 심마에 설득 당했다면 어찌되었을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아무래도 회정결(灰情訣)이 십성에 이르고 또 수어검(手御劍)에도 이르자, 본격적으로 현경(玄境)의 마관(魔關)이 시작된 것 같은데. 앞으로는 더욱 마음을 굳게 해야겠군. 흠, 도법도 가급적이면 쓰지 않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지옥파라구천절도 마성(魔性)이 강한 것이어서 쓰면 쓸수록 자신도 모르게 마기에 물들 텐데. 어찌해야 하나? 정말 한시도 편할 날이 없군. 이제는 미지의 적들과도 싸워야하는데....’ 이렇게 단리유아가 홀로 고심하고 있을 때, 동쪽으로 난 외길을 따라 철목군주(鐵木君主)가 신형을 날려 분지내로 들어왔다. 시냇물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전신에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는 단리유아를 보며 철목군주가 코웃음과 함께, “흥! 꼴 좋군. 단리유아, 겨우 달아난 곳이 이곳 밖에 안 되느냐? 나는 당신이 세상 끝까지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 장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에 떨어진 철목군주를 바라보며, 상대의 말에는 상관없이 무표정하게, “도대체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리고 당신들은....” “닥쳐! 당신이 묻는다고 해서 내가 대답할 것 같아? 칠년 만에 만났는데도 내가 누구인줄도 모르는 인간에게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죽어라, 이 천하에 무정한 인간아!” 말과 함께 신형을 날려 시냇물을 건너 단리유아를 공격해왔다. 태음현마공(太陰玄魔功)을 바탕으로 한 태음십삼마장(太陰十三魔掌)의 일초로, 한줄기 음유한 한기가 은밀하게 몰아쳐오고 있었다. 상대의 공격에 단리유아가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피하면서 도를 들어 철목군주의 목을 노리고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쳤다. “팟!” “크흐키아악!” 이에 철목군주가 다급히 방향을 바꾸어 피했지만, 온전하지 못해서 목에 한줄기 도흔이 지나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은 말처럼 결코 단리유아를 죽일 생각은 없었고 단지 그에게 화풀이하듯이 공격했는데, 이 인간은 결코 봐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과 단리유아의 무정함에 철목군주는 다시 한 번 가슴가득 정한(情恨)이 솟구쳐 쓰라린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곧바로 한 맺힌 웃음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친 다음에 떨어져 내리며 다시 연이어 단리유아를 공격해나갔다. “오호호호! 죽어, 이 인간아! 정말로 공격하다니, 나도 오늘 당신과 함께 죽고 말겠어!” “펑, 퍼펑!” 미친 듯이 날뛰며 무차별로 장력을 날려 공격하는 여인을 보며, 단리유아는 신법을 펼쳐서 피하기만 하고 있었다. ‘이 여인은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강호(江湖)에서 만났던 여인 중에서 이렇게 나에게 원한을 품은 여인이 있었던가? 칠년 만이라면 내가 낭야산(狼倻山)에 들어가 수련하기 얼마 전이라는 것인데....’ 계속해서 피하다가 일단 상대가 누구인줄 알고나 나서 공격하기로 하고, 신법을 펼쳐 십여 장 밖으로 물러서며 덮쳐오는 여인의 앞쪽에 도강(刀剛)을 터뜨렸다. “꽝!” 철목군주가 갑작스런 도강에 놀라서 걸음을 멈추어 뒤로 물러나고, 허공으로 터져나간 흙먼지가 가라앉자, “당신의 태도를 보아서는 나를 잘 알던 사람인 것 같은데, 도대체 그대는 누구요?” “호호호. 정말 나를 몰라본단 말이냐, 이 인간아? 한 달 동안을 같이 지냈으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소리치는 여인을 보며, ‘한 달 정도 한곳에 머문 적은 아주 드문데, 칠년 전에 그랬다면 그건....?’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며, “설마, 운영비곡(雲影秘谷)의 그...? 그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데....” 그제야 임유정을 기억하고 되묻지만 단리유아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과거의 천진난만하고 밝던 표정과는 완전히 딴판인데다가, 외모도 변해서 기억속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던 것이다. 놀라 되묻는 단리유아의 태도에 임유정이 코웃음과 함께, “흥! 이제야 누구인지 기억나나보군. 천하에 무정한 인간 같으니.” “정말로 임소매(林少妹)요? 당신의 모습은....?” “입 닥쳐요! 누가 당신의 임소매라는 것인가요? 다시는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흥! 내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이 누구 때문인데? 모두 당신 때문이야! 그때 당신이 나의 호소에 세상을 떠나서 함께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일은 없었을 텐데, 당신은 단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매정하게 나를 뿌리치기만 했었지.” “그것은....” 단리유아가 임유정을 보고 대꾸하려다가 말을 멈추었다. 과거 임유정이 매일 같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말할 때, 솔직히 귀찮은 중에도 약간 마음이 흔들려 심산에서 모든 것을 잊고 단 둘이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겉으로 무표정하더라도 생각을 하는 사람임에야 그녀의 눈빛과 표정에 드러나는 맑고 깨끗한 애정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의 맹세가 뇌리에 계속 울려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게 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상처 입을까 보아 머무는 중에도 될수록 무정하게 그녀를 대하고, 떠날 때 붙잡아도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떨치고 떠났던 것이다. 생각에 잠긴 채 저녁놀이 지는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는 단리유아를, 싸늘한 표정으로 임유정이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 임유정이 원망이 가득한 채 울부짖듯이 말한다. “당신은 그렇게 떠난 후로 행복했나요? 나는 당신 때문에 하루도 시름에 겨워 편히 잠들지 못했는데, 어째서 그대는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나요?” “..... 아무런 할 말이 없소, 임소매. 미안하오.” 마지못해 대답하듯이 나중에야 겨우 말문을 여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화가 나서, 달려들어 손을 휘둘러 세차게 뺨을 친다. “철썩”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서 입술이 터져 한줄기 피가 입가를 타고 흐를 때, 임유정이 흠칫하는 기색이다가 다시 소리치듯이, “흥!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다시 한 번 날 그렇게 부르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미안하오.” “겨우 한다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뿐인가요? 이제 말해 봐요. 도대체 날 버리고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때 그렇게도 매정히 떠나야 했는지.” 다그치는 임유정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다가, 단리유아가 고개를 흔들며 탄식하듯이, “그것은.... 이제와 말해서 무엇 하겠소? 이미 지나간 물결 같이 다시 되돌릴 수도 없는 과거의 일을 떠올려....” “끝까지 나를 무시하는군. 역시 당신은 나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내가 그 치욕스런.... 오호호호, 이리 된 것도 모두 당신 때문이니, 차라리 당신을 죽여 버린 후에 나도 목숨을 끊고 말겠어.” ****** 며칠 글을 올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 연말이 되니 별다른 일이 없어도 마음이 뒤숭숭해서 제대로 글이 써지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헛되게 보내지 마시고, 부디 세모를 알차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벤트에서 당첨된 분들 중에서 주소가 확인된 분들에게는 3권까지 수요일에 부쳤습니다. 3권까지 포함해서 보내느라 약간 늦어졌는데, 늦어도 내일이나 월요일에는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공지에 이벤트에서 뽑힌 분들께 연락하시길 바랬는데, 몇 분은 아무런 소식이 없군요. [하레스, 허풍공작, 유나v, 작가아님, 샤르나크]님은 부디 월요일 전까지 연락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다른 분들에게 드려야겠습니다. 참, 오타나 오류가 보이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철목군주(鐵木君主) 임유정(林有情) 5 달려들어 공격하는 임유정을 피해서 단리유아는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퍼펑 펑!” “오호호호, 죽어! 차라리 당신과 같이 죽는다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지.” 미친 듯이 소리치며 공격하는 임유정을 보며 단리유아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이자니 지난날 자신에게 보인 그녀의 정이 마음에 걸렸고, 그렇다고 살려두자니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 큰 위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이다. 임유정의 공세를 피해서 다시 뒤로 물러서며 소리쳐, “그만 멈추시오, 임소매! 과거에 그대에게 잘못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러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요? 말로 합시다.” “흥!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당신은 나를 생각지도 않고, 그동안 나 혼자 온갖 괴로움을 맛본 것 같은데.” 냉소하며 답하며 계속해서 공격하려는 임유정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확실히 그리 그대를 생각하지도 않았고, 지난날 나의 태도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때는 밝힐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고, 그 이후로 이때까지 다른 여인들을 생각했던 적도 없었소.”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임유정이 공격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단리유아를 향해 뚝뚝 끊어지는 어조로 묻는다. “좋아요. 그러면 이제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와 함께 강호(江湖)를 떠날 수 있나요?” “그건.... 임소매, 당신과 나는 이제까지 강호에서 해온 일이 있는데, 어떻게 쉽게 떨치고 떠날 수 있겠소? 더구나 당신은 어딘가 단체에 속한 것 같은데?” 말을 돌려 반문하는 단리유아의 태도에 실망하여 화를 내면서, “뭐라구요? 겨우 그런 일로?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할 결심만 한다면, 나는 설사 하루밖에 같이 살 수 없다할지라도 그것을 선택할 것이에요. 그들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당신을 향한 내 마음만은 결코 막을 수 없을 테니.” 나중에는 애원하는 얼굴로 단리유아에게 호소한다. 임유정의 굳은 마음을 보고 단리유아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정도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인가? 과거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이 정도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모든 걸 포기할 생각이라니....’ 임유정의 말 속에 드러나는 깊은 정에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대는 아직도 나를 사랑한단 말이오? 나는 여인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않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쉽지 않소. 그런 내가 도대체 어디가 좋다는 것이오?” 조용히 반문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임유정이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긴 채, “지난날 당신이 겉으론 무정해도, 나는 당신이 나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른 봄날 같이 칠선폭(七仙瀑)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지요. 당신도 기억하나요?” “그렇소.”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단리유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침울한 기색이 되었다. 운영비곡(雲影秘谷)에서 지낸지 열흘 정도가 지나 어느 정도 상처가 치료되어 거동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임유정이 떼를 쓰다시피 해서 단리유아를 데리고 근처의 칠선폭(七仙瀑)이라는 곳으로 봄놀이를 간 적이 있었다. 때는 삼월말로 운영비곡이 있던, 낙양(洛陽)에서 황하를 건너 북서쪽 산서성(山西省)과의 경계부분에 위치한 왕옥산(王屋山) 근처, 지역은 높은 곳에서는 아직까지 눈이 남아있었고 폭포에도 얼음이 녹지 않은 곳이 있을 정도로 쌀쌀한 날씨였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해가 중천에 이를 무렵 칠선폭에 도착했을 때, 임유정이 폭포에 어린 전설을 들려주며 계속해서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 이른 봄날의 싱그러운 미풍이 불어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일곱 계단으로 층층을 이루며 쏟아지는 폭포수가 모여 연못을 이룬 곳 근처의, 한쪽의 바위에 나란히 앉아서 폭포의 절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리유아야 내키지 않는데도 억지로 끌려나오다시피 했고, 또 본래가 주변에 무관심했던 터라 이렇다 할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반대로 임유정은 이러한 단리유아의 태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쪽 손으로는 단리유아의 팔을 꼭 붙들고는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아득한 옛날 이 폭포에는 본래 승천을 앞둔 이무기가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하루는 하늘에서 일곱 명의 선녀가 목욕을 하러 이곳에 내려왔답니다. 모두가 아름다웠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막내인 칠선녀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반하게 된 이무기가, 하루는 잘생긴 미남자로 화신하여 나타나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떻게 선녀의 신분으로 하계(下界)의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겠어요?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듣지 않자, 칠선녀는 이무기의 호소를 뿌리칠 작정으로 한 가지 불가능한 요구를 하게 되었답니다. 당신이 만약 여의주(如意珠)를 구해올 수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그녀는 눈앞의 미남자가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일 줄도 몰랐고, 보통 사람은 여의주라는 것을 구할 수도 없을 테니 결국 포기하게 되리라 여겼지요. 여의주라는 것은 용이 되어 승천할 때 필요한 것으로 결코 몸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인데, 만약 여의주를 잃게 된다면 승천할 수 없이 다시 몇 천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폭포만을 바라보고 있는 단리유아를 향해 고개를 돌려서, “그대가 만일 그 이무기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 “당신은 또 아무런 말이 없네요. 내가 칠선녀이고 당신이 그라면 정말 좋을 텐데.”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무표정한 단리유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휴우. 선녀의 요구에 이무기는 말했지요.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까짓 여의주가 대수겠냐고? 설사 다시 몇 천 년을 기다려도, 승천을 못하게 될지라도 그대와 함께라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다고. 말과 함께 바로 모습을 바꿔 이무기로 현신하여서 그동안 공들여 이루었던 여의주를 건네주었지요. 여의주를 본 그녀는 놀라기도 했지만, 그의 단호한 결심에서 우러나는 자신에 대한 사랑에 더 감동하게 되었답니다. 이에 그녀도 선녀의 지위를 내버리고 하계에 남기로 결심하게 되었지요.” 이야기를 멈추고는 단리유아를 향해 밝게 웃으며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호호호, 당신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선녀라면 나도 틀림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은 어때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대답을 재촉하듯이 단리유아를 응시하며 계속 미소 짓는다. 그래도 묵묵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는 단리유아가 야속하다는 듯이, 고개를 계속 저어 단리유아의 어깨에 얼굴을 간질이며, “아이, 말 좀 해보세요. 왜 그리 말이 없어요? 내가 그리 밉나요? 당신은 나를 귀찮게만 여기는 것인가요?” 끊임없이 속삭이며 답을 요구하는 기색에 말하지 않으면 계속 그럴 것 같아서, 마지못해 단리유아가 대답한다. “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오. 그리고 그대를 미워하지는 않소. 단지....” 이어지려는 말을 중간에 가로막으며, 기뻐서 손뼉을 침과 동시에 단리유아를 다정히 바라보며, “짝!” “그대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군요. 그러면 나를 좋아하나요? 나는 당신이 정말 좋아요. 당신이 조금만 더 나를 다정하게 대해준다면 좋을 텐데, 어째서 그리 무표정하기만 할 뿐인가요? 아무리 심법의 영향이라 하지만 그래도 생각은 할 것이 아닌가요?” ‘그대의 정을 받아줄 수 없는 내 처지에 더 이상 정을 붙이기 싫어서 그런 것인데, 그대는 왜 그리 나를 좋아하는 것이오? 나는 그대에게 줄 것도 없는데.’ 생각에 잠긴 채 다시 말이 없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일부러 밝게 웃지만 한 가닥 서글픔이 배인 쓸쓸한 어조로, “호호호, 난 당신에게 큰 것을 바라지 않아요. 단지 나를 사랑해주고 평생을 같이 해준다면 어떠한 고난도 견딜 자신이 있어요. 아, 이렇게 매일 당신과 함께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세상을 떠돈다면 정말 좋을 텐데....” “....” 말 없는 단리유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화제를 돌려 이야기를 계속한다. 먼저 발바닥 옆의 조약돌을 집어 들어 연못을 향해서 던져, 한동안 파문이 일어 겹겹이 물결이 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 이렇게 당신의 마음도 흔들려 나에게 향한다면....’ 속으로 생각하다가 곧이어, “아까 그 이야기가 끝이 아니랍니다. 어디까지 했었나요? 아, 칠선녀가 천계(天界)로 되돌아가지 않을 결심을 한 것까지 했군요. 그렇게 서로간의 정(情)이 화합하여 둘이 함께 할 때, 뜻하지 않는 비극이 일어났지요. 본래 그녀를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위휘신장(衛揮神將)이라는 천계에서 손꼽히는 장수였지요. 다른 선녀들의 말을 듣고 어찌된 일인지 알게 된 그는, 칠선녀가 자신을 버리고 하계의 미물에 불과한 이무기와 함께 하는 것에 불같은 노여움과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답니다. 선녀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하계로 내려와 이무기를 죽이려했지요. 비록 천여 년을 수련한 이무기일지라도 천계의 신장과의 싸움은 상대가 되지 않는 일방적인 것이었다고 해요.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어 얼마가지 않아 이무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게 되었을 때, 둘의 싸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이던 칠선녀가 순간적으로 뛰어들어 신장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섰지요. 신장이 공격을 멈추려했지만 이미 때늦은 뒤라, 이내 그녀는 가슴이 꿰뚫린 채 죽게 되었답니다. 그 모습에 이무기도 절망하여 저 폭포수의 절벽에 부딪쳐 죽고 말았지요. 부디 내세에서는 다시 만나 함께 하길 소원하면서요. 폭포가 저리 구불구불하고 그 벽이 붉은 것도 그 때문이랍니다.“ 임유정이 이야기를 마치고, 단리유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그들은 내세에서 다시 만났을까요? 그래서 행복하게 되었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렇게 되었을 것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하는 단리유아를 향해 간절한 표정으로, “단 사흘을 함께 했을 뿐이었다고 하지만, 난 정말 그녀가 부러워요. 나도 그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 ------- 과거의 일에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바라보다가, 임유정 역시 과거를 돌아다보며 아련한 목소리로, “그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한쪽 언덕에서 그대와 얘기하는 중에 깜박 잠이 들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일부러 피곤한 척했던 것인데,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잠들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대는 나를 위해서 해가 질 때까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앉은 채 나를 감싸 주고 옷을 덮어주었지요. 그러다 저녁 늦게야 깨어났는데, 나는 오한이 들어서 제대로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척 했었지요. 떼를 써 당신 등에 업힌 채 돌아오면서, 나는 이후로 당신과 함께라면 어떠한 괴로움도 참으리라 맹세했어요.” “.... 임소매가 그 정도로 나를 생각할 줄은 몰랐소.” 조용한 단리유아의 말에 임유정이 회상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려, 그윽하게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나는 아직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지금이라도 당신이 나와 함께 하겠다면 모든 것을 떨치고 어디든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설혹 그 결과로 지옥의 불길에 휩싸일지라도....” ‘그때 그대에게 더 모질게 대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는구려. 그랬다면 그대도 나를 단념하고, 한 조각 스쳐지나가는 뜬구름처럼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을 텐데.’ 임유정의 굳은 결심에 단리유아는 후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옛날 자신은 결코 그녀에게 별달리 정을 표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까지도 자신을 잊지 못하고 또 이 정도까지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누가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간은 무심하여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 이제와 지난날을 후회한들 어찌할 것인가? 단리유아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과거의 상념을 떨친 후, 그동안의 고초를 말해주는 듯한 임유정의 변해버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지난날의 밝고 청순하기만 했던 모습은 간데없어 갈라지고 퇴색한 회벽과 같았고, 석양이 짐에 따라 얼굴 곳곳에 음영을 드리우니 그 모습이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묵묵히 회오에 잠긴 채 바라만보다가 조용히, “그대의 깊은 정에 나는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지 모르겠소.” “그러면 나와 함께 지금이라도 떠나겠어요?” 바로 기뻐서 되묻는 임유정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임소매, 내게 필생의 목표가 없었고 평범한 운명을 지녔다면, 과거에도 그대에게 무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제라도 그대와 함께 떠나겠다고 말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결코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소. 하지만, 만일 그대가 기다려준다면....” “닥쳐요! 당신은 또다시 나를 실망시키는군요. 어떻게 그런 변명이나 늘어놓을 수 있죠? 당신이 조금이라도 나를 사랑한고 있다면, 결코 그런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에요!” 중간에 끼어들어 울부짖듯이 소리치다가, 곧이어 단리유아에게 달려들어 공격했다. 임유정이 장력을 날려 공격하는 모습을 보며, 단리유아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퍼펑!” “털썩!” 자신의 장력에 맞아 선혈을 내뿜으며 날아가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임유정이 오히려 놀라서 곁으로 달려갔다. 태음현마력(太陰玄魔力)이 주입된 장력에 정통으로 가슴을 얻어맞아 쓰러진 채 계속해서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 털썩 주저앉아서 다리로 단리유아의 머리를 받친다. 놀람과 당황으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다, 당신은.... 나, 나는....” “마, 말하지 마시오. 그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우욱!” 피를 토하며 가까스로 말하는 단리유아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다가, 단리유아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채 한탄하듯이 울부짖는다. “흐흐흑, 당신은 어떻게 그리 여인의 마음을 몰라주나요? 당신은 정말 그렇게 밖에는 말을 못하나요? 말뿐이라도 나와 함께 하겠다는 한 마디라도 해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무정한 말만 하는가요? 난 칠년 동안 그 괴로움 속에서도 당신만을 생각하며 견뎠는데, 당신은 그것이 느껴지지도 않나요?” 몇 번이고 죽은피를 토해내다가 숨을 고르며 일어나 정좌한 후에, 아직도 흐느끼며 소리치는 임유정의 머리를 매만지며 씁쓸하게, “미안하오, 임소매. 내가 어찌 그 사실을 모를 수 있겠소. 이 머리카락만 보아도 그대의 지난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당신은, 당신은....” “그대가 믿을지 모르지만, 내가 무정하게 대했던 것은 다 그대를 위해서였소. 나의 운명은 한시도 순탄치 않아서 그대가 함께한다면 불행할 것이 훤히 보이기에 부디 나를 잊고 평온한 삶을 살기를 바랐었소. 그런데 그대의 나에 대한 정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소. 그때 차라리 당신에게 더 무정하게 대했었다면....” 눈물이 가득 맺힌 얼굴을 들어 올린 채, 한손으로는 단리유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니, 아니에요. 당신은 겉으로는 무정한척 하지만, 그 내심은 누구보다도 더 따뜻한 사람이에요.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것을 느꼈어요. 무표정하고 괴상한 당신의 모습에 다들 피할 때에도, 나는 오히려 그런 당신의 모습이 좋았어요. 다른 자매들이 싫어할수록 내가 당신과 함께할 시간이 길어질 테니.” “....”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당신도 참 많이 변했군요. 검푸른 반점은 없어졌지만 이렇게 큰 흉터가 새로 생겼군요. 아직도 전신에는 흉터투성이일 테지요?”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한시도 침상 곁을 떠나지 않고 돌보던 지난 일을 돌이키며 넋을 잃은 표정으로 물어본다. 계속해서 단리유아의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이, 멍하니 홀로 중얼거린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떠난 후에 어찌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을 한편으론 그리워하고 한편으론 가슴깊이 원망하며 보내지 않았다면, 절망하여 이미 한줌 흙이 되어버렸을 것이에요. 비록 이렇게 이역 타향에서 적으로써 만났지만 처음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런데 나를 몰라보는 당신의 태도에 그만 설움이 북받쳐서 나도 모르게....” “괜찮소, 약간 내상이 있을 뿐이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니. 이까짓 거야 마음의 상처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테니.” 마주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답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정이 가득한 얼굴로, “당신은 정말 많이 변했군요. 예전에는 내가 물어도 대답도 잘 하지 않고, 무표정하기만 하더니. 호호, 내가 처음 당신에게 반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나요?” “....” “처음 당신이 갑자기 본곡에 나타나 싸우게 되었을 때, 당신은 이미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여서 보통 사람이라면 곧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해보일 정도였지요. 그냥 검을 버리고 항복하여 물어보는 말에 응하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당신은 그런 상처에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저항했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 상처가 심해지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호호, 정말 당신 같은 고집불통은 다시없을 것이에요.” 슬쩍 자신을 흘겨보며 미소 짓는 임유정을 보고, ‘그때 백마왕부(白馬王府)의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서 매일매일 싸우고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들어서게 되었소. 그런데 자세한 연유를 들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제압하려고만 하니, 내가 어떻게 순순히 무릎을 꿇을 수 있었겠소?’ 이렇게 단리유아가 속으로 말할 때, 임유정이 아련히 추억에 잠긴 채 즐거운 듯이 눈웃음 지으며 계속해서, “결국 마지막에는 사부님까지 나서게 되었지요. 그런데 사부님과의 싸움이 끝난 후 쓰러지기 직전, 당신이 하늘을 쳐다보며 웃는 것을 보고 난 심혼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을 느꼈어요. 워낙 순간적이고 입 꼬리만 슬쩍 움직여서 다른 사람들은 웃는 것인 줄도 몰랐겠지만 말이에요. 그 쓸쓸함과 남자로서의 당당함에 넋이 나간 채, 오직 눈에는 당신만 보이고 귀에는 천둥소리만 사방에서 들리는 듯 했어요. 그때 난 알았어요. 당신이야 말로 내가 꿈속에서도 기다린 사람이고, 내 운명이라는 것을.” “....” 말없이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쓸쓸한 표정으로, “그런데, 당신은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의 반절만큼도 나를 생각하지 않는군요. 나는 당신을 잊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검지로 단리유아의 입을 가로막으며, “말하지 말아요. 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 당신은 내가 지금 강제로 제압하더라도 내 말을 따르지는 않겠지요?” “..... 임소매. 우리가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이미 예전에 당신의 뜻대로 했을 것이오.” “차라리 그때 당신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괴로움도 없었을 텐데....”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작게 되뇌며, 자세히 단리유아의 얼굴을 바라본다. 곧이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등을 돌리며 차고 냉정한 목소리로, “가세요, 어서!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마세요!” “임소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를 기다려준다면 꼭 당신에게 돌아가겠소.” “가요, 가! 내 맘이 변하기 전에, 어서!” 소리치듯이 외치는 임유정의 등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리유아가 한숨을 내쉬며, “휴, 임소매. 부디 다시 만날 때까지 몸 보중하시오.” “....” 대답 없는 임유정의 가냘픈 등을 바라보다가, “떠나기 전에 한마디 물어볼 것이 있소.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를 공격하는지, 어떤 집단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입술을 악물어 터져 나오는 오열을 감추며 냉랭하게, “내가 말할 것 같은가요? 내가 비록 여인이지만, 한번 맹세한 말을 어길 사람은 아니에요. 더 물어보지 말고 그냥 가세요. 운남(雲南)에서는 더 이상 공격이 없을 테지만, 다른 지역은 다들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부디 조심하세요.” “그대도 조심하시오. 다시 만나는 그날....” “그만 가요, 어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괴로움만 늘어가니.” 낮게 가라앉아 음울하게 울리는 임유정의 목소리에, 단리유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긴다. 단리유아가 심란한 가운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장내를 떠나갈 때서야, 임유정이 뒤돌아서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소리쳐 부르고 싶어 입을 벌리지만, 막상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바라보다가, 조금이라도 더 보기위해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훔쳐내면서, “흑흑흑, 무정한 사람.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군요. 아, 이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순간이라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곧 죽는다 해도 아무런 여한이 없을 텐데....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그동안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내가 앞장서 당신을 죽이는데 나선 것도 마지막이나마 당신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 시절처럼 당신에게 떼를 쓰고 마음껏 가슴속의 한을 쏟아내고 싶었어요. 비록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당신을 오늘 만난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요. 이제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고, 만난다 해도 그때는 난 내가 아닐 테지요. 하지만, 내가 곧 죽을지라도 이미 내 마음은 당신의 것이에요.” 산굽이를 돌아서 단리유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계속 바라보다가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진정 천지신명이 있다면 소녀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세요. 비록 이생에는 인연(因緣)이 박하여 함께 할 수 없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평범한 농부의 자식으로서 부디 그와 해로할 수 있기를....” 임유정이 두 손 모아 기원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산굽이를 돌아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한발자국을 걸어 모퉁이를 돈다면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다시 돌아가는 것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가야 하는가, 앞으로 계속가야 하는가? 그녀는 어찌해야 하는가? 결코 좋아 보이지 않고, 온갖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 같은데.’ ‘유아(唯我)야, 이 어미와 했던 맹세를 그새 잊었느냐? 이 어미의 한을 풀기 전에는 절대 넌 그럴 수 없다.’ ‘어머니, 어째서 자식에게 그런 맹세를 하게 하셨습니까? 제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넌 벌써 잊었느냐! 내가 겪은 그 수모와 한을? 네가 그리된 것이 누구 때문이더냐?’ ‘하지만 그녀는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다 저 때문에 저리 된 것인데, 어찌 제가 모른 체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흥! 여인은 다들 똑같아. 특히 아름다운 여인은. 네 이름을 걸고 했던 맹세를 결코 잊지마라! 그 이전에는 절대로 여정(女情)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서성이며 갈피를 못 잡고 헤매이다, 계속해서 뇌리에 일어나는 번민에 괴로움을 참을 수 없었다. “우!” 한줄기 긴 장소성을 내뱉으며 서쪽을 향해서 달려갔다. 치밀어 오르는 상처의 고통도 무시한 채. 붉게 산하를 물들이는 노을, 아득히 멀고 푸르기만 한 초원. 한가로이 풀 뜯는 양을 바라보며, 양치기는 오늘도 삶의 평온함을 노래하네. 붉게 온몸을 물들이는 선혈, 아득히 멀고 어둡기만 한 그곳. 들끓는 번민으로 가득한 마음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삶의 어려움을 되새기네. 마음에 시름 가득하니, 발걸음도 술 취한 듯 비틀비틀. 양치기 고개 돌려 뭘 하냐고 물어보지만, 씁쓸히 웃음 지며 말없이 고개 들어 무심한 하늘만 바라볼 뿐. ****** 2003년의 마지막 날이네요. 한해가 알게 모르게 지나간 것 같아서 답답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합니다. Happy New Year, Everybody! ###### 허풍공작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결의(決意) 결의(決意) 1 그날 단리유아는 란창강(瀾凔江)에 가까이 이를 때까지 가슴에 가득한 번민으로 정신없이 달리다가, 굽이쳐 세차게 흐르는 란창강을 보고나서야 걸음을 늦추게 되었다. 상처에서 쑤셔오는 고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마음에 정한(情恨)이 가득하니 육신의 상처는 돌아볼 생각도 못한 채 넋을 잃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될까? 이번 일을 보아서는 그들에게 중요한 일이었을 텐데. 혹여 나 때문에 더욱 곤란한 처지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그 옛날의 아름답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갖가지 풍상에 시달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던데, 도대체 그 후로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단리유아야, 단리유아야! 넌 도대체 어찌할 것이냐? 그녀의 깊고 깊은 정(情)을.... 이 천하의 무정한 인간아!’ ‘그녀의 정이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고, 그동안 생각해보지도 않고 있었는데. 아아, 지난날이 한탄스럽구나. 차라리 지난날 그녀와 함께 강호(江湖)를 떠났다면 이런 괴로움도 없을 텐데. 아니 애초에 만나지 않았던들....’ ‘어찌 인연(因緣)이란 이리도 무섭고 질겨서 그렇지 않아도 힘겨운 삶에 더하여, 가슴을 꽁꽁 묶어 숨을 조이게 하는 것인가?’ 끊임없이 뇌리를 울리는 임유정에 대한 걱정과, 자신에 대한 한탄과 자책에 빠진 채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노을이 져 붉게 물든 주변의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시름에 싸인 나그네의 마음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모습이 자신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듯하니, 더더욱 세상에 대한 괴리감을 느끼게 하여 괴로움을 더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지친 걸음을 옮겨 란창강을 옆에 끼고 다시 북상하다가, 문득 개들이 사납게 짓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걸음을 멈추었다. “컹컹! 컹!” 단리유아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니 푸르른 들판에는 수십여 마리의 양들이 모여 있었고, 한쪽에는 천막이 세워진 채 한 늙은 목동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이보다도 더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한, 약간 허리가 구부정한 육십 대의 노인이 단리유아의 모습에 깜짝 놀라다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그때까지 계속해서 시끄럽게 짖고 있는 네 마리의 개들을 향해 소리친다. “시끄럽다, 이놈들아! 그만 짖고 이리와!” 개들을 불러 모으고는 다시 한 번 단리유아의 행색을 찬찬히 살피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단리유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죄송합니다. 생각에 빠져 지나가다가 미처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단리유아의 말에야 노인이 다시 한어로 다시 묻는다. “자네는 한인인가? 그런데 그 모양으로 이런 황야에서 뭘 하고 있나?” “....” 전신을 피로 물들인데다가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맨 채, 겨우 넝마 같이 다 떨어진 옷을 걸친 단리유아의 모습에 놀라 계속해서 묻는다. 몇 마디 더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는 단리유아를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쯔쯔쯪. 어쨌거나 이리 만나게 된 것도 삼생의 연(緣)이 닿아서일 테니, 나와 하룻밤 같이 지내는 것이 어떻겠나?” “.... 폐가 되지 않는다면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뭐, 폐랄 것까지야 있나? 이곳은 한 달이 다가도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곳이라네. 그나마 우리 부족의 사람들이나 가끔 보지, 자네 같은 한인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지. 껄껄껄, 이 늙은이도 자네 덕분에 오늘밤은 심심하지 않겠네.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저기 개울가에 가서 좀 씻고 오게. 원, 정말 보기 흉하구만.” 노인이 반색하다가 단리유아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한쪽의 개울을 가리키며 말한다. 단리유아가 고개 숙여 답하고는 개울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먼저 전신을 씻은 후에 상처를 돌보고, 옷도 대충이나마 빨아서 핏물을 빼낸 후에 물기를 짜내서 다시 입었다. 개울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핏물이 풀려나갔지만, 핏자국은 그대로 남아서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아, 오늘도 이렇게 타인의 선혈로 물들였구나! 휴, 언제나 이런 일이 그칠지. 죽어간 사람들도 각자의 삶이 있을 진데, 이 무거운 살업(殺業)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당장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결국에는 업보가 되어 내게로 다시 돌아올 텐데.’ 핏물이 풀려나가 개울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모습에, 단리유아는 속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끊이지 않는 살업을 돌아보며, 가슴을 무섭게 짓누르는 인과(因果)의 무게에 답답해져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한 회의와 운명에 대한 한탄으로 한동안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문득 노인이 소리쳐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게 되었다. “어이, 거기서 뭐하나? 빨리 오지 않고, 어서 오게!” 단리유아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높이가 육천척이 넘는 고산지대였지만, 동쪽의 산비탈에서 멀리 란창강(瀾凔江)에 이르기까지는 푸른 초원만이 펼쳐져 있었다. 해가 넘어가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의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적막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쯔쯧, 정말 꼴이 말이 아니로군. 잠깐 기다려보게. 내 양가죽 한 장을 내줄테니 그것으로라도 감싸고 있게나. 저녁이 되면 점점 추워지다가 새벽에는 서리까지 내릴 테니.” 돌아오는 자신을 향해서 노인이 걱정스레 말하자, 단리유아가 자신의 모습에도 별다르게 동요하지 않는 노인이 이상해보여서 되묻는다. “어르신은 이렇게 흉한 모습인 제가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돌아서 천막으로 향하다가, 노인이 너털웃음과 함께 허리춤의 칼을 두드리며 약간의 허풍을 넣어 대답한다. “허허, 나 같은 늙은이가 무엇이 두렵겠나? 어차피 갈 날도 그리 멀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지금은 내 이리 보여도 젊었을 적에는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라네.” 이윽고 노인이 천막 안에서 모피를 꺼내어 단리유아에게 건네주며, 물에 젖은 옷은 벗어서 모닥불에 말리고 대신 몸을 감싸게 한다. 잠시 후 불에 구워 말린 양고기와 양젖으로 저녁을 대신하며, 두 사람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단리유아는 하루 종일 끼니를 때우지 못해 배가 고팠던 터라 묵묵히 먹기에 바빴고, 맞은편의 노인도 그 모습에 담담한 미소를 지은 채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먹고 마시는 소리만이 불꽃이 튀기는 소리와 어우러져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한식경이 지나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랬다고 생각한 노인이 단리유아를 향해서, “그래, 자네도 이제는 말할 기분이 나겠지? 우선 이름이 어찌 되나?”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 제가 먼저 여쭈지 못했습니다. 단리유아라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손을 가로저으며,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나? 나는 그저 치(梔) 늙은이라 불린다네. 이름은 잊은 지 오래니 자네도 그리 부르게. 그나저나 자네는 어째서 그런 꼴로 돌아다니고 있었나?” “어쩌다보니 밤새 다른 사람들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대항하여 적들을 죽이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보기 흉한 모습이 된 것 같습니다.” “자네 인생도 고달프기 그지없나보군. 그러나 힘을 내게. 사람이 평탄하기만 한 삶을 산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이 아니야. 인생이란 달고 쓴 오만가지 맛을 보아야 진정으로 후회 없는 삶이라 할 수 있을 테니.” 위로하는 듯한 노인의 말에, 단리유아가 주변을 돌아보다가 말을 돌려서, “어르신, 이런 곳에서 혼자 계시다니 외롭지는 않으십니까?” 말을 돌려 되묻는 단리유아를 보며, “허허허, 내가 이렇게 홀로 생활한지도 스무 해가 넘어간다네. 뭐, 처음에는 지내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즐기는 기분으로 지내고 있지. 나도 소싯적에는 대리(大理)에서 살기도 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마누라도 죽고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해 되돌아오게 되었지. 저 멀리 산을 넘어 삼십여 리 정도 가면 우리 부족의 마을이 있다네.” 말과 함께 한동안 자신의 부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근처 운남(雲南)의 북부지역에 사는 보미족(普米族)은 산악지대에서 주로 목축과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부족으로, 자연과 조상에 대한 숭배가 강했고 생활의 특성상 절대로 개를 때리거나 죽이는 것을 금기시했다. 특이한 풍습으로는 결혼하여 신부를 맞이할 때, 네 번의 결혼식을 통해서 데리러 와야 신랑의 집으로 데려갈 수 있는 불낙부가(不落夫家)의 풍습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설명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 “젊었을 때는 꿈도 많고 일도 많았지만, 나이 들수록 그런 것보다는 이렇게 생활하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네.” “다른 가족들은 안계십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허리춤의 칼을 두드리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허허허, 지금은 이리 볼품없어도 나도 젊었을 적에는 용맹한 사냥꾼으로 이름 꽤나 날렸지. 내 마누라는 본래 백족(白族)의 여자로 아주 아름다웠는데, 오래 살지 못하고 나만 두고 떠나버렸다네. 이상하게 자식도 없어서 고향에 돌아온 뒤로는 이렇게 마을 사람들의 양들을 돌보며 혼자 살고 있지. 쯔쯧, 불쌍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그렇게 빨리 가버릴 게 뭐람? 머리를 서로 묶어 함께하기로 해놓고 자기만 먼저 가버리다니....” 잠시 과거를 생각하다 먼저 간 아내를 떠올리고는 착잡한 기색이 되었다. 곧 표정을 바꾸어 주위를 돌아보며, “이곳은 워낙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곳이라, 다들 이렇게 적막한 곳에 떨어져 살기 싫어하지. 그래서 아무도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네. 뭐, 나야 이런 생활에 이골이 나서 이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즐겁지만 말이야.” “저도 어르신처럼 이런 곳에서 세사를 잊고 평온하게 살 수 있다면....” 단리유아가 탄식하듯이 중얼거릴 때, 노인이 혀를 차며, “쯔쯧, 자네는 마치 세상을 다 산 것 같이 말하는군. 아직 젊은 사람이 무어 그리 근심이 많은가?” “어르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희 같은 강호인은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특별히 원한을 맺은 것도 아닌데도 다른 사람에게 쫓기는 데에다, 저를 위해주는 여인의 정도 뿌리쳐야만 하는 것이....” “허허, 어찌 그렇게만 생각하는가? 사람이란 다 타고난 운명이 있고, 다채로운 인생사에 어찌 평온한 일만 계속되겠는가? 자네는 내가 이리 지내니 시샘이라도 나는 모양이군? 껄껄껄!” “그런 뜻이 아니라....” 단리유아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노인이 마치 철모르는 자식에게 가르침을 내리듯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여보게. 그래서 자네는 그렇게 운명을 한탄하며 고뇌에 차 일생을 허비할 생각인가? 아니면 모든 것에서 도망쳐서 숨어서 살 생각인가? 쯔쯧, 나는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늙은이이지만, 자네에게 도움이 될까하여 내 한 마디하지. 먼저 예전에 들었던 얘기를 하나 해주겠네.” 잠시 말을 끊고는, 모닥불을 뒤집고 나뭇조각을 다시 더 넣어 불길을 일으킨 후에, 되살아나는 불길을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아주 오래전에 너무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두 형제가 있었네. 형이 되는 아이가 아직 여덟 살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렸는데, 갑작스럽게 그 부모와 사별하게 되었지. 그래서 두 아이는 날마다 부모를 애타게 부르며 울고만 있었다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두 형제의 모습에 사악한 생각을 품은 한 사람이 접근해서 말을 걸었다네. ‘얘들아, 내가 너희 부모를 만나게 해줄 테니 나를 따라가지 않으련?’ ‘정말요? 우리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어요?‘ ‘그래, 그러니 이 아저씨를 따라가는 것이 어떻겠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얼마안가 그 사내의 말에 속아서 길을 떠났지. 그 사내는 조각배에 아이들을 실고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무인도로 향했다네. 이윽고 섬에 도착하자 아이들을 내려놓고는, 섬의 한쪽에 너희 부모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찾아가라고 말했지. 아이들이 너무 기뻐서 감사의 말도 못한 채 달려 나갔을 때, 그 사람은 낄낄거리며 배를 돌려서 혼자 떠나버렸다네.“ 노인이 말을 멈추고 단리유아를 향해서,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 어린 아이들이니 얼마 안가서 죽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단리유아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하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네 말대로 라네. 얼마 되지 않아서 두 형제는 죽게 되었지. 아무도 없는 무인도를 헤매며 애처롭게 부모를 찾았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배고픔과 슬픔에 잠긴 채 몇날며칠을 수풀과 거친 바위를 헤치면서 돌아다녔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결국에는 그동안 쌓인 피로와 굶주림으로 가엾게도 죽게 되었다네. 두 아이가 쓰러져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 아우가 울다가 세상을 한하며 말했네. ‘흐흐흑. 형, 우리는 태어나서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은 우리를 속여서 이런 괴로움 속에 죽어가게 만들었을까?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난 반드시 그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고 말테야.’ ‘아우야. 나도 처음에는 세상을 원망하고 그 사람을 저주했지만, 이제와 그래보았자 무엇하겠니? 이곳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나가는 배 한척 보이지 않는데?’ ‘그래서 형은 그 사람을 용서하자는 말이야?’ 담담하게 말하는 형을 보고 아우가 소리치며 말했지. 자, 여기서 자네는 어떤 생각이 드나? 그 나쁜 인간을 원망하나? 아니면 아이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리된 운명을 한탄하겠나?” 노인이 묻는 말에 단리유아가 생각에 잠겼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뜻대로 되지 않는 운명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바라보다가, 노인이 다시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아우의 말에 형은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네. ‘아우야, 나는 며칠 동안 느낀 것이 있단다. 우리는 부모님과 헤어지고 나쁜 사람에게도 속아서, 며칠 동안이나 슬픔과 굶주림, 절망 같은 고통을 겪게 되지 않았니? 나도 처음에는 너와 같았지만, 결국에는 그런 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느꼈단다. 미워하고 한탄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일생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지. 사랑하는 아우야, 우리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날 때에는 우리 이 고통스런 경험을 인연으로 삼아서, 우리와 같은 슬픈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것이 어떻겠니?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위로받는 길일 테니 말이야.’ 아우는 형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동안의 괴로움과 원망을 떨치게 되었다네. 서로 얼싸안고 숨진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오직 평온하고 밝은 미소만 어려 있었지.“ 묵묵히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향해 빙그레 웃음 지며, “이 이야기는 오래전에 마누라가 죽어서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잃어 절망하고 있을 때에, 어떤 늙은 수도승이 나에게 이야기해준 것이라네. 그분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다시 이야기해준 말이 있다네. ‘시주, 이 이야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속아서 무인도에 버려져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과거로 되돌아가 고쳐 살아보고 싶어 해도 그것이 불가능하고, 오늘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도피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작은 섬에서 만나고 겪게 되는 인생의 갖가지 번뇌를, 부모를 찾아 헤매고 굶주림과 괴로움에 지쳐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시주가 이야기 속의 그 아우처럼 인생이 한과 고뇌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라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과 한탄으로 보낸다면 그것은 헛되이 일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형은 그런 고통스런 체험 속에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고통도 깨닫게 되었고, 자신들의 운명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신이 괴로워도 자기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좋게 해주고 그들과 함께 밝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다 소중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말에 나는 가슴에 가득했던 그리움과 괴로움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네. 나도 젊어서는 사람을 속이기도 했고 못된 일도 한 적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생각을 바꾸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려 한다네.“ 노인의 말에 단리유아는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태어나 기억이라는 것이 생겨난 후부터, 어린 시절 집을 떠난 이래 여태까지의 삶이 찰나 간에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아, 나는 어떤 인간인가? 지금까지 어찌 살아왔는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멍하니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며, “인생에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갖가지 일이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한탄과 고뇌에 쌓여서만 허비하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은가? 자네도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보다 넓게 세상을 바라보게나. 이렇게 불어오는 한줄기 미풍에도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웃음 한번 짓는 것도 커다란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두 팔을 벌려 크게 숨을 내수고, 껄껄껄 유쾌하게 웃는다. 잠시 후 노인이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그대로 두고,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하다가 먼저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잠에 취했다. 모닥불 가에 드러누운 채 한줄기 바람에 실려 오는 풀잎의 향기를 맡으며, 단리유아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천공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에 괴로운 마음을 실어 보내며 자신의 삶에 대해 돌이켜보고 있었다. ‘번뇌에 휩싸여 어지러운 마음,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뒤섞여 끝을 모르고. 괴로운 마음 천근만근인 듯, 몸 또한 마음을 쫓아 더욱 지치고 피로하네. 흔들리지 않으리라 맹세한 마음, 갈대처럼 다시 흔들리는구나! 이토록 마음이 맑고 고르지 못하니, 어찌 도를 얻을 수 있겠는가?‘ 결의(決意) 결의(決意) 2 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니 너무 밝아서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천공에 박아놓은 보석이 달빛에 각기 제 모습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구름 몇 조각이 이따금 시야를 가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찰나일 뿐이었다. 성월(星月)의 빛이 산하를 밝게 비추니 한밤중 임에도 그리 어둡지 않아, 멀리 산언덕의 바위의 생김새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구름이 달을 지날 때마다 생기는 음영(陰影)이 산자락에 드리워지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세상사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서로 상반되는 명암이 교차하듯이,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겠는가?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을 것이고, 만남이 있으면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것이겠지. 때론 기뻐하고 때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견딜 수 없는 번민에 시달려 이렇게 밤을 지새우는 것도, 언젠가는 돌이켜보며 허허롭게 웃을 날이 있을 지도 모르지 않은가?’ 쓰디쓴 고소를 입가에 매달 때, 또 다른 생각이 뇌리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이 헛되고 일순간일지라도 사람인 이상, 보다 즐겁고 편안한 삶을 바라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너는 그녀와 함께 한다면, 또는 무공을 성취하여 운명을 벗어난다면, 그 욕망이 충족되어 행복해지리라 생각하는가? 아니지! 사람이란 어떤 것을 원하여 가지게 되면 또다시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게 되지. 점점 더 욕망에 빠져서 더 나은 것, 즐거운 것, 편안한 것을 찾게 되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있는 줄도 모르게 되겠지.’ 그러자 한쪽에서 또 다른 반문이 치솟아, ‘그러면 누구나 눈앞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눈앞의 일에 급급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보다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다 넓고 큰 생각을 한다는 것이겠지. 단지 눈앞의 결과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소리치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은 사람들이겠지. 바로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찾은.’ 문득 노인이 이야기해주었던 아이들이 생각나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 나는 그 어린아이보다도 못하구나. 철모르는 아이들도 그러한 깨달음을 얻어서 세상을 달리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보다 훨씬 똑똑하고 강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렇게 마음의 부침(浮沈) 속에 흔들리기만 할 뿐이니.’ ‘나에게도 그런 기우가 닿아 그것을 얻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라면 이 세상에 현자 아니고 성자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한 사실을 안다 해도 내 자신이 절실히 느끼고 깨닫지 않는 한, 그저 귓전을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소리와 다를 바 없을 텐데.’ 자정에 가까워질 때까지 번민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생각해보아도 그 끝을 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저어서 생각을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어둠을 몰아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치(梔)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가득 메웠던 답답함이 덜어졌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생각은 더 많아져서 계속해서 자신을 돌이켜보게 만들고 있었다. 지난날에는 무공 이외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아서, 자기 자신과 주변의 세사에는 무관심했었다. 그러다 소적교(素赤橋)의 일로 회정결(灰情訣)이 금이 가고 한 가닥 깨달음을 얻어 수어검(手御劍)에 이른 이후부터, 잇따른 정신적인 충격과 혼란으로 인해 점차 번뇌가 심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회정결에 의해서, 아니 사실은 일부러 그런 일을 멀리해왔다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로 마음이 괴롭지만, 한편으로는 기쁜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보다 나은 경지로 다가가는 지름길이 될 터이니 말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렇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설혹 당장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상달에는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잠시 더 생각에 잠겼다가, 그동안 마음에 겨를이 없어서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던 내상의 치료에 들어갔다. 밤을 새워 운공을 하여 내상을 가라앉힌 단리유아는, 새벽부터 일어나 양들을 돌보는 노인과 아침을 함께 했다. 아침식사라고 해보아야 보릿가루를 양젖에 개어 만든 딱딱한 빵과 차 한 잔이 다였다. 노인이 건네주는 것을 받으면서 단리유아가 물었다. “어르신, 제가 며칠 더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응? 하하하, 나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만 자네는 쫓기는 중이 아니었나?” “괜찮을 것입니다. 더 이상 뒤를 쫓지는 않을 것이니.” “그러면 자네가 떠나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머물게나. 나야 말벗이 생겨서 좋기만 할 뿐이니.” 식사를 마치고 단리유아는 따로 떨어져 내외상을 치료하는데 전념했고, 치노인은 양들을 이끌고 한쪽의 풀밭으로 데려가서 풀어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그러한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단리유아도 첫날을 제외한 다음날부터는 치노인을 따라다니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사흘째 되는 오후에도 두 사람은 언덕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쾌하게 웃으며 얘기하는 치노인의 말들은 단리유아에게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그러다 자꾸만 무리에서 벗어나 딴 길로 새려는 양 한 마리를 보게 되었을 때, 치노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여보게, 저기 저놈은 새끼 때부터 말을 안 듣고 나를 애먹이는 특이한 녀석이라네.”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겉모습은 다른 양들과 별다르지 않았지만, 개들이 따라가 사납게 짖어서 몰아대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싸우려는 듯한 태도로 맞서는 것이 이상해보일 뿐이었다. “단지 개들에게 두려움이 없는 것만 빼고는, 별로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아니야, 저놈은 한시라도 감시가 소홀하면 무리를 벗어나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놈이라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일이 자주 있어왔는데, 이상한 점은 이삼일 후면 다시 어슬렁거리며 나타난다는 것이지. 그동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지만 말이야.” “아마도 저놈의 성격이 자유로운 것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단리유아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이제는 포기하여 말릴 생각도 안 한다네. 정말 이런 말 못하는 동물도 그럴진대 사람이라면 오죽하겠나? 사람이 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또 어딘가에 속박되어 살아간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 그것이 물욕이든 애욕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지 상관없이, 사람이란 항상 모든 것에서 벗어난 대자유(大自由)를 꿈꾸며 살아가는 거지.” “그렇습니다.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항상 불만에 차서 어딘가로 떠나고자 하는 욕구가 가득한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손뼉을 치며, 유쾌한 표정으로 노인이 말을 잇는다. “탁!” “하하하,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또 달라지는 것이 인간이니, 정말 우습지 않나? 그때는 다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라고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지. 마치 저 양처럼 말이야.” 손가락으로 양을 가리키며 말하는 노인을 보며, 단리유아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함께 지낸지 이제 나흘에 불과했지만, 가끔씩 드러나는 말 속에서 느껴지는 연륜과 세상에 대한 안목에서 자신은 비교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태도와 평범한 일상사에 숨어있는 조그마한 기쁨을 찾아내는 것에서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진리란 결코 거창한 것이나 어려운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평범함 속에 숨어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 단리유아의 마음도 이전과는 달리 많이 가벼워지고 밝아지게 되었다. 적막한 초원에서 만난 글도 모르는 노인이 단리유아에게 건넨 몇 마디 말이 오히려 어떤 책이나 사람들에게서 얻은 것보다 귀하고 많았다. 그런 마음으로, 말리는데도 부득불 절을 세 번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무공외적으로 마주친 사람 중에서 자신에게는 첫 스승이라 할 만한 사람이었으니 이런 것도 부족하다 할 것이다. 더 머무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걱정하며 기다릴 일행을 생각한다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며칠 쉬며 지내는 동안, 내상은 완치되었고 외상 역시 아물고 있었다. 임유정의 말대로라면 별달리 일행에게 위험은 없을 것이고, 기혼사와 팔망수괴의 무위로 보았을 때도 포위망을 돌파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신법을 펼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북부지방에서는 가장 큰 마을에 들어가는 덕흠(德欽)은 일만 척이 넘는 고산지대에 위치한 이백여 호의 마을이었다. 나무나 벽돌로 지은 집들도 있었지만, 천막으로 지은 집들이 오히려 많아서 이들이 본래 유목민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주민의 대다수는 서장(西藏)의 주요 민족인 장족(藏族)이 대부분으로, 멀리 보이는 매리설산(梅里雪山)을 넘어간다면 바로 서장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단리유아가 이백여 리 떨어진 덕흠(德欽)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마을에는 들어서지 않고 지나쳐 곧바로 십여 리 떨어진 마애불(磨崖佛)이 조각되어 있는 암벽으로 향했다. 높이가 백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은, 아직 거리가 멀었음에도 쉽게 눈에 들어와 찾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암벽에 다다라 새겨진 마애삼불을 바라보고 동굴을 찾고 있을 때, 동쪽의 절벽 틈으로부터 기혼사를 선두로 일행이 뛰어내려왔다. 기혼사가 달려들어 단리유아를 껴안더니, 크게 웃음 지며 떠든다. “하하하, 자네 무사했군 그래. 우리는 사흘 전에 이미 이곳에 도착했었는데, 그동안 자네 소식을 듣지 못해서 애가 타서 죽는 줄 알았다네. 어디 크게 다친 곳은 없나? 괜찮겠지?” “소사숙, 정말 다행입니다. 이렇게 무사하시니. 그동안에 소사숙에 대한 걱정으로....” 선상조도 끼어들어 말하는데, 격한 감정으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공손고와 팔망수괴도 옆에서 큰 소리로 각기 안부를 물어왔다. 자신에 대한 반응을 보고 잠시 놀랐던 단리유아가 다들 별 이상이 없자, “보다시피 저는 건강합니다. 다들 무사하신 것을 보니 저도 마음이 가벼운데, 혹시라도 상처가 심한 분은 없습니까?” “아니, 다들 팔팔하다네. 자네와 헤어진 뒤로 그놈들과 몇 번 싸웠지만, 되도록 도망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뭐, 끈질기게 따라붙는 놈들에게는 내가 독(毒)의 진미를 톡톡히 보여주었지. 흐흐흐” 아직까지도 단리유아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기혼사가 떠든다. 칠척의 단리유아에게 꼭 붙어서 오척 단구의 기혼사가 말하니, 마치 철모르는 아이가 어른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았다. 그런 기혼사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팔망수괴가, “어이구! 야, 이 늙은이야! 제발 그만 좀 하고 떨어져라. 나잇살이나 먹어서 그게 뭐하는 짓이냐? 그리고 겨우 몇 놈 중독시킨 것 가지고 무슨 생색이 그리 많아?” “뭐? 이 자식이 뭐라고 떠드는 거야? 너, 내가 단리소협과 친해보여서 샘이 나서 그런 것이지, 그렇지?” 크게 소리치다가 오히려 약 올리는 듯한 표정으로 기혼사가 대꾸한다. 다른 일행들도 그 모습에 어이없어할 때, 곧바로 팔망수괴가 떠든다. “내가 당신 같은 줄 아나보지? 모름지기 어른이라면 겸손함을 알아야 하는데, 몇 명 중독시킨 것 가지고 며칠을 자랑하다니. 만일 내 수준의 고수가 하나라도 끼어있었다면, 다들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말이야. 나처럼 우아하게 적들과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무식하게 철편으로 묵사발이나 만들면서. 쯔쯧쯧, 언제나 철이 들는지.” 힐끗거리며 말하는 팔망수괴를 보고 기혼사가 화가 나서 달려들었다.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다들 골치 아픈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서로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잡아서 계속 싸우는 것을 보고, 곁에 있던 선상조와 공손고가 오히려 더 괴로울 지경이었다. 싸우다가도 자신들에게 물어보는데, 한쪽이라도 편들면 나중에는 다른 쪽에게 하루 종일 시달려야했고, 말이 없을라치면 나이 많은 어른을 무시한다고 못살게 굴었다. 단리유아가 나서서 두 사람을 말린 후에야 떨어지는데, 그 짧은 시간에 변한 모습이 가관이었다. 옷자락이 흐트러진 대다가 머리카락도 사방으로 풀어져 있었고, 목에는 서로의 손자국과 할퀸 자국이 남아있었다. “치사한 놈 같으니, 머리카락이나 뽑고.” “누가 할 소리. 이렇게 손톱으로 긁기나 하는 게 누군데.” 서로를 삿대질하며 소리치다가 다시 달려들려는 두 사람을 일행이 붙들어 말린다. 단리유아가 나서서, “두 분 다 그만 고정하시고, 우선 어디 자리에 앉아서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이 좋겠네. 일단 우리가 머물던 동굴로 가도록 하세.” 공손고가 얼른 맞장구를 치며 앞장서 동굴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들 동굴로 향하니, 그제야 두 사람도 따라 들어간다. 다들 동굴내로 들어가 빙 둘러서 앉았을 때, 단리유아가 일행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어, “제가 떠난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주시겠습니까?” “자네가 떠난 그날 밤부터 우리도 하루 종일 싸워야만 했네. 다행히 여기 두 선배님을 상대할만한 고수가 없어서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달아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네. 그날 이후로는 별다른 일이 없었고, 우리가 며칠 이곳에 머물러 근처를 살펴보아도 추적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네.” 공손고가 하는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팔망수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으흠. 그게 다 이 어르신 때문이 아니겠냐? 내 무위를 보고 그놈들도 경악해서 다 도망친 것이 분명해. 흐흐흐, 다들 두려움에 질려서 도망치다가 이젠 나를 더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틀림없이 하늘에 감사하고 있을 거야.” “흥! 무서워? 누가? 어떤 놈이? 오히려 네놈의 헛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테니 기뻐서 날뛰지 않을까?” 기고만장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하는 팔망수괴를, 기혼사가 딴죽을 걸듯이 코웃음 치며 비웃는다. 곧바로 서로 갖가지 욕설을 내뱉으며 싸우더니, 점점 더 소리가 커져 얼마 안 있어 동굴 안에는 두 사람이 소리 지르는 고성에 고막이 윙윙거릴 지경까지 되었다. 참다못한 선상조가 맞고함치며, “선배님들! 우리 좀 진지하게 얘기 좀 합시다. 정말, 두 분 다 어떻게 나이를 먹었는지....” “뭐시라? 이 자식 어른에게 말하는 것 좀 보게.” “클클, 선가 아이야! 벌써 지난날을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내가 이참에 다시는 잊어먹지 못하도록 해주련?” 기혼사와 팔망수괴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선상조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단리유아가 한숨을 내쉬며, “두 분 모두 고정하시고 앞으로는 그렇게 서로 싸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한참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참에 서로 변죽을 올려 싸우기만 하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최소한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만이라도 참고 나중에 두 분이서 따로 싸우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런 분은 빼고, 다른 사람들끼리만 이야기 하도록 할 것이니. 그리고 선사질의 말도 너무 심한 면이 있으니, 두 분께 사과하도록 하시오.” 단리유아의 말에야 두 사람도 기가 죽어, 잠시 후에는 아주 조용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윽고 단리유아가 고개를 돌려 일행을 보며, “다시 아까전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먼저 어찌된 일인지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는지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그러는 자네는? 자네부터 이야기해 보게. 우리와 헤어진 뒤에 어찌되었는지.” 공손고가 되묻는다. 다들 자신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며 단리유아가 담담한 표정으로, “흠, 여러분과 헤어진 뒤로 저는 계속해서 그들과 싸우며 포위망을 뚫고 나갔습니다.” 말을 시작하여 일행을 떠난 이후부터의 자세한 경과를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사상시마와 싸웠던 대목에 이르자 팔망수괴가 놀라서 경호성을 지른다. “설마, 사상시마(四象屍魔)?” “선배님께서 아는 사람들입니까?” “우선 다시 한 번 그놈들의 생김새를 말해보게, 어서!” 재촉하기만 하는 팔망수괴를 향해서, 단리유아가 그들의 생김새와 무공의 투로에 대해서 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음, 정말 그놈들이었구만. 그놈들은 나보다 반배 정도 앞서 강호에서 활동했던 놈들인데, 아직도 살아 있었단 말인가? 내 듣기로는 소림사와 시비가 붙어서 강호를 떠나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저도 그들과 싸워보았지만 보통 고수들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기습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을 때는 저도 큰 손해를 감수하여야만 하였을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아무리 자네라도 그들이 합벽진을 펼쳐서 상대하게 되었을 때는 그리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네. 당시에도 그들의 합벽진은 유명해서 소림의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과도 맞겨룰 정도였다고 들었으니까.” “그 정도의 고수들까지 거느리는 세력이라니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상조도 우려의 표정으로 끼어든다. 잠시 서로 생각에 잠겼을 때, 공손고가 다시 경과를 재촉한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나?” “적들의 수뇌로 보이는 여인과 만나서 싸운 후에 다시 헤어졌습니다.” “여인이라고? 어느 정도의 고수였는가?” 다들 놀라서 바라보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임유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서 대충 둘러대어 단리유아가 말한다. “기선배님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였는데, 물리치고 바로 떠나서 어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저도 그동안에 입은 상처가 있어서 자세히 물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상 임유정의 무공은 기혼사보다 강하다 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다들 약간 의혹스런 표정이 되었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더 캐물을 수는 없었다. 기혼사가 침묵을 깨뜨리며 다시 단리유아를 향해, “흠, 그러면 그놈들에게서 알아낸 것은 더 없나?” “예. 계속해서 싸우기에 바빴고, 그녀와 싸운 이후로는 더 이상 적들을 만날 수 없어서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은 요상하며 보낸 것이 다이니.” 기혼사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에 한숨을 내쉬며, “휴, 정말 난감한 일이군. 우리도 알아낸 것이 별로 없네. 쫓기는 도중에 삼파의 고수 몇 놈을 붙잡아서 물어보았지만, 무슨 운남지단(雲南支壇)의 인물들이 자신들을 움직였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지.” “운남지단이라면?” “수뇌들이 아닌 말단 제자들이라 그놈들도 자세히는 모르고, 단지 어떤 세력의 하부조직으로 이곳 운남(雲南)일대의 패권을 노리고 있다 들었네.” 잠시 단리유아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지단(支壇)이라 이름 지은 것을 보면, 다른 지역에도 그와 비슷한 조직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내 생각도 자네와 같네. 명칭만 가지고 무어라 단언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름 지을 때는 그와 비슷한 것이 여러 개일 때 그렇게 하는 것이니. 삼파를 아우르는 것만 해도 이 운남(雲南)지역에서는 맞상대할 세력이 없을 텐데, 그런 조직이 일개 하부조직이라니 도대체 그런 집단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네.” 기혼사의 말에 덧붙여 공손고가 우려의 표정으로, “어떻게 그런 세력이 여태까지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이상할 정도라네. 그 정도의 세력이라면 오륙년의 세월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내 생각으로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반갑자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어 생각에 잠기거나 분분히 서로의 의견을 말할 때, 팔망수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 녀석의 말에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 말이야. 내가 은거하기 전에 강호(江湖)에 약간 이상한 일이 생긴 적이 있었지. 어느 날 갑자기 죽거나 실종된 고수들이 상당수가 있었는데, 막상 살펴보면 별다른 이상을 찾을 수 없었거든. 죽은 사람을 검시해보아도 별다른 상처 없이 자연사라는 것만 확인되었고, 실종되었던 사람들도 일이년이 지나면 되돌아오곤 해서 말이야. 사오년 그런 일이 삼십여 건 있어서 한동안 시끄러웠지만, 그 이후로는 별일이 없어서 다들 잊어버리게 되었지. 우리 파행삼괴(破行三怪)가 나서서....” 자신들의 일을 떠벌리는 팔망수괴를 보다가, 공손고 역시 기억이 떠올라 손뼉을 치며, “짝!” “맞습니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지요. 제가 출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일들로 저도 막 그 사건을 캐보려고 했는데,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단념하게 된 것이 생각납니다.” 결의(決意) 결의(決意) 3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기혼사가, 고개를 돌려 단리유아를 향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한다. “자네가 오기 전에 우리끼리만 생각해보았는데, 운남지단(雲南支壇)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이것이 한 지역의 단체가 아닌 세외(世外)전체 아니 중원(中原)까지 포함한다면 사상 유래 없는 단체라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라네. 최소한 삼십년 전부터 이 세력이 생겨났다고 했을 때, 이미 강호(江湖)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는 상황이라 할 것이네.” 기혼사의 말처럼 다들 여태까지의 경과를 보고 그런 암중의 세력이 강호에 나타난 것에 대해 우려의 표정이 완연했다. 일행의 생각처럼 오래전부터 태동하여 준비해왔다면,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도 짙어지고 있었다. 문득 단리유아가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일행을 돌아보며,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웅크리고 있던 세력이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팔망수괴가 나서서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해서, “내 생각에는 뭔가 그들 내부에 문제가 있어서 아직까지는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 우리 예상처럼 세외(世外)와 중원(中原)을 아우르는 세력이라면 그 구성에 있어서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니, 아마도 내부세력이 서로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을지도 모르지. 또, 아직은 완전한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당금 중원의 정세를 보아서도 분명하지. 그렇지만 멀지 않아 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아. 아마 세외를 어느 정도 평정하고 나서, 중원의 세력들이 서로 싸워 상잔한 뒤에 순식간에 강호를 제패할 심산이겠지. 그때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테니.” “문제는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도 이렇게 그들과 싸워보지 않았다면 그런 세력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텐데, 세외쪽은 제외하더라도 현재 중원은 정사가 서로 으르렁대기 바빠서 그런 일이 있는지도 신경을 쓸 여유도 없을 것이니 정말 걱정스런 일입니다.” 선상조도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공손고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정말 큰일이야. 아직 그놈들이 백일하에 세력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만일 준비가 끝나 강호에 현세한다면 그땐 이미 끝장이라고 보아야지. 이제까지의 정황을 보면 세외지역은 거의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이니.” “그렇지. 우리가 겪었던 남만(南蠻)에서의 일들을 본다면 그쪽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거의 정리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세외의 다른 강파들이 일제히 준동하여 세력을 모으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을 테니.” 같은 생각인 기혼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손고가 다시 이어서, “우리를 공격한 것도 아마도 그런 연유가 아닐까 생각되네. 자네가 이처럼 계속해서 세외(世外)를 떠돌며 비무를 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계속해서 방해하거나 혹시라도 세력을 모은다면 큰 문제라 생각할 테니. 다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라 여겨지는데, 그들이 우리를 잡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자네를 뒤쫓는데 전력을 다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그건....” 단리유아가 임유정을 생각하고 설명을 자세히 하려다, 어차피 공손고의 생각도 맞고 임유정에 대한 일은 언급하지 않고 싶어서 다시 화제를 돌려서 되물었다. “그렇다고 꼭 저를 공격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의 성격은 어떤 무리를 이끌거나 강호(江湖)의 패권 같은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 텐데 말입니다.” 기혼사가 곧바로 혀를 차면서, “쯔쯧, 자네는 자신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바보인척 하는 것인가? 자네의 무공만으로도 천하에 맞상대할 고수가 몇이나 되겠나? 어디 한 번 자네가 직접 말해보게.” “.... 아무래도 삼십여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한참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하는 단리유아를 보며, 기혼사가 코웃음 치며, “흥! 삼십여 명이라고?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기선배님도 직접 보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남만(南蠻)의 고수들과 비무하면서도 그리 우세를 차지한 것은 확실히 차이가 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얼마 없다는 것을. 철목존자(鐵木尊子)나 자령독제(紫靈毒帝), 백상무후(白象武侯) 같은 사람과는 그 우열을 가늠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다들 단리유아를 처다 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단지 겸손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궁금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볼 때에는 그들과 싸울 때에도 단리유아가 우세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이후로도 무공이 상승해서 수어검(手御劍)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격차는 더욱 커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기혼사가 얼굴을 들이밀어 단리유아를 빤히 바라보며, “자네는 우리를 바보로 아는가? 자네의 주요무공 중에서 단지 검법만을 펼쳐서 상대했고,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무공이 진전해서 더욱 그 차이가 벌어져 다시 싸운다면 아주 일방적인 싸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게다가 자네의 그 끔찍한 도법은 그들과 싸울 때에는 쓰지도 않았지 않나?”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도 실전이 아니어서 전력을 다했다고 볼 수는.....” 뒤로 얼굴을 물리며 말하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끊으며, “그만 자신을 속이게. 내가 보기에 중원과 세외를 통틀어 자네와 맞상대할 자는 열을 넘지 않을 것이네. 게다가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자네가 보다 더 유리할 테니 실제로는 그 수가 더욱 줄어들 것이네. 어디 너희들의 생각은 어떠냐?”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는 기혼사를 보며 단리유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선배, 실제로 그렇다 해도 실전에서 일대일로만 싸운다는 것은 거의 일어날 수 없는 몽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히 저를 제압할 만한 고수들을 모아서 상대할 것이지, 미련하게 정정당당을 외치며 일대일로 부딪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강하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적입니다. 만일 강기(剛氣)를 쓸 수 있는 자들이 네 명만 모여도 저는 도망쳐야 할 것이고, 다섯 명이라면 필사(必死)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경(玄境)에 이르지 않는 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도 같은 경지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중과부적입니다.’ 고개 숙여 말하지 않고 있는 단리유아를 보며 일행이 각자 떠들 때, 기혼사가 다시 단리유아를 향해, “그러면 우리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 내가 자네의 적이라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나? 누군가 내가 꾸민 일을 자꾸만 방해하고, 게다가 점차 강해져가기까지 하는 것을 본다면?” 미처 단리유아가 대꾸하기도 전에 팔망수괴가 끼어들어, “킬킬킬, 나라면 제일 먼저 제거하려고 할 걸? 다른 일은 모르지만 적수가 강해진다는데 가만히 기다리는 바보는 천하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머리에 구멍이 뚫려 바람이 술술 들락거리지 않는 한 말이야.” “자네가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는 나서기 싫어하고 관심도 없어하는 것을 알지만,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그들은 결코 멈추려하지 않을 것이네. 자네가 죽던지 그들을 거꾸러뜨려 없애지 않는 한, 절대 그 끝은 보이지 않을 것이네.” 기혼사의 말처럼 단리유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운명(運命)에 질질 끌려가듯이 어쩔 수 없이 강호(江湖)의 이전투구에 끼어들어, 허울 좋은 강호제패나 사람을 도륙하는데 빠져서 세월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왜 사람들은 그런 쓸데없는 것에 목을 맬까? 차라리 자신을 갈고 닭아 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 같은, 보다 나은 길도 많고 많을 텐데. 무한한 세월에 비한다면 인간의 삶이란 하루살이의 일생과 비교해도 그리 길다 볼 수 없을진대. 그런 찰나의 허상(虛像)에 매달려 일생을 허비하여 수많은 피를 부르는 일이나 하다니, 도대체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자들일까?’ 탄식하다가 생각을 멈추고 씁쓸한 웃음과 함께, “저도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싸우려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겠지요. 사람의 일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은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니....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거창한 대의나 심신수련 같은 이유로 무공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와의 맹세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아(自我)의 완성으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운 것이 바로 무공입니다. 우선적으로 신체적인 구속에서 벗어나는 길로서 힘이 있어야 할 것인데, 다른 금력(金力)이나 권력(權力) 같은 수단보다도 직접적인 육체의 강함을 추구하다보니 무공을 익히게 된 것입니다. 현경(玄境)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일단 그렇게 된다면 혹시나 운명의 사슬을 끊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현경이라는 경지가 마음의 깨달음이 우선이니, 마음을 갈고 닦다보면 언젠가는 자아의 완성이라는 명제에도 도달하리라 여겼습니다. 그런 것에 비할 때 원한(怨恨)이나 야망(野望), 여인의 정(情) 등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저로서는 누가 강호제패(江湖制覇)를 하든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보았자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천년만년 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이 불사(不死)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설혹 그런다하더라도 얻는 것이 무엇이라고.... 명예와 부, 미인 등 갖가지 환락(歡樂)을 맞볼 지라도, 그런 것으로는 일시적으로는 모르지만 결코 인간 본연의 텅 빈 공허함을 채워주지 못할 터인데.”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단리유아의 말에 다들 생각에 잠겨서 자신들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일행이 언제나 무공을 익혀서 현경(玄境)에 이르기를 소원하는 것을 보고, 단지 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 줄 알았지 이런 이유가 있을지는 미처 몰랐었다. 좀처럼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법도 없었고, 이런 생각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 이렇다 할 감정의 표현이 없는 것이야 심결(心訣)의 영향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일 줄 알았지, 근본적으로 자신들과는 그 생각하는 인생관이 전혀 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자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 뜻밖이로군. 자아(自我)의 완성이라. 휴, 우리 같은 필부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인데....” 기혼사가 탄식처럼 말할 때, 단리유아가 억지로 크게 웃음 지며, “하하하, 너무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찌 되었던 저도 싸우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 순순히 목숨을 포기하거나 도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그 길에 다가가는데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될 수 있는 대로 부딪치지 않으려한 것뿐입니다.”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거의 평생을 웃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단지 입가의 근육을 씰룩여 인상을 쓰는 것처럼 보였고, 웃음소리도 탁해서 이상하게 들렸다. 일행도 단리유아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처음 보는지라, 한동안 단리유아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팔망수괴가 일부러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고자, 얼굴을 일그러뜨려 갖가지 우스운 표정을 만들어내며, “쯔쯧, 그것도 웃음이라고. 내가 시범으로 확실히 보여주지. 하하하, 허허허, 껄껄껄, 후후후, 헤헤헤, 흐흐흐, 킬킬킬.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지 웃음이라 할 수 있지.” “바보 같은 놈, 그게 웃음이냐? 모름지기 웃음이란 나처럼 연륜이 묻어나와야지. 흘흘흘, 클클클.” 기혼사가 끼어들어 웃음 지며 팔망수괴를 놀린다. 이에 질세라 팔망수괴가 계속해서 소리 내 웃기를 계속하고, 기혼사도 멈추지 않고 갖가지 표정으로 계속한다. 이런 모습에 다들 우울한 분위기를 떨치고 즐겁게 웃으니, 한동안 동굴 안은 갖가지 웃음소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잠시 후에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자, 먼저 단리유아가 일행을 향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봅시다.” 이에 단지 일행의 행보에 관해서 물은 것에 불과한 단리유아의 말을, 공손고가 이야기를 확대 해석하여, “내 생각으로는 현재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강호(江湖)를 볼 때, 누군가는 나서서 강호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것도 시급히 준비를 마치고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이네. 이미 늦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런데 현 강호에서는 이렇다 할 믿을 만한 사람도, 중원과 세외에 두루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 문제지. 중원만을 따져보았을 때, 정파의 보루라는 무외신궁(無畏神宮)이 의심스러운 마당에는 더욱 그러하지. 또 다른 문파들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야. 이런 음모가 한두 해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라면, 대부분 간세들이 침투해 있을 테니 말이야.” 공손고의 얘기에 단리유아가 말 하려할 때, 미리 이야기를 맞추어놓았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기혼사가 나서서, “그래서 말인데, 어떤 세력과 관련이 없고 무공에 있어서도 적수가 드문 사람이 있으면 적당하겠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런데,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자네가 적임자인 것 같아.” “자네가 만일 나선다면, 이곳 운남(雲南)의 천룡사(天龍寺)나 남만(南蠻)의 세력들을 손쉽게 응집시킬 수 있을 걸세. 또 자네가 만났었다는 천수검제(千手劍帝)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만리장성 밖 요동(遼東)지역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다시 공손고가 기혼사의 뒤를 이어 덧붙인다. 곧이어 선상조와 팔망수괴까지 합세하여 연이어 서로 떠들었다. ‘아니 이들이 왜 이러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나서서 떠드는군. 나는 단지 앞으로의 행보가 걱정이 되어 이들과 헤어지는 것을 생각해보자고 말할 작정으로 그런 것인데?’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단리유아가 약간 당황하여 손을 저으며, “여러분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어린데, 어떻게 그런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혼사가 중간에 끼어들어, 화가 난 얼굴로 크게 소리쳐, “뭐? 그럼 자네는 일개집단에 의해서 강호가 독패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자네 혼자서 그들을 모두 상대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손사래를 치는 단리유아를 보며, 기혼사가 콧방귀를 뀌며, “흥! 어떻게 자네는 자네 생각밖에 모르나? 별 상관도 없는 우리를 죽이기 위해 떼로 달려드는 것을 보거나, 지난날 소적교(素赤橋)의 일도 그놈들의 소행으로 보이는데.” “그건 아직은 누가 그랬는지 밝혀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되묻는 단리유아의 말에 혀를 차며, “쯔즛, 자네도 심중으로는 그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왜 그리 묻는가? 이때까지 세외에 세력을 구축하였다면 틀림없이 남만에서도 그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테고, 그 일을 저지를 만한 세력도 그 정도의 큰 집단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일 것이네.” 이어서 공손고도 거들어, “여보게, 내 생각에도 자네가 나서는 것이 좋으리라 보네. 자네가 그런 일을 싫어한다고 해도, 결코 혼자서는 그들과 싸울 수 없을 걸세. 그러니 우리도 힘을 모아야 할 것이네. 만일이라도 그놈들이 본격적으로 강호(江湖)에 나선 후에 대항할 생각이라면, 이미 그 일은 물 건너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네. 세외를 일통한 후에는 중원일 것이고 그 다음은 그 밖의 아직 굴복하지 않는 지역일 테니, 그때에는 아무리 자네의 무공이 높아져 설사 현경(玄境)에 이른다 해도 쉽지 않을 것이네. 내가 보기에 저들이 아직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세외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다른 곳에서는 그들 지단(支壇)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세력들이 많으니 말이야. 아마도 지금은 동맹정도로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일이 흐를수록 다른 세력들이 굴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일 것으로 보이네.” “소사숙, 저도 선배님들의 의견과 같습니다. 그것이 구의와 웅사형의 목숨 값을 보상하는 길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과 싸우고 싶습니다.” 선상조까지 달려들어 몰아세우는 것을 보고 단리유아가 답답한 마음에, “이일은 아무래도 쉽게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잠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다른 명성 높은 선배에게 이일을 여쭈고, 그분이 앞장서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 중원과 세외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자네 말고 어디 있나? 자네보다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말해보게.” 기혼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생각해보다가, “천수검제(千手劍帝) 선배나 불광괴승(佛光怪僧) 같은 분이 나선다면....” “흥! 어림도 없는 소리. 그들의 나이가 지금 몇인 줄 아나? 이미 백이십이 넘어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말일세. 설혹 그들이 생생하더라도 이런 일에는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주동이 되고, 나이든 사람은 단지 조언을 하고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말일세. 또 그들의 문제점은 명성에 비해서, 그 일대를 제외하고는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야말로 적임자란 말일세.” 다들 이구동성으로 떠드니, 단리유아 혼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이들은 어째서 이렇게 내가 나서기를 바란단 말인가? 난 그들이 공격하면 공격하는 대로 그들과 싸우며 무공을 완성해나갈 생각뿐이었는데. 그런 일에 앞장서서 세력을 모아 대항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묵묵히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며,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팔망수괴가 나서며 크게 소리쳐, “야, 이놈아! 무슨 생각이 그리 많으냐? 네가 무공에만 전념하고자 하는 것을 다들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강호(江湖)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 무공을 익혀 옳은 일을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냐! 자아(自我)의 완성을 위해서 무공을 익혔다면서, 어떻게 불의(不義)를 보고 참아 넘기겠다는 말이냐! 만일 자신만을 위해서 무공을 익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른 척 한다면, 아무리 무공이 높아져 상승의 경지에 도달할지라도, 넌 일개 비천한 무부(武夫)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무공완성(武功完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좋고, 다른 일에 무관심한 것도 큰 문제는 아니지. 이 세상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 착한 놈이 있으면 반드시 어딘가에는 나쁜 놈이 있기 마련인 것이 세상 이치야. 분명히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소극적으로 자신에게는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듯이 나서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오히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더욱 악행(惡行)을 조장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충분히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악행을 막을 수 있음에도 방관만 한다면, 그것은 직접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느냐?“ 계속해서 이어지는 팔망수괴의 말에 다들 놀라 휘둥그레 눈을 뜨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무게 있는 말을 할 수 있으면서, 어떻게 평상시에는 그리 주책맞은지 하고 생각하면서. 일행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단리유아의 마음까지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모름지기 진정한 대장부(大丈夫)라면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데 지켜야할 근본적인 도리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지 않느냐? 나는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힘을 준 것은 다 뜻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런 힘을 가지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도 문제이지만, 충분히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음에도 나서지 않고 자신만의 이기적인 욕심에 빠진 사람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 네가 무공을 익힌 무인(武人)인 이상, 그 바탕인 협의(俠義)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협의에 대해서 떠드는 많고 많은 말이 있지만, 난 가장 평범하고 흔한 말로 대신하겠다. 약자를 보호하고 악한 자에 맞서 싸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들 무인의 본분이라 할 것이지. 그래도 네가 너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내가 사람을 잘못보고 널 따라나선 것이라 하겠지.” 말을 마치고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등을 돌리고 앉아버린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일행이, 이윽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 사람이 말썽만 피우던 그 사람이 정말 맞아?’ 하고 눈짓으로만 얘기하고 있었다. 결의(決意) 결의(決意) 4 침묵만이 동굴 안에 흐를 때, 단리유아도 팔망수괴의 말에 충격을 받고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었다. ‘허허. 불과 며칠 전에 치노인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그새 또 나만을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다니. 어떻게 나는 그런 아이들의 생각만도 못하단 말인가?’ ‘이 천하에 어리석은 단리유아야! 그러고도 네가 자아(自我)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으로만 똘똘 뭉친 주제에?’ 자기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한동안 넋을 잃고 자책하다가, 일어나 팔망수괴를 향해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육선배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선배님의 깨우침이 없었다면 아직도 소생은 잘못인줄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피하려고만 했을 것입니다. 부디 용서하시고 저의 사죄를 받아주십시오.” “....” 단리유아가 계속해서 말해도 아무런 대꾸가 없는 팔망수괴의 모습에 기혼사가 소리쳐, “야, 이놈아! 사람이 말하면 그만하고 받아주어야 할 것 아니냐? 어떻게 계속해서 모른 척하기만 하고 있냐?” “....” 그래도 미동 없이 등을 내보이고 돌아앉아만 있는 모습에 기혼사가 다가가 어깨를 밀친다. 스르르 옆으로 넘어가는 모습에 놀라서, “얼래? 이 자식 잠들었잖아? 야, 임마! 그만 일어나지 못해! 지금 이런 순간에 잠이 오냐? 하여간에 네놈은....” 발로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자, 그제야 잠들었던 척 실눈을 뜨며, “으웅. 왜 그래? 막 잠이 들 판이었는데?” “이 자식아 뒤를 돌아봐라! 단리소협이 너한테 사과한다고 무릎 꿇고 있지 않느냐?” “뭐? 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대? 저놈이 내 물건 중에 훔쳐간 것이라도 있나? 아니면....” 횡설수설하는 팔망수괴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입 닥쳐! 정말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네. 아까 그 진지하던 놈이 맞아? 어쨌든 빨리 사과나 받아줘라. 안 그러면 계속 저러고 있을 것 같으니. 앞으로 의논할 일도 많은데, 어서 서둘러!” “뭐,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서 일어나! 사람 쪽팔리게 이게 무슨 짓이냐? 알았으니 어서 일어나란 말이야, 어서!”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단리유가, “육선배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지 않았다면, 아직도 미망(迷妄)에 빠져서 회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흠! 그래그래. 알았으니 그만 하자. 너도 이제야 철이 들었나보구나. 역시 내가 했음에도 좋은 말임에는 분명해. 옛날 사부님이 임종시에 유언으로 떠들던 말로 나두 눈물이 날 정도여서, 너한테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해서 한 것인데. 정말 효과가 직방이군. 앞으로도 많이 써먹어야지. 음, 다음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다가 이내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채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기혼사가 팔망수괴의 모습에 안도의 기색으로 중얼거리며, “어쩐지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길래 뭔일인가 했지. 그러면 그렇지! 저놈이 그런 말을 생각해낼 만한 놈은 절대 아닌데 그러니, 내가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몰라!” “어째서 선배님의 가슴이 철렁한단 말입니까?” “항상 나보다 훨씬 못난 놈으로 보았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너는 기분이 어떨 것 같냐?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모르지?” 그 말에 질문을 던졌던 공손고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제기랄! 하여간에 이 늙은이 둘은 절대 상종하지 못할 괴물들이라니까. 어이구,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내가 정신 나갔지.‘ 반각 정도가 흘러 어느 정도 장내의 어수선함이 가라앉았을 때, 일행은 다시 둘러 모여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계속했다. “여러분의 뜻대로 저도 결의(決意)를 다져, 앞장서 그들과 맞서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모인 것은 우리들 다섯 사람에게 불과하고 저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아는 것이라곤 어떤 미증유의 세력이 강호제패를 노리고, 우리를 공격해왔다는 사실 뿐입니다. 각자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의견을 말해보십시오.” 잠시 일행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먼저 선상조가 나서서, “소사숙, 제가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일단 기본적인 세력의 구성에 있어서의 문제. 둘째로 자금력에 대한 문제. 셋째로 절대고수의 숫자에 있어서의 문제. 넷째로 정보력의 문제가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중에서 둘째와 셋째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하루라도 빨리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공손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네의 말이 옳네. 일단 첫 번째 단계인 세력의 구성면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세. 내 생각에는 그들이 각각의 지역마다 지단을 두듯이 우리 역시 각 지역마다 연맹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네.” “흠, 그것도 좋지만 일단 유사시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세력 면에서는 밀리는 입장이니, 나는 아예 한곳에 세력을 모아서 대항하는 것이 어떨까 하네.” “기선배, 그것은 안 될 말이오. 그러다 그곳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단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이 끝장이 나게 될 것이오.” 서로 중구난방으로 각자의 생각을 떠들 때, 단리유아가 손을 들어 진정시키며, “여러분의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뭔가 중요한 것을 잊으신 것 같습니다. 바로 그들과의 본격적인 싸움은 최소한 오년은 지난 후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절대고수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것도 큰 이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는 일류 이상의 기본적인 손발을 이루는 고수들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에 있어서 운남과 남만지역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도와줄 우군이 별로 없습니다. 북방의 천검해(千劍海)가 있다하지만 그들은 보통 소수로 전해지는 문파여서 너무 그 수가 적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확실한 세력을 우군으로 맞아들여서 점차 세력을 완성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일단은 각 지역별로 연합 비슷하게 해서 겉으로는 단지 낯선 세력에 경계심을 품어서 대항하려는 정도로 하고, 내부적으로는 몇 개의 핵심문파가 주축이 되어 단단히 결속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하다가, 잠시 더 의논하여 아직 본격적으로 싸우는 것은 이르다고 보고, 당장에는 몇 년 후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으로 의논을 모았다. 어느 정도 그 점에 관해서 의견이 모아지자, 다시 단리유아가 일행을 향해서, “그래서 저는 이번에 여러분이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준비를 했으면 합니다. 이제는 모두가 표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다 함께 있다가는 언제 공격받아 끝장이 날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운 좋게 벗어났다지만 다음번에는 그들도 전력을 다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한번 자네의 생각을 말해보게” 기혼사의 말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더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그들이 완전히 세력을 갖추고 등장하기 전에 우리도 맞설 준비를 끝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동안에 그들의 시선을 끌어서 다른 곳에 미처 신경을 쓸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혼자 세외(世外)를 떠돌며 그들의 세력응집을 방해하고, 그들에게 원한을 가진 세력들을 찾아내어 그들과 맞서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자네는 중원에는 들어가지 않을 생각인가?” 기혼사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현재 저에게는 많은 이목이 따라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중원에 들어가 보십시오. 적아(敵我)도 불분명한 정세를 생각해볼 때, 중원에서 행동하는 것은 목숨을 여벌로 내놓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준비하는 상황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제가 다른 곳으로 그들의 시선을 이끌고 다녀서 다른 곳에 크게 신경 쓸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세외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 우리 일에 동참할 아군을 만들고 드러나는 대로 적들의 세력을 분쇄한다면, 그들은 미처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길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선상조가 나서서,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그러신다면 너무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소사숙?” “그래. 나도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차라리 암중에 숨어서 준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선상조와 공손고가 만류하고, 곧 다른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반대한다. 손을 들어 떠드는 소리를 멈추게 하고 단리유아가, “나도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 혼자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그런 일을 하기에는 더 유리한 점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반드시 누군가 그렇게 해야 만이 앞으로 우리가 준비하는데도 꼭 필요하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아실 것입니다. 그냥 숨어서 진행한다면 위험은 덜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우리가 세력을 완성하는 것보다 그들이 세력을 더 굳건히 하는 시간만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는 더욱 격차가 벌어져, 제대로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그렇게 시선을 끌 동안 여러분도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준비를 해 주십시오” 단리유아의 말에도 일행이 한동안 반론을 펴고 홀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며 따라가겠다는 등 여러 가지로 계속해서 말린다. 그러나 그들도 누군가는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어서 계속되는 단리유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잠시 의논을 계속하여 일행은 단리유아와 헤어져 일단 란창강(瀾凔江)을 따라 내려가 천룡사(天龍寺)로 향한 다음 각지로 흩어지기로 했다. 기혼사는 먼저 불광괴승(佛光怪僧)에게 알리기로 했는데, 그리되면 대리왕실(大理王室)의 도움까지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남만(南蠻)의 삼대문파를 찾아가서 역시 세력을 모으기로 했다. 선상조는 일단 기혼사를 따라서 남만에까지 같이 간 다음에, 임읍국(林邑國)에서 배를 타고 곧바로 해남도(海南島)로 건너가 무삼사에게 사실을 알리고, 중원의 남부인 광동·광서지역의 세력을 모으기로 했다. 공손고와 팔망수괴는 대리(大理)에서 곤명(昆明)을 거쳐 곧바로 귀주성(貴州省) 쪽으로 향해 중원으로 잠입하기로 했는데, 일단 팔망수괴는 전대의 고수들을 끌어들이는데 주목적을 두기로 했고 공손고는 각지를 찾아다니며 믿을 만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단리유아가 언급한 하북팽가(河北彭家)의 도왕(刀王)과 장안(長安)에 위치한 낭인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혈광막(血狂幕)이 주요대상이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비록 사파에 속하지만 십대고수 중의 일인인 잔결마(殘缺魔) 수삼결(首三缺)도 설득하기로 했다. 잔인한 성품과 자기 멋 대로인 행동으로 유명했지만, 그만큼 다른 세력들과도 관련이 없는 독불장군 같은 인물이어서 그를 합류시킨다면 다른 사파의 세력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였다. 단리유아는 공손고에게 될수록 정사의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도록 하면서, 은밀히 주변의 믿을만한 사람들을 동참시켜 세력을 모으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당부했다. 또 무외신궁(無畏神宮)과 혈련마경(血蓮魔鏡)이 도난당했던 일, 천목산(天目山)의 사건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조사할 것을 부탁했는데, 아무래도 그 일과 이 세력이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각자의 임무가 정리가 되었을 때는 이미 해가 지려는 무렵이어서 일행은 잠시 쉬고 저녁을 마친 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건포를 물에 불려 끓인 것으로 저녁을 해결한 일행은, 곧 다시 모여서 더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일단 세력적인 면에서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으니, 다른 문제에 대해서 논의해 보도록 합시다.” 단리유아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공손고가, “고수들을 끌어들이고 세력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자금력이 문제인데, 이 문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오대상단(五大商團) 중의 한곳이라도 끌어들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일단은 각각의 문파가 부담하기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공손선배도 제가 중원을 떠날 때 십만대산(十萬大山)에 들렸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 뜻밖의 말에 공손고가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아, 그일? 지난번에 물어보았을 때는 별 말이 없더니, 그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제가 십만대산(十萬大山)의 응수간(鷹愁間)에 일부러 찾아간 것은 과거의 대문파인 십왕전(十王殿)의 옛터를 찾아보려고 해서였습니다.” “뭐? 십왕전이라고? 그게 정말인가? 그래 어떻게 되었었나?” 놀라서 되묻는 팔망수괴의 재촉처럼, 다른 일행도 궁금한 표정으로 앞 다투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단리유아가, “이미 멸망해버린 지 오백여 년이 넘어서 별달리 찾은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 불릴 수 있는 곳으로, 적어도 오천 명은 수용할 수 있는 은밀한 곳입니다. 또 그들이 모아두었던 금은보화는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 그 정도의 자금이라면 충분하지는 못해도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룻밤밖에 머무르지 못하여 무공비급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지만, 어딘가에는 남아있는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운이 좋아 그것을 찾는다면, 앞으로 영입하거나 양성할 고수들에게 전해주어 그들의 무공연성에도 큰 도움이 되어줄 것입니다.” “하하하,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 자네는 정말 운이 따라가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곳을 찾을 생각을 했나? 다들 관심도 없는 일인데?” 크게 웃으며 맞장구치며 말하는 공손고처럼 한동안 다들 기뻐서 떠들었다. 과거 십왕전(十王殿)의 세력을 생각해 볼 때 모아놓았던 재화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에, 다들 자금력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진정으로 돕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운이라니?’ 기뻐하는 그들을 보며 단리유아는 생각했다. 자신이 운이 좋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끼어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런 평탄치 않은 삶도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앞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그만 상념을 멈추고 떠드는 일행을 진정시켰다. 곧이어 일행을 돌아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각 지역에서 연합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도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정예들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곳으로는 중원과 운남·남만의 경계지역인 십왕전(十王殿)의 옛터가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각 지역에서 은밀히 사람들을 빼돌려 나중을 대비해서, 가장 완벽한 연무관(鍊武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나중에 선사질에게 다시 전하겠지만 반드시 제 뜻대로 연무관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최소한 삼천 정도의 결사대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점을 생각하시고 앞으로 사람을 뽑을 때에도 현재의 무공수위보다는 될 수 있는 대로 정의감이 투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뽑아주십시오.” “그래, 알겠네. 흐흐흐, 난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 자네가 생각했다면 틀림없이 다시없는 연무관이 될 테지. 그놈들의 고생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은데? 킬킬킬. 나중에 다른 녀석들과 만나서 그것을 본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흐흐흐, 그놈들도....” 곧바로 팔망수괴가 단리유아의 말에, 흐뭇한 표정으로 뇌리에 떠오르는 모습에 즐거워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연신 괴소를 흘리며 계속해서 떠들었다. 혼자의 생각에 빠져 미친 것 같은 그 모습에 공손고가 멀찍이 자리를 옮기며 생각하기를, ‘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빌어먹을, 중원까지 가는 길도 순탄치는 않을 것 같군. 게다가 이 사람이 이런데 나머지 파행삼괴(破行三怪)의 두 사람까지 모인다면 얼마나 시끄러울까? 그들은 더하다고 들었는데. 제기랄, 나중에 그들하고는 말도 말아야지.’ 기혼사가 도저히 못 참겠던지 팔망수괴를 향해 소리 지르며, “그만 좀 웃어! 너 정신 나갔냐?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보는 사람이 소름이 돋을 정도네 정말!” “흥! 남이사 무슨 생각을 하던 말던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저도 가끔씩 그러는 주제에 사돈 남말하고 있어!” “내가 언제 그랬단 말이야? 최소한 너 정도는 아니야!”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던 일행은 정말 다시 볼 수 없는 앙숙이 만났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이 보기에는 둘 다 막상막하였던 것이다. 싸우는 두 사람을 내버려두고 단리유아가 공손고를 향해서, “일단 그 문제도 어느 정도 길이 보인다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오대상단(五大商團) 중의 한곳이라도 끌어들여야 할 것입니다. 자금도 자금이지만, 그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세외의 여러 곳과의 연락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리되면 우리에게는 날개를 단 것 같을 테니 말이야.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직 남았네. 다른 것이 다 갖추어진다고 해도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준비한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헛것이라는 것이지. 그러니 우리는 어떤 세력과도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정보세력을 구축하거나 아니면 그런 정보에 밝은 문파를 찾는 일을 가장 서둘러야 할 것이네.” 공손고의 말에 선상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건 개방(丐幇)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아니면 하오문(下午門)은? 그들이 가장 빠르고 정확할 텐데.” 단리유아가 고개를 젓고 단호하게, “그들은 절대 안 됩니다. 공손선배, 두 문파 모두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나쁜 결과만 가져올 우려가 더 큽니다. 현재 개방은 무림맹(武林盟)의 수족으로 움직이고 있고, 하오문도 역시 흑사련(黑邪聯)의 정보세력이니 불가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끌어들일 생각은 마시고, 오히려 그들을 예의 주시하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곳은 강호(江湖)에 잘 알려지지 않는 그런 정보집단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음, 그러면 화정궁(花情宮)은 어떨까? 기녀들의 대모와 같은 단체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고가 뇌리에 떠오르는 여인단체를 생각해낸다. 이에 단리유아가 또다시 고개를 저으며, “그것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인들이 침상에서 빼내는 것이 확실히 정보로서 가치가 크겠지만, 그만큼 남자에게 빠져든다면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도 많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여자들이니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풍령문(風鈴門)은 어떨까?” “그들은 무공을 모르는 약초꾼들로 이루어진 단체인데 그리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런 비밀세력을 탐문하다보면 위험한 일도 많을 텐데.” 계속해서 서로 얘기했지만 적당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단리유아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흠, 만상밀총(萬象密塚)은 어떻습니까?” “만상밀총? 그런 문파도 있었나?” 들어본 적이 없는 문파라, 곧바로 공손고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싸우던 두 사람까지 어느새 싸움을 멈추고 궁금한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들로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문파였기 때문일 것이다. 단리유아가 일행을 향해서, “본래 의도(義盜)로 유명한 무영문(無影門)의 하부단체로, 처음에는 무영문에 속한 도둑들이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만든 단체입니다. 그러니 아주 은밀하지요. 현재는 무영문에서 반 독립한 상태인데 제가 그들과 약간 인연이 있으니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영문(無影門)의 시조인 무영비도(無影秘盜)의 장보동을 얻은 사람이 바로 단리유아였기에, 단리유아가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수하로 거두어들일 수도 있었다. 그동안은 별로 관심이 없던 일이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렇게 서로 얘기하다보니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도둑들의 단체였다는 말에 회의적인 표정으로 공손고가, “자네의 말대로라면 괜찮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도와줄까? 도둑들의 단체라는데 믿기에도 조금 그렇군.”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오히려 다른 단체보다는 더 낫다고 봅니다. 강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정보의 신뢰성도 뛰어나다고 들었으니.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들이 본래 무영문(無影門)의 휘하세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무영문은 도둑들의 집단이긴 하지만 사사로운 목적으로 훔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악명이 자자한 사람들만을 골라서 터는 의적들로 더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은 세력이 커져서 만상밀총(萬象密塚)이 독립되다시피 했다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무영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무영문을 끌어들이면 그들도 우리를 돕게 될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대가를 주어야겠지만 말입니다.” “좋아! 그러면 그들을 끌어들이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하세.” 공손고가 응낙하며 말할 때, 기혼사가 끼어들어서, “자네들의 얘기는 잘 들었지만 그들은 중원에서만 활동하지 않나? 이 먼 세외지역의 정보를 찾는 것도 쉽지 않는데다가, 소식을 서로 주고받기에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단리유아도 그 점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흠, 그것도 그렇습니다. 저도 중원 내라면 모르지만 다른 지역에서까지 정보를 구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기노선님께서는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나도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 않는군. 워낙 넓은 지역이다 보니 전 지역에까지 미치는 곳은 없다고 보아야겠지. 뭐, 현재로선 별 수 없구만. 각자 개별적으로 정보를 모으는 수밖에는. 단지 우리가 모은 것은 일단 십왕전(十王殿)으로 보낼 테니 자네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 다들 얼굴을 돌아보며 더 의논해보았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에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단리유아가, “현재로서는 기선배님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상단(商團)을 끌어들이는 것을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절실할 것 같군요.” “그래, 그렇지만 그 문제는 당장에는 어쩔 수 없으니 우선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나중에 사람이 모이면 인연이 닿는 곳이 있을 것이니, 그때 다시 생각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네. 어차피 몇 년 동안은 세력을 모으는데 전력을 다해야할 것이니.” 공손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중요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결론이 나자 일행은 다시 세부적인 일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단리유도 거듭 신중하게 사람을 뽑을 것을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것을 준비하며 그날 저녁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대충 준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서로 걱정스런 표정으로 떠들었다. 모두가 어둡고 불안한 안색이었는데, 특히나 단리유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들이야 이제부터는 일단 시야에서 벗어나서 은밀히 움직일 테니 상대적으로 덜 위험할 것이지만, 단리유아는 적들의 표적이 되어 시선을 끌면서 세력을 모으고 수많은 적들과 직접 부딪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런 거대한 세력에 맞서 싸울 자신들을 생각을 하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올라 모두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다들 전전반측으로 잠들지 못했던 하룻밤이 지나고, 동굴의 입구를 밝은 태양이 따사롭게 어루만지듯 비추고 있을 때, 피곤한 표정으로 하나둘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리유아는 새벽부터 일어나 조식을 취한 후에 주변을 돌아다니며 산책하다가, 일행이 모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 되서야 되돌아왔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누르는 가운데 아침을 같이하며, 단리유아가 일행을 둘러보며 일부러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게 너무 걱정들 하지 마십시오. 저도 불안하지만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니 말입니다. 모두 기운을 내시고, 앞날에 대해 희망을 가지십시오. 지금은 비록 우리 다섯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희미하게 타오르지만, 머지않아 온 천하를 비출 만큼 크게 빛날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헤쳐 나갈 길이 험난하다 해도 모두가 합심하여 정성을 다한다면, 설사 저 무정하기만한 하늘이라도 우리의 노력에 감동할 날이 올 것입니다.” 다들 단리유아의 말에 상념에 잠겨있을 때, 기혼사가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어서 큰 소리로, “그래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지. 지금은 암담하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음 지을 날이 있을 것이네. 자 자, 우리 앞날을 위해서 먼저 한번 소리 내어 웃어 보세나! 하하하!” “제기랄! 저 늙은이가 내가 할 말을 선수 치네. 흥, 내가 질까보냐! 우하하하하!” 팔망수괴가 크게 웃고 잇따라 다른 사람들도 웃으며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떨쳐낸다. 그렇게 서로 웃으며 안색이 밝아지는 가운데 식사를 마친 일행은, 동굴을 나와서 각기 서로를 염려하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곧 두 방향으로 흩어졌다. 단리유아는 북서쪽으로, 나머지 일행은 란창강(瀾凔江)을 따라 남하해 대리(大理)로 향할 것이다. 점차 멀어지는 가운데에도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일정한 보폭으로 뚜벅뚜벅 걷는 단리유아의 뒷모습이 마치 그의 굳건한 결심을 나타내주는 것처럼 보였다. 단리유아의 모습이 조그마한 점으로 보일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일행도,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려 남쪽으로 향했다. 척발척천(拓拔剔天) 척발척천(拓拔剔天) 1 그 무렵, 서장(西藏)의 서북쪽 창도(昌都) 인근 한쪽 계곡에 위치한 서장지단(西藏支壇). 서장지단은 자체의 고수들 수만으로도 오백 명에 이를 정도로 세외지단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곳이었는데, 사실상 각 지역의 대문파와도 능히 맞설 수 있을 정도였다. 이십여 년 처음 이곳에 서장지단이 생길 때만해도 평범한 상단으로 위장한 삼십여 명에 불과했었는데, 현재에 이르러서는 소뢰음사(少雷音寺)를 제외하고는 서장(西藏)에서도 맞설 곳이 없었다. 가장 먼저 근처에 위치한 호리구련(湖里九連)에 접근하여 동맹을 체결한 후에 점차 회유와 협박으로 완전히 굴복시킨 것을 시작으로, 점차로 주변의 세력을 병합하고 본교에서도 고수들을 증파하여 현재는 소뢰음사와 함께 서장을 동서로 양분한 상태였다. 먼저 현재 서장(西藏)의 세력 판도를 살펴본다면, 우선 서장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납살(拉薩)의 포달랍궁(包達拉宮)을 중심으로, 서북쪽에는 창도(昌都)의 서장지단(西藏支壇), 나곡(那曲)과 단달산(丹達山) 사이에 위치한 슬리당(膝釐黨), 파밀(波密) 지역의 호리구련(湖里九連)이 있었다. 이 슬리당과 호리구련은 겉으로는 문파가 존속되고 있었지만, 사실상 서장지단에게 흡수 병합된 상태로 독자적인 실권은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동남부 랑장(朗長) 아래지역에는 서장 전래의 종교인 본교(本敎)를 바탕으로 하는 백본파(白本派)가 있었고, 남쪽 희마랍아산맥(喜馬拉雅山脈)의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에베레스트) 근처에는 여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성모궁(聖母宮)이 있었다. 남서쪽 일객칙(日喀則)에는 살가사(薩迦寺)가 있었는데, 소뢰음사(少雷音寺)의 분파라 할 수 있는 단체로 대대로 소뢰음사의 이인자가 이끌던 세력이었다. 일객칙에서 다시 서쪽으로 천오백여리 떨어진 살갈(薩喝) 지역에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현재 세력을 가장 크게 떨치고 있는 소뢰음사가 있었다. 서부 강저사산(岡底斯山), 달리 수미산(須彌山)이라 불리는 신성한 곳에는 정통 불교세력인 대뢰음사(大雷音寺)가 있었는데, 현재는 세력이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서북쪽과 북부 지역에는 각기 토상하맹(土狀河盟)과 일마새(逸馬塞)가 있었지만, 이들은 토착세력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어서 사실상 강호세력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중서부 니마(尼瑪) 지역에는 환희마찰(歡喜魔刹)이 있었는데, 환희불(歡喜佛)을 주불로 숭배하고 남녀의 성합(性合)을 통해서 득도를 외치는 이단사법(異端邪法)에 빠진 사악한 승려들이 모인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중심부인 랍살(拉薩)에 위치한 포달랍궁(包達拉宮)은 서장의 전통종교인 본교(本敎)와 밀교(密敎:좌파밀교가 아닌 정통밀교)가 융합되어 형성된 라마교(喇嘛敎)의 사원으로 현재에 있어서는 그리 강성하다고 할 수 없었고, 소뢰음사와의 싸움에서 패한 이후로 수뇌부는 탈출해버린 상태로 사실상 반봉문한 상태였다. 대체적으로 문파들의 수가 다른 지역보다는 적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지형적인 영향이 가장 컸는데, 이곳 서장(西藏)은 넓은 지역에 비해 사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로 동부지역과 아로장포강(雅魯藏布江) 유역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 외 북부와 서부 일대는 끝없는 구릉이 이어진 황막(荒漠)한 고원지대여서 사흘을 내리 걸어도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한 과거 서장(西藏)을 지배했던 흑찰미사(黑刹彌寺)의 영향으로 인해, 주술(呪術)이나 사술(邪術), 법술(法術) 같은 술법이 널리 퍼져서 어느 곳이나 다양하고 많은 술법이 존재한 곳이었다. 대뢰음사(大雷音寺)가 융성한 후 사라진 흑찰미사는 본래 중부의 기림호(奇林湖)변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미 오래전에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려서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멸망했음에도 아직까지 서장의 여러 문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는데, 특히 백본파(白本派)나 슬리당(膝釐黨) 같은 본교(本敎)를 믿는 단체의 정령신앙과 부합하는 면이 많아서 주로 이들 단체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현재는 소뢰음사(少雷音寺)의 세력이 가장 커서 거의 칠백여 명에 이르렀고, 나머지 단체들은 대부분 이삼백 명 정도로 그 세력이 미약했다. 서부의 소뢰음사가 포달랍궁에 이르는 지역까지 그 세력권이라 한다면, 그 외의 동북부 지역은 서장지단의 세력 하에 있었다. 본래 천지신교 휘하 각각의 지단들의 목적은 각 지역의 문파들을 흡수 병합하는데 있었다. 처음에는 동맹의 방식으로 접근하였다가 차츰차츰 상대의 세력을 약화시켜 흡수하는 방식으로, 이곳 서장지단의 목적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소뢰음사(少雷音寺)만 거꾸러뜨린다면 사실상 서장(西藏)은 그들 서장지단의 완전한 지배하에 놓인다고 보아야했다. 서장지단의 중앙에 위치한 대전에 모인 고수들은 모두 다섯 사람으로 이곳의 최고 수뇌에 해당했다. 중앙에 길게 위치한 석탁을 중심으로, 왼쪽의 앞에는 혈겸(血鎌)을 맨 오십대의 걍팍한 얼굴의 중년인이, 그 옆에는 사십대의 냉랭한 표정의 중년검수가 앞으로만 시선을 둔 채로 앉아 있었다. 그 맞은 편 오른쪽의 앞쪽에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수사가 백우선(白羽扇)를 부치며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역삼각형의 얼굴을 한 육십대의 중늙은이가 사이한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탁자와 삼 장여 떨어진, 전면의 상단 태사의에는 삼십대의 청년이 벌거벗다시피 한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었다. 백색의 장포에 수려한 얼굴이 다시없는 미남자였지만, 얼굴에 드리워진 조롱하는 듯한 표정과 간간히 눈에서 번뜩이는 혈광(血光)이 그 성품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단리유아 놈이 포위망 속에서 달아났다며?” 태사의 청년이 한 여인이 건네주는 포도알을 삼키고, 아무렇게나 씨를 뱉어내며 툭 던지듯이 말문을 열었다. 이 청년이 바로 서장지단의 단주로서 혈련마후(血蓮魔侯)라는 명호를 가진, 본래 천지신교에서 세외총교에 해당하는 혈련마교의 교주의 제 삼제자였다. 그 이름은 척발척천(拓拔剔天)으로 이제 서른넷의 젊은 나이였는데, 이곳 서장으로 건너온 지 구년 만에 서장지단을 세외지단 중에서 가장 강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혈련마교의 차기교주로서도 유력시되는 한 사람으로, 겉모습으로는 태평하고 너그러운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철두철미하고 조그마한 실수에도 용서가 없는 사람이었다. 척발척천(拓拔剔天)의 독백 같은 물음에 오른쪽의 중년수사가 왼손으로는 백우선을 부치고 오른손으로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렇다고 하더군요.” 서장지단의 내외총사(內外總師)의 직책에 있는 자로서 실질적으로 서장지단의 주요대사를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는데, 명호는 명전제갈(明全諸葛)이었고 이름은 위후수(魏厚垂)였다. 척발척천이 서장지단으로 자리를 옮겨온 후에 초빙한 사람으로, 지략이 뛰어나서 지금의 서장지단의 성세를 이룩하는데 있어 제일 공이 컸다. 본래부터 혈련마교에 속한 사람은 아니고, 찾아와 도움을 바라는 척발척천의 기상을 보고 최근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태평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명전제갈의 말에 맞은편의 혈겸을 맨 중년인이,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인상을 더욱 찌푸리며, “총사께서는 다른 할 말이 없으신 게요? 그놈이 앞으로 지나갈 곳은 우리지역인데?” 혈우마겸(血雨魔鎌) 시전초(矢前初)로서 서장지단의 주요 무력세력인 괴명전(魁冥殿)의 전주(殿主)를 맡고 있었다. 주로 적과의 싸움에 앞장서서 나서는 인물로 단주인 척발척천을 제외하고는 가장 무공이 높았는데, 명전제갈 위후수와 더불어 척발척천의 좌우날개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선대로부터 척발가(拓拔家)를 보필하던 가신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척발척천을 도맡아 키우다시피 한 사람이었다. “크크크, 나도 소문에 들었는데 오군주 중의 하나인 철목군주(鐵木君主)까지 나서고, 운남지단(雲南支壇)까지 나섰다고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했다고 하더구려.” 명전제갈에게 물어보는 말을 건너편에 있던 육십 대의 늙은이가 끼어들어, 괴이로운 웃음을 흘리며 딴소리한다. 총순찰(總巡察)의 지위에 있는 자로 명호는 독망비흉(毒莽飛兇) 괴언장(乖言章)이었는데, 주변의 포섭한 세력을 감시하거나 공식적인 일 같은 경우에 주로 서장지단을 대표해서 돌아다녔는데 혈련마교 출신이 아니라 천지신교 직속의 사람이었다. 냉막한 표정의 말이 없는 중년검수 역시 천지신교 직속이었는데, 서장지단에 파견되어있는 암살과 밀행 같은 일을 처리하는 전문 살수조직인, 백인살(百刃煞)이라는 단체를 이끄는 냉면마검(冷面魔劍) 해시환(奚是奐)이라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찌푸리는 혈우마겸의 표정을 보고 그제야 명전제갈이, “흠, 나도 들었지만 별 걱정은 하지 않소이다. 그놈이 우리 쪽으로 온다면야 우리한테는 오히려 이익이 되는 일이지요.” 느긋한 명전제갈의 말에 혈우마겸이 곧바로, “어째서 그렇소?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우리도 철목군주나 운남지단주처럼 문책 당할지도 모르는데?” “크크크, 우리가 단리유아를 죽여 버리면 오히려 우리에게는 기회가 될 것이 아니요? 또 그들이야 손발이 맞지 않았고,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다가 고수들도 많지 않았으니 말이오.”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독망비흉이 대신 대꾸할 때, 명전제갈이 화가 나 소리치려는 혈우마겸을 막기 위해 중간에 끼어들어, “철목군주야 천지신교의 태상교주 직속이니, 어떠한 문책을 당하든 말든 우리와 별 상관이 없소. 운남지단주도 비협조적인 태도에 대해서 약간의 질책을 듣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각 지단주는 혈련마교의 직속이니 더 따지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니 이번 일만 잘된다면야 우리는 서장을 완전히 독패할 수 있을 테고, 실패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오.” 이때 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희롱하며 놀고 있던 척발척천이, 철목군주의 얘기에 흥미가 동한 듯이 끼어들어, “내 듣기로는 그 계집이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일부러 놓아주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저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흐흐흐, 어리석은 계집 같으니라고,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도 그러다니. 게다가 아무리 물어도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다합니다. 그래서 이번 일로 신교 내에서는 그 계집을 아예 태음현마녀(太陰玄魔女)로 만들 계획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음흉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독망비흉의 말에 척발척천이 시중드는 여인의 젖가슴을 움켜쥐어 만지작거리며, “쩝, 아쉽게 되었군. 한번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내 여자로나 삼을 생각이었는데. 태음현마녀(太陰玄魔女)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쯔쯔쯧, 그 계집도 불쌍하게 되었군.” 말로는 동정하는 척하지만, 그 표정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한다. 이에 명전제갈이 백우선을 살랑거리며, “어차피 오대군주들은 명목상으로나 태상교주의 제자이지 실제로는 볼모와 같지요. 일이 성공하였을 때는 모르지만, 실패한다면 바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키는 경우가 여럿 되었으니 말입니다. 겉으로야 실권이 많지만 실상은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지요.” “총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흐흐흐, 게다가 그 계집은 신체가 특이해서 태음현마녀가 되기에는 가장 적합했었다고 하니, 신교에세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게 되었지요. 다른 자들이라면 그래도 적당히 하고 물러나게만 하겠지만 말입니다.” 독망비흉이 덧붙여 말할 때, 척발척천이 그래도 입맛을 다시며, “그래도 중원의 계집이 아닌가? 이 지겨운 서장(西藏) 촌구석에 처박힌 지 벌써 구년이나 되어서, 제대로 된 계집 구경을 한지도 너무 오래 되었단 말이야. 기련산(祁連山)에 있을 때야 서역을 오고가는 상인들 때문에 원하는 계집들은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구한 이 계집들은 어떻게 된 것이 얼굴은 어떨지 모르지만 벗겨보면 정말 형편없단 말이야.” 말과 함께 여인들의 옷을 아예 벗기고는, 여기저기 만지면서 일일이 단점을 지적한다. 네 사람도 그런 일이 자주 있었던 일이라 별반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흥미 있다는 듯이 발가벗은 여인들을 자세히 바라보는 사람에서부터 차를 마시며 딴청을 부리거나 앞만 보고 냉정하게 앉아 있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혈우마겸이 대놓고 큰소리로 쏘아붙이며, “주군! 제발 체통 좀 지키십시오. 저희야 이런 일에 만성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지만, 곧 있으면 천지신교에서도 사람이 올 것인데 이런 일을 계속한다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그래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으로, “아, 그때야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여인에 대한 일만 나오면 쌍심지를 켜고 난리인가? 쯔쯧, 그러니 그 나이 되도록 장가도 못 갔겠지. 모름지기 영웅이라면 오는 여인 마다않고, 떠나는 여인은 붙잡아 죽이고, 예쁘다는 소문이 들리면 즉시 잡아와 맛을 보아야지.” 오히려 더욱 노골적으로 여인들의 음부까지 훤히 드러나도록 만들며 말하는 척발척천을 보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혈우마겸이 핏대를 세우며,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곳으로 물러나신 것도 다 계집들 때문에 그런 것인데, 나중에 교주에 오르셔서 맘대로 하셔도 될 것 아닙니까? 교주직을 노리고 있는 다른 두 사람도 그 문제를 꼬집어서 주군을 비방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정말 돌아가신 선주군께서 제게 당부하신....” 오래전에 죽은 척발척천의 아버지까지 들추며 말하려하지만, 바로 중간에 말을 막으며, “자네, 그 잔소리 좀 그만하게. 이제는 아주 귀에 못이 박혀서 지겨워 죽겠어. 어쨌든 그 인간들은 그렇게 떠들라고 해. 날 그런 놈으로만 본다면, 그러면 그럴수록 방심하게 될 테니. 지금은 이곳에서 노닥거리고 있지만, 서장(西藏)을 완전히 내 손아귀에 넣은 후에는 바로 무력으로라도 교주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니.” 느물거리며 말하는 척발척천을 바라보며, 명전제갈이 조용한 목소리로, “주군, 그래도 더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주군의 사형이신 두 분의 능력도 만만치 않으니, 무력만으로 계승권을 얻는 것은 힘들지요. 일단 단리유아를 없애고, 서장을 차지하여 능력을 보여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필요하지요. 또 이번의 일로 문책 받은 운남지단의 너구리도 될 수 있으면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한동안 척발척천의 말에 불만스러운 표정이던 혈우마겸이 곧바로 끼어들어, “그 인간을 어떻게 믿을 수 있소?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놈인데?” “어차피 그자는 소모품 이상은 안 되겠지만, 나중에 교주 승계 시에는 각 지역의 단주와 원로원의 의견이 문제이니, 하나라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지요. 정 안되면 무력시위를 해서 교주위에 오른다고 해도 그것은 많은 문제를 남길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우리의 세력도 완전히 들어내지 않고 최대한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명전제갈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르며 다들 생각에 빠졌다. 현재 천지신교의 휘하세력으로서 세외지역을 맡고 있는 혈련마교는 한창 후계자 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현교주가 이미 나이가 많고 병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는데,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고 있으니 서로가 교주 위를 노리고 있는 혼란스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크게 세 사람이 유력했는데, 현교주의 손자이고 동시에 대제자로서 원로원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혈련무정(血蓮無情)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제사장인 마화대사제장(魔火大司祭長)이 미는 이제자 구주혈광(九州血狂) 태주천(泰周天), 마지막으로 일반제자와 세외지단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척발척천이 있었다. 실질적인 가능성면으로는 장손무기가 가장 커서 그가 앞장선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교주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태주천도 실질적으로 그 권한이 교주에 못지않은 제사장의 후원이 있으니 그 가능성이 높았다. 척발척천은 셋 중에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과 입지전적이라는 면으로 가장 많은 하급제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문제는 상층부의 고수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성격상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신보다 능력이 못한 사람이 윗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대놓고 무시하고, 너무 여자들을 좋아해서 혈련마교에 머물 때에도 아무나 건드려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력으로 후계 계승권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경우였다. 무력으로 찬탈하거나 다른 두 사람이 포기하거나 아니면 둘 중 하나라도 자신을 지지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척발척천이 네 사람을 내려다보며, “아, 다들 그만 생각하고 단리유아를 어떻게 할지나 얘기해보게. 일단은 서장을 손에 넣은 뒤에 생각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 “총사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좋은 방도가 있겠소?” 곧바로 혈우마겸이 묻는다. 이에 즉각 대답하지 않고 명전제갈이 차를 마시며 한동안 딴청을 피우다가, 점점 검붉어지는 혈우마겸을 보며 그제야 느릿느릿, “이번에 단리유아가 서장으로 들어오면 우리가 직접 그를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되돌아가지 못하게 포위한 채로 계속 앞으로만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놈을 죽여야만 한다면서 내버려두자니?” 혈우마겸이 답답하다는 듯이 바로 되묻는다. 혈우마겸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척발척천을 향해서, “주군, 될수록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고스란히 세력을 보전해야 합니다. 단리유아와 부딪친다면 우리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될 테니,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끼어들지 않고 그를 소뢰음사 쪽으로 몰아가야 합니다.” “흠, 그들도 바보는 아닐 터인데 그냥 당하고 있을 것 같소? 게다가 그들도 손을 쓰지 않는다면 어쩔 것이오?” 척발척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물으니, 빙그레 웃음 지으며, “물론 그들도 싸우고 싶어 하지 않겠지요. 그들과는 큰 상관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나서게 될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일일 테니 말입니다.” 척발척천(拓拔剔天) 척발척천(拓拔剔天) 2 명전제갈(明全諸葛)의 말에 다들 생각에 잠긴 채 어떤 방법으로 소뢰음사를 움직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고 있었다. 모두가 궁금한 가운데 먼저 독망비흉(毒莽飛兇)이, “크크크. 이보시오, 총사. 도대체 무슨 수로 그놈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오? 지놈들에게 이익이 없다면 손끝도 까딱이려고 하지 않는 놈들인데?” “바로 대뢰음사(大雷音寺)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때 한쪽에서 말이 없었던 냉면마검(冷面魔劍) 해시환(奚是奐)이 짤막하게, “대뢰음사(大雷音寺)의 힘은 이미 별 볼일 없는데?” “힘으로만 해결하려면 안 되지요. 지금의 대뢰음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소뢰음사(少雷音寺)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본래 소뢰음사는 대뢰음사에게 갈라져 나온 문파입니다. 두 문파는 대대로 앙숙지간이었는데, 오백년 전의 혈사(血史)이후로는 줄곧 소뢰음사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요.” 명전제갈의 말처럼 소뢰음사(少雷音寺)는 대뢰음사(大雷音寺)에서 이단으로 추방된 승려들이 모여 형성된 문파였다. 혈불(血佛)을 주불로 숭배하여 피로써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교리를 믿고 있었는데, 그 혈불의 화신이라는 혈등마승(血燈魔僧)이 등장한 오백년 전까지는 내내 대뢰음사의 그늘에 눌려 있었다. 혈등마승은 파라구천절도(波羅九天絶刀)를 창안한 사람이기도 한데, 소뢰음사 사상 최강의 고수중의 하나로 불리며 사실상 소뢰음사 무공의 초석을 세운 사람이었다. 오백여년 전 혈등마승(血燈魔僧)을 주축으로 뭉친 소뢰음사(少雷音寺)는 대뢰음사(大雷音寺)와 싸워 거의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대뢰음사에게 주었고, 그 이후로는 줄곧 그 우위를 지켜오고 있었다. 절치부심하던 대뢰음사가 삼백년 전에 뇌정천궁(雷霆天宮)과 연합하여 다시 공격해오기도 했지만, 양쪽 다 막심한 피해를 입고 수십 년간 봉문하게 한 것이 다였다. 그 싸움으로 뇌정천궁은 바로 멸망했고, 소뢰음사와 대뢰음사는 한동안 강호에 나설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점차 격차가 커져서 최근까지 거의 일방적으로 소뢰음사가 독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까지 명전제갈의 지루한 설명이 이어지자 혈우마겸(血雨魔鎌)이 말을 가로막으며, “그거야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그것이 뭐 어쨌다고.” 성급하기만 한 혈우마겸의 태도에 명전제갈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백우선(白羽扇)을 흔들며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소뢰음사(少雷音寺)는 대뢰음사(大雷音寺)를 멸절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뢰음사의 위치가 애매해서 직접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문제이지요. 대뢰음사가 있는 곳이 바로 강저사산(岡底斯山) 아래였는데, 강저사산은 달리 수미산(須彌山)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천축의 바라문교(婆羅門敎)를 비롯하여 불교(佛敎), 서장 전통의 본교(本敎), 라마교(喇嘛敎) 등의 신산(神山)으로 모든 이들에게 신성시되는 산입니다. 그러니 그 근처에서는 큰 싸움이 일어날 수 없는 곳입니다. 만일이라도 신산(神山)을 피로 물들여 더럽히는 일이 일어난다면 사대종파의 공분을 사게 될 것이 뻔하니까요. 이런 상황이니 소뢰음사로서도 눈에 가시 같은 대뢰음사이지만, 그들로서도 어찌할 수 없이 단지 목줄을 움켜쥐어 점점 숨통을 막아 고사시키는 수밖에는 없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총사? 제발 속 시원하게 빨리빨리 말 좀 하시오. 기다리는 사람도 생각해주어야지, 도대체.....” 혈우마겸이 답답하여 다시 끼어들어 중얼거리자, 명전제갈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척발척천이, “자네는 제발 가만히 좀 앉아 있게.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지는 않고, 말할 때마다 바로바로 중간에 말을 막는 것인가? 자네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야. 나중에 내 실컷 싸우게 해줄 테니 좀 조용히 하고 있게. 머리 쓰는 일에까지 끼어들어 시끄럽게 굴지 말고.” “아니, 주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를 돌 머리로 아십니까?” “그래도 주제파악은 확실히 하고 있구만. 잘 알고 있으니 앞으로는 부디 나서지 말게.” “하하하! 크크크. 킬킬킬” 척발척천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따라 웃자, 혈우마겸이 큰소리로, “뭐가 우스워서 그렇게 웃는 것이오? 모두 닥치지 못하겠소? 흥! 나중에 두고 봅시다. 내 정말 주군의 말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주군, 제가 선주군 때부터 주군을 모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주군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데.....” 소리치다 척발척천을 향해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말하지만, 원체 우락부락하게 험악한 표정이니 그 모습이 더 우스워보였다. 이에 척발척천이 혀를 차며, “쯔쯧, 정말 아버님도 너무하셨지. 어떻게 자네에게 나를 맡기셨는지. 아마 속으로 아버님도 많이 괴로우셨을 거야. 믿을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자네에게까지 부탁하셨으니. 하나밖에 없는 가신이라 어쩔 수도 없고 정말 나도 불쌍해. 무식하게 사람 죽이는 데에만 능하니 원. 어이구, 선대로부터 대대로 본가에 충성한 가신만 아니라면 폴 새 내쳤을 것인데.” “정말 이러실 것입니까? 이렇게 다 보는 앞에서 계속 망신을 주다니.....” 혈우마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썹을 치켜세우고 크게 소리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드러누우며 느긋한 표정으로, “자네가 그렇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데 뭐가 망신이라는 건가? 망신당하기 싫으면 아무 생각 없이 중간에 끼어들지 말고, 잠자코 듣고만 있으란 말이야! 나중에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고 괜히 골치 아픈 일에 나서서 떠들지 말게.” “그래도....” “어서 앉기나 해! 아니면 그냥 나가서 애들 훈련이나 더 시켜.” 척발척천이 곧바로 소리 지르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으며, 혈우마겸이 속으로 궁시렁 댄다. ‘다른 자들이 다 등을 돌려 척발가(拓拔家)를 밀치고 장손가(長孫家)를 교주로 앉혀 온갖 아부를 떨어도, 그래도 본가만은 충성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서 자기를 구해 주었는데 이런 푸대접이라니! 아, 선주군께서는 이러지 않으셨는데.... 제기랄, 어떻게 된 것이 갈수록 독랄했던 주모님만 닮아가 사람 속을 박박 긁기만 하는지. 아, 정말 선주군이 보고 싶군.’ 본래 혈련마교의 교주위는 대대로 척발가(拓拔家)가 맡아오고 있었는데, 중간 중간에 잠깐 장손가(長孫家)에서 맡은 적도 있었지만 결코 일대 이상은 이어지지 않았고 그 기간도 십년 안밖의 짧은 시간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과거 천지신교가 혈련마교를 흡수하면서 당시의 교주였던 척발척천의 조부를 밀어내고 현재의 장손가의 사람을 교주로 앉혔었다. 그 당시 천지신교의 의도는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히 충성하는 장손가로 하여금 척발가를 견제하도록 하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점차 천지신교의 뜻대로 되어서 척발가의 세력은 갈수록 약해져, 이제는 가신이라고는 혈우마겸밖에 남지 않을 정도까지 기울게 되었다. 술에 빠져 세월을 탕진하던 척발척천의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죽은 것도, 척발척천이 이런 곳으로 밀러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척발척천도 혈련마교 내에 있을 때는 목숨이 위태로워 미친 척 여인에만 빠진 것으로 가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이제는 아주 고질적인 병이 되다시피 해서, 하루라도 여인을 품지 않고는 잠들 수 없을 정도가 돼버리긴 했지만. 불만이 가득한 혈우마겸의 얼굴을 보고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짓다가, 척발척천이 고개를 돌려 명전제갈을 향하여, “총사, 어서 얘기를 계속해보게나. 어떤 멧돼지 같은 녀석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놀리는 말에 다시 혈우마겸이 발끈하여 일어나 소리치려는 것을, 옆에 앉아 있던 냉면마검이 옷자락을 붙잡아 앉힌다. 씩씩거리는 혈우마겸을 보면서 명전제갈이 느긋한 표정으로, “우리는 바로 이런 소뢰음사(少雷音寺)와 대뢰음사(大雷音寺)의 관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소뢰음사로서는 대뢰음사를 없애버리고 싶겠지만, 그들로서는 직접 나서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때 우리가 대신 나서서 대뢰음사를 없애주겠다고 하면 그들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곧바로 독망비흉이 흉물스런 웃음을 흘리며 조롱하는 어조로, “흐흐흐, 다 좋은데 말이오. 총사, 그리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대종파에게 사갈시될 것 아니오? 그곳은 해마다 순례하는 사람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인데, 다른 것들이야 그저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천축의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과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는 우리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강파인데 말이오?” 현재 천축(天竺)은 크게 두 문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천년이 넘어가는 유구한 전통의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과 비사법문(毘沙法門)의 정통후예를 자처하는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가 그들이었는데, 두 세력 모두 다른 지역의 어떠한 대문파보다도 세력이 커서 각기 문하의 수만 삼천이 넘는 강파들이었다. 이렇게 이 두 세력이 워낙 강성하니 천지신교도 천축까지는 어떻게 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래도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은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겠지만, 비록 지금은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소원하더라도 본래가 대뢰음사(大雷音寺)도 같은 비사법문(毘沙法門)에서 갈라져 나온 문파였으니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는 결코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소뢰음사(少雷音寺)가 대뢰음사를 두고 보기만 하는 것도 다른 종파들의 이목 때문이기도 했지만, 특히 이 마하보리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딴지를 거는 독망비흉의 물음에도, 명전제갈이 별 동요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그거야 하기 나름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제안한다면, 소뢰음사(少雷音寺)는 틀림없이 받아들여서 단리유아를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소뢰음사는 그 시간동안 우리에게 대뢰음사(大雷音寺)를 없애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시일을 끌다가 그들이 단리유아를 공격한 이후에나 대뢰음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공격전에 대뢰음사를 공격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같이 동행할 소뢰음사 놈들을 먼저 죽이고, 미리 준비해간 소뢰음사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서 대뢰음사를 씨 몰살시켜야 합니다. 목격자가 살아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잔인성을 알리게 하는 것이 요건입니다. 명심할 것은 대부분은 불태워 소각하고 몇 사람의 시신만 남겨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소뢰음사 무공을 흉내 내고 소뢰음사 놈들의 시신도 남겨두어야 하지요. 그리되면 모든 책임은 소뢰음사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중간에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되묻는 독망비흉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타이르듯이, “다른 문파를 공격하려 가는데 밝은 대낮에 나다니겠다는 것입니까? 게다가 이번 일은 결코 많은 사람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많이 동원한다면 소뢰음사는 이를 공개적으로 알려서 대뢰음사가 준비하게끔 하려고 할 것입니다만, 극소수의 인물만 따라간다면 그들도 그런 일은 꾸밀 수 없게 될 테지요.” 명전제갈의 말이 끝났을 때 척발척천이 대소하며, “좋소, 좋아! 아주 명쾌한 계책이요. 그리되면 우리는 원하는 성과를 얻고 아무런 흔적 없이 발뺌할 수 있겠지. 그러면 누가 그 일을 맡는 것이 좋겠소, 총사?” “이일은 최대한 은밀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신속해야하니, 먼저 해(奚)대주가 백인살(百刃煞)에서 가장 뛰어난 이십 명 정도를 뽑고, 이번에 천지신교에서 단리유아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오는 백 명의 고수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로 십여 명을 덧붙인다면 무리 없이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독망비흉을 향해서, “그리고 괴(乖)순찰께서 동행하여 소뢰음사(少雷音寺)와 그 일을 협상하여 주시오. 이번에 신교에서 지원 나올 고수가 백 명이라 하니, 해(奚)대주를 따라가는 사람들을 제외한 고수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단리유아를 죽이는데 도와주겠다는 뜻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더 의심하지 않고 우리를 철썩 같이 믿게 될 테니.” “총사, 그렇지만 신교에서는 단리유아를 직접 공격하라고 했는데,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독망비흉이 천지신교의 명령을 들먹이며 서장지단도 움직여야 한다는 말을 하려할 때, 명전제갈이 고개를 저으며,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지단의 힘과 합해서 공격하는 것보다는 소뢰음사(少雷音寺)와 합세하여 공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것은 괴순찰도 알고 계시지 않소? 우리 지단의 힘이 강하다고 하지만 실제의 전력은 소뢰음사가 더 강하다 할 수 있으니 말이오. 수적으로는 엇비슷하겠지만 십대마불(十大魔佛)을 비롯한 소뢰음사의 최고수들을 상대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여기 장내의 고수들뿐이니. 게다가 우리로서는 그리 전력의 희생이 없으니, 신교로서도 좋지 않겠소?” “그렇지만....” 다급한 얼굴로 더 따지려는 독망비흉을 향해서, 척발척천이 지겹다는 듯이, “아, 됐소. 그만 하시오. 괴순찰의 뜻이 뭔지는 알지만, 우리는 최대한 전력을 보전하여 서장(西藏)을 석권하는 일이 급하지 않소? 둘이 부딪친다면 우리는 전력을 소비하지 않은 상태로 바로 소뢰음사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오. 그리되면 서장은 우리 손아귀에 떨어진다고 보아야 하니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오? 설마 신교에서 이런 이치도 모른다는 소리는 아닐 텐데?” “그러나 명령은 분명히 같이 합세하여 싸우두록....” “어차피 그들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뭐 하러 우리 서장지단까지 나선다는 말이오? 오히려 소뢰음사만 움직이는 것이 훨씬 우리에게는 유리한데. 그러니 그리 알고 어서 나가 준비하시오. 해대주도 같이 나가서 같이 갈 사람들을 뽑도록 하시오.” 더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명령하는 척발척천을 보고, 독망비흉이 더는 말하지 못하고 불만스런 표정만 가득한 채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냉면마검 해시환도 따라 일어나서 절을 하고 돌아설 때, 대전을 나가며 독망비흉이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이를 갈며, ‘개자식 같으니라고, 지놈들은 쏙 빠지고 본 신교의 고수들만 동원할 속셈이군. 이리되면 일이 성사되더라도 본교의 고수들의 피해가 막심할 텐데.... 제기랄, 저 음흉한 놈이 딴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런 수로 신교의 영향력을 줄일 셈인지는 미처 몰랐군. 하지만 어디 두고 보자, 이번 일이 끝나면 반드시 꼬투리를 붙잡아서 상부에 보고할 테니. 흐흐흐, 그때는 지놈도 어쩔 수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혈련마교에서도 노리고 있고, 신교의 어르신들도 좋아하지 않고 있으니.’ 두 사람이 대전문을 지나 밖으로 향하자, 그동안 말없이 잠자코 있던 혈우마겸이 화가 나서 소리치며, “주군, 어째서 저에게는 아무 일도 시키지 않습니까? 저도 따라가서 몸을 풀고 싶으니 어느 쪽이라도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어떤 놈이라도 자신 있으니 꼭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주군의 명이 떨어지면 누구라도 이 혈겸(血鎌)으로 모가지를 싹둑 잘라버릴 테니. 하하하!” 소리 지르다가 혈겸을 꺼내 보이며 통쾌하게 웃어젖힌다. 이에 척발척천이 한동안 말없이 불쌍하다는 듯한 눈길로 바라만 보다가, 곁에 놓여 있던 포도송이를 혈우마겸을 향해 내던지며, “에라, 이 바보 멍충이야! 그렇게 따라가 죽고 싶다면 네 맘대로 어디든지 가고 싶은 데로 가라. 당장 나가, 이 꼴통아! 너만 보면 골치가 지근거리니.” 날아오는 포도송이를 피하며 혈우마겸이 투덜투덜,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뜬금없이 죽게 된다니? 게다가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주군이라고 하지만....” “에휴, 말이나 못하면 덜 밉지. 이 인간을 죽일 수도 없고, 내쫓자니 은혜도 모르는 막돼먹은 인간이라 사람들이 나를 욕할 것 같고. 더 설명하기 싫다. 어서 나가기나 해. 가서 잠자코 생각해보다가 그래도 모르겠으면....”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주시하는 혈우마겸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냥..... 그냥 엎어져 잠이나 퍼질러 자! 내리는 명령이나 잘 따르고.” 놀리듯이 말하는 척발척천의 말에 혈우마겸이 성질이 나서 소리치며, “나갑니다, 나가요. 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젠장, 아무리 주군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막말을 할 수 있담? 어렸을 때부터 손수 똥오줌을 치운 것부터 내가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해서 하며 이때까지 따랐는데.... 아이고, 내 신세야!” 투덜거리며 대전을 나가는 그 모습에 척발척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저, 저 개자식이. 너 거기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을 테니. 거기 안서?” “서라고 선다면 그게 제 정신이오? 바보천치지, 하하하!” 그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혈우마겸이 크게 말하며 대전 밖으로 급히 뛰쳐나간다. 그 모습에 척발척천이 흥분하여 뒤쫓으려 할 때, 명전제갈이 소매를 붙들어 말리며, “주군,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다 농담으로 그런 것이니.” “나도 알아, 안다구. 어이구, 속 터져 정말. 어째 저 인간도 점점 수가 느는 것 같단 말이야. 제기랄, 어떻게 할 수는 없고. 하나 남은 가신이라고 평생 도움이 되지 않는 애물단지니 원.” “그래도 주군께서 가장 믿고 좋아하시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제 눈에는 그 점이 훤히 보여 오히려 부러운 마음이 큽니다.” 부드러운 명전제갈의 말에 어색한 표정으로 척발척천이, “내가 언제? 자네도 참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구만, 쯔쯧.” 말을 하며 태사의에 다시 앉고는, 곧이어 대전내의 모든 사람들을 물러나게 명령한다. 여인들과 호위들이 떠나고 두 사람 만이 남게 되었을 때,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어, “그런데 이번 일이 우리 뜻대로 될까? 혹시라도 그 늙은이가 눈치 챈 것은 아닐 테지?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진다면 이제까지 이뤄놓은 일까지도 만사 도로아미타불이 될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될 것입니다. 주군의 뜻대로 일이 풀린다면, 본 서장지단은 완전히 주군만의 세력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 떠날 자들은 결코 되돌아 올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동안 비밀리에 인마곡(刃魔谷)에서 수련 중이었던 고수들도 이미 출발하여 근처에서 은잠한 채 대기하고 있으니, 이번 일에 참여한 자는 다들 죽은 목숨이라고 보아야지요.” 그동안 척발척천은 권토중래를 노리며, 이곳 서장지단으로 옮겨온 후부터 남은 척발가(拓拔家)의 모든 힘을 쏟아 부어서 서장(西藏)과 청해(靑海)의 접경에 위치한 인마곡(刃魔谷)에 비밀리에 연무관을 만들었었다. 본가 직속의 고수들과 혈련마교의 고수로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 거기에 서장지역에서 흡수한 고수들을 더하여 만든 세력으로 그 수가 오백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명전제갈의 말을 듣고, 흐뭇한 표정이 된 척발척천이 나직히 웃음을 흘리며, “흐흐흐, 단리유아와 싸운 후에는 소뢰음사 역시 피해가 막심하겠지. 천지신교 놈들도 무사하지는 못할 테고, 이번 기회에 완전히 정리해야해! 알겠나?” “물론입니다. 거듭 꼼꼼히 계획을 준비하고 있고 이미 한 달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니, 결코 건곤일척의 이번 대계를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백우선을 부치며 명전제갈이 확신에 차서 힘주어 말한다. 한 달 전 단리유아의 행보가 남만(南蠻)을 거쳐 곤명(昆明)을 지나 대리(大理)에 이르렀을 때에 전해진 천지신교의 척살령에, 두 사람은 무릎을 치며 바로 이것이라고 소리쳤었다. 몇 년 동안이나 서장(西藏)을 노리고는 있었지만, 그들만의 전력으로는 너무 피해가 막심해서 막상 서장을 얻는다 해도 빈껍데기만 남을 공산이 컸다. 그런데 마침 내려진 단리유아에 대한 척살령은 그동안 고심했던 모든 것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던 것이다. “하하하, 그래 자네의 머리에서 나온 이상 실패할 일은 없겠지. 정말 단리유아 그놈이 우리에게는 복덩어리야. 이렇게 서로 싸우는 입장만 되지 않았어도 꼭 만나보고 싶을 정도인데, 이번의 거사가 본좌에게는 꼭 필요하니 어쩔 수 없겠지. 그동안 서장(西藏)을 노리고 있었어도 소뢰음사(少雷音寺)의 힘과 천지신교의 감시 때문에 망설이고만 있었는데, 그자 때문에 모든 일이 술술 풀리게 되었어. 만난다면 입맞춤까지 해주고 싶다니까, 하하하” 척발척천이 소리내어 웃을 때, 명전제갈이 농담조로, “이제 여색(女色)을 벗어나 남색(男色)에까지 손길을 뻗치려고 하십니까?” “응? 자네 무슨 말인가? 난 엄연히 여자를 좋아하지 수염 난 남자는 좋아하지 않아. 혹시 또 모르지, 남자로서도 보기 드물게 미녀 뺨치는 미소년이 있다면 사랑해주고 싶을지. 흐흐흐, 그것도 재미는 있겠군. 음, 한번 생각을 해보아야겠어. 요새 계집들을 보아도 영 흥미가 일지 않고 모두 아니올시다였는데.” 바로 한수 더 떠서 맞받아치는 척발척천의 말에 명전제갈이 한동안 어색한 표정이다가, “휴, 제발 그러지는 마십시오. 아무리 많은 여자들을 가까이 하더라도 말리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주군께서 여자들을 좋아해도 잠시 잠깐이라는 것을 알고 결코 심신을 어지럽히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제가 어떤 계집이라도 주군이 마음에 들어 하면 곧바로 대령할 테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생각은 입 밖으로도 꺼내지 마십시오.” “쯔쯧, 농담이야, 농담. 한번 웃자고 한 얘기인데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어찌하나? 자네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 아무렴 내가 남색이나 하는 변태가 될 것 같은가?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고 이번 일에 대해서나 더 이야기해보세.” 혀를 차며 아직까지 혼자 사는 명전제갈의 위아래를 지긋이 쓸어본다.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어서, “총사, 다른 자들은 모르지만 냉면마검은 이번에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독망비흉 그 늙은이는 믿을 수가 없고 그동안 우리를 감시하던 놈이라 죽일 수밖에는 없겠지만, 냉면마검은 회유할 수 있다면 앞으로 본좌의 대업에 크게 도움이 될 텐데.” 이에 명전제갈이 표정을 고치고 천천히, “저도 그 사람이 아깝기는 하지만, 전에 넌지시 물어보았을 때 보니 결코 천지신교를 벗어날 마음은 없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계획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자도 죽는 것이 낫습니다.” 이에 척발척천이 곁에 있는 쟁반에서 포도알을 따서 삼키며, “쩝, 아쉽게 되었군. 하나라도 더 고수가 필요한 때인데.... 뭐, 어쩔 수 없겠지. 그런데 그들이 떠나기 전에 중독시킬 계획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포도알을 허공으로 던져 받아 삼키는 장난을 하며 툭 던지듯이 말하는 척발척천을 바라보며, 명전제갈이 빙그레 미소 지은 채, “이미 준비해서 내일 그들이 떠나기 전에 모두 중독시킬 생각입니다. 오래전부터 아무런 표시가 드러나지 않는 무색무취무미의 독들을 찾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야 멀리 남천축(南天竺)에서 적당한 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중원이나 남만 쪽은 천지신교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요.” “그래, 자네와 만난 이후부터 계획을 세웠는데, 이제야 독을 구했나보군. 물론 효과는 확실하겠지?” 명전제갈이 찻잔을 집어 들어 차를 한 모금 머금더니, 느긋한 표정으로 그 맛을 음미하며, “며칠 전에 직접 시험해 보았는데 순식간에 중독되어 녹아나더군요. 아마 놈들이 중독된다 해도 똑같은 경우가 될 것입니다.” “자네도 참, 그런 좋은 구경을 혼자만 했다는 말인가? 나도 사람이 어떻게 녹아 없어지는지 예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게 되었군.” 척발척천이 입으로는 흥미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반대로 그 태도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가 다분해 혼자서 포도알을 가지고 장난을 계속하고 있었다. 명전제갈도 그저 묻기에 대답한다는 듯이 별 동요 없는 표정으로 느릿느릿, “나중에 말 안 듣는 자들을 붙잡아서 시험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충분히 구해서 이번에 쓰고도 남을 테니 말입니다.” “좋아, 좋아. 재미있겠군. 흐흐흐, 어떤 놈에게 처음 시험해볼까? 계집들 중에 수하들과 눈이 맞은 년이 있던데, 그년에게 시험해볼까? 아니면 두 년 놈 다 할까?” “확실한 본보기를 위해서 둘이 함께 맛을 보게 하는 것이 좋겠지요.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할 테니.”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서로 딴소리만 계속하다가, 잠시 후 척발척천이 졌다는 듯이 먼저, “자네도 참 강적이야. 끝까지 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군. 내가졌으니 어서 설명해보게.” “주군께서도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오래 버티시다니. 점점 기술이 느는 게 눈에 보이는군요. 하지만 아직 저에게는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더 갈고 닦아서 상대가 먼저 항복하게 만들 때까지 단련을 하십시오.” “자네 잘난 것 알고 있으니 그만 설명이나 해! 내 다음번에는 꼭 이기고 말 테니.” 화가 나서 똑바로 일어나 앉으며 소리치는 척발척천을 보고도, 급할 것 전혀 없다는 태도로 느긋하게 명전제갈이 독에 대해서 설명한다. 명전제갈이 구한 독은 멀리 남천축에서만 나는 홍백혼정산분(紅白混精珊粉)이라는 독이었다. 이것은 본래 산호초에서 뽑아낸 홍백색의 두 가지 가루로서 홍색은 주로 여인들이 몸에 지니는 장향으로 쓰이는 것이고, 백색은 무색무취해서 장향으로서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두 가지 각각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둘이 만나게 되었을 때 촉매제인 백색분이 조금만 섞여도 다시없는 극독으로 변했다. 다른 독들과 달리 일단 중독된 후에는 어떻게 손쓸 수도 없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피와 살을 녹이는 화혈산(化血酸) 계열의 독이었다. 잠시 독에 대한 명전제갈의 설명을 듣고, 척발척천이 궁금한 표정으로, “자네 말대로라면 다시없는 극독이긴 한데, 어떻게 그것을 쓸 것인가? 그냥 공기 중에 있을 때는 그다지 효과가 없고, 꼭 둘이 합쳐져 몸속에서 녹아나야 할 것이지 않는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천천히 명전제갈이, “그게 이 독의 오묘한 점이지요. 평소에는 홍색분에서만 정신을 맑게 하는 향기만 나니 누가 그런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 가지 방도를 마련해보았지만, 적당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반드시 홍색분을 복용시키고 나중에 백색분으로 중독 시켜야 하는데 강호인이라면 그런 사소한 향기도 의심할 테니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본교의 요상단인 혈련치상단(血蓮治傷丹)을 이용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혈련치상단은 붉은 색이고 향기도 비슷하지요. 그래서 홍색분을 혈련치상단에 섞어서 다시 만들었습니다. 실험해보았는데 그 자체로는 오히려 요상력이 훨씬 더 뛰어나게 되서 차라리 이것으로 요상단을 대신하면 어떨까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내일 주군이 하실 일은 떠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닫아버리자, 척발척천이 또 다시, “그것이 다란 말인가? 요상단이야 싸우게 되면 먹는다 할지라도 중독시키는 것은?” “자세히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내일 출발하는 사람 중에 우리 쪽 사람이 한명씩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만 아십시오.” 명전제갈의 말에 입맛을 다시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하여간에 이번 기회에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네. 우리가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천지신교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혹 중독되어 죽지 않는다 해도 인마곡(刃魔谷)의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단지 몇 호흡 더 쉴 수 있는 것뿐이지 죽는 것은 다름없을 것입니다.” 확신에 찬 명전제갈의 말에 소리 내어 크게 웃으며, “하하하, 그렇지. 누구의 계획인데? 실패해서도 안 되고 실패할 수도 없는 일이지.” 곧이어 혈광을 번뜩이며, 지난날 조부와 아버지가 죽게 되고 가문이 풍비박산된 것을 생각하고, “흐흐흐, 저 죽일 놈의 천지신교 놈들에게 그동안 고개 숙이고 지낸 것을 생각하면.... 으드득, 본가를 이 꼴로 만들고 혈련마교를 제멋대로 농락하다니. 혈련마교의 놈들도 다들 멍청이들만 있는지 이용당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그대로 따르기만 하고. 흐흐흐, 그놈들도 증오스럽기는 마찬가지이지. 장손가(長孫家)와 천지신교에 빌붙어 아부나 일삼는 놈들. 지금은 때가 될 때까지 참고 있지만, 나중에 때가 되면 내 반드시 모두 죽여 버리고 말겠어.” “주군, 지금은 그런 기색을 내비치시면 안 됩니다. 사방에 혈련마교와 천지신교의 눈이 있어서 호시탐탐 꼬투리를 잡으려 노리고 있으니, 때가 될 때까지는 부디 참으십시오. 지금은 단지 삼제자로서 서장지단을 이끄는데 충실한 모습을 보이시면 됩니다.” 흥분하여 소리치는 척발척천을 명전제갈이 조용한 어조로 말린다. 그제야 약간 누그러져 얼굴빛을 고치고, “그래, 그때가 될 때까지는 참아야겠지. 하지만 이번에 소뢰음사(少雷音寺)와 단리유아가 충돌하게 된다면 양패공멸할 테니, 그때는 들고 일어나 순식간에 서장(西藏)을 싹쓸이해야 할 것이네. 일단 서장만 내손아귀에 들어오면, 천지신교도 그리 두려워할 필요 없지. 흐흐흐, 그때는 혈련마교를 되찾는 데에도 쉬울 것이고, 되찾는다면....” ******** 본래는 중간의 독망비흉이 나가는 장면에서 나눌려고 했는데, 그러자니 너무 짧아지는 것 같아서 그냥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복잡한데다가 길이가 기니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으실 것 같군요. 제가 말했던 곳을 기준으로 둘로 나누어서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내일은 일요일인 것은 다들 아실 테니, 저에게도 내일은 쉬는 날이 되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 월요일날 다시 뵙기로 하지요. 오타나 오류가 보이시는 분들은 바로바로 댓글에 써주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1 일행을 떠나 홀로 걸어가며 나는 생각한다. ‘삶이란 무엇이고, 운명이란 어떤 것인가?’ ‘말로는 최선을 다해왔다고 하지만,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낸 것은 아닐까?’ ‘무공에 미쳐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집을 떠나 무공을 익힌 열 살 이후로 쉴 새 없이 싸우고 수련하여 무공에만 전념한 채로 지내왔지만, 단지 무공이 뛰어난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어떤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힘이 조금 세다는 것일 뿐, 목적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고개 저어 변명해 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메아리쳐 들려오는 것은 그와 반대임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나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도 적으로서 싸웠던 사람들의 상황도 외면한 채, 오직 나만의 이기적인 마음만으로 잡을 수 없는 허상(虛像)을 쫓아다닌 것은 아닌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내 일이 아니라며 지나친 것이 얼마나 될까? 아마 하나 둘이 아닐 것이고, 그중에는 나를 원망하여 원한을 품은 자들이 생겨난 일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무공이 뛰어나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위한 것이었을 뿐이지 결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대의(大義)를 위해서도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자신은 검(劍)을 든 힘센 무뢰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단지 이기적인 욕망에 빠진 채 하루하루를 보낸 최하(最下)의 인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옆 이웃의 어려움도 같이하는 동료의 어려움도 모르는 사람이 깨달음을 바라는 것은 단지 자기기만에 불과할 뿐이요, 그릇된 욕망의 표출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팔망수괴의 말처럼, 혼자만의 심신을 수련하는 목적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不義)에 맞서는 것이 무공을 익힌 자의 도리요 마음가짐이 아닌가? 혼자만의 이익을 쫓는다면 그것은 필부(匹夫)의 무력에 불과할 뿐, 결코 대승(大乘)의 무도(武道)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보다 넓고 크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내가 높은 경지에 이를지라도, 아니 그런 자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일 테지만, 그것은 진정한 무도에는 이르렀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나는 생각한다. ‘운명(運命)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과연 여태까지의 나의 살인(殺人)은 정당한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하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내 자신의 행동이 그런 화를 불러오게 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 것은 아닐까? 검을 들어 상대와 싸우는 것이 강호(江湖)에서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고, 아니 강호에서 살아가는 강호인의 삶이란 결코 거기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한번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아무리 내가 도망쳐 은거할지라도 한번 씌어진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나의 이 살인의 정당성을 외칠 수 있을까? 나에게 죽은 사람 중에서 과연 직접적으로 원한이나 목적을 가지고 공격한 것은 얼마나 될까? 아마 몇 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이끌려 나와 부딪치게 되었을 것이다. 적이 공격하니 나도 맞서야했다고 강변해보지만, 그렇지 않음을 하늘도 알고 자신도 앎을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 처음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나중에는 살인의 쾌감에 빠져 무의미한 도살을 벌인 적도 많음을. 그러면 적들이 공격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도망쳐야 했을까? 피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까? 아니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끝없는 피의 운명에서 허우적거리며 무의미한 살생을 늘리는 것은 자신의 죄업을 늘리고 더욱 더 그런 운명에 속박되는 것에 불과할 뿐 자신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렵고 어렵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머나먼 인생의 여로(旅路)에 이와 같은 일만 이어지는 것이. 이렇게 가다가 점점 살인에 물들어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나는 또 생각해본다. ‘아버지의 무정함과 큰어머니의 질투에 희생된 어머니와의 맹세 때문에 이름을 버리고 가문과도 절연한 채로 이렇게 천애(天涯)를 떠돌지만, 그 결과 과연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내가 발버둥 친다고 해도 천륜(天倫)이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 무정하게 형제들을 뿌리쳤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으로서 할 행동이었을까? 물론 나 자신이 겪은 일만으로도 그들의 잘못을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고 어머니의 한(恨)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렇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으로 앙갚음하려한다면, 과연 내가 그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최소한 그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보여 지난날을 깨끗이 청산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했다면 마음의 부담도 덜어져 더 이상 거기에 얽매이는 일도 없을 터인데. ‘어리석은 원한에 얽매어 잃어버린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정을 잃어버린 채 다른 사람의 정도 거부한 채로 떠돌기를 벌써 십오 년. 가족의 정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아본다는 것 또한 우습게 여겼고, 내 자신이 직접 그런 일을 당하니 여인의 정 또한 믿을 수 없었다. 회정결(灰情訣)은 더욱 그런 것을 부추겼고 그러한 세월 속에 인간의 감정을 모르고 지내오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미동도 없는 암석처럼, 벼락을 맞아 반쯤 불타버린 고목처럼. 그러나 이제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자신의 잘못이 눈앞에 확연히 드러나고, 노도처럼 밀려드는 후회 속에 가슴만 쓰라려왔다. 어머니와의 맹세로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더 나은 방법으로 그들을 대할 수도 있었음을. 임유정의 정을 뿌리치고 그렇게 홀로 떠나보낸 것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쉰다. 탄식하며 가로되, ‘아아! 진정 어리석었구나, 단리유아야! 너는 어찌하여 너만을 생각한 것이냐? 아무리 네가 변명을 해본다 해도 너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옹졸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에 힘겨운 운명에 처한 것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그 크기와 깊이에 차이가 있을 지라도 인간인 이상 육체적인 괴로움과 심적인 번민으로 살아가지 않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대소경중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고뇌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각자 자신의 일이 더 괴롭고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한다 해도 일시적으로 자신의 괴로움을 덮어서 자위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리라. 인간이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이상 서로 부딪치고 소소한 일에도 얽매이며 보낼 것인데, 만일 그런 괴로움과 고뇌가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감정이 없는 목각인형이 아닌 이상, 설사 도를 깨달을지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물결에 흘려보내듯이 떠나보내어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일 뿐. 한동안 몰아치는 회오(悔悟)에 빠진 채 걷다가, 고개를 떨치고 새롭게 결심을 하여 다짐해본다. ‘이제부터는 나의 의지대로 행할 것이다. 결코 운명에 끌려 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어머니와의 맹세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자신의 자유의지(自由意志)로서 행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내가 꿈꾸는 자아(自我)의 완성에도 한걸음 더 다가가는 지름길일 테니.’ ‘어머니, 제가 맹세를 지키지 않는다고 결코 말하지 마십시오. 맹세처럼 가문에 돌아가지도 않고 가정을 이루는 일도 없을 테지만, 그러나 앞으로는 부딪쳐오는 인연(因緣)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피하고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뒷날 더욱 큰 괴로움으로 되돌아와 후회하고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을 알았으니.’ 결심을 새롭게 하다가, 이어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부딪칠 신비세력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막상 그들과 싸울 결심을 하였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일행에게 각자 임무를 주어서 준비하도록 떠나보내고, 일 년에 한 번씩 소식을 전해 받기로 하였지만 뜻대로 될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미 삼십년 이전부터 그들이 천하를 노리고 있었다면, 그들의 힘은 이제 포화상태에 이르러 곧 분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직 그들이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서는 뭔가 큰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동안에 축적된 힘만도 얼마나 될 것인가? 떠나는 일행에게 앞으로는 강호(江湖)의 시비에 얽혀 들어 싸우지 말고 세력을 모으는 데에만 전력을 다하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사람의 앞날이란 알 수 없으니, 만일 우리가 세력을 모으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도 힘들 것이다. 이제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듯이 일을 시작하는 초기이니, 그들이 공격한다면 별다른 저항도 못해볼 것이다. 한편으론 일행이 염려되었고, 한편으론 자신의 일이 막중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제부터는 세외(世外)에서 분란을 일으켜서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어 미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 사실을 안다 해도 그들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만들기만 해도 반은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를 노리는 세력과 싸우고 같이 동참할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할 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위험한 경우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의(大義)를 위해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가오는 운명(運命)을 피하지도 않을 것이고, 전신을 혈해(血海)에 누울지라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각오를 다지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부터는 혈혈단신이니 거치적거리는 일도 없을 것이고, 혼자인 것이 오히려 이런 일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적들의 공격을 혼자서 감당해야 할 테지만, 각 지역에서 세력을 모으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또 적들의 시선을 끌고 다녀야할 테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숨어서 다닐 필요는 없었다. 덕흠(德欽)을 지나 서장(西藏)의 동남부 끝 벽토(碧土)에 들려 서장의 정세를 대충 파악하고는 곧바로 노강(怒江)을 건너서 서진을 계속했다. 말을 한필 구했지만 특별히 걸음을 재촉할 생각은 없어서 흔들리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말 등위에 앉아 생각에 잠긴 채 그저 서쪽으로만 방향을 잡아 걷게 했다. 서장(西藏). 며칠이 흘러 느낀 서장에 대한 나의 생각은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서장인들의 순박함, 깊은 신앙심이었다. 높은 하늘에 한두 개의 뭉게구름, 사방을 둘러보아도 드넓은 초원과 멀리 산위의 눈이 쌓인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었다. 넓고 넓음에도 하루종일가야 마주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떤 날은 하루에 한명 만나기도 어려웠다. 자연은 아름다운데 너무 적막하니 오히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들 서장인들은 장족(藏族)이 거의 대다수였는데, 남녀 모두 두 갈래로 머리를 땋아서 둘둘 머리를 감는 형태를 하고 있었고, 복장의 대부분은 흑청색 계통으로 양털이나 야크의 털로 만든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그리 낯선 이를 경계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가이 자신의 천막으로 초대해 수유차(야크의 젖으로 만드는 것. 버터차.)를 대접하며 상대를 축복하는 사람들이었다. 천막 안에는 불상에서부터 탕카라 불리는 그림들, 동물들을 조각한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각기 믿는 종교에 따라 각기 한가지씩은 꼭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방인인 자신이 보기에는 이상한 것도 약간 있었다.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있다는 숙명론적인 삶에 있어서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 신실한 모습과 꾸밈없는 태도가 많은 감명을 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일차로 목적했던 파밀(波密)에 이른 것은 시월 십삼일의 오후였다. 파밀은 벽토(碧土)에서 육백여 리 떨어진 곳이었는데, 일행이 없이 혼자이고 말을 타고 가다보니 서두르지 않았음에도 예상보다는 빨라서 육일 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백여 호가 살아가는 파밀은 인근 백여 리 안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소문에 들었던 호리구련(湖里九連)을 찾아가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왔는데,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하룻밤 머물고 있는 농가의 주인에게 물어보니, 최근 십여 년 내로 호리구련에 속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끔 한두 명이 산에서 내려올 뿐이고, 이전과 같이 떼로 몰려다니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역시나 들었던 소문과 같음을 알고 어찌할지 생각해보았다. ‘그냥 백본파(白本派)로 향할까? 소문에 들었던 대로라면 기껏해야 이백여 명의 중소문파에 불과하다는데, 꼭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별로 도움이 될 만한 세력도 아닌 것 같은데.’ 잠시 생각하다가 일단은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하나라도 도움을 청해서 자신들의 지역을 지켜내 신비세력에 맞서 싸우게 설득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니, 그들의 세력만 보고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호리구련(湖里九連)을 찾아가 만남을 청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일각이 넘게 몇 번이고 소리쳤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으니, 별 수 없이 포기하고 돌아설 수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실망한 채로 돌아선 뒤, 곧바로 파밀(波密)을 뒤로하고 백본파(白本派)가 위치한 랑장(朗長)으로 향했다. 이틀 후 아로장포강(雅魯藏布江)을 건너 길을 계속 가다가 날이 저물어 노숙해야만 했다. 근처에 다른 유목민의 천막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도 없으니 별 수 없이 오늘은 혼자서 머물러야 했다. 그렇게 노숙을 준비하며 모닥불을 피우고 작은 솥에 차를 끓이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의 말의 방울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로 들어보아서는 한 마리인 것 같아서 별로 경계하지 않고 저녁을 차리는데 신경을 쏟았다. 반각이 미처 못되어 한쪽의 말안장에 걸터앉아 육포를 뜯고 수유차를 마시고 있을 때, 잡 털 하나 없는 희디흰 백마를 타고 한사람이 접근해왔다.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삼십대의 이목구비가 수려한 사람으로 걸친 백의장포와 말로 보았을 때 보통 신분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홀로 다니는 것이 이상해보였다. 바로 척발척천으로 호리구련(湖里九連)에 단리유아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더 늦기 전에 한번 만나보기 위해서 막아서는 명전제갈의 눈을 피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 책으로 낼 때는 앞의 척발척천 부분을 최대한 간단히 할 생각입니다. 본래는 주변의 정황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지니 답답해 보이네요. 중간정도로 잘라서 이야기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까지만 나타낼 생각입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2 말에서 뛰어내린 척발척천이 모닥불 곁으로 다가와 단리유아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더니, 넉살 좋게 껄껄 웃으며 말한다. “하하하, 이거 반갑구려. 이런 황원(荒原)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불빛이 나기에 급하게 말을 몰아왔소이다. 꼼짝없이 혼자 노숙할 줄 알았었는데 말이오. 음, 배가 고파 그러는데 먹을 것 좀 나누어 주지 않겠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因緣)인데.” 모닥불에 손바닥을 쬐며 떠드는 척발척천의 모습에 단리유아는 말없이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서장(西藏)의 날씨를 모를 리 없을 텐데 이렇게 준비 없이 다니다니. 아무래도 무언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처럼 보이는군. 말을 보아도 그렇고 옷을 보아도 이렇게 홀로 다닐 사람은 결코 아니야. 게다가 날 때부터 아랫사람들을 부리던 것이 몸에 밴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고 척발척천이 얼굴을 찌푸리다가,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되찾는다는 듯이, “어째 대답이 없소? 쫀쫀하게 나누어 주기 싫다는 것이오? 흠, 이거 너무하구려. 아무리 초면이라고 해도....” 계속해서 떠드는 것을 바라보다가, 단리유아가 말없이 차를 따라 건네고 육포도 한줌 꺼내어 같이 건네주었다. 육포를 건네받은 척발척천이 말라비틀어지고 오래되어 색까지 거무죽죽하게 변한 모습에 한동안 먹을지 말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다 부지런히 먹고 있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는, 그 자신도 육포를 한 조각 입에 넣고 씹다가, “쩝쩝, 이건 왜 이리 딱딱해? 꼭 나무껍질을 씹는 것 같네. 뭐 다른 것은 없소? 정말 먹기 힘들어서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것 밖에는 먹을 것이 없소.” “제기랄, 별 수 없군. 지금은 배가 너무 고프니. 다른 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거의 이틀 동안을 아무 것도 못 먹었으니.” “계속 씹다가 차와 함께 마시면 괜찮을 것이오.” 투덜거리는 모습에 단리유아가 무표정이 중얼거린다. 고개를 끄덕이며 척발척천이 한동안 육포만 씹다가 단리유아의 모습을 슬쩍 훑어보고 나서, “쯔쯧, 노형도 고생 꽤나 했나 보구려. 얼굴의 흉터하고 갈라터진 손의 모습을 보니. 노형, 나는 척발척천이라는 사람인데 형장의 이름은 어찌 되시오?” “단리유아라 하오.” 짧게 내뱉는 단리유아의 대답에 척발척천이 바로 대꾸하지 않고 질기디질긴 육포만 부득부득 씹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물러진 육포를 삼키고는 수유차를 한 모금 마신다. 입맛에 잘 맞지 않는 수유차를 곧바로 뱉어내며, “으, 이건 왜 이리 느글거려. 제기랄, 예전에 한번 먹어본 적이 있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먹다보면 괜찮을 것이오. 처음에는 다들 그러니.” “그런가? 그래도 더는 마시기 싫군.” “좋도록 하시오.” 곧바로 차를 땅에 쏟아버리고는, “이보시오, 단리형. 다른 마실 것은 없소?” “야크 젖이 조금 있는데, 어차피 그것으로 만든 것이 그 차이니 그대에겐 매일반일 것이오.” “제기랄, 이 맛없는 것을 어떻게 먹나 몰라. 휴, 끔찍하구만.” “그것도 못 먹어서 굶는 자들도 부지기수일 것이오.” “흥! 그거야 그들이 무능력해서 그런 것이지. 그보다 단리형은 어쩐 일로 서장(西藏)에까지 온 것이오? 상인이 아닌 이상 중원인이 이곳까지 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일인데.” 말을 돌려 말하는 척발척천을 보고, 단리유아도 대충 둘러대며, “그저 지나가는 길이오. 그러는 척발형은 어쩐 일이오?” “나? 나는 볼일을 보러 랍살(拉薩)로 가는 길이었소.” 서로 한동안은 신변잡기만 떠들고, 중요한 본론에 대해서는 내비치지 않고 겉돌기만 한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척발척천이 먼저, “단리형, 만일 그대가 힘이 있어 천하를 제패할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흠, 난 그런 경우에 온다 해도 천하를 어떻게 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소. 그런 무의미한 일에 일생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고.” 조용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단리유아를 보며, 척발척천이 속으로, ‘그게 정말일까? 누구나 힘이 주어진다면 한번이라도 써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어린아이도 칼을 손에 쥐면 휘둘러보는데 말이야.’ 생각과 함께 곧바로 다시 단리유아를 향해서, “과연 그럴까요?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단리형처럼 행동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남아(男兒)로 태어나서 그 정도의 포부도 없고, 또 명성을 천하에 떨치지 않는다면 무인(武人)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와 같은 일이 무슨 도움이 되겠소? 그렇게 하여 천하를 품에 안고 명성을 사해에 떨친다 해도, 죽으면 일 장(丈)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고 썩어서 부토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단리유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척발척천이 고개를 저으며 곧바로 반론한다. “단리형의 생각은 너무 개인적인 면으로 치중해서 그런 것이오. 여태까지 강호(江湖)에서 하루 동안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사람만 해도 얼마이오? 아마 셀 수도 없을 것이오. 보다 넓게 보아서 만일 천하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다면 강호의 분란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오.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여러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오?” 척발척천의 말에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물론 척발형의 말도 옳은 점이 있소. 하지만 과연 강호를 일통하는 것이 그런 목적에만 있다고 할 수 있겠소? 여태까지의 예를 보아서도 천하를 노리는 사람들의 목적은 개인의 영화(榮華)를 위한 것이었지, 결코 힘없는 대다수를 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그거야.....” 반론하려는 척발척천을 손을 들어 가로막으며, “그런 순수한 목적만으로 강호(江湖)를 일통(一統)했다고도 해봅시다. 그렇다고 강호가 평안할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는 못할 것이오. 그 자신이 아무리 청백하다고 해도 그 밑에 있는 자들까지 그렇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니 말이오. 오히려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받고자 더 날뛰지 않겠소?” “그 정도는 엄격한 법(法)과 감찰(監察)을 통해서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또 아무리 그래도 일단 강호가 일통되면 소소한 분쟁은 줄어들 테니, 힘이 없는 약자들이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경우도 줄어들 것이오. 현재까지 정사(正邪)로 나뉘어서 혹은 이권(利權)을 쫓아서 싸우는 일이 끊임이 없는데, 그런 결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어나가고 있소?” 단언하듯이 응답하는 척발척천을 바라보며, “과연 척발형의 말대로 강호(江湖)가 평탄하게 될 것 같소? 나는 오히려 그 하나의 집단을 위하여 희생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오. 또 강제로 강호의 무인들을 억누르는 것은 진정한 평화라 할 수 없을 것이오. 언젠가 그들의 분노가 폭발한다면 더욱 큰 혼란이 일어나고 무수한 생명이 헛되게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니오?” 이에 척발척천이 발끈하며 곧바로, “무슨 말이오? 그런 자들이야 강호를 일통할 때, 싹쓸이 없애버린다면 될 것이 아니오? 내가 보기에 단리형은 너무 소심한 것 같소이다.”   비꼬는 것 같은 척발척천의 말에, 단리유아가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처다만 보다가, “다 좋소. 척발형의 말대로만 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야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았소?” “흥! 그 정도야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충분히 희생할 만 하다고 보오. 게다가 어리석은 놈들이나 반대하는 놈들에게 무슨 자비(慈悲)가 필요하겠소. 어차피 나중에 걸림돌만 될 테니 깡그리 없애는 것이 나을 것이오.” 코웃음 치며 확고부동하게 말하는 척발척천을 보며, ‘당신은 너무 위험한 사람이로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천만인(千萬人)이라도 없앨 수 있는.’ 곧이어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해서 강호(江湖)를 일통(一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소? 서로의 뜻이 일치하여 그런 것도 아닌데. 단지 힘으로서 억누른다면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공포 속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텐데.” “하하하, 그거야 시간이 흐른다면 차차 누그러지지 않겠소? 반대할 자가 없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니.” 기고만장한 듯이 크게 웃으며 말하는 척발척천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유리한대로만 생각하는군. 그동안에 죽어나갈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게다가 그 사람이 죽어버린 뒤에 일어날 혼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이 사람을 어떻게 할까? 차라리 지금 죽여 버릴까? 아무리 생각해도 천하를 위해서는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더 이상 반론해보아야 쓸데없다는 것을 알고, 말없이 단리유아가 척발척천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속도 모르고 은근한 표정으로 척발척천이, “단리형, 그래서 말인데 나와 같이 그런 일에 동참하지 않겠소?” 뜻밖의 물음에 생각에서 깨어난 단리유아가 흠칫하며, “무슨 일 말이오?” “흐흐흐, 나와 같이 강호(江湖)의 안녕을 위해서 노력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오.” “나는 그런 일에는 별 생각이 없소. 그런 허황된 말뿐인 일에는.” 단리유아의 말에 척발척천이 속으로, ‘당신이 그런다고 당신 뜻대로 될까? 흐흐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하게 만들면 되지.’ 곧이어 음흉하게 웃음 지으며, “흐흐흐, 그렇지만 요새 누군가 단리형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아시오? 혼자서는 어쩔 수 없을 텐데....” “당신은..... 누구요?” 말과 함께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척발척천의 목에 갖다 댄다. ‘제길, 더럽게 빠르군. 무공만으로 본다면 이 자식이 나보다는 반수 위인 것 같은데? 어째 들었던 소문과는 많이 다른 걸? 강하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나만 못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흐흐흐, 하지만 세상 일이 꼭 무공만으로 된다면 재미없지. 게다가 내 일에는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좋지.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천하를 노리는 데는 더 도움이 될 테니 말이야.’ 목에 와 닿은 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한 어조로 느물거리듯이, “아까 내 이름을 말했을 텐데? 쯔쯧, 이 검이나 치우는 것이 어떻겠소? 좀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했는데 이러면 너무 살벌하지 않소?” 척발척천의 말에도 동요 없이 오히려 그대로 검을 들이밀어 목젖을 찌르며, “나는 당신이 그리 맘에 들지 않소. 아까부터 당신을 죽일지 말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죽여 없애는 것이 나을 것 같소” 무표정이 중얼거리는 단리유아를 보고도 겉으로는 별 변함없이 느긋한 표정으로, ‘제기랄, 무슨 이딴 놈이 있어? 쇳덩어리 같이 무뚝뚝한 놈 같으니.’ 곧바로 손으로 검을 밀치고 툴툴 거리며, “좋아 좋아. 자존심 상하지만 내가 양보하여 말해줄 테니 이 검이나 거두지. 내 이야기를 들어보면 단리형도 별 손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말이오.” “그러면 어서 말해 보시오. 이렇게 나에게 접근한 본래 목적을.” 단리유아의 말에 흠칫하다가, 곧 안색을 바꾸어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하하! 사람들이 말하길 단리형은 무공만 세고 살인에만 미친 인간이라 하더니, 이제 보니 천하가 속고 있었군. 흐흐흐, 당신은 정말 흥미로운 친구요. 다른 때에 만났으면 내가 먼저 바로 의형제를 맺자고 떼를 쓰고 싶었을 텐데, 이런 세상에 만나서....” 한동안 계속해서 딴청을 부리는 척발척천을 보고는 눈썹을 치켜 올리다가, 곧 안색을 고쳐 무표정한 얼굴로, “나는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보고 그리 오래 참지 않소. 이제 그만 본론을 얘기하시오.” 동시에 검을 들어 올리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척발척천이 손을 휘저으며, “아, 알겠소. 거참 성격 한번 급하네. 어련히 얘기해주지 않을까봐.” “....” “흠, 단리형을 공격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겠지? 흐흐흐, 그런데 그냥 얘기해주는 것은 내가 너무 손해인 것 같은데. 아아, 그렇게 서둘지 말고, 우리 말로 하자니까. 정말 겁나게 하지 말고.” “마지막이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단리유아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속으로 음흉한 웃음과 함께, ‘흐흐흐, 지금은 그저 넘어가주지. 어차피 네놈이 천지신교(天地神敎)에 대해서 자세히 알수록 나에게는 더 유리하니. 크크크, 네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넌 그저 잘 훈련된 사냥개일 뿐이지. 나를 대신해서 천지신교를 물어뜯을. 흐흐흐.’ 겉으로는 쩔쩔매는 표정으로, “그래 그래. 이제 말하겠네. 진정하라고, 사람이 어찌 그리 성격이 급하나! 아, 얘기한다니까. 흠, 어디서부터 얘기해줄까? 천지신교에 대해서? 그래? 그럼 그것부터 말해주지.” 단리유아를 보며 혼자서 떠들다가, 자기 마음대로 단리유아의 뜻을 판단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3 단리유아를 향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단리형을 공격한 단체는 과거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었던 원시마교(原始魔敎:본래 명칭은 천지신교임)의 후예라고 할 수 있소. 즉, 그들은 원시마교를 계승한다는 의미로서 천지신교(天地神敎)라는 같은 이름을 쓰고 있소.” 척발척천의 말에 단리유아가 의아해서, “원시마교가 멸망한지는 천년이 넘었는데?” “맞소. 하지만, 흐흐흐, 단리형도 알다시피 그 후신으로 수라혈교(修羅血敎)나 혈련마교(血蓮魔敎)도 있지 않소? 정파에서만 그렇게 부를 뿐, 실제 그들이 자칭할 때는 이차·삼차신교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라오.” 단리유아도 그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수라혈교의 본래 명칭은 수라신교나 이차신교라는 것이 맞지만, 정파에서 경멸과 비하하는 뜻을 담아서 마(魔)자를 중간에 집어넣은 경우였다. 혈련마교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는데, 두 문파 모두 원시마교의 후예들이 세우거나 무공이 흘러들어 발전한 경우였다. ‘그래도 이미 흘러간 시간이 얼마인데? 게다가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현재의 혈련마교는 오히려 배화교(拜火敎)의 영향이 더 크다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힐끗 처다 보고는 계속해서 척발척천이, “물론 천지신교(天地神敎)는 그 두 문파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소. 오히려 자신들이 정통후예라 주장하고 있지.” “그렇다면 혈련마교처럼 수라혈교의 멸망 후에 생긴 것이 아니란 말이오?” 단리유아의 물음에 척발척천이 속으로, ‘이 자식에게 속속들이 자세한 사항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다보면 본가(本家)의 일까지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제기랄, 이놈이 머리가 조금만 부족해도 대충 넘어갈 수 있을 텐데.’ 잠시 생각하다가 어차피 단리유아의 의심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흐흐, 나도 최근에야 어느 정도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이 생긴 지는 이제 이백년도 안 되었다고 알고 있소. 그 당시 전설 속에서만 떠돌던 천패무조(天覇武祖:일반적으로 천마노조라 불림)의 무덤을 발굴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후예들이 모여 이룩한 것이 현재의 천지신교라고 하오.” 척발척천의 말을 듣고 한동안 단리유아는 아무런 물음도 던지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천패무조(天覇武祖)가 죽은 뒤로 아무도 그의 무공을 찾지 못했고, 이제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그의 무맥(武脈)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의 무덤을 찾았단 말인가? 이미 천년이 넘어가 무덤의 흔적도 없어서 그저 작은 동산처럼만 보일 텐데. 또, 무덤을 찾아 나섰던 사람이 누구지? 다들 전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잠시 누가 어떻게 무덤을 찾았을까 생각해보다가 문득, ‘그렇지. 천패신검(天覇神劍)이 있었지. 천패신검의 비밀을 푼다면 고금오대고수의 일인인 천패무조의 무공을 얻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 아니야. 천패신검이 강호(江湖)에서 사라진지도 오백년 이상이라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계속해서 생각해도 알 수가 없자, 다시 척발척천을 향해서 물음을 던졌다. “무덤을 어떻게 찾았는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단리유아의 물음에 약간 뜨끔하다가, 오히려 그 기색을 감추려고 크게 웃으며, “하하하, 단리형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로구려. 다른 사람은 먼저 천지신교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부터 물어볼 텐데, 그런 세세한 점까지 생각하다니.” 겉으로는 약간 비웃는 표정으로 말하는데, 이와 반대로 속으로는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대충 넘어가자. 이 빌어먹을 자식아! 조금이라도 빈틈을 찾으려고만 하네. 누가 이놈이 무공에만 미친놈이라고 했지? 그놈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에 주둥이를 찢어놓고 싶구만 정말. 제기랄, 괜히 이놈에게 접근한 것은 아닐까?’ 묵묵히 대답을 요구하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척발척천이 쓴 웃음과 함께, “나도 어떻게 찾았는지는 잘 모르오. 단지 이백년 전의 고수들인 강호삼천군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들었을 뿐이지.” 강호삼천군(江湖三天君)은 대략 이백년 전에서 백오십 년 전까지 강호(江湖)에서 활동했던 고수들이었다. 당시에 세 명 모두 십대고수에 들 정도의 고수들로서 상대할 자가 별로 없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본래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는데, 갑자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싸운 후에는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척발척천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들 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 간에 벌어진 일이 큰 단서가 될 것 같은데, 백오십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 현재로선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 문제로군. 이것은 나중에 자세히 조사해달라고 해야겠군. 현재와 같은 상황이 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테니.’ 일단 생각을 멈추고 다른 일부터 알아보기로 하고, 한쪽의 검으로는 장작을 뒤집고 다른 손으로는 포대에서 말린 야크 똥을 꺼내어 불길을 일으키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척발형의 말대로라면 이백년에서 백오십년 사이에 천지신교(天地神敎)가 다시 부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말이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먼 세외(世外)까지 세력을 뻗칠 정도이겠소? 차라리 백 년 전의 혈란(血亂)이 일어났을 때 중원을 노렸다면 훨씬 쉬웠을 테고, 그랬다면 이미 중원을 독패한 후일 테니 나머지 세외지역까지 노릴 만 할 텐데.” “그거야 강호삼천군(江湖三天君)이 사라진 후에도 그들의 후예들끼리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고, 겨우 하나로 세력을 모았다고 하지만 그것도 얼마 전이라고 하니....” 척발척천이 무심코 대꾸하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중단할 때,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며 계속해서 단리유아가, “그러면 갑작스런 세외지역의 준동은 어떻게 된 것이오? 거의 다가 사파의 세력이 패권을 차지한 상황이던데. 또 나를 공격했던 자들이 말하기를 운남지단이라 했었는데, 그건 어찌된 것이오?” 단리유아의 물음에 척발척천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다. ‘제기랄, 아주 손해가 막심하구만. 어떻게 된 인간이 나보다 말발이 더 세? 위(魏)총사를 제외하고는 밀린 적이 없었는데. 아, 정말 짜증나는군.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다니. 소문으로 듣기로는 무공에 대한 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말이 없다고 알려져서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손해가 커, 손해가! 젠장, 이번 만남은 나의 완패인 것 같군. 흐흐흐, 그렇다고 손해만 계속 본다면 내가 척발가의 후손이 아니지. 오냐, 네놈 뜻대로 다 얘기해주마. 그런 후에 두고 보자. 흐흐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때까지 쳐다보고만 있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단리형의 말대로 아무리 그들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실제 그들만으로는 세외지역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소. 게다가 전체 인원도 천여 명에 불과하다고 들었으니 말이오.” “겨우 그 정도의 수밖으로.....” “아, 내가 설명할 테니 가만히 있으시오. 비록 천 명 정도에 불과하다지만, 다들 뛰어난 고수들이어서 다른 문파와 단순히 숫자로는 비교할 수 없소. 게다가 누가 그들만으로 세력이 이루어졌다고 했소?” 단리유아에게 신경질을 부리듯이 쏘아붙이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천지신교는 그들 자신과 다른 두 집단이 연합한 세력이오. 뭐, 말뿐인 연합이기는 하지만. 처음에 말했다시피 천지신교는 천여 년 전의 원시마교의 정통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인데.... 아 참,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단리형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군. 단리형은 어떤 곳이라 생각하오, 그 두 곳이?” “그렇다면 혈련마교(血蓮魔敎)가? 다른 곳은....” “맞소. 혈련마교가 그 한 곳이지. 다른 곳은....” 약 올리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뜸을 들이다가, “흐흐흐, 모르겠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중의 하나인 늙은 여우가 주인으로 있는 곳인데?” “혹시, 무외신궁(無畏神宮)?” “오오! 똑똑하시구려, 단리형. 대번에 무외신궁이라고 맞추다니. 다들 무성(武聖) 그 늙은이가 정의롭기 그지없다고 생각해서, 그럴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라 여겼는데.” 조롱기어린 척발척천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단리유아는 생각에 잠겼다. 무외신궁이야 약간 의심을 하고 있어서 최소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솔직히 혈련마교까지 동참했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삼백년 가까이 봉문 아닌 봉문을 하며 중원 쪽으로는 세력을 뻗친 적이 없었고,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도 소림사가 혈련마경(血蓮魔鏡)을 도난 당한 최근에 이르러서였던 것이다. ‘이리되면 중원과 세외에서 가장 큰 세력이 한패라는 것이지 않는가? 거기에다 천지신교 자체의 세력만도 거대하니.... 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군.’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며, “흐흐, 본래 무외신궁은 백 년 전에 혈련마교가 중원으로 잠입시켰던 세력이오. 혈련마경(血蓮魔鏡)을 찾고 또 중원을 노리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말이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흘러 세력이 커지자 점점 혈련마교와 거리를 두면서 벗어나려고 기를 쓰고 있었소. 최근에는 거의 독립하다시피 했었는데 천지신교의 세력이 뻗치자 냉큼 그쪽으로 돌아서버렸소. 비록 지금은 한편이 되어서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 간에 앙앙불락하는 실정이오.” 척발척천 말에 단리유아가 생각에서 깨어나 검을 들어 올리며, “이제 보니 척발형은 천지신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구려. 그런 세부적인 상황까지 알고 있으려면, 반드시 당신도 그들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아, 정말 말로 하자니까. 이거 어디 겁나서 살겠소?” 무서워 죽겠다는 듯이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다가, 음흉하게 웃음 지며, “흐흐흐, 물론 나도 관계가 있소.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을 테니. 하지만 나의 목적도 단리형처럼 그들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이렇게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오.” “그것이 아니라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온 것 같은데?” “아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이오? 단리형을 이용하다니! 이래 뵈도 불알 두 쪽 달린 남자로 여태까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소이다. 믿어주시구려” 오른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척발척천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물론 사정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정말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거짓말을 한 적이 있지. 하지만 그럴 때는 미리 손으로 거짓말이라는 것을 표시했으니, 다른 놈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나는 결백해. 흐흐흐’ 지금도 왼손을 등 뒤로 돌려서 손가락으로 거짓말이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절대로 진실이라는 듯이 계속해서 다짐하는 척발척천을 보다가, 문득 한 가지 일에 생각이 미쳐서, “천지신교의 위치를 아시오?” “뭐요? 혹시라도 쳐들어갈 생각인 것이오?” “....” 지긋이 바라만보고 있는 단리유아를 보고, 한동안 척발척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가, “흥! 꿈 깨는 것이 좋을 것이오. 단리형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천여 명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가 뭘 어쩌겠다는 것이오? 게다가 하나 같이 고수들이어서 단리형을 상대할 만한 자들도 부지기수일 텐데. 또 그렇다 해도 나도 어디 있는 줄은 모르니 그런 생각은 아예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여태까지 얘기한 것으로 보았을 때는 당신의 신분이나 실력이 보통이 아닐 것 같은데? 당신이 생각했을 때도,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시오?” 단리유아의 추궁에 짜증난 목소리로, “아, 글쎄 모른다니까 그러네. 제기랄, 난 혈련마교(血蓮魔敎)의 셋째 제자에 불과하단 말이요. 본교 내에서도 교주만이 알고 있을 정도인데,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혈련마교의 삼제자?” 말꼬리를 올려서 되묻는 단리유아를 보며, ‘제기랄, 오늘은 되는 일이 없군. 계속해서 실수 연발이라니. 차라리 위(魏)총사를 데리고 오는 것인데. 아니면 그저 서찰의 형식으로 천지신교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 나았을 것 같은데. 빌어먹을,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로군. 처참하군, 처참해! 척천아, 네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적이 언제였지?’ 당황하는 표정을 숨기고서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아니, 뭐 말뿐인 삼제자지. 실제적으로는 원수지간이라고 할 수 있소.” 이에 한참을 아무런 말없이 척발척천의 얼굴만을 주시하는 단리유아였다. 처음에는 시선을 회피하던 척발척천도 단리유아를 노려보듯이, 뚫어져라 마주쳐다보며 소리친다. “내 부모와 조부님이 그들 때문에 돌아가셨단 말이오. 제기랄, 사람 말 좀 믿어보시오. 어떻게 의심만 한단 말이요?” “믿소. 그렇지 않다면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니.” “뭐, 뭐요?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려는 것을 단리유아가 검을 들어 올려 막아서며, “아, 됐소.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천지신교의 교주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나 얘기해 보시오.”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듯이 말하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뿌드득. 이 빌어먹을 자식아, 검이나 저리 집어넣고 얘기하잔 말이야! 삐뜩하면 사람 겁이나 주고. 확 맞장 떠버릴까 보다 정말.’ ‘어휴, 끓는다 끓어. 내가 목적이 있으니 참을 뿐이지, 아니면.... 하지만, 네놈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척발가의 후손이 아니다. 나중에 두고 보자, 이 철가면을 둘러쓴 것 같은 놈아! 여태까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단리유아의 모습 때문에, 대화에 능수능란하다는 척발척천도 단리유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다 할 어조나 표정의 변화가 없으니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울화가 치밀어 확 덮쳐버릴까 하고도 몇 번이나 생각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는 약간 고수라 생각되었고 또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싸워보았자 자신만 손해이고, 지금까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것을 생각해서라도 참아야했다. [설정 & 참조] [1] 강호삼천군(江湖三天君) : 이백년에서 백오십년 전 사이에 주로 활동했던 세 명의 고수들로 각기 중주신군(中州神君) 역리행(易理行), 북천검군(北天劍君) 상관궁(上官宮), 남천도군(南天刀君) 사공수(司空守)를 이르는 말. 당시의 십대고수에 들 정도의 고수들로서 서로 간에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음. 셋 모두 협행으로 유명해서 당시의 강호에서 가장 위명이 높았던 고수들이었음. 이 중에서 중주신군 역리행의 정확한 신분이나 무공내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음. 북천검군 상관궁은 이백여 년 전 제자들 간의 내분으로 멸망한 한수검문(寒愁劍門)과 관련이 있다고도 하지만, 실제의 검법에 있어서는 그 유사점을 찾기 어려웠음. 남천도군 사공수만이 신분이 확실했는데, 지금은 사라진 천도벽(天刀壁)이라는 문파의 후계자로서 나중에 자신만의 독특한 도법을 창안하게 되었다고 알려짐. ****** 흠, 며칠 동안 제대로 연재를 못했습니다. 컴퓨터를 조립하게 되었는데, 거의 반년 동안 손을 놓고 있다보니 재빠르게 조립할 수 없더군요. 불과 몇 달 만인데도 아주 애먹었습니다. 오타나 오류가 보이면 지적해 주시고, 저녁에 다시 한 편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老翁 님의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부분을 바꿀까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꾸려니 오히려 헷갈리게 만드는 면이 더 커보이더군요. 일반적인 강호상의 명칭으로 지금까지 혈련마교라고 했는데, 여기서만 그렇게 하기에는 어쩐지.... 그래서 내버려 두었는데 약간 이상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나쁘게 말해도 자신의 입으로는 좋게 말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데 말입니다. 음, 일단은 이대로 두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달아주십시요. 그러면 제가 보아서 다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老翁 님께 감사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4 어금니를 지그시 악물어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척발천척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에 기분을 떨치고자 오히려 호쾌하게 웃으면서, “하하하, 이거 내가 꼭 죄인이 되어 문초받는 듯한 기분이구려. 아무리 생각해도 단리형은 판관(判官)이 되었으면 크게 성공했을 것 같소이다 그려.” “....” “좀 웃으시오. 어떻게 그런 표정만 계속 지으시오? 아무래도 여자들과의 관계가 부족한 것 같소. 내가 조금 도와줄 수도 있는데. 자고로 여자들과 한번 사귀어보면, 단리형도....” “그만! 아까의 이야기나 대답하시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허비 말고.” 중간에 가로막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한동안 척발척천이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다가, 들어 올려지는 검을 보고나서, “말하겠소. 말하면 될 것 아니요? 정말이지 다시는 단리형과 마주치고 싶지 않소. 어디에서든지. 제기랄, 나도 천지신교(天地神敎)의 교주라는 자가 어떤 놈인지는 모르오. 현재의 혈련마교의 교주만이 어떤 자인지 알고 있을 뿐이지.” 말을 멈추고 과거를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리다가 계속해서, “삼십여 년 전에 일단의 무리들이 혈련마교(血蓮魔敎)를 찾아온 적이 있었소. 그들의 목적은 같은 원시마교(原始魔敎)의 후예로서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결맹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당시의 교주였던 내 조부님은 듣지도 못했던 자들이 찾아와 그런 요구를 하니 코웃음만 치며 상대하지 않으려 했소. 혈련마교는 원시마교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오히려 배화교(拜火敎)의 영향이 큰 상태였고, 당시에 수십 년 간에 걸쳐서 이룩한 중원공략의 대계(大計)가 무르익어가는 시점이었으니 더욱 그랬소. 그런데 뜻밖에도 당시의 부교주였던 현재의 교주가 조부님의 말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게 되었소.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교내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던 상당수의 고수들도 부교주의 말에 찬동하여서 결맹을 승낙하기를 요구했던 것이오. 나중에야 그들 대다수가 미리 천지신교에 포섭되거나 거짓으로 입교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소. 워낙 비세이다 보니 말이요. 천만 뜻밖의 일이어서 조부님은 경악하고 분노했지만 거부할 마땅한 방도가 없었소. 교주라 하지만 실제적인 권한은 제사장과 반반으로 나뉘어져있는 상황이었고, 이미 본가의 고수들 대부분도 제압되거나 포위된 상태였으니 말이오. 할 수없이 마지막 방법으로, 조부님은 비무하여 자신을 꺾는다면 더 이상 앞으로의 일에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소.“ “....” “단리형, 세상에 그런 더러운 배신자들이 어디 있소? 토막 쳐 죽일 놈들 같으니, 대대로 내려오는 교주를 배반하고 그따위 천지신교를 따를 생각이나 하다니. 제기랄, 나 같으면 전멸을 각오하고 아예 사생결단을 내버렸을 텐데.” 한동안 배신자들을 욕하다가 다시 계속해서,     “빌어먹을 일이지만, 조부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오. 자신뿐이라면 어떻게든 해보았겠지만, 딸려있는 수많은 수하들과 식솔의 목숨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밖에는 달리 할 수 없었다고 했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찾아온 천지신교의 교주라는 자와 싸우게 되었지만, 이미 조부님은 손발이 다 묶인 상황이었으니 제대로 무공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패배를 시인해야만 했소.” “그러면 교주가 누구인줄 알 것이 아니오?” 전혀 동정의 기미도 없이 곧바로 되묻는 단리유아에게 신경질이 난 척발척천이, “제기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는 항상 황금(黃金)으로 만든 면구(面具)를 쓰고 있는 놈을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이오? 현재의 교주라는 작자는 알고 있는 기미였지만, 결코 말할 생각이 없는 놈인데.” 척발척천의 말보다 그 당시의 상황에는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숨어있었다. 당시의 천지신교는, 지금도 많은 수가 아니지만, 전체인원이 오백 명에 못 미치는 소수정예의 비밀단체였다. 강호(江湖)를 독패하려는 야욕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 수가 너무 적어서 반드시 손발이 되어줄 하부세력이 필요했었는데, 그때 눈에 띈 것이 바로 혈련마경(血蓮魔鏡)을 분실하고 봉문 중에 있던 혈련마교(血蓮魔敎)와 무외신궁(無畏神宮)이었다. 잠입한 간자들로부터 무외신궁이 본래 혈련마교에서 떨어져나간 세력이라는 알자 더욱 군침이 돌게 된 그들은 반드시 혈련마교를 포섭 흡수하기로 결심했다. 현재의 천지신교의 태상교주였던 당시의 교주는 결심을 굳히자 바로 혈련마교를 포섭하려고 했지만, 척발척천의 조부였던 당시의 혈련마교주가 혈련마교가 최고인줄 아는 골수적인 반(反) 중원을 표방하는 자인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혈련마경만 되찾으면,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자신들 힘으로도 중원을 정복할 수 있을 텐데 고개를 숙일 필요가 뭐가 있냐고 여기는 사람이었으니 결코 천지신교에 굴복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교주를 암살하거나 강제로 쳐들어가서 굴복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척발가의 힘은 사실상 혈련마교의 사분의 일에 해당할 정도로 거대했는데, 만일 누군가의 암살로 교주가 죽게 된다면 오히려 척발가 쪽으로 일치단결하여 맞설 공산이 컸다. 쳐들어가서 죽이는 것도 원한을 겹겹이 쌓게 되는 일이고 서로간의 피해가 클 것이 분명할 테니, 그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하기를 바라는 천지신교로서는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되자 하나의 방법밖에 없었는데, 바로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해서 주요고수들을 포섭하거나 아예 휘하의 고수들을 입교하게 만들어 차차 세력을 장악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대대로 척발가(拓拔家)가 독점하다시피 하는 교주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장손가(長孫家)를 포섭하고, 나중에 중원에서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제사장(祭司長)을 설득하게 되자, 상황은 완전히 천지신교 쪽으로 기울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지신교가 결맹을 요구하였을 때는 이미 혈련마교의 운명은 결정되어버린 후였다. 단리유아는 한동안 척발척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었다. ‘삼십년 전이라면 전에 일행과 생각했었던 것과 비슷한 시기로군. 그렇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강호(江湖) 전체를 노렸다는 말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무슨 일일까? 아직 세력적으로 완전치 않다는 말인가?’ ‘세외의 지단과 혈련마교 만으로도 막을 만한 세력이 얼마 없을 텐데. 아니면, 뭔가 다른 문제가 있나?’   생각을 멈추고는 기분 나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척발척천을 향해서 다시 물었다. “일단 교주가 누구인줄 모른다는 것은 넘어갑시다. 하지만, 척발형의 말대로라면 이미 삼십년부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아직까지도 천지신교가 강호에 정식으로 개파(開派)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오? 또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된 것인지?”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 단리유아를 보며 척발척천이, ‘이 개자식은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어떻게 동정하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계속해서 묻기만 하지? 내가 지 호구인줄 아나? 으으, 정말 울화통이 터지는 것 같아서 죽겠네.’ 속으로는 울화가 치밀어 당장에라도 일어서고 싶었지만, 아쉬운 것은 그인지라 될수록 그런 기색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잠시 길게 숨을 내쉬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혈련마교의 실권이 천지신교로 넘어가서 처음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천지신교의 명령을 들어야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소. 하지만 세외지단이 하나둘 생기고 점차 세력이 커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천지신교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는데, 본래가 제사장의 실권이 절반 이상인 혈련마교인지라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어 이제는 천지신교는 거의 감찰(監察)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세력이 미약하게 되었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이오? 천지신교의 인물들이 다들 바보는 아닐 텐데, 그렇게까지 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오?” 이해가 되지 않아서 바로 되묻는 단리유아를 보며, 척발척천이 그것도 모르겠냐는 듯이 혀를 차며, “쯔쯧, 내가 말했지 않았소? 천지신교는 전체인원이 천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대부분은 그들의 총단에 머무르고, 실제 각지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오백 명도 안 되오. 그것도 오대군주(五大君主)가 움직이는 것까지 포함해서이고 진짜 고수들은 잘 나오지도 않는 상황이니, 실제 오대군주의 직속세력을 빼버리면 불과 이삼백 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오. 그러니 그 정도의 수로서 온 천하를 감독하는 것은 애시당초 글러먹은 일이오.” “그래도....” 되물으려는 단리유아를 가로막으며, “물론 태상교주가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또 틀릴 것이오. 하지만 폐관수련만 계속하고 있는 상태로서, 현재는 열성전(列聖殿)에 속한 몇몇 수뇌들 간의 합의로 중요사안이 결정되는 상황이오. 그러니 제대로 된 결정이 얼마나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겠소? 아무리 오대군주가 천하를 떠돌며 갖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는 일이오.” 척발척천의 말에 단리유아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렇게 여러 명이 결정하는 경우가 계속된다면, 조직의 관리에 있어서 문제가 있겠지. 특히 강호에서 일어나는 일은 시급을 요하는 경우가 많을 테니.’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천지신교가 혈련마교의 세력이 커져서 자신들을 벗어나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척발척천 역시 생각하고 있었다. ‘이자식이 그래도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네. 오히려 서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제기랄, 대충 넘어가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꼬치꼬치 파고들고. 아, 정말 살맛 않나! 이럴 땐 그저 계집을 끼고 뒹굴어야 제 격인데. 쩝쩝, 이런 황야에서는 어떻게 기분을 풀 수도 없고....’ 생각을 멈추고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계속해서 쏘아 부쳤다. “혈련마교의 세력이 눈덩이처럼 커진 것은 최근 몇 년 사이란 말이요. 그 이전에는 세외지단을 만들어나가고는 있었지만, 그 세력이라는 것이 미미할 정도였소. 하지만 하나둘 세외의 세력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점차 세력이 불어나고, 혈련마경(血蓮魔鏡)을 되찾은 삼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니 더욱 그 속도가 빨라지고 커지게 되었던 것이오. 단리형이라면 힘이 대등하게 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르겠소?” 척발척천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도 단리유아는 생각에 잠긴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의 말처럼 천지신교가 소수이고, 혈련마교가 여타 세외세력을 흡수하는 상황이 이어졌다면 현재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혈련마교의 세력이 더 커져가는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천지신교의 사람들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사사건건 맞서는 혈련마교를 멍하니 바라만보고 있었을까? 독술이나 사술 같은 것으로 주요고수들을 금제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다 생각을 멈추고는 척발척천을 향해서, “아까 척발형의 말대로라면 혈련마교는 거의 수족과 같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소? 장손가가 교주가 되어서 그들을 따른다면, 그렇게까지 되기는 힘들 텐데? 또 독이나 사술 같은 수단으로 금제를 가하여 주요고수들을 압박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흥! 장손 머저리들이 뭐가 대수요. 본래부터 제사장의 세력이 교주보다 큰 곳인데 말이요. 더욱이 그동안 천지신교와 무외신궁에서 혈련마교의 팽창을 막기 위해 혈련마경(血蓮魔鏡)을 돌려주지도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겨우 돌려주어서 반감이 심한 상태인데. 그리고 독술은 모르지만 사술같은 수단은 혈련마교의 사람들에겐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괜히 혈련마경이 강호십대중보(江湖十大重寶)에 낀 것 같소? 다 특별한 효능들이 있기 때문이지.” 척발척천의 말처럼 혈련마경은 그 자체로서도 마공(魔功)을 익히는 데 있어서 다시없는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최면의 효과와 더불어 어떠한 사술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혈련마교가 그렇게 혈련마경을 원한 이유도 단순히 교주령에 불과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효용이 있었는데, 척발척천도 다른 자들은 모르는 가장 중요한 쓰임새를 한 가지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척발척천이 말을 쏟아 붇듯이, “천외신교의 태상교주는 몇 년 전부터 현경(玄境)에 도전하기 위해서 폐관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 제대로 세력을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오. 게다가 무외신궁의 욕심많은 늙은 여우도 호시탐탐 천지신교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오. 이렇게 삼파의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한 상황이니 일이 제대로 될 수가 없소. 만일 이제라도 태상교주라는 인간이 현경을 이루고 폐관을 끝낸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몇 년 이내에는 서로 천하를 노리고 싸우게 될 것이 뻔하오.”       말과 동시에 속으로, ‘흐흐흐, 물론 그렇게 되려면 네놈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아무리 수가 적다고 해도 천지신교 놈들은 하나 같이 고수여서, 만일 세력을 집중하게 된다면 어떤 세력도 대항할 수 없거든. 그렇지만, 네놈이 분란을 일으키고 다닌다면 그놈들도 널 쫓아다니며 싸우게 될 테고, 그리되면 세력의 약화를 가져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아마 그때는 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걸?’ 척발척천의 말에 단리유아가 생각에서 깨어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척발척천을 향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천지신교와 혈련마교가 싸운다면 그 와중에 당신의 복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텐데.” 속마음을 감추고자 너스레를 떨며 척발척천이, “흐흐흐,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차려놓은 밥상을 앞에 두고 먼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없을 테니. 게다가 아직까지는 천지신교의 세력이 우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오. 전체적인 수에 있어서는 상대가 안 되지만, 그들 중 절반만 나서도 혈련마교의 총단은 쑥대밭이 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일 정도로 그들은 고수들만 모인 집단이오. 거의 대부분이 절정이상의 고수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오.” “그러면 내가 어떻게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어차피 단리형은 천지신교와 싸워야만 하는 입장이 아니오? 그들이 단리형을 적으로 생각하는 이상, 아무리 단리형이 싸우고 싶지 않아도 그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오. 그런 상황에서 우리 둘이 협력한다면 훨씬 천지신교를 없애는 것이 쉽게 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오. 단리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은근한 어조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라는 듯이 말하지만, ‘그때까지 네놈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어. 이곳저곳 끌고 다니며 실컷 이용해 먹을 생각이니. 흐흐흐, 네놈이 천지신교의 고수들을 없애고 나에게 반대하는 혈련마교의 머저리들도 없애면, 나는 그저 네놈을 쫓아다니며 이삭을 줍듯이 힘도 들이지 않고 세력을 흡수할 수 있을 테니. 이야말로 일석이조, 일거양득. 아니지, 너무 약하군. 일석삼조의 이득을 가져오는 것이지. 흐흐흐’ 상체를 구부리며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척발척천을 보면서, 단리유아가 검을 가로저으며, “아니, 그것은 당신만의 생각이겠지. 나에게는 크게 유리할 것도 없는. 일단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시오. 그런 다음에 내가 생각해보고 결정할 테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이오. 나는 단리형을 친구로 생각해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단리유아를 보고 다시 말을 바꿔서, “에, 아직 친구라 하기는 뭐하니.... 음, 최소한 같은 목적을 가진 동지로서 도와주고 싶기 때문이란 말이오! 이런 나의 순수한 마음을 몰라주고 의심만 하다니, 단리형의 마음은 너무 삭막하구려. 아, 나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천리 길을 한걸음에 찾아왔건만, 정작 내가 찾은 그 사람은.....” 두 팔을 벌려 손짓을 연발하고 얼굴은 우울한 기운이 가득한 채로 척발척천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한동안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만 보던 단리유아가 검을 들어 척발척천을 가리키며 말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그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오.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있듯이 우리 들은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사이요. 단지 일시적으로 같은 적을 두고 있을 뿐이지. 그러니 그런 입바른 넋두리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당신의 목적이나 분명하게 말하시오.” 단호한 단리유아의 말에 척발척천이 불만인 듯 잠시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리다가, “내가 혈련마교의 내부를 맡을 테니 단리형은 세외를 떠돌며 세외지단을 찾아 없애주시오. 그러면 동시에 두 가지 큰 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오? 단리형은 자신을 공격하는 천지신교의 세력을 미리미리 없애서 좋고 나는 가문의 복수를 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 아, 내게 누이동생이 있다면 단리형과 인연을 맺어줄 텐데 정말 아쉽게 됐소이다. 내 양친 모두가 일찍 돌아가신 터라, 그렇지 않았다면....” 슬쩍 곁눈질로 단리유아를 바라보다가, 무표정하게 검만 가로 젓는 모습에, ‘흥! 내게 누이동생이 있다고 해도, 내가 미쳤다고 너 같은 놈에게 누이동생을 주겠느냐? 빌어먹을 자식,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으으, 개자식 같으니라고! 지금은 고개를 숙이지만 나중에 혈련마교를 완전히 내 손아귀에 넣은 후에는 제일 먼저 네놈부터 없애버리겠어!’ ‘제기랄, 네놈 얼굴을 더 바라보다간 나도 내 성질을 못 참고 폭발할 지경이니 빨리 말해주고 떠나마!’ 속으로는 온갖 욕설을 퍼붓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변화 없이 다만 아쉽다는 표정으로, “정말 단리형과는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데....” “....” “내 솔직히 말하리다. 나에겐 복수도 중요하지만, 혈련마교를 되찾는 것이 더 중요하오. 난 말이요, 혈련마교의 교주가 된다 해도 중원에까지 세력을 확장할 생각은 절대 없소. 세외만 해도 얼마나 넓은데 중원까지 노린다는 말이오? 너무 넓어 제대로 지배하기도 힘들 텐데. 난 혈련마교의 삼제자이니 단리형이 도와준다면 복수를 하고 혈련마교를 되찾는 길은 훨씬 쉬어질 것이라 생각하오. 만일 내가 교주가 된 뒤에도 중원을 노릴까 하는 것이 걱정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절대로 중원을 넘보지 않을 것을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다. 그러니 내가 세외의 세력과 천지신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여러 가지 도움을 줄 테니, 단리형은 제발 나를 도와 그들을 찾아 없애주시오. 그러면 나중에 단리형이 천지신교와 본격적으로 싸우게 될 때에 나도 도와주겠소.“ 간절한 표정으로 호소하는 척발척천을 바라보며 단리유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자의 목적은 그 자신의 말처럼 아마도 나를 어떻게든 이용해서 혈련마교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런 후에는 틀림없이 이자도 천하를 노릴 생각이 분명해!’ ‘지금 이 자리에서 이자를 죽여 버릴까? 이자도 천하를 노리는 효웅(梟雄)이니 필시 천하를 어지럽히게 될 텐데. 게다가 아무래도 나중에 나와 다시 부딪칠 것 같은데....’ 힐끗 쳐다보고 나중의 우환을 미리 제거할까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꿔서, ‘아니야. 지금 이자를 죽이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을 거야. 변변한 세력도 없는 나에게 있어서 지금 이자의 도움은 절실하다고 할 수 있으니. 나 혼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고, 게다가 만일 적들에게 포위라도 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겠지. 또 떠나갔던 일행들이 어느 정도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오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것도 우리의 뜻대로 될 경우에 한해서고 만일이라도 일이 잘못되면 무한정 시간이 늦추어질 테니, 적어도 그동안에 세외지역 만이라도 정리를 해야 어느 정도 대등하게 싸움을 시작할 수 있어.’ ‘이자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어차피 내게도 필요하고 당장에는 손해가 없으니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군. 나중에 어떻게 될지라도....’ 그러다 문득 앞으로의 일을 그려보며 절로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정말이지 이런 쓸데없는 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것으로 무의미하게 인생을 허비하다니, 대관절 강호를 차지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지도 못하고 이런 일에 붙들려야만 하다니....’ 단리유아 자신이 느끼기에는 이런 세력다툼이라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로만 보였던 것이다. 자신도 그런 허망한 일에 끼어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절로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잠시 후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서 기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척발척천을 마주보며,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겠소. 단, 천지신교를 없애는 일에만 나설 것이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곳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단리유아의 말에 척발척천이 잠깐 눈썹을 찌푸리다가, 곧 표정을 고치고 크게 웃으며, “하하하! 정말 고맙소, 단리형. 나를 도와주겠다니 내가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를 것이오. 아, 그런데 우리의 동맹을 축하할 술이 없구려. 이런 때에는 술을 퍼마시며 계집들을 끼고 우의를 다져야하는 것인데.” “그런 것은 필요 없으니, 각각의 세력이나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나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시오.” “아니, 그래도.... 조금이라도 즐기는 것이. 이대로 반나절 정도 말을 달리면 마을이 나오는데 거기에 들러서 다시 얘기하는 것이?” “나는 술을 마시지 않소. 그리고 여자들과 어울리고 생각도 없으니, 내겐 이곳이나 그곳이나 마찬가지요.” 단리유아의 무뚝뚝한 말에 척발척천은 절로 인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가는지 모르겠네. 아무리 말뿐인 동맹이라 하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서로 내색하지 않고 그 결맹을 다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인데.’ ‘제기랄 놈 같으니, 어차피 어련히 안 알려 줄까봐 재촉이나 하고. 아, 이 자식과 만난 뒤로는 뭐든 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피곤하기 짝이 없군. 젠장할, 이놈은 정말 다시는 상종하지 못할 인간이야.’ ‘어떻게 말이 통해야지 설득이라도 할 텐데, 도대체가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묻기만 하니.’ 생각을 멈추고 그때까지 주시하고 있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현재의 상황과 세외지역의 각 지단에 대해서, 천지신교의 고수들이 어디에 어떻게 포진되어 있는지 설명했다.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 ‘흐흐흐, 네놈의 생각이 꼭 천지신교만 건드리겠다는 것을 모를 줄 아느냐? 흥! 네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넌 내가 전해주는 대로만 하기만 하면 돼! 그리되면 넌 나에게 반대하는 자들까지 없애야 할 걸?’ ‘네가 휩쓸고 지나가면 나는 구원자처럼 나타나 그들을 흡수하는 것이지. 그리되면 오래지 않아서 혈련마교는 나의 것이 될 것이고, 그 이후에는.... 흐흐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 운명(運命)의 조우(遭遇) Ⅰ-5 한 시진여가 흘러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정리되었을 때, 척발척천은 말을 타고 그대로 떠나갔다. 겉으로는 아쉬운 기색이 가득한 채로 작별의 인사를 했지만, 실제로는 한시라도 빨리 떠나가는 것을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을 타고 십여 리를 벗어났을 때, 명전제갈(明全諸葛) 위후수(魏厚垂)와 일단의 서장지단(西藏支壇)의 고수들을 만나게 되었다. 잠시 명전제갈의 질책과 잔소리가 이어진 후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교자에 들어가서 단 둘이 마주했을 때, 척발척천이 한참 동안 욕설을 퍼부으며 단리유아와 만난 일을 떠들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가 흘러 욕설 반 푸념 반이 뒤섞인 척발척천의 얘기가 끝났을 무렵, 말없이 듣고만 있던 명전제갈이 물었다. “그래, 주군께서 직접 그와 만나보니 어떠했습니까?” “제기랄, 내 생전에 그런 인간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시종일관 별다른 동요가 없는 목석같은 놈이라니. 게다가, 젠장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기세에 눌려 나의 의도대로 상황을 이끌어갈 수가 없었지. 그동안 무공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막상 나보다 강한 자라는 생각이 들자 알게 모르게 말의 실수가 잦아지더군.” 얼굴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대답하는 척발척천을 바라보며, “그러길래 제가 뭐랬습니까? 머리를 쓰는 것도 좋지만, 무공 연마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막상 어려운 상황에서는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구요.” “나도 알아, 나도 안다구. 제기랄, 괜히 그놈을 만나서....” “주군이 천하를 노릴 생각이신 이상에는 적어도 상대와 맞설 만한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단리유아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천지신교의 태상교주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 “알았어, 알았으니 지겨운 잔소리는 그만 하게. 빌어먹을, 오늘은 내 생애 최고로 재수 없는 날인 것 같군.” 고개를 휘저으며 듣기 싫다는 듯이 소리치는 척발척천을 바라만보다가, 잠시 후 명전제갈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어쨌든 그자와 만나서 저희의 뜻대로 되었으니, 그 점은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자도 미래를 보았을 때는 큰 적이고, 서장(西藏)을 차지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희 단독으로 일을 벌인다면 아무래도 피해가 커질 것이고, 천지신교의 의심을 피할 수도 없을 테니 현재로는 그자의 도움이 필수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 나도 그놈과 말하다가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네. 하지만, 원대한 목적이 있으니 꾹 참을 수밖에는 없었지.” 말끝에 속으로 ‘싸웠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지만’ 이라고 되뇔 때, 명전제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잘 하셨습니다. 그런 자는 독불장군과 같으니 언제라도 제거할 수 있지요. 지금은 내버려두는 것이 몇 배 이익이니, 최소한 혈련마교를 되찾을 때까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서 우리를 믿게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 그것이 좋겠지. 지금은 말이야.....” 잠시 더 단리유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문득 척발척천이 화제를 전환하여, “총사, 혈련마경(血蓮魔鏡)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진전이 있나?” 약간 뜻밖인 척발척천의 말에 명전제갈이 백우선을 부치며, “주군께서도 그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시일을 충분히 두고 하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갑작스럽게 그 일을 꺼내시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한시라도 빨리 무공을 높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자네의 말마따나 태상교주는 더욱 강할 텐데, 단리유아 놈과 비교해도 지금의 내 수준은 너무 낮네. 본래는 혈련마교를 되찾았을 때나 또는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혈련마경을 빼돌릴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아. 그때는 너무 시간이 늦었을지도 모르니.” “주군, 그것이 무공을 높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잘못하다간 괜히 일만 커질 수도 있는 일인데?” 교주령인 혈련마경이 마공을 익히는 자에게는 보물이라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일순간에 무공을 높여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명전제갈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척발척천이 한동안 기묘한 웃음만 흘리다가, “흐흐흐, 다들 혈련마경이 보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용도는 모르고 있지. 대대로 본가의 가주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비밀로 이 세상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 자네도 더는 묻지 말고 그것을 어떻게든 빨리 손에 넣을 방도를 강구해 보게.”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일을 서두르도록 재촉만 한다. ‘본가가 교주자리에서 물러났지만 혈련마라혈지도(血蓮魔羅血池圖)는 넘겨주지 않았지. 시일이 너무 흘러 지금에 와서는 단순이 오래된 그림 정도로 여기고 있지만, 혈련마경(血蓮魔鏡)과 함께 있으면 또 이야기가 틀려지는 것이지. 본가가 대대로 혈련마경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것도 그런 이유인데, 빌어먹을 장손가 놈들이 배반해서 중간에 일이 틀어진 것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능히 천지신교의 태상교주와도 싸울 수 있을 텐데. 놈이 아무리 천마삼절(天魔三絶:천마노조-천패무조의 최고 무공 세 가지)을 얻었다고 해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는 무공을 진작에 얻을 수 있었을 터인데. 제기랄 것들 때문에.....’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미소 짖고 있는 척발척천을 바라보며 명전제갈이, “주군의 명이시니 서둘기는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혈련마경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직 교주만이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관과 고수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설혹 알아낸다고 해도 탈취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에 척발척천이 오래전에 교주의 희첩(姬妾)중의 하나로 들여보낸 여인을 떠올리며, “제기랄, 그년은 여태 뭐하고 있는 거야! 그까짓 골골하는 늙은이 하나 휘어잡지 못하고. 그동안 그년을 위해서 허비한 시간과 노력이 얼마인데?” “아무리 우리가 공을 들인 미인계를 쓴다 해도 교주 역시 수십 년간 음모와 귀계 속에 산 사람인데 그런 것을 쉽게 발설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주군께서 교주위에 오르기 전에는 탈취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말하는 명전제갈의 말에 척발척천이 답답하여 소리치며, “자네는 내가 혈련마교를 되찾는데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하나? 아마도 최소한 삼년이상은 걸릴 것이네. 그때서야 혈련마경을 되찾으면 너무 늦게 되는 것이 아닌가? 천지신교의 태상교주라는 자만 해도 현경(玄境)에 도전하고 있고, 저 단리놈도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그제야 명전제갈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느긋한 얼굴로, “흠, 그렇기도 하군요. 최소한 서장(西藏)을 완전히 장악하고 다른 세외지단 두 곳 정도는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저도 급한 것을 아니 방도를 더 강구해 보겠습니다.” “그래 어떤 방법으로 할 생각인가? 아무래도 그 계집은 별로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곧바로 되묻는 척발척천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음, 교주(敎主)와 제사장(祭司長)을 싸우게 만드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다. 지금도 불화가 심하지만, 공개적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지요. 하지만 하나의 계기가 이루어진다면 대판 싸우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그들 모두 우리에게는 거추장스런 걸림돌에 지나지 않으니 이 기회에 될 수 있는 대로 세력을 깎아내리는 것이 좋겠지요.” 명전제갈의 말에 척발척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이 서로 싸우게 만들겠다고? 그렇게 된다면야 우리에겐 더없이 좋겠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까? 그놈들도 내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있을 텐데?” “그렇지요, 지금도 본단의 세력이 지단(支壇) 중에서 가장 커서 사뭇 경계의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일을 만들어 서로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서 주군의 사형제이신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암살(暗殺)한다면 어찌 될까요?” 슬쩍 미소 지으며 말하는 명전제갈의 물음에 척발척천이 맞장구를 치며, “흐흐흐, 그래 그렇게 한다면 서로 대놓고 싸우게 되겠지. 현재로서도 후계자위를 노리고 대립하고 있고, 또 더 팽창하느냐 이 정도로 만족하여 수성에 전념하느냐로 팽팽히 맞서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 자네 생각에는 어떤 놈이 좋을 것 같은가?” “제 생각에는 어느 쪽도 상관없다고 여기지만, 그래도 장손무기(長孫無忌) 보다는 태주천(泰周天)쪽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데 주군은 어느 쪽이 좋을 것 같습니까?” 명전제갈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척발척천이 상체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속삭이듯이, “내 생각도 자네처럼 태주천 쪽이 쉽다고 생각되네. 호위하는 자들도 상대적으로 적고 태주천 그 백정 놈도 장손무기보다는 무공이 떨어지니 말이야.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장손무기를 먼저 없애는 것이 좋겠네.” “쉽다고 하시면서 왜 장손무기를 노린다는 말입니까? 그자는 무공이 강할 뿐 아니라 매사에 빈틈이 없는 인간이라 쉽지 않을 텐데요.” 명전제갈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흐흐흐, 물론 겉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태주천을 암살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어. 제사장은 초혼술(招魂術)을 쓸 수 있으니 말이야. 게다가 제사장 쪽의 세력이 더 강한 현재로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복수하려고 전력을 다할 테니 아주 일방적인 싸움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커. 반대로 장손무기가 죽는다면 교주 쪽도 복수하고자 할 테지만, 힘이 부족할 테니 우리에게도 손을 벌리게 될 것이네. 그러면 우리는 적당히 도와주는 척 하면서 두 세력을 쉽게 소진시킬 수 있을 것이네. 어떤가, 내 생각이?” 척발척천의 말에 명전제갈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조용한 목소리로, “허허, 확실히 주군의 생각이 저보다 낫게 보이는군요. 하지만 말입니다. 장손무기를 암살하기란 훨씬 어려운 것임을 주군도 아실 텐데요?” 은근히 약 올리는 것 같이 되묻는 명전제갈의 말에, 척발척천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물론 내 생각이 자네보다 더 낫지. 그리고 그 일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어. 겉으로는 허점이 없어 보이는 인간이 오히려 더 큰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 장손 그자식도 그런 약점이 하나 있지. 흐흐흐, 나중에 내가 알려주는 대로만 하게. 그러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테니.” 한동안 그 문제를 두고 서로 이야기하다가, 척발척천이 다시 화제를 전환해서, “지금쯤 천지신교(天地神敎) 놈들은 소뢰음사(少雷音寺)의 미친 중놈들과 만나고 있겠지?” “흠, 칠일 전에 출발 했으니 거의 도착했을 수도 있겠지요. 전력으로 달려가라고 했으니.” 이에 이제부터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서, 척발척천이 즐겁기 그지없다는 듯이, “흐흐흐,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자네도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단리 놈에게도 정보를 확실히 전해주게.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줄 아주아주 고마운 인간이니, 철저하게 부려먹기 위해서라도 무사해야지. 흐흐흐, 나중에는 모르지만....” “이미 멀리 뒤따르라고 했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지만, 그자가 우리 뜻대로만 따를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성사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말처럼, 아무도 내일의 일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니 우리도 만일을 대비해서 더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 맞아! 혹시 모르니 더 준비를 해야겠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으니.” 그렇게 두 사람이 앞날을 그리며 안면 가득 미소 지은 채,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편, 척발척천이 떠나간 뒤로, 단리유아는 희미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척발척천이 여러 상황을 설명해주어서 어느 정도 현재의 정세(情勢)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고, 설혹 그가 알려준 대로 한다고 해도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였다. 신이 아닌 이상 세상의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없으니 언제 뜻밖의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자의 말대로라면 천지신교(天地神敎)는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겠군. 혈련마교와 무외신궁, 천지신교가 연합한 상태이지만, 완전히 하나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고 생각되니. 게다가 각 문파의 내부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으니.’ ‘하지만, 태상교주라는 자가 현경(玄境)에 들어 다시 나타난다면 그런 문제도 사그라지겠지. 이리 되면 그자가 연공을 끝마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군. 게다가 그와 맞서려면 적어도 나 역시 현경에 달하지 않는 한, 승산은 하나도 없다고 보아야겠지.’ 실제 현경(玄境)의 고수를 막기 위해서는 적어도 화경(化境)의 고수 오십 명이 미리 진법(陣法)을 펼쳐 합공해야만 한다는 것이 강호(江湖)의 통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으니, 그 가설이 반드시 맞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더 적은 수로 막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그런 숫자적인 우세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몰랐다. 전자라면 그래도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 후자라면 깨끗이 포기하고 세월이 흘러가기만을 바래야할 것이다. 하지만 탈겁(脫劫)하여 갑작스럽게 등천하지 않는 이상, 현경(玄境)에 달한 이후로 이백년의 삶은 보장된다고 알려져 있으니 세월이 흘러 변하기를 바라는 것도 꿈에서나 바랄 일일 것이다. 그동안에 강호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 테니. ‘그자가 천패무조(天覇武祖:천마노조)의 무공을 얻었다고 볼 때, 과연 지금쯤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있을까? 나보다 강할까? 아니면, 벌써 현경(玄境)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최소한 삼십년 전에 화경에 올랐다고 보면 현재는 거의 막바지에 달했을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본래 현경의 경지는 폐관하여 열심히 수련만 한다고 해서 결코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아니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무리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 중의 한명인 천패무조의 무공일지라도 단순히 비급(秘?)에 쓰여진 것이 모든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책으로는 초식과 구결은 전할 수 있겠지만, 현경에 이르는 깨달음까지 전해줄 수는 없을 것이니. 현경에 이르는 길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알려져 있으니, 비급자체만으로 볼 때는 현경에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곳곳에 그런 경지에 이르는 방법이나 어떠한 상태인지에 대해서 써놓았을 테니, 아무래도 현경에 이르기는 보다 쉬울지도 몰랐다. 그와 반대로, 그러한 것이 딱히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경우도 있었다. 사람마다 그 특성과 처해있는 환경이 다르고, 그런 것을 아는 것이 오히려 더 높은 벽을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하면 최소한 그자 역시 수어검(手御劍)은 넘어섰다고 보아야겠군. 아니면 목어검(目御劍)까지는 이룩했을지도....’ ‘아, 시간은 촉박한데 할 일은 많고. 아무리 대의(大義)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제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취해야 할 테니 깨달음에 다가서기란 더욱 어려울 텐데....’ 태상교주와 앞날의 일로 머리가 복잡할 때, 문득 한 가지 일에 생각이 미쳤다. ‘아, 동파교(東巴敎)의 동파무전(東巴武典)이라도 한번 볼 수 있었다면.... 무공구결이 아닌 다른 것이라도....’ 얼마 전 백지(白地)까지 찾아갔다가 천지신교의 세력들과 싸우고 그냥 지나친 것이 단리유아는 후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었다면 자세히 조사해볼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동파문(東巴文)을 해독할 사람도 없고 주변의 상황도 어려우니 돌아갈 수도 없었다. 태상교주가 무공을 완성할 시간은 가까워지고 있을 터인데, 자신의 무공은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자신도 현재 수어검(手御劍)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아직도 백 장에 못 미치는 칠십 장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흑아검(黑牙劍)을 뽑아서 어검술(御劒術)을 펼쳤다. 먼저 오십 장 밖으로 날린 다음 회수하고, 다시 검을 날려 점점 거리를 벌여나갔다. 경홍(景洪)의 공작호(孔雀湖)변에서 한 가지 깨달음으로 수어검에 든 지 넉 달이 가까이 오는데, 한순간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천룡사에서 마주쳤던 육맥신검(六脈神劍) 덕분에 보다 효과적으로 펼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거리가 멀어질수록 제어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시간도 더 많이 들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심신이 흩어진다면 그대로 어검술은 중단이 될 것이고, 펼치는 자신도 내상을 입게 될 것이다. 물론 완성이 되어 숙달된다면 그렇게까지 심신을 집중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현재에 있어서는 아무런 삿된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의 상태에서 펼쳐야 만이 제대로 펼칠 수 있었다. 거의 반 시진 동안 수련한 것에 불과한데도 온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였고, 과도한 심력의 소모로 인해서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아직도 멀었군. 육맥신검(六脈神劍)의 진기 운용으로 조금 더 쉬어졌다고는 해도 역시 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소모되는군. 불과 반 시진 밖에 펼치지 않았는데도, 탈진할 정도이니. 게다가 한계에 이를 때까지 전력을 다해서 펼치지 않으면, 도대체 진전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니.’ ‘적들이라도 부딪친다면 제대로 대응도 못할 정도이니, 보통 때에는 제대로 수련하기도 어렵고. 휴, 수어검(手御劍)을 완성하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될 것 같은데,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서 완성하는 데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시간이 여유롭고 다른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혹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자를 따라잡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현경(玄境)으로 가는 깨달음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다고 해도 아예 단계를 무시하거나 기본적인 수련을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니....’ ‘내공이 특수한 나도 이럴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걸릴까? 아마 일각 이상 계속하기도 힘들 테니 몇 배로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휴, 어렵구나, 어려워.’ 기진맥진 한 채 털썩 주저앉아 조식을 취한 후에 무공의 단계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었다. 최소한 목어검(目御劍)에 이르지 않는 한, 수어검(手御劍) 자체로는 화경(化境)의 고수를 공격하는 데에도 별 소용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수어검은 검기(劍氣)를 둘러싸서 검을 날리는 것일 뿐, 실제적인 파괴력에 있어서는 별 볼일 없었다. 만일 실전(實戰)에서 같은 화경의 고수에게 수어검을 펼쳤다가는 그대로 목숨 줄을 내맡기는 것과 같았다. 수어검을 펼치는 동안에는 다른 곳에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없으니, 그것도 완성한 상태에서야 어느 정도 여유가 있겠지만 현재의 자신의 상태로는 피할 수도 없이 그대로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 면 때문에 실제 실전에서는 그리 쓰이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누구나 어검술에 목을 매는 이유는 그 자체로도 현경(玄境)으로 올라가는 확실한 단계를 나타내주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 어검술 자체가 고도의 정신력(精神力)과 정밀한 내력(內力)의 운용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이 되면 될수록 진기(眞氣)의 집중도, 초식(招式)의 세밀한 변화, 내력(內力)의 자유로운 수발 등에 있어 급격하게 진전을 이루어서, 같은 경지의 사람이 아닌 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었다. 일단 수어검(手御劍)까지는 정신력보다는 기(氣)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어하느냐에 달려있지만, 점차 상승의 경지로 갈수록 정신력 쪽으로 우선권이 넘어가 심어검(心御劍)에 이르렀을 때는 단지 기는 처음에만 최소한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때는 마음이 이는 곳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검이 형성되어, 순간적으로 목표를 꿰뚫고 지나가 파괴되지 않을 것이 없었다. 설혹 기관으로 둘러싸인 곳에 꼭꼭 숨더라도 거리와 장애물에 지장을 받지 않으니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심어검(心御劍)의 경지는 현경에 이르러서야 가능하다고 하지만, 보통사람은 평생을 가도 불가능한 경지였고 실제 중원에서도 현경에 이르렀다고 확인된 것은 고금오대고수 중에서도 두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소한 수어검(手御劍)만 이르러도 같은 화경의 고수라도 일대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 일단 화경의 경지에 이른 자는 누구나 그 경지를 바랬다. 하지만 그 수어검 역시 십만 명에 한명 정도 이를까 말까한 경지여서, 강호역사를 통틀어 보아도 완성한 자는 백 명을 넘지 못할 정도였고 대부분은 그 초입에 머무르는 경우가 다였다. ‘휴, 아직도 첩첩산중이요, 천만리 길에 한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군.’ ‘시간, 시간이 문제로구나. 누가 더 먼저 현경(玄境)에 드느냐가 최후의 순간에 강호(江湖)의 운명을 결정하겠군. 나의 운명(運命)도.’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갖가지 어려움만이 뇌리에서 들고 일어나, 회의적이고 절망적인 생각만 더욱더 부추기고 있었다. 자신만의 깨달음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서도, 강호를 위하여 주변을 돌아보아야하는 상황에도, 갖가지 난관이 가로막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늦었으니 포기해!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보아야 별무소용일걸?’ ‘남들이 죽든 살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세상이 네게 준 것도 없는데?’ ‘갑자기 웬 성인(聖人), 협객(俠客) 흉내를 내려고 그러시나? 그저 그런대로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아?’ ‘크크, 나에게 모든 걸 맡겨!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내가 모든 걸 알아서 해줄 테니 말이야!’ 조롱하는 소리, 책망하는 소리, 유혹하는 소리.... 갖가지 목소리가 메아리쳐 답답한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고개를 휘젓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서성일 때, 때마침 불어오는 차가운 북풍(北風)이 들끓는 심화(心火)를 어루만져 주듯이 전신을 휩쓸며 지나갔다.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쳐다보니, 한밤중인데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여서 달빛과 별빛이 너무나 밝았다. 크고 작은 수많은 별들이 모여서 총총히 온 산하를 밝게 비추는 모습이, 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로 자신을 보아달라는 듯했다. [설정 & 참조] [1] 혈련마라혈지도(血蓮魔羅血池圖) : 혈련마경(血蓮魔鏡:본명 반혼경(返魂鏡))과 더불어 배화교(拜火敎)의 최고 보물로서. 본래 명칭은 불멸아함천지도(不滅阿含天地圖)이지만 혈련마교에 흘러들어가서 명칭이 변하게 되었음. 사람의 피로써 그려진 그림으로, 핏빛의 연못을 배경으로 피어오르는 천개의 혈련(血蓮)이 족자 내에 가득한 그림. 혈련마경을 그 그림에 비추면 배화교의 최고 무공인 마라아함천지수라공(魔羅阿含天地修羅功)이 나타나게 되는데, 보는 사람의 심성(心性)에 따라서 신공(神功)이 될 수도 마공(魔功)이 될 수도 있는 신비한 무공임. 그러나 실제로는 그림의 사악함에 빠져 마기(魔氣)에 물들거나 주화입마로 미쳐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신공이 나타난 경우는 없었음. 배화교가 멸망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로는, 혈련마경을 쥐고 운공하여야만이 연성 속도가 빠르고 극성에 달할 수 있어서 다들 원래부터가 마공으로 생각하고 있었음. 삼백년 전 무상대선사(無上大禪師)가 강제로 혈련마경을 빼앗아 가버린 이후로는 아무도 그 무공을 찾거나 터득한 사람이 없음. 당시 현경(玄境)에 이른 무상대선사와도 반 시진 넘게 맞서 싸울 정도로, 현경에 이르지 못한 이상 막을 수 있는 무공이 거의 없을 정도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소뢰음사(少雷音寺)와의 결전(決戰) 소뢰음사(少雷音寺)와의 결전(決戰) 1 앞일에 대한 생각으로 잠들지 못한 하룻밤이 지난 다음날 아침 일찍, 몸보다 마음이 지친 상태로 다시 길을 떠났다. 말 등에 앉아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며 생각에 잠겼다. 천지신교의 세력을 없애거나 서장(西藏)의 세력을 모아서 천지신교에 대항하게 만드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척발척천과의 만남으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서장에 위치한 지단도 없앨 생각이었지만 지난밤의 약속으로 이제는 오히려 서로 도와야할 상황이었다. 마음 한 구석은 내키지 않았지만 현재와 같은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는, 비록 미래에는 적이 될 것이 확실함에도, 그와 힘을 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가 근본적으로는 다른 목적을 지닌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상황이었지만, 천지신교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는 일단은 동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상황이 급변하면 서로가 등을 노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자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이용해 소뢰음사(少雷音寺)까지 끌어들여 싸움을 붙일 심산이겠지. 나도 소뢰음사와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문제는 천지신교의 고수들과 그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부딪칠 가능성이 높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나에게는 소뢰음사가 끼어들지 않고 전력을 보전한다면, 미래에 오히려 그자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테니 싸우지 않는 것이 훨씬 유리할 텐데.... 내가 보기에 그자의 세력도 만만치 않게 보이고, 야심 역시 끝 간 데 없을 것처럼 보이던데.’ ‘정말 복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이군. 한쪽을 생각하면 다른 쪽이 걸리고 다른 쪽을 생각하면 또 반대로 되니, 어느 쪽으로 향하는 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길인지 모르겠구나.’ 소뢰음사와 부딪치고 싶지 않지만, 상황을 보았을 때는 피할 방도가 딱히 없었다. 천지신교 자체도 그들을 이용해서 자신을 상대할 생각이 분명할 테니, 그들과는 싸우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될수록 천지신교의 고수들과만 싸울 계획이지만, 척발척천도 자신의 생각을 모를 리 없으니 반드시 서로 싸우게 만들려할 것이다. 오히려 척발척천만 도와주는 일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보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태로서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본래의 목적중의 하나인 천지신교에 대항할 세력의 결집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척발척천의 설명대로라면 서장(西藏)의 문파 중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문파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였던 것이다. 현재 찾아가고자 하는 백본파(白本派)나 성모궁(聖母宮), 일마새(逸馬塞)를 제외하곤 모두가 서장지단이나 소뢰음사에게 잠식된 상태였는데, 그나마 그들 세력도 그리 크지 않는데다가 강호 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 문파들이었다. 그러니 실제로 힘을 모은다 해도, 그렇게 될 가능성도 커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다. ‘만일 포달랍궁(包達拉宮)이라도 무사한 상태였다면 어떻게든 해볼 방도가 있겠지만, 이미 달라이대라마를 비롯한 주요 수뇌부는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고 소뢰음사에게 항복한 상태이니....’ ‘백본파(白本派)는 종교적인 면이 강하고, 성모궁(聖母宮)은 아무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일마새(逸馬塞)는 광할한 서북부의 평원지역에 위치해있지만 사실상 일개 토후(土侯)의 세력으로 강호와는 별 상관이 없으니....’ 뇌리에 떠오르는 비관적인 생각을 멈추고, 일단 길을 떠나 백본파(白本派)에 들러서 강호의 정세를 얘기하고 같이 협력하고자 설득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또 포달랍궁에도 잠입하여 수뇌부가 어느 곳으로 피신했는지도 알아보기로 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아야할 것이다. 먼저 찾아갈 생각인 백본파는 현재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부터 서쪽으로 오백여리 떨어진 아로장포강(雅魯藏布江) 남단의 랑장(朗長)에 있었다. 이 백본파는 서장(西藏) 전통의 종교인 본교(本敎)의 중심세력이었다. 본교는 만물에 정령이 있다는 정령신앙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에 따라 이들의 무공의 특성도 주술 쪽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본래부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기 때문인지 강호(江湖)의 일에 연관되는 경우도 드물었고, 실질적으로도 본교(本敎)의 교단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특별히 자신들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는 한 다른 세력과 싸우려하지도 않을 사람들이었다. 찾아가 천지신교가 얼마나 위협적이고 사악한 세력인지 설명할 생각이지만, 여태까지 드러나지도 않는 세력을 낯선 이방인이 얘기할 때에 과연 믿어줄지 자신으로서도 의문이었다. 가는 길에 서두르지 않고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수련을 계속해나갔다. 얼마가지 않아서부터는 수련할 시간도 없을 테니 그동안만이라도 수련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예상으로는 소뢰음사의 분사인 살가사(薩迦寺)가 위치한 일객칙(日喀則)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래도 여유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 천칠백여 리 떨어진 곳이니, 대략 보름에서 이십일 정도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닷새 후 백본파에 들려서 장문인과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조차 들을 수 없이 자리를 물러 나와야 했다. 장문인을 만날 수 없어서 장로에 해당하는 자들에게도 대충 설명했지만 한 결 같이 자신의 이야기는 믿으려하지도 않았다. 천지신교라는 단체가 천하를 노리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드러난 적이 없었고,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소뢰음사가 서장의 패권을 차지했다는 사실 뿐이었던 것이다. 낯선 이방인이 찾아와 뚜렷한 물증도 없이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단체를 언급하니 미친 것이 아닌지, 아니면 뭔가 다른 목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경계심만 잔뜩 일으킨 채,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도 없이 쫓아내려고만 했다. ‘이들은 어째서 자신들만 생각할까? 당장 눈앞에 그런 일이 도래해야 나설 생각인가?’ ‘천지신교(天地神敎)가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후에는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한 단체만 남기고 모두 없애버릴 것이고, 남는 단체라도 제대로 활동도 하지 못할 것인데.’ ‘휴, 예상 못한 바는 아니지만 장문인을 만나서 대화도 나누지 못하다니.... 조금의 힘이라도 모아야 할 상황인데 처음부터 이러니 앞으로 일의 전망도 밝지 않는 것 같군.’ 실망한 채로 물러나 다시 길을 떠났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며칠이고 근처에 머물러 설득하려 노력해보기도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일도 급했다.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백본파를 물러나온 후에 다시 길을 떠나, 칠백여리 떨어진 랍살(拉薩)에 도착한 것은 시월 이십이일이었다. 도착한 그날 저녁이 되자마자 은밀히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담을 넘어가 달라이대라마의 행적을 알아보았지만, 겨우 알 수 있었던 것은 천축(天竺)으로 달아났다는 소리뿐이었다. 포달랍궁을 떠나 다시 길을 떠나며 앞으로의 여정(旅情)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동안에 척발척천으로부터 몇 번의 연락을 받아서 소뢰음사와 천지신교의 고수들 삼백여 명이 살갈(薩喝)과 일객칙(日喀則) 사이의 랍자(拉孜)에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생각은 양쪽으로 포위하여 공격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일객칙에 살가사(薩迦寺)가 있으니 그 사이의 랍자(拉孜)에서 공격한다면 어느 쪽으로 도망쳐도 쉽게 포위하여 공격할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 ‘흠, 어떻게 하지? 그대로 갔다가는 범의 아가리에 들어가는 격인데. 차라리 우회하여 먼저 성모궁(聖母宮)을 찾아갈까? 아니면 이대로 북서쪽으로 향해 일마새(逸馬塞)로 가는 것이 나을까?’ ‘랍자(拉孜)에서 싸우는 것은 너무 불리한데. 아무리 척발척천이 정보를 전해준다 해도,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한참 생각해보다가 일단 우회하여 성모궁(聖母宮)을 찾아가기로 했다. 성모궁의 위치를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어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적들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보다는 몇 배 나을 것이다. 척발척천도 자신이 랍자에서 싸우기를 바라겠지만, 적들의 행동을 미리 알 수 있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불리할 것이 뻔한 곳에서 싸우는 것은 바보짓에 불과했다. 일객칙(日喀則) 근처까지는 그대로 갔다가, 방향을 틀어 동남쪽 희마랍아산맥(喜馬拉雅山脈)의 주봉인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에베레스트)으로 향하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진로가 바뀌면 그들도 당황하여 포위망이 흐트러질 것이고, 이만 척이 넘어가는 희마랍아산맥의 설봉(雪峰)들 사이에서 싸운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점이 많을 것이다. 랍살(拉薩)을 떠나면서도 말이 가는 대로 내버려둔 채 주위의 풍경을 구경하거나 이따금 멈추어서 수련을 할 뿐으로, 계속해서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 랍살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신을 감시하는 자들이 멀리서 뒤따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두고 계속해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귀찮기는 했지만 어차피 쉽게 떨쳐버리기도 힘들고 현재로서는 자신의 행적을 숨길 필요가 없어서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이상 내버려두고 있었다. 일단 일객칙(日喀則)까지는 필요하니 그동안은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둘 생각이었다. 주변은 넓은 지역에 비해서 사는 사람이 희박해서 가끔씩 양이나 야크를 키우는 유목민을 만날 수 있을 뿐, 사람이 모여 농경을 이루는 마을은 수십 리 이내에 한군데 만나기도 힘들었다. 서장인들이 죽은 승려가 다시 태어났다고 믿는 개들만이 이따금 낯선 이방인을 보고 시끄럽게 짖어댈 뿐, 너무나 조용해서 오히려 적막하기까지 한 푸르른 평원만이 계속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길을 가던 어느 날 오후, 양떼를 몰고 다니는 유목민을 만나게 되었다. 단 네 명에 불과한 한 가족이었다. 아이들은 비록 햇볕에 시커멓게 타고 떼에 절은 상태였지만, 그러한 외면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찰랑거리는 듯한 해맑은 웃음을 흘리며 천진난만하게 양들 사이를 뛰놀고 있었다. 한쪽의 아낙은 양떼를 따라가며 두 손으로는 실패에 양털을 잦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무슨 말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여타의 서장인들처럼 경전의 한 구절을 외고 있을 것이다. 가장(家長)으로 보이는 사내는 말에 올라탄 채, 짐을 가득 실은 야크를 몰고 있거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과는 전혀 딴판인 그 평화로운 정경(情景)에 오히려 시샘이 들 정도였다. ‘부럽군. 차라리 이런 삶이 더 행복할 텐데. 내가 만일 이런 평범한 운명을 타고났다면....’ ‘나도 지금쯤은 저 사내처럼 아내를 거느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겠지. 그랬다면....’ 고개를 숙이고 생각해보았다. 과연 자신이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행복할까? 아니면 너무나 평범한 삶에 염증을 느끼게 될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자신이 직접 그런 처지가 되지 않고 이렇게 생각만으로 하는 것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결론만이 나왔다. ‘현재의 나도 행복하게 여기지 않지만, 저 사내와 같이 되었어도 불행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비록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는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행복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여러 문제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있을 테니.’ 마침 가는 방향이 서쪽으로 같았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가다가 저녁이 되어 잠자리를 마련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자신은 별로 준비할 것도 없이 모닥불을 피우고 평평한 땅바닥을 골라 양털 겉옷을 깔고 눕는 것이 다였다. 그들 일가족도 잠자리를 준비하는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사내와 아이들은 야크의 등에 짊어진 물건들을 내려 천막을 세우고, 한쪽에선 아낙이 밀가루를 야크 젖에 개어서 평평한 돌 위에다가 굽고 있었다. 불을 피우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내가 다가와 저녁을 같이하자 했다.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어서 같이 하기로 했다. 저녁을 같이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가닥 부러운 마음을 전하자, 검게 탄 얼굴의 사내가 껄껄거리며 말한다. “껄껄껄, 무엇이 부럽다는 것이오? 우리의 모습이 말이오? 당신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구려. 우리라고 어찌 아무 문제가 없겠소? 사람 살아가는 것이 다 똑 같은데.” “....” “누군가 아파도 단지 부처님께 기도만 할 수 있을 뿐이어서 본래 태어난 다섯 아이 중에 남은 것은 이 두 녀석뿐이오. 이런 곳에서는 약도 구할 수 없어서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소. 내 꿈은 조금 더 많은 양을 키워서 돈이 모이면 마을에 정착하여 살고 싶은 것이오. 아이들 중의 한명이라도 라마가 될 수 있다면 집안 형편이 피게 될 테니. 내 아내도 자식들을 위해 더 나은 음식과 잠자리를 원한다오. 하지만, 모든 것이 전생(前生)의 업보라 생각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이지 만족하거나 문제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오.” 사내의 말에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과 이런 평범한 삶을 바꿀 수 있다면 바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대는 그래도 행복한 것이오. 서로 믿고 사랑하는 가족들이라도 있으니.’ 아이들은 서로 웃고 떠들며 먹을 것을 다투고, 부부는 아이들을 말리거나 먹을 것을 서로 건네주고 있었다. 멍하니 한동안 그 모습을 보다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작 이런 평범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복된 것인지 모른다오.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풍족한 삶을 바라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이르면 혹시라도 누군가 빼앗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전긍긍하게 되거나 더욱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 사람이오.’ ‘그때는 가족 간의 사랑도 형제간의 우애도 찾기 힘들 것이오. 정작 이렇게 부족한 듯이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가득 찬 것임을 모르는구려.’ 저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거닐었다. 비록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자신은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가족 간의 오붓한 정을 볼 수 있어서 기쁨과 부러움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되어 오히려 슬픔과 허탈함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틀 후면 일객칙(日喀則)에 도착할 것이고, 그날 이후로 한동안은 이런 생각에 잠기지도 못할 것이다. 일객칙 근처에 이른 것은 시월 이십칠일의 저녁 무렵이었다. 일객칙은 삼백여 호의 마을로서 일대에서는 가장 큰 곳이었고, 그 서쪽 외곽에 소뢰음사(少雷音寺)의 분사인 살가사(薩迦寺)가 있었다. 일객칙에는 들어서지 않고, 멀리 바라보이는 십여 리 떨어진 동쪽 외곽에 여장을 풀고 노숙을 준비했다. 평상시처럼 행동했는데 단지 말고삐를 묶지 않고 내버려둔 것이 틀릴 뿐이었다. 어차피 오늘밤에 은밀히 진로를 바꾸어 적들의 시선을 벗어날 작정이었으니 이제 말은 아무 필요가 없었다. ******* 모두들 설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떡국도 많이 드십시요. 저는 쓸데없이 나이만 한 살 늘어나는 것 같아서 먹어도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향에 내려가시는 분들도 무사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소뢰음사(少雷音寺)와의 결전(決戰) 소뢰음사(少雷音寺)와의 결전(決戰) 2 이틀 후 시월 이십구일이 되었을 때, 단리유아는 일객칙(日喀則)에서 사백여리 정도 떨어진 정결(定結)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정결은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희마랍아산맥(喜馬拉雅山脈)의 한쪽에 자리한 작은 마을로, 일차 목적지인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에베레스트)에서는 동북쪽으로 삼백여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희마랍아산맥에 들어서기 전에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로는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후 산맥을 넘어 니파라국(泥波羅國:네팔)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주 드물게 보이는 소수의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이만 척이 넘는 설산(雪山)만이 연이어져 있을 뿐이었고, 우연이라도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일객칙(日喀則)을 떠나면서 감시하던 자들을 죽이고 떠났으니, 지금쯤 천지신교(天地神敎)나 소뢰음사(少雷音寺)도 어떻게 된 사태인지 알아차리고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차렸다고 해도 당장에는 쉽게 포위하여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의 자신의 위치와 천지신교와 여러 세력들의 포진한 경우를 감안했을 때는 우선적으로 상당한 거리차가 있기 때문이었고, 갑작스럽게 경로를 변경했기에 그들 역시 일순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쯤은 척발척천도 예상과는 다른 자신의 행보를 알고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것이지만, 그의 뜻대로 랍자(拉孜) 인근에서 포위당한 채 좌충우돌하는 것은 안만 생각해보아도 별로 승산이 없는 일이었다. 일단 정결(定結)을 지나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으로 향한 후에 상대가 이동하는 길목에서 미리 기다렸다가 싸울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의도하는 대로 싸울 수 있을 테니 최소한 포위되어 쉬이 물러서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 저녁 간단히 건량을 준비한 채로 다시 길을 떠나 멀리 구름 사이로 빠끔히 보이는 설산(雪山)들을 보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먼저 아통하(阿桶河:순코시강)를 따라서 서남쪽으로 향하다가 강을 건너 주목랑마봉으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천지신교의 사람들도 모두 바보들은 아닐 테니 지금쯤은 알아차리고 곧바로 남진(南進)하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의 예상으로는 주목랑마봉과 아통하 사이의 설산들이 연이어진 곳에서 맞부딪칠 것으로 보였는데, 먼저 출발하여 적들이 넘어올 지역을 선점하여 기다리는 것이 이번 일의 성패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다. ‘흠, 그나저나 더 이상 척발척천의 정보를 받을 수 없는 것이 아쉽군. 그도 지금은 나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기도 할 테지만, 내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으니 아무래도....’ ‘뭐, 어차피 이제부터는 그리 도움도 되지는 않을 것이기는 하지만....’ ‘내 생각대로 설산(雪山)의 협곡(峽谷)사이를 넘나들며 싸운다면 수적인 우세는 그리 의미가 없을 테고, 그들이 포위하여 공격하려고 해도 제대로 이동하기도 힘들 테지.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흰 눈과 얼음 천지이니.’ 육포를 꺼내어 씹으며 생각에 잠긴 채 아통하(阿桶河)를 따라 내려갔다. 주변은 온통 희디흰 설봉만이 펼쳐진 곳으로 아무리 둘러보아도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막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아통하(阿桶河)는 적어도 높이 일만 척 이상에 달하는 설산들 사이를 누비는 큰 강으로, 서장(西藏)에서 발원하여 희마랍아산맥을 관통한 다음 니파라국(泥波羅國)을 걸쳐 천축(天竺)의 환하(桓河:갠지스강)에 합쳐지는 강이었다. 폭이 그리 넓지도 않았고 수량도 풍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설산 사이의 협곡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물살이 매우 빨랐고, 또 곳곳에 산위에서 흘러 내린 빙하(氷河)가 떠다니기도 해서 그 강물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온 세상에 마치 자신 혼자만이 있는 듯 쓸쓸하고 적막한 가운데, 이따금 순례자들이 세워놓은 기둥에 매달린 깃발만이 세찬 겨울바람에 시끄럽게 울부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곳곳에 쌓인 눈과 거친 협곡을 건너뛰는 험악한 행로에다가, 이따금 느닷없이 몰아치기도 하는 눈보라에 제대로 길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기도 했다. 누군가 아무런 목적 없이 이런 길을 지나간다면 그 자는 결코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따금 고갯마루에 보이는 순례자의 흔적은 이 땅이 얼마나 신심(信心)이 두터운지를 보여주고 그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역설해주는 것 같았다. ‘비록 풍광(風光)은 거칠고 황량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나에게는 운치가 있는 것 같군. 이렇게 적막하고 고요한 가운데 천지는 눈보라에 휩싸여 춤추는 것 같으니 마치 나의 행보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데....’ ‘마침 겨울이어서 순례자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쉽군. 만나서 서로 얘기해본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길을 걷다가, 문득 계곡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는 한 줄기 세찬 광풍(狂風)에 쌓였던 눈들이 일어나 허공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다. ‘저 소용돌이쳐서 솟구치는 눈보라처럼 자유롭게 천공을 활보하며 세상을 굽어볼 수 있다면....’ ‘뼛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와 온몸을 둘러싼 겉옷을 날려 보내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바람이 상쾌하고 반갑기만 하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앞으로의 일에 마음이 답답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원망으로 나도 모르게 그동안의 그런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마음이 커서일까?’ ‘차라리 저 눈보라와 같이....’ 자신도 모르게 그 모습에 정신이 팔린 상태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의식중에 마음을 빼앗겨 빙글빙글 바람에 따라 자신 역시 춤을 추게 되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온몸을 맡긴 채 솟구치는 눈보라처럼 회전하여 허공으로 떠올라 십여 장 상공에서 회전과 반전을 거듭하며 자유로이 떠돌아다녔다. 온몸을 휘몰아치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자연(自然)과 하나가 되어 마치 자신이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는 눈보라처럼.... 그렇게 반각(半刻)의 시간이 흘러 가라앉는 눈보라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땅에 내려섰을 때에도 자신 역시 어찌된 일인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리 내가 능공허도(凌空虛渡)의 경공술을 펼칠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것도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전신의 진기(眞氣)를 집중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인데?’ ‘분명히 단순한 경공술만으로는 그리 된 것 같지 않은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비록 반각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마치 찰나(刹那)의 시간이 흐른 듯도 했고 잴 수 없는 영겁(永劫)의 시간이 흐른 듯 하기도 했는데, 마치 한바탕 꿈인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기만 할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며 좀 전의 일을 돌이켜봄에도 단지 무의식중에 일어났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고,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잘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다시 몸을 움직여 아까와 같은 상황을 재현해보려 했지만, 거의 반나절을 허비했어도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아, 분명 이것은 상승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 ‘휴, 아직도 나의 수련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마음가짐이 잘못 돼 너무 그 일에 매달려서 그런 것인가?’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무르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으니....’ 반나절이나 한 곳에서 지체했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그 일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없음이 너무나 아쉬웠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비록 아직 자신의 상태가 그에 못 미쳐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없을지라도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하는 최소한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자꾸만 이 일을 돌이키려보려 하는 어지러운 마음을 접고, 더 생각해보아야 현재로서는 헛것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길을 떠나기로 했다. 떠나기에 앞서 빙그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며, 자기 자신을 향해서 다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유아(唯我)야, 그만 이 일은 잊기로 하자. 아직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이 일에 마음을 계속 쓰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을지도 모르니.’ ‘언젠가 또 이런 기우(奇遇)가 다시 찾아올 거야. 그때 나의 수련이나 마음가짐이 지금보다 높아져있다면, 그러면 확실히 깨달아서 완벽하게 나에게 다가오겠지.’ 자신에게 그 일면을 보이게 해준 주위의 풍광을 바라보며, 희마랍아산맥(喜馬拉雅山脈)의 그 장엄하고 적요(寂寥)한 모습에 경탄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자신이 있는 곳을 다시 한 번 기억 속에 새겨 넣은 후에 아쉬운 마음을 접고 그동안 지체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전력으로 신법을 펼쳐나갔다. 해가 저무는 데에는 한 시진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서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야만했다. 밤에는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방향을 찾을 수 없어서 잘못된 곳으로 간다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지난 다음날, 아통하(阿桶河)를 건너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으로 향했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천지신교의 인물들은 랍자(拉孜)에서 주목랑마봉을 가로질러 니파라국(泥波羅國)으로 향하는 감포특협로(甘暴忒峽路)를 따라 내려올 것이다. 본래 서장에서 주목랑마봉을 지나 니파라국으로 향하는 길에는 크게 두 가지 노선이 있었는데, 육로를 통하여 력갈미(礫碣彌)를 출발하여 희마랍아산맥 산맥사이의 좁고 험한 협곡사이를 통과하여가는 것과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아통하를 따라서 내려가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단리유아 자신처럼 일객칙(日喀則)에서 출발한 경우거나 시일이 걸리더라도 길을 잃을 위험이 상대적으로 보다 적은 길을 택한다면 보통은 아통하를 따라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천지신교처럼 랍자(拉孜)에서 출발하려하고 시일이 촉박하다면, 력갈미(礫碣彌)를 거쳐서 곧장 남하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이 육로가 감포특협로(甘暴忒峽路)라 이름이 붙어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닐 정도로 정확하게 길이 나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만 척이 넘는 설봉(雪峰)들 사이에 위치한 곳곳의 절벽을 따라 이어진 협로에 불과해서 길을 잘 아는 원주민들이나 다닐 뿐으로, 특히 현재와 같은 한겨울에는 길을 찾기도 어려워 지나가려는 사람도 그나마 없을 정도였다. ‘내가 감시하던 자들을 죽였다는 것을 안다면 그자들도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포위공격하려는 의도가 이미 드러났다고 생각할 테지. 그래서 내가 니파라국(泥波羅國)를 거쳐 천축(天竺)으로 도망치려한다고 생각할 테고, 이쪽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떨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라도 감포특협로를 따라오겠지?’ ‘그들도 천축까지는 쫓지 못할 테니까 적어도 니파라국 내에서 끝장을 보려 할 것인데....’ ‘분명히 나의 처지와 일객칙(日喀則)에서부터의 예상 경로를 생각해본다면 아통하(阿桶河)를 따라 내려가 니파라국의 단뢰탑(丹雷塔)으로 향할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 최소한 반나절은 지나서야 내가 천축 쪽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테니 틀림없이 감포특협로를 따라올 거야.’ 일객칙(日喀則)을 떠나면서 감시하던 자들을 죽일 때, 일부러 고문하듯이 갖은 상처를 내어서 죽였었다. 마치 천지신교의 정체와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하게끔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잔인하게 보일 정도까지 상처를 내어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일단 예상대로만 된다면 그들과는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 근처에서 마주칠 것인데.... 높이 삼만 척에 가까운 만년설로 뒤덮인 주목랑마봉 일대의 험준한 설봉 사이를 옮겨 다니며 싸우게 될 것이니 내가 꼭 불리하다고만 볼 수는 없겠지?’ ‘이런 지형에서는 떼로 몰려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기도 하고 신속히 이동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크다고 보아야하니. 고수가 아닌 이상 눈 덮인 산들을 뛰어다니며 추적하기도 힘들 테니까.’ ‘그렇지만 척발척천의 정보대로라면 그들 역시 다들 고수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하던데, 내 뜻대로만 쉽게 일이 풀릴지 모르겠군.’ ‘뜻밖의 변수가 없어야 할 텐데.... 만일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진다면 그때는....’ 걸음을 바삐 옮기며 앞으로의 싸움을 생각해보고 있었지만, 사실 싸움에 대한 초조함이나 걱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포위되어 공격받더라도 최소한 달아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또다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고, 원하지 않더라도 소뢰음사의 사람들과도 부딪쳐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 생각이 복잡했다. 쓸데없이 원한을 맺고 싶지는 않았지만, 강호(江湖)의 일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듯이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일도 그런 상황에 속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소뢰음사와는 두고두고 원한이 맺히게 되겠지. 천지신교야 그들과 부딪칠 결심을 하여서 별문제라 하지만, 정말 쓸데없이 소뢰음사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휴, 가능한 그들과는 부딪치지 않으려 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분명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길 테지. 이 일로 인해서 서로 간에 원한만을 남길 뿐일 텐데도....’ 보통 사람일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며 은원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신은 무심코 한 행동에 분명 상처입고 원한을 마음 속 깊이 새긴 경우가 있기도 할 것이고,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앙심(怏心)을 품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하물며 자신과 같은 강호인(江湖人)임에야 원하든 원하지 않던 결코 은원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그 삶일 것이다. 언제나 칼부림 속에서 살아가니 더욱더 맺어진 원한은 이루 셀 수 없을 것이고, 그에 비례해 남에게 베푼 은혜는 더욱 적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서 강호(江湖)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은원은 죽어서도 삼생(三生)의 윤회로도 끊을 수 없이 이어지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지금처럼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원한은, 비록 상대는 원망할 대상이라도 있겠지만, 그 가해자인 자신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자신의 운명만을 한탄해야만 할 것이니 더욱 괴로운 일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마음 가득 복잡한 생각과 답답한 심정으로 길을 떠나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 아래에 도착한 것은 그날 신시(申時:15-17시)무렵이었다. 다행히도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 맑아서 주목랑마봉의 신비로운 자태를 완전하게 볼 수 있었다. 마치 누런 황금빛으로 물든 것 같은 깃발구름이 산 정상을 살짝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주목랑마(珠穆朗瑪)라는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살짝 얼굴만을 내비치는 풍요의 여신(女神)의 모습과 같았다. 본래 주목랑마라는 이름은 니파라국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온통 세상을 어지럽혀 황폐하게 만들던 독룡(毒龍)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한 다섯 여신 중의 하나인 풍요의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을 성모봉(聖母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성모궁(聖母宮)도 본래 그 여신을 숭배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목랑마봉 아래에까지 도착했으니 기회가 닿는다면 성모궁을 찾아볼 생각도 있었지만, 사실상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고 있었다. 이따금 거의 십여 년에 한번 꼴로 성모궁의 신녀(神女)들이 내려와 산주변의 원주민들의 병을 치료할 뿐이라 알려져 있었고, 일단 천지신교와 소뢰음사의 연합세력과 싸움이 시작되면 그럴 정신도 없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감포특협로(甘暴忒峽路)가 지나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본래 감포특협로가 지나는 산기슭도 일만 척 이상의 고지대로서 협곡 사이로 난 비좁은 길에 불과했고, 눈이 쌓이지 않은 지역에서야 한줄기 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만일 폭설이라도 쏟아져 산 아래의 길까지 눈에 덮인다면 그 길을 찾기도 어려웠다. 이러니 겨울철에는 사람의 왕래란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반 시진쯤이 흘렀을 때 이곳저곳 뛰어다니다가 눈에 반쯤 파묻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주변을 살피며 현재의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이곳은 그래도 산의 아래쪽에 해당해서 거칠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만이 뼈골에 스며들듯이 몰아치고 있을 뿐이었지만, 만일 더 높은 곳으로 향한다면 하루 종일 눈보라가 휘몰아치거나 사시사철 눈으로 뒤덮인 지역이나 깊이를 모를 정도의 협곡 사이로 빙하가 흐르는 지역들을 쉽게 볼 수 있을 터였다. 오늘의 날씨가 괜찮았으니 산 아래쪽도 시야가 확 트인 것이지, 그렇지 않고 만일 날씨가 어제와 같았다면 더욱 그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시간이 흘러서 협곡 사이의 적당한 공터를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노숙했던 자리였던 모양인지 검게 탄 돌들의 모습이 쉽게 보이는 곳이었다. 천지신교의 인물들도 협곡을 지나온다면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낼 것이라 생각되자, 일단 이 공터가 쉽게 눈에 띄는 높은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아예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산 중턱의 눈이 쌓인 지역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이 적당할 것 같군.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등성이에 해당하니. 저 아래의 공터도 쉽게 눈에 들어오고.’ 일단 이곳에서 적들을 맞기로 하고 일대를 다시 한 번 둘러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이번 싸움이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 식량이나 추위를 막아줄 복장도 꼼꼼히 챙겨야했다. 싸움이 계속되면 점차 산위로 이동할 것이고, 언제 이번 싸움이 끝날지는 자신도 알 수 없으니 적들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했다. 산이라고 해보아야 온통 바위와 돌투성이인 민둥산일 뿐이어서 한번 시야에 들어오면 숨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아예 눈으로 뒤덮인 산위로 이동하여 눈 속에 자신을 감추는 것이 나았다. 그날 밤 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보기 드물게 날이 맑고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손에 닿을 듯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갑자기 그때, 한동안 계속해서 유성우(流星雨)가 서쪽으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넋을 잃고 천공에서 일어나는 그 아름다운 별들의 산화(散華)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별들은 그 오랜 세월을 저 천공의 정점에 머물다가 그 생을 마치고 유성이 되어 하늘을 수놓는 것인데, 그에 비할 때 단 일백년의 삶을 보내는 인간의 욕망이란 얼마나 부질없고 허황된 것인가?’ ‘나의 단 한 가지 소망도, 천지신교의 강호제패나 척발척천의 야망 역시 그런 것 중 하나일 텐데, 과연 그 끝은 어떠할까? 생각했던 것처럼 만족스럽고 자신이 상상했었던 상황 같을까? 아니면 끝없는 공허함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다가오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한한 세월을 천공에 머물다 그 정점에 이르러 자신을 불태우며 낙하하는 별처럼, 이렇게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오히려 그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욕망에 불타올라 산화하여 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인간의 본성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이라 하지만, 막상 그 끝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것만 느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았을 때도, 아직 그 끝이 멀다하지만, 행복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나 갖가지 욕구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바라는 것은 행복일 것이다.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지 간에. ‘하지만 과연 그 정점에 달했을 때 그런 행복감이 찾아올까? 아니면 밀려드는 공허함의 홍수에 압도되어 절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상념을 옮겨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앞으로는 끝없는 피의 바다를 헤치며 그 목표를 향해가야 할 것인데, 과연 수많은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할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천지신교와 맞서 싸운다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않음에도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천지신교를 무너뜨린다 해도 자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싸워야한다지만,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홀로 은거하여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아,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앞으로의 일이 얼마나 달라질까? 내가 멈추고 싶다고 해서 이미 구르기 시작한 혈륜(血輪)을 무슨 수로 막는다는 말인가? 아무리 내가 숨어 산다 해도 천지신교의 추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인데?’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을 계속할수록 자신의 일생에 대한 회오와 앞날에 대한 회의로 뇌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후의 일을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많은 피를 손에 묻히면서까지 천지신교와 싸워야하는지, 운명에 벗어나기 위해서 매일 수련하고 노력하는 것도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하는 생각에 잠이 들 수 없었다. 강호(江湖)의 협의(俠義)와 약자들을 위해서 천지신교와 맞설 싸울 결심을 했는데, 과연 그것도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불쑥불쑥 의심만 솟구쳤다. ‘꼭 내가 나서야만 했을까?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고 하지만, 찾아보면 어딘가 다른 사람이 있지는 않았을까? 아니, 천지신교가 천하를 제패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또 무언가?’ ‘어차피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돌아가는 것으로, 모두가 갖가지 정의를 내세우며 떠들어도 단지 힘 있는 사람이 그 주인이 되어 온갖 미화로서 자신을 치장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이제까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데....’ ‘이렇게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오히려 그 피해를 크게 하는 것은 아닐까? 막상 그들과 싸움을 계속한다면 적어도 수년은 싸움이 지속될 것이고, 전 강호의 세력들까지 서로 싸우게 되면 그 폐해는 어느 정도일까? 그 와중에 사라져갈 무의미한 생명들과 강호와 아무런 상관없는 무고한 사람들은....’ ‘그들이 천만년 갈 세력도 아니고, 어차피 정상에 서게 되면 그들도 세상의 인심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으니 그들 또한 변하게 될 것인데....’ 천지신교와 싸울 결심을 하였지만 막상 내일의 결전을 생각하다보니 온갖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실제 이제부터 싸움이 시작된다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대로 수련이나 혼자만의 생각에 잠길 시간이란 없을 터였다. 그 자신이 원하는 바는 결코 아니었지만, 이제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절로 앞으로의 일에 대해 회의와 탄식이 솟아남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비록 그 일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의(大義)를 위해서라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이런 생각이 솟구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정해진 운명(運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의 삶을 보는 것 같았고, 모든 일이 부질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회의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벗어나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으로 허우적거리지만, 오히려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니 그럴 것이다. ******* 설 이후로 쭉 몸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뭐,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열흘이 넘도록 약만 먹었는데, 그러다보니 머리가 맑지 못해서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더군요. 며칠 전에야 어느 정도 나아져 다시 쓸 생각을 했는데, 너무 시간이 흐르니 제대로 감을 찾을 수 없더군요. 기다리시던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앞으로는 제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소뢰음사(少雷音寺)와의 결전(決戰) 소뢰음사(少雷音寺)와의 결전(決戰) 3 다음날은 전날과는 달리 날씨가 험악했다.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정오가 지났을 때는 온 산하를 흰색으로 색칠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고, 계속해서 내리는 눈과 미친듯한 바람에 의해 시야가 극히 불량해서 삼십 장 이상은 제대로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날씨 때문에 단리유아도 본래의 위치에서 감포특협로(甘暴忒峽路)가 아래로 지나는 왼쪽 절벽 위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정좌하여 절벽 아래의 소로(小路)를 주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쌓이는 눈에 파묻혀 마치 눈사람처럼 그 모습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두터운 양가죽을 둘러쓰고 계속해서 운기(運氣)를 하고 있었지만,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는 어쩔 수 없어서 잠깐 잠깐 일어나 움직이지 않으면 뻣뻣하게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끔찍한 날씨로군. 어제는 그리 맑더니. 하긴 이런 날씨가 본래는 정상이겠지. 어제가 오히려 이상한 경우일 거야. 흠, 매일 이런 날씨가 지속된다면 내겐 오히려 더 낫겠지.’ ‘그나저나 그들은 언제나 오는 것이지? 예상대로라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이곳을 통과할 것이라 여겼는데.... 뭐, 이런 악천후에는 제대로 길을 찾기도 어려울 테니 애초의 생각보다 늦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 험악한 날씨 속에 앞으로의 결전에 대해 생각하며 천지신교와 소뢰음사의 고수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떨어져가는 유시(酉時:17-19시)초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 거의 포기하고 있을 무렵, 일단의 인영들이 양쪽 절벽 사이의 일 장(丈) 정도의 소로를 통과하여 나타났다. 모두가 두터운 양털로 짠 옷을 걸치고 머리에도 털모자를 쓴 상태로 온몸이 눈에 뒤덮인 채 나타나는 모습이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설인(雪人)과 같았다. 오십여 명 정도로 천지신교와 소뢰음사 연합세력 중에서 선발대로서 먼저 출발한 자들이었다. 나머지 본대(本隊)는 반나절 거리로 오십여 리 정도 뒤쳐져서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무공을 익힌 고수들도 길을 재촉하기란 쉽지 않아서 생각보다는 이동 속도가 빠르지 않았고 도중에 길을 찾기 위해 잠시 멈춘 적도 있어서 이제야 도착한 것이었다. 그 무리 중에서 천지신교의 사람들은 삼십 명으로 열성전(列聖殿)에 속하는 고수인 탄철신수(彈鐵神手) 체평고(遆評暠)가 이끌고 있었고, 나머지 이십여 명은 소뢰음사의 사람들로 십대마불(十大魔佛) 중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제탁마불(齊鐸魔佛)이 이끌고 있었다. 본래 천지신교에서는 백여 명의 고수가 움직였는데, 이번에 참여한 열성전의 고수만도 여섯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 외에 소뢰음사의 인원이 백여 명 정도였고 서장지단의 고수들 역시 백 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었다. 일대를 잘 알고 한어에 능통한 제탁마불이 선발대에 참여하여 이들을 인도하고 있었고, 탄철신수 체평고는 상황판단과 각각의 일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있었다. 절벽사이의 길을 통과하여 공터가 보이는 지역에 이르렀을 때, 청의장포에 두터운 털가죽을 걸친, 겉보기에는 육십대의 청수한 노문사 같은 탄철신수 체평고가 제탁마불을 향하여 말했다. “존자,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이곳에서 쉬었다가 가는 것이 어떻겠소?” 이에 계인(戒印) 대신에 칼과 탁령(鐸鈴)을 양손에 쥔 핏빛의 혈불(血佛)을 정수리에 새긴 제탁마불이, 소뢰음사의 독특한 인사방식인 지권인(智拳印)과 비슷한 형식으로 주먹 쥔 두 손을 포개어 수인을 맺으며 응답한다. “혈뢰바라밀(血顂波羅密)! 체시주의 말대로 내일부터는 저 주목랑마봉을 넘어가야할 것이니 오늘은 그만 멈추고 푹 쉬는 것이 좋겠소이다.” 두 사람이 잠시 더 상의하여 오늘은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수하들에게도 알려서 노숙할 준비를 하도록 한다. 또 각기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수하들을 양쪽 산기슭 쪽으로 정찰을 보내고 뒤따라오는 본대에게도 비응전서를 날려서 지금의 상황을 알리도록 바쁘게 지시한다. 분주히 움직이며 명령을 수행하는 수하들을 보다가 탄철신수 체평고가 제탁마불을 향해서, “존자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놈이 천축에 닿기 전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소?” “혈뢰바라밀! 잡을 수도 있고 잡지 못할 수도 있지요. 뭐, 니파라국 내에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으니 그 전에 마주친다면 어떻게든 될 것이지만, 원체 천축의 영향이 강해서....” 뜨뜻미지근한 어조로 제탁마불이 답하는데, 실제 니파라국(泥波羅國) 내에는 바라문교의 세력이 가장 강했고 그 외에 불교의 세력이 몇 곳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들의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온갖 자연물에까지 이름을 붙인 무수한 신들이 난립하는 곳이기도 해서, 그런 신들을 믿는 소수의 알려지지 않는 세력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이렇다 할 세력이 없다고 하지만, 대체로 바라문교나 불교의 세력들은 천축의 바라만겁전(婆羅萬劫殿)과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의 영향 하에 있어서 마치 분타와 비슷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천지신교로서도 막상 니파라국 내의 세력들과 충돌한다면 마음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양보해야할 처지였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런 어려움을무릅쓰고서라도, 단리유아가 천축으로 넘어가기 전에 포위하여 없애야만 했다. 니파라국까지는 몰라도 천축에까지 수백 명의 타 지역의 고수들이 넘어 들어와 설치는 것을 바라만겁전이나 마하보리사가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본래부터 소뢰음사로서는 단리유아를 추적하여 제거하는 데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는데, 아무리 수백 년간의 숙적인 대뢰음사(大雷音寺)를 대신 없애준다고 해도 그들 자신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한 명의 중원인을 죽이는 일에 이렇게 떼로 몰려가는 것이 의아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번에 거의 강권하다시피 하는 천지신교의 요구에 의해서 십대마불 중에서 다섯 명이나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솔직히 그들로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뒤쫓을 만한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처음 랍자(拉孜)에서 포위하여 공격할 계획일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열의를 가지고 일에 동참했었지만, 한겨울에 이렇게 멀리까지 추적해나가는 것은 아무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랍자에서 포위하여 기다리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단리유아의 행방이 묘연하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천축 쪽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부랴부랴 일대에 펼쳐진 포위망을 거두고 추적에 나서게 되었는데, 사실 단리유아의 목적은 주목랑마봉 일대의 설산을 옮겨 다니며 싸우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그들의 생각으로 볼 때는 자신들이 노리니 당해낼 수 없어서 천축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제탁마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하고는 곧바로 다시 탄철신수 체평고를 향해서 반문했다. “그런데 귀교의 약속은 틀림없겠지요?” 자신들의 약속만 따지는 듯한 제탁마불의 태도에 탄철신수가 일순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속으로만 불만을 삼키고 이미 결정된 지 오래라는 듯한 단호한 어조로, “지금쯤 대뢰음사의 일도 시작되었을 것이오. 그쪽은 서장지단내의 본교 세력이 주축이 되어 떠났는데, 현재의 대뢰음사 정도의 힘으로는 결코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흐흐, 혈뢰바라밀! 귀교의 도움으로 우리의 숙원을 풀게 되었구려. 정말 감사하오. 부디 귀혈환(歸血還)하시길!” 두 주먹을 포개어 흔들며 말하는 제탁마불의 능청스런 모습에 탄철신수가 속으로 열불이 나서,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말끝마다 그놈의 소리는.... 네놈들에게는 그게 다시없는 성불하라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서 죽어자빠지라는 저주야, 이 빌어먹을 미친 중놈아!’ ‘세상에 피가 되어 환생하라니! 제미랄 놈들 같으니, 어떻게 이런 놈들과 연합할 생각을 했는지.... 척발척천 그놈이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서 함께하지만 정말 다시는 상종하고 싶은 인간들이 아니야.’ 그러한 자신의 속내는 감춘채로 오히려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하하하,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귀사에서 도움을 주신다면 본교에서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혈맹의 동지로서 귀사를 도울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해주시오.” “혈뢰바라밀! 아무 걱정 마시오. 고작 한 명을 제거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소? 더구나 귀교와 본교가 연합한 마당에 말이오. 솔직히 본존은 그놈 하나를 잡자고 이곳까지 이 많은 사람들이 추적에 나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소. 단지 몇 명의 고수가 포위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은데?” 이번 일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제탁마불이 오히려 수백 명의 고수들이 먼 곳까지 추적해 나선 것을 꼬집어 되물었다. 이에 곧바로 탄철신수 체평고가 고개를 저으며, “그것은 존자께서 모르시는 말씀이오. 그놈의 무공만도 일대일로는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없을 정도로 강한데다가, 갑자기 그놈이 암습이라도 한다면 더욱 당할 자가 없소. 우리도 단지 몇 명으로 잡을 수 있다면 그리 했겠지만, 워낙 미꾸라지 같은 놈이라 일단 사방을 포위한 다음 고수들이 나서야 하오.” “흐흐, 너무 상대를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오? 아무리 그자가 중원의 십대고수 중의 하나라 하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그들 십대고수들과 큰 차이는 없다고 보는데? 그러니 우리 두 사람만으로도 그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이오.” 이해를 못하는 듯한 제탁마불의 호언장담에 역정이 난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게 아니란 말이오, 정말! 이전에도 나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 고수 네 명이 그놈을 추적하다가 오히려 그놈의 암습으로 모두 죽어나갔단 말이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둘만으로 싸울 생각은 버려야하오. 일단 수하들을 이용해 진법을 펼치거나 암기로 공격하여 지치게 만든 후에나 그놈과 싸워야 할 것이오. 그 이전에는 그저 다들 모여서 진을 치고 본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소.” 이런 탄철신수 체평고의 신신당부에도 제탁마불은 신경 쓰는 표정이 아닌 오히려 비꼬는 듯한 어조로 되받았다. “혈뢰바라밀! 체시주는 너무 소심한 것 같소이다. 고작 그 한 놈이 두려워서 그런 말이나 하다니, 내 듣기로 현재 귀교의 세력은 천하에 당할 곳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차라리 살수들을 동원하는 것이 더 낫지는 않았겠소?” “그자가 원체 한곳에 머무는 자가 아닌데다가, 말도 통하지 않고 지리도 모르는 이 먼 곳까지 와서 청부를 수행할 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소? 살수 역시 이런 지역은 역시 낯선 곳인지라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기도 힘들고, 그자 또한 고수이니 암습도 쉽지 않는 일이오. 천상 가장 쉬운 방법은 일단 포위하여 한 곳으로 몰은 다음에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의 고수들이 합공하여 제거하는 수밖에는 없단 말이오!”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친 탄철신수가 쏘아붙이듯이 내리소리치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한쪽에서 노숙을 준비하는 수하들 곁으로 떠나버렸다. 이 모습에 제탁마불이 수인을 맺으며 뭐라고 서장어로 중얼거리다가 자신 역시 제자들이 준비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편, 이들이 이렇게 노숙을 준비하는 등 여러 가지 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한쪽에 숨어 이들을 지켜보며 어서 밤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어제와 달리 날씨가 험악한 것이 지금은 오히려 도움이 되었는데, 특별히 은신술이나 귀식대법을 쓰지 않더라도 자신의 흔적을 들킬 염려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오십 명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보니 아직 본대는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모두 없애서 흔적을 지울까? 아니면 몇 명 살려서 나를 뒤쫓게 할까?’ ‘나와 맞설 만한 자들은 저기 두 사람 뿐으로 보이고, 모두가 잠이든 한밤에 습격하면 저들도 제대로 대항할 수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잠시 더 생각해보다가 일단 이들을 침묵시키기로 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될 수 있는 대로 그 수를 줄이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곧 장내는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덮었다. 아무리 무공에 뛰어난 고수들이라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겨울에 백오십 여리를 뚫고 이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대충 저녁을 때운 지 얼마 안 되어 경계를 서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피곤에 지쳐 깊은 잠속에 골아 떨어졌다. “흐으으윽! 크흐흐흐....” 깊은 산중에는 미친듯한 바람이 계곡을 통과하며 내는 귀신의 호곡성 같은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눈보라만이 제 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어둠속에 춤추고 있었다. 자정을 넘어 주변을 지키던 보초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장내로 접근해갔다. 장내에는 이삼십 여개의 조그마한 천막들이 원형을 이루며 세워져 있었는데, 그 각각의 천막에는 보통 두 명이서 한조가 되어서 잠이 들어 있었다. 먼저 한쪽의 보초를 제거한 후에 천막을 따라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천막안의 적들을 죽여 나갔다. 엎드려 다가가 천막의 입구를 슬며시 들추고 세상모르고 잠에 취한 상대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왼손으로는 입을 막고 오른손의 적운도로 상대의 목을 갈랐다. “스윽” “으음” 미약한 신음과 함께 고통 속에 눈을 휩뜨며 손으로 옷깃을 붙잡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못한 채 다가오는 사신(死神)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일을 실행하기 전에는 갖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일단 일을 시작했을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일수에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도 없이 숨을 끊는 것이 이들에게 보내는 한 조각의 자비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기위안을 위한 위선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가장 외곽의 십여 개의 천막들을 돌아다니며 소리 없이 이십여 명을 제거하고 다시 그 다음 안쪽의 천막 쪽으로 접근해가고 있을 때, 문득 한 사람이 일어나 밖으로 향하다가 단리유아와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쳤다. 아마 잠결에 소변을 보고자 일어난 것 같았다. 반쯤 잠에 취한 대다가 추위에 온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숙인 채 천막을 나서다가 한쪽으로 접근하던 단리유아를 보게 되자, 비록 어둠 속에서 상대방이 누구인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겠지만 핏방울이 떨어지는 도를 쥔 모습에 곧 한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 누구? 저, (적이다!)” 얼떨결에 중얼거리다가 소리 지르려고 했을 때, 한줄기의 도광(刀光)이 번뜩이며 도가 날아와, “피웃!” “윽” 다급히 피하려 했지만, 이미 얼음처럼 차가운 도신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간 다음이었다. 삼 장 정도 떨어진 천막에서 갑작스럽게 일어선 상대의 모습에 다급히 도를 날려서 상대를 죽였지만, 이미 새어나가는 신음소리와 파공음은 막을 수 없어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더 이상 하나하나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곧바로 일어서서 가운데의 천막을 중심으로 지옥파라구천절의 지옥폭풍파(地獄暴風波)을 펼쳐서 장내를 휩쓸어나갔다. “크흐키아악! 크흐흐....”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소름끼치는 도성에 미적거리며 일어나던 인영들도 정신이 들며 적이 습격해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도성에 미처 대항하지도 못하며 대부분이 내상을 입고 전신이 마비된 상태였는지라 일순간에는 어찌할 수 없었다. 멍하니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드는 혈광(血光)을 본 것이 최후의 모습일 뿐이었다. “파파팟! 퍼퍼퍽!” “차차창! 채챙!” “후두둑! 투투툭!” 사람과 천막, 무기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조각내며 덮쳐드는 핏빛의 도강(刀剛)에 의해서 일순 장내는 광란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아악! 아악” “피, 피햇!” “마, 막아랏!” 곧이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두려움에 질린 소리로 뒤덮여 장내는 완전히 아비귀환을 이루고 있었다. “차차창!” “혈뢰바라밀! 제기랄, 무슨 이런 놈이 다 있지?” 중앙의 천막 쪽에서 잠들었던 제탁마불이 다급히 천막을 찢고 일어나 단리유아의 도강에 맞부딪치다가 물러서며 소리치고 있었다. 곧이어 탄철신수 체평고 역시 일어나 단리유아의 공격에 맞서나갔다. “콰콰콰! 파파팡!” 두 손의 수강(手剛)으로 단리유아의 공세를 막아서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끊임없이 회전하며 변화를 계속하는 도법에 의해 곳곳에 상처를 입고 뒤로 몰리고 있었다. 상대의 도법과 부딪친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석장의 끝이 잘라져나간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던 제탁마불이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혈뢰바라밀! 모두 정신 차리고 제대로 대항해라! 모두 그냥 죽고 싶으냣?” 곧이어 자신이 물러섰다는 것과 손상된 무기에 자존심이 상해서 곧바로 단리유아를 향해 덮쳐나가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으드득,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놈아!” 제탁마불의 외침에 소뢰음사 쪽의 고수들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파라구천절도(波羅九天絶刀)와 비슷한 소성을 내니 적응력이 더 빨랐던 것이다. 하지만, 들을 때마다 충격을 주는 도성에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일순간에 대다수가 죽어나가 살아있는 자라곤 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들 모두 갑자기 벌어진 일로 공황의 상태에 빠져서 한동안은 멍한 기색이었다. 도망치기 바쁠 것으로 생각했던 자가 갑자기 습격해오니 방심하고 있었던 고수들 대다수가 미처 제대로 대항도 못해보고 당해버린 것이었다. 제탁마불의 외침에 다시 정신을 차린 자들이 하나둘 무기를 꺼내어 제대로 옷도 입지 못한 상태로 다시 단리유아를 공격해나갔다. 다들 단리유아를 죽일 생각보다는 자신들을 향해 계속해서 허공을 뒤덮으며 다가오는 도영을 막기 위한 발악에 가까웠다. “크흐키아악! 크흐흐흐....” “채챙! 차차창!” “으윽! 아악! 으아악!” “콰콰쾅! 콰쾅!” 장내에는 비명소리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가끔씩 터져 나오는 폭음만이 요란할 뿐, 제대로 사람의 모습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죽어랏! 이 살인마야!” “제발 그만 죽어!” 천지신교 쪽에서 당황한 목소리와 두려움에 질린 악에 바친 목소리로 단리유아에게 소리치고 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이미 장내에 남아 있는 자들도 하나하나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고르고 고른 고수라하지만, 도강을 일순간이라도 막을 수 있는 자는 제탁마불과 탄철신수 체평고를 제외하고는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 “존자! 우선 이 자리를 피합시다. 도저히 저놈을 우리들만으로는 당할 수가 없소. 빌어먹을 놈,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상황이 점점 어려워져 전멸은 시간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을 느끼자, 탄철신수가 단리유아의 공세를 막으며 한쪽의 제탁마불을 향해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에 제탁마불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단리유아를 공격해나가며, “혈뢰바라밀!　흥! 그래 이런 꼴을 보고서도 당신은 달아날 생각부터 하는 것이오?” “그게 아니지 않소, 존자! 이미 그른 상황에서 무의미하게 목숨만 내놓겠다는 것이오? 당신도 저놈을 직접 보니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놈인 줄 알게 되지 않았소? 그러니.....” 하나둘 늘어만 가는 상처에 재차 탄철신수가 설득할 때, 중간에 말을 가로막으며 제탁마불이 크게 소리친다. “닥치시오! 그렇게 두려우면 당신이나 혼자서 도망치시오. 본사에는 적에게 등을 내보이고 도망치는 법은 없소! 흐흐흐, 오늘 이 자리가 내가 혈불(血佛)께 귀의할 순간이군! 우하하, 제자들아! 두려워마라, 자비로운 혈불께서 우리의 귀혈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망설이지 말고 저놈을 공격해라! 혈뢰바라밀!” 오히려 몇 남지 않는 제자들을 부추기며 단리유아를 공격해나갔다. 이미 삶을 포기한 모습으로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옴(唵)! 혈뢰바라밀(血顂波羅密)!” “옴! ....” “죽어랏!” 곧이어 제자들 역시 불호를 외치며 각자 달려들었다. 이렇게 각자 무기를 들고 오히려 전의(戰意)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탄철신수 체평고가 부들부들 몸을 떨며, “이 미친 중놈들 같으니라고! 상대가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다가 멈칫거리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서 분풀이 하듯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너희들도 어서 달려들지 않고! 내 손에 먼저 죽고 싶으냐?” 주변의 살아남은 천지신교의 수하들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무기를 움켜쥐며 단리유아를 향해서 공격을 해나갔다. 그나마 단 세 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장내로 뛰어들고 있을 때, 탄철신수는 혼자 슬며시 물러서다가 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흐흐흐, 미친놈들! 어차피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지 이런 상황에서 불나방처럼 달려들기만 할 뿐이라니! 너희들은 실컷 싸우다가 죽어라. 내가 멀리 달아날 때까지. 내일에는 본대가 올 테니 그때 내가 충분히 복수해주마!’ 도망치는 체평고의 모습에 남은 자들 모두가 갖은 욕설로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단리유아 역시 일을 끝낼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저자가 적들의 주장 중의 하나로 보였는데, 다른 자들은 몰라도 저런 고수만은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죽여야 했다. 저 정도의 고수가 몇 모이게 된다면 자신 역시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백팔산영환마보(百八散影幻魔步)를 펼쳐 남아있는 제탁마불과 일곱 명의 고수들을 둘러쌌다. 순식간에 방원 십 장을 뒤덮는 단리유아의 환영에 그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곧바로 제오절 지옥천폭류(地獄千瀑流)를 펼쳤다. “크흐키아악....” 핏빛 도광(刀光)과 함께 사방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바늘 같은 도강(刀剛)의 모습에 남은 자들 역시 최후의 저항으로 각기 자신들의 최고무공을 펼쳤지만, 이미 삶은 자신들 곁에서 멀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빌어먹을! 세상에 이런 무공이라니.... 그 비겁한 놈이 저 혼자 살고자 도망친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군. 이런 무공에 죽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라 할 수 있으니 두렵지는 않지만 뒤따라 이자와 싸울 사형제들이 걱정이군. 아무래도 우리가 속은 것 같아. 절대로 이자와 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눈앞으로 다가서는 단리유아의 도강에 제탁마불의 마지막 생각도 그치고, 곧이어 장내는 서로의 공세가 부딪쳐서 일어난 비명과 갖가지 소리만이 가득했다. “콰콰쾅! 꽈꽈꽝!” “아아악! 윽, 아악!” “투투툭! 퍼퍼퍽!” 십 장 내의 땅바닥까지 완전히 파헤쳐지고 하늘 높이 솟구친 조각난 육편과 무기의 파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남아있을 때, 단리유아는 장내의 상황을 더 살펴보지도 않고 곧바로 방향을 바꿔 탄철신수 체고평이 달아난 쪽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백여 장 밖을 달아나고 있던 탄철신수가 장내의 폭음에 놀라 뒤돌아보고 있을 때, 이미 단리유아는 전력을 다해서 접근하던 중이라 순식간에 그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제대로 상대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신법을 펼치며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탄철신수 역시 곧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뛰쳐나갔다. 신법을 펼치는 기척에 상대와 오십여 장 가까이 다가선 것을 알았지만, 단리유아도 더 이상 그 차이를 좁힐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과 같은 악천후인 상태에서는 추적해보아야 잡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최후의 수로 등 뒤의 흑아검을 꺼내어 어검술(御劒術)로 상대에게 날려 보냈다. “파아앙!” 미친듯한 눈보라 속을 뚫고 한줄기의 검광이 일어나 앞으로 날아갔다. 밝은 대낮에 그 광경을 보았다면 아름답기 그지없을 테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르슴한 광채는 오히려 무언가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등 뒤의 허공을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파공성에 힐끗 쳐다보던 탄철신수 체평고가 한줄기 광소와 함께 소리쳤다. “우하하하! 단리유아야, 그만 포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겨우 이런 비검술(飛劒術)로 나를 어쩌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말과 함께 바로 등 뒤까지 접근한 흑아검을 탄철신마수(彈鐵神魔手)를 펼쳐 쳐내어 날려 보냈다. “파파팡!” 서로의 공세가 부딪친 후에 흑아검이 허공을 솟구친 것을 보고 탄철신수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어 다시 신법을 펼치려할 때, 또 다시 위에서 흑아검이 내리 덮쳤다. “파팟” “헛! 어, 어검술(御劒術)?” 그제야 비검술이 아닌 어검술인 것을 알고 회피하며 수강(手剛)을 펼쳐 맞서나가려 했지만, 마치 자신의 생각이라도 안다는 듯이 흑아검은 허공을 떠돌며 빈틈을 노리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탄철신수가 어검술을 무시하고 그대로 신법을 펼쳐 달아나며 최소한의 방어만해야 할지, 아니면 아예 수강을 펼쳐 먼저 없애야할지를 망설이며 당황하고 있는 순간에 단리유아가 십장 이내로 들어섰다. 단리유아도 여태까지 제자리에서는 어검술을 펼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신법을 펼치며 어검술을 펼친 적은 없었던지라 여러 가지로 무리한 면이 있었다. 다행히 그동안의 수련이 성과가 있어서 성공은 하였지만, 진기나 심력의 소모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역시 어떤 무공이든지 수련과 실전에서의 사용에 있어서는 천지차이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상대의 모습이 보이자 어검술을 거두어들여 흑아검을 회수한 후에 적운도를 들고 탄철신수를 향해서 다가섰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서며 자신을 죽이겠다는 기색만 다분한 단리유아의 모습에 탄철신수가 감탄 반 비웃음 반이 된 얼굴로, “흐흐흐. 정말 대단하구나, 단리유아야! 그런 젊은 나이에 수어검(手御劍)을 성공하다니.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네 무공이 그 정도는 아닌 것으로 알았는데....” “그거야 중원에 있을 때의 얘기지 않소? 이미 이년이 가깝게 흘렀는데 아무런 나아짐이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니오?” 말과 함께 점차 거리를 좁혀 오 장 가까이 다가서자, 탄철신수가 오히려 뒷걸음질하며 혼자 중얼거리듯이, “후후,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인가? 정말 어이가 없군. 이렇게 진전이 빠르다니. 보통 사람은 평생가도 처다 보기도 힘든 경지인데.... 그러니 위에서 그렇게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군.” “그보다 천지신교에서 이번에 나온 고수들은 어느 정도요? 당신 정도의?” 단리유아도 척발척천의 정보로 대충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탄철신수 정도의 최고수들이 어느 정도 움직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전면에 드러난 이는 눈앞의 탄철신수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흐흐흐, 나에게서 뭔가를 알아낼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걸? 그보다 이제라도 네가 본교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본교의 원로들을 설득할 수도 있는데 어떠냐?” “흠, 나를 죽이기 위해서 만여 리 떨어진 서장(西藏)의 끝까지 쫓아오더니 겨우 당신의 말 한마디로 그런 일을 중단할 수 있다는 말이오?” 솔깃한 듯이 되묻는 단리유아의 말에 탄철신수가 자신을 가리키며, “나 역시 본교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열성전의 사람이다. 너도 본교에 대해서 대충은 파악하고 있을 테니 본교가 어느 정도의 힘이 있는지 알고 있을 테지? 그러니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 네가 충성을 맹세하고 나를 따라 본교에 들어간다면 오히려 높은 지위와 일생의 복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인데?” 겉의 말과 달리 속으로는, ‘흐흐흐, 물론 그때는 또 다른 상황이 이어지겠지. 너를 죽이려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고, 모두가 나보다는 상위의 사람들이라 나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생각과 함께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은밀히 진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런 탄철신수의 모습에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그의 말에 마음이 동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면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질 수 있겠소?” “흐흐흐, 너의 무공과 위명이라면 최소한 십대천마위(十大天魔位)까지는 도전해볼만 할 거야.” “십대천마위라면?” “본교에서 최고의 위치라 할 수 있지. 오직 교주의 명령만 따르면 되고 자신의 세력도 만들 수 있는.” “그보다 높은 지위는 없소?” 바로 되묻는 단리유아의 반문에 탄철신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 위에는 오직 교주와 부교주, 그리고 삼태상(三太上) 뿐인데?” “그렇기도 하구려. 그러면 천지신교의 위치는 어디오?” 척발척천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것을 지나가는 듯이 슬쩍 물을 때, “흐흐흐, 그것은 말할 수 없어. 단지 네가 나와 동행한다면 나중에 알 수 있을 것이지만. 그보다 내 제안에 대해서 결정은 내렸나?” “그렇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단리유아의 말에 탄철신수가 초조한 듯이 곧바로, “어떻게?” “당신을 잡아놓고 하나하나 물어보기로.” 칼을 들어 올려 자신을 가리키며 무심히 말하는 모습에, 일수의 기회를 기다리던 탄철신수가 고개를 갸웃거린 채 오히려 천천히 앞으로 다가서면서, “흐흐흐, 그것이 말처럼 쉬울까?” “어렵지도 않을 것이오. 아까 전이라면 몰라도....” “뭐, 뭐라고?” “나 역시 수어검을 펼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오. 계속해서 전력을 다해 싸우고 다시 당신을 뒤쫓으며 신법을 펼친 상태에서 검을 날린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대화가 암수를 기다리던 자신보다 단리유아에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는 것을 알자, 제 꾀에 제가 당했다는 것을 알고 기겁한 채로, “뭐? 이 개자식이, 죽어랏!” 전력을 다해서 앞으로 다가서며 그동안 집중해서 모았던 진기로 탄철신마수의 마지막 초식인 탄철파영탄(彈鐵破影彈)을 펼쳤다. “파팟” 삼 장 여의 거리에서 달려드는 묵청빛의 강환(剛丸)의 모습에도 단리유아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산무귀흔영을 펼쳐 환영만을 남겨놓긴 채, 오히려 실체는 앞으로 다가가며 일순간에 지옥뇌섬벽(地獄雷閃劈)을 펼쳤다. “팟!” 한줄기 도광과 함께 탄철신수의 오른팔이 떨어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가까이 접근하여 단전혈을 뇌전지(雷電指)로 파괴해버렸다. “푸푹” “으윽!” 일순간에 무공을 잃고 팔이 잘린 탄철신수가 상처의 고통으로 상처의 고통으로 주저앉는 순간, “콰쾅!” 그제야 제어력을 잃어버린 강환이 땅바닥에 부딪쳐 폭발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흩어지는 강기와 흙더미를 호신강기로 막아서며, “당신은 또 속았소. 그렇다고 내가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오. 당신이 좀 전에라도 달아날 생각이었다면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오래 쫓지는 못했을 것인데.... 게다가 친절하게 당신이 다가서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리지도 않았을 것이오.” 아무런 동요도 없이 중얼거리는 듯한 단리유아의 어조에 오히려 더욱 울화가 치밀어 오른 탄철신수가 입으로 피를 내뱉으며, “이 더러운 놈! 그렇다고 무공까지 폐지해?” 얼굴로 날아드는 침과 피가 뒤섞인 것을 단리유아가 피할 때, 탄철신수가 원한이 가득한 시선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며, “흐흐흐, 내가 오늘 너 같은 애송이에게 어이없게 당했지만, 그렇다고 나한테서 무언가를 알아낼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마라. 흐흐흐, 단리 미치광이야. 나중에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 말과 함께 온 몸의 혈관이 부풀며 터져나갔다. “퍼퍼퍽!” 단리유아가 가까이 다가가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여서, 전신의 혈관이 터져 곳곳의 갈라진 곳으로부터 선혈이 흘러나와 온몸뿐 아니라 백설이 깔린 땅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보기에 과거 수라혈교의 금단마공중의 하나였던 수라폭혈공(修羅爆血功)의 일종인 것 같았다. 내력이 있었다면 온몸의 살점이 무기가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을 것이지만, 내공이 폐쇄된 상태에서는 자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친 것 같았다. ‘이리되면 서로 주고받은 것 같군. 본래부터 죽일 생각이었으니 나에게는 별다른 손해가 없다하지만, 그래도 이런 지독한 수단까지 쓸 줄은 몰랐는데....’ 한동안 처참한 모습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장력으로 땅을 파헤쳐 한쪽의 팔과 함께 파묻고, 싸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파헤쳐진 땅을 고른 다음에 다시 장내를 떠나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서도 태울 수 있는 것은 태우고 나머지 물건들은 한곳으로 모아 깊게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자, 장내를 떠나 임시로 머무는 산등성이로 향했다. 너무 어두운 한밤중이라 어딘가 빠뜨린 것이 있을 것이지만, 나머지 일들은 날이 밝았을 때 다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알아차린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자신도 아까 무리해서 수어검을 펼친 후이라 운기행공하여 심신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어차피 내일도 오늘과 같은 싸움이 이어질 것이고, 오히려 점점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이니.... ******* 쓰다보니 예상보다 길어져서 늦었습니다. 너무 길어져서 어딘가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잘못된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오타나 오류가 보이시는 분들은 지적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차가랑제(嵯駕朗梯)에서의 낙하(落下) 차가랑제(嵯駕朗梯)에서의 낙하(落下) 1 선발대와 싸운 다음날 아침 단리유아가 미처 싸움의 흔적을 없애기도 전에 일단의 고수들이 감포특협로(甘暴忒峽路)를 통과하여 공터로 들어섰다. 때마침 운기행공을 마치고 아래로 내려가려던 단리유아도 그 모습에 다시 신형을 숨긴 채로 주시하고 있었다. ‘저 자들은? 본대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어찌된 것이지? 빨라도 정오경이나 되어서 도착할 줄 알았는데? 벌써 이곳의 소식을 알았단 말인가? 살아난 자가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빠르게 도착할 수는 없을 터인데?’ 본래 어젯밤의 격전으로 모두 죽었지만, 하루에 세 시진마다 한 번씩 하기로 했었던 연락이 없는 것을 보고 이상이 발생했음을 짐작한 천지신교의 고수들이 새벽녘부터 전력으로 이동하여 도착한 것이었다. 속속들이 모여드는 고수들의 수를 보며 단리유아도 이미 일이 틀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처럼 얼마가지 않아 공터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찼던 것이다. ‘아무래도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겠군. 곧 이 근처까지 수색할 것 같으니. 나중에 밤이 되면 다시 기회를 노리는 것이 좋겠어.’ ‘어제 그자에게 천지신교의 위치를 알아냈다면 당장 이곳에서의 싸움은 별 소용이 없으니 그냥 천축으로 달아나고 볼 텐데....’ 어젯밤 탄철신수를 붙잡아놓고도 제대로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정도의 인물이 단독 행동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어제와 같은 암습이 아니고는 혼자서 따로 마주칠 기회도 거의 없을 터였다. 미처 자신이 손쓸 사이 없이 벌어진 일인데다 더구나 수라폭혈공을 펼쳐 자폭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힘들여 손아귀에 잡아놓고 보니 잠깐 방심한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이번 일을 교훈삼아 다음번에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먼저 전신대혈을 제압하여 그러한 수법도 통하지 않게 만들 생각이었다. 잠시 지켜보던 단리유아가 생각을 멈추고 짐을 챙겨 은신처를 옮기고 있을 때, 장내에 도착한 천지신교의 사람들은 눈앞에 속속들이 들어나는 상황에 모두 경악하고 있었다. 추종술에 일가견이 있는 고수들이 얼마가지 않아 눈 밑에 파묻혀있던 조각난 시체의 파편들과, 무기들을 오래지 않아 찾아내었고, 조금 후에는 탄철신수(彈鐵神手) 체평고(遆評暠)의 시신까지 찾아냈던 것이다. 그나마 시신이라도 온전히 보존한 것은 체평고 정도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산산이 조각나거나 사지가 각기 곳곳에 흩어져있었다. 단리유아가 처음 암습으로 죽인 자들도 격전의 와중에 흩어지는 강기에 의해 박살나서 제 모습을 지닌 것이 없었다. 탄철신수만이 따로 떨어져 죽은 것을 두고 천지신교와 소뢰음사 사이에 한동안 설전이 벌어졌지만, 곧 서로가 이런 일을 벌인 흉수를 찾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수하들이 흩어져 사방을 뒤지고 있는 것을 보고, 수뇌부에 해당하는 십대마불 중의 나머지 네 명과 열성전의 고수 다섯 명은 다들 침중한 기색이었다. 오늘의 일을 보건대 단리유아가 먼저 공격해온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오십여 명의 고수가 일순간에 몰살될 수 있는지는 다들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선발대라고는 하지만 그들만으로도 웬만한 중소문파를 소리 없이 없애고도 남을 정도의 전력이었는데도, 아무리 뜻밖의 암습이었다고 하지만 별다른 저항의 흔적도 없이 몰살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들과 동격의 고수 두 명이 함께하고 있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모두가 마음 한 구석 불안감이 치솟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칠일 동안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 일대를 밤낮으로 누비며 싸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높고 험준한 지형상의 불리함과 계속되는 악천후에 피해만 늘뿐 제대로 포위망을 구축할 수도 제대로 싸울 수도 없었다. 단리유아를 일대일로 막을만한 자가 없으니 아무리 고수들로 이루어진 추적대도 피해만 속출하여 사상자만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 따로 흩어져 다니다가는 단리유아의 습격에 살아남지 못해서 최소한 오십여 명이 한 무리가 되어 움직였는데, 그러다보니 추적하여 이동하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동안 수뇌부의 고수 두 명과 수하들 백여 명이 죽었는데 단리유아의 습격으로 죽은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눈사태나 협곡 사이의 갈라진 틈을 이용한 함정으로 입은 피해가 더 컸다. 습격한 후 달아나는 단리유아를 보고 이제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세 좋게 소리치며 뒤쫓다가, 갑자기 터져 나온 단리유아의 사자후에 의해 눈사태가 일어나거나 눈이 뒤덮인 땅이 꺼져 한꺼번에 많은 고수들이 죽어버렸던 것이다. 제대로 단리유아와 싸워보지도 못한 채로 피해만 늘어가니 사기만 날로 저하되어, 이제는 수뇌들 사이에서도 열심히 뒤쫓으려는 의지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수하들도 몇 명씩 나뉘어 제일 선두에서 정찰하는 일은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두려움이 팽배한 상태였고, 다들 이제나저제나 그만 포기하고 빨리 되돌아가기를 바랄뿐이었다. 게다가 날씨와 식량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천지신교 일행에게 불리한 일이 산적해 있었다. 본래 단리유아의 예상행로를 니파라국의 단뢰탑(丹雷塔)으로 잡았던 그들로서는 될 수 있는 한 빠른 속도로 희마랍아산맥을 통과하고자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출발했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주목랑마봉 일대의 춥고 험난한 지형에서 계속 싸우게 되었는데, 추위를 막는 것은 따로 치고라도 열흘 치에 불과했던 식량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또 이 일대는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대다가 산하의 눈이 없는 곳도 나무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으니 불을 피울 땔감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다보니 눈 덮인 땅바닥에 털가죽으로 감싼 채 그대로 잠을 자거나 딱딱하게 얼어붙은 육포를 눈과 함께 씹어 삼키는 것이 다였는데 그 괴로움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준비해왔던 야크 똥으로 저녁에만 잠깐 물을 끓여 한 모금의 따뜻한 차로서 추위를 몰아내고 있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마시기에는 태부족이었고 그것도 이젠 그만둬야할 것이 확실했다. 아무리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라고 해도 이런 일이 계속 이어지니 이제는 단리유아와 싸우는 것보다는 이런 추위와 배고픔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런 십일월 구일 저녁, 흩어져 단리유아를 뒤쫓던 추적대가 산중턱의 한 동굴에 모여들었다. 이제는 일곱 명으로 줄어든 수뇌부도 이렇게 가다가는 오히려 자신들이 몰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속에 앞으로의 일을 어찌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식량이 떨어져가니 어떤 식으로든 오늘 중으로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중앙의 불타오르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일곱 명의 고수가 둘러앉아 있었다. 그나마 이들이야 야크똥을 말린 것에 불을 붙여 몸을 녹이고 있었지만 나머지 수하들은 제대로 불도 피우지 못한 채로 추위 속에 떨고 있었고, 이것이 마지막이라 할 수 있으니 다음날부터는 이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처지가 될 것이다. 다들 며칠간의 일로 낙담하여 멍하니 불꽃이 춤추는 것을 보고만 있을 때, 이제는 네 명만 남은 천지신교의 고수 중에서 얼굴의 오른쪽 볼에 동전만한 검은 점이 있는 육십대의 왜소한 늙은이가 검은 철장(鐵杖)으로 불을 뒤집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열성전의 고수 중의 하나로서, 오 척의 철장으로 펼치는 일점쇄곤십팔장법(一點碎坤十八杖法)으로 영하(寧夏)일대에서 주로 악명을 떨쳤던 일점쇄장마(一點碎杖魔) 나첨치(那瞻致)였다. “다들 정신들 차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의논해보십시다. 간절히 우리만 쳐다보고 있는 수하들을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단안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이니.” “그래서 나형(那兄)은 이대로 그냥 되돌아가자는 것이오? 마치 두려움에 질려 쫓겨나듯이 이런 꼴로?”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산만한 체구의 인물이 곧바로 소리치듯이 되물었다. 본래부터 천지신교 출신으로서 패력거산장(覇力拒山掌)이 일절인 패력신장(覇力神掌) 여불과(呂不過)라는 인물이었는데, 천지신교 내에서도 융통성이 없이 꽉 막힌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내 말은 이제는 어떻게든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뿐이오. 식량도 떨어져가는 대다가 수하들도 기진맥진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죽어나가는 것만 더 늘어날 뿐이니, 이대로 가다가는 그냥 달아날 자도 생길지 모르오.” 천천히 설명하듯이 현재의 상황을 말하는 나첨치의 말에 여불과가 오히려 성이 나서 바로 따지고 들었다. “아니 본교의 수하 중에 그런 놈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나형은 도대체 본교의 수하들을 어떻게 보고 그렇게 단정하듯이 말하는 것이오? 그리고 이대로 포기한 채로 돌아간다면, 나중에 본교에 돌아가서 쏟아지는 문책은 어찌할 것이오? 당신이 모든 책임을 질 것이오? 흥! 이래서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은 영....” “뭣이? 지금 말이면 다인 줄 아시오? 아무리 서열이 나보다 좀 높다고 그렇게 막말을 하다니....” “그렇다면 어쩔 텐가? 설마 이 자리에서 하극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 이....” 비웃으며 일부러 화를 돋우는 듯한 여불과의 태도에 나첨치가 분통이 터졌지만, 엄연히 자신보다는 서열이 높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이 앞뒤 꽉 막힌 빌어먹을 멍텅구리 같은 놈아! 지금은 너희들의 세력이 강해서 참고 있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우리 쪽의 세력이 더 커진 후에도 그딴 소리나 하는지 두고 보자.’ 나첨치가 이렇게 속으로만 이를 갈며 분을 삼키고 있을 때, 한쪽의 빼빼마른 중년 서생이 두 사람을 말리고자 끼어들었다. 겉보기에는 중년의 나이이지만 이미 칠십에 가까운 사람으로 반갑자 전에 각종 사술과 귀계로써 강호에 악명을 떨쳤던 사심제후(邪心制侯) 담이호(曇弛弧)였다. “두 사람 모두 그만 하시오. 지금이 우리끼리 싸울 때요? 이렇게 다른 문파의 사람들도 있는 마당에?” “하지만.....” 여불과가 다시 떠들려고 할 때, 지금까지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던 검버섯이 핀 얼굴과 메부리코의 백발노인이 반쯤 쉰 듯한 목소리로 조용하게 웅얼거렸다. 결지검마(缺指劍魔) 첩목풍(牒凩風)으로서 쇠꼬챙이 같은 검으로 펼치는 잔혼찬심검법(殘魂鑽心劍法)이라는 마검을 익히기 위해서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없애버린 것으로 유명했던 사람이었다. “그만 조용히!” 여불과도 자신보다 거의 이십여 년 선배인 첩목풍의 말에, 비록 불만의 기색은 완연했지만, 더 이상 말이 없이 조용히 앉았다. 사실상 이들 중에서 서열이나 배분을 따질 때 가장 높은 사람이 첩목풍이었고, 무공 또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강했다. “첩선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렇게 가다가는 피해만 커질 뿐, 단리유아 그 놈을 잡는 것은 요원하기만 할뿐으로 보이는데?” 다들 조용할 때 담이호가 첩목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불꽃만을 응시한 채로 첩목풍이 반문한다.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하는가?” 이에 담이호가 이미 생각해두고 있던 바가 있었던지 곧바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음, 제가 보기에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봅니다. 이대로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과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단리유아를 끝까지 추적하여 죽이는 길 말입니다.” “무슨 소리요? 돌아가는 것은 아예 생각도 마시오. 이대로 돌아가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할 것이오?” 곧바로 끼어들어 떠드는 여불과의 큰 소리에 잠시 다들 말이 없을 때, 첩목풍이 담이호에게 다시 묻는다. “어쨌든 돌아가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 할 수 있네. 피해가 크지만, 단리유아와 맞설만한 고수가 아직 이 자리에 일곱이나 남아있네. 그런 상황에서 돌아간다면 누구도 이 일을 납득하지 못할 걸세. 아무리 상황이 어려웠다고 설명해보아도 말이야.” “그것은 저도 알고 있지만.... 솔직히 저는 이번 일이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었습니다. 게다가 이제까지의 상황도 영 이상하기만 한 것이 마치....” 담이호가 머뭇하며 말끝을 흐릴 때, 나첨치가 끼어들어 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시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단리유아를 죽이는 일이 급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네. 윗분들이야 그놈의 무공발전에 대해서 우려하고 본교의 기밀을 알고 있으니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아무리 단리유아가 고수라하지만 나중에 본교가 천하제패를 한 뒤에는 그놈 혼자서 뭘 어쩌겠나? 그보다 지금 본교에 더 급한 일은 내부의 단결이 더 필요한 상황으로, 혈련마교와 무외신궁을 단속하고 신교본파와 외부영입파간의 알력을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지. 게다가 무외신궁이나 혈련마교 모두 따로 꿍꿍이 속이....”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첩목풍이 손을 들어 올리며 중단시킨다. “그만! 그 문제는 더 떠들지 말게. 상부에서 결정이 나기 전에는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고, 그런 일을 왈가왈부해서 자네에게도 결코 좋을 것이 없을 것이네.” 첩목풍의 말에 담이호가 말을 멈추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선배, 이렇게 가다가는 대업을 이루기 전에 우리끼리 내분에 휩싸여 자멸하고 말 것이오. 태상교주가 폐관을 깨고 나타난다면 다 해결될 것이라 낙관하고 있지만, 사실 현경(玄境)이라는 것이 무작정 폐관수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 세월에 나설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소?’ ‘게다가 세월이 너무 흐르면 태상교주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지 않겠소? 혈련마교도 단순한 외형으로는 본교보다 커진지 오래고, 무외신궁의 그 교활한 놈도 무슨 생각인지 최근 비밀리에 수라혈교(修羅血敎)의 터전이었던 무릉산(武陵山) 일대를 뒤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생각에 잠긴 담이호를 보며 첩목풍이 다시 되묻는다. “그보다 이제까지의 상황이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혹, 그동안 우리가 모르던 사실이라도 알아챈 것이 있나?” 첩목풍의 질문에 담이호가 자신만의 생각에서 깨어나, 눈썹을 찌푸린 채로 지난 일을 되짚으며 말한다. “첩선배는 어딘가 이상하지 않소? 아무리 단리유아 그놈이 자신을 감시하던 수하들로부터 우리가 포위하여 공격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정확히 어떤 곳에 얼마나의 고수가 포진한 것은 모를 것은 아니오? 설혹 수하들이 그런 사실을 얘기했다고 해도 우리가 누구인지는 결코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데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안다는 듯이 마치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듯이 도주하고 이 길로 우리가 올 것이 틀림없다는 듯이 기다렸다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지 않소?” 확실히 단리유아가 고문한 흔적이 수하들의 시신에서 발견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때 감시하던 수하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천지신교의 일반제자들에게는 금제가 걸려있어서 고문으로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다른 말을 내뱉는 경우에는 곧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그때에는 단리유아가 알아차렸다는 것이 중요했고 그래도 어느 정도의 정보는 넘어갔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노리는 사실을 알고 단리유아가 천축으로 급히 달아날 것으로만 여겼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추적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로 이상했던 것이다. 담이호의 말에 첩목풍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나첨치가 먼저 끼어들어 되물었다. “그래도 니파라국으로 향하는 길은 몇 없으니, 우리가 이 길로 이동하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네. 그놈 역시 중원인이니 이 지역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 일 텐데도 어떻게 지름길로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이 길로 지날 것을 짐작했다고 해도 그 길을 정확하게 찾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게다가 우리가 이동하는 시간은 또 어떻게 알아맞힌다는 것인가?” “그럼 담선배의 말은?” 놀라 되묻는 나첨치의 말에 담이호가 확언하듯이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이번 일은 시작부터가 어딘가 이상했네. 그놈이 눈치가 빨랐다고 해도 자신을 감시하던 자들을 그리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런 이역만리에서 이방인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주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결코 그런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닌데도, 본교가 자신을 감시하는 것을 안다는 듯이 감시하던 본교의 수하들만 찾아내어 죽였단 말이야. 이것은 그놈이 우리를 알고 미리 의식하고 있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일 것이네.” 담이호의 말에 다들 생각에 잠겨서 지난 일을 되새겨보고 있었다. 확실히 단리유아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많이 있었다. 자신들은 단리유아가 서장에 들어서기 전보다 먼저 움직였으니 단리유아가 알 수 없을 것인데다가, 미리 자신들이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그런 움직임은 보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럼 담선배는 누군가 우리가 공격한다는 기밀을 흘렸다는 것이오? 그게 도대체 누구요?” 여불과가 제일 먼저 소리치고, 다른 이들도 역시 담이호를 주시한다. 잠깐 담이호가 주위를 돌아보다가 소뢰음사의 삼대존자를 의식해서 전음으로 이야기한다. <이번에 척발척천의 요구로 소뢰음사와 동행하고 대뢰음사를 없애주기로 했네. 확실히 그놈의 말대로라면 우리도 손해가 없지. 나중에 다시 소뢰음사의 일로 꾸민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이때까지의 일을 따져보면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을까?> <그거야....> 무심코 여불과가 대답하려다가 흠칫한 기색으로 말끝을 흐린다. 다들 생각해보지만 담이호의 말처럼 척발척천이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놈은 겉으로는 본교에 충성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원한을 품고 이를 갈고 있음을 본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세. 그래서 다들 그놈을 제거하고 싶지만, 딱히 흠을 찾을 수 없고 공만 크니 그냥 두고 볼 뿐이었지.> 다들 척발척천을 의심하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첩목풍이 먼저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말한다. “지금은 누가 그런 정보를 흘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네. 설사 그놈이 각종 정보를 누설했다고 해도 지금 당장에는 어쩔 수 없네. 그것은 되돌아가서 다시 깊이 파고들 문제야. 그보다 당장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 단리유아 그 놈을 잡을 것인가 하는 것이네. 자네는 귀계로 이름 높았으니 그 문제에 대해서나 이야기해보게.” “하지만 선배....”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담이호가 말을 이으려다가 멈춘다. ‘만일 내 생각대로 척발척천 그놈이 본교를 배반하여 단리유아 에게 정보를 넘겼다면 이건 결코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이곳 서장지역은 곧 그놈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 분명하니, 정말로 본교에 반할 생각이 있다면 분명코 우리들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오. 나라도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기지 않을 테니.... 난 오히려 단리유아를 처리하는 일보다 그놈이 우리의 뒤통수를 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크단 말이오. 차라리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는 것이 좋을 텐데.....’ 걱정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막상 그대로 돌아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척발척천이 뒤를 노리고 있다는 짐작만으로는 물러설 수 없었고, 단리유아를 그대로 두고 도망치듯이 떠나는 것도 나중에 천지신교에 돌아가서는 문책을 받을 생각을 하면 그만 멈출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들 단리유아를 잡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담이호에게는 오히려 척발천척에 대한 일이 걱정스러웠고 마치 자신의 불길한 미래가 보이듯이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하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차가랑제(嵯駕朗梯)에서의 낙하(落下) 차가랑제(嵯駕朗梯)에서의 낙하(落下) 2 한편, 천지신교의 인물들이 이렇게 서로 얘기하고 있을 때, 소뢰음사의 인물들은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은 채로 서로 속닥이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로서는 이번 일로 자신들의 사형제가 두 사람이나 죽었음에도 이제 그만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강했는데, 한편으론 단리유아에 대한 복수심도 들끓었지만, 더 이상 제자들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고 본래 목적인 대뢰음사의 일도 끝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첩목풍의 말에 담이호가 걱정스런 상념에서 깨어나 혼자 한숨을 내쉬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 소뢰음사의 삼대존자를 향해 말한다. “이 일은 먼저 세 분 존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소뢰음사에서 이번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십대마불 중의 다섯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이미 두 명이 죽고 지금은 세 명만이 남아있었다. 이들은 모두 핏빛의 승포를 입고 있었는데 넷째에 해당하는 누하마불(漏河魔佛), 일곱째에 해당하는 마타마불(磨拖魔佛), 아홉째에 해당하는 치리마불(恥罹魔佛)이 그들이었다. 담이호의 말에 워낙 뚱뚱하게 살이 쪄서 한기가 몰아치는 동굴 속에서도 계속해서 더워죽겠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향해 부치고 있던 누하마불이, 수인을 맺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눈 깜짝할 시간동안만 대충 흉내만 내듯이 수인을 맺은 후에 응답한다. “혈뢰바라밀! 말씀하시구려. 귀교의 말씀이라면 어떤 말이든지 들어보아야겠지요. 틀림없이 좋은 말일 테니.” “허허, 누하존자께서는 과연 위엄이 넘치시는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하시고 계시다니.” 느긋한 태도의 누하마불의 모습에 여불과가 감탄 반 비웃음 반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할 때, 오히려 기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누하마불이 반쯤 살 속에 파묻힌 콩알만한 눈을 깜박이며 응답한다. “흘흘흘! 뭘 이 정도 가지고.... 오히려 땀이 나지 않아서 난 더 좋은데. 다른 때였다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을 텐데, 이 서늘한 기운에 땀이 그리 나지 않으니. 우흐흐흐, 앞으로도 본존은 종종 이곳을 찾아와야할 것 같소이다. 그대도 나에 못지않으니 다음에도 함께 오는 것이 어떻소?” 오히려 놀리는 듯한 누하마불의 맞받아치는 말에 여불과가 발끈하여 나서려 할 때, 첩목풍이 노려보듯이 묵묵한 시선으로 응시하여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이때 담이호가 나서서 자신은 별 상관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얼굴로 말한다. “과연 존자의 법력은 알아 모셔야 할 것 같소이다. 탄복, 탄복하는 바입니다.” 이 순간 한쪽에서 계속해서 인상을 찌푸린 채로 쏘아보고 있던, 신경질적인 생김새의 마타마불이 끼어들어 짜증이 더덕더덕 뭍은 음성으로 소리친다. “그만하고 빨리빨리 본론이나 떠드시오. 아니면 그냥 어서 이 지겨운 곳을 떠나기로 하든지. 혈뢰바라밀! 자비로운 혈불께서는 결코 이런 곳에 오고자 하지 않을 텐데, 현생불인 본존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곤란함을 겪어야하다니..... 오, 자비로운 혈불이시여....” 짜증을 내다가 나중에는 혼자서 계속 한탄하며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천지신교의 사람들이 한동안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 바라보다가, 그래도 이제는 몇 번 보아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고 넘겼다. “존자, 먼저 귀사의 제자 중에 이 주목랑마봉 일대의 지세를 아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흘흘흘. 혈뢰바라밀! 자비로운 혈불의 은혜로움으로 마침 그런 사람이 몇 있지요. 하지만 그런 제자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소? 여태까지 포위망을 구축하고 추적하는 데에 그 아이들의 도움이 있었어도 별 효과가 없었는데?” 느글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누하마불이 반문함에도 그에 대해서는 별달리 응답하지 않은 채로 담이호가 재촉한다. “그러면 지금 당장 그런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 주십시오.” “그러시구려.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 여보게, 아홉째. 자네가 좀 불러오게. 나는 몸이 이래서 움직이는데 너무 시간이 걸릴 테니.” 누하마불이 한쪽에 어린아이 같이 쪼그려 앉은 채로 별 말이 없던 치리마불을 향해서 부탁한다. 이에 치리마불이 고개를 숙인 채로 조그맣게 웅얼거린다. “.... 본사에서 신법이 가장 빠른 사람이 넷째 사형이면서....” “아홉째야, 안 들린다. 뭐라고?” “갈게요. 가면....” 귓구멍을 후비며 누하마불이 되물었을 때에야 치리마불이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상체를 잔뜩 웅크린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밖으로 향하는 모습에 누하마불이 혀를 차며 말한다. “끌끌끌. 불쌍한 아홉째. 저리 소심하다니. 이건 틀림없이 대사형이 어릴 적에 너무 괴롭혀서 기가 죽었기 때문일 거야. 혈뢰바라밀! 자비로운 혈불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두 주먹을 포개며 혈불을 찾는 모습에 다들 찡그린 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 소뢰음사의 사람들은 하는 행동이 모두 기괴해서 그동안 뜻밖의 행동으로 천지신교의 사람들이 놀라는 일이 많았었다. 보름이 넘게 함께하면서 그런 일을 계속 겪다보니 이제는 만성이 될 만도 하건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저절로 안색이 찌푸려지는 것을 다들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반각이 미처 못되어 치리마불이 사십대의 잿빛가사를 걸친 승려를 대동하고 되돌아왔다. 다가온 승려가 수인을 맺으며 먼저 누하마불과 마타마불에게 인사를 여쭌다. “혈뢰바라밀! 두 분 존자님께 미라타(彌羅陀)가 인사드립니다. 귀혈환하시길!” “흘흘! 마침 자네가 왔군 그래. 자네도 그리되길 바라네.” 누하마불은 즐거운 표정으로 응답했지만, 오히려 마타마불은 역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소리친다. “입 닥쳐, 이 죽일 놈아! 난 더 오래 살고 싶단 말이다. 네놈은 감히 나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하다니, 벌써 내 금기를 잊어 먹었더냐?” “죄, 죄송합니다. 칠존자 님. 존자님 앞에서는 삼가야 함을 어리석은 제자가 잠시 잊었습니다.” 잔뜩 겁을 집어먹고 곧바로 오체투지 하며 잘못을 비는 모습에 누하마불이 마타마불을 향해 혀를 차며 타이른다. “쯔쯧, 사제는 어찌 그렇게 트집만 잡으려하나? 본사의 사람에겐 더없는 축복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흥! 그러는 사형이나 빨리 혈불께 귀의하시오. 정말 꼴불견 같은 그 모습을 평생 동안 옆에서 본 것만 해도 지겨워 죽겠으니. 나는 오래 오래 살아서 그냥 늙어 죽을 테니. 젠장할! 여기가 본사였고 대사형의 제자만 아니었다면 저놈을 당장에 반쯤 죽여 놓을 텐데....” 누하마불의 타이름에 오히려 흘겨보며 마타마불이 소리치다가, 자리에 엎어져서 잘못을 비는 제자를 노려보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찬 후에 제자를 일어서게 하여 사심제후 담이호에게 말한다. “이 아이의 출신이 이 근처이고 이곳에서 수련을 쌓은 적도 있으니 이 일대의 지리에 대해서는 가장 훤히 알고 있다할 것이오. 물어볼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물어보시구려.” 한동안의 소란스러움에 다른 사람들은 못마땅한 기색이 완연했지만, 담이호는 별 상관이 없다는 듯이 곧바로 누하마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후 질문을 시작했다. “자네가 이 일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하니 내가 곧바로 묻겠네. 어떤 두 지점 사이에 다른 곳으로는 움직일 수 없이 오직 한 길만이 이어진 곳이 있는지 알고 있나? 단, 협곡 같은 곳은 제외하고 말이야. 그런 곳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 그렇지?” 꼭 그런 곳이 있어야한다는 듯이 강조하며 되묻는 담이호의 말을 누하마불이 통역하여 전하니, 중년의 승려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다가 곧 배례하며 뭐라고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동안 설명을 듣던 누하마불이 그 말을 간추려서 담이호에게 다시 전했다. “이 아이가 말하기를 이곳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과 서쪽의 수릉마가봉(垂陵瑪加峰) 사이에 마침 그런 장소가 있다하오. 마치 구름다리처럼 두 봉우리 사이를 외길로 된 석벽이 이백여 장에 걸쳐 이어져 있는데, 멀리서 볼 때는 두 설봉(雪峰) 사이를 연결하는 하얀색의 다리처럼 보여서 차가랑제(嵯駕朗梯)라 부른다고 하오.” 누하마불의 말에 담이호가 얼굴 가득 기쁜 기색을 드러내더니, 곧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하하하, 잘 됐소. 잘 됐어. 하늘이 우리를 아직 버리지 않았나보오. 그런 곳이 있다면 더 이상 이렇게 단리유아 놈을 쫓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소.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이오.” 혼자서 기뻐 떠들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여불과가 끼어들어 툴툴거린다. “이보시오, 담선배. 무슨 좋은 일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 아니오. 어떻게 계속 혼자만 떠드시오?” “그래. 그래. 내가 잠시 정신이 없었군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진정한 후, 담이호가 주위에서 자신만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한다. “현재 우리가 단리유아를 포위하여 공격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이동 속도요. 소수의 인원으로는 도저히 그놈을 막을 수 없어서 계속해서 오십 명 이상씩 무리지어 이동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막상 눈앞에까지 그놈에게 다가갔다고 해도 계속해서 공격하기는 쉽지 않았소. 바로 잡힐 것 같으면서도 그놈이 먼저 달아나버리고 몇 명만으로 추적하다가 당한 것이 지금까지의 일이오. 함정을 파서 협곡으로 몰아넣으려 해도 놈이 워낙 약아서 번번이 우리의 의도와 흔적을 알아차려서 실패했었소.” “지금까지의 일을 되새겨 누구 복장 터지게 할 일 있소? 어서 계획을 얘기해보란 말이오.” 끼어들어 말을 중단시키며 떠드는 여불과의 재촉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담이호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놈을 잡을 수 없소. 내 계획은 이렇소.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따로 세력을 갈라서 미리 아까 말한 차가랑제의 건너편 수릉마가봉 쪽으로 보내는 것이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무리하게 단리유아 놈을 공격하는 대신에 단지 그놈을 그쪽으로 몰아붙이는 데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오. 물론 누군가는 미끼가 되어 그놈을 그쪽으로 유인해야하오. 그 외의 사람들은 다급히 구원하고자 그 뒤를 추적하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나첨치가 철장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과연 좋은 생각이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여우같은 놈도 어쩔 수 없을 것이오. 만일 놈이 차가랑제에 들어서기만 한다면 하늘로 날아가든지 땅속으로 꺼지지 않는 한 결코 달아날 길은 없을 것이니, 그때 우리가 달려들어 공격한다면 아무리 그놈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나머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계책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을 때,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첩목풍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자네의 생각은 뛰어나지만 말이야. 이 계획에는 큰 맹점이 있네. 지금도 우리는 세 명 이상 모여서 행동하고 있네. 아니 사실상 여기 세 분과 우리 네 사람이 각기 반분하여 무리를 이끌고 있는 상황이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일대의 고수를 빼돌린다면 남아서 그놈을 쫓는 쪽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네. 또 누가 미끼가 되어서 놈을 유인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계획이 어긋나면 무의미한 죽음이 될 것인데?” 첩목풍의 말처럼 막상 그 일을 떠올리자 다들 서로 간에 시선을 회피한 채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담이호가 곧 그런 모습에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어차피 우리로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소. 모험을 하지 않는 이상에는 이렇게 질질 끌려 다니다가 피해만 커질 뿐이고, 결국에는 우리가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서는 길밖에 없음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오. 또 식량문제도 있으니 더 길게 시간을 끌 수도 없소.” “.....” 다들 말이 없이 생각에 잠긴 모습을 바라보며 담이호가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우선 건너편의 봉우리로 갈 사람은 최소한 오십 명의 고수와 우리들 중에서 세 명 이상은 가야 할 것이오. 서둘러 가서 달아나지 못하게 막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오. 남는 사람들은 백여 명의 고수에 네 사람 뿐인데, 지금처럼 둘로 나누어서 추적하듯이 하다가 오히려 한쪽은 그놈에게 일부러 당한채로 쫓겨가야하오. 물론 네 명 중에서 최소한 한명은 죽음을 각오한 채로 그쪽을 이끌어야하오.” 한쪽에서 설명을 듣고 있던 누하마불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흘흘흘, 좋소. 어차피 그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그 수밖에는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래도 담시주의 계획은 문제가 있소. 갑자기 오십여 명이 빠져나간다면 그놈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소? 얼마나 약은 놈인지 다들 잘 알고 있듯이, 분명 우리가 함정을 파고 있음을 눈치 챌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 누하마불의 질문에 담이호를 바라보며 답을 재촉하듯이 다들 주시하고 있었다. 담이호가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놈도 대충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있을 것이오. 식량이 떨어져가고 땔감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 오십여 명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오기 위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할 것이오. 만일 그 일을 막으려고 놈이 공격한다면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오. 어차피 한동안은 그렇게 꾸며서 은밀히 그 뒤를 받쳐서 쫓아야 할 것인데, 오히려 자연스럽게 함정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담이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계획에 찬동했다. 남은 일은 누가 건너편으로 갈 것인지와 미끼 역을 누가 맡게 될 것인지에 대한 결정만이 남아 있었다. 서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소뢰음사와 천지신교 쪽으로 양분된 답답한 상황에서 첩목풍이 먼저 말을 꺼내 결단을 내렸다. “세 명은 가야하니 아무래도 세분 존자께서 적당할 것 같소이다. 그 외에 미끼 역은 내가 맡기로 하겠소. 그래도 내가 제일 무공이 높으니 살아남아 그놈을 차가랑제 쪽으로 유인할 가능성이 가장 클 테니.” 그 결정에 곧바로 나첨치와 여불과가 반대하며 떠들었다. “아니, 첩선배. 선배가 이번 일의 책임자인데 그러는 것은....” “맞소. 차라리 내가 대신 그 역을 맡겠소.” 첩목풍이 이런 일행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뢰음사의 삼대존자를 향해서 말한다. “나의 의견에 존자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그 일을 맡아주시겠소?” 누하마불이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인을 맺으며 응답한다. “혈뢰바라밀! 첩시주의 결단에 본존은 감탄, 감탄했소이다. 아무렴, 첩시주의 말대로라면 남는 여러분들보다 우리의 위험은 별로 크지 않을 텐데 어찌 본존이 승낙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이에 반해서 마타마불은 정신 나간 일이라는 듯이 조롱끼가 다분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흥! 나보다 먼저 본사의 혈불에게 귀의하고 싶어 하는 중원인이 여기 있었군 그래. 그만 포기하고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정말,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을 못해. 혈뢰바라밀! 부디 어서 귀혈환하기를!” 이런 마타마불의 말에 천지신교 쪽의 사람들이 다들 어이없고 화가 나서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 옆에서 말없이 웅크리고 있던 치리마불이 웅얼거리듯이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그래도 위험한데....” 이런 모습에 한손으로 치리마불을 밀어제치며 마타마불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닥쳐! 이 자식아! 짜증나니 크게 말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여태까지 말한 것을 세면 밤하늘의 별들 수보다도 많을 것이다. 저 쪽으로 떨어져, 이 나이만 헛먹은 소심한 울보야!” “.... 사형은 맨날 성질만 내고....” 넘어질 듯하다가 누하마불의 뒤로 숨으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에 마타마불이 화를 내며 소리치고 있을 때, 담이호가 마지막으로 세부사항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번에 움직일 때 소뢰음사의 고수들은 대부분 이곳에 남아야 합니다. 소뢰음사의 고수만 빠져나가면 그놈이 이상하게 여길 테니. 또 여러분도 일반제자들로 변장을 하셔야 하고, 일단 건너편의 수릉마가봉에 가까워지면 대여섯 명 정도는 실제로 식량이나 다른 물건들을 구하러 떠나보내야 합니다. 사흘 이내에 결판이 난다 해도 그때쯤이면 우리의 식량 역시 바닥나게 될 것이니.” 고개를 끄덕여 다들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바로 마타마불이 걸고 넘어졌다. “아니, 본사의 제자들 대부분 이곳에 남겨야한다고?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본사의 제자들만 남겨두어서 어떻게 하려고....” “좀 전에 설명했다시피 갑작스럽게 귀사의 사람들만 빠져나간다면 틀림없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또 세분 역시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마음 놓고 남은 사람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니 몇 명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대다수의 소뢰음사의 고수들은 이곳에 남아서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처럼 보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분과 비슷한 사람들을 이곳에 대신 남겨둘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담이호의 설명에도 성이 차지 않아서 마타마불이 다시 떠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자들을 두고 가라니? 그러다 본사의 제자들만 앞세워 죽어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오?” “아니 본교와 저희들을 못 믿으십니까? 여태까지 함께 했으면서도?” 어이없는데다가 그렇게도 설명했는데에도 계속 시비거는 것 같아서 담이호 역시 얼굴을 찌푸린 채로 점차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마타마불의 이런 태도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누하마불이나 치리마불는 말리지 않은 채로 두 사람의 설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흥! 그거야 눈앞에서 같이 있을 때의 일이고. 우리가 빠져나가 버리면 마땅히 본사를 이끌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대들의 명을 따라야할 텐데 그렇게 된다면 본사의 고수들이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 아니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희를 믿고 승낙하실 것입니까?” “첫째로 본사의 고수들은 후미에서의 습격만 막고 전방으로는 결코 나서게 하지 말 것. 둘째로 밤에도 가장 안쪽에 머무르고 보초나 정찰 나가는데서 빼줄 것. 이상이오.” 이런 마타마불의 무리한 요구가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다가 말을 짧게 끊어서 담이호가 다시 묻는다. “더는 없습니까?” “혈뢰바라밀! 그 정도만 되어도 우리는 만족하오.” 마음에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양보했다는 듯한 태도로 마타마불이 말을 마쳤을 때, 담이호가 승리의 기쁨에 빙글거리는 마타마불을 향해서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하지요. 단 저희 쪽도 한 가지 조건, 아니 양해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알다시피 막상 그놈과 부딪친다면 일일이 그런 것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경우는 저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과 차가랑제에 이르러 싸우게 될 때에는 그런 일을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타마불이 곧바로 반론하여 떠들려는 것을 누하마불이 소매를 잡아 당겨 말리며 담이호의 말에 동의한다. “음, 좋소이다. 우리도 그 정도는 양보해야 서로 공평할 테니.”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 일에 대해 더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해보기로 합시다.” 각자 머리를 맞대고 더 세부적인 일에 대해서 논의를 계속했다. 그렇게 모든 의논이 끝났을 때는 거의 한 시진이 더 흐른 뒤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야 단리유아를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모처럼 얼굴에 희색이 감돌고 있었지만, 담이호는 이 일이 꼭 그렇게 생각하는 대로 끝나지만 않을 것임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어서 마냥 기쁨에 들뜰 수는 없었다. 앞날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은. 특히 강호에서의 머리싸움에 있어서는.... 연(緣) 리지마야(裏智摩耶) 연(緣) 리지마야(裏智摩耶) 1 하늘도 땅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자욱한 미지(未知)의 땅을 한 여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오른 손에는 흰 연꽃을 살며시 움켜쥔 채로 눈처럼 흰 옷을 걸치고, 마치 안개를 타고 흐르듯 사뿐사뿐 가냘픈 몸을 움직이며 천천히 안개 자욱한 길을 걷고 있었다. 티 하나 없이 희고 깨끗한 얼굴은, 비록 한눈에 들어오는 사람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단정한 이목구비가 청신하고 맑은 기품을 절로 일으켜 마치 손에 쥔 연꽃이 여인으로 화신한 것 같았다. 이마에는 중앙에 금강석(金剛石)이 박힌 폭이 반치 정도인 은으로 만든 테를 둘렀고, 머리카락은 하나로 모아 등 뒤로 땋아 내려 허리아래에 이르고 있었다. “여기는?” 처음에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몇 번 본 익숙한 광경이었는지 이내 침착한 안색이 되어서 다시 자신에게 던지듯 물음을 던졌다. “또 이곳이란 말인가?” 살짝 아미를 찌푸리며 자문하다가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섰다. 이어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전방을 향해서 무릎을 꿇으며 맑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어째서 또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여신이시여” 평온하고 일정한 어조였지만 얼굴에는 다소간 귀찮고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 엿보였다. 여인이 물음을 던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방의 안개가 갈라지며, 거대한 연꽃을 타고 앉은 한 여신(女神)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풍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신으로, 한손에는 여인과 같은 연꽃을 들고 다른 손에는 자기병을 들고 있었다. 연꽃 형상으로 형형색색으로 수놓은 옷을 입고 높다란 관을 쓴 채, 그윽하고 자애로운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내 딸, 마야(摩耶)야! 어찌하여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냐?” “주목랑마(珠穆朗瑪) 여신이시여. 전 싫습니다. 그를 만나러 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신의 물음에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리지마야(裏智摩耶)가 고집스레 대답했다. 이런 모습에 여신이 얼굴을 굳힌 채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윽고 표정을 풀면서 다시 나직하게 물음을 던졌다. “정녕 가지 않겠다는 말이냐? 그리 되면 어찌되는지 알면서도?” 다정하게 물어보는 여신의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수그린 채, 마야가 원망스레 대답했다. “자애로우신 어머니, 여신이시여. 왜 제가 그리해야만 합니까? 저는 얼마....” 마야의 한탄하는 말을 가로막고는, 여신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타이른다. “마야야! 내가 몇 번을 말하지 않았느냐? 너와 그는 언제나 같이 윤회(輪廻)를 거듭하는 사이라고. 두 사람 중에서 먼저 한 사람이 윤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너와 그의 운명은 몇 겁(劫)의 생을 다시 산다 해도 항상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단다.” “그렇다 해도 이제와 이생에서 그를 만나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운하기 짝이 없는 저의 생도 이젠 몇 년 남지 않았는데, 혹시라도 그를 사랑하게 되면? 아니, 그 혼자 남게 되어 저를 생각하고 괴로워하게 된다면?” 고개를 들어 처음에는 여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하소연하듯이 되묻다가, 이내 설움이 북받친 듯 눈물 맺힌 얼굴로 자문하고 있었다. 그러한 마야의 모습을 여신이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다가, 이윽고 조금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다시 말문을 열었다. “사랑하는 내 딸 마야야! 나도 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너와 그의 변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느냐? 어느 한쪽이 먼저 윤회의 사슬을 끊고 지상의 업(業)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너희 둘은 항상 같이 윤회하며 괴로움을 당해야하는 것을.” 눈물 젖은 마야의 슬픈 얼굴을 여신이 가엽게 바라보며 말할 때, 마야가 곧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여신이시여, 어차피 그러한 운명이라면 제가 나서서 그를 만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만나야 서로 괴로움만 느낄 사이라면, 차라리 그대로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이 나을 텐데....” 마야의 한탄에 여신이 철모르는 딸아이를 바라보듯이 빙그레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타이른다. “지혜로운 내 딸아! 만나기가 두렵다고 피한다면 다음 생에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느냐? 어느 쪽이라도 먼저 업을 끊어야 하는데, 그대로 또 다시 괴로움을 맛보겠다는 말이냐? 지금보다도 더한 괴로움이 기다릴 지도 모르는데?” 여신의 연이은 반문에도 마야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다시 물음을 던졌다. “여신이시여, 정녕 다른 방법은 없단 말입니까?” “마야야!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신의 말에 마야가 아무 말 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운명대로라면 그와 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겠지만.... 아, 그러나 나중에 닥칠 괴로움은 어찌하란 말인가요?’ 생각에 잠긴 마야를 불쌍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여신이 다시 재촉했다. “그만 일어나 어서 그를 찾아가거라! 너무 늦어 돌이킬 수도 없기 전에. 마야야, 어서!” “....” 이윽고 여신이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져, 미지의 공간에는 마야만이 홀로 남아 울고 있었다. 여신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메아리쳐 재촉하는 가운데, 마야는 고개 숙인 채 아직 만나지도 않은 그와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리에 누워 잠든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던 마야는 누군가 자신을 흔들며 소리치는 목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다. “마야공주(摩耶公主)님! 마야공주님! 무슨 일이세요? 마야공주님!” 시끄럽게 계속 소리치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눈물 때문인지 천정의 연화문양이 일그러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꿈속의 일을 떠올리며 앞으로 어찌할지 생각해보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마음만 답답할 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렇게 눈을 뜬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 마야를 보고, 그제야 놀람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침상 곁에서 소리치던 청색의 사리를 입은 소녀가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마야공주님! 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낮잠을 주무시면서 눈물을 흘리다니.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몇 년 동안 사람들과는 말도 하지 않으셨던 분이 지난 며칠 동안에는 잠만 주무시면 그러니 말이에요. 지금도 혹시나 해서 와보았는데, 역시나 눈물을 흘리고 계시잖아요? 도대체 어찌된 일이세요? 소비(小婢) 라소차(喇笑嗟)에게 말해주시면 안돼요? 참, 말을 하지 않으시지. 그러면 살짝 글로 써 주셔도 되는데?” 대리석으로 지어진 실내는 대략 십여 평 정도 되었는데, 동쪽으로 침상이 놓여있었고 그 바로 곁에 폭이 오 척 정도 되는 팔각의 창문이 있었다. 중앙에는 두 명이 마주앉을 수 있는 자그마한 원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침상이 있는 동쪽을 제외한 사방의 벽을 따라서 수많은 책들이 꽂힌 서가가 이어져 있었다. 침상 쪽의 나머지 부분에는 각종 악기와 무기류가 각각 구분되어 걸려 있었는데, 중원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본래 성모궁(聖母宮)의 제 이공주인 리지마야(裏智摩耶)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밝고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자신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에는 사람들과 말도 하지 않은 채 거의 자신의 거처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무공이나 지혜, 품성 등을 따져보았을 때 다음 대의 궁주로서도 유력했지만, 모든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유폐하다시피 한 상태로 한쪽에 떨어진 별궁에 라소차를 비롯한 다섯 명의 시비와 살고 있었다. 완전한 이름은 리지마야였지만, 대부분은 그냥 줄여서 마야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제 십오 세가 되가는 라소차는 마야의 시중을 드는 시비로써, 주근깨 가득한 까무잡잡한 얼굴에 조그마한 키를 지닌 장난 끼가 다분하고 수다스러운 소녀였다. 본래는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 일대에 위치한 차파족(遮擺族) 출신이었는데, 십여 년 전 라소차의 부모가 성모궁의 은혜로 목숨을 건진 후 은혜를 갚기 위해서 들여보낸 아이였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별궁 생활에서 라소차의 수다는 한줄기 밝은 햇살처럼 암울한 분위기를 걷어내 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었지만, 지금의 마야에게는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아무런 뜻도 없는 낯선 중얼거림에 불과했다. ‘사흘 간 계속되는 꿈을 통해서 그의 위험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를 찾아야할까? 아니면, 이대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어 다음 생의 만남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 ‘차라리 주목랑마 여신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나와 그의 비틀려 엮인 운명도 몰랐을 테니,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쓸쓸히 혼자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텐데.’ 태어날 때부터 여신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사실을 안 것이 불행한 자신의 운명에 더욱더 가없는 슬픔과 괴로움을 더하고 있음을 마야는 느끼고 있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가운데 그와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운명의 이끌림대로 따라가 훤히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슬픔의 골짜기를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지. 철없던 어린 시절처럼 아무것도 몰랐다면.... 아니 최소한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랬다면.... 아무 것도 모르던 지난날,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오묘하게 보였던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동안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희망에 불타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득한 과거의 일처럼 흐릿하고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것 같은데.... 이젠 모든 일이 허무하고 부질없게만 느껴지는데.... 그렇게 마야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채 주위의 모든 것을 잊은 채 누워있었다. 계속해서 떠들던 라소차도 이상함을 느꼈던지, 곧 말을 멈추고 고개 숙여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의 눈물은 흘리지 않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는 멍한 시선으로 위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마야의 모습에 깜작 놀란 라소차가 다시 어께를 흔들며 소리쳤다. “공주님, 마야공주님. 정신 차리세요. 제발, 이 라소차를 생각해서라도....” 계속 흔들며 불러도 별 변화가 없는 모습에 라소차가 허둥대며 밖으로 뛰쳐나가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할 때, 시선은 돌리지 않은 채 마야는 거의 이년 만에 라소차를 불렀다. “라소차. 그만 멈추고 차나 한 잔 다오.” 띄엄띄엄 들려오는 뜻밖의 목소리에 방문 앞까지 달려 나가던 라소차가 놀람과 기쁨이 범벅이 된 얼굴로 침상으로 되돌아 뛰어가며 소리쳤다. “어머나! 마야공주님, 말을 하시는군요. 이게 얼마만이세요? 그동안 공주님이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자 우리 모두 공주님이 벙어리가 된 줄 알았지 뭐에요. 저도 공주님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몰라요. 흥! 그동안 대공주님과 삼공주께서는 온갖 나쁜 말로 공주님을 비방하기만 했었는데, 정말 어쩌면 그럴 수 있는지 몰라요. 아무리....” 수다스럽게 계속 떠드는 라소차를 향해, 손을 들어 말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만하고 우선 차나 가져오너라.” “알았어요. 공주님. 금방 제가 대령할게요. 그런데 이젠 괜찮으신 거지요, 공주님? 아까 공주님의 모습을 보고 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마치 혼백이 어디론가 빠져나간 것 같아서 이대로 영영 떠나가시는 줄 알았어요. 공주님, 부디 공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저를 위해서도 그런 모습은 보여주지 마세요. 전 옛날 공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뵙고 싶은데. 흐흑흑.” 라소차가 대답하다가 저도 모르게 감상에 젖어 침상에 고개를 묻고 눈물을 흘린다. 그런 라소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야가 조용하게 다독였다. “우리 귀여운 수다쟁이가 울 때도 있구나. 뚝! 어서 그만 울음을 그치고 이 언니를 위해서 차를 준비해주지 않으련?”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어르자 라소차는 이내 기운을 차려서,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쾌활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벌떡 일어서서 가슴을 내밀며 마치 자신이 더 나이 많은 언니라도 되는 양 큰소리쳤다. “흥! 누가 수다쟁이라는 말이세요? 정말 공주님만 아니라면 바로 혼쭐을 내줄 텐데. 음음, 성숙한 처녀인 제가 공주님이 그러신 것이니 한번 너그러이 봐드리지요.” 그러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태도가 멋쩍은지 이내 온몸을 흔들며 명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정말 기뻐요. 몇 년 만에 공주님께서 말을 하시다니. 아이 좋아라.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지. 다들 얼마나 기뻐할지 생각하니 정말 흥분되네.” 명랑하게 떠드는 라소차를 보며 마야는 그래도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이내 고개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니, 라소차가 다가와 어께사이로 팔을 넣어 부축했다. “공주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로서 이게 뭐에요? 그동안 무공수련도 전혀 하시지도 않고 몸을 가꾸지도 않으시다니. 정말 이 라소차가 없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하기도 두려워요. 이제라도 좀 신경을 쓰도록 하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이렇게 되신 것인지 저는....” 푸석푸석하게 윤기를 잃고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앙상하게 마른 몸매를 보며 라소차는 걱정이 되었다. 옛날의 고결하고 아리따운 자태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깊은 병에 걸린 병자의 모습이었으니 라소차는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도 않고 쓸쓸히 웃음만 흘리거나, 해가 질 무렵에 멍하니 석양만을 바라보던 마야였으니.... 궁내에서 누군가 찾아와 물어보고 위로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대공주와 삼공주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이제는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침상에 걸터앉은 채로 마야는 잠시 한숨을 내쉬다가, 걱정스레 떠드는 라소차를 향해서 나직하게 말문을 열었다. “내 걱정은 그만하고 어서 나가 보거라. 그리고, 어차피 알려지겠지만, 별궁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내가 말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른 곳에는 알리지 말도록 해라. 나중에 내가 스스로 알릴 테니 그때까지는 다들 함구하도록 하고. 귀여운 토끼야, 알겠니?” “알았어요. 알았어요. 우리 사랑스런 공주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차를 끓여서 가져올 테니.” 자신의 애칭을 다정하게 부르는 마야를 보고 라소차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다가, 이내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경쾌하게 달려 나갔다. 그런 밝고 명랑한 라소차의 모습에 마야는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드리웠다. 외모나 재능이 특출하게 뛰어난 아이는 아니었지만 항상 친동생처럼 자신을 위해주고 무거운 분위기를 밝게 해주고 있었다. 적막한 별궁 생활에 이 아이가 없었다면 이미 자신은 생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어버렸을 것이다. 이제는 차라리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어쩔 것인가? 정해진 운명을 알 수 없었던, 필멸자인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이. 이제와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해도 그땐 그 누가 그런 것을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오히려 절망한 채 하루하루 보내던 자신에게 이제 와서 그런 일을 알려주는 주목랑마 여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휴,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그를 만나보아야겠지. 여신의 말대로 그와 나에게 엮인 운명대로라면 괴로움만 늘 테지만, 내 생도 다 끝나가니 지금의 상태보다 나빠져야 얼마나 더 나빠질 것인가? 단지 그 사람이....’ ‘둘 중에 누군가는 이생에서 윤회의 사슬을 끊어야 거듭되는 이런 운명을 바꿀 수 있을 테니.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나보다는 그래도 그에게 더 기회가 있을 테니, 그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는....’ ‘부디 이 무서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그가 성공하기 바라며....’ 윤회를 거듭하며 항상 같이 태어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 끝은 결코 좋지 못해서 서로가 괴로움만 맛본 채 불행하게 되는 운명이었다. 태어날 때마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더없는 축복일 테지만, 만일 그것이 이미 불행을 잉태한 사랑이라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저주일 터였다. 왜 자신과 그가 그런 업보에 처하게 되었는지 여신에게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었지만, 부디 다음 생에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마야는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연(緣) 리지마야(裏智摩耶) 연(緣) 리지마야(裏智摩耶) 2 단리유아와 자신과의 얽힌 인연에 대해 생각하며 마야가 홀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라소차와 함께 네 명의 여인이 실내로 뛰어 들어왔다. 남의와 녹의를 입은 두 명의 이십대 중반의 여인과 백발의 곱게 늙은 쌍둥이 노파였다. 젊은 여인들은 마야의 수신호위라 할 수 있는 곤리화(昆里花)와 곤리수(昆里秀) 자매였는데 두 사람 모두 오척이 겨우 넘을 정도의 작은 키에 평범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두 노파는 어린 시절부터 마야를 기르고 가르친 남북쌍파(南北雙婆)로 똑같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은 정반대였다. 거의 이년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던 마야공주가 입을 열었다는 라소차의 전갈에 다들 놀랐지만, 그럼에도 완전히는 믿지 못해서 이렇게 반신반의한 채로 직접 확인하고자 달려 들어온 것이다. 허겁지겁 라소차를 밀치며 뛰어드는 것이 모두가 놀람과 기쁨에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공주님!” “마야공주님!” 침상에 걸터앉아있는 마야를 둘러싼 채로 앞 다투어 소리쳐 불렀지만, 막상 마주하니 말문이 막혔는지 다들 더 이상은 묻지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공주님, 제가 말해도 다들 믿지 않고 글쎄 이렇게 저를 몰아세우며 뛰어들지 뭐에요. 어서 뭐라고 한 말씀해주세요. 특히 북파(北婆)어르신은 날 가만두지 않겠대요. 공주님이 말하는 것을 직접 듣지 않는다면.” 네 사람 사이를 끼어들어 밀어내며 라소차가 반쯤 투정어린 목소리로 마야에게 하소연했다. 이런 라소차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뛰어든 사람들이 그제야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공주님, 이 수다쟁이의 말이 사실이십니까?” “어서 말 좀 해보세요.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십니까?” “아, 공주님께서 말문을 여시다니.... 저희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마야공주님, 정말로 말을 하신 것이에요? 혹시라도 요 계집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요?” 경황없이 다그치듯 질문을 퍼붓는 네 사람의 모습에 마야는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의 자신의 행동에도 변함없이 자신을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네 사람의 모습은 세상에 하나 없는 혈육의 정보다도 더 깊은 온정을 가슴에 전해주는 것 같았다. 혼자만의 슬픔에 젖어 모든 일에 무관심한 채로 보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자신의 그런 행동이 사뭇 이기적이었음 알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이들과도 멀지 않아 헤어지게 될 것을 생각하니 더 큰 슬픔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자신 먼저 떠나야할 것을 생각하니.... “다들 그만 떠드세요. 제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었지요? 이젠 이렇게 다시 정신을 차렸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가슴에 닿는 온정과 슬픔이 교차하는 가운데 담담히 미소 지으며 대답하려 하지만, 말을 마쳤을 때 즈음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모궁에서 자질을 인정받아 이공주가 되었지만, 이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따뜻한 한 마디 말조차 들을 수 없었다. 다들 자신을 시기하거나 겉으로의 입바른 소리만 할 뿐이었다. “라소차의 말이 정말이네. 공주님, 이제는 괜찮으신 거지요?” 마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저 곤리수가 기쁨에 젖은 얼굴로 마야의 옷소매를 붙잡으며 말한다. 이에 라소차가 고개를 치켜들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거 보란 듯이, “거봐요. 내 말이 사실이지요? 그렇게 말해도 날 믿지 못하고 거짓말쟁이 취급하더니....” 라소차의 행동에는 상관없이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기쁨에 가득차서 떠들기 시작했다. “공주님, 정말 말씀을 하시는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그동안에는 말문을 닫은 채로 그렇게 지내셨는지요? 노신은 공주님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답니다.” “어찌 그리 무심하실 수 있으세요? 그동안 저희들이 걱정하는 것도 모르시고....” “저는 이러다가 영영 공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줄 알았답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말을 하셨으니 정말 다행이세요.” 이렇게 북파와 두 자매가 놀람과 기쁨으로 흥분하여 연이어 떠들 때, 남파(南婆)는 마야가 말문을 열었다는 사실보다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놀라 다가가 옷소매로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을 꺼냈다. “공주님. 이제라도 저희에게 고민을 털어 놓아보세요. 그동안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 노신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오히려 답답함이 더했답니다.” 다른 이들도 남파의 말에 이내 떠드는 것을 멈추고는 다들 대답을 촉구하듯이 마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불치의 병에 걸려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야할까? 아니면, 이대로 말하지 않고 지난날처럼 지내야할까?’ 말할지 말아야할지 생각하면서 더불어 마야는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아, 이제와 지난날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가슴에 가득하구나!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었는데 어째서 그때는 그렇게 했어야만 했을까?’ 그 중에서도 대공주, 삼공주와 사이가 틀어진 것을 생각하면 가슴 가득 후회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서로 친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서로 싫어하고 의심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본래 두 사람은 궁주의 딸들이었고, 마야는 고아로서 외부에서 선택되어 들어온 경우에 해당했다. 마야는 단지 받아보지 못했던 모정(母情)을 궁주에게 받고 싶어서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자질에 있어서도 두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던 마야가 노력하기 시작한 후로는 두 사람은 모든 일에서 결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공이나 의술, 아니 일상사의 자수나 요리 같은 소소한 일에까지도 뛰어나니, 궁주가 마야를 편애하고 다른 두 공주에게는 사사건건 마야와 비교하는 경우가 잦아졌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마야가 이공주가 된 것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두 공주의 미움을 옆에서 부추기고 후계자 문제까지 불거지게 되자, 그 이후로는 서로 마주쳐도 말도 잘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틀어졌고 지금의 두 공주에게는 마야에 대한 미움만이 남아있었다. ‘결코 궁주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단지, 철모르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정을 느껴보고 싶어서였는데....’ 자신은 단지 궁주에게 인정받고자 노력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들 두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누군가와 비교되어 야단을 계속 맞는다면 아무리 친한 사이였다고 해도 틀어지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자신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결국에는 나쁜 결과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렇게 서로 미워하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이제와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두 사람을 찾아가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찾아가도 제대로 상대해주지도 않을 터였다. 이제는 이렇게 상념에 잠긴 채로 단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만을 한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누가 말했던가? 세상사는 한줄기 꿈과 같은 것이라고. 무상(無常)하니 그리 연연해 할 것도 없다고. 그저 한순간의 뜬구름처럼 모든 것을 담담히 대하라고. 그러나 삶은 또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가? 희비(喜悲)가 조석(朝夕)으로 교차하며 마음을 흔드는데.... 돌부처가 아닌 이상, 어찌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을 텐가? 자신들의 물음에도 아무런 말이 없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마야를 향해서 모두가 걱정스런 표정이 되어서 주시하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지난날을 후회하는 상념이 계속 교차하면서 그 결과 역시 얼굴에 드러나, 마야의 얼굴은 절로 찡그리고 한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남파가 이런 마야의 옷소매를 잡아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하면서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공주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리 괴로운 표정을 지으세요?” “공주님, 정말 무슨 일이세요? 어서 저희들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아보세요. 저희들은 공주님이 어렸을 때부터 같이한 사람들이잖아요.” 곤리화도 울상인 채로 걱정스럽게 반문하고,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마야를 걱정하며 한두 마디 위로의 말을 하거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마야가 걱정스레 떠드는 사람들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별일 아니랍니다. 그만 지난날을 떠올리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 모두들 더 이상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마야가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곁에서 함께 지켜보았던지라, 한동안은 다들 말이 없는 채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실내에 흐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마야를 시기하여 퍼뜨린 좋지 않은 소문들과 마야에 대한 두 공주의 미움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마야의 면전에서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지만, 마야가 없는 곳에서는 다같이 분노한 목소리로 궁내의 다른 사람들을 성토하곤 했었다. 시간이 얼마 흐른 후, 엄정한 얼굴로 북파가 다시 말을 꺼냈다. “공주님, 무슨 일로 그동안 말문을 닫고 이렇게 칩거하시기만 하셨는지는 말해주지 않으실 것입니까?” “그 일은.... 음,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군요. 나중에 제 마음이 가라앉으면.... 그때 모두에게 말해줄게요.” 마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마치 자신에게 속삭이듯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바로 되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서 다들 궁금한 기색을 참을 수 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억지로 계속 물어서 마야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말문이라도 열었다는 사실에 당장은 어느 정도 만족했다고 여겨서 다들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다들 입을 벌리고 묻고 싶은 기색이 다분한 모습임에도 더 묻지 않는 모습에 마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라도 자신의 병을 고백하고 싶기도 했지만 좋은 일도 아닌 것을 알려서 이들을 괴롭게 하고는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들도 알게 될 것이고, 아니 지금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아는 것이 지금 알아서 괴롭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을 것이다. ‘아, 모두에게 미안해요. 다들 제게는 가족과 같지만, 이 일만은 직접 입으로 말하기는 쉽지는 않군요.’ ‘그 사람과 만나야할 일이 없었다면, 마지막 생을 그 사람을 위해서 보낼 생각이 없었다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그대로 지냈을 텐데.... 휴우! 이것이 비록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일은 말하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사랑하는 이들을 속이는 것 같아서 마야는 마음 한 구석이 편치 못했다. 나중에라도 말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언제일지 실제로 말할지는 그녀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 차라리 행복했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것을 보면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구나. 비록 단순한 자기기만에 불과할지라도 그때 몰랐다면 이렇게 혼자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텐데....’ 지난날에는 무공과 의술에 매진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었다. 일어나서 다시 잠들기 전까지는 무공과 의술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배우며 보냈었고, 잠드는 시간까지 아쉬울 정도여서 하루에 두 시진 이상 자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오년 전 처음 발작이 일어난 것이 병의 시초가 되었는데, 마야 자신도 처음에는 단지 너무 피곤해서 잠깐 혈행(血行)이 불완전해져 신체가 일시적으로 마비된 정도로 알았었다. 아주 찰나에 불과한 시간의 마비였고 특별히 이상한 곳도 없었으니 그 심각함을 모르고 그대로 지나쳤던 것이다. 그러다 열 달 후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다시 여덟 달 후에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점차 시간이 짧아지고 일어나는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마야도 무언가 자신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그 문제를 연구한 것이 삼년 전으로 그때에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발작이 일어나는 그때를 제외하고는 신체적으로 이상한 곳이 없어서 무공을 수련하는 데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무공의 성취속도가 유달리 빠르고 내력의 증진도 특이할 정도 큰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었지만, 그때는 단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하는 우쭐한 생각이 들뿐이었다. 그런 생각에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가득한 채로 각종 서책을 뒤지며 자신의 증상에 대해 알아보다가, 이년쯤 전에 아주 오래된 천축의 의서(醫書)에서 자신의 병에 대한 것을 찾았을 때에 마야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겉표지도 떨어져나가고 군데군데 조각나서 제대로 해독하기도 힘들었지만, 거기에 나타난 증상은 자신의 상태와 그대로 일치했던 것이다. <응혈폐혈산맥증(凝血閉穴散脈症) : 이것은 딱히 병이라고 할 수도 없고, 보통 사람이 이런 증상을 나타내는 경우도 백만 명 중의 한명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만일 맥이 불완전한 산맥증을 타고난 특이한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이 무공수련을 하게 된다면 걸리게 되는 병 아닌 병이 되는 것이다. 내공이 뛰어날수록 그 성취가 높아질수록 점점 상태가 악화되어 나중에는 오히려 어떠한 불치의 병보다도 무서운 경우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 증상은....> 그 서책에 써진 대로라면 마야 자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처음 발작이 일어났을 때에 무공수련을 중단했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수명은 보장할 수 있었지만,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병이 심각해진 이후로 결코 되돌릴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미 발작하는 기간이 점차 줄어들어 한 달에 한번 꼴로 일어났는데, 그 지경에 이른 뒤에는 결코 오년 이상은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공이 깊어질수록 그 기간도 짧아짐을 알 수 있어서 수련도 그만두었지만, 이미 진행된 병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점차 그 기간이 줄어들어 이제는 하루에 한번은 그런 발작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병이 진행되어 그 기간이 더 이상 줄어들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완전히 전신의 혈맥이 굳어진 채로 죽게 될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아 아쉬운 일도 많았고 뜻하지 않게 얻은 병으로 한스럽기도 하지만, 여러분과 함께 했었던 일들은 그런 고달픈 세상사에서도 내게 큰 기쁨이 되어주었어요. 비록 얼마 더 살지 못하겠지만 나를 위해준 일만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에요.’ 잠시 상념에 잠겨서 지난 일을 돌이켜보다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다섯 명의 여인들을 차근차근 돌아보며 마야는 조용히 속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곧이어 마야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실어 라소차를 향해 말했다. “라소파, 잠깐 가볼 곳이 있으니 행장을 준비해다오.“ “아니, 어디를 가시게요? 그동안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으셔서 몸도 많이 약해지셨을 텐데....” 갑작스런 마야의 말에 놀라 라소차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반문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네 사람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라 이구동성으로 마야를 만류했다. “공주님, 도대체 그 몸으로 어디를 가시겠다는 소리세요? 가시더라도 며칠 조섭을 한 뒤에나 가시도록 하세요.” “그래요. 공주님.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며칠 뒤로 미루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마야를 쓸어보며 다들 안타깝고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비쩍 마른데다가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은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던 과거의 마야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이 넘은 나이였지만 본래의 나이보다도 훨씬 나이 들어 보여서, 과거의 천진했던 소녀다운 분위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었고 오직 온갖 풍상을 겪은 나이든 듯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이런 외적인 모습처럼 마야의 현재 몸 상태는, 비록 내력은 다소 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년 동안 제대로 수련도 하지 못한 대다가 침식을 거르는 것이 다반사여서 급격하게 움직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앞 다투어 서로 만류하는 소리에 마야가 손을 저어 말을 가로막고, 곧 꿈속에서 여신을 만난 일을 들추어내며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쳤다. “이번 일은 여신께서 내게 현몽(現夢)하시어 전한 일이니 더 이상은 만류하지 마세요. 저도 찾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으니.” 마야 역시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단리유아를 찾아가려는 생각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지고 무의식중에도 오늘이 그를 만날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주목랑마 여신이 꿈속에서 명했다는 마야의 말에 더 이상은 만류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심으로야 마야가 걱정되어서 할 수만 있다면 계속 만류하고 싶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는 여신은 단순한 숭배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니 더 따질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라소차가 옷장에서 옷을 꺼내 마야에게 건네 갈아입히며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공주님, 그러면 제가 따라가도 되지요?” 마야가 데려갈지 말지 생각하며 라소차의 도움을 받아서 의관을 갖추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마야를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마야공주님, 저희 자매도 같이 가게 해주세요. 명색이 그래도 수신호위인데 저희도 따라가야지요. 공주님께서 건강하셨을 때에야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더 나았을 테지만, 지금은....” 곤리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파가 선언하듯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노신도 따라가겠소, 공주. 더 이상은 저도 양보할 수 없으니 그리 아십시요.” “북파의 말처럼 공주님 혼자서 나설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최근 이 일대에 괴무리들이 들끓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말입니다.” 남파가 단리유아와 천지신교 간에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상기하며 자신 역시 동행할 것을 주장했다. “아니, 바로 근처의 소리월탄(霄離月灘)에 가려고 하니....” 아무리 여신의 현몽으로 인해서 단리유아를 찾아간다고 해도, 금남(禁男)의 성지인 성모궁(聖母宮)의 특성상 남자를 찾아가는 일에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기를 마야는 바라지 않았다. 그런 마야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라소차가 곧바로 쏘아붙이듯이 떠들었다. “말도 안돼요. 그곳이 얼마나 험한 곳인데? 예전의 공주님이라면 혼자서 가시는 것도 말리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아무리 공주님이 말리셔도 저는 따라갈 거예요.” 소리월탄은 현재 마야가 머물고 있는 별궁이 있는 계곡에서 십여 리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워낙 물살이 거칠고 지형이 험난해서 평상시에도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더욱이 현재 마야의 상태와 주변의 정황으로 볼 때 다른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혼자서 움직인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희들 모두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일대에서 괴무리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본궁내에서도 다들 궁 밖으로 나서는 것을 엄금하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특히 저희 별궁은 외따로 떨어져 있으니 더욱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요. 아무리 소리월탄이 지척이라 해도 공주님 혼자 가신다면 다들 걱정 때문에 죽을 지경이 되어서 온종일 그쪽으로 고개만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남파와 곤리수가 다시 마야의 말을 반대하며 다 같이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마야로서도 이들의 말을 계속 묵살하며 자신의 고집만 부릴 수는 없었다. “좋아요. 그럼 다 같이 떠나기로 하지요. 단, 내가 시키는 대로만 따르기를 바래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말고. 나중에 다시 말해줄 테니 말이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야는 다섯 여인들과 함께 별궁을 나섰다. 때는 정오가 막 지난 시각이었는데, 진법(陣法)이 펼쳐진 별궁을 벗어난 지점부터는 한 겨울의 추위가 매섭게 몰아닥치고 있었다. 눈보라 때문에 시야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고 세찬 바람이 옷자락을 날리려 해서 다들 옷깃을 꼭꼭 여미고 있었다. 계곡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중간에서 라소차의 부축을 받으며 움직이던 마야는 소리월탄에 가까워질수록 앞장서서 서두르고 있었다. 바람결에 전해지는 한 가닥 운명의 끈이 점점 더 강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여신의 명이라 해도 이런 악천후 속에서 도대체 누구를 만난다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마야의 모습에 다들 걱정되어 서로가 마야를 만류하며 부축하려했다. 그럼에도 듣는 척도 않고 발걸음만 재촉하는 마야의 모습에서 뭉게구름처럼 의혹이 짙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緣) 리지마야(裏智摩耶) 연(緣) 리지마야(裏智摩耶) 3 본래 성모궁(聖母宮)은 주목랑마봉의 한가운데인 완랑구사계(宛朗嶇斜溪)에 위치해 있었는데, 자연적인 운무와 진법으로 인해서 밖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눈 덮인 계곡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마야가 있는 별궁은 그곳에서도 서쪽으로 십여 리 정도 떨어진 산등성이를 세 개 넘어선 곳에 있었고, 다시 별궁에서 차가랑제(嵯駕朗梯)의 아래쪽에 해당하는 소리월탄과는 서쪽으로 십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소리월탄(霄離月灘)은 주목랑마봉과 수릉마가봉을 연결하는 차가랑제의 둥글게 파진 아래 부분을 관통하여 흐르는 지점을 가리켰는데, 양쪽의 설봉에서부터 흘러내린 계곡물이 소리월탄에 이르러서는 일단 방원 삼십여 장의 호수와 같은 소용돌이치는 물굽이를 이루다가 다시 좁고 험한 계곡을 따라 세차게 흘러내렸다. 소리월탄의 양쪽 절벽에는 ‘여신(女神)의 눈물’ 이라는 이름을 가진 높이 오십여 장 정도의 폭포가 있었는데, 그 폭포 때문에 항시 일대는 뿌연 운무로 가리어진 상태가 되었다. 마야가 있던 별궁에서 소리월탄에 이르는 길은 산 아래에서 계곡의 측면을 따라 나있는 비좁은 석도(石道)뿐이었다. 그 길을 빼고는, 계곡의 양쪽을 따라 치솟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을 타고 직접 내려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한낮이라도 계곡의 아래쪽은 햇살이 비추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항상 어두컴컴했고, 미끈거리는 이끼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식물이나 곤충만이 서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시사철 운무에 뒤덮이고 햇빛이 닿지 않으니 인적이란 찾아보기 어려웠고, 이따금 성모궁의 여인들만이 이곳을 찾을 뿐이었다. 마야와 다섯 사람은 별궁이 있던 계곡을 나와서 굽이진 협곡을 따라 내려간 다음에, 다시 계곡의 석도를 따라서 일렬로 움직이고 있었다. 산 위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계곡의 아래쪽은 단지 물안개만이 일행의 걸음을 더디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따금 바람이 절벽의 상층부를 통과하여 울어대는 기분 나쁜 소리가 섬뜩하게 하기도 했지만, 쿵쾅거리며 흘러내리는 계곡물과 운무로 인해서 일행은 마치 몽환경에 빠진 것처럼 희미하게 드러나는 굽이진 석도를 따라 춤추듯이 빙글빙글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움직이던 마야를 비롯한 일행이 소리월탄에 이른 시각은 오시(午時:11-13시)말이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다. 소리월탄의 도착한 일행은 한쪽의 바위에 모여서 잠시 주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무로 뒤덮여 십 장 밖의 모습을 분간하기도 어려웠고 위쪽의 모습 역시 보이지도 않았지만, 가히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런 소리월탄을 볼 수 있었다. “우르르릉! 콰콰콰!“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와 계곡물이 하류로 흘러내리며 내는 소리에 파묻혀 다들 소리월탄의 정경에 도취되어 있을 때, 문득 라소차가 위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와아! 저것 좀 보세요, 공주님. 무지개에요, 무지개!” 그 소리에 다들 위쪽을 올려다보니 햇빛에 물안개가 산란하여 마치 무지개처럼 형형색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다들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북파가 죽장으로 바위를 내리치며 호통 쳤다. “모두 정신 차려라! 그리고 너 이 계집애야, 너는 그런 것 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느냐? 저 위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말이냐?” 그제야 나머지 일행도 청각을 집중해서 소리를 모으니, 희미하게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폭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는 단리유아와 천지신교 고수들 간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로, 그때서야 일행도 가끔 위쪽에서 돌무더기가 계곡물에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차가랑제 위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며 다들 걱정하고 있을 때, 북파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라소차만은 불만스런 기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북파 어르신께서야 무공이 높으셔서 폭포수의 굉음을 뚫고도 그런 소리까지 들을 수 있지만, 저 같은 어린 아이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이에요? 맨날 내가 무슨 말만 꺼내면 트집을 잡아서....” “시끄럽다, 이 계집애야!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도 그딴 소리냐? 네가 칠칠맞아서 신경이 원체 산만한 것은 모르고.” 북파가 그래도 투덜거리는 라소차를 보고는 죽장을 휘둘러 때리려고 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말리는 등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었다. 이런 일행들과는 달리 마야는 소리월탄에 도착할 때부터 콸콸거리는 계곡물만 멍하니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곳인데.... 여신이 말씀하신 곳은.... 그와 만나게 될 곳은....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 왜....” 중얼거리다가 나중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해 종종걸음으로 주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여기야. 여기가 틀림없어. 내가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닐까? 여신께서는 며칠 전부터 그를 찾아가라고 재촉했었는데도.... 혹시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제야 일행도 이런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마야의 모습을 알아차리고는, 다들 걱정이 되어서 마야를 둘러싸면서 붙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공주님! 도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그러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곳에 누가 있다고 찾아오신 겁니까?” 먼저 남파가 마야의 팔을 붙잡아 흔들면서 크게 소리쳤다. 별궁을 나서면서부터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넋이 완전히 나간 상태는 아니었다. 다들 너도나도 마야를 걱정하면서 소리칠 때, 라소차가 마야를 붙잡고 울먹였다. “흐흑흑! 공주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몇 년 만에 말문을 열어 기뻐서 어쩔 줄 모를 정도였는데 이러시다니.... 와아앙! 공주님....” 나중에는 아예 마야의 품속에 고개를 파묻고는 울음보가 터졌는지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이런 일행의 외침에 마야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휴,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그렇게 만나기 싫어했는데도, 막상 그와 만날 생각을 하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하게 되는 것은?’ ‘아, 정말 그와 나는 전생에서부터 만나야만 할 운명이었단 말인가? 어째서 이리도 마음이 걷잡을 수 없게 날뛰는지....’ 평소의 정요(靜窈)하기만 했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현재의 혼란스런 마음을 마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은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이끄는 것처럼, 아니 마치 누군가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이 들끓고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어 마음을 달래면서, 마야가 라소차를 감싸 안아 다독이며 말문을 열었다. “휴우! 라소차야, 그만 울어라. 어서!” “흐흑, 정말 괜찮으신 것이지요? 전 공주님이 걱정돼서....” “난 괜찮단다. 그런데 넌 아직도 어린 아이구나! 이렇게 쉽게 울음을 터뜨리고.” 라소차의 얼굴의 눈물을 훔쳐내면서 마야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마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야의 품속에서 떨어져나가며, 라소차가 뒤돌아서서 토라진 듯이 쏘아붙였다. “뭐가 어린 아이라는 말이에요? 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벌써 시집을 가도 한참 전에 갔을 나이인데....” 철없는 아이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라소차를 보며 마야는 생각했다. ‘넌 그래도 나보다는 낫구나! 아직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고 물들지 않아서 쉽게 감정을 토해내고 이내 해소할 수 있으니.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이 들수록 어린 시절의 맑고 순진하기 했던 자신의 모습은 아득한 꿈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파에 물들어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는 항상 꾸민 태도로 대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괴롭고 불안한 마음은 혼자만 깊이 간직한 채 꼭꼭 숨겨야만 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북파가 마야를 향해 힐문하듯이 소리쳤다. “공주님, 도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여기에 누가 있다고. 게다가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모습으로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던 마야의 정신없는 모습에 북파는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 역시 마야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예전의 침착하고 오연하기만 했던 모습과는 다른, 전혀 마야답지 않은 모습에 대한 실망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런 북파의 힐문에 마야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남파가 북파를 말리고는 다시 마야에게 물음을 던졌다. “공주님, 이곳에 누가 있다고 오신 것입니까? 안개만 자욱할 뿐 아무도 없는데. 본궁에서도 가끔 청린어(靑鱗魚)나 잡으러 이곳에 올 뿐, 그 외에는 전혀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인데.” “저도 그 사실을 잘 알지만, 여신께서 말씀하신 곳이 바로 여기에요.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니 부디 더는 묻지 마시고, 모두 이제부터는 이곳 소리월탄의 주위를 돌면서 사람을 찾아보세요.” 마야가 남파에게 대답하고는 곧 손으로 각자 찾아볼 곳을 지적했다. 남북쌍파는 암초를 징검다리 삼아서 건너편을 살펴보도록 했고, 마야와 나머지 사람들은 이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난데없이 사람을 찾으라는 말에 다들 마야가 걱정되어 내켜하지 않았지만, 거듭해서 닦달하듯이 재촉하기만 하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흩어져서 찾기 시작했다. “다들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람이 보이면 저를 부르세요. 라소파야, 너는 나와 함께 움직이도록 하자.” 남북쌍파가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직전에 마지막 당부의 말을 덧붙이고, 마야 역시 라소차와 나머지 사람을 재촉해서 단리유아를 찾아 나섰다. 곤리화 자매가 앞장섰고 그 뒤를 마야와 라소차가 뒤따랐다. 마야를 제외하고는 다들 마야의 말에 반신반의한 상태여서 세심히 사방을 살피는 데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반각도 못 되어 라소차는 마야의 말을 그저 한 귀로 흘려듣고는, 벌써부터 딴 생각에 빠져들어서 떠들었다. “공주님, 우리 온 김에 청린어라도 잡아가요. 그동안 공주님 때문에 잡으러 다니지도 못해서 먹어보지 못한지도 한참이지 뭐에요. 얼마나 별미인데....”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지 라소차가 말하는 중에도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이 소리에 앞서 걷던 곤리수가 고개를 돌려서 라소차를 꾸짖었다. “쯔쯧, 이 계집애야! 우리가 지금 놀러온 것인 줄 아느냐? 넌 어째서 그 모양이냐? 상황파악도 못하고 정말!” “뭐에요? 언니는 이왕 어려운 걸음을 한 김에 청린어라도 잡아가자는 것인데,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것이에요!” 곧바로 쏘아붙이는 라소차를 보고 어이가 없어진 곤리수가 이내 화가 나서 혼을 내려다가 마야의 면전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단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롱기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계집애는 정말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니까.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이 성스러운 여신의 땅을 더럽히면서 싸우고 있는 것을 대체 넌 아냐 모르냐? 혹시라도 그놈들 눈에 띈다면 우리까지도 노릴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청린어는 또 무슨 수로 잡을래? 맨손으로? 아니면, 너의 그 하찮은 무공으로?” “그만 냅둬라, 동생아! 저 얘한테 계속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니. 호호호, 그러다 너까지 저 계집애 같이 될지도 몰라.” 비웃는 곤리수의 말에 곤리화까지 옆에서 웃으며 라소차의 약을 올렸다. 라소차가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으론 설움이 북받치기도 해서 마야에게 하소연하려 할 때, “펑! 풍덩!” 무언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일행의 바로 옆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충격으로 물결이 치솟아 일행의 바로 옆에까지 쏟아져 내릴 때, 갑작스런 폭음에 놀라 마야의 등 뒤로 숨었던 라소차가 소리쳤다. “어머나! 도대체 무엇이 떨어졌담. 공주님, 뭐가 떨어졌어요?” 이미 곤리화 자매의 놀림은 안중에도 없이 잊어먹고, 마야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로 묻기에만 바빴다. 다들 놀라 잠시 경황이 없을 때, 이윽고 물속에 잠겼던 것이 물위로 떠올랐다. “에엑? 시, 시체잖아. 으으, 끔찍해.” 떠오른 물체를 보고 놀란 라소차가 마야에게 달라붙어 떨면서 중얼거렸다. 생전 궁밖에는 나가지 않아서 전신이 상처투성이로 갈라터진 시체는 처음 본 라소차였다. 곤리화 자매도 라소차 만큼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런 일로 놀라고, 너무나 처참한 시체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죽어서도 지옥에서 그 벌을 받아야할 거야.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이런 신성한 곳을 더럽히다니.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으드득.” 곤리화가 시체의 모습을 보며, 위에서 싸우던 사람들을 상기하고 저주하듯이 소리쳤다. “난 다시는 청린어 안 먹을래요. 이제 보니 아까부터 무언가 떨어져 내리던 소리가 들리던데, 그런 것들이 다 저런 시체였나 봐요. 웨엑! 너무 너무 징그럽고 끔찍해.” 물살에 밀려서 물가에까지 밀려나온 모습에 라소차가 헛구역질까지 하며 기겁한 얼굴로 떠들었다. 다들 시체의 모습에 한두 마디하고 있을 때, 마야는 무언가에 홀린듯이 시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물가에 들어가 마야가 시체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본 두 자매와 라소차가 놀라 소리쳤다. 가까이 다가갈 때만해도 설마하니 마야가 시체를 직접 끌어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머나! 공주님. 어서 저리 치워버리세요! 어서요!” “공주님,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시체를 끌어올리시는 것이세요.” “이런 어째! 공주님, 제발 그대로 던져서 물고기 밥이나 만들어 버리세요. 그런 놈들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요.” 다른 사람들의 외침에도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마야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시체와 같은 단리유아의 모습만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야 당신을 만나게 되었군요. 꿈속에서 여신이 보여준 얼굴과 똑같아요. 그런데 어째서 이런 모습인가요? 내가 너무 늦게 왔나요? 사흘 전에 당신을 찾아갔더라면....” 단리유아의 얼굴을 매만지며 마야는 넋을 잃은 얼굴로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때 단리유아의 모습은 전신에 셀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가득했고 복부에는 구멍이 휑하니 뚫려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만 해도 서너 곳에 이르는 모습으로 다들 이미 죽은 시체로 생각했다. 잠시 마야의 이런 이상한 행동 때문에 세 사람도 놀라고 정신이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주님, 공주님! 정신 차리세요.” 먼저 곤리화가 정신을 차려 마야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치다가,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곤리수와 라소차를 향해서 외쳤다. “너희들은 뭐하니? 어서 공주님을 저 시체로부터 떼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알았어요, 언니. 라소차, 너는 언니를 도와라. 시체는 내가 계곡물에 다시 던져버릴 테니.” 곤리수가 말하고는, 다가가 단리유아의 시체를 잡아당겨서 마야의 손으로부터 빼앗으려 들었다. 곤리화와 라소차가 어께를 붙잡아 강제로 일으키려할 때, 마야가 손을 내밀어 곤리수를 밀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둬! 너희 둘도 그만 손을 놓고 물러나라!” 라소차가 먼저 반색한 얼굴로 마야의 얼굴로 머리를 들이밀며 소리쳤다. “공주님, 이제 정신이 드세요? 도대체 오늘 따라 왜 이러세요, 자꾸! 흑흑!” 울먹이는 라소차를 밀치며 곤리화가 마야를 향해서 말했다. “우선 이 시체부터 어떻게 하지요, 공주님. 이깟 시체가 뭐길래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래요. 제발 그 시체로부터 떨어지세요, 공주님!” 곤리수까지 재촉할 때에 마야가 손으로 단리유아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아까 내가 말했던 만나야 할 사람이란다. 내가 너무 늦게 와서 이런 모습이지만, 여신께서 알려준 사람이 틀림없어.”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마야의 말에 세 사람 모두 너무 놀라, 마야를 보고 다시 단리유아를 번갈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곧바로 반문했다. “네? 이 시체가?” “그게 정말이세요?” “말도 안 돼! 이런 시체가....” 겨우 시체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것을 생각하니, 다들 어이가 없어서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미 죽어도 몇 번은 죽고 남을 정도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척 보기에도 숨이 끊어진 것 같았으니, 모두 다시 한 번 마야를 쳐다보며 정말 제 정신일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혼란스런 표정을 바라보다가, 마야가 단리유아의 심장에 손을 얹어보고 다시 목 밑에 손을 대어 맥을 집어보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직 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야. 혈맥이 차단되어서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뿐이지.” 이때 단리유아의 상태는 비록 의식이 끊어졌지만, 무의식중에도 구전회혼결(九轉廻魂訣)이 움직이며 전신의 혈맥을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상처가 악화되는 것을 막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이 정도의 상처에서는 얼마 더 버티지 못할 상태였다. “아무리 그래도 곧 죽을 것 같은데....” 곤리화가 미적미적 말끝을 흐릴 때, 마야가 단호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죽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내가 살리고 말 테니. 너희들은 어서 쌍파를 부르고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해라.” 말과 함께 다른 사람의 말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품속에서 옥병을 꺼낸 뒤 다시 그 속에서 밀랍으로 봉해진 황색의 손톱크기의 환단(丸丹)을 손바닥에 쏟아냈다. 궁주에게만 전해지는 성모궁 최고의 비전영약인 금령신단(金靈神丹)이었다. “공주님, 그건....?” 곤리수가 놀라 막으려하고 다른 두 사람 역시 소리치려할 때, 이미 마야는 환단을 삼킨 후에 다시 단리유아의 입을 벌리고 입술을 포개어 자신의 진기로 밀어 넣고 있었다. 세 사람이 마야의 행동에 놀라 입만 벙긋거리며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마야가 다시 한번 단리유아의 상처 부위의 혈도를 눌러 지혈하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궁주님께서 내 생명이 위급할 때 사용하라고 특별히 준 것이지. 나도 안다. 다시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고, 타인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 사람은 나와 전생에서부터 연(緣)이 닿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란다. 처음에는 나도 여신의 말을 믿지도 못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나도 이 사람과는 몇 겁의 인연이 얽혀있음을 느끼고 있다.” 도저히 이해 못할 마야의 행동과 말에 세 사람이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때, 마야가 다시 재촉했다. “모두 어서 서둘러라! 아무리 본궁의 금령신단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 사람의 상태로 보아서는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니. 당장 되돌아가서 제대로 치료해야 해. 그러니, 어서들 서둘러!” 마야의 재촉에도 다들 미적거리며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곤리화가 반문했다. “하지만, 공주님. 본궁은 금남(禁男)의 땅인데, 혹시라도 궁내에서 남자를 데려온 사실을 안다면....” 공식적으로 궁주가 초대해서 들어온 경우를 제외한다면 성모궁에는 여태까지 남자가 들어온 적은 없었다. 만일 마야가 단리유아를 데리고 별궁에 들어온 것이 알려진다면, 대공주와 삼공주를 비롯한 마야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임은 눈에 보듯 뻔했다. 그러니 세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마야의 명이라도 따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걱정마라. 그런 일이 일어나도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테니. 설혹 목숨을 내 놓으라 해도, 어차피....” 단호한 표정으로 마야가 다짐하며 중얼거리다가 뒤끝을 흐린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죽음이란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비록 꿈속에서 일지라도, 다시 만난 단리유아를 어떻게 해서든 구하는 것이 마야에게는 더 중요했다. 설사 그녀 자신의 생명을 그 대가로 지불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기를 세 사람이 거듭해서 바랬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을 되풀이하는 마야였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먼저 곤리화가 포기하고, 남북쌍파를 데려와 다시 설득해보기로 했다. 마야의 모습으로는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키우고 가르친 사람들이었으니 혹시라도 마음이 다시 바뀔지도 몰랐다. 곤리화가 남북쌍파를 찾아 떠나가고 나머지 두 사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마야만 쳐다보고 있을 때, 그러한 주위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야는 단리유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 당신의 인생도 결코 쉽지 않았나보군요. 얼굴에만 해도 이리 큰 흉터가 있는 것을 보니’ 손가락으로 오른쪽 눈 밑에서 아래턱을 가르고 지나가는 커다란 흉터를 매만져보니, 마치 자신이 그런 상처를 당한 것같이 마음이 떨려왔다. ‘왜 우리 두 사람은 이런 모습일까요? 전생에서도 당신과 나는 이랬을까요?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요?’ ‘당신은 알고 있나요? 나는 당신을 보자마자 마치 오래전부터 당신과 마주한 느낌이 들었어요. 전혀 기억에도 없는 일들이 마치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뇌리에서 그려져서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요.’ 아무런 대답 없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야는 쓸쓸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운명이란 참 이상해요. 죽음이 가까워지는 순간에야 당신을 만나게 되고. 당신 역시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가 되어서 눈앞에 나타나다니....’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당신과 나는. 여신의 예언대로라면 우리 두 사람 모두 마음의 상처만 커질 테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한없이 이끌리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저 당신과 만나보기만하고 그대로 돌아설 생각이었는데, 막상 만나니....’ 불안하기만 앞날을 떠올리면 마야는 마음 가득 근심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서로 처음 마주쳤음에도 질긴 끈이 두 사람을 꽁꽁 옭매어 묶는 것 같았고, 예언대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아 벗어나려하지만 이미 어지러운 마음은 쏜 화살과 같이 단리유아라는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 정말 무섭고 두려워요. 우리 두 사람의 앞날이.... 운명의 힘에 끌려 다니기만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다음 생에서는 이런 운명에 처하지 않게, 비록 나는 이미 늦었지만, 당신이 살아나 성공할 수 있게 만들겠어요. 어떤 수를 쓰던지....’ 입술을 꼭 악물며 마야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어떻게 해서든 운명의 질긴 끈을 자르게 만들겠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마야의 얼굴표정을 보며 곤리수와 라소차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연함, 쓸쓸함, 애잔함에서 무언가 굳은 결심을 나타내듯이 단호한 표정이 되는 것을. 마야의 성격을 생각해본다면, 한번 자신이 결심한 일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이루어내고 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운명처럼 희미한 안개 속에서 세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공지 - 이벤트] 요새는 이상하게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자가 등장해서 모르는 여인의 심리를 쓰려니 막혀서인지, 아니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까이 다가오자 갑자기 제 마음까지 풀려버린 것인지. 하여간에 죄송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되도록 이틀에 한번 꼴로는 올리겠습니다. 흠, 이렇게 공지를 날린 것은 저번에 댓글에 쓴대로, 5권이 나온 것을 기념해서 이벤트를 열 생각에서입니다. 작가의 무성의함 때문인지 이제야 공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글도 제대로 안올리고 이제야 공지를 쓰는 것을 양해주시고, 그래도 도저히 양해 못하시겠다면 앞으로는 빨리 글을 올리라고 재촉이라도 하십시요. 혹시라도 압니까? 그 때문이라도 빨리빨리 쓰게 될지.... 이만 변명 겸, 쓸데없는 사설은 줄이고 이벤트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이번 이벤트의 주제는 넷상의 연재와 출판본에서 바뀐 부분을 지적해주시는 것입니다. 지명이나 이름, 내용에 상관없이 많이 지적할수록 유리한데, 뽑힌 분들께는 기본적으로 4,5권을 보내드리고 많이 지적하신 분들께는 1,2,3권 중에서 남은 것을 보태어 보내드리겠습니다. 보내실 주소는 zerocrush70@empal.com 입니다. 메일이 어려운 분들께서는 쪽지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보내실 때,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적으시는 것을 잊어버리시지 마십시오. 나중에 다시 확인하고 그러다보면 그냥 일주일이 넘게 흘러가 버리거든요. 부디 많이 많이 참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꿈속의 상면(相面)과 치료(治療) 꿈속의 상면(相面)과 치료(治療) 1 곤리화가 남북쌍파를 데려와서 재차 다 같이 마야를 설득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 남북쌍파가 기겁해서 말렸음에도 자신의 말만 할뿐이었고, 나중에는 혼자서라도 업어서가려는 마야의 모습에는 모두가 두 손을 들 수밖에는 없었다. 다들 그저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도대체 영락없는 시체인 단리유아의 어디를 보고 그러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로서는 정말로 마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나 서로 한마디의 말도 나누어보지 못한 사이이면서도, 마치 평생 동안 같이 살아온 것처럼 다정하게 상처를 어루만지며 계속해서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영락없이 오래전 헤어졌던 연인(戀人)을 다시 만난 것이라고 오해할 만한도 한 상황이었다. 이러니 남북쌍파는 속으로 열불이 나서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단리유아를 빼앗아서 그대로 다시 물속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홀린 듯이 단리유아만을 바라보고 있는 마야의 모습을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겨우 실날같이 목숨만 붙어있는 이 녀석 때문에 다시 말문을 연 것 같은데, 지금 자신들 마음대로 했다가는 충격을 받아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 ‘대체 이 보기에도 끔찍한 시체 같은 녀석이 누구이길래 이럴까?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그 귀한 금령신단(金靈神丹)까지 처먹은 천하에 빌어먹을 놈이?’ 북파의 중얼거림처럼 다들 영문을 몰라 마음이 답답했지만, 그저 여신이 만나라는 사람이었다는,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만하면서 마야는 어서 돌아가기를 재촉하기만 하고 있었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찌할지 무언으로 대화하다가, 이윽고 다들 한숨만 내쉰 채 지금 당장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일단은 마야의 뜻대로 별궁으로 단리유아를 옮기기로 했다. 딱히 운반할 도구가 없어서 급한대로 곤리화 자매의 겉옷을 서로 묶어 들것을 대신했는데, 단리유아의 상처 때문에 천천히 움직이다보니 돌아가는 시간이 왔을 때보다 훨씬 오래 걸리게 되었다. 그렇게 마야를 제외하고는 다들 내키지 않는 표정인 채 목숨이 경각에 달한 단리유아를 데리고 별궁으로 돌아왔을 때, 시각은 벌써 미시(未時:13-15시) 말에 다다르고 있었다. 별궁의 지하에 위치한 연공실(練功室)로 단리유아를 옮겼는데, 본래 처음에는 마야가 자신의 방으로 옮기려고 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다들 펄쩍뛰며 시집도 안간 여인의 규방에 외간남자를 들일 수 없다고 소리치고, 혹시라도 나중에 본궁에서 누가 찾아오면 어찌할 생각이냐며 말려서야 마야도 마음을 바꾸어서 연공실로 단리유아를 옮기게 되었다. 지켜보던 사람들로서는 계속해서 상리에서 벗어난 행동만하는 마야 때문에 당혹스러움과 걱정으로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이런 일행의 모습과는 달리 이미 마야는 세사의 규범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본궁의 사람이 보아서는 좋을 것이 없음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어서 마음을 바꾸었을 따름이었다. 마야는 연공실의 한쪽 측면에 위치한 석실(石室)의 석대위에 단리유아를 내려놓은 후, 먼저 남북쌍파에게 본궁에 들려 상처치료에 필요한 여러 가지 약물을 가져오도록 했다. 별궁에는 치료할 만한 약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만류하고 있던 남북쌍파도 마야의 계속된 고집에는 포기한 채, 결국에는 본궁으로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을 꼬박 눈도 붙이지 않은 채, 마야는 나머지 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단리유아를 치료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특별한 약물이 없었던 터라 단지 단리유아의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게 하는 데에 신경을 썼는데, 마침 단리유아의 품속에서 발견한 자옥신단(紫玉神丹)은 그런 마야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라소차는 자질구레한 심부름만 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처참한 상처들을 보고 처음부터 기겁해서 아예 옆으로 다가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곤리화 자매도 이렇게 심한 상처는 본 적이 없었던지라 크게 안색을 찌푸리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옆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마야는 손수 단리유아의 옷을 벗겨 상처를 씻어내고 꼼꼼히 약을 바르고 크게 터진 곳은 봉합했는데, 매 세 시진(時辰)마다 그 일과 더불어 침술을 병행해서 펼치고 있었다. 헝클어진 혈맥과 혼탁한 기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침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이것은 단지 미봉책에 불과하고, 한시라도 빨리 남북쌍파가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최후의 선택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마야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쌍파가 돌아오는 것이 너무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해도 그리 아쉬울 것도 없을 테지만.... 단지, 단 한번 만이라도 실제로 이 사람과 말을 해보고 싶은 것이....’ 본래는 좌도방문의 사이한 대법인 혼정취산사령밀법(混精取散邪靈密法)을 역으로 펼쳐서 마야 자신의 정기로 단리유아의 정혈(精血)을 대신하는 방법이 있었다. 마야 정도의 내력과 순음진기(純陰眞氣)라면 단리유아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최후의 순간에나 쓸 것으로,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마야 자신은 곧 죽음에 이르게 될 터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설사 그 방법밖에 없더라도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할 것이에요. 바로 당신을 위해서....’ 단리유아의 얼굴을 응시한 채 자신의 결심을 재차 다짐하면서, 두 손으로는 단리유아의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자신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죽는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고, 단지 서로 마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어서 당신이 회복되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난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아요. 시시콜콜한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까지.... 당신도 나와의 얽힌 인연을 알고 있는지도....’ ‘그리 되면 당신에게만은 내 마음을 보여주고 하소연할 수 있을 거예요.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답답한 마음을....’ 비록 한마디도 서로 얘기해보지 못했고 이름도 모르지만, 운명에 따라 이끌리는 마음과 전생의 기억처럼 함께 했던 모습들이 흐릿하게 뇌리에 떠올라서 마치 평생을 같이한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바로 어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듯이 정(情)이 샘솟듯 일어나 단리유아에게로 향하는 것을 마야는 멈출 수 없었다. 앞날을 그리며 살포시 미소 지은 채 중얼거리다가, 왼손으로 손에 쥔 단리유아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쓸쓸한 표정이 되어 계속해서 마야가 속삭였다. ‘지금까지는 죽음이란 것이 그리 두렵지 않았어요. 단지, 그동안의 노력과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아무 것도 못해보고 죽어야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었을 뿐이었지요. 그렇게 자포자기한 상태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젠 점점 더 죽는다는 사실이 두려워지고 있어요.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과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텐데도.’ 지난날에는 더디기만 하던 시간은 이제는 너무나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고, 무심하게 줄달음쳐 막바지로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마야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야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이제야 만나게 된 것에 대한 기쁨과 아쉬움, 곧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괴로움이 마구 뒤섞인 채로 마음속에서 날뛰고 있었다. 어지러운 마음에 한참을 넋을 잃고 있다가, 마야는 깊이 탄식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아아!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안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에요. 선택할 수도 없이 막다른 골목에 마주선 듯 막막하기만 하는 이 마음을 누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당신은 알고 있겠지요? 아니, 틀림없이 당신은 알 수 있을 거예요. 당신과 나는 운명의 반쪽이니.... 비록 항상 끝에서는 어긋나 빗겨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단리유아의 손을 꼭 움켜쥐며, 마치 스스로에게 확신을 심어주듯이 마야가 속삭였다. ‘이생에서는 어쩔 수 없다지만, 후생에서는 반드시 이렇게 되지 않게 하겠어요. 당신도 나의 마음처럼, 부디 이런 몇 겁(劫)에 걸친 운명을 깨뜨려주기를 바래요. 다음 생에 다시 그대와 만났을 때에는 이런 불행이 없이 평생을 같이 할 수 있도록....’ 마야는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을 단리유아라면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비록 미동도 없이 희미한 숨소리만 내쉬는 단리유아였지만.... 두 사람의 영혼만은 허공을 타고 흐르며, 오랜만에 서로 만나 이야기 하고 있을 것이라고.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부질없는 바램에 불과할지라도.... 세상의 온갖 어려움과 불행한 운명은 잊어버리고 즐겁게 춤추며. 이틀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한시도 단리유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마야의 모습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피가 얼룩진 옷과 헝클어진 머리, 얼굴에 쌓인 먼지로 보기 흉했지만, 두 눈동자만은 생생이 빛나고 있었고 입가에는 꿈꾸듯 몽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단리유아의 치료를 마친 그날 저녁 무렵에, 곁에서 지켜보던 곤리화가 마야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공주님, 제발 잠시라도 좀 쉬세요. 이러다가는 공주님께서 먼저 쓰러질 것 같아요.” “그래요, 공주님. 눈 좀 부치시고 씻기라도 하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저희가 바로 알릴 테니.” 석대 옆에 앉아서 단리유아의 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마야의 모습에 곤리화와 곤리수 자매는 마치 애간장이 타는 것 것처럼 마야가 걱정스러웠다. 그동안에도 그리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는데도,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단리유아를 치료하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눈에 보이는 듯이 끊임없이 웅얼거리는 모습이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난 괜찮아. 그보다 쌍파로부터는 아직도 아무런 전갈이 없느냐?” 두 사람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되묻고만 있었다. 이런 모습에 곤리화가 걱정스럽고 답답한 마음에 소리치듯이 물음을 던졌다. “정말이지 어쩌실 생각으로 그러시는 것이에요? 대체 그 사람이 누구이길래 만사를 제쳐놓고 매달리시는지....” 상처를 치료하면서 본 수많은 흉터들까지 합쳐서, 그들이 본 단리유아에 대한 인상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단지 흉물스럽고 끔직한 몰골을 지닌, 그 자신에게는 정말 다시없을 정도로 재수가 좋을 테지만, 자신들에게는 재수 옴 붙은 사내놈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마야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인간 같아서 더욱 그러했다. 비록 입 밖으로 말은 꺼내지 않고 있었지만, 제발 그냥 어서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만 계속 드는 애물단지 이상이하도 아니었다. 애원 섞인 곤리화의 외침에도 마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쌍파는 돌아오지 않는 거지? 더 늦기 전에 본격적으로 치료를 해야 하는데....” “공주님, 제발....” 정신없는 마야의 모습에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서 곤리화가 울상을 지으며 말을 꺼냈지만, 이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말을 잇지 못한 채 탄식만 내쉴 뿐이었다. 곤리수가 그런 언니를 잡아당겨 뒤로 물리며 대신 마야의 물음에 대답했는데, 답을 듣지 못하면 계속해서 중얼거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공주님, 아무래도 약물을 가져오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느닷없이 별궁에서 약물이 필요하다고 하니 다들 의아하게 여길 것이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공주님을....” 곤리수가 마야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릴 때, 마야 역시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질시를 알고 있었던 터라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바꾸었다. “그래. 아무리 내가 연공 중에 다쳤다고 둘러댄다고 해도 그들이 믿기에는 어딘지 부족하겠지. 하지만, 오늘밤 내로 쌍파가 약물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상처가 다시 악화될 텐데.... 결국 그 방법을 써야 하나?” 현재의 단리유아의 상태는 금령신단으로 생기를 불러일으킨 후에 다시 되돌아와서 치료를 계속해서 상처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고 있었다. 옷을 벗길 때 발견한 자옥신단도 도움이 되어서 서서히 상처가 아물고는 있었지만, 잠력을 소진한데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황이라서 아직도 위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이 고비로 적당한 전기를 마련하지 않는 한 이렇게 버티는 것도 곧 한계에 달할 것이다. 마야가 어떻게 할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돌연 라소차가 석실로 뛰어들며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공주님! 왔어요, 왔어! 쌍파 어르신께서 약물을 가지고 되돌아오셨어요. 이제는 공주님도 마음을 놓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거울이라도 한번 봐보세요.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공주님은.....” 뒤따라 석실로 들어선 남북쌍파 중의 북파가 그런 라소차를 밀치며 소리쳤다. “시끄럽다, 이 방정맞은 계집애야! 수다는 그만 떨고, 너는 나가서 약탕을 얹고 물이나 끓여라. 넌 여기 있어봐야 다른 사람들 신경만 더 쓰게 만들고 도움도 되지 않으니.” “북파 어르신은....” “어서 나가지 못해! 정 혼이 나야 말을 듣겠느냐?” 죽장을 들어 올리며 다그치는 북파의 호통에 라소차가 더 이상 말하지 못한 채 석실을 물러났다. 속으로 할망구가 나이 들어도 성깔만 더 지독해지는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인 채로.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약물은?” 마야가 남북쌍파의 모습을 살피며 곧바로 물었다. 북파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말이 없었고, 남파가 대신 나서서 물음에 답했다. “그런대로 잘 되었습니다, 공주님. 만족할 만큼 많이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 놈.... 저 사람을 구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무심코 단리유아를 가리키며 말하다가 마야가 싫어할까봐 다시 말을 바꾸어 대답했다. 그런 모습에도 별 신경 쓰는 기색이 없이, 마야는 단지 약을 가져왔다는 말만 귓속에 들어오는지 밝은 안색이 되어서 기뻐하며 두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래요? 정말 다행이에요. 더 늦어지면 다른 수를 써야할지 말지 한창 고민하고 있었는데. 두 분 다 수고하셨어요. 장로의 신분이라고 해도 쉽지 않는 일이었을 텐데, 저 때문에 어려운 걸음을 하셨다는 것을 저도 잘 알아요. 뭐라 더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지만 그래도 제 마음만은 알아주세요.” “아닙니다, 공주님. 이 정도 일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저희 같은 늙은이들은 공주님께 좋은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답니다. 단지....” 남파가 대답하다가 말끝을 흐리며 마야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불과 이틀 사이에도 더 상태가 나빠진 것 같은 마야의 모습에 근심이 가득했지만, 차마 더 이상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더 말해보았자 마야의 마음만 상하게 만들 것 같아서. ‘휴, 공주님! 대관절 저 사람과는 무슨 관계이시기에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인지, 노신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여신께서 현몽해서 만나라 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하면서, 막상 자신의 건강은 내팽개치고. 게다가 자신의 처지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다니....’ 그들 두 사람이 본궁에 찾아가 약물을 달라고 했을 때,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해서 꼬치꼬치 물음을 던졌었다. 마야의 내상 때문이라고 둘러대었지만, 그들 자신이 생각해도 그리 설득력이 없는 변명이었다. 요구한 약물 자체도 단순한 내상의 치료에 대한 것보다는 원기를 회복하거나 외상이나 혈행(血行)에 도움이 되는 약물이 더 많았던 것이다. 특히나 대공주나 삼공주가 의심이 가득했는데, 마야가 무공수련을 멈춘 지 한참 되었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어서 수련 중에 내상을 입었다는 두 사람의 변명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무리하게 수련을 다시 시작하다가 내상을 입었다고 설명했지만 다들 납득하지 못해서, 결국에는 그러면 단지 내상에 필요한 약물만 가져가라고 했었다. 나중에 두 사람이 다시 궁주에게 간청해서야 필요한 약물들을 겨우 구해올 수 있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더 걱정인 두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시체 같은 녀석에게 마음을 쏟는 마야의 상태도 심히 근심스러웠지만,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거나 아니면 감시자가 생길지도 몰랐다. 누군가 마야가 남자를 무단히 궁내로 끌어들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비록 치료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좋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야를 시기해서 어떻게 해서든 흠을 찾아서 괴롭히려는 사람들인데, 이런 일을 알게 된다면.... 잠시 남북쌍파가 본궁에서 겪은 일에 대한 경과를 설명한 후, 마야가 주위의 사람들을 향해서 말을 꺼냈다. 단리유아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해 전에 없이 밝은 표정이었고,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면 어서 서두르지요. 빠를수록 저 사람을 회복시키는데 유리하니. 한시가 급해요.” “아니 됩니다, 공주님. 서두르는 것도 좋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공주님도 제대로 의복을 갖추고 몸을 추슬러야합니다. 이제라도 누군가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르니. 더욱이 공주님의 지금 상태로는 계속적인 치료는 무리입니다.” 남파가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이라도 치료할 생각인 것처럼 서두르는 마야를 말렸다. 이런 남파의 말에도 고개를 저으며 마야가 다시 재촉했다. “아니에요. 누가 찾아오면 옷만 갈아입으면 될 것이고, 지금의 모습이 오히려 그들의 의심을 없애는 것에도 더 효과적일 것이에요. 그러니....” “안됩니다. 공주님의 말도 그럴듯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요.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뭔가 이상함을 곧 느끼게 될 것입니다. 노신은 허락할 수 없으니, 공주께서도 잠시 여유를 가지고 쉬시오.” 북파가 곧바로 마야의 말을 가로막으며 강하게 반박하고, 이어서 남파도 북파를 편들며 마야를 설득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현재의 마야의 상태는 아무리 잘 봐주어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과 같았다. 마야의 마음은 어쩔지 모르지만, 몸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아서 피곤에 지친 파리한 안색과 불과 며칠 사이에도 더욱 마른 것 같은 모습에 다들 연민이 치솟을 정도였고,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을까 싶어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주님, 어차피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니 잠깐이나마 눈이라도 붙이십시오. 혹시라도 무리하게 계속하다가 치료 중에 실수하실 수도 있으니.... 설마 공주님께서도 자신 때문에 일이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으시겠지요?” 연이어 걱정스레 만류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마야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마음은 단리유아를 한시라도 빨리 치료하고 싶었지만, 자신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되지 않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두 시진이 흘렀을 때, 잠시 잠을 붙인 마야는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더 쉬기를 바랬지만, 더 이상 마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먼저 성모궁에서 가져온 각종 영약(靈藥)을 달인 약탕을 단리유아에게 조금씩 복용시키고 천천히 전신으로 약효가 흡수되도록 내력을 주입해서 그 움직임을 도왔다. 금침을 이용해서 상처가 심한 쪽의 혈맥은 일부러 막아서 무리하게 급격히 약효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한 다음, 조금씩 혈도를 개방하면서 약효가 흡수되도록 했다. 일순간에 잠력을 끌어올려서 원기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신체가 약력(藥力)을 버티질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될 가능성이 커서 조금씩 상처를 치료하고 원기를 회복시키게끔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어느 정도 원기가 회복되고 외상도 아문 다음에야, 다시 커다란 독에 약물을 모두 넣고 끓여서 그 속에 단리유아를 집어넣어 천천히 몸 전체로 흡수하게 할 생각이었다, 한 번씩 치료할 때마다 거의 두 시진은 꼬박 잡아먹는 일이어서 마치 물 빨아먹은 솜처럼 몸이 피로했지만, 마야는 한시도 쉬려하지 않았다.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그 일을 반복해야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대신하려고 해도 도무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하고 있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반복된 치료를 해야 했는데, 언제나 끝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마야가 버티어낼지 이러다 마야가 먼저 쓰러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다들 걱정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저 쳐다볼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 허풍공작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4,5권을 보내드리려고 했었는데, 이번의 이벤트가 취소되버리는 바람에 게으른 제가 깜박 했답니다. 6권이 나오면 틀림없이 제일 먼저 보내드리겠습니다. 꿈속의 상면(相面)과 치료(治療) 꿈속의 상면(相面)과 치료(治療) 2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을 때, 마야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단리유아의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다. 내외상도 점차 아물어 이제는 거의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비록 길고 지루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제부터는 원기의 회복과 의식을 차리는 문제만 남아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한 번도 깨어나지 않는 것을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당장에 중요한 것은 신체적인 회복에 있어서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마야는 다시 단리유아를 커다란 항아리에 옮겨 넣고 전신으로 약력을 흡수하도록 했다. 몸속의 나쁜 기운은 모공을 통해서 배출하고 대신 약력을 흡수하여 소모된 원기를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세 시진마다 한 번씩 꺼내어 침술로서 약기운을 북돋아주고 다시 약물을 갈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중요한 고비는 넘긴 것이라 할 수 있어서, 마야 역시 안도하는 표정으로 항아리에 담겨져 얼굴만 내밀고 있는 단리유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보름 동안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고 단리유아의 상처에만 신경을 쓴 마야의 상태는 누가 보더라도 중병에 든 것처럼 피골이 상접하고 쇠약해져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약향(藥香)이 짙게 풍기는 석실 안에는 남북쌍파와 곤리화 자매가 모여서 마야를 지켜보고 있었고 라소차는 밖에 혼자 남아있었다. 그동안 네 사람들이 교대로 석실에서 마야를 돕고 있었고 라소차는 주로 심부름과 전갈을 맡았었는데, 오늘은 단리유아를 옮기기 위해서 네 사람 모두 들어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만류가 끊임없이 계속되었음에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포기한 채 지켜보기만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만 자신을 돌보도록 마야에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저 사람의 상처도 위급함을 넘기고 이제 어느 정도는 나아졌으니, 그만 자신의 몸조리에도 신경을 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리유아를 바라보고 있는 마야를 향해서 남파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마야가 대답하기 전에 곧바로 곤리화도 말을 이어 간청했다. “그래요, 공주님. 이제는 딱히 어려운 일도 없잖아요? 내력을 조절하여 약력을 퍼뜨릴 필요도 없고 공주님만 펼칠 수 있는 이기환령생정침법(以氣還靈生精針法)도 필요한 상황이 아니니까요. 이제는 제발 자신의 건강도 신경을 쓰세요.” “공주님은 어떻게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저희들은 생각하지도 않나요? 그러다 먼저 쓰러지면 저희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잇달아 곤리수가 한줄기 원망을 담아서 마야에게 애원했다. 단리유아에게만 온 정신을 쏟은 채 주위의 사람이나 상황에는 무관심하기만 했던 마야 때문에, 그동안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사람들로서는 마음이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 이유도 상황도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고집대로만 하는 마야를 보면서 답답함과 마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남은 이들도 마음이 편치 못해 다들 제대로 잠든 적도 없었다. 물론 거의 매 시간을 붙어서 단리유아를 돌봐왔던 마야에 비길 바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공주님도 그만 쉬시어 체력을 회복하십시오. 변화가 생기면 저희들이 알릴 테니. 설마 공주님께는 저 사람이 깨어났을 때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요?” 북파가 덧붙여서 마야의 상태를 꼬집으며 다그쳤다. 그 소리에 엉망인 자신의 모습을 힐끗 내려 보다가, 너무나 지저분하고 헝클어진 자신의 모습에 마야가 ‘풋’ 하고 절로 작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나도 여유를 가질 생각이었어요. 다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저 사람을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물러나도록 할 테니.” 목까지 약물에 잠긴 채 얼굴만 내보이고 있는 단리유아을 보면서 마야가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야 또한 오늘은 이만 물러날 생각이었고, 앞으로는 자신의 몸도 돌볼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었다. ‘어서 정신을 차리세요. 당신의 눈동자를 보며 서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것이 무척 많잖아요?’ ‘물어볼 것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혹시라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나만을 바라보고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나를 사랑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그러고 싶은 이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이 이기적인 나만의 집착에 불과한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생각을 하면 자꾸만 자신의 남은 수명을 되돌아보게 되어서 일부러라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생각이 그것에 미치는 것은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만의 마음으로 간직해야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사랑으로 그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시간이 흘러 그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 계속해서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애써 떨치고 마야는 다른 곳으로 생각을 건너뛰었다. ‘아, 난 정말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비록 모습으로 보아서는 좋지 않았던 것이 분명할지라도.... 하나부터 열까지 속속들이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당신에게....’ 서로 지난날을 털어놓으면서 얘기하고, 자신의 괴로운 마음도 토로하고 싶었다. 또 현생(現生)에 있어서는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전생(前生)에 있어서는 어떻게 만난 것인지 자신의 뇌리에 떠오르는 모습을 설명해주고 되묻고 싶기도 했다. 그도 그런 꿈을 꾸고 있는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두 눈을 감고만 있는 단리유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어떤가요? 지금 나에 대한 꿈을 꾸고 있나요? 혹시라도 우리의 연(緣)을 알고 마음이 괴로운 것은 아닌가요?’ ‘괴로워 말아요. 비록 그것이 결코 우리가 원하지 않은 정해진 운명(運命)의 힘에 의해서라도, 서로가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기쁘지 않나요? 짧은 행복에 비해서 그 괴로움은 견딜 수 없는 길고 긴 세월을 요구하며 남은 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지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야는 끊임없이 단리유아에게 묻고 있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꿈을 꾸고 알고 있는지, 일면 궁금하여 물으면서도 이내 그도 알고 있을 것이라 스스로에게 답하고 있었다. 뇌리에 떠오르는 전생의 모습에서 자신은 힘없는 작은 나라의 공주였고 그는 장군의 모습이었다. 서로가 마음 깊이 사랑함에도, 두 연인(戀人)을 시기하는 운명의 힘은 잔인해서 천애(天涯)에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자신은 타국으로 원하지 않는 시집을 가게 되었고 자포자기한 단리유아 또한 전쟁 중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볼모와 같은 처지로 떠난 마야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절망했지만, 바로 뒤따라 자결을 할 수도 없는 처지에 마음의 괴로움이 신체를 집어삼킬 때까지 쓰디쓴 인고의 삶을 보내야 했다. ‘전생에서는 당신이 먼저 떠나고 나만이 남게 되었지요. 헤어날 수 운명의 힘에 이끌려 또다시 이렇게 만났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떠나가게 될 것 같아요. 남겨질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아아! 당신에게 향하는 이 마음을 지금이라도 붙잡고 싶지만, 이미 운명대로 흐르는 마음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남겨질 단리유아의 괴로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해서 마야 또한 괴로움에 얼굴에 그늘이 졌다. 예정대로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이미 불행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채 두 사람의 운명을 조소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절로 깊은 탄식을 토해내며 마야가 다시 속삭였다. ‘우리의 운명을 알게 되면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나요? 나를 피해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을까요? 아니지요? 나를 내버려두고 가지는....’ 돌고 도는 윤회의 사슬에서 겪게 되는 불행한 운명에 마야는 엎드려 마냥 울고 싶었다. 전생에서 현생에까지 이어지는 이런 업보는 누구의 잘못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알고 싶어서, 그동안에도 여신에게 하소연하며 계속 물어보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나니, 천애(天涯)에 홀로 되어 의지할 사람 하나 없었네.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것이 사람이라 하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그 누구였던가요? 바람결에 흔들리는 촛불보다도 못 믿을 것이 사람이라 하지만, 어찌해서 그리 믿음은 쉽게 흔들리고 사그라지는지. 각박한 인심(人心)은 겉모습에만 좌지우지 흔들리고, 내면(內面)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이 적어라. 고적(孤寂)하기만 했던 삶 속에 찾아든 운명(運命)의 사랑. 바람을 타고 스며들어 내 가슴을 뛰놀게 만드는데. 헤어짐을 그리고 홀로 남을 그대를 생각하면, 괴로운 마음은 천장(千丈) 심연(深淵)에 빠진 듯. 외로움과 괴로움에 짓눌려 가슴 깊이 탄식을 내쉬며, 그대에게 묻노라니 운명(運命)은 어떤 것인가요? 지울 수 없는 업(業)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하지만, 어찌해서 우리의 운명은 이렇게 가혹한 것인지? 돌아오지 않는 물음을 단리유아에게, 아니 자신에게, 아니 그것도 아닌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던지며 마야는 생각하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마야의 모습을 네 사람이 걱정스런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석실 내에는 자욱한 약향이 감돌며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 흐르고 있었고,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단리유아를 치료하는 데에만 온 심력을 기울이는 마야에 대한 걱정이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동안에 몇 번인가 본궁에서 의심을 하여 사람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무사히 속여 넘길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마야의 기색과 나머지 사람들의 행동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단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일지도. 만일이라도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마야를 제외한 다섯 여인들은 생각만 해도 두렵기 그지없었다. 자신들이야 어떤 벌을 받더라도 상관없다하지만, 마야에게 내려질 벌은 결코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남자를 끌어들인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비켜나갈 수 없는 일이었으니. 더욱이 마야를 편들만한 사람들이라고는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궁주 정도에 불과했는데, 궁주 역시도 모두가 나서서 마야를 성토한다면 어쩔 수 없을 터였다. 단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자 하나 때문에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마야의 모습이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도 고집이 세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말리는 일에는 대체로 따르는 편이었던 마야였고, 궁내에서의 문제도 잘 알고 있어서 스스로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도록 처신을 잘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말문을 닫고 지내다가 입을 연 최근의 행동들은 완전히 성격이 변한 것처럼 다른 일에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자신의 고집대로만 하고 있었다. 저 사내놈이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마야의 태도로 짐작하기로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자신들의 시선을 벗어난 적이 없던 마야가 어떻게 저놈을 아느냐는 것이었다. 만난 적도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러한 것을 보면서 다섯 사람도 혹시라도 마야가 미친 것은 아닐까하고도 생각했었다. 아무리 여신의 현몽에 의해서 만난 사람일지라도 그녀들에게는 쉽게 납득가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네 사람이 마야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한 심경일 때, 의자에 앉아있던 마야가 고개를 외로 숙이며 옆으로 쓰러졌다. 안도하는 마음에 긴장이 풀어졌던지 그동안에 쌓여있던 피로가 한순간에 마야를 덮쳐서 정신을 잃게 만든 것 같았다. “이런! 공주님, 공주님 괜찮으세요?” 곤리화가 먼저 알아차리고 곁으로 다가가 어께를 흔들며 소리쳤지만 완전히 의식을 잃어 버렸는지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다들 놀라 마야의 곁으로 다가가 허둥대고 있다가, 잠시 후 남파가 마야를 안으며 곤리화 자매를 향해서 명을 내렸다. “부산 그만 떨고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서 저 사내놈을 지키도록 해라. 공주님은 우리 두 사람이 모시고 가서 돌보도록 할 테니.” “남파 장로님, 공주님은 괜찮으시겠지요? 설마 공주님까지 잘못....” 곤리수가 초조한 표정으로 걱정스레 반문할 때, 북파가 먼저 그런 곤리수를 크게 꾸짖었다. “무슨 그 방정맞은 소리냐! 말이 씨가 되는 줄도 모르고. 너희들....” “그만하게. 이 아이들도 걱정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니.” 계속 소리치려는 북파를 가로막고는, 남파가 고개를 돌려 두 자매에게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동안에 너무 무리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이니, 며칠 잘 조섭하면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회복될 것 같아 보이는구나. 너희들도 그리 알고 맡은 소임이나 잘 하거라. 저놈이 혹시라도 잘못되면 공주님께서 어찌될지도 모르니.” 북파의 호통에 주눅이 들어 두 자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을 때, 화풀이 하듯이 북파가 단리유아를 노려보며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모두가 다 저놈 때문이네. 생각 같아서는 내 당장이라도 저 독을 깨트려 잡아 패주고 싶은 심정이야.” “어허. 자네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이제와 무얼 어떻게 하겠다고. 자네의 답답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말은 앞으로 일절 꺼내지 말게. 혹시라도 공주님이 듣는다면 어찌 생각할 것 같은가?” 남파의 당부에도 북파는 화를 참을 수 없는지 계속 크게 소리치며 따지고 들었다. “자네도 저놈 때문에 공주님께서 그렇게 된 것임을 잘 알면서도 그런 소린가? 저 빌어먹을 놈 때문에....” “휴우! 그만하게나. 낸들 자네와 그 심정이 얼마나 다를 것 같은가? 속대로만 한다면 나 역시도 자네와 같이 저놈을 패주고 싶어, 아니 아예 죽여 버리고 싶기도 하지. 하지만, 다 공주님을 위해서 참을 뿐이라네. 몇 년 만에 말문을 연 것이 저놈 때문인 것 같은데, 어떻게 내가 일을 망칠 수 있겠나?” 잠시 남파가 숨을 돌리고는 품속의 마야의 얼굴을 불쌍히 바라보며 말을 계속 이었다. “자네나 우리 모두 몇 년 동안을 허송세월하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낙망한 표정이 되어 지내던 공주님을 보아왔지. 그런데 며칠 동안 비록 몸은 날로 쇠약해지고 피로함에 지친 얼굴임에도 간만에 공주님의 얼굴에서는 사람다운 열의가 넘치지 않았나? 그것이 저놈에 대한 정(情)인지 단순한 여신의 명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만 해도 어떤가?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시들어가는 꽃처럼 멍하니 지내는 것보다는 좋지 않겠나?” 말을 마치며 남파가 연민이 가득한 얼굴로 초췌하기 그지없는 마야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남북쌍파 두 사람에게 있어서 마야는 마치 친딸처럼 손녀처럼 여겨졌다. 본래 성모궁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들고 아이를 가져본 적도 없는 두 사람이 마야를 맡아 키우게 된 것은 마야의 자질을 알아 본 궁주의 부탁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던 두 사람도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의 재능을 가꾸어가며 아름답게 커가는 마야의 모습에서 큰 기쁨을 맛보았고, 비록 자신들이 직접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 매일 돌보며 같이 지내는 동안 깊어진 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지난 십오 년 동안이 그녀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스스로가 거침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임에랴. 지난 이 년여 동안은 말문을 닫은 채 자신들에게도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아서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상심이 되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마야에 대한 두 사람의 정은 변함이 없어서 단지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이제야 말문을 연 것이 단리유아 때문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무형의 족쇄에 가둔 채 절망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는 백배 나을 것이었다. 단지, 단리유아 때문에 마야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는 것에 화가 나고 걱정이 커서 그런 것일 뿐,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휴! 공주님, 너무나 마르셨군요. 무슨 걱정이, 괴로움이 게시기에 그런 것인지요? 노신은 섭섭하답니다. 저희들에게까지 말 못할 사연이 무엇인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답니다. 무서운 말이 나올까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남파가 걱정스런 얼굴로 마야를 매만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품에 안은 것이었으니 거의 십년이 넘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나이와 키에 비해서 그동안의 심적인 고통과 피로 때문에 메마른 마야는 너무나 가벼워, 마치 어린 시절의 마야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그 시절로 돌아가 그 해맑은 미소를 짓던 여아를 안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남파는 생각해보았다. ‘다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겠지요, 공주님. 시간이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니. 그래도 그 시절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는 것은? 노신이 너무 나이가 많아 추억 속에만 살아가는 늙은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흔히들 사람에게 남는 것은 추억뿐이라 하던데, 공주님이나 저나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던 때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아무런 걱정이나 미움이 없을 때였으니. 그런데 지금은....’ 쓴웃음을 지으며 남파는 생각을 멈추었다. 사람간의 미움과 불신을 많이 겪기도 했지만, 최근에 겪고 있는 마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는 그런 일이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만한 자신과 같은 나이 든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인생사가 고해(苦海)라는 말처럼 일백 평생에 좋은 일은 적고 나쁜 일이 더 많았지만, 어찌해서 무상함을 느낄만한 나이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을 겪게 되어 마음이 괴로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마야에 관계된 것이기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 넷상으로 올릴 때는 끊기가 애매한 경우가 많습니다. 제목도 나누기 어려울 때가 많아서 같은 이름으로 계속 올리지만 나중에 책으로 나올 때는 바꾸어야 할 때가 많지요. 내용도 다시 나누어 구분해야 하구요. 제 소설에서 싸움이 너무 많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제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잘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공이나 세력, 풍물 같은 것부터 싸움까지 이런 것은 다 부차원적인 것이지 제 소설의 중심 주제가 아닙니다. 내용의 전개상 들어가는 것일 뿐, 본래의 목적이나 주제는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의 구도기처럼 단리유아라는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완성, ‘운명(運命)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이 주된 것입니다. 이 글은 앞으로 제가 써나갈 글들의 기본 뼈대라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설정인 문파, 풍물, 무공 수위 같은 것은 거의 변화가 없이 시대가 바뀌면서 각각의 이야기가 이어질 것입니다. 빨리 1부를 끝내고 싶은데, 아마 길어도 8권에서는 끝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부를 쓰기 전에 3, 4권 정도의 분량으로 짧게 다른 작품을 하나 쓸 계획으로 지금 거의 줄거리를 다 잡아가고 있습니다. 어서 1부를 빨리 끝내고 그 글을 쓰고 싶은데, 생각보다 1부를 쓰는 시간이 길어져서 저도 난감할 지경입니다. 꿈속의 상면(相面)과 치료(治療) 꿈속의 상면(相面)과 치료(治療) 3 다시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흐른 십이월 말이 다 되었을 때, 단리유아에 대한 치료도 끝이 났다. 그러나, 비록 신체적인 면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치료가 필요 없을 정도였지만, 한 번도 깨어나지 않는 단리유아의 정신적인 상태가 이제는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워낙 중상이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리유아를 독에서 꺼내 옮겨 치료를 마친 후, 마야와 네 여인이 석실에 모여서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논의해보고 있었다. 그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해서인지, 마야도 이전보다는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이제는 거의 건강을 회복한 것 같았다. 여전히 예전의 밝은 모습은 찾기 힘들었지만, 더욱 심원해진 듯한 서늘한 눈동자와 가라앉은 표정이 오히려 그때와는 달리 무언가 사람의 심금을 흔드는 성숙한 여인의 자태가 엿보이고 있었다. “남파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이의 어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가요?” 마야가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않고 있는 단리유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항상 곁에서 지켜볼 때는 그렇듯이 단리유아의 오른손을 꼭 움켜쥔 채였는데, 그동안 단리유아를 부를 때는 몇 년을 함께한 연인처럼 항상 그렇게 다정한 어조로 부르고 있었다. 단리유아를 부르는 마야의 호칭이 다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이동풍으로 듣는 척도 하지 않은 모습에는 그만 다들 포기하고 있었다. 남파에게 물음을 던졌지만, 마야는 그 답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단리유아의 얼굴만 응시하면서 빙그레 웃음지은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당신 모습이 어떤지 아세요? 풋! 다른 사람들은 꼭 산적 같데요.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당신이 어떤 모습일지라도 나에게는 다시없는 미남같이 보일 거예요.’ 석대위에 누워있는 단리유아는 그동안 깎지 못해서인지 구레나룻이 무성하게 자라나 창백한 얼굴을 거의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야도 수염을 깎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고도 생각했지만, 얼굴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지금의 모습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크고 작은 흉터가 많아서 평범한 얼굴임에도 날카롭고 삭막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리 수염으로 가리니 그런 면은 없이 남자다운 느낌이 강하게 들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단리유아만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마야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내 남파가 그런 마음을 떨치고 들릴락 말락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휴! 제가 보기에는 이 사람의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떨어지며 머리에 충격을 입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을 수는 없지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제 생각엔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남파의 말에 곧바로 한쪽의 곤리수가 반론을 폈다. “그렇지만 장로님, 떨어지면서 충격을 입어 영영 혼수상태에 빠져 든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나요? 제 생각에는 그게 오히려 타당할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두뇌에 입은 손상은 겉으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부분이 많으니....” “저도 제 동생의 생각과 같아요. 싸우다가 그런 큰 상처를 입게 되었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움에 집중하기에도 부족할 상황에서 스스로 마음을 닫아야만 할 일이 있었을까요? 있다하더라도 그럴 시간이나 있었을까요? 보통 사람의 정신력으로는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옆에서 끼어든 곤리화가 동생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이어서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설명하며 자신의 주장을 폈다. 곤리화의 생각으로는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까마득한 차가랑제에서 떨어졌는데, 다행히 소리월탄의 물속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그 충격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컷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설혹 상처가 없다 해도 보통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지사라 여길 정도였으니, 오히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견디어낸 저 사람이 몇 배는 더 이상해보였다. 두 사람의 반론이 이어진 후에 남파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반론했다. “물론 너희들의 말도 맞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란다. 우선 저 사람의 무공은 보통이 아닐 것이니 일반적인 경우에 비추어서 생각할 수는 없지. 그런 상처와 상태에서도 숨이 붙어있던 것이 너희들로서는 가능하리라 생각하느냐? 상처만으로도 즉사할 것이 분명하고, 최소한 떨어지는 순간에는 숨이 끊어지게 되었을 그런 높이에서 떨어지면서?” 확실히 상처를 입은 상태로 그런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면, 보통사람이라면 그 압력에 의해서 전신에 입은 상처에서부터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십중팔구일 것이다. 단리유아가 살 수 있었던 것도 무의식중에도 일시 혈맥을 막았던 구전회혼결(九轉廻魂訣) 덕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 그동안의 상처회복이 빠른 것도 마야의 헌신적인 노력과 성모궁의 약물이 뛰어난 면도 있었지만, 비록 신체적인 면에 불과할지라도, 알게 모르게 구전회혼결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르게 완치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이 사람도 그런 상태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역시 그 충격은 무시할 수 없을 테니 얼마 동안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신체적인 면에 있어서 이미 완치된 상태에서도 한 번도 깨어나지 않는 경우를 상상하기란 힘들지. 머리 쪽에 상처의 흔적이라도 보이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는 상황에서 거의 두 달이 가까워지도록 의식이 없다는 것이 너희들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남파의 반문처럼, 심중으로 마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신체적인 이상보다는 내면의 정신적인 문제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생각과 같은 남파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야가 곧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남파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단리유아의 상태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성모궁의 본궁에서 누군가 찾아와서 수색을 할지도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혹시라도 궁주를 설득해서 별궁을 뒤지게 된다면 마야로서도 막을 수 없을 테니 이내 단리유아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무런 변명도 통하지 않을 테니,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깨어나 스스로 움직일 정도는 되게 만들어야 했다. 다들 마야의 생각처럼 그 문제가 걱정스러워 어서 저 사내놈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항상 저놈만을 생각하는 마야를 볼 때, 마치 자신들만의 소중했던 마야를 빼앗긴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더욱 단리유아가 싫었다. 차마 마야의 면전에서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글쎄요? 정신적으로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 없지요. 뇌리에 충격을 입은 경우였다면 그래도 머지않아 깨어날 가망이 클 텐데.... 흠, 저 사람과 같은 상태라면 언제 깨어날지는, 그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열고 벽을 깨뜨리지 않는 한,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단정 짓듯 남파의 대답이 이어진 후에 한동안 다들 어찌해야 좋을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는데, 근본적으로 외부에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리유아 자신의 내면의 문제였지 약물을 이용한 외적인 도움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상태였다. 한동안 다들 생각에 잠겨 침묵만이 석실을 감싸고 있을 때, 먼저 마야가 말문을 열어서 자신의 생각을 일행에게 밝혔다. “제 생각에는 술법을 펼쳐 제가 이 사람의 정신 속으로 한번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마야는 이 문제를 가지고 며칠 전부터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사실 지금까지 네 사람에게 단리유아의 상태에 대해 물음을 던졌던 것도 다 그런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설득하기 위한 마음에서였는데, 이미 어찌해야 할지 마야는 결심을 마친 상태로서 단지 그 수순을 밟은 것에 불과했다. 바로 자신의 의도를 밝히면 반대가 극심할 것이 뻔했으니.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남북쌍파의 놀라서 반대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북파가 얼굴을 굳힌 채 먼저 소리치며 반대했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공주님, 설마하니 그 금단의 술법을 펼치시겠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여태까지 성공한 적도 없었고, 시전 중에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것인데? 절대로 안 됩니다. 노신은 결단코 그 일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도 반대입니다. 아무리 저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라지만, 일푼의 성공할 확률도 없는 일을 벌이실 생각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이번 일만은 저도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술법을....” 너무 놀라고 화가 나서 오히려 기가 막힐 지경이 된 남파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며 극력하게 반대했다. 한쪽의 곤리화 자매는 도대체 무슨 술법을 말하는 것인지 몰라서 궁금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역시, 비록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이내 남북쌍파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그 술법의 위험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곧바로 계속해서 반대하며 소리치는 남북쌍파의 대열에 끼어들어서, 곧 석실 내에서는 네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시끄럽게 소리치는 소리로 벽이 윙윙거릴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마야가 언급한 술법은 이혼대법(離魂大法)의 일종인, 수혼이체이혼도(睡魂離體離魂道)라는 성모궁의 비전술법이었다. 흑찰미사에서 전해진 이혼대법을 연구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본래는 병으로 죽음에 다다른 사람이 숨은 쉬지만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영혼을 옮겨서 다시 삶을 지속시키는 방법으로 연구한 것이었다. 과거에도 성공한 적이 드물었고, 설사 성공했다하더라도 두 영혼이 충돌하여 이내 정신분열로 자살한 경우가 다여서 성모궁내에서도 그만 포기한 술법이었다. 더욱이 비록 의식이 없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는 것과 같아, 자칫 잘못 오용될 위험이 큼을 인식해서 성모궁에서도 더 이상의 연구를 금지시킨 지 오래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 생각을 포기하라며 계속해서 다그치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마야가 말문을 열었다. 반각 가까이 계속된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별로 동요한 기색이 없는 침착한 어조였다. “여러분이 걱정하는 바는 저도 잘 알고 있지만, 저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요. 그 술법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몸으로 자신의 혼을 옮긴 경우에요. 저처럼 잠깐 제 영혼을 분리하여 저 사람의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경우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단지 어찌된 일인지 파악하고 벽을 깨뜨리게 만드는 것이 목적으로, 잠시 몸에서 이탈하는 것일 뿐이니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라 보아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절대로 안 됩니다, 공주님!” 마야의 말과 행동에서 우러나오는 확고한 태도에 북파가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말은 어디로 흘려듣고 고집만 피우는지 마야의 태도가 답답하기 그지없었고, 일면으로는 너무 당황해서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런 경우라도 위험이 적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이전에 그런 식으로 펼쳐보았다는 것을 들은 적도 없는데? 노신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봅니다.” “맞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인지 저는 그게 더 궁금해요. 정말 공주님은....” 정신을 차린 남파가 다시 반론을 펴며 반대하고, 그 뒤를 곤리화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그녀들로서는 마야를 붙잡고 제 정신이냐고 소리쳐 묻고 싶었다. 그런 위험한 대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일상적인 흔한 치료법이라는 듯이 말하는 마야의 태도에 다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다른 좋은 방도가 있나요? 여러분도 언제까지 이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아요?” 마야가 고개를 돌려 네 사람을 차례로 주시하면서 반문했다. 뒤 이은 생각은 속으로만 중얼거린 채. ‘물론 하루라도 빨리 이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더 큰 이유이지만....’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마야에게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해서, 일분의 시각도 그대로 흘려보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더 단리유아와 함께 하고 싶지만, 이미 그날은 정해져있는데다가 그것도 주변의 상황이 악화된다면 더욱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야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런 술법을 펼칠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이 단리유아를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저히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직접 단리유아의 정신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하루라도 빨리 단리유아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길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마야의 반문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말이 없었다. 입을 벌리고 뭐라 답하고는 싶은데, 그녀들로서 마땅한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주변의 상황도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그저 안 된다는 소리만 반복해서 웅얼거리고 있을 뿐, 조리 있게 마야의 말을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다. “제발, 공주님!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세요. 우리 두 늙은이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남파가 마야를 붙잡고 흔들며 애원 섞인 눈길로 떼를 쓰듯이 간청했다. 이어서 앞 다투어 다른 사람들도 마야를 만류하여 다시 생각해보기를 애원했다. “공주님, 그러다 잘못되면 저희는 어찌하라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흐흐흑....” “저 사람이 대관절 누구이기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시면서까지 그러시나요? 도대체....” 곤리화 자매가 울먹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때, 이어서 북파가 굳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차라리 제가 해보겠습니다. 제가 성공한 다음에라도 하시는 것이....” 술법이 성공한다는 것도 보장할 수 없었고, 술법 중에 누군가 마야를 조금만 건드리기만 해도 치명적인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 그 후유증도 심각해서 수명 역시 깎아질 것이 분명하니, 그녀들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말려야만 했다. “모두 그만하세요. 이미 제 마음은 정해진지 오래니. 여러분의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지만, 저 사람은 제 자신을 다 바쳐서라도 도와야할 사람이에요. 그러니 더 이상은 저를 막을 생각을 마시고 앞으로 그 술법을 펼칠 준비나 해주세요.” 일부러 얼굴을 굳힌 채 마야가 단호하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네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어서 마야도 가슴이 아팠다. 자신과 가까운 친인이라고는 이들에 불과하면서도 이렇게 매정히 자신의 고집을 부려야만 하는 것이. 하지만 어쩔 것인가?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단리유아였는데. 마야 역시 이들의 걱정과 자신에 대한 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코 마음을 되돌릴 생각은 없었다. 설혹 일이 잘못된다하더라도 무엇을 원망할 것인가? 어차피 남은 생도 얼마 없는 마당에 그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마야는 무슨 일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얽혀진 운명을 생각한다면, 마야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가 운명을 끊을 수 있게 도울 생각이었다. 계속해서 최종적으로 선언하듯이 마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결정을 알렸다. “내일은 본궁에 들려야 하니 사흘 후에나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에요. 그러니 그때까지 쌍파께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주세요. 이번에는 저와 여기 두 사람이 다녀올 테니.” 내일이면 해가 바뀌니 마야도 궁주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본궁에 들려야 할 터였다. 그동안에는 제대로 찾아가지도 않았지만, 말문을 열었고 수련도 다시 시작했다고 알려진 상황에서 더 회피할 수도 없었다. 생각만 해도 답답한 마음에 가고 싶은 생각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본궁에서 자신을 위해주던 궁주를 찾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 자체도 싫었지만, 겉으로 꾸민 가증스런 태도로 면전에서는 다정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마야는 그 무엇보다도 싫었다. 차라리 대놓고 무시하고 미워한다면 그래도 나을 테지만, 뒤로는 갖은 악의에 찬 소문을 퍼뜨리고 질시하고 미워하면서도, 막상 마주할 때는 전혀 그런 적이 없다는 듯한 사람들의 태도는 마야를 더욱 질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문제를 가지고 그랬었고 별로 심하지도 않았던 것이 이제는 모두가 한통속이 된 것처럼 자신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일이 해명하고 그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신물이 날 정도였고, 이제는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 마야였지만, 단지 삼년 만에 처음 궁주를 만나보는 것을 위안 삼아 가야만 했다. 확고부동한 마야의 태도에 다들 깊이 한숨을 내쉰 채로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굳은 결심을 내비치는 모습에 더 떠들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임을 모두가 알았다. 그녀들로서는 당최 마야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저 사내놈이 누구이기에 이러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단지 한탄만 토해내고 있었다. ‘차라리 처음 저놈을 보았을 때 나중일은 생각도 말고 그때 그냥 물속에 처넣어버리는 것인데....’ 북파의 생각처럼 다들 이제야 마야의 뜻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단리유아를 구해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간만에 말문을 열고 밝은 얼굴이 된 마야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내키지 않음에도 따랐던 것인데,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을 보니 그때 그러지 못했음을 모두가 가슴을 내리치며 통탄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제와 후회한들 어쩔 것인가? 지금 저놈을 죽인다고 일이 뜻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마야의 태도로 보았을 때는 바로 뒤따라 자결이라도 할 기세였으니. 다들 낙심한 얼굴이 되어서 하나둘 문밖으로 힘없이 걸어 나가고 있었다. ‘모두에게 죄송하게 생각해요. 이유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제 자신의 고집만 피우는 것 같아서. 하지만 모두가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해요.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아, 여러분의 마음은 가슴 깊이 간직했다가 꼭 갚을게요. 후생에 다시 태어나 만나게 된다면....’ 나가는 네 사람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마야는 돌아섰다. 그녀들이 혹시라도 볼까봐.... 다 커서 운다는 것이 새삼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본다면 그녀들의 상심만 더 커지게 될 것이니. 그동안에는 어떻게 해서든 숨겼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병을 숨기기도 어려웠다. 그들도 자신이 마비된 채로 정신을 잃은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으니, 이제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을 터였다. 그녀들도 눈치 챘으면서도 두려운 마음에 차마 묻지 못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묻는다면 내가 더 괴로워할까봐 그렇기도 하겠지. 차라리 이제라도 밝히고 싶기도 하지만....’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을 테지만, 마야는 가능한 누군가 묻기 전에는 스스로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로가 모른 척 그렇게 지내기만을 바랄뿐이었다. 비록 그것이 서로의 마음에 더한 상처를 주는 것일지라도. 이번 일 역시 시간이 더 있다면 순리대로 했겠지만, 이제 자신의 남은 삶은 일년 남짓에 불과했다. 그것도 이번에 술법을 펼치게 된다면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럼에도 마야는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단지 그와 오랫동안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찌르고 있을 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사람이 모든 것을 뜻대로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시일이 흘러 죽음에 이를 때,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한 점 후회 없이 밝게 웃을 수 있도록. 꿈속의 상면(相面)과 치료(治療) 꿈속의 상면(相面)과 치료(治療) 4 사흘 후, 본궁에 갔던 마야는 기직맥진한 채 다시 별궁으로 돌아왔다. 남북쌍파의 걱정 어린 물음이나 라소차의 쫑알거리며 묻는 말에는 희미하게 쓴 웃음만을 지어보이고, 곧장 몸을 돌려 단리유아에게로 향했다.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그에게라도 털어놓고 하소연하지 하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아서였다. 남파가 그런 마야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돌려 본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곤리화 자매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공주님의 기색을 보니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도 한 결 같이 공주님께만 그러는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에요.” 곤리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지만, 그다지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계속 다그치는 남북쌍파와 라소파의 물음에, 그제서야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곤리화 자매가 지난 사흘 동안 겪은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뒤, 내내 얼굴을 찡그리던 남파가 탄식을 토해내며 말했다. “아, 정말 어찌할 수가 없구나. 일이 그 정도에까지 이르다니.... 어째서 다들 그리도 공주님만 못살게 구는 것인지.” 마야의 처지를 생각한 다른 사람들도 걱정스럽고 한스러운 표정이 되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불상사들이 쌓여 이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마야의 불행만이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들 다섯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마야를 미워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밉고 불만스러운 것은 여전했지만, 단지 현재의 마야의 상태가 더 걱정이 되고 있었다. 다섯 사람도 어느 정도 마야의 상태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한참 후에 북파가 굳은 얼굴이 되어서 말문을 열었다.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도 생각이 복잡한지 말의 두서가 없는 모습이었다. “너희들도.... 음,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공주님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더구나. 저번에 쓰러졌을 때 진맥을 해보았는데, 딱히 크게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지만 혈행이 불규칙적이고 혈맥이 막힌 곳이 여러 곳이더구나. 이내 회복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었지만. 매번 그런 일이 이어져서....” “장노님도 그러셨군요. 저희도 슬며시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내력의 움직임도 아주 불안한 모습이었어요. 몸도 그 때문인지 점차로 허약해지는 것 같아요. 겉모습은 그렇지 않지만. 장로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무슨 병인지 아시겠어요?” 곤리화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라 곧바로 말을 이어서 되물었다. 처음에는 단리유아의 치료에 너무 신경을 써 몸이 피로해서 그런 것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이내 그녀들도 이것이 일시적인 것이나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들 심중으로는 크게 의혹이 일고 있었지만, 막상 마야를 대하고서는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지난 몇 년 동안의 마야의 행동이 이 병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확신처럼 뇌리를 쳐올려서 보통 병이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떨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만 서로 생각하던 것을 이렇게 대화를 나누어보기 시작하자, 곧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들 마음을 옥죄는 듯한 불안한 생각에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잠시 후, 말이 없는 북파를 대신해서 남파가 침중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 얘기했다. “나도 그런 증상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눈에 띄게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잠시 그때만 혈맥이 곳곳이 막히고 그랬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정상을 찾아가니. 그래도 설마 했는데.... 휴, 아무래도 본궁에 들려 의전(醫殿)의 장로를 만나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공주님을 제외하곤 본궁에서 가장 의술에 해박한 사람이니 아는 것이 있겠지.” 서로 한참을 그 문제를 두고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리다가, 결국 남파가 근일 중으로 마야 몰래 본궁을 찾아가 정확한 병명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 때까지는 아무 내색하지 않기를 서로 다짐하고, 미덥지 못한 라소차에게도 거듭해서 단단히 숙지시켰다. “그나저나 큰일이구나. 이렇게 걱정만 자꾸 쌓여 가는데도 공주님은 만사를 제쳐두고 그 사람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이제 곧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술법까지 펼쳐야하는데....” 불안한 얼굴로 마야가 들어간 지하연공실의 입구를 바라보며 남파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석실에 들어선 마야는 단리유아의 손을 움켜쥔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번에 본궁에 들어가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들 묻더군요. 이공주로서의 책임은 내팽개치고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느냐고? 마치 제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기를 바라는 것처럼. 은근히 이공주의 신분을 내놓으라는 압박도 끊이질 않더군요. 마치 똑똑히 들으라는 듯이 뒤에서 서로 비아냥거리는 소리까지도.” 마야가 단리유아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얘기하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면서 잠들어 있는 단리유아에게 하소연했다. “휴, 당신은 내 맘을 알겠지요?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지쳐가기만 하는 내 마음을.... 그들의 그런 태도를 한두 번 접한 것도 아니어서 이젠 이골이라도 날만한데, 막상 그런 일을 부딪치니 저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어요.” 예전의 마야였다면 당당한 태도로 따지고 들었을 테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다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얼마 남지 않는 자신의 삶과 단리유아를 생각하니.... 그래서 그들의 면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그대로 넘겼었다. 비록 마음이 괴로운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밤을 지새우며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으니. 한편으론 그런 그들이 불쌍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남을 괴롭히는 것이 일시적인 만족을 줄지라도, 되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뒤집는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 테니. 쌓이고 쌓여 굳어진 생각들은 성격을 이루고, 그런 성격은 사람의 겉모습 그대로 드러날 테니. 언젠가 거울을 보고 찌푸린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들도 얼마나 자신의 마음이 추악하고 삐뚤어져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답답했던 속마음을 털어놓자 마야도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단리유아의 얼굴을 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짓다가, 곧이어 천천히 본궁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새해인사만 하고 그냥 되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궁주님께서 자신의 처소로 저를 부르시더군요. 어쩐 일로 그동안 그런 것인지 물으시고, 또 이제부터라도 돌아와 직무를 다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는 것은 어떠냐고 물으시더군요.” “참 고마우신 분이세요. 친딸들도 물리치고 제게 궁주 위를 넘기시려하다니. 하지만 건강했을 때도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았고, 더구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이끌고 싶지도 않았었지요. 하물며 지금의.... 그래서 간곡히 사양했지요. 저는 부족하니 두 분 공주님 중에서 택하시라고.” 궁주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잠깐 얼굴이 밝아졌던 마야는 이내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궁주의 호의와 애정을 거절해야 했던 순간을 떠올리니, 지금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처럼 따랐었으니 더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릴 적 마야의 재능을 알아보았을 때부터 궁주는 후계자로 거의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친딸인 두 공주의 자질이 훨씬 못 미치는데다가 커갈수록 그 격차가 벌어졌으니, 궁주 역시 다른 사람들이 마야를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야가 맡는 것이 성모궁의 발전에는 더 낫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뜻밖의 거부하는 저의 말에 궁주님도 매우 놀라시더군요. 당연히 제가 궁주가 되어야하고, 그래도 받아들일 줄 아셨을 테니. 계속해서 제가 사양하자 궁주님도 마침내는 포기하셨지요. 그렇지만, 제가 단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사양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는지 진짜 이유를 물으셨어요.” 아무리 설득해도 마야가 거부만하니 나중에는 궁주도 뭔가 다른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게 됐다. 마야의 모습에서도 예전과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더욱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저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무슨 연유인지 자신에게 만이라도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휴, 저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제 일신에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 고백했어요.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으로 찾아뵙는 것이라 생각하고 간 것이었으니, 그분에게는 말해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참, 당신에 대한 일도 말했답니다. 처음에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미리 알려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누군가가 해코지해도 전혀 몰랐다가 놀라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마야도 여신의 현몽에 의해서 만난 처지고, 일단 상처가 완쾌되면 바로 돌려보낼 생각이라고도 설명했다. 마야의 그런 설명에도 궁주는 오직 마야가 얼마 더 못산다는 말만 머리에 들어오는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단지 고개만 끄덕거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언제나 눈에 차지 않았던 자신의 친딸들보다도 마야를 더 딸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궁주의 놀람과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그런 궁주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다시 나타난 듯해서 마야 또한 눈시울이 붉어졌다. 궁주의 기대를 실망시킨 것 같아서,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아직도 그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짐을 피할 수 없었다. “제가 얼마 못사신다는 것을 아시고 그분도 크게 낙심한 얼굴이시더군요. 제게 많은 기대를 하셨나 봐요. 그런데 제가....” 한동안 마야는 궁주와 만난 얘기를 들려주고, 또 궁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단리유아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문득 마야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하고 싶었다. 울적한 기분을 떨치고도 싶었고, 너무 하소연만 했지 여태까지 자신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어서 단리유아가 자신을 못난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마야는 단리유아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석실에서 팽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살짝 길게 늘어진 치마를 두 손으로 치켜들고 돌아서니, 마치 흰 연꽃이 만개한 모습처럼 치마가 넓게 퍼져 펄럭였고 허리아래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이 허공을 맴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바퀴만 돌려다가 이내 자신도 모르게 몇 바퀴를 더 돌게 되었는데, 희디흰 백의를 걸친 마야의 모습은 더없이 맑고 깨끗한 얼굴로 삶의 광휘에 물들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춤추듯이 빙그르르 도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그 누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겠는가? 여인은 일순간이나마 삶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찰나에 불과해 곧 사그라질지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의 어떤 여인보다도 행복에 차 있고 아름다웠다. 이내 누가 볼 새라 재빨리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마야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행동이 멋쩍고 부끄러운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곧이어 고개를 수그려 단리유아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후훗! 어때요, 내 모습이? 괜찮았나요? 밉지는 않았겠지요? 당신이 보기에는 이리 연약해보여도 지난날에는 얼마나 야무졌다고요. 음.... 음, 얼굴은 나보다 예쁜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흥! 그래도 누구나 인정할 팔방미인이에요. 배울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배웠으니! 무공이나 의술에서도 본궁에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어요. 될수록 사람들에게는 제 능력을 보이지 않으려고 숨기고 있었을 뿐이었지. 저를 가장 잘 아는 쌍파도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모를 거예요. 어렴풋이 본궁에서 제일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런데....” 무심코 그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움을 한탄하려다가, 또다시 우울해질까봐 이내 말을 멈추고 다시 말을 돌렸다. “어서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당신도 그럴 테지요? 실제로 저와 당신이 함께 거닐며 속삭인다면.... 아, 짧은 시간이나마 당신이 곁에서 나를 지켜봐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예요. 그때, 당신과 내가....” 단리유아와 같이 손을 마주잡고 주목랑마봉을 오르는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것처럼, 상상 속에 빠진 채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석실에는 새처럼 재잘거리는 마야의 밝은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와, 잠이 든 단리유아의 귓전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어서 정신을 차리라는 것처럼.... 다음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별궁의 사람들은 술법을 펼치기 위해서 분주했다. 제대로 성공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서 다들 침중한 안색으로 말이 없었다. 꼭 필요한 말만 내뱉을 뿐, 다들 모여 식사하는 중에도 대법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었다. 간밤에 마지막으로 입이 닳도록 설득했어도 마야의 결심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다섯 사람은, 이제는 제발 무사히 끝나기만을 속으로 기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준비로 분주할 때, 마야는 혼자서 심신을 정갈히 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는 일체 곡기도 끊고 벽곡단으로 대신하고 있었는데, 얼마 동안이나 술법이 유지될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몸속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상태가 그 성공률을 높여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석양이 땅거미를 길게 드리울 무렵, 마야는 마지막으로 단리유아가 있는 석실에 들어와 있었다. 자정(子正)의 술법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신 역시도 옆에 있는 석실에서 하나하나 약물을 복용하며 준비를 해야 했으니, 이후로는 따로 찾아올 시간도 없었다. ‘이번에 당신의 마음속으로 찾아갈 거예요. 술법이 성공할지는 저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반드시 성공하리라 난 믿어요. 하늘이 이렇게 당신과 만나게 했으니 실패하게 해서 더 빨리 나를 데려가려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때 찾아가 당신을 만날게요. 혹시라도 나를 몰라보고 누구냐고 묻지는 마세요. 그러면 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엉 울어버릴지도 모르니.... 부디 나를 반가이 맞아주길 바래요.’ 눈을 감고 있는 단리유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그의 가슴에 파묻고 두 팔을 벌려 꼭 끌어안았다. 얼굴에 전해지는 그의 따뜻한 온기와 심장의 두근거림이 잠시나마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고 있었다. ‘당신이 깨어나 나를 안아주고 어루만져주면 좋을 텐데.... 언제나 일어날 것인가요? 제발 너무 늦지는 말아요. 이렇게 내가 껴안는 것은 너무도 허전하니....’ 두 눈을 감고 단리유아의 가슴에 엎드린 채 마야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리라 생각하며.... 부디 술법이 성공하여 영혼이라도 서로 만나기를.... 그리하여 단리유아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현실에서도 안아주기를.... 간절히 천지신명과 여신을 부르며 기원하고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마야는 잠깐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사를 했다.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많아서 혹여 잘못된다면 그것으로 이 세상과의 인연은 끝이었다. 라소차는 울며불며 매달리다 뛰쳐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침통한 얼굴이 되어 마지못해서 서로 인사하고 있었다. “공주님. 이왕 이렇게 된 것 이제는 성공하기나 바래야하니 그만하시오. 난 지금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마지막으로 북파의 차례가 되었을 때, 북파가 먼저 입을 열어 마야의 인사와 말을 막고는 곧바로 뒤돌아서버리고 있었다. 꼭 마지막 유언을 말하는 것 같은 마야의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훗! 그래요. 성공해야지요. 성공할 거예요. 제가 잠시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도 부족한 상황인데. 죄송해요, 북파.” 마야가 일부러 밝게 웃음 지으며 그런 북파의 등을 향해 말했다. 웃음을 짓고 말하지만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서 곧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숨기고자 마야는 곧 몸을 돌려 석실로 향했다. 그동안에 자신에게 베풀어준 온정을 가슴에 되새겨 잊지 않겠노라 마음속으로 한명 한명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자신에게 준비된 석실로 향해서 마야는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막상 약을 먹게 되었을 때, 그때까지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슬픈가?’ ‘아니. 그 때문이 아니야.’ ‘그러면 왜 울지? 이제와 두려워서?’ ‘그것도 아니야. 혹시라도 정든 이들을 다시 못 볼까봐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야. 이제 잘못되면....’ 아무도 없는 석실에서 펑펑 눈물을 내쏟으며 마야는 자문자답하고 있었다. 그동안 혼자 간직하고 참기만 했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진 듯해서, 한참동안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렇게 엎드려 얼굴이 엉망일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토해내니, 그제야 마음의 괴로움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아, 아쉽기만 하구나. 항상 받기만 하고 그들에게 제대로 보답도 못한 것 같아서. 그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위해주는데 비해서 그동안 난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었으니....’ 막상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마야는 그동안의 자신의 행동이 후회가 되었다. 정말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동물일까? 자신에게 쏟아지는 미움이나 질시는 너무나 잘 의식하고 있으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온정은 느끼지도 못하고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잠시 시간이 흘렀을 때, 마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 후회한다고 없는 시간을 다시 만들 수도 없고 당장에 달라질 것도 없었다. 술법에 정신을 집중해도 어려울 판에 더 이상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단지, 그런 생각을 잊지 않고 꼭 술법이 성공한 뒤에 보답하리라 다짐하고, 설혹 이것이 마지막일지라도 이런 마음을 지금에라도 알아차렸다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날 밤 자정이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수혼이체이혼도(睡魂離體離魂道)의 술법이 시작되었다. 석실의 사방은 백색의 천으로 완전히 벽을 가리고 있었고, 바닥에서 석 자 높이로 사면의 벽을 따라 선반과 비슷한 모습의 탁자가 이어져 있었다. 그 위에 다시 갖가지 색깔의 초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약물을 가루 내어 밀랍과 뒤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단리유아의 머리맡에는 높이 한 자에 이르는 향로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 계속해서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푸른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바로 이 술법에서 가장 중요한 약물 중의 하나인 기리미사목(奇莉迷思木)이라는 식물의 뿌리를 태운 것이었다. 먼저 옆의 석실에서 준비를 하던 마야를 곤리화 자매가 부축하고 들어와 단리유아의 곁에 눕혔다. 눕자마자 곁에 단리유아가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마야는 정신이 혼몽한 중에도 단리유아의 손을 더듬어 움켜쥐고 있었다. 석대위에 드러누운 두 사람은 전신에 걸친 것이라고는 얇은 침의에 불과한 모습이었는데, 보다 더 쉽게 약향이 몸으로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단리유아의 상태는 의식이 없는 공(空)의 상태여서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었지만, 마야는 반 시진마다 각각의 약물을 복용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약물이 몽혼의 효과를 불러오는 것이어서 마야 역시 이제는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술법의 구결만을 암송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 남북쌍파가 다른 사람들을 내보냈다. 마야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겨우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시작한 것이지만, 솔직히 그녀들은 성공의 여부는 전적으로 하늘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역천(逆天)의 비술을 과연 하늘이 용납할지 의문이었지만, 자신들의 마음도 마야의 염원처럼 하늘에 닿아서 부디 허락하기만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있었다. “내가 술법의 수혼결(睡魂訣)을 읊을 테니, 자네가 공주님께 마지막으로 약물을 복용시키게. 그리고 구결을 암송하는 것도 잊지 말도록 다시 한 번 주지시키고. 지금 정신을 잃어버리면 만사 수포로 돌아갈 테니. 그 다음에는 내가 읊는 수혼결에 맞추어 두 사람의 칠규(七竅)를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 막게.” 잠시 후, 남파가 석실을 폐쇄하고 작은 목소리로 북파에게 속삭이며 술법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약향의 영향을 최대한 받지 않게 전신을 두터운 검은 색의 마의로 감싸고 있었고 콧구멍에도 약초로 틀어막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자신들이 먼저 약향에 취해서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북파가 누워있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준비를 마치고 신호를 보내자, 이내 남파가 오른 손에 쥔 탁령을 흔들며 술법의 수혼결을 읊기 시작했다. “차르릉. 찰랑!” “옴(唵)! 묘하사바리(杳遐娑婆提) 하소탄탈후(颬掃呑脫吼).....” 일정한 음률을 타고 낮게 흐르는, 남파의 웅얼거리는 목소리와과 탁령 소리가 벽에 부딪쳐 메아리쳤다. 향로와 초들에게서 나오는 연기 또한 점차 실내를 가득 메워가더니, 곧 석실은 희미한 안개 속에 파묻힌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한 모습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파의 목소리와 탁령 소리도 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소리와 뒤섞여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 석실은 자욱한 연기와 나지막하게 웅웅거리는 소리에 의해 완전히 몽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구결을 암송하던 마야 또한 점차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느낌에 빠져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들리던 남파의 주문도 희미해져 나중에는 아예 들리지도 않았고, 자신이 외우던 구결도 잊어먹은 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일순간 마야는 자신도 모르게, 마치 정신이 든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물론 영체(靈體)의 상태로서 일어나 앉은 것으로, 마야도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술법의 일단계가 성공한 것을 알았다. 수혼이체(睡魂離體)의 상태에까지는 이르렀고 이제는 이혼(離魂)의 결과만이 남아있었다. 한쪽에서 세심히 수혼경(搜魂鏡)을 살피고 있던 북파가 이내 마야의 영체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남파에게 신호를 보내 일단계가 성공했음을 알렸다. 잠시 후, 남파의 인도에 의해서 마야의 영체는 한줄기 작은 빛으로 화해서 마야는 단리유아의 미심을 통해 그의 정신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어둠에 덮인 공간을 얼마나 지나쳤을까, 찰나인지 천년인지 모를 시간이 흘렀을 때, 마야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회색의 벽을 만나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것이 단리유아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사실 이것은 단리유아가 추락하며 펼친 술법의 바깥쪽을 가로막는 결계막이었다. 안쪽에서는 결코 열 수 없는 것으로서 술법을 펼친 단리유아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떨어져 잠시 벽을 살피던 마야는 곧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들어 만져보니 파문이 물결처럼 퍼져나갔고 안으로도 아무 저항 없이 손이 들어가고 있었다.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음을 알자, 마야는 잠시 멈춰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 여기를 지나면 그를 보게 될 텐데....‘ ‘그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나를 알아보기는 할까?’ ‘혹시라도 나를 못 알아보면....’ 복잡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마야는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틀림없이 자신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하리라.... 그리하여 몇 겁(劫)의 연인(戀人)은 다시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될 것임을 마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되새기며 흥분되고 긴장된 마음속에 마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벽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회정(懷情)과 파벽(破壁) 회정(懷情)과 파벽(破壁) 1 결계(結界)의 벽을 통과하는 순간, 마야는 볼 수 있었다. 백의를 걸친 단리유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현실의 모습과는 달리 흉터 하나 없는 얼굴이었고, 머리는 틀어 올려 푸른 빛 옥잠(玉簪)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단리유아 또한 마야를 볼 수 있었다. 처음 결계를 펼친 이후, 잠시 모든 의식이 끊어졌던 얼마간을 제외한 수십일 동안 끊임없이 뇌리에 울려 퍼지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한손에는 흰 연꽃을 들고 이마는 은빛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맑고 청순한 여인이었다. 운명의 연인을 서로 바라보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가 멍하니 넋을 놓은 채. 서로의 마음을 뒤흔드는 느낌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바로 당신이군요. 날 기다리고 있었나요? 그대는 끊임없이 내게 속삭이던 그 사람? 마음속으로 물음을 던지고 서로의 모습을 살피며, 이어지는 인연의 끈에 마음이 이끌리고 있음을 느끼며.... 누가 이런 만남을 만들었을까요? 슬프게 거듭되는 이런 인연의 마주침은? 공간을 건너 뛰어 서로에게, 자신에게 속삭이듯 두 사람은 눈으로 묻고 있었다. 침묵 속에 서로의 마음을 파고드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하지 않음에도 두 사람은 이것이 예정된 만남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서로가 한 운명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단리유아를 막상 보니 마야는 웬일인지 말문을 열 수 없었다. 하고픈 말은 가슴 속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음에도, 그렇게 물어보리라 다짐했었음에도, 미치도록 홀로 날뛰는 가슴 때문인지 입맛 벙긋거리고 있을 뿐 입술 사이로 새어나가는 소리는 없었다. 시간이 가도 쉬이 진정되지 않고 만남의 기쁨과 기대에 차서 날뛰는 마음에 얼굴만 설핏 홍조를 띄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단리유아는 표정이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생각해서도, 처음 본 순간부터 연무처럼 마음을 뒤덮는 두 사람의 운명을 생각해서도, 설레이는 마음속에도 불길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짐을 느낄 수 있었으니.... 더욱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마야의 상태를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휴! 그대는 무엇 하러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오?” 한동안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중에서, 단리유아가 먼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이런 단리유아의 약간 질책어린 물음에도, 이제야 단리유아를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마야는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서 제대로 말문을 잇지 못했다. “당신은....” “그대가 이곳에 들어선 순간, 이제 그대도 나갈 수 없게 되었소. 왜 이곳에....” 안타까운 얼굴로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질책하듯 말을 던졌다. 마야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야와의 운명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현재의 상태에서는 단리유아 자신일지라도 결계를 깨뜨릴 수 없었다. 그동안 폐쇄된 상태에서 심마(心魔)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들려오는 마야의 호소가 자꾸만 약해지고 포기하려는 마음을 붙잡아서 정신을 잃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 아직도 심마의 세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어서 당장에는 벽을 깨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벽을 깨뜨리면 어찌될지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때에 마야가 들어왔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단리유아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술법을 멈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결계에 갇힌 상황에서는 마야가 술법을 펼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었다. 자신 역시 그런 술법의 위험함과 부작용을 잘 알고 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이제 벽을 깨뜨리기 전에는 마야 역시 되돌아갈 수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영영 육신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자신과 함께 영원히 갇혀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또, 설혹 벽을 깨뜨린다고 해도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리게 되면 육신이 더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야가 찾아오니 실제 만났어도 단리유아는 만남의 기쁨이나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서고 답답함만 커져가고 있었다. “이제야 당신과 마주하여 이야기할 수 있군요. 그런데, 당신은 하나도 내가 반갑지 않는 것 같네요. 나는....” 계속해서 다그치기만 하는 단리유아의 태도에 마야는 실망과 설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렇게 온갖 노력을 다하고 목숨을 걸어 금단의 술법을 펼치면서까지 이렇게 단리유아를 찾아왔는데, 그의 태도는 마치 뭐 하러 왔느냐는 기색이 다분했기에.... 그가 반기고 다정히 안아줄 것이라 생각했기에.... 마야가 단리유아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중얼거리다가, 이내 말문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하지만, 자꾸 방울져 흘러내림을 자신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마야의 기색을 보고 단리유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야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도 이렇게 다그치기만 하는 것이 자신도 싫었다. 마야의 처지와 자신에 대한 정을 잘 알고 있음에도 따뜻하게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계속해서 다그쳐 묻기만 하는 자신이.... 실제의 마음과는 달리 입 밖으로 나가는 소리는 어찌 그리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만 하는지.... ‘휴! 여인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일까? 그동안 그녀에 대해서 줄곧 생각해오고 있었으면서도 어째서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할까?“ 그나마 자신이 의식을 차리고 심마와 싸울 수 있던 것이 누구 때문이었던가? 자신에게 속삭이며 들려주던 마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이미 여기에 있는 자신은 없었을 테고 오래전에 심마에게 흡수되거나 소멸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그동안 속삭이던 마야의 말에서 단리유아도 그 자신과 마야 사이에 얽힌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내몰린 채 들려오는 마야의 목소리가 전혀 낯설지 않았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의해서 자신 역시 마음이 진동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막상 서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 역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어닥쳐서 말문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울고 있는 마야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만 우시오. 그대를 만난 것이 기쁘지 않거나 반갑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나 때문에 당신 역시 잘못될까봐 나도 모르게 그런 것이니. 영영 이대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서글피 울며 눈물로 범벅이 된 마야의 얼굴을 보니, 자신의 무심한 물음에 마음이 많이 상한 것 같아서 단리유아 역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도 않고 찾아온 마야가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런 마야의 크나큰 정을 받으면서도 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당신과 나의 운명을 생각한다면 그리 대해서는 안 되었는데. 휴, 어째서 더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하고 이럴까? 마음의 이끌림에도 제대로 내비치지 못하고....’ 감정의 표현에 능숙하지 못해서 단리유아는 다가가 위로하면서도 어색한 모습이 다분했다. 생각과는 다른 자신의 행동이 단리유아도 싫었지만, 타고난 천성과 그동안의 삶이 그러했으니 어쩔 것인가? 그저 탄식하며 마야를 감싸고 토닥일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흐흐흑!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인가요? 차라리 이곳에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 오히려 행복할 거예요. 그것이 비록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일일지라도....”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마야는 도리질하며 단리유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설혹 되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마야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남북쌍파나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대하지는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이렇게 단리유아와 있는 이 순간의 행복과는 비할 수 없으리라. 단리유아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도 있을 테니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볼 수도 없을 테니.... “그것은 옳지 않소, 마야! 더구나 여기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니....” 마야를 품에서 밀어내며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해서든 마야를 되돌려 보낼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했다. 심마가 마야가 들어온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에. 아니, 이미 알아차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고지식하기만 한 것 같은 단리유아의 말과 행동에 마야가 울음을 멈추고 샐쭉이 흘겨보았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에 이내 생각이 미치자,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단리유아가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에만 생각이 닿는 듯, 곧바로 고개를 바짝 들어 단리유아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눈물이 맺힌 가운데에서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마야가 되물었다. “내 이름을 아는군요. 호호호, 어떻게 아나요? 이곳까지 내 말이 전해졌나요?” “휴! 그렇게 매일 속삭이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소?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기를 벗어나 신체를 제어할 수 없을 뿐인데?”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마야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약간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어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야는 궁금한 얼굴로 연이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그랬었군요. 그러면 어째서 깨어나지 않았나요? 혹시 내가 들어섰던 저 벽이 문제인가요? 아니, 먼저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내 이름은 이미 알면서 당신의 이름을 나는 모르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어서 내게 가르쳐주세요. 어서요!” 처음 만났으면서도 마야에게서는 전혀 단리유아를 낯설어하는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매일 만나는 사이처럼 떨어지려는 단리유아의 품을 자꾸만 파고들며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 마야의 행동에 단리유아 역시 얼마안가 포기했다. 자신 역시도 그녀와 비슷한 심정이기도 했으니. “음, 내 이름은 단리유아(段俚唯我).... 아니, 남궁한상(南宮寒霜)이오.” 잠시 망설이던 단리유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불행한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이름까지 마야에게 가르쳐주었다. 본래 처음에는 자신의 본명을 숨기려했지만, 단리유아 역시 마야에게는 숨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궁가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고, 누구에게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는데도....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이면서도 평생을 마주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자신이 어색하고 의아할 지경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마야를 보면서 이끌리는 마음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들려오는 목소리가 큰 힘이 되었으니 친근한 감정이 들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전혀 낯설지 않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정말 그대의 속삭임처럼 나와 그대는 전생에서부터의 인연이 있는 것이오?’ 마야의 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물어보았다.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만나게 되었을 때부터 단리유아도 그런 생각이 자꾸만 더 강해지고 있었다. ‘여태까지 여인이라면 마음이 끌렸던 적이 없었는데.... 임유정(林有情)에 대한 정은 연민이 큰 것이지 사랑이라고는 볼 수 없으니.’ 임유정은 처음부터 끌리거나 자신이 사랑한 것은 아니었고, 단지 자신에게 쏟는 정에 비해 무심하기만 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연민을 느끼는 그런 정이었다. 이에 반해서 마야에게 향하는 마음은 저도 모르게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정이 흐르고 있었다. 단리유아의 일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인은 어머니와 큰 어머니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두 명의 여인에 대한 경험이 여태까지의 단리유아의 행동을 좌우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어머니와의 맹세는 자의든 타의든 더욱 여인에 대한 정을 멀어지게 만들었었다. 실제 단리유아가 느끼는 여인에 대한 마음은 막연한 두려움 비슷한 감정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큰어머니와 같은 여인을 사랑할까봐, 아니면 어머니와 같이 불행한 처지가 되게 만들까봐, 그런 생각에 제대로 여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지난날 임유정의 정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도,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이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아이 참, 무슨 생각을 하길래 물어도 대답이 없어요? 무슨 이름이 두 개냐니까요? 어떤 것이 진짜 이름인가요?” 거듭 물어도 대답이 없는 단리유아의 팔을 흔들며 마야가 소리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단리유아가 마야의 손을 붙잡아 움켜쥐며 설명했다. “남궁한상이 본명이지만, 그 이름을 언제 되찾을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오. 그 이전까지는 어머니와의 약속으로 단리유아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이오. 그러니 당신도 그렇게 부르시오.” “아, 당신에게도 많은 사연이 있나보군요. 내게 자세히 말해주지 않을래요? 난 당신에 대한 것이라면 모두 알고 싶어요.” 안색이 좋지 않은 단리유아의 모습에 마야가 안타까운 얼굴이 되어서 되물었다. 하지만, 그다지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단리유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오. 들어보았자.” 과거를 기억해보았자, 기쁜 일보다 괴로운 일이 더 많았으니.... 더욱이 자신이야 이젠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 해도, 틀림없이 마야의 마음은 아프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게 모두 말해주세요. 괴로웠던 일에서부터 즐거웠던 일까지 모두. 당신이 정말 나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휴! 그대가 고집쟁이인줄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울어서는 안 되오? 약속할 수 있소?” “흥! 내가 무슨 고집쟁이란 말이에요! 게다가 또 날 울보같이 생각하고 그렇게....” 토라져 소리치며 쏘아붙이는 마야의 모습에 단리유아는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음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다. 자신이 이렇게 여인과 다정하게 이야기하다니,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야 역시 이렇게 단리유아에게 떼를 쓰거나 앙탈을 부리는 자신을 생각하면, 평소의 자신의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어서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하고 되짚어보기도 하고 너무 어이가 없기도 해서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단리유아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마음이 편안해짐에 막을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회정(懷情)과 파벽(破壁) 회정(懷情)과 파벽(破壁) 2 백색의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공간(空間). 두 사람은 서로가 나란히 기대앉은 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제야 만나게 된 서로의 운명을 생각하며.... 먼저 단리유아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막상 얘기하려하니 단리유아는 과거의 괴로움이 떠올라 잠시 마음이 답답했다.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마야의 마음까지 아프게 할 것 같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무언으로 계속 재촉하는 마야를 보니 말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단리유아는 한동안 씁쓸한 표정으로 생각을 더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에 대한 일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조용히 속삭이듯이 귓전을 파고드는 단리유아의 말이 거듭될수록 마야의 얼굴은 그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있었다. 희노애락이 얼굴에 교차하며 마치 자신이 항상 그와 함께 했었던 것처럼 눈앞에 그의 변해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어린 아이에서 소년으로 다시 청년으로 변하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당신의 삶은 나보다도 험난했군요. 나 역시 천애고아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요. 비록 얼굴 한번 본 적이 없고 목소리도 기억에 없지만, 분명히 서로 사랑해서 저를 나았을 것이라 여기고 항상 내 곁에 머물며 나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부모가 있지만....’ 마야는 생각해보았다. 어떤 것이 더 행복할까? 한 번도 부모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자신과, 부모와 가족이 있음에도 따스한 정 한번 받지 못한 단리유아와.... 분명히 외관적으로는 자신이 더한 처지라 할 수 있었지만, 만일 자신이 단리유아와 같은 처지가 된다면 차라리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의 자신을 오히려 부러워하리라 생각되었다. 최소한 상상만으로도 자신은 행복할 수 있기에. 과거의 불행한 기억으로 남아서 평생의 회한(悔恨)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단리유아의 손을 꼭 그려 쥐고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당신 이제는 혼자만이 아님을 알기를, 나 역시 당신과 함께 함을. 비록 한마디 말도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더라도,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 것이라 믿으며.... 마야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단리유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어깨에 기댄 마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묻고 답하며 이루어지는 수많은 위로의 말보다도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마야가 더없이 사랑스러웠고 고마웠다. 그와 함께 느꼈다. 절대로 그녀와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말로 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으니....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정(情)의 파고(波高)가 가슴을 몰아치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을 꼭 쥐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야도 자신의 마음을 알았는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생긋 밝게 미소 지었다. 서로가 마음이 일치됨을 알고 두 사람은 태어나 처음으로 맛보는 행복에 그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어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계속되어 단리유아의 무공에 대한 것과 최근에 벌어진 여러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결계를 치고 깨어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심마(心魔)가 일어난 것이 어찌 무공 때문이겠어요. 그런 무공이 아무리 불안정하더라도 그것은 큰 이유가 될 수 없어요.” 심마가 일어나게 된 사연과 결과에 대해서 마야가 고개를 저으며 완곡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마야의 말에 단리유아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회정결(灰情訣)의 불안정이 그 주된 이유고, 거기에 더해 살기 짙은 지옥파라구천절이 그것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마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원인이 무어라 생각하오?” 단리유아의 물음에 마야가 잠시 망설이는 기색으로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대답이 혹시라도 단리유아를 더 괴롭게 만들까봐. 그런 머뭇거리는 마야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다독거렸다.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얘기해보시오, 마야. 서로가 마음이 통하는데, 그대가 어떤 말을 할지라도 무엇이 대수겠소. 그대의 마음은 항상 나를 위한다는 것을 아는데.” “호호호, 너무 장담 말아요. 앞으로 당신이 내 말을 안 들으면 마구 혼내줄 생각이니.”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정을 표현해주는 단리유아를 보고, 너무나 기쁜 마음에 마야가 밝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익히 알 수 있다 해도, 더더욱 고지식하고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던 단리유아가 막상 그런 말을 하니, 이렇게 실제로 듣는 것과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내 생각으로는 당신의 말을 거스를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거야 두고 보면 알 테지요. 당신이 정말로 그럴지....” 문득, 말을 잇던 마야는 침울한 기색이 되었다. 이렇게 다정하게 서로 이야기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다가, 그것도 술법을 펼친 덕분에 더욱 수명이 줄어들게 되었으니.... 울적한 생각을 떨치고자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마야가 아까의 말을 다시 언급했다. 헤어질 시간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고,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이라도 함께 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헤어지더라도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음, 내 생각에는 당신이 그런 상태가 된 것은 모두 당신 자신의 생각 때문이라고 여겨요. 물론 그런 무공, 회정결이라는 심결이 흐트러져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시발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시발점에 불과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리유아가 반문할 때, 반대로 마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그래요. 그것은 단지 당신 마음의 정서(情緖)를 되살아나게 만든 것일 뿐이지, 큰 원인은 될 수 없어요. 그동안 마음속으로 억지로 내리누르고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갑작스럽게 족쇄가 풀린 것처럼 솟아난 것에 불과하지요. 만약 그런 일들이 시일을 가지고 하나하나 되살아났다면, 결코 이 지경에까지는 이르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에요.” 마야의 말에 단리유아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최근 몇 달 사이에 무공이 상승하고 회정결이 금이 간 이후로 차차 감정이 되살아나 온갖 생각이 물밀듯이 일어나고 있었다. 음구의와 웅정향의 죽음, 임유정에 대한 회한, 천지신교에 대한 생각과 헤어진 일행에 대한 걱정, 그런 것들로 계속해서 마음이 편치 못했었다. 거기에 더해 과거의 기억들과 자신의 운명과 처지에 대한 생각들도 새삼스레 마음을 흔드니 쉽게 마음이 진정될 수가 없었다. “당신이 심마라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건 또 다른 당신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 그동안 당신이 억누르고 잊으려고만 했던 그런 일들이 모여서 이룬 것에 사념(邪念)이 더해진 것일 뿐이지, 전혀 별개의 것이라 할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요? 심마가 나와 같다는 소리요? 그건....?” 마야의 말이 일견 일리가 있음을 단리유아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심마가 자신과 같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념이 주된 것이지 결코 자신 안의 또 다른 자기 자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단리유아의 기색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마야는 다시 확고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 단리유아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앞으로의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여겨, 마야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단리유아에게 그 사실을 직시하도록 설득하여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심마란 무엇인가요? 그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결코 밖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또 다른 생각이 사념과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당신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에요. 물론 내 말은 같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에 불과하다는 것이에요.” “허상이라고, 허상?” 충격에 빠진 단리유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야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말을 이어 계속했다. “당신이 현실에서 직면한 여러 가지 괴로움에서 도피하고자 만들어낸 것이에요. 당신이 그런 괴로움을 잊고자 할수록 반대로 그런 사념체는 점점 힘이 커졌지요. 그러다 살기에 빠져 마구 사람을 죽이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이르러 도저히 마음이 괴로우니 스스로도 자신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에요. 누군가가 나서서 그런 일들을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렇게 될 수는 결코 없었지요.” 마야의 말에 충격에 빠져 단리유아는 한동안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며 자신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그랬다니. 한편으로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지만, 되돌아보면 마야의 말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그동안의 괴로움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것이 심마라니.... 자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일을 바라왔었다니.... 단리유아는 자신이 그토록 나약한 인간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내가 정말 그런 일을 바래왔을까? 정말로 나 자신이 싫어서 만들어낸 것일까?’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감정의 홍수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기에 그런 것이지 단리유아가 나약한 인간이라서 그랬다고는 볼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라도 거의 십오 년 동안 내리눌러오던 감정들이 되살아나며 마음을 흔드는데, 만일 단리유아가 회정결을 익히지 않는 자연적인 상태로 그동안 지내왔다면 별 무리 없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십오 년 동안은 거의 감정을 느끼거나 동요된 적이 없었으니 최근에 터져 나오는 감정의 봇물에 더더욱 혼란스런 마음이 되었고, 거기에 더해 주변의 상황이나 과거에 대한 기억들도 그런 면을 더욱 부추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볼수록, 마음 한켠으로는 아직도 완전히 승복할 수 없었지만, 단리유아는 마야의 말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 상태에 더불어 자신이 과거에 그러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회한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 또 하나의 자신인 심마였다. 무의식중으로도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에.... 그동안 제대로 마음의 평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괴로움에 지친 마음이 현실을 도피하고자 만든 허상임을 단리유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회와 괴로움이 가득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보면서 마야 역시 마음이 아팠다. ‘그동안 얼마나 자신의 처지와 운명이 싫었으면 심마에게까지 마음을 내놓고 숨고자 하였을까?’ 자신이 함께 해주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파왔다. 자신이 그와 함께 있었더라면 항상 옆에서 위로해주고 그런 괴로움을 같이 나누었을 텐데.... ‘당신에게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당신은 너무나 어리석어요. 모든 일을 혼자서만 해결하거나 감당하려고만 하고, 막상 자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요. 만일 운남(雲南)에서 헤어졌다는 일행 중 한명이라도 당신 곁에 있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마야는 단리유아의 손을 꼭 잡았다. 여기에서 또다시 단리유아가 자신에 대한 환멸에 빠져든다면 그때는 영영 심마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단리유아의 마음을 굳건하게 만들어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눈에 보이는 대로 인정하고 맞서 싸워나갈 용기를 불러일으키게 해야 했다. 그래야만이 심마를 극복할 수 있고, 그것이 자신과 그의 얽힌 운명을 극복하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함을 마야는 잘 알고 있었다. 오른 손에 든 연화를 손으로 흔들며 마야는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백련(白蓮)이 허공에 밝은 빛 무리를 수놓으며 청아한 마야의 목소리에 맞추어 춤추고 있었다. 마음속의 생각이 그대를 만들지니, 지금 그대의 모습은 단지 생각이 빚어놓은 것. 그대 마음에 삿되고 나약한 생각만 가득하다면, 소가 달구지를 끌듯이 고통만이 그대에게 달려오리라. 그대 마음에 맑고 순수한 생각만이 담겨있다면, 항상 그대를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기쁨만이 그대를 따르리. “마음에 삿되고 나약한 생각만 가득하다면.... 맑고 순수한 생각만 담겨있다면....” 나직히 들려오는 마야의 읊조림을 단리유아는 무의식중으로 따라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통렬히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여주는 한마디 한마디가 계속될수록, 깊숙이 스며들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개를 내려 마야를 바라보니, 마야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유하고 정감이 가득한 시선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새초롬히 반짝거리고, 움켜쥔 서로의 손을 통해서 만정(滿情)이 오고가고 있었다. 서로 마주보며 말이 없었지만, 눈으로 전해지는 정념(情念)은 서로의 가슴을 깊이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 위의 시구는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 제임스 앨런, 공영희 역]에서 인용하여 조금만 바꾼 것입니다. 읽어보지 못한 분은 좋은 책이니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6권 수정을 마쳤으니 앞으로 제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수정할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글이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더군요. 줄거리야 별 상관이 없지만, 문단의 연결이나 순서 등이 정말 이상해서 아주 애먹었습니다. 넷상의 연재는 정해진 기본 스토리에 따라 올리는데, 역시 일관성이나 순서에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수정하는 도중에 어떻게 이렇게 썼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지경인 곳이 여러곳이었는데, 그동안 별 말 없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가급적 그런 실수가 줄어들기를 바라지만, 과연 제대로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수정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계속드니... 그동안 단리유아의 생각과 독백이 많아서 지루하셨던 분들도 있으셨겠지만, 사실 단리유아가 점차 감정을 되찾고 무공이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만드는 목적으로 그런 것이랍니다. 여기의 심마 역시 그런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정(懷情)과 파벽(破壁) 회정(懷情)과 파벽(破壁) 3 한참을 오가는 시선 속에 말없이 따스한 정감(情感)으로 수많은 말을 대신했다. 서로간의 정이 물결쳐 메아리침을 느끼며 두 사람은 아득히 먼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현재의 불행과 괴로움도, 일그러진 운명의 시달림도 없었다. 오직, 행복에 넘쳐 서로 손을 잡고 달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일 뿐. 축복과 희망이 가득한 곳. 아니, 또 다른 누군가도 보이는 듯 했다. 누굴까?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이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지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지만, 잠시 동안의 상념은 두 사람의 마음을 더없이 밝고 가볍게 만들었다. 운명을 극복하고 함께하는 다음 생에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잠시 후, 상념에서 깨어난 마야가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눈앞의 일부터 해결해야 그런 행복이나마 기대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다음 생에도 또다시 어긋난 운명에 이끌려 불행 속에 침잠하게 될 테니. “당신도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나요? 심마가 자신의....” 마야의 물음을 고개 저어 가로막으며, 단리유아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단리유아 또한 그런 행복을 놓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현생의 불행만으로도 충분했으니, 어떻게 해서든 이번의 난관을 벗어나 다음 생만이라도 행복을 기약해야 했다. “더 말할 필요 없소, 마야. 내 스스로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당신의 말이 맞음을 시인해야하겠소. 그동안 나약한 생각에 빠져서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은데,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소. 마야, 앞으로는 마음을 굳건히 하여 다가오는 고뇌(苦惱)의 파도에 당당히 맞서 싸우리다. 절대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막상 단리유아에게 먼저 말을 꺼냈어도 마야의 마음은 편치 않았었다. 누가 나약한 자기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겠는가? 그것이 정당한 지적이고 맞는 말임에도 대부분은 회피하거나 변명을 하게 될 것이다. 혹시나 단리유아도 그럴까봐 내심으론 마야 역시 걱정이 되어서 마음을 졸였는데, 이렇게 단호한 단리유아의 대답에 마음이 놓이고 기쁨이 가득했다. 단리유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품속으로 파고들며 마야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기뻐요. 당신이 혹시라도 그런 자신에 대해서 더 낙심하게 되지는 않을까 했는데.” “그대는 정말 내 마음의 보배요. 우리가 일찍 만났다면 지금쯤에는....” 단리유아는 말을 이으려다 멈췄다. 이렇게 늦게 만난 것이 운명의 힘일지, 아니면 오래 전에 만났더라도 행복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지금보다 더한 불행에 빠져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마야와의 만남이 아쉬운 것은 자신 역시도 얼마 남지 않은 마야의 삶을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리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평생을 같이하고픈 여인을 만났음에도 그 만남이 너무나 짧은 것을 알기에.... “아니, 아니에요. 나 역시 당신을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만난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그저 아무것도 못해보고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겠지요. 그러다 이렇게 당신을 만났으니 나의 죽음도 절대 의미 없는 것은 아닐 것이에요.” 마야가 단리유아의 기색을 알아차리자마자, 애써 슬픈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자신 역시 어찌 이런 만남이 아쉽지 않겠는가마는 이제와 어떻게 바꿀 수도 없는 일을 계속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여겼다. 무의미한 일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세상의 다른 이들에게는 몰라도 단리유아에게만은, 굳게 믿고 있었다. 틀림없이 서로의 어그러진 운명을 극복하고,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있을 테니.... 침울한 분위기 속에 잠시 서로 생각에 잠겨 말이 없다가, 이내 분위기를 바꾸어 서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만정(萬情)이 교차하고 있을 때, 공간 넘어 한쪽의 어둠이 천천히 출렁거리며 다가왔다. 뚜렷한 형상은 보이지도 않고, 단지 검은 안개가 모여 일 장여의 타원형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그 주위로 뭉실거리는 검은 기운을 사방으로 흘리고 있었는데, 이내 가까이 다가온 그 물체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 둘이서 잘들 노는군그래. 흐흐, 오늘은 도망치지 않을 셈이냐?” 짙은 사기(邪氣)에 휩싸여 뇌리를 울리는 소리에 마야는 머리가 어지러워 절로 안색을 찌푸렸다. 곧바로 심마임을 알아차리고, 일어서는 단리유아를 뒤따르며 자그맣게 소곤거렸다. “당신이 말한 심마가 저건가요?” “그렇소, 마야. 그대는 뒤쪽으로 물러서 있구려.”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마야를 뒤로 밀어내려할 때, 마야가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고 단리유아의 팔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난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당신도 용기를 내세요. 저것은 단지 허상(虛像)에 불과할 뿐이에요. 당신의 괴로움과 두려움이 커갈수록 저것의 힘도 커진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흐흐흐, 네가 바로 그동안 시끄럽게 떠들던 계집이군. 흐흐흐, 뭐 감히 나보고 허상이라고? 진짜 내가 허상인지 실체인지 똑똑히 보여주지.” 미처 단리유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심마가 마야를 향해 말을 던졌다. 그동안 단리유아를 소멸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려오던 목소리에 적지 않게 지장을 받아온 터라 곧장 마야를 향해서 사기(邪氣)가 가득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잘 만났다, 계집! 너부터 먼저 소멸시켜주마. 이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세상을 활보했을 텐데도 네 년의 시끄러운 소리에 저 녀석을 없애지 못했지. 흐흐흐, 하지만 이곳에서는 네 년도 어쩔 수 없을 걸?” 가까이 접근하며 소리치는 심마를 보고 마야가 연꽃을 휘저으며 응수했다. “그래도 넌 허상에 불과해. 그릇된 상념의 찌꺼기가 모여 힘을 얻은 것이지만, 그것도 저이가 자신을 직시하고 마음을 굳게 하면 너의 힘도 모두 사라지지. 더구나 너의 힘은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 네가 어떤 것이란 것을 알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별 효과가 없음을 잘 아니.” 마야의 손길을 따라 밝은 빛 무리가 일어나 앞으로 다가오던 흑무의 촉수를 밀어내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부딪치자 불꽃이 튀기며 서로의 기운이 상쇄되고 있었다. 잠시 후 더이상 마야를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심마가 다시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키키키, 대단하군 대단해. 심련(心蓮)을 형상화시킬 수 있다니 말이야. 하지만, 그래봤자 네 년 역시 앞으로는 나갈 수 없을 걸? 내가 저놈을 소멸시켜서 완전히 심신을 차지하게 된다면,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지. 흐흐흐, 그때는 너를 두고두고 괴롭히다가 죽여 없애버리겠다고 내 장담하지.” 잠시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던 단리유아가 앞으로 나서며 마야를 대신해 대답했다. “글쎄? 예전의 나였다면 너 말대로 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마야, 당신은 잠시만 뒤로 물러서시오. 나를 믿는다면.” “알았어요. 부디 아까 했던 얘기를 잊지 마세요. 모든 것은 당신의 의지(意志) 여하에 달렸다는 것을.” 애써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며 마야가 다시 한 번 당부의 말을 전했다. 자신이야 타인이었으니 저 심마와의 싸움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단리유아에게 있어서는 상황이 많이 틀렸다. 아마도 둘이 싸운다면 심마는 공유하는 기억 중에서 갖가지 괴로운 기억들을 보여주어, 단리유아의 의지를 약화시켜 삶을 포기하게 만들려 할 것이다. 너무 위험해진다면 자신이 직접 끼어들어 단리유아를 구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 결코 영구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단리유아 스스로 극복하여야 만이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고, 그래야만이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역경과 맞서 싸울 의지를 얻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단지 단리유아를 믿고 그가 심마의 유혹으로부터 참아내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마야의 당부에 단리유아가 아무 걱정 말라는 듯 밝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피하며 상대하지 않으려고만 했던 다른 때와는 달리 서슴없이 먼저 앞으로 다가오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 심마가 조소하며 뭉클거리는 흑무를 넓게 펼쳐 단리유아를 감싸나갔다. “흐흐흐, 아무리 그렇다고 네 놈의 의지력이 일순간 커질 수는 없지. 이번에야 말로 네놈을 완전히 소멸시켜주마.” 이내 단리유아의 모습은 흑무에 감싸인 채 마야의 시선 속에서 사라졌다. 주위는 온통 기분 나쁜 기운을 흘리는 흑무만이 너울거리며 기괴한 음향을 흘리고 있었고, 한켠에서 마야 홀로 두 손 모아 기원하고 있었다. 무사히 단리유아가 마관(魔關)을 이겨내고 자신 앞에 다시 드러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흑무(黑霧) 속에서. 단리유아가 처음으로 마주 친 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얼기설기 검푸른 반점 투성이인,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흉측해서 정말 저런 모습이었나 하고 생각될 정도였지만, 자신의 어린 모습임에 틀림없었다. “아버지, 어째서 저에게는 한 번도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못하게 하나요? 정말로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요? 그렇다면 차라리 어머니와 저를 가문에서 내보내주세요. 저는....” 기억에는 여덟 살 정도 되는 나이였던 것 같았는데, 아마도 아버지를 찾아가서 마지막으로 하소연했던 때였던 것 같았다. 어머니를 밀폐된 지하석실로 완전히 유폐시키려는 아버지를 찾아간 것은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부정(父情)에 호소했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은 철이 너무 일찍 들어서였는지, 아니면 이미 절망의 향기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는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도 거의 말이 없었다. 응석이나 어리광을 받아줄 사람도 없었고 형제간에 어울리지도 못해서 하루 종일 책을 벗 삼아 혼자서 지내니 생각이 깊어졌는데, 그럴수록 세상과의 담은 높아져가고 있었고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 남궁유수(南宮柔琇)의 모습이 보였다. “흥! 이놈, 누가 네놈더러 그렇게 부르랬더냐!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가주라 부르라 했을 텐데?” “....” “어째서 말이 없느냐? 어서 대답하지 못해!“ 거듭되는 아버지의 매정한 호통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어린 단리유아(남궁한상)는 억지로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그런 모습을 감추고자 고개를 숙인 채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겨우겨우 대답했다. “우윽! 아, 알겠습니다. 아, 아버.... 가, 가주님!” 애처로운 단리유아의 모습에도 남궁유수는 오히려 안색을 더욱 찌푸릴 뿐이었다. 그로선 결코 자식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는 것이 찾아와서 따지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화가 날 뿐이었다. 처음부터 단리화(段俚花)에게 정이 있지도 않았던 대다가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은 괴물이라 불러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모습이었으니, 그들 모자에게 정을 붙일 수도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미움만 커지고 있었다. 가문의 제일 어른인 숙부의 명으로 두고 볼 수밖에는 없었지만 절대로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네 에미인 그 계집의 광증(狂症)이 점점 더 심해져 별채에도 둘 수 없을 지경이어서 그런 것일 뿐인데,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나서느냐! 둘 다 본가의 수치인 줄도 모르고. 네놈도 잠자코 서고에나 틀어박혀 있어! 그렇지 않다면....” “하지만, 가주님. 제게는 어머니가 되지만 가주님께는 이부인이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밀실에 가둘 수 있단 말입니까? 정 가문의 수치가 된다면 저희를 내보내시면 될 것 아닌가요?” 또다시 되풀이하는 남궁한상의 모습에 남궁유수가 손을 들어 뺨을 올려 부치며 소리쳤다. “짝!” “닥쳐라!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냐! 어서 돌아가기나 해!” “아버지....” “그래도 이것이.... 흥! 여봐라, 어서 이 녀석을 끌어내라.” 재차 손을 들어 올리다가 남궁유수가 등을 돌리며 소리쳐 호위들을 불러들였다. 생각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었고 죽여 버릴 생각도 솟구쳤지만, 그래도 숙부의 명만은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런 남궁유수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무정함을 느낀 채 남궁한상은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한 채로 끌려 나가고 있었다. 흐릿하게 점차 사라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단리유아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괴로움을 더하려는 심마의 수작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저절로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때의 일이 아마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마지막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라는 생각에 참아왔던 갖가지 일들이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어 한으로 새겨진.... 다시 장면이 바뀌어 형인 남궁천상과 동생인 남궁현상의 모습이 나타났다. “야, 이 괴물아! 이제는 너까지 미쳤나 보구나. 분수도 모르고 내원에까지 들어와 아버지를 찾아가다니. 흥! 네까짓 것이 형이라니, 징그러운 괴물 같은 게. 어디 오늘 나한테 한번 죽도록 맞아봐라. 또 다시 내원에 들어올 생각이 싹 없어질 테니.” “퍽. 퍼벅. 팍!” 남궁현상이 남궁한상(단리유아)의 팔을 비틀어 땅바닥에 패대기친 후, 계속해서 발로 차고 때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겨우 몇 달 차이로 자신의 형이라는 것이 내내 못마땅했고, 모습 또한 흉측하니 더더욱 싫은 남궁현상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의 어머니가 욕을 먹는 것도 다 이 녀석 때문이니 항상 기회를 노리던 그에게는 오늘 같은 날이 원 없이 분풀이할 바로 그런 날이었다. 어린 시절의 남궁한상은 키가 작은 편에 속했고, 항상 책만 읽다보니 몸도 허약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익힌 두 형제는 어린 아이임에도 이미 무공을 익힌 지 사오년에 이르렀으니 힘으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그저 두들겨 패는 남궁현상의 손길에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남궁현상이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때려서 신음만 흘리고 있는 남궁한상의 모습을 보며, 남궁천상이 비웃음 반 장난 반인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얼룩아, 좋게 말할 때 우리 집에서 나가라. 아니면 자살이라도 하든지. 쯔쯧, 나 같으면 하루도 못 견디고 자살했을 텐데. 너도 참 딱하구나! 그런 꼴로도....” “무슨 소리야, 형! 이 녀석은 이 꼴로 평생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놀림이 되는 것이 더 좋아. 하하하, 게다가 이렇게 심심할 때마다 분풀이 할 수 있잖아. 작은 할아버지한테만 안 들키면 되니.” “그렇구나, 아우야. 하하하, 나도 그런 일에 쓸모가 있을 줄은 생각 못 했는걸? 그러면 아주 오래 살도록 빌어야겠네.” “그렇구말구. 오래오래 살아서 괴롭혀 먹어야지. 그냥 쉽게 죽어버리면 우리가 너무 심심하잖아.” 떠드는 두 사람을 보며 단리유아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분노가 들끓어 그들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어린 시절의 괴로움을 앙갚음하고 싶었다. 그런 단리유아의 모습에 심마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기억이 새롭지? 흐흐흐! 네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한 일이지만, 너 역시도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잖아, 안 그래? 흐흐흐! 그만 포기하시지, 응?” “닥쳐! 이정도 가지고 포기할 내가 아니야. 그래 나도 인정해. 솔직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한풀이하고 싶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 그렇게 했다간 나 역시 똑 같은 인간에 불과할 테니.” “정말 그럴까? 흐흐흐, 글쎄. 더 두고 보면 알겠지. 네가 얼마나 견딜지 말이야. 아마 쉽지는 않을 걸?” 나직히 조롱하는 심마의 목소리가 멈추고 이내 장면이 바뀌어 어머니의 임종하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에 단리유아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한스런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고 말이 귓전에 계속 들려올수록 단리유아는 두 손을 부러져라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참을 수 없는 괴로음은 더해만 가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 어머니 제발....” 그 후로도 계속해서 여러 가지 괴로운 일과 후회스런 일들이 이어져 점차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는데, 이런 단리유아의 모습에 심마는 쾌재를 부르며 계속해서 단리유아의 의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갖가지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장면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흑무 속에 들려오는 단리유아의 외침에 마야는 초조한 표정이 되었다. 흥분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심마가 바라는 바였다. 분노, 괴로움, 두려움 같은 감정은 심마의 힘만 커지게 할뿐으로, 마침내는 단리유아 자신의 의지력까지 완전히 흐트러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심마의 뜻과 동화된다면 완전히 소멸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당장이라도 흑무를 없애고 단리유아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결코 마야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리유아를 믿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마야는 원형으로 넘실거리는 흑무 주위를 돌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흑무가 차단하여 단지 소리로서는 들리지 않겠지만, 자신의 말이 심어(心語)로서 공간을 뛰어넘어 단리유아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연화가지가 허공에 빛 무리를 일으키고 펄럭이는 치맛자락에 따라 맑고 깨끗한 마야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무엇이 옳은가? 옳다 그르다 말할 것 없네. 무엇이 좋은가? 좋다 싫다 말할 것 없네. 어리석은 이는 사물에 맡기지 않고 자기에게 맡기니, 취함과 버림이 있으며 거스름과 순응함도 있다네. 현명한 이는 자신에게 초연하니 탁함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얽매이지 않아 자재(自在)롭다네. 마음은 깊은 연못과 같이 고요하고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하나니. 막으려 말고 쫓으려도 말고, 텅 빈 허공과 같이 일체의 번뇌(煩惱)를 띄워 보내리. 처음의 굳은 결심에도 자욱하게 드리워진 흑무 사이로 나타나는 온갖 괴로운 기억에 스스로를 옥죄던 단리유아아에게 있어 마야의 노래는 한 줄기 단비와 같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촉촉히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어머니의 한 서린 눈망울도, 임유정의 애원어린 시선도, 자신에 죽은 수많은 원혼들의 증오어린 시선도 더 이상 단리유아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지나친 심력의 소모로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이미 마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평정을 되찾은 뒤였다. 내 스스로 인정하나니 모든 것은 공(空)과 같아라. 괴로움과 두려움, 슬픔과 분노는 모두 내 마음 속을 스쳐지나가는 허상이리니. 이제 나 깨어나 나 자신을 찾으리라. 내 본연의 모습을. 참된 자아(自我)를. 단정한 얼굴로 소리치는 단리유아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주위로 휘황한 빛줄기가 퍼져나가며 점차 둘러싼 흑무를 사그라뜨리기 시작했다. 빛줄기에 닿을 때마다 발광하듯 흑무가 꿈틀거리며 비명과 고함이 이어졌다. “크아아악! 저, 저 빌어먹을 계집 때문에. 바로 손아귀에까지 들어온 일을...” “그만 사라져라. 너는 내 마음의 일부, 지난날 숨기고 피하려했던 일체의 상념이 모인 것. 사념(邪念)은 사라지고 이제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와라.” 단리유아의 선언이 이어지며 이내 흑무는 사그라지고 있었다. 완전히 흑무가 사라져 빛만이 주위를 비추고 있을 때, 희미한 심마의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흐흐흐, 좋아 좋아. 이번에는 네가 이겼군. 하지만, 이것이 끝이라고는 생각하지마라. 언제고 너의 마음이 약해지는 날, 그날....” 이윽고 들려오던 심마의 사기(邪氣)어린 목소리도 스러지고 장내에는 단리유아만이 남았다. 심마를 극복했다는 것을 알고 그때까지 가까스로 버티던 단리유아도 너무나 지친 나머지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심마를 이겨내고 제 모습을 드러내자, 마야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곧바로 뛰어가 단리유아를 껴안으며 소리쳤다. “당신! 정말 당신이야말로 내 마음의 반쪽이에요. 나의 마음을 전해 듣고 이겨내다니.” “훗! 마야, 너무 꽉 껴안지는 말구려. 너무 지쳐 힘이 없으니.” 마야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단리유아가 대답했다. 그런 모습에 마야는 오히려 더욱 꼭 껴안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흥! 무슨 소리에요. 결코 당신한테서 떨어뜨릴 생각하지 마요. 언제나 이렇게 당신 품에 안겨 있을 테니.” “그렇게 하구려, 고집쟁이 아가씨.” 미소 지으며 자신을 놀리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마야가 토라진 척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뭐에요? 또 그 말을....?” “마야, 잠시 잠을 자야겠소. 너무 지쳐서.....” 제대로 말을 맺지 못하고 단리유아는 마야의 품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런 단리유아의 얼굴을 온유한 눈길로 바라보며 마야는 천천히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이같이 해맑은 표정이 된 채로 잠이든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마야는 조용하게 속삭였다. “편히 주무세요. 그리고 다시 깨어나 온전히 만나기로 해요. 비록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해요. 하루를 백년같이 서로 사랑한다면 무엇이 아쉽겠어요? 하물며 백 년 동안을 살아도 제대로 된 사랑을 찾지 못한 채 허송세월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인데.”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된다면 영원한 시간이 가로막을지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다시 만나서 서로 완전한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러기를 바라죠?” 물음에 답하는 대답은 없었지만, 마야는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라는 단리유아의 말을.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1 마야는 눈을 떴다. 단리유아 역시 조금 있으면 일어날 것이다. 눈동자를 굴려 석실을 둘러보려 했지만, 술법을 펼치기 전에 눈을 덮은 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주님! 무사히 되돌아 오셨군요. 노신은....” 이제나 저제나 수혼경(搜魂鏡)을 살피던 북파가 먼저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술법이 지속된 실제의 시간은 세 시진 정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남북쌍파에게 있어서는 혹시라도 잘못되지나 않을까하는 걱정과 불안에 시달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지루하고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이렇게 마야가 무사히 정신을 차리니 두 사람은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괜찮으신 거지요, 공주님? 혹시 어디 이상한 곳은?” 그때까지 술법을 펼치던 남파 역시 북파의 외침을 듣고 가까이 다가와 정신없는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곁으로 다가온 두 사람이 계속해서 떠들며 마야의 칠규를 막았던 약초를 빼어내고 마야를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다시 미리 준비했던 몽혼향의 해독약을 복용시키고 걱정스레 이곳저곳을 매만지고 있었다. 잠시 동안의 걱정 어린 물음들과 부산한 움직임이 있은 후, 한 차례 몸을 움직여보던 마야가 작게 한숨을 토하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몽혼향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전체적으로 맥이 빠진 듯 무기력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두 분의 바램이 닿아서인지 무사히 술법을 마친 것 같습니다. 두 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려요. 계속해서 걱정만 끼쳐드리고.... 다행히 술법이 성공하여 이 사람도 곧 있으면 깨어날 거예요.” “휴, 공주님. 저희에게 그런 말은 필요 없답니다. 노신들이야 공주님만 무사하신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니. 하지만 저놈 때문에....” 북파가 안도하는 기색이면서도 못마땅한 얼굴로 단리유아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무사히 되돌아 왔다지만 이런 천리를 거역한 술법의 부작용은 심각해서 보통 사람이라도 수명이 줄어들게 될 텐데, 마야의 상태를 보아서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북파로선 이 모든 것이 단리유아 때문이라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아서 절로 그런 원망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만 하게. 공주님도 마음이 편치 않을 텐데. 그보다 석실을 열어서 연기를 몰아내기나 하세. 아이들에게도 소식을 알리고.” 남파가 북파의 말을 가로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지독한 향연에 자신들 역시 더 버티기는 힘들 정도였고 마야 역시 다시 정신을 잃을 수 있으니 될수록 빨리 환기시켜야 했다. 북파 역시 더 이야기해봐야 마야의 마음만 아프게 할 것 같아서, 그래도 못마땅한 표정은 숨길 수 없었지만, 이내 남파를 뒤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이 석실을 열고 마야의 무사함을 빌며 술법이 끝나길 학수고대하던 곤리화 자매와 라소차를 불려들었다. 모두다 걱정 어린 물음을 던지는 소란스런 상황이 다시 이어지다가, 북파의 호통에 이르러서야 멈추고 다들 재빠르게 움직이며 석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소란스러움 속에 마야는 단리유아의 얼굴에서 칠규를 막았던 약초와 천을 떼어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리유아도 눈을 떴다. 곁에 앉아 있던 마야가 밝은 얼굴로 함초롬히 미소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잘 잤나요? 이제야 깨어나다니 당신은 잠꾸러기 같아요.” 현실 속에서도 같이 잠을 자다가 아침을 맞이하는 듯 마야의 태도에는 스스럼이 없었다. 잠시 마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야가 얼굴을 붉힐 지경이 되어서야 단리유아가 대꾸했다. “그대가 없어서 잠시 헤맸소.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려서 무슨 일인가 걱정이 되었는데.”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떨리는 손을 겨우 움직여 마야의 손을 잡았다. 온몸이 뻣뻣한 것이 마치 제 몸이 아닌 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어 달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데다가 의식이 깨어나지 않아서 약간의 부자연스러움이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너무 오래 자니 그런 거예요. 또 조금이라도 빨리 이렇게 실제로 만나고 싶어서, 당신이 깨어날 때쯤에 먼저 돌아간 것뿐이랍니다.” 단리유아의 손을 마주잡으며 마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마야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단리유아는 마야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야의 실제 모습을 보니, 너무도 허약하고 초췌한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자신 때문에 이리 되었을 것이라 생각되니 그 마음과 정이 그대로 가슴을 파고들어 요동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래도 미인이구려. 난 당신의 의지가 만들어낸 모습이 일부러 꾸민 것인 줄 알았는데?” “실망되지 않나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몸을 가꾸었을 텐데. 당신에게만은 더없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일부러 농담을 하듯이 말을 건네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마야가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마야라고 어찌 다른 여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단지 병든 몸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서글플 뿐이었다. 그런 마야의 마음을 알아보고 단리유아가 살며시 끌어안으며 위로했다. “아니요. 지금 이 모습이 오히려 더욱 마음에 드오. 그대의 내면을 볼 수 있는 터에 외형의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겠소? 그대가 아무리 변해도 나는 개의치 않을 것이고, 언제라도 그대를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다음 생에서도....” 단리유아의 품에 안겨 마야는 기쁨에 가득 차 아득한 표정이 되었다. 따뜻한 단리유아의 말은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잊게 해주는 천상의 음악처럼 귓가에 여울지며 울리고 있었다. 더욱 품속으로 파고들어 단리유아의 뛰는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야는 부드럽게 속삭였고, 단리유아 역시 그런 마야의 귓전에 대고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히 화답하고 있었다. 이런 마야와 단리유아의 모습에 소란스레 석실을 치우던 다섯 여인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동안의 마야의 태도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마당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서로를 껴안고 자신들만의 세상에 빠져서 속삭일 줄은 몰랐다. 그런 마야는 또 모르지만,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던 저 사내놈도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보면 볼수록 도무지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당혹스럽기만 했다. “커흠, 흠! 공주님! 그 사람도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 그만 공주님도 자리에서 일어서시지요.” 남파가 먼저 헛기침을 토해내며 주의를 주고 있었다. 그제야 마야도 단리유아의 품속에서 벗어났지만, 어께에 기댄 채 더 이상은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이리 모여 보세요. 이 분을 소개해드릴 테니.” 마야의 말에 다들 내키지 않아서 미적거릴 때, 북파가 큰소리로 마야의 행동을 힐책했다. “아니, 공주님! 도대체 그게 무슨 태도입니까? 낯선 사람의 품에 안겨서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북파.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이 분은 저에게는 낯선 타인이 아니랍니다. 제게 있어서는 평생의 반려(伴侶)라 할 수 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다들 대해주면 좋겠어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북파가 마야의 말에 더욱 어이가 없어서 말문을 맺지 못할 때, 다른 사람들 역시 난데없는 마야의 선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다들 치료가 끝나면 서둘러 단리유아를 내쫓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반려라며 당당히 말하는 마야의 모습에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분의 이름은 단리유아라 한답니다. 제가 마음 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들 앞으로는 저를 대하듯 이분에게도 대해주세요.” 전혀 주위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야는 고개를 들어 단리유아의 얼굴을 애정이 넘치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잇고 있었다. 실제로 마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마야의 모습에 지켜보던 여인들은 다들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공주님이 저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그 짧은 만남에 서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아무리 술법을 펼치는 중에 만났다고 해도.... 혹시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은?’ 다들 마야의 얼굴을 바라보며 갖가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편으론 놀라고 당황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뜻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어긋난 행동을 보여주는 마야에게 실망과 원망하는 마음이 더 커서 다들 낙심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공주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서....” 남파가 마지막으로 나서서 마야에게 부끄럽지도 않냐 는 듯이 물음을 던졌지만, 마야의 얼굴에서는 전혀 동요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호호호. 남파, 그런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서로 사랑하는데 남들의 시선 때문에 제대로 말도 못 꺼내고 미적거리는 모습만 보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지요. 서로의 정을 확인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터인데....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답니다.” 말을 이어 곧바로 한 명 한 명 가리키며 단리유아에게 소개시켜주고 있었다. 화가 난 북파는 아예 등을 돌리고 소개를 받지 않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나 단리유아의 험상궂어 보이기까지 한 얼굴과 반쯤 쉰 듯한 갈라터진 목소리에는 다들 절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마야의 얼굴에서는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으니 무언가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의 그런 거북스런 상황이 이어진 후에 마야가 단리유아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리유아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어서 거의 마야에게 기대다시피하고 있었다. “공주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설마 저 사람을 데리고....” 라소차가 놀라 물어보다가 힐끗 단리유아의 얼굴을 쳐다보고 무서워서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라소차의 말에 이어서 앞 다투어 물음을 던지고 만류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저 사람을 데리고 어디를 가시려고? 설마하니 공주님의 규방에까지?” “정말로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요, 공주님? 아무려면 저 사람을....” 곤리화 자매의 말에 뒤이어 남북쌍파 역시 이구동성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안 됩니다, 공주님!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어찌할 생각입니까?” “그래요, 공주님! 공주님도 그런 일이 생기면 어찌될지 뻔히 아시면서 이러시다니. 대체 어쩔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가요?” 주위의 만류에 마야가 살짝 안색을 찌푸리며 대꾸하려 할 때, 단리유아가 먼저 나서서 마야를 만류했다. 단리유아 역시 마야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마야가 전에 얘기한 것처럼 성모궁에서 알아차린다면 혹시라도 좋지 않은 생길지도 몰랐다. “마야, 그 결정은 잠시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소. 다른 이들의 눈에 뜨여서 좋을 것 없으니....” “아니에요. 난 한시도 당신 곁을 떠나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설마 당신도 세사의 규범에 얽매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은 아니겠지요?” 마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반문할 뿐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단리유아가 다시 자신의 마음을 밝히며 만류했다. “휴! 마야,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오. 단지, 이들의 걱정처럼 다른 이들이 나를 보게 되면 틀림없이 당신을 해치고자 할 것이오. 그러니....” “더 말할 필요 없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의 수명은 길어야 팔 개월 정도이고, 짧으면 반년 정도에 불과할 거예요. 그런데 무엇이 두렵겠어요?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하는 이상, 전 절대로 당신과 떨어져서 지내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도 그렇지요?” 더 이상은 단리유아도 마야를 설득할 수 없었다. 너무도 확고한 마야의 태도와 자신 역시 마야와의 시간이 한시라도 아쉬운 심정은 마찬가지였으니. 잠시 고개를 수그려 마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간절한 염원이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야의 모습에 팔에 힘을 주어 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나도 얼마 가지 않아서 완전히 회복이 될 테니 설마 그대 하나 못 지키겠소?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소.”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마야의 말에 놀란 다섯 여인들은 경악성을 토해낼 뿐 다들 말문을 잃고 없었다. 혹시나 하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마야 본인으로부터 직접 그 사실을 들으니 다들 충격으로 정신이 없었다. “공주님, 그게 정말이세요? 흐흐흑, 정말로 그것밖에는 못사신단 말이에요? 와왕! 공주님! 우리 불쌍하신 공주님을 어떻게....” 라소차가 먼저 울상인 얼굴로 묻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마야의 모습에 이내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마야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곧이어 서로가 어찌된 일인지 묻기에 바빴지만, 그것도 일순 마야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다들 충격에 잠겨 멍한 얼굴이 된 채 단지 허탈한 목소리로 ‘그럴 수가’ 만을 연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만류할 생각도 못한 채 충격과 슬픔에 잠겨서 망연한 기색인 사람들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먼저 석실을 나가고 있었다. 이런 일행들의 기색에 반해서 마야는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디뎌 단리유아를 부축하며 명랑한 얼굴로 속삭이고 있었다. “앞으로 당신은 무척 바쁠 것이에요. 성모궁의 무공을 제외하고, 그동안 내가 배웠던 의술이나 알고 있는 무공을 모두 가르칠 생각이니. 당신, 혹시라도 게으름 피우면 알지요? 난 아주 엄격하게 가르칠 거예요. 내 모든 것을 당신이 이어받을 수 있게.” “하하, 무섭구려. 마야, 당신이 원하는데 내가 그럴 리가 있겠소? 당신이 원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텐데?” 칠척에 달하는 자신의 키에 비해서 겨우 자신의 가슴에 닿는 자그마한 마야를 굳게 껴안으며 단리유아가 유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 모든 것을 다 배우기는 어렵겠지만, 분명 당신의 앞날에 도움이 될 거예요. 또 그것이 당신이라도 운명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줄 테니.” 단리유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행복에 잠긴 얼굴로 마야는 작게 속삭였다. 멈추지 않고 거침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이 야속할 뿐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을 쓰려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때의 찰나의 순간마다 서로의 마음을 다하여 보내어 나중에 조금이라도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로 마야의 침실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으로 단리유아를 대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마지막으로 마야가 바라는 바임을 알고 있었으니 더 이상은 뭐라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다만 마야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세상의 시름을 잊고 행복하기를 빌 뿐이었다.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2 마야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지 사흘 후, 단리유아가 어느 정도 움직임이 자연스러울 정도가 되었을 때에 두 사람은 천지신명(天地神明)에 맹세하며 부부의 연을 맺었다. 지켜보는 사람은 불과 다섯에 불과하고 단지 한 그릇의 물을 떠놓고 달밤에 언약을 맺은 것에 불과했지만, 두 사람은 세상의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본래 처음에는 두 사람도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해서 형식적인 혼인식까지는 올릴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지켜보던 여러 여인들로서는 도저히 그냥은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 동침하면서도 아무런 관계가 아닌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마야에게 여인으로서의 가장 큰 기쁨중의 하나인 결혼식을 올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에 무심하던 단리유아도 여인들의 설득을 받고나서는 이 일이 얼마나 마야에게 기쁨을 주는 일인지 깨닫고 먼저 청혼을 하게 됐다. 비록 초라하기 그지없는 결혼식이었지만, 마야는 기쁨에 겨워 두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혀있었다. 실제 이런 일은 기대하지 않았던 터였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를 절망 속에 보내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말로 할 수 없었다. 실질적인 첫날밤이 지난 다음날 아침, 단리유아는 먼저 눈을 떠 마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핏 홍조를 띤 얼굴은 여전히 초췌해 보였지만, 한줌 그늘진 구석이 없이 행복에 잠겨 미소 짓고 있었다. 아침마다 매일 보던 얼굴이었지만, 오늘의 마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 모두 자신의 여인이라는 생각에 단리유아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빠져들고 있었다. 고난에 가득 찬 자신의 일생에 이런 일이 있을지 몰랐기에 더더욱 이순간의 행복이 혹시라도 꿈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마야를 품속으로 끌어당기며 어께를 어루만져 보았다. ‘아니, 꿈이 아니야. 이렇게 생생하게 마야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지니.’ ‘마야, 누군가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그대와는 바꾸지 않겠소. 세상에 이런 행복에 비할 것이 어디 있겠소?’ 자신의 팔을 베고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잠이 든 마야의 모습이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웠다. 그 평화롭고 행복에 잠긴 모습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아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괴로움으로부터 지켜야할 바로 나의 여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마야를 어루만지며 단리유아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대의 병이 불치의 병이라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합쳐서 생각해본다면 분명 어떤 방도가 생길지도 모르오. 그대가 알고 있는 의학도 대단하지만, 나 역시 수많은 의서를 암기하고 있으니. 또 내가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무공 중에서도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있을지도 모르니.’ 단리유아 자신이 무영비고에서 찾은 고서들 중에서 무공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암기만 한 채 실제로는 깊이 파고든 적이 없었다. 무공 역시 실전에 도움이 되는 것들로 주로 연구했으니, 어딘가 자신이 간과했었던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단리유아는 마야와의 이런 행복이 깨어지기 않고 영원하기를 바랬다. 설사 그것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과 싸우게 될지라도, 운명과의 싸움일지라도.... 반드시 마야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거듭해서 다짐했다. 운명대로라면 다음 생에서도 다시 만나게 될 테지만, 그렇다고 이생에서의 행복을 놓치고 그대로 마야를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단리유아가 속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야 역시 깨어났으면서도 일어나지 않은 채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취해있었다. 단리유아가 깨어나기 전에 이미 깨어났지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데다가 조금이라도 더 품속에 안겨있고 싶은 마음에 잠든 척하고 있었다. 천둥처럼 귀를 울리는 서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와 전신으로 느껴지는 단리유아의 따스한 몸의 온기가 더더욱 안온함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은 아나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를? 지금 이 순간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에요. 사랑하는 당신과 한 몸이 되어 이렇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니....’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행복감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멈출 수 없는 시간과 자신으로선 바랄 수 없는 미래가 마야는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춰 이대로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질없음을 잘 알고 있고 머지않아 끝이 보이는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음에도, 지금 이순간의 행복감이 너무 크기에 절로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과 함께 한다면 분명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 계속될 텐데.... 더구나 당신의 아이도 낳아서 함께할 수 있다면....’ 가장 아쉬운 것은 사랑의 결정(結晶)인 아이를 낳고 기를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수명을 늘릴 수 있다면, 비록 자신이 곧 죽게 될지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지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그렇다면 단리유아를 혼자 두고 떠나더라도 자신의 분신을 남겨 단리유아를 위로할 수 있을 테니 아쉬움과 슬픔을 덜 수 있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마야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마음이 드러나 얼굴을 찌푸린 것 같았다. 곧바로 단리유아가 알아차리고 마야의 얼굴을 매만지며 물음을 던졌다. “마야,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오? 어디가 편치 못한 것이오?” 단리유아의 물음에 마야도 더 이상은 잠든 척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눈을 떴다. 맑은 눈동자로 단리유아를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 얼굴로 속삭였다. “아니에요.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흠! 마야, 좋지 않은 생각은 하지 말구려. 그것이 당신의 건강에도 더 바람직할 테니.” 마야의 생각을 어림짐작한 단리유아가 품속의 마야를 굳게 끌어안으며 위로했다. 마야 역시 단리유아의 마음을 알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다시는 슬픈 생각은 하지 않을래요. 이렇게 당신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마야, 그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오.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이 모인다면 분명 어떤 길이 보일 것이오. 그러니 그대도 너무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말고 될수록 밝은 생각을 하구려.” 마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음을 표했다. 앞으로 어찌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불행히도 예상과 같이 될지라도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이 순간 순간의 일에 전념하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마음의 결심을 새롭게 하며 각자 인생에 있어서의 중요한 전기가 된 새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던 단리유아도 시일이 흐를수록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급격한 움직임이나 본격적인 운기행공은 삼가고 있었는데, 내력이 많이 흐트러지고 운기 시에 불규칙적으로 막힌 곳이 있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다면 본래의 공력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복용하거나 흡수한 영약들의 일부가 내력으로 전이될 수도 있었으니 오히려 전보다 늘어날 수도 있었다. 하루의 일과 중에서 오전에는 주로 마야로부터 의술에 대해서 배우며 서로 토론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의서와 마야가 익힌 의술을 비교하면서 단리유아 역시 의학에 눈을 떠가고 있었다. 하지만, 의술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듯 실제로 환자를 접해보고 증상에 따라서 치료를 해보지 않는 한 크게 진보를 이룰 수는 없었다. 단지 암기만 했던 것을 이해하고 각종의 증상에 대한 치료법을 숙지하는데 전념할 뿐이었다. 의술이외에도 가끔 무공이나 술법, 기타의 학문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의술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지만, 단리유아 역시 어릴 적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알고 있는 무공도 마야보다는 많고 다양하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으로도 단리유아에게 있어 무공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는데, 심마(心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미 목어검(目御劍)의 경지에까지는 이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새로운 무공보다는 기존에 지닌 무공을 현재의 경지에 맞게 몸으로도 완숙하게 펼칠 수 있도록 수련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런 연유로 천축과 서장의 알려지지 않은 무학이나 술법에 대해서 마야가 구술해주는 것을 가끔 논하며 암기할 뿐이었다. 물론 마야가 전해주는 무공이나 술법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중원의 무공이 주류를 이르고 있었고 술법에 대해서도 암기만 하고 있을 뿐 거의 익힌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이한 세외지역의 무공에 대한 이해와 술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그런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있었다. 오후에는 주로 몸의 회복을 위해서 마야와 함께 산책을 하거나 운기조식을 취하며 보내고 있었다. 곳곳의 혈맥이 불완전하고 내력 역시 많이 흐트러져 있어서 생각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목어검에 이른 것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완전히 몸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수련을 자제하라는 마야의 당부에 단리유아 역시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저녁에는 달밤을 거닐며 마야와 속삭이거나 마야가 들려주는 이국적인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악기 자체의 모습도 특이했지만 그 선율이 독특했는데, 마야의 목소리와 맞춰 들으니 무언가 가슴을 파고들어 온갖 감정을 헤집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의식을 차린 지 열흘 정도가 흘렀을 때,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와서 단리유아도 본격적인 연무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우선 단리유아는 별궁의 한쪽에 위치한 공터에서 가볍게 나한권으로 몸을 풀었다. 공터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거목 아래의 흔들의자에 마야가 앉은 채 웃음 띤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곁으로 별궁에 기거하는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단리유아의 연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야, 혹시 내가 지니고 있던 무기가 어찌 되었는지 알고 있소?” 지켜보던 여인들이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나한권만을 반 시진 가까이 계속 펼치는 모습에 맥이 빠질 참일 때, 어느 정도 몸이 풀렸다고 생각한 단리유아가 마야에게 다가가며 물음을 던졌다. 단리유아의 물음에 마야가 라소차에게 심부름을 시킨 후에 답했다. “당신이 지니고 있던 것 중에서 영단은 모두 썼고 무기 중에는 검만 있었어요. 그 외에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도 있었지만 물에 젖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들은 모두 버렸지요. 나머지는 라소차에게 가져오도록 했으니 확인해 보도록 하세요.” “도는 없었단 말이요?” “도라니요? 당신이 검을 매고 있기에 나는 당신이 검법을 익힌 줄 알았는데, 도가 있었나요?” 마야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 역시 싸우던 사람이 검을 그냥 매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단리유아도 검 하나만을 주로 쓰는 줄 알고 있었다. ‘하늘의 뜻인가? 목어검의 경지에 이르니 더 이상 마성(魔性)을 일으키는 도법을 펼치지 말라는? 하긴 이제는 검만으로도 도법의 위력을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잠시 복잡한 생각에 잠겨 단리유아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물속으로 떨어져 내릴 때에 손에서 적운도(赤雲刀)가 풀려나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무공이 한 단계 나아지는 순간에 도를 잃어버린 것이 뭔가 하늘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목어검에 이르고 회정결(灰情訣)도 사실상 깨어졌다고 볼 수 있는 지금, 마성을 북돋우는 적운도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떨어져나가 마치 더 이상의 무의미한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당신, 무슨 일이 있나요? 도를 잃어버린 것이 아쉬워서 그런다면 제게도 몇 가지 있으니 대신하면 될 것이에요. 그러니....” 단리유아의 팔을 잡고 흔들며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마야가 말할 때, 생각에서 깨어난 단리유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내 밝은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는데, 더 이상 살기 짙은 도법을 펼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했다. “걱정 마오, 마야. 그 때문에 아니니. 잠시 지난날을 떠올리다가 그런 것뿐이라오. 어차피 이제부터는 도가 그리 필요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잘된 것도 같구려.” “난 또, 당신이 갑자기 넋을 잃고 있기에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요. 행여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서슴지 말고 말하세요. 알겠지요?” 철없는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자신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하는 마야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슬며시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손을 잡고 속삭이는 모습에 지켜보던 여인들의 마음은 복잡했다. 마야가 행복한 모습을 보니 기쁨이 가득한 것도 같았지만, 일면으론 그 대상이 자신들이 아닌 남자라는 것이 못내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야와의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에 외모와는 달리 무식하고 사나운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단리유아가 맘에 들지 않는 것은 다들 여전해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전에는 거의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무언중에 그런 미묘한 감정들이 장내를 떠다니고 있을 때, 라소차가 여러 가지 물건을 품에 안은 채 호들갑스럽게 뛰어왔다. “호호호, 공주님! 여기 가져왔어요. 모두 부마께서 지니고 있던 것이랍니다. 이것은 검이고 이것은....” 라소차의 수다에 여인들이 슬슬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을 때, 단리유아가 나서서 여러 물건 중에 흑아검(黑牙劍)만을 집어 올리면서 칭찬했다. “라소차, 착하구나. 이렇게 빨리 다녀오다니. 마야의 말대로 정말 귀여운 토끼로구나.” “호호호, 부마님도 참. 이 정도 가지고 뭘....” 부끄러운 기색으로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라소차가 몸을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며 단리유아를 어려워하던 라소차도 항시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다보니 이내 적응을 하여, 본래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단리유아의 앞에서도 활달함을 되찾았다. 이런 라소차의 모습에 다른 여인들은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서 노려보고 있었다. 무엇이 좋다고 벌써 저놈에게 넘어가서 깔깔거리는지, 생각 같아서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소란스런 상황이 이어지다가, 이윽고 단리유아가 검을 꺼내어 무공을 펼치려하자 다들 조용해졌다. 단리유아가 흑아검을 검집에서 빼내어보니 여전히 날카로움을 드러내지 않는 채 담담히 묵광을 흘리고 있었다. 그동안 마야가 신경을 썼는지 자신이 사용했을 때의 지저분한 이물질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칠흑 같은 검은 검신이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야 자신을 제대로 알아준다는 듯이 흑아검이 칭얼거리는 듯한 검성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 손으로 검신을 쓸면서 달래다가 몸을 돌려 공터의 중앙으로 향해 육합검법을 펼쳤다. 처음에는 보통의 속도로 펼치다가 일각에 겨우 초식을 다 펼칠 정도로 느리게 펼쳤다. 그런 후에는 반대로 서서히 빠르게 펼쳐서 나중에는 완전히 일체가 되어 검영만이 사위에 흐를 뿐 제대로 모습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검법을 펼쳤다. 처음에는 또 흔한 검법을 펼치니 실망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여인들도 시간이 갈수록 놀란 얼굴이 되어서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그 평범한 검법이 저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니. 보면 볼수록 놀랍군.” “그렇구만. 저 사람의 검에 대한 이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아. 저 검법만으로도 우리들은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군.” 남북쌍파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단리유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있었다. 고수라는 것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들보다 못하거나 비슷한 경지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자신들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성모궁에서도 최고수에 드는 자신들보다도 뛰어나고, 아직 본신의 검법을 펼치지도 않은 것이 저 정도이니 두 사람은 대체 단리유아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공주님, 혹시 부마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남파가 여인들의 궁금함을 대표해서 마야에게 물었다. 다들 마야의 대답을 기다릴 때, 마야가 살포시 웃음 지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어서.... 하지만 서로 논무할 때 보니 그의 무공이 저보다는 적어도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무공에 대해서는 마땅히 더 논할 것도 없었고, 오히려 제가 배우는 것이 더 많았지요.” “설마, 그럴수가....” 남파의 반문처럼 다들 반신반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 예전 마야의 수준도 화경을 넘어선지 오래였는데, 그런 마야보다도 뛰어나다니 도저히 얼마나 강한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인들이 놀라서 서로 수군거리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육합검법을 멈추고 천애구검(天涯九劍)을 펼쳐보고 있었다. 하나하나 초식을 펼칠수록 단리유아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름을 느끼고 있었다. 도법에 비해서 어딘가 부족한 점이 많이 보였었는데, 지금 보니 속도나 변화의 자유로움이 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여서 충분히 지옥파라구천절을 능가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검기만을 사용해서 제 삼초 천애유성간(天涯流星干)까지만 펼쳐보던 단리유아는 이윽고 공터의 반대쪽에 자리한 절벽을 마주보며 전력을 다해서 천애구검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꽝! 꽈꽝! 우르르 꽝!” 난데없는 폭음에 별궁이 있는 계곡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검강에 의해서 떨어지는 바위조각과 지진을 만난 듯 땅이 흔들리는 모습에 다들 뒤로 물러서며 기겁을 하고 있었다. “공주님! 제발 그만 멈추게 하십시오. 이러다가 양쪽의 계곡이 무너질 수도 있고, 본궁에서도 찾아올 수도 있으니.” “그래요, 공주님. 설마 부마의 무공이 저 정도일 줄 몰랐는데....“ 앞 다투어 여인들이 마야에게 달라붙어 하소연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천애구검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 모습에 여인들이 나서서 뭐라 소리치려고 할 순간, 흑아검이 단리유아의 손을 떠나 허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어, 어검술(御劍術)? 설마 저 나이에 벌써....” “어떻게....?” 다들 놀란 얼굴이 되어 입을 벌린 채 헛소리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들과 달리 마야는 그것보라는 듯이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일각 가량을 허공에 은빛 궤적을 그리며 흑아검으로 수어검(手御劍)을 펼치던 단리유아는 돌아온 흑아검을 다시 신중한 얼굴로 밀어내고 있었다. 느낌상으로는 목어검에 달한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어떨지 펼쳐보기 전에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우우웅!” 검강으로 흑아검을 둘러싼 후 천천히 허공으로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일장, 이장, 십장..... 거리가 멀어질수록 단리유아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들 너무도 놀라운 광경에 이번에는 말조차 잊은 채 넋을 잃고 있을 때, 오십여 장을 날아가던 흑아검이 기운이 다했는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단리유아도 지나친 심력과 내력의 소모로 이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마야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뛰쳐나가며 단리유아를 부축했다. “당신, 괜찮은가요? 이제 막 몸을 회복했는데 왜 그리 서둘러서 무공을 펼치세요? 천천히 해도 될 텐데....” 걱정스런 얼굴로 마야가 계속 말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손가락으로 마야의 입을 막으며 빙긋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대 모습이 어떤 줄 아오? 정말 영락없이 아내가 남편에게 따지는 듯한 모습이구려.” “뭐라구요? 남은 걱정이 돼서 죽겠는데, 당신은....” 토라져 고개를 돌리며 마야가 소리칠 때, 단리유아가 품속으로 마야를 끌어당겨 꼭 안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마오, 마야. 단지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제외하고는 별 탈이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펼쳐보고 싶었고, 당신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계속한 것 같소. 다음번에는 더 나아질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쩌란 말이에요. 혹시라도 당신이 잘못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다시는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어서요!” 품속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리다가 마야가 고개를 들면서 단리유아를 다그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유쾌한 얼굴로 단리유아가 약속하고는, 기쁨에 가득 차 마야를 두 팔로 안아서 빙글빙글 돌았다. 마야 역시 더없이 밝은 얼굴로 두 팔로 단리유아의 목을 감싸 안은 채로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놀라서 한참 멍해 있던 다섯 여인들도 정신을 차렸다. 북파가 먼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휴! 정말 천생연분이로군. 그동안 공주님의 말을 불신했는데, 이제 보니 두 분의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군.” “그렇군. 나도 내심으론 부마가 못마땅했는데 오늘 보니 공주님을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줄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 게다가 공주님께서 저리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남파의 말처럼 다들 단리유아가 불행한 마야를 언제까지고 지켜주길 바랬다. 오늘 본 단리유아의 무공을 보니, 설사 본궁의 모든 사람이 달려든다고 해도 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이젠 어느 누구도 마야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남은 시간만이라도 마야가 충분한 행복을 맛보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섯 여인들 역시 웃음 진 얼굴로 춤을 추고 있는 두 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 봉노 님께 감사드립니다. 문장의 연결이 조금 이상해 보였나봅니다. 수정했습니다.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3 다음날 성모궁의 본궁에서 대공주를 중심으로 삼십여 명에 이르는 여인들이 몰려왔다. 전날에 일어난 폭음을 듣고 별궁에 무슨 일이 생긴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혹시라도 마야가 무슨 일인가 꾸미고 있지 않나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찾아온 여인들도 이내 마야와 단리유아가 별궁의 난간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금남의 성지에 남자가 들어와 있는 것도 경악할 일이었지만, 그보다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는 마야의 모습이 더욱 맘에 들지 않는 대공주 일행이었다. 십여 년을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다가 최근 몇 년 동안의 유폐 아닌 유폐로 스스로를 해쳐가는 모습에 은밀히 미소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중인 환시리에 기쁨에 가득한 얼굴인 것이 마치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움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잠시 놀란 얼굴이었던 대공주가 이내 냉소를 날리며 같이 온 수하들로 하여금 마야와 단리유아를 끌어오게 명령했다. 무단히 남자를 끌어들인 것이 눈앞에 명백히 드러나 있으니 어떠한 변명도 필요 없는 일이었다. 난처한 얼굴로 앞길을 가로막는 남북쌍파, 곤리화 자매와 여인들이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말다툼을 벌이다가 이내 무기를 꺼내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침울한 얼굴로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마야가 싸움을 중지시키고는 단리유아와 함께 이층의 난간에서 내려왔다. 라소차는 단리유아의 뒤에서 반쯤 몸을 가린 채 겁먹은 얼굴로 뒤따르고 있었다. “마사(摩斯) 언니, 그리고 자매들께서 간만에 저를 찾아오셨군요.” 마야가 대공주와 나머지 여인들을 차례로 둘러보면서 평온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험악한 시선들과 욕설이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옆에 선 단리유아의 손을 잡고 있으니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전혀 동요의 기색도 없는데다가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있던 대공주가 소리쳤다. 큰 키에 비취빛 옥구슬이 늘어진 금관을 쓰고 천만인 중에 한번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목구비가 빼어나 마치 여신처럼 아름답고 위풍당당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흥! 더 이상 언니라고 부르지도 마라. 넌 이제는 본궁의 이공주가 아니라 죄인일 뿐이야. 이렇게 명확한 물증이 있고 목격한 사람이 수십이니 너도 더 이상은 변명하지 못하겠지?” “잠시만요, 마사 언니. 변명일 수도 있지만 잠깐 제 말을 먼저 들어주세요.” “무슨 소리냐? 네까짓 것의 말을 더 들어서 뭣하겠다고! 무엇들 하느냐? 더 들어볼 것도 없는 마당에 당장 저 계집을 나포하지 않고. 막는 자들도 저 계집과 한통속으로 죄인이라 할 수 있으니 사정 볼 것 없이 모두 죽여라.” 마야의 말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재차 대공주가 수하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명에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들이 덮쳐들 때, 남북쌍파와 곤리화 자매가 먼저 앞으로 나서서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공격만 하는 모습에 마야가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쉴 때, 단리유아가 마야를 품속으로 끌어당겨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마야,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되겠소.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끌고 갈 생각뿐인 것 같으니.” “휴! 제 잘못이에요. 궁주님께는 말을 했다고 해도 다시 연락해서 공개적으로 허락을 받아야 했을 일이었는데.” 마야가 미처 사실을 알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탄식했다. 그런 마야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단리유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걱정할 필요 없소, 마야. 저들이 아무리 뭐라 해도, 무슨 수를 쓴다 해도 난 당신을 내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으니. 그보다 쌍파와 두 자매가 위험해보이니 내가 나서야겠소.”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저와 같은 본궁의 사람들이니.” 마야의 당부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마야는 단지 서로 떼어놓고 말로써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단리유아가 보기에는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말로써 오랜 세월 속에 쌓인 앙금을 풀기도 어려워보였고, 저들의 모습을 보니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절대로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죽여서라도 마야를 끌고 갈 생각이 다분해 보였으니, 단리유아는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모두 뒤로 물러서시오” 내력을 목소리에 실어서 소리치니, 별궁의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충격을 받고서 일시적으로 몸이 마비되거나 내상을 입은 채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단리유아의 모습을 흥미롭게 주시하고 있던 대공주도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낯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키만 크고 흉터가 가득한 단리유아의 모습에 내심 겨우 저런 남자에게 빠진 마야를 비웃고 있었는데, 일성의 고함에 곧바로 단리유아의 무서움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서 소리친 것도 아님에도 여기서 가장 강한 고수라 할 수 있는 자신이 내상을 입을 정도였으니, 아마 단리유아가 죽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어서 단리유아가 검을 꺼내는 모습에 대공주를 비롯한 여인들이 더더욱 두려움에 질려갈 때, 단리유아는 위협하듯이 잠시 여인들을 둘러보다가 곧 이기어검강(以氣御劍剛)을 펼쳐 삼십여 장 떨어진 석벽을 향해서 검을 날렸다. “꽝! 우르릉 꽈꽝!” 절벽이 무너지고 바위조각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할 때, 두려움에 질렸던 여인들은 이제 경악 속에 빠져 모두가 멍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이, 이기어검강.... 모, 목어검(目御劍)의 고수?” 대공주가 너무 놀라 말을 더듬으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른 여인들도 정신을 차려 잇따라 소리치며 뒷걸음치고 있었다. 수어검에 든 자도 서장일대를 다 찾아봐도 하나도 없는 마당에 목어검의 경지에 든 고수가 눈앞에 있으니, 놀라움도 놀라움이었지만 그보다는 마야와 무척 가까워보였던 모습을 상기하고는 절로 두려움이 치밀어 다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누구도 마야를 끌고 갈 생각은 하지 마시오. 만일 또 누군가 찾아와서 귀찮게 한다면, 성모궁의 본궁으로 내가 직접 찾아가 따질 테니 그리 아시오. 알겠소?” 대공주를 비롯한 여인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기에 급급할 때, 마야가 슬쩍 단리유아를 흘겨보며 앞으로 나섰다. 자신에게 했던 말과는 다르게 다짜고짜 곧 죽일 것처럼 소리치는 모습에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약간 화가 나기도 했지만, 반면에 자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난관과도 맞서 싸우려는 결심이 확고해 보여서 마야는 가슴이 뭉클했다. “마사 언니, 이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것은 궁주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랍니다.” “어머니가.... 알고 있다고?” 또다시 자신은 빼돌리고 마야만 위하는 것 같아서 대공주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탄스레 반문하고 있었다. 이미 알면서도 아무런 사실도 가르쳐주지 않고 이런 일과 부딪치게 하다니 대공주는 더욱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었다. 자신과 동생에게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서 다그치기만 하고 어떻게 마야에게는 그리 너그러운지, 절로 설움이 복받치고 한편으론 그런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치밀어 올랐다. 누가 정말로 친딸인지 대공주는 어머니에게 소리쳐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 언니, 제가 미처 다시 찾아가 공개적으로 허락을 얻지 못해서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고개를 끄덕이며 마야가 설명하다가, 허탈감과 분노로 복잡한 표정인 대공주를 향해서 말을 이었다. “마사 언니, 그동안 나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전 얼마 더 살지 못한답니다. 아마 이 해가 다 가기 전, 더 이상 이 미운 동생을 볼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뜻밖인 마야의 말에 모두 수군거릴 때, 대공주 역시 놀라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곧바로 되묻고 있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정말로?” “그동안 제가 스스로를 유폐하다시피 하며 이곳에 머문 것도 제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랍니다. 마사언니, 제가 잘못한 일이 많고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도 잘 알지만, 부디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이분은 저와 인연을 맺은 분으로 잠시나마 제 곁에 있는 것이랍니다. 제가 생을 다할 때까지....” “너, 넌 정말 끝까지 날....” 대공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야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기뻐할 일일 텐데, 어째서 마음은 딴판으로 슬프고 괴로운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넋을 잃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대공주는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이제 마야가 사라지면,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올렸던 미움은 누구에게서 보상받는단 말인가? 어머니의 홀대에 대한 반발심으로 더욱 마야를 미워하고 있었는데, 이제 난 누구를 원망하지? 난....’ 자신이라고 마야에 대한 미움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마야가 잘못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항상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었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더할 수 없이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는데, 언젠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마야를 미워하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후회하며 관계를 되돌려보려고도 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찌 그리 가볍고 간사하기만 한지 한번 길들어진 타성을 바꾸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다.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 역시 이제는 포기한 채 완전히 그런 마음에 젖어 지냈는데, 이제 마야의 단명을 알게 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넋을 잃고 생각에 빠진 대공주를 향해 마야가 가까이 다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언니. 일간 제가 이분과 함께 제가 찾아가 어찌된 사유인지 밝히고, 모두에게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서도 사죄하도록 하겠어요. 그러니 오늘은 이대로 그만 물러나주세요. 제발 마지막으로 제 부탁을 들어서....” 지난날의 일이 어떻든 마야는 이제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단리유아와 함께하는 행복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막상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절로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후회스런 심정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마야는 죽기 전에 더 이상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그늘진 부분을 남겨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을 미워한다고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만두자, 그만 둬! 아, 모든 것이 헛되구나, 헛돼.” 잠시 마야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허탈한 얼굴로 대공주가 소리치며 발길을 돌렸다. 이제껏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마야만을 미워하며 한탄했었는데, 이젠 그런 일이 모두 부질없게 되어 버렸다. 잠시 마야의 초췌한 얼굴을 바라보니, 더욱 그동안의 잘못이 가슴을 파고들어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것 같아 잠시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서 실컷 울음을 쏟아낸다면 이런 괴로움이 사라질지도 모르리라고 생각했다. “언니, 마사 언니....” 마야가 몇 번이고 소리쳐 불렀지만, 대공주는 고개만 홰홰 저으며 말없이 장내를 떠나가고 있었다. 다른 여인들도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채 서성거리다가, 이내 대공주를 뒤쫓아서 떠나갔다. 일진의 광풍이 몰아쳐 장내를 휩쓸어간 듯, 떠나간 사람도 남은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다들 얼굴이 좋지 못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과연 이 일이 잘한 일일까요? 괜히 내 죽음을 알린 것은 아닌지, 혹시라도....” 쓸쓸한 표정으로 마야가 물음을 던지자, 단리유아가 마야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끌어안아 등을 쓰다듬었다. “마야, 더 생각할 것 없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받아들일 것이오.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그대의 맘을 밝히고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소, 마야?” 마음이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 번민이 생기고 사람 간에 시비가 생긴다 해도, 정과 한, 사랑과 미움 또한 같이하리니, 인생의 다채로움에 삶에 대한 진지한 사색도 뒤따르리. 만일 사람의 마음이 고정된 것이라면, 세상의 시비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긴 해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이 아닐 지니, 어찌 사람이라 할 것인가? 차라리 나무토막이라 이름 하는 것이 나으리. 마야도 복잡한 생각을 접고 단리유아와 함께 걸음을 옮겨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건지는 그들에게 달린 것이지,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설사 그들이 마음을 되돌리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자신을 미워한다고 해도 자신으로선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던 셈이니 더 바랄 것은 없었다. 오늘의 일로서 남북쌍파나 곤리화 자매도 더 이상 단리유아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 쌓였던 울분이 싹 쓸어나감을 느끼며, 전과는 다르게 단리유아에게도 진심으로 대하게 됐다. 그 후, 이틀 뒤에 마야와 단리유아는 성모궁을 찾아갔다. 더 이상의 시비를 피하고 공개적으로 부마로서 인정받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컸다. 그동안 불편하게 지냈던 관계를 회복하고 더 이상 마음의 부담을 없애기 위해서, 마야는 한 명 한 명 찾아가 서로의 오해와 미움을 풀어버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생을 마치기 전에나마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밝힐 수 있어서, 마야는 사흘 동안의 바쁜 일정 중에도 내내 마음이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항시 곁에서 따라다니며 보살펴주는 단리유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제는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그 사흘 동안의 일을 마치고 두 사람은 별궁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로 한번 본궁에서 대공주와 삼공주가 찾아와 마야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간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날의 앙금을 완전히 씻어 내리지는 못했지만, 마야와 두 공주의 관계도 예전의 삭막하고 미움만 가득한 사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 혈천수라 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4 조용한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사랑도 깊어만 갔다. 단리유아가 무공을 수련하는 오후의 한두 시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함께해서, 두 사람은 낮에는 주목랑마봉 주위를 돌아다니며 밤에는 별궁의 정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평온한 나날 속에 두 사람은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행복에 빠져 있었고, 단지 시간만이 두 사람의 행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가파르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일월이 끝나기 전에 단리유아는 남북쌍파에게 척발척천과 천룡사(天龍寺)에 서찰을 전해주도록 부탁했다. 아직은 척발척천과의 협력이 필요하기도 했고, 혹시라도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에 일행이 낙심하여 일을 그르칠지도 몰라서였다. 천룡사에 보내는 서신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자세히 적어서 앞으로의 일에 참고가 되고 계획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날이 갈수록 단리유아의 무공은 늘어서 점차 완전한 목어검의 경지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현경(玄境)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이 자신에게 부족할까 생각하고 있던 단리유아에게 마야가 마침 적절한 지적을 해주었다. 이미 천지신교와의 일을 알고 있었던 터라, 마야 역시 단리유아가 하루라도 빨리 무공을 완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타인에 대한 이타심 즉 자비심(慈悲心)이 부족해요. 또 천지만물의 변화에 대한 깊은 철리(哲理)가 없으니 아직도 요원하지요.” “....” “당신도 잘 알겠지만, 서두를수록 오히려 좋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니 너무 그 생각에만 매달리지는 마세요. 하루하루 생각해보고 많은 일을 겪게 되면 언젠가는 저절로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될 테니.” 아무리 단리유아가 불과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목어검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현경의 경지와는 천지 차이임을 단리유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 중원과 세외를 막론한 고금(古今)의 강호를 통틀어도 확실하게 현경에 든 사람은 열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강호의 정설이라 할 때, 단리유아가 현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부분은 수어검의 벽에 이르러 좌절하거나, 목어검에 이르렀다고 해도 평생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단 수어검에 이른다면 목어검에 이르는 과정은 그 이전과는 달리 쉬운 편이라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난관은 목어검에서 현경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서 이전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이전의 과정이 개인적인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자아(自我)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그 이후의 과정은 세상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래서 타인을 위하는 이타심이나 자비심, 천지만물의 변화에 대한 깊은 철리와 같은 문제들을 깨닫지 않고는 절대로 이를 수 없었다. 마야의 말에 단리유아도 일단 목어검의 완성에만 마음을 집중하기로 하고, 더 이상 그 문제를 가지고 깊은 생각에 빠지지 않고자 했다. 물론 갈수록 야위어가고 병이 심해져 거동도 불편한 마야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더 이상 제대로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서로 의술이나 기타의 여러 방법을 가지고 논의해보고 따로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마땅한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뿐으로 단지 세 가지의 방법만이 최후로 남아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마야의 의술과 단리유아가 지닌 천단금서(天丹禁書)의 술법을 이용하여, 마야의 몸의 시간을 현재의 상태로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방법은 마치 강시와 같은 상태가 되어 온몸이 굳어져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 또한 죽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마야가 직접 역혈(逆血)의 마공(魔功)을 익히는 것으로, 전신의 혈맥을 반대로 돌려서 혈맥이 굳어져가는 것을 막는 방법이 있었다. 서장지역 상고(上古)의 마공중의 하나인 구마현공(九魔玄功)이라는 이름의 마공으로, 마야 역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결코 익힐 생각은 없었다. 말 그대로 이 마공을 익히게 되면 마야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린 채 점차 피만 갈구하는 마인이 되어버리게 되어서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라고 해도, 단리유아도 몰라보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려는 살심만 가득한 마녀가 될 생각은 결코 없었다. 세 번째의 방법으로 현경의 고수가 강제로 마야의 몸을 환골탈태시켜 체질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세외와 중원을 통틀어도 현세에선 현경의 경지에 든 사람은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바로 곁에 가까이 있는 단리유아가 현경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시간이 두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단리유아가 자신이 찾은 세 가지 방법을 마야에게 꺼내자, 깊은 한숨과 함께 마야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휴! 당신도 이제 그만하세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잖아요?” “마야, 그래도 그대를 이대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소. 그대가 어떤 상태가 되던 나는 상관이 없다오. 그러니 첫째 방법이나 둘째 방법으로 시간을 벌어서....” 단리유아가 애원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지만, 마야는 고개를 저어 말을 막을 뿐이었다. 마야 자신이라고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겠는가마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도 그럴 자신도 없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당신과 같이하더라도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니에요. 사람의 감정도 못 느끼는 강시가 어떻게 당신과 기쁨을 같이하고 당신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겠어요? 또 마녀가 된다면 당신도 몰라보고 살수나 펼칠 텐데, 도저히 그런 모습으로는 살고 싶지 않아요. 사랑하는 당신, 당신도 잘 알잖아요? 이생의 이 만남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 생에 다시 만난다는 것을....” 쓸쓸히 반문하는 마야를 바라보며 단리유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라고 그런 운명을 모르지도 믿지도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아무것도 못해보고 마야를 떠나보내려 하니 슬픔이 가득 침잠하는 마음으로 괴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그대와 함께하고 싶소. 어떻게 그 긴긴 시간을 기다려 그대와 다시 만난다는 말이오? 차라리 그런 모습이 되더라도 그대와 이생에서 함께하고 싶소, 나는.” “안될 말이에요.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의 헛된 욕심일 뿐이에요. 천리(天理)에 역행하는 짓은 한번으로 족해요. 만일 그랬다가는 분명히 더욱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에요.” 마야 역시 단리유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 눈물이 가득 맺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를 악물며 눈물을 참고 간신히 대답하다가, 이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일부러 밝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충분한 행복을 맛보았어요. 물론 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만족한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일생의 큰 행복을 맛보고 순간순간 행복한 나날이었으니 말이에요. 그러니 더 이상은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단리유아도 더 이상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슬픔이 휘몰아쳐 가슴을 비트는 것 같았지만, 마야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숨이 멈출 때까지 함께하며 마야가 세상의 괴로움과 불행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 속에 잠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금세 이월이 가고, 삼월이 가고, 그렇게 무정한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 주변의 산하(山下)를 돌아다니며 마지막 남은 행복을 같이했다. 별궁의 여인들도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고, 성모궁의 궁주도 마지막으로 찾아와 마야의 단명을 한탄하다가 슬픈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동안 마야는 차근차근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을 어릴 적부터 돌보아준 남북쌍파와 친구 같았던 곤리화 자매, 철부지 동생 같은 천진한 라소차에게 마야가 줄 것이라고는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과 같이 지내서 행복했다는 말뿐이었다. 자신의 물건에 대한 것도 미리 결정을 내린 뒤 마야는 단리유아의 품속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단리유아가 별궁에 머문 지도 팔 개월이 넘은 그해 칠월 초에, 마야의 병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한번 깨어나면 채 반각을 지속할 수 없었고, 나머지 시간동안은 계속 잠이 드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하루 중에 깨어나 있는 시간을 다 합쳐도 이각이 못될 정도였고 그 시간도 점차 더 짧아져만 가고 있었다. 칠월(七月) 칠석(七夕)의 자정이 가까워질 때, 마야는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렸다. 뼈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하고 파리한 얼굴이었지만, 얼굴에선 알 수 없는 광채가 나오는 것처럼 밝고 환희에 가득한 표정이었다. 작고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말속에도 슬픔의 여운은 없었다. “사랑하는 당신,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그동안 당신과 함께 했던 나날이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지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요?” “크흑! 마야....” 마야의 손을 꼭 움켜쥔 채 침상 곁에 앉아있던 단리유아가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동안 마야의 앞에서는 이를 악물고서라도 슬픈 내색을 보이지 않은 채, 단리유아는 한시도 마야의 곁을 떠나지 않고 손수 수발을 들며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도저히 그 자신도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흐흐흑, 공주님!” “흐흑.” 침상의 주위로 다섯 여인들도 마야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가 눈물을 쏟아내고 꺼억 꺼억 울음을 터뜨리거나 소리죽여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모두들 울지 마세요. 사람이 죽는다고 끝은 아니랍니다. 몇 겁(劫)의 인연 속에 이렇게 만난 것이니, 다음 생에서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에요.” “공주님! 와왕!” 조용한 마야의 말에 라소차가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곧이어 여인들의 울음으로 장내가 눈물바다가 되었을 때, 마야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말을 이었다. “울지 마세요. 난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이생에서의 짧은 행복이나마 가져갈 수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요. 후생에 이런 기억을 잊지 않고 다시 당신을 찾을 수 있기만을 빌어요.” “분명히 다시 만나리라, 마야. 그대가 찾지 않더라도 내가 먼저 그대를 찾을 테니.” 마야의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내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단리유아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단리유아의 말에 밝게 미소 짓다가 마야가 걱정스레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날 잊지 못해서 평생을 홀로 지내지는 마세요.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니. 부디 운명의 사슬을 끊고 행복을 찾으세요. 아시겠지요?” “어떻게 그대를 잊고 다른 여인과 행복하게 살 수 있겠소? 난 못하겠소, 마야. 그대가 아니고서는....” 한탄스레 단리유아가 대답했다. 자신은 마야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사랑하고 싶지도,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을 권하니 슬픔이 더욱 더하는 것 같았다. 마야 역시 단리유아를 혼자서 독점하고 싶었지만, 단리유아가 슬픔에 젖어 자신의 그림자만을 찾으며 불행한 일생을 보내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미처 주지 못했던 기쁨과 행복을 다른 여인에게서라도 찾아서 단리유아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였다. “풋! 어린아이 같은 투정은 하지 말아요. 이 세상에 어찌 당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나밖에 없겠어요? 분명히 어딘가에는 나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고 위해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당신, 당신의 행복만이 내가 바라는 바랍니다. 약속해줘요, 부디 슬픔을 딛고 즐겁고 보람된 일생을 보낼 것이라고. 내 몫까지 합쳐서, 어서....” 간절한 표정으로 대답을 재촉하는 마야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마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을 이었다. “마야. 날 홀로 내버려두고 떠나지 마오. 어떻게 나 혼자서....” 만족스런 얼굴이 되어 마야가 단리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점점 기운이 빠지는지 목소리도 작아지고 들어 올린 팔도 이내 다시 침상으로 떨어졌다. “사랑하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이제 내가 죽는다 해도 그것은 육신만이 사라지는 것뿐이랍니다. 난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할 것이에요. 어디를 가나 구름이 되어 당신을 따라다니며 보살필 것이고, 바람이 되어 당신의 품에 안겨 마음의 괴로움을 어루만져 줄 거예요.” “아니오, 마야. 나는 당신이 살아서 내 곁에 있기를 바라지, 결코 그런 것은 바라지 않소.” “그....” “마야, 마야!” 간신히 귓전에 들리던 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고개를 들어 마야를 살펴보던 단리유아가 이내 비통하게 마야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맑은 눈동자는 아스라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입가에는 한 조각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었다. 곧이라도 일어나 자신을 부를 것 같았지만, 단리유아도 이것이 마야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공주님! 흐흐흑....” “공주님!” 이내 장내는 지켜보던 여인들의 울음바다가 되어서, 통곡소리만이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야를 흔들며 비통히 외치던 단리유아도 넋을 잃고 마야의 이름만을 찾고 있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았는데, 더 이상 마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지금이라도 깨어나 밝게 웃으며 자신을 부를 것 같았다. 슬픔에 잠겨 애타게 마야를 불러보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이 슬픔에 잠긴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쳐오고 있었다. [공지-이벤트] 6 권이 나온 것을 기념하여 작은 이벤트를 열려고 합니다. 지난 번에는 바뀐 부분을 찾아달라고 했었는데, 지원자가 거의 없더군요. 이번에는 많은 분이 참여하시길 바라며, 그 주제는 전검행을 읽고 감상문을 적어보내시는 것입니다. 잘 쓴 감상평을 주신 분께는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따끔한 비평도 상관없으니, 그저 칭찬일색으로는 보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단점을 지적하고 문제점을 찾아주시는 분께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보내실 메일주소는 zerocrush70@empal.com 입니다. 본인의 주소와 이름을 포함해 보내시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라고, 만일 없다면 다른 분께 자동적으로 기회가 넘어갈 것입니다.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1 슬픔과 절망의 하룻밤이 지난 다음날, 단리유아는 마야를 안고 주목랑마봉을 올라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뒤따르려 했지만, 묵묵히 고개를 저은 채 혼자서 정상을 향해서 발길을 옮겼다. 보기 드물게 청명한 날씨로 눈보라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기는 해도 구름 한 점 없었고, 정상에 쌓인 백설이 햇빛에 반사된 광채가 현란하게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맑고 적요(寂寥)한 주목랑마봉의 모습이 집을 나갔던 딸을 마중하듯이 마야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품속의 마야의 모습은 마치 단잠에 취한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리유아 역시도 그 모습에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언제나 자신과 함께하겠다는 마야의 말을 믿고 있었다. 지금도 귓전에 대고 속삭이는 마야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했다. ‘마음이 슬플수록 괴로울수록 더 밝게 웃으며 살아가세요. 세상에 웃음보다 더한 치료약은 없답니다. 웃을수록 마음은 밝아지고 투명해질 것이에요. 내 말대로 그럴 거지요, 당신?’ ‘걱정 말구려. 그대의 말대로 할 테니. 당장이라도 나도 그대를 뒤따르고 싶지만, 그대와 나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이 아님을 알기에 슬픔을 참고 그대를 보내는 것이라오.’ 비록 이생에서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겠지만, 반드시 다음 생에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땐 자신이 먼저 마야를 찾아서 영원한 사랑을 이루리라 맹세했다. 한편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생에서의 운명을 반드시 깨뜨려야함을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하여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마야. 지금 이렇게 그대 혼자 떠나보내려 하니, 난 슬픔보다는 오히려 그대가 무서워하지나 않을까 혼자서 쓸쓸하지나 않을까 걱정이구려.’ ‘걱정 마세요. 당신과의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가는데 어찌 무섭거나 외롭겠어요. 당신의 마음 한 조각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부디 내 걱정은 마시고, 자신을 더 돌보세요. 혹시라도 낙망하여 심신을 해치지 마시고. 만일 그랬다간 다음에 만날 때 나에게 혼날 줄 아세요!’ 다그치는 마야의 목소리에 단리유아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육신으론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겠지만, 두 사람의 영혼은 언제나 함께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산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맑은 날씨 때문인지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까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마야가 잠든다면, 자신이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지라도 마야가 쉽게 찾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야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별의 인사를 한 후에 단리유아는 얼어붙은 땅바닥을 파헤쳤다. 위에는 눈이 쌓였지만 조금 파들어 가니 빙판이 보였다. 다시 일 장 정도 빙판을 걷어내고 제일 아래의 바위를 검강으로 조각냈다. 마지막으로 관 모양으로 암석을 잘라내어 석관을 만든 후에 미리 준비해온 꽃잎을 내부에 가득 뿌려 넣고 마야를 다시 그 위에 눕혔다. ‘마야, 이것으로 그대의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겠구려. 잘 자오, 영원한 내 사랑. 부디 좋은 꿈 꾸기를 바라오.’ 이것이 마지막임을 생각하니, 그렇게 다짐했으면서도 막상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단리유아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해 웃음 짓는 마야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한참을 마야의 얼굴에 엎드린 채로 숨죽여 울음을 터뜨렸다. ‘마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구려. 내가 그대를 찾았을 때, 혹시라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는 않겠지? 내가 그대를 보자마자 알아보았듯이 그대도 역시 날 알아보아야 하오. 알겠소, 마야?’ ‘풋! 당신이 나를 찾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저번에 나를 보자 야단부터 친 게 누군데 그러세요? 아무렴 내가 당신을 몰라볼까봐 그런가요? 흥! 다음에 다시 만날 때도 그런다면 이번에는 당신을 단단히 혼내줄 거예요. 알았어요?’ 바람결에 들려오는 마야의 속삭임에 단리유아는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실제로는 무심하게 바람이 맴도는 것에 불과했지만, 마야가 주위를 맴돌며 자신을 향해 속삭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단리유아는 석관을 덮은 다음 마야를 여신의 품속으로 떠나보냈다.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 눈을 덮으니, 자신을 제외하곤, 이곳에 한 남자를 찾아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여인이 묻혔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은 없었다. 곧바로 내려가지 않고 단리유아는 마야가 묻힌 눈 위에 드러누워 하루 종일 마야의 곁에서 보냈다. 가슴을 파고드는 찬바람과 등 뒤로부터 전해오는 한기가 뼈골이 시릴 정도였지만, 단리유아에게는 마야가 전해오는 따뜻한 온정에 다름 아니라 느끼고 있었다. 육신은 차가운 땅바닥에 머물러 있었지만, 두 사람의 영혼은 허공에서 손을 잡고 거니는 모습이 눈에 선해서 단리유아는 몽롱한 꿈에 취한 듯 밝은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해질녘 쓸쓸히 혼자서 산을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산봉우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서 보였다. 누구일까? 마야인지 주목랑마 여신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단리유아는 마야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듯이 밝은 얼굴로 웃음 짓는 모습에 단리유아 역시 따라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별궁에 돌아온 뒤, 단리유아는 서둘러 주변을 정리했다. 이제 다시 멀고 먼 길을 떠나야하는데, 그동안 너무 한 곳에 머문 터라 서둘러 떠나야했다. 물론, 마야와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라 남아있을수록 마야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에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마야의 물건 중에서 단리유아에게 직접 남긴 것은 사 척 길이의 비나라는 악기와 백금으로 만들어진 연화가 다였다. 정신 속으로 찾아왔을 때 쥐고 있었던 연화의 모습과 같았는데, 실제로도 마야에게 있음을 알고 단리유아도 놀랐었던 물건이었다. “당신, 이것은 나의 분신, 아니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본래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암기로 유명했던 것이지만, 저는 암기로서 사용한 적이 없답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줄 테니, 당신도 나처럼 암기로서 사용하지 말고 항상 나의 모습을 보듯이 아껴주세요.” 줄기까지 합쳐도 반 자에 못 미치는 백련의 모습으로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죽음을 맞이하기 며칠 전 자신에게 건넸었는데, 활짝 핀 연꽃의 모습이 함초롬히 웃는 마야의 얼굴 같았다. 자신 역시도 마야의 모습을 떠올리는 물건을 가지고 피를 묻히는 암기로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실제로 단리유아가 가져갈 것은 이것뿐이었는데, 상하로 각기 공명통이 달린 악기는 너무 크고 거추장스러워서 먼 길을 가지고 다니기에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악기는 남북쌍파에 맡겨 나중에 다시 중원에서 재회할 때 찾아가기로 했다. 그동안 성모궁(聖母宮)에도 변화가 찾아와서, 마야의 죽음을 뒤로하고 궁주가 물러나고 대공주가 차기궁주로 확정되었다. 뜻밖에도 대공주가 이후의 싸움에서 단리유아를 도울 것을 약속했는데, 외적인 이유로는 단리유아와 마야의 관계를 들었지만, 내심으론 미움을 털어버리고 그동안 마야에게 잘못 대했던 미안함을 갚고자 함에 있었다. 천지신교와 맞서 싸우는 일에 함께 해달라는 말을 꺼낸 적은 있었지만, 단리유아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성모궁 자체의 성향이 워낙 세사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는데다가 마야와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으니. 대공주의 선언에 단리유아는 마야가 죽어서도 자신을 돕는 것이라 느꼈다. 언제나 자신의 앞길을 밝혀주고 어려움을 덜어주는 마야를 생각하니 다시 한 번 마야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마음이 서글펐다. 일단 궁주위의 승계가 끝난 후에 삼공주와 이십여 명의 여인들이 천룡사(天龍寺)로 떠나서 준비하기로 했다. 비록 직접적인 전투에는 끼어들지 않을 것이지만, 성모궁의 의술만으로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별궁의 여인들도 삼공주를 따라가서 일을 거들기로 했는데, 그녀들이 사랑하는 마야의 부마를 위한 일이었으니 그녀들로서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일이었다. 마야와의 인연을 이어주는 끈은 이제 단리유아뿐이었으니, 단리유아가 요청하지 않더라도 그녀들 스스로가 소원하던 바였다. 라소차야 단리유아를 계속 따라다니고 싶어 한동안 떼를 쓰기도 했지만, 이내 북파의 호통에 시무룩한 기색으로 물러났다. 그런 라소차를 위로하며 단리유아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약속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라소차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야가 여신의 품에 안긴지 사흘 후 아침, 떠나는 단리유아를 배웅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각각의 작별인사가 이어진 후, 대공주가 자그마한 옥함을 건네주었다. “이건 본궁의 비전성약들이에요. 제가 줄 것은 이것 밖에는 없군요. 비록 하잘 것 없는 것이지만, 앞으로의 어려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맙소, 대공주. 지난날이 어찌 되었든 마야도 대공주의 모습에 분명 기뻐할 것이오. 다시 만날 때까지 그대도 평안하기를 바라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후,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염려가 가득한 얼굴에서부터 울고 있는 라소차의 모습까지 모두가 표정이 각각이었다. 이내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단리유아는 몸을 돌려 감포특협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대공주가 들릴 듯 말듯 나직히 중얼거렸다. “솔직히 마야가 부럽군요. 당신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으니. 나도....“ 곁에서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냉막한 얼굴이던 삼공주 마라(摩羅)가 흠칫한 얼굴이 되어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별궁에 찾아올 때마다 단리유아와 마야의 모습에 부러움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마음과 같은 언니의 독백을 들으니 마라는 마음이 미묘했다. 마야가 죽었으니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질투의 감정도 들기도 하고 그런 마음을 떨치고자 하는 마음도 들어서 마라는 심경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상충하고 있을 때, 한쪽의 남북쌍파 또한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휴우. 공주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다시는 함께하던 모습은 볼 수 없겠지.... 공주님께서 계셨다면 분명 부마를 뒤따라 같이 가셨을 텐데, 어디를 가든지.” 북파의 말을 받아 남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확신시키듯이 단정지어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보아왔지만 두 분의 인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였네. 틀림없이 몸은 이곳에 남았어도 공주님의 마음만은 저분을 따라갈 것이네. 틀림없이!” 그런 여인들을 뒤로하고 단리유아는 산등성이를 내려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금은 헤어지더라도 몇 년 뒤에는 다시 만날 것이니, 비록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애써 다시 만날 때의 기쁨을 떠올리며 뒤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본래 단리유아는 서장으로 되돌아간 다음 천산(天山)으로 향할 생각이었지만, 한참 소뢰음사와 서장지단의 싸움이 치열한 상황이라는 소식에 마음을 바꿨다. 자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천지신교와 싸우는 것이지, 자칫 척발척천의 목적처럼 쓸데없는 싸움판에 휩쓸려 다른 곳과 좌충우돌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 마야가 천축으로 해서 가기를 바란 것도 단리유아가 마음을 바꾸게 된 큰 원인이었다. 본래 천축(天竺)은 수많은 신들과 종교가 가득한 곳이기도 했지만, 어디를 가나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들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했다. 마야가 단리유아에게 그렇게 권유한 것도, 시간상 직접 수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것을 보고 느끼며 기회가 되면 서로 대화를 해보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비록 당장에는 수행할 시간이 없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알게 모르게 단리유아의 깨달음에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했다. 일단 불타가야(佛陀伽耶: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가 일차 목적지로, 천축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곳이었으니 천지신교와 싸움에 도움을 청할 생각도 있었다. 삼천 여 명이 넘게 상주하는 가장 큰 사찰이기도 했으니 수행자들도 많고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도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런 면에서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마하보리사를 들린 다음에는 와랍납서(瓦臘納西:바라나시)의 바라만겁문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 계속 서진하여 덕리(德里:델리)에 이른 다음에, 쭉 북상하여 파미이(帕米爾:파미르 고원)를 넘어 천산남로로 접어들 작정이었다. 성모궁을 뒤로한 채 단리유아는 애써 앞으로의 여정에 생각을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등 뒤로 마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떠나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다른 생각에 매달리다가 단리유아도 결국 포기한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마야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가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서글픈 마음에 단지 품속의 연꽃을 어루만져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야와 지낸 몇 달 동안의 일이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음을 단리유아는 새삼 느끼고 있었다. 행복한 세월 속에 사랑이 무엇인지 여인의 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마야를 떠나보낸 후 사무치는 그리움에 잠들지 못하기도 했다. 감정이 되살아나 일희일비하게 되니 분명 그 자체로 기쁜 일임에도 쉽게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단리유아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와 더불어 회정결을 깨뜨려 감정을 되찾고 심마를 극복하여 목어검의 경지에까지 이른 외적인 성과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세상에 대한 생각 자체가 많이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의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로 인해서 대체로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무관심했었는데, 마야와의 생활 이후로 이제는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마야, 미치도록 그대가 보고 싶구려. 그대의 사랑과 온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난 이렇게 홀로 그대만을 그리워하니....’ 탄식하며 단리유아는 고개를 저었다. 현실에선 볼 수 없을지라도 언제나 자신과 함께할 것이니, 더 이상은 그런 생각에 빠져 스스로를 해쳐서는 안됐다. 그것이 마야와의 약속이기도하고 앞날을 위해서도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은.... 그대를 보려고 고개 돌리니 마음은 벌써 저 멀리 날아가는 새들을 뒤쫓네. 하늘 끝 산봉은 아스라이 구름에 잠겨있고, 바람결에 흩날리는 눈보라 그대의 손짓인 듯. 산마루의 해 서쪽으로 떨어지고, 밝은 달은 두둥실 동쪽에서 떠오르네. 아득히 산자락은 어둠에 가려있는데, 날 뒤따르는 저 달은 그대의 얼굴인 듯. 떠도는 밤바람에 몸을 내맡기니, 연꽃 같은 그대의 향기가 가슴을 파고드네. 그대 생각 간절하여 꿈속에서조차 그리워하는데, 깨어나 보면 눈물만 옷깃을 적시었구나. 쓸쓸히 흘러가는 세월 속에 달이 얼마나 차고 기울어야 그대를 다시 만날까? 그대여, 멀고 먼 그곳은 어떠하오? 외롭지는 않은지? 혹여, 날 그리워 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에 묻노라니, 가이없는 망망대해와 이별의 이 심정 어느 것이 더 큰가?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2 천축(天竺). 단리유아가 마하보리사를 목표로 움직일 무렵, 천축의 상황은 한마디로 난세로 치닫고 있었다. 북서부 지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회회교(回回敎)의 침입이 시작되고 있었고, 남부지역에는 촐라왕조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중북부에는 이렇다 할 강자가 없이 수많은 군소국가들이 난립한 채로 서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또한 곳곳에 도적떼들이 들끓는 상황으로 연일 약탈과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전성기를 맞은 바라문교의 힘이 가장 강했고, 상대적으로 승자교(勝者敎:자이나교)와 불교의 세력은 미미한 편이었다. 비록 마하보리사가 이백년 이래 최고로 흥성한 상태로서 세력이 크다고 하지만, 그것도 그 일대에 불과해서 전반적인 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의 세력은 쇠퇴일로에 있다고 보아야했다. 북서부를 중심으로 점차 회회교의 세력이 커져가는 상황이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종교적인 싸움도 커져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강호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단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큰 곳이 대부분이었다. 바라문교의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 불교의 마하보리사와 승자교에 속한 니라타궁(泥羅陀宮)이 가장 큰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나머지 대부분의 강호세력은 이들 종단에 속해 있었고, 그렇지 않은 곳은 부족의 결맹체나 기타 사이한 원시종교를 믿는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단리유아가 니파라국을 거쳐 천축으로 진입한 팔월 경은 마침 우기(雨期)가 한창인 무렵이라 곳곳에 홍수가 나서 무수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야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잊고자 단리유아는 몸을 혹사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는 일에 매달렸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얼마 없었다. 천축 특유의 사성제(四姓制:카스트제도)에도 속하지 못한 힘없는 불가촉천민(아추뜨)들의 피해가 대부분이었지만, 누구도 나서서 이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태도는 천축에 대한 단리유아의 생각을 다시 하게끔 할 정도로 심했다. 개나 소보다도 못하게 취급당하고 아예 바라문교에 입문할 자격도 없어서 이들을 상위계급에 속한 자들이 죽인다 해도 거의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같이 접촉하는 것도 꺼릴 정도여서 누구도 나서서 이들을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고, 가끔 불교의 수행자가 나서기도 했지만 그것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방인인 자신 역시 비슷한 대접을 받으니, 단리유아가 천축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교가 흥성했던 성스러운 곳이라는 환상은 여지없이 깨어져버렸다. 실제로 세외의 여러 곳을 돌아다닌 단리유아였지만 이처럼 복잡하고 이상한 곳은 없었다. 수많은 민족·언어·신, 자신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풍습들과 생각들로 단리유아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바라문교에 대해서도 들었던 적이 있었지만, 아주 단편적이어서 막연하게 채식을 하고 소를 신성시한다는 것만 들었지 천축이란 곳이 이런 이상한 곳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전생의 업보에 의한 것으로 이미 정해져있다고 생각해 만사를 쉽게 체념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죽음에 대한 이들의 태도도 이해할 수 없어서 단리유아로서는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신 역시 인과응보와 윤회를 믿지만, 이들은 운명이란 이미 정해져 있어서 결코 바꿀 수 없는 숙명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것보다 더욱 단리유아를 곤란하게 한 것은 언어의 문제였다. 워낙 다양하고 알려지지 않은 민족들이 많아서 제대로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이 허다했던 것이다. 그나마 브라만계급의 사제나 바이샤 계급의 상인들이 있는 곳은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했지만, 그밖의 지역에서는 자신이 익혔던 천축어와 다른 방언이나 각 민족의 토속어들로 인해서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도중에도 단리유아는 몇몇 수행자들과 만나 대화를 해보기도 하고 그들을 따라 수행을 해보기도 했었다. 보통 금식과 더불어 명상에 잠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단리유아로선 쉽게 빠져들 수 없었다. 결국에는 몇번 시도해보다가 중단하고 일단은 걸음을 재촉하기로 했는데, 오직 시간만이 마야를 잃은 슬픔과 그리움을 누그러지게 할 수 있으리라 보여 절로 탄식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구나. 마음이란 멈춘다고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언젠가는 이런 마음이 가라앉을 날이 있겠지.’ 그동안 완전히 녹초가 될 정도로 다른 일에 매달려서 쓰러지면 그대로 잠들 정도가 되었지만, 오히려 마야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날로 더해가는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아 생각을 떨치려 해도 막상 꿈을 꾸면 지난날의 행복했던 모습만 떠오르니, 시간이 흐를수록 마야의 모습은 점점 더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물론 마야를 잊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괴로운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다른 일에라도 매달리고자 하는 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보통의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어째서 자신을 돌보지 않나요? 나와의 약속을 잊었나요? 당신이 그러면 난 슬퍼져요. 사랑하는 당신, 제발 억지로 그러지는 마세요. 세월이 흐르면 그런 마음도 점차 누그러질 테니.’ 속삭이듯 마야의 목소리가 들려와 단리유아의 마음을 흔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단리유아도 더 이상 억지로 마음을 막거나 몸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를 내팽개치지 않겠다고 마야에게 다짐했다. 그런 어지러운 마음과 더불어 천축에 대한 실망과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목적지인 마하보리사가 있는 불타가야로 향했다. 도중에 승자교(자이나교)의 성지이고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살았던 곳이라는 비야리성(扉倻離城:바이샬리)을 거쳐서 갔는데, 본래 승자교(자이나교)의 사람들이 많은 곳인지 옷을 입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승자교는 옷을 전혀 입지 않는 나행파(裸行派)와 백의파(白衣派)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나행파에 속한 호교단체인 니라타궁이 있는 곳도 이곳이었다. 단리유아가 비야리성을 거쳐서 불타가야에 이른 때는 우기가 끝나가는 구월 십칠일 정오경이었다. 성모궁을 떠난 지는 거의 두 달이 넘은 시간이 흐른 뒤로, 그동안의 행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듯이 단리유아의 모습은 완전히 상거지 꼴로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지저분한 것 같아서 단리유아는 불타가야의 외곽을 흐르는 니련선하(尼蓮禪河)에 몸을 씻고 마하보리사로 향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에 세워졌다는 마하보리사는 멀리서도 쉽게 눈에 들어오는 십칠여 장 높이의 큰 탑으로 인해서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불교성지로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참배를 위해서 찾는 사람들도 많아서 단리유아도 그들을 뒤따르니 쉽게 마하보리사에 이를 수 있었다. 보는 사람의 기가 질리게 만들 정도로 높은 탑을 바라보며 한동안 감탄하다가, 단리유아는 사원의 정면에 이르기까지 이십여 장에 걸쳐 깔려진 석도를 걸어서 대문으로 향했다. 근처에는 겨우 한가닥 천으로 국부만 가린 가난한 사람들부터 비단옷을 입고 금은보석을 매단 부유한 사람들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절을 하며 사원주위를 순례하거나 출입하고 있었다. 생각과는 달리 복잡한 모습이었는데 뜻밖에 출입을 막는 승려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 의아한 생각을 하면서 단리유아는 외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멈추어 전면을 바라보니 왼쪽으로는 폭이 삼십여 장에 이르는 연못이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각종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건물들은 중원과는 전혀 다른 형태들로 벽돌로 지어졌고 대체로 탑과 비슷한 형식의 뾰쪽한 첨탑들이 지붕에 연이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못 주위나 건물을 돌아다니며 오체투지로 예배하고 있거나 건물에서 경을 설하는 승려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보기엔 이 외곽의 건물들은 주로 수행자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승려들이 머무는 것 같았다. 한참을 주위의 정경을 바라보다 단리유아는 다시 정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삼십여 장을 걸으니 연못을 기준으로 쭉 늘어선 백여 장에 이르는 석벽과 마주쳤다. 정면에는 폭이 오 장여에 높이 삼 장여의 큰 대문이 있었고, 그 양쪽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들의 모습이 각각 여섯 명씩 부조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사원의 출입을 지키는 승려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지닌바 자세와 우러나오는 기세에서 무공을 익힌 승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이곳부터가 사원의 내원으로 생각되었는데, 실제로도 출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황의가사를 걸친 열두 명의 승려만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그 모습들이 약간 이상해보이기도 했는데, 보통 승려는 머리를 깎는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개중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복 역시 일반적인 가사와는 달리 바느질이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긴 천을 그냥 온몸에 둘둘 만 듯한 모습이었다. 몇몇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 방문한 목적을 말하며 들어가거나 거부되어 돌아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시 후 자신의 차례가 되어 승려들에게 다가갔다. 제일 앞 왼쪽에 자리한 불그스름한 얼굴의 중년의 승려가 잠시 단리유아를 훑어보다가 이내 합장하며 방문 이유를 물었다. 척 보기에도 천축인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의아한 기색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동안 각지에서 찾아오는 이방인들을 심심치 않게 보아왔음으로 그리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아미타불! 어디에서 오신 분으로 이렇게 본사를 방문하셨는지요?” “저는 단리유아라 하는데, 멀리 중원에서 찾아왔습니다.” 합장하며 능숙한 천축어로 단리유아가 답하니, 잠시 중년승려가 다시 한 번 단리유아를 살피다가 물음을 던졌다. “중원에서 이 먼 곳까지 오시다니, 본사에 무슨 중요한 볼일이 계십니까? 아니면....” 이방인이 찾아오는 경우는 보통 경전을 연구하기 위해서나 성지순례의 목적이 대부분이었으니, 승려의 말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외원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단리유아의 모습에서 딱히 무공을 익힌 고수의 기도가 엿보이지 않아서 승려는 단순한 순례자로 여겼다. “아닙니다. 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으로 찾아온 것도 한 이유지만, 귀사의 법왕(法王)께 중원과 세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상의할 생각으로 찾아왔습니다.” 단리유아가 승려의 말을 가로막아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주위의 승려들도 잠시 뜻밖의 요구에 황당한 얼굴이 되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본래 마하보리사의 방장은 천축내 불교를 대표하는 법왕으로서 대대로 살아있는 활불로 숭배되었다. 현재의 법왕은 십사대로서 용장대존자(龍藏大尊子)라는 노승으로 벌써 세수가 이갑자가 넘는 인물이었다. 사내의 중요사안이 아닌 이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부분은 장로들이 처리하고 있어서 실제로 법왕을 보기란 마하보리사의 승려들도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방인이 접견을 요구하니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시주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법왕께서는 존귀하기 그지없는 분으로 보통은 저희들도 뵙기 힘듭니다. 그러니 보다 세세하게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중년의 승려가 웅성거리는 승려들을 진정시킨 후 단리유아에게 다시 물음을 던졌다.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단리유아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이 일은 여기에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음. 귀사도 소문을 들었겠지만, 대뢰음사가 멸망한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그 일도 제가 말했던 것과 연관이 있으니 꼭 좀 법왕을 만나 뵙게 해주십시오.” “뭐라구요? 그 일은.... 시주,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아무래도 이 일은 소승이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인 것 같으니.” 놀란 얼굴로 중년 승려가 소리치다가 이내 신중한 얼굴로 단리유아의 양해를 구한 뒤, 곧이어 한쪽의 승려에게 단리유아를 객사로 안내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은 총총히 대문안으로 들어갔다. 대문과 인접한 객사의 승방에 홀로 앉아서 단리유아가 기다리는 동안 승려가 점심을 내왔다. 짜파티(화덕에 구운 빵)와 달(콩이나 팥 등을 오랫동안 끓인 것)이라는 것으로, 그동안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들 때문에 입맛에 맞지 않아 제대로 식사를 못했던지라, 단리유아는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먹었다. 반 시진 정도가 흘렀을 때, 단리유아는 객사 주위로 접근하는 십여 명의 인기척을 느꼈다. 하나같이 고수들이었는데, 그중에서 한명은 자신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 같았다. 잠시 헛기침하는 소리에 이어서 아까의 중년 승려가 문을 열고 금빛 법의를 걸친 노승을 인도하여 들어왔다. “아미타불! 시주,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는지요? 어떤 것을 좋아하실지 몰라 평소 저희가 공양하던 것으로 내왔었는데.” “오히려 저에게는 이런 담백한 것이 좋았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스님.” 잠시 서로간의 식사에 대한 말을 주고받으며 예를 표하다가, 곧이어 중년승려가 합장하며 노승을 소개했다. “이 분은 본사의 장로중의 한분으로 타문관(陀門關)의 관주 되시는 라후수지(羅候隨智) 존자이십니다. 시주의 이야기를 듣고 보다 상세한 전말을 알고자 이렇게 직접 오시게 되었습니다.” 노승을 바라보니 전체적으로 백발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각진 얼굴과 굳은 표정이 그 성정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자신이 느꼈던 고수의 기도가 바로 이 노승임을 알아차리고 이내 합장하며 인사했다. “소생 단리유아라 합니다. 이렇게 존자님을 뵙게 되니 과연 그 법력이 대단하심을 직감할 수 있군요.” 중원의 이방인이 찾아와 법왕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소뢰음사의 일을 언급하자 마하보리사의 장로들은 한동안 의논이 분분했다. 그러다 외부의 정보와 대외적인 일을 처리하는 타문관의 관주로서 단리유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던 라후수지존자가, 일단 그 자신이 먼저 만나보고 나서 이후의 일을 다시 결정하기로 하고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라후수지존자는 승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단리유아를 응시하며 살피고 있었는데, 중원의 십대고수로 알려진 사람이 자신으로서도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녔는지 알 수 없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런 의문에 라후수지존자가 내력을 일으켜 단리유아를 향해 발출해보았다. 은유(隱柔)하기 짝이 없는 만법다라니선공(卍法多羅尼禪功)의 내력이 단리유아를 향해서 밀려갔지만, 물에 빠진 듯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이 그대로 사그라져 버렸다. 도저히 그 자신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경지의 단리유아에 대한 놀람과 가슴 서늘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라후수지존자가 단리유아를 향해 합장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미타불. 단리시주, 소승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한 터라 잠시 진위를 파악하려고 한 것이오.” “하하. 저 역시도 존자님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맘에 두지 마십시오.” 잠시 서로간에 인사말을 주고받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보내고, 두 사람만 남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좌하여 자리를 잡고 앉은 후, 먼저 라후수지존자가 말문을 열었다. “단리시주. 제자에게서 대충 들었지만, 저희들 역시 근본적으로 수행자들이라 할 수 있으니 시주의 깨달음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도와줄 의향이 있습니다. 그 외에 본사를 찾아와 법왕을 뵙고자하신 연유를 한 번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일단 제가 들어보고 나서 나중에 장로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할 테니.” “먼저 감사의 말부터 해야겠군요. 저와 같은 이방인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신다니.” 단리유아가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말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라후수지존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비록 그곳에 이르는 길은 다를지라도 도(道)를 찾아가는 머나먼 여정(旅程)에 오른 것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사문(沙門)으로서 출생과 신분을 따지겠습니까? 부디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시길 바랍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후 단리유아가 다시 말을 이어서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난날 척발척천에게 들었던 천지신교에 대한 것과 자신이 싸웠던 일도 설명하고 나서, 뒤이어 대뢰음사의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현재 서장에서는 소뢰음사와 천장련(天藏聯)이라는 이름을 내건 천지신교의 서장지단이 그 일을 두고 한창 싸우고 있지요. 세상에는 소뢰음사가 그 일을 벌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알기로는 천지신교가 그 실제 배후입니다. 본래 그들의 목적은 각 지역을 무리 없이 포섭흡수하는데 있어서, 처음에는 주로 동맹을 하며 세력을 키우다가 때가 되면 완전히 상대를 굴복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지요.” 단리유아의 말이 계속될수록 놀라는 얼굴이 되었던 라후수지존자가 잠깐 한숨을 내쉬어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에 말을 받았다. “휴! 그 일은 본사로서도 조사해보았지만, 확실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소. 외적 증거들로야 분명 소뢰음사의 소행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들도 바보는 아닐 텐데 그런 증거들을 내버려두고 떠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소. 이제 단리시주의 이야기를 들으니 대뢰음사의 일에 대해서 명확히 알 수 있겠구료.” 그동안 마하보리사에서도 같은 일파라 할 수 있는 대뢰음사의 멸망에 대해 정확한 사유를 알아내고자 조사대를 보낸 적이 있었지만, 단지 소뢰음사의 소행으로 보이는 증거만 찾아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몇 백 년을 그대로 두고 보다가 갑작스럽게 대뢰음사를 공격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증거물을 허술하게 남겨 둔 것도 이상하기만 했었다. 그 때문에 그동안 격론이 벌어졌지만 마하보리사로서도 아직까지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단리시주, 우선 감사의 말을 드려야겠소. 근자에 이르러 어찌되었든지 본사도 소뢰음사를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져갔는데, 하마터면 그 이면에 스며든 음모와 그런 세력에 대해 모른 채 이용만 당할 뻔 했구려.” 라후수지존자가 합장하며 감사를 표하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그 세력과 맞서 싸우는 일에 귀사의 도움을 얻고자 찾아온 것이니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그 일은.... 단리시주, 장로회의를 열어보아야겠지만 아마 그 일은 쉽지 않을 것이오. 본사에도 여러 계파가 있어서.... 소승으로서야 도와주고 싶지만.” 단리유아의 대답에 라후수지존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 자신으로서야 단리유아와 얘기하는 도중에 호감을 느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었지만, 마하보리사 내에는 계파가 다른 장로들도 많아서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 얘기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성과를 얻었다 할 수 있으니 그 일에는 그리 마음 쓰지 마십시오. 한 사람이라도 그 세력에 대해서 알고 대비한다면 이후 그들의 세력팽창도 벽에 부딪칠 테니 말입니다.” 난처한 기색인 라후수지존자를 보며 단리유아가 엷게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이후 몇 마디 더 말이 이어진 후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라후수지존자는 내원으로 들어가 장로회의를 소집할 예정이었다. 또한 신분이 확인된 이상 단리유아도 귀빈이라 할 수 있어서 라후수지존자가 청해 내원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기로 했다. 용전(龍展)과 사리발마(舍利鉢磨) 용전(龍展)과 사리발마(舍利鉢磨) 1 내원으로 거처를 옮긴 며칠 동안 단리유아는 부처님의 행적을 돌아보고 있었다. 라후수지 존자가 말했다시피, 그동안 마하보리사에서는 단리유아가 전해온 소식을 듣고 연일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쉽게 결말이 나지 않는 어려운 문제였기에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끔씩 마하보리사의 승려로서 비무를 요구하며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물론 무공의 고하를 비교할 필요를 느낄 정도의 고수가 찾아온 적도 거의 없었지만, 그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내원에 있는 보리수(菩提樹)와 금강좌(金剛坐)에서부터 사원 밖의 전정각산(前正覺山)과 유영굴(留影窟), 고행림(苦行林)등에 이르기까지, 자신 역시 그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님의 자취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곳곳을 돌아보고 승려들의 설법을 듣기도 하면서 지내던 중에 하루는 마하보리사 북쪽의 니련선하(尼蓮禪河)와 인접한 숲속으로 우연히 들어서게 되었다. 본래는 강 건너 고행림을 찾아갈 작정이었는데, 생각에 잠긴 채 무심코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숲의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실소를 흘리다가 다시 니련선하로 방향을 대충 잡아서 걸음을 옮기려할 때, 왼쪽의 숲길을 따라 오솔길이 펼쳐진 것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전면의 우거진 수풀을 뚫고 나가기보다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오솔길을 따라 백여 장을 걸어가니, 더 이상의 길은 보이지 않고 자그마한 텃밭을 뒤로한 채 자그마한 오두막만이 자신을 맞이했다. 막다른 곳인 것 같아서 다시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오두막 뒤에서 한사람이 돌아 나오며 물음을 던졌다. “게 누구인고?” 바라보니 본래의 색깔이 어떤 것인지도 모를 정도인데다가 군데군데 기운 흔적이 더 많은 낡고 빛바랜 승포를 걸친 노승이었다. 뼈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한 몸에 백발이 무성하고 주름살이 가득해서 그 나이를 짐작하기도 어려웠지만, 아직도 목소리에는 힘이 있어서 카랑카랑했다. “마하보리사에 머물고 있는 사람인데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니련선하로 되돌아나가는 길을 아시는지요?” 수행자라 생각하고 합장하며 단리유아가 길을 물었다. 말의 억양과 모습에서 단리유아가 천축인이 아님을 알아보고 노승이 잠깐 의아한 기색으로 단리유아를 훑어보고 있었다. “들어오면서 이곳이 금지임을 알리는 목판을 보지 못했는가?” 자신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재차 묻는 소리에 단리유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마하보리사에서도 북문을 나가서 니련선하로 향할 때는 숲에 들어가지 말고 돌아가도록 했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제 생각하니 숲에 들어섰을 때 무슨 글이 써 있는 목판을 본 것도 같았다. 오랜 풍상에 너무 희미해져서 자신의 짧은 천축어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던지라 그대로 무시했던 생각이 났다. “보았지만 제대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던 터라,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것인데.... 어르신의 수행에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그냥 발길을 돌려 제가 물러나가지요.” “수행, 수행이라.... 허허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노승이 잠시 회한(悔恨)에 잠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 후, 단리유아를 향해서 말을 이었다. “휴! 여보게, 시간이 있다면 나와 잠시 몇 마디 말이나 나누세. 사람들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본지도 수십 년이 흘렀으니....”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아닐세. 그동안 지내는 데에는 별 불편은 없었지만, 혼자서 수십 년을 지내다보니 단지 사람의 향기가 그리울 뿐이라네. 더구나 자네로 인해서....” 노승이 말끝을 흐릴 때, 단리유아 또한 딱히 급한 일은 아니었던지라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단지 마하보리사에서 이곳을 금지로 한 연유가 마음에 걸렸지만, 노승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약간의 내력만 엿보일 뿐이어서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앞장선 노승의 안내를 받아서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는데, 밝은 대낮임에도 집안이 어두컴컴했다. 왼쪽은 부엌인지 화덕과 여러 가지 도구가 얼핏 열려진 문을 통해서 엿보였고, 오른쪽으로는 나무로 된 낡은 침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면으로는 뒷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자그마한 우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단리유아가 침상 곁에 놓인 탁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 노승이 부엌에서 무엇인가를 끓여서 두 개의 나무잔에 담아왔다. 노승이 탁자에 나무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한번 마셔보게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대접할 것이라곤 이것뿐이 없군그래. 그래도 피곤을 풀어주고 정신을 맑게 하는 데에는 그만이라네.” 나무잔에 담긴 이파리에서 우러나온 연한 갈색의 물이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향기를 은은하게 흘리고 있었다. 잠시 바라보다가 한 모금 머금고 음미하던 단리유아가 감탄한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약간 쓴맛이 강하지만, 향기가 특이하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흠. 일반적인 차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떤 것인지 모르겠군요?” “보리수의 일종인데 흔히 보이지는 않는 종류라네. 그 잎을 말렸다가 끓인 것인데, 그동안은 또 하나의 나를 상상하며 이렇게 마주앉아 그것으로 고적함을 달래고 있었지. 그런데 자네와 이렇게 마주하며 즐기니 기쁘기 그지없구만.” 단리유아의 물음에 노승이 밝은 얼굴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랜 세월 혼자 있을 때의 적적함을 달래주던 것을 이렇게 다른 이와 나누며 같이하니 노승의 마음속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잠시 노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차향을 음미하던 단리유아가 잔을 내려놓고, 이윽고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곳에 계시는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보아하니 자네 역시 마하보리사에 머물고 있는 것 같은데, 이곳이 금지임을 듣지 못했나? 또, 결계도 펼쳐져 있었을 텐데?” 단리유아의 물음에 잠깐 생각에 잠긴 표정이던 노승이 오히려 단리유아에게 되물었다. 마하보리사에서 금지임을 가르쳐주었을 테고, 설혹 몰랐더라도 결계가 펼쳐져서 보통사람은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러니 노승 역시 단리유아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도 들은 적이 있지만, 그만 딴 생각에 잠겨서 결계가 펼쳐져 있던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 흐음.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표정으로 보아서는 단리유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기에 더더욱 노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본래 마하보리사에서도 결계의 입구에 한 달에 한번 생필품을 가져다놓을 뿐이었고, 거의 일갑자의 세월동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이제는 단지 금지라는 말만 들었지, 정확히 어떤 연유로 어떤 사람이 갇혀있는지 아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사부님의 명으로 사문의 어른들이 펼친 것인데.... 비록 수십 년 전에 펼쳐진 것이라 결계가 약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했다는 것이 노승으로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의혹에 잠겨 잠시 단리유아를 살펴보던 노승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휴! 자네가 뭔가 특이한 사람이기에 그런 것 같군. 아니면, 결계가 허술해졌던지. 어쨌거나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 자네에게 내가 이곳에 갇힌 일에 대해서도 말해주겠네.” “어르신, 말씀하기 싫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꼭 알고 싶은 것은 아니니....” 어딘지 불편한 표정인 노승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사양할 때, 고개를 저어 말을 막으며 노승이 슬며시 미소를 지은 채로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네. 사실 자네가 결계를 뚫고 들어옴으로 해서 내 영어(囹圄)도 풀리게 되었다네. 뭐, 이젠 날 알아볼 사람도 얼마 없을 테고, 이곳을 떠날 생각도 별로 없지만.... 흠, 어쨌거나 자네로 인해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어찌된 일인지는 말해주어야 할 것 같네.” 잠시 말을 멈추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가 노승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오래전에 내가 전대 법왕이신 사부에게 대든 적이 있다네. 본사가 점점 본분을 잃고서 밀교(密敎)적인 주술과 의식으로 너무 치우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 거의 매일 잘못을 들추어내고 따지며 사부와 여러 사람들에게 맞섰다네. 이렇게 가다간 점점 더 바라문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것이 너무 심했던지 평소 날 못마땅해 하던 장로들이 몰아붙여 날 이곳에 가두도록 결정을 내려버렸다네. 휴, 지금이야 모든 것이 꿈만 같고 부질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얼마나 사부를 원망하고 아무 말이 없던 동문들을 야속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네.” 확실히 단리유아가 보기에도 밀교적인 주술과 의식이 군데군데 보이기도 했다. 노승의 말처럼 밀교 그 자체로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점차 본래의 성격을 잃고 성력(性力)을 통해서 해탈을 이룬다는 좌도밀교(左道密敎)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현재의 마하보리사는 노승의 우려처럼 좌도밀교의 세력이 점점 강해져서 세력의 삼분의 일을 넘어선지 오래였다. “그러셨군요. 흠, 그럼 배분상 현재의 장로들보다 높을 것 같은데, 법명을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물으니, 노승이 희미하게 웃으며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허허, 법명이라 이미 기억에도 아득한데 말해서 무엇 하겠나! 그저 쓸모없는 늙은 수행자라 여기게.” 본래 노승은 현재의 법왕과 동배라 할 수 있는 용전(龍展)존자로서 장로들보다는 반배 정도 배분이 높았다. 지금은 그런 성격이 사라져버렸지만, 과거의 그는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기를 즐겨했었다. 경전에 대해서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차기법왕으로서도 유력했지만, 너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꼬집고 몰아붙여 적들을 많이 만든 것이 탈이었다. “그보다 자네는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발걸음하게 되었나? 자네의 모습을 보아서는....” 용전존자가 말끝을 흐리며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단리유아의 모습에서 경전을 연구하기 위해 찾아온 승려로도 보이지 않고, 단지 순례의 목적으로 찾아온 것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물음에 답하여 단리유아가 마하보리사를 찾아온 연유에 대해서 얘기했다. 한참동안의 설명이 이어진 후에 용전존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아마 자네의 바램대로 될 것 같지는 않구만. 그동안 어찌되었는지 모르지만, 내 예상대로 좌도밀교의 세력이 강해졌다면 천축을 떠나서 싸움판에 끼어들 생각은 없을 걸세. 비록 대뢰음사가 본사와 관계가 깊다 해도 말이야. 그들은 이대로 안주하기를 바랄 테니. 휴, 내게는 뻔히 어찌될지 보이는데도 대부분은 더 이상 각성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에만 만족하고 있으니. 허허, 참으로 본사의 앞날이 걱정이구만.” 마하보리사의 앞날을 생각해보며 용전존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점점 더 세속화되어 바라문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더욱이 회회교의 세력 또한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 용전존자가 보기에는 불가의 세력이 천축에서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이내 고개를 저어 어두운 생각을 떨치며 용전존자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왔다고?” “예. 그렇지만 수행자들의 모습을 보아도, 불법의 이치를 들어도 제게는 깊이 다가오지 않더군요.” 단리유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용전존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물음을 던졌다. “자네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날 가두어놓은 금령(禁令)을 깨뜨려주었으니, 자네에게 몇 마디 해주고 싶네. 경전의 글귀도 잊었고 이미 불호도 잊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오래 산 인생의 선배로서 자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줄 수는 있을 걸세. 어디 들어볼 텐가?” “그러시다면 더 바랄 바가 없지요. 현재의 정체된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보일지도 모르니.” 반색하며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자신에게는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물론 마야에 대한 생각들로 마음이 어지러운 것도 그 이유가 되었지만, 그보다는 낯선 풍물과 생각들에 대한 거부감이 본능적으로 먼저 일어나 깊은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의 나를 돌이켜보면, 스스로는 정당한 이유를 들어서 상대방을 공격했다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공명심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네. 지금까지 이렇게 갇힌 채로 지내면서 쭉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지. 너무 나 자신만이 잘났다는 듯이, 옳다는 듯이 떠들었으니.... 쯔쯧. 한편으론 날 가둔 이들을 원망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잘못이 드러나더군.” 씁쓸한 표정으로 잠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용전존자가 다시 화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수많은 경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잊어 먹어버렸네. 뭐 좋은 얘기도 많이 있지만, 막상 파고들면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들이 대부분이지. 해서 자네에게는 내가 경험했던 일을 가지고 얘기해주겠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부디 자네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라네.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 날 한그루의 나무를 마주보고 정좌한 후에 물음을 던졌네. ‘나는 어떤 인간일까?’ 스스로 물음을 던지면서도 일면으론 창피한 생각도 들더군. 불문(佛門)에 든 지가 얼마인데 겨우 이런 질문이나 하고 있나하고. 또 일면으론 내 잘못을 승복할 수 없는 마음도 솟구쳐서,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잘못이 없다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었지. 그런 생각 속에 며칠을 묵상에 잠긴 채 있던 중에 누군가 내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네. ‘그러니까 넌 네가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지?’ 그것이 나무인지, 바람인지, 아니면 내 마음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있어서 아주 정신이 혼미했거든. ‘네가 경험한 것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걸 모르니? 그 밖에는 모두가 들은 소리에 불과해.’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 사실 이곳에 갇히기 전만해도 나보다 경전을 많이 알고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었거든. 지금은 이리 볼품없어 보여도 과거에는 나란타사(那爛陀寺 : 나란다 대학)에서도 천재로서 이름을 날렸으니 나보다 아는 것이 많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을 것일세. 어쨌거나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네. ‘그래. 넌 책을 많이 읽었지.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에 불과해. 너에게 그것들은 들은 소리에 지나지 않아. 왜냐하면, 네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너는 그것들을 아는 게 아냐. 넌 단지 그것들에 대해서 아는 것뿐이지.’ 그 말을 듣고 난 그제야 내 마음을 직시할 수 있었다네. 내 안에 숨어있던 자부심과 자아, 자존심을 버리고 순수한 인간 본연의 나를 말일세. 그동안의 나는 헛된 망상에 젖어 자존망대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지. 또한 내가 배운 것은 단지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네. 나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연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한 채로 다른 사람의 약점만 찾고 있었으니, 돌이켜보면 정말로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돌아보다가 용전존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만일 더 높은 경지에 이르길 바란다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에 대한,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는 것이 좋을 걸세. 우선은 자연에 대해서 관찰하고 통찰력을 기르는 법을 배우도록하게. 주위에서 움직이는 작은 벌레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습기의 정도, 새들이 날아가는 방향과 모습, 별들이 뜨고 사라지는 모습 등을 감정의 치우침이 없이 파악하도록 노력하게. 물론 자신이 관찰하는 모든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세. 요컨대 요점은 어떤 것도 자신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네.“ 용전존자의 말에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물음을 던졌다. “그것은 안법(眼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거라면....” “물론 무공에서도 안법의 수련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은 변화와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네. 이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통찰력을 기르라는 것이네. 어떤 것을 배울 때 대충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중요성을 파고들어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 살아있는 지혜(智慧)를 가지라는 것이지. 그것이 단지 학문적인 배움일 수도 있고, 자연에 대한 것일 수도, 무공에 대한 것일 수도,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네. 그렇게 하여 자네가 만일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감지할 수 있다면, 인생은 더욱 다채로워지고 길어질 테니 똑같이 주어진 삶속에서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걸세. 또한 그런 관찰을 통해서 자네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말을 마치고 용전존자가 단리유아의 얼굴을 살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에 슬며시 미소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혹여 자네는 이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눈동자만 움직여 하나하나의 변화를 놓지 않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네. 아마 일각이 가기 전에 팔다리가 저리고 전신을 기어오르는 벌레들 때문에 일어나고 말걸? 조금만 움직여도 가까이 다가오던 동물들이나 벌레들은 달아나고 말 테니, 마치 살아있는 나무와 같이 움직이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어야 한다네. 만일 자네가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자네는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될 걸세.” 용전존자의 말에 단리유아는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자연에 대한 관찰을 시작하여 통찰력을 기른다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진정한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를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한지, 자신과 같은 여유가 없는 사람이 과연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일었다. “어르신께서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걸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로서는....” 용전존자가 단리유아의 말을 가로막으며 다시 한 번 설명했다. “나로서도 수년 동안 이 일에만 매달려서야 어느 정도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다네. 그렇다고 지금 완전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룰 정도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지. 아마 평생을 해도 모자란 바가 있을 걸세. 그렇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네. 관찰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이해와 사물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지. 많이 할 필요도 없고, 시간과 장소를 따질 필요도 없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시장통에 앉아 사람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도, 잠자리에 들기 전 밤하늘에 떠있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할 수 있을 것이네. 요컨대 자신의 주변 모든 것이 다 수행(修行)의 수단이 될 수 있네. 만일 자네가 주위를 완전히 인지하고 조화(造化)를 이루는 경지에 이른다면, 그때 바로 자네가 바라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네.” 들을수록 단리유아는 실제 그런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의문이었다. 말처럼 쉽다면 누가 그런 수행을 하지 않겠는가? 주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전반적인 통찰력을 기르고 다시 그것을 뛰어넘어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결코 생각처럼 쉽지도 않고 효과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얼굴을 가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용전존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좀 전에 얘기했던 것이 자연과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 수행법이라면, 내가 이번에 해줄 말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마음가짐이라네. 흔히들 얘기하기를 인생은 고해(苦海)라 하지. 맞는 말이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행복한 삶을, 평탄한 삶을 바라지만, 현실적으로는 고난이 가득한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걸세. 하지만, 그 고난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이지. 누구나 한번쯤은 슬프고 괴로운 일들로 삶을 포기하고 그대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네. 그러나 그런 일들 속에서야 말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을 탓하기부터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네. 만일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고 후회하는 것도 역시 바보 같은 일이지. 항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자신에게 일어난 괴로운 일에 대해서도 교훈을 찾는 것을 잊지 말게. 그것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괴로움과 마주쳤을 때에도 맞서 싸워 극복할 의지를 기를 수 있을 것이네. 고난이 삶의 끝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인생(人生)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은 강해지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네. 자네도 그런 역경과 괴로움을 겪기도 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것이지만, 부디 그런 일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길 바라네.“ 용전존자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어 단리유아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오면서 괴로운 일, 슬픈 일을 많이 겪었지만, 운명을 한탄하고 후회하며 지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용전존자의 말을 들으니 자신의 잘못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한탄하고 후회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할 텐데도, 어리석은 감정에만 휩싸여 번민만을 더욱 키워왔으니.... 그와 더불어 마야가 말했던, 항시 미소를 지으며 앞날을 맞이하라는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대도 그런 생각이었겠지?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밝은 생각을 가지고 앞날을 향해 달려가라는.’ 깊은 한숨을 토해낸 후, 단리유아는 용전존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동안 마음에 쌓였던 생각들이 바람에 씻겨 내려가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삶에 대한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으니 그야말로 자신을 일깨워주는 마음의 스승이라 할 수 있었다. 용전(龍展)과 사리발마(舍利鉢磨) 용전(龍展)과 사리발마(舍利鉢磨) 2 단리유아는 그날 내내 용전존자와 대화를 나누며 보냈다. 이야기를 계속할수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인생에 대한 보다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게 한 깨우침이 더욱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용전존자와의 대화에 빠져 보내다가 해가 져 어스름이 깔리는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날 다시 찾아올 것을 약속하고 단리유아는 발길을 돌렸다. ‘허허. 속세의 허물을 벗어던지려는 순간에 저 사람을 만나게 되어 금령이 풀리다니,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라는 뜻인가? 모든 것을 가슴에 묻으려 했는데, 이리 되면 나도 할 일이 생겼구나.’ 한동안 멀어지는 단리유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용전존자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나둘 나타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아마도 오늘밤이 태어나서 가장 바쁜 날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다음날 단리유아가 다시 찾아갔을 때, 오두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 안팎을 돌아보니, 우물 곁에 낡은 가사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불에 반쯤 탄 가사와 잿더미를 바라보고 단리유아는 탄식을 터뜨렸다. “아, 내가 한 발 늦었구나. 아니, 지난밤에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었더라면....” 이미 지난밤에 용전존자가 스스로를 소신(燒身)하여 적멸(寂滅)에 들었음을 알게 되니, 단리유아는 마음속에 허전함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비록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고 매일 찾아와 가르침을 더 받고 싶었는데, 겨우 하루밖에 인연(因緣)이 없었음을 알게 되니 다시 한 번 운명의 야속함을 느끼게 되었다. 잠시 후 그런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젓고 용전존자의 열반을 축원하며 주위를 수습했다. 자신이 그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단 하루의 인연일지라도 큰 가르침을 얻었으니 더 이상 부질없는 감정에 휩싸여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용전존자가 자신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받드는 길이리라. 불탄 가사는 땅에 묻고, 옷을 벗어 사리와 뼈 조각을 주어 담았다. 잠시 용전존자의 유골을 어찌할지 생각하다가 나중에 라후수지존자에게 건네주기로 했다. 혹시 자신에게 남긴 것이 있나 집안을 세세히 살피던 중에 침상의 한켠에 놓인 서찰을 찾을 수 있었다. 대충 짧은 인연을 아쉬워하는 말과 함께 이후에 어떻게 처리해달라는 말, 못 다한 당부들, 또한 나중에 라후수지존자가 찾아와 하는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는 얘기가 적혀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대로 따를 것을 약속하고, 글의 말미에 남긴 송(頌)을 나직히 읊조리며 용전존자의 마지막을 되새기고 있었다. 세상을 잊고서 앉아 있노라니, 영욕이 어우러진 인간사 또한 끊어지네. 아무것도 마음에 걸릴 것 없으니, 다만 구름과 달을 벗하여 세월을 보내네. 텅 비고 환히 밝아 다시 씻을 티끌도 없으니, 한가로이 거닐며 자연에 생을 맡기노라. 유명대로 오두막을 불태우고 마하보리사로 돌아와 라후수지존자에게 서찰과 사리 등을 전했다. 이미 간밤에 찾아와 어떻게 될지 알렸는지, 그리 놀라는 기색은 없이 다만 침중한 얼굴로 말없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라후수지존자가 앳되어 보이는 모습의 승려를 데리고 단리유아를 찾아왔다. 서로 합장하며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나후수지존자가 옆의 어린 승려를 단리유아에게 소개했다. “얘야, 인사드리거라. 이분이 내가 이전에 말했던 단리시주란다. 무공에 있어서도 대단하지만, 그 생각이 깊은 것에 대해서 더 감탄했던 분이란다.” “아미타불. 소승 사리발마가 단리시주께 인사드립니다.” 들어올 때부터 단리유아만 주시하고 있던 사리발마가 곧바로 합장하면서 단리유아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이제 십오여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아직도 볼의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것 같은 미승(美僧)이었다. 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보조개가 파여서, 머리만 길렀다면 영락없이 다시 찾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년이리라 생각됐다. “단리유아라 합니다.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스님.” 남자답기보다 소녀처럼 곱고 귀여운 모습을 보고 단리유아가 미소 띤 얼굴로 합장하며 인사를 받았다.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각처럼 수줍어하며 살짝 홍조를 띄우는 사리발마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저도 모르게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런 말이 실례임을 알지만 정말 잘 생기셨군요. 제가 여인이라면 어찌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거의 농담을 해본 적이 없던 단리유아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리발마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있었다. 소녀처럼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더 크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내 라후수지존자에게 고개를 돌려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렇게 찾아오셨습니까? 그것도 저분과 함께?” “단리시주께 며칠 동안 있었던 장로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온 것이지요. 음, 또 한 가지 부탁드릴 것도 있어서 이렇게 이 아이와 같이 찾아왔습니다.” 라후수지존자 역시 미소 띤 얼굴로 사리발마를 슬쩍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리발마를 데려와 부탁할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단리유아는 먼저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다. “흠. 제게 부탁할 것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그보다 어떻게 결정되었는지요?” 마하보리사에 머문 지도 열흘이 다 되어가니 이제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더 머무르고 싶기도 했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으니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리유아의 반문에 라후수지존자가 잠깐 난처한 얼굴이 되어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휴, 그럼 먼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아이의 문제도 그 일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니, 그 일을 먼저 설명하는 것이 낫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다가, 라후수지존자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본사에서 공식적으로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천지신교와 소뢰음사를 물리치고 대뢰음사를 다시 재건해야한다고 하는 장로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소수에 불과해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소승 역시 앞날을 보아서는 그리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워낙....” 사내의 계파간의 분쟁이라서 라후수지존자가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말끝을 흐렸다. 본래 마하보리사 내에는 대승불교의 전통회복을 주장하는 전통파와 정통밀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순밀파(純密派), 그리고 좌도밀교에 치우친 금강유가파(金剛瑜伽派) 등이 있었다. 전통파가 가장 적어서 이할 정도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순밀파가 삼할, 금강유가파가 사할에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계파도 있었지만, 실제 장로회의의 결정에 영향을 줄 정도의 계파는 없었다. 전통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라후수지존자가 나서서 그동안 다른 계파의 장로들을 부지런히 설득했지만, 결국에는 서장으로 고수들을 파견할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대부분은 이미 오래전에 대뢰음사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성향 역시 대승불교의 전통을 따르니 현재의 자신들과는 그리 맞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 또한 지금의 상태에서 바라문교와 맞서서 천축 내의 세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힘들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단리유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차피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던 일이고, 단지 천축만이라도 천지신교의 본질을 알아차려 경각심을 높이길 바랄뿐이었었다. 그런 단리유아의 표정을 살피며 라후수지존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결정이 났지만, 저를 비롯한 몇 명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대뢰음사를 재건하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천축 내에서는 본사의 미래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낫게 보이더군요. 물론 오백 명도 안 되는 소수의 인원밖에 되지 않지만....” 뜻밖의 말에 놀라 단리유아가 곧바로 반문했다. 아무리 서로간의 불화가 심하더라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분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단리유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많은 반대가 있었을 텐데?” “생각보다는 그리 반대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많은 문제가 있었던 터라, 오히려 은근히 환영하는 분위기도 보이더군요.” 씁쓸한 표정으로 라후수지존자가 대답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갈라질 상황은 아니었지만, 금지에 갇혀있던 용전존자가 찾아와서 전통파의 수장들을 설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과거에 용전존자가 전통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기도 했거니와 다른 장로들도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세속화하는 마하보리사의 모습에, 차라리 서장으로 옮겨서 다시 한 번 발흥(發興)을 기도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어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저 때문에 그렇게까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분파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서 단리유아가 얼굴을 찌푸릴 때, 라후수지존자가 일부러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하하하, 물론 단리시주의 역할이 컸지요. 다른 무엇보다도 용전사숙을 영어에서 풀어준 것이 말입니다.” 라후수지존자의 말에 그때까지도 용전존자의 법명을 몰랐던 단리유아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용전사숙이시라면?” “단리시주가 수림 속에서 뵌 분이 바로 그분이랍니다. 그분께서 나오셔서 설득하니, 그동안 망설이던 사람들도 결심을 하고 모두가 의견을 모으게 되었지요.” 그로부터 반시진여에 걸쳐 라후수지존자가 지난 며칠간의 경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이미 완전히 멸망한 대뢰음사를 같은 이름으로 새롭게 재건하기로 결정했다는 것과 떠날 사람들의 면면에 대해서 얘기했다. 또한 서장(西藏)의 상황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단리유아에게 꼼꼼히 묻고, 앞으로 서로 협조할 방법에 대해서도 의논을 나누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났을 때, 화제를 돌려 라후수지존자가 사리발마를 데려온 것에 대해 설명했다. “단리시주, 제가 이 아이를 데려온 것은 용전사숙의 부탁 때문입니다.” “흠, 그분께 받은 가르침이 있으니 저도 가급적 들어드리겠습니다. 단지, 전 오래도록 이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 혹시 자신에게 사리발마의 무공을 높이기 위해서 도와달라고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단리유아가 말을 흐렸다. 그런 모습에 라후수지존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허, 소승도 단리시주의 행보가 바쁨을 알고 있는데, 어찌 이곳에 더 머물러달라고 하겠소.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아이를 같이 데리고 다녀달라는 것이랍니다.” “아니, 그 일은.... 존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저와 천지신교와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위험한 일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동행하여 위태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놀란 얼굴로 단리유아가 반문하고 있었다. 아무리 용전존자의 부탁이라 하지만,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뻔히 위험한 처지에 다른 사람을 동행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다. 만일 사리발마가 스스로를 지킬만한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또 모르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이제 겨우 내공이 반갑자 남짓한 모습이었으니 일류 정도의 고수라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 걱정 어린 단리유아의 반문에 라후수지존자가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 점은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우리 같은 승려가 죽을 땅을 고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 “그래도....” 내키지 않은 얼굴로 단리유아가 재차 설득하려할 때, 라후수지존자가 중간에 말을 가로막으며 사리발마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사리발마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네가 싫다면 나도 더 이상은 부탁하지 않을 생각이다. 본래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지금도 그런 생각이냐? “아닙니다. 저도 사조(師祖)의 뜻에 따라 이분을 따라가겠습니다. 앞날이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일로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사리발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까의 부끄러워하던 것이 거짓이라는 듯이 표정에서는 단호한 기색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본래 사리발마는 사승으로 따졌을 때는 용전존자의 사손뻘이 되지만, 출가 전의 혈연으로 따졌을 때는 증손자의 관계였다. 사리발마는 마하보리사에서도 소문난 기재로서 그동안은 나란타사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그러다 용전존자의 유명으로 이렇게 되돌아왔지만, 사실 단리유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리발마 역시 그 유명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아무리 사조이자 증조부인 용전존자의 명이라 하지만, 그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대다가 학승(學僧)으로 앞날이 유망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물론, 책만을 끼고 사는 것이 실제의 깨달음과는 별 상관이 없고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용전존자의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뭔가 허전함을 느끼고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던지라, 일단 단리유아를 만나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부러 목숨이 위태로운 길을 동행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솔직한 사리발마의 마음이었지만, 막상 단리유아를 만나고 나서는 생각이 변하게 되었다. 이사람이라면 동행하여 자신의 시야를 트이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여서 어떤 고난도 같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단리유아가 떨치려고만 하니 반감이 솟구치기도 해서 라후수지존자가 묻자마자 단호한 얼굴로 선언해버렸다. 사리발마의 말에 단리유아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때, 라후수지존자가 말문을 열어 재차 설득에 나섰다. “단리시주, 본래 나도 처음에는 이일을 반대했었지만 용전사숙께서 하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오. 그분께서 자신의 후손으로 이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과 똑같은 길을 따라가는 것 같다며 탄식하셨소. 글에 쓰여진 것만 파고들어 죽어있는 지식은 많이 얻을 테지만 살아있는 지혜를 찾기란 요원할 것이라고. 또한 명성에 연연하게 된다면 문장의 유희에 빠져 헛되게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라 하셨소.” 말을 마치고 슬쩍 사리발마를 돌아본 후, 전음으로 다시 몇 가지 사실을 보충해서 설명했다. <사실 이 아이는 본 계파의 미래라 할 수 있다오. 대뢰음사를 재건한다면 다음대의 장문인이 될 가능성도 큰 재목인데, 문제는 이미 학식은 부족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너무 고생을 겪어보지 못해 세사에 대한 안목과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것이오. 단리시주도 한 문파를 책임지는 위치는 단순히 무공이 강하거나 학식이 풍부하다고 될 수는 없음을 잘 알 것이오. 용전사숙과 내가 바라는 것도 무공이 아니라, 그저 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치게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라오.> 단리유아도 라후수지존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천축을 지나 천산에 이르렀을 때는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또한, 현재 어지러운 천축의 사정을 보아서도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곰곰이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다가 단리유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휴, 알겠습니다. 그분의 부탁이니 저도 더 이상은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천산에 이르기 전에 이분을 되돌려 보낼 테니 그 점은 양보해주십시오. 존자께서도 아시다시피 그 이후에는 저 자신도 돌보기 어려울 것이니 말입니다.” “흠, 좋소. 그때쯤이면 우리도 대뢰음사를 재건하고 있을 테니 이 아이도 서장으로 바로 돌아오면 될 것이오.” 잠시 생각하던 라후수지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의 결정에 사리발마가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얼굴로 입술을 벌렸지만 밖으로 꺼내지는 않고 있었다. 한동안 이런저런 말이 이어지다가 다음날 아침에 만나 같이 떠나기로 하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두 사람을 단리유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못해 승낙하기는 했지만, 앞날이 불안한 상황에서 사리발마와 동행할 생각을 하니 절로 마음의 답답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의 문제로 복잡한 상황에서 이제는 사리발마도 신경을 써야하는 형편이었으니.... 하지만, 이것도 자신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기로 했다. ****** 투표방송을 볼려고 빨리 올렸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과연 다음 4년 동안은 저를 얼마나 실망시킬지 기대도 됩니다. 감상문을 받는 것은 이번주 일요일까지로 하고, 월요일에 개별적으로 연락하겠습니다. 오타나 오류가 보이시는 분은 바로바로 지적해주십시오.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 1 다음날 아침 단리유아는 사리발마와 함께 다시 길을 떠났다. 배웅해주는 사람은 몇 명 없었지만, 무언가가 붙잡는 듯해서 자꾸만 고개를 돌려 되돌아보고 싶었다. 아마도 지난 십여 일에 걸쳐 마하보리사에 머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전기(轉機)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니련선하를 건너서 돌아보니, 우거진 수림 속에 우뚝 솟은 대탑(大塔)의 끄트머리만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며칠을 생각해보다가, 곁의 사리발마에게 물음을 던졌다. “사리발마 스님께선 어떠십니까? 이제 이곳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는 힘들 텐데?” “아미타불! 소승이야 불가의 사람인데 그런 것에 연연하겠습니까? 인연이 되면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영원히 볼 수 없겠지요.” 별다른 동요 없이 엄숙한 얼굴로 사리발마가 대답했다. 잠시 그 모습에 단리유아가 미소 지었다. 겉으로는 나이든 고승처럼 말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뒤돌아보며 미적이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미소 지으며 뚫어져라 사리발마의 얼굴을 주시하자 무안해진 사리발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하하! 스님, 아주 생각이 깊으시군요. 하지만, 때로는 솔직해지는 것이 좋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마음에 쌓아두지 않고 털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지요.” 사리발마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크게 웃으며 말하고, 이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중에는 그런 감정들이 쌓여서 저도 모르게 번뇌에 빠지게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속으로 꼭꼭 숨기고 혼자서 생각만 하다가는 나중에 몰아쳐오는 감정들의 홍수에 밀려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단리유아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즉시 떨쳐버리는 것이 나았다. 자신 역시 억지로 누르고 회정결로 막아서 가슴에만 쌓아두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심마(心魔)에 빠질 정도가 되지 않았던가? 마야의 당부와 용전존자의 깨우침처럼 항상 밝게 생각하며 작은 일에서도 기쁨을 찾고, 고난 속에서도 교훈을 깨달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에 대한 자세라 생각했다. 앞으로 부딪쳐오는 수많은 인연과 일들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당당히 맞서리라고 단리유아는 결심하고 있었다. 단리유아의 말에 사리발마가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가 합장하며 대답했다. “흠. 시주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느끼는 바가 있군요.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대한 꿈을 꾸며 생각을 어지럽혔을지 모릅니다. 감사드립니다, 단리시주.” “하하하, 됐습니다. 속인의 짧은 생각이었으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고 단리유아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짧은 대화를 통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어색함이 많이 누그러졌음을 느꼈다. 걸음을 옮기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묻고 답하며 상대방에 대해 보다 더 자세히 알아갔다. 이번에 마하보리사에 들린 결과, 단리유아로선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용전존자의 가르침이 있었고, 세력적으로는 천지신교에 맞설 응원군을 얻을 수 있었다. 약속한 대로 대뢰음사가 재건된다면 최소한 서장 지역에서만이라도 천지신교의 세력확장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 척발척천의 야심이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비록 현재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동맹의 처지라 할지라도, 자신으로선 서장의 패권이 그에게 넘어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생각보다는 소뢰음사와의 싸움이 길게 이어져 척발척천의 세력도 많은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으니, 다시 대뢰음사를 재건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면 충분히 척발척천의 야욕에 뒤통수를 가할 수 있는 세력이 되리라 예상했다. 마하보리사를 떠난 두 사람이 육백여 리 떨어진 와랍납서(瓦臘納西:바라나시)에 도착했을 때는 시월 십이일의 저녁 무렵이었다. 생각보다는 시일이 오래 걸린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둘이서 함께하니 그런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서두르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용전존자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하고 여러 가지 천축의 풍물을 보고 겪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용전존자의 가르침은 효과가 있었는데, 심신을 집중하여 살필수록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도, 사람의 행동과 그 심리의 변화에서도 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었고 미리 예측할 수도 있었다. 또한 주변의 움직임을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 통제하고 파악하는 것은 목어검의 완성을 보다 깊고 넓게 했다. 그런 수행과 견문을 넓히는 여정 속에 도착한 와랍납서는 항하(恒河:갠지스강)의 북서면 강변을 따라 위치한 수많은 사원들로 이루어진 곳으로,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서 천축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다. 바라문교의 성지(聖地)이자 중심지로서 항시 순례자가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는데, 호교단체라 할 수 있는 바라만겁문이 위치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대다수가 바라문교도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파의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석가모니의 초전법륜지인 녹야원(鹿野園)도 북으로 불과 이십여 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도착했을 때가 마침 해가 진 유시(酉時17-19시)말로,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강위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촛불들이 떠다녀 마치 하늘의 별들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허허, 정말 대단한 장관이구려! 이처럼 촛불을 강물에 띄어 보내는 모습을 세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떠다니는 것은 본 적이 없소이다.” 경탄해마지 않는 표정으로 단리유아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리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미타불! 바라문교의 신들에게 소원을 비는 디아(나뭇잎을 실로 꿰어 초를 얹은 것)가 떠다니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어서 특별히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천축인들에게 가장 신성시되는 강인 항하는 희마랍아의 빙하를 원천으로 하여 천축의 대지에 온갖 풍요로움을 선사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천축인들은 고대로부터 항하를 신격화하여 강가(항하-갠지스의 천축이름)라는 이름의 여신으로서 숭배했다. 강가 여신이 자신의 강물에 재나 시체를 수장한 자의 죄를 씻어주고 천상의 지복의 영역에서 머무르는 신들 사이에 환생하는 것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에, 강 주위로는 항시 수많은 사람들이 몸을 씻거나 화장한 재나 시체가 떠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강물을 바라보니 촛불이 켜진 수많은 디아 사이로 간혹 사람의 시체나 화장하고 남은 재와 부유물이 떠다니는 것을 단리유아도 볼 수 있었다. 옆에서 사리발마가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주었지만, 그렇다고 단리유아가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 믿음이야 더 따질 바가 없었지만, 그 물에 목욕하고 심지어 마신다는 말에는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항하와 맞닿아 있는 백여 개의 가트(강과 이어진 계단)중의 한곳에 내린 두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감에도 곳곳에 불이 밝혀져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는데, 보름날이라 더욱 사람들이 많아서 몇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과 부딪치곤 했다. 가트를 올라선 두 사람은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우선 북부지역에 있는 불교 사원인 연하향적사(蓮荷香積寺)로 향하기로 하고, 내일 다시 바라만겁문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이 강변에 연이어진 사원들을 지나 도시의 중심부에 접근할 무렵, 일단의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중원인이다!” “저 자가 그 도둑일지도 몰라!” 영문을 알 수 없어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할 때, 처음에는 몇 사람이 소리치던 것이 이내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에워싼 채 욕설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모두 저 놈을 잡아라. 달아나게 해선 안 돼!” “저 빌어먹을 중원놈이....”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신보(神寶)를 훔친 놈을 죽이자!” 몇 사람이 몽둥이와 칼을 꺼내어 접근하고, 다른 사람들도 단리유아를 향해 돌을 던지며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뭔가 좋지 않은 일로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단리유아가 어찌할지를 몰라 날아오는 돌멩이만 쳐내고 있었다. 점점 더 흉흉해지는 분위기에 사리발마가 합장한 채 크게 불호를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아미타불! 모두 멈추시오. 무슨 연유인지 설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이 무슨 행패시오?” 아름다운 얼굴의 미승(美僧)이 나타나서 소리치는 소리에 다들 주춤하면서 사리발마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사리발마의 미려한 모습에 곤란한 지경에 처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이들도 그들과 별다르지 않게 잠시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인파를 헤치며 장내로 다가왔다. 둘러싼 사람들도 모두 그들을 보고는 뒤로 물러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고 있었다. 다 같이 흰색의 도띠(사리처럼 긴 천으로 둘둘 감듯이 입는 옷)를 걸치고 있는 모습을 단리유아가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을 때, 사리발마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라문교의 사제들입니다. 어깨의 천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았을 때는 바라만겁문에서 나온 정식 사제들인 것 같습니다.” 말을 이어 그들을 향해 사리발마가 합장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미타불! 마하보리사의 사리발마가 신의 사자인 바라문들에게 인사들입니다.” “비쉬누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하길! 파란굴타(芭欒淈朶)가 깨달은 자의 제자에게 답례하오.” 앞장 선 중년의 바라문이 고개를 숙이며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갈색의 눈동자와 곱슬거리는 턱수염에 각진 얼굴을 한 사오십 대의 건장한 체격의 사람이었다. 본래 바라만겁문과 마하보리사는 천축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경쟁관계에 있는 문파였지만, 서로 간의 사이가 그리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바라문교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석가모니 역시 비쉬누 신의 한 화신이라 여겨서, 불교 역시 같은 바라문교에서 갈라진 다른 분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해마다 한 번씩은 서로 교류하고, 회회교(回回敎)의 문제를 두고 협력하기도 해서 상층부의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다. “실례지만, 무슨 일인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사리발마의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이 파란굴타가 단리유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물음을 던졌다. “흠. 이 사람과는 어떤 사이이신지....?” “저와 같이 수행길에 오른 분이십니다.” 슬며시 눈썹을 찌푸리며 사리발마가 대답할 때, 단리유아의 모습을 자세히 훑어보며 파란굴타가 다시 물었다. “보름 전에 저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불! 저 분께선 한 달 정도 전부터 본사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십여 일 전에 저와 같이 동행하여 이곳으로 오게 되었지요. 그보다 무슨 일인지요? 다짜고짜 중원인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공격하려 하다니....” 사리발마의 대답에 파란굴타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한숨을 내쉬다가 파란굴타가 재차 물음을 던졌다. “그 사실을 보증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시는 것입니까? 설마하니 승려의 신분으로 소승이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것입니까? 정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본사에 연락해서 물어볼까요?” 거듭 믿지 못하고 물어보자, 사리발마가 화가 난 얼굴로 퉁명스레 소리쳤다. 파란굴타가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휴! 아닙니다. 답답한 마음에 제가 너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보다 연유나 알려 주십시오. 마침 저희도 귀문을 방문할 생각으로 오던 중이었으니 말입니다.” “본문을 말입니까? 무슨 일로?” 재차 자신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파란굴타가 또다시 묻기만 하자, 사리발마도 점점 더 역정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사리발마의 기색을 보고 단리유아가 끼어들었다. “마하보리사를 찾아간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만, 이곳에서는 말씀드리기 그렇군요. 보고 듣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방문한 뒤에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뜻밖인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 일견으론 놀라고 일견으론 의아하여 바라만겁문의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본래 바라만겁문에서는 이번에 일어난 사건이 중원인이 벌인 것이라는 증거를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사리발마의 말에도 다들 반신반의하며 미심쩍은 얼굴로 단리유아를 노려보고 있던 중이었는데 뜻밖의 말을 들으니 다들 혼란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 다들 조용히 해라.” 웅성거리는 제자들을 향해 파란굴타가 야단을 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단리유아와 사리발마를 향해 말을 이었다. “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본문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방문할 것이라면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을 테니.....”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파란굴타에게는 바라만겁문 내로 단리유아를 끌어들여 다시 한 번 자세히 캐묻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물론 그 사건을 일으킨 중원인이 이미 포위망을 벗어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공공연히 활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단리유아도 중원인이니 파란굴타로선 계속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란굴타의 말에 서로 마주보며 눈으로 의향을 묻던 단리유아와 사리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을 표했다. 어차피 찾아갈 생각이었으니 당장 따라나서는 것도 단리유아로선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불쾌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떤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리발마 역시 설혹 공격을 받을지라도 단리유아라면 자신을 데리고 능히 도망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어서 별다른 말없이 단리유아의 결정을 따랐다. Burntocrush 제 목 전검행(戰劍行) [148 회] 날 짜 2004-04-20 조회수 1637 추천수 37 선작수 1519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 이전 이후 >>>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 2 중원인을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걸음을 옮긴지 일각 여가 지났을 때, 파란굴타가 이끄는 사제들과 함께 단리유아와 사리발마는 바라만겁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 바라만겁문은 유마밀전(幽魔密殿)·태양마찰(太陽魔刹)과 더불어 천축의 상고 삼대문파 중의 하나로서, 이미 오래전에 다른 두 문파가 티끌 속에 사라진 것에 반해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천오백 년이 훨씬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파였다. 한때는 불교나 승자교의 세력에 밀려 위축되기도 했었지만, 현재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상주하는 인원만 삼천여 명이 넘고 천축 각지의 분파들까지 합한다면 그 인원이 상상을 초월하는 전무후무한 거대세력이었다. 천축에 존재하는 바라문교의 수많은 신들의 추종자가 모여서 이룩된 바라만겁문은 성립초기에는 인드라(천둥의 신)와 아그니(불의 신)를 믿는 세력이 강했지만 지금은 삼대신(브라흐마·비쉬누·시바)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원칙적으론 각 분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십대성자(十大聖者)가 십년마다 돌아가며 문주가 되어서 다스렸지만, 반드시 순환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때때로 한 분파의 성자가 반백년 이상 연임한 적도 있었다. 현재의 문주도 그런 경우에 속해서, 비쉬누 계열의 수장인 아난대성자(阿蘭大聖者)가 벌써 삼십년 동안 문주위를 맡아오고 있었다. 바라만겁문의 앞에 도착한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반 장(丈)마다 점점 높아지는 형식의 계단의 양쪽으로 각각 오십여 개의 신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사원의 입구와 본래의 지면과는 오 장여의 차이가 났는데, 그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엄한 가운데 절로 사람을 내리누르는 위압감을 던지는 것 같았다. 또한 딱히 대문이 없는 특이한 형태로서 양옆에 위치한 높이가 삼 장이 넘는 금빛 기둥이 대신하고 있었다. 각각의 신상을 살피며 입구에 들어서니 한눈에 사원 전체의 전경이 들어왔다. 중앙의 만신전(萬神殿)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을 기준으로 삼대신을 상징하는 대탑(大塔)이 뒤쪽으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고, 전후좌우로도 수많은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다. 입구에서 백여 장 이상 떨어진 만신전까지도 중앙의 석도를 중심으로 건물들과 공터, 정원등이 곳곳에 위치해 있었다. 밤이 깊어갔지만 보름이기도 하고 곳곳에 등이 걸려있어서 그리 어둡지 않았고, 경문을 외는 사람과 나직하게 송가를 부르는 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마디로 도시 속의 또 다른 도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거대한 바라만겁문의 모습에, 과연 천축 제일의 세력다운 모습이라고 단리유아는 감탄하고 있었다. 마하보리사도 크고 웅장했지만, 바라만겁문은 거의 두 배 이상의 크기를 자랑해서 자신이 느끼기에도 마하보리사가 약간 손색이 있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바라만겁문에 온 사리발마 역시 감탄했는지 곁에서 입을 벌려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서 갑시다. 이미 연락을 보냈으니 본문에서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한동안 멈춰서 탄성을 지르는 두 사람의 기색을 살피던 파란굴타가 잠시 후에 굳은 얼굴로 재촉했다. 여태까지 어찌된 일인지 물어도 대답을 회피하기만 하던 파란굴타가 재촉하는 모습에 단리유아와 사리발마가 슬며시 안색을 찌푸렸다. “이제는 어찌된 이유를 말해주어도 되지 않겠소?” “그것은 본문의 어르신들과 만났을 때 물어보도록 하시오.” 단리유아의 물음에 파란굴타가 어서 가자는 듯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를 보고 단리유아는 이들이 뭔가 좋지 않은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곳까지 오는 중에도 사제들이 뒤따르며 포위하는 것처럼 둘러싸서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이곳에 이르자 마치 죄인 취급하듯이 강압적인 태도로 나오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표면적으로는 수십여 명의 고수들이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 보다도 몇 배나 더 많은 고수들이 마치 대적을 맞이하는 듯이 곳곳에 은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단리유아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좋소.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이 무례에 대해 따지기로 하지요.” 발끈한 얼굴로 따지려드는 사리발마를 잡아당기며, 단리유아가 파란굴타에게 나직하게 응답했다. 무덤덤하고 자신감 넘치는 단리유아의 태도에 파란굴타가 뒤돌아서 잠시 이채를 띄며 주시하다가, 이내 앞장서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단리유아가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길 때, 사리발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단리유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라후수지존자에게 단리유아의 무공이 상대할 자가 거의 없을 것이라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주위에서 고수들의 기파(氣波)가 엄습해오니 어린나이의 사리발마로선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리시주, 아무래도 우리에게 나쁜 의도를 지닌 것 같은데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흠, 이들이 우리를 노린다면 쉽게 벗어나기는 틀렸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일대에는 이미 천라지망이 펼쳐진 것 같으니.> <천라지망이라구요? 아니 그렇다면....> 놀라서 다급히 반문하는 사리발마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스님께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소한 제가 달아날 생각을 한다면 이들이 어떤 수를 쓰더라도 벗어날 수는 있을 테니. 모든 일을 제게 맡기시고, 어떤 경우에도 스님께선 일 장 이상 제 곁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말입니다.>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라고는 없는 단리유아의 태도에 사리발마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졌다. 일면으론 그래도 계속 걱정이 되기도 하고, 단리유아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승려로서 동요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기에.... “하하하! 스님, 어서 가시지요. 저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줄지 스님께선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사리발마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단리유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건넨 뒤 앞장서 걸어나갔다. 그런 자신만만한 단리유아의 태도에 마음이 진정되는지 사리발마가 나직히 불호를 되뇌이며 발걸음을 맞추었다. 이후, 느긋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며 두 사람은 주위의 신상이나 건물 외벽의 부조와 벽화 등 낯선 풍물을 감상하며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유람을 떠나서 이적(異蹟)을 구경하듯이 가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심각한 얼굴로 감상을 말하기도 하면서 떠들고 있었다. ‘이 자는 도대체 누구지? 저 승려야 그렇다고 쳐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보통 낯선 속인들이 본문을 들어서면 모두가 기가 죽어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정말 이상한 일이군. 흠. 아무리 보아도 그리 무공이 강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앞장 서 걷던 파란굴타가 돌아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그 자신이 보기에는 단리유아에게서 딱히 무공을 익힌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고, 단지 흉터로 인해 인상이 험악하고 반쯤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약간 특이할 뿐이었다. 더욱이 바라문교를 믿는 신자라도 주위의 모습에 위압감을 느끼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기 마련인데도, 전혀 그런 기색이라고는 없이 주위의 동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흥미진진한 표정이기만 했다. 그렇게 각각의 표정이 상반된 모습으로 반 각여 동안 천천히 걸음을 옮겼을 때, 일행은 만신전 옆의 한 건물 앞에 이르고 있었다. 건물 앞에는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다가오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내 일행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주다가와 주위를 둘러쌌다. 먼저 파란굴타가 앞으로 나서서 정면의 뚱뚱한 노인에게 예를 표하며 경과를 보고했다. 노인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하마처럼 둥글둥글하게 살이 찐 족히 이백 근이 넘어 보이는 거구였는데, 가끔씩 눈을 치켜뜰 때 드러나는 청광(靑光)이 어린 눈동자가 절로 사람의 내면을 꿰뚫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잠시 후, 파란굴타가 옆으로 물러나자 사리발마가 앞으로 나서서 합장하며 인사했다. “아미타불. 소승 사리발마가 바라문께 인사드립니다.” 사리발마가 나서서 합장하며 말하는데도 노인은 별다른 말이 없이 잠자코 응시만 하고 있었다. 한동안 사리발마를 살피다가, 사리발마가 불쾌한 얼굴이 될 때에야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난 수리살타(羞利薩陀)라고 한다네. 그런데 자네가 마하보리사의 승려라던데,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나?” “그건.... 설마 승려의 신분인 저를 의심한다는 말입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사리발마가 소리쳐 되물었다. 그 모습에 수리살타가 느글거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답했다. “흘흘. 요새 너무 가짜 승려가 많아서 말이야. 만일 자네의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다면 자네는 그냥 물러나 있게. 최소한 자네는 중원인은 아닌 것으로 보이니, 내 더 따지지는 않겠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제 가사의 문양을 보고도 그렇게 묻다니.... 지금 본사를 무시하겠다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던 수리살타가 거듭 약 올리는 모습에 사리발마가 화가 나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리살타가 고개를 저으며 쯧쯧 혀만 차고 대답을 하지 않을 때, 더욱 흥분한 사리발마를 향해서 파란굴타가 대신 말문을 열었다. “잠시 진정하고 내 말을 듣고 다시 답해주시오. 이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니.” “스님. 일단 더 들어보고 나서 따지도록 하시지요. 이분들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 이럴 테니.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마하보리사에 이런 문제를 다시 알려도 될 것입니다.” 지켜보던 단리유아가 나서서 사리발마를 향해 말을 건넸다. 두 문파의 관계를 무시하면서까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볼 때, 단리유아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 여겼다. 단리유아의 말을 듣고서 사리발마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질 때, 파란굴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보름 전 그믐에 누군가 본문에 침입해서 신상을 파괴하고 신보(神寶)를 훔쳐갔소. 스님도 보름이나 그믐에는 특히 순례자가 많다는 것을 알 것이오. 더욱이 그땐 잔마쉬따미(가장 인기 있는 신중의 하나인 크리쉬나 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제)까지 겹쳐서 더욱 사람들이 들끓었소. 본문도 그때는 문을 열고 순례자들을 받아들였는데, 문제는 그때 세 명의 중원인이 승려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잠입했다는 것이오.” “그래도 중원인이라면 뭔가 이상해서라도 자세히 조사했을 것이 아니오?” 단리유아가 의문을 느껴 끼어들 때, 파란굴타가 성난 얼굴로 노려보며 코웃음 쳤다. “흥! 당신은 잠자코 있으시오. 나중에 당신이 그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땐....” 파란굴타가 생각할수록 흥분되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옆에서 지켜보던 수리살타가 역정어린 목소리로 다그쳤다. “어서 설명이나 계속해라.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제야 파란굴타가 숨을 내쉬며 화를 가라앉히고 사리발마를 향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축제를 북돋기 위해서 부른 광대패들과 함께 들어왔는데, 우리도 승려의 신분이라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소. 게다가 분장에 능한 광대패까지 속일 정도로 감쪽같이 천축인으로 변장을 한 상태였으니 더욱 그러했지. 나중에 사고가 생기고 나서 그놈들 중의 두 명을 붙잡은 후에야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는 것도,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놈이 신보를 가지고 갔다는 것도 알게 되었소. 그러니 우리로서도 아무리 마하보리사의 승려라 해도 의심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소?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파란굴타의 반문에 사리발마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런 사정이라면 자신도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한 가지 일에 생각이 미치자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붙잡은 사람이 있다면서 여태까지 달아난 사람을 못 잡았다는 것입니까? 또한 진짜 승려인지 가짜인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니....?” 사리발마의 반문에 잠시 파란굴타가 수리살타와 전음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더 자세히 설명할지 말지를 묻다가 이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붙잡은 두 놈 중에서 한명은 이내 독단(毒丹)을 깨물어 자결했고, 다른 놈은 워낙 상처가 심해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여서 우리로서도 간신히 숨만 붙여놓고 있는 상황이오. 광대패들도 심문해보았는데,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놈들을 녹야원(鹿野園)에서 처음 만났다는 것뿐이오. 우리 수중에 있는 두 놈들은 거의 말을 꺼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달아난 놈이 주로 대화를 했는데 경문을 암송하거나 여러 행사에서 축원하는 경우 등을 보았을 때는 분명 승려가 틀림없다는 것이었소. 그러니 최소한 한명은 승려라고 보는 것이오. 또 분명히 다른 자들이 더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천축어를 능숙할 정도로 구사할 정도에다가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다면 최소한 육개월 전부터 잠입하여 준비해야만 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오.” 파란굴타의 설명에 단리유아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저 사람의 말대로라면 오랫동안 준비를 한 뒤에 저지른 일이라 할 수 있겠지. 또 아직까지 그 자를 잡지 못한 것을 보면, 근처에 은신처나 동료들이 더 있다고 볼 수도 있을 테고.’ ‘흠. 도대체 누굴까? 아니, 한두 명이 아니라면 어떤 세력에 속한 자들일지도.... 그런데, 도대체 훔쳐간 것이 뭐지? 듣기로는 신보(神寶)라는데, 무엇을 말하는 거지?’ [설정 & 참조] [1] 태양마찰(太陽魔刹) : 천축의 상고 삼대문파의 하나. 태양신을 믿는 천축의 원시종교로서 시기상으로는 가장 앞서는데, 바라문교의 세력이 일어나면서 점점 쇠퇴하다가 사악한 이교도들이라 몰아붙인 바라만겁문에게 멸망당했음. 배화교와 열화천궁(熱火天宮)과도 약간 관련이 있어서 그 무공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짐. 최고무공은 태양나가천륜공(太陽邏軻天輪功)으로서 원시마교 태양마(太陽魔)의 마화지옥태양공(魔火地獄太陽功)과 배화교의 융천겁파염우기(融天劫波炎雨炁)와 더불어 극양강기류의 무공 중에서 가장 강한 무공 중의 하나. 최고신물은 손바닥 크기의 태양철엽(太陽鐵葉)이라는 대사제를 나타내는 인장(印章). 무공과 신물 모두 실전되었다고 알려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Burntocrush 제 목 전검행(戰劍行) [149 회] 날 짜 2004-04-21 조회수 1543 추천수 36 선작수 1519 옵 션 글자 크기 8 9 10 11 12 <<< 이전 이후 >>>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 바라만겁문(婆羅萬劫門) 3 단리유아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파란굴타가 사리발마를 향해서 물음을 던졌다. “이젠 상황을 이해했을 테니, 스님도 확실하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것을 제시해보시오. 겉으로 드러난 표식이 아니라 마하보리사의 비전무공 같은 것으로 말이오.” “그건....” 사리발마가 곤혹스런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내공심법은 부지런히 익히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동안 나란타사에서 학문을 연구하기에 바빴지 그 외의 무공은 거의 익혀본 적이 없었다. 물론 구결상으로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깊이 익힌 적이 없어서 구결을 따라서 어설프게 펼칠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흉내 내는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을 것이다. 구결을 말한다면 믿겠지만, 그렇다고 사문의 비전무공을 발설할 수는 없었다. “흥! 마하보리사의 제자라면서 펼칠 줄 아는 무공이 없다는 것인가?” 난처한 사리발마의 표정에 파란굴타가 어림짐작해서 추궁했다. 잠시 난감한 기색이던 사리발마가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소승은 학승으로 나란타에서 공부만 했던지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일반적인 신법이나 수법만 알고 있을 뿐이어서.... 하지만, 소승이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틀림없이....” “그만! 그대의 말이 맞더라도 지금 당장에는 딱히 신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오. 그러니 마하보리사에 연락하여 확인이 될 때까지 스님은 본사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겠소.” 파란굴타가 말을 가로막으며 사리발마를 다그쳤다. 이어서 주위의 제자들을 움직여 사리발마를 데려가려고 할 때, 단리유아가 끼어들었다. “잠깐!“ “흥! 무슨 일로 또 끼어드는 것이냐? 비천한 중원 놈이!” 사람을 무시하는 파란굴타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근본적으로 이들은 바라문교가 아닌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처럼 비천하게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중원인에 의해서 사고가 생겼으니 더욱 단리유아를 무시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보시오. 내 말을 듣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 “하하하. 그래 어디 말해봐라. 쓸데없는 소리겠지만, 그래도 들어는 줄 테니.” 조소를 흘리며 파란굴타가 대꾸할 때, 애써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단리유아가 사리발마에게 말을 건넸다. “스님. 스님께선 나란타사에서 오래도록 수학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본사에 잠깐씩 들린 경우를 제외하고 일곱 살 이후로는 거의 그곳을 떠난 적이 없었지요.” “제가 알기로 나란타사에는 다른 종파의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바라문교에 속한 사람 중에도 스님을 알아볼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당황하기만 하던 사리발마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타사가 불교대학으로 유명했지만, 딱히 불교의 경전만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종파의 경전에 대해서도 연구했고, 수사학·천문학·수학·지리학 같은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연구하는 종합적인 학문의 전당으로 이름이 높아서 다른 종파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아, 그래요. 다급한 마음에 제가 미처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군요. 저와 같이 수학한 사람 중에 바라문교의 사람도 있었지요.” 곧이어 파란굴타를 향해서 넌지시 말을 꺼냈다. “혹시 나란타사에서 수학한 사람이 있습니까? 최근 오년 안에 머문 적이 있던 사람이라면 쉽게 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리발마의 말에 파란굴타가 잠시 수리살타와 말을 주고받았다. 이내 곁의 제자에게 뭐라 명을 내리고는 사리발마에게 대꾸했다. “좋소. 스님의 말대로라면 본문에서도 알아볼만한 사람이 있을 것이오. 그 문제는 조금 있다가 사람이 오면 확인이 될 것이니, 일단 스님은 한쪽으로 물러서 계시오. 지금부턴 저 자를 붙잡아서 물어보도록 할 테니.” 단리유아를 손가락질하며 파란굴타가 명령조로 말하고, 이어서 사리발마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사람들로 하여금 단리유아를 붙잡도록 명령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리발마가 큰 소리로 항변했다. “지금 뭐하는 것이오? 곧 있으면 소승의 신분도 확인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내 말이 사실임을 알 수도 있을 텐데. 이분은 본사에서도 귀한 손님으로 머문 분인데,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이오?” “흥! 스님의 말대로라도 저 자가 지난번의 중원인들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소? 일단 우리가 저 자를 붙잡아서 심문해보고난 뒤에 관련이 없다면 그때 귀사에 다시 사죄하겠소.” 파란굴타의 억지에 사리발마가 일순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분노에 가득 차 다시 외쳤다. “그, 그런.... 감히 본사까지도 무시하겠다는 소리요, 지금? 흥! 나중에 소승이 그대들의 행동을 본사에 알려서 이 문제를 따지면 어쩔 것이오?” “그러시든지....” “이, 이....” 야유하듯 무신경한 얼굴로 파란굴타가 대꾸하자, 너무 화가 난 사리발마가 차마 욕설은 내뱉지 못하고 더듬거리고만 있었다. 이때 단리유아가 사리발마의 소매를 끌어서 진정시키고는 곁으로 다가서는 바라문교의 사제들을 향해서 말문을 열었다. “이보시오. 아무리 그대들의 사정이 다급하다고 해도 이렇게 무경우 할 수 있단 말이오? 모두 뒤로 물러나고 말로 합시다. 만일 나를 공격한다면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나도 더 이상 책임을 지지 않겠소.” 처음에는 단리유아도 이들의 사정이 어려운 것 같아서 순순히 잡힌 상태에서 해결할까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들의 이방인에 대한 태도와 지금의 모습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없는 일까지도 고문으로 만들어낼 작정인 듯이 보여서 그런 생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 네놈 혼자서 뭘 하겠다고! 뭣들 하느냐? 어서 저자를 굴복시켜라. 죽이지만 말고 목숨만 붙어있을 정도만 되니, 반항하면 살수를 써도 된다.” 파란굴타가 명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사리발마에게 요구했다. “스님은 어서 뒤로 물러서시오. 괜히 같이 있다가 상처나 입지 말고.” “아미타불! 소승은 이분과 떨어질 생각이 없소. 나도 같이 싸울 생각이니 그리 아시오.” 굳은 표정으로 사리발마가 대답하자, 파란굴타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자칫 잘못하여 사리발마가 상처를 입는다면 나중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다급한 사정으로는 더 이상 사정을 보아줄 수는 없었다. 또한 사리발마의 무공도 별로인 것 같고, 눈앞의 중원인도 검을 매고는 있었지만 그리 강해보이지 않아서 쉽게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 생각에 파란굴타가 공격명령을 기다리는 고수들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바라만겁문의 고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주위를 둘러쌌는데, 대부분 무기를 지니지 않은 적수공권이었고 가끔 곤이나 추, 금강원 같은 무기를 지닌 고수들이 몇 명 있을 뿐이었다. 공격하려 접근하는 모습을 보고 단리유아가 사리발마를 향해 속삭였다. “제가 이들을 제압할 테니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저도 싸우겠습니다. 무공은 별로지만 그래도 도움은 될 테니.” 긴장한 기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사리발마가 대꾸했다. 사실상 첫 실전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애써 표정을 굳히고 단호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손발이 떨리고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어린 사리발마의 그런 모습에 단리유아가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아무 걱정 마시고 그대로 계십시오. 이들 정도로는 제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할 테니. 스님께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저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리발마가 고개 저으며 대꾸할 때, 단리유아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사실 포위한 바라만겁문의 고수들이 많았지만, 단리유아의 무공에 비할 때는 천지차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현경(玄境)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미 단리유아의 무공은 그 끝에 다다라서 둘러싼 고수들이 볼 수 있던 거라곤 겨우 희끗한 인영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비록 현경에 이르지 못해 심검(心劍)을 쓸 수는 없었지만, 마음이 일면 이미 몸이 움직일 정도의 경지에는 이른 뒤여서 더 이상 단리유아에게 무기나 거리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기를 형성해서 무기를 대신할 수도 있었고, 목어검에 이른 뒤였으니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상 달아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사실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지만, 목어검에 이른 이후의 첫 싸움이라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보고도 싶었고 이들에게 딴 생각을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직접 몸을 움직여 무공을 펼친 것뿐이었다. “윽. 으윽” 별다른 공격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일순간에 십 장 이내에 들어섰던 삼십여 명이 우수수 쓰러져서 나뒹굴고 있었다. 접근하던 나머지 고수들이 경악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이미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자약한 얼굴과 어디 한 곳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이, 이게..... 혹시 모두 죽은 것은 아니겠지요? 만일....” 장내의 상황에 사리발마도 너무 놀라서 당황한 목소리로 단리유아에게 묻고 있었다. 무공이 강하다고는 들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자신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움직였다가 거의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을 보니 너무 놀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하하. 모두 혈도만 제압당해 정신을 잃었을 뿐이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신을 차릴 것이니, 그리 걱정 마십시오.” “허! 아미타불. 사숙께 듣기는 했지만 시주의 무공이 이정도일 줄이야.” 탄성을 내쉬며 사리발마가 그제야 진정이 된 듯이 넋 놓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라문교의 고수들의 놀람에 비한다면 이런 사리발마의 놀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손쓴 것도 알지 못한 일순간에 허수아비처럼 널브러진 모습에 다들 경악하여 헛바람을 들이키며 제대로 말문을 잇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사, 사술이야. 사술. 어떻게....” 다들 넋이 빠져 중얼거리고 있을 때, 파란굴타와 수리살타 역시 너무 놀라서 아연실색한 얼굴로 눈을 부릅떠 장내만 거듭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만겁문에 고수들이 많다고 하지만, 이런 정도의 무공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그들도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들어서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 있었다. 만일 전력을 다한다면 자신들의 문파에서도 일순간에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공이나 고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상처도 없이 제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쓰러진 이들 모두 일류이상의 고수들인데도 허수아비마냥 눈을 뜨고도 멍하니 당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만일 단리유아가 살수를 펼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지 생각하니, 두 사람은 두려움에 사지가 떨려오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별 볼일 없게 생각되었는데, 이제는 단리유아와 시선을 마주쳐도 마음이 조마조마했고 얼굴의 수염이나 칼자국조차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진 완전히 무시하고 조롱하고 있었지만, 이젠 혹시라도 자신들의 무례에 대해서 따지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만 들어서 두 사람 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이젠 말로서 해결할 생각이 들었소? 당신들이 잃어버린 신보(神寶)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오. 어떤 영약이나 신병이라도 내게는 맹물이나 돌로 만든 것에 불과할 따름이라오.” 단리유아의 말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수리살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서 수군거리는 제자들을 향해 쓰러진 동료들을 옮기도록 명하고 나서 단리유아에게 공손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아량을 베풀어 제자들을 해치지 않은 것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고인을 몰라 뵙고 무례했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음, 이제라도 제가 대협의 고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하하, 고인은 무슨.... 그저 단리유아 라는 무명소졸일 뿐이라오.” 이전과는 딴판인 모습에 단리유아가 재미있다는 듯이 농담 삼아 대꾸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파란굴타와 수리살타가 서로 마주보며 단리유아라는 이름을 상기해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중원의 고수의 이름까지 알 수는 없었다. 곁의 수하를 시켜 외부의 소식을 잘 알고 있는 가리행전(加里行殿)의 사람에게 물어보도록 하고, 또 다른 수하를 불러 단리유아에 대해서 수뇌부에게도 알리도록 했다. “흠. 대협, 우선 자리를 옮기시지요. 더 이상 그 일과 상관이 없을 것으로 보이니, 저희가 아까의 무례를 사죄하는 의미로 귀빈전으로 모시겠습니다. 본문에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일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지요.” 더 없이 공손하게 대하는 수리살타의 태도에 사리발마가 아직도 화가 안 풀려서 보란 듯이 소리쳤다. “흥! 이제야 그런단 말이오? 여태 사람을 믿지 못해서....” “스님. 그만 진정하시지요. 별다른 불상사가 생긴 것도 아니고, 이제라도 연유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서운한 마음은 접으시고, 일단 이분들의 말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곁에서 단리유아가 사리발마를 말렸다. 자신 역시 이들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 역시 아쉬운 사정이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화해하는 것이 나았다. 나중에 상황이 또 변한다면 그때 따지고 화풀이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상황이 변해서 어수선할 때,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장내로 찾아왔다.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고 바라만겁문의 사람들이 모두가 숙연한 얼굴로 경배하고 있었다. 수리살타와 파란굴타도 급히 다가가 중앙의 노인에게 예를 표했다. “증과현인께 수리살타가 문안드립니다. 이곳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 어쩐 일로 이렇게 오셨는지요?” 수리살타의 물음에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꾸했다. “일이 어찌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마침 나란타사에서 지냈던 사람을 찾는다기에 이렇게 와보았다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되었나보구만.” 쓰러진 고수들을 옮기고 혈도를 눌러 깨우는 등 부산한 모습을 보며 노인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겨우 뼈에 가죽만 덧씌운 듯한 자그마한 체구와 한 올의 터럭도 없는 얼굴의 괴상한 생김새의 노인이었다. 수리살타가 난처한 얼굴로 그저 쓴웃음만 짓고 있을 때, 사리발마가 노인을 향해서 합장하며 인사했다. “소승 사리발마가 바라문의 위대한 스승이신 증과현인께 인사드립니다.” 잠시 사리발마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곧 노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깨달은 자의 제자에게 증과시리(增顆恃釐)가 답례하네. 그런데 찾아온 사람이 자네였던가?” “예. 그런데 상황이 우습게 되어서 이렇게 이상한 꼴이 되었습니다.” 볼멘 얼굴로 사리발마가 힐끗 파란굴타와 수리살타를 응시하며 대꾸했다. 사리발마와 증과시리가 서로 잘 아는 사이 같아서 두 사람이 더욱 당황하고 있을 때, 증과시리가 혀를 차며 그런 두 사람을 나무랐다. “쯔쯧. 어찌 그리 일을 처리하는 것인가? 다급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순리대로 일을 처리해야지. 까닥 잘못했다간 본문과 마하보리사와 큰 문제도 생길 수 있었어. 이 사람은 마하보리사에도 그 앞날을 기대하고 있는 인재인데 말이야.” 그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빌고, 이윽고 사리발마에게도 다시 사죄했다. 잠시 후, 다른 사람들은 내버려둔 채 증과시리와 사리발마가 반가운 마음에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현인께서는 삼년 전에 나란타사를 떠난 뒤로 그동안 쭉 고행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뵈니 이미 고행이 끝났나보군요.” 사리발마의 말에 너털거리며 웃다가 증과시리가 다시 물음을 되돌렸다. “허허, 고행이라니.... 그저 남들도 다하는 것인데. 그보다 자넨 평생을 나란타사에서 보낼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이렇게 떠나온 것인가?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나?” “제게 사조 되시는 용전존자 님의 당부로 떠나게 되었지요. 마침 저도 경전만을 파고드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참이라 이렇게 저분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아 참, 그리고 보니 미처 소개도 못 드렸군요.” 말을 잇던 사리발마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단리유아를 향해 말을 건넸다. “단리시주,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반가운 마음에 깜빡 정신이 없었군요. 이분은 제가 나란타사에서 머물 때 많은 가르침을 받은 분이십니다. 삼년 전에 현자(賢者)위에 오르셔서 바라만겁문으로 돌아갔다고는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만날지는 저도 몰라서....” 본래 증과시리는 바라만겁문에 속했지만, 한때는 나란타사에 머물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사리발마도 그런 학생 중의 한명으로서 증과시리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었는데, 삼년 전 현자의 위에 올라서 증과시리가 되돌아가버린 후로는 만날 수 없어서 많이 아쉬워하고 있었다. 나란타사를 떠났던 증과시리는 그동안 통과의식인 삼년의 고행을 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야 출관하여 정식으로 현자의 위에 오르게 되었다. 현자의 위치는 십대성자의 바로 아랫단계에 해당해서, 십대성자의 자리가 비었을 때 곧바로 그 지위를 계승했다. 지위에 있어서는 구분이 간다 해도 사실상의 영향력은 그에 못지않았고 일반적인 장로들보다도 한 단계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중원에서 온 단리유아가 삼가 증과현인께 인사드립니다.” 단리유아가 다가가 포권하며 예를 표하자, 잠시 단리유아를 살피고 있던 증과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한 뼘 마음의 밭을 가는 늙은이인 증과시리라 하오. 이렇게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을 보니 나도 반갑구려.” “하하하, 무슨 말씀을.... 저 같은 무부가 어찌 현인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단리유아가 겸손하게 되물을 때, 증과시리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아니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며 겉으로 드러난 것만 쫓지, 과연 자기 내면의 무한한 텃밭에서 진리의 열매를 가꾸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그대 역시 그런 길에 들어섰으니 어찌 내가 마땅히 동반으로서 축하하고 이 만남을 기꺼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 “과분할 따름이랍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니, 앞으로 자주 뵈오며 제게도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잠시간의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 후에 일단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사람들은 장내를 벗어나 귀빈전으로 향했다. 한편, 은잠한 채 장내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한 사람들도 은밀히 자리를 떠나 다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 일어난 사고로 인해서 바라만겁문 내에는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었는데, 단리유아를 보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변수라 생각되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다들 각자가 속한 계파의 수장들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암중으로는 분주한 상황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전개(展開) 전개(展開) 1 그런 부산한 움직임 속에 바라만겁문의 한 곳 심처에서도 보고를 받고 있었다. 사방이 막힌 오 장여의 밀실에는 사면의 벽을 따라 검은색의 천이 드리워져 있었고, 귀면이 새겨진 붉은색의 등이 각각 구석진 곳에 매달려 희미하게 불그스름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검은 색의 휘장이 쳐진 상단 앞에는 작은 향로가 놓인 채 회색의 연기를 피어 올리고 있어서 실내의 음울하고 사이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실내의 중앙에서 은영포를 입은 한 복면인이 상단을 향해 허리를 수그린 채로 이제까지 일어난 일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러다 단리유아가 찾아왔다는 말에 이르게 되었을 때, 휘장 뒤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고! 단리유아라니? 그게 정말이냐?” “예. 그 스스로 그렇게 대답했고, 과거 소적교(素赤橋)의 혈적사존(血赤死尊)이 보내준 그림과도 일치했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며 복면인이 대답했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휘장사이로 다시 물음이 새어나왔다. “다시 말해봐라! 정말 그놈이 틀림없다는 말이냐?” “속하가 보기엔 그놈이 확실합니다. 그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로서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은 없을 테니.” “말도 안 돼! 작년에 주목랑마봉 일대에서 본교의 사람들과 공멸(共滅)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버젓이 살아나서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이냐?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동안 전혀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다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의혹에 가득 찬 날카롭게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휘장 사이로 새어나왔다. 이에 복면인이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아무래도 서장의 척발척천이 뭔가 농간을 부린 것 같습니다. 그때 고수들의 수와 수준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단리유아가 대단하다 해도 한명도 살아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으드득, 그놈이 정말로.... 수색에 나섰던 사람들도 따돌리더니, 정말 본교를 배반할 생각이었던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올 때, 복면인이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오늘 보니 단리유아 놈의 무공이 전해듣던 것보다 훨씬 강한 것이 혹시나 현경(玄境)에 이른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 소리에 더더욱 놀라서 곧바로 휘장 뒤의 인물이 소리치고 있었다. “뭐? 현경이라니? 넌 현경이 무슨 애들 장난하듯 쉽게 오를 수 있는 경지라 생각한단 말이냐? 아무리 그놈이 대단하다고 해도 설마 벌써....” “속하가 보니 일수에 십장 내의 고수들이 순식간에 쓰러졌습니다. 전혀 반항할 생각도 못한 듯이 보였고, 제대로 그놈의 공격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 같았습니다.” 복면인의 말에 너무 놀라고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 휘장 뒤에서 스스로를 확신시키듯이 단정하는 어조로 말이 터져 나왔다. “흥! 그래도 본좌는 믿을 수 없다. 본교의 태상교주께서도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인데, 어떻게 그놈이 현경에 이를 수 있단 말이냐? 아마 잘해야 수어검이나 목어검 정도에 이르렀겠지.” “설혹 그렇다 해도, 지금으로선 그 정도만이라도 그놈을 상대할 자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빨리 놈이 강해지는 것을 볼 때, 아무래도 머지않아서....” 걱정 어린 어조로 복면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단리유아의 진전은 상리를 벗어날 정도로 빠른 상황이어서 말하는 복면인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기껏 화경에 이르기도 힘들었고, 그나마 그 경지에 이른 것도 영약이나 선배들의 많은 도움이 있어서야 겨우 가능했었으니 생각할수록 믿을 수 없었고 기가 찰뿐이었다. “허허! 그놈이 중원총교주가 반드시 죽여야 할 자라고 거듭 얘기했어도 믿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진전이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태상교주도 무리해서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돌파하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졌는데. 본교가 한창 어지러운 상황에서 그놈까지 다시 나타나다니, 정말 갈수록 태산이군.” 휘장 뒤의 인물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절로 탄식을 토해내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었다. “태상교주께서 이번의 주화입마를 극복하면 현경에 다시 도전해볼 수 있을 테니, 그때는 그놈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억지로 스스로를 위안하듯이 복면인이 응답했지만, 그 역시 현경은 단순히 내공이나 수련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목소리에 그다지 힘이 없었다. 서로의 생각에 잠겨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 흐르다가, 잠시 후 휘장 뒤의 인물이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보다 네 생각에는 앞으로 어찌 했으면 좋겠느냐? 현재로선 그놈을 어찌할 수도 없고, 그놈이 혹시라도 이번 일을 파고들면 우리에 대해서 알아낼 가능성이 큰데.” “속하의 생각으론 한동안 잠적하거나, 아니면 이곳을 정리하고 벗어나는 길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후자의 방법이 나을 것 같습니다.” 복면인이 잠시 생각해보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납득할 수 없는지 곧바로 휘장 뒤에서 물음이 이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여태까지 공들인 시간과 노력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그놈이 두려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아나자고? “물론 잠시 잠적한 채로 몇몇 바라만겁문의 장로들을 선동해서 그놈을 공격하게끔 할 수도 있지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그놈이 이곳을 찾아온 것도 본교에 대한 일일 테니, 틀림없이 이번 일에 의문을 느끼고 파고들려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휘장 뒤에서 내키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복면인이 다시 설득조로 대꾸했다. 그 역시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상황에서 여태까지의 노력이 헛되이 되는 것 같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숨죽이고 기다리다가는 단리유아의 시야에 걸릴 우려가 더 컸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미 소기의 성과는 올렸다고 볼 수 있으니, 본교에서도 그리 따지고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단리유아가 살아있다는 사실과 척발척천의 배반을 알린다면, 오히려 포상이 뒤따르거나 서열이 오를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에 휘장 뒤의 인물이 고심을 거듭하는지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한참 뒤에야 겨우 결정을 했는지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겠지. 으드득, 정말 그놈이 살아나서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이 모든 것이 척발척천 그 개잡종 때문이지. 조금만 더 시일이 흐른다면 본좌가 성자(聖者)위에 오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빌어먹을 이렇게 해야만 하다니....” 오년 전 가까스로 현자(賢者)중의 한명을 암살하고 여태까지 화신해오고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니 결정을 내렸음에도 화가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새로운 풍습을 알아야했고 말도 완전하게 익혀야 했다. 현자를 찾아내 습관과 언행을 파악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암살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겨우 바라만겁문의 내부인물을 협박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일이 흘러 이제야 기반이 닦이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길 참이었으니, 생각할수록 일이 이렇게 되게 한 척발척천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존(魔尊)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지금 당장 탈출할까요?” 한동안 이어진 시끄러운 욕설이 끝났을 때, 복면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문했다. 욕설을 내뱉어서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았는지, 휘장 뒤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시 기다려보기로 하지. 상황을 지켜보다가 빠져나가도 늦지는 않을 것이니. 일단은 밖에 있는 수하들에게 알려 모든 흔적을 지우고 제삼거점으로 옮기도록 해라.” “그렇게 하다가는 저희의 종적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변장하고 당장에 빠져나가시지요. 혹시라도 수하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잡힌다면, 그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못내 성자(聖者)위에 대한 욕심으로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복면인이 다시 한 번 청했다. 복면인이 서열이 낮다고 하지만, 휘장 뒤의 인물과는 본래 별개의 조직에서 지원하는 입장으로 끼어든 상황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수하들을 위해서도 나았다. 잘못 되었다간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욕심으로 시일을 끄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면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휘장 뒤에서 역정에 가득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아니라니까. 단리유아 그놈이 이번 사건을 파고든다고 해도 쉽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며칠 더 기다려보기로 하지.” “그렇지만....” “넌 그만 나가서 수하들에게 어서 명령이나 전하도록 해라.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하고.” 다그치는 명령에 마지못해 복면인이 물러났다. 지금으로선 그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더 따질 수 없었다. 휘장 뒤의 인물은 암도를 열고 나가는 복면인을 뒤로하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로잡힌 밀영(密影)도 없애야할 것 같은데.... 휴, 정말이지 갑자기 나타난 그놈 때문에 완전히 엉망이 될 정도 일이 꼬여버렸군.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그동안에도 틈만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기랄, 그렇다고 그놈이 개입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명줄이 붙어 있는 것을 그냥 나둘 수도 없고. 아무리 혼수상태라 하지만 혹시 또 모르니....’ 이때, 암도를 나가던 복면인 역시 혼자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흐흐흐. 어차피 목적했던 것은 이미 이룬 상황이니, 때를 보아서 저 늙은이도 없애버리고 그대로 탈출하는 것이 낫겠군. 나중에 신교에서 추궁해도 핑계거리는 많으니 말이야. 저 늙은이가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그래도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뭐, 다 지놈의 팔자겠지. 그나저나 궁주에게 유마십이해(幽魔十二解)를 따로 필사해 보냈는데, 제대로 손에 들어갔는지 모르겠군.’ 각자의 목적대로 두 사람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단리유아는 증과시리를 비롯한 사람들과 귀빈전에 있었다. 탁자가 없는 대신 양탄자가 깔린 넓은 거실에 단리유아와 사리발마, 증과시리와 수리살타가 둘러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단리유아가 중원의 십대고수의 한명임을 알고, 다시 한 번 지난 일에 대해 수리살타가 사죄했다. “이미 지난 일이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 문제는 이대로 접기로 합시다. 그보다 이젠 저희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해주십시오. 원, 뭣도 모르고 공격당하고 죄인 취급당하니, 난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의아한 마음이 더 컸소.” 단리유아가 손을 흔들어 수리살타의 사죄하는 절을 막으며 말을 건넸다. 흔적도 없이 자신의 몸을 떠받드는 부드러운 경력에, 잠시 저항하던 수리살타가 탄복한 얼굴로 감탄사를 던지다가 이어서 어찌된 이유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로 대협을 공격하게 되었는지 말씀드리지요. 먼저 보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순서이겠지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 후, 수리살타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으니, 말을 거듭할수록 목소리가 높아가고 흥분하여 얼굴 역시 상기되고 있었다. “보름 전 그믐일 때, 세 사람이 비쉬누 신께 봉헌된 탑에 침입했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제일 경비가 삼엄한 곳에 드는 곳인데도, 저희가 이상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들이 지하의 비전(秘殿)에 들렸다가 나온 뒤였습니다. 단 세 명뿐이었지만, 다들 절정 이상의 고수였고 살법과 은신술에 능한 자들이었습니다. 한동안 탑을 지키는 고수들과 접전이 벌어졌지만, 결국에는 한명은 놓치고 말았지요.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피가 낭자하고 곳곳이 파괴된 엉망이 된 탑의 모습이었지요. 휴, 정말이지 비쉬누 신의 노여움을 어찌 피해야할지 생각하면....” 잃어버린 신보도 물론 중요했지만, 신에게 봉헌된 탑의 신상이나 부조 등이 박살나고 여기 저기 피가 튀어서 난장판이 되어버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수리살타로서는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으로 신의 응보가 따를 것이라며 수리살타가 침입자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한쪽의 사리발마가 물음을 던졌다. “달아난 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무리 그자가 고수였다 해도 이 넓은 바라만겁문 내에서 그자를 추적할만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사리발마의 물음에 난감한 얼굴로 수리살타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마지못한 얼굴로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게 저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인데, 본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이 마치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요. 아무리 은신에 능한 자라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쨌든 그때 이후로 본문내 뿐만아니라 도시 전체까지 뒤집어엎다시피 하며 수색을 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어서, 저희들로서는 일단 이방인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잡아서 심문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수리살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단리유아가 말문을 열었다. “흠. 그런데 도대체 어떤 물건을 잃어버렸기에 그런 것인지요?” 단리유아의 물음에 수리살타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증과시리를 쳐다보며 어찌할지 눈으로 묻고 있었다. 증과시리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내 단리대협을 믿고 이 이야기를 꺼내니 다른 곳에서는 절대 발설하지 말아주시오.” “예, 저도 그럴 생각이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이번 일을 듣고 저도 약간 짐작되는 바가 있지만, 일단 더 들어보고 나서 제가 다시 이야기하지요. 제가 찾아온 일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니.” 잠시 의아한 얼굴로 단리유아를 응시하던 증과시리가, 그 얘기는 이따가 단리유아에게 다시 물어보리라 생각하고,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흠, 본시 천축의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소. 처음에는 신이나 악마나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오. 그런데 신이 악마보다는 힘이 약해서 신들에게 죽음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던 어느 날 신들이 비쉬누 신에게 찾아가 악마를 이길 방도를 간구했소. 신들의 말에 비쉬누 신께서 말하기를, 우유의 바다를 휘젓다보면 영생(永生)의 물인 감로수(甘露水)가 나올 것이라는 것이었소. 그렇지만, 우유의 바다가 너무 넓었을 뿐 아니라 저을 막대도 쉽게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 필요했소. 그래서 신들과 악마들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광대한 우유의 바다를 휘저을 수 있었소.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우유의 바다를 저어 여러 가지 보석이나 신들, 요정, 심지어 독까지 나오고, 마지막으로 감로수도 나오게 되었소.“ 난데없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에 단리유아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고개를 돌려 사리발마를 바라보니 그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재미있게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궁금한 표정인 단리유아를 힐끗 응시하다가 증과시리가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본사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그 신화 속에 나오는 감로수요. 물론 진짜 감로수는 아니지만, 수백 년에 겨우 한 방울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영약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소. 정식 명칭은 감로신수(甘露神水)인데, 천지간의 가장 신령스런 기운이 모인 것이라 어떠한 상처도 완치시킬 수 있다고 알려진 전설상의 영약이라오. 그때 잃어버린 것이 그것만이 아니었지만, 본문에 있어서는 그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오. 특히 수백 년에 한번 되돌아오는 퇴마(退魔)의 의식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이 필요하오. 세상의 모든 마기(魔氣)를 정화하고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에 바라문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본문으로 모이게 되어 있소.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본문의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로신수를 되찾아야만 하는 처지라오.“ 그제야 납득한 얼굴로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자신 역시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다급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다른 물건도 잃어버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제야 저도 연유를 알고 귀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군요. 정말 어떤 자들인지 몰라도 이런 일을 벌리다니, 귀문으로서는 보통 근심이 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잃어버린 물건이 더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반대쪽의 수리살타가 대신 입을 열어서 대답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지요. 본문의 비전에서 사라진 것이 그 외에도 몇 가지 있었지만, 다른 것은 그래도 문제가 크지 않습니다. 보물이나 신병은 어차피 신외지물이고 대신 다른 것을 구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래전 멸망한 유마밀전(幽魔密殿)의 유마십이해까지 사라진 것이 문제입니다.” “유마십이해라구요! 그 사악한 것을....?” 곧바로 수리살타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악한 사리발마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유마밀전을 멸망시킨 것이 마하보리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비사법문(毘沙法門)이었으니, 사리발마로서는 더욱 놀라고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의 고서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유마밀전의 법술은 너무도 끔찍한 것이라 들었으니, 사리발마에게 있어서는 감로신수보다 이 일이 더 크고 다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사리발마처럼 단리유아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사악한 자가 이 유마십이해를 손에 넣는다면 강호(江湖)에 일대재앙이 밀어닥칠 것이다. 그런 일이 훤히 보이는 듯해서 단리유아는 아찔한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흑찰미사(黑刹彌寺)의 천단금서(天丹禁書) 역시 무섭고 끔찍한 술법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의 원전(原典)이라 할 수 있는 유마십이해는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전개(展開) 전개(展開) 2 유마십이해를 도난당했다는 말에 단리유아와 사리발마가 놀라 심각한 표정일 때, 수리살타가 짐짓 안심하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구결이 완전하지는 않아서 그 자체로는 큰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후반부의 삼할 이상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하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사리발마가 큰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마하보리사의 전신이 비사법문이었으니 사리발마로서는 도저히 그대로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떻게 그렇게 사악한 무공을 여태까지 보관하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과거 비사법문이 유마밀문을 멸문시키고 그들의 무공도 모두 불태웠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천축제일의 정파라는 바라만겁문이 그런 무공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니요? 그리고 위험하지 않다니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과거 천축의 상고 삼대문파가 존재했을 때만 해도 술법의 전성시기였지만, 비사법문이 등장하고 나서는 천축 내에서 대부분의 사악한 술법이 사라지게 되었다. 비사법문은 유마밀문을 멸망시킨 후에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방문좌도의 세력들과 싸움을 계속했었다. 그 결과로 천축내의 술법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일부가 흘러들어간 서장이나 남만지역 등 다른 지역에서는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비사법문이 급속도로 세력이 약화되고 마하보리사와 대뢰음사로 분리된 것도 그런 세력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다. “그건....” 사리발마의 추궁에 수리살타가 당혹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로서도 없애버리자는 의견도 있어왔지만, 혹시라도 그런 술법을 익힌 세력이나 사람이 출현했을 때를 대비해서 남겨둔 것이었다. 그동안에도 십대성자 전원의 뜻이 모이지 않는 한 유마십이해가 보관된 금궤를 열 수도 없어서, 실제로도 유마십이해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었다. “자네 말대로 마땅히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우리로서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네. 사실 장로 중에서도 그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희미해져갔던 일이지.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우리로서도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라네. 본문에서도 회수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 자네가 이해해 주게나. 결코 나쁜 의도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 수리살타의 난처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증과시리가 대신 나서서 사리발마를 달랬다. 이에 조금 진정이 된 사리발마였지만, 그래도 납득할 수 없는지 이내 합장하며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추궁했다. “아미타불! 이 일은 소승으로서도 그대로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루 빨리 본사에도 알려서 대책을 마련하게 할 생각입니다. 게다가 그런 중대한 일을 아직까지도 본사에도 알리지 않고 있다니,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런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서로 협조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며칠 내로 마하보리사에도 전갈이 갈 것이네. 우리도 이미 본문의 경계망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미 사건이 일어난 지 보름이 지났으니 바라만겁문 내에서도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와랍납서가 작은 도시도 아니고, 수십만에 이르는 천축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번성한 곳이었으니 완전하게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실 수색은 하고 있었지만, 내부적인 문제도 있어서 지지부진했었고 대부분은 거의 포기한 상태로 희생양이나 찾고 있는 형편이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단리유아는 생각하고 있었다. 일부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 자체로도 위험한 것이 유마십이해였다. 만일 술법에 조예가 깊은 술사가 있어서 연구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휴! 전설에 전하기를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소환술(召喚術)이 무서웠다고 하던데. 지옥의 악귀를 소환하는 것도 그렇지만, 만일 이미 오래전에 죽은 고수의 영혼을 불러들인다면.... 게다가 혹시라도 구시술(驅屍術)과 결합하게 된다면....’ 생각할수록 이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감로신수야 바라만겁문에게는 큰일이었지만, 그 영향이 단지 일개 개인에게만 미치니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마십이해의 피해는 강호 전체에 미치고 무한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세력이 의도적으로 훔친 것이라면 더더욱.... ‘이리되면 나도 본격적으로 천단금서(天丹禁書)를 연구해서 앞날을 대비해야 하겠군. 그동안은 무공에만 전념하느라 시간도 없었고, 너무 끔찍한데다가 수련하기도 어려웠으니.... 하지만, 마야의 도움으로 술법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고, 이젠 현경에 이르기까지는 무공의 외적인 수련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는 상황이니....’ 정말로 마야가 자신에게 베푼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큼을 단리유아는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마음의 안정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시각도, 이와 같은 일에 보탬이 되라고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을 전한 것도. 마야와의 만남 이후의 자신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휴! 그나마 다행한 일이군. 마하보리사를 찾아가 도움을 얻어내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정말.... 그런 술법과의 싸움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가장 풍부하게 남아있는 곳이니 틀림없이 크게 도움이 될 테지.’ 단리유아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증과시리의 말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사리발마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그런 물건이 보관된 곳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고 훔쳐갈 수 있었을까요? 그런 물건을 위해서 몇 겹의 보호가 펼쳐져있었을 텐데? 아무리 그들이 고수였고, 그런 일에 뛰어나다고 해도....” 의아함과 의심이 뒤섞인 물음에 수리살타와 증과시리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도 알 수 없는데다가 문내의 치부를 드러내야만 했으니 말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증과시리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게 이상한 일이네. 중원인이 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신보(神寶)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았는지, 경계하던 고수들을 어떻게 속이고 들어갈 수 있었는지, 첩첩한 기관은 또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지, 최후로 펼쳐진 술법은 어떻게 무력화시킬 수 있었는지, 아니 그보다는 과연 그렇게 많은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이라네.” 증과시리의 말이 끝나자, 수리살타가 얼굴을 찌푸리며 덧붙여서 보충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내부인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암중으로 감찰에 들어갔었지요. 하지만, 딱히 의심을 받을만한 행동을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현재 본문 내의 사정으로 안팎이 뒤숭숭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딱 띄는 사람은 없으니 문제지요.” “사실 내부적으로 감찰을 했다고 하지만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네. 현재 본문에서는 차기 문주의 선출을 둘러싸고 내홍이 심각한 상황이라서 서로 자신들만을 차별한다고 주장하고 방해해서 말이야. 더욱이 장로들까지 거기에 휩쓸려서 중심을 못 잡고 있으니....” 증과시리의 말처럼 현재 바라만겁문은 다음대의 문주 위를 누가 맡을지를 두고 치열한 암중모색과 암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동안 아난대성자가 문주 위를 세 번에 걸쳐 내리 맡아오고 있었지만, 이미 나이도 나이려니와 다른 파벌에서도 더 이상 양보하지 않을 것이 예상되어서 본인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한 바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열 명의 성자가 돌아가며 맡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삼대신의 세력이 강해진 최근에 이르러서는 거의 그런 경우가 없었다. 대체로 성자들 간의 내부조율을 통해서 한 명이 선출되는 방식으로 주로 삼대신의 계열 중에서 한명이 선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바라흐마 계열이 두 명이었고, 비쉬누와 시바 계열이 각기 세 명씩, 인드라와 아그니 계열이 한명씩, 총 열 명의 성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소외되었던 인드라와 아그니 신을 믿는 계파가 이번에 자신들 쪽에서 문주를 맡지 못한다면 분파까지도 생각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서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세력이 적어서 번번이 물러서야 했던 브라흐마 계열도 불만이 컸고, 아난대성자가 비쉬누 계열이니 이번에는 자신들에게서 문주가 나올 것으로 보았던 시바 계열에서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단리유아로서는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심각함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이번 일은 단지 중원인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사라진 중원인도, 아무리 고수일지라도, 내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달아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최소한 장로, 아니 현자나 성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그런 기밀을 알아낼 수도 없을 것이고, 중원인을 숨겨줄 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였지만,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이상 자신으로서도 더는 알아낼 수 없었다. 한동안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잠시 후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이야기했다. “제가 생각해보니, 이 일은 아무래도 제가 찾아온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군요. 물론 저 역시도 내부인물이 도왔다고 생각하지만, 이 먼 천축까지 와서 그런 일을 하려면 오랜 시간의 준비가 필요하고 또 단순히 몇 사람만으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아무래도 큰 세력이 개입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테니까요.” 단리유아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증과시리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먼저 물음을 던졌다. “우리 역시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과연 중원에서 이 먼 곳까지 와서 그런 일을 저지를 세력이 있겠소? 더구나 내가 알기로는 중원은 한창 정사간의 싸움으로 시끄러운 상태라는데 말이오.” “맞습니다. 겉으로의 모습은 그러하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다들 싸움판에 끼어들어 현재의 중원은 혼란의 도가니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보다 깊이 파고들면 세상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력이 음모를 꾸며서 그런 것입니다.” 단리유아의 설명에 모두가 놀라서 쳐다보고 있었다. 사리발마 역시 자세한 사정은 들은 적이 없던 터라 단리유아의 말에 놀란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어떤 세력이 음모를 꾸며서 일어난 일이란 말입니까?” 수리살타가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중원의 일이야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고 있었다 해도, 전혀 뜻밖의 일이고 처음 듣는 소리였으니 놀라면서도 의혹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놀람에 기름을 붓듯이 단리유아가 말을 이어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예, 제가 이곳에 찾아온 것도 그 세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세력의 힘이 미증유에 달할 정도로 거대해서 중원뿐만 아니라 세외 각 지역의 분란도 대부분 그들이 야기시킨 것이니까요.” “세외의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리발마가 끼어들어 성급히 되물었다. 다른 두 사람도 묻지는 않고 있었지만, 다들 단리유아를 응시하며 대답을 재촉하는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현재 세외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이나 사정을 여러분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사파의 세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그것도 얼마 안가 전혀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다시 그 세력에 의해서 흡수되어 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일 때, 단리유아가 계속 이어서 천지신교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했다. 그 세력적인 구성과 고수들의 수에 대해서, 그 목적에 대해서도. 설명이 이어질수록 모두가 점점 더 놀라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맥이 빠져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런 사실을 여태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런 거대한 세력이 천하를 노리는 상황에서 어찌할까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기운이 빠졌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런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혼자서 맞서 싸우고 있는 단리유아에 대해서도 감탄하게 되었다. 자신들은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맞서 싸울 의욕이 사그라질 정도로 거대한 집단에 생사를 도외시하고 맞서 싸우니 더욱 그러했다. “제가 마하보리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비록 충분한 도움은 얻어내지 못했지만, 대뢰음사를 재건하고 서장지역의 천지신교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동참하겠다는 약속은 얻어냈지요. 귀문을 찾아온 것도 그 일에 대해서 설명하고 도움을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단리유아가 말을 맺으니, 다들 한동안은 말이 없이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잠시 후 증과시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허허, 그런 일이.... 정말로 큰일이구려. 그들의 행동을 볼 때 보통 야욕이 큰 것 같지 않은데. 더구나 세외의 일을 볼 때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천하를 완전히 일통할 생각인 것 같은데....” 다들 증과시리의 말처럼 천지신교에 대한 걱정으로 얼굴이 어두웠다. 하나하나 세력을 키우고 음모를 일으켜 상잔하게 만든 후에 흡수하고 있었으니, 자신들이 보기에도 머지않아 천지신교가 천하를 일통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번에 벌어진 일도 그들과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의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벌일만한 세력은 그들 밖에 없다고 생각되니 말입니다. 물론 내부적인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직접적으로 말하기 거북해서 단리유아가 말끝을 흐릴 때, 그래도 증과시리가 믿고 싶지 않은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건.... 휴!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도 이제는 본사의 수뇌부 중의 누군가가 그들과 연계하지 않고는 이번 일이 벌어지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하지 않을 수 없구려. 허허, 정말로 어찌된 일인지.... 도대체 어떻게 하여 본문의 인물 중에 그런 자가 나왔단 말인가?” 탄식하며 반문해보지만,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증과시리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성자나 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중에 누군가가 깊이 개입한 것 같았는데,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그랬는지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새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현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수양을 필요로 하고 최상의 바라문 계급의 혈통을 지닌 자여야만이 가능했다. 거기에 더해서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생각할수록 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야욕에 물들어 타락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탄스럽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차기문주를 노리는 자들 중에서 누군가 그런 일을 꾸민 것 같았다. 물론 어떤 대가를 받았을 것이고,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뭔가 이득이 있을 것이다. 한동안 누가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차지할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각 계파마다 약간씩의 이유와 부가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서 의혹만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단리대협. 아무래도 이 일은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 같구려. 본래는 대협의 위명을 듣고서 이번 일에 대해서 자문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아난대성자께 말씀드려서 대협과의 만남을 한 번 주선해 보아야할 것 같소. 그때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이번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내가 힘써 볼 테니 본격적으로 조사해주었으면 하오.” 증과시리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의향을 묻자, 잠시 머뭇하던 단리유아가 이윽고 되물었다. “이방인인 제가 파고든다면 많은 반대가 뒤따를 것인데 괜찮겠습니까? 더구나 다들 이번 일이 중원인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라 알고 있어서 더욱 그러할 텐데.” “흠. 더 이상 말할 것 없소이다. 만일 대협의 설명을 듣고도 이번 일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바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이니. 어차피 본문 내의 고수로서는 중립을 지켜서 조사하기도 힘든 상황이라서 약간의 반발은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어떻소? 한 번 맡아서 이번 일을 조사해볼 생각은 있소?” 비록 현재 아난대성자 계열의 장로들이 실무를 맡아오고 있었지만, 다른 계열의 장로들의 수가 훨씬 많아서 한계가 있었다. 증과시리나 수리살타 역시 아난대성자 계열로서 이번 일을 조사하고 있었지만 힘이 부쳤고 마땅한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단리유아를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여러 가지 속사정을 알게 되었고 이제야 비로소 마땅한 방책이 눈에 보였다. 증과시리의 거듭된 요청에 단리유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예. 저로서도 이번 일을 파고들어서 확실하게 무슨 목적인지 알고 싶고, 그들의 음모도 깨트리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제가 맡아서 조사해보았으면 합니다.” 단리유아 역시 내심으로는 이 일을 파헤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니, 그들이 허락만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알아내리라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직접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틀림없이 현자, 아니 성자들 중에서 최소한 한두 명은 천지신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물론 그보다 많을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천지신교의 야욕을 분쇄해야하는 자신의 입장으로서는 이번 일을 확실히 매듭짓고 거기에 더해 이들의 도움을 끌어낼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전개(展開) 전개(展開) 3 증과시리와 수리살타가 돌아가고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단리유아가 사리발마에게 물음을 던졌다. “스님이 생각하기에는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리라고 보십니까? 증과현인의 말대로 제가 조사하게 된다면, 과연 바라만겁문의 사람들이 제대로 협조할까요?” 단리유아의 물음에 사리발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음. 소승의 생각으로는 아마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라만겁문은 계파가 다양한데, 같은 문하라고 해도 실제로는 독립적인 면이 강해서 쉽게 접근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또한 바라문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배타적인 문파이지요. 천축 제일의 세력과 전통을 지닌 문파이기는 하지만, 그런 면 때문에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한때는 자멸에 이를 정도에까지 이른 적도 있습니다. 물론 또 한편으로는 그런 면 때문에 상고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문파가 된 것이기도 하지요.” 바라만겁문의 특성을 설명하는 사리발마의 말처럼 단리유아도 이번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드러내놓고 방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협조적으로 나서는 곳도 없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서 앞으로 어찌할지 생각해보다가 다시 사리발마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스님의 생각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혹시 누구 의심 가는 사람이라도 없습니까?” “아미타불. 소승으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 이런 걸 물으시는지요? 저는 책만 읽었지 경험이라곤 전무한 어린 승려일 뿐인데?” 어떨떨한 표정으로 사리발마가 합장하며 되물었다. 그 모습에 단리유아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래도 저보다는 천축의 사정에 대해서 더 잘 알 것이 아닙니까? 또한 한 사람이라도 더 생각이 모인다면 뭔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서 궁리하는 것 보다는 말입니다. 설마 절 도와주지 않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아미타불. 물론 도와드려야지요. 제 힘 닿는 데까지는 말입니다. 음, 그래도 그리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인데....” 자신 없는 표정으로 사리발마가 말끝을 흐릴 때, 곧바로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스님. 저 혼자서 조사한다면 분명 뭔가 빠뜨리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스님이 옆에서 객관적으로 사건을 본다면 제가 모르던 어떤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단리유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건을 살필 수 있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지, 무공이 강하거나 직접 뛰어들어 조사할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은 천지신교가 개입했다고 단정하고 있어서 무의식중에도 그런 방향으로만 치우쳐서 생각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런데 사리발마는 바라만겁문과도 그리 상관없고 세상 물정도 거의 모르니, 오히려 드러나는 사실만 가지고 객관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책만을 읽어서 곧이곧대로 외면적인 면에만 매달릴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런 점은 자신이 감안해서 생각하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것도 그렇군요. 흠, 그럼 제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리발마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잠시 후 말문을 열었을 때, 단리유아가 끼어들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물건을 도난당했고, 중원인이 범인이라는....” 곧바로 사리발마가 단리유아의 말을 가로막으며, 아까의 자신 없어하던 표정이 거짓이라는 듯이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대충 아는 것이지 하나하나 파고들어서 세분하지 않은 생각들이지요. 이런 난제를 해결할 때는 될수록 잘게 쪼개서 사건들을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일단 하나하나 세분하고 생각을 정리한 후에 조합하게 된다면 분명히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단리유아도 그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이 그보다는 경험이 훨씬 많고, 그와 비교해서도 읽었던 책의 양도 그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년간 나란타사에서 교육을 받은 사리발마와 같은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생각은 모자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의 말씀이 맞군요. 역시 제가 물어보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저 혼자였다면 대충 짐작해서 이리저리 헤매게 되었을 텐데.” 칭찬하며 단리유아가 빤히 바라보자, 사리발마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음음. 과찬이시군요. 소승의 짧은 생각일 뿐으로 저의 의견도 다 맞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시주께서도 그런 점을 생각하시고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이 모이니 분명 일이 잘 풀릴 것 같군요.” 사리발마의 모습이 마치 귀여운 동생을 보는 듯해서 단리유아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도 앳되고 티 없이 순진한 표정이었으니, 아무리 승려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에게도 이런 형제가 있어서 서로 우애가 깊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씁쓸한 표정이 되기도 했다. ‘내게도 형제자매가 있지만, 이렇게 다정하게 마주하며 얘기해본 적은 없었지. 언제나....’ 남궁세가의 사람들과의 지난날을 회상하면 좋지 못한 일들뿐이어서 돌이킬수록 마음이 아파왔다. 이미 화해하기로 하고 지난 과거를 떨칠 결심을 하였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은 편치 않았다. 그만큼 과거의 일들이 가슴 아프고 자신은 받지 못했던 혈육의 정에 대한 그리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지만.... 사람간의 인연이란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그런 인연 속에서 마주치고 겪는 삶 또한 복잡하고 번뇌의 연속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야의 뜻이나 용전존자의 가르침대로 이미 생각을 바꾸어 삶을 바라보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것은 아직도 자신이 마음을 가꾸어나가고 다스리는 길에 있어서는 걸음마의 수준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리발마도 단리유아의 쓸쓸한 표정을 보고 한동안은 말이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해준 적이 없었던 터라 잘 알 수 없었지만 단리유아가 천애(天涯)에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편으론 위로해주고 싶기도 했지만, 승려의 신분으로서 세속의 정에 이끌리는 것도 옳지 않음을 잘 알고 있어서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는 없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문득 단리유아가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는 것을 알고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이내 표정을 바꾸어 일부러 유쾌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하하하. 제가 잠시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이야기가 끊어졌군요. 죄송합니다, 스님. 어서 아까 하시던 말씀을 이어서 해주십시오.” 단리유아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다가 사리발마가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전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감로신수와 유마십이해, 그 외의 보물들이 도난당했다는 것입니다. 신상이 파괴되기도 했고 지키던 고수들도 죽거나 다쳤고, 그 외에 한명의 중원인은 잡았지만 중태에 빠져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또한 달아난 한명의 중원인으로 인해서 내부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이자, 사리발마가 이내 말을 이어서 자신이 추론한 바를 설명했다. “그런 사실로부터 몇 가지를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감로신수나 유마십이해인가? 둘째, 이 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 사람이나 계파는 어디인가? 셋째, 달아난 중원인이 아직도 이곳에 있을까? 넷째, 살아남은 중원인은 과연 완전히 입을 벌릴 수도 없는 상태인가? 다섯째, 과연 내부에서 기밀을 빼내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기타 여러 가지도 있을 것이지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논리 정연한 사리발마의 분석이 끝났을 때, 곧바로 단리유아가 질문을 던졌다. “스님의 생각으로는 도난당한 물건의 목적이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감로신수를 탈취하려다가 다른 물건들도 훔쳐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해서 유마십이해가 본래의 목적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것은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의 것과도 상관이 있는데, 만일 감로신수가 목적이었다면 이후의 문주의 선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음. 문주의 선출이라?” 바라만겁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단리유아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그 자체의 목적이리라고 단정 짓고 있었으니 사리발마의 말은 약간 이외였다. “감로신수 자체가 상처치료에 어떤 영약보다도 효과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바라만겁문에 있어서는 특히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년 이내에 퇴마의식(退魔儀式)이 있을 것인데, 그때까지 만일 감로신수가 없다면 바라만겁문은 존립자체의 문제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내분에 휩싸일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공개적으로 정확히 어떤 물건이 도난당했다고는 발설하지 않았겠지만, 여하튼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감로신수입니다.” 이 문제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복잡했다. 퇴마의식 전까지 감로신수를 찾지 못한다면 현재의 계파 중에서 몇 곳은 분파할 가능성이 컸다. 또한 그 사실이 공개된다면 성자들 중의 몇 명도 책임을 지고 얼마이내에 물러나야 할 것이다. 아난대성자 역시 곧바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겠지만, 만일 이번 사건을 해결하고 공개적으로 시인한다면 상황이 다르게 흐를 수도 있었다. 다른 곳으로 초점을 돌려서, 이를테면 천지신교와의 성전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문주 위를 다시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리되면 현재와 같은 명분뿐인 문주의 역할이 아닌 실질적인 무상의 권한을 지닌 문주로서 확고히 자리 잡을 수도 있었다. 사리발마가 각 계파의 특성을 들추며 자세히 설명하자, 단리유아의 표정도 점점 어지러워졌다. 딱히 한곳이 이득이라고 볼 수도 없었고, 언뜻 보기에는 손해 같지만 그 속사정을 깊이 파고들면 오히려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니 넘어가고, 다음 세 번째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중원인이 달아났다고는 하는데 아직까지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아까 전에 증과현인의 말씀으로는....” 뜻밖의 말에 놀라서 단리유아가 곧바로 되묻고 있었다. 그런 단리유아를 향해서 사리발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이 그렇게 말했지만, 반드시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부적인 사정이 복잡하다고 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짐작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말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있겠지요. 또 바라만겁문의 고수들도 다들 바보는 아닐 텐데, 여태까지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예. 분명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자신들로서도 어쩔 수 없어서 특히나 단리시주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단리시주를 끼워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단리시주의 위명이 높고 조사해보고 싶은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리발마가 틀림없다는 듯이 확고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생각 밖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자 단리유아는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이방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들로서는 너무 다급한 상황이라서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단리유아로서는 약간의 배신감도 느낄 정도였다. 그런 곤혹스런 표정인 단리유아를 향해서 사리발마가 일침을 가하듯이 주의를 주었다. “단리시주께서 이번 일을 파고든다면 반드시 먼저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알아낸 사실을 다 알려주지 말아야 하고, 앞으로 아난대성자나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그런 내색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치부를 너무 깊게 파헤친다면 오히려 좋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어서 시주가 바라던 결과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만일이라도 이들이 불측한 생각을 품기라도 한다면....” 걱정스레 당부하는 사리발마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허허허. 제가 한 수 배웠군요. 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 역시 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 앞뒤 안 재고 파헤칠 생각만이 가득했는데,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가 너무 성급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전 이방인이었으니 이들은 많이 알아낼수록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깜빡했군요. 감사합니다, 스님. 역시 사전에 의견을 나누어 보기를 백번 잘 한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별 것도 아니랍니다. 시주께서야 천축에 대해서 잘 모르시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의젓한 얼굴로 합장하면서 겸손하게 대답하는 사리발마의 모습에 단리유아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고 정이 가니 정말로 형제지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속세를 벗어난 승려에게 의형제를 맺자고 청할 수도 없어서, 아쉬운 마음은 속으로만 간직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 라후수지 존자께서 앞날이 기대되는 분이라고 했었는데, 과연 오늘 보니 그 재능이 범상치 않습니다, 스님.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도 지적해내시고....” “아미타불....” “하하하. 정말....” 사리발마가 불호만 거듭 되뇌이며 얼굴을 붉히자, 단리유아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시간이 흘러 겨우 진정이 된 사리발마가 말을 이어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네 번째인 중원인이 중상에 처한 문제를 얘기해보지요. 아직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 생각에는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완전히 회복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흠. 분명히 이전에 파란굴타가 이야기하기론 겨우 명이 붙어있는 상황이라고 했었는데, 그런 사실까지 속일 필요가 있을까요?” 단리유아가 설마하니 그런 일까지 속였을까 반신반의 하고 있을 때, 사리발마가 보다 정확히 그 일을 꼬집었다. “아미타불. 바라만겁문에도 의술이 뛰어난 사람도 술법에 능한 사람도 있을 테니, 보름이 흐른 아직까지도 그대로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분명 그것 역시 겉으로만 그런 것일 것입니다. 이미 죽어서 단지 진정한 범인을 잡기 위한 미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실을 알아냈는데도 뭔가 밝힐 수 없는 일이 있겠지요.” 거듭해서 예상과 벗어난 이야기에 단리유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리발마의 말이 맞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지만, 생각할수록 이번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휴. 아무래도 그 문제를 제일 먼저 조사해보아야겠군요. 일에 대한 단서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움직이는 것에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이상한 행동을 보일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그 문제를 우선해서 조사해야지요. 그 다음에야 다른 문제들도 풀리게 될 것이니.” 사리발마의 말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사리발마가 마지막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다섯 번째, 기밀을 빼어내 준 사람에 대해서는 최소한 현자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 명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비쉬누의 대탑은 비쉬누의 계열에서 관리하고 있으니, 그들 역시 의심의 대상에서 빼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더해서 여러 가지가 복합된 사실을 알아내려면 최소한 두세 명이 함께 했을 것이고, 보름 전에도 같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확실히 그렇겠지요. 그런 귀중한 보물이 보관된 곳이 쉽게 털렸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니. 암만 생각해도 누군가 기밀을 빼돌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기회가 닿는다면 비고(秘庫)의 내부까지 조사해서 확실히 어떠한 방법으로 돌파했는지도 알아봐야겠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단리유아 역시 사리발마와 생각이 같았다. 단지, 사리발마의 말처럼 비쉬누 계파의 성자들까지 의심하지 못한 것이 틀릴 뿐이었다. 비록 사리발마와의 대화로서 문제가 분명해졌지만, 생각할수록 복잡한 사건이라서 단리유아로서도 점점 더 골치가 아파오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사리발마의 의견들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서 다시 한 번 사리발마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 7권 수정하느라 바쁘네요. 이벤트에 당첨된 분들께는 수요일에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요 며칠 정신이 없을 정도라서 미처 보내드리지 못했네요. ###### 게인스빌 님께 감사드립니다. 문맥이 약간 이상했네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십대성자(十大聖者) 십대성자(十大聖者) 1 단리유아와 사리발마는 의논을 계속해서 크게 세 가지 일을 결정했다. 첫째로 조사의 순위로서 먼저 살아남은 중원인을 조사해야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바라만겁문의 인물 모두를 의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으로 물론 여기에는 증과시리나 수리살타 역시 해당했다. 마지막으로 조사 시에 필요한 동조자를 더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증과시리나 수리살타가 내부사정에 밝으니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느 정도 방해할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그 이외의 사람들도 구해야 했다. 하지만, 바라만겁문의 깊은 내막까지 알 수는 없는 상황이라서 당장에는 어쩔 수 없이 그들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였다. 한편, 증과시리는 아난대성자를 찾아가 단리유아가 전해준 사실들과 경과에 대해서 전했다. 비쉬누 계열의 세 성자인 아난대성자와 지나(知那)성자, 찰합리(紮合犁)성자 그리고 증과시리는 이 문제를 두고 아난대성자의 거소에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이와 같으니 제 생각에는 그의 말대로 그에게 맡기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둥글게 서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상태에서 증과시리의 설명이 끝났을 때, 오른쪽에 앉아있던 지나 성자가 되물었다. 육십 대의 나이임에도 항상 싱글거리는 표정의 동안으로 비쉬누 계열 중에서도 행운의 여신인 락쉬미를 숭배하는 일파의 수장이었다. “과연 그 사람을 믿을 수 있겠소? 혹시라도 그가 우리 쪽에 불리하게 조사한다면....” “그것은....” 증과시리의 대답이 이어지기 전에 왼쪽의 찰합리 성자가 끼어들어 대신 대답했다. 흰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있는 영락없이 원숭이 형상인 얼굴의 노인으로 원숭이 신인 하누만 일파의 수장이었다. “음. 어차피 우리들로서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오. 이미 다른 계파에서는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형편이니, 우리로서는 크게 손해 볼 일은 아닌 것 같소. 그가 조사해서 사실을 밝혀도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계파의 문제도 헤집게 될 것이니 말이오.” 지나 성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찰합리 성자의 대꾸에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는지 다시 아난대성자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아난 성자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과연 이 일이 우리 뜻대로 좋게 끝날까요?” “흠. 현재로선 나도 증과현자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다고 보네. 우리가 직접 관리하던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의심을 피할 수는 없는데다가, 그렇다고 우리만으로는 다른 계열을 추궁하기도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네.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에는 이 일을 아예 크게 벌려서 다른 계열도 끼어들게 만드는 것이 좋겠네.” 육십 대의 안색이 붉고 온화한 인상인 아난대성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나 성자도 겉으론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내심으론 의혹스런 생각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과연 그렇게 될까? 게다가 이제까지는 다른 계파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나가더니,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해서 낯선 이방인에 불과한 그 사람을 밀다니. 아무리 그의 명성이 높다고 해도....’ ‘분명 그날 대탑의 경비를 맡은 사람은 찰합리 성자 휘하의 고수들이었는데.... 그리고....’ 갖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나 성자 역시 단리유아에게 이번 일을 맡긴다는 것에는 찬성하고 있었다. 비록 같은 계파의 입장인데다가 변명을 둘러대기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더 따지고 들 수는 없었지만, 지나 성자는 속으로 이번 일에 여러 가지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귀빈전에 머문 지 이틀이 지났을 때, 마침내 아난대성자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이미 단리유아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데다가 아난대성자의 강력한 요청이 뒤따라서 나머지 십대성자도 같이 만나기로 했다. 단리유아로서야 오히려 더 나은 바여서 양해를 구하는 증과시리의 말에 별 다른 반대를 표하지 않고 곧바로 승낙했다. 그날 정오경, 단리유아는 증과시리의 안내를 따라서 만신전으로 향했다. 총 삼층의 만신전은 천축에서는 보기 드물게 순수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전각이었다. 한 변의 폭이 삼십여 장이고 일층의 높이가 오 장여에 달하는 거대한 건축물로 삼십삼 개의 높은 계단 위에 일층이 세워져 있어서 실제의 높이보다 더욱 크고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주로 일층은 제의를 집전하거나 주요인사 들이 모였을 때 사용했고, 이층은 장로들과 현자들이, 삼층은 성자들만이 머무르고 있었다. 신상들과 벽화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채 노려보는 입구를 통과해서 전내의 측면에 자리한 계단을 올라갔다. 곳곳에 윗몸을 벌거벗은 금강역사와 같은 생김새의 고수들이 경계를 서고 있을 뿐, 이미 단단히 주의를 주었는지 일반 바라만겁문의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층에 이르러서야 흥미 있는 시선이나 도전적인 눈길을 던지는 사람들을 가끔 마주칠 수 있었지만, 한순간의 멈춤도 없이 단리유아와 사리발마는 위층으로 향했다. 본래 삼층은 장로의 신분이라고 해도 별도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오를 수 없는 곳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물러가고 증과시리 만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계단에 올라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한참을 가니 오색의 줄이 교차된 옷을 입은 여덟 명의 고수들이 각기 좌우로 막아선 대전 앞에 이르게 되었다. 황금으로 쓰여진 편액에는 천축어로 십성대전(十聖大殿)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고, 그 아래로 세계를 누비며 악을 소멸시킨다는 가루라(迦樓羅)의 형상이 새겨져 커다란 문이 있었다. “이곳은 십대성자 전원이 모여 중대사를 논할 때만 쓰이는 곳이오. 단리대협, 이제까지 바라문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곳을 들어선 역사가 없소이다. 보통은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다른 곳에서 만나겠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라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예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증과시리가 엄숙한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향해서 설명했다. 사실상 십대성자가 모두 모이는 일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에 불과할 정도여서 이번에 단리유아가 그들 전체와 만나기 위해서 십성대전에 이른 것은 전례에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증과시리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이미 사전의 약속이 있어서였는지 별다른 제지 없이 호전의 고수가 기관을 작동해 문을 열었다. 좌우로 미끄러지듯이 열리는 문을 통과하니, 폭이 오 장여 길이가 십여 장에 이르는 전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중앙에는 길게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양쪽으로 각각의 신들이 양각된 석주들이 늘어서 있었다. 전면의 벽에는 바라문교의 신들이 형형색색으로 그려진 벽화가 차지하고 있어서 장내의 위엄과 웅장함을 더하고 있었다. “문주님. 단리대협을 모시고 왔습니다.” 증과시리가 대전에 들어서자 곧바로 탁자의 전면에 앉아있던 아난대성자에게 예를 표하며 고했다. 그를 중심으로 탁자의 양옆으로 다섯 개씩의 좌석이 있었는데, 그곳에 중년에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늙은 사람들 아홉 명이 각기 자리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성자들 간의 위치는 수평관계임을 드러내주듯이 아난대성자와 나머지 성자들 간의 좌석의 높이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다. “어서 오시오, 단리대협. 대협의 명성을 들었지만 막상 이리 만나게 되니 새삼 그 위명을 실감할 수 있겠구려. 반갑소이다. 이 늙은이가 바로 문주를 맡고 있는 아난이라오.” 아난대성자가 일어서서 예를 표하며 자신을 소개하자, 잠시 주위의 인물들을 살피고 있던 단리유아가 포권하며 답했다. “과분한 말씀이시군요. 일개 무부에 불과한데 이렇게 성자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서 저야말로 광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중원에서 온 단리유아라 합니다.” “자, 일단 모두 자리에 앉으신 다음에 서로 상견례를 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증과, 자네는 저곳에 앉도록 하게나.” 고개를 끄덕이며 아난대성자가 답례한 후에 자신의 바로 왼쪽의 비어있는 자리에 증과시리가 앉도록 하고, 단리유아는 자신과 마주보는 탁자의 끝에 좌석을 배치했다. 곧이어 좌우에 앉아있는 성자에 대해서 소개가 이어졌다. 나이나 피부색깔, 얼굴의 모습 등에 있어서 아주 다양했는데, 모두들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할 뿐 별다른 말이 없이 호기심과 불쾌함이 반반인 모습들이었다. 단리유아가 보기에 크게 네 사람의 인상이 특이하고 그 기도에 있어서도 가장 눈에 띄었다. 브라흐마의 성자 중의 한명인 제리파(提理巴), 인드라의 성자인 다시리(多柴犁), 시바의 성자 중의 한명인 모로(暮路), 비쉬누 성자 중의 한명인 지나 성자가 특이했는데, 아마 이들이 사대계파에서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가장 큰 것 같았다. 잠시의 상견례가 이어진 후에 먼저 증과시리가 단리유아에게 천지신교와 세외의 사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설명을 부탁했다. 이미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단리유아가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 여겨서 다시 설명을 듣고자 했다. 증과시리의 부탁에 단리유아가 설명을 했지만, 가끔 지나 성자가 가끔 질문을 할 뿐 다른 사람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 문제에 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그들로서는 어떤 세력이라도 싸울 자신이 있었고, 더욱이 문내의 도난 사건이 급박한 상황이었으니 단리유아의 말은 그다지 마음에 닿지 않고 있었다. “흠, 단리대협의 말은 잘 들었소이다. 과연 내 생각으로도 보통 큰 야심을 지닌 세력이 아닌 것 같소이다. 또한 본문내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에도 동의를 표하는 바이오.” 설명이 끝났을 때 아난대성자가 먼저 말문을 열어서 그 쪽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바 계열의 모로 성자가 끼어들어 굳은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왜소한 체격에 비쩍 마르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사람으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서 그 나이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잠깐! 내가 한마디 하겠소. 그대가 말하기로는 그들 세력이 이곳까지 와서 이번 일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그 외에 그들이 정말 존재한다는 물적 증거가 있소이까? 각 지역의 분란이야 그곳의 세력 간의 싸움일 수도 있지 않겠소?” 모로 성자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흠. 제 설명으로는 아마 부족하신 것 같군요. 직접적인 물증을 대라면 당장에는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이미 다른 곳과는 협의가 끝난 상황이라고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운남의 천룡사(天龍寺)나 남만의 독룡림(毒龍林)등 여러 문파에서 이미 서로 협조하여 그들과 맞서기로 약조가 되어있지요.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들 문파에게 연락해보시면 제 말이 사실임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단리유아가 언급한 문파들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십대성자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각 지역의 대표적인 문파들이었으니 더 이상 단리유아의 말에 대한 신빙성은 따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이번 일에 천지신교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설득력을 얻어서 아난대성자가 본래 의도했던 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하하하. 단리대협의 말대로라면 고금에 드문 싸움이 될 것 같구려. 여태까지 일부지역에서의 다툼은 있어왔지만, 이렇게 세외 전체가 한 도가니가 되어서 혼란스런 경우는 없었지요. 내가 보기에 본문에 일어난 이번 일도 틀림없이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 생각하오. 만일 단리대협께서 이번 일을 맡아서 사건을.....”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이방인에 불과한 저 사람에게 그런 중대한 사건을 맡기자는 것이오? 지금 대체 정신이 있소, 없소?” 주름 가득한 얼굴을 더욱 찌푸리며 모로 성자가 아난대성자를 향해서 소리쳤다. 잇따라 비쉬누 계파의 성자들과 다른 계파의 성자들 간의 고성이 오가면서 설전이 이어졌다. 한동안의 소란스런 상황이 이어진 후에 아난대성자가 손을 들어 올려 싸움을 중지시키면서 단리유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흠, 단리대협. 대협도 이번에 일어난 사건을 들었을 것이오. 그 사건에 대한 대협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소이다.” “제 미욱한 생각이나마 말씀드리자면 이 일은 크게 중원인과 내부적인 누군가의 동조가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단리유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라흐마 계열의 제리파 성자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사십대의 젊은 나이에 잘생긴 외모가 신과 같은 은은한 위엄과 신비로움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감히 당신은 본문을 모독하는 것이오? 어찌 바라문이 비천한 이방인과 함께....” “그렇다면 제리파 성자께서는 그런 신보가 보관된 기밀을 외부인인 중원인 단독으로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단리유아가 맞받아쳐서 되물었다. 제리파 성자뿐 아니라 다들 그 물음에 얼굴 가득 곤혹스런 표정일 때, 단리유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마 그런 기밀을 알기 위해서라면 최소한 십여 년의 시간을 두고 잠입하거나 누군가를 납치해서 알아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상 그런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을 테니 분명 내부의 누군가가 함께 했을 것이라는 제 의견이 더 현실적임을 여러분 모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최상위의 수뇌분들 중에서 누군가가 말이지요.” 자신들의 문파 내의 누군가가 내통했다는 단리유아의 단정에 모두 불쾌한 표정이었다. 자부심 강한 신들의 종들로서 이방인과 동조하다니, 속으로는 단리유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기분이 언짢은 것은 다들 어쩔 수 없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 일은 본문내의 사람들만으로 조사하기는 한계가 있소이다. 단리대협의 말대로 수뇌부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니, 틀림없이 다른 계파에서 조사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심할 것이오. 마침 단리대협이 본문을 찾아오셨고 관심을 가지고 계시니 이 일을 맡기면 금상첨화가 아니겠소?” 아난대존자가 은근 슬쩍 말꼬리를 돌려서 자신들의 책임은 감추고 단리유아에게 모든 것을 넘기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아난 성자께서는 이 일의 근본적인 책임을 은폐하고 다른 계파를 걸고넘어지겠다는 소리가 아니오? 왜 자신들이 관리하던 것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소? 분명 일차적인 책임은 그대들에게 있을진대?” 내내 말이 없던 인드라 계파의 다시리 성자가 아난대성자에게 따지고 들었다. 벽안 적발의 노인으로서 탐스런 수염이 가슴에 이르고 있었고, 나이답지 않게 혈기가 감도는 안색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로 성자 역시 아난대성자를 향해 추궁했다. “본시 신보의 관리는 대대로 그대들의 임무가 아니오? 다른 곳을 의심하여 조사하려면 분명 그대들부터 조사를 받아야할 것이오.” 곧바로 다른 계열의 성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비쉬누 계열을 공격했다. 이때, 지나 성자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크게 소리쳤다. “쾅!” “모두 좀 조용히 하시오! 확실히 우리 쪽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지만, 당신들도 역시 의심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 아니오?” “무엇이? 그게 무슨 헛소리요? 분명 당신들 중에 누군가가.....” 모로 성자가 의심스런 얼굴로 비아냥거리자, 지나 성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손가락질했다. “흥! 그곳에 신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부적인 지리와 기관 등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여기의 당신들도 해당하는 것이오. 그 사실을 잊지 마시오.” “뭐요? 감히 자신들의 처지가 어려우니까 다른 계파에게 떠넘기려다니, 어떻게 그딴 소리를 할 수 있소?” 모로 성자가 맞받아치고 이어서 또다시 설전이 오가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한참을 지켜보던 단리유아가 보기에는 정말 어이없는 모습이었다. 오랜 시간 수양을 쌓아서 성자 위에 올랐다는 사람들이 계파가 다르다고 완전히 서로를 무시하는 발언이 계속되는 것을 보니, 세상사는 어느 곳이나 다를 바 없음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다들 잠시 조용히 하시오! 여기 손님도 계신데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아난대성자가 목소리를 높여서 주의를 주어서야 단리유아를 의식하고 조용해졌다. 어색해하는 얼굴로 헛기침을 하면서도 아직도 서로 상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아난대성자가 말문을 열어 다시 한 번 나머지 사람들을 설득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번에 일어난 일에 본문의 수뇌부 중의 누군가는 개입했다는 것을 알 것이오. 물론 우리 쪽의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오. 우리도 충분히 잘못을 인식하고 자진해서 조사에 협조할 것이오. 하지만, 여러분들도 그 조사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 것이라 보오. 그러니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단리대협에게 이 일을 맡겨서 조사시키기로 합시다.” “하지만....” 모로 성자가 끼어들어 반박하려는 순간에 아난대성자가 엄숙한 얼굴로 단정 지어 대꾸했다. “만약 이번의 일에 상관이 없다면 조사를 거부할 필요도 없지 않겠소? 만일 계속해서 거부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야말로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보오.” 아난대성자의 말에 잠시 더 몇 사람의 반론이 이어졌지만, 결국에는 단리유아가 조사하는데 협조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또한 단리유아를 도와서 각 계파의 장로 이상의 인물 한명씩을 동참시키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아난대성자의 의도대로 되었지만, 나머지 계파의 사람들이 많은 상황이었으니 반드시 유리하게 일이 풀렸다고도 볼 수 없었다. ****** 7권 끝내고 며칠 몸이 좋지를 못했습니다. 감기 몸살에 이까지 아려서 오늘 올리고 있지만, 약에 취해서 멍한 상태라 제대로 써졌는지는 모르겠군요. 이번 달 내로 1부의 끝인 8권분량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는데, 몸이 이러니 며칠 더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이 괜찮아지면 계속 연참해서 끝을 보도록 할 테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십대성자(十大聖者) 십대성자(十大聖者) 2 그렇게 십대성자들이 멋대로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단리유아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성자분들께서는 제 입장은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는군요. 제가 확실히 맡겠다고 하지 않았는데도....” 전혀 뜻밖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얼굴로 단리유아를 쳐다보았다. 특히나 단리유아가 맡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비쉬누 계파의 성자들로서는 더욱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둘러 증과시리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말문을 열었다. “대협, 전에 말씀하시기로는 분명 직접 조사해보고 싶다고....”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끼어들고 싶지 않군요. 솔직히 제가 느끼기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저를 이용하여 상대편을 해코지하려는 면만 두드러질 뿐, 사건 해결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손을 들어 증과시리의 말을 가로막으려 단리유아가 대꾸했다. 단리유아 역시 속으론 다급했지만, 그들의 목적대로 이용만 당할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라 한발 슬쩍 뒤로 물러선 것이었다. “하하하! 잘 되었구려. 그렇지 않아도 내내 못 마땅했는데. 어떠시오? 아난 성자께서는 이래도 저 사람이 조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계속 고집할 것이오?” 즉각 모로 성자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아난대성자에게 은근히 약 올리는 얼굴로 반문했다. 몇 사람은 모로 성자와 같은 생각이라서 이내 아까의 결정을 철회하자고 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잇따랐다. 이에 맞서 단리유아가 끼어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던 계파의 사람들은 당황한 가운데에도 상대를 비난하며 어떻게 해서든 단리유아가 이번 일을 맡도록 마주 반론을 펴고 있었다. “쾅, 쾅!” “여러분, 조용히 하시오! 아직 확실히 결정은 나지 않았으니. 내 보기에 단리대협께서 우리에게 뭔가 요구 조건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단리대협?” 아난대성자가 탁자를 두드려 장내의 소란을 잠재우며 단리유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내 성자들의 시선이 단리유아에게 집중될 때, 단리유아가 성자들을 한번 쭉 둘러본 후에 입술을 떼었다. “전 여러분 문내의 사정에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끼어들 마음도 없습니다. 단지, 제가 바라는 것은 사건의 해결을 통한 천지신교의 음모를 밝혀내는 것뿐입니다.” “흠. 우리들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오. 하지만....” 아난대성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다가 슬쩍 주위의 성자들을 주시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바로 당신들 때문이라는 듯이. 이에 곧바로 모로 성자가 소리쳐 따지려는 순간, 다시리 성자가 먼저 끼어들어 단리유아에게 말을 건넸다. “단리대협, 나 역시 대협의 말에 찬성하는 바이오. 솔직히 말해선 난 아직도 이방인인 대협이 끼어드는 것이 달갑지 않소. 그렇지만, 우리들만으로는 시간만 끌뿐 종내에는 흐지부지하다가 분열되기 십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소. 그래서 찬성은 했지만, 그렇다고 한쪽으로 유리하게 이 일을 진행시킬 맘은 없어서 모든 계파에서 참여하기로 조건을 걸었던 것이오.” 단리유아를 주시하다가 이내 주위의 성자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리 성자가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듯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잠시 주위의 성자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다시리 성자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다시 물음을 던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대협께 묻겠소. 바라는 조건이 무엇이오?” “하하하, 다시리 성자께서 그렇게 물으시니 답하지 않을 수 없군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묻는 벽안적발의 혈기왕성해 보이는 노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피며 단리유아가 말문을 열었다. 자신이 보기에 계파간의 세력을 따지지 않는다면 다시리 성자의 권위가 가장 큰 것 같았고, 그 기도를 보아서도 계파간의 알력이 없었다면 문주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첫째 참여하실 장로들의 수를 줄여달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다른 계파를 헐뜯고 따지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둘째로 제게 어디든지 조사할 권한과 누구든 체포할 권한을 주십시오. 셋째....”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가 그런 권한까지 줄 것으로 보이오, 지금? 흥! 꿈 깨시오. 어떻게 이방인이 그런 권한을....” 말을 가로막으며 모로 성자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반대를 외치는 소리가 이어졌고 단리유아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커져갔다. 단리유아에게 협조적이었던 사람들의 얼굴도 난색을 드러내고 있을 때,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지나 성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설득에 나섰다. “여보시오, 단리대협. 그 정도까지 권한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큰 것 같소. 사람을 체포하는 데는 동행할 장로들과 여기 증과현자 정도면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장소 중에는 외부인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는 곳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소. 그러니 그 조건은 받아들이기 어렵소.” “그럼 그런 권한도 없이 어떻게 조사하겠다는 것입니까? 동행할 사람들이 항상 같이 움직일 상황만 벌어진다면 저도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단독으로 움직여야 할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내부인물이나 그 범인이 달아나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장소에 숨어버린다고 허락이 내릴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런 권한은 주지도 않은 채로 조사하라고 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자신을 이용하여 차일피일 시간이나 끌 심산이 다분해보였다. 그런 생각에 단리유아의 대답도 퉁명스런 기색이 저절로 우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단리유아의 반문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라 십대성자들이 설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한동안의 설전이 이어진 후에 아난대성자가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일단 사람을 체포하는 것은 장로 이하에 한하여서는 그때그때의 재량에 맡기도록 하고, 그 외에 현자 이상의 사람에 한하여서는 일단 본문내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오. 그리고 장소에 관하여서는 동행하는 사람들과 상의해서 하도록 하면 될 것이오. 물론 범인이라고 의심되는 사람이 갑자기 뛰어든다면 절대적인 금지가 아닌 이상에는 움직여도 좋을 것이오. 단, 본문의 사람도 동행하는 조건으로 말이오.” 아난대성자의 말에 반대하는 성자들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어느 정도는 권한을 주어야한다는 생각이 설득력이 더 있어서 찬성하는 모습이 더 많았다.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해보고 우선은 그 정도로 만족하고 다음의 조건으로 넘어갔다. 실제의 상황에서는 또 달라지리라 생각했지만 일단 그들에게 양해를 구해놓았으니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크게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 조건은 저를 도와줄 사람을 선발할 권한을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장로들 말고 또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다른 사람들이야 장로들에게 부탁하면....” 뜻밖의 조건에 아난대성자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할 때,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막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실 장로들이 참여하겠지만 솔직히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사실을 여러 성자분들께서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임의로 사람을 뽑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물론 조사하는 동안에만 한해서 전적으로 제 휘하에 속하게 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소. 어떻게 이방인인 당신에게 그런 권한까지 준단 말이오? 이미 장로들이 돕기로 했으니 그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오.” 단리유아의 말에 한동안 말이 없이 단리유아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제리파 성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반문했다. 원리주의자라 할 수 있어서 본래부터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터라 그 시선과 어조가 곱지 않았다. 실제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브라흐마 계열이 다른 계파보다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었다. 평소 세력적인 면에서는 가장 약세에 처한 상태였던지라, 비록 이번 일이 다른 계파에게는 막대한 타격이 될 터이지만,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는 사건이 해결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당신 밑에 속한 사람과 본문 내 다른 사람들과 서로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리되면 오히려 내분만 더 커질 수도 있을 것이오.” 모로 성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리파 성자의 말을 거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각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지나 성자가 큰 소리로 두 사람의 말을 반박했다. “그 문제는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소. 다들 알다시피 현실적으로 우리들이 선택한 장로들은 이번 일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을 것이오. 각자 계파의 입장을 우선할 테니 이번 일을 조사하는데 방해가 되는 일을 저지를 가능성도 있소. 내 생각에는 일단 단리대협의 말대로 선발권을 주되 차후 우리의 승인을 얻어야한다고 보오. 물론 본문내의 인물에 한해야한다는 단서도 덧붙여서 말이오.” 제리파 성자의 말에야 점차 찬성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어갔다. 실상 그렇게 단서를 붙이면 단리유아에게 협조적인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바라만겁문 내에 십대성자의 계파에 속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 장로 이상의 위치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단리유아가 보기에 마지막 단서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사실상 원천 봉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서 곧바로 반대하려고 했다. 자신들 문파에 해가 되는 일을 하려는 자는 없을 것이고 이방인에 협조했다가는 나중에 배신자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일에 생각이 떠올라서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표명했다. ‘어차피 이 조건은 만일을 위해서 언급한 것이지. 실제로 지금 당장에는 아는 사람도 딱히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조사하는 도중에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도 있을 테니 그때를 대비한 것이지. 일단 내가 선발한 다음에는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보아서 당신들이 거부한다고 해도 그 시간이 오래 걸릴걸? 또, 그 사람 본인이 거부해도 방법은 많으니....’ 단리유아가 보기에 가장 다급해하는 쪽은 비쉬누 계열이었고, 그리 다급한 구석이 없는 곳은 인드라와 아그니, 브라흐마 계열이었다. 가장 반대가 심한 곳은 시바 계열로서 가만히 있으면 비쉬누 계열을 몰아붙여서 차기 문주를 맡을 가능성이 가장 커보였기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인드라와 아그니 계열은 원칙적으로는 찬성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일을 공개적으로 크게 확대할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보는 것 같았다. 이후, 몇 가지 세부사항에 논의가 잠시 더 이어지고 나서 먼저 단리유아와 증과시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전내를 완전히 벗어나 다시 문이 닫혔을 때, 인드라 계열의 다시리 성자가 침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일으킨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자는 본문 역사상 가장 큰 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지금이라도 자백한다면 그래도 정상이 참작될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말을 하면서 힐끗 아난대성자를 주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모로 성자와 제리파 성자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마치 그들 중의 누군가가 이번 일을 꾸민 원흉이라 확신하고 있다는 듯한 다시리 성자의 모습에 시선을 마주친 사람들이 발끈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러는 다시리 성자께서도 이번 일에 예외가 될 수 없을 텐데요? 실제 이번 일로 몇 사람이 물러나고 세력이 약화된다면 그대가 차기문주가 될 수도 있고, 설혹 그렇지 않다 해도 공개적으로 분파할 명분을 얻게 될 테니 말이오.” “맞소. 사실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쪽은 소수파인 그대들 인드라와 아그니 계파가 아니오?” 제리파 성자와 모로 성자가 동시에 대꾸하면서 다시리 성자 당신이야말로 의심받기 알맞지 않냐는 듯이 비웃음을 흘렸다. 곧바로 고성이 오가며 서로간의 설전이 점점 격화되고 있을 때, 아난대성자가 탁자를 탁탁 두드리며 소리쳤다. “자자. 됐소이다. 이후 저 중원인이 사건을 조사한 후에는 누가 진정한 반역자인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오. 그때까지 모두들 꾹 참고 결과를 기다려보기로 합시다.” “흥! 아난대성자께서는 아주 흡족한 모양이구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었으니. 이제 우리들만 있으니 그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긴 진정한 저의를 말할 때가 되지 않았소?” 세 불리하여 위축되었던 다시리 성자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을 돌려 아난대성자를 공격해갔다. 곧바로 아난대성자가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얼굴 가득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의라니? 본 계파의 세력에 흠집을 가하면서까지 그에게 이번 일을 맡기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오?” “흥! 무슨.... 본문 전체의 위명에 먹칠을 한 것이지 당신들 계파만 그런 것은 아니오. 그러니 그런 위선을 떨어서 멋대로 호도하지 마시오. 보기에 역겨우니까. 그랬으니 당신의 제자도....” 모로 성자가 검고 주름진 얼굴을 찌푸려 기분 나쁘다는 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반박했다. 그의 말에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한 아난대성자를 대신해서 곁에 있던 지나 성자가 성난 얼굴로 맞받아쳤다. “뭐요? 지금 말이면 다인 줄 아시오? 이미 끝난 일까지 끄집어내어서 문주를 비방하다니, 최소한 문주에 대한 예의 정도는 지켜서....” 지나 성자의 말 도중에 이번에는 제리파 성자가 끼어들어서,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한 채 딴청을 부리며 지나 성자의 말을 반박해갔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들이 이번 일에 있어서 가장 책임이 크고 의심 받아 마땅한 처지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오? 그리고 문주는 본래 순번제였지 지금처럼 독재적으로 계속 연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본래부터가 모두 평등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렇다고 이미 끝난 과거지사까지 들먹이며 비방하는 것이 잘하는 짓이란 말이오?” 지나 성자의 되물음에 곧바로 모로 성자가 다그치듯이 대꾸했다. “흥! 누가 그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오? 다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묵과하고 있을 뿐이지, 언제 상황이 달라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오. 다음 문주가 만일....” “이, 이 정말 말이면 다인 줄 아시오? 어떻게....” 사방에서 쏟아지는 역공에 지나 성자가 얼굴만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제대로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한쪽에서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들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던 아난대성자가 손을 들어 올려 지나 성자를 말렸다. “그만하게. 흠! 이 모든 것이 나의 부덕에서 나온 소치일 테니. 지난 일이야 어찌되었던 내 제자임을 부인할 길도 없으니 말이야.” 곧이어 시선을 돌려서 전내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자, 다들 그만하고 오늘은 이대로 헤어집시다. 얼마 후에 나올 결과를 기다리도록 하고.” 곧바로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전내를 빠져나가버렸다. 지나 성자와 찰합리 성자가 잇따라 그 뒤를 이어 나간 뒤, 장내에는 일곱 명의 성자만이 남아서 서로 설전을 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일에 보조하기로 입을 맞추는 등 한동안 떠들썩한 상황이 이어졌다. 의혹(疑惑) 의혹(疑惑) 1 십대성자와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단리유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타 강호세력과는 그 구성에 있어서 차이가 나서 만남이 있기 전까지 예상하고 있던 자신의 생각과는 많이 틀렸다. 비록 문주라 하여도 십대성자 간의 위상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었고, 성자들의 행동 역시 기대완 달리 실망스런 것이었다. 만나기 전까지는 정황으로 보아서 성자들 중의 누군가가 이번 일의 주모자라 의심하고 있었지만, 오늘의 만남에서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조사하는데 두드러지게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를 가지고서는 딱히 누군가를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의 만남에서 모로, 다시리, 제리파, 아난대성자 등이 특히 눈에 들어왔지만 자신이 간과한 다른 성자들 중에 배반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들만을 의심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각 성자들의 성향이나 내부의 역학관계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으니 아예 쓸모없었던 만남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또한 본래는 열 명의 장로가 참여하기로 했던 것이 네 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요구가 이루어져서 명목뿐인 것이 아닌 실질적인 조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소득이라 할 수 있겠지.’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점점 강해져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라도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일기도 했지만, 앞날을 생각한다면 멈출 수도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때, 한 줄기 바람이 파고들어 가슴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당신,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처음엔 어려워 보이는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왜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했을까 할 정도로 쉬운 경우가 많답니다. 서두르지 말고 마음에 여유를 가지세요. 그러면 아주 작은 일에서도 일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마야의 소곤거림에 그나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은 한시도 마야가 곁에서 떠났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주변에서 맴돌며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 같아서, 종종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 독백처럼 중얼거리기도 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사리발마가 몇 번이고 놀라서 흔든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도 익숙해졌는지 크게 신경 쓰는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설명을 듣고 어찌된 일인지 알고난 뒤여서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것은 여전했다. 돌아와 사리발마에게 경과를 설명해주고난 다음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먼저 자신을 찾아온 네 명의 장로와 상견례를 가졌는데, 수리살타만 만났던 적이 있을 뿐 다른 세 사람은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각각 삼대신 계열과 소수파의 대표로서 앞으로 그들은 증과시리가 직접 관리하며 자신을 보조하게 될 것이다. 서로간의 소개가 끝난 후에 곧바로 단리유아가 증과시리를 향해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우선 여태까지 귀문에서 파악한 내용에 대해서 알고 싶으니 그 자료를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허허허. 자료야 많지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인데....” 증과시리가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한쪽의 수리살타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음, 그럼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수리살타 장로가 도맡아 왔으니 그의 집무처로 향하는 것이 나을 것 같소이다. 이곳으로 가져오게 할 수도 있지만 양도 많고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곧 문내의 감찰을 맡고 있는 찰행합전(察行闔殿)으로 향했다. 전주와 세 명의 장로로 이루어진 찰행합전은 만신전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증과시리가 그 전주였지만 사실상 명목뿐인 전주라 할 수 있어서 그 휘하의 세 명의 장로에 의해서 주로 안건이 처리되고 있었다.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현자에 오른 사람들은 대체로 특별히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오늘은 자료를 읽어보고 정황을 파악하는데 보낼 생각이니 다른 분들께서는 그만 물러가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아닌 한 이곳을 임시적으로 집무실로 썼으면 하는데 증과현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찰행합전에 도착한 뒤 수리살타의 집무처에 들어선 단리유아가 그동안 모아온 방대한 양의 자료를 보고서 증과시리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좋도록 하시구려. 될수록 대협의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기로 한데다가 나 역시 이곳으로 모이는 것이 편하니.” 증과시리 역시 별다른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낙했다. 얼마안가 수리살타를 제외한 다른 장로들을 데리고 증과시리가 물러나갔다. 그들이 물러난 뒤에 단리유아는 수많은 보고서와 서찰로 어지럽혀진 곳에서 수리살타와 사리발마의 도움을 받아가며 주변을 정리하고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단 문내의 정세에 대해서 더 꼼꼼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해서 그런 쪽에 특히 신경을 써서 살피기 시작했고 그동안 그들이 알아낸 사실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가지고 살폈다. 다음날 아침 증과시리와 장로들이 단리유아가 집무실로 삼았던 곳으로 찾아왔을 때, 사리발마와 수리살타가 탁자에 엎드려 잠이 든 것과는 달리 그때까지도 단리유아는 꼿꼿이 앉은 채로 각종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허허. 단리대협, 모습을 보아하니 잠도 주무시지 않은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이 아니오? 저 두 사람도 피곤한 것 같은데,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소?” 부스스한 안면과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 이어서 두 사람의 잠든 모습을 돌아보다가, 증과시리가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차며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증과시리의 말에 이어서 다른 장로들이 서둘러 두 사람을 깨우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이정도야 별 것 아니니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이 분들이야 더 쉬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고, 오늘부터 저는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조사를 하고 싶습니다.” “벌써 그 많은 것을 모두 살펴보았단 말이오?” “아직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대충 알아냈다고 할 수 있으니 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살펴보아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다른 것부터 살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놀라서 모아둔 자료를 돌아보며 되묻는 증과시리에게 단리유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실 더 이상 서류로 알아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샌 결과 바라만겁문내의 정황을 파악하고 이번 일에 대한 경과도 자세히 알 수 있었지만 내심 바라던 확실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지난 일을 직접 살펴보거나 이제까지 느꼈던 의문을 하나하나 파고들며 직접 움직일 수밖에는 없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연신 하품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이끌고 일행은 거실로 나갔다. 둘러앉은 채 간단한 다과로 늦은 아침을 대신하면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먼저 저번에 사로잡았다고 말씀하신 중원인을 심문해보고, 그 다음에 사건의 현장에 대해서 조사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단리유아가 물음을 던지니, 잠시 증과시리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자고 했다. 예상과는 달리 선선히 승낙하는 모습에 약간 의문이 들었지만, 어찌 되었던 잘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넘어갔다. 다과를 들으며 경과에 대해서 묻기도 하고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다가, 반 시진 후 증과시리를 필두로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행합전을 나서서 만신전을 돌아 서쪽으로 향하며 증과시리가 앞으로 찾아갈 곳에 대해 설명했다. “단리대협, 현재 그 사람은 참회옥(懺悔獄)이라는 곳에 있다오. 본래는 본문에서도 중대한 죄인들을 가두는 곳이었지만 이번 일로 배반자가 있음을 직감하고는 그곳으로 옮긴 것이라오.” 서류상으로 보았었지만 단리유아나 사리발마에겐 아직도 약간 뜻밖의 장소라 할 수 있어서 놀람과 의문이 가득했다. 수감되어 있는 죄인들은 몇 명 되지 않고 출입하는 것도 엄격한데다가 경계가 삼엄한 곳이니 가히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는 증과시리의 설명이 이어져서 그나마 이해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보안에 취약하고 사람들을 믿기 어려우면 그런 곳에다가 중요한 증인이 될 사람을 두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사람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전에 말씀하시기로는 중태여서....” “그건.... 대협, 가서 보시면 아실 테니 여기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얼마 안가 직접 보시게 될 테니.” 뒤따르는 장로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증과시리가 대답했다. 아직까지 다른 계파에게도 정확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니, 이제와 다른 계파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발설할 수는 없었다. 단리유아로서는 궁금했지만 지금으로선 더 물어볼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스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저번에 예상했던 대로일까요? 아니면 말처럼 아직도 중태에 빠져 있을까요?>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사리발마에게 슬쩍 전음을 날려 물어보니, 피곤한 얼굴로 터벅터벅 걷던 사리발마가 그제야 생각을 집중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정말로 상처를 입어서 중태에 빠져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 생각은 전에 했던 예상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군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생각할수록 틀림없다는 듯이 사리발마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끝마쳤다. 곧바로 단리유아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어떤 이유에서 그리 단정하십니까?> <아미타불! 아무리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지만, 그렇다고 참회옥 같은 감옥에 중상을 입은 사람을 계속 가두어둘 수는 없지요. 물론 하루 이틀 정도야 상관이 없겠지만, 벌써 이십일 가까이가 되어가는 동안에도 그런 곳에 계속 둔다는 것은 뭔가 납득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 말과 달리 무슨 일이 있을 것이 확실합니다.> 사리발마의 말에 단리유아 역시 생각이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서로 전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들이 궁금한 기색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끼어들어 방해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생각에 잠겨있거나 전음으로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변으로 가로수가 늘어지고 곳곳에 정원이 만들어져 있었지만, 태양빛이 강하게 쨍쨍 내리쬐는 가운데 돌이 깔린 석도를 걷다보니 지열로 인해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일행의 모습을 보고 바라만겁문의 인물들이 예를 표하기도 하고, 멀리서 서로 속닥이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였다. 그런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노골적으로 단리유아에 대한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부산한 가운데 일행이 목적했던 참회옥이 이른 것은 찰행합전을 나온 지 일각여가 흐른 뒤였다. 바라만겁문에서도 서북쪽 끝에 위치한 외진 곳으로 주변에 사람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은 황량한 곳이었다. “이곳이 그곳이오, 단리대협.” 앞서 걷던 증과시리가 걸음을 멈추며 손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서북쪽은 바라만겁문의 외곽 성벽과 이십여 장의 사이를 둔 채로 삼 장여의 높이를 지닌 붉은 벽돌담이 사방 삼십여 장을 빙 둘러서 주위와 차단하고 있었고, 가까운 주변에는 아무런 건물이 없어서 벽돌담의 네 귀퉁이마다 위치한 망루에서 손쉽게 사위의 동정을 제어할 수 있는 구조였다. 정문을 지키던 고수들이 증과시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예를 표하며 문을 열었다.이미 전갈을 받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별다른 제지나 검사가 없었다. 다들 이제까지 마주쳤던 바라만겁문의 사람들과 달리 얼굴에 분장을 하고 검은 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는 특이한 모습들이었는데, 증과시리의 설명으로는 죽음과 법의 신인 염마(閻魔)를 따르는 계파의 사람들이라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대문을 통과하니 단층의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낡고 퇴색한 전각만이 덩그러니 중앙에 위치한 채로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건물 주위 사방으로는 푸르른 잔디만이 드넓게 깔려있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전혀 이곳이 그런 곳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고 있는 단리유아를 보고, 증과시리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다. “허허, 뜻밖의 모습에 놀라시는 모양이구려. 하지만, 사실 곳곳에 진법과 기관이 펼쳐져 있어서 멋모르고 잘못 들어섰다간 그대로 벌집이 되어서 죽어나갈 뿐인 살벌한 곳이라오.” 눈에 띄는 사람들은 건물 주위를 순찰하거나 경계를 서고 있는 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잔디가 펼쳐진 사방에도 수십여 명이 더 은잠해 있는 기척을 단리유아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멈춰 섰던 일행이 건물로 이어진 석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참회옥의 고수가 앞장서 안내하며 주의를 주었다. “본래 이곳 석도에도 기관이 펼쳐져 있었지만 여러분을 위해서 기관을 잠시 멈추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절대 석도를 벗어나서 잔디 쪽으로 들어서지 마시고 다만 석도를 따라 걸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주의를 들으며 건물로 향하니 양쪽으로 늘어선 나가(뱀의 형상으로 문지기나 불사의 상징)의 조각상들이 수문장처럼 정면의 입구까지 줄지어 세워져있었다. 입구의 문에는 야차를 이끌고 수많은 악귀들을 없애는 염마의 모습이 새겨져 보는 이를 위협하는 듯했다. “끼이익!” 소름끼치는 소성을 흘리는 문을 지나 검붉은 색의 비좁고 음침해 보이는 석도를 따라 한참을 이리저리 걸었다. 마침내 한 대전에 이르러 들어서니 양쪽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늘어선 채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의 상단에는 검붉은 피부에 누런 옷을 걸친 염마의 복장을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머리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허리춤에는 흑색의 새끼줄이 걸려있고 오른손에는 백금으로 된 홀을 지니고 있었다. “오서 오시오, 증과현인.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옥주께 증과시리가 답례하오.” 두 손을 모아 서로 상대방에게 예를 표한 뒤에 증과시리가 뒤에 서서 기다리던 단리유아에게 단상의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단리대협. 이분은 이곳을 맡아오고 있는 가가상태(加訶喪跆)라는 분으로 죽음과 법의 신인 야마를 믿는 계파의 수장이 되십니다.” 비록 지위 상으로는 장로에 불과했지만, 일파의 수장으로서 실제의 위치는 최소한 현자들과 동급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 삼대신의 세력이 미약했던 바라만겁문의 성립초기에는 십대계파에도 속했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겨우 명맥을 보존하고 있는 소수파로 전락해서 현재와 같은 처지가 된 것이었다. “중원에서 온 단리유아라 합니다. 옥주께 인사드립니다.” 검붉게 채색되어 본 모습을 알기 어려웠지만, 십대성자의 계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는 처음 만나는 인물이라 단리유아 역시 흥미로운 시선을 던진 채 포권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잇따라 사리발마와 장로들의 인사가 이어진 뒤에 가가상태가 단리유아에게 말문을 열었다. “가가상태라 하오이다. 이미 그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지 오래되지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입장이라 이제야 마주치게 되었구려. 부디 이번 사건을 해결하여 하루라도 빨리 본문의 안정을 가져오도록 부탁하오이다.” 희미하게 안개가 깔리듯 작고 늘어지는 목소리에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었지만, 이내 그런 표정을 감추고서 담담한 얼굴로 단리유아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요.” 잠시 서로에 대한 소개와 안부를 주고받다가 단리유아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옥주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이곳에 있다는 중원인을 보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가가상태가 의아한 얼굴로 슬쩍 증과시리를 돌아보았다. 이미 증과시리가 말해주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단리유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어찌된 일인지 모르는 것 같아서 가가상태로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본 옥주의 소관이 아니라오. 외부에 대한 일차적인 보호는 본 옥이 책임지지만, 그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처리는 비쉬누 계파에서 하고 있소이다. 그러니 내게 따로 양해를 구할 필요 없소이다. 다만 증과현인의 승인이 필요할 뿐이니 저분께 직접 물어보시구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답변에 단리유아가 어찌된 일이지 증과시리에게 시선을 던지며 무언 속에 추궁했다. “말씀드려야 했는데 본인이 깜박했구려. 용서하시오, 단리대협. 본래 다른 계파들도 믿을 수 없어서 여태까지는 이런 사실을 숨긴 채 다만 중립적인 참회옥에 가둔 것으로만 하고 있었소. 고의로 아직까지 대협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그리 알고 양해를 해주시오.” 잠시 아차하며 난처한 얼굴이던 증과시리가 표정을 고치며 대답했다. 그의 설명에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단리유아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고 의혹만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 해도 이번 일을 조사하는 자신에게만은 최소한 어찌된 일인지 알려주었어야 했다. 따라온 다른 계파의 장로들도 크게 따지고 들지는 않았지만, 다들 증과시리의 말에 불쾌한 얼굴이 되어서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더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얼마안가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전을 물러나온 일행은 참회옥에 속한 수하의 뒤를 따라서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향했는데,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지만 어두침침함과 음울한 기운이 떠도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서 절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층은 보통 그 기간이 얼마 남지 않거나 죄의 무거움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오. 물론 그들 중에는 이곳을 경계하는 간수가 위장하여 있는 경우도 있소. 이층은 죄질이 더 무거운 곳이고, 삼층은 영구히 빠져나올 수 없도록 금제된 죄인들이 갇혀 있다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증과시리가 단리유아와 사리발마에게 전음으로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발자국에 따라 울려 퍼지는 반향에 귀 기울이고 있던 단리유아에게 문득 어떤 사람이 발광하는 듯한 괴성이 나지막하게 귓속을 파고들어왔다. “크아아악! 날 풀어줘, 이 저주받을 놈들아! 그러고도 네놈들이 신을 따르는 종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으드득, 이 간악한 위선자 같으니라고. 세상을 속이고 날 이곳에 가두다니 언제고 네놈에게 신벌이 내릴 것이다. 퉤! 이놈들아, 어서 이것을 풀지 못해!” “빨리 저 자식의 입을 막아! 곧 있으면 중원인과 증과현인께서 들어오실 테니.” 곧이어 사람들의 투덕거리는 소리가 이어져서 들려왔다. 의문이 들어 힐끗 증과시리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이렇다할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일행이 향하는 삼층에 있던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인지 자못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여태까지 바라만겁문에 적대적인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도대체 무슨 일로 어떤 사람이 갇혀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솟아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의혹(疑惑) 의혹(疑惑) 2 지하 삼층의 입구에 이르니 두 명의 참회옥의 고수가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가슴팍에 야차의 얼굴이 새겨진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도 복면을 한 상태로 단리유아가 짐작하기에는 최소한 각자 장로 이상의 무위를 지닌 것 같았다. 본래 참회옥의 구조는 위층을 감시하는 고수들이 더 많았지만 반대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높은 수준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특히 삼층의 고수들은 옥주의 명만 들을 뿐이어서 참회옥 내에서도 완전히 독립적인 장소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행의 접근에 왼쪽의 복면인이 아무런 말이 없이 증과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익숙한 태도로 증과시리가 신분을 증명하는 증표를 내밀며 일행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들은 이번에 나와 함께 조사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고, 이쪽 이분은 단리대협으로 이번 일을 맡으신 분이라네.” “증과현인께 염마팔영(閻魔八影)이 인사드립니다. 저희들은 모두 규칙대로 할 뿐이니 모두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신표를 제시하고 지닌 무기는 이곳에 풀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증과시리의 설명에도 아랑곳하는 기색 없이 복면인이 신표를 되돌려주며 껄끄러운 늙은이의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위층에서는 별다른 제지 없이 통과했지만 이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이분은 십대성자의 부탁을 받아 이번 일을 맡게 되었는데 어떻게 안 되겠나?” 난처한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돌아보며 증과시리가 부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거절뿐이었다. “저희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신분이야 현인의 말과 옥주의 전갈로 확인이 되었으니 더 검사할 필요가 없겠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무기를 지닌 채로 죄수들과 접촉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거부하면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듯한 무심한 대꾸에 못마땅한 표정이던 단리유아도 검을 풀어놓았다. 싸우겠다면 못 싸울 것도 없었지만, 여기에서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더 이상 무기의 유무가 필요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잠시 후 조사가 끝나자 두 명의 고수가 석문을 열어준 뒤 안개처럼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흔히 볼 수 없는 장안법(障眼法)의 일종인 것 같았다. 그들의 무공에 흥미가 동한 단리유아가 기척을 탐지해보니, 두 사람과 같은 기운이 입구의 네 곳에서 은밀하게 흘러나왔고 석문 안쪽으로도 네 사람의 기운이 더 느껴지고 있었다. ‘살기도 없고 소리도 보이지도 않지만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는 상태로군. 아직 자신들 자체의 기운을 주변의 사물과 완전히 동화시킬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음, 내가 만일 저들을 공격해야 한다면....’ 각자 숨은 위치를 계산하며 어떤 식으로 공격하여 장안법을 깨뜨리고 제압할까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또다시 과거의 버릇이 되살아난 듯이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사리발마가 소매를 붙잡으며 정신을 일깨웠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들어가고 있는데?” 그제야 단리유아도 정신을 차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일행을 뒤따라 석문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 천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서 새로운 무공과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일에 몰두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은 무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지만 실제의 행동에서는 영락없는 무공광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훅 끼쳐오는 퀴퀴하고 역겨운 냄새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는데, 도대체 이런 곳에 상처가 심하다는 사람을 가두어놓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경계가 철통같아서 외부로부터 안전하다고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좌우 양쪽으로 각기 다섯 개의 석실이 있는 것 같았지만, 조그마한 들창만 달려있는 석문으로 가리어진 상태여서 안쪽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십여 장 떨어진 맞은편에도 일단의 고수들이 지키고 서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아마 그곳이 목적지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석도를 따라서 걷다가 문득 좀 전의 일을 상기하고 좌우의 석실에 청각을 집중해보니, 단 두 곳에만 사람이 감금되어 있는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곳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까 들어보니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던데.” 넌지시 증과시리에게 계단을 내려오며 들은 소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또한 아까 들었던 소리가 어느 곳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단리대협, 이곳 삼층의 죄인들은 본문에서도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묻지 마시고 다만 본문의 반도들이라 생각하십시오. 행여나 안쪽을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마시고.” 직접적인 대답은 회피한 채 증과시리가 주의를 주며 별 상관없다는 듯이 걸음만 재촉했다. 자신이 알기에는 참회옥은 일반적인 죄인들이 아닌 반도들만을 가두는 곳이라 할 수 있었고, 특히나 삼층의 경우에는 더욱 수감되는 경우가 드물 것이니 이곳에 갇힌 자들은 보통 신분의 사람은 아닐 것이라 여겼다. 아까 들었던 소리로 보아서는 뭔가 심상치 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외부인의 입장인 자신의 처지로서는 당장에는 어쩔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이번 일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나중에라도 기회를 보아서 어떤 일인지 알아내리라 속으로만 다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중앙의 석도를 따라 걸어서 맞은편에 이르니 네 명의 인물이 일행을 맞이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비쉬누 계파의 인물들로 곧바로 문을 열로 또 다른 석실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전에 비해서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이곳도 역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악취가 허공을 떠돌아서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여전했다. 석실 내에 있던 십여 명의 고수들이 일행을 맞이하여 인사하는 등 잠시 소란스런 상황이 이어진 후에 증과시리가 단리유아를 향해서 말문을 열었다. “단리대협, 이곳이 바로 그 중원인이 있는 곳이라오. 저 안쪽의 왼편 석실에 있으니 그리로 가십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기다리시오.” 증과시리의 말에 석실의 안쪽을 바라보니 좌우로 각기 두 개씩의 석실이 더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꽉 막히고 공기가 탁한 곳에 환자를 놓아두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슬며시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려할 때, 장로들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증과시리에게 외쳤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도 확인하고 심문하는데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건 안 되네. 오직 단리대협 만이 만나볼 수 있네.” “그러려면 뭐 하러 이곳까지 우리를 데려온 것이오? 내 참....” 냉정하게 거절하는 증과시리의 말에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음을 던지거나 불만스레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단리유아 역시 이해할 수 없어서 물음을 던지려할 때, 증과시리가 언성을 높이며 장로들에게 대꾸했다. “이 일은 아직까지 다른 계파에서 알아서는 안 되네. 단리대협이야 이 일을 조사하는 중립적인 입장이니 상관없지만, 다른 계파들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상태이니 말이야! 그러니 자네들은 이곳에 기다리도록 하게. 사리발마 자네도.” “지금 다른 계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번 일이 발생한 제일 큰 책임이 있는 곳이 그쪽일 텐데? 정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한 장로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대꾸하며 궁시렁거리자 수리살타가 끼어들어 그를 향해서 소리쳤다. “닥치시오! 아무려면 우리가 그런 것도 몰라서 이런 줄 아시오? 이제까지 일로 보아서는 당신들도 의심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고, 만일 누군가 그 중원인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그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게. 어쨌거나 나로서는 자네들이 심문하는데 참관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네. 그러니 그리 알게!” 증과시리가 수리살타의 말을 막으며 더 이상의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로 선언했다. 다들 불만에 찬 얼굴이었지만, 주위에는 비쉬누 계파의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떠 따질 수는 없었다. 단지 상부에 보고해서 두고 보자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리발마도 처음에는 불만이어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단리유아가 전음으로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말에 그만 생각을 접고 주변을 살피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곧이어 증과시리와 단리유아만이 한명의 수하를 뒤따라서 중원인이 갇혀있다는 석실로 향했다. 이윽고 안내하던 고수는 석문을 지키고 두 사람만이 석실내로 들어섰다. 단리유아가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 삼 장 정도 되는 단조로운 석실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도구도 없이 한쪽에 덩그러니 석침만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석침으로 다가가니 누군가 누워있는 모습은 보였지만, 머리끝까지 혈흔이 배여 있는 지저분한 천으로 덮여있는 상태였다. 호흡도 들리지 않아서 의아한 얼굴로 증과시리를 돌아보니 좀 전의 단호했던 태도와는 달리 어정쩡한 태도로 연유를 이야기해주었다. “흠. 단리대협, 이제야 말하는 바이지만 그 사람은 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소이다. 혹시라도 누군가 그 사실을 알고 구하러오거나 입을 막기 위해 올지도 몰라서 중상을 입은 것으로 가장했지요.” “뭐라구요? 그렇다면 더 이상 무엇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그저 그렇다고 미리 말하면 될 것이지 무엇 하러 이곳까지 저를 데려온 것입니까?”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곧바로 단리유아가 소리치듯 연달아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증과시리가 손을 들어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대꾸했다. “진정하십시오, 단리대협. 사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이곳에 있는 수하들과 본 계파의 수장이신 아난대성자 정도일 뿐입니다. 이렇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가장해서 이곳까지 단리대협을 모셔온 것은 이 일을 일으킨 자들을 속이기 위해서 부득이 그런 것입니다. 다들 오늘 일로 더욱 어떤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앞으로 뭔가 사단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저에겐 최소한 귀띔이라도 해주었어야 했을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죄송합니다. 부디 화를 푸시고 저희의 어려운 사정을 보아주십시오. 오죽했으면 저희도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거듭 저자세로 사정하는 증과시리의 모습에 단리유아도 더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사리발마와의 대화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여서 그리 놀람이 크지 않은 것도 한 이유였다. 비록 마음 한 구석에 불만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일단 생각을 가라앉히고 정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흥분하여 떠든다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날 가능성은 하나도 없었으니. ‘이리되면 가장 중요한 증인이 헛것이 되고 만 것인가? 틀림없이 이번 일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리라 예상했는데.’ 생각할수록 사건이 점점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아서 절로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다. 이제는 싸움의 흔적이 남아있을 비고(秘庫)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겠지만, 여태까지 그대로 흔적을 내버려두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 사람의 말대로 그런 이유로 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뭔가 자꾸만 내 일을 방해하거나 자신들 뜻대로만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들었던 그 괴성도 점점 더 의심스럽게 생각되는군. 분명 들었을 텐데도 모른 척하고 딴청을 부리는 것도 그렇고. 분명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어. 이렇게 가다가는 이들 뜻대로만 될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틀림없이 뭔가 빠뜨린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이들 비쉬누 일파에게 의지하는 면이 강해서 은연중에 이들을 믿고 있었지만, 분명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이들 사이에 있음이 틀림없었다. 갈수록 이들의 행동과 마주치는 일들은 자신의 의심을 부추길 뿐이었고 실망감만 늘어나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런 내색은 감추고, 초조한 얼굴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증과시리에게 말문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까지 속인 것은 정말 섭섭하군요.” “저도 어쩔 수 없었답니다, 대협. 아난대성자께서 함구하라고 명을 내리셔서.” 약간 밝아졌지만 여전히 곤혹스런 표정으로 증과시리가 대꾸했다. “그래요? 아난대성자께서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그 당시 곧 죽었다면 차라리 공표하고 이후의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더 나을 텐데.” “그건....” 증과시리가 대답하려다가 말문을 닫았다. 그 당시 공표했다면 약간이나마 의심을 벗어날 수는 있을 테지만, 전적으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비쉬누 일파가 져야했고 범인을 잡을 기회도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그리되면 비쉬누 계파의 세력약화는 뻔한 상황이었고, 아난대성자 역시 책임을 지고 당장에 물러나야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처음에 이 일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려는 생각으로 아난대성자가 시간을 끌고,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한다면 문주의 지위도 강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개인적인 야망이 강하게 작용한 바가 컸다. 그런 속사정까지 얘기해 스스로 치부를 들어낼 수는 없는 입장이었으니, 증과시리의 얼굴에는 난처함과 답답함만이 가득할 뿐 속 시원하게 말을 토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증과시리의 표정에서 단리유아도 그와는 상관없이 아난대성자에게 무슨 일인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난대성자라.... 설마 그 사람이 이 일을 벌인 것일까? 일부러 이런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이들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으로 꾸민 일일까?’ ‘이미 문주 위를 물러나겠다고 공표했다고 알았었는데.... 저번에 만났을 때도 별로 야심이 강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 허허, 참. 사람은 정말 겉모습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인가? 음, 이리되면 아무래도 아난대성자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할 것 같군.’ 잠시 생각해보다가 일단은 눈앞의 일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곧 몸을 돌려서 침상의 천을 걷어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이 사람이 곧바로 죽었다고 하셨습니까?” “아, 예. 사로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증과시리도 생각에 잠겼던지 얼떨결에 대답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곧바로 되물었다. “죽었다고 들었다는 것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닌가 보군요?” “음. 제가 수행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일이 벌어졌지요. 명목상이나마 제가 찰행합전의 전주여서 이 일을 맡게 되었지만, 사건이 흐른 지 오 일 후에야 저도 이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증과시리의 설명을 들으며 시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곳곳에는 자상과 타박상의 흔적이 엿보였고 무기에 관통된 상처도 몇 곳이 보였다. 보기 드물게 험악한 얼굴의 사오십 대의 중년인이었는데, 그들 말처럼 중원인이었지만 자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모든 고수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 일을 벌일 정도의 고수로서 이런 용모를 지닌 사람은 기억에 없었다. 입에 물린 오리알 만한 한옥주(寒玉珠)가 시신의 부패를 막아주어서 부패되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한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퍼렇게 변색된 시신의 모습이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 날짜를 예측할 수 없게 하고 있었다. “그럼 직접 이 사람의 모습을 본지는 언제입니까?” “그게 뭐 중요한 일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곧바로 죽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자꾸 단리유아가 시간을 물어보자 증과시리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물론 중요하지요. 정확한 시일을 알 수 있다면 앞으로 여러 가지를 추론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 말입니다.” “그렇기도 하겠군요. 흠, 가만 있어보자 내가 이 사람의 죽음을 직접 확인했던 때가 언제더라.... 수행을 마친 다음날 사건을 듣고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으니, 사건이 일어난 후로 칠 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군요. 제가 직접 확인한 날은 그때이지요.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죽었다고 말을 이으려할 때,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말을 가로막으며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상처가 심해서 죽었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심문하는 도중에 바로 죽은 것입니까?” “심문하려고 이자를 강제로 깨우는 도중에 그만 숨이 멎었다고 들었습니다. 단리대협, 왜 자꾸 그 일을 물으시는 것인지요? 뭔가 의심쩍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계속 물어보는 단리유아의 태도에 증과시리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아스런 얼굴로 반문하고 있었다. 그의 물음에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단리유아는 시신을 뒤집어보고 곳곳을 만져보고 있다가, 잠시 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저 확인 차 물어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라도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흠, 그런데 이 사람에게 독물이 묻은 무기를 쓴 적이 있습니까?” “독물이라니오? 본문은 그런 사악한 물건을 쓰지 않소이다. 물론 확실한 적과 싸울 때는 모르지만.... 그런데 독이라니?” 놀란 증과시리가 소리쳐 되물었다. 바라만겁문에서 상대가 먼저 독을 쓰는 경우에 한해서 공개적인 싸움일 때 쓰는 경우는 있어도 내부를 지키는 상황에서 쓰는 경우는 없었으니, 증과시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였다. 혹시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서 단리유아가 물어보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단리유아를 주시하며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뭐, 제가 잘못 보았을 지도 있겠지요. 저도 독물은 잘 몰라서....”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넘어갔지만, 시험 삼아 회공독결(回空毒訣)을 펼쳤을 때 독기가 흡수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터라 자신 역시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분이야 모르지만 독이라는 것은 분명해. 나의 회공독결에 반응하는 것을 보니 말이야.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일을 몰랐던 것 같은데?’ ‘하지만, 비록 아주 미세해서 알아차리기 힘들더라도, 이들 중에도 의독(醫毒)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심문하려고 일부러 투입시켰나?’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선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런 단리유아를 향해서 넌지시 증과시리가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혹시 기관을 통과할 때 발사된 물건에 묻어 있던 것이 상처 중에 스며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제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건성으로 단리유아가 대꾸하며 시신의 곳곳을 만져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 사인(死因)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다는 것으로만 결론을 내릴 수밖에는 없었다. ‘저 한옥주에 때문에 언제 죽었는지 알 수가 없군. 부패하는 정도라도 알 수 있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독이 발견되었지만 싸우는 중에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심문하려고 깨우기 위해서 극약을 쓰는 경우도 있으니. 사인은 치명상에 의한 과다출혈이 어느 정도 맞겠지만, 독이나 아니면....’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며 전신을 살피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내력을 두 손에 모아 전신을 쓸어갔다. 이미 혈맥이 굳은 뒤라 내력이 스며들지는 못했지만, 반발하는 정도의 차이는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시신을 뒤집은 상태에서 검사하는 도중에 심장의 뒤편에 해당하는 곳에서 미묘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다른 곳과는 달리 텅 빈 것 같이 내력이 깊이 침투했던 것이다. 두어 번에 걸쳐 확인해보고 내력을 거둔 다음, 손가락으로 직접 그 주변을 확인해 보았다. ‘이건.... 등뼈가 산산조각이 났군. 장력에 의한 것인가? 최심장(催心掌) 계통인? 심장에 아주 작은 구멍이 났을 것 같은데....’ 슬쩍 증과시리를 돌아보니 자신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 해부해보아야 하겠지만, 아마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으리라 생각되었다. “흠, 이 사람을 그냥 살펴보는 것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겠는데, 혹시 부검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귀문의 인사가 참여하는 가운데 저는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니....” 아무것도 모른 척 반대로 물음을 던지니, 증과시리가 숙연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 무슨 이상이라도 있습니까? 저희가 검시할 때는 너무 출혈이 심해서 죽은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는데....” “아니, 뭐 이상이 있다기보다는 부검해서 알아보는 것이 더 확실하게 생각되어서 말입니다. 저도 현인의 말씀이 맞다고는 생각하지만, 혹시 또 모르지 않겠습니까? 안 보이던 것이 보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단리유아가 변명했다. 사실 하면 좋겠지만, 이미 알아낼 것은 다 알아낸 뒤라 할 수 있었다. 단지, 이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흠. 그런 이유라면 곤란하겠군요. 지금 당장에는 이 사람을 나중을 위해서 그대로 보존했다가 다른 계파의 사람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에나 부검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여간 대협의 의견을 아난대성자께 말씀드려서 어찌해야 좋을지 물어보기는 하겠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그보다 이 사람이 지닌 소지품이 있을 텐데....”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화제를 돌렸다. 시신의 모습에서 사인은 어느 정도 확인이 되었지만, 언제 죽었느냐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시신의 상태만으로는 그 문제는 알 수가 없었다. 시신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더 없었으니, 이제 시신이 지녔던 물건들에서나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번 일 같은 경우엔 물증 자체의 단서보다는 그에 따른 정황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우선은 각각의 물증에서 의문점을 찾고 나서 나중에 다시 곰곰이 다른 것과 연계해서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또한 이들에게도 미끼가 아닌 이상에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들 역시 미덥지 못한 구석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혹(疑惑) 의혹(疑惑) 3 단리유아의 요청에 증과시리가 석침의 하단부를 열어젖혀 검은 색의 보자기에 감싸인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저 중원인이 지녔던 물건들인데, 본문에서는 별로 특이한 것을 찾지 못했소. 단리대협이 보시고 어떤지 판단해보시오.” 보자기를 받아서 풀어보니 도와 암기에서부터 피에 젖은 의복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들뿐이어서 무언가 더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실망하며 살피던 도중에 문득 물건 중에 이빨과 같은 형상을 한 것을 보고 만지려할 때, 증과시리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주의를 주었다. “단리대협, 그건 독단(毒丹)이니 주의하시오. 저자의 입속에서 빼낸 것인데, 우리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남만에 위치한 세금동(銴金洞)의 절명부세독(絶命腐銴毒)이라는 것이었소.” “세금동, 세금동이라....” 중얼거리며 단리유아는 생각에 잠겼다. 과거 남만을 돌아다닐 때 직접 싸워본 적은 없었지만, 세금동이 독으로서 독룡림(毒龍林)과 남만을 양분하는 세력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그들 중의 일부가 중원으로 스며들었다는 소식도 들은 바가 있어서, 이것으로 볼 때 그들도 천지신교와 무언가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세금동의 오대극독중의 하나지만 외부로는 유출된 적이 없던 것이라 알려져서 우리로서도 의아하기 그지없었소이다. 중원인이 그런 물건을 지니다니 말이오. 대협의 생각은 어떠시오?” 증과시리가 생각에 잠긴 얼굴인 단리유아를 향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제야 생각에 깨어난 단리유아가 독단을 다시 자세히 살피며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제가 남만을 지나쳤을 때, 일단의 독공을 익힌 고수들이 중원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독룡림이 움직인 적은 없다고 알고 있었으니 그럴 곳은 세금동뿐이라 생각되었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예, 아무래도 그때 잠입했던 자들과 상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중원으로 스며든 것을 알고 그렇지 않아도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천지신교에서 그들을 포섭했을 것이 아마 확실한 것 같습니다.” 단리유아의 설명에 증과시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며칠 전 단리유아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바라만겁문의 사람들 대부분은 설마 그런 거대한 세력이 있을까 반신반의하고 있었고 자신들과도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정황은 그들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상 물증은 없는 상황이었으니 여태까지는 단리유아의 말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었다. 비록 아직까지는 천지신교가 개입했다는 것을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증과시리가 생각해도 점점 더 단리유아의 얘기가 가슴에 와 닿음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침묵 속에 두 사람 모두 생각에 잠겼다가 단리유아가 먼저 물음을 던졌다. “흠. 이 사람에게서는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그때 침입했던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또 상처를 입은 사람도 만나 이야기해 보고 싶은데....”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음, 상처를 입었던 사람 중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내일 단리대협을 찾아가도록 내 조치해주겠소. 그리고 중상을 입은 사람이나 시신은 제의행전(濟醫行殿)에 있으니 당장이라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오.” 증과시리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일단 오늘 오후는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 조사하는 것으로 하고 그 문제는 내일 자세히 조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중원인에 대한 조사는 이정도로 하고 나중에 의심이 생기면 다시 살펴보기로 한 후에 석실을 정리하고 나가려할 때, 증과시리가 단리유아에게 머뭇거리며 요청했다. “대협, 잘 아시겠지만 이 사람에 대한 일은 잠시 비밀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마십시오.” “사리발마 스님께도 말입니까?” “가급적 그 사람에게도 비밀을 지켜주시면 좋겠지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일이니. 게다가 혹시라도 누군가 납치해서 고문이라도 한다면....” 말끝을 흐리는 증과시리를 보면서 단리유아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납치해서 고문한다라.... 흠, 만일 누군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속으로만 계획을 세우고는 곧바로 먼저 석실을 나섰다. 별다른 물음이나 반대도 없이 찬성하는 단리유아의 모습에 마음이 가벼워진 가운데에도 의아함이 치밀어 올라 증과시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건대 뭔가 알아차린 것도 같은데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니 갈수록 단리유아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져갔다. 처음에는 그의 명성을 이용해서 이번 일의 진위를 흐리고 적당한 때에 자신들 계파에서 나서서 사건을 해결했다고 공표하며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자신들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일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증과시리의 마음이 복잡할 때, 단리유아 역시 알아낸 것이 얼마 없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속마음을 숨긴 채 석실을 나온 두 사람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일행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사리발마나 장로들 모두 두리뭉실하게 둘러대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거듭 캐묻고 있었지만 얻은 소득은 이전과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곳의 일은 이것으로 마치고 점심을 든 후에 사건의 현장을 둘러보기로 하고 일행은 그만 참회옥을 나가기로 했다. 증과시리를 선두로 해서 장로들이 그 뒤를 잇고 단리유아와 사리발마는 맨 뒤에서 뒤따라서 나가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음성이 단리유아의 귓전을 두드렸다. <자네는 누구인가? 크크, 본문의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거칠고 늙그스레한 목소리에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는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좌우의 석실에 수감된 사람 중에서 누구가가 자신만을 목표를 삼아 심어류의 전음을 보냈다는 것을 알고, 단리유아 역시 혜광심어(慧光心語)로 좌우의 석실을 향해서 물음을 던졌다. <누구신지요?> <시간이 얼마 없어. 우선 자네가 누구인지나 얘기해봐.> 곧바로 퉁명스레 재촉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왼쪽 두 번째 석실에서 들려오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단리유아가 그곳을 향해 심력을 집중했다. <바라만겁문에 들렸다가 이번에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게 된 단리유아라는 사람입니다.> <자네가 바로 그 중원인인가? 후후, 배타적인 그 늙은이들이 자네에게 일을 맡기다니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군 그래.> <....> 그의 말에 수감된 사람이 누구인지 의아했지만 들려오는 사람의 어조로 보아서는 십대성자보다 배분이 낮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단리유아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흐흐, 어쨌거나 이것이 나에게는 마지막 남은 기회겠지. 자네, 오늘밤 중으로 이곳으로 찾아올 수 있겠나? 이곳을 지키는 염마의 귀신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말이야.> <음, 가능은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잠시 생각해보던 단리유아가 대답하며 이유를 물으니, 곧바로 말을 자르면서 노인이 희색이 만연한 목소리로 멋대로 소리쳤다. <푸하하하! 좋아 좋아. 자네의 무공이 그리 대단하다면 나에게는 더욱 좋은 일이지. 흐흐흐, 그 늙은이 들에게 톡톡히 앙갚음할 수 있을 테니.> <무슨 일인지 지금 가르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흐흐, 그 긴 이야기를 지금 다 듣겠다고. 흥!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그냥 가. 이따가 다시 얘기해줄 테니. 이번 일과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만 명심하고 말이야.> 노인의 말에 단리유아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지금 조금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노인은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의문이 쌓이던 중이어서 자신 역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답답한 상황이었으니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 있었다. 참회옥을 통과하여 이곳까지 비밀리에 들어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는 일이겠지만, 자신이 전력을 다하여 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서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물음을 던졌다. <아까 전에 소리쳤던 것이 선배님입니까? 아니면, 저쪽의....> <흐흐, 내가 아니라 저쪽에 갇힌 녀석이 소리친 것이지. 크흐흐, 어린놈이 불쌍하게도....> 노인의 말에 마침 또 다른 기척이 느껴지는 입구 쪽에 위치한 석실 근처에 다다랐던지라 힐끗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들창까지 닫힌 상태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심히 얼굴을 돌려서 계속 걸음을 옮기다가 삼층의 입구를 지나치려고 했을 때, 노인의 거듭 강조하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지 마라. 절대 오늘밤 안으로 와야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때 뵙기로 하지요.> 단리유아가 짤막하게 대꾸하며 석문을 나섰다. 자신의 행동을 주시하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들 역시 별다른 이상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노인이 누구인지 무슨 일인지, 또 다른 석실의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함이 가득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한편 일행이 참회옥에 들어갔을 무렵, 바라만겁문의 한곳 밀실에서는 이번 일의 주모자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가 볼 때, 단리유아가 이번 일을 알아낼 가능성이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은은히 초조함이 깃든 휘장 뒤의 목소리에 전면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복면인이 대답했다. “쉽지는 않을 것이지만, 혹시나 사로잡혔던 밀영(密影)이 발설하게 된다면 저희를 찾아내는 것은 시간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놈이 외부에서 일어난 일들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파고든다면 나머지 수하들의 은신처 또한 위험할 것입니다.” 복면인이 냉정한 목소리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강조하며 한시라도 빨리 떠나자는 의도를 내비추고 있었다. 휘장 뒤의 인물 역시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지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은 채 욕설만 내뱉고 있었다. “제기랄! 하필이면 참회옥에 밀영을 숨겨두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군. 다른 곳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텐데.... 게다가 그 늙은이조차 갑자기 연락을 끊고는 나 몰라라 하고. 흥! 이제 와서 지 마음대로 관계를 끊겠다고? 흐흐흐, 늙은 너구리가 그래 봤자지. 나도 그렇게 나온다면 생각이 다 있으니....” “마존, 속하가 생각하기에 그 인간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전에 일어난 일도 그 자가 제대로 알려주었다면 수하들의 희생이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끝날 수 있었습니다. 분명 그 늙은이가 딴 꿍꿍이속이 있어서 우리를 속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난번에 일어난 사고를 언급하면서 복면인이 그만 포기하고 탈출하기를 바랄 때, 곧바로 휘장 뒤에서 윽박지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흥! 시끄럽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느냐?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 앞으로 그놈에 대한 것은 더 얘기하지 마라! 흐흐흐, 그놈이 우리를 이용할 생각이겠지만 두고 보면 누가 이용당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니....” 말끝을 흐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을 때, 불만이 가득했던 복면인은 휘장을 노려보며 속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노괴물아! 넌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바보 멍텅구리에 불과하단 말이다. 으드득! 서열만 높지 않다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떠났을 텐데. 제기랄, 늙은이가 무슨 쓸데없는 욕심은 그리 많은지....’ 이번의 일도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해서 성자 중의 한명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했었다. 그자의 도움으로 생각보다는 쉽게 탈취할 수 있었지만, 그에 반해서 자신들의 종적이 드러난 것은 고의인 것 같았기에 갈수록 의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눈앞의 욕심에 빠져서 제대로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군. 한시 바삐 이곳을 떠야하는데도 지놈에게 유리한데로만 생각하고 시간이나 끌고. 성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그놈의 말이나 믿고 말이야. 그놈도 이젠 우리에 대해서 거의 다 파악했을 테니, 여차하면 우리를 잡아들여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려고 할 텐데.’ 한참 서로의 생각이 맞부딪치고 있을 때, 휘장 뒤에서 넌지시 떠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너의 능력으로도 참회옥을 탐지할 수 없겠느냐? 밀영을 살인멸구할 수 있다면 단리유아 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을 텐데.” “마존께서는 제가 죽기를 바라시는 것입니까? 참회옥의 다른 곳은 모르지만 염마팔영은 각각으로도 저보다 고수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도 일장박투는 피할 수 없음을 잘 아시면서 왜 자꾸 그 말을 꺼내시는 것입니까?” 불만을 숨기지 않은 채 복면인이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자신으로선 그놈을 믿을 수 없었고 상황도 점점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아서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음에도 휘장 뒤의 노물은 그놈만 믿고 미적거리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노물을 암살하고 혼자서 탈출할지 아니면 잠시 더 기다렸다가 함께 탈출하는 것이 나을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었다. “크큿. 네가 감히 본좌에게 따지는 것이냐! 잊지 마라! 나중에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이번 일을 맡은 사람은 본좌라는 것을.” 휘장 뒤에서 곧바로 살기에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무형 중에 복면인을 압박해갔다. 속으로야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일단은 그런 마음을 숨기고 짐짓 무서움에 질린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복면인이 애걸했다. “속하가 잠시 경망되게 나섰습니다. 제발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흥!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상황이 다급하지 않았다면 네가 소속이 다르다고 해도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 “속하 마존의 은혜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거듭 고개를 조아리며 중년인이 감읍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휘장 뒤에서 기고만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흐흐, 그럼 그래야지. 음, 일단 밀영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결정하기로 할 테니 네가 단리유아가 밀영과 만나서 어찌되었는지 조사해서 다시 보고해라. 그 다음에 최종적으로 결정할 테니. 뭐 밀영이 떠벌렸다면 우리도 위험할 텐데, 아직까지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을 보면 우리에 대해서 발설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명령에 고개를 숙이며 중년인이 복명을 외쳤지만, 마음은 점점 더 암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실제 귀빈전을 에워싼 바라만겁문의 고수들 때문에 단리유아에게 접근하기도 어려웠지만, 통과했다고 해도 혹시라도 자신의 기척을 발견했다가는 바로 끝장이었다. 어차피 바라만겁문에 뒤집어씌울 수도 있으니 암살은 큰 문제가 아니었고, 단지 노물의 무공이 자신보다는 강한 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승자가 되는 경우는 없듯이 저 늙은이도 자신의 암습 앞에서는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복면인은 점차 그렇게 결심을 굳히며 암살을 위한 준비와 탈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의혹(疑惑) 의혹(疑惑) 4 한편, 참회옥을 나와 헤어졌던 일행은 미시(未時:13-15시)경에 다시 모여 비쉬누의 대탑으로 향했다. 만신전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증과시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직까지도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지요?” “현재로선 수리에 들어가지 않고 있소이다. 하루라도 복구해야하겠지만, 다른 계파에서 결사코 반대하는 상황이어서....” 그로선 마음이 들지 않은 상황이라서 증과시리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답하고 있었다. 단리유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걱정스런 어조로 말을 받았다. “제 입장으로야 반가운 일이지만 현인께서는 심려가 크겠군요. 보기 흉할 텐데도 당분간은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할 테니.” “그렇지요. 저희들로서도 범인에 대한 윤곽을 잡기 전에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휴! 정말 하루 속히 일이 해결되어 탑을 수리해 비쉬누 신의 노여움을 풀어드려야 할 텐데....”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증과시리가 대답했다. 잠시 말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탑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무렵, 단리유아가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비고까지 조사가 가능하겠습니까? 저번에 성자분들께서는 반대하는 것 같던데?” “그 문제는 단리대협의 뜻대로 조사할 수 있도록 결정이 났습니다. 이미 중요한 물건들은 다른 곳으로 옮긴 후이라 별 상관이 없다고 보시는 것 같더군요.” “다행이군요. 혹시라도 완전히 조사할 수 없을까봐 근심이 되었는데.” 단리유아가 대꾸하다가 눈앞에 다가온 처참하게 파손된 탑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높이가 십칠여 장이 넘을 정도로 높이 치솟아 웅장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하단부의 모습은 곳곳이 파손되어서 마치 인간의 배신으로 고통 받고 있는 신의 얼굴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곳곳의 신상들이 조각난 채 사방으로 널려있었고, 휘황찬란했을 벽화들도 본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뜯겨져나간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서 사방으로 검붉게 굳어진 핏자국들이 묻어 있는 상황이어서, 정말 당시의 소란이 어느 정도로 끔찍했었는지 생생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단 삼인의 도둑에 불과했지만 대협께서도 보다시피 그 피해는 막심하오. 감로신수나 기타 보물이 도난당한 것도 큰일이지만, 신께 봉헌된 탑의 모습이 이 꼴인 것도 결코 그에 못지않은 큰일이지요.” 낙심천만한 표정으로 증과시리가 중얼거릴 때, 단리유아가 침통한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흠. 외인인 저 역시 동감이 되는군요. 저 모습을 보니 하루빨리 이 일을 해결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소이다. 서둘러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원래대로 복구해야하오.” 잠시 대탑의 전면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서로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고, 분개한 표정으로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한다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중원인을 욕하며 은근히 단리유아를 압박하는 사람도 있을 때, 단리유아가 증과시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보고서에는 찰합리 성자 휘하의 고수들이 경계를 서고 있을 때 사건이 일어났다던데, 정확히 언제 일어난 일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믐날 자정에 가까워졌을 무렵에 사건이 일어났지요. 보고서를 읽으셨다면 대협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왜 물어보냐는 듯이 증과시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다른 사람들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터라 단리유아의 대답을 기다리듯 다 같이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제가 여쭈었던 것은 그들을 발견하고 싸운 시각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자료들을 뒤져보면 그 세 중원인이 정확히 언제 침투했었는지는 어디에서도 말이 없더군요. 다들 싸움이 벌어진 시각만 기술해놓고 말이지요.” “그거야 그날 저녁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단리유아가 의문스런 얼굴로 되물을 때, 이해할 수 없는지 증과시리가 곧바로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렇다면 대협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 이전에 침투해서 때를 기다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거듭되는 단리유아의 물음에 증과시리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모습이 되어갔다. “그건....” “제가 알기에 그날 저녁에 찰합리 성자 휘하의 고수들이 교대했고, 그 이전까지는 아난대성자 휘하의 고수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경계가 가장 흐트러졌을 때를 생각해보아도 교대하는 순간이 가장 침투하기 쉬운 시간이지요. 물론 다른 때라도 가능은 하겠지만....” 가장 의심스러운 일이라 생각되어서 단리유아는 증과시리의 얼굴 변화를 자세히 살피며 은근히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증과시리의 얼굴에서는 약간 당황하는 표정만 보일 뿐 그다지 이상스러운 징후는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대탑 외부에 경계를 서던 사람이 이십사 명이었고, 내부에서 지하의 기관 입구에 이르기까지 다시 여덟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예. 평소 그렇게 해왔지요. 그 위치는....” 수리살타가 대신 나서서 대꾸하며 그 위치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외부는 탑의 사면을 따라서 다시 탑신을 올라가며 각기 배치되는 구조였고, 내부 역시 천장과 각기 구석을 은신처로 삼아서 경계하는 구조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단리유아는 자신이라도 침투가 용이하지 않은 배치라 생각했다. 정말 어떻게 들키지 않고 침투했는지 갈수록 의문이 커져갔는데, 나중에야 발각되어서 접전이 벌어졌다고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들어갔는지가 진실에 접근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무리 그들이 고수들의 위치와 교대시간 등을 알고 있다 해도 들키지 않고 침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단리유아의 물음에 다들 생각에 빠졌다. 증과시리나 수리살타는 당황해서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조사해보았지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단리유아가 자꾸 자신들 중의 누군가가 협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투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자, 수리살타가 난처한 국면을 전환하고자 다른 쪽으로 질문방향을 바꾸었다. “단리대협의 생각대로라면 아무 흔적이 없이 빠져나가는 것이 또한 정상이 아닙니까?” “....” “그 이전에 빠져나갈 수도 있으면서도 뒤늦게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인데, 발각되어 자신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는데 일부러 그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한동안 수리살타의 반론을 듣고만 있던 단리유아가 잠시 후에 슬쩍 주위를 돌아보면서 이야기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요. 뭔가 사고가 생겨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다가 발각되었을 수도 있을 테니. 뭐, 이것이야 단지 정황에 비춘 저의 추론에 불과하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아직 완전하게 조사한 것은 아니니.” 일행이 다들 생각에 잠겨 말이 없을 때, 단리유아는 먼저 대탑 안으로 들어섰다. 탑내를 둘러보니 내부 역시 곳곳이 파괴되어 있었고, 검흔이나 장흔, 혈흔 등이 도처에 남아 아수라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로 장흔은 바라만겁문의 고수들의 흔적이어서 제외하고 나머지 흔적들을 유심히 살폈다. 검흔의 각도와 위치, 피가 튀겨나간 상태로 어떤 자세로 공방을 펼쳤는지 판단해보고 있었다. ‘검흔을 보았을 때는 두 손으로 검을 쥐는 형식이고 벽자결(劈字訣)이 주된 것 같은데. 흠, 일수에 각기 사혈(死穴)을 노리는 살수검의 일종이고,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군. 처음에는 위에서 덮쳤다고 보아서 이해가 되지만 나중에도 다시 신형을 솟구쳐 떨어지며 공격하다니.... 이런 수법은 흔하지 않은데....’ 수법으로 보아서 어느 정도 검법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어서 즉시 몇 가지 무공이 떠올랐지만,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니 정확한 것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그 생각은 접고 머릿속으로 그 당시의 광경을 재현해보았다. 구석진 곳의 혈흔으로 보아 전내에 있던 네 명이 제일 먼저 죽음을 당하고, 그 뒤 외부의 고수들이 뛰어들며 싸움이 이어진 것 같았다. “이 쪽에 있던 사람은 암기에 죽은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제일 먼저 수리표에 미간이 관통당해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면 좌측 구석의 핏자국을 바라보며 물음을 던지니 곁으로 다가온 수리살타가 설명해주었다. 지하로 통하는 층계의 입구에도 혈흔이 엿보였는데, 그것으로 보아서는 이미 일을 끝마친 상황에서 격전이 벌어지는 것을 듣고 올라오다가 죽은 것으로 보였다. 상황으로 보아서는 그 뒤 곧이어 외부의 고수들이 들어오며 격전이 벌어지고, 그들을 돌파하며 달아나는 와중에 외부의 건물들도 파괴되었을 것이다. ‘흠. 대충 어떻게 싸움이 진행된 것인지는 알겠군. 그런데 내부에는 여덟 명의 고수들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나머지 두 명은 어디에서 당한 것이지?’ 모두들 말없이 생각에 잠긴 단리유아를 주시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천정을 가로지르는 들보 위로 뛰어 올랐다. 바닥과는 삼 장 정도의 높이에 위치한 들보는 폭이 한 자 정도로 넓고 가로 세로로 각기 세 개씩이 교차하는 상태라 누군가 숨는다면 쉬이 찾을 수 없는 구조였다. 중앙의 들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방원 칠 장여의 탑 내부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될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조심하며 들보 위의 먼지에 남은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이미 바라만겁문에서 조사하며 다녔는지 여기저기 발자국이 남아서 제대로 분간을 할 수 없었지만, 두 곳에서 혈흔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들 두 사람을 죽이는 도중에 뭔가 실수로 발각된 것 같았다. ‘자, 여기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두 명을 죽였다고 생각할 때에 왜 그렇게 했어야만 했을까? 만일 누군가의 협조로 침투했다면 탈출 때도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었을 텐데.’ ‘뭔가 이상이 생겨서 늦어졌을까? 아니면, 일부러 의도적으로 시간을 늦춘 것은 아닐까?’ 잠시 왜 싸움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보았지만 지금까지의 단서로는 확실히 파악할 수 없었다. 일단 어떻게 해서 싸움이 벌어진 것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이 숨어 있었을 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분명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가 움직이는 도중에 이곳을 지키던 고수들의 눈에 띈 것이겠지. 아래는 눈에 쉽게 띄는 편이라 딱히 숨을만한 곳이 없는 것 같아. 그렇다면 여기 어딘가라는 것인데....’ 틀림없이 들보와 천장 사이의 어떤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라 여겨 천정과 들보 사이를 세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탁! 탁!”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벽과 천정, 기둥을 두드리거나 만지며 돌아다니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서쪽 중앙의 창문에 해당하는 곳 근처 천정에서 이상함을 발견했다. 두 자 정도에 이르는 사각형의 석판 속이 빈 것 같았는데, 기관으로 여는 것인지 손으로 밀어보려고 하니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을음 같은 것이 금 주위에 칠해진 상태여서 주위와 구분이 가지 않았는데, 창문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두 개의 신상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빛이 들보에 반사되어 주위와 구별되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무심결에 그대로 지나쳤을 것이다. “스스슥” 기관을 찾아보다가 가운데를 축으로 두 개의 석상을 반 바퀴 돌리게 되었을 때, 천장의 석판이 소리 없이 위로 들려지며 입구가 열렸다. 올라가 들어서니 방원 일장 정도의 밀실이 나타났다. 비좁았지만 세 사람이 숨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이곳이 은신처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이런 곳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만들어진지도 일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그들이 직접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 분명 누군가가 이곳을 가르쳐주었을 텐데....’ 내부에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대체로 깨끗해서 별다른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대로 밀실을 빠져나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단리대협, 그 위에 뭐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기다리던 일행 중에서 수리살타가 궁금한 표정으로 곧바로 반문했다. “위에 밀실이 있던데 모르셨습니까?” “아니 밀실이라니오? 금시초문인데. 잠깐만,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깜작 놀란 수리살타가 소리치며 다급하게 뛰어올라갔다. 곧이어 놀라 외치는 수리살타의 목소리가 아래에 있던 일행의 귀에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런 곳에 밀실이 있다니! 누가 이런 것을 만들었지?” 그 소리에 잇따라 다른 사람들도 뛰어올라가 밀실을 보며 다들 경악한 얼굴로 크게 떠들고 있었다. 곧이어 하나둘 다시 아래로 내려왔을 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단리유아가 증과시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증과현인께서도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십니까?” “그것은.... 자네가 말해보게. 그동안 난 수행중이어서 어찌된 일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하군. 본래 이곳에는 밀실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증과시리가 수리살타를 향해서 대신 설명을 부탁했는데, 말하는 중에도 그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인지 그 얼굴에는 황당함과 놀람이 가득했다. “저로서도 도대체 어찌된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대체 언제.....” “잠깐만, 두 분 다 모르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경계가 삼엄한 곳이니, 저런 것을 만들려면 누군가의 시선에 띄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단리유아가 말을 가로막으며 되물었지만, 수리살타 역시 어찌된 일인지 몰라서 곤혹스런 얼굴로 겨우 말을 이을뿐이었다. “글쎄 말입니다, 단리대협. 저 또한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정말 저런 곳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른 계열의 장로들도 의심스런 얼굴로 물음을 던지기도 했지만, 증과시리나 수리살타의 모습에서는 자신들 역시 몰랐던 것 같았다. 한동안 떠들다가 다들 누가 만든 것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한쪽의 사리발마가 증과시리를 향해서 말문을 열었다. “흠! 현인께 제가 한마디 물어도 되겠습니까?” “해보게.” “단리대협의 말씀대로 저 밀실을 만들려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평소에는 만들 수 없을 테니 분명 이 탑을 손볼 때 만들었을 것입니다. 만든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으니 최근에 수리한 때를 알면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증과시리가 고개를 돌려 답을 하라는 듯이 수리살타를 바라보았다. 주위의 시선이 모여 일제히 수리살타에게로 향할 때, 수리살타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일 년 전쯤에 벽화를 다시 손보고 훼손된 석상도 교체한 적이 있습니다. 사흘 정도 걸렸는데, 그럼 그때?” “그때 누가 그 일을 맡아서 했습니까?” “그거야.... 설마....” 수리살타가 당혹해하며 말을 잇지 못할 때, 사리발마가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누구입니까?” “으음. 아난대성자께서 휘하의 고수들을 지휘하여 수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지하의 통로는 완전히 봉쇄한 상태로 수리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지요. 하지만, 문주께서....” 힐끗 증과시리를 돌아보다가 수리살타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곧바로 좋은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각 계열의 장로들이 비난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흥! 아난대성자가 그러지 않았다면 누가 그럴 수 있단 말이오? 그때를 제외하곤 저것을 만들 시간은 없었을 텐데....” “저것을 보니 틀림없이 이번 일도 아난대성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 분명하오.” “맞소이다. 더구나 그의 제자가 문제를 일으켜 갇힌 때도 그때였잖소. 혹 그 일도 지금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오?” 장로들의 말에 증과시리나 수리살타가 아난대성자께서 그럴 리 없다고 맞받아치며 온힘을 다해 해명하려했지만, 그들 역시 속으로는 의심이 늘어가는 상태여서 목소리에 그다지 힘이 없었다. 잠시 소란스런 장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을 살피기만 하던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양쪽을 말렸다. “모두 그만 하십시오. 지금으로선 아직 단언할 수 없으니.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따로 조사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보아도....” 장로중의 한명이 끼어들어 재차 아난대성자가 의심스러움을 강조하려할 때,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됐습니다.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니 나중에 자세히 조사한 뒤에 어찌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 내일 오전에는 제의행전에 들릴 예정이니 증과현인께서는 오후에 이 일을 맡았던 사람들을 제게 보내주십시오. 그 일을 직접 맡아서 실행했던 장인이나 고수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내주시고 그 일에 관계된 서류도 가져다주십시오. 이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들 익히 아시리라 믿으니 행여나 착오가 없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수리살타가 나서서 반대하려할 때, 증과시리가 그를 제지하며 대답했다. “휴! 알겠소. 내 그리하리다.” 다른 계열에서도 이미 알게 된 이상 자신들이 거부한다고 해도 오히려 의심만 가중될 뿐일 테니 증과시리가 보기에는 그대로 승낙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 역시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지만, 점점 더 아난대성자가 의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여서 복잡한 심정으로 승낙할 수밖에는 없었다. 비고(秘庫)의 함정 비고(秘庫)의 함정 1 단리유아가 생각하기에 밀실이 발견된 것은 이번 일에 복합적인 요인이 더해져 있을 것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정말로 그들이 비고까지 들어갔다가 나왔는지도 의심스러웠는데, 차라리 교대 순간에 숨어 있다가 누군가 전해주는 것을 받았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였다.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왜 이곳까지 들어와서 주고받았는지, 왜 혈전을 벌여야했는지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 머리가 복잡했다.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복잡한 생각을 떨치고 일단은 비고에 들려보기로 했다. 곧이어 증과시리를 향해서 자신의 의향을 전했다. “일단 이 문제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지금은 지하비고를 살피고 싶으니 그곳에 가보도록하지요.” “굳이 볼 필요 있겠소? 우리들이 조사할 때는 어떤 흔적도 없었는데.” 증과시리가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곧이어 장로들 역시 그 일은 별 소용이 없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렇소. 이미 중요한 단서를 찾았는데, 뭐 하러....” “아닙니다. 그들이 남긴 흔적이 없다 해도 우리는 이것에서 또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정말로 들어간 것은 확실할까 하는 의혹을 풀어줄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르니까요.” 장로의 말을 가로막으며 사리발마가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사리발마의 얘기에 단리유아가 그를 향해 빙그레 웃음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사리발마 스님의 말씀이 맞소이다.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니 말입니다.“ 두 사람의 말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지 비고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도 이내 동의를 표했다. 곧이어 수리살타를 선두로 해서 다들 지하의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단리유아가 수리살타를 향해서 궁금한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기관이 펼쳐진 곳이라 하는데, 혹시 지금도 기관이 작동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해제해서 비고까지는 그대로 들어갈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미리 확인해 보았으니 틀림없습니다.” 벽에 붙은 유등과 천장에 박힌 야명주 덕분에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지만, 지하의 습기와 탁한 공기는 어쩔 수 없는지 다들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득히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의 반향이 뭔가 불안감을 일으키고 있을 때, 일행은 나선형의 계단을 돌고 돌아 이십여 장을 내려가 비고의 입구 가까이에 이르렀다. 선두에 섰던 수리살타가 마지막 계단을 딛고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쉭. 쉬식!” 갑자기 좌우 측면과 전면에서 일제히 강침류의 암기가 일행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두 조심하시오!” 단리유아가 먼저 이상을 알아차리고 수리살타를 잡아 젖히며 소리쳤다. 곧바로 전방으로 앞서나가 사방으로 움직이며 쏟아지는 천공침(穿孔針)을 쳐내기 시작했지만, 비좁은 공간에다가 사방에서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철침들을 완벽히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타탁탁!” “으윽. 윽” 워낙 뜻밖에 일어난 일이고 다들 방심한 상태여서 각자 자신을 보호하며 막아서고 있었지만, 미처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한두 군데 암기에 맞고 있었다. 그나마 단리유아가 거의 쳐내어버린 뒤라 대부분은 튕겨진 철침들에 맞는 경우였고, 요행히도 치명상은 피하고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스르릉! 쿠쿵!” 동시에 후면에서 철벽이 내려와 일행의 퇴로를 봉쇄했다. 다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장로 중의 한명이 힐끗 돌아보다가 소리쳤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기관을 멈추었다면서!” “이럴 수가! 어떻게 기관이....” 정신없는 얼굴로 수리살타가 무심결에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 역시 놀라고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들 철침을 막아서기에 바빠서 제대로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는데, 한참 쏟아지던 철침의 비가 멈춘 뒤에야 일행은 자리에 널브러진 채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잠시 가쁜 숨을 고르며 침을 뽑아내고 상처를 치료하던 일행 중에서 아까 소리쳤던 장로가 증과시리와 수리살타를 향해서 따지고 들었다. “기관이 멈추었다면서 이게 어찌된 것이오? 당신들이 우리 입을 막으려고 이런 것은 아니오?” “그렇소! 어서 해명하시오, 대체 어찌된 일인지!” 다른 계열의 장로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치며 두 사람을 압박해나갔다. 장로들의 외침에 말없이 생각에 잠긴 증과시리와는 달리 수리살타는 곧바로 맞받아치고 있었다. 그 역시 어찌된 일인지 몰라서 잔뜩 울화가 치민 참이라 튀어나가는 말도 자연 거칠었다. “뭐요? 아무려면 스스로 위급한 지경에 처하기를 바란단 말이오? 세상에 그런 바보천치가 어디 있단 말이오?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해 죽겠으니 그만 입 닥치고 생각할 시간이나 주시오.” “뭐라고! 당신 지금....” 서로가 설전을 벌이며 사방으로 침을 튀기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나서서 일행을 향해서 소리쳤다. “잠깐!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오. 어찌 되었든 이곳을 나가야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그 문제는 나간 뒤에 다시 따져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어찌할지나 우선 생각해봅시다.” 단리유아의 외침에 누그러졌지만, 양편으로 나뉜 채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단리유아가 뒤편으로 다가가 철벽을 두드려보며 증과시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반 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어떻게 기관을 움직일 수 없겠습니까?” “이곳에서는 움직일 방도가 없소이다. 본래가 외부의 침입 시에 비고를 수호하고자 만든 것인데, 이곳까지 철벽이 내려온 것을 보면 아홉 개의 철벽이 모두 내려진 것 같소. 밖에서 해제한다고 해도 하루에 하나씩만 기관으로 해제해야 하고, 만일 한 개 이상을 열려고 한다면 자폭하여 통째로 이곳이 내려앉게 되는 구조이오.” 증과시리의 말에 다들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간이 흐르면 일행이 갇힌 것을 알게 될 테니 구일간만 어떻게 버티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일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전혀 뜻밖에 일어난 변고를 보아서는 앞으로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깨뜨리고 나가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단리유아의 물음에 다들 놀라는 와중에도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증과시리의 얼굴을 기대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모두 한철로 이루어진 것이라오. 게다가 실제 깨뜨린다고 해도 아까와 마찬가지의 상황에 이를 것이오.” “확실합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렇소. 안에서 깨뜨려본 적은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증과시리가 대답했다. 단리유아는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해야할지 생각해보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반자 두께의 철벽을 깨뜨리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실제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고자 한다면 가능했지만, 문제는 기관이나 이곳의 구조를 제대로 모르는 상황이라서 무작정 깨뜨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증과시리의 말대로 무너진다면 자신은 어떻게든 뚫고 나갈 자신이 있었지만 일행의 생사는 절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흠! 그럼 천상 기다릴 수밖에는 없단 말입니까? 기다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혹시 이곳 건물의 전체구조를 알 수는 없겠습니까?” 단리유아로서는 오늘밤 중으로 참회옥을 찾아가봐야 하는 입장이라서 그때까지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더구나 기다리는 도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가만히 있는 것도 상수는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휴! 내가 아는 것도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오. 대충 어떻게 생겼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세하게는 모르오. 이곳의 구조는 십대성자의 위에 오른 사람만이 알 권리가 있는 기밀이라서 말이오.” “대강이라도 좋으니 제게 알려 주십시오.” “아니 뭐하려고 그러십니까? 어차피 기다리면 기관이 열릴 텐데. 괜히 기관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니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지요.” 수리살타가 나서서 단리유아를 만류했다. 사리발마나 다른 사람들도 말은 없었지만, 만류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는지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무턱대고 기다리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외의 상황이 벌어졌으니 무작정 기다린다고 또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을 것이니. 어쨌든 모든 방법을 써봐야 하고, 혹시 비고의 심처에는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모든 방법을 찾아봐야할 것입니다.” “허허, 단리대협은 포기를 모르시는구려. 다른 사람들은 걱정하기에 바쁜데도 빠져나갈 생각부터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증과시리가 빙그레 웃음 진 얼굴로 대꾸했다. 가볍게 실소를 흘린 뒤,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받았다. “사람의 반응이란 다 제각기이지요. 하지만, 경험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이지 그 본질을 파고들면 다들 똑같습니다. 저 역시 한편으론 두려움을 느끼고 당황스럽지만, 다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생각하는 것이 클 뿐이지요.”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막상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지요. 흠, 나 역시 대협의 말을 들으니 힘이 나는 것 같구려. 이번 일이 내가 생각해도 석연치 않고 갈수록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도 내심으론 당황하고 낙심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증과시리가 대답한 뒤, 잠시 씁쓸한 얼굴로 탄식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휴! 단리대협. 외부인인 그대가 이런 일까지 겪게 되어 나로서도 미안하기 그지없소이다. 사실 나의 입장으로선 본 계파의 입장을 우선해야 해서 여태까지는 소극적으로만 움직이고 있었지요. 하지만, 나도 오늘 일을 겪어보니 어떤 일이 정말로 본문을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오. 앞으론 보다 적극적으로 대협에게 협조하겠소. 그것이 비록 본 계파에 막대한 타격을 가져오는 일일지라도 말이오.” “저도 현인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분명 이 일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음모가 끼어들어 있습니다. 이곳의 기보를 다른 곳으로 옮기며 기관이 멈춘 것을 확인했었고, 오늘 아침에도 틀림없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리살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증과시리의 말에 동조를 표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흔쾌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두 분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도 이 일을 조사하면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지요. 외부인의 입장이라서 섣불리 깊게 파고들 수는 없는데다가 도움을 청할 사람도 마땅히 없는 처지라 누구에게 제대로 묻고 의논할 상대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단리유아로서야 두 사람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후에 일을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가 기관을 작동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오늘의 일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라 여겨지기도 했다. 잠시 서로간의 의견이 조율되는 시간이 이어지다가 증과시리가 비고 내의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대강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전해준 뒤에 걱정스런 어조로 덧붙였다. “본래 그렇게 십구 개의 관문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지만, 기관이 작동된 후에는 어떻게 변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오. 일단 저 입구를 들어서면 미로와 같이 석도가 계속 변화하고 함정이 계속 펼쳐지니 말이오. 그런데 정말 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오? 지금으로 보아선 모든 기관과 함정이 다 작동하는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통과한 기관을 제대로 조사해보고 싶었는데,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을 테니 전 오히려 기대가 되는군요.” 다들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즐겁다는 듯 농담을 던졌다. 일행 모두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만류하고 싶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인 터라 단리유아의 생각을 막을 수도 없었다. “내가 언뜻 들었던 바에 의하면 비고 내에도 기관을 제어하는 곳이 있다고 했소.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오.” 증과시리가 말을 덧붙이고 있을 때, 또 다시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응! 촤르르륵!” 곧이어 일행이 쉬고 있는 비고 앞의 공간을 향해서 좌우의 벽이 다가왔다. “이런 제기랄!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않는군. 우릴 모두 죽일 심산인 것 같은데. 으드득! 도대체 어떤 놈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없애는 쇄멸지관(碎滅之關)까지 움직인 것 같소이다. 이리 되면 기관의 중추를 찾아서 멈추지 않는 한 다른 길은 없을 것 같소. 어서 들어갑시다.” 수리살타가 욕설을 내뱉고 있을 때, 증과시리가 걱정스런 얼굴로 소리치며 일행을 향해서 비고에 들어가기를 재촉했다. 본래 일행 중에서는 비고내로 들어갈 생각인 사람이 몇 없었지만, 이제는 원치 않더라도 모두 다 들어갈 수 밖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일어서 비고의 입구로 향할 때, 증과시리가 앞장 서 다가가 전면의 입구를 열었다. “그그그긍!” 육중한 철문이 좌측으로 밀려들어가며 비고의 입구가 열렸다. 전면에 펼쳐진 광경과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다들 불안감이 가득했지만 더 이상 미적대며 기다릴 수도 없었다. 서둘러 일행이 들어서니 곧바로 굉음을 울리며 문이 닫혔다. “쿵. 쾅! 위위잉! 촤르르륵!” 뒤에서 나는 소리에 힐끗 뒤를 돌아보던 단리유아에게 증과시리가 탄식을 내쉬며 설명해주었다. “단리대협, 이미 되돌아갈 수도 없게 된 것 같소이다. 허, 내가 듣기에 이런 정도까지 기관을 작동한 적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휴! 본래의 기관이라면 상관이 없는데 쇄멸지관이 작동한 뒤에는 석실전체가 움직여서 이미 저 뒤의 문조차 아까의 입구로 통하는 것이 아닐 것이오. 이제부터는 기관을 통과하고 맞은편에 나타나는 문양에 따라서 방향을 찾아야하오. 그렇지 않고 다른 길로 빠진다면 기관을 통과하더라도 영영 미로 속을 헤매게 될 것이오.” 증과시리의 설명에 일행 모두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기관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이제는 석실전체가 계속 움직일 테니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게 된 상황이었다. “모두 힘을 내십시오. 우리의 힘이 모인다면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여태 통과한 사람이 없다고 알려졌는데 이제 쇄멸지관까지 발동한 상황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장로중의 한사람이 말문을 열자,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얼굴로 일행을 향해 대답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소.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져 보일 뿐이지. 이곳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이니, 반드시 해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난 확신하오.” ****** 8권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쓴 것인데, 자세히 쓰다보니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지네요. 본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뭐, 나중에 책으로 나올 때는 반 이하로 줄일 생각입니다. 근데 수정할 생각을 하면 저도 갑갑해지네요. 조금도 아니고 반절로 줄이는 것이니 보통 일은 골치 아픈 일이 아닐 것인데.... 비고(秘庫)의 함정 비고(秘庫)의 함정 2 단리유아의 말에 일행도 관문을 돌파하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이젠 뒤돌아서 갈 방법도 없었으니 모두가 한마음으로 서로를 믿고 최선을 다해야함을 알고 있었다. “십구관문(十九關門) 중에서 처음의 십관은 비쉬누 신과 직접 관련된 것이오. 사실 외부인은 모르지만, 바라문으로서 베다 성전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쉬운 관문이라 할 수 있소. 문제는 후(後) 구관인데 그것 역시 천축의 신화들과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는 실제적인 힘과 지혜가 필요한 곳이라 들었소.” 증과시리가 장내를 둘러보고 있는 단리유아에게 앞으로 마주칠 기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마따나 단리유아 역시 이번 일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기관이 움직이는 그 자체는 중원과 그리 다를 바가 없을 테지만, 해제하는 원리에 있어서는 딴판이라 현재로선 자신의 힘보다는 일행의 힘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행이 들어선 제일관문은 폭이 삼 장에 건너편 철문까지는 십여 장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로 갖가지 색깔의 석판이 놓여 있었다. 가로로 열 줄 세로로 삼십삼 줄로서 각각의 크기가 삼 척인 정사각형의 석판이었다. 좌우 양쪽 벽에도 각각 두 개씩의 문이 있어서 모두 합치면 관문 안에는 총 여섯 개의 문이 있었다. “증과현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맞은편까지 신법을 펼친다면 한 번에 건너뛸 수 있을 것 같은데, 곧바로 가서 다음 관문으로 가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습니까?” 건너편의 문을 가리키며 단리유아가 물음을 던졌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사리발마를 제외한 사람들의 무공으로 볼 때에 약간 버겁기는 해도 도움을 받는다면 한 번에 도약하여 건널 수 있는 거리였다. “대협, 문제를 풀어 바닥의 기관을 먼저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문이 열리지 않소. 오히려 전체 기관이 발동할 뿐이지. 내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아마 한번 보는 것이 빠를 것이오.” 증과시리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불가함을 설명한 뒤, 품속에서 동전을 꺼내 내공을 주입하여 한곳 석판을 향해서 내던졌다. “쾅! 파팍!” 동전의 타격력에 힘입어 석판이 눌리게 된 찰나, 석판 중앙에서 철창(鐵槍)이 튀어나와 천정에 스칠 듯 솟구쳤다. 동시에 왼쪽의 벽에서 튀어나온 눈에 잘 띄지 않은 철선이 맞은편 벽으로 박혀들었다. 단리유아가 바라보니 철창은 그래도 피할 수 있겠지만, 무형금강사(無形金剛絲)는 자신이라도 미리 알기 전에는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만일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대로 관통해서 꼬치가 되었을 것이다. 일행도 모두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였는지 다들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스스슥. 차창” 잠시 후 기관음과 함께 철창이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갔을 때, 증과시리가 가리키며 단리유아에게 설명해주었다. “이것은 단 하나가 작동된 것으로 아주 단순하지만, 만일 기관을 해제하지 않고 억지로 문을 열려고 할 때는 석판 전체가 작동할 것이오. 물론 이것 이외에도 또 다른 기관이 숨겨져 있을 테니 그때는 아무리 고수라 해도 피할 곳을 찾지 못할 것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번에는 증과시리가 먼저 물음을 던졌다. “단리대협, 저기 천장이 보이시오?” “예, 물고기와 여러 가지 일들이 벽화로 새겨져 있군요.” 증과시리의 손길을 따라 천정을 쳐다보며 단리유아가 무심결에 대답하니 다들 안색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증과시리와 수리살타 역시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비난을 퍼붓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장로들은 참을 수 없는지 곧바로 단리유아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말조심하시오. 아무리 이방인이라지만 당신 눈에는 저 그림이 그렇게 하찮게 보인다는 말이오?” “하여간에 이방인들이란! 좀 전에 들었던 설명은 어디로 흘려버리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비록 계파가 달랐지만 그렇다고 다른 계파의 신들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단리유아의 말은 신성모독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자, 다들 그만하게. 단리대협도 아직 천축의 문물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것뿐일 테니 말이야.” 장로들의 소리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잠자코 있던 증과시리가 나서서 장로들을 말렸다. 단리유아도 자신의 말 중에 이들의 기분을 거슬린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이내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잠시 소란이 있은 뒤, 증과시리가 천정의 벽화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했다. “저 벽화를 보니 이곳은 비쉬누 신의 제일 화신인 마뜨스야와 관계된 관문인 것 같소. 신화에 전하기를, 마뜨스야는 현자 마누에게 대홍수가 일어날 것을 알려서 세상의 생명들을 구하게 했다고 하오.” 벽화에는 하반신이 물고기의 모습인 마뜨스야 신이 대홍수로 모든 세상이 잠긴 상태에서 거대한 배를 이끌고 있었다. 배에는 마누를 비롯한 일곱 명의 사람들과 갖가지 동물들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모두 마뜨스야 신을 바라보며 찬양하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또한 하늘에는 일곱 개의 달이 변화하는 모습이 그려져 대홍수가 일어난 뒤의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벽화에 대한 신화를 들으며 단리유아가 벽화의 모습을 한참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을 때, 이야기를 마친 증과시리가 주위의 장로들을 향해서 물음을 던졌다. “내가 보기에는 이곳 바닥의 석판에 설치된 기관이 벽화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다들 천축의 신화와 베다 성전에 능통한 사람들이라서 이내 각자 자신의 생각을 꺼내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리발마 역시 나란타사에서 수학하는 동안에 배웠던 적이 있었던지라 완전히 문외한인 사람은 장내에선 단리유아에 불과했다. 서로 자신의 생각을 떠들 때,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던 수리살타가 말문을 열었다. “다들 석판의 모습과 연계해 보면 누구라도 숫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세 가지가 그 해답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 어떤 것인가?” “우선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서의 순서로 보면 처음이니 1이고, 배에 탄 사람과 흐른 날짜가 각기 7입니다. 그 외에 배에 탄 동물들은 모두 짝으로 이루어졌으니 2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증과시리의 반문에 수리살타가 설명할 때, 장로 중의 한명이 단리유아를 손가락질하며 퉁명스레 소리쳤다. “지금 누가 그것을 모르오? 그 정도는 저 벽화를 처음 본 저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 뻔한 이야기 말고 확실한 방법을 얘기해보란 말이오, 제길!”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하려고 했소. 흥! 성질 급하게 나선 것이 누군데....” 수리살타가 맞받아치자 곧바로 장로 역시 성난 얼굴로 소리쳐서 장내는 잠시 동안 두 사람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불안한 상태가 자신들도 모르게 일행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어서 사소한 일에도 쉽게 흥분하게 했다. “쯔쯧, 어째서 다들 이 모양인가?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었나, 자네들?” “....” “휴, 나 역시 답답하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라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해. 그렇지 않는다면 결코 아무도 이 난관을 돌파하고 살아남지 못할 것이네. 그러니 다들 진정하고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하게나.” 주위를 둘러보며 호통을 치다가 증과시리가 계속해서 타이르고 있었다. 부끄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을 때, 증과시리가 수리살타에게 다시 이야기해보도록 했다. “자네도 그 발끈하는 성질을 누르고 다시 이야기 해보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음, 제가 생각하기에 아까 전에 말했던 것 외에도 한 가지 요인을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신화가 바로 세상의 재창조와 관련되었으니 숫자상의 배열에도 그것과 같이 정반합이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첫 번째 줄부터 1,7,7,2로 시작한 다음 역순으로 다시 돌아오고, 다시 전체의 수를 더해서 석판을 눌러야 한다고 봅니다.” 수리살타의 얘기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가장 타당해보였고 자신들 역시 생각이 비슷했다. 그러다 문득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의문이 떠올라 손가락으로 열 번째 줄을 가리키며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 열 번째 줄의 석판은 비게 되는데? 그것은 또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오?” “그건 내가 보기에 그대로 두는 것이 답일 것 같네. 창조 뒤에는 다시 종말이 뒤따르니, 모든 것은 다시 무로 돌아간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야.” 증과시리가 대신 나서서 대답했다. 일행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해답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해보기전에는 확실하게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맞다고 해도 과연 누가 석판을 차례로 누른 다음 건너편으로 갈지 정해야했다. 건너편의 철문에 새겨진 문양을 해석하여 다음 관문의 입구를 찾아야하니 그 일도 역시 쉽지 않았다. 다들 서로 얼굴을 돌아보며 나서기를 망설이고 있었는데, 해답이 틀리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해답이 맞다면 이 관문내의 기관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을 것이지만, 만일 틀리다면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서 관문내의 모든 기관이 작동할 수도 있었다. 일행의 모습에 여태 아무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 듣고만 있던 단리유아가 먼저 자청했다. “제가 해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중에서 그래도 저의 무공이 가장 나을 테니.” “아, 그래 그렇군. 저 사람이라면....” 일행의 안색이 일시 밝아지며 탄성이 터졌지만, 곧바로 증과시리의 반론이 이어져서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오. 건너편의 문양을 해독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은 바라문이 아닌 이상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니.” “그래도 제가 보아서 생김새를 말해주면....” “허허, 됐소이다. 그 정도로는 해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흠, 어차피 전(前) 십관은 대협의 도움이 그리 필요치 않을 것이오. 문제의 해답이 맞는다면 별로 위험하지 않을 테니. 나중에 후(後) 구관은 해법을 안다 해도 무공으로 극복해야 하니 그때에나 대협께서 나서주시구려.” 증과시리의 말에 단리유아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더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수리살타가 맡기로 했다. 처음에는 증과시리가 나서겠다고 했지만 일행의 입장으로선 결코 승낙할 수 없는 일이라 모두 반대했다. “부디 조심하게.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되돌아오고.” 증과시리의 마지막 당부가 이어진 뒤, 이윽고 수리살타가 석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 모두 불안과 우려가 가득한 얼굴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첫줄 첫째 칸의 석판으로 걸음을 옮길 때는 수리살타 역시 긴장이 역력해서 얼굴에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쿵! 그그그긍.” 수리살타가 석판에 올라서니 잠시 있다가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불안 불안한 표정이던 수리살타도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일단 처음이 맞는 것 같아서 일행도 약간은 불안감이 가셨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라서 다들 수리살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쿵! 그그그긍.” 장내에는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와 일행의 한숨 소리만 연이은 채 무거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들 긴장한 채 바라보다가 마침내 수리살타가 아홉 번째 줄의 석판을 누르고 무사히 건너편 철문 앞으로 건너뛰자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아, 됐군 됐어.” “정말 다행이야. 처음부터 잘못 되었다면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을 텐데.” 일행이 안심하여 소리치고 있을 때, 건너편에 도착한 수리살타는 얼굴의 식은땀을 닦고 있었다. 온몸 역시 긴장의 여파로 식은땀으로 홍건이 젖은 상태였고 겨우 십 장의 공간을 지나친 것이 마치 천리 길을 건넌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잠시 한숨을 내쉬며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다가 곧바로 철문위의 문양에 해독에 들어갔다. 물결치는 모양으로 중심을 향해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문양은 고대범어와 그림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해독이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 글을 해석하고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던 수리살타가 일행을 향해서 소리쳤다. “좌측의 두 번째 입구가 다음번 관문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곳의 문양대로 기관을 해제할 테니, 문이 열리면 모두 일제히 그곳으로 뛰어드십시오.” 곧이어 기관음과 함께 여섯 곳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그그그긍!” “지금이오!” 수리살타의 외침과 동시에 일행 모두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단리유아도 사리발마를 붙잡아 안고 일행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일행이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내 철문이 다시 닫혔다. “그그그긍. 쿠쿵!” 다음번 관문도 이전의 관문과 그 형상이 비슷했는데, 눈에 들어오는 다른 점은 천정의 벽화였다. 비쉬누 신의 화신인 꾸르마(하체가 거북인 형상)가 만다라 산을 등에 짊어진 채로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주위로는 신과 악마들이 모여서 만다라 산을 붙잡은 채 돌리고 있었다. 제대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일행의 안면이 다소 밝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관문을 계속해서 돌파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감은 증폭되고 있었다. “자자. 모두 힘을 내게. 이전의 예로 보아서는 우리의 생각이 맞는 것이니, 그렇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다들 힘을 모은다면 생각보다는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네.” 증과시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일행의 기분을 북돋아주었다. 그의 말에 따라 일행도 한결 나아진 표정이 되어서 앞으로의 관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임할 결심을 재차 다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모은 일행은 계속해서 기관을 돌파해나갔는데, 일관에서 조금 지체되었을 뿐 십관에 이를 때까지는 별다른 불상사 없이 거의 멈추지 않은 채로 기관을 해제하고 다음 관문으로 들어서는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후 구관에 이르렀을 때는 사뭇 상황이 달라졌다. 일단 기관의 해법은 전과 비슷했지만, 그에 더해서 힘으로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화염(火焰)·빙하(氷河)·유사(流砂)·수뢰(水牢)·천검(千劍)·흑암(黑暗)·유성(流星)·전뇌(電雷)의 팔관문을 통과한 일행은 최후의 관문인 환상관(幻想關)에 이르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최후의 관문에 이르렀지만 일행의 몰골은 말이 아니어서 불타고 찢겨져 본래의 형상을 알 수 없는 넝마와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모두가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장로 중의 한명은 도중에서 명을 달리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내력과 심력이 고갈되어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외로 단리유아가 감싸다시피 하며 돌본 사리발마가 가장 나았는데, 비록 그 역시 몇 군데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라 할 정도였다. “그그그긍. 쿠쿵.” 등 뒤에서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올 때, 마지막 관문인 환상관의 입구에 철퍼덕 주저앉은 일행 중에서 수리살타가 몸서리치며 중얼거렸다. “으으, 세상에 이런 끔직한 곳이 있다니. 소문을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정말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곳이야.” “휴, 그래. 아마 우리만 있었다면 결코 통과하지도 못한 채 아마 후 일관인 화염관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네. 정말 단리대협이 없었다면....” 증과시리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다가 단리유아에게 탄복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만일 단리유아가 동분서주하며 일행을 챙기지 않았다면 이미 일행 모두 죽음의 강을 건너고 있을 것임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비록 장로 한 명이 도중에 목숨을 잃었지만 그것은 단리유아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실제 이들 모두 단리유아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는 입장이라 할 수 있었는데, 이전까지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장로들 역시 이제는 단리유아에게 완전히 감복한 상태였다. “저 역시 여러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통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관의 해법을 몰랐다면 그렇게 적절하게 대처하며 파해할 수 없었을 테니.” 피곤한 중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대답하며 단리유아가 일행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단리유아 역시 이번 일이 쉽지 않았을 터였다. 이미 절반의 해법을 지닌 채로 기관에 맞섰기에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통과할 수 있었지, 만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서 통과하려고 했다면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상처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고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대협의 힘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오. 솔직히 후 팔관에서는 우리가 짐이 된 경우가 많음을 잘 알고 있으니.” “별 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그보다 이번 관문에 대해서나 이야기해주십시오. 이번이 마지막인 것 같으니.” 증과시리의 거듭된 칭찬에 단리유아가 화제를 돌렸다. 기진맥진한 채 등 뒤의 차가운 철벽에 기대어 쓰러져있던 일행도 잠시 조식을 취하여 몸을 추스른 뒤에 서로 부축하며 모여들었다. “단리대협, 이곳 환상관은 말 그대로 술법과 기관, 진법이 합하여 갖가지 환상을 보여주는 관문이라고오. 자신이 평소 가장 바라던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빠져나오지 못하면 심력이 고갈되어 그대로 목내이가 되어버린다고 알려져 있소. 특별한 해법은 없고 오직 관문에 든 사람의 정력(定力)으로만 극복해야 하는 곳인데, 사실 말이야 쉽지 오히려 이전의 관문보다도 더 돌파하기 어려운 곳이오.” 눈앞에 펼쳐진 운무가 가득한 공간을 가리키며 증과시리가 우려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전의 관문에서는 단리유아가 도와주어서 그나마 이곳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이곳에서는 각자 자신의 환상과 맞서야하니 더 이상 단리유아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럼, 이곳이 마지막이라면 본래 보물이 있던 비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일행은 안색이 어두웠지만 단리유아에게선 그런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관문이니 이 지긋지긋한 관문도 끝이라는 생각만 클 뿐 환상관에 대한 걱정은 전혀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단리유아의 얼굴을 감탄과 의아함속에 바라보며 증과시리가 대답했다. “글쎄요.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 기관이 발동된 상태에서는 아무도 이곳을 통과해본 적이 없어서....” 본래 서천축(西天竺)의 인도하(印度河:인더스 강) 강변에 위치해 있던 바라만겁문이 이곳 와랍납서로 이전한지는 어언 천년에 가까웠다. 그런데 처음 건축할 당시의 전체적인 밀도가 사라진데다가 그동안에도 수리한 곳이 많아서 본래와는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 기관의 출입법이 기록된 비도(秘圖)가 남아있었지만 이 지하 깊숙한 곳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십대성자가 이곳을 드나들기는 했지만, 그것은 기관이 다 정지되었을 때였고 또한 일행이 통과한 길과도 틀렸다. 증과시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단리유아는 일단 환상관을 통과하는 데에 생각을 집중하기로 했다. 본래의 예상대로 기관의 심처에 이를지 비고에 이를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이런 관문은 자신도 더 이상 달갑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참회옥에 잠입할 일 때문이라도 좀 더 서둘러야했다. “이번 관문은 저도 여러분을 도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데 제가 수혈을 짚어서 여러분을 잠들게 하고 저 혼자만 움직이면 어떨까 합니다.” 단리유아의 제안에 다들 생각에 잠길 뿐 별 말이 없었다. 현재의 상태로 보아서는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고 환상관에서는 단리유아도 어쩔 수 없을 테니 그의 말대로 따르는 것이 낫게도 보였다. 그런 생각에도 못미더운지 수리살타가 잠시 후 반문했다. “그러다 대협께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이곳을 보니 별다른 기관은 보이지 않고 저기 운무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별로 위험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제가 관문을 깨뜨린다면 틀림없이 여러분을 데리러올 테고, 설혹 제가 오지 못하더라도 한 시진 뒤에는 깨어날 테니.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기력이 회복되어 있을 테니 여러분이 움직이기에도 쉬울 것입니다.” 일행 모두 우려의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단리유아의 말대로 따르는 것이 최선임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잠시 더 서로를 걱정하는 당부가 이어지다가 단리유아는 일행의 수혈을 짚고서 정면의 운무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고(秘庫)의 함정 비고(秘庫)의 함정 3 운무(雲霧) 속으로 들어선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걸었는데도 전혀 방향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리유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두텁게 깔린 운무와 각종 악기음이 내는 음률이 몽상적인 상태를 만들어 감각을 흐리게 만들었다. 역시 들었던 대로라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계속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제부터 나타날 환상에 대해서 맞서기 위해서 멈추어 마음을 가라앉혔다. “삘리리, 투퉁, 두둥” 잠시 환상에 대한 파해법을 생각하며 멈추어 섰을 때,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악기음을 동반하며 운무 사이로 누군가의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물안개처럼 일 장 방원 내의 운무가 스러지며 한 명의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대 사바세계의 방랑자여, 내 이제 물음을 던지리니 답하라.” 부드러운 목소리가 악기음을 뚫고 은은하게 울러 퍼지며 마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바라보니 흰색의 사리를 입은 채 백조를 타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네 개의 팔에는 각기 책과 염주, 비나(천축의 대표적 악기)를 들고 있었다. 모습으로 보아서는 바라만겁문의 사원에 새겨져 있던 벽화들 중에서 보았던 적이 있던 사라스와띠 여신(女神) 같았다. 증과시리가 얘기했던 환상과는 달리 뜻밖에 여신의 환영이 나타나자, 어찌할지를 몰라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당혹스러움도 있었고, 신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에 경복하는 마음도 있었다. 한편으론 증과시리가 말한 환상과는 달리 학문과 예술, 지혜를 대표하는 사라스와띠 여신이 나타난 것에 대한 궁금함이 강하게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여신이여, 제게 묻고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을 때에야 자신의 답을 기다리듯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여신을 향해서 고개 숙여 경배하며 물음을 던졌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여신의 물음이 이어졌다. “세상을 떠도는 이여, 진리(眞理)의 본체는 어떤 것인가?” “....” 난데없는 여신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서 곧바로 대꾸할 수 없었다. 지혜의 여신이라는 말처럼 쉽지 않은 물음이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던져진 질문을 듣고 보니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망설여지며 점점 마음이 혼란스러워져갔다. “어서 물음에 답하라. 진리의 본체는 어떤 것인가?” “외람되오나 먼저 지혜로우신 여신께 한마디 묻고자 합니다. 만일 저의 대답이 틀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거듭된 여신의 재촉에 곤혹스런 얼굴로 반문하니, 잠시 살며시 안색을 찌푸리던 여신이 이윽고 엄정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내 마음에 흡족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대 역시 환상관에 들어서 답을 찾을 때까지 온갖 괴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래도 답을 찾지 못한다면 영혼조차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 채 영원히 환상 속에 묶여있게 될 것이다.” 여신의 목소리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듣고 있던 자신에게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신의 판결처럼 냉혹하게 들리고 있었다. 처음 일행을 떠나서 환상관에 들어섰을 때만해도 쉽사리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라 생각해서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 잘못 대답하게 된다면 백골이 되어서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증과시리가 얘기했던 것과 다른 것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은 것에 불과하니 완벽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휴! 잘못되어 환상관에 떨어진다고 해도 그다지 두려움은 없지만.... 단지, 설혹 답을 찾더라도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린다면, 나뿐만 아니라 일행도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렇게 한참을 걱정 속에 답을 찾았지만 자신 있게 선뜻 내놓을 만한 답을 입 밖에 토해낼 수 없어서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은 답답해져갔다. “답하지 못하겠는가? 앞으로 반각이내에 답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으로 알겠다.” 마지막으로 선언하듯 여신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단리유아에게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누구라도 이런 질문에는 제대로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진리의 본체는 어떤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지? 세상의 일반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인성(人性)에 대한 진리를 말하는 것인지?’ 초조한 마음에서인지 이마에서는 진땀이 눈썹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자신의 수양과 깨달음이 이것밖에 되지 않은 것인가 하고 거의 포기하면서 탄식을 토해낼 순간, 문득 방울진 땀방울이 떨어지며 눈동자를 스쳐지나갔다. “툭!” 찰나의 순간, 땀방울에 비친 잔상은 주변의 모습이 그 속에 갇힌 채 어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은....?’ 그 모습에서야 비로소 한 가닥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잠시 길게 한숨을 내쉬어 마음을 가라앉힌 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여신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제 말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무심(無心)이 바로 진리 자체라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정확하게 설명해보라.” 기다리던 대답과는 다르다는 듯 곧바로 여신의 반문이 이어졌다. 그 모습에 약간 실망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체득한 것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담담하게 설명했다. “여기서 제가 여신께 말한 무심은 마음 그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져 보이고 생각이 변화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라 감정의 동요나 구별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제가 말한 무심은 일체의 걸리는 것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 것으로 ‘무언가를 구할 바가 없는 마음’입니다.” 나직한 단리유아의 목소리에서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고 마치 그 자신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것처럼 유유하면서도 낭랑하게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단리유아의 대답에 여신이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말이 없을 때, 단리유아가 곧이어 여신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거룩하신 지혜의 여신이여, 저의 대답이 온당한 것입니까?” 여신이 잠시 단리유아를 응시하다가 온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랑자여, 그대의 말은 내가 원하던 정확한 답은 아니다.” “그럼....” 단리유아가 실망스런 표정으로 반문하려할 때, 여신이 나직히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후후.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비록 내가 원하던 답은 아니었지만, 그대의 말 역시 맞는 것이니. 오히려 그 말이 더 내 마음에 드니 이 관문은 통과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너그러우신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한 가지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기쁜 마음에 단리유아가 고개를 수그리며 감사를 표한 뒤에 다시 물음을 던지니, 여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무엇인가? 가야할 시간이 다가오니 어서 말하도록 해라.” “다름이 아니라, 제 말이 정답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여신께서 묻고자 하던 답이었습니까?” “그것은.... 음, 그 답은 말해주지 않겠다. 말해주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만 그대에게는 오히려 해가 될 테니. 스스로 생각해서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해라. 더 물을 것은 없느냐?” 곧바로 답하려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여신이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 답을 들을 수 없어서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더 이상 단리유아로서도 캐물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자신 스스로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짤막하게 응답했다. “없습니다. 단지 이 관문의 해법은....” “그대의 대답으로 보아서는 스스로 관문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간단한 방법이 있지. 그대 사바세계의 방랑자여. 내 눈을 똑바로 보도록 해라.” 곧바로 여신이 밝게 웃으며 응시하는 단리유아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윽고 여신의 미간에서 한줄기 백색의 광채가 번뜩이더니 단리유아의 뇌리로 파고들어 잠에 빠지게 만들었다. “팟!” “음.” 백색의 길고 긴 사리에 감싸인 손을 휘저어 쓰러지는 단리유아를 부드럽게 바닥에 눕히며 여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호호호, 주목랑마(珠穆朗瑪)나 마야의 말대로군. 하지만, 과연 그대가 속세의 겁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는....” 서서히 여신의 환영이 흐트러지며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공간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동시에 백색의 운무도 흔적 없이 흩어지더니 이윽고 환상관의 본래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면의 벽에는 갖가지 모습으로 고통 받는 인간들의 벽화가 새겨져 있었고, 좌우의 석대 위에는 먼지에 뒤덮인 낡은 악기들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또한 벽면의 하단을 따라 한 자가 약간 못되는 백여 개의 목상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각기 틀린 희노애락의 얼굴표정과 복장·생김새 등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음울한 분위기가 가득한 관문의 한 가운데에서 단리유아가 잠에 빠진지 반 시진여가 되었을 때, 입구 쪽에 잠들었던 일행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며 웅성거리던 일행이 단리유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사리발마가 증과시리를 향해서 걱정스레 물음을 던졌다. “혹시 단리시주께서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요?” “흠. 내가 보기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네. 단지 지쳐서 잠든 것 같아. 그런데 이곳은 아직 환상관 내인 것 같은데 어째서 기관의 움직임이 없지? 단리대협이 벌써 해제한 것이라서 그런가?” 증과시리가 단리유아를 살피며 대답하다가 관문내의 상황이 이상해보여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살펴보던 증과시리가 이윽고 단리유아를 깨웠다. “대협, 괜찮으십니까? 어디 잘못된 곳은....” “대협....” 앞 다투어 일행의 걱정 어린 물음이 이어질 때, 단리유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앉았다. 잠시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다가 그제야 일행을 돌아보며 단리유아가 대꾸했다. “전 괜찮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무사하신 것 같군요. 이곳 환상관도 해제된 것 같으니, 어서 이곳을 벗어나도록 합시다.”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단리유아가 건너편에 열린 출구를 향해서 일행을 재촉했다. 혹시라도 기관이 다시 작동할까봐서 일행 역시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은 채 서둘러 단리유아를 뒤따랐다.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문득 단리유아가 환상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증과시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환상관에서는 각자의 욕망에 따라 환상이 나타난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제가 본 것은 학문과 지혜의 사라스와띠 여신이었습니다. 혹시 증과현인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없습니까?” 분명 본래의 설명과 달랐고, 자신이 느끼기에도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기에 증과시리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뒤따르던 증과시리가 급히 옆으로 다가서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거듭해서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여신의 모습이라니? 그게 틀림없소?” “예, 제가 전에 본 적이 있던 그림의 모습과 똑 같았습니다. 제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사라스와띠 여신이었습니다.” “그럴 수가? 내가 듣기에는 기관만 설치되었다고 했는데..... 술법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스스로도 믿기지 않은지 증과시리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인 그의 모습처럼 일행 역시 그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탄성을 내지르거나 서로 속삭이고 있었다. “됐습니다. 어찌 되었든 무사히 통과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겠지요.” 단리유아의 말에 증과시리가 그래도 이상한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본래의 기관도가 사라져서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해도 이런 곳에 여신의 현신이라니? 근 백여 년이 넘도록 여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로서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관이 설치 된지 천년이 가까워오도록 통과해보았다는 사람도 없었고 본래의 밀도도 사라져서 제대로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믿기지 않은 일이라 힐끗 단리유아를 바라보며 과연 정말일까 생각해보고 있었다. ‘이 사람의 성격으론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흠, 낯선 이방인의 앞에 현신하다니.... 이 사람의 전생의 업(業)과 관련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증과시리처럼 각자 단리유아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며, 일행은 습기 가득한 석도를 걸어 얼마 되지 않아 지하의 비고에 들어섰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비고에 들어섰을 때, 그제야 안심이 된 일행은 털썩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모두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널브러진 채 그동안은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상처의 고통과 마음의 번잡함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듯이 한동안은 신음만이 고요한 광장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잠시 시간이 흘렀을 때, 단리유아가 먼저 말문을 열어서 일행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나마 끝나서 천만다행입니다. 최소한 더 이상의 관문은 없을 테니.” “휴! 그거야 대협의 말씀이 맞지만, 막상 이곳에 이르러서도 고민이 끊이질 않구려. 누가 기관을 작동했는지도 의문이지만, 과연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구일 후면 지하로 통하는 철벽이 해제될 테지만, 솔직히 그동안 아무런 일이 없을지는....” 증과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다가 걱정스레 말끝을 흐렸다. 일행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다들 침울한 표정으로 멍한 얼굴들이었다. 특히 바라만겁문의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웠는데, 지금까지의 일로 보아서는 설혹 자신들이 이곳을 벗어난다고 해도 무사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번 일을 꾸민 음모자가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니. 생각할수록 버려진 듯 함정에 빠진 자신들의 처지에 한숨만 나오고 낙망해서 다들 축 처져 있었다. “흠. 이 정도의 기관을 만들었을 때는 분명 어딘가 밀도(密道)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죽을 결심을 하는 중에도 한 가닥 활로를 남겨두는 것이 본성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다들 힘을 내십시오. 분명 빠져나갈 길이 있을 테니.” 단리유아가 재차 빠져나갈 수 있다고 일행을 북돋았지만 장내의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들의 처지를 모르는 바도 아니어서 단리유아는 더 이상 그 얘기는 꺼내지 않고 돌아다니며 일행의 상처를 돌보고 기분을 바꾸려 다독이고 있었다. 반 시진 정도 후에 일행 역시 조식을 취하여 어느 정도 심신이 안정되었다. 각자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자 일행은 혹시 비고에 남겨져있을지 모르는 한 가닥 활로를 우선 찾아보기로 했다. 사방 십 장 정도의 거대한 비고의 내부에는 아무런 물건도 없이 보물이 놓여있었을 흔적만이 남아있었는데, 휑하니 텅 빈 공간과 그늘지고 희끗한 벽면이 마치 한 겨울 북풍 앞에 마주선 벌거벗은 나무처럼 삭막함과 썰렁함을 던져주고 있었다. 흩어진 일행이 곳곳을 만지고 두드려보기도 하면서 살펴보았지만 별다르게 이상한 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낙심한 일행이 중앙에 다시 모였을 때, 단리유아가 증과시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제가 보기에도 별다른 기관은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이곳을 건축할 때 어떤 방법으로 세웠는지 들으신 것이 있습니까?” “글쎄요. 워낙 오래전 일이고 제대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어서.... 본래 천축의 내놓으라하는 장인들이 모여서 만들었는데도 이십년 가까이 걸렸다고 하는 이야기만 전해지는데....” 딱히 이야기해줄 것이 없어서 증과시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던 단리유아가 재차 물음을 던졌다. “수천 명이 동원되었을 텐데도 이십 년이 넘게 걸리다니,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린 것 같습니다만?” “그렇기는 합니다만, 본래 본문이 있는 이 와랍납서 지역을 항하(恒河)가 관통하는 상황이어서 조금만 땅을 파도 지하수로와 부딪쳐서 애를 먹었다고 하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수로와 부딪치는 일을 피할 수 없자, 결국에는 수로와 맞닿지 않을 정도만 파서 지하의 기저를 만들고 그 위에다 흙을 쌓아서 역으로 지면을 높이는 수밖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증과시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단리유아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을 두드렸다. “탁!” “바로 그겁니다. 하하하! 제 생각이 맞다면 틀림없이 우리들 모두 무사히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뻐서 혼자 소리치는 단리유아를 향해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일행이 쳐다보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일행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인의 말을 들었다시피, 분명 이곳 지하 아래로는 지하수로가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수로를 찾아서 바닥을 뚫을 수만 있다면 수로를 타고 항하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허허, 정말 단리대협의 생각은 남다른 바가 있구려. 하지만 말이오, 최소한 지하 오륙 장 아래에 있을 수로를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오. 또 수로를 찾았다고 해도 바닥을 뚫다가 오히려 그대로 역류되는 물길에 수장될 수도 있을 텐데, 그건 또 어떻게 할 것이오?” 증과시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감탄 반 농담 반인 어조로 단리유아에게 반문했다. 곧바로 한쪽의 수리살타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듯이 조목조목 따지며 반대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수로가 항하까지 연결되어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또 이곳에서 항하까지는 최소한 오륙백 장 이상 떨어져 있을 텐데, 숨을 참고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차라리 기다렸다가 구조를 바라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대협, 제 생각에도 그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지하수로를 이용하는 것은....” 수리살타의 말처럼 다른 일행들도 불가능한 방법이라며 한참을 단리유아를 만류하며 떠들어댔다. 잠시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단리유아가 일행이 조금 잠잠해졌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기다린다는 것도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어찌되었든지 우리는 이곳을 빠져나가야합니다. 그것도 한시라도 서둘러서!” “그렇다고 수로를 타고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소? 그래도 우리를 구조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니 그쪽이 오히려 더 가능성이 있을 텐데....” 증과시리가 다시 한 번 만류할 때, 주위를 돌아보며 단리유아가 물음을 던졌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우리를 이 함정에 몰아넣은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거야 물론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수리살타가 이야기할 때,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한 말입니다. 물론 우리를 죽이고자 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제 생각에는 구일 동안 뭔가 음모를 꾸미고자 하는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또 다른 음모가 있단 말이오?” 증과시리가 놀라서 되묻자, 틀림없다는 듯이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언했다. “예.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사실 수로를 통하지 않더라도 저 혼자라면 이곳을 빠져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물론 강제로 철벽을 돌파하면 완전히 지면이 가라앉는다고는 하지만 철벽 사이 자체에는 어느 정도 공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곳 대부분이 철골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그 정도만 되어도 제가 뚫고나가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단리유아의 말에 잠시 일행이 말문이 막혀서 쳐다만 보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흠! 잠시 이야기가 빗나갔군요. 아마 이번 음모를 꾸민 자도 최소한 저만은 이 함정에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갑작스레 그자가 기관을 움직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허점이 남을 것이 분명하고 시일이 흘러서 파고든다면 오히려 자신의 마각을 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임에도 말입니다.” 단리유아의 반문에 다들 말이 없을 때, 한쪽의 사리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그럼 오직 구일이라는 그 시간이 문제이군요. 어떻게 해서든 대협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어야했고, 그동안에 이번 사건을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마 제가 이번 일을 파고들게 되자, 본래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비밀이 많이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그자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밀실에 대한 것을 알아낸 것이 결정적인 것이겠지만, 제가 참회옥을 찾아가게 한 것도 큰 실수이지요.” 이야기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단리유아가 빙그레 웃고 있을 때, 증과시리가 의아한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밀실은 모르지만, 참회옥의 일이라면 중원인의 시체를 제외하고는 별 일이 없었을 텐데요?” “물론 외관상으로는 그렇지만, 그자가 감추려던 뭔가 다른 일이 그곳에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그자도 아차 했을 것입니다. 제가 의심하게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말입니다. 지금으로 보아서는 확실히 그곳에 이번 일을 해결할 열쇠가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 생각에 이제까지 제가 조사한 것에서 그곳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미심쩍은 일이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단리유아가 보기에는 참회옥에서 심어로 대화를 나누었던 노인과 다른 감방의 수인이 바로 그 열쇠라 생각되었다. ‘분명 시간이 늦어진다면 그동안 그들을 죽여 입을 막거나 아예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이송할지도 몰라.’ ‘이대로 기다리다 구일 후에 나서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겠지만, 그때는 사건이 이미 해결된 후일 테니 더 이상 조사할 길이 없지. 진실은 은폐되어진 채 음모자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진 뒤일 테니 말이야.’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어 일행을 돌아보며 단리유아가 말을 이었다. “기관이 완전히 해제되기까지 기다린다면 구일 동안 저나 여러분은 이곳에서 꼼짝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동안에 사건이 해결된다면 나중에 설혹 물증이 있더라도 더 이상 파고 들 수 없을 상황이 될 것이지요. 그자의 뜻대로 기다린다는 것은 또한 여러분의 안위에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비록 당장에는 죽음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결국에는 하나둘 입막음 당하게 될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요.” 말을 마치며 단리유아가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누구나 진실을 아는 자는 두려워하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비록 입 밖에 꺼내지 않았지만, 일행 역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서 이 사건을 해결하는 길만이 자신들이 살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에 더 이상 기다리자는 의견은 없었다. 곧이어 침중한 분위기가 장내를 누르는 중에도 일행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수로를 찾아서 나갈 방법에 대해서 열띤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반전(反轉) 반전(反轉) 1 생사의 기로 속에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일행이 지하수로를 벗어났을 때는 자정이 가까워지는 무렵이었다. 밤하늘에는 별빛이 수를 놓고 있었고, 항하(恒河)에는 별이 떨어진 듯 디아 위에서 빛나는 촛불이 떠다니고 있었다. 낮에 보았다면 결코 손도 담그기 싫을 만큼 지저분하기 짝이 없을 테지만, 단리유아에게도 오늘밤의 항하는 뭔가 특별해서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반짝이며 자신을 반기는 것처럼 여겨졌다. 일행 역시 오후부터 한밤중에 이르기까지의 변고를 겪고 나니 주위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생사위기를 겪고 나니 삶의 무상함과 욕망의 그릇된 발로에 대해서 깊이 침잠해보고 있었다. 마치 악몽처럼 괴로운 기억이었지만, 각자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기(轉機)를 맞은 날임도 분명해서 다들 깊은 생각에 잠겨 강물에 몸을 맡긴 채로 물결 따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물결에 따라 몸을 맡긴 일행이 동북쪽 끝 파라간트 가트에 올라선 시각은 자정이 지났을 때였다. 이 지역은 사람의 왕래가 드문 외진 곳이어서 다행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염려는 적었다. 일단 일행은 증과시리가 과거 수행하면서 머물던 동굴로 움직이기로 했는데, 최소한 며칠 동안은 음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암중으로만 움직여 정보를 수집하고 바라만겁문 내의 동태를 살피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며칠 이내로 분명 사단이 일어날 것이라 예견되어 그 시일은 결코 길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도시 외곽을 따라 몸을 날려서 일행이 북쪽에 위치한 동굴에 이르렀을 때, 단리유아가 일행을 향해서 말문을 열었다. “저는 따로 조사해보아야 할 것이 있으니, 여러분은 먼저 쉬도록 하십시오.” 심신의 피로와 상처로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쓰러지던 일행들이 그 소리에 놀라 단리유아를 돌아보고 있었다. 자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기력을 소모한 이가 단리유아였으니, 비록 겉으로 들어나지 않더라도 단리유아의 상태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곧바로 다들 지친 목소리로 만류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손을 저어 일행의 말을 막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유쾌한 얼굴로 일행을 안심시켰다. “저의 몸 상태는 생각처럼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심각한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약간 탈진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회복되니 그리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다들 푹 쉬어서 기력을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더욱이 내일부터는 바빠서 쉴 틈도 그리 없을 테니.” 더 이상 만류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다들 말문을 닫았을 때, 증과시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휴! 단리대협, 우리도 더 이상 걱정하여 만류하는 말은 하지 않으리다. 하지만 부디 몸을 중히 여기시길 바라오. 이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대협을 도와 이번 일을 해결하는 수밖에는 없으니.” “현인께서도 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몸을 빼내려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 단리유아가 대답하고 돌아서려할 때, 고개를 끄덕이던 증과시리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알겠소. 그런데 이 야심한 시각에 또 어디를 가려는지 물어도 되겠소?” “지금 말씀드려도 되겠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돌아와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 설혹 제가 내일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제가 부탁했던 일들을 조사해주시길 바랍니다.” 곧 일행의 걱정스런 시선을 뒤로하고 단리유아는 동굴을 나섰다. 서늘한 밤바람이 옷자락을 파고들어 일행의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혀줄 때, 단리유아는 바람을 따라 다시 참회옥이 있는 바라만겁문으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 일행이 비고에 갇힌 뒤부터 사흘이 흐르는 동안 바라만겁문에서는 계속해서 변괴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건을 조사하던 일행이 들어간 비고가 폐쇄되어 기관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그 한가지였고, 다음날 저녁에는 참회옥의 삼층에 갇혔던 두 수인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지키고 있던 염마팔영의 감시를 피해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화골산 계열의 독에 당한 상태여서 이렇다 할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남겨진 의복이나 머리카락 등으로 두 수인이 죽었다고 추정했지만, 정말 그들 본인이 죽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었다. 참회옥의 입장으로선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 항변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참회옥의 경계망을 뚫고 흔적 없이 두 사람을 살해할만한 고수도 없다고 보아야 하는 상태였으니 각 계파의 추궁에는 이렇다 할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수인의 신분이 범상치 않아서 갖은 의혹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둘 다 사형과 다름없는 영구적인 금제에 갇혀있던 상황이라서 그래도 참회옥주와 염마팔영의 문책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밤에 일어난 일은 바라만겁문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여파를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비쉬누 계열의 찰합리 성자가 인드라 계파의 발하루(勃河漏) 현자에 의해서 살해당한 일이었는데, 그 주검에서 발견된 사실이 일파만파의 여파를 일으켰다. 환영역골공(幻影易骨功)이 풀어진 모습에서 곧바로 중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아난대성자의 명으로 쳐들어간 고수들이 그의 처소에서 발견한 여러 서찰과 문건들로 인해서 이번에 일어났던 도난 사건에 연관된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곧바로 중원인들의 종적도 알아낼 수 있어서 아난대성자의 명으로 그날 새벽에 나머지 중원인들이 숨어있던 인드라 신전의 밀실을 고수들이 수색했다. 평소라면 다른 계파의 건물을 수색할 수 없겠지만, 사안이 중대하고 문주의 직권에 의한 명이라서 인드라 계파의 항의는 묵살되었다. 이윽고 신전의 밀실에서 수색을 벌이던 고수들과 접전이 벌어졌고, 끝까지 저항하는 중원인들 때문에 무수한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일 수 있었다. 비록 중원인들이 모두 죽어서 더 이상의 사실은 밝혀낼 수 없었지만, 들어난 물증만으로도 다시리 성자가 이번 일의 주모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였다. 그 자신은 전혀 관계가 없다며 다른 누군가의 음모라며 강변했지만, 계속해서 그의 거처에서 발견된 중원인들과의 서신 등 속속들이 들어나는 여러 증거물로 인해서 가장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나흘이 더 흘러 일행이 비고에 들어간 지 이레째 되는 날, 이번 일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 장로이상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만신전에 모였다. 너무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었지만, 이미 명백히 드러난 증거물들로 인해서 더 이상의 증거는 필요치 않고 한시라도 빨리 이번 일을 마무리 짓고 그 여파를 최소화해야한다는 아난대성자의 주장에 의해서 일이 서둘러지게 되었다. 평소에는 드넓기 그지없어 다소 황량하게 보이기까지 하던 만신전이 오늘 아침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차서 오히려 비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높이만도 오 장여에 이르는 만신전 일층의 상단에는 이번에 죽은 찰합리 성자를 제외한 나머지 팔대성자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아래 좌우로 각각 현자의 위치에 있는 여덟 명이, 다시 그 아래에서부터 각 계파의 장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드라와 아그니 계파의 사람들은 비록 참석은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다시리 성자가 체포된 입장에서인지 다들 침울한 표정이었다. 다른 계파의 입장에서도 전례가 없던 이번 사건 때문에 침통한 기색이 역력했고, 다만 비쉬누 계열의 인물들만이 분노가 가득한 표정이면서도 이번 일을 해결했다는 자부심에서인지 기세가 등등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대전 중앙에 위치한 석좌에는 내력이 봉쇄된 다시리 성자가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별다른 외적인 상처는 없었지만 그동안의 고심을 말해주듯이 산발한 머리와 지저분한 수염이 얼굴을 가득 가리고 있었다. “다시리 성자에게 묻겠소. 당신은 이번 일의 주모자임을 인정하겠소? 인정하겠다면 그 지위를 참작하여 자결할 기회를 줄 수도 있소.” 모두가 착석한 뒤에 성자들을 대표하여 비쉬누 계열의 지나 성자가 심문을 시작했다. 오늘의 심문은 그동안 수집한 증거를 바라만겁문 전체에 공표하고 이를 통해서 다시리 성자를 반역도로서 심판하는 자리였지만, 사실상 그의 부정에도 차후 고문이 계속 이어질 것이니 단지 확인하는 마지막 작업에 불과했다. 반역도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겠지만 그래도 편안하게 자결할 기회를 주겠다는 말에 다시리 성자가 상단의 성자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껄껄껄. 당신들이 다 짜놓은 판에서 내가 더 무슨 말을 하겠소. 하지만 난 결단코 이번 일과 관련이 없음을 천둥의 신 인드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오. 흥! 당신들이 무어라 떠들어도 난 결코 인정하지 않겠소.” “닥치시오! 이미 정황이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란 말이오? 어떻게 당신 같은 자가 성자의 위치에까지 올랐는지가 정말 의문이오. 게다가 겨우 천둥이나 날리는 신을 믿고....” 찰합리 성자의 죽음으로 다음대의 성자위에 오를 것이 확실한 하누만 계파의 과란타(戈爛打) 현자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자신들 계파의 수장이 죽어 당장에라도 분노가 폭발할 듯한 모습으로 다시리 성자를 손가락질을 하면서 한쪽에 모인 인드라와 아그니 계열의 인물들이 모인 곳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뭐라고? 너....” 평소에는 그다지 말이 없던 아그니 계파의 타마라(駝磨羅) 성자가 소리치며 일어나려는 순간, 그 옆에 앉아있던 브라흐마 계열의 제리파 성자가 붙잡아 말리며 엄숙한 표정으로 과란타 현자를 꾸짖었다. “닥쳐라! 감히 신들을 모욕하는 말을 내뱉다니, 아무리 소수파라 해도 그런 말은 금기임을 잊었는가? 더욱이 아직까지는 죄가 확정된 것이 아니니, 함부로 성자의 권위에 먹칠하는 말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역시도 소수파에 해당하는 입장이어서 과란타 현자의 말은 비위를 거스르고 있었다. 아직 성자의 위에 오른 것도 아닌데도 벌써부터 위세를 떨치려는 모습도 아니 꼬았고, 오늘의 일이 비쉬누 계열의 뜻대로 된다면 더욱 자신들과 같은 소수파의 세력은 위축들 것이 뻔해서 제리파 성자는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과란타 현자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인드라 계파 등 소수파 쪽에서 비난이 이어질 때, 지나 성자가 손에 든 금척(金尺)으로 석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탁탁탁!” “모두들 그만 조용히 하시오. 이 자리는 죄인을 심문하는 자리니 쓸데없는 소리를 일삼아 타 계파를 비방하는 자는 강제로 밖으로 내쫓겠소. 그리고 과란타, 그대도 본분을 지키고 다시리 성자에 대한 예우를 잃지 마시오. 아직까지는 그대보다 위인 성자의 신분이니까.” 잠시 후 장내가 다소 숙연해지자, 지나 성자가 고개를 돌려 다시리 성자를 다시 심문하기 시작했다. “다시리 성자, 그대 휘하의 발하루(勃河漏) 현자, 즉 중원인이 화신한 인물이 찰합리 성자의 호출을 받고 갔다가 본색이 드러나자 역으로 찰합리 성자를 죽인 것을 아시오?” “흥! 그것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요. 설혹 그자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었다고 해도 어떻게 동시에 양패구상 할 수 있단 말이오? 그가 암습했다면 찰합리 성자가 죽더라도 그자는 살아있어야 하고, 반대로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찰합리 성자는 대비하고 있었을 테니 찰합리 성자는 무사해야할 것이 아니오?” 곧바로 다시리 성자가 의문점을 지적하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주위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장내의 소란을 큰소리로 잠재우며 지나 성자가 계속해서 심문했다. “그만! 다들 조용히 하시오. 다시리 성자, 그거야 아직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그자의 암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찰합리 성자의 방심이 부른 결과로도 볼 수 있지 않소? 현장에서 발견된 두 사람의 모습도 서로의 심장을 수도로 찌른 상태였으니 말이오.” “그거야 말로 더욱 이상한 것이오. 서로 짜고 한 것도 아닐 텐데 지척에서 그런 상황에 이르다니 그게 말이 된다는 것이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다시리 성자가 맹점을 지적하며 반박하자, 지나 성자 역시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말이 없었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지나 성자가 정신을 차리고 재차 다시리 성자를 몰아붙여갔다. “그렇게 따진다면 이 세상에 흠 없이 완벽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오. 좋소. 그 문제는 그대로 넘어갑시다. 그자의 거처에서 발견된 서찰도 위조한 것이라 변명할 테니, 그것도 건너뛰고 다른 것을 그대에게 물어보겠소. 발하루 현자가 당신 밑에 있은 지 수십 년에 이르고 무척 친한 사이라는데, 여태 그자가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당신 생각에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자가 화신한 것이 사오년 전이라고 밝혀졌는데, 그 당시 발하루 현자는 신병 때문에 몇 달 동안 요양하고 있었소. 돌아왔던 그때 당시에는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더라도 단지 서먹함을 느끼는 정도였지 별다른 이상을 찾을 수 없었소. 음, 당신도 사람이란 지극히 타성적인 동물이란 것을 알 것이오. 설마 매일 마주치는 대다가 현자의 위치에까지 오른 자가 가짜이리라는 것을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다시리 성자의 반박이 이어지자 그의 말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확실히 몇 달 동안의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 습관과 어투 등을 익힌다면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현자나 성자위에 오른 자들은 대개가 친족이 없거나 설혹 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절연하다시피 하며 생활해서 그 차이점을 직감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고 보아야 했다. 발하루 현자 역시 혈혈단신의 몸이었으니 화신하여 몇 개월이 지난 뒤에 다시리 성자가 알아차리기란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흥! 나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아무리 위장을 잘해도 허점이 드러나는 경우가 없을 수는 없었을 텐데도 오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심해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물론 나도 그 점에 있어서는 잘못을 인정하오. 내가 더 신중하거나 예민했다면 의심해보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처지도 되지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는데, 가까이 있던 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찰합리 성자가 어떻게 알아차리고 호출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시인하던 다시리 성자가 역습을 해오자, 곧바로 지나 성자가 반론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최근에 몇 곳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중원인들이 숨어있을 것이라 의심하던 곳이었소. 그런데 그 일을 조사하던 찰합리 성자가 그자, 발하루 현자가 연락한 것을 알아내게 되었소. 그래서 반신반의하면서도 호출하여 캐물었던 것이오.” 그의 설명의 다시리 성자가 코웃음치며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흥! 정말 운도 좋군. 바보가 아니면 흔적을 남기지 않을 텐데도 그렇게 쉽게 알아차리다니. 하지만, 내가 결코 그와 작당하여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것이오.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 일을 일으킨단 말이오?” “그거야 밀실에서 발견된 서찰 등에서 보이듯이 이번 기회에 문주위를 차지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소수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오?” 곧바로 지나 성자가 다시 반론을 펴며 되묻자, 잠시 다시리 성자가 실소를 흘리다가 상단의 성자들을 둘러보며 반박했다. “허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 여러 성자들도 알다시피 솔직히 아난대성자가 이번에 물러난다면 내가 문주가 될 것이 가장 유력할 것이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분파하여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소. 그런데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일을 벌인다는 말이오? 더구나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 실권이라곤 별로 없는 문주의 지위가 뭐가 그리 좋다고 말이오.” “좋소, 좋아. 허나 말이오. 만일 이 사건을 일으킨 천지신교에 대한 성전을 일으킨다면 상황은 또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소? 그때는 모든 계파의 고수들이 소집되어 싸움을 준비하게 될 테고 문주도 실질적인 힘을 지니게 될 테니 말이오.” “흥! 그거야 당신들 뜻이겠지. 지금 이렇게 흘러가는 상황도....” 두 사람의 설전이 계속되었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다시리 성자가 음모의 주동자라는 증거물들이 드러나고 있었고 정황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시리 성자의 말도 설득력이 있었다. 겉으로는 확실해보였지만, 심중으로는 그가 그럴 리 없다는 의혹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반전(反轉) 반전(反轉) 2 계속해서 지나 성자가 증거물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자인할 것을 다그쳤지만, 다시리 성자는 강력하게 부인하고만 있었다. 그렇게 점차 시간이 흐르자 지나 성자도 그의 부인은 들은 척도 않고, 오히려 더욱 노골적으로 물증을 하나하나 내보이며 중인들을 설득하는데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아예 자신의 말은 무시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마침내 참다못한 다시리 성자가 팔걸이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탁!” “그만 하시오! 그따위 서찰이나 서류들을 가지고 무엇 하겠다는 것이오? 살아있는 사람이 있어서 증언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종이쪼가리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소. 그런 물증들은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단 말이오.” “나 역시도 유감이지만, 이 일에 관계된 사람으로서 살아있는 사람이 없소. 중원인들을 하나라도 사로잡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이 확실할 텐데 말이오. 정말이지, 쯔쯧.” 짐짓 아쉽다는 듯이 혀까지 차면서 지나 성자가 대꾸했다. 그 말에 곧바로 다시리 성자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비아냥거렸다. “하하하. 그것 참 정말 우연의 일치요. 수십 명이 밀실에 들이닥쳤으면서도 그래 단 한 명도 사로잡지 못하다니.... 정말 비쉬누 계파의 고수들은 대단하오이다. 순식간에 다 죽여 버리고.” 그러자 그의 비웃음에 화가 난 지나 성자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흥! 그건 그자들이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이오. 당신도 그들의 입속에서 나온 독물(毒物)을 보았지 않소. 그 정도로 지독한 놈들이었는데 순순히 사로잡혔을 것 같소?” “아무리 그래도 내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밖에 보이지 않소. 그 대단하다는 고수들이 몰려가서 기껏 했다는 것이 싸움밖에 없었다는 것은 당최 이해할 수 없소. 다른 수단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말이오. 이건 마치 처음부터 사로잡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 않소?” 다시리 성자가 계속해서 의문점을 들추어내며 애초부터 사로잡을 마음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말에 중인들도 술렁이며 확실히 이상하다고 서로 얘기하고 있었다. 점차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여태까지 침중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하던 아난대성자가 끼어들어 좌중을 향해서 소리쳤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다들 알다시피 워낙 다급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오. 우리로서도 그들이 그렇게 완강하게 저항할 줄은 몰랐고, 충분히 설득하고 비세라는 것을 안다면 포기할 줄로 알았었소. 하지만 사람의 일이 본래 그렇듯 예상과는 다른 일이 왕왕 생기기도 하오. 그렇듯이 그 일도 본좌 휘하의 고수들이 실수한 면이 약간 있지만, 결코 우리가 그들을 사로잡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오. 그러니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따지지 마시오. 지나 성자, 심문을 계속하시오.” 그의 말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더 이상은 따지지 못했다. 사소한 실수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인정해버리니, 의심스런 부분이 있음을 느끼던 사람들도 더 이상 나서지 못했다. 자칫 곤경에 빠질 뻔한 상황에서 구해준 아난대성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한 뒤에 지나 성자가 심문을 계속했다. 이후 몇 가지 증거물을 더 보여주다가 발하루 현자의 시동이 증인으로 불려나왔지만, 제리파 성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아직 어린 아이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면서 참고 이상의 가치는 줄 수 없다고 반대했다. 강력히 증인으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하던 아난대성자와 지나 성자도 수적인 열세를 어쩔 수 없어서 결국에는 참고하는 정도로 그치게 되었다. 한참의 설전이 이어진 뒤에 지나 성자가 이제 최후의 판결만이 남았다고 생각해서 성자와 현자들을 불러 모으려고 할 때, 그동안 잠자코 있던 다시리 성자가 입을 열어 소리쳤다. “잠깐, 아직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오. 어떻게 그대들의 주장만 얘기하고 나에게는 발언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는 말이오? 나에게도 의문되는 일을 물을 수 있는 발언권을 주시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다는 말이오? 이미 이 정도로도 충분할 텐데?” 지나 성자가 반문하고 계속해서 더 이상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할 때, 제리파 성자가 끼어들어서 다시리 성자의 편을 들었다. “내 생각에도 다시리 성자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어야한다고 생각하오. 비쉬누 계열에서 이번 일을 해결한 공로는 충분히 알고 있고 확실하게 보여주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심문만하고 끝내려한다면 결코 공평하지 않다고 보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그의 반론도 충분히 들어볼 가치가 있소이다.” 아그니 계파의 타마라 성자가 덧붙이고 곧이어 다른 성자들 역시 그의 말에 찬동하며 기회를 주어야한다고 소리쳤다. 이에 당황한 지나 성자가 슬쩍 곁눈질로 아난대성자의 의중을 물었다. 아난대성자 역시 대세에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시리 성자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겠소. 솔직히 더 들을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마지못한 얼굴로 지나 성자가 입술을 떼었다. 쉽게 끝날 것 같은 일이 복잡해질지도 몰라서 은연중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상대방을 무시하는 느낌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곧바로 다시리 성자가 자신이 느낀 의문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요 며칠 동안 본인이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생각할수록 수많은 의혹이 뇌리에 자리 잡은 채 내내 떠나지 않고 있었소.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크게 몇 가지만을 지적하고 싶소.” 잠시 말을 멈추어 숨을 돌린 뒤에 다시리 성자가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명확한 어조로 의문점을 이야기했다. “첫째, 이번 일을 조사하던 단리대협과 그 일행을 비고에 가두고 기관을 작동한 사람이 누군가? 그것도 하필 이런 시기에. 둘째, 중원인들이 보물을 훔칠 당시 숨어있었다고 믿어지는 대탑 천정의 밀실을 만든 사람은 누군가? 셋째, 참회옥에 갇힌 두 수인은 누구에 의해서 죽었는가?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참회옥에 있었던 중원인에 대한 것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제야 죽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인가?” 그의 말에 갑자기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가 일순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다시리 성자의 명성이 가장 높았던 바, 비록 다른 계파의 사람이라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흠. 정말 그런 일에 대해 이 자리에서는 한마디도 없었군 그래.” “다시리 성자님의 말도 일리가 있어. 정말이지 지난 며칠 사이에 갑작스레 여러 일들이 터진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야.” “맞아.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혀야만 이번의 판결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서로 떠드는 소리가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시장판처럼 떠드는 소리가 들끓었다. 성자들 역시 그런 분위기에 휩싸인 것처럼 크게 서로 소리치며 다시리 성자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쾅쾅!” “다들 조용히 하시오! 모두 조용히!” 갑작스런 장내의 변화에 당황한 지나 성자가 신경질적으로 금척을 내리치면서 좌중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지만 계속 소리치는 지나 성자의 고함에 의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누그러져갔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조용해지고 장내가 정리되자 지나 성자가 다시 목소리를 높여서 장내를 둘러보며 얘기했다.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이 자리에서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십대성자와 지명된 사람에 한하니 다른 사람들은 경청하기만 할뿐 절대 말하지 마시오. 차후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가차 없이 밖으로 내쫓고 나중에 문책할 것이오. 다들 알겠소?” 그의 경고를 듣고서야 장내는 일순 물을 끼얹은 듯이 정적이 감돌았다. 그제야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 성자가 말을 이었다. “앞서 다시리 성자가 의문시한 일들은 이번 일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현재 조사 중이어서 이 자리에서 논의하지 않은 것뿐이오. 그러니 내 생각으로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어떻게 그런 일이 상관이 없다는 것이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지금?” 지나 성자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은폐하려는 의도를 느낀 다시리 성자가 곧바로 소리쳤다. 거기에 동조해서 시바 계열의 모로 성자가 주름투성이인 얼굴을 더욱 신경질적으로 찌푸리며 지나 성자를 추궁했다. “본인 역시 지나 성자의 말이 이상하게 생각되는구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이오? 그대들 계파에서 조사한답시고 해서 우리에게 던지듯 알려주었을 뿐, 누구도 정확히 어떻게 되어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소. 이 자리에서 그 일들에 대한 것도 밝혀서 확실하게 결판을 내야하오.” “맞소. 다시리 성자의 일이 너무 중대해서 일단 그냥 넘어갔지만, 솔직히 의심스런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나 역시 그 일들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니, 다시리 성자의 반론대로 이 자리에서 명백히 밝혀야할 것이라 보오.” 제리파 성자까지 나서서 힘을 실어주고, 곧이어 나머지 성자들도 거기에 가세했다. 이렇듯 소란스러울 때, 아난대성자와 지나 성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며 어찌할지 상의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세로 보아서는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전음으로 묻는 지나 성자의 말에 잠시 생각해보던 아난대성자가 결정을 내렸다. <음. 어쩔 수 없지 않나? 너무 걱정은 말게. 저 자가 아무리 기를 써도 그에게 증거가 없는 이상에는 어쩔 수 없을 걸세. 아무리 떠들어도 증명할 길이 없는 단순한 중얼거림에 불과하지. 뭐, 약간은 불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으로서도 다른 모든 성자들이 나서서 주장하는 사태에서 더 이상 은근슬쩍 넘어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뜻대로 되지 않아서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였지만, 그 일들을 거론하더라고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국면을 이끌어나가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잠시 후, 상의를 끝낸 지나 성자가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퉁명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여러 성자분들의 의견이 정 그렇다면, 좋소이다. 그러면 다시리 성자의 말대로 그 일들에 대해서도 거론하도록 합시다. 다시리 성자, 당신이 묻고자하는 바를 정확히 이야기해보시오.” 그의 말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다시리 성자가 물음을 던졌다. “첫째, 이번 일을 조사하던 단리대협 일행이 비고에 갇힌 일에 대해서 해명해보시오. 하필 이런 때에, 중요한 단서로 생각되던 대탑 천정의 밀실이 발견된 직후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말이오.” 이때까지의 상황과는 완전히 반전되어서, 비록 여전히 위치상으로는 상하로 마주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간의 입장이 정반대인 상태가 되었다. 그런 탓인지 말하는 다시리 성자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 것처럼 웅혼한 울림을 장내에 던져주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저번에 설명했다시피, 대탑의 수리를 위한 준비를 하던 도중에 장인 중의 한 사람이 실수로 기관을 작동하게 된 것이오. 처음에는 철벽이 내려진 것 정도에 불과해서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지만 거기에 더해서 비고내의 전 기관이 작동되어버린 것 같소.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본 계열의 증과현자까지 거기에 갇히게 되었소.” 지나 성자가 마지막에 슬쩍 자신들 계파의 사람까지 갇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논점을 흐리려고 할 때, 곧바로 다시리 성자가 비웃으며 되물었다. “단지 실수였고, 기관의 오작동이었다? 흥! 도대체 당신 생각에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아닐 것은 또 무어요? 세상에 꼭 정해진 대로 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 정 의문스럽다면 당장에라도 그 장인을 불러올 수도 있소. 또 다른 계파에서 기관을 조사하고 싶다면 그것도 응낙하겠소.” 다시리 성자의 비웃음에도 별 동요 없이 지나 성자가 명확한 어조로 대꾸했다. 말을 이어서 다른 성자들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본인도 역시 그들이 기관에 갇힌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부디 여러 제위들께서도 이렇게까지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감안해서 그 상황을 이해해주시길 바라오.” “좋소. 그 점은 그만 넘어갑시다. 정말 우연의 일치가 계속되는 것이 이상하기 짝이 없지만 말이오. 그렇다면 밀실에 대한 것은 어떻게 된 것이오?” 다시리 성자의 추궁에 지나 성자가 잠시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문제는 복잡한 것으로 지나 성자 역시 의문을 느끼고 있었지만, 같은 계열의 아난대성자가 말한 것을 믿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음. 그 밀실은 지난해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소. 그 당시 대탑의 수리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참회옥에 수감되었었던 아난대성자의 제자인 제타구고(啼陀九苦)요. 알다시피 얼마 전에 그 역시 살해되었고, 같이 밀실을 만들었었다는 장인은 지난해에 죽음을 맞이해서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그놈은 단지 무고한 사람들 수십 명을 살해한 죄로 수감되었지 않소?” 지나 성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놀란 제리파 성자가 소리쳐 되물었다. 본래 제타구고는 유일한 혈육인 누이동생이 윤간당한 뒤 살해되자 복수심에 미쳐버렸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 일에 관계된 사람뿐만 아니라 아무런 상관없던 이웃사람들과 체포하러 나선 바라만겁문의 고수들까지 죽인 죄명으로 참회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래도 정상을 참작하고 아난대성자가 호소하여 죽음은 면했지만, 그 일 때문에 아난대성자는 문주 위에서 물러나겠다고 공표해야 했다. “아니 그놈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냈다는 것이오?” “도대체 당신들은 제자를 어떻게 가르친 것이오? 그런 일을 벌이는 것도 모르다니!” 나머지 성자들도 아난대성자와 지나 성자에게 소리치며 따지고 들었다. 이어서 장내에 있던 사람들까지 웅성거리자 또다시 장내는 소란스러워져갔다. 성자들의 추궁에 두 사람의 얼굴에서 잠시 곤혹스런 기색이 엿보였다가, 답변을 바라듯 주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마지못해서 아난대성자가 입을 열었다. “흠, 우리도 밀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번에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아냈을 뿐이오. 설마하니 그놈이 그런 일까지 벌였을 줄은 나도 정말 몰랐소. 알았다면 그때 바로 사형에 동의했을 텐데....” “하하하! 정말 멋대로 둘러대는 군 그래. 어떻게 된 것이 물을만한 놈들은 죄다 죽어버렸는지, 정말 당신들은 운도 좋구려. 흥! 좋소. 물증이 더 없으니 그놈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대로 넘어갑시다. 사실 누가 만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로 만든 것인가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니까.” 난처한 표정의 아난대성자와 지나 성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다시리 성자가 주위를 돌아보며 비아냥거렸다. 장내의 사람들 역시 불신이 가득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곧바로 다시 말을 이어서 두 사람을 추궁해갔다. “그렇다면 그놈이 밀실을 만든 이유가 대체 뭐요? 평소에도 그놈은 성격이 안하무인에다 외골수적이라서 아난대성자 당신의 말만 듣는다고 알려졌던 놈인데.” “으음. 그거야 이미 죽어버려서 확신할 수 없지만 중원인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겠소? 하지만 본인은 결코 모르는 일이었소. 이제야 이런 일을 알게 되어 본인으로서도 정말 유감천만일 따름이오. 휴! 당시 그래도 제자여서 죽음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던 것도 정말 후회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럴 줄 몰랐다는 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아난대성자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즉시 다시리 성자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과연 그럴까? 본인이 발하루 현자가 가짜인 것을 몰랐다고 할 때는 마구 몰아붙이더니, 그래 자신의 제자가 그런 일을 벌이도록 아무런 것도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오? 혹시 당신이 사주한 것은 아니오?” “결코 그렇지 않소. 정말....” “흥! 도대체 믿을 수가 없군. 자식처럼 총애하던 제자가 그런 일을 벌이는데도 전혀 몰랐다니 말이야.” 냉소를 흘리며 다시리 성자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다시리 성자 때문에 아난대성자도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반박했다. “그때 그놈이 그런 일까지 벌인 줄 알았다면 결코 사정하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미쳤다고 문주 위를 내놓겠다는 선언까지 했겠소? 또 당신이 주장하듯 내가 관련되었다면 더더욱 그때 바로 사형에 동의했을 것이 아니오?”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이 더 낫지, 당신 생각에는 영구금제가 사형보다 가볍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흥! 위선은 그만 떠시오. 이제 보니 혹시 그때 당시 일어난 제타구고의 누이동생을 윤간한 일도 당신이 사주하여 그런 것이 아니오? 미리 선수처서 입막음하려고 말이오?”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리 성자가 추궁을 계속했다. 이에 아난대성자가 코웃음 치더니, 오히려 당시의 상황을 들추어내며 역습을 가했다. “흥!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오히려 그때 일어난 사건은 당신들 계파의 속한 사람들이 벌인 것으로 모두가 알고 있소. 오히려 당신이 본인의 제자를 혹하여 밀실을 만들게 했다가 내게 고백할 것 같으니 그런 식으로 음모를 꾸민 것은 아니오?” “억지 부리지 마시오! 그것은 그렇지 않아도 본 계파의 세력이 강해지는 상황을 억누르고자 일부러 당신이 저지른 것이지 않소? 당신 제자가 자신을 배반할 것 같으니 그런 일을 꾸며서 말이오. 본 계파의 명성을 악화시킬 수도 있고, 당신은 제자를 별무리 없이 제거할 수 있을 테니.” 고성이 오고가며 각자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혼란스러워져갔다. 다시리 성자의 지적대로 아난대성자에게 미혹스런 부분이 많았지만, 당시 일어난 사건의 경위로 보아서는 다시리 성자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반전(反轉) 반전(反轉) 3 본래 제타구고는 그 자질이 특출나서 아난대성자가 제자로 받아들였지만, 그 신분이 가장 낮은 수드라(피정복민계급) 출신으로 처음 제자가 되었을 때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또한 어린 시절 다른 상위계급의 사람들에게 당한 기억때문인지 바라만겁문내에 있을 때에도 친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문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난대성자의 도움으로 누이동생도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그 신분상의 제약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살던 지역에서도 질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어서 몸은 조금 편해졌을지 모르지만 심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당시 제타구고의 누이가 사는 지역은 인드라 신을 주로 믿는 금세공들이 사는 지역에서 가까웠고, 그 일을 벌인 파락호도 그쪽 계파에 속했다. 파락호를 죽이고 떠나던 제타구고가 지켜보던 금세공들이 잘 죽었다는 듯이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광분해서 날뛰게 된 것이 바로 그 사건이었다. 평소부터 누이동생을 괴롭혀왔던 것을 알고도 참았지만,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야유와 욕설까지 들으니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서로 상대방이 이 음모의 주동자라 떠들고 있었다. 다시리 성자로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상황이어서 이렇게 몰아붙이는 것만으로도 소득이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고 제타구고도 죽어버린 뒤여서 아난대성자에 대한 의심을 키우는 것 이상의 소득은 얻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시오. 내가 보기에 의심스런 것은 두 사람 다 마찬가지이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는 이상 이런 설전은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오. 이 문제는 더 이상 파고들어야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에 지나지 않을 테니 다른 문제에 대해서나 논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어떻소, 여러 성자분들께서는?” 한참동안 설전을 지켜보던 제리파 성자가 두 사람을 말리고 곁에 있던 성자들의 동의를 구했다. 곧이어 이 문제는 이만 마무리하기로 성자들이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 일로 아난대성자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명성에도 흠집이 생긴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여러 제위들께서 그렇게 결정하신다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겠소. 하지만, 여태까지 보았듯이 아난대성자도 결코 이번 일과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소. 모두 그 점을 명심해주시길 바라오.” 성자들의 결정에 답하여 다시리 성자가 장내를 둘러보며 호소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나 성자가 냉소를 날리며 반론을 펴나갔다. “흥! 그러나 당신의 말은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일 뿐이오. 증거가 하나 없는 당신 자신만의 단순한 바램 말이오. 그에 반해 우리에게는 당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무수한 증거물이 있소. 그런 상황이니 당신의 말은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없소. 여러 성자들께서도 이점을 분명히 해주시오.” “증인은 없이 쓸데없는 서찰과 물품만 난무하고 그럴 것 같다는 정황만 있을 뿐이오. 단 한명의 확실한 증인도 없이 당신들이 미리 준비했다면 충분히 위조하고 꾸며낼 수 있는 것들뿐이니, 그것만 가지고 결정을 내린다면 난 결코 승복할 수 없소.” 다시리 성자가 곧바로 반박하여 두 사람은 다시 팽팽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재차 제리파 성자가 끼어들어 두 사람을 말리며 주의를 주었다. “그만! 모든 일의 판단은 이후 성자와 현자들 간의 표결로 결정될 것이오. 그런 얘기는 두 사람 다 그만하고 어서 다음 문제로 넘어가시오.” 못마땅한 얼굴로 서로를 냉랭하게 노려보던 두 사람이 그의 말에 따라 시선을 거두었다. 잠시 후, 다시리 성자가 다시 말문을 열어 지나 성자를 추궁해나갔다. “참회옥의 두 사람이 며칠 전 죽는 일이 벌어졌는데, 두 사람 모두 이번 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모두 익히 알 것이오. 하필 단리대협이 비고에 갇힌 직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살해되었고, 그 후 일사천리로 내가 누명을 쓰는 일까지 이어졌소. 과연 이것이 우연의 일치이겠소?” “그건....”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소! 끝난 다음에나 마음껏 답변하시오.” 지나 성자가 말하려는 순간, 다시리 성자가 큰소리로 면박을 주었다. 억지로 화를 참는 표정이 역력한 지나 성자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보며 잠시 비웃음을 날리다가 다시리 성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흐흠. 알다시피 제타구고만 해도 밀실에 대한 것과 이번 일에 대한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자였소. 또한 그 미치광이 이단자인 자무라(玆霧邏) 역시 과거 본문을 뒤집으려는 야욕이 있었지만, 여기 아난대성자가 그것을 밝혀내어서 자신이 문주위에 오른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소? 당신들이 구린 구석이 있으니 아예 죽여 버린 것이 아니오? 단리대협이 계속 조사한다면 밝혀낼 가능성이 다분했으니까 말이오.” 과거 문주 위를 두고 다투던 일까지 상기시키며 다시리 성자가 추궁했다. 과거에 그 자신에게 유리했던 상황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아난대성자가 자무라의 반역사건을 밝혀내서 문주 위가 넘어가게 된 일이었다. 추궁하는 다시리 성자는 마치 입장이 바뀌어 심문자가 된 것처럼 당당했고, 반대로 지나 성자와 아난대성자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지나 성자가 표정을 고쳐서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허허! 그게 언제적일인데 자무라의 일까지 언급하는 것이오? 그것만 보아도 당신이 아직도 문주 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오.” “흥!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본래부터 순환제였던 문주 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온 것이 누군데 그런 소리요? 그리고 내가 문주 위에 도전해온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으니 괜한 말로 논점을 회피하려 하지 마시오! 내가 던진 물음에나 똑바로 답하시오. 쓸데없는 소리를 계속 늘어놓지 말고.” 곧바로 다시리 성자가 맞받아치며 오히려 지나 성자를 조롱하고 있었다. 화가 난 지나 성자가 소리치려는 순간, 제리파 성자가 나서서 다시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잠시 후, 조금 진정된 지나 성자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그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미 끝난 일을 두고 다시 캐묻는 저의가 극히 의심스럽지만, 다시 한 번 본문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참고 밝히겠소. 며칠 전 발표했다시피, 두 사람이 참회옥 내에서 살해되었소. 하지만, 본 계열의 사람들이 암살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오. 참회옥은 독립적인 곳으로 다른 계파의 사람들이 침입해서 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오.” 그의 말에 다시리 성자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그 말이 맞소. 정말 말 한번 잘 했소이다그려.” 뜻밖의 말에 지나 성자가 어리둥절할 때, 곧바로 재미있다는 듯이 싱글거리며 다시리 성자가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말이오, 당신들 계파의 고수들이 체포한 중원인을 지키기 위해서 참회옥의 삼층에 같이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소? 외부에서 침입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들이라면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어떻소, 내 말이?” “당신은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거요? 살인이 벌어지던 그날 오전에 이미 본 계파의 고수들은 물러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체포했던 중원인이 죽어버려서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말이오. 참회옥주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증언한 일을 또다시 언급하는 이유가 대체 뭐요?” 발끈한 지나 성자가 소리쳐 되묻자, 다시리 성자가 곧바로 반박해나갔다. “그렇다면 당신은 유령이 그들 두 사람을 죽였다는 얘기요? 그들의 시신이 화골산 계열의 독에 녹았으니, 당신들이 나오기 전에 독물을 장치하였을 수도 있지 않소? 시간을 조절하여 당신들이 나간 뒤에 발동하게 한다면, 무공이 폐지된 두 사람이 대항할 길이 없을 테니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되는 것처럼 아무런 의심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오.” “그게 가능하단 말이오? 알다시피 본문에는 독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이 거의 없소. 더구나 염마팔영의 감시를 피해서 독을 장치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려울 것이오. 그들 각자의 무위는 사실상 본문의 최고수들로 볼 수 있으니 말이오.” 지나 성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다른 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리 성자가 다시 냉소를 날리며 반박해나갔다. “흥!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들의 시선을 끈 뒤에 하독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오. 또한 하누만 계파는 본문에서도 유일하게 독물을 다루는 곳이지 않소?”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말을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다시리 성자가 상단의 성자들을 향해서 짐짓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찰합리 성자가 죽은 것도 뭔가 의심쩍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그 사람이 발하루 현자의 진위를 알아냈는데, 독물에도 관련이 있을 사람이 죽어 버리다니. 이건 마치 아귀를 잘 짜마추듯이 모든 일이 술술 돌아가는 것 같지 않소? 우연이 한두 번도 아닐 텐데 몇 번이고 거듭되고 말이오.” 그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나 성자와 아난대성자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다시리 성자의 말대로 의심스런 구석이 다분해서 사람들도 아난대성자를 의심하는 마음이 커져갔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하던 두 사람이 서로 전음으로 의견을 교환하다가, 잠시 지나서 지나 성자가 해명하기 시작했다. “본 계열이 관련되었다는 다시리 성자의 말은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실상은 전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소. 상관이 없는 두 가지 일을 연관시켜서 의혹을 가중시켜서 자신의 죄를 벗어나려하고 있지만, 찰합리 성자와 참회옥의 일 사이에는 전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소. 또한 본 계파에서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차라리 다른 수단을 썼을 것이오. 가장 의심받기 쉬운 독물을 써서 죽이는 일을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오.” “그거야 역으로 그런 맹점을 찔러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한 단계 앞질러 말이야.” 비아냥거리는 다시리 성자를 노려보다가 지나 성자가 크게 숨을 몰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휴! 당신 맘대로 상상하시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일이고, 이미 참회옥의 자체 조사에서도 본 계파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 밝혀진 마당에서 더 이상 할 말은 없소. 이상이오.” 잠시 더 설전이 벌어졌지만, 더 이상 밝혀진 것은 없었다. 다시리 성자가 체포되었던 중원인에 대한 문제도 언급했지만, 지나 성자는 상처가 심한 상태여서 쭉 혼수상태였다가 죽었다는 이전에 밝혀진 사실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서로간의 공방이 끝난 뒤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일만 남았을 때, 제리파 성자가 안타까운 얼굴로 다시리 성자에게 최후의 변론을 하도록 허락했다. 속마음으로야 그 역시 의문투성이인 이 일을 보다 다시리 성자에게 유리하게 이끌고 싶었지만, 결정적으로 다시리 성자에게는 증거가 없었으니 판결은 이미 끝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리 성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비록 판결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겠지만, 이번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니.” 다시리 성자 역시 비세임을 인식하고 있던 터라 약간 침울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장내를 둘러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푸른 눈동자로 일일이 주시하며 목소리에도 힘을 실었다. “고맙소, 제리파 성자. 음, 여태까지 여러 제위들이 보았다시피 확실히 정황 증거로 보아서는 본인 역시도 내가 범인인 것처럼 착각될 정도이오. 정말 누가 이렇게 일을 꾸민 것인지는 모르지만,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요. 하지만 난 결코 이런 일을 저지르거나 가담하지 않았소. 더욱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는 일들이 여럿 있는 상황에서는 차후 어떠한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절대로 승복할 수 없음을 이 자리에서 천명하겠소.” 말이 끝나자마자 지나 성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리 성자의 아픈 곳을 찔렀다. “무슨 말이오? 이미 증거물도 충분하고 정황으로 보아서도 그대가 범인이 분명한데. 뻔뻔스럽게도 성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끝까지 시인하지 않다니, 당신은 자신만 생각하고 계파의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않는구려. 정말이지 그대에게 실망했소.” 그의 말처럼 이렇게 계속 진행된다면 다시리 성자뿐 아니라 인드라 계파 역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불명예를 뒤집어쓴 채 십대 계파에서 축출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며 지나 성자가 압력을 가하자, 일순 다시리 성자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시인할 수 없소. 바라문의 양심으로서도, 인드라 신 앞에서도 결코 죄가 없음을 고백하오!” 잠시 침묵하며 생각하던 다시리 성자가 굳은 얼굴로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곧이어 고개를 돌려 자신들 계파의 인물들을 향해서 말을 이었다. “본인 때문에 여러 바라문들에게도 피해가 가게 되었지만, 여러분이라면 충분히 나의 결백을 믿어 주리라 생각하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점만은 분명히 기억해주시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외침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저희도 다시리 성자님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번 일은 모두 저 비쉬누 일파의 농간이 분명합니다.” “저희 역시 절대 승복하지 않겠습니다. 설혹 분파하여 본문에서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인드라 신께 경배를!” “다시리 성자에게 축복을!” 곳곳에서 떠드는 소리와 함게 베다 경전을 암송하며 신의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가장 명성이 높고 존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던지라, 순식간에 장내는 다시리 성자의 무고함을 외치는 소리로 뒤덮여갔다. 곧바로 이에 맞서 비쉬누 계열의 장로들도 일어나 상대편을 비방하니 장내는 완전히 양쪽으로 갈라진 채 고함과 욕설이 난무하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하지 못하겠소? 모두 그만 자리에 앉으시오! 성자 분들도 각자 자신들 계파의 사람들을 다독여서 더 이상의 혼란을 막아주시오.” 제리파 성자가 먼저 나서서 소리치고, 뒤따라 다른 성자들도 나서서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본보기로 여러 계파에서 몇 명을 내쫓고 장로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인드라 계파의 사람들을 내보내자 이윽고 장내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장내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생각하자, 성자와 현자들이 일어나 어두운 표정으로 일층의 밀실로 향했다. 어떠한 판결이 내리듯 바라만겁문 사상 최악의 오점이 될 것이기에 마음이 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최후의 판결을 기다리는 전내에는 굳은 표정으로 석좌에 앉아있는 다시리 성자와 결정이 어떻게 내릴지 설왕설래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반전(反轉) 반전(反轉) 4 모두가 초조하게 판결을 기다린 지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 밀실의 문을 열고 성자와 현자들이 돌아왔다. 아난대성자와 지나 성자만이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대부분은 찌푸리거나 굳은 표정이었다. 판결을 기다리며 물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할 때, 문주로서 아난대성자가 일어나 판결문을 펼쳐들었다. “그럼 결정된 판결문을 공표하겠소. 금번 다시리 성자의 역모에 대한 본 수뇌부의 최종결정은....” 그 순간, 어디선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그 전에 밝혀야할 일들이 있소.” 뜻밖의 상황에 장내의 모든 인물들이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기다리던 판결 대신 누군가 끼어드니 다들 의아해하고 있었다. “누군가? 감히 판결을 내리는 중에 끼어들다니! 당장 나서라!” 지나 성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 난 방향으로 외쳤다. 곧 왼편에 있던 장로들 사이로 장로 복장을 한 두 명의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대들은 감히 본 성자들의 권위를 무시하는가? 누군데 감히 멋대로 소리쳐 판결을 중단케 하는가? 신분을 밝혀라. 나중에 내 친히 문책할 테니.” 두 명의 장로 복장을 한 육십 대의 늙은이들을 향해서 지나 성자가 꾸짖었다. 그의 말에도 별다른 동요도 없이 그 중의 한사람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맞받았다. “하하! 지나 성자께서는 며칠 못 본 사이에 본인의 목소리도 잊어먹은 모양이구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내가 언제.... 혹시....?” 화를 내려다 문득 천축인의 억양과는 약간 다른 것을 알고, 지나 성자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넌지시 묻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노인이 앞으로 나서서 얼굴의 분장을 지우고 가발을 벗으며 대꾸했다. “맞소.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정말 섭섭하기 짝이 없소.” 자신의 말에 창백해지는 지나 성자를 뒤로하고, 곧이어 단리유아가 상단의 성자들을 향해서 인사말을 던졌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이번 사건을 맡아 처리하던 중에 죽을 뻔한 단리유아가 인사드립니다. 며칠밖에 안 되었지만, 모두 정말 반갑기 그지없군요.” 포권하면서 특히 죽을 뻔했다는 말을 강조하는 단리유아였다. 한편 다른 한 노인도 본색을 드러내며 좌중의 인물들을 향해서 인사했다. “증과시리가 여러분들께 인사드리오. 부득이하게 변장하여 들어온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라오.” 뜻밖의 사태에 다들 어리둥절하고 놀라고 있었다. 비고에 갇힌 뒤에 기관이 작동되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다들 정말로 본인들이 맞는지 두 사람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내 틀림없다는 것을 알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난대성자와 지나 성자에게 향하면서 어찌된 연유인지 묻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당황한 기색만 보일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농담하듯이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두 분께 물어보았자 헛수고입니다. 본인을 포함한 일행이 비고에 갇힌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사실 기관에 죽을 뻔했지만, 하늘이 정의를 수호하고자하는지 살 길을 열어주더군요.” “허허허! 정말 다행이오, 단리대협. 이렇게 무사하시다니. 이방인임에도 본문의 난제를 해결해주는 데 열성적이던 분이 하마터면 무의미하게 희생된 줄 알았소. 무사하시니 본인도 한시름 놓았소이다.” 당황하던 아난대성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선수를 쳐 반가움을 표했다. 이어서 증과현인에게 고개를 돌려서 그동안 크게 걱정했다는 듯이 연이어 물음을 던졌다. “증과 현자, 자네도 무사하니 다행이네. 어디 이상한 곳은 없겠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도 무사하겠지?” “....” 그의 말에 증과시리가 묵묵히 몸을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아난대성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길 때, 지나 성자가 대신해서 물음을 던졌다. “비고에 갇혔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나온 것이오? 따로 밀도가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아는데?” 장내의 모든 사람이 궁금해 하는 물음인지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증과시리는 낙심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며 고개를 수그리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남의 이야기하듯 태평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하하. 물론 구중철벽을 깨뜨리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겨우겨우 기관을 돌파한 뒤, 땅을 파서 지하수로를 통해 나온 것이지요.” “허, 정말 천우신조로군. 그런 방법으로 탈출하다니.” “그래도 다행한 일이 아니오?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다들 무사하게 나왔다니.” 주위의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떠들고 있을 때, 지나 성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니 구일만 기다리면 구중철벽이 열리고 모든 기관도 멈추게 되었을 텐데, 비고의 밑바닥에 구멍까지 뚫으며 탈출했다는 것이오? 그랬다면 물이 역류하여 비고가 완전히 잠기게 되었을 텐데” “흠, 지나 성자께서는 어째 저희가 살아 돌아온 것이 반갑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비고가 물에 잠긴 것만 신경을 쓰다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시일이 흐르면 무사하게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것이오. 침수된다면 더 이상 비고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말이오.” 지나 성자가 손을 휘저으며 다급히 해명했다. 이에 단리유아가 빙그레 웃으며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기관이 계속 돌아가는데 어떻게 무작정 기다린다는 말입니까?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구출된 뒤에도 모든 일이 끝나버린 후일 것인데? 마치 지금 상황처럼 말이오. 그런데 그까짓 보물도 없는 비고를 구태여 신경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계속해서 뭐 하러 그렇게까지 했냐고 추궁하는 지나 성자의 말을 가로막고, 단리유아가 은근한 어조로 되물었다. “지나 성자께서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저를 포함한 일행을 함정에 빠뜨린 것은 뭔가 얻고자하는 것이 있지 않겠소? 그렇다면 비고의 침수와 이번 사건의 해결 중 어떤 것이 더 큰 일이겠소?” “....음, 그렇기도 하겠구려.” 마지못한 표정으로 지나 성자가 시인했다. 계속 물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지금도 의혹스런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 때문에 더 이상은 추궁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의 설전을 통해서 단리유아 일행이 어떻게 탈출했는지를 알게 된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수군거릴 때, 단리유아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성자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성자 여러분들께서 본인에게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권을 준 것을 다들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음모로 인해서 저희 일행이 비고에 갇히는 일이 벌어졌지요. 아마 제가 이번 사건을 해결하게 될 것 같아 불안한 생각에 그런 일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뒤, 뒤쪽의 석좌에 앉은 다시리 성자를 돌아보고 이어서 상단의 성자들에게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곧이어 주위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도움에서인지 이렇게 무사하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음, 제가 이렇듯 무례하게 판결의 마지막에 끼어든 것은 제게 잠시 시간을 주어서 이번 일을 해결할 기회를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아직 제게 맡긴 조사권이 아직 유효하다면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미 결정이 나서 판결문을 공표하기만 되는 상황에서 또 무엇을 밝힌다는 말이오? 이미 끝난 일이니 당신은 그만 물러나시오.” 지나 성자가 큰소리치며 서둘러 단리유아의 입을 막으려했다. 만일 내버려두었다가는 다된 밥에 재 뿌리는 격으로 일이 엉망이 될 것이 분명해보였기에 어떻게든 단리유아를 이 자리에서 내쫓아내야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곧바로 한쪽의 제리파 성자가 나서서 그의 말을 반박했다. “지나 성자께서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단리대협에게 조사권을 준 것은 여기 십대성자 모두의 결정이었소. 어떻게 그대 마음대로 그렇게 한다는 말이오? 더구나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빠져 기관에 갇혔던 것이니, 분명 이번 사건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한 사실들도 밝혀줄 수 있을 것이오.” “그렇소. 아직 판결문이 공표된 것도 아니니, 그에게 준 조사권도 아직 유효하다고 할 수 있소. 또한 그가 알아낸 사실로 인해 판결이 번복될 수도 있으니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하오.” 타마라 성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리파 성자의 말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잇달아서 이구동성으로 두 사람의 말에 동조했다. 본래 밀실에서 투표로서 판결을 결정할 때도 미심쩍은 정황이 많아서 서로 의견이 분분했었다. 하지만, 정황은 배제하고 증거 상으로만 판결을 내려야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석연치 않아하는 마음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연유로 대부분이 단리유아에게 기회를 주기를 바란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흐르자, 지나 성자가 다시 나서서 중단시키려고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제리파 성자가 지나 성자를 응시하며 넌지시 물었다. “지나 성자께서는 자꾸 중단시키려하는데, 혹시 단리대협이 뭔가 알고 있을까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오?” “아니 그게 아니라, 이미 논의가 끝난 상태인데 다시 해야 하니 너무 쓸데없는 일일 것 같아서 그런 것이오.” 손을 내저으면서 지나 성자가 다급한 얼굴로 변명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의심어린 시선을 던지니 지나 성자로서도 아난대성자의 얼굴만을 쳐다볼 뿐 더 이상은 반대할 수 없었다. 이런 주위의 소란과 동떨어진 듯 아난대성자는 전례 없이 굳은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면 모두 단리대협의 조사권이 유효하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으로 알겠소. 단리대협, 알아낸 것들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혀주시오. 세이경청할 테니.” 제리파 성자가 대표로 단리유아에게 결정을 알렸다. 이에 포권하여 감사를 표한 후, 단리유아가 본격적으로 알아낸 일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밀실을 발견한 후에 저와 일행이 비고에 갇힌 것은 다들 아실 테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전에 지나 성자께서 얘기했듯이 단순한 실수와 오작동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미 끝난 일을 왜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오? 증거가 있소? 증거를 대고 말하시오. 단지 심중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말고.” 지나 성자가 곧바로 큰소리쳤다. 이에 단리유아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뭐, 그렇게 따지시면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저로서도 그 문제에 있어서는 더 알아낼 것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충분한 증거가 있습니다.” “어떤 증거요? 어서 말해보시오!” 단리유아의 말에 제리파 성자가 놀라서 다그쳤고, 다른 사람들 역시 떠들며 어서 증거를 내보이라며 소리쳤다. 그런 주위의 외침에도 단리유아는 유유자적한 태도로 자신의 말을 계속해나갔다. “일전에 제가 참회옥에 들렸을 때, 어떤 분께서 제게 이상한 말씀을 하시며 반드시 몰래 다시 찾아오라고 하더군요. 혹시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난대성자?”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하지만 참회옥 삼층의 수인들은 모두 죽었지 않소?” 퉁명스럽게 대꾸한 뒤 아난대성자가 반문했다. “죽었다라? 하긴 그 말도 맞긴 맞군요, 아직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어서 다시 고개를 쳐들고 좌중을 향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음, 비고를 나선 제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바로 참회옥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요. 바로 두 수인 중의 한명인 제타구고로부터요.” “대협이 비고에 갇힌 다음날 저녁에 독살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의아한 얼굴로 제리파 성자가 말할 때, 단리유아가 깜박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날 새벽에 찾아간 것입니다. 자정 무렵에 비고에서 탈출해서 말이지요. 뭐,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하여간에 제타구고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음 말을 기다리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할 때, 잠시 말을 끊은 단리유아가 아난대성자에게 물음을 던졌다. “제자이니 잘 알겠지만 아난대성께서는 밀실을 만들게 하지 않았다고 하셨지요. 지금도 그 말을 그대로 주장하십니까?” “물론이오. 본인은 결코 그런 일을 시킨 적이 없소. 분명 다시리 성자, 저 사람이 시켜서 한 것일 것이오.” 아난대성자가 별로 동요하는 기색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무슨 말이 나오든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석좌에 앉아있던 다시리 성자가 화가 나서 크게 소리쳤다. “내가 언제 그런 일을 시켰다는 말이오? 하지도 않은 일을 남에게 뒤집어씌우지 마시오. 단리대협, 그래 제타구고의 말이 무엇이었소? 분명 저자가 시킨 일이라 그랬겠지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아질 때, 단리유아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니오!” 짤막한 대답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지며 곳곳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럼 도대체 누가 시켰단 말이오?” “어서 빨리 얘기해보시오.” 주위의 소란에 상관하지 않고 단리유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타구고가 다른 말은 했소. 자신이 비쉬누 대탑의 수리를 감독하고 있을 때, 장인 중의 한 명이 비밀리에 밀실을 만드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이오. 그래서 그 사람을 붙잡아 추궁한 뒤에 아난대성자에게 보고하여 어찌할 것인지 물었다는데, 아난대성자는 그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소.” “허허,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대협,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을 바꾸어도 되는 것이오?” 아난대성자가 끼어들어 거짓말이라는 듯이 단리유아를 책망했다. 그의 말에도 단리유아는 멈춤 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해나갔다. “의심이 생겼지만 제타구고는 일단 넘어갔다고 하오. 그래도 유일하게 자신에게 온정을 베풀어진 스승의 말이니 믿고 말이오. 그런데 하루는 한밤중에 발하루 현자가 찰합리 성자를 찾아가는 일을 목격하게 되었소. 두 계파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함을 잘 알고 있는데 비밀리에 만나니 제타구고로서도 부쩍 의심이 들었소. 그래서 발하루 현자를 몰래 뒤쫓아서 두 사람의 밀담을 엿듣게 되었소.” “그러면 이미 이전부터 두 사람이 알고 있던 사이란 말이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말이오, 지나 성자? 아까 전에 얘기하기로는 찰합리 성자가 발하루 현자를 최근에야 의심한 것으로 들었는데?” 모로 성자가 지나 성자를 쏘아보며 연달아 물음을 퍼부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지나 성자와 아난대성자를 의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주위의 변화에 당황한 지나 성자가 힐끗 아난대성자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 그건.... 본인이 조사한 것으로는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서로 상대방을 죽인 며칠 전이라고 알고 있소. 아마 그 당시에는 찰합리 성자도 상대방이 가짜인지 몰랐을 수도....” “쾅!”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함을 본문의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데, 비밀리에 만난다는 것이?” 지나 성자의 변명에 모로 성자가 탁자를 내리치며 쏘아붙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끼어들어 모로 성자를 말렸다. “모로 성자께서는 그만 진정하십시오. 제 얘기가 끝나서 다시 따져도 될 테니. 다른 분들도 가급적이면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주위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단리유아가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만난 뒤 나눈 내용을 듣던 제타구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소. 비고에서 보물을 훔칠 계획과 앞으로 두 세력 간의 교환조건 등을 듣고 말이오. 즉시 제타구고는 스승인 아난대성자에게 사실을 보고하고 두 사람을 체포할 것을 요청해소. 그런데 아난대성자는 아직 확실한 것은 없으니 물증이 잡힐 때까지 기다리자면서 그동안에 면밀하게 조사하여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소.” 힐끗 상단의 아난대성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단리유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도 스승으로부터는 아무런 말이 없었소. 계속 간청했는데도 별 말이 없자, 제타구고는 제 힘으로 조사해볼 생각을 하게 되었소. 그러다가 아버지처럼 따르던 스승이 그 일의 주모자임을 알게 되었는데, 너무도 놀라고 낙심한 제타구고로서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소. 스승을 배신하기에도 그랬고, 그렇다고 옳지 않은 일을 알고서도 말하지 않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소. 그렇게 제타구고가 온정과 정의 사이에서 방황할 때, 바로 누이동생에게 참변이 일어났소.” 그 순간 아난대성자가 코웃음 치면서 반박했다. 한 손으로는 다시리 성자를 가리키며 서로 공모하여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꾸며내고 있음을 주장했다. “흥! 대협의 말은 그럴듯하지만 미쳐 날뛰어 수십 명의 무고한 생명을 죽인 놈의 말을 어떻게 믿는다는 말이오? 더구나 이미 죽어버린 놈의 말을. 혹시 당신이 저 다시리 성자와 짜고서 일부러 나에게 불리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오? 이미 며칠 전에 나와서 말이요.” “억지 부리지 마시오. 하늘에 맹세코 난 단리대협과 만난 적이 없소. 자신이 이번 사건의 주모자임이 들어나니 괜한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오?” 다시리 성자가 맞받아치며 곧바로 서로 고성과 욕설이 오고갔다. 지켜보던 사람들로서는 도대체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알 수 없어서 장내는 서로 웅성거리는 소리들로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여러분, 잠깐만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여러분 모두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곧 끝날 테니 말입니다.” 단리유아가 내공을 모아 소리쳐서 장내를 가라앉힌 후에 다시 아난대성자를 바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난대성자의 말대로 증인이 없다면 본인의 말은 전혀 쓸데없는 소리에 불과할 것이오. 하지만 증인이 있다면 또 다른 얘기가 아니겠소?” “있으면 어디 데려와 보시오. 이미 모두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혼백이라도 데려올 생각이오?”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고 아난대성자가 큰소리쳤다. 그 자신의 생각에는 이 일과 직접 관련된 사람은 모두 죽어버렸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보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들이 단리유아를 주시하며 과연 증인을 데려올 수 있을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주위의 요구에 곧 단리유아가 증과시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에 증과시리가 밖으로 전음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리발마와 수리살타의 부축을 받으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제타구고(啼陀九苦)?” “자무라(玆霧邏)?” 앙상하게 마른 몸매에 얼굴 역시 흉터와 주름살투성이인 두 사람을 보고, 마치 귀신을 본 듯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치고 있었다. 죽었다던 사람이 버젓이 살아서 이렇게 만신전내로 들어오니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전(反轉) 반전(反轉) 5 본래 비고를 탈출했던 그날 새벽 단리유아는 참회옥에 찾아가 자무라와 제타구고를 만났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린 단리유아가 두 사람을 빼돌릴 결심을 하게 되었지만, 참회옥주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증과시리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이번 음모를 알게 된 참회옥주도 개인적인 불명예와 문책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단리대협! 저들이 분명 그 사람들이 맞소?” 제리파 성자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그 역시도 그들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놀라는 마음에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하하하. 잘 아시면서 왜 제게 물으십니까? 설마하니 저들의 얼굴을 잊어먹은 것은 아니실 테면서?” “그래도 너무 놀라운 일이라.... 허허, 죽었다는 사람이 멀쩡하다니. 단리대협, 어떻게 해서 저들을 무사히 빼돌린 것인지 설명해주지 않겠소?” 제리파 성자의 물음에 단리유아가 어떻게 두 사람을 구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비쉬누 일파의 고수들이 독물을 풀고 나가기 전에 참회옥의 협조를 받아서 두 사람을 위층의 죄수 두 사람과 바꾸어놓은 일이었다. 단리유아의 설명이 끝나서 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회백색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자무라가 상단의 성자들을 향해 낄낄대며 떠들었다. “흐흐흐, 잘들 있었나? 늙은이들이 어째 예전보다 오히려 혈색이 더 좋아진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성자들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 아난대성자가 반역죄를 뒤집어씌워서 감금한 사람이 바로 자무라였는데, 사실 그의 무고함을 알고서도 성자들이 반대하지 않고 적극 찬성했었다. 그가 금기시된 사술을 익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큰 이유는 주장하는 교리가 이단적이기도 했고, 성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리대협, 그런데 저 자는 왜 데려온 것이오? 별 상관도 없을 미친 늙은이를.” 불편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모로 성자가 투덜거렸다. 이에 단리유아가 설명하며 성자들의 양해를 구했다. “저분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자리에서 밝힐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단리유아의 말에야 마지못한 표정으로 응낙했지만, 다들 될수록 자무라와는 시선을 마주치는 일도 꺼려하고 있었다. 이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난대성자는 두 사람이 들어올 때부터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제타구고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타구고는 오 척이 조금 넘는 키에 대머리인 인물로 이마에는 비상하는 붉은 가루라가 새겨져있었다. 이제 삼십도 안 된 나이였지만 얼굴에는 흉터와 주름살로 가득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다 죽어가는 노인인줄 알았을 것이다. 제타구고도 장내에 들어섰을 때부터 아난대성자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복수심이 들끓어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요동치고 있다가, 마침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그래도 입술이 타는지 슬쩍 한번 깨물고는 손을 들어 가리키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왜, 왜 그랬소? 내, 내가 비록 당신의 음모를 알아냈지만, 결국에는 은혜를 저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그, 그런데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누이에게 그런 일까지 저지르면서.... 부, 부모님의 얼굴도 모르고 어려서부터 내가 기르다시피 한 불쌍한 아이인데. 차라리 내게 그냥 죽으라고 명을 내릴 것이지,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소? 다, 당신이....” 목소리 역시 떨려나와 그의 격탕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너무 흥분되었는지 목소리가 잠겨들며 이내 기절하여 쓰러졌다. 곁에 있던 사리발마가 바로 그 몸을 받아서 누이며 보살피고 있었다. 고요한 장내에 오직 그의 외침만이 퍼져나갈 때에도 아난대성자는 마치 얼어붙은 동상처럼 아무런 대꾸도, 움직임도 없었다. 참다못한 지나 성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놈의 말은 허튼 소리가 틀림없소.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 당시 판결을 내릴 때는 아무런 말이 없더니 이제와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지 않소? 저놈은 틀림없이 저 중원인의 사주를 받아서 지껄이는 것일 거요. 이건 다시리 성자에게 유리하게 이끌려는 저 사람의 농간이 분명하니, 여러분들도 그 점을 명심해주기를 바라오.” 이에 즉각 자무라가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이 맞받아쳤다. 심각한 장내의 상황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싱글벙글 이었다. “킬킬, 수다쟁이. 그때는 저놈이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은 직후라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설마하니 자신의 스승이 지시해서 그런 일까지 벌일 줄은 몰랐거든. 게다가 저놈을 구하려고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주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참회옥에 갇힌 뒤에는 상황이 틀려졌지. 갇힌 다음날 찾아온 저 인간이 놀리듯이 사실을 말해주었거든.” “흥! 헛소리 마시오. 아난대성자께서 결코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소.” 지나 성자가 코웃음 치며 소리쳤지만, 자무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제야 저놈도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되었지. 저놈이 생각해도 자신이 아무리 분노했다고 해도 한순간에 완전히 이성을 잃고서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죽일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었거든. 마치 약에 취한 듯이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말이야. 흐흐, 그날 누이동생을 찾아가기 직전에 저 인간이 건네준 차속에 뭔가가 들어있지 않고선 그럴 수 없는 일이지. 이를테면 광혈산(狂血散) 같은 것 말이야. 흐흐흐. 어때, 늙은이, 내 말이 맞지?” 슬쩍 아난대성자를 돌아보며 음충맞은 웃음을 터뜨리며 자무라가 물었다. 장내의 모든 이들은 이제 아난대성자를 향해서 무언중으로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런 묵시적인 요구에도 한참을 말이 없다가 아난대성자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아이의 말은 거짓말이오. 설마하니 내가 제자에게 그런 일까지 저지를 정도로 파렴치한 사람이란 말이오? 다시리 성자, 저 사람이 시켜서 꾸민 일일 것이오. 원한에 차 있던 상태였으니 그가 조금만 부추겼어도 그렇게 믿게 되었을 것이오.” “당신은 끝까지 내게 덤터기를 씌우는군. 흥! 이들 두 사람의 증인으로 부족하다면 도대체가 어떤 것이 증거가 될 수 있단 말이오?” 곧바로 다시리 성자가 분개하여 소리쳤다. 장내도 점차 소란해져서 누가 진정한 범인인지를 놓고 떠들어댔다. 상황을 보아서는 다시리 성자였고,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아서는 아난대성자였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아직 단리대협의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시끄럽소? 모두 쫓겨나고 싶소?” 제리파 성자가 장내를 둘러보며 소리친 뒤, 단리유아에게 다시 물음을 던졌다. “단리대협, 더 이상의 물증은 없소? 솔직히 저 두 사람의 말을 믿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오. 둘 다 반도로 낙인이 찍힌 자들이라서 말이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단리유아가 입을 열었다. 자신 역시 순순히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준비해둔 패는 더 남아 있었다. “이 정도의 상황에서도 굳건히 버티시니 정말 존경스러울 따름이오, 아난대성자. 하지만, 당신이 중원인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내게 있소. 증과 현인, 현인께서 그 자를 데려와 주십시오.” “휴! 알았소이다. 내가 가서 끌고 오지요.” 침울한 얼굴로 내내 말이 없던 증과시리가 한숨 쉬며 돌아나갔다. 이미 전모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어서 이런 상황이 끝났으면 하는 바램만 가득했다. 축 쳐진 어께를 보이며 나갔던 증과시리가 반각이 못되어 허리춤에 정신을 잃은 복면인을 든 채 돌아왔다. 증과시리가 복면인을 내려놓자, 단리유아가 다시 복면인을 무릎 꿇게 만들고는 정신을 차리게 했다. <으음! 이, 이곳은....!> 혹시 몰라 아혈(啞穴)을 봉쇄한 상태에서 깨어난 복면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놀라 흠칫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다. “이 복면인은 중원인들 중 수괴에 해당하는 자입니다. 며칠 전 인드라 신전의 밀실을 들이치기 직전 탈출하는 이 자를 잡을 수 있었지요.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여기 이 자리에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아난대성자와 다시리 성자를 일별하며 끝머리를 강조했다. 곧이어 그의 품에서 천지신교의 영패와 바라만겁문에서 만든 신분증을 꺼내어 보이고, 이어서 미리 준비해가지고 있던 증거물들을 수리살타에게 꺼내어놓도록 했다. 그 다음 복면인의 복면을 벗겨서 사십대의 중원인임을 사방에 확인시켜주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의 증거물들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을 것이오. 또한 본인이 미리 밀실에서 빼돌린 이 증거물들은 아난대성자가 위조해서 꾸민 것이 아닌 진짜이니 확실할 것이오. 아난대성자, 더 할 말이 있소?” “....” “당신이 실수한 것은 너무 증거인멸에 급급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사람들까지 모두 죽여 버린 것이오. 찰합리 성자나 밀실에 있던 중원인들 중에서 한두 명을 사로잡았다면 나로서도 이번 일을 뒤집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오. 내 말보다는 당신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까.” 수리살타를 시켜 증거물을 상단의 성자들을 향해 건네주면서 단리유아가 아난대성자에게 말하고 있었다. 각종 서찰과 영패, 아난대성자의 수인이 들어간 결맹서를 서로 살피며 성자 들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져갔다. 계속 살피던 모로 성자가 참다못해서 석탁을 내리치며 아난대성자에게 소리쳤다. “아난대성자, 당신이 뭐가 부족해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오? 겨우 문주 위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는 말이오?” “도대체가 본교의 신보와 저주받은 비급까지 내주면서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당신이 정말 제정신이요? 아니면 당신도 중원인이 화신한 것이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어서!” 제리파 성자가 뒤를 이어서 소리치고, 잇따라 나머지 성자들의 힐문이 이어졌다. 한쪽의 지나 성자 역시 증거물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난대성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나 성자, 그대에게는 미안하기 짝이 없소. 하지만 결코 사욕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이해해주시오.” 잠시 후, 이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난대성자가 먼저 지나 성자를 향해서 말을 건넸다. 이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자신을 변론했다. “내가 이런 일을 벌인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놀라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일은 결코 사욕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오.” “당신 때문에 무참히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인데, 사욕이 아니라는 것이오? 그 따위 변명은 집어치우시오!” 다시리 성자가 자신의 무죄가 증명되었다는 듯이 기고만장해서 소리쳤다. 그런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난대성자가 말을 이었다. “현재 본문의 상황은 위태롭기 짝이 없소. 내부적으로는 밀교의 성합설(性合說)이 널리 퍼져 점점 타락하는 바라문들이 많아지고 있소. 또한, 비록 전성기를 맞고 있지만, 그에 반해서 각 계파간의 알력이 극도에 이르러서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해 있소. 외부적으로는 회회교(回回敎)들의 난입이 계속되어 본문의 세력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오. 이런 위기상황인데도 본문은 과거의 법도에 얽매어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있소. 문주라는 지위가 말뿐이고 실권은 하나도 없소. 아마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가지 못해서 본교는 분파되어 점점 회회교의 세력에 밀려나게 될 것이 틀림없소.” “그렇다 해도 이런 일까지 벌인 이유는 충분하지 않소. 서로 논의를 해서....” 제리파 성자가 끼어들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즉각 아난대성자가 냉소하며 반문했다. “흥! 당신도 뻔히 본문의 상황을 알면서 그딴 소리요? 내가 아무리 말해도 자신들 계파의 이권을 우선시하여 반대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소. 특히 저 자, 다시리 성자는 내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먼저 반대부터 하던 자였고, 공공연히 분파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본문의 화합을 저해하는 자였소. 그래서 천지신교에서 제의가 들어왔을 때, 저 자를 노리고 함정을 팠던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리 성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내가 언제 당신의 말에 무조건 반대했다는 것이오? 당신이 계속해서 문주 위를 넘길 생각이 없었고, 자신들 일파의 이익을 위해서만 그러니 반대한 것이 아니오?” 서로간의 싸움이 이어질 때, 지켜보던 단리유아가 나서며 다시리 성자에게 물음을 던졌다. “다시리 성자, 당신도 그리 깨끗한 입장은 아닐 텐데요?”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 입으로 저 사람이 음모를 꾸몄다고 했으면서.” 발끈한 표정으로 다시리 성자가 소리쳤다. 다른 성자들도 또다시 뜻밖의 얘기가 나오자, 다들 어리둥절하여 단리유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아그니 계파의 타마라 성자가 다시리 성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단리유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단리대협, 이미 아난대성자가 시인한 마당에 무슨 또 밝힐 것이 있단 말입니까? 이 정도로도 다시리 성자의 결백은 충분히 밝혀진 것 같은데 말이오.”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나머지 성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었다. 이에 단리유아가 성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지난 일을 상기시켰다. “여러분들께서는 한 가지 잊으신 것이 있으십니다. 다시리 성자가 발하루 현자를 매일 같이 만나고 있었는데, 과연 그가 가짜임을 몰랐을까요? 그리고 천지신교의 사람들도 바보는 아닌데, 아난대성자가 배반할 때를 대비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뭐라고? 그게 정말이오?” “아니 그럴 수가? 정말로 다시리 성자까지?” 모두들 놀라서 너도나도 한두 마디 소리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다시리 성자 역시 유죄임을 밝혔다. “여러분들께서 알다시피, 여기 다시리 성자와 아난대성자는 수십 년 동안의 앙숙입니다. 항상 암중으로 상대를 노리고 있었는데, 다시리 성자가 아무런 낌새도 못 느꼈을 것 같습니까? 천만의 일이지요. 아마 대충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지신교의 인물로서 발하루 현자로 위장한 자도 아난대성자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일이 커지자, 또 다른 곳에 매달려야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다시리 성자이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이건 전적으로 증거가 없는 모함이오. 단리유아,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딴 소리요? 당신이 아예 본문을 무너뜨릴 심산이오?” 다시리 성자가 소리치며 단리유아를 몰아갔지만 단리유아는 신경 쓰지도 않고 계속해서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다시리 성자나 천지신교에서 미처 대비하기 전에 아난대성자가 전격적으로 몰아친 것이지요. 아마 시간이 오래 흘렀다면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증거가 있소, 단리대협? 대협이 건네준 증거물에는 다시리 성자가 관련된 것은 없는데” 제리파 성자가 침중한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문파의 수장 중에서 두 명이나 이번 사건에 연루된 것이라면, 아마 오늘이 바라만겁문의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이미 찰합리 성자가 죽은 뒤였으니, 세 사람의 성자가 사라진다면 각 계파간의 세력판도에 있어서도 큰 변동을 가져올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단리유아가 수리살타로 하여금 다시리 성자 역시 이번 일에 관련되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을 건네주도록 했다. “거기에 있는 증거물 중에서도 특히 다시리 성자가 발하루 현자에게 약속한 서찰이 있을 텐데, 그곳에 찍힌 지인이 그 사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라도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물증이 있으니, 나중에 심문해보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는 이번 천지신교의 인물 중에서 수뇌에 해당하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단리유아가 복면인를 가리키며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다. 곧이어 다시리 성자가 개입한 증거물이 상단의 성자들에게 건네졌고, 그의 유죄도 확실해지게 되었다. 잠시 동안 다시리 성자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외쳤지만, 곧 묵살된 채로 뇌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아난대성자 역시 판결에 따라 뇌옥에 수감되었고, 지나 성자는 연루된 사실이 입증될 때까지 일단은 거처에 감금하도록 판결이 내려졌다. 가엽미리전(嘉燁彌離殿)에서 가엽미리전(嘉燁彌離殿)에서 1 사건이 해결되었지만 곧바로 떠날 수는 없었다. 천지신교에 대한 대응책을 서로 상의해야하는데, 사실상 수뇌부의 네 사람이 공백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난대성자와 다시리 성자는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졌고, 지나 성자는 성자위에서 강제로 물러나야했다. 성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에게 사형이 결정된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었는데, 이번 경우에 있어서는 문의 쇄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그 외에 계속적인 조사를 통해서 수십 명이 투옥되거나 추방되어졌다. 사실 투옥되는 것보다는 추방되는 것이 더 무거운 처벌이었는데, 신분상 천민과 같게 되고 반도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기에 더 이상 천축 내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 십여 일이 지나서야 일단락이 되었고, 문주도 누가 맡을지 결정되었다. 브라흐마 계파의 수장인 제리파 성자가 추대되었는데, 이번에 일어난 일을 계기로 선출방법이 장로회의의 표결로 바뀌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세력이 가장 큰 모로 성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그의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탈락하게 된 것이었다. 공석인 네 명의 성자 위도 다시 채워졌는데, 그 중의 하나인 비쉬누 계파의 수장으로서 증과시리가 성자위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대충 내부적인 정리가 끝났지만, 여러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바라만겁문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계속 유지될지는 의문이었다. 남은 것은 제리파 성자의 역량에 달렸다고 할 수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적으로 지목된 천지신교와의 성전에서 어떤 성과를 이루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내부가 정리되자 단리유아는 십대성자와의 회합을 통해서 천지신교와 맞서 싸우는데 서로 협조하기로 맹약을 맺었다. 일단 일차로 오백 명의 고수들이 서장의 대뢰음사로 출발하기로 했고, 이후의 중원 내에서의 싸움에서도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되자, 단리유아는 바라만겁문을 떠날 결심을 했다. 때는 십일월 오일로서 바라만겁문에 머문 지도 이십여 일이 넘었다. 떠나려는 그날 아침 일찍 증과시리가 제타구고를 데리고 귀빈전에 찾아왔는데, 사건을 해결한 그날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던 제타구고를 다시 보자 단리유아도 반가웠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좌정한 후에 단리유아가 증과성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떠나기에 앞서 한 번 더 뵙고 싶기도 했는데, 어쩐 일로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까? 그것도 제타 형까지 대동하고.” “허허, 뭐가 어려운 걸음이겠소? 솔직히 거추장스럽기만 해서, 적당한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물러날 생각이라오. 그나저나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라오.” 이번에 일어난 일을 상기하며 증과시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심정을 이해한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문했다. “어떤 것이 길래 이리 몸소 찾아온 것입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급적 들어드릴 테니 말씀해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말하리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 이 아이를 이번 길에 대협께서 데려가 주셨으면 하오.” “제타 형을 말입니까?” 제타구고를 돌아보며 단리유아가 되물었다. 제타구고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리 건강해진 것 같았지만, 한마디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자세로 음울한 기운을 무겁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부탁이기도 하지만, 자무라 노인의 부탁이기도 하오.” “참, 그러고 보니 그분도 그날 이후로는 뵙지 못했군요. 어떻게 되셨습니까?” 단리유아도 자무라를 기억하고는 궁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말에 제타구고가 움찔할 때, 잠시 말이 없던 증과시리가 나직이 탄식하며 대답했다. “그분께선 며칠 전에 귀천하셨소. 여기 이 아이에게 자신의 힘을 모두 물러주고 말이오.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인데, 아마 이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보시고 개정대법을 펼치신듯하오.” “그렇게 되었군요. 한 번 더 뵈었으면 했는데....” 안타까운 얼굴로 단리유아가 자무라를 생각하고 있을 때, 증과시리가 다시 물었다. “그보다 어떻소? 단리대협. 부탁을 들어주시겠소?” “그것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단리유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타구고의 모습으로 보아서는 무공을 어느 정도 되찾은 것 같아서 방해는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약간은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 아이는 그동안 본문의 영약과 그분의 도움으로 무공을 회복하였소. 단전이 파괴되고 오랜 시간동안 주요관절에 철심이 박혔던지라 아직 혈맥이 약하고 불안전하지만, 시간이 흐른다면 예전과 같은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증과시리가 단리유아의 걱정을 짐작하고 설명해주었다. 현재 제타구고의 내공은 영약과 자무라의 도움으로 삼갑자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실제로는 혈맥이 불안전해서 내공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갑자 정도라 할 수 있었다. 내공심법도 본래의 것이 아닌 자무라의 사공(邪功)을 익혔는데, 이것은 몸 상태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단리대협, 대협이 맡아주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다시 참회옥에 수감되어야 한다오. 정상을 참작해서 조금 상태가 나아질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겠소? 하지만, 만일 대협이 신보(神寶)와 비급을 되찾는 일에 이 아이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것이오. 대협의 도움으로 본문이 이 정도나마 안정된 것이니 말이오.> 증과시리가 전음으로 사정을 설명하며 간청하자, 단리유아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가는 것으로 하지요. 그런데, 과연 제타 형이 저를 따라갈지?” “따라가겠소.” 들릴 듯 말 듯 작고 쉰 목소리로 제타구고가 대답했다. 사실상 천축에 더 남아있을 이유도 그럴 마음도 없는 제타구고였다. 불타오르던 복수심도 아난대성자가 죽은 뒤로는 남아있지 않았고, 다만 자무라 노인의 부탁대로 그의 무공의 전승자를 다시 찾아주는 일과 단리유아의 은혜를 갚는 일만 남아있었다. 잠시 더 대화를 나누다가 증과시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문밖으로 향하던 증과시리가 단리유아에게 걱정 어린 당부를 전했다. <저 아이는 이번 일로 성격이 크게 변한 것 같소. 전보다 더욱 외골수적으로 변한 것 같은데, 아마 대협의 말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무공이 회복되면 크게 도움이 될 테지만, 만일 피를 보게 되면 예전의 일 때문에 미쳐버릴 가능성이 있으니 부디 주의하시기를 바라오.> 그의 전음에 단리유아가 힐끗 제타구고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증과시리가 물러난 뒤, 얼마 안 있어 단리유아는 사리발마와 제타구고를 데리고 바라만겁문을 떠나갔다. 대부분은 전날의 송별식에서 보았었기에 배웅 나온 사람들은 직접 인연이 있는 몇 사람에 불과했다. 세 사람은 항하를 따라 올라가다가 그 지류인 주목나하(朱木拿河:야무나강)를 타고 계속해서 북상했다. 단리유아는 일단 주목나하를 따라 아격랍(亞格拉:아그라), 덕리(德里:델리)를 지난 뒤에 고원지대인 극십미이(克什米爾:캐쉬미르), 파미이(帕米爾:파미르)를 거쳐서 신강(新疆)의 끝에 위치한 비단길의 도시 객십(喀什:카스)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에 천산의 남쪽 고차(庫車)에 위치한 천지신교의 직속세력인 천산흑랑청(天山黑狼廳)을 공격할 생각이었는데, 그 전에 일단은 객십에서 대뢰음사에 모인 고수들과 만날 예정이었다. 또한 기회가 닿는다면 멸망했다고 하는 천산파(天山派)의 잔존세력도 찾아서 동참시킬 생각이었다. 주목나하를 따라서 일행은 될수록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단리유아와 사리발마는 서로 주변의 풍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유쾌한 일정을 보내고 있었지만, 제타구고는 거의 사람이 없는 것처럼 거의 말이 없었다. 단리유아의 말만 들을 뿐 사리발마가 접근해서 말을 붙이면 마이동풍처럼 줄곧 침묵만 지켰고, 저녁에는 어디 가서 무엇을 하는지는 몰라도 아침이 되어 일행이 떠나갈 때가 되어서야 겨우 나타나곤 했다. 일행이 지나가는 천축의 상황은 군소국가들의 난립한 채 연일 크고 작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란에 휩쓸려 돌아다니는 유민들이 넘쳐났고 곳곳에 도적들이 들끓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그러던 하루는 전장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벌판 가득 시체가 널리고 곳곳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비참한 광경을 보고 사리발마가 불경을 읊다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여태 경전을 배웠지만, 이런 광경을 보니 인간 욕심의 끝없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됩니다. 사람의 본성이 본래 그런지는 몰라도 자족하는 사람은 드물고, 다들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켭니다. 보시하여 세상을 위하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군요.” “맞습니다. 이런 모습도 욕망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을 일으킨 힘 있는 자들은 여전히 권세를 누리고 아무런 피해가 없지만, 정작 힘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피해를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단리유아 역시 한탄하며 덧붙이다가 문득 천지신교의 야망도 이와 같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대로 강호의 한 세력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것임에도 강호제패를 위해서 전 강호를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는데, 그들로 인해서 앞으로 죽어나갈 사람들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인간 욕망의 종착지를 보는 것 같아 일행 모두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한참 전장을 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행은 각자 깊은 생각에 잠겨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 될수록 시비를 피하며 길을 서두르던 일행이 극습미이의 도시 중의 한곳인 렬성(列城)에 도착한 것은 와랍납서를 떠난 지 한 달이 넘는 십이월 십칠 일의 저녁 무렵이었다. 거리상으로는 거의 사천 리의 길로 그동안 일행은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었다. 덕리를 지나서부터는 말을 탔지만, 길이 험해서인지 생각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렬성은 일만 척이 넘는 고원에 위치한 도시로, 북천축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대승불교의 거점으로서 수세기동안 흥성한 곳이었다. 그동안 쉬지 못해서 지친 일행은 일단 이곳 렬성에서 하루를 푹 쉬기로 결정했는데, 사리발마가 근처에 위치한 가엽미리전(嘉燁彌離殿)에 들려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연일 강행군에 덩달아 지친 말을 이끌고 일행은 가엽미리전이 위치한 렬성의 북쪽으로 향했다. 일행이 찾아가고자 하는 가엽미리전은 이 지역 불교세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었는데, 대대로 서장 지역의 대뢰음사와 함께 희마랍아산맥의 양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렬성을 우회하여 십여 리 정도 가니, 낮지만 험준한 야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 정상부분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며 사리발마가 바로 저곳이라고 소리칠 때, 문득 귓전을 파고드는 어떤 소리에 단리유아가 멈춰선 채 주의를 주었다. “스님. 아무래도 저곳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소. 계속해서 비명과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아니 누가 감히 이곳을 노린다는 말입니까? 가엽미리전은 일대에서 제일 큰 세력인데, 대체 어떤 곳에서....” 사리발마가 놀라서 소리칠 때, 잠시 산위를 살피던 단리유아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그보다 어서 가보아야 할 것 같소. 불이 붙는 건물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을 보면,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이니.” 말을 마침과 동시에 단리유아가 말에서 뛰어내려 신형을 날렸다. 곧바로 다른 두 사람도 신법을 펼쳐 그 뒤를 쫓고 있었지만, 워낙 빠른 속도로 달리는 단리유아 때문에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제타 형, 나를 따르는 데는 신경 쓰지 말고 스님을 보호하면서 천천히 따라오시오. 이런 혈전은 처음일 테니, 아마 제대로 자신을 지키기에도 힘들 것이오. 부탁하오.> 단리유아가 자신을 뒤쫓아 달려오는 제타구고에게 사리발마를 부탁했다. 제타구고가 멈추어 사리발마와 보조를 맞추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벌써 산 위의 정상에 거의 가까워지고 있었다. “휴! 빨라도 너무 빠르군. 금 새 보이지도 않다니. 우리도 어서 갑시다, 제타시주.” 단리유아의 모습을 보고, 사리발마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타구고가 움직였는데, 비명성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평소와는 다르게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한편, 앞서 달려간 단리유아는 사찰의 입구 앞의 공터에 다다르고 있었다. “죽어랏!” 문득 한 사람이 외치며 정면으로 달려들었는데, 길게 휘어진 신월(新月) 형상의 날카로운 도를 휘두르며 알아듣기 힘든 말로 외치고 있었다. 머리에는 색란(色蘭:흰색의 터번)을 두른 것으로 보아서는 회회교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도대체 이들이 무슨 이유로 이곳을 공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퍽!” 달려오는 자의 도를 오른쪽으로 비껴 흘린 뒤에 그대로 상대의 어께를 붙잡아서 매다 꽂아버린 뒤에 단리유아는 잠시 멈춰선 채 주위를 살펴보았다. “차차창!” “으아악. 아악!” 곳곳에서 무기성과 비명이 들려왔지만 살아있는 자는 대부분이 색란을 쓴 회회교도 뿐이었고, 이미 승려들은 거의 죽거나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몇몇만이 남아서 저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의 바닥에는 시체와 무기들이 널린 채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상처를 입어 쓰러졌더라도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있으면 회회교들이 목을 치는 광경이 들어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자들이 누구지? 게다가 가엽미리전이 이리 맥없이 당하다니, 소문이 과장되었단 말인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일단은 사찰의 본전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미 근처는 회회교도만 남은 상황이었으니 아직 무기성이 들리는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퍼퍼퍽! 쿠쿵!” “윽. 악!” 일단 결정을 내리자 단리유아는 서둘러 움직이며 닥치는 대로 가로막는 자들을 제압해나갔다. 시간이 늦는다면 정말로 몰살될 가능성도 엿보였기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있었다. 비록 살인할 가치도 없는 하수들이어서 목숨은 빼앗지 않고 있었지만, 모두들 어디 한 곳은 부러지거나 폐혈 되어서 다시는 무공을 펼치기 어려울 터였다. 가엽미리전(嘉燁彌離殿)에서 가엽미리전(嘉燁彌離殿)에서 2 앞을 가로막고 덮치는 자들은 무조건 제압하며 나아가는 도중에 단리유아는 곳곳에서 무수한 회회교도들이 날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평상시 오백 명 이상의 승려들이 머문다고 알려진 곳에서 회회교도들만이 죽이고 약탈하며 날뛰니 단리유아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승려들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미 죽었거나 겨우 몇 명만이 살아남은 채 저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회회교인들의 숲을 헤치며 나아간 지 반각이 미처 못되었을 때에 단리유아는 드넓은 가엽미리전의 중심에 해당하는 대웅전 앞에 이르게 되었다. 삼층의 대웅전을 뒤로한 이십여 장의 공터에서는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두 패로 갈라선 채 싸우고 있었다. 한쪽은 색란(色蘭)에 검은 색의 두루마기를 걸친 정식 회회교도였고, 반대편은 황모(黃帽)를 쓴 승려들이었다. 여기에서도 상황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는데, 숫자상으로는 승려들이 좀 더 많았지만 대부분이 상처를 입은 채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어서 그 수가 급격히 줄고 있었다. 잠시 멈춰 서서 전황을 둘러보며 어찌할까 생각하다가 단리유아는 일단 싸움을 말리고 연유를 알아보기로 했다. “모두 그만 멈추시오!” 벼락같은 호통소리에 일순 장내의 싸움이 멈추어졌다. 목소리에 담긴 내공에 의해서 절대고수가 등장한 것을 알아차린 두 파의 사람들이 각각 표정이 상반된 모습으로 떨어졌다. 이미 패색이 짙었던 승려들로서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이라 잠시간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이에 반해서 회회교의 사람들은 일이 혹시라도 틀어질까봐서 어두운 얼굴로 흠칫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대는 뉘시오? 그대도 회회찰난(回回擦欄)을 도와 본문을 공격하려는 것이오?” 살아남은 십여 명의 승려 중에서 백발의 벽안노승이 단리유아에게 물었다. 본래 회회찰난은 북천축에서 신강(新疆)의 서쪽 끝 지역까지 아우르는 거대세력으로 회회교의 전위부대라고까지 알려진 곳이었다. 점차 남하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회회교를 믿는다고 하는 자는 누구나 받아들였기에 그 구성원에 있어서는 사악한 자가 많았다. 노승의 물음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장내의 중앙으로 다가서던 단리유아가 합장하면서 대꾸했다. “아닙니다. 본래 제 일행이 이곳을 방문하고자 해서 찾아오던 중이었는데, 멀리서 싸움이 일어난 것을 보고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공격받고 있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승려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표정이 밝아졌다. 이미 옥쇄할 결심까지 하고 있었지만, 단리유아로 인해서 조금이나마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막 승려들이 그 연유를 말하여 구원을 요청하려는 순간, 한쪽에서 지켜보던 회회찰난의 고수가 선수를 쳐서 천축어로 소리쳤다. “네 놈은 누군데 감히 본교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냐? 이것은 우리 두 문파 사이의 일이니, 썩 물러나라. 그렇지 않는다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 상대의 위협에 단리유아가 힐끗 돌아다보았다. 중년의 곱슬거리는 턱수염을 자랑하는 사내로 가슴팍에는 선명하게 금색 술로 나선형의 회오리를 수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서 이것으로 그들 간의 지위가 구분됨을 단리유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대의 폭언에 기분이 상했지만, 단리유아는 그냥 무시하고 벽안노승을 향해서 다시 물었다. “전 단리유아라 합니다. 연유를 들어보고 타당하다면 도와드리겠으니 제게 말해주십시오.” “저자들은 회회찰난의 고수들이라오. 아미타불! 백여 년 전부터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더니 최근에는 이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려고 했었소. 그래도 설마 했는데 저 자들이 갑자기 오늘 천 명이 넘는 인원을 모아서 전격적으로 공격해왔소. 게다가 저들이 미리 산공독(散功毒)을 풀어서 제대로 대항도 못해보고 당하게 된 것이오.” 침통한 얼굴로 노승이 설명하고 있었다. 노승의 말처럼 대부분의 고수가 산공독에 중독되었기에 내공이 깊은 수뇌부를 제외한 나머지 승려들은 거의 일순간에 몰살되다시피 했다. 이곳에 모인 수뇌부들 역시 시간이 갈수록 내공이 흐트러져서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던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듣고 보니 제가 도와드리지 않을 수 없겠군요.” 상황을 이해한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반대편의 회회교도 중에서 육십 대의 노인이 나섰다. 흰 수염이 가슴팍에 닿을 듯이 늘어졌고, 금색의 회오리 문양이 세 개가 겹쳐 새겨져 있었다. “당신은 지금 신성한 본교의 포교행위를 방해하겠다는 것이오?” “무엇이 포교라는 말이냐? 네놈들은 칼을 들이밀어서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진실된 신앙이라는 말이냐? 더러운 놈들 같으니라고, 본 목적은 노략질에 지나지 않으면서 그 따위 헛소리를 계속 나불대다니!” 한 젊은 승려가 들끓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회회난찰의 사람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이에 맞서서 아까의 중년사내가 코웃음 치며 냉랭히 소리쳤다. “흥! 어리석은 이교도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이 세상에는 오직 알라신만이 계신다. 그분의 믿음을 전파하는 일을 가로막는 너희 같은 자들과의 성전(聖戰)에서는 결코 자비란 있을 수 없다.” 그의 말과 동시에 일제히 양쪽에서 고함과 욕설이 오고갔고 다시 무기를 치켜들고 싸움을 계속하려했다. 그 순간, 단리유아가 장력을 내리치며 조용히 선언하듯 말했다. “쾅!” “이미 경과를 알게 되었으니, 그대들 회회찰난의 사람들은 이만 물러가는 것이 어떻소? 만약 싸움을 계속하려한다면 나도 이 이후의 일은 책임지지 않겠소.” “뭐가 어째? 네 놈이 지금 본교를 무시하는 것이냐? 게다가 너 혼자서? 흥! 내가 먼저 네놈을 육시를 내주겠다.” 화가 난 중년의 사내가 욕설을 내뱉으면서 동시에 길고 완만하게 휘어진 신월도(新月刀)를 휘두르며 단리유아를 덮쳐갔다. “죽어랏! 이 잡놈아!” 단리유아의 시야를 가리며 시퍼렇게 번뜩이는 도기(刀氣)가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이미 상대방이 몸을 날릴 때부터 기다리고 있던 단리유아는 곧바로 등 뒤의 천애검을 검갑째 들어서 막아갔다. “차차창!” 신월도가 검갑과 부딪쳐 요란한 금속음을 울렸다. 중년 사내가 힘에 밀려서 오히려 물러서고 있을 때, 순식간에 산무귀흔영(散霧鬼痕影)으로 접근한 단리유아가 상대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퍽!” “으윽!” 검갑에 맞아서 팔이 부러짐과 동시에 단리유아는 상대의 옆으로 돌아가면서 왼손으로 등판을 가격했다. “퍼퍼퍽!” 입에서 토해낸 핏줄기가 허공에 길게 일직선을 긋고 있을 때, 이미 중년인은 한쪽 구석에 처박힌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일합의 싸움을 보고 회회찰난의 고수들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단리유아가 강할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일초지적도 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중년인이 자신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수준 차이가 난다면 자신들 중에서도 상대할 자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였다. 이에 좀 전에 나섰던 노인이 동요하는 수하들을 진정시킨 뒤에 단리유아에게 말을 던졌다. “본로는 회회찰난의 장로인 심인표풍도(心刃飄風刀) 무타하산이라 하오. 그런데 당신은 정녕 본교의 일을 방해할 생각이오? 만일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이제까지의 일은 없던 일로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본교의 적으로서 당신이 죽을 때까지 성전을 일으키겠소.” “이보시오, 장로. 그런 위협은 내게 통하지 않으니 어서 물러나기나 하시오. 그렇지 않고 싸우겠다면 나도 사양하지 않겠소.” 물러섬이 없이 단리유아도 단호하게 대꾸했다. 사실 가엽미리전과 특별한 인연도 없었고 회회찰난과 원수져서 좋을 일도 없지만, 지금까지 겪은 회회교도들의 만행을 보고서는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이 덕리를 지나면서부터 심심치 않게 회회교도들을 볼 수 있었는데, 말이 포교이지 사실상 그들의 행위는 마적단의 소행과 별다르지 않았다. 남자들이라면 씨를 말리고 겁탈과 약탈을 일삼아서 그들이 한번 휩쓸고 간 마을은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린 경우를 몇 번이고 보았었다. 직접적으로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 한 내버려두었지만, 오늘은 단리유아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미 정면을 들어서면서부터 보았다시피 자신이 물러서면 아마 부상자까지 모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흥! 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자로군. 쓸데없는 피해를 입기 싫어서 그런 것이지, 우리가 당신이 두려워서 그러는 줄 아나?” 노인이 끝까지 물러설 기색이 없는 단리유아의 표정에 냉소하면서 소리쳤다. 직후 다시 고개를 돌려서 삼십여 명의 수하들을 향해서 명령을 내렸다. “표풍십이수, 너희들은 모두 저자를 공격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저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호도하는 땡중들을 죽여 버려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열두 명의 사람들이 단리유아를 에워 쌓고 다른 사람들은 승려들을 향해서 덮쳐갔다. 이렇게 되자 단리유아도 더 이상은 살인을 망설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산공독에 중독된지 오래이니 승려들은 시간이 갈수록 저항할 수 없을 터였다. 마야의 도움으로 심마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줄곧 생명의 존귀함을 느끼고 살생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차차창.” “으윽. 아악!”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단리유아도 검을 빼들었다. 천주부동(天柱不動)의 자세로 검을 아래로 향한 채 빙 둘러 두 겹으로 포위한 채 각기 반대 방향을 회전하는 십이표풍수를 노려보다가 먼저 신형을 움직여 공격해나갔다. 그와 동시에 십이표풍수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단리유아는 안쪽에서 왼쪽으로 회전하는 자들을 따라 돌다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여서 등이 보이는 자를 향해서 검을 날렸다. 다른 자들이 그 광경에 도를 모아서 단리유아를 향해서 찔렀지만, 이미 단리유아는 그 자리에 없었다. “파팟! 채채챙.” “으악!” 적들의 공격을 피해서 일학충천(一鶴沖天)으로 십여 장 높이까지 치솟은 단리유아는 다시 거꾸로 떨어져 내리며 천애구검의 천애유성폭(天涯流星爆)을 연달아 펼쳤다. 그와 함께 은백색의 검강이 달무리처럼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십이표풍수 역시 허공을 향해서 일제히 도기를 날리고 있었다. 검광과 도기가 별빛에 반사되어 허공을 물들일 때, 지켜보던 심인표풍도가 기겁하면서 소리쳤다. “안 돼! 부딪치지 마라. 어서 모두 피해!” 허공으로 솟구쳐서 십이표풍수의 진형(陣形)에서 벗어날 때까지도 포위된 상황에서 허공으로 솟구치다니 바보가 아닌가 하고 비웃고 있었지만, 검강을 보고나서는 경악하여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자신 역시 화경에 올라섰지만, 도저히 허공중에서 저처럼 자유롭게 검강을 연이어 펼칠 수는 없었다. 그의 외침이 있었지만, 이미 때늦은 뒤여서 검강과 도기는 부딪친 뒤였다. “쾅! 콰콰콰!” 곧바로 천애유성폭의 검강이 도기와 충돌하여 폭발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기를 소멸시키고도 여력이 남은 검강은 계속해서 그 아래에 있던 십이표풍수를 향해서 떨어져 내렸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알고 연이어 도기를 날리며 몸부림치고 있던 그들을 향해서 검강이 내리 덮쳤다. “으윽! 아아악!” 단발마의 비명성이 연이어 울림과 동시에 흩어지는 강기가 오 장 밖까지 미쳐서 곳곳에 구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이미 십이표풍수는 강기에 맞아서 조각나거나 관통되어 죽은 지 오래였고, 가까운 근처에서 싸우던 사람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신형을 회전하여 떨어져 내리다가 단리유아는 자신이 만든 참혹한 결과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전에는 수없이 만들고 무심히 보던 광경인데, 이제는 욕지기까지 날 정도로 보기가 싫었다. 폭음에 놀란 두 파의 고수들이 멈칫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신형을 날려 회회찰난의 고수들을 제압해나갔다. 더 이상은 살수를 쓰고 싶지 않아서 될수록 점혈하거나 정신을 잃게 만들고 있었다. “퍼퍽. 푹!” 순식간에 십여 명이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나갈 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심인표풍도가 흙빛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모두 그만 도망쳐라! 여기서 벗어나는 자는 일단 귀교하도록 하고, 외부에 있던 수하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라.” 심인표풍도도 이미 자신들로선 도저히 상대할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뒤였다. 단리유아가 최소한 수어검에 이른 것 같았기에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한 희생자만 늘 뿐이라 생각했다. “으드득! 이놈, 어디 두고 보자! 오늘 이후로 결코 편하게 잠들지 못할 테니.” 이를 갈며 그 역시 담을 넘어 도망쳐갔다. 심인표풍도의 외침에 다른 이들도 틀렸다는 것을 알고 단리유아를 피해 사력을 다해서 도망쳤다. 단리유아도 그들의 모습을 보았지만, 더 이상은 싸우고 싶지 않아서 추격하지는 않았다. 회회찰난의 고수들이 달아난 장내는 승려들과 여기 저기 쓰러진 시체와 정신을 잃은 사람들만이 남아있었다.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된 십여 명의 승려들이 밝은 표정으로 단리유아를 향해서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그것도 일순 장내의 참혹한 광경과 동문들의 죽음을 보고 하나둘 슬피 울거나 탄식을 토해내 이내 모두들 침울해졌다. “쾅!” “뭣들 하느냐! 사문(沙門)에 들어선 자로서 죽음은 결코 먼 것이 아니다. 다들 정신을 차리고 이 난국을 수습할 생각부터 하도록 해라. 우선 일부는 흩어져 살아남은 동문을 찾아 불을 끄고, 나머지는 아직 살아있는 적들을 한곳으로 모아라.” 제자들의 모습에 벽안노승이 석장으로 석판을 내리치며 명령했다. 그제서야 승려들이 정신을 차려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단리시주. 시주의 도움에 뭐라 감사드려야할지 모르겠소이다. 시주 때문에 명맥이나마 보존하게 되었으니 소승 이렇게 거듭 감사드리오.” 제자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던 벽안노승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노인은 가엽미리전의 장문인으로서 일대에 명성이 높은 가난신승(迦蘭神僧)이었는데, 무공보다는 그 불력의 깊이로 유명해서 천수관음(千手觀音)의 화신이라 불리고 있었다. 잠시 후, 가난신승의 절에 한 걸음 물러섰던 단리유아는 이번 일에 대해서 가난신승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참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사리발마가 놀라고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화급히 뛰어왔다. “단리시주, 큰 일 났습니다! 허헉! 제타시주께서....” 숨이 차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단리유아가 진정시키며 말을 건넸다.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스님.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급하십니까? 제타 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제타시주가 글쎄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리려고 해보았지만 저까지도 못 알아보고 공격하더군요. 제 무공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단리시주에게 알리려 뛰어온 것입니다. 어서 가주십시오, 단리시주. 늦으면 늦을수록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게 될 테니.... 어서요!” 사리발마의 말에 단리유아 역시 놀라서 서둘러 정문 쪽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정문 쪽에서 비명이 들리기에 약간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설마하니 제타구고가 그런 일을 일으키고 있는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급히 신형을 날리는 단리유아를 뒤쫓아서 사리발마와 가난신승도 역시 신형을 날렸다. 가엽미리전(嘉燁彌離殿)에서 가엽미리전(嘉燁彌離殿)에서 3 단리유아가 정문에 이르렀을 때, 장내는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온몸이 혈무에 휩싸인 상태로 제타구고가 회회찰난의 수하들을 학살하다시피하고 있었는데, 이미 수뇌부는 빠져나간 상황에서 그 본성을 저버리지 못한 수하들 중의 일부가 계속해서 약탈을 일삼다 제타구고와 마주쳤던 것이다. 사실 회회찰난은 그 수는 삼천 명이 넘을 정도였지만, 세력확장을 위해서 아무나 받아들였기에 실질적인 고수라 할 수 있는 정식 회교도는 삼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 나머지는 겨우 삼류고수 정도에 불과한 도적패들이 흡수되어서 외형적으로는 세력이 컸지만 뛰어난 고수들은 드물었다. 이번에 일어난 일도 산공독에 중독된 상황만 아니었다면 비록 수적으로 두 배가 차이가 나더라도 가엽미리전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일이었다. 처음에는 제타구고도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어서 사리발마를 보호하려고만 할뿐이었지만, 승려라면 불을 켜고 계속 달려드는 회회찰난의 수하들 때문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한두 명 살인을 하게 되자, 흩어지는 선혈에 지난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완전히 제정신을 잃어버렸다. 그 이후로는 사리발마가 말려도 아무 소용이 없어서 눈에 들어오는 자는 무조건 죽이고 있었다. 제타구고가 아직 정상적인 몸 상태라 할 수는 없었지만, 워낙 수준차이가 커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자무라의 사공인 혈적환혼사공(血摘還魂邪功)이 핏속의 혈기를 끌어당기는 특성이 있어서 싸우면 싸울수록 지치지 않고 오히려 강해지고 있었다. ‘휴! 자무라 노인의 무공이 사악하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거기에 더해서 환술을 펼친다면 웬만한 고수는 실체를 찾기도 힘들 것 같군.’ 장내에 도착한 단리유아가 잠시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회회찰난의 사람들도 처음에는 멋모르고 달려들었지만, 이제는 미쳐 날뛰는 제타구고를 피해서 달아나기에 급급하고 있었다. 문제는 내려갈 길이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 뿐이어서 무공이 뛰어나지 못한 수하들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운이 좋은 사람은 제타구고의 시선을 피해서 달아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리저리 쫓기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험준한 산비탈을 위험을 무릅쓰고 그냥 뛰어내리는 사람들까지 속출했다. “크크크. 모두 죽어. 죽엇!” “으아악! 제발 살려줘!” 이미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는 상황을 보고 단리유아도 곧 제타구고를 덮쳐갔다. 현재로선 아무런 상처 없이 제타구고를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흐흐, 너도 죽어!” 단리유아가 덮쳐오는 것을 알았는지 일 장 반경의 혈무 속에서 제타구고의 광기어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혈무가 갈라지면서 핏빛 지력(指力)이 날아왔다. “파파팟!” 날아오는 지력을 몸을 선회하면서 피할 때, 지력이 지면을 파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리유아도 동시에 장력을 펼쳐서 혈무 사이로 공격했지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죽이고자 한다면 일초면 될 테지만, 사로잡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없었고, 제타구고의 혈도 상의 위치가 범인과는 판이한 상황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 수준차가 워낙 크기에 단리유아도 이내 상대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호신강기와 산무귀흔영을 펼쳐서 혈무 사이로 뛰어든 단리유아는 제타구고의 공격은 피하거나 흘리며 계속해서 그의 몸 전체를 향해 지력을 난사했다. “크아아악!” “파파팍!” 분노에 찬 괴성을 지르며 제타구고가 환술을 펼쳐 달아나려했지만, 전신의 대혈을 계속 점하는 지력 앞에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털썩!” 이내 제타구고가 점혈된 채 쓰러졌지만, 그 눈동자만은 계속해서 끔직한 핏빛 사기(邪氣)를 흘리며 번뜩이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어찌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사리발마와 가난신승이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도 장내의 처참한 모습에는 넋을 잃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제타구고가 제압되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제타구고가 제압되자 그동안 죽음을 피해서 피하기 바빴던 회회찰난의 수하들도 앞 다투어 날아나고 있었다. “아미타불. 단리시주, 다행이도 아무런 상처 없이 제압할 수 있었군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사리발마가 제타구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물음을 던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먼저 가까이하려고 했지만, 오늘의 모습을 보고는 이젠 제타구고의 곁으로 다가서기도 두려울 정도가 된 사리발마였다. “글쎄요. 일단 제압은 되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본 정신이 돌아오겠지만, 나중에 이런 경우가 또 생긴다면 그때는 더 악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로선 어떻게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이 사람이 익힌 무공 자체가 워낙 특이해서....” “아미타불! 단리시주. 본 승에게 한 가지 방도가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내게 한번 맡겨보시는 것이 어떻겠소?” 곁에서 제타구고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가난신승이 끼어들어서 청했다. 그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곤혹스런 표정으로 방도를 생각하고 있던 단리유아가 반색하며 곧바로 반문했다. “완치시킬 방도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서두르는 단리유아를 보며 가난신승이 손을 젓다가, 이어서 주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지금은 다른 일이 급하니 일단은 잠들게 하는 것이 좋겠소. 본문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서야 본 승도 치료할 여유가 생길 테니....” “음, 그렇군요. 제가 급한 마음에 깜박했습니다. 귀문의 사정이 훨씬 어려운 입장인데, 제 생각만 했군요. 저도 귀문을 도와서 수습에 앞장서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단리유아는 제타구고를 잠들게 하여 등에 업었다. 일단은 안전한 곳에 안치시키고 이번 일이 수습된 뒤에 다시 처리하기로 하고 세 사람은 장내를 떠났다. 싸움이 있은 지 나흘이 지났을 때, 가엽미리전도 급하게나마 대충 정리가 되었다. 즉시 지파에 소식을 알려 사람들을 불러 모은 덕분에 생각보다는 일이 빨리 끝나게 되었지만, 이번의 참화로 가엽미리전은 사실상 전력의 육 할이 손실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지파의 고수들까지 불러들여서 수적으로는 삼백여 명 정도에 이르렀지만, 이전의 성세를 되찾으려면 최소한 십년은 봉문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 대웅전에서 단리유아는 제타구고의 치료를 두고 가난신승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가엽미리전의 특징이 관음신앙인 것을 나타내주듯이 대웅전에는 일반적인 다른 불사와는 달리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관음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가난신승이 제타구고의 상태에 대해서 진단하며 그의 과거에 대해서 캐물었다. “아미타불. 단리시주, 이 사람을 치료하려면 먼저 이 사람의 과거에 대해서 알아야하오. 왜냐하면, 본 승이 보기에는 이 사람의 무공이 비록 괴이편벽하여 사기가 짙지만 완전한 사공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이오. 그보다는 이 사람의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소.” 가난신승의 말처럼 혈적환혼사공이 비록 상리를 벗어난 면이 많고 사기가 짙지만, 그 근본이 사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본래가 바라문교의 유가심법(瑜伽心法)에다가 환술과 술법을 배합하여 만든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흠! 신승의 말씀처럼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에 이 사람이 아주 불행한 일을 겪었는데, 아마도 그 때문인지 싶습니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한 후에 제타구고의 과거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난신승이 끝난 후에도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허허. 여기 고해(苦海)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또 있구려. 듣고 보니 이름처럼 정말 불행한 사람이오이다. 구고(九苦)라....” 잠시 석대 위의 제타구고를 불쌍히 바라보다가 가난신승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보기에 이 사람이 과거 누이동생을 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 같소. 그것이 지난날의 기억과 맞물려 피를 볼 때 저도 모르게 정신을 잃게 된 것으로 보이오. 거기에 더해서 사기가 짙은 무공을 익혔으니 더욱 쉽게 빠지게 되었을 것이오.” “저 역시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지난번에 치료방법이 있다하셨는데, 어떻게 치료하실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다가 단리유아가 넌지시 치료방법을 물었다. 단순한 무공에 의한 것이 아닌 심마(心魔)와 비슷한 상태였으니 단리유아 역시 그 방법이 궁금했다. 자신 역시 그와 비슷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싸워서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 사람의 정신을 일깨운 뒤에 십문혜정대법(十門慧定大法)을 펼칠 생각이오. 그 다음 일은 전적으로 이 사람의 의지에 달렸다고 할 수 있소.” “사부, 십문혜정대법이라니요? 아무리 저 사람이 불쌍하다고 해도....” 가난신승의 말에 놀란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내키지 않은 얼굴로 반문했다. 그 대법을 펼친다면 현재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몇 달 동안 열 명의 고승이 다시 원기를 회복하려면 폐관해야한다는 얘기였다. 더구나 미처 날뛰는 도중에 가엽미리전 사람들의 시신까지 상하게 만들었으니, 아무리 단리유아의 일행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으로 다른 제자들이나 장로 등이 난색을 표하며 재고를 바랬다. 이에 가난신승이 석장을 내리치며 불호와 함께 엄한 표정으로 호통쳤다. “불제자로서 그게 무슨 소리들이냐? 단 한 사람이라도 고해에서 구하려는 것이 승려의 본분인데. 더구나 저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제자들을 위해서 엄숙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불가(佛家)의 수행자로서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하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둘째가 신분의 귀천이나 선악을 떠나서 모든 이들을 똑같이 대하고 존중하는 겸허한 자세이다. 이런 두 가지 기본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자는 아무리 오래 면벽좌선을 해도, 억만 권의 불경을 읽더라도 대각(大覺)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아미타불! 신승의 금언을 명심하겠습니다.” 가난신승의 말에 제자들이 합장배례하며 대답했다.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 같아서 단리유아가 곰곰이 되새기고 있을 때, 가난신승이 십문혜정대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단리시주, 십문혜정대법은 본문의 비전으로 보통은 축사(逐邪)와 정심(正心)을 기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오. 단, 지금 이 경우에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으로 십 인의 고승이 불력을 모아 강제적으로 뇌리에 심어주는 것이오. 일종의 금제와 비슷하게도 보이지만, 해가 없고 오히려 그의 정신을 사기로부터 보호해주는 효과가 있소.” 계속해서 어떻게 대법을 시행할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치료에 대한 상의가 끝난 다음날 아침에 제타구고에 대한 치료에 들어갔다. 가난신승을 비롯한 십 인의 고승이 밀실의 중앙 석대위에 누운 제타구고를 둘러싸고 앉았다. 단리유아와 사리발마 역시 석실에 들어와 있었는데, 호법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대법을 보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탁! 타르륵 탁!”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隅)....” 목탁소리와 함께 천수경의 개경게(開經偈)를 시작으로 대법이 시작되었다. 십 인의 고승 중에서 한명이 심법을 일으켜서 제타구고에게 주입하고 그 나머지는 독경을 계속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순환되었다. “크으으으....” 내부에 스며드는 불력과 사기가 충돌하는지 제타구고의 신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일단 불력을 주입한 고승은 한쪽으로 물러나 조식을 취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제타구고가 얼마나 빨리 깨어나느냐에 따라서 한 번의 순환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여러 번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 시진 정도가 지나 한 번의 순환을 이룬 뒤에도 제타구고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생각보다 일이 어려워지자, 가난신승을 비롯한 승려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제타구고의 본성이 이번 일에 동조하지 않고 깊이 침잠해서 그런 것 같았다. 목탁과 낮게 울리는 독경소리만이 석실을 떠돌아다니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가난신승의 차례가 되었을 때 제타구고의 머리맡으로 다가간 가난신승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엇을 그리 붙들고 있길 래 놓지 못하는가? 사랑과 미움도, 그대 마음의 분노도 모두 떠나보내게.” 타오르는 분노로는 법을 볼 수 없고, 분노의 불꽃으로는 도를 알지 못하네. 삶은 뜬구름과 같이 덧없으니, 백년을 산다 해도 꿈에 지나지 않네. 모든 것은 마음의 허상에 불과하니, 붙잡으려면 억만 겁을 다하여도 끝이 없다네. 가난신승이 제타구고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읊조렸다. 그의 말이 끝난 직후에야 기다리던 변화가 찾아왔다. 상서로운 불광이 머리에서부터 일어나 천천히 제타구고의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검붉은 사기(邪氣)가 스며 나와 허공으로 흩어져갔다. 잠시 후, 상서로운 광채는 점차 줄어들어 그의 미간을 통해서 뇌리로 흡수되었다. 석대 위의 제타구고도 이제까지의 고통스런 표정과는 달리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미타불! 신승, 다행이도 대법이 성공한 것 같소. 한 번 더 계속되었다면 우리 역시 더 버티지는 못했을 텐데. 휴우!” 대법의 성공을 알아차린 한 노승이 가난신승에게 말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모두가 앞 다투어 성공을 자축하고 있을 때, 한쪽의 단리유아에게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가람신승의 법어를 듣고 단리유아 역시 그 말을 입속으로 되뇌이며 자신을 반추해보고 있었다. 문득 비록 그 처지는 달랐지만, 자신 역시 아직 마야에 대한 사랑에 매달려서 큰 것을 놓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알고 가슴에 깊이 새기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그것을 넘어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대도(大道)이리라. 나를 버리는 길이 바로 그 길을 가는 첩경임을 단리유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세상에 대한 자비심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는데,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쉽게 극복하지 못한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단리유아는 그대로 그 자리에 좌정한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하나 기억속의 사건들에 대해 반성하며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 대법이 끝나갈 무렵 갑작스럽게 자리에 앉은 채 삼매경(三昧境)에 든 단리유아를 보고 곁에 있던 사리발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대법의 성공을 알리기 위해 막 손을 뻗쳐 흔들어 깨우려는 순간, “여보게! 지금 그 사람은 중대한 깨달음에 직면해 있는 것 같으니 건드리지 말게.” 어느새 다가온 가난신승이 손을 붙잡았다. 그제야 사리발마도 자신이 큰 잘못을 범할 뻔 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곧이어 가난신승이 다른 사람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한쪽으로 불러 모았다. 그때 한명의 고승이 단리유아를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 아니오? 이런 상황에서 깨달음을 찾다니.... 게다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몰입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 같은데,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오.”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가난신승이 대꾸했다. 서로가 한두 마디 단리유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사리발마는 일면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고 있었다. 같이 동행한지 석 달이 넘어가도록 자신은 그리 큰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단리유아는 날로 수행하며 나아가니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이전 나란타사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보다 생각이 넓어지고 느낀 것도 많음을 알고 있었지만, 승려인 자신이 속인인 단리유아보다도 못한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단리유아보다 구도에 매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지만, 사리발마도 이번 일에 자극을 받아서 더욱 정진하리라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일행이 물러간 뒤에도 단리유아는 깨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삼매경에서 깨어나게 되었는데, 마치 오랜 미망에서 깨어난 듯 얼굴에서는 안온함과 밝은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깊이 한숨을 내며 마음을 가라앉힌 단리유아는 정좌한 채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하룻밤의 참오(懺悟)로 인해서 정신이 맑고 새로운 것을 느끼고 얼마나 상승한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운기를 시작한지 얼아 안 되어 구단전에서 각각 기운이 창통하며 전신을 감싸고돌았다. 반 시진 정도가 흘렀을 때는 구색(九色)의 진기가 각기 구단전의 위에서 형상화되어갔다. 무념무아의 상태에서 형상화된 진기가 아홉 마리의 용과 같이 뚜렷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과는 달리 혼탁한 기운도 없이 선명한 모습에서 내공의 경지가 십 이성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이제 진기를 하나로 모아서 생사현관을 뚫어볼까 생각해보았지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상달(上達)할 때가 되었다면 본능적으로 온몸 가득 출렁이는 기운이 이끌었을 터인데도 물처럼 고요할 뿐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고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안 단리유아는 그만 운기행공을 멈췄다. 행공에서 깨어나서 생각해보니 아직 현경에 오를 정도의 깨달음을 얻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공에 있어서는 더 이상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단지 깨달음이 더 필요할 뿐이었지만, 이번의 기우로 앞으로 나아갈 확고한 토대는 세운 것 같았다. 마음이 가야할 방향과 버릴 것이 정리되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서두르며 초조해하던 마음도 심연처럼 고요해졌다. 더 이상 바랄 것도 바랄 마음도 필요치 않았다. 이제는 대자연에 대한 득의(得意)와 한순간의 계기가 필요할 뿐임을 느끼고 있었다. 현경의 관문은 하늘이 내린 것이니, 무리하여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한발 가까이 다가가 문을 두드릴 때, 진정으로 하늘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생각을 마치고 눈을 뜨니, 어느 샌가 제타구고가 석대위에 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평상시처럼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좋은 아침이오, 제타형.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주공(主公).”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제타구고도 선선히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자신에 대한 호칭이 달라졌다는 것을 안 단리유아가 되물었다. “왜 나를 주공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이제까지는 서로 존대하기로 했으면서.” “아닙니다. 바라만겁문을 떠날 때부터 내심 느끼고 있었지만, 이번의 일로 제가 평생을 맡길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공으로 모시겠으니 앞으로는 하대해주십시오.”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제타구고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전까지는 겨우 묻는 말에나 짧게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술술 대답하고 있었다. 제타구고의 성격은 본래부터가 외골수적인 면이 강했고, 일단 한 사람에 마음을 주면 전적으로 그 사람에 의존하는 성격이었다. 아난대성자의 배반을 알고도 발설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참혹한 일을 겪고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커졌지만, 단리유아와 함께 동행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고 하룻밤의 깨달음 속에 자신을 돌아본 뒤에는 단리유아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제타 형! 나는 아직까지 누구를 거느려본 적이 없고 스스로도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세상에 사람이 많지만, 제가 세상을 배우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주가 되어줄 분은 주공뿐입니다. 그러니 제 주공이 되어 주십시오.” 단리유아가 설득했지만, 제타구고의 결심은 확고한지 전혀 동요의 기색이 없었다. “그런 일에 꼭 주종지간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제타 형? 같은 길을 가는 입장인데, 앞으로 서로 의지하며 허심탄회하게 묻고 답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제타 형, 제발 그 말은 물려주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가루라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니 앞으로는 반드시 주공으로 모시겠습니다.” 강하게 부인하며 제 할 말만 하는 제타구고였다.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려는 제타구고를 단리유아가 말렸지만, 아무리 해도 한번 굳어진 제타구고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표정이 안정되어 보이고 밝아서 기뻤지만, 단리유아는 이제까지 누군가를 거느려본 적이 없었던지라 제타구고의 선언 같은 결심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소, 제타 형! 앞으로는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하지만, 호칭만은 이대로 서로 편한 데로 부르는 것이 좋겠소. 한동안 계속해서 설득했지만 결국에는 제타구고의 결심을 꺾지 못한 단리유아가 그만 포기하며 대답했다. 호칭을 두고서도 잠시 실랑이가 있었지만, 그것만은 단리유아의 뜻대로 되었다. 그 후, 잠시 서로 지난 경과에 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밖에서 들려오던 아침 공양의 종소리를 듣고 밀실을 나섰다. 그로부터 이틀을 더 단리유아는 가엽미리전에 머물렀다. 고승들과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사리발마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고, 제타구고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난신승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이 깨달은 바를 확고히 정립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기도 했다. 시옥상(柴玉霜) 시옥상(柴玉霜) 1 십이월 이십오일, 흰 눈이 바람에 휩쓸려 세상을 하얗게 색칠해갈 때 일행은 가엽미리전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며칠 머문 것에 불과했지만, 다들 얻은 것이 있는지 밝은 안색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번이고 멀어지는 가엽미리전의 모습을 돌아보곤 했다. 오른 편으로는 희마랍아를 바라보고, 왼편으로는 인도하(印度河:인더스 강)를 끼고 일차 목적지인 객십(喀什)으로 향했다. 추운 날씨와 더불어 주위가 인적이 드문 고산지대에서인지 마치 세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이 고요했다. 쓸쓸함을 느낄 만도 하건만 일행은 서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있었다. 계속 북상하는 동안 간간히 회회찰난의 공격이 이어졌지만,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암살의 고수가 몇 번 공격을 해왔지만, 아무리 몸을 숨긴 채 공격하려 해도 미리 단리유아에게 발각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그들도 방향을 바꾸어서 인근의 부족민이나 상인들로 변장한 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무공이 없는 자들로 단지 믿음 한 가지로 공격해온 것이었는데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포기할 줄을 몰랐다. 거의 연일 귀찮은 일이 이어졌지만 일정이 바쁜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본거지가 있는 백사와(白沙瓦)는 서쪽으로 천 오백여 리 정도 떨어져 있어서 직접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부분이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을 죽일 수도 없어서 단지 계속 그러면 찾아가겠다는 경고를 보내고 풀어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이 천축을 벗어나 일행이 신강의 끝에 해당하는 포륜구(布倫口)에 이를 무렵 회회찰난의 공격도 뜸해졌다. 이미 해가 바뀌었고 바라만겁문에서 포륜구까지의 거리만 해도 육천 리 가까이 되는 장정이 계속 되었지만, 일행은 목적지인 객십을 바라보고 좀 더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포륜구를 떠난 일행은 계속해서 공격이산(公格爾山)을 오른편으로 끼고 돌아 객십으로 향했다. 그렇게 계속 움직이던 일행이 객십까지 불과 백여 리 정도를 남겨 두었을 때, 사리발마가 눈 덮인 험준한 공격이산을 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휴! 매일 같이 눈 덮인 산만 보니, 이제는 정말 지겨울 지경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객십을 지나서부터는 오히려 그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부터는 타클라마칸(塔克拉瑪干) 사막에 접어들게 될 테니.” 단리유아가 화답하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선가 짙은 피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알아차렸는지 말을 세우고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주공. 제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저 쪽에서 나는 것 같으니.” 하늘을 배회하는 독수리 떼를 발견한 제타구고가 손으로 서쪽 구릉 사이의 작은 골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 등에서 몸을 날려 달려가는 제타구고의 뒤를 따라서 단리유아와 사리발마도 말을 몰아갔다. 골짜기에 들어서니 사방으로 사람과 말의 시체와 물건 들이 널려 있었다. 거의 백여 장에 걸쳐서 이백여 명의 사람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 규모로 보아서는 대규모의 상단이었을 것 같았다. 곧 말에서 내린 두 사람도 제타구고처럼 혹시나 살아있을 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보았다. 이런 일행의 모습을 독수리들이 양쪽 언덕 위에서 자신들의 성찬을 방해해서 기분 나쁘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서역이나 천축에서 돌아오던 대상들인 것 같은데, 주변의 도적 떼에게 당한 것 같군요.” “아미타불! 휴, 조금만 더 갔으면 객십이었을 텐데....” 단리유아가 말에 사리발마가 주위의 모습을 보며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의 고달픈 여정을 마치고 이제 조금 쉬어볼까 하는 생각이 가득했을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비단길의 중요도시 중의 하나인 객십은 천산남로(天山南路)와 서역남로(西域南路)가 합류하는 곳으로, 항상 서역이나 천축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대상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서 대상을 노리는 도적들도 일대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이 일대의 고원지대에 넓게 퍼져 사는 탑길극족(塔吉克族:타지커족) 중의 일부는 겨울철에 강도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름철에는 유목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겨울철에는 한곳에 머물러야했고 그러다 양식이 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것이다. 일행이 계곡 사이에 길게 늘어진 시체들을 뒤지고 있을 때, 가장 깊숙이 들어갔던 제타구고가 큰소리로 단리유아를 불렀다. “주군, 이쪽으로 와보십시오. 여기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에 단리유아가 급히 다가가 바라보니, 사십대의 중년인이 복부에 큰 상처를 입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시체들 속에 있었는데, 아마 싸운 직후에 칼을 맞은 것 같습니다. 즉사는 면했지만, 그동안 피를 너무 많이 흘러서....” 제타구고가 중년인의 상처를 손보며 설명했다. 다가서던 사리발마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단리유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구할 수 있겠습니까, 단리시주?” “음.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칼을 맞은 지 적어도 두 시진은 된 것 같으니. 아직 살아있는 것이 용할 정도입니다.” 살펴보던 단리유아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유명이나마 들어보고자 단리유아는 내공을 일으켜 중년인을 깨웠다. “으으.... 누, 누구?” 간신히 고개를 쳐든 중년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원어로 물었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고향 말에 단리유아도 반가웠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마침 지나다가 우연히 구한 것인데,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십시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 무, 물 좀.” 상황을 알아차린 중년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목이 타는지 물을 요구했다. 이미 죽음이 가까워진 상황이었기에 단리유아도 선선히 물을 건네주었다. 양가죽에 담긴 물을 입가에 부어주었지만, 입속에 들어가는 것은 채 반절도 되지 않았다. “주르르륵!” “쿨럭! 되, 되었소.” 물을 마시자 조금 정신이 드는지 중년인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 시작했다. “휴! 그 많은 사람들이 이리 허망하게 죽다니.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우선 구해주어서 고맙소. 나는 사하상단(沙河商團)의 사람으로 시찬명(柴璨明)이라는 사람이오.”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당황하거나 슬픈 기색이 없었다. 평상시 통성명하듯이 자신의 이름을 먼저 말하는 중년인의 모습에 단리유아도 이채를 띄고 바라보았다. 또한 사하상단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하상단은 중원오대상단 중의 하나로 섬서·감숙을 중심으로 주로 비단길을 따라 세외와 교역하는 곳이었다. “저는 단리유아라 합니다. 여기 두 사람은 제 일행이고.” “단리유아? 혹시 그....” 가만히 듣고 있던 시찬명이 문득 낯익은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쳐들고 단리유아를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시찬명이 간청하기 시작했다. 단 세 명인 것을 알고 처음에는 체념하고 있었지만, 그 한 사람이 단리유아라는 것을 알자 한 가닥 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허허, 이런 곳에서 대협을 만나다니 하늘이 아직 본가를 버리지 않았나보구려. 대협, 내 죽기 전에 부탁이 있소. 내 죽어서도 잊지 않을 테니 반드시 들어주시구려.” 간절한 얼굴로 계속 청하는 시찬명의 말에 단리유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부탁할 말이 있으시면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드릴 테니.” “고맙소, 대협. 내 부탁은 다름이 아니라, 내 질녀를 구해달라는 것이오. 이 일대에서 유명한 도적 중에 한 명인 과천성(過天星)이 이끄는 혈사풍령단(血獅風鈴團)에게 오늘 오전에 공격받았는데, 호위하던 무사들은 모두 죽고 질녀를 포함한 백여 명의 사람들은 끌려갔소.” 혈사풍령단은 단 삼백여 명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신비한 도적들이었는데, 그들의 수뇌가 과천성이라는 것만 알려지고 있었다. 잠시 시찬명의 설명을 듣고 생각해보던 단리유아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십니까?” “모르오. 과천성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 일대를 휩쓸고 다닌다고만 알려진 자여서. 그렇지만, 객십에 있는 노예시장에 매달 보름에 나타난다고 알고 있소. 노략질한 사람들을 노예로 팔기 위해서.” 이틀 후가 보름이었고, 이달 말에 대뢰음사에서 온 고수들과 만나기로 했었으니 그때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어차피 그동안은 객십에서 천산파(天山派)의 생존자들을 수소문할 작정이었으니 별 문제 없으리라 여겼다. “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질녀분의 이름이? 또 생김새에 남다른 특징이라도?” 잠시 생각하던 단리유아가 질녀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다. 곧바로 시찬명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질녀의 성격을 생각나는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름은 시옥상(柴玉霜)이고 나이는 스물 셋이오. 오른쪽 입가에 작은 미인점이 있지만 별다른 특징은 없소. 하지만, 대협도 척 보면 알게 될 것이오. 보통 성격이 아니니.” 시찬명의 말에 단리유아도 이채를 띄었다. 다른 것이 아니고 자신의 여동생과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단리유아가 오래전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만났던 남궁옥상(南宮玉霜)을 생각하고 있을 때, 시찬명이 기력이 다했는지 숨 가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부탁했다. “대협, 본가의 운명이 대협의 손에 달렸으니 반드시 그 아이를 구해주시오. 이번 상행(商行)도 마지막 모든 힘을 모아서 떠나온 것인데, 만일 잘못 된다면 죽어서 어떻게 조상의 얼굴을 볼 지....” 말을 미처 맺지 못한 채 부릅뜬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시찬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사하상단은 중원오대상단 중의 하나에 들 정도로 거대한 상가로 알고 있던 단리유아는 그의 마지막 말이 약간 뜻밖이었다. 자신이 중원을 떠나온 삼년 사이에 상로(商路)에도 뭔가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시찬명의 두 눈을 감기고 단리유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에 그의 무덤을 따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시신은 모아서 합장을 했다. 모든 일을 마친 일행은 반 시진 후 다시 객십을 향해서 떠나갔다. 오늘의 만남으로 인해서 할 일이 한 가지 더 늘었으니 이후로도 더욱 바쁘게 될 것으로 단리유아는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전에 객십에 도착한 일행은 도시의 남쪽에 위치한 한 객관에 여장을 풀었다. 오랜만에 사람들이 들끓는 도시에 도착한 일행은 그제야 사람다운 모습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매일 같이 노숙했기에 때와 땀에 절고 햇볕에 타서 시커먼 흑인을 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일행은 객관의 주청에 모였다. 일순 세 사람의 특이한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기도 했지만, 이곳 객십에는 별별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라 이내 관심을 돌렸다. 주청 내에도 벽안 적발의 서역사람에서부터 중원인과 천축인, 흑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자리에 앉은 일행은 식사를 하면서 어떻게 시옥상과 나머지 사람들을 구할까 의논했다. “흠. 단리시주, 혈사풍령단에 납치되었다는데 과연 여자의 몸으로 무사할까요? 혹시 욕이라도 당했다면....” 사리발마가 혹시 욕을 당해서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며 묻고 있었다. 이에 잠시 생각해보던 단리유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일을 벌인지 이틀밖에 안 되었고, 그들 역시 내일 노예시장이 열리기 전에 도착해야 했을 테니 무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여자의 몸으로 이 먼 곳까지 따라왔다면 그 정도의 일은 각오하고 있을 것입니다.” 서로 시옥청과 혈사풍령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문득 바로 옆 탁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끼어들어 물음을 던졌다. “혈사풍령단에 누가 납치되었습니까?” 단리유아가 돌아보니, 이십대의 품이 넓고 긴 가죽옷을 입은 청년이었다. 복장으로 보아서는 천산 일대에 사는 합살극(哈薩克:카자흐)족의 사람인 것 같았다. 청년의 옆에는 볼우물이 귀여워 보이는 십여 세의 어린 여아가 앉아 있었다. 시옥상(柴玉霜) 시옥상(柴玉霜) 2 청년의 모습은 그냥 앉아 있었어도 떡 벌어진 어께와 곰 같은 허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정도로 우람했다. 얼굴 역시 중원인과 다르게 코가 높고 턱이 길어 보였는데, 약간 푸른 기가 감도는 눈이 이채로웠다. 여자 아이는 머리에 구슬이 달린 화모(花帽)를 쓰고 있었는데,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모습이었다. 잠시 두 사람을 살펴보던 단리유아가 본 적이 없던 낯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되물었다. “그렇긴 한데, 형장은 뉘십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저는 위마산(魏磨山)이라고 합니다.” 단리유아의 물음에 그제야 청년이 깜박했다는 듯이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곁의 여자 아이가 두 갈래로 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오빠는 부족에서 제일 유명해요. 얼마나 용감하다구요. 다들 백호의 전사라 칭송하는데....” “얘가, 또? 너 가만히 있지 않을 래? 여기까지 따라와서도 그러다니, 그러면 다음에는 데려오지 않는다?”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며 위마산이 여아의 입을 막았다. 숨이 막혀서 켁켁거리며 상기된 여자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서 일행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콱!” “윽! 너? 정말!” 손을 깨물린 위마산이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지만, 여아의 얼굴에서는 전혀 겁먹는 기색이 없었다. “히히히. 그러기에 누가 입을 막으라고 그랬나? 그리고 노려보면 어쩔 건데?” “으이구, 이 계집애를 데려온 것이 아닌데. 괜히 이 도깨비 같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위마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토닥거리는 모습이 정겨워서 계속 바라보고만 있던 단리유아가 여자 아이에게 물음을 던졌다. “꼬마 아가씨, 아가씨 이름은 무엇이지?” “뭐가 꼬마에요? 흥! 내년이면 시집을 가고도 남을 나이인데 무시하다니. 안 가르쳐줄 테니 딴 데나 알아봐요, 무섭게 흉터만 많은 아저씨!” 여자 아이가 토라져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일대에서는 보통 열셋이면 시집을 가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이를 달래본 적이 없던 단리유아가 어찌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무안한 표정으로 위마산이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노형. 아직 어려서 버릇이 없습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으로 위화화(魏花花)라 합니다. 보통은 그냥 소화(小花)나 화귀(花鬼)로 부르지요. 뭐, 제 생각에는 뒤에 것이 더 낫게 보이지만.” “오빠! 또 그렇게 부르다니. 흥! 저번 보름에 지홍(芝鴻) 언니하고 만난 것을....” 곧바로 위마산을 쏘아보며 위화화가 소리쳤다. 그 말에 당황한 위마산이 재빨리 다시 입을 막으며 달랬다. “알았어, 알았다구. 내 잘못했다, 소화야. 그 얘기는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니? 내가 예쁜 비단 옷 사줄 테니, 응?” “우웅. 헤헥! 또 입을 막다니. 자꾸 그럴 거야? 한 번만 더 그러면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해버린다?” “어이구! 잘못했다 소화야.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게. 한번만 이 불쌍한 오라비를 봐다오.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죽는단 말이다.” 위마산이 울상을 지으며 손바닥을 싹싹 비비고 빌고 있었다. 두 오누이의 정겨운 모습에 미소를 짓던 단리유아가 잠시 후 그들의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위마산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위형, 나는 단리유아라 하고 여기 이 두 분은 사리발마 스님과 제타구고 형이시오. 우리가 아는 어떤 아가씨가 혈사풍령단에 납치당해서 그러는데, 그들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으면 알려주시구려.” “혹시 아저씨 애인인가요? 예뻐요? 아니면 나보다 못생겼나요?” 단리유아의 말을 듣자마자 위화화가 끼어들어 연이어 캐물었다. 두 가닥 머리댕기를 잡고 이리저리 상반신을 흔들어 보이며 묻자, 단리유아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하하. 애인은 아니오, 소화 아가씨.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은 것뿐이지.” “흠흠. 그런 일이 있으시군요. 저도 잘 알지 못하지만 풍문에 들은 몇 가지는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헛기침을 연발하며 위마산이 대답한 뒤에 혹시라도 위화화가 끼어들까봐 곧바로 혈사풍령단에 대해서 설명했다. “단리형. 안 된 일이지만, 혈사풍령단에 대한 것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지난 삼 년 사이에 과천성이라는 신비한 사람이 조직해서 나타난 도적집단이라고만 알려져 있지요. 매달 한 번씩만 습격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주로 대상의 물건을 털거나 사람을 사로잡아서 노예로 판다고만 알려져 있지요.” “여자의 몸인데 과연 무사하겠소? 혹시 겁탈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소?” 우려의 표정으로 단리유아가 묻자, 위마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듣기로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보통 도적들은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물건만 터는데, 그들은 이상하게 사람들까지 팔지요. 최근에 이 지역의 노예시장이 커진 것도 다 그들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단리형도 그 아가씨를 구하려면 아마 많은 돈을 준비해야 할 거요.” 위마산의 말에 일단은 걱정이 하나 줄어들었지만,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구해야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해보던 단리유아가 계속해서 물음을 던졌다. “혹시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시오? 보통은 산채나 동굴 같은 본거지가 있을 텐데.” “없다고 알려졌지만 또 모르지요. 비밀 거처가 있는지는. 아주 신출괴몰해서 한 달에 활동하는 날도 닷새를 넘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하여간에 괴상한 도적들인데, 궁금해서 추격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실종되거나 죽음을 맞이해서 아무도 모른답니다.” 지금이라도 혈사풍령단을 추적했으면 좋겠지만 위마산의 말로는 힘들 것 같았다. 일단 그들에 대한 물음은 접고 단리유아는 노예시장에 대해서 계속 물음을 던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자신은 무시하며 계속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지루한 듯이 딴청을 부리고 있던 위화화가 소리쳤다. “곰탱이 오빠, 시간이 됐단 말이에요. 언제까지 떠들고만 있을 거예요? 삼촌이 기다릴 텐데.” “알았어 알았다구, 이 화귀.... 아니, 사랑하는 누이야. 단리 형,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오늘은 바빠서 제가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참, 혹시 이령(伊寧)에 오실 일이 있으면 내 이름을 대고 한번 찾아오시오.” 위마산이 화급히 말하며 위화화를 쫓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주청을 나설 무렵, 문득 위화화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어이 무서운 흉터쟁이 아저씨, 다음에 또 봐요. 참, 그 언니도 꼭 구하기를 바래요. 안녕!” “넌 도대체 계집애가 돼서 그게 무슨 말버릇....” “흥! 잔소리 말고 어서 가기나 해요. 아니면 지홍 언니 얘기나....” “윽. 제길....” 두 사람이 티격태격 거리며 떠나는 모습을 보고 일행 모두 즐거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두 오누이에 얘기하던 일행은 다시 시옥상을 구출하는 문제로 대화를 옮겼다. “아미타불. 단리시주, 노예시장에서 그 아가씨를 구하려면 많은 돈이 있어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큰돈이 없는데.” “일단은 오늘 밤에 노예시장이 열리는 곳을 잠입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柴)소저가 있다면 구해오고, 없다면 천상 내일을 기다려야 할 테지요. 그땐 뭐 저희도 돈 안 드는 장사를 좀 해야 하겠지만....” 사리발마의 말에 단리유아가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대꾸했다. 사리발마가 돈 안 드는 장사라는 말에 의아해할 때, 제타구고가 귓속말로 살짝 속삭였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리다니?” “나 참, 훔친다구요.” “설마 도둑이 된다는....” 그제야 이해한 사리발마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급히 제타구고가 떠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낼 때, 단리유아가 대신 자그맣게 대답해주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훔쳐야만 할 상황이 되어도 이 지역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사람의 집을 털 테니.” 그래도 사리발마의 모습에서는 내키지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잠시 더 상의를 한 일행은 식사를 마치고 이층으로 향해서 자정까지 각자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질 때 일행은 객관을 나섰다. 모두가 복면을 한 상태로 노예시장이 위치한 서쪽 외곽의 백사구(白蛇丘)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백사구에 도착한 일행은 언덕 위에 보이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제타 형, 나와 사리발마 스님은 뇌옥으로 향할 테니 제타 형은 일단 내원 쪽을 찾아보시오. 혹시 그쪽에 있을지도 모르니. 그리고 사경(四更)이 되면 찾지 못하더라도 이곳으로 다시 모이기로 하고, 만일 문제가 생기면 휘파람을 불기로 합시다.> 단리유아가 전음으로 얘기한 후에 일행은 두 방향으로 흩어졌다. 제타구고가 내원 쪽으로 향할 때, 단리유아는 뇌옥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우선 순찰을 도는 사람을 두 사람을 제압했다. 뇌옥의 위치와 노예들이 언제 들어왔는지 등을 캐묻고, 이어서 장원을 지키는 고수의 수와 배치 등을 알아낸 단리유아는 두 사람의 혼혈을 짚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시하는 고수들의 시선을 피해서 뇌옥으로 향했지만, 단리유아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뇌옥의 입구에는 화롯불을 뒤로하고 네 사람의 황의대한들이 지키고 있었다. 네 사람을 점혈하여 제압한 뒤에 단리유아는 곧바로 뇌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괜찮을까요? 저러다 누군가의 눈에 띄게 된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잠시 후에는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될 테니.> 사리발마의 걱정을 눈치 채고 단리유아가 설명해주었다. 수혈을 약하게 집었으니 곧 깨어날 것이고 약간 이상함을 느끼더라도 잠시 졸은 것으로 알 것이다. 일단 뇌옥에 들어서자 단리유아는 간수들의 거처로 향했다. 입구의 왼쪽은 창고로서 여러 물품이 보관되어 있었고 오른쪽이 간수들이 있는 곳이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음담패설로 간수들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단리유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어 젖혔다. “잘들 있었나, 친구들?” “어? 누구?” “잠시만 협조를 부탁하네. 그럼 그리 알고....” 난데없이 복면을 쓴 사람이 들어와 당당히 말하자, 일순간 방에 있던 여덟 명의 간수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들이 막 침입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단리유아의 움직임이 시작된 뒤였다. “윽, 으윽.” “제기랄! 대체 무슨....” 한 호흡의 순간도 되지 않아서 모두 혼혈을 제압당한 채 나뒹굴고 있었다. 워낙 수준차이가 큰 것도 한 이유였지만, 상대적으로 외부에서 감시하던 자들보다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간수들을 제압한 뒤 단리유아는 뇌옥으로 통하는 문으로 향했다. 머리맡 창살로 된 문 사이로 들여다보니 통로의 끝 쪽에 두 명의 흑의인이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쪽에 두 명이 지키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곳에 누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들어가 제압할 테니, 스님께선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전음과 함께 살짝 문을 열고서 천정으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던 흑의인이 사람은 보이지 않고 문만 열린 것에 의아해하며 다가오려고 할 때, 단리유아는 천정을 타고 흐르듯이 접근하다가 떨어져 내렸다. “누구냐?” 뒤에 있던 흑의인이 뭔가 희끄무레한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서 소리쳤다. “파팟!” 두 흑의인이 침입자라는 것을 알고 검을 뽑으려할 때는 이미 단리유아의 공격이 시작된 뒤였다. 이제까지 본 자들 중에서 무공이 제일 높았지만, 숨 돌릴 새 없이 쏟아지는 뇌전지(雷電指)의 공격 앞에서는 몇 초 견딜 수 없었다. “차차창!” “퍼퍼퍽.” 두세 번 막아서기도 전에 이미 두 팔에 격중이 되어서 구멍이 난 뒤였다. “챙그랑!” “누, 누구? 어, 어떻게....” 두 손을 교차하여 양 팔뚝을 누르며 두 흑의인이 묻고 있었다. 그래도 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고수들로서 거의 적수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손쓸 새도 없이 당해버린 것이었으니 두 사람의 놀라움과 두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단리유아가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이미 바닥에 누워있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대체 이런 고수가 누구일까, 어디서 나타났을까하는 생각에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경악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는 그들이 지키고 있던 감방을 살피고 있었다. 감방 안에는 어떤 청년이 막 여자를 겁탈하려는 순간이었는지, 벌거벗은 채로 여자 위에 올라탄 채 여인을 누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누워있는 여인이 시옥상인 것 같아서 단리유아는 마음이 급해졌다. “스윽. 챙. 채챙.” 곧바로 수강(手剛)을 일으켜서 쇠창살을 절단한 뒤, 뛰어들자마자 벌거벗은 청년을 잡아 채 내던졌다. “쿵! 아악” “대협! 부디 손속에 자비를....” 뒷벽에 부딪친 채 기절하는 모습에 두 흑의인이 소리쳤다. 수강을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자유자재로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들은 오늘 항거할 수 없는 절대고수(絶代高手)가 찾아왔음을 알았다. 어떻게 해서 저런 고수를 건드리게 되었는지 몰랐지만, 장원내의 모든 사람들이 달려든다 해도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두 흑의인은 두려움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들이 소리칠 때, 단리유아는 누워있는 여인을 살피고 있었다. 겨우 하반신의 고의만 무사한 채 전신의 나머지 옷은 찢겨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여태까지 기를 쓰고 반항을 했는지, 재갈이 물린 입가에도 혈흔이 묻어 있었고 몸통에도 곳곳에 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혹시 시옥상, 시소저 되시오?” 여인의 전신을 빤히 살피고 있던 단리유아가 문득 입가에 찍힌 미인점을 보고 물음을 던졌다. 여인도 여느 여인들과는 달리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단리유아의 시선을 마주 쏘아보고 있다가 입에 물린 헝겊을 치워주자, 곧바로 퉁명스런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라고.... 겁탈당하는 여인을 보았으면 우선 몸부터 가려주어야 할 것 아니에요? 뻔뻔스럽게 빤히 쳐다보다니, 당장 옷부터 내놔요!” 말과 함께 얼굴로 날아오는 손바닥을 붙잡았지만, 단리유아는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제대로 대꾸할 수도 없었다. “옷 내놓으라는 소리가 안 들려요? 당신 혹시 귀머거리에요? 아니면 벌거벗은 여자 몸 구경하길 좋아하는 변태? 볼 테면 옷이나 주고 봐요, 치사하게 공짜로 보지 말고.” 아예 일어서서 왼손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기가 막혀 쓴 웃음만 짓다가 단리유아가 상의를 벗어서 건네준 뒤 돌아섰다. 겁탈 당했을 뻔했는데도 전혀 두려움이나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지켜보는 자신이 당황할 정도로 사납고 당찼다. 세상에 이런 여인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던 대다가 더욱이 유일하게 알고 사랑한 마야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어서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시찬명의 말대로 누구나 이런 여인을 보게 되면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마치 암호랑이처럼 사납고 괄괄하니 누군지 모르지만 앞으로 이 여자의 남자가 될 사람은 고생문이 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옥상(柴玉霜) 시옥상(柴玉霜) 3 한편, 시옥상은 대충 단리유아의 상의를 걸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있었다. 그녀 역시 오늘 일이 속으로 두려웠고, 결코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집안이 몰락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여인의 몸임에도 상행을 이끌고 이역까지 왔지만, 이런 일을 겪은 적은 없었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이미 정조라는 관념은 버려두고 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강제로 겁탈당할 뻔한 상황에 이르자 얼마나 무섭고 끔찍했는지 다시는 기억하고도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나타난 단리유아가 한없이 반가웠고 기뻤지만, 여심이라는 것은 원체 종잡을 수 없는 것인지 시옥상 자신도 모르게 오히려 쏘아붙이기에만 바빴다. 지금이라도 저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고 서러움을 토해내며 엉엉 울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굳게 먹고 방울져 흐르는 눈물을 소리죽여 닦을 뿐이었다. 대충 수습을 하고 눈물 자국을 지운 시옥상은 바깥에 떨어진 흑의인의 검을 주워들었다. 두 흑의인이 시옥상에게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단리유아에게 말려줄 것을 눈짓으로 부탁하고 있을 때, 시옥상은 한쪽 구석에 처박힌 청년을 향해서 다가가고 있었다. 잠시 뒷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큰 대자로 뻗어있는 모습을 주시하다가, 뽀드득 이를 갈면서 시옥상이 검을 내리쳤다. “으으득! 물건도 작은 것이 감히 나를 겁탈하려해? 개자식,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못하게 해주마!” 돌아보며 말리려하던 단리유아도 목숨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막아야할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 눈물을 닦던 모습을 슬쩍 보았던지라 차마 말릴 수 없었다. “챙그랑!” 다시는 사내구실을 못하게 만든 뒤 시옥상이 철검을 내던졌다. 곧이어 몸을 돌려 단리유아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단리유아도 시옥상의 모습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의 생김새에서 입가의 미인점이 애교스러움을 던지고 있었지만, 그에 반해서 치솟은 눈썹과 크고 반짝이는 두 눈이 절로 노려보는 것 같아서 그 성격이 보통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키도 보통 여인들에 비해서 큰 편으로 오 척 반은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아주 돋보이게 아름다운 미인은 아니었지만, 보통 여인들에게는 없는 당당함과 위엄이 있어보였다.   복도의 횃불아래에서 서로를 잠시 쏘아보던 두 사람 중에서 단리유아가 먼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아가씨가 시옥상 소저이시오?” “흥! 알면서 뭐 하러 물어요? 그보다 당신은 누구에요?” “아가씨 숙부의 부탁으로 구하려고 온 사람이오.”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숙부가 부탁했다는 소리에 시옥상이 황급히 되물었다. “숙부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이에요? 분명 칼을 맞은 것을 보았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부탁받은 것이오.” “우연히? 오라, 이제 보니 정의의 협객이시로군. 여자 몸을 훔쳐보는. 흥! 다른 부탁은 없었나요?” 숙부에 대해서는 더 물어보지도 않고 비웃으며 자신의 할 말만하는 시옥상이었다. 말로는 당해낼 수 없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단리유아가 대답했다. “아가씨와 잡혀간 사람들을 구해달라는 것이 다였소. 그보다 저 청년은 누구요?” 슬쩍 화제를 돌리자, 시옥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흘겨보았다. 그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시옥상이 부드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으드득! 여기 노예시장의 주인인 루보만(蔞寶萬)의 개망나니 아들놈이에요. 서로 안면이 있는데도 그 늙은이가 과천성이라는 도적에게서 우리 일행을 사들였어요. 내가 대가를 치르겠다는데도 들은 척도 않고 이곳에 가두고. 이 늙은이를 내 가만두나 봐라. 저 개자식도 아예 죽여 버릴까? 도저히 분이 안 풀리네.” 대답하다가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석실 안을 노려보는 시옥상이었다. 그 말에 자신들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목숨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던 두 흑의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대협, 제발 소주인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루대인에게 아들은 이 아이뿐입니다. 대신 저희들의 목숨을 바칠 테니.” 시옥상이 오히려 더 무서운지 대신 단리유아에게 애걸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 기분이 나쁜지 시옥상이 두 사람을 노려보고 소리쳤다. “이것들이 도대체 누구에게 비는 거야. 당사자가 여기 있는데, 왜 이 사람한테 빌어? 정말 저 놈을 콱 죽여 버릴까?” “어이쿠. 아가씨, 제발 노여움을 푸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저희들이 이렇게 빌 테니.” “흥! 아량이 넓은 본 소저가 참는 줄 알아라. 너, 넌 가서 루보만 그 자식을 데려와!” 시옥상이 주인이 된 듯이 소리쳤다. 지목된 흑의인이 슬슬 단리유아의 눈치를 보며 미적이자, 시옥상이 눈썹을 치켜들며 다시 소리쳤다. “저 인간을 뭐 하러 보는 거야! 이번 일의 주인은 나야. 당장 루보만 데려오지 못해! 아니면, 저 자식을 지금 토막 내 버릴까?” “알겠습니다, 소저. 지금 갑니다.” 더 이상 단리유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흑의인이 다급히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말없이 지켜보던 단리유아가 문득 시옥상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보시오, 시소저. 우선 소저만이라도 빠져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자가 온다면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흥! 당신은 숙부의 부탁을 받지 않았나요? 나뿐만 아니라, 본가의 사람들까지 구해주겠다고. 설마하니 그럴만한 힘도 없이 이렇게 뛰어든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면 겁이 나나요?” 당찬 얼굴로 시옥상이 맞받아치며 단리유아를 슬쩍 비웃었다. 더 이상의 입씨름은 손해라고 생각한 단리유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나서 노려보던 시옥상이 문득 은근한 표정으로 단리유아에게 속삭였다. “당신, 내 몸을 똑똑히 보았지요? 보니까 어떻던가요?” “.... 음.” “이래봬도 한 몸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단리유아가 대답했다. 말하지 않으면 계속 곤란한 질문을 퍼부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걸려들었다는 듯이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시옥상이 대꾸했다. “당신도 내 몸을 보았다는 것을 시인하지요? 순결한 처녀의 몸을 보았으면 책임을 져야지요.” “그건 부득이....” “흥! 그래서 온 몸을 샅샅이 바라보았나요?” “소저가 맞는지 확인하려....” “닥쳐요! 내가 말은 함부로 해도 아직까지 외간남자에게 손목 한번 잡혀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두 사람이 청백을 더럽혔는데, 내 마음이 어떻겠어요?” 억지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눈물이 글썽이는 모습에는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단리유아가 말이 없자, 잠시 노려보던 시옥상이 한숨을 내쉬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나도 당신 같은 대가리에 든 것은 하나 없는 칼잡이와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당신도 내 몸을 본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것은 시인하겠지요?” “....” “어서 말하지 못해요! 시인할 거예요, 말 거예요?” “그래 내 시인하리라. 내게 원하는 것이 대체 뭐요?” 시옥상의 다그침에 질린 단리유아가 퉁명스레 물음을 던졌다. 어쩐지 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옥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그럼 내 부탁을 대신 한 가지 들어줘요.” “무엇이오?” “으드득! 본가의 상행을 덮쳐서 숙부님을 죽게 한 과천성과 그 일당을 잡아줘요.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물품도 찾아주고. 그 다음에는 당신 맘대로 떠나도 좋아요.” 이를 갈며 원한에 찬 표정으로 시옥상이 말하고 있었다. 대뢰음사와 약속한 시간이 보름 정도 남았지만, 그 동안에 찾을 수 있을 지는 회의적이었다. 아무도 행적을 모르는 도적단을 찾아야할까 차라리 다른 조건을 들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할 때, 시옥상이 어림없다는 듯이 의표를 찔러왔다. “흥! 다른 것은 필요 없어요. 반드시 그 조건이어야 해요. 알겠어요?” “으음. 알았소.” 마지못해서 단리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여자는 여우라던 옛말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새삼스레 마야의 다정한 음성이 그리워지는 단리유아였다. “이리 와서 이 아이 좀 깨워줘요.” 잠시 단리유아가 마야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시옥상이 단리유아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니 감방 안 한쪽 구석에 정신을 잃은 소녀가 쓰러져있었다. 복장으로 보아서는 시녀인 것 같았는데, 곰보 투성이에 돼지코를 한 열다섯 살 정도의 못생긴 소녀였다. “아가씨! 아가씨, 어떻게 됐어요? 무사하신가요? 엉엉! 혹시 그 짐승 같은 놈이....” 수혈을 풀어주자마자 벌떡 일어난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시옥상에게 매달린 채로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해주던 시옥상이 시녀가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계속해서 묻자, 나중에는 화가 폭발했는지 밀쳐내며 쏘아붙였다. “그만 좀 물어, 이 못난이야! 지겨워 죽겠네, 정말. 울음도 안 그칠래!” “아가씨. 흑흑, 소비는 아가씨가 걱정돼서 그런 것인데....” “정말 내가 왜 너를 깨울 생각을 했는지 몰라! 차라리 계속 잠들게 놔둘걸.” 한참 이런 소란이 계속되고 있을 때, 입구 쪽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사리발마가 곁으로 다가왔다. 사리발마가 장내의 상황이 어색한지 헛기침을 거듭하다가 단리유아에게 물었다. “흠흠. 시, 대협, 밖이 포위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저 소저를 데리고 빠져나가지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은 돈을 주고 구하더라도.” “뭐가 어째요? 어린 중이 뭘 안다고 나서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염불이나 할 것이지?” 시옥상이 힐끗 사리발마를 쳐다보고는 곧바로 쏘아붙였다. 사리발마가 시옥상의 폭언과 신분을 알아차린 사실에 놀라 멍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시옥상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분이 승려임을 어떻게 알았소?” “흥! 복면만하면 다인가요? 상인이 되려면 먼저 눈썰미부터 키워야하는 것이에요. 팔목에 걸친 염주나 몸에 베인 향내도 숨기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면 바보 아니에요?”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시옥상이 곧바로 허점을 지적했다. 여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본래 시옥상의 눈썰미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리유아와 사리발마는 그녀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생각한 단리유아가 청각을 모아서 일대를 살폈다. 살펴보니 뇌옥의 주위로 이백 여명의 사람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특히 입구 쪽에 백여 명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소란스런 기척으로 보아서는 불화살이나 암기 등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미 뇌옥에 있던 소란을 알게 된 것 같았다. 흑의인이 한명 나간 것으로 알 수도 있었겠지만, 뇌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구해달라고 외치는 소리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잠시 기척에 귀를 기울이던 단리유아가 한쪽에 있는 흑의인을 향해서 물었다. “흠! 내가 보기에 이 뇌옥을 이백 여 명의 사람들이 포위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의 주인 되는 사람은 자식을 살리고 싶지 않은 것 같구려.” “대협, 그럴 리가 없습니다. 누대인이 얼마나 자식을 위하는데....” 흑의인이 고개를 저으며 강력히 부인할 때, 시옥상이 끼어들어서 소리쳤다. “그 늙은이가 돈 욕심보다 큰 것이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야!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라고, 이미 병신이 되었으니 자식도 필요 없다 이거지? 이 늙은이를 도대체 어떻게 죽여야 분이 풀릴까?” “아가씨, 제발 말 좀 가려서 하세요. 흑흑. 그게 대체 무슨 말버릇이세요. 돌아가신 대부인 마님이 들으셨다면 분명 놀라 뒤로 넘어지셨을 거예요.” 시옥상의 욕설에 시비가 옷자락을 움켜쥐며 주의를 주었지만, 시옥상의 모습에서는 당황하는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쏘아붙였다. “뭘 보는 거예요? 댁들은 한 번도 욕을 안 하는 것처럼. 흥! 그리고 너 이 계집애, 그만 좀 그치지 못해! 어떻게 된 것이 기뻐도 울고, 슬퍼도 울고, 허구한 날 훌쩍거리기만 해!” “아가씨는 그 성질 때문에....” “내 성질이 뭐 어떻다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화가 폭발한 듯이 소리 지르는 모습에 모두들 무서워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비록 시옥상이 무서워서 직접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니 여태 시집도 못가고, 찾아온 남자들도 모두 도망쳤지.’ 라고 시비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시옥상이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단리유아가 흑의인에게 물음을 던졌다. “이 장원에 그대 만한 고수가 얼마나 있소?” “왜 그런 것을 물으시는지 모르지만, 저 정도의 고수는 삼십여 명 정도 됩니다.” “더 강한 사람은?” “다섯 명이 있지만, 대협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묻는 바를 이해하겠소?” 무심한 단리유아의 말에 그제야 묻는 의도를 알아차린 흑의인이 경악성을 흘렸다. “예? 헉, 그렇다면....” “그렇소. 사실 내가 죽이려한다면 이 장원내의 사람은 일각 이내에 모두 죽일 수 있소. 하지만, 나는 될수록 피를 보고 싶지 않소. 그러니 그대가 나가서 루대인이라는 사람을 데려오시오. 물론 그 가장 강하다는 다섯 사람도 함께해서.” 단리유아의 말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시옥상이었다. 설마하니 단리유아가 그 정도의 고수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무공을 알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지만, 아무런 기도를 흘리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두 흑의인을 손쉽게 제압했다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의 고수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절대고수이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자신이 요구조건을 괜히 바꾼 것은 아닌가 하고 후회가 되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다시 바꿀 수 없었다. 물론 다음에 다시 기회가 생길 테니, 그때는.... 시옥상(柴玉霜) 시옥상(柴玉霜) 4 일각 후, 나갔던 흑의인이 뇌옥 안으로 배불뚝이 노인과 다섯 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들어섰다. 노인이 바로 노예시장의 주인인 루보만으로 이곳 객십 일대에서는 가장 큰 부호중의 하나였다. 노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시옥상이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루보만! 이 두꺼비야! 안면이 있는데도 날 노예로 팔아먹으려고 해! 게다가 그 개망나니 놈이 날 겁탈하도록 내버려두고. 이봐요! 어서 저 늙은이를 죽여 버려요. 상도도 모르는 쓰레기 같은 늙은이이니.” 악다구니를 쓰며 시옥상이 소리치고 있을 때, 십여 장 떨어진 단리유아와 루보만은 서로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살찐 얼굴에 눈동자가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이 전혀 마음에 드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단리유아로서는 시옥상의 말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시찬명의 부탁대로 어디까지나 그녀와 그 일행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지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로 피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전혀 자신의 말에 기울이는 기색이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화가 폭발한 시옥상이 다시 소리치려고 했을 때, 단리유아가 땅에 떨어진 철검을 허공섭물을 이용해 끌어당겼다. 루보만과 그 일행이 그 모습에 긴장한 채 무기를 움켜쥐고 있을 때, 철검을 천천히 밀어내었다. 점점 속도가 빨라져 루보만의 머리를 향해서 다가오자, 다섯 명의 고수들 중에서 가장 앞서 있던 고수가 철편으로 내려쳤다. “채 챙!” 부딪친 철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루보만의 머리를 향해서 날아가자,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다섯 명의 고수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어, 어검술!” “이럴 수가! 설마 하니 수어검의 고수라는 말인가?” 곧이어 앞 다투어 서로의 무기를 들고서 철검을 막아갔다. 순식간에 뇌옥 안에는 허공을 자유자재로 비산하는 철검과 다섯 사람의 무기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채채챙. 차창!”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들이 춤추는 것처럼 루보만을 호위하던 다섯 사람은 철검을 막기 위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시옥상이나 노예로 붙잡힌 뇌옥안의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반대로 철검을 막아서고 있던 다섯 사람은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해도 막을 수도 없었던 대다가 진기가 다해서 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목숨이 몇 번이고 저승길에 들어섰다가 돌아왔음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며 루보만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스쳐지나가는 철검에 루보만 역시 간담이 철렁거리고 있었다. 처음에 들어섰을 때만해도 설마하니 이 정도의 고수일지는 몰라서 그래도 자신은 있었는데, 이제는 들어온 것이 후회가 될 정도였다. 일각이 넘게 계속되는 상황에 루보만도 상대가 마음만 먹었다면 모두 이미 죽어도 몇 번을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진땀을 흘리며 단리유아를 향해 소리쳤다. “대, 대협! 말로 합시다. 내가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 테니.” 그제야 단리유아도 어검술을 멈추고 철검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팍!” 천정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릴 때, 루보만의 그림자 속에서 제타구고가 몸을 일으켜 단리유아에게 돌아왔다. “헉! 어, 언제?” 등을 내보이며 걸어가는 데에도 루보만이나 다섯 명의 고수들은 너무 놀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자신들이 계속 반항했다면 단리유아가 내버려두었어도 소리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모두들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돌아와 제타구고가 복명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단리유아가 루보만에게 요구 조건을 말했다. “루대인, 내가 바라는 것은 여기에 있는 시소저와 뇌옥에 있는 모든 노예들을 당장에 풀어달라는 것이오. 그럴 수 있겠소?” “헤헤. 대협, 시소저는 풀어줄 수 있지만, 저도 밑지는 장사를 하기에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면서 루보만이 간사하게 떠버리려는 순간, 단리유아의 무심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당신 자식의 목숨도 걸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또한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사람이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오. 단지 피를 보기 싫어서 그런 것일 뿐.” 그런 단리유아의 모습에 루보만도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말을 듣지 않겠다면 모두들 죽이겠다는 위협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단리유아를 제외하고 제타구고라도 움직인다면 기척도 없이 자신들 목을 따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보만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숨을 내쉬며 결국에는 노예들을 풀어주라고 명을 내렸다. 곧이어 감방문이 열리고 노예들이 풀려났다. 잠깐 단리유아에게 감사의 말을 떠드는 사람에서부터 곧바로 떠나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백여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뇌옥에서 빠져나갔다. 쾌도난마처럼 순식간에 모든 일이 처리되고 시옥상과 그 일행만이 남았을 때, 시옥상이 기뻐하면서도 맘에 들지 않은지 단리유아에게 소리쳤다. “이것 봐요! 저 늙은이는 그냥 내버려둘 생각인가요? 나 같으면 곧바로 죽여 버리고 말 텐데. 흥! 당신도 말만 번지르르한 협객들과 똑같군요.” “시소저. 당신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당신과 그 일행을 구해달라는 부탁만 받았을 뿐이오. 또한 죄를 진자는 다 때가 되면 그 죄 값을 치르게 마련이오. 오늘 내가 반드시 그를 죽이지 않더라도 말이오.” 단리유아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시옥상이 불만스레 다시 쏘아붙이려고 했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린 단리유아가 루보만을 호위하던 다섯 사람에게 말을 던졌다. “여러분들에게도 한마디 하자면, 대장부로서 큰일을 하지는 못할망정 몇 푼의 돈에 좌우되어 죄업을 쌓지는 마시오. 일순간의 쾌락에 젖어 마음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되시오, 백년의 삶도 결코 긴 것은 아니니.” 다섯 사람이 부끄러운 기색으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 역시 단리유아의 말을 곰곰이 새기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옥상도 말문이 막혔는지 일시 말을 못하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루보만에게 물음을 던졌다. “루대인, 내 한마디 물어볼 것이 있소. 여기 시소저를 건네 준 과천성이 누구인줄 아시오? 당신과는 오래 거래했을 테니, 분명히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그 말에 자식의 상처를 돌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루보만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허!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루(疎而不漏)요, 인과응보라는 말인가? 휴우, 대협. 그자가 누구인지 나도 모르오. 항상 복면을 하고 있었으니. 단지 알고 있는 것은 뭔가 벽풍장(碧風莊)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오. 언젠가 궁금하여 추적을 했을 때,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으니.” 루보만의 말에 단리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정도의 단서를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옥상의 처지를 동정해서 억지요구에 응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 이번 일을 계기로 천지신교와 맞서 싸우는데 도움을 얻고자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비록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그 인맥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니 자신이 조금만 도와주면 곧 성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사하상단(沙河商團)라는 든든한 자금원을 마련할 수 있고, 중원과 세외사이를 연결할 정보력도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만난 지 불과 반 시진도 되지 않아서 시옥상에게 질려가고 있었다. 일면으로는 당차고 굳센 성격이라 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같이 있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이어서, 세상에서 마야가 가장 완벽한 여인이라 생각하고 있던 자신과는 하나도 맞는 구석이 없었다. 어서 해결해주고 서로 협조를 얻는 일만 마무리되면 한시라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나자 단리유아는 불만스레 떠드는 시옥상은 내버려둔 채 앞장서 걸어 나갔다. 시옥상도 더는 어쩔 수 없었는지 루보만을 향해서 코웃음 치다가 뒤따라 나왔다. 객관으로 돌아와 아예 별채를 빌려서 시옥상과 그 일행에게 머물게 하고, 단리유아는 다음날 시옥상과 함께 루보만이 말한 벽풍장을 찾아 길을 나섰다. 떠나기 전에 벽풍장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서역과 비단이나 모피 등을 교역한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옥상이 제타구고가 뒤따르는 것이 못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단리유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 사람은 꼭 데려가야 해요? 저 사람의 모습에 다들 슬슬 피하잖아요?” “시소저, 우리는 지금 소풍을 가는 것이 아니오. 그리고 면사를 내리시오. 혹시라도 그자가 당신을 알아보고 숨어버릴지도 모르니.” 무뚝뚝하게 얼굴을 가리라는 잔소리만 하자, 시옥상이 샐쭉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단리유아가 십대고수 중의 한명이라는 소리를 듣고 어떻게 해서든 이 인간하고 친해질 생각이었지만, 단리유아는 자신과는 달리 무신경하게 대하고 있었다. 가문을 중흥시키는 일에도 필요하고, 이번 일을 겪으며 상가와 자신을 보호해줄 무력이 절심함을 실감했기에 더욱 단리유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이 인간을 어떻게 하지? 성질 같아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호락호락하게 넘어올 인간이 아니고. 그냥 밤에 확 덮쳐서 책임지게 만들까? 하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저 인간이 지키고 있을 텐데....’ 시옥상이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우선 애교작전으로 나가기로 하고 단리유아의 곁으로 말을 몰아갔다. 성질을 죽이고 방글거리며 단리유아에 대해서 묻기도 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었지만, 몇 번 다그치는 경우에만 말을 할 뿐 단리유아에게선 도통 반응이 없었다. 단리유아로서도 이 성질 사나운 아가씨와는 말해보았자 손해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될수록 가까이하려하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신경전 속에 북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벽풍장에 이른 시각은 오시(午時:11-13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북쪽 산기슭을 뒤로 하고 세워진 벽풍장은 장원 주위로도 수목이 빙 둘러싸서 아주 아름다웠다. 말에서 내린 세 사람이 장원의 입구에 이르러서 문을 두드리니, 곧 나이든 하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주인을 만나고 싶다는 말에 하인이 곤란하다며 물러가길 바라고 있을 때, 안쪽의 마당에서 뛰놀던 누군가가 얼굴을 들이밀며 물음을 던졌다. “누가 찾아왔어, 하노(夏老)?” 그러다 곧 단리유아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소리쳤다. “어? 어제 만난 흉터쟁이 아저씨네. 이것 봐요, 아저씨. 오늘은 무슨 일로 우리 삼촌 집에 찾아왔나요? 아니면 오빠를 만나러, 그것도 아니면 혹시 나를.... 음음. 그럼 안 되는데. 난 정혼자가 있어서....” 혼자서 묻다가 고개를 배배꼬며 중얼거리는 위화화의 모습에 단리유아도 웃으며 반겼다. 반면에 과천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벽풍장에 있는 것이 불안감을 일으켰다. 일단 그런 기색을 숨기고 말을 건넸다. “소화 아가씨. 장주를 뵈려고 찾아왔는데, 아가씨가 있을 줄은 몰랐구려. 그런데 오라버니는 어디 가셨소?” “곰탱이 오빠는 나와 놀아주지도 않고 삼촌이랑 얘기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촌 꼬마들과 놀고 있었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지 뭐에요.” 위화화가 대답하며 한쪽에 서 있는 열 살이 못되어 보이는 소동과 소녀를 가리켰다. 흙투성이가 된 것을 보아서는 노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단리유아가 그 모습에 빙그레 웃고 있을 때, 위화화가 고개를 돌려 시옥상을 보더니 단리유아에게 물었다. “저 언니가 어제 말한 그 언니에요?” “그렇소. 소화아가씨.” “어머 그래요? 노예시장에서 구출했나보군요. 안녕하세요, 언니. 난 위화화라고 해요.” 반색을 하며 위화화가 시옥상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흙투성이 손으로 옷을 만지려하자, 시옥상이 곧바로 뒤로 물러서며 야단쳤다. “거기 서! 그 손으로 어디를 만지려고 해!” 내심 과천성이 이곳에 있으리라 단정하고 있었기에 시옥상의 태도에서는 냉기가 풀풀 날렸다. 그 모습에 놀라고 약간 겁을 먹은 위화화가 단리유아 뒤로 숨으며 귀엣말로 속삭였다. “아저씨, 무슨 여자가 저리 사나워요? 어쩐지 꼭 살쾡이 같네요.” “이 조그만 계집애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화가 치민 시옥상이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혀를 내미는 위화화를 시옥상이 다시 혼내려 할 때, 단리유아가 말리며 넌지시 주의를 주었다. “시소저, 우리가 찾아온 이유를 잊지 마시오.” “흥!” “소화 아가씨. 장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만나게 해줄 수 없겠소?”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리는 시옥상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차다가, 단리유아가 위화화에게 물었다.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위화화가 별 일 아니라 여겨서 일행을 대청(大廳)쪽으로 안내했다. 곧이어 위화화가 오빠와 삼촌을 데려오겠다며 뛰쳐나갔다. 서로 탁자에 앉아서 시비가 갖다놓은 차를 마시며 대청 안을 살펴보던 단리유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시옥상에게 물었다. “시소저, 그 사람을 보게 되면 과천성(過天星)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소? 혹시나....” “당신은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에요? 그자가 복면을 쓰고 있었다고 해도 난 그 사람의 목소리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 해도 특이한 습관을 봐도 알 수 있고. 흥! 이제 보니 당신은 나를 아주 경우 없는 귀찮은 여자라고만 생각하고 있군요.” 곧바로 쏘아붙이는 시옥상의 모습에 단리유아는 말이 없었다. 단지 속으로만 ‘제대로 말했군.’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냉랭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떠돌고 있을 때, 대청의 문이 열리며 위화화와 위마산, 그리고 단정히 콧수염을 기른 사십대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잠시 위마산이 단리유아를 반기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중년인이 단리유아에게 말을 건넸다. “허허허. 단리대협, 조카의 말에도 설마하고 있었는데 정말 단리대협이시구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소. 변변치 않지만 이곳의 주인인 위사청(魏獅靑)이오.” 이에 단리유아가 화답하려는 순간, 곁에서 있던 시옥상이 떨리는 손길로 소매를 붙잡으며 신호를 주었다. 잠시 얼굴이 굳었다가 이내 그런 기색을 감추고 단리유아가 포권하며 대답했다. “단리유아라 합니다. 저도 위명이 쟁쟁하신 장주님을 뵙게 되어서 반갑군요.” “허, 그 무슨. 겨우 비단이나 파는 졸부에게.... 과찬이시오, 대협. 우선 앉으십시다. 참, 그러고 보니 이 소저는 누구신지 물어보는 것을 깜박했구려.” 손을 휘저으며 겸손히 청하던 위사청이 깜박했다는 듯이 시옥상을 가리키며 물음을 던졌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시옥상이 면사를 걷으며 소리쳤다. “흥! 과천성, 설마 나를 몰라보는 것은 아니겠지? 이틀 동안을 같이 있었으니 말이야.” 그 물음에 위마산 자매가 어리둥절하며 쳐다볼 때, 안색이 굳어졌던 위사청이 재빨리 그런 표정을 지우며 뜬금없는 소리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 소저, 뭔가 착각하신 것 아니오? 내가 그 유명한 도적인 과천성이라니? 본인은 그저 비단이나 팔아 살아가는 상인이라오.” “그렇소, 소저. 숙부께서는 상인일뿐이오. 우리 부족에서 모은 모피를 팔기도 해서 내가 잘 아오. 내가 직접 석 달에 한번 사람들과 같이 와서 모피를 건네주는데,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시오?” 위마산이 설명하며 제정신이냐는 듯이 시옥상에게 묻고 있었다. 이에 시옥상이 냉소하며 위사청을 향해 소리쳤다. “흥! 아무리 그래도 내 눈은 못 속여. 그 웃음, 그 눈매, 앞발을 안쪽으로 모으며 걷는 걸음까지.” “확실하오, 시소저?” 상인치고는 무공이 너무 높은 것이 이상해보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단정할 수 없어서 단리유아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요? 그렇게 내 말을 못 믿나요? 그러면 저 사람의 창고를 뒤져보면 될 것이 아니에요? 아직 처분하지는 못했을 테니. 아니면 닷새 안의 저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도.” 단리유아에게 소리치고 나서 시옥상이 대청을 한 바퀴 돌아보다가, 한쪽에 걸린 고금(古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흥! 저 악산선생의 고금은 내가 애지중지해서 한시도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것이에요. 이래도 더 증거가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시옥상의 말에 이제까지 믿지 못하고 있던 두 남매도 의혹어린 시선으로 위사청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이에요. 우리 삼촌이 그럴 리 없어요. 삼촌, 삼촌은 그런 도적이 아니지요?” “숙부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설마....” 위마산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음을 던지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이틀 전에 벽풍장에 도착했었지만, 위사청을 만나지 못하고 기다려야했다는 사실이었다. 멀리 교역을 나갔다고 했지만,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동생과 돌아다니며 놀다가 저녁에 들어가니 그제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장주. 실례지만 창고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이미 증거가 확실한 것 같기는 하지만.” 단리유아의 단정 짓는 말에 위사청도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힐끗 시옥상을 돌아본 뒤에 단리유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단리대협, 어떻게 내가 과천성이라는 것을 알았소? 저 아가씨가 나를 안다고 해도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을 텐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일이 없소. 순순히 잡히겠소? 저항하겠소?” 위마산이나 위화화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했지만, 시옥상이나 그동안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망설일 수 없었다. 앞으로 다가서는 단리유아를 보며 갈등하던 위사청이 한쪽에 놓인 촛대를 시옥상에게 내던지며 몸을 날렸다. “악!” “쾅” 시옥상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순간, 서쪽의 창문을 박살내며 위사청이 달아났다. 급히 촛대를 낚아 챈 단링유아는 제타구고에게 시옥상을 부탁하며 곧바로 추격해갔다. 창문을 나서서 바라보니 위사청은 벌써 십여 장을 앞서가고 있었다. 담을 넘어 숲으로 뛰어든다면 일이 어려워지리라 생각하며 단리유아는 전력을 다해서 덮쳐갔다. “휘이익!” 등 뒤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에 전력을 다해서 달아나던 위사청이 돌아보다가 놀라 선회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곧이어 날아오는 천애검을 회수하며 단리유아가 앞을 가로 막았다. “허허, 벌써 그 나이에 수어검의 경지라?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군.” 단리유아의 무위를 지레짐작한 위사청이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자신이 화경을 곧 앞둔 절정의 고수였지만, 단리유아에게 비한다면 어른 앞의 어린아이와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서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 단리유아가 물음을 던졌다. “위장주, 천산파와는 무슨 관계요? 아까 신법을 보니 천산비조신법(天山飛鳥身法)인 것 같던데....” “숙부님은 과거 천산파의 제자였소. 비록 파문되었지만....” 지켜보던 위마산이 침통한 얼굴로 대신 답했다. 이미 달아나려했던 것을 모두가 보았으니 더 이상 위사청이 과천성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장주,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이런 일까지 벌인 것 같지는 않은데, 이유가 뭐요? 그리고 천산파의 생존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단리유아가 물어보고 있었다. 뜻밖의 물음에 위사청이 단리유아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되물었다. “대협이 천산파를 찾아서 무엇 하려고 그러시오? 이미 무너진 문파인데.”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단리유아가 전음으로 되물었다. <앞으로 천산흑랑청(天山黑狼廳)을 칠 생각인데, 천산파도 동참시키고 싶고 또 도움을 바라기 때문이요. 아무래도 이 지역에 대한 것은 그들이 가장 잘 알 테니 말이오.> 단리유아의 전음에 놀란 위사청이 곧바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허나 아무리 대협이 강하더라도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일 텐데. 그들의 숫자만도 천여 명이고 고수들도 많으니 말이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참할 테니 걱정 마시오. 그보다 천산파의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 단리유아가 자세한 언급을 회피하며 되물었다. 이때, 한쪽에서 지켜보던 시옥상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직감하고 끼어들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예요? 어서 저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소저, 물건은 창고에 고스란히 있으니 가져가시오. 그리고 내 목도 원한다면 기꺼이 드리리다.” 위사청이 대신 대답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전혀 망설이는 기색도 없었다. 시옥상에게 말한 뒤에 위사청이 단리유아를 향해 담담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과거 젊었을 적에 나쁜 일에 손을 대게 되어서 파문되었지만, 난 한시도 천산파의 제자가 아니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소. 문파가 멸망하고 나서 도망친 생존자들이 나에게 왔을 때는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소. 천산흑랑청의 위세에 누구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나에게까지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오. 나는 기꺼이 도와주리라고 결심하고 과거의 친구들을 불러들였소. 그것이 바로 혈사풍령단이 탄생한 배경이요.” 잠시 말을 멈춘 뒤에 위사청이 계속해서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그동안 인간으로선 못할 짓을 많이 해서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제는 오히려 홀가분하오. 대협, 부디 마지막 부탁이니 꼭 천산파가 천산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시오.” 말을 마치고 눈을 감으면서 전음으로 천산파가 위치한 곳을 이야기해주었다. <서북쪽으로 이십 리 정도 가면 척불이산(拓不爾山)이 나오고, 그곳에 완사계(宛斜溪)라는 계곡이 있소. 천산파의 생존자들은 그곳에 있소. 그동안 흩어졌던 사람들과 속가의 사람들까지 모여서 사백 명은 넘을 것이오. 이때까지 복수할 날을 기다리며 무공연마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대협의 일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오.>   모든 일을 단리유아에게 떠넘기자 아무런 여한이 없다는 듯이 위사청이 시옥상을 향해 재촉했다. “소저, 어서 날 죽이시오. 그래서 그대 숙부의 원한과 다른 사람들의 복수를 하시구려.” 검을 던져주며 어서 죽이라는 말에 시옥상이 힐끗 단리유아를 돌아보았다. 무공을 모르는 여자의 몸으로서 아무리 저항하지 않는다고 해도 직접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이 원한을 갚는 일임에도.... 단리유아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앉자, 결국 시옥상이 입술을 깨물며 나섰다. 땅에 떨어진 검을 검집에서 빼내어 들고 시옥상이 위사청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흥! 그러면 내가 못 죽일 줄 알고? 나쁜 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하고 노예로 팔아? 어디 죽어봐라.” 냉소하며 시옥상이 소리칠 때, 위화화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간청했다. “언니!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네? 제가 이렇게 빌게요.” “소저, 저기 어린 아이들을 보아서라도 용서해주시오. 제가 무슨 수를 쓰든 보은할 테니.” 위마산까지 위사청의 아이들을 가리키며 애걸하고 있었다. 그 말에 돌아보던 시옥상이 두 아이가 서로 껴안은 채 두려움에 질린 애처로운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자, 마음이 흔들려 부르르 몸을 떨며 멈추어 섰다. 위사청을 죽이자니 슬픔에 싸여 나중에 저 아이들도 자신처럼 복수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살려두자니 죽은 숙부와 가문 사람들의 원한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단리유아가 망설이는 시옥상에게 다가가 칼을 빼앗아 들었다. 이어서 칼을 휘둘러 위사청의 왼팔을 내리친 후에 검을 내던졌다. “윽! 챙그랑!” 위사청의 비명과 검이 굴러가는 소리가 울리고 있을 때, 놀란 위화화와 위마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시옥청은 느닷없이 끼어들어 멋대로 처리하는 단리유아를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신이 뭔데 끼어드는 것이에요? 죽여 버리라고 할 때는 가만히 있더니!” “됐소, 시소저. 당신 역시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 아니오?”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당신이 내가 죽일지 안 죽일지 어떻게 아느냐구요?” “당신은 죽이지 못해요.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살인마가 아닌 이상 그러지 못하니까.” 단리유아가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잠시 시옥상이 아이들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렸다. “흥! 항상 자기 멋대로 하는군. 내 마음은 눈곱만치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말인가 하여 단리유아가 시옥상을 바라보았다. 이내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젓고 위사청을 향해 말을 건넸다. “위장주, 내가 한 가지 조건을 걸겠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팔 하나로는 너무 가벼우니까.” 뜻밖의 말에 시옥상이나 위사청까지 모두가 단리유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단리유아를 쳐다보던 위사청이 굳은 얼굴로 반문했다. “조건을 말하시오, 단리대협.” “그것은 당신이 앞으로 삼년 동안 시소저를 도와주어야한다는 것이오. 이번 일로 사하상가는 거의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으니 말이오. 특히 쓸 만한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려서 당장에는 이곳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오.” 단리유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시옥상이 따져들었다. “흥! 그 정도로는 내가 너무 손해에요. 앞으로 십년간, 무보수로 혈사풍령단의 호위를 받는다는 조건이라면 또 몰라도.” 이런 때까지 손익을 따지는 시옥상의 모습에 모두가 어이가 없을 때, 오히려 위사청은 대놓고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아가씨, 그건 조건이 너무 박한 것 같소. 최소한 보수는 주어야하고 오년간만 합시다.” “무슨 소리에요? 살려준 것만 해도 어딘데. 보수는 줄 테지만 기간은 더 깎아줄 수 없어요.” 그만 서로 원한을 풀기를 기대하고 일을 벌였던 단리유아로서는 그러는 두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어떤 것도 내팽겨 칠 정도로 괴인이었다. 그 후, 보름여 동안 단리유아는 천산파의 사람들과 만나 천산흑랑청을 공격할 것에 대해 의논을 하고, 대뢰음사에서 온 삼백여 명의 바라만겁문과 마하보리사의 고수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그동안 시옥상과도 협의하여 앞으로 서로 돕기로 했는데, 단리유아는 자금력과 상행을 보호해줄 고수들을 제공하기로 했고, 시옥상은 세외세력간의 연락과 매년 이익의 반절을 단리유아에게 건네줄 것을 약속했다. 뜻밖에 조건을 까다롭게 붙이지 않고 선선히 승낙하는 시옥상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로서 천지신교와 맞설 기초는 완성된 것이라 생각했다. 이월 초하루에 천산파가 먼저 움직인 것을 시작으로 단리유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여 명씩 흩어져 길을 떠났다가 일단 천산흑랑청과 백여 리 떨어진 극랑산(克朗山)에 모이기로 했다. 이제까지의 싸움이 천지신교가 음모를 획책하거나 먼저 암습을 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 시초라 할 수 있는 이번의 싸움에서 확고한 전과를 얻어야만 앞으로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신강까지 손에 넣는다면 기련산의 혈련마교(血蓮魔敎)나 성숙해의 혈수미교(血修彌敎)에도 압력을 가할 수 있고, 넓게 보아서는 중원의 서남쪽을 완전히 포위하는 형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일단 천산흑랑청을 제거한 후에는 혈련마교를 무너뜨리는 일이 중요했다. 북해나 대막, 북만주 지역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상황이라서 반드시 천지신교에 앞서 먼저 제거해야 했다. 그 자체로도 워낙 거대한 세력이라 쉽지 않을 테지만, 척발척천의 야망이나 문내의 내분을 이용한다면 생각보다 수월히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그렇게 세외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뒤에야 단리유아는 중원의 천지신교와 맞설 생각이었다. -----------------<전검행 1부 완결(完結)>----------------------- ####### 1부가 끝났습니다.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다가 몹쓸 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하여간에 끝을 내게 되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2부는 다른 작품을 먼저 하나 정도 쓴 후에 다시 쓸 생각이고, 2부 제목은 천애고검행(天涯孤劍行)이 될 것입니다. 2부 전에 쓸 글은 유성천리(流星千里)입니다. 그 글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전검행과는 주제가 틀린 것이니까요. ********** 여기에서 시옥상이 위사청을 살려두는 부분이 이상하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수정할 생각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번 주말을 기해서 게시판을 내릴 생각이니 참고 하시구요. 그리고 지금까지 감상해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건강하십시오. 몸이 아픈 뒤에 느낀 것인데, 건강이 제일 중요하더군요. 그럼....